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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대사관 6곳 일시 폐쇄

    【음바바네·워싱턴 AP AFP 연합】 미국은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 폭탄테러 이후 말레이시아,우간다,스와질란드 등 6개국 주재 미 대사관을 일시 폐쇄했다고 11일 패트릭 케네디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밝혔다.
  • 첼리스트 鄭明和(이세기의 인물탐구:173)

    ◎사색을 길어올린 웅숭깊은 음색/선율마다 무르익은 서정성과 넉넉한 여유/테크닉보다 음의 조화 이뤄내는 경지 터득/80년대 음악 멀리하다 “삶의 목적” 깨달아/드로브자크 협주곡 백미… 제자양성에 보람 첼리스트 鄭明和의 손은 남자손보다 크다. 어깨도 남자처럼 넓다. 잘 생긴 용모에다 목소리도 밝고 건강하다.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때문인지 음악도 스케일이 크고 넓고 심오하다. 단순히 넓고 클뿐만 아니라 톤에는 힘이 살아있고 음의 마디마다엔 유연하고 확고한 뼈대가 꿈틀거린다. 그에게선 발톱을 세운것 같은 독이나 과시감은 찾아볼수 없다. 단지 무르익은 서정성과 육화된 음악의 포도주가 내면에서 출렁거릴 뿐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는 타인에 대한 포용력과 너그러움으로 남의 잘못을 가려줄 줄 안다. 초면이라도 구면같이 굴고 좋은 환경에서 잘자란 숙녀답게 반듯한 예의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다. 만사에 대범한 편이지만 음악에 관해서만은 치열성과 철저성이 대단하다. 승부근성이 투철하여 그가 이화여중에 다닐때는 친구 하나도 사귀지 못한채 낮과 밤은 온통 첼로연습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전국남녀음악경연대회에서 첼로부문 1등상, 서울예고 재학중에 이미 두번의 개인독주회를 가졌고 고2때인 60년에는 한국학생문화사절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와 오사카 순회연주등 그의 이름은 ‘첼로의 천재’로서 소녀시절에 음악계의 중앙에 우뚝서는 존재였다. 오랜 연주경력탓에 그의 음악은 언제부턴가 외형보다 내면을 추구하게 되었고 테크닉보다는 음과 음의 연결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는 능란한 경지를 터득하고 있다. 음악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인 이강숙씨는 ‘정명화의 음악은 팽팽한가 하면 느슨하고 여유로운가 하면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는 가운데 자신감에 찬 연주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평한다. 그는 과연 무리와 과장이 없이 음악의 ‘순리’를 존중하며 음악의 도리에 순종한다는 자세를 지킨다. 기교에 침몰하거나 장식음으로 청중을 혼도시키기보다 음과 음으로 보석타래를 꾸미듯이 장구하고도 값진 음악을 그때마다 선사해준다. 화사하게꽃가루를 뿌려대는 바이올린의 변화무쌍과는 달리 첼로만의 사색과 철학은 마치 동굴에서 길어올린 갖가지 원석처럼 장중과 비장미마저 풍긴다. 정명화를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서울 명동의 유명한 음식점이었던 고려정의 정준채씨와 이원숙씨 사이의 7남매중 딸로 둘째.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첼로의 거장 피아티골스키를 사사했고 60년대 중반 뉴욕 링컨센터에서 첫연주를 가졌을때 뉴욕타임스는 ‘멋과 재능 그리고 기교의 연주가’로 평했고 워싱턴포스트는 ‘가장 보배로운 첼리스트’로 표현하여 지금까지도 이 찬사는 그를 따라다니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때까지 동생인 바이올린 정경화나 피아노를 치던 정명훈보다 정명화의 이름은 그들을 리드하고 있었고 그만의 음악적 매력으로 해 세계 첼로계에서도 선두그룹을 달리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명성을 쌓던 시기인 66년, 고국에 돌아와 첫리사이틀을 열었을때 음악계의 대부이던 평론가 유한철씨는‘예의 타고난 활달함과 연주가다운 낙천성이 몸에 배어 다이내믹한 역성감(力性感)을 실감시켜주는 연주’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세계에 내놓아 자랑할수 있는 젊은이’로 정명화의 장밋빛 미래를 예고한 것도 그 무렵이다. 제네바국제음악콩쿠르에서 첼로부문 1등상을 수상하던 71년에 전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당시 AP통신 기자이던 具三悅씨와 결혼, 부군은 유엔 50주년 총괄국장으로 있다가 최근에는 유니세프총재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자녀는 꽃별과 꽃샘. 장녀 꽃별이 지난주 뉴욕에서 결혼했다. 80년대 로마에 머물던 시기에는 잠깐이지만 첼로연주를 멈춘 적이 있으며 가장 자신있게 연주하던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마저 낯설게 느껴지자 문득 ‘좌절의 시간이 오히려 음악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 ‘첼로야말로 무덤까지 끌고갈 동반자이자 삶의 목적 자체임을 깨달을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94년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교수로 재직하면서 같은해 8월 그는 실로 12년만에 고국에서의 독주회를 가졌고 작곡가 이영조가 그를 위해 작곡한 ‘첼로와 장구를 위한 도드리 1’ 연주는 또한번 음악계에 센세이셔널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농현을 뜻하는 피치카토와 글리산도, 높은 음역에서 낮은 음으로 급격히 낙하하는 소리의 대비, 명상적인 지속음과 장식음등 우리만의 얼이 담긴 가야금과 거문고, 해금과 아쟁이 할수 있는 음악적 요소를 첼로로 펼치면서 우리의 소리를 세계음악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었다. 과연 한국 첼리스트의 자존심과 실력을 마음껏 과시한 자리로 그가 연주를 끝냈을때 객석에서 길게 이어지는 박수갈채는 그칠줄을 몰랐다. 조용하게 데뷔한 연주자가 있는가하면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하는 연주자도 있을 것이다. 조용한 강이라고 해서 모두가 깊은 것은 아니며 센세이셔널은 그만한 화제성과 가치성을 지닌다. 일찍이 세계의 매스컴으로부터 ‘발군의 테크닉과 명쾌한 해석, 특히나 그의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은 보헤미아의 향수가 사무친 연주’라는 평과 함께 그의 연주는 지금도 고국의 땅을 밟는 순간의 탄성과 향수와 사랑이 간절하게 얼룩져 듣는 이의 심금을 뜨겁게 울린다. 어릴때는 피아노 성악 바이올린 사이에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방황했고 20대에는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성과 장래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30대에 이르자 명성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40대가 넘자 비로소 모든 치열성과 명성에서 벗어나 그는 진정한 음악인의 자유로움을 구가하고 있다. 그래선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가 되어 조국과의 연대를 끈끈히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게된것을 어느때보다 감사하고 행복과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다. 음악을 관조하고 무르익은 예술성을 내면에 삭이는 시기에 서서 그는 물이 흐르는 듯한 유연함과 여유로움으로 그만의 서조와 광채를 여전히 잃지않고 있다 □그의 길 ▲1944년 서울출생 ▲1961년 서울예고 졸업, 도미 ▲1961부터 줄리아드음악원 및 남가주립대졸업, 거장 레오나드 로즈, 그레고르 피아티골스키 사사 ▲1969년 미 닉슨 대통령 초청 백악관연주,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 협연 ▲1971년 제네바국제음악경연대회 최우수연주상 수상 ▲1972년부터 런던 BBC교향악단을 비롯, 런던필, 베를린 R IAS, 스위스로망드, 로테르담 워싱턴교향악단등과 협연(지휘 주빈메타 루돌프 켐페 안탈 도라티 줄리니등) ▲1976년 뉴욕 링컨센터 바이올린 정경화, 피아노 정명훈과 ‘ 3남매’연주,전미순회연주, 파블로 카잘스탄생 100주년기념연주 1982년 KBS교향악단초청 협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91년부터 정트리오 음악축제 ▲1994년 국악과의 만남독주회 ‘장구와 첼로를 위한 도드리1( 이영조작곡)’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995년 UN창설 50주년 UN마약퇴치 친선 사절로 세계순회 연주 ▲1997년 뉴욕에서 유니세프주최‘북한 어린이돕기 모금음악회’ ▲1998년 워싱턴 케네디홀 뉴욕 카네기홀서 ‘나라사랑’음악회, 미국 버몬트 국제음악제연주, 이착펄먼 서머프로그램 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미국 ‘엑설런트 2000’상(92년) 청소년 차이코프스 키콩쿠르 최고지도자상(97년) 아름다운 소리 ‘한·꿈·그리움’(96년 CMI음반레이블 )출반
  • DJ 환영 열기의 명암/梁承賢 차장·정치팀(오늘의 눈)

    金大中 대통령을 맞는 미국의 열기가 뜨겁다.유력지인 워싱턴 포스트지는 金대통령을 ‘한국에서 온 영웅(hero)’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어디를 가도,누구를 만나도 온통 환영일색이다. 7일 상오(한국 시간) 루빈 미재무장관 부부가 예정에 없이 金대통령의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했고,사회자가 앉은채 박수를 치도록 유도했지만 참석자들은 모두 기립 박수로 진심어린 축하를 했다.이에 앞서 金대통령의 뉴욕 케네디공항 도착때는 보스워스 주한 미국대사가 주재국 대사로는 처음으로 환영식에 나왔다.모두들 金대통령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의전을 중시하는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金대통령의 방미는 ‘특별 대우’임에 분명하다.그러나 이같은 대우는 金대통령이 일궈온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징성’ 등으로 미뤄볼때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50년만에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한때 ‘망명지’였던 미국을 다시 찾은 金대통령의 극적인 인생 역정이 미국을 들뜨게 하는데 보탬이 된 듯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미국 기업들의 대한(對韓)투자 유치를 위한 좋은 전조(前兆)이긴 하나 그렇다고 전부는 아니다.金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야당 총재가 아니다.그의 두 어깨는 난국 극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미국은 민간 투자가의 해외 투자에 정부 영향력이 별로 없는 나라다.환대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해서 기업도산이 줄을 잇고,실업자수가 나날이 늘고 있는 우리의 각박한 현실을 치유할 처방전을 함께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이다.金대통령이 IMF의 추가지원과 미국의 2선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민주당 행정부와 공화당 주도의 의회와의 불화도 뛰어넘는 신뢰감과 지도력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취임후 100일을 ‘대통령 혼자 애쓴다’고 느끼고 있다.무려 7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행사로 가득한 金대통령의 방미 세일즈외교가 또다시 국내용 ‘신 용비어천가(新 龍飛御天歌)’로 머물 공산도 없지 않다.진심으로 환영받는 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방미수행단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IMF이후 모처럼 자부심을 맛보게 했다.그러나 실직의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바람은 재기의 터전을 일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국제사회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한국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 金 대통령 訪美­미국과의 인연

    ◎72·82년 망명 이어 10번째 방문/61년 의원 신분으로 처음 찾아/71년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뉴욕=梁承賢 특파원】 金대통령으로서는 이번이 열번째 미국 방문이다.金대통령은 지난 60년대말 의원신분으로 미 국무부의 초청을 받아 처음 미국과 인연을 맺었다.미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방문한 71년 두번째 방문부터였다.이 때만 해도 박해와 탄압의 상징과는 꽤거리가 있었다. 세번째는 국내에 10월 유신이 선포된 72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의 이른바 ‘1차 망명’때였다.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미국내 지우(知友)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金대통령은 당시 해외 민주화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을 분주히 왕래했다.그러다 일본 도꾜에서 납치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동교동에서 가택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80년 사형수로 수감된뒤 풀려난 82년 12월부터 85년 2월까지는 네번째이자 ‘2차 망명’시기였다.全斗煥 전 대통령의 방미 대가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91년 10월의 다섯번째는 야당총재 자격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92년 4월에는 LA폭동으로 비탄에 빠진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았다.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면담했다.93년 9월과 10월에는 애틀란타 뉴욕 피츠버그를 방문했다. 95년 4∼5월에는 뉴욕 워싱턴 휴스톤을 차례로 찾았으며,부시 전 미 대통령과도 환담했다.97년 4월 국민회의 총재로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조지타운 대학과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네번째 대권도전 의사를 밝혔던 때가 아홉번째의 방미였다.
  • “이란 核 개발 서두를것”/美 브루킹스硏 등 전망

    ◎印·파키스탄 핵실험으로 모험가능성 고조 【워싱턴 AFP 연합】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이들과 함께 핵무기를 개발해 온 것으로 의심받아온 이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스티브 코언 연구원은 28일 “이란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실험을 계기로 핵개발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카네기국제평화기금의 남아시아지역 전문가인 토비 돌턴 연구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이 이란의 모험 가능성을 고조시켰다”며 러시아의 핵기술이 이란으로 수출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돌턴 연구원은 파키스탄이 회교권 국가들에 핵기술을 수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엄청난 압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키스탄이 이란에 핵기술을 이전해 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연구소 매슈 번 연구원은 “파키스탄이 수십년전부터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동안 핵관련 정보를 외국에 수출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었다”며 이란의 핵실험 가능성을 부정했다. 미국의 정치 분석가들이 지목하는 다음번 핵실험 강행 국가는 서로 다르다.그러나 이란,이라크를 포함해 남아시아지역에서 핵무기를 포함해서 군비경쟁이 더욱 가열될 것이라는데 입을 모은다.더욱이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과 관련,어떠한 확립된 원칙도 갖고 있지 않아 앞으로의 사태를 전망하기가 어렵다고 강조하고 있다.
  • 세계지도력의 산실 백악관(美國의 대통령 문화:21·끝)

    ◎‘모든 사람의 집’ 백악관 매년 관광객 수백만명 다녀가/1800년 애덤스 첫입주후 40명 거쳐/“정직 현명한 이들만 살게 하소서”/라이브러리룸 등 6개 20분 소요/시대 초월한 국민과의 교감 피부로 【워싱턴=羅潤道 특파원】 미국 대통령문화의 산실인 워싱턴DC에는 미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수백만의 관광객들이 매년 몰려든다.‘펜실베니아 애브뉴1600번지’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진 백악관,스미스소니언 초상화박물관의 대통령실 등은 차치하고라도,워싱턴기념탑,링컨기념관,제퍼슨기념관,프랭클린루즈벨트 기념관,시어도어 루즈벨트 기념관 등 개인 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포토맥강과 잔디광장 ‘더 몰’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아름다움 사이로는 또 케네디센터,윌슨센터,조지 워싱턴 대학,루즈벨트 브릿지,린든 B.존슨 기념공원,제임스 매디슨 빌딩 등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시설물들도 많아 시내곳곳 어디를 가도 대통령을 만날수 있다.특히 백악관은 미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세계 지도력의산실로 역대 미대통령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이다. 이곳은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누구에게나 개방된다.백악관 남쪽의 ‘방문자센터’에 가서 줄을 서기만 하면 된다.그러나 백악관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한다.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부터 선착순으로 줄을 선 사람들에게 3천매,단체관광객에게 1천500매 등 모두 4천500장의 입장권을 나눠준다.대부분의 경우 입장권 분배를 시작,30분이면 동이난다. 입장은 당일 상오10시부터 정오까지만 허용되며 지하1층의 회랑을 통해 첫 방인 라이브러리 룸에서 출발하여 지상1층의 국가만찬장까지 모두 6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된다.전체 20여분의 투어다. 백악관은 보통 관광객들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남쪽에서는 4개층으로,정문쪽인 펜실바니아애브뉴 쪽에서는 3개층으로 보인다.따라서 관광객들은 지하1층 동쪽 회랑의 출입문으로 입장하여 첫방인 ‘라이브러리’만을 본후 지상1층으로 올라가게 된다.지하1층의 다른 방으로는 금도금한 은제품들을 진열한 ‘버메일(금도금)룸’,대통령의 식기 세트를 진열한 ‘차이나룸’,중앙의 ‘외교사절 영접룸’,그 좌측에 2차대전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황을 체크하기 위해 사용했던 ‘맵(지도)룸’ 등이 있다. 지상1층에는 리셉션이 열리는 가장 큰 방인 ‘이스트룸’,응접실인 ‘그린룸’과 ‘블루룸’,퍼스트레디들의 응접실인 ‘레드룸’,연회실인 ‘국가만찬장’ 등이 있고 이들 5개의 방은 모두 공개된다.또한 이들 방을 연결하는 중앙회랑에는 대통령들의 흉상과 퍼스트레디들의 초상화들로 장식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집무실과 침실 등 사적 공간이 있는 2,3층은 공개되지 않는다.중앙의 거실인 ‘옐로 오벌 룸’을 중심으로 양측에 대통령의 서재와 조약체결시 사용하던 ‘트리티룸’이 있고 그 양측 옆으로 대통령의 침실과 손님방으로 사용되는 ‘링컨룸’이 있다.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와 각료회의장인 ‘캐비닛룸’은 서쪽 부속건물에 있다. 1792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의 임기중 착공된후 1800년 11월,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 퇴임 2개월여를 남기고 미완성인채로 입주함으로써 시작된 백악관에서의 대통령 스토리는 오는 2000년 200주년에 이르게 된다.그동안 워싱턴을 제외하고 클린턴 대통령까지 40명의 대통령을 거쳐오며 조금씩 증개축되어 오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거주기간은 윌리엄 해리슨(9대)의 1개월부터F.루즈벨트(32대)의 12년까지 다양하다.임기중 사망한 대통령은 모두 8명으로 4명은 암살,4명은 병사로 기록돼 있다. 한편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이듬해 득녀,백악관에서 자녀를 얻은 유일한 대통령이 됐다.자녀수가 가장 많은 대통령은 타일러로 전처와 후처로부터 모두 8남6녀를 얻었다.다음은 윌리엄 해리슨으로 6남4녀를 기록하고 있다.가족대통령으로는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6대)가 부자관계 였고 윌리엄 해리슨과 벤자민 해리슨(23대)은 조부와 손자 사이로 유명하다. 워싱턴에서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대통령문화의 본거지는 국립초상화박물관 이다.2층의 대통령실에는 역대 미대통령들의 사진과 흉상,부조 등이 전시돼 있다.언제라도 대통령의 미소를 접하고 그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시대를 초월한 국민과 대통령의 교감은 이같이 바로 민주주의의 근원을 이루는 또하나의 현장이기도 하다.백악관 ‘국가만찬장’의 벽난로 위에 새겨진 애덤스의 글귀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정직하고 현명한 사람들만이 이지붕 아래 살게 하소서.”
  • 대통령 도서관(美國의 대통령 문화:20)

    ◎국민속에 살아있는 ‘대통령 체취’/“지나치게 크게 지어 업적 미화” 지적/86년 건축규모·시설 규제조항 신설/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까지 11곳 모두 자신의 고향에 건립/시설은 개인,관리는 정부서/재임시의 모든 행위 문서·메모·사진·테이프 등/취임전후 가정사는 물론 당시 시대상까지 기록·보관 【칼리지파크(美 메릴랜드주)=羅潤道 특파원】 지난해 11월7일자 미국의 조간신문들은 4명의 미 전현직대통령들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한 사진을 일제히 전면에 실었다.‘조지 부시 라이브러리’ 개관식에 참석한 카터,포드,부시 전 대통령 부처와,클린턴 대통령 부처,그리고 알츠하이머로 앓고 있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등이 파안대소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날 텍사스주의 소읍 칼리지 스테이션에 있는 텍사스A&M 대학교 교정 한편에 위치한 이 도서관 앞뜰에서 열린 기념행사는 부시의 가족과 부시 행정부의 전직 관리들을 포함한 각계인사와 시민 등 4만여명이 참석,성대하게 치러졌다. 부시의 고향집이 있는 휴스톤에서 북으로 130여㎞ 떨어진 이 도서관은 개인자금과 후원회의 모금 8천300만달러를 투입,11번째로 건립된 대통령도서관으로 CIA국장,주중(駐中)대사,부통령 등 그의 다양한 경력만큼 자료도 다채로와 4천만점 가까운 각종 자료들이 20명의 ‘내셔널 아카이브’(NARA:국립문서 및 기록보관소)파견 직원과 300명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도서관은 대통령 재임시 행해진 모든 행위들에 대한 문서,메모,필름,테이프,사진 등 기록을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통령 취임전과 퇴임후의 개인사및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따라서 대통령도서관은 대통령 재임당시의 역사는 물론 그 전후한 시대상의 기록을 알 수 있는 센터로 국민 속에 살아있는 대통령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내 대통령도서관은 31대 후버 대통령부터 부시 전 대통령까지 모두 11개로 주로 자신들의 고향에 건립돼 있다.이들 도서관은 대통령의 재임기에 따른 특징들을 갖고 있어 대통령 자신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연구하는학자나 일반 관람객들로 항상 붐빈다.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39년,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중 이었다.자신의 1차 임기중 모든 공적 사적문서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했다.그는 동시에 하이드파크 농장의 일부를 내놓고 또 친구와 지인들로 구성된 후원회는 이듬해 그 땅에 도서관과 박물관을 지었다.그리고 46년 건물이 완공되자 루즈벨트는 NARA에 도서관의 운영을 의뢰했던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통령도서관 구상은 그때까지 대통령 기록들에 대한 공식적인 보관방법이 없이 의회도서관이나 출신 대학·고향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에게 물려주는 등 제각각이어서 분실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많던 당시 현실에서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같은 루즈벨트의 뜻에 동감,의회는 55년 ‘대통령도서관법’을 통과시켰다.이로써 시설은 대통령 자신이 마련하고 그 관리는 연방정부에서 맡아주는 형태로 미국의 대통령도서관이 정착되게 되었다.특히 78년에는 ‘대통령기록법’이 통과돼 그때까지는 개인재산으로 간주되던 대통령의 개인적인 문서들에 대한 개념도 국가재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따라 트루만(57년),아이젠하워·후버(62),존슨(71),케네디(79),포드(81),카터(86),레이건(91),부시도서관(97) 등이 차례로 건립,기증됐다.닉슨도서관은 그의 출생지인 LA 교외의 요르바 린다애 건립됐으나 닉슨대통령 당시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 등 상당량의 문건이 의회로부터 아직 비공개로 묶여 있어 NARA본부에 보관되고 있다.따라서 이 도서관은 현재는 사설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 대통령도서관은 NARA의 8개 실중 하나인 ‘대통령도서관실’에서 모두 관장하고 있으며 각도서관의 인력 파견과 운영은 물론 자료수집 활용 등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특히 최근 각대통령도서관이 지나치게 크고 호화롭게 지어지고 또 대통령의 업적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등 문제점이 발생함에 따라 NARA측은 1986년 대통령도서관법 개정안을 마련,건축규모와 시설 등을 규제하는 장치를 해놓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실 산하에는 2억5천만페이지의 문서,500만장의 사진,활동사진 1천350만 피트,6만8천시간분의 테이프,박물관 자료 28만건 등이 보관되고 있다. NARA는 대통령 퇴임시 모든 문건을 인계받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도서관이 완공될때까지 관리를 맡고 있다.지난해 11월 부시도서관의 개관과 함께 ‘부시프로젝트’는 해체됐고 현재는 ‘닉슨프로젝트’만 운용되고 있다.오는 2001년 퇴임하는 클린턴 대통령의 후원회도 클린턴도서관 준비위를 결성,아칸소 리틀록 시내에 대지를 물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당시 훔친 금품액수 수십억 아닌 수백억”

    ◎大盜 조세형 보호감호 재심/‘물방울’보다 희귀한 보석/주인에 반환 안되고 증발/다음엔 털었던 집 밝힐것 22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319호 법정.재판장의 호명에 따라 법정에 들어선 ‘대도(大盜)’ 趙世衡 피고인(54)은 15년 넘게 독방에 갇혀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5공 초기인 82년 재벌과 고위 공직자 등 부유층만을 털었던 趙씨는 걸인과 노점상 등에게 수십만원씩을 선뜻 쥐어주어 ‘의적(義賊)’으로도 불렸다. 이날 재판은 83년 절도 및 특수도주죄로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趙씨가 옛 사회보호법이 89년 위헌으로 결정된 만큼 보호감호 부분은 다시 재판을 해야 한다며 재심을 청구해 열렸다. 변호인인 嚴相益 변호사는 공판 직후 “실제 피해액수는 수백억에 이르고 물방울 다이아몬드 보다 훨씬 더 비싼 보석도 있었는데 피해자들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사라졌다”면서 “趙씨가 권세가의 집에서 턴 보석류만 마대자루 2개 분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趙씨가 신당동 JP 집에 들어갔으나 미술품만있고 보석은 없어 케네디 대통령이 선물했다는 은빗 하나만 들고 나왔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嚴변호사는 “다음 공판 부터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는 한 당시 피해자들의 실명을 거론해서 신문을 진행할 계획이며 필요하면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 존 F.케네디(美國의 대통령 문화:19)

    ◎뉴 프런티어정책 편 美 상징적 지도자/평화봉사단 창설… 후진국 교육·영농지도/蘇의 쿠바 미사일 배치 기도 ‘힘’으로 봉쇄 【보스톤(美 메사추세츠주)=羅潤道 특파원】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요.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요.” 1961년 1월20일,43세의 나이로 미역사상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며35대 대통령에 취임한 존 F.케네디 대통령(1917­1963)의 취임사는 냉전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에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미국민들에게 신선한충격으로 다가왔다. 63년 11월21일 댈러스에서의 총성으로 최고의 전성기에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서게 된 케네디는 불과 2년10개월(1천37일)의 짧은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포토맥강 건너 알링턴 국립묘지 한복판,워싱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중앙 언덕에 ‘불멸의 불꽃’(eternal flame)으로 살아 미국민들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다. 첫 20세기 출생 대통령인 그는 많은 업적을남겼다.‘뉴 프런티어’라고 불린 그의 정책은 루즈벨트의 ‘뉴 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평화봉사단’을 창설,미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세계 구석구석 후진국을 찾아가 교육과 영농을 지도케하는 인류애적 차원의 일에 적극 나섰다.흑인인권 보호를 위해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도 만들었다.소련보다 한발늦기는 했지만 선구자적인 의지로 우주개발계획을 추진,미국이 최초의 달정복 국가가 되도록 했다. ○흑백차별금지법 제정 대외적으로도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대한 강력한 대처,쿠바내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저지키 위한 쿠바 봉쇄 등 ‘힘’으로 소련을 굴복시킨 그의 강력한 대외정책은 미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관심또한 불러 일으켰다.비록 쿠바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하기도 했지만 60년대 들어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고 용기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던 미국민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상징’으로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고 강력한 의지력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더우기 정계 입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 성장과정이 백만장자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금권을 앞세운 적극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가 강력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펼수 있었던 것은 겸손하고 노력하는 자세 때문이다.그는 사려깊고 여러 사회문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민주주의 원칙의 수호자로 이미지를 심었다. 1917년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와 로즈 케네디 사이의 9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케네디는 병약하고 그다지 학교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사람을 사귀기 좋아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부친이 루즈벨트 행정부때 영국대사를 지내 런던대학에도 잠깐 재학한 일이 있는 그는 하버드에 입학,광범위한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점차 학업에 흥미를 보였다.영국의 나치 독일에 대한 대응 실패를 다룬 그의 졸업논문은 ‘왜 영국은 잠을 잤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이어 1942년 진주만 폭격 직전 미해군에 입대해 PT(어뢰정)지휘관으로 활약,일본군과 싸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기도 했다.45년 디스크 수술로 전역한 그는 부친의 권고로 46년 민주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에 출마,당선됐다. ○57년 퓰리처상 수상 52년 3선의원인 케네디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이듬해 그는 조지워싱턴대를 나오고 워싱턴타임스­헤럴드의 런던특파원 이던 24세의 재클린 부비어와 결혼했다.지성과 미모를 갖춘 재클린과 미남 총각 상원의원과의 결혼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케네디의 바람기로 원만치 못했다. 57년 미의회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의원들의 이야기를 엮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저술,퓰리쳐상을 받은 케네디는 바른 이상을 가진 정치인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TV토론이 처음 실시된 60년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릴수 있었다. 백악관에 들어간후 재클린은 훌륭한 참모이자 동반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63년 8월 2살바기 아들 패트릭이 죽은 후에는 두사람의 금슬이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이 좋은 금슬도 케네디의 피격으로 3달밖에 지속되지 못했다.케네디 가문은 대통령과 3형제 상원의원을 내는 등 미역사상 가장 번성한 집안의 대명사가 됐지만 두아들이 총에 맞아죽고 아들과 딸들이 사고로 죽는 비운의 가문으로도 남아 있다. 서거 35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는 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으며 보스턴항 남부의 컬럼비아 포인트에는 케네디도서관이 우뚝 서 케네디 대통령 당시 각종 자료 및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다.또 브루클린에는 그의 생가,히아니스항 인근에는 하계별장 등이 잘 보존돼 있다.
  • 국군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15)

    ◎軍 정치적 중립 5·16구데타로 무너져/65년 월남 파병 계기로 환골탈태/軍장비 현대화­전투력 강화 한몫/6·25 직전 10만서 69만 大軍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한민국 국군의 총병력은 10만5천여명이었다.이 가운데 지상군이 9만6천여명,해군 7천여명,공군 2천명가량이다.참고로 북한 인민군은 총 19만8천명 규모였다. 국군은 6·25를 거치면서 미국의 원조와 지원 아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전쟁중에는 최고 80만에 이르기도 했지만 종전 무렵에는 60만 대군으로 자리잡았다.게다가 사회 각 부문의 성장이 더딘 상태에서 군은 미국식 교육·관리제도를 도입,운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앞서가는 조직이 되었다. ○李承晩의 정치이용 거부 그러나 덩치가 커지긴 했어도 군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제1공화국 시절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고 집권을 연장하는 도구로 군을 이용하려 했다.이에 따라 정치권이 인사에 개입하고 부정선거를 강요했으며,정치자금 조달을 요구하기도 했다. 갓 독립한신생국가에서,4억달러쯤에 이르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가예산의 40%가량을 이용하는 군만큼 재정능력이 풍부한 집단은 없었다.따라서 정치권으로서는 군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유당 정부 때의 군이 일방적으로 정치에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다.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장군은 육군훈령을 내려 군의 정치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60년 4·19가 일어났을때도 군은 질서유지에만 나섰을뿐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던 군의 자세는 5·16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일시에 무너진다.인사문제를 비롯한 군 내부의 부정부패가 누적되고 정치불안이 야기한 사회혼란이 이어지자 이를 빌미삼아 朴正熙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16은 朴正熙 집권 18년에 이어 全斗煥·盧泰愚로 연장되는 군사정권 시대의 출발점이 됐다.이 기간 군출신 정치세력은 특유의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일정부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민주주의 발전은 억압됐고 인권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됐다.국민의 군대여야 할 군은 국민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경원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특히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은 월남파병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환골탈태한다.1965년 1월8일 朴正熙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월남에 국군 2천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다음달 24일 비둘기부대장병 583명이 첫 전투부대로 파병됐다.이에앞서 64년 9월11일에는 의료진과 태권도 사범 164명이 부산항을 떠나 열하룻만에 월남 사이공(현 호지명시)에 도착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1961년 11월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처음 논의됐다.파병의 명분은 ▲한미 양국은 자유우방으로서 아시아의 집단안보에 공동책임이 있고 ▲월남의 안전은 한국의 안보와 직결되며 ▲한국으로서는 6·25때 우방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것 등이었다. ○8년간 31만2천명 파병 하지만 파병이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우리 정부로서는 파병에 따른 제반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얻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한미간의 줄다리기는 월남전 내내 계속됐고,이같은 상황은 65년 5월17일 미국에서 열린 朴正熙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전후의 사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65년 6월14일 월남공화국 수상이 우리 정부에 1개 전투사단 지원을 공식요청한 것을 계기로 국군의 월남 참전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그해 10월16일 첫 전투사단인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고 이어 백마부대·백구부대·청룡부대가 속속 파병대열에 합류했다. 1973년 3월23일 마지막 부대가 귀국하기까지 8년동안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31만2천여명을 월남에 파견했다.그땅에서 국군은 대대급 이상 작전만 1천100회를 실행했고,민간지원 사업으로는 3천500여채의 건물을 지어주고 1천700㎞의 길을 닦아주는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종적으로 내리긴 아직 이르지만 국군장비 현대화와 전투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만 따질 때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아울러 국군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최근 국군은 UN평화유지활동(PKO)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93년 7월 소말리아에 공병대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그동안 앙골라,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아 등지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따른 국제사회는 그 증거라 할 만하다. 6공화국에서는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이어 문민정부는 하나회 조직을 정비하는 등 군의 정치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군도 국방백서를 발간,군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군내 민주화를 이루고자 군인복무규율을 개정하는 등 국민의 군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지상군 56만,해군 6만7천,공군 6만3천 등 총 69만병력에 이른다.이에 견줘 북한군 규모는 1백14만7천명이다. ◎朴正熙­존슨 대통령 65년 월남 파병 담판/“전투병력 추가 파병 안하면 주한美軍월남으로 빼겠다”/“對韓 경제원조 확대 한국 군장비 현대화 해달라” 65년 5월 미국에서 만난 朴正熙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미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한 뒤 동아시아 안보에 관해 깊이있는 논의를 나누었다.그러나 실질적인 초점은 단연 한국군의 월남 증파 건에 맞춰졌다. 존슨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국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이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미상호방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했다.이때는 한국이 전투부대로 비둘기부대 2천명을 파견한 정도였기 때문에 존슨의 치하처럼 월남에서 큰몫을 담당하지 못한 상태였다.존슨의 언사는 결국 한미상호방위에 더욱 관심을 가질테니 한국도 월남에 병력을 더 많이 보내라는 정치적 요구에 다름아니었다.이 자리에서 존슨은,한국이 병력 파견을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암시도 함께 했다. 두 정상은 이 만남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한국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군사원조를 늘이기로 합의했다.또 주월한국군 유지비용의 인상과 주한미군 유지 약속 등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해 3월7일 브라운 주한 미대사는 국군의 월남 추가파병에 따른 미국측 보상조치를 약속한 14항목의 문서를 한국정부에 전달했다.주요 내용은 ▲추가파병 비용은 미국이 부담 ▲한국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 현대화 ▲월남 재건 및 구호사업에 한국업체 참가 ▲미국의 차관·군사원조 계속 및 신규차관 제공 등이다. 이 각서이후 곧바로 국군은 2만여명을 월남으로 보냈고,월남전이 끝날 때까지의 병력 31만여명은 월남전 참전국 가운데 미군에 이은 두번째 규모 였다.또 민간업체의 월남에 대한 수출액 할당도 연 6천만달러로 늘어났으며 건설사업 등에의 참여도 활발해져 우리 사회는 ‘월남특수’를 노렸다.그러나 월남에서 숱한 한국청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였다든지,참전용사와 그 자녀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일따위는 월남파병에 따른 손실이기도 하다.
  • 美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오늘 새벽 발사

    ◎현대판 노아의 방주 뜬다/쥐·귀뚜라미·물고기 등 태워 신경계 실험 【워싱턴 AFP AP 연합】 미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가 16일 하오 2시19분(한국시간 17일 새벽 3시19분) 플로리다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우주실험 역사상 가장 정교한 임무 가운데 하나인 인간 신경계에 미치는 무중력 상태의 영향에 관해 실험을 실시한다. 미국립항공우주국(NASA)은 콜럼비아호 승무원 7명(미국인 6명 캐나다인 1명)이 16일간 우주에 머물면서 불면증이나 불안정과 같은 평범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처치법을 찾기 위해 26개 실험장치들을 통해 조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NASA는 콜럼비아호에 탑승한 인간 7명과 함께 귀뚜라미 1천500여마리,물고기 223마리,쥐 152마리,달팽이 135마리,새끼밴 생쥐 18마리 등 작은 동물들을 대상으로 이같은 신경계 실험이 실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경계 실험 책임자인 제리 호믹 박사는 “이번 신경계 실험이 NASA가 우주실험 임무중 시도한 것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과학 실험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콜럼비아호에 탑승한 우주인들 일부는 특별한 장치로 수면 형태를 조사하며 다른 승무원들은 마이크로 중력 상태에 적응하는 동안의 손­눈의 협조와 감각­운동근육신경의 조절 상태를 연구하게 된다.
  • 미 대통령 전용기 35년만에 퇴역

    【워싱턴 DPA 연합】 63년 존 F.케네디 대통령을 태우고 냉전의 전시장 베를린으로 갔던 최초의 에어 포스 원(미 대통령전용기) ‘SAM 26000’이 취역 35년만에 이달말 퇴역한다. 특수 항공 임무의 머리글자와 꼬리 고유번호를 따 ‘SAM 26000’으로 불린 보잉707 제트여객기는 곧 대통령이 탑승중일 때 사용되는 호출부호인 ‘에어 포스 원’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케네디와 함께 자유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싣고 갔던 에어 포스 원 1세는 그러나 그해가 가기전 댈러스에서 암살된 케네디의 유해를 워싱턴으로 싣고 와야 하는 비애를 겪었다. 미국 역대 대통령 8명을 섬기는 동안 성공과 실패,기쁨과 절망을 목격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 비행기는 3월말 최후의 공식 임무를 마친후 오는 5월부터 오하이오주의 한 비행장에 영구전시될 예정이다.
  • 존 애덤스­퀸시 애덤스(미국의 대통령 문화:15)

    ◎2대­6대 유일한 부자 대통령/존­제퍼슨과 독립선언 기초… 당선후 해군부 창설//퀸시­뛰어난 국무장관 꼽혀… 취임뒤 복지정책 주력 【퀸시(미매사추세츠주)=나윤도 특파원】 1825년 3월4일,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의 대통령 취임식장.미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1825­1829)의 취임선서가 끝나자 군중들은 환호했고 새대통령은 줄곧 뒤에서 지켜보던 백발 노인의 손을 번쩍 치켜들어 답했다.89세의 이 노인은 2대 대통령 존 애덤스(1797­1801) 였다.미역사상 전무후무한 부자 대통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두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애덤스 가문은 1633년 잉글랜드에서 보스턴 해안에 도착한 이민 후손으로 이들 대통령 이외에도 보스턴 일대에서 과격파 청년단체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한 새뮤얼 애덤스,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친 찰스 프란시스 애덤스 등 많은 국가적 인재를 배출,오늘날 케네디가문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부자 모두 하버드대 출시 특히 이들 부자는 모두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로 독립초기 유럽 각국의 외교관을 역임하며 신생 미합중국의 국제적 지지 획득을 위해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에 건국초 버지니아왕조라 불릴만큼 버지니아주 출신의 위세가 드센 가운데서도 매사추세츠주 출신으로 입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존 애덤스는 1735년 보스턴 인근의 브레인트리(오늘날의 퀸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러나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하버드에 진학할 수 있었으며 23세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고향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당시는 점차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횡포가 높아질때 였고 마침내 1765년 영국의회가 인지조례를 통과시키자 그는 사촌인 새뮤얼과 함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사용되는 서류,증권 등 모든 문서에 인지를 의무적으로 붙이도록한 이 법은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는 식민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이듬해 폐기되고 말았다.애덤스는 이어 보스톤 학살사건,보스톤차 사건 등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매사추세츠 주의원으로 대륙회의에 참가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토마스 제퍼슨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으로 활약했고 초대 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8년을 지낸뒤 1797년연방당 출신으로 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그는 해군부를 창설,해로 안전확보에 노력했고 재임 4년 동안 신생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열강 사이에서 전쟁에 휘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4년후 친구이자 정적인 제퍼슨에게 패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저술에 몰두하며 90세까지 생존,최장수 전직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다. 특히 그는 평생 애증관계로 지낸 친구 제퍼슨과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인 1826년 7월4일 함께 눈을 감음으로써 두 독립영웅의 죽음에 있어 묘한 우연의 일치가 지금까지도 화제로 남아 있다. 존 애덤스가 32세때인 1767년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존 퀸시 애덤스 역시 국제사회에서의 미국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애썼다.아버지와 같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같은 나이인 23세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그는 어렸을때부터 대륙회의 대외 협상대표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장기간 광범위하게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이는 그가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많은 건국초기의 지도자들을 만나는데 도움을 주었다. ○3대가 영 대사 역임 기록 27세때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네델란드대사로 임명돼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프러시아,영국대사를 역임했다.후에 남북전쟁때 그의 아들 찰스가 영국대사를 역임함으로써 3대가 같은 지역에 부임하는 기록도 세웠다. 퀸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 주의원을 거쳐 연방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5대대통령 제임스 먼로 하에서 8년간 국무장관을 지냈다.그는 미국에 대한 유럽열강의 간섭 배제를 천명한 먼로선언을 기초하는등 가장 훌륭한 국무장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1825년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그는 대통령 선출과정에서 앤드루 잭슨과의 경쟁에서 부정거래 의혹에 휩싸여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국민복지를 위해 국립대학및 천문대신설.도로·수로건설 등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의회 반대에 직면했다. 4년후 잭슨에 패배,단임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1년후 다시 자신의 고향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재기했다.노예제도 폐지와 남북갈등 해소에 진력하면서 존경받는 하원의원으로서 8선 임기를 수행중 80세의 고령으로 워싱턴 의사당에서 쓰러져 숨을 거뒀다.특히 그가 13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미독립 전후의 뒷얘기들을 수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같은 부자 대통령의 탄생 뒤에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대통령으로 만든 애비게일 애덤스 여사의 선각자적인 노력이 전해지고 있다.목사 딸로 신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지않던 당시의 학교제도에 반발,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쳐 후에 부통령부인으로 또 퍼스트레이디로서 제도적인 여성권익의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보스톤 남쪽 10㎞에 위치한 인구 9만의 작은 도시인 퀸시는 ‘대통령의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 곳곳에 흩어진 애덤스 일가의 유적들은 ‘애덤스 국립사적지’로 지정,국립공원국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켈리 코블 애덤스 사적지 관리담당관/“국립사적지로 지정 보호”/대통령부자 생가·‘올드하우스’로 구분/1870년 지은 대통령도서관 가장 애착 【퀸시(미매사추세츠주)=나윤도 특파원】 애덤스 국립사적지의 캘리 코블 관리담당관은 퀸시 일대에 흩어져 있는 애덤스 가문의 유적들을 국립공원관리국에서 사적지로 지정,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발굴작업 등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애덤스 국립사적지는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존 애덤스의 생가와 존 퀸시 애덤스의 생가,애덤스가의 사저인 ‘올드하우스’등 크게 3부분으로 돼있다.올드하우스는 1788년부터 1927년까지 140년간 애덤스가 4대의 사저로 사용되던 곳으로 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소장 유물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올드하우스 옆에 별채로 지어진 도서관이다.존 퀸시 애덤스의 아들 찰스 프란시스 애덤스가 집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친의 책들을 한군데 모아놓기 위해 1870년에 지은 것으로 사실상 최초의 대통령도서관이라 할수 있다.소장 도서는 모두 1만4천권으로 주로 문학과 종교서적이 많으며 14개 언어의 책들이 있어 그의 언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말해주고 있다.조부 존 애덤스의 책들은 매사추세츠대학에 기증돼 있었다. ­올드하우스의 유래를 설명해달라. ▲존 애덤스가 외교사절로 오래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부인 애비게일이 구입해서 지은 방6개의 작은 집이었다.존은 이 집을 ‘평화터’(Peacefield)라고 부르며 매우 좋아했다.대통령 퇴임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후손들에의해 집이 증축돼 오늘날은 방60개의 대저택이 됐다. ­애덤스 부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 조사에 따르면 42명중 존 애덤스는 14위,존 퀸시 애덤스는 18위로 비교적 상위에 랭크돼 있다.
  • 취임축가/이세기 사빈 논설위원(외언내언)

    지난 93년,16년만에 민주당 정권을 탄생시킨 미국 클린턴 대통령 취임행사 첫날에는 백악관앞 광장과 링컨기념관에서 다이애나 로스,레이 찰스,퀸시 존슨 등 인기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있었다.다음날은 케네디센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갈채’‘청소년을 위한 갈채’공연과 저녁엔 캐피털센터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국가인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했다.제42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에는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이 역시 국가를 불렀고 웨이크 포레스트대학 교수인 흑인시인 마야 안젤라가 축시를 낭독했다.유명작곡가나 시인에게 따로 작사나 작곡을 의뢰하지 않고 ‘애국가’와 ‘축시’를 취임축가·축시로 쓰고 있다. 내일이면 우리도 50년만에 처음 이룬 여야 정권교체로 야당출신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취임식을 갖게된다.나라 안팎이 IMF몸 살로 어수선한 형편이라 호화취임식은 엄두도 못내지만 어쨌든 다른때에 비해 그 절반 수준에서 검소하게 치러질 모양이다.그래선지 지금까지 유명작곡가에게 의뢰했던 취임축가 없이 KBS가주관한 ‘겨레의 노래’공모에서 당선한 ‘아,동방의 아침의 나라’가 취임축가를 대신하고 있다. ‘아,동방의 아침의 나라/햇빛이 찬란하다/반만년 역사속에 갈고 닦은 슬기로움/새시대 열리는 이땅위에/우리 모두 힘을 모아 나아가자’로 시작되는 전주는 아침햇살이 떠오를 때의 찬란한 느낌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전진,힘과 용기를 주는 멜로디가 신선하다.한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69세의 김경희씨가 ‘새벽기도후 받은 영감’을 노랫말로 적었고 바로 그의 따님인 임준희씨가 작곡,소프라노 조수미가 서울시향의 반주에 맞춰 노래부른다.우리의 취임식은 국가적 난국을 극복하려는 장중하고 맑고 힘찬 분위기로 국민적 화합과 용기를 북돋우는 자리일 수밖에없다.지난번에는 최영섭 작곡의 ‘해뜨는 아침의 나라’가 취임축가로 창작됐으나 그날 하루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오늘의 축가는 ‘겨레의 노래’로 만들어진만큼 국민화합을 다짐하는 노래로 계속 불려져도 괜찮을 것같다.
  • 미 버지니아대 ‘아카데미 빌리지’(세계 문화유산 순례:63)

    ◎학문­주거­자연 어우러진 ‘환상의 캠퍼스’/1826년 미 3대 대통령 제퍼슨이 직접 설계 완공/판테온 신전 본뜬 ‘로툰다홀’ 앞에 ‘파빌리온’ 배치 【샬롯빌(미버지니아)〓나윤도 특파원】 워싱턴 DC 남부에 위치한 버지니아주 최고 명문으로 알려진 버지니아대학(UVA)의 대표적 상징으로 돼 있는 ‘아카데미 빌리지’는 학문과 주거와 자연 3자가 한데 어우러진 이상적인 대학캠퍼스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미국 건국의 일등공신 토마스 제퍼슨이 180여년전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펼치기 위해 고향인 버지니아주 중동부 샬롯빌에 건립한 이 대학은 건국 초기의 대학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등 정치인은 물론 작가 애드가 앨런 포,요즘 최고 인기 앵커우먼인 NBC­TV의 캐티 쿠릭 등각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UVA를 미국내 일류대로 만들었다면 이 대학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제퍼슨에 의해 직접 설계되고 이름지어진 캠퍼스인 ‘아카데미 빌리지’ 때문이다.이는 대학이 학문 자체뿐만 아니라 학문을 위한 모든 부대조건까지 갖춘 완벽한 공간이 되도록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인간적 측면의 고려없이 학문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는 현대의 대학들에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완성도 가장 높은 건축” 따라서 이 빌리지는 1976년 독립 200주년을 기념,미국의 대표적 건축가 모임인 미건축연구소(AIA)에 의해 미국 건축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또 완성도가 높은 건축물로 선정됐다.이어 87년에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포괄적 문화의 가치를 인식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빌리지는 셰난도 밸리의 동쪽 산맥군인 블루 릿지 마운틴 기슭,락피시 계곡의 빼어난 주변경관의 이점을 한껏 살려 설계됐다.건국초 3대 대통령을 지낸 제퍼슨의 ▲교육자로서의 비젼 ▲건축가로서의 재능 ▲원예전문가로서의 기술 등이 한데 어우러져 노년기에 접어든 그의 인간적 완숙미가 배어난 작품으로 설명되고 있다. 제퍼슨은 죽기 직전 자신의 묘비명에 ‘독립선언서 기초자’‘종교자유를 위한버지니아장전 기초자’‘버지니아대학 설립자’ 등 세가지 타이틀만을 새겨달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이 대학 건설을 대통령직보다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재임(1801­09)중 또하나의 그의 건축가적 기질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샬롯빌 고향농장에 몽티첼로라 이름 지은 자신의 집을 건축한바 있는 제퍼슨은 퇴임후 교육자로서의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1817년 10월6일 이 대학의 첫삽을 떴으며 모두 9년 걸려 26년 완공됐다.기공식 자리에는 그의 고향 후배들이기도 한 당시 대통령 제임스 먼로,직전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 등이 참석,3·4·5대 대통령이 나란히 초석을 놓았다. 한글자모의 티읕(ㅌ)자를 거꾸로 세운 모양의 아카데미 빌리지는 가운데 직사각형 잔디밭인 ‘론’(Lawn)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원형건물인 ‘로툰다’(Rotunda)홀을,동·서 양쪽으로는 회랑으로 길게 연결된 ‘파빌리온’(Pavillions)이 건설돼 있다.또 각각 뒷편으로는 모양이 다른 정원과 그 건너편에 파빌리온과 나란히 또 한줄씩의 건물로 된 ‘레인지’(Ranges)가세워져있다.론 남쪽은 블루 릿지 마운틴 쪽으로 탁 터져 제퍼슨의 이상인 인간정신의 무한한 진보를 상징하고 있다. 로마 판테온 신전을 본따 절반 크기로 지은 로툰다홀은 당시 도서관으로 사용됐으며 그 밑에는 강의실이 위치했다.또 파빌리온은 I부터 X까지 로마숫자 번호가 붙은 10채의 2층건물이 동서로 5채씩 서 있으며 주로 교수들의 주거와 연구실 공간으로 활용됐다. ○기공식 3∼5대 대통령 참석 뒷편의 레인지에는 ‘호텔’이라 이름 붙은역시 2층건물이 A부터 F까지 6채가 동서로 3채씩 있어 학생식당과 특별활동룸,학교 오피스 등으로 사용됐다.그리고 파빌리온과 호텔들을 연결하는 방들은 학생 기숙사로 쓰였다. 이들 각 건물과 방들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돼 비나 눈 등 자연의 영향에 관계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항상 밀접히 지낼수 있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살며 함께 연구하는 제퍼슨의 학문공동체 이상을 실현시킬수 있었다.특히 파빌리온과 레인지 사이의 10개의 정원은 모두 각각의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중앙의 ‘론’과 함께 학문공동체에 충분한 자연의 휴식공간을 제공토록 했다. 로툰다홀의 도서관은 1930년대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나머지 건물들에는 오늘날에도 일부 교수들의 주거와 대학원생들의 기숙사로 쓰이고 있으며 특별활동룸 등 학교생활의 중심으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이중 일부는 성적이 좋은 학부 4학년생에게도 제공된다. ○학문 필요한 휴식공간 제공 이들 건물이 낡고 욕실 화장실 등이 떨어져 있어 불편한 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방을 얻는 것을 학생들은 큰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고 학교관계자는 설명했다. 이제 학교규모는 엄청나게 커져 1825년 개교 당시 40명이던 학생수는 1만8천명으로,제퍼슨에 의해 처음 임명됐던 8명의 교수는 오늘날 1천7백명으로 증가했다.또 이 대학의 전부였던 아카데미 빌리지도 이제 캠퍼스 한 귀퉁이로 밀려나게 됐다.그러나 그의 학문공동체 정신은 오늘날 컴퓨터시대와 조화를 이루어 수업,연구,행정,학생활동 등 대학의 모든 분야가 컴퓨터로 연결된 ‘전자 아카데미 빌리지’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살아 있다. ◎여행가이드/워싱턴서 남서쪽 200㎞… 부근엔 미 대통령 3명 사저­농장도 워싱턴 남서쪽으로 200㎞m 가량 떨어져 있으며 승용차로 약 2시간 걸린다.66번 고속도로를 타고 40여㎞ 서쪽으로 달린뒤 29번 국도로 샬롯빌까지 가면된다.이 길은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가운데 넓은 분리대와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어 버지니아 시골분위기를 만끽하며 달릴수 있다.이 근처에는 제퍼슨의 몽티첼로 이외에,약간 못미쳐 제임스 메디슨의 사저 몽펠리에와 제임스 먼로의 농장 애쉬 론 등이 있다.또 서쪽의 스톤턴에는 우드로 윌슨 생가도 있어 이 일대는 미 대통령문화의 진수를 맛볼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지퍼 게이트’란걸 지켜봐 오면서(박갑천 칼럼)

    “이 강토와 억조창생이 다 전하의 것이옵니다…”. 사극같은데서 가끔 듣는 대사다.국토와 백성이 임금인 당신의 것이라는 뜻이다.그랬으니 후궁을 맛맛으로 두는 따위 엽색취향도 소유권 행사 정도였다고나 할 것인가.그런 가운데서도 조선 성종의 경우는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화를 남긴다.차천로의 등이 말하는 것처럼 성종은 영흥 기생 소춘풍을 총애했다.성종은 정사도 잘했지만 주색도 밝혔기에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걸주”(주요순야걸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날 소춘풍은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간다.그런데 여느때 같은 연회가 아니라 임금 혼자였고 천침 분부.하건만 딱하다.임금을 모시고 나면 그다음부턴 ‘남자’에 자유로울 수 없는게 그시대 여인네 신세 아니던가.그 이유를 들며 ‘감히’거절한다.임금은 “너야말로 인생의 군주”라면서 놓아주고 며칠후 미복차림으로 소춘풍한테 간다.‘임금과 신하’아닌 ‘한량과 계집’의 관계는 두번 있었다던가.들에 핀꽃의 ‘인권’을 존중한데에 성종의 살가운 멋이 있었다고 해두자. 그같은 바람기는 유독 임금만의 것은 아니다.영웅호걸 여색을 밝힌다 했지만 영웅호걸만의 것도 아니다.범인 또한 돈벌고 권세잡으면 생각하는게 주색이라지 않던가.아니,그걸 남성에 국한된다고 할 수만도 없다.여성도 힘이 생기면 달라지던 것.당나라 측천무후,신라 진성여왕,제정러시아 에카테리나(2세) 여제 등의 화려한 남성편력을 돌이켜 볼만하다. 불길이 한풀 가라앉은듯하지만 미국의 이른바 지퍼게이트라는걸 지켜 보면서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오늘의 미국은 옛날왕조에 비길 수 없는 대국.옛날 같으면 그런 ‘지구촌 황제’가 곁눈질한걸 가지고 누가 입방아 찧겠는가.한데도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현 대황제’는 휘청거렸다.이 문제를 지퍼게이트라 한다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고 케네디 대통령.그의 바람기도 인구에 회자됐던 터이다.그가 명연설을 하고 나오자 누군가 첫바대기 그비결을 묻는다.“시집을 읽느냐,명연설집을 챙기느냐,옛정치가들 행적을 뒤지느냐”면서.“아니오.난 등단하기 전에 바지 지퍼가 잘 잠가졌나 어쨌나 확인하는 것뿐이라오”.절묘한 대답이었다. 우리나라서도 예로부터 삼부리 조심하라 했것다.어디 대통령뿐인가.범인도 지퍼(파스너) 그것 아뭏게나 여닫으면 큰 코 다치는법 아니던가.
  • 김 당선자의 KIST 방문/박건승 과학정보부 기자(오늘의 눈)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11일 한국 과학기술의 산실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찾았다. 대통령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KIST를 방문한 것은 지난 83년 6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후 15년만의 일이다.역대 대통령 가운데 KIST를 가장 많이 찾은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유난히 과학기술 진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여덟차례나 KIST를 찾았다.아무런 예고 없이 한밤중에 불쑥 나타나 연구원들과 격의없이 대화한 뒤 호주머니를 뒤져 막걸리 값을 내놓기도 했다.사회 전반의 무관심 속에 사기가 땅에 떨어진 요즘의 과학기술인들로서는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 아닐 수 없다.과학기술인들은 역대 통수권자중 과학기술 발전에 가장 공이 큰 사람으로 역시 박 전 대통령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전 전 대통령도 80,83년 두 차례에 걸쳐 KIST를 방문했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중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 김당선자의 이날 KIST 방문은 32돌 기념식 참석을 위한 의례적인 일인데도 과학기술계는 한껏 고무되었다.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가 재임중 KIST 방문 횟수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이미 체득한 터였다. 과학기술은 결코 하루 아침에 결실을 내는 법이 없다.‘기술가지’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기술나무’를 이루고,또다시 ‘기술정원’을 이뤄야 한다.그 나무와 정원을 빨리 가꾸기 위해서는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여기에는 자상하고 능숙한 정원사가 필요하다.그 정원사는 다름아닌 최고 통수권자의 몫인 것이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원자탄 개발이나 아이젠하워의 고속도로 건설,케네디의 인간 달 정복,레이건의 ‘별들의 전쟁’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2차대전이후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영광’을 내걸고 원자력·해양·우주항공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국가재건을 이룩한 것도 본보기로 삼을만 하다. 대통령은 분명 과학기술 도약의 향도다.재임중의 단기 치적에 구애받는 대통령에게 과학기술 투자는 갈등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반면 국가의 미래 개척을 중시하는 대통령은 과학기술의 지원 확대에 파격적일 수 밖에 없다. “21세기는 과학기술 시대”라는 따위의 겉치레 말보다 과학기술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통수권자의 격려와 관심만으로도 과학기술인의 사기는 충분히 되살아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김당선자의 KIST 방문이 과학기술계에 대한 지속적 관심의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 시오노 나나미/신명나게 풀어 본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레판도 해전/문명간의 대결 균형있게 묘사/‘성자필쇠’의 잔잔한 역사 교훈 “…‘일리아스’를 통해 지중해 세계에 매료되었기에 전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여느 전쟁이 아니라,‘일리아스’에 묘사된 것 같은 다른 문명간의 대결로서의 전쟁을…” 일본태생의 재 이탈리아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61)는 그의 나이 열여섯살에 품은 이꿈을 세개의 전쟁이야기에 담았다.‘콘스탄티노플 함락’‘로도스섬 공방전’‘레판토 해전’이 그것이다.시오노의 이 전쟁 3부작이 전쟁사 연구가 최은석씨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나왔다. 시오노는 영국의 이른바 ‘내러티브 히스토리언(narrative historian)’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이는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이야기체 역사가’로 에드워드 기번·매콜리·칼라일·J.R.그린·트리벨리언·토인비·폴 케네디 등이 이에 속한다.요컨대 시오노는 기번을 비롯한 앵글로 색슨류의 역사서술 장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시오노의 글에서 드러나는 또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은 성자필쇠론이다.그의 이런 입장은 1천년 동안 공화제를 지키다가 1797년 나폴레옹의 말발굽 아래 사라져간 베네치아공화국의 멸망을 온갖 시련과 질병 끝에 천수를 다하고 죽는 인간의 자연사에 비유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소개된 전쟁 3부작에는 이러한 시오노의 역사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시오노는 ‘전쟁’이야기를 다룰 때 가장 신명이 난다.그는 마치 진중의 야전사령관처럼 힘있게 전투의 고리들을 풀어간다.첫째권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는 동로마 제국 비잔틴의 수도로 천년의 영광을 누려온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함락되기까지를 다룬다. 바빌론 붕괴나 트로이 멸망에 비견되기도 하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야말로 작가 시오노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한 소재.작가는 비극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입장에서,때론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진영에서,때론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니콜로의 눈을 통해 전쟁을 그린다.또 어떤때는 베네치아의 해군장수 트레비사노의 흉중으로 살며시 들어가 그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젖힌다. 2부 ‘로도스섬 공방전’은 ‘서구문명의 총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거대 동방제국을 형성하며 서진하던 오스만 투르크의 대제 술레이만 1세와 성 요한 기사단의 장렬한 공방전을 다룬다.에게해의 작은 섬 로도스는 이슬람 세계에 맞선 기독교 세계의 최전진기지.10만 군세로 밀고 들어오는 술레이만 1세의 물량작전과 이에 맞선 ‘몰락하는 계급’으로서의 기사들의 분전이 처절하도록 아름답게 그려진다.2부는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레판토 해전 사이의 기간을 설명하는 막간극인 셈이다. 이어 3부작의 완결편인 ‘레판토 해전’에서는 문명의 교체기를 살다간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동지중해의 레판토 바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베네치아의 해군장수 바르바리고,불같은 성격의 베니에로,스페인의 왕자이자 오스트리아공으로 연합함대를 총지휘한 돈 후안,피흘리는 전장의 다른 편에서 피흘리지 않는 전쟁을 치러낸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대사 바르바로….작가는 더할나위 없이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선명한 색깔로 되살려 낸다.3부의 압권은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서구 연합 함대가 1571년 동방의 무적 투르크를 격파하는 대목.콘스탄티노플 공략부터 헤아려 118년만에 대투르크제국이 품어온 지중해 세계 제패의 야망이 마침내 궤멸된 것이다.그러나 이와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역사의 주무대였던 지중해의 해도 기울기 시작한다.바로 이 ‘결정적 전투’를 전환점으로 해 역사의 무대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지고 만 것이다. 시오노는 지난 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30년 넘게 그곳에 머물고 있다.그러나 그는 결코 기독교 문화에 무작정 빠져들지 않는다.그 한 예로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에드워드 기번을 포함한 후세 사가들의 로마사는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 역사라고 해서 대부분 참고문헌 목록에서 배제했다. 이 전쟁3부작 역시 이러한 엄정한 사관에 입각해 쓰여졌다.시오노의 전쟁3부작은 서구와 대치하는 이교도 문명,곧 이슬람 문명과의 충돌을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다룸으로써 유럽의 역사를 객관적인거리에서 보게 한다.이것은 특히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젖어 지낸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역사평설가로서의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를 심판하지 않는다.다만 역사과정을 추적할 뿐이다.
  • 미 케네디 센터 설립자/로저 L 스티븐스 사망

    미국 케네디 센터의 설립자이자 유명 연극 연출가인 로저 L 스티븐스가 지난 2일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스티븐스는 현재의 케네디 센터를 세계 최고의 문화공연장으로 우뚝 서게 한 주역이다.지난 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미 국립문화센터(NCC)의 이사장에 임명된 뒤 71년 케네디가 암살되자 NCC를 케네디 센터로 개명했다. 27년 이사장 재임기간 동안 그는 정부 및 개인기부금을 끌어내 센터의 탄탄한 재정을 마련하는 한편,세계 최고의 예술인과 작품들을 무대에 유치했다.그가 연출한 작품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애니’ 등 연극 및 뮤지컬 250여편.
  • ‘대학의 의무’등 3권/도널드 케네디 외(미래를 보는 세계의눈)

    ◎위기의 미 대학교육 원인은 뭔가/“교수 종신제·학문 비밀주의 폐단/돈벌이 연구 매달려 본분 망각/도덕·인격 중시 전통교육 회귀를” 【뉴욕=이건영 특파원】 대학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현 시대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위기를 맞고 있다는 미국 대학교육의 현실을 진단하고 향후 좌표설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서적들이 최근 미국 대학자체 출판사에 의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대학의 의무’,‘고등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인문학 개발’등이다. 미국의 대학환경이 갈수록 열악해 지고 있는 데는 교수의 노령화와 연구개발비의 축소가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또 새로운 첨단기술의 발달은 대학으로 하여금 학생들과 자금을 유치하는 경쟁을 벌이도록 강요하고 있다.이 책들이 주목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널드 케네디의 저서 ‘대학의 의무’는 미국 대학교육의 미래를 제시한 사실상의 첫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80년부터 92년까지 스탠포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의 책임보다는 대학의 자유를 더많이 주장한다.대학교수들에게 연구실적을 공개하고 잘 가르치며,대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모든 학문적 도전을 뚫고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그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관례를 타파,교수들이 현재 무엇을 연구하고 있느냐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대학사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스탠포드대는 연구개발비 지원에 대한 회계부실이 지적돼 시끄러웠다.결국 이 문제로 총장직을 물러난 그는 이러한 뼈아픈 경험에서 대학교육자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항목으로 지원 받는지를 모르고 있으며,연구내용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비판한다.대학학문의 비밀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박사학위 준비자들을 가르치면서 대학의 의무를 실감했다는 저자는 현재의 교수진들은 과거처럼 은퇴연령인 65세가 됐어도 물러나지 않아 젊은사람들이 대학강단에 서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교수의 노령화는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 교수 채용을 줄이고 시간강사수를 늘리게 하며 이는 대학의 책임성 결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대학의 현안을 둘러싼 갈등을 대학의‘문화전쟁’으로 부르면서 개별분석을 통해 문화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현재의 대학의 명성과 위상이 교수들의 연구실적만 토대로 한 것이라면 학생들이 고품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교수들이 ‘생명공학’같은 돈벌이 되는 연구계획만을 맡을 때 대학당국은 이를 어느 정도로 제어해야 하는가. 대학당국 자체가 그런 수익 높은 연구계획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연구대학의 미래는 정부와 산업체와의 협력관계에 묶일 수 밖에 없지만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정부와 기업체간의 협력관계 속에서 대학의 역할을 찾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대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어려운 선택에 있어 역시 대학총장 출신인 ‘대학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의 저자 조지 D.오브라이언은보수적인 방법을 제시한다.그는 한세기 전에 대학사회를 지배한 전통적인 대학교육의 체제로 회귀하자는 이색주장을 펴고 있다.학문적 발견과 다양성보다는 도덕적·인격적인 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많은 미국학생들이 인문학을 소홀히 하면서 학습단위만 큰 첨단기술학문 쪽을 선호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3천600개의 대학중 교양과목을 설치한 대학은 600개에 불과하다.저자는 또 현재의 대학사회가 교수집단이 아닌 관리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면서 교수의 수급 시장기능에 맞지 않는 ‘교수 종신제’는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저자는 특히 대학은 다문화적인 여러가지의 학문연구보다는 각자 전문성과 독자성 제고에 치중함으로써 다양성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문학 개발’의 저자 마사 C.누스바움은 다문화적 학문연구를 지양하자는 오브라이언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철학자이며 고전주의학자인 그는 미국의 전 대학을 순례하면서 대학의 다양성 부족을 목격하고 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그는 일부 대학은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한 나머지 지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인문학 교육의 목적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과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대학들이 학문의 자유와 개방적 표현의 터전이란 명성을 얻은 것은 튼튼한 재정 때문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목적달성을 위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만큼 미국의 대학들은 이제 변화하는 사회를 계속 선도하기 위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이 세 학자들의 문제제기는 최근의 미국 대학의 재정난과 관련해볼 때 음미할 점이 상당히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의 의무’:원제 Academic Duty,하버드대학 출판,310쪽,29.95달러.‘고등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원제 All The Essential Half­Truths About Higher Education,시카고대학 출판,243쪽,19.95달러.‘인문학 개발’:원제 Cultivating Humanity,하버드대학 출판,328쪽,26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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