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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와 집 사이, 학원 아닌 ‘꿈 셔틀’… 모든 공간이 상상력으로 채워진다[건축 오디세이]

    학교와 집 사이, 학원 아닌 ‘꿈 셔틀’… 모든 공간이 상상력으로 채워진다[건축 오디세이]

    서울 강남은 ‘지옥’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대한민국 입시를 거론할 때마다, 천정부지의 아파트 가격을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좋은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욕망의 상징 같은 곳이다. 상가 건물이 대로변에 도열해 있고, 그 뒤로 아파트가 숲을 이룬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성장하다 아주 일찍부터 치열한 경쟁 사회의 일원이 되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른바 셔틀 인생. 비단 서울 강남에 사는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아이들이 겪는 상황이다.건축가 전이서(전아키텍츠 대표)가 강남구로부터 일원동 재개발 단지의 키움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이들이 학교와 집의 사이 시간,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찾아오는 곳인 만큼 학원처럼 느끼지 않으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고,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강남구의 ‘마을 건축가’(현재는 서울시 공공건축가 제도로 통합됐다)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전 대표는 “아파트촌의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다른 형태의 집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한다”면서 “아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의 집, 나의 공간’이 있는 마을 같은 공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의 집, 나의 공간’ 있는 마을로 서울 시내의 각 구에서 운영하는 우리동네키움센터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에 부모의 부재로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교 아이들(만 6~12세)이 방과 후에 머무는 곳이다. 규모에 따라 소규모의 일반형과 중규모의 융합형, 대규모의 거점형이 있으며 현재 서울 시내에는 거점형 7개소를 포함해 총 282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디에이치자이아파트 건설사로부터 기부채납을 받은 공간은 685.79㎡(207.8평)로 여기에 융합형 키움센터가 계획됐다. 건축가이기 이전에 아들 둘을 키운 전문직 엄마이기도 한 전 대표에게는 특별히 관심이 가는 프로젝트였다. 일원동 스포츠센터 1층에 있는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를 아이들의 학교가 파하기 전 조용한 시간에 방문했다. 직사각형의 공간은 꽤 커서 아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장에는 뭉게뭉게 흰 구름무늬로 된 조명이 달려 있는데다 말끔하고 모던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공간은 바닥재와 작은 집, 미끄럼틀 등 모두 자작나무 원목 합판으로 만들어져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고 화사하다. “공간의 질이 좋아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뇌가 공간 구석구석을 경험하면서 상상력이 확대되기 때문이에요. 아이의 인성, 창의성도 공간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 대표는 “다양한 입체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학습 위주의 기능적 공간을 넘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감성적 공간으로 다가가고자 했다”면서 “아이들 스스로가 재구성하는 자율형 공간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센터 구석구석, 상상력이 무럭무럭 아이의 마음으로 찬찬히 공간을 탐험해 보자. 왼쪽에 작은 집 모양의 상자들이 쌓여 있다. 문을 열어보니 실내화와 스케치북, 색연필 등이 들어 있는 사물함이다. 사물함 뒤쪽으로는 그물망을 친 점프 놀이공간(구름방)이 있다. 1층과 2층 사이 공간을 이용해 만들어놓은 것인데 활동적인 아이들이 특히 좋아할 것 같다. 구름방을 나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층층마을집’으로 간다. 집 하나를 골라 들어가 앉아보니 아늑하고 바닥에 푹신한 쿠션까지 깔려 있어 편안하다. 각각의 집들은 바닥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웃으로 들락날락하는 것도 가능하고 한가운데 상이 놓여 있는 넓은 집(도담방)으로 갈 수도 있다. 마루 아래쪽 수납공간에는 책들이 꽂혀 있다. 전 대표는 “아이들이 입체적인 공간에서 누웠다가, 앉았다가, 오르내리고 뒹굴기도 하면서 숙제도 하고 책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미끄럼틀도 집처럼 생겼다. 아래쪽 으슥한 곳은 비밀 아지트로 삼으면 좋겠다. 미끄럼틀 뒤쪽으로 가면 세면대가 있고 테이블이 있는 다목적 공간이다. 나무가 있고 숲이 있는 것 같아 마치 캠핑장에 온 느낌이다. 캠프를 추상화한 ‘새움방’은 식사 외에도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는 등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전 대표는 “아이들이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 숲속의 캠프를 가고 싶어한다는 점에 착안해 식당을 캠핑 공간처럼 꾸몄다”면서 “키움센터에서는 아이들에게 점심과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데 이왕이면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떠나 캠핑을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간 속 기하학, 자연스럽게 배워 초록색이 칠해진 벽을 따라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된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가니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기하학적 도상으로 구성한 것도 의미가 있다. “기하학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로부터 찾은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조형 언어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그냥 흡수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을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기하학의 원형을 몸으로 느끼도록 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질서, 논리, 수리’의 개념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키움센터는 놀이 공간과 공부 공간, 즉 동적 공간과 정적 공간이 정확히 분리된 구조인데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에는 구분이 없다. 전 대표는 “정적 공간과 동적 공간의 경계를 지우고 함께 놓아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꾸고, 즐겁게 작업하고, 자기 생각을 나누는 곳이 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이전에 관악구의 신성초등학교 도서관 리모델링을 하면서 아이들이 융합적 공간을 선호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주저함 없이 정적 공간과 동적 공간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했다. 신성초에서는 아이들과 워크숍을 함께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아이들에게 원하는 공간을 물어봤더니 편하게 엎드리거나 누워 책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란다. 리모델링 후 도서관은 신성초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 장소가 됐다.# 미끄럼틀은 ‘무궁화꽃~’ 놀이터로 전 대표는 “키움센터에 오는 연령대의 아이들에게는 놀이 장소와 공부하는 장소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서 “공간을 만들어만 주면 아이들 스스로가 주어진 공간을 이용해서 자기들만의 장소로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키움센터 홀에는 미끄럼틀을 길게 연장한 쿠션 트랙이 놓여 있다. 실내이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기도 하고, 엎드려서 긴 캔버스를 편 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의도는 그랬지만 막상 오픈하고 보니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뛰어놀았다. “아이들에게 어른들 잣대로 만든 의도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다양한 높이, 다양한 스타일의 입체적 공간을 만들어 주면 아이들에게는 안락하면서도 상상을 자극하는 공간이 되어 한정된 기능을 넘어서 아이들의 의도에 따라 반응하는 장소가 됩니다.” ‘아이들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와 쉼이 있는 공간’의 콘셉트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의 크기와 높낮이가 각각 다르고 박공 모양 지붕엔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도형들을 붙여놓았다. 문자화된 이름이 아닌 추상화된 도형의 사인은 아이들 저마다 의미 있는 이름을 지어 붙이도록 한 것이다.# 이름도, 쓸모도 모두 아이들의 몫으로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는 코로나가 채 끝나기 전이었던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40명 정원에 조리 담당 1명을 포함해 7명의 교사가 근무한다. 일원동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도 개방되어 있어 늘 대기자가 줄을 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평단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22년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문체부장관상을 받았으며 최근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IF디자인어워드 골드메달도 수여받았다. ‘디자이너가 공간을 사용할 대상을 명확히 이해했으며, 즐거우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재료, 형태, 규모, 빛과 같은 핵심 매개변수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제안하고 있다.’(IF디자인어워드 심사평)전 대표는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공간의 힘은 크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고 했다. 취재를 마칠 즈음 학교가 파하고 오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무슨 책을 보며 어떤 꿈을 키울지 궁금했다. 함혜리 건축 칼럼니스트
  • “한국의 IAEA 사무총장 항의시위는 국민들 민도가 낮기 때문”...日우익의 ‘망언’

    “한국의 IAEA 사무총장 항의시위는 국민들 민도가 낮기 때문”...日우익의 ‘망언’

    한국에 대한 ‘헤이트스피치’(특정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표현)성 언설을 정기적으로 우익 매체에 기고하는 일본 인사가 최근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에 대한 한국내 항의 시위와 관련해 ‘낮은 민도’를 언급하며 망언을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인사 무로타니 가쓰미는 13일 일간 유칸(夕刊)후지에 “IAEA 사무총장 ‘한국에서 참극’ 처리수 방류에 근거 없는 반발…‘그로시, 고 홈!’ 규탄 시위대에 공항에서 발 묶이기도”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지난 7일 그로시 사무총장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을 때 시민단체 등의 항의 시위가 있었던 것을 언급하며 “이것이 IAEA 사무총장이 한국에서 맛본 참극”이라며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그로시 사무총장이)‘우리와도 대화하라’고 해서 방문했더니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 홈!’(돌아가라)을 외치는 과격한 시위대. 겨우 밖으로 나왔지만 호텔에도 시위대. 국회에서 국회의원과 만나러 가는데도 거기서도 시위대가 창문을 두드리며 구호. 의원들은 설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근거 없는 괴담을 고압적으로 늘어놓는다.” 그는 최근 물의를 빚었던 유튜브 동영상 조작 파문을 여기에 끌어들였다. “한국인 유튜버가 프랑스 축구 영웅 킬리안 음바페 선수와 일본 기자의 인터뷰를 날조해 만든 가짜 동영상이 전 세계 축구 팬들의 뇌리에 ‘반일 한국인의 비정상성’을 각인시키고 있다”며 “이번 그로시 사무총장에 대한 규탄도 ‘한국 좌파 반일주의자들의 비정정상’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될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폈다.무로타니는 “그로시 사무총장은 7일 오후 10시 47분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공항에 와 있던 시위대가 입국 통로를 막고 ‘그로시, 고 홈!’ 등 구호를 외쳤다”며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 순간 시위대가 달려들었고 몸싸움을 벌인 끝에 탈출했다”고 했다. “결국 그로시 사무총장은 2시간 이상 공항 안에 발이 묶여 있다가 다음날인 8일 0시 50분이 되어서야 간신히 화물용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것은 ‘괴롭히기’가 목적이었다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무로타니는 63년 전인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협상 당시 발생했던 ‘해거티 사건’(도쿄 하네다공항에서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온 백악관 보도관 제임스 해거티가 공항 주위에 모인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미군이 헬리콥터로 구조했던 사건)을 동원했다.“당시 해거티 보도관이 타고 있던 차를 수많은 시위대가 에워싸고 일부는 차 지붕으로 뛰어올라 난동을 부렸다.” 그는 “(당시 일본과 현재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외국 요인의 입국을 폭력적으로 방해하는 민도(를 보여준다)”라며 “일본과 한국의 민도가 60년 이상 차이 난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국 ‘좌파 반일주의자’의 행동이 오늘날 세계 상식과 크게 동떨어져 있음은 틀림없다”고 비방했다.
  • [진경호 칼럼] 아기는 누가 죽였나/논설실장

    [진경호 칼럼] 아기는 누가 죽였나/논설실장

    버려져 죽고, 죽어 버려진 아기들 얘기가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아기 시신을 냉장고에 몇 년 동안 감춰 둔 엄마가 붙잡혔고, 아기를 야산에 묻은 아빠와 외할머니가 체포됐다. 어느 사실혼 부부는 아기를 하천에 버렸다. 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발견된 아기 시신도 있다. 지난 주말엔 텃밭에서 나은 아기를 바로 목졸라 죽이고 묻은 40대 엄마가 구속됐다. 2015년치부터 뒤져 보니 지난 8년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사라진 아기’가 2236명에 이르더라고 감사원이 밝혔다. 그나마 병원에다 탄생의 흔적을 남긴 아기들 얘기다. 야산에서, 화장실에서, 불 꺼진 방에서 태어나 하늘 한 번 못 보고 스러진 아기들은 이 축에 끼지도 못한다. 이런 죽음 앞에 널브러진 대개의 젊거나 어리거나 가난한 부모들의 처연할 사연과 삶도 이 숫자는 보여 주지 못한다. 새삼 놀랐다는 듯 여야가 황급히 출생통보제 법안을 국회에서 처리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게 전부가 아니다, 보완 입법도 서두르겠다고도 했다. 제 할 도리 다 하고 있다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사라지는 아기들’의 소리 없는 울음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2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영아 실종 대책을 촉구한 게 2015년이다. 아기 실종을 줄일 출생통보제 법안만 해도 2017년 이후 10여건이 발의됐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정치는 이를 외면했다. 병의원이 출산 기록을 지자체 등 행정기관에 통보해 출생신고를 보완토록 하는 이 간단한 방안을 10년 가까이 뭉갰다. 낙태죄는 어떤가. 지난 문재인 정부가 외면한 국가 과제가 연금개혁 등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잊혀진 것 하나가 낙태죄 대체입법이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020년 말까지 관련 입법을 정비하라고 주문했으나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외면했다. 물론 입법 시도는 있었다. 2020년 하반기 추미애 법무부가 양성평등정책자문회의 권고에 맞춰 낙태 허용 주수(週數)와 임산부 지원 방안 등을 담은 입법안을 추진했다. 당시 논의엔 기자도 참여했다. 법무부의 입법안은 그러나 막판 청와대에 막혔다. 천주교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낙태에 부정적이라서라는 설이 돌았으나 확인한 바는 없다. 다만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어이없게도 청와대의 제동을 “묘수”라고 반기는 반응이 나왔다. 낙태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인 판에 어느 편을 들어 매를 맞기보다는 그냥 헌법불합치 상태로 놔두는 게 낫다는 것이다. 낙태를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방기하고, 이로 인해 몰래 출산과 영아 유기가 빈번해질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들은 ‘묘수’ 운운했다. 여성의 자기 선택권을 그토록 강조했던 당시 여권의 인권운동가 출신 의원들조차 싹 입을 닫았다. 지금 터져 나오는 영아 살해유기의 참극은 이런 비겁하고 교활한 정치가 잉태한 것들이다. 우리 정치가 모든 일에 이처럼 굼뜬 게 아님은 우리 모두가 안다. 신속처리안건, 이른바 패스트트랙에 올려 후다닥 처리한 법안만도 한둘이 아니다. 2016년 세월호 관련 사회적참사특별법에서부터 2019년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 관련 법안, 2023년 이른바 화천대유 50억 클럽과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관련 쌍특검 법안 등 대표적 패스트트랙 법안만 7건에 이른다. 사이사이 단식과 삭발, 철야 농성도 틈틈이 해 왔다. 우리 정치는 이렇게 선택적으로 반응한다. 표가 안 되는 목소리엔 귀를 닫는다. 일본 오염수 방류에 맞서 국회 본관에 자리 깔고 누운 이들이 “국민 안전”을 외치고 있다. 일부는 현해탄까지 건넜다. 오늘도 우주를 담은 생명 하나가 세상을 스쳐 간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국민이 존재하는 나라는 이렇게 슬프다.
  • [최보기의 책보기]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부산은 항구다

    [최보기의 책보기]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부산은 항구다

    지난 4월 『득량, 어디에도 없는』(글을낳는집)을 소개했다. 공주 출신 소설가 양승언이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남도 보성으로 내려가 살면서 그곳 득량만을 터전으로 평생을 살아낸 이웃 사람들 이야기를 쓴 기행소설이다. 이 책이 꽤 읽히며 새롭게 득량을 찾는 사람이 늘자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작가에게 자기 지역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써줄 수 없냐는 제안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또 바로 지난주에는 『사람을 잇다 사람이 있다 삼달다방』(미니멈)을 소개했다. 역시 저자 이상엽 사회활동가가 제주도 삼달리에 마련한 특별한 공간과 그곳을 찾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금이나 쌀이 아무리 귀해도 돈이 있으면 다 살 수 있거든. 근데 물은 돈으로 살 수도 없는 거야. 집에 있는 큰 고무 다라이에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어찌나 마음이 좋던지. 그때 물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나는 지금도 물 함부로 안 쓴대이.” “옛날에는 먹을 게 귀하잖아. 그러니까 어느 집에서 제사하면 늦은 밤까지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여 노는 거야. 그러다 제사가 좀 늦어져서 자정이 넘을라치면 ‘빨리 제사 음식 가져와라’ 성화였지. 그럼 제사 음식을 큰상에 내서 다 같이 먹고 그랬어. 그 정도로 인심이 좋고 재밌었다고.”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 빨래방』은 이렇듯 부산일보 기자 두 명과 피디(PD) 두 명이 산복도로의 한 마을에 ‘공짜 빨래방’을 만들어 들어간 까닭과 과정, 그곳에서 채굴한 ‘사람과 삶 이야기’다. 2022년 1월 신문사에 새롭게 만들어진 디지털 미디어부 2030팀에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임무가 주어졌다. 2030팀 제안으로 5월 빨래방이 문을 연 후 10월까지 6개월간 빨래방장 격인 김준용 팀장과 이상배 기자, 이재화, 김보경 피디 등 네 명이 빨래방을 찾는 주민들로부터 살아온 내력을 듣고, 찍고, 써서 유튜브로 보도했다. 유튜브의 성공기준인 구독자수나 조회수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 언론의 존재 이유와 나아갈 길 제시, 새로운 저널리즘에 대한 도전, 기자와 기레기의 차이를 보여줬다’는 등 호평을 받으면서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을 비롯해 상도 많이 탔다 산복도로는 ‘산허리를 지나는 도로’를 뜻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역 곳곳에 산복도로가 있지만 부산의 산복도로는 특별하다. 해안가 땅은 좁고 뒤는 산으로 가로막힌 부산의 서구, 동구, 영도구 등을 잇는 22km의 이 도로는 부산항 ‘뱃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해변의 자갈치 시장과 함께 부산의 ‘거의 모든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선박 기관장인 남편은 출항하면 2개월이 지나야 집으로 왔다. 집에는 시동생, 시부모님뿐이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건 어머님에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이 시아버지의 임종을 못 지켰을 때는 안타까워 많이 울었다. “뱃사람들은 가족 중대사를 잘 못 챙겨요. 밖에 있으니까.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남편이 한마디 하더라고. 잘 화장해서 보내 드리라고. 아마 많이 울었을 거야.”’ <산복빨래방>은 그 후 주민협의회, 의용소방대 등 여러 주민 단체가 팔을 걷고 나선 덕분에 다시 문을 열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등 사정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제 보니 새삼 그렇다. 부산은 항구다!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日교수 “윤석열 정부는 ‘중국의 패배’에 베팅했다…中에 휘둘리며 길러온 안목” 주장

    日교수 “윤석열 정부는 ‘중국의 패배’에 베팅했다…中에 휘둘리며 길러온 안목” 주장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한국의 대중 감정이 변해 지금은 여야가 경쟁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한반도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기무라 간(57) 고베대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교수가 4일 ‘마침내 한국은 중국의 패배에 베팅했다…중국의 왕조 교체에 휘둘리며 길러진 승자를 알아보는 안목’이란 제목의 칼럼을 뉴스위크 일본판에 기고했다. 기무라 교수는 한국이 긴 세월에 걸쳐 중국에 종속된 역사를 통해 변화를 읽는 능력을 배양해 온 가운데 중국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현실을 감안해 사실상 ‘탈(脫) 중국’을 선택했다는 논지를 폈다. 한중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서 한국의 ‘탈중국 베팅’을 기정사실로 서술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오랫동안 한국을 관찰하고 분석해 온 일본인 학자의 관점인 만큼 원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韓 반응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야당 측의 반응” 기무라 교수는 지난달 8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가진 만찬 자리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해 파문을 불렀던 것을 서두에서 언급했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발단은 싱하이밍 대사의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그 배경에는 대미 관계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불만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노골적인 비판을 받은 윤석열 정부가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는 것까지는 그동안의 외교정책을 고려할 때 이상할 게 없다”면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야당 측의 반응이었다고 강조했다.‘한국내 중국 이미지 악화’와 ‘대북 대화에서 역할 부재’ 등 지적 “한중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에 타협적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중국 정부의 그런 태도가 마땅치는 않다’고 발언하며 서둘러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다. 그 결과 여야 양쪽이 경쟁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기무라 교수는 “그 배경에 한국의 대중 감정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2013년 보수 성향의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에 접근했던 것은 3가지 이유에서였다. 중국에 대한 한국 여론의 높은 친밀감, 대북 대화의 가교 역할에 대한 기대, 또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중국 시장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상승 등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박근혜 정부 말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이뤄졌던 중국의 사실상의 경제 제재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은 다른 나라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북한과의 대화에서도 중국은 가교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박근혜 정부에 이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이었다.”기무라 교수는 “한국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는 2013년을 정점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며 첫 번째 이유로 중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우려한 한국 기업들이 다른 나라로 대외 투자를 분산시킨 것을 들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한때 대외 투자의 40%에 근접했던 중국 직접투자는 현재 10% 이하로 떨어졌다. 두 번째는 중국 경제의 둔화다. 2000년대 연평균 10%를 넘었던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2010년대 들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2020년과 2022년에는 2%대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거 존재했던 ‘다가오는 시대는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기무라 교수는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중국에 대한 인식은 원나라가 명나라에, 명나라가 청나라에 천하를 내준 것처럼 여러 개의 ‘제국’이 서로 경쟁하며 패권을 다투는 도식”이라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변화하는 패권국가들 사이에서 ‘다음 패권국가’를 잘못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고 주장했다.이어 “원·명 교체기에 고려가 선택을 잘못해 멸망하고,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선이 망해가는 명을 지지해 청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패권국가 선택의 오류는 때로 왕조와 국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중국에 대한 냉담한 태도는 그들이 ‘다음 패권국가’로서 중국의 존재에 큰 물음표를 붙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의 중국과 거리를 둔 친미 노선은 우리의 예상보다 이 나라에 더 깊이 뿌리내려가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 [황성기 칼럼] ‘후쿠시마’ 피해는 누가 책임지나 - 현장에서 본 후쿠시마 문제< 4 >/논설고문

    [황성기 칼럼] ‘후쿠시마’ 피해는 누가 책임지나 - 현장에서 본 후쿠시마 문제< 4 >/논설고문

    시마 아케미(53)는 일본 후쿠시마현 인구 5만 5930명 다테(伊達)시 시의원이다. “일개 주부로, 원전 같은 데 신경쓰는 일도, 정치에도 인연이 없었던”(아사히신문 2022년 6월 2일 보도) 시마는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1103표를 얻어 22명 시의원 중 한 명이 됐다. 다테시를 벗어나면 무명이던 시마 의원이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유명인이 된 것은 4월 7일 더불어민주당의 ‘후쿠시마 대응단’ 국회의원 4명과 만난 ‘악연’ 때문이었다. 시마 의원은 대응단과의 간담회에서 후쿠시마 주민 중에 오염처리수 방류에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 한국발 기사를 접한 일본인들 반응은 격렬했다. 시마 의원 트위터에 달린 댓글은 “인구 177만 후쿠시마현의 대표도, 외교관도, 과학자도 아닌 시의원이 풍평(소문에 의한 불안심리)을 논한다”로 요약된다. 시마 의원이 “의원단에 ‘내 개인 의견’이라고 말씀드렸다”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마 의원은 “주위 분들에게 물어봤지만, (방류에) 찬성인 분은 없었다는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했다. 지방지 후쿠시마민보의 3월 후쿠시마 주민 여론조사에선 방류에 대해 ‘찬성’(38.9%), ‘반대’(41.0%)가 엇비슷했다. ‘후쿠시마 사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었던 셈이다. 민주당의 오염처리수 공세는 ‘후쿠시마 대응단’이 일본에 파견돼 가짜뉴스를 생산한 4월 초부터 시작됐다. 한 달이 지나고 당사자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먼저 수산물 소비 위축이 발생한 것은 웃을 수 없는 코미디이자 울 수 없는 비극이다. 6월 초 서울의 한 초밥집에서는 5월 한 달 매상이 지난해에 비해 30% 정도 줄었다고 울상이었다. 초밥집 사장은 경기 침체보다는 괴담이 낳은 불안심리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그는 재료를 사 오는 노량진수산시장의 경매가가 생선에 따라 절반까지 떨어졌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오염처리수 방류 전인데도 국내 수산물 소비가 위축된 것은 민주당의 괴담과 선동에 기인한 바 크다. 2008년 광우병 때는 ‘뇌 송송 구멍 탁’이란 가짜뉴스에 소고기 소비가 줄어 축산 농가가, 2017년 사드 때는 ‘전자레인지 참외’로 성주 참외 농가가 직격탄을 맞았다. 두 사건 모두 민주당과 시민단체가 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안을 부추겨 피해가 발생했다는 유사점이 있다. 미국산 소고기나 사드의 전자파가 유해하다는 반미·친중의 굿판을 벌이며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이 지켜야 할 농민만 애꿎은 피해자로 만든 꼴이 됐다. 하지만 돈만 챙기고 사라지는 ‘떴다방’처럼 누군가 책임지기는커녕 사과도 없이 정치적 이득만 챙기고 떠 버렸다. ‘반일’을 깐 오염수 공세 또한 다르지 않다. 희석된 오염처리수가 태평양을 돌아 우리 해역에 진입하는 것은 4, 5년 뒤다. 방류 전부터 우리 국민들이 생선을 꺼리는 것은 4월부터 민주당이 ‘핵폐수’, ‘핵폐기물 테러’라며 공포를 조장한 결과다. 어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최종 보고서 이후 야당의 화력 집중에 비례해 소비 위축도 정점으로 치달을 것이다. 일본에 가면 마트에 들러 보고 일본인에게도 물어본다. 하지만 한국과 같은 괴담도, 소비 위축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은 무덤덤한데 우리만 과열됐다. 비과학으로 과학을 덮어 과열을 조작해서다. 소비 침체의 피해는 어민, 수산물 유통업·자영업자에게 돌아간다. 회 한 점과 바다를 즐기려는 여행도 줄어들 게 뻔하다. 광우병, 사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천문학적 전국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생업 현장의 아우성, 그 손해는 누가 책임질 건가. 문재인 정권 때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재미 본 민주당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 국민 오염수 피해지원금’이라도 뿌리겠다는 건가. 피해를 만든 장본인이 피해를 보상한다며 특별법을 만드는 자작극을 용납해선 안 된다. 방탄과 총선을 위한 기만극,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역사를 품은 주먹밥, 아란치니/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시칠리아의 역사를 품은 주먹밥, 아란치니/셰프 겸 칼럼니스트

    어떤 음식이 한 지역을 대표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누군가 강요하거나 법으로 정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지역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전승돼 온 음식이 있다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특한 일인지.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아란치니도 그런 음식 중 하나다. 사프란으로 노랗게 물들인 쌀밥에 속 재료를 채워 넣고 바삭하게 튀겨 만드는 일종의 주먹밥이다. 피자나 파스타처럼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아닌데 어째서 국가대표급 위상을 갖게 됐을까.우리나라의 평양냉면이 슬픈 분단의 역사를 품고 있듯, 아란치니는 애환의 시칠리아 역사 일부를 품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시칠리아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놓이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거기다 농사짓기에 좋은 비옥한 땅이 넓었던 탓에 고대부터 숱한 침략을 받아 왔다. 이미 청동기 시대에 선주민이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이 들어와 포도와 올리브, 밀을 심어 척박한 그리스에 물자를 수출하는 식민지로 활용했다. 이후 포에니전쟁 이후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게르만족, 아랍, 노르만족,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된 역사를 갖고 있다. 많은 지배자들 중 오늘날 시칠리아의 문화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건 약 200년간 시칠리아를 통치했던 아랍인들이었다. 예술과 종교, 건축 등 문화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식문화도 그중 하나였다. 밀이 주식인 유럽인들과 달리 아랍인들은 쌀이 주식이었기에 벼농사가 일부 도입됐고 자연히 쌀을 이용한 요리도 전파됐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음식을 먹음직스러운 황금빛으로 물들여 주는 사프란과 달콤한 사탕수수, 오렌지 같은 감귤류 등이 이때 시칠리아로 들어왔다.아란치니에 대한 기록이 아랍 지배 당시부터 있는 건 아니지만 아랍인들의 식문화를 토대로 추정하건대 시칠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아란치니는 지금 모습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프란으로 쌀을 물들여 익힌 후 허브와 각종 향신료를 버무려 구운 고기를 함께 뭉쳐 만든 단순한 주먹밥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요리라기보다는 쌀에 설탕을 넣어 달콤하게 만든 일종의 디저트였다고도 본다. 지금처럼 빵가루를 묻혀 바삭하게 튀겨 먹는 방식은 아랍의 지배로부터 100년이 지난 13세기 신성로마제국이 시칠리아를 지배했을 당시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의 겉에 빵가루를 묻힌 후 기름에 튀기는 건 맛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시엔 음식의 부패를 늦추는, 일종의 보존처리법으로 더 유용했다. 아란치니는 ‘작은 오렌지’라는 뜻인데 빵가루를 입히기 전 사프란으로 물들인 쌀 때문인지, 빵가루를 묻혀 튀겨 놓은 모습과 색이 오렌지를 닮아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란치니는 일본이나 한국의 주먹밥처럼 시칠리아의 농민들이 밭일하러 갈 때 챙겨 가는 새참 역할을 했는데 팔레르모와 같은 큰 도시에서는 도시민들이 빠르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패스트푸드로도 인기가 높았다.전통적인 아란치니엔 속 재료로 라구나 리코타 치즈를 사용한다. 치즈를 한번 만들고 남은 유청을 다시 끓여 만든 리코타 치즈는 저렴하면서 포만감을 주는 서민들의 식재료였고, 고기를 잘게 다져 오랫동안 익혀 만든 라구 소스는 적은 고기로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서민 친화적인 소스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창의적인 요리사들이 아란치니를 변주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시칠리아의 거리에 가면 라구나 치즈뿐만 아니라 해산물, 베샤멜소스, 가지, 견과류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아란치니를 만나 볼 수 있다. 아란치니는 시칠리아를 대표하지만 비슷한 음식이 다른 지역에도 있다. 로마 지역의 식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플리’는 모양만 다를 뿐 영락없는 아란치니다. 아란치니보다 작고 둥글게 네모난 크로켓과 같은 형태로 빚는데 쌀과 토마토 소스, 모차렐라 치즈로 만든다. 나폴리의 ‘팔레 디 리조’는 아예 작은 아란치니 그 자체다. 아란치니 맛의 핵심은 라구 같은 속 재료 소스가 아니라 쌀에 있다. 유럽에서 쌀은 아시아권에서 생각하는 쌀 조리 방식과는 다르다. 아시아에서는 쌀은 큰 조미 없이 익힌 후 맛이 강한 다른 반찬과 곁들이는 역할이지만 유럽에서는 적극적으로 맛을 더해 요리한다. 현대적인 아란치니라면 크리미한 질감의 완벽한 리조토를 만들어 식힌 다음 속 재료를 넣고 튀긴다.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아란치니라고 부를 수 있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단순히 튀긴 주먹밥과는 다른 풍미를 선사해 주니 기꺼이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 [최광숙 칼럼] 빨간 마후라와 켈로부대/대기자

    [최광숙 칼럼] 빨간 마후라와 켈로부대/대기자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 무대인 강릉 공군기지는 6·25 전쟁 당시 공군의 최전방 기지였다. 북한군의 군수물자 수송 요충지인 평양의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 평양 대폭격 작전 등 7800여회나 되는 작전이 수행된 곳이다. 필자는 이곳이 고향이지만 부끄럽게도 2년 전 모교 동창회장을 지낸 80대 후반의 지금은 고인이 된 김미자 선배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당시 강릉여고 1학년이던 그 선배님은 “친구들과 선배들은 수업하다가도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나가 들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서 8㎞쯤 되는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걸어 강릉비행장까지 가서 출격하거나 귀환하는 조종사들을 환송하고 환영했다”고 회고했다. 겨울에는 꽃이 없어 미농지(꽃 만드는 흰 종이)로 꽃을 접었다고 한다. 그는 “전투기 1개 편대 4대가 출격했다가 4대 모두 돌아오면 펄쩍 뛰며 기뻐했지만 가끔 3대만 돌아오는 날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시 국어 시간은 위문 편지를 쓰는 시간이고, 음악 시간은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꿈 많은 여고생들의 일상에 전쟁의 상흔이 파고들었지만, 꽃다발을 주다가 조종사들과 눈이 맞아 나중에 결혼한 동창생들도 꽤 있다며 전장의 로맨스도 소개했다. 빨간 마후라들은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여고생들의 꽃다발과 노래 속에 출격했지만, 전쟁통에 군번도 계급도 없이 국가에 헌신한 이름 없는 용사들도 많다. 북파돼 첩보전을 수행했던 KLO부대(켈로부대)가 그랬다. 첩보활동을 하다 숨진 이들이 많지만 미군 소속인 데다 서로 이름도 모를 정도로 비밀스럽게 활동하다 보니 신원 파악이 안 돼 지난 1993년 뒤늦게 일부 부대원이 정부로부터 참전용사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그러다 최근 켈로부대 출신 이창건(94) 전 한국원자력학회장이 청와대 오찬과 정부 주최 ‘6·25 전쟁 기념행사’에 처음 초청받았다. “KLO가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못 돌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노병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그가 행사에 초대되지 않았다면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숨은 영웅들의 처절한 이야기가 알려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새삼 느꼈다는 이들이 꽤 있다. 탈원전과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정책 등 전 정권 정책의 궤도 수정뿐 아니라 순국선열 등 영웅을 대하는 정부 태도가 180도 달라진 데서 정권 교체를 실감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충원 안장을 거부당했던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재단이 세워지고, 천안함의 최원일 전 함장이 한 단체로부터 ‘호국영웅상’을 받은 것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생활고를 겪던 80대 후반 6·25 참전용사가 부산의 한 마트에서 일곱 차례 반찬 8만원어치를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현재 참전용사 정부 수당은 불과 월 38만원이다. 올해 병장 월급이 100만원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을 정도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당시 보훈처 사무관이던 전직 고위 인사의 얘기다. 박 전 대통령은 참전용사 수당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쌀 한 가마니 값이 얼마냐”고 묻고 “쌀값에 맞춰 더 인상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수당이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지금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훈처가 설립 62년 만에 지난달 보훈부로 승격했다.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다. 부처의 위상 강화보다 더 중요한 건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다. 영웅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대접’하는 나라로 가야 한다.
  • “아베 시대 부정하면 집권은 꿈도 못 꿔”

    “아베 시대 부정하면 집권은 꿈도 못 꿔”

    “현재 기시다 내각은 아베 시대의 전환이 아닌 계승입니다.” 일본 정치·행정학자인 마키하라 이즈루(56) 도쿄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도쿄대 연구실에서 열린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사후 1년 일본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오는 8일이면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를 지냈던 아베 전 총리의 1주기를 맞는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8일 참의원(상원) 선거 유세 중 전직 해상자위대원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베 전 총리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엔화 가치 하락의 근본적 원인인 아베노믹스, 자위대의 존재를 명시하는 내용의 개헌, 방위력 강화 등은 그가 남긴 대표적 정책이다. 마키하라 교수는 “지금도 자민당 내에선 아베 전 총리의 정책 등을 부정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며 “다만 자민당은 서서히 지지를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마키하라 교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호쿠대를 거쳐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교수직을 맡고 있으며 도쿄·아사히신문 등에 일본 정치 비평 칼럼을 쓰고 있다.-아베 전 총리의 존재감이 여전한 것 같다. “그의 영향력이 지금도 강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베노믹스의 부작용으로 엔화 가치 하락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다. 정책을 뒤집으려고 하면 아베 전 총리 지지층으로부터 외면받는다. 기시다 내각도 아베 시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계승할 수밖에 없다.” -일본 국민이 아베 전 총리를 지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많으니까. 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결점이 많다는 게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는 연설도 잘 못했고 영어도 잘하지 않았지만 (총리로서) 완벽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란 면모가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줬다.” -한국에서 아베 전 총리의 이미지는 좋지 않다. “아베 전 총리는 ‘적’을 만들고 이를 이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며 정권을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 일본 내에서는 진보 세력과 입헌민주당, 언론 등을 적으로 삼아 대립하며 정권을 유지해 왔고 자신의 정치를 위해 내셔널리즘을 이용했다. 특히 미국에 집중하고 한국은 적대적으로 대하며 혐한 감정을 동원했다. 물론 문재인 정부도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이를 이용해 지지층을 유지한 것은 비슷하다.” -아베 내각과 기시다 내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베 전 총리는 인터넷 혐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혐한이 반드시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보여 줬다. 한일 관계가 좋아져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오히려 상승하지 않았나. 일본 젊은층은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점을 보면 기시다 총리는 확실히 우파는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하락한다고 해도 30%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민당을 지지하는 골수 지지층이 그만큼 된다는 이야기다. 이 골수 지지층이 아베 전 총리의 우파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아베 전 총리의 영향력이 지금도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민당 내 최대 계파는 여전히 아베파다. 아베 전 총리가 남긴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곧 최대 계파인 아베파와 척지겠다는 의미다. 나와 반대되는 쪽은 적, 적은 곧 야당의 편, 자민당 내에서 반대 세력은 곧 야당의 동료라는 게 아베 전 총리의 구분법이었는데 그런 정치적 유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아베 전 총리 같은 강한 리더십이 일본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인가. “그렇진 않다. 다만 2012년은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의 정권 교체 시기였기 때문에 아베 전 총리가 내세운 ‘싸우는 리더’가 먹혀들어 총리직에 올라 장기 집권했다. 사실 현재 일본은 누가 되더라도 자민당 내 리더를 뽑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파벌의 인정을 받은) 유화적인 사람이 총리가 될 수밖에 없다. 기시다 총리도 각 파벌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다시 총리가 되기 어렵다.” -기시다 총리의 장기 집권은 가능한가. “기시다 총리는 무엇을 하겠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결단력이 부족하다. 대대적으로 내세운 저출산 대책은 사실 아베 전 총리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 코로나19 등의 위기를 기시다 총리가 어느 정도 방어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포스트 기시다’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시다 총리가 직을 더 이어 갈 가능성이 있다. 경쟁자인 고노 다로 디지털상은 마이넘버카드(일본식 주민등록증) 오류 문제로 흠집이 났다.” -기시다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를 수 있을까. “중의원 임기의 절반도 지나지 않아 ‘명분’이 없다. 기시다 내각에 위기를 낳을 만한 문제들도 남아 있다. 마이넘버카드 문제도 그렇고 저출산 대책과 방위비 증액을 위한 ‘증세’가 대표적이다. 자민당은 증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금 문제에 극도로 예민한 일본 국민은 자민당이 거짓말을 한다는 불신이 크다.”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러도 자민당에 승산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정권 교체가 쉽지는 않겠지만 자민당 의석수는 서서히 줄고 있다. 일본유신회가 득세하는 것은 자민당에 지친 지지층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까’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가진 일본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 [특파원 칼럼] ‘더 데이스’가 보여준 오염수 현실/김진아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더 데이스’가 보여준 오염수 현실/김진아 도쿄 특파원

    지지난주 한국에서 논란이 된 넷플릭스 ‘더 데이스’(THE DAYS)를 봤다. 넷플릭스 가입 설정이 일본으로 돼 있어서 한국에서는 오는 20일에야 볼 수 있는 이 드라마를 일본에서는 문제없이 볼 수 있었다. 8화로 구성된 이 작품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가 쓰나미의 영향을 받은 상황을 실감 나게 그렸다. 하지만 1호기 등이 폭발하면서 방사능 유출을 수습하려 나선 현장 직원들과 무능한 정부의 갈등 등은 지루하게 묘사됐다. 일본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작품은 오락적인 면에서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면 감상할 의미가 있다. 원전 폭발 이후 취재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대지진 발생 후 어떻게 방사능 오염수가 만들어지게 됐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 데이스에서 가장 긴장감 있게 연출된 장면은 도쿄전력 직원들이 원전 내부에 들어가 사태를 수습하려고 할 때마다 방사능 선량계 수치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삑’ 하는 소리가 들릴 때다. 선량계 수치가 올라갈 때의 공포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4월 오염수 방류 시설을 취재하기 위해 후쿠시마 제1원전을 방문했을 때 이곳은 아직 사고 수습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다. 현재진행형이란 현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시 방문한 제1원전 내 이동 차량에서도 가장 폭발이 심했던 1호기에 가까워질수록 선량계의 수치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3시간 남짓한 취재 후 당시 피폭된 정도는 엑스레이 검사 수준에 그쳤다. 더 데이스는 8화로 끝났지만 동일본대지진의 후유증과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마지막 8화 해설에서 ‘폐로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후쿠시마현 어민 등에게 이 폐로 작업을 위해서라도 오염수 방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폐로 작업을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오염수를 모아 둔 탱크를 처분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폐로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는 다시 말해 폐로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오염수는 계속 만들어지고 오염수 방류는 폐로 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계획은 한국에서 막기 어려운 문제다.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의지는 강경하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이번 주 일본을 방문한 뒤 한국을 찾아 직접 방류 계획의 안전성을 설명할 계획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때다. 오염수는 한 번 방류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피해를 끼칠 일본을 상대로 후쿠시마산 식품 수입 금지 조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나라 어민 피해 발생 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지 등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더 데이스가 보여 줬듯이 후쿠시마 제1원전이 폐로가 되지 않는 한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겪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 “푸틴, 프리고진 반란 당시 요트 타고 축제 관람” 러 독립언론

    “푸틴, 프리고진 반란 당시 요트 타고 축제 관람” 러 독립언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무장반란이 있던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요트를 타고 붉은 돛 축제를 보고 있었다고 러시아 독립매체 언론인들이 주장했다. 붉은 돛 축제는 매년 6월 말쯤 이 도시에서 열리는 졸업 축제로,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 붉은 돛을 단 배가 등장하고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다. 1일(현지시간) 러시아 독립언론 노바야가제타 유럽에 따르면, 러시아 언론인 미하일 지가르는 전날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푸틴 대통령은 고향에서 열리는 동문 졸업 파티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며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수하들과 함께 무장반란을 일으켰던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썼다. 러시아 최초의 독립TV 채널인 도즈드 창립 편집장을 지내고, 푸틴 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내다가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흘째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떠난 지가르는 이번 기고문에서 푸틴 대통령은 그의 친구이자 억만장자 사업가로 ‘푸틴의 은행가’로 불리는 유리 코발추크 소유의 요트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붉은 돛 축제를 감상했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관료와 행정관, 언론인, 사업가 등 소식통들은 푸틴의 이같은 모습은 그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라고 말한다. 자가르는 “그(푸틴 대통령)는 여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으며 프리고진의 반란이 정치적 상황에 어떤 식으로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며 “내가 대화한 많은 사람들은 푸틴의 통치 체제는 더는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언론인 율리아 타라투타도 토즈드 TV의 칼럼에서 이같은 상황에 정통한 소식통들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이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타라투타는 푸틴 대통령이 이날 행사에서 서방 제재로 이탈리아에서 압수당한 셰헤라자데라는 요트를 대신할 새로운 요트를 선물 받았다며 “코발추크가 푸틴을 위해 개인적으로 선물을 준비했다”고 상황에 정통한 소식통들을 인용해 말했다. 이어 그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도, 프리고진의 반란도, (바그너그룹이 접수한) 로스토프나도누와 보로네즈의 공격도, (푸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을) 방해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러시아 독립매체 ‘바즈니예 이스토리’와 ‘프로엑트’는 푸틴 전용기 2기가 24일 오후 2시16분과 6시43분 각각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서 이륙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 트베리 상공에서 레이더상에서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기체 내 위치 송신기를 끈 것이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러시아 국영 리아보보스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에서 집무를 보고 있다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국가 원수가 붉은 돛 축제에 갈 계획은 없다고 강조했다.푸틴 대통령의 전용기 2기는 다음 날인 25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고 프로엑트는 전했다. 플라이트레이더24 데이터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13분 전용기 한 기가 트베리 상공에서 레이더를 켜고 30여분 뒤인 1시50분 모스크바에 착륙했다. 이후 또 다른 전용기가 같은 날 오전 2시쯤 트베리 상공에서 레이더상에 나타났고 15분간 모스크바로 향하다가 인근 체호프 상공을 배회하다가 3시43분 모스크바 공항에 착륙했다.
  • ‘전술핵 재배치’ 주장해온 통일장관 후보[외통(外統) 비하인드]

    ‘전술핵 재배치’ 주장해온 통일장관 후보[외통(外統) 비하인드]

    서울신문이 외교 안보 분야에서 한 주간 가장 중요한 뉴스의 포인트를 짚는 [외통(外統) 비하인드]를 매주 금요일 선보입니다. 국익과 국익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외교·통일·안보 정책이 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을 담겠습니다. “전술핵을 재반입하면 공포의 균형이 만들어져 오히려 한반도가 더 안정적이 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두번째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문화일보 칼럼에서 한 주장입니다. 미국 핵우산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1991년 철수한 주한미군의 전술핵을 다시 한국에 배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정부는 전술핵 재배치가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해온 김 교수가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지명되면서 향후 미칠 파장에 관심이 모입니다. 김 후보자의 전술핵 재배치 소신은 최근까지도 드러납니다.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 직후엔 유튜브채널에서 “미국이 워싱턴 선언에 담긴 획기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지 않는다면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독자 핵무장 관련 여론이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핵협의그룹(NCG) 창설과 핵잠수함의 정기적 전개 등을 골자로 한 워싱턴선언 이후에도 전술핵무기 재배치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여전히 강조한 것으로 읽힙니다. 만약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려면 1991년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를 파기해야 합니다. 전술핵 재배치는 국방정책의 영역이지만 통일부와도 완전히 무관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전술핵 재배치는 정부나 미국정부의 공식입장과도 배치됩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한 포럼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은 그것과 배치된다”고 했습니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도 지난 3월 “우리의 현재 정책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그것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김 후보자가 정부 입장과는 다른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해온 것과 함께 ‘북한체제파괴’나 ‘김정은 정권 타도’와 같은 대북 강경 발언을 한 사실이 맞물리면서 적격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광온 원내대표는 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김 후보자를 향해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의 파기를 주장하고, 6·15 남북선언, 판문점 선언 등을 부정하는 극우적 시각과 적대적 통일관을 가졌다”며 “통일부 장관에 부적격”이라고 했습니다. 자칫 충돌로 이어질 있는 군사적 긴장 고조를 피하고 평화 통일을 추구해야하는 통일부 장관에 적합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반면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상황에서 이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일각의 시각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도 있습니다. 실제 김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한다면 전술핵 재배치 소신이 실제 정책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두고봐야할 일입니다. 학자로서 견해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전부를 정책으로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김 후보자는 이날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한 사무실이 있는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흡수통일에 가까운 통일방안을 주장해왔다’는 지적에 “정책은 현실 여건을 많이 고려해야 한다. 강압적인 흡수통일은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있지 않다”며 정책이 학자로서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김 후보자가 임명된다면 통일부의 역할은 크게 바뀔 전망입니다. 김 후보자는 이날 “통일부가 앞으로 원칙이 있는 가치지향적인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며 “우리가 변화된 상황에서는 남북 간 합의라든지 이런 것들을 선별적으로 고려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 [김균미 칼럼] ‘킬러 문항’ 논란, 여야 정직하지 못하다/논설고문

    [김균미 칼럼] ‘킬러 문항’ 논란, 여야 정직하지 못하다/논설고문

    줄넘기까지 학원에서 과외를 받는다는 초등학생 얘기는 서울 강남 학원에 ‘초등 의대 입시반’이 등장했다는 뉴스에 밀려 더이상 놀랍지도 않다. 사교육을 비롯해 우리 교육 문제는 대학입시로 수렴된다. 이른바 명문대와 의대 등의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학부모의 불안을 겨냥한 ‘사교육 마케팅’은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실제로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학습하는 초등학생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사교육비 총액은 26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교육비와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을 포함한 입시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하면서 ‘킬러 문항 논란’이 거세다.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교육부는 후속 대책으로 지난 21일 ‘공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에 이어 26일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킬러 문항의 사례를 제시하며 수험생과 학부모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이 부총리는 “역대 정부를 막론하고 공교육 과정 내 수능 출제가 기본 원칙이었다”면서도 “손쉽게 변별력을 확보하려고 전문가와 공급자 입장에서 수능에 킬러 문항을 출제한 점을 반성한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킬러 문항 사례들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는 안심하라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수험생과 학부모 불안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수능에서 ‘킬러 문항 배제’ 지시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수능까지 5개월이나 남았고, 킬러 문항도 빠졌는데 뭐가 문제냐고 한다면 이 역시 수험생과는 동떨어진 공급자의 입장이다. 킬러 문항 배제는 수능 정상화를 넘어 교육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치권도 ‘킬러 문항 배제 논란’에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최악의 교육 참사”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근 최고위원회의에서 “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교육 현장이 아수라장과 쑥대밭이 됐다”며 “지금 대한민국 교육의 최대 리스크는 윤 대통령”이라고 했다. 하지만 킬러 문항 배제는 이 대표의 대선 공약이었고, 킬러 문항 방지법은 야당 의원이 발의한 상태다. 발표 시기를 문제 삼는 건 몰라도 수험생과 학부모 혼란을 가중시키는 발언과 정치적 공방은 자제해야 한다. 수능과 대입 체제뿐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개혁에 대한 논의를 여당에 제안하는 것이 거대 야당 대표에게 보다 걸맞은 대응이다. 여당인 국민의힘 역시 킬러 문항 배제만으로 수능과 사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당은 대통령이 화두를 던진 만큼 공교육 정상화를 포함한 교육개혁 논의로 이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교육 문제는 복잡하다. 사교육비 부담은 저출생 문제와 직결돼 있다.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를 해결하지 않고는 교육을 혁신할 수 없다. 직업별·직종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격차가 줄어야 대학 입시에 모든 걸 거는 비정상이 정상화될 수 있다. 교육 전문가의 제언 봇물 속에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인터뷰가 눈길을 잡는다. “킬러 문항과 사교육 문제의 심각성은 여야, 보수ㆍ진보 모두 공감하는 문제”, “야당도 정치적 공방 소재로 삼기보다 차분하게 교육개혁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주장과 어른 세대의 책임이라는 자기 반성에 공감한다. 여야는 말꼬리나 잡지 말고 누가 집권하든 바뀌지 않을 장기적 교육개혁안을 국가교육위원회와 논의해 나가야 한다.
  • [열린세상] 지식의 혼돈/박준영 변호사

    [열린세상] 지식의 혼돈/박준영 변호사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식이 사회의 공공재로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 그 사회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지표가 없는 것과 같다. 상반되는 주장이 대립되는 경우 그 시비를 가릴 준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식에 대한 불신을 낳고 다시 지식 자체에 대한 회의로 굳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식사회의 총체적 혼란이며 지적 공동화다. 신영복 선생이 22년 전 쓴 칼럼의 일부다(2001년 9월 21일 중앙일보 ‘지식의 혼돈’). 오늘날 지식사회의 혼란은 더 커진 모양새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이 불신받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9주기를 맞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한 ‘공인된 설명’을 정립하지 못했다. 참 답답하다. 침몰 원인과 관련해 무리한 증개축, 화물 과적, 화물의 부실 고박, 복원성 불량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이른바 ‘내인설’과 잠수함 등 외부 충격의 영향으로 침몰했다는 ‘외인설’이 대립하고 있다. 2017년 3월부터 1년 4개월간 활동한 세월호 선체 조사위원회는 의결 과정에서 과반 의결인데 위원 2명이 기피 또는 기권했다고 한다. 나머지 6명이 내인설과 외인설을 놓고 표결했는데 3대3으로 나왔다. 지난해 6월 침몰 원인을 3년 6개월간 조사해 온 사회적 참사 특별위원회도 ‘외력 충돌’을 주장하는 진상규명국과 ‘증명이 부족하다’는 전원위원회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진통이 계속됐다. 결국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외력의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다. 서로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애매모호한 결론이 최선이었을까. 과학적 판단보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우선한 결과가 아니길 바란다. ‘PD수첩’은 2008년 4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라는 제목으로 그 무렵 우리 사회를 매우 시끄럽게 한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는 “한국인 중 약 94%가 MM형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섭취할 경우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확률이 약 94%에 이른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았다. 이 보도의 과학적 근거는 영국에서 발병한 인간광우병 환자 13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였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9인의 대법관(다수 의견)은 보도의 근거로 내세우는 과학적 증거만으로 인간광우병과 유전자 사이에는 일반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적 사실의 진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보아야 한다며 ‘단정적 보도는 허위’라고 판단했다. 반면 3인의 대법관(소수 의견)은 다르게 판단했다. 보도에서 한국인에게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확률이 94%라거나 영국인의 약 3배, 미국인의 약 2배에 이른다는 부분은 사소한 오류가 있거나 수치를 다소 과장한 정도에 불과하며, 보도가 근거로 한 MM형 유전자와 인간광우병 발병 사이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면 보도의 핵심 내용인 한국인이 유전자 특성상 인간광우병에 취약하다는 부분은 허위라고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소수 의견을 낸 3인은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던 대법관들이다.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웠을까. 과학적 판단에 보수와 진보가 나뉘고 있는 현실에서 논쟁의 배경을 의심하게 된다. 정보 접근이 쉽고 빠른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사진과 영상 등 이미지에 근거한 사고방식은 복잡한 사고를 기피하게 하는 것 같다. 요즘 내 모습이다. 복잡하고 귀찮아도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사고를 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내 스스로를 가두는, 때로 누군가를 갇히게 하는 ‘프레임’에 대해 생각한다.
  • 세상을 읽는 새로운 시선…독자 여러분 찾아갑니다

    세상을 읽는 새로운 시선…독자 여러분 찾아갑니다

    거짓 정보와 가짜뉴스가 범람하면서 갈수록 세상 읽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객관적 사실과 다양한 관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혼돈의 시대, 세상을 읽는 안목을 보다 높여 줄 새 필진 14명이 새달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분야별 학계 인사와 전현직 관료 등 정책 전문가 120여명이 참여한 사단법인 K정책플랫폼(이사장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 원장 박진 KDI 교수·정태용 연세대 교수)이 월 1회 노동개혁 등 각 국정 현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탁월한 분석과 견해를 찬반 토론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유재웅(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을지대 교수와 양성일(전 보건복지부 차관) 고려대 특임교수 등 관료 출신 교수와 고학수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 김형배 한국거래조정원장 등 현직 기관장,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 이종수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김보름 한성대 문학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장남원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홍용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별아 소설가, 최여정 작가 등도 참여해 외교안보에서부터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걸쳐 풍성한 시선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울러 서울신문 3040 기자들이 쓰는 젊은 현장 칼럼 ‘서울 on’도 신설합니다. 명쾌하면서도 다양한 시각을 담아 한 걸음 더 독자 여러분 곁에 다가서겠습니다.
  • [황수정 칼럼] 고은은 되고 오정희는 안 된다는 패권주의/수석논설위원

    [황수정 칼럼] 고은은 되고 오정희는 안 된다는 패권주의/수석논설위원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일에 맞춰 원로 시인에게 신문에 실을 시론을 부탁했다. 새 대통령에게 당부하는 의례적 글이었다. 세상이 다 아는 시인의 거절 이유는 뜻밖이었다. “쓰고는 싶지만 두고두고 정치적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였다. ‘두고두고’라니. ‘정치적 오해’라니. 팔순 넘은 시인이 세평을 의식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정치적 오해의 실체였다. 대체 그게 뭐기에 팔순 넘은 원로를 쩔쩔매게 하나. 지난 18일 막을 내린 서울국제도서전은 소설가 오정희 논란으로 파행했다. 겨우 나흘짜리 행사가 블랙리스트 시비로 끓다 반쪽짜리로 끝났다. 홍보대사로 위촉된 오 작가가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에 연루됐다는 시비가 불거졌다. 한국작가회의를 위시한 문화예술 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오 작가는 중도사퇴했다. 행사를 주최한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는 공개 사과도 했다. 사과의 내용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진실에 기반한 책임자 규명과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시간이 멈춰 블랙리스트가 진행형인 착각이 들었다. 해외 바이어들에게 우리 책 한 권이라도 더 소개하는 것이 출협의 본업이었다. 명색이 국제행사에서 문화단체들을 달래느라 출협은 진을 뺐다. 박근혜 정부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통해 문인들에게 지원금을 줬다. 그 작업이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되는 얼개였고 오 작가는 소속 위원이었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총력을 쏟아 조사했던 결과를 확인해 봤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2-4권의 62쪽에 14줄짜리 결론이 있다. ‘(오 작가가) 블랙리스트 실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관련 진술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는 결론 뒤에 ‘적어도 블랙리스트에 대해 인지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증거는 없으나 정황상 알고는 있었을 거라는 추론이다. 백서 이후 문 정부의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그를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했다. 문화계 반발로 결국 해촉됐으나 도 전 장관도 그를 결격 인사로 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오 작가를 변명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문제는 그의 파문이 지난해 원로 시인의 그 변명을 새삼 복기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정권에 닿았다는 정치적 오해가 평생의 문업(文業)을 흔들 수 있다는 것. 두고두고 설 땅이 없다는 것. “두고두고 정치적 오해”의 결절들을 현실로 목도하는 중이다. 오 작가가 진보정권의 문화단체에서 뭐라도 맡았어도 이랬을까. 적어도 “부역자”라는 어마무시한 죄목으로 공격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정희 반대를 주도한 한국작가회의는 문화계 대표적 진보단체다. 그런데 지난 1월 고은 시인의 복귀에는 입도 떼지 않았다. 성추행 논란 5년 만에 고 시인의 신작을 낸 실천문학사는 한국작가회의가 계간지를 발간하는 곳이다. 고 시인은 작가회의 상임고문이었고 그 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때부터 터줏대감이었다. 내편 네편을 가르는 선택적 침묵과 이념편향의 공격. AI가 시를 쓰는 시대에 문단의 상투를 쥔 사람들은 아직도 진영 논리의 껍데기 안에서 헛심을 쓰고 있다. 독일의 문학 거장 토마스 만은 히틀러를 고발하는 순회연설을 하면서도 괴로워했다. “예술가가 정치적 도덕군자연하는 모습이 우습다”고 자괴했다. 문학을 위해 고립된 세계시민으로 남고 싶어 했다. 하물며 히틀러 시대를 살던 대문호도 그런 고뇌를 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작가의 뿌리마저 흔드는 것은 문단의 자해다. 안 그래도 과작(寡作)의 작가인 ‘소설가들의 소설가’ 오정희를 이제 그만 놓아주라. 심판은 독자들이 한다. 시인이라면 시 한 줄, 소설가라면 소설 한 줄 더 쓰는 것. 예술이 세계를 개선하는 본래의 방식 아닌가.
  • [최보기의 책보기] 풀꽃은 어린이와 신이 주신 선물 같은 문장

    [최보기의 책보기] 풀꽃은 어린이와 신이 주신 선물 같은 문장

    운 좋게도 집 바로 옆에 아담한 공원이 있다. 둘레를 따라 한 바퀴 걷는데 10분이 채 안 걸리지만 시청에서 계획적으로 조성해 관리하는 터라 초목이 다양해 봄부터 가을까지 꽃들의 향연이 계속된다. 풀꽃은 둘로 나뉘는데 시청에서 애써 심은 것들이 있고, 자연적으로 번식해 자라는 것들이 있다. 전자가 주로 화단에서 질서정연하게 자란다면 후자는 나무 밑이나 잔디밭, 풀밭, 길섶 등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야생화들이다. 공원과 계절을 압도하는 꽃은 당연히 야생화인데 꽃다지, 꽃마리, 괭이밥, 꼭두서니, 애기똥풀, 민들레, 냉이, 봄망초, 개망초, 토끼풀, 씀바귀, 고들빼기, 괭이밥, 두메부추, 패랭이, 초롱꽃, 메꽃, 금계국, 달개비, 원추리, 달맞이꽃, 산수국, 비비추, 참나리, 옥잠화까지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이름도 하나같이 예쁜 우리 꽃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도처에 피는 꽃들을 볼 때마다 ‘그냥 풀꽃’으로 이름이 같았다. 그러다 하나하나 이름을 알아보려 애를 썼는데 좁쌀만한 꽃부터 손바닥만한 꽃까지 제 이름이 없는 꽃은 없었다. 이름을 알고, 부르면서 바라보는 꽃은 ‘그냥 풀꽃’으로 봤을 때와 그 감상의 맛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름’이 분명했다. 아!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과 평생을 지낸 ‘국민 풀꽃 시인 나태주 선생님’에게도 “어느 날 문득 「풀꽃」 시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준 선물이자 신이 주신 문장이다. ‘너’를 ‘나’로 고쳐 쓰면 아무것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만큼 ‘너’가 중요하다. ‘나’만 바라보며 살 것이 아니라 ‘너’를 깊이 바라보는” 자비와 배려를 번식하는 풀꽃씨를 온 나라에 뿌리게 됐다. 그 씨앗들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나’ 아닌 ‘너’를 위한 풀꽃을 가득 피웠으면 하는 바램이 더욱 간절한 요즘이다. 사람도, 사회도, 교육도, 정치도, 국가도. 풀꽃1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특파원 칼럼] 아직은 쉽지 않은 선택 ‘탈중국’/류지영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아직은 쉽지 않은 선택 ‘탈중국’/류지영 베이징 특파원

    윤석열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을 계기로 미중 전략경쟁 상황에서 베트남의 지정학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미 백악관 회동으로 인도의 잠재력도 각광받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포스트 차이나’ 전진 기지로 베트남과 인도에 주목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친해진 한인 국제변호사는 서울을 찾을 때마다 대기업 임원들의 러브콜을 받는다. 중국의 신산업 동향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의 식사 약속이 쇄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단다. “더는 중국에 관심 없으니 밥만 먹자”거나 “돈 적게 벌어도 (중국이 아닌) 마음 편한 나라에 투자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기업인들의 싸늘한 태도를 전해 들으며 착잡한 마음이 크다. 최근 기자는 ‘탈중국’ 현실을 확인하고자 한국 기업들이 모여 있는 톈진을 찾았다. 우리 기업인들은 중국 내 혐한 정서에도 소비자들의 신뢰를 지키고자 애쓰고 있었다. 글로벌 가전 브랜드에 핵심 부품을 납품하는 국내 중견기업의 현지 법인 대표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중국의 계속되는 임금 상승과 미국의 첨단기술 제재에 불안감을 느껴 수년 전부터 새로운 제조국을 물색하고 있다고 했다. 베트남과 인도를 각각 10번 이상 찾았지만 그의 결론은 ‘중국을 대신할 국가는 아직 없다’는 불편한 진실뿐이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두 나라는 공급망 생태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상대적으로 베트남이 조금 나은 편인데, 공장 부지까지 도로나 전력 시설은 마련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원재료와 부품을 공급할 협력업체들은 공장 후보지에서 모두 2~3시간 거리에 있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부품을 구해 대전에서 공장을 돌리는 격이다. ‘베트남 이전’은 이런 기업들을 한자리로 불러 모을 만한 능력이 있는 애플이나 삼성 정도 되는 대기업에 가능한 선택지라는 설명이다. 인도는 한술 더 떠 현지 정부가 추천한 공장 부지에도 도로나 전기가 없는 곳이 태반이란다. ‘당신들이 알아서 당국을 설득해 도로를 깔고 전기도 연결한 뒤 사업을 시작하라’는 주문이다. 그는 양국의 현실을 설명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에다 “두 나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대표는 혀를 찼다. 뇌물 문화로는 중국도 빠지지 않지만, 그래도 시진핑 국가주석이 10년 넘게 ‘부패와의 전쟁’을 이어 오면서 공무원들의 뒷거래 요구는 대부분 사라졌다. 중국을 떠나려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모색할수록 역설적으로 중국이 ‘개도국 최고의 제조기지’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중국 내 커지는 여러 어려움에도 “최소 10년 이내에 이 나라를 떠나기 힘들 것 같다”고 내다봤다. ‘차이나 리스크’가 한국 경제의 핵심 상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무조건 탈중국’이 근본 해법은 아닌 듯하다. 중국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바라보면 ‘게도 구럭도 다 잃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시기다.
  • 도시의 성장은 농촌 희생 없인 불가능했을 일… ‘연대의 책임감’ 공간을 살린다[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도시의 성장은 농촌 희생 없인 불가능했을 일… ‘연대의 책임감’ 공간을 살린다[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영국의 농촌 풍경은 한마디로 ‘환상적’이다. 끝도 없어 펼쳐지는 초원이 부드러운 지평선을 만들고, 그곳에서 양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하지만 목장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낭만에 젖어 들진 마시라. 영국의 목장엔 파란만장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민초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이 녹아 있다. 또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투쟁, 농촌의 변화가 촉발한 도시 변화의 역사가 각인돼 있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약탈뿐만 아니라 영국 산업혁명이 촉발된 곳으로서의 흔적도 묻어 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 성장의 이면엔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쌀값을 인위적으로 낮춘 1960~1970년대의 ‘저곡가 정책’은 농촌 붕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지만 도시 내 인력 공급을 통해 산업화를 촉진하는 기반이 됐다. 지난 칼럼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산업이 변화하면 일자리가 변하고 이는 공간에도 영향을 준다. 농업이 뜰 때는 농업에 맞는 공간이, 제조업이 뜰 때는 제조업에 적합한 공간이 번성한다. 공간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바로 일자리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지역은 사람을 밀어내고, 일자리가 생기는 곳은 낯선 이들을 끌어들인다. 산업구조 변화와 일자리의 변화 그리고 공간의 변화에 대한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가 존재하는 곳은 바로 영국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산업혁명을 전후로 영국 농촌의 변화와 도시 성장의 관계를 소개하려 한다. 영국의 예는 풍요로운 우리 사회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반추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양들이 사나워지고 마침내 인간들마저 집어삼킬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4세기엔 영국 지주들의 땅이 프랑스에도 걸쳐 있었는데, 여기엔 모직공업의 중심지인 ‘플랑드르’도 포함돼 있었다(현재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다). 플랑드르엔 모직물 제조 기술자가 많았다. 이들은 영국 본토에서 양털을 값싸게 공급받아 모직물을 만들어 다시 영국 본토에 비싼 값에 팔았다. 14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넘게 지리멸렬한 전쟁을 벌였다.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영국이 더이상 플랑드르에 양털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의 기술자가 영국으로 대거 넘어왔다. 영국은 해외에 모직물을 내다 팔았다. 품질 좋은 영국 모직물은 금세 소문이 났다. 15세기 말 양털에 대한 수요가 더욱 커졌고 영국은 모직물 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양털 가격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돈 냄새를 가장 빨리 맡은 사람은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양을 키우면 돈이 된다는 걸 간파했다. 이해타산이 빠른 지주들은 농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소작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살던 농민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일부 지주는 농민들이 이용하던 공유지에도 울타리를 치고 자기 땅이라고 우겼다. 이게 16세기 초에서 17세기 중반에 걸쳐 일어난 1차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다. 울타리가 쳐진 목장에선 많은 사람이 일할 필요가 없었다. 10명이 일하던 농경지가 목장으로 변하면서 1명의 양치기만 필요해졌다. 지주들은 떼돈을 벌었다. 토머스 모어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1516)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양들은 온순하고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가 듣기로 양들이 사나워지고 게걸스러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인간들마저 집어삼킬 정도라고 합니다. … 욕망에 굶주린 대식가 한 명이 땅 몇천 평을 울타리 하나로 둘러치고 농부들을 몰아낸 형국으로 혹독한 국가적 역병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농부들 가운데는 속임수나 혹은 강압에 의해 그들 소유의 토지에서 쫓겨났으며, 일부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땅을 팔고 떠났습니다.”(토머스 모어(김남우 역) ‘유토피아’ 중) 지주의 횡포에 농민들은 분노했다. 1549년 7월엔 로버트 케트가 이끈 농민군이 봉기했다. 이들은 지주가 둘러친 울타리를 파괴했다. 이 난을 주도했던 케트는 두 달 만에 붙잡혔고 런던탑에서 처형됐다. 몰락한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도시엔 집도 일자리도 부족했다. 도둑과 거지가 넘쳐났다. 영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도시 빈민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1601년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통해 빈민의 구제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이 만들어졌다. 빈민을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 빈민 아동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노동할 수 있는 이들은 일을 하게끔 도왔고 노인, 장애인 등 일할 수 없는 이들은 ‘구빈원’에 수용했다. 농민의 희생이 커질수록 지주의 부도 커졌다. 다수의 빈민이 발생하자 국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한 빈민 정책을 폈다.●극단까지 내몰렸던 노동자의 삶,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바뀌어 독자들도 잘 알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도시는 ‘격동’ 그 자체였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증기기관이 가장 먼저 쓰인 곳은 다름 아닌 ‘방적기’다. 당시 모직물은 면직물로 대체되고 있었다. 기계가 면을 뽑아내기 전까지는 집마다 조그만 기계를 놓고 실을 뽑는 ‘가내수공업’이 대세였다. 당시 면을 뽑기 위해서는 손으로 물레를 돌려야 했다. 사람이 물레를 돌리니 상품의 질도 균일하지 않았다. 1764년 ‘하그리브스’가 아내의 이름을 딴 ‘제니 방적기’를 만들었는데, 이 기계는 한 번에 8가닥의 실을 뽑아냈다. 1768년엔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가 등장했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 특허권을 냈고, 1779년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장점을 이용한 뮬 방적기가 개발됐다. 인도에서 쓰이던 전통적인 방적기는 면화 45kg을 가공하는 데 5만 시간이나 소요됐다고 한다. 뮬 방적기는 이걸 2000시간으로 줄였다. 뮬 방적기에 증기기관이 결합될 경우에는 작업 시간이 300시간으로 줄었다.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계 덕분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공장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일할 사람도 필요했다.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공급될 수 있었을까. 산업화와 맞물려 진행된 ‘2차 인클로저 운동’은 도시 내 공장에 인력을 공급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지주들은 이곳저곳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 지주들은 자그마한 땅, 그러니까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땅뙈기’를 강제로 통합하거나 맞교환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대부분은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몰락한 농민의 도시 유입이 이어졌다. 도시에 빈민이 넘쳐나니 인클로저 운동에 제재를 가할 법도 했지만 영국은 오히려 그 반대로 나갔다. 인클로저 운동은 의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의회 구성원 대부분이 귀족이나 지주였기 때문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더욱 체계화되고 공식화됐다. 국가가 농민들의 희생을 묵인한 것이다. 도시에 일할 사람이 차고 넘치니 임금이 낮아졌다.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에 16시간 정도를 일했다. 이제는 방직기계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식이 커졌다. 노동자들은 밤에 몰래 공장에 들어가 망치로 기계를 때려 부쉈다. 19세기 초 요크셔, 랭커셔 등 양모산업 중심지로부터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은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다급해진 정부도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1802년 공장법이 도입됐다. 이 공장법은 1833년까지 여러 차례 개정됐다. 노동시간은 최대 12시간으로 제한됐고,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야간노동이 금지됐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았는가. 지주의 횡포에 일자리를 잃고 떠도는 농민이 사회문제화되자 정부가 나섰다. 이번엔 공장주는 산업의 변화를 이용해 권력 집단으로 부상했고, 노동자들은 사회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취급됐다. 국가는 사후 대책으로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내놓았다. 공장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건 아니다. ‘생의 극단까지 내몰렸던 노동자의 삶’이 딱 죽지 않을 만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830년대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당시 런던 빈민의 비참했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 집단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집단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허구생 ‘빈곤의 역사, 복지의 역사’ 중). 공간도 마찬가지다. 한 공간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공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증기기관은 교통의 발달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도시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829년엔 맨체스터에서 생산된 면을 리버풀까지 옮기기 위해 50㎞에 이르는 철도가 개설됐다.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철도를 통해 무거운 화물을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차로 인해 도시는 농촌인구를 더 강하게 빨아들이는 빨판까지 갖추게 됐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물건을 파는 상인이 모여들었다. 음식점과 호텔도 늘었다. 1850년 정도엔 런던에 런던 브리지역, 유스턴역, 패딩턴역, 킹스크로스역, 비숍스게이트역, 세인트판크라스역, 워털루역 등 7개의 종점역이 생겼다. 런던 지하철은 1863년에 개통됐다. 19세기 중반 런던은 가장 큰 인구 흡입력을 가진 대도시로 떠올랐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영국의 도시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말부터 전기에너지 기반의 대량생산이 대세가 됐고 이는 공장의 자동화를 더욱 촉진했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은 화물차의 보급을 확대했다. 생산성이 폭증했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넓은 토지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필요했다. 기업의 생산 활동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서 도시가 팽창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컴퓨터, 인터넷, 반도체로 대변되는 3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입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맞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의 흐름보다 중소도시에서 대도시로 이동하는 인구의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융복합 산업의 대도시 입지 선호가 강해지면서 ‘농촌 대 도시’의 구도가 ‘중소도시 대 대도시’의 구도로 바뀌고 있다. 영국도 런던권 쏠림으로 인한 지역 격차 확대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나라도 시기만 다를 뿐 영국과 유사한 과정을 밟아 왔다. 영국의 농촌에서 공급된 인력이 영국의 산업화를 촉진하는 동인이 됐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1960년대 산업화 과정 속에서 농촌의 젊은이가 도시로 대규모 유입됐다. 이들은 제조업을 성장시키는 주역이 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산업단지가 도시 외곽에 지어지는 과정에서 도시는 계속 팽창했다. 1990년대 초부터 컴퓨터와 정보화 기반 산업들이 성장했고, 이는 도시 외곽뿐만 아니라 도시 내 정보기술(IT) 기업 일자리를 증가시켰다. 2010년 이후 고부가가치 일자리는 대도시, 대도시 중에서도 광역교통의 결절점에서만 성장하고 있다. 이젠 수도권만 활황이다. 학생도, 의사도, 근로자도, 투자자도 지방을 떠나고 있다. 대학도, 병원도, 회사도, 부동산도 수도권만 살아남을 기세다. ●대도시·중소도시·농촌은 ‘원팀’… 연대하여 지방도시 위기 극복을 도시의 성장은 농촌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그랬다. 농촌의 붕괴가 현실이 된 지금은 큰 도시가 중소도시의 희생으로 인해 성장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건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성장이 혼자만의 힘으론 어려운 것처럼 공간도 그러하다. 어떤 공간이 성장하고 있다면 그건 주변 공간에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농촌에, 대도시는 중소도시에 빚을 지며 성장해 왔다. 그러니 잘나가는 곳은 그렇지 못한 곳에 대해 ‘연대의 책임감’을 져야 한다. 이런 책임을 무시하면 ‘도덕적 의무감’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깊숙이 진행되면서 수도권 쏠림의 흐름은 더 강해질 것이다. 지방의 대도시마저 붕괴한다면 수도권의 성장도 불가능하다.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은 원래 한 팀이었다. 지방도시의 위기가 더 깊어지기 전에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익을 중소도시와 농촌에 교차 보전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 “라면 먹고 살면서 중소기업은 거부…韓청년들 자존심만 강해” 日우익 비난

    “라면 먹고 살면서 중소기업은 거부…韓청년들 자존심만 강해” 日우익 비난

    일본의 극우 인사가 취업활동을 하지 않는 한국 젊은이들이 증가한 것은 ‘현대판 양반의식’ 때문이라고 자의적인 주장을 폈다. 한국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혐오·증오 발언)로 유명한 극우 인사 무로타니 가쓰미(74)는 22일 일간 유칸(夕刊)후지에 ‘한국에서 취업활동을 하지 않고 쉬는 청년 증가…자존심 강한 현대판 양반의 마이너스 인식…연봉은 일본보다 높다면서 왜 저출산이 진행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보수언론 산케이신문 계열의 타블로이드지 유칸후지는 산케이보다 훨씬 더 자극적으로 극우 논조를 펴는 대중 매체다. 무로타니는 “양반은 조선 왕조 시대의 귀족 계급을 일컫는다. 자존심이 강해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글을 시작했다.그는 “오늘날 한국에서 대졸 남성은 젊은 층의 과반수를 차지한다”며 “이들은 ‘소수의 엘리트’와 거리가 먼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강해 의식만큼은 ‘현대판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 일부는 매번 인스턴트 라면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도 ‘중소기업 같은 데는 취업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런 현상이 대졸 남성의 평균 첫 취업연령을 30세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커다란 마이너스 요인이다.” 무로타니는 조선시대 역사를 동원하며 한국을 비하했다. “양반의 일이라는 게 집에 보유한 노비에게 농사를 지도하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관료조직이 극히 작았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관직에 진출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용케 관직을 얻게 되면 이때가 기회라며 직무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이권을 챙겼다. 같은 파벌의 윗사람에게 상납해 더 큰 이권이 있는 자리에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파벌 역학구도가 바뀌어 쫓겨날 때에 대비한 저축이기도 했다.”그는 “오늘날 한국에서 대기업, 공무원, 공기업, 시중은행 등에 취업할 수 있는 대졸 남성의 비율은 7% 정도”라면서 “이런 곳을 ‘오늘날의 양반 직장’이라고 본다면 파벌 다툼, 상사에 대한 아첨, 하청업체나 감독기관과의 유착 등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현대판 양반 의식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은 재벌기업에 입사해 임원으로 발탁돼 50세 전후에 퇴출의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은 기업의 정점에 오르거나 재직 중 쌓은 역량과 연줄을 활용해 화려하게 독립하는 꿈을 꾸며 ‘취업 낭인’ 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한국 청년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아르바이트는 할 수 있어도, 결코 생산직으로 취업하는 길은 선택하지 않는다”라며 “그것이 ‘양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한국 통계청에 따르면 자격시험을 위한 공부도 취업을 위한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쉬었음’ 상태의 인구는 지난 4월 말 기준 20대가 38만 6000명, 30대가 27만 4000명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기회(대부분은 부모의 연줄)로 기업에 취직했다고 할 때 ‘유능한 사원’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여유는 있을까.” 무로타니는 “한국의 저출산 원인으로 ‘청년 빈곤’이 지적되지만, 더 파고들면 ‘청년들의 양반 의식’이 배일지도 모른다”며 “자의적인 통계를 근거로 ‘한국 직장인의 연봉이 일본을 추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한국의 저출산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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