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송이·이용우씨 등 유명인 ‘마녀사냥’식 피해 확산
대기업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모(39)씨는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 동기들끼리 운영하는 게시판에 누군가가 서울대와 미국 카네기멜론대학을 나온 김씨의 학위가 가짜라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주위 사람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느끼고 논문과 학위번호 등을 공개하며 해명을 해야 했다. 김씨는 “유명인도 아니고, 회사에 증빙서류를 제출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며칠간 마음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기업체·학원가도 학위조회 붐
신정아 동국대 교수, 디자이너 이창하씨, 단국대 김옥랑 교수 등 유명인들의 학력 위조 사실이 잇따라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 사회가 ‘학력 괴담’에 떨고 있다. 최근에는 검증 대상이 기업체, 학원가 등으로 확대되고 네티즌 등 일반인들이 검증 대열에 동참하면서 정확하지 않은 소문으로 인해 ‘마녀 사냥’식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천재 소녀’로 알려진 SK텔레콤 윤송이(32) 상무는 허황된 학력 괴담에 어이없어하고 있다. 과학고를 나와 카이스트를 수석졸업하고 미국 MIT 미디어랩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윤 상무는 최근 시중 정보지(일명 찌라시)에 “수석졸업이 아니다.MIT 미디어랩 박사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급속히 확산돼 곤혹스러워 하고있다.
●교수·기업체 임원들 학위·경력 수정 요청 잇따라
윤 상무 측은 “예전부터 음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다.”면서 “계속 확산되면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장 역시 ‘학위와 경력이 가짜’라는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기업체에서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대기업 계열사인 P사는 한 직원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 대해 ‘학력이 위조됐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해 자체 조사에 나섰다. 한 대형 인터넷 업체는 직원들의 의견수렴용 게시판에 익명의 허위 제보가 잇따르자 지난 14일 게시판을 폐쇄하고 ‘감사실로 실명제보해 달라.’고 공지했다.
인사팀 관계자는 “경력사원에 대한 일부 제보가 있다.”면서 “명확한 검증이 힘들고, 만약 사실이 아닐 경우 당사자가 문제삼을 수도 있어 고민”이라고 밝혔다.
학력과 경력을 위조하거나 방조했던 사람들은 양심고백을 통해 후폭풍을 줄이거나, 본인의 학력을 몰래 지우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정덕희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한 언론을 통해 학력 위조 의혹이 제기되자 ‘위조가 아닌 방조’라며 사과했고, 만화가 이현세씨와 연극인 윤석화씨는 고졸 학력을 고백했다.
이들의 고백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며 면죄부 효과를 누리고 있다. 학원가에서는 스타강사들이 공개된 이력을 고치거나 감추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EBS강사로 활약했던 대형 학원 대표강사 이모씨는 그동안 공개된 이력이나 강의를 통해 영국 유학 경력을 강조해왔지만, 최근 모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이 학원 홈페이지에는 이씨의 학위 정보가 삭제되고 전공만 표시돼 있다.
●학술진흥재단에 “내 박사학위 삭제해달라” 쇄도
포털과 언론사 인물DB 관리팀에는 학력에 대한 수정을 요청하는 사람도 급증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업체 관계자는 “개인신상인 만큼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순 없지만 기업체 임원과 교수들이 학위 또는 경력 수정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해외 박사학위를 관리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도 해외 박사학위 삭제를 문의하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당장 삭제해 달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등록에 절차가 있듯이 삭제에도 절차가 필요하다.”면서 “이대로 검증이 계속되면 국내 대학 교수자리 1000여개는 새로 생길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