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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패륜아’ ‘히틀러’ 정치권의 추한 입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 지도부가 그제 서로 상대측 후보를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언사를 주고 받았다. 신당 측은 이명박 후보를 히틀러에 비유했고, 한나라당은 정동영 후보를 패륜아로 매도했다. 선거전이 더 이상 막가파 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권자인 국민이 눈을 부릅뜰 때다. 아무리 여야 정당이 대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금도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통합신당 이해찬 공동선대위원장은 이명박 후보를 빗대 “히틀러도 선거로 당선돼 국가주의를 주창하다 나치로 변질돼 2차 대전을 일으켰다.”고 공격했다.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도 “키워줬는데도 돌보지 않자 자기 삼촌이 (소송을 걸어)7500만원을 청구했다.”면서 정동영 후보를 “패륜아”라고 비방했다. 참으로 더러운 입들이다. 터무니없는 논리의 비약과 상대를 물어뜯으려는 적대감만 번뜩인다. 우리는 이런 막가파식 인신공격은 타기해야 할 구태라고 본다. 이는 프로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상대팀 선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자비한 반칙을 하는 경우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관중의 외면을 불러 해당 스포츠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이전투구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정치판의 이같은 진흙탕 비방전은 결국은 ‘누워서 침뱉기’다. 정치권 전체에 대한 불신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란 차원에서다. 후보 주변에서 합리적 정책 토론이나 팩트에 입각한 후보 검증과 무관한 비방을 일삼는 인사들을 유권자들은 다음 총선까지 꼭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 입냄새, 상대방은 괴롭다!

    입냄새, 상대방은 괴롭다!

    역겨운 입냄새가 나는 사람과 대화를 꺼리거나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특히 요즘 같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인이나 수험생에게 이러한 입냄새의 문제는 많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아직도 그 원인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분들이 많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클라크 케이블도 이러한 입냄새가 지독하기로 유명한 배우였다고 한다.상대역인 비비안 리와 같이 키스신을 찍을 때 입냄새가 하도 지독해 비비안 리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는 말은 헐리우드에서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라고 한다.이렇듯 사람들과의 벽을 만드는 심한 입냄새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방에서 바라보는 구강적인 원인을 제외한 입냄새가 나는 원인들은 첫째,축농증을 비롯한 코의 질환이나 기관지,폐,식도 위장의 질환으로 생기는 구취이다.이러한 경우에는 원인에 따라 어떠한 증상이 수반되기에 원인인 질병을 먼저 치료해주면 구취는 치료가 된다. 둘째,생리적인 원인에 의한 구취이다.술이나 담배,냄새가 심한 마늘,양파 등에 의한 냄새나 침의 양이 줄어들어서 입냄새가 심하게 나거나,장기간 식사를 못해 위가 비어 있을 때도 입냄새는 심하게 나는 경우이다. 셋째,한의학적으로 바라보는 견해에서 가장 많이 치료를 받는 구취의 원인으로서 비장과 위장에 열이 몰려서 오는 경우이거나 식체 혹은 허화 등에 의해서 오는 경우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흔히 한의학적으로 비위에 습열이 심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습열이란 끈적끈적한 기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내부 장기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말한다. 비위에 열이 쌓여 나는 입냄새는 입이 쓰고 잘 마르며,평소에도 찬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또한 오줌량이 줄었거나 붉어지기도 하고,대변이 굵어지며 혀가 붉어지고 맥이 빨라지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한의원으로 구취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세번째 원인으로 찾아오는 환자가 가장 많으며 가장 치료를 요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입냄새가 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입냄새가 심한지를 잘 모른다.얼마 전에 내원했던 김모씨(42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사업상 고객들과 만날 때가 많은데,대화를 나누다보면 상대방이 자꾸 얼굴을 찌푸리고 피하더라는 것이다.대화상에 무슨 문제가 있나,아니면 나의 얼굴에 안 좋은 기색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어느 날 아내가 건넨 말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신 입냄새가 심한데,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고 그 치료를 위하여 내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씨의 경우는 불규칙한 식사와 직장 내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이러한 과정이 자꾸 쌓이다 보니 비위에 습열이 심하여 구취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비장과 위장의 습열을 없애주면서 기능을 정상적으로 돌려주는 침 요법과 뜸,부항,그리고 탕약 및 환약 처방으로 2개월만에 구취를 없앴지만,생활습관이나 식습관이 나쁘면 다시 재발할 수 있기에 주의하라는 당부의 말을 건넸던 일도 있었다. 도움글 : 명옥헌 한의원 김진형 원장
  • [깔깔깔]

    ●1위는 누구? 병사들이 PX에서 다과를 들며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소대장이 갑자기 들어섰다.병사들은 벌떡 일어나 힘차게 거수경례를 했다.기분이 좋아진 소대장이 말했다. “그래, 편히 쉬어. 오늘 너희들에게 들려줄 기쁜 소식이 있다.” 궁금해진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상 2위에 바로 너희들, 군인이 뽑혔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기뻐했다.잠시 뒤 한 병사가 물었다. “그러면 1위는 누굽니까?” 소대장이 대답했다. “음,1위는…. 민간인이다….”
  • [HAPPY KOREA] (24) 안동시 북후면 ‘산약마을’

    [HAPPY KOREA] (24) 안동시 북후면 ‘산약마을’

    지난 11일 오후 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도로변 들판. 수십명의 주민들이 여기저기 모여 마을이 떠들썩한 가운데 구수한 음식 냄새가 지나는 사람들의 코를 자극한다. 한쪽에선 마을 아주머니들이 전을 부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동네 어르신들이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바비큐 시설에 직접 구운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곁들여 마신다. 영락 없이 마을에 큰 잔치가 벌어진 모습이다. 이곳은 북후면 주민들의 자랑인 산약(마)의 우수성을 전국에 소개하는 자리다. 지역 특산품과 먹거리를 소개하는 모 방송국 프로그램 녹화가 있는 날이라 주민들이 모두 모였다. 이날 주민들이 내놓은 음식은 모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민들이 대체작물로 재배하고 있는 산약(마)으로 만든 것들이다. 생마를 얇게 썰어 부친 마전, 마가 섞인 사료를 먹여 키운 참마돼지 고기, 마를 첨가해 빚은 참마 막걸리 등 10여가지가 소개됐다. ●1000평 재배하면 1000만원 소득 행정자치부가 지정한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대상지역은 북후면 옹천1·2·3리, 도촌 1·2리 5개 마을이다.590여가구에 1700여명의 주민들이 살면서 산약을 집중 재배하고 있다. 주민들은 살기좋은 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주민들 스스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정부로부터 5억원을 지원받아 산약 시식과 전시 판매, 산약 수확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산약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도시의 소비자나 관광객들이 편안히 쉬면서 산약을 체험하게 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2년 동안은 25억원을 투입해 산약을 테마로 한 아름다운 거리 조성에 나선다. 현재 용역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거리가 조성되면 산약 체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를 체계적으로 갖추게 돼 안동의 대표적 명소로 거듭날 것이라는 게 안동시와 주민들의 생각이다. ●산약으로 FTA 파고 넘는다 산약(山藥)은 마를 한방에서 일컫는 용어다. 산우(山芋)·서여(薯囊)라고도 하는데, 중국 원산으로 약초로 재배하며 산지에서 자생한다. 땅속 깊이 들어간다. 품종에 따라 뿌리가 긴 것, 손바닥처럼 생긴 것, 덩어리 같은 것 등 여러 가지다. 동의보감에 위장 등 내장기능 강화에 좋다고 적혀 있으며, 특히 당뇨·숙취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북후면 도촌1리 이장을 맡고 있는 권춘원(51)씨는 “술을 많이 마신 뒤 잠들기 전 생마 2개만 깎아 먹으면 아침에 전혀 숙취가 없다.”고 자랑한다. 우황청심환 성분의 4분의1을 마가 차지하는 것도 바로 마의 특효를 보증해 주는 것이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주민들은 작게는 100여평에서 많게는 1만 5000평 규모로 마를 재배하고 있지만 소득이 만만치 않다. 북후면 옹천3리에 사는 박성왕(62)씨는 지난해 100여평에 마 농사를 지어 300만원의 소득을 얻었다고 했다. 생마 10㎏ 1상자에 8만원 정도 수입을 올렸다. 박씨는 규모가 작은 데다 서울 친척을 통해 판매를 했기 때문에 면적당 소득이 특별히 많은 편이다. 보통 대규모로 짓는 농민들은 평당 1만원, 즉 1000평 마농사를 지으면 1000만원 정도 소득을 올린다. 그래도 쌀 농사보다는 2∼3배 이상 높다. 소득이 높은 만큼 재배에 들어가는 노력도 대단하다.4월 초에 파종해 11월에 수확할 때까지 병충해 방제 등 마 관리에 매달려야 한다. 물이 차면 뿌리가 쉽게 썩기 때문에 물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 재배지로 모래가 많은 마사토양을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는 또 뿌리가 50㎝ 이상 땅속 깊숙이 박히기 때문에 수확작업도 힘든 편이다. 권춘원씨는 “재배 못지않게 홍보와 판로가 중요하다면서, 같은 양이라도 판로에 따라 농민간 소득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마 홍보와 판매를 위한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판매의 대부분은 이렇게 직접 주문을 받은 뒤 택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공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여라 안동시는 마 가공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유기인 북후면장은 “현재 농협이 운영하는 마 가공공장에서 마 분말과 각종 음료 등 60여가지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면서 “수요가 계속 늘면서 저장 및 생산라인을 내년에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공장의 처리능력은 200∼300t이지만, 처리할 마는 500여t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만 작년에 6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7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그중 10억원어치는 중국·일본·캐나다 등에 수출했다. 안동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김휘동 안동시장 “마는 약·먹거리 등 쓰임새 다양 FTA 대비 대체작물로 각광” “우황청심환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성분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저희가 ‘산약’으로 부르는 마입니다.” 김휘동 안동시장은 산약이 약의 재료뿐만 아니라 건강식품, 음식 재료로서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며 인터뷰 내내 마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았다. 김 시장은 “2005년 재정경제부로부터 ‘마 특구’로 지정받은 뒤 마 재배와 수요가 크게 늘었다.”면서 “행정자치부 지원으로 진행중인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이 완료되는 2010년이면 ‘안동 산약’에 대한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 시장은 특구 지정 이후 마 판매와 홍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2005년 11월엔 모 TV홈쇼핑 채널에 직접 출연해 안동산약을 소개하면서 잠깐 동안 3억 9000만원어치를 팔아치우기도 했다. 그 여진으로 그해 12월까지 10억원어치를 추가로 판매했다고 한다. 김 시장은 “마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뿐만 아니라 홍보·판매기법 도입, 판로개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면서 “최근엔 유명 인터넷 홈쇼핑과 계약을 체결, 곧 판매에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시장은 마의 가능성에 대해 “한·미 FTA 체결로 피해가 예상되는 우리 농업의 대체작물로 매우 유망하다.”고 강조했다. 아직 마를 식품으로 먹는 사람이 극소수이고, 이제 막 그 효용성이 알려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시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안동시에서도 현재 살기좋은 마을 사업지로 지정된 북후면 옹천리, 도촌리뿐만 아니라 인근 다른 면들도 적합한 토지를 찾아 대체작물로 재배하는 계획을 이미 작년에 수립했다고 밝혔다.KDI 분석에서도 이미 이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받은 상태라고 했다. 김 시장은 “안동은 수백채가 넘는 고택(古宅)들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와 농촌문화가 어우러진 전통·녹색 체험마을을 활성화하기 위한 신활력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안동산약은 살기좋은 마을 사업뿐만 아니라 신활력 사업에서도 기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혼수 장만 어떻게 할까

    혼수 장만 어떻게 할까

    혼수 계획은 결혼 이후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달라진다. 분가형 맞벌이 부부라면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생활을 고려해 영상·음향 등 가전제품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전업 주부는 실용적인 다기능 주방용품 구입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시댁에 들어가 함께 산다면 어른들과 상의해 대형 가전에 투자하는 편이 좋다. 어떤 공간에 예산을 집중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전, 대형 고가 강세 가전은 대형화하는 추세다. 전용면적 85㎡ 이하의 소형 신혼집에서도 120㎡ 평형 이상의 중대형에 맞을 것처럼 보이는 42인치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업체 관계자들은 한 번 사면 보통 10년은 쓰기 때문에 큰 것을 사더라도 집을 넓힌 뒤 계속 쓸 수 있어 무리는 없다고 말한다. 냉장고는 600ℓ 이상의 양문형이 주류. 홈바 같은 편의사양을 더한 프리미엄 모델도 잘 나간다. 세탁기도 아이가 생길 것까지 대비해 건조기능과 살균기능을 제품이 인기가 있는 편이라고 한다. 홈쇼핑 업계는 막바지 혼수 가전 특집을 마련했다.GS홈쇼핑에서는 LG디오스 홈바 냉장고 676ℓ(99만원),LG 모던플라워 디오스 김치냉장고 201ℓ(91만원),LG트롬 건조 겸용 10㎏(59만원) 등을 판다. 믹서기, 미니오븐 등은 사은품.GS와 CJ홈쇼핑 모두 14일,20일 등 주말 오전과 저녁에 혼수 가전 특집 방송을 한다. 현대홈쇼핑은 13∼14일 이틀간 LG전자 특별전을 방송한다. 인터넷쇼핑몰에서는 소형 가전을 눈여겨 볼 만하다. 롯데아이몰에서는 청소기, 믹서기, 오븐, 그릴세트 등을 2개 이상 패키지로 묶어 할인 판매한다. 일레트로룩스 울트라 사일런트 청소기+비사오 전자레인지 패키지는 31만원, 커피메이커+무선주전자+팝업토스터는 10만원이다. 신세계 이마트는 17일까지 혼수 가전 대전을 열고 10% 가량 싸게 판다. 삼성전자 LCD TV(32T7ABDA)는 89만원, 삼성 홈씨어터(HT-TX25)는 49만원이다. ●가구 신제품도 봇물 가구는 중가 제품이 잘 팔리는 편이다. 장롱+침대+협탁 등을 묶은 침실 세트 신제품은 200만∼300만원선. 한샘은 가을시즌 침실 신제품으로 댄디 소프트 럭셔리와 두오모 프렌치 월넛 등 2종을 내놓았다. 리바트는 30주년 제품으로 신혼 분위기에 중점을 둔 비비안 휴 침실세트를 내놓았다.10자반 장롱, 협탁, 침대(메트리스 별도) 등이 409만원. 까사미아의 침실세트인 허드슨 시리즈는 천연 월넛 소재가 돋보이는 스타일로 침대, 화장대, 협탁 등이 250만원. 소파는 가죽이 인기다. 한샘의 신제품인 시드투투 5006 실키베이지는 현대적인 유럽 가죽 소파. 취향에 따라 확장 4인용, 코너형, 베드형 등으로 배치가 가능하다. 가격은 99만원. 까사미아는 화이트 앤 블랙 매치 스타일의 3인용 제프소파(99만원)를 신제품으로 내놓았다. 행사도 많다. 현대홈쇼핑은 13일 자코비안소파(188만원)와 동서침대(29만원)를 할인 판매한다. 현대백화점은 전 점포에서 21일까지 다우닝 소파 기획전을 열고 전 상품을 10% 할인 판매한다. 특히 목동점에서는 18일까지 프라안젤리고, 예인갤러리의 침대와 소파 등 진열 상품을 30∼50% 할인 판매한다. CJ몰은 이달 말까지 109만원인 네오젠 3인용 가죽소파(카우치 포함)를 59만 9000원에, 퍼슨 아이리스 인조 대리석 4인 식탁세트는 40% 할인된 25만원에 각각 판다. 디앤샵은 다음달 말까지 네오젠 셀리앙 가죽 소파를 50% 할인된 29만원에 판다. ●달콤한 침실…면 제품이 좋아 침구류는 벽지, 가구, 커튼 등 방 분위기를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 물세탁이 가능한 제품이 편하다. 이불 2채, 속통, 여름 이불, 손님용 이불 등을 모두 구입할 경우 평균 150만∼200만원선. 품목별로 보면 실크 소재가 100만원선, 면 소재는 30만∼40만원선, 한실 이불 50만∼70만원선, 차렵 이불 10만원선, 차렵이불 세트 20만∼40만원선 등이다. 침대 커버는 면이 좋다. 최근에는 면 40수와 60수 제품이 인기다. 잘 모르면 면 100% 마크로 확인하는 방법이 확실하다. 실크 겉감에 명주솜을 넣은 한실이불은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GS홈쇼핑에서는 앙드레김 럭셔리 면 차렵침구 세트(22만 9000원)와 아트리앙 향연 극세사 침구(13만 9000원)를, 롯데마트는 스트라이프 패턴의 모나코 메카 침구세트(9만 9000원)와 인프레션 극세사 침구세트(11만 8000원)를 혼수 침구로 각각 판매중이다. 이브자리는 실크 느낌의 면 소재인 뉴올리비아 침대커버세트(퀸 사이즈 기준 이불커버 1, 메트리스커버 1, 베개커버 2장)를 판다. 가격은 69만 5000원.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이젠 얼굴마사지도 로봇에게 맡겨요”

    “이젠 얼굴마사지도 로봇에게 맡겨요”

    로봇에게 얼굴마사지를 받는다? 일본의 와세다(早稲田)대학과 아사히(朝日)대학 연구팀은 9일 “턱관절 장애등에 치료 효과를 내는 얼굴마사지용 로봇을 공동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WAO-1’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로봇의 주요 기능은 사람의 얼굴 크기를 자동적으로 인식해 마사지해 주는 것. 63kg의 무게와 높이 78cm의 크기의 이 로봇은 측면에서 뻗어나오는 2개의 팔이 안면근육을 골고루 주물러준다. 또 팔에는 안면근육이 손상되지 않도록 압력이 자동적으로 조정되며 인간의 손가락과 같은 느낌의 세라믹소재가 사용되었다. 아울러 기존의 마사지기는 목부분을 중심으로 주물러주는데 그쳤으나 이 로봇은 안면질환과 턱관절 교정에도 효과가 탁월하다는 평이다. 지금까지 3대가 개발되었으며 1대당 가격은 700만~1000만엔 정도(한화 약 5천 5백만원~7천 8백만원)다. 아사히대학의 카쓰마타 아키토시(勝又明敏)교수는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악관절증이나 구강건조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마사지치료를 받게 되면 금방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현재 마사지사가 많지 않아 (마사지를) 받기 힘든 실정”이라며 개발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또 “이 로봇으로 2분동안 마사지를 받으면 침의 분비량이 증가하는 등 효과가 입증되었다.”며 “로봇을 소형화하고 가격도 낮춰 미래에는 가정에서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사진=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열린세상] ‘계란 열사들’의 나라/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열린세상] ‘계란 열사들’의 나라/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철 지난 얘기지만, 아프간에서 탈레반에 납치되었던 인질들은 두 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대부분 무사히 돌아왔다.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봉사’라 둘러대더니 희생자를 ‘순교자’로 부르는 것을 보니 교회에서는 그 행위를 ‘선교’로 인식하는 듯하다. 지금 한국 교회는 ‘선교’와 ‘봉사’를 새로 정의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정직하게 꺼내서 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낡은 원칙이다. 듣자 하니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 신학자가 외려 출교 당하는 게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 아닌가. 한국 기독교의 눈에 이슬람 국가는 이른바 ‘복음화율’이 세계에서 가장 떨어지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선교의 대상지역이다. 이슬람은 종교적 열정의 결핍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의 과잉으로 고통 받는 지역이다. 그런 곳에 그 못지않게 극성스러운 종교를 하나 더 들고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순교’를 해서라도 사마리아 땅 끝까지 기독교화하겠다는 한국 기독교의 중세적 열정. 그 못지않게 중세적인 것이 바로 귀환한 피랍자들을 대하던 한국 사회의 험악한 분위기다. 듣자 하니 한 극성스러운 분자가 공항에까지 나와 피납자들에게 계란을 던지려고 했단다. 물론 이런 맹동주의자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맹동주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니, 온통 이 위험한 자를 ‘계란열사’로 만들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분위기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심성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망가졌을까? 한 달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심리적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던 사람들이다. 당신도 사형이 집행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달을 지냈다고 생각해 보라.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극심하겠는가? 도대체 그런 사람들에게 계란을 던지겠다는 그 잔인한 심성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봉사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생각 자체는 비난할 게 못 된다. 그 젊은이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저 아프간 여행의 위험을 너무나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천진난만함이 공항에서 계란을 맞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일까? 교회에 계란을 던질 수는 있다. 잘못은 교회가 했고, 교회는 납치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는 영혼에 치유하기 힘든 커다란 후유증을 남긴다. 그런데도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나 트라우마를 겪어야 할 희생자들에게 계란을 던진다? 이는 그야말로 인간성을 의심하게 하는 행위다. 왜 그러는 걸까?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일인지 버젓이 알면서도 그 짓을 저지를 때에는, 그 잘못을 사소한 것으로 덮어줄 더 큰 대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를 ‘계란 열사’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대의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듣자 하니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여름에 대피하라는 경고를 무시했다가 조난당한 피서객들을 구조해줬다고 나라에서 어디 비용을 부담시키던가? 생각을 잘못해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국가로부터 무료로 구조 받을 권리 좀 요구하면 안 되는가?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아프간에서 납치됐다 풀려난 일본인도 “고국에 돌아갈 일이 더 걱정스럽다.”고 했다. 거기서 이것은 이른바 ‘국권’ 대 ‘민권’의 문제다.‘민권’보다 ‘국권’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국가에 누를 끼친 개인은 유형무형으로 공동체의 제재를 받는 모양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왜 이렇게 불쌍한 ‘국민’으로 살아야 할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길섶에서] 외도의 두 갈래/우득정 논설위원

    토마스와 프란츠 사이를 줄다리기 하던 사비나는 어느 날 남몰래 떠난 파리에서 회상에 잠긴다. 그리고 외도하는 남성에게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에게 탐닉했던 프란츠는 ‘이상형’ 추구형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신기루를 찾아 헤매지만 끝내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다. 종말은 이국 땅에서의 비명횡사다. 자신이 탐닉했던 토마스는 매일 상대가 바뀐다. 그는 어쩌면 똑같을 수밖에 없는 상대방에게서 100만분의1의 차이를 확인하려 한다. 탄탈로스와도 같은 토마스의 갈증 역시 체코의 시골 밤길 산산조각난 트럭에서 마침표를 찍는다.(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십이 넘어서도 K는 우리의 우상이다. 술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자리를 파할 때까지 화려한 여성편력사(그의 표현은 인생역정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한때 놀았다던 친구들도 입을 떡 벌린 채 ‘형님’을 연발한다.K의 결론은 항상 이렇다.“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플라토닉 로맨티스트인 것 같아.”입술에 침조차 바르지 않은 그의 표정은 항상 진지하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 가을 전어의 유혹

    [요리전문가 김수진의 계절별미 오감만족] 가을 전어의 유혹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먹을 거리가 많아서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 잡는 것이 많다. 가을에 먼저 생각나는 생선이 전어다. 얼마나 영양이 풍부하고 맛 있으면 “며느리 친정간 사이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든가.“집 나가던 며느리 다시 돌아온다”,“가을전어 대가리엔 참깨가 서말”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맛과 영양의 보고이다. 전어는 사투리로 대전어, 엿사리, 전어사리, 새갈치 등으로도 불리는데, 우리나라 연안에 사는 연안성 어종이다. 큰 회유는 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6∼9월쯤에는 바깥바다에 있다가 10∼5월쯤에는 연안의 내만(內灣)으로 이동하여 생활한다. 산란기는 3∼6월로서 이때가 되면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와 만 입구의 저층에서 산란하는데 만 1년(길이13㎝)이면 성숙하여 산란에 참가하고 산란 시각은 해 진후 1∼2시간 이내에 일제히 방란하며 산란수는 2년생의 경우 대략 13∼15만개 정도이다. 전어는 봄에 알을 낳은 후 가을에 최고의 영양상태를 유지하는데 봄이나 겨울에 비해서 지방성분이 3배정도 높아진다. 그래서 가을에 먹는 전어가 유독 고소하고 맛이 있는 이유가 몸에 좋은 지방과 맛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어는 청어목 전어과로서 청어에 잔 가시가 많듯이 전어도 잔 가시가 많다. 이렇게 고소하고 맛있는 전어에 가시가 많을 줄이야~.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잔 가시가 많으므로서 종족을 보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선은 대부분의 근육이 흰색을 띠고 있는 흰살 생선과 등푸른 생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어는 흰살 생선으로서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우리 몸의 체 구성 물질과 에너지원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그리고 비타민A, 비타민 B1, 비타민E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건강식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생선기름은 혈관을 확장하고 염증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어 손상된 혈관을 회복시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도 지나고 시원한 가을에 더위에 지쳤던 몸을 전어의 유혹에 흠뻑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푸드엔컬처코리아 원장 ■전어 회무침 ●재료 및 분량 전어 3마리, 모듬 채소류 150g, 초고추장 양념:고추장 2큰술, 레몬즙 1큰술, 식초 1큰술, 마늘즙 1큰술, 물엿 1큰술, 생강즙 1작은술, 파인주스 1큰술, 참기름 1작은술, 백후추 1/2작은술. ●만드는방법 1. 전어는 칼로 배쪽을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비늘을 긁어 낸다. 2. 등쪽 지느러미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고 깨끗이 씻은 후 종이 타월로 물기를 제거한다. 3.2의 손질한 전어를 0.5㎝의 폭으로 어슷썰기를 한다. 4. 모듬채소류는 전어의 크기로 썰어 준 다음 찬물에 헹구어 소쿠리에 밭는다. 5. 초고추장 양념한 것에 3,4를 넣어 무쳐 그릇에 담아낸다.※회로 무칠 경우에는 살아 있는 전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어 구이 ●재료 및 분량 전어 5마리, 소금 1큰술, 백후추 1작은술, 마늘즙 1큰술. 초간장:간장 1큰술, 식초 1큰술, 레몬 1작은술, 물 1큰술, 설탕 1작은술. ●만드는방법 1. 전어는 배쪽을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칼로 비늘을 긁어낸다. 2. 등쪽 지느러미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고 몸통부분에 3∼4차례 어슷하게 칼집을 내어준다. 3. 소금을 뿌린 후 마늘즙, 백후추를 뿌려 약 1시간 정도 재운다. 4. 오븐이나 석쇠를 이용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 준다. 5. 초간장을 곁들여 접시에 담아낸다.Tip=전어구이를 할 때 참숯에 구우면 더 좋은 맛과 향을 느낄수 있다. 집에서 나 아파트에서 숯을 이용한다면 과연 이웃들의 반응이 어떠할까? 푸드스타일링:손명희, 두루미. 촬영:박준선
  • 또 등뼈 美쇠고기… 덮고 가자?

    또 등뼈 美쇠고기… 덮고 가자?

    미국산 쇠고기에서 수입이 금지된 광우병위험물질(SRM)인 ‘등뼈’가 또다시 검출됐다. 그러나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는 ‘LA갈비’수입을 허용하기로 최종 방침을 세워 안전성을 둘러싼 비난 여론이 거세질 전망이다. 농림부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5일 미국 대형육류생산업체 스위프트사로부터 지난달 7일 수입돼 지난 4일 오후 경기 용인의 한 냉장 창고에서 검역과정을 거치던 쇠고기 18.5t(618상자)에서 등뼈로 채워진 상자(30.3㎏) 1개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미국산 쇠고기에서 SRM이 검출된 것은 지난 8월1일 카길사 제품에 이어 두번째다. ●또 ‘등뼈 쇠고기’, 제재는 오래 안갈 듯 이에 농림부는 새로운 수입위생조건이 발효될 때까지 미국산 쇠고기 전체에 대한 검역 중단과 함께 현지 수출선적 금지조치를 취했다.‘수출선적중단’은 이미 반입된 모든 쇠고기 물량도 모두 반송조치하는 ‘수입중단’보다는 낮은 단계의 제재다. 해당 작업장은 승인이 취소됐다. 스위프트사는 앞서 세번이나 뼈를 섞어 수출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제재는 오래가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과 연계해 ‘LA갈비’수입을 계속 압박하고 있어 검역 및 선적중단 조치를 오래 끌기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갈비’는 수입, 꼬리·내장 등은 불허 방침 이날 오전 농림부는 생산자·소비자 단체를 초청해 가축방역협의회를 열어 미국산 갈비 수입 여부를 논의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갈비는 수입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면서 “다만 국민 여론을 감안해 등뼈, 뇌, 척수 등 SRM과 꼬리, 내장, 사골 등 부산물은 수입하지 않고, 연령 기준도 ‘30개월 미만’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농림부는 이같은 원칙을 토대로 미국과의 수입위생조건 개정협상에 나선다는입장이다. 그러나 당초 이달 초 개최할 예정이던 한·미간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 협상은 이번 ‘등뼈’발견과 국정감사(19일) 등을 감안해 이달 말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향후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서 이같은 개방 수준이 더욱 ‘하향조정’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은 지난 5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결정을 앞세워 ‘모든 연령과 부위’를 개방하라고 파상공세를 벌이고 있다. 최근 일본도 연령제한을 ‘20개월에서 30개월로 완화’하는 양보안을 제시했지만, 미국에 ‘퇴짜’를 맞았다. 농림부가 갈비수입을 향한 ‘잰걸음’을 더욱 재촉하면서 축산농가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날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등뼈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농림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지나친 승부욕… 막가는 축구판

    이번엔 판정에 불만을 품은 프로축구 선수가 웃통을 벗어젖힌 채 심판에게 돌진하는 추태가 벌어졌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상대 선수에게 침을 뱉거나 중계카메라를 향해 욕설을 퍼부은 선수들을 징계한 지 겨우 닷새 만에 벌어진 일이다. 4일 대한축구협회는 전날 광양구장에서 열린 전남과의 FA컵 4강전 도중 추태를 벌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방승환(24)을 상벌위원회에 회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방승환은 이날 전반 3분 산드로의 선제골이 터진 뒤에 주심에게 다가가 산드로에게 크로스를 해준 김치우가 인천 수비수를 떠밀었는데 왜 그냥 넘어 가느냐고 항의하다 경고를 받았다. 이어 전반 16분에는 이규로에게 거칠게 백태클을 걸어 두 번째 옐로카드와 함께 퇴장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방승환은 무려 4분이나 그라운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웃옷을 벗어 주심에게 내던지는 한편, 정강이 보호대를 내동댕이치고 터치라인 앞에서 ‘목놓아’ 울기까지 했다. 방승환만이 아니었다. 앞서 산드로의 골이 인정되자 선수 거의 전원이 주심에게 달려들었다. 선수들을 진정시켜야 할 김시석 코치와 신범철 골키퍼코치까지 벤치에서 거칠게 항의하다 레드카드를 받았다. 후반에는 서포터들이 이성을 잃었다. 후반 20분쯤 응원도구로 쓰이는 붉은 화염이 전남 페널티지역 왼쪽을 향해 날아갔다. 물병 투척도 있었다. 이 경기는 네 차례나 중단됐다. 인천은 지난달 22일 K-리그 수원전에서 전재호의 ‘카메라 욕설’에 이어 ‘추태 구단’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게 됐다. 에두(수원)의 침뱉는 장면을 전광판에서 되풀이 보여줘 서포터들을 자극했다는 이유로 벌금 100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당시에도 프로연맹의 징계가 솜방망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닷새 만에 들어맞았다. 인천 서포터들은 그동안 팀이 당한 억울한 사례들을 들어 방승환도 잘못했지만 프로연맹 등이 편파판정을 조장하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설득력이 없다. 다만,‘심판 불신’이라는 근본을 무시한 채 중징계만 남발하는 것도 문제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홍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다.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할 수 있는 명예직인 셈이다.‘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성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프로축구 2007] PO 6강 티켓 두장 누구 품에

    [프로축구 2007] PO 6강 티켓 두장 누구 품에

    프로축구 K-리그에 올해 처음 도입된 6강 플레이오프(PO)에 올라갈 팀은? 1∼4위 팀이 거의 가려진 가운데 나머지 두 자리를 놓고 이번 주말, 정규리그 23라운드에서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5연승에 브레이크가 걸린 4위 경남은 29일 창원에서 제주와의 힘겨운 싸움에 나선다. 제주는 10위에 처져 있지만 5∼7위 전북,FC서울, 포항과의 승점차가 4에 불과해 남은 4경기에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상황. 이번 대결은 2002년 월드컵때 한솥밥을 먹던 박항서 경남, 정해성 제주 감독의 자존심 대결로도 관심을 끈다. 18경기 무패(11승7무)의 3위 울산과 8경기 무패(7승1무)의 2위 수원이 맞붙는 울산 경기에도 관심이 쏠린다. 차범근 수원 감독으로선 올시즌 두 번이나 패한 울산을 상대로 설욕해야 한다. 수원은 22일 인천전에서 두 골을 뽑아내며 득점원으로 가세한 신영록이 힘이 되고 울산은 ‘돌아온 득점왕’ 마차도에 기대를 건다.30일에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한 성남과 정규리그 8위 인천의 맞대결이 주목된다. 성남은 왕복 40시간의 원정으로 인해 바닥난 체력을 어떻게 끌어 올리느냐가 관건. 인천은 12골로 득점 3위를 달리는 데얀 등을 앞세워 ‘불안한 선두’ 성남을 잠재우며 PO 불씨를 살려야 할 상황.6위에 턱걸이하고 있는 FC서울은 돌아온 천재 박주영에게 12위 부산 깨기의 중책을 맡긴다. ●에두, 벌금 200만원에 2경기 출장 정지 한편 연맹 상벌위원회는 28일, 경기 도중 상대 선수에게 침을 뱉은 에두(수원)에게 벌금 200만원과 2경기 출장 정지, 퇴장당한 뒤 중계 카메라를 향해 욕설을 퍼부은 전재호(인천)에게 벌금 500만원, 에두의 침뱉는 장면을 전광판에 되풀이 방영해 서포터들을 자극한 인천구단에 벌금 1000만원 등의 징계를 내렸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단독] 광화문 복원공사 도편수 자리, 형님뻘 전흥수 대목장 물러서

    [단독] 광화문 복원공사 도편수 자리, 형님뻘 전흥수 대목장 물러서

    처음엔 ‘필생의 역작’을 만들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를 맏형인 내가 아니면 누가 맡겠느냐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아우를 만나자 감정은 눈녹듯 사라지고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양보를 해야지….”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건축 분야 양대 산맥의 한판승부가 뜻밖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신응수 대목장 “다음엔 내가 양보”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 20일 신 대목장을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다음에 중요한 문화재 복원공사가 있을 때는 자신이 양보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당초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 자리는 신 대목장보다는 전 대목장에게 더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많았다. 신 대목장은 1991년 이후 도편수로 경복궁 복원에 참여한 ‘기득권’을 무시할 수 없지만 광화문 만큼은 결정적으로 신 대목장이 적을 두고 있는 업체가 복원공사를 따냈기 때문이다. 전 대목장의 양보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 대목장은 27일 양보한 이유를 묻자 “우리는 그동안에도 그렇게 (양보하며) 살았다.”면서 “하지만 막상 양보하고 나니 앞으로 광화문 같은 큰 일이 또 있을까 싶어 며칠동안은 섭섭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으며 껄껄 웃었다. 그는 “특히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니 점수를 매겨 대목장을 뽑아야 한다느니, 한 사람은 도편수를 맡고 한 사람은 부편수를 맡으면 되는 것 아니냐느니 하는 불편한 얘기가 나도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면서 “나라도 좋은 생각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양보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전통건축 분야의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는 충남 예산에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전 대목장과 궁궐건축의 대부로 꼽히는 신 대목장, 막내뻘인 최기영(63) 대목장 등 모두 3명이다. 충남 부여의 백제문화역사재현단지 조성을 맡고 있는 최 대목장은 광화문 도편수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전 대목장은 “성재(신 대목장의 호)하고는 가능한 한 빨리 문화재청을 비롯해 걱정해주신 분들을 찾아가기로 했다.”면서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 대목장 “아우라면 제대로 해낼 것” 추석 연휴를 보내며 아쉬움을 털었다는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면서 “다만 가장 좋은 자재를 대고 훌륭한 일꾼을 투입하는 것은 물론 칭찬받으면서 일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로서 정부나 국민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이날 “광화문 복원공사 감리단에서 신 대목장을 도편수로 추천한다는 공문서를 보내왔다.”면서 “심의를 거치기는 하겠지만 자격이 충분한 분이므로 신 대목장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고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9)숭록대부까지 오른 ‘神醫’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9)숭록대부까지 오른 ‘神醫’

    약을 쓰는 의원과 별도로 침의를 양성하자는 주장은 세종시대 전의감(典醫監) 책임자였던 황자후가 처음 내세웠다.“병을 속히 고치는 데는 침이나 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의원으로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구멍을 밝게 알면 한 푼의 약도 쓰지 않고 모든 병을 고칠 것입니다. 지금부터 중국의 의술을 익히는 법에 의해 각각 전문(專門)을 세우고 주종소(鑄鐘所)로 하여금 구리로 사람을 만들게 하여, 점혈법(點穴法)에 의해 재주를 시험하면 의원을 취재하는 법이 또한 확실해질 것입니다.” 허임의 ‘침구경험방’ 첫 판본이 나온 지 7년 뒤인 효종 2년(1651)에 내의원의 부속청으로 침의청(鍼醫廳)이 설치되었다. 당대 침구술의 최고 실력자들이 왕궁에 모이게 된 것이다.‘내침의선생안’에 202명의 내침의, 즉 내의원 침의 명단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외과수술로 가장 이름을 날린 침의가 백광현이다. ●의서를 보지 않고 침을 써서 말을 고치다 침의로 이름난 백광현(白光炫·1625∼1697)은 사람됨이 순박하고도 조심스러웠다. 자기 동네에서도 너무 진실스러워, 마치 바보 같았다. 키가 큰 데다 수염이 길었으며,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대를 잇는 의원이 아니라, 처음엔 말의 병을 고쳤다. 말의 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처방을 모은 ‘마의방(馬醫方)’이 광해군 8년(1616) 4월 의주에서 간행되었지만, 그는 이런 책을 보지 않고 오로지 침만 써서 치료했다.‘마의방’에 말의 경혈도가 있어서 경혈을 찾아 침을 찔러 넣으면 편했는데, 그는 자기 방식을 고집해 경험을 쌓았다. 임상실험을 충분하게 한 것이다. 말침은 사람에게 시술하는 침에 비해 납작하고 넓은 봉 형태이며 철제로 만들었다. 침을 오래 놓을수록 손에 익어지자, 사람의 종기에도 시험을 해보았다. 지금은 종기가 별로 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위생관념이 열악해 많이 났으며,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큰 병이었다. 침으로 사람의 종기까지도 고쳐 기이한 효험을 많이 보게 되자, 드디어 사람 고치는 것만 일삼았다. 마의(馬醫)에서 침의(鍼醫)로 전업했으니, 신분이 상승한 셈이다. 그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의과를 거쳐 내의원에 들어가지 않고 민간에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의 종기를 보고, 상황에 따라 달리 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그의 진단이 더욱 정확해졌다. 중인들의 전기를 많이 지었던 정내교가 백광현의 전기도 지었는데, 그가 종기의 뿌리를 뽑은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종기에 독이 가득 차면 근(根)이 생기는데, 옛 처방으론 이걸 고칠 방법이 없었다. 광현은 이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커다란 침을 써서 근을 발라내어, 죽을 사람도 살렸다. 처음엔 침을 너무 세게 써서, 어떨 때에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게 효험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이 차츰 많아졌으므로,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대문에 모여들었다.” 정내교는 “지금 세상에서 종기를 째고 고치는 법은 백태의에게서 시작되는데, 그 뒤에 배운 자들은 모두 그에게 미칠 수 없었다.”고 했다.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종기를 외과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처음 개발한 것이다. 시술하다 환자를 죽이기까지 했다는데, 사람이 아니라 말부터 치료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째보면서 임상실험에 일찍 성공했고, 사람에게 시술할 무렵에는 이미 침술이 손에 익었을 것이다. 침을 놓는 솜씨는 의서를 많이 보았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병자들이 모여들수록 의술 베풀기를 좋아해, 더욱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돈을 밝히지도 않았다. 침으로 째서 뿌리를 뽑는 비법을 써 그의 이름을 크게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신의(神醫)라고 칭송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종기를 똑같이 고치다 그는 의과에 합격하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내의원에 배속되었다. 현종 11년(1670) 8월16일 실록에 “왕의 병환이 회복되자 백광현에게 가자(加資)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품계를 한 급 올려주었다는 뜻인데, 몇품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숙종은 10년(1684) 5월2일 정사에서 그를 특별히 강령현감(종6품)에 임명했다가 포천현감으로 바꾸었는데,“의관의 수령 임명이 여러 번 중비(中批)에서 나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진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백광현이 미천한 출신이고 또 글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별안간 그를 이 벼슬에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대론(臺論)이 일어났다.”고 사관은 기록했다. 어의들이 왕의 병을 고치면 승진하고, 의원으로 더 이상 승진할 자리가 없으면 지방 수령으로 발령내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의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백광현이 현종의 목에 난 종기를 고치고, 효종비 인선왕후의 머리에 난 종기도 큰 침으로 수술하여 완치시켰으며, 자신의 목에 난 종기와 배꼽에 난 종기까지 침으로 치료했으니 종6품 현감으로 발령내는 것쯤은 숙종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효종이 종기를 제대로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으므로, 종기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중비(中批)는 임금의 뜻이다. 백광현을 내의원의 관직에 올려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지방 수령은 문과나 무과에 급제한 양반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으니 파격적인 대우였다. 사간원에서 그를 반대할 명분이 없자 “글자를 알지 못한다.”고 반대했다. 그가 전형적인 의과 출신이 아닌 데다 전통적인 의서(醫書)도 보지 않고 경험에 따라 치료한 침의였으므로, 한문에 약한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는 1691년에 지중추부사,1692년에 숭록대부로 승진했는데, 실제 직책이 없는 벼슬이나 품계였다. 정내교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높은 벼슬에 오른 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숙종 초엽에 어의로 뽑혔는데, 공을 세울 때마다 품계가 더해지곤 해서 종1품에 이르렀다. 벼슬도 현감을 지내, 민간에서 영예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병자들을 대할 때에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부름이 있으면 곧 달려갔고, 가서는 반드시 자기의 정성과 능력을 다하였다. 병이 다 나은 것을 본 뒤에야 치료를 그만두었다. 늙고 고귀해졌다고 해서 게을러지지 않았다.” ●“백광현이 세상에 없어서 죽는구나” 정내교는 전기를 쓰면서, 자신이 실제로 본 백광현의 신통한 진단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 나이 15세 때에 외삼촌 강군이 입술에 종기가 났다. 백태의를 불러왔더니, 그가 살펴보고 ‘어쩔 수가 없소. 이틀 전에 보지 못한 게 한스럽소. 빨리 장례 치를 준비를 하시오. 밤이 되면 반드시 죽을 게요.’라고 말했다. 밤이 되자 과연 죽었다. 그때 백태의는 몹시 늙었지만, 신통한 진단은 여전했다. 죽을 병인지 살릴 병인지 알아내는 데 조금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가 한창때에는 신기한 효험이 있어서 죽은 자도 일으켰다는 게 헛말은 아니었다.” 정내교가 15세 때라면 백광현이 71세 되던 1695년이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데, 이 해에 재상을 치료한 기록이 실록에 실려 있다.12월9일에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왕이 백광현을 보냈는데, 사관은 “백광현이 종기를 잘 치료하여 기이한 효험이 많이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고 설명했다. 효종 10년(1659) 5월1일에 약방에서 문안하자, 효종이 “종기의 증후가 이같이 날로 심해 가는데도 의원들은 그저 심상한 처방만 일삼고 있는데, 경들은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답하였다. 의관 유후성이 산침(散鍼)을 놓자고 아뢰어 그대로 따랐지만, 효험이 없었다.3일에는 병이 위독해 편전에 나가지 못했으며, 왕이 입시한 의관들에게 종기의 증후를 설명하라고 명했지만 아무도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4일에는 의관 신가귀가 침을 놓자고 했으며, 유후선은 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신가귀가 침을 놓았지만, 혈락(血絡)을 범하는 바람에 피가 그치지 않고 나와 효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뒤에 신가귀는 교수형을 당했다. 효종 10년이라면 백광현이 아직 내의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민간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던 시절이다. 몇 년 뒤였다면 효종의 종기를 침으로 고치지 않았을까? 정내교는 백광현의 전기를 끝내면서 “종기가 생겨서 그 독을 고치기 어렵게 된 사람들은 요즘도 반드시 ‘세상에 백광현이 없으니, 아아! 이젠 죽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탄식한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십년 뒤에도 그의 신통한 침술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백광현은 4형제였는데,2남 광린(光璘)과 4남 광현이 의원으로 활동했다.4형제의 후손 가운데 역관, 의원, 계사가 골고루 배출되었는데, 광현의 후손에서 대를 이어 침의가 많이 나왔다. 정내교는 “그가 죽은 뒤에 그 아들 흥령이 대를 이어 의원이 되었는데, 꽤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그의 침술이 아들을 통해 가업으로 전수된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지옥같은 관타나모 1600일 증언

    지옥같은 관타나모 1600일 증언

    “‘너 알카에다 맞지?’ ‘아니요.’ 군인 중 하나가 내 얼굴을 갈긴다.‘너 탈레반이지?’ ‘아니요.’ 다시 갈긴다.‘넌 오사마를 알고 있어!’ ‘아니, 아니요.’ 다른 군인이 내 턱을 때린다.‘너 알카에다 대원이지?’ ‘아니요….’” 반복되는 질문, 반복되는 대답, 반복되는 구타… 반복되는 고문, 반복되는 기만, 반복되는 역사…. 한국에서 익히 봐왔던 장면들이 이라크에서 반복되고, 미국에서 반복되고, 쿠바에서 반복된다. 자유, 평화, 인권이란 절대 가치를 지키겠다며 억압, 전쟁, 인권탄압을 서슴지 않는 거짓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2001년 9·11사태 직후 어느 날, 터키계 독일인 무라트 쿠르나츠가 증발했다. 코란을 공부하러 간 파키스탄에서였다. 쿠르나츠는 독일로 돌아오기 직전 검문소에서 파키스탄 보안요원에게 체포됐다. 테러리스트 용의자란 이유였다.‘이슬람 형제’ 파키스탄 보안요원들은 3000 달러에 그를 미군에게 넘겼고,‘그의 나라’ 독일은 석방요구를 외면했다. 쿠르나츠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미군기지에 두 달간 갇혔고,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로 옮겨져 지난해 8월까지 수감됐다.1600여일간이었다. 갓 결혼한 19살 앳된 청년 쿠르나츠는 수염이 치렁치렁한 24살, 부인마저 떠난 이혼남이 돼 있었다.‘가장 고약한 죄수들’만 가둔다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쿠르나츠는 오직 혼자였다. 논픽션 ‘내 인생의 5년’(무라트 쿠르나츠 지음, 홍성광 옮김, 작가정신 펴냄)은 쿠르나츠가 보낸 지옥 같은 시간의 기록이자, 전쟁 이면에 대한 육화된 고발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쿠르나츠는 테러리스트란 자백을 강요받으며 온갖 참혹한 고문에 시달린다. 전기고문, 물고문, 잠 안 재우기와 무산소 독방 감금에, 때론 먹음직스런 음식으로 유혹하고 때론 여자까지 동원해 괴롭힌다.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잠을 자야하고, 간수를 쳐다봐서도 말을 붙여서도 안 되며, 규칙을 어기면 군기교육조가 투입돼 고춧가루를 뿌리고 곤봉으로 두들겨 팬다.“장갑은 내 손을 따뜻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고, 귀마개는 내 귀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마스크 역시 얼굴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물 수 없었고, 침 뱉을 수 없었으며, 할퀼 수도 없었다.”며 쿠르나츠는 절규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악명은 굳이 새로운 증거를 필요치 않는다. 수용소의 잔혹함은 이미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내 인생의 5년’은 뉴스 언어로는 느껴지지 않는 ‘먼 나라 남의 고통’을 내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선혈처럼 선명한 아픔으로 되살려낸다. 진실은 늘 불편함을 동반하고, 불편한 진실은 생생하게 아프다.“그저 내가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쿠르나츠. 그는 관타나모를 겪은 후 세상 도처에 숨겨진 관타나모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됐고,“정치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간파할 수 있으며,“어떤 행동을 하는지” 직시할 수 있게 됐다. 관타나모는 모든 은폐의 실체다.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미국의 국가적 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자, 미국이 감추고 싶은 가장 미국다운 곳이다. 도무지 가식이란 없는 행위들이 낯 부끄럼 없이 이뤄지는 현장이자, 어떤 조직이나 체제, 국가가 내보이기 싫은 가장 벌거벗은 속살이고 치부다. 모든 전쟁이 적을 상정하나 전쟁이 노리는 적은 따로 있다는 사실,‘범죄와의 전쟁’이 범죄만을 노리는 게 아니듯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만을 노리는 게 아니란 사실, 노태우와 부시의 쌍둥이 조어(造語)는 전쟁 이면을 간파하게 만든 언어의 관타나모다. 반복되는 언어, 반복되는 거짓, 반복되는 관타나모…. 쿠르나츠는 “말해야 하고, 알려야 한다.”며 외치고 또 외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기로에 선 손학규] 孫, 반전카드 잡았나

    선거인단 동원 등 ‘경선 구태’를 주장하며 자택칩거에 이어 지방으로 잠적했던,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선 경선 후보가 21일 경선에 복귀한다.한때 후보사퇴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손 후보는 이틀만의 ‘장고’끝에 경선 복귀를 결심,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추석 연휴 경선판 뒤집을 계기 마련 손 후보는 20일 오전 7시40분쯤 서울 도화동 자택에서 나와 부인 이윤영씨와 이씨의 마티즈 차량을 직접 운전, 합정동 절두산 순교 성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40분정도 머물다 경기 화성 남양성지에서 1시간가량 산책을 한 뒤 취재진을 따돌리고 경기 의왕시 성 나사로 마을로 떠났다가 늦은 밤 서울로 돌아왔다. 손 후보는 이날 밤 자신의 거취에 대해 “오늘 마지막 기도를 하고 내일 아침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캠프 내부에서는 이미 21일 부산에서 예정된 후보자 토론회 준비를 하는 등 복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손 후보가 선택한 칩거와 지방행은 당 지도부를 겨냥한 강도높은 항의 표시의 성격을 띠었다.자신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와 중진의원들이 동원경선 의혹에 대해 미온적 태도로 대응하고 있는 데 대한 고강도의 불만과 항의 차원으로 빼어든 카드였다.여차하면 후보직을 사퇴할 수 있다는 ‘배수진’을 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당 지도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그러나 손 후보의 이번 초강수는 이미 경선 복귀를 전제로 한 압박 전략이었다. 지난 3월 한나라당 경선을 앞두고 탈당한 그로선 또 한번의 경선 불참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손 후보의 이번 칩거는 추석 연휴를 겨냥한 노림수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연휴 직후인 29일에 열리는 광주·전남 경선에서 대역전극을 꾀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손 후보의 칩거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동원·조직 선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경선판을 일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지지층 결집 여부는 미지수 그러나 손 후보의 이 같은 행동이 지지층의 결집을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지지자들과 국민에게 “불리하면 언제든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인식됐다는 점이 그로선 손실이다.당내에서는 손 후보의 칩거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당 관계자는 “손 후보가 동원선거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에 대해 당 지도부가 뒤늦게 나마 심각하게 인식한 것은 나름대로 큰 수확이다.”라면서도 “그의 행보가 표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8) 침술의 대가 허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8) 침술의 대가 허임

    의원은 전형적인 중인의 직업이지만, 모두 중인은 아니다. 중인이 형성되기 전인 조선 전기에는 물론 선비들이 의원 활동을 했으며, 중인층이 형성된 조선 중기 이후에도 선비 출신의 의원이 많았다. 이들을 유의(儒醫)라고 하였다.‘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도 서얼이긴 하지만 양반 출신이다. 그랬기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의원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허준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였던 허임은 관노의 아들인데 의원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의원으로 대를 잇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집안은 중인층으로 정착되지 못했지만, 그의 대표적인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의 집안을 통해 그의 의술이 전승되었다. ●관노 허억봉과 여종 사이에 태어난 허임 허임이 선조나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승진할 때에도 끝내 따라다닌 꼬리표가 관노의 아들이라는 점이다.1617년 2월12일에 광해군이 허임을 영평현령에서 양주목사로 승진시키자 사헌부에서 “허임의 아비는 관노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이니, 비천한 자 가운데 더욱 비천한 자입니다.”라고 출생 신분을 들고나와 반대하였다.18일부터 26일까지 계속 반대하자, 광해군도 결국 지쳐서 3월9일에 부평부사로 내보내는 형식으로 타협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관노와 여종 사이에 태어난 천민을 서울 인근의 목사(정3품)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강원도 양양의 관노였던 허억봉은 어린 나이에 장악원 악공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왔다. 악생은 양민이지만, 악공은 천민이었다. 장악원 첨정 안상이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만들었는데, 허억봉의 연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악보는 목판본으로 간행된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는데, 안상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내가 가정 신유년(1561)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는데, 악공을 시험할 때에 쓰는 악보와 책을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합자보(合字譜)를 버리고 다만 거문고와 상하 괘(卦)의 차례만 있으며, 손가락을 쓰는 법과 술대를 쓰는 법은 없으니, 거문고를 처음 배우는 자들이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악사 홍선종을 시켜 당시의 곡조를 모으고 약간의 악보를 보태어, 합자보를 고쳐 내게 하였다. 또 허억봉에게 적보(笛譜)를 만들게 하고, 이무금에게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그 가사와 육보(肉譜)를 함께 기록했다. 홍선종은 기보법(記譜法)에 통달하였고, 허억봉과 이무금은 젓대와 장구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들이다.” 이달의 시에는 그가 악사(樂師)로 소개되고, 서성의 시에는 전악(典樂)으로 소개된다. 관노 출신이었지만 장악원 연주자 사이에 솜씨를 인정받아 연주 책임자까지 승진한 것이다. 그의 아우 허롱도 악사였다. 허씨대종회 허장렬 부회장은 “허조(許稠)가 좌의정으로 있던 세종 때까지는 하양 허씨가 떳떳한 양반이었는데, 아들 허후와 손자 허조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가 죽고 자손들은 관노가 되어 충청북도 괴산군에 배속되었다.”고 고증했다. 그래서 허임의 선조 묘소가 괴산에 있게 된 것이다. 관노가 된 허임이 좌의정 김귀영의 계집종과 부부가 된 사연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데, 허임기념사업회 손중양 이사는 이렇게 추측하였다. 허임이 태어났다고 추정된 1570년 직전에 김귀영이 예조판서가 되었다.‘금합자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장악원의 대표적인 연주자로 인정받은 허억봉은 당연히 김귀영의 집에 자주 부름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계집종 박씨와 눈이 맞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관노인데다 어머니도 여종이었으면 허임은 당연히 종이 되었어야 하는데, 허임을 비난하는 글에도 그가 종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아버지가 전악까지 오르면서 제도에 따라 면천되고, 허임도 천인의 신분을 벗어난 것이다. ●어머니를 고쳐준 의원에게 품을 팔며 침술 배워 어머니 박씨가 병에 걸렸는데, 집이 가난해 의원을 불러다 치료할 수가 없었다. 의원이 진맥해서 처방을 내주어도 약재가 비싸기 때문에, 서민들은 몇 차례 침만 맞고도 고칠 수 있는 침술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허임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침 놓은 수고비조차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 놓아준 의원의 집에 가서 잡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치료비를 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눈썰미가 있던 허임이 침구법을 배운 것이다. 신통한 침술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75세 때에 자신의 평생 경험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이란 책을 냈는데, 그 머리말에서 자기가 침술을 배운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명민하지 못한 내가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오랫동안 공들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을 떴다.” ‘의가(醫家)’라고만 표현했는데, 앞뒤 문맥을 보면 침의였던 듯하다. 전의감이나 혜민서에서 의학생도로 정식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스무살이 갓 넘자마자 현장에 나가 침술을 베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을 따라 황해도, 충청도 등지를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광해군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1595년에는 종6품 의학교수가 되었으니, 체계적으로 의술을 배우지 않은 그로서는 상당히 빠르게 승진한 것이다. 의원은 크게 약을 쓰는 약의(藥醫)와 침을 쓰는 침의로 나뉘어지는데, 약의는 의과에 합격해야 했고, 침의는 민간 출신도 많았다. 약의를 침의보다 높게 여기긴 했지만, 병에 따라 약의와 침의의 역할이 달랐으며, 약재가 넉넉지 않은 전쟁 중에는 침의의 할 일이 많았다. 허임을 치종교수(治腫敎授)라고도 표기했으니, 외과적인 치료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여러 의원들이 자주 입시하여 치료했는데, 실록에는 허준과 허임의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특히 1604년 9월23일 한밤중에 편두통을 일으키자 선조가 허준에게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었다. 허준이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만,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룁니다. 허임도 평소에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선조가 병풍을 치게 하고, 허임에게 침을 놓게 했다.50대의 허준이 30대의 허임의 침술을 임금 앞에서 인정했는데, 약으로 며칠 끌다가 침을 맞고 완쾌된 선조는 한 달 뒤에 허임을 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시켰다. 허임이 현역에서 물러나 공주에 살 때에도 광해군은 그를 왕궁으로 불러 침을 맞았으며, 너무 늙어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처방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는 한평생 치료경험을 집대성해 ‘침구경험방’을 지었는데, 내의원 제조 이경석이 발문을 썼다. “태의 허임은 평소 신의 기술을 가진 자로 일컬어져 평생 구하고 살린 사람이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그간 죽어가던 사람도 일으키는 효험을 많이 거두어 명성을 일세에 날렸으니, 침가(針家)들이 추대하여 으뜸으로 삼았다.” 18세기 초엽에 조선으로 유학을 온 오사카 출신의 일본 의사 야마카와(山川淳庵)가 ‘침구경험방´을 일본에 가지고 가서 1725년 일본에서 간행하였다.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를 통해 침술 전승 허임이 공주에 정착하자 후손들이 서울의 중인들과 연결되지 못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제자들을 통해 대대로 전수되었다.‘급유방(及幼方)’이라는 의서에 숙종시대 명의 두 사람을 소개했는데, 이들이 모두 허임의 제자였다. 그 기사는 이렇다. “숙종시대에 태의(太醫) 최유태와 별제(別提) 오정화는 모두 허임에게서 침술을 전수받아 당대에 이름났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그 침술의 연원을 전해들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최유태는 9대 의원으로 이름난 청주 한씨 출신이다. 최귀동부터 계손, 덕은, 준삼, 응원, 유태를 거쳐 만선, 익진, 택증과 택규에 이르기까지 9대가 모두 의원으로 활동했다. 응원은 내침의(內針醫)인데,23세 되던 1651년 의과에 합격한 작은아들 유태는 아버지의 침술을 전수받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았다. 응원의 맏아들 유후는 1639년 의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후손들도 만상, 익명, 홍훈까지 의원으로 활동했다. 오정화의 집안은 11세 오인수까지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지만,13세 오구가와 14세 오대종이 무과에 합격해 무반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맏아들인 15세 오인량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가문이 되었다. 둘째아들인 오제량은 무과에 급제해 무반의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그의 아들 오정화(吳鼎和)가 역관의 딸과 결혼했지만 가업을 잇지 않고 허임의 침술을 전수받으면서 그의 후손 가운데 한 계파는 역관으로 이어지고, 한 계파는 의원으로 이어진다. 의과에 합격해 활인서 별제(종6품)까지 오른 오정화는 침만 잘 놓은 것이 아니라 약까지 처방을 내려 의약동참의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의 후손들은 17세 지철,18세 덕신,19세 명검,20세 인풍까지 여러 대에 걸쳐 모두 침술 의원으로 대를 이었다. 오정화의 아들 17세 지항부터 24세 경석까지 8대에 걸쳐 역관을 낸 것도 유명한데, 이미 26회부터 29회까지 4회에 걸쳐 역관 오경석과 오세창의 중인 활동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오경석의 사위 이용백은 대표적인 중인 집안의 족보를 집대성한 ‘성원록’ 편찬자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이 책의 해주 오씨 항목에서 역관으로 이어지는 17세 지항의 계파를 정통으로 놓고, 의원으로 이어지는 17세 지철의 계파를 왼쪽에 배치하였다. 허임의 후손들은 중인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제자 최유태와 오정화를 통해 대대로 전수되면서 중인 침의의 전문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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