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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나가는 종교 다큐… 비결은 ‘휴먼스토리’

    잘나가는 종교 다큐… 비결은 ‘휴먼스토리’

    종교 영화는 극장가에서 그리 대접받지 못한다. ‘미션’(1986),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등 예외가 있긴 하지만, 흥행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종교 다큐멘터리는 스크린에 걸기조차 어려운, 말 그대로 찬밥 신세였다. 그러다 보니 교회나 성당에서 교인끼리 공동 관람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랬던 종교 다큐가 최근 들어 상업적인 경쟁력을 지닌 장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2년 새 10만명 안팎을 동원한 작품만 해도 독일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 등 4편이나 된다. 이쯤 되면 다큐멘터리로는 ‘초대박’ 수준이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바보야’와 고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법정스님의 의자’가 5월 극장가에 나란히 걸린 것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김수환 추기경·법정스님 5월 극장가 나란히 휴먼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강한 ‘법정스님의 의자’는 지난 12일 CGV의 다양성영화전용관인 무비꼴라쥬 9개관에서 개봉했다. 19일부터는 전국의 예술영화 전용관 등 8개관이 더 늘어난다. 지난달 21일 개봉한 ‘바보야’는 17일 현재 1만 5758명을 불러모으는 등 순항 중이다. 영화계는 이렇듯 소리 없이 약진하는 종교 다큐의 힘을 우선 ‘휴먼 스토리’에서 찾는다. ‘법정스님의 의자’ 마케팅을 맡은 키노아이DMC 박주원 대리는 “(작품이) 특정 종교색을 띠기보다는 보편적인 수행자의 삶을 그린 휴먼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서 폭넓은 공감을 얻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종교 다큐는 물론, 독립영화를 통틀어 ‘워낭소리’(2009) 이후 최고 히트작이라는 ‘울지마, 톤즈’도 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인 아프리카 봉사 인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해 9월 초 개봉해 8개월 넘게 상영되면서 누적관객수 44만명을 돌파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관객과 극장의 인식이 달라진 것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는 295만명을 동원한 ‘워낭소리’가 한몫했다. 마니아의 전유물 정도로 여겨지던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제 돈 내고 봐도 아깝지 않은 장르라는 인식 전환이 이뤄진 것. 극장이나 배급사들 또한 장기 상영을 통해 다큐멘터리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학습효과를 얻었다. 마침 ‘워낭소리’ 이후 잇따른 종교 다큐멘터리의 작품성도 뒷받침됐다. 2009년 4월 개봉한 신현원 감독의 ‘소명’은 단 한 곳에서 상영됐는데도 9만 7314명을 모으면서 종교 다큐 흥행의 첫 단추를 끼웠다. 그해 12월에 나온 2시간 48분짜리 ‘위대한 침묵’도 10만명 가까이(9만 5334명) 동원했다. 지난해 1월에는 김종철 감독의 ‘회복’이 16만 663명을 모았다. ●‘워낭소리’가 준 다큐영화 호감도 한 몫 물론 종교 커뮤니티의 티켓 파워도 빼놓을 수 없다. 특정 종교 모임에서 상영관 한 회차를 아예 통째로 대관하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SNS)의 평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20대와 달리, ‘구전’에 의존하는 중장년층이 주소비층인 탓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상규 CGV 홍보팀장은 “‘소명’ 이후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잇따르면서 종교 다큐가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잡는 추세”라면서 “(아무래도 마니아층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독립영화에 비해 일반 관객을 흡수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커 장기 상영이 가능한 것도 흥행에 플러스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사설] 석면으로부터 우리 아이들 구하자

    아이 키우기 어려운 나라에 또 하나 위험이 드러났다. 서울의 학교 건물 대부분에 석면이 포함된 건축재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의 유치원 및 초·중·고교 교실 5만 4279곳 중 87.8%, 4만 7694곳의 천장과 칸막이, 바닥재와 벽면재에 석면 의심 건축재가 사용됐다는 것이다. 또 학교 공사 전후에 실시한 공기질 검사에서는 실제 석면이 검출된 곳도 무려 829곳이나 됐다고 한다. 뜯어보지 않았을 뿐, 아이들이 교실의 석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석면이란 솜같이 부드러운 섬유 모양의 규산광물로 한 가닥 굵기가 머리카락 5000분의1에 불과하다. 내구·내열·전기 절연성이 뛰어나 건축자재나 전기제품 등에 사용되는 물질이다. 하지만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후 선진국에서는 퇴출되기 시작했다. 일본과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60여개국은 석면 사용을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금지, 규제하고 있다. 20~30년의 잠복기를 거쳐 폐암이나 후두암과 석면폐, 늑막·흉막에 암이 생기는 악성 중피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조사가 잇따라 ‘침묵의 살인자’ 혹은 ‘조용한 시한폭탄’으로 불린다. 국내에선 1970년대부터 석면이 함유된 건축자재 등이 학교와 공공건물 등에 많이 사용됐다. 이들 건물이 낡으면서 공기 중에 석면 가루가 날려 위험하다는 경고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면역성이 약하고 민감한 아이들이 생활하는 교실 공간을 생각할 때 불안감은 커진다. 아이들이 꿈을 키워야 할 교실이 석면 물질을 방치한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미래의 국가 인적 자산인 우리 아이들을 석면의 공포로부터 구하기 위해 아이들의 교실만은 깨끗하고 안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앞으로 석면 제거를 위해 학교 건물의 철거와 폐기물 처리를 할 때도 세심한 관리가 이뤄지기를 촉구한다.
  • [데스크 시각] 금감원이 사는 길/박정현 경제부장

    [데스크 시각] 금감원이 사는 길/박정현 경제부장

    저축은행 사태는 금융감독원 비리로 발전됐고, 이제는 ‘금융강도원’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상황이다. 금융감독원 사태를 보면서 국회 청문회를 다시 들어봤다. 지난 4월 20일 국회는 전·현직 금융 수장을 불러모아 저축은행 부실화 원인 규명 및 대책 마련 청문회를 가졌다. 참석한다, 안 한다는 논란 끝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참석해 뉴스 가치는 어느 때보나 높았지만 차분히 청문회 중계를 지켜볼 여유는 없었다. 한달 가까운 시간이 지난 시점에 굳이 국회 홈페이지를 찾아가 동영상을 다시 들여다본 까닭은 국회의원들이 금융 수장에게 뭐라고 했을지가 궁금해서다. 그리고 금융수장들은 어떤 방어 논리를 폈을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실 저축은행 정책을 편 금융위의 잘잘못에 관심이 집중됐고, 금감원은 책임 공방에서 살짝 비켜 있는 듯했다. 회의는 오전에 시작됐건만 이헌재·진념 전 부총리는 오후 4시쯤 느긋하게 출석했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금융 수장을 대상으로 정책 잘못을 따졌고, 야당 의원들은 이명박 정부의 금융 수장을 타깃으로 삼는 분위기였다. 이헌재·진념 전 부총리, 전광우·진동수 전 금융(감독)위원장, 김종창 전 금감원장 등의 전직 수장 5명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김석동 금융위원장, 권혁세 금감원장 등 8명의 증인. 그들은 명성답게 국회의원들의 질타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정책적인 실패였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실패였다고 인정하라는 식의 국회의원 추궁에 수장들은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면서 “지금이라도 그때의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부실의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풍당당했다. “공직자라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에둘러 책임을 인정하는 ‘따거’의 모습을 보여준 이는 윤증현 장관 정도가 유일했다. 우리나라에는 왜 앨런 그린스펀 같은 이가 나오지 않는가. 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시절에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지난해 고해성사했다. 자신의 정책이 70%는 옳았지만, 30%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틀린 것 같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일부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무려 21년 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맡았던 그로서는 경제정책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했을 법하다. 숱한 금융 수장들이 정책수립과 집행을 했건만 공식 사과는 김석동 위원장의 몫이었다. 김 위원장은 3월 17일 저축은행 영업정지 조치를 하면서 사태가 여기까지 온 데 대해 대국민사과를 했었다. 저축은행이라는 폭탄돌리기를 하다가 자신의 임기에 터진 것을 놓고 전직 금융 수장들을 대리한 포괄적인 사과의 성격이다. 잘못된 저축은행 정책을 펴서 영업정지 사태를 빚고, 예금주들에게 불편을 준 데 대한 사과인 동시에 예금한 돈 가운데 5000만원이 넘는 돈 2173억원을 찾지 못하게 된 3만 2000여명의 예금주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뿐이다. 직원이 강남 이사 비용 명목으로 2억원을 받고, 승용차를 받아 챙긴 사실이 밝혀져도 금감원은 말이 없다.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대통령이 금감원을 방문해서 유례 없는 질타를 해도 마찬가지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인가. 침묵 속에는 현재의 소나기가 시간이 지나면 곧 그칠 것이라는 안일함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자신들은 평균 연봉 9000만원을 받으면서 ‘소박하게’ 살고 있을 뿐이고, 일부 직원들이 저지른 개인 비리에 불과한데 왜 금감원 조직 전체를 흔드느냐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현재의 검찰 수사 진행상황이 본질과 달리 왜곡돼 있다는 불만도 가질 법하다. 금감원은 사상 최대 규모라는 인사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조직 추스르기도 중요하겠지만 금감원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한다. 수습책에 앞서 밥그릇 싸움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금감원이 사는 길의 시작은 반성과 사과다. jhpark@seoul.co.kr
  • [과학벨트 대전 대덕 선정] 정치권 반응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가 대전 대덕지구로 확정된 것과 관련, 정치권은 지역별로 반응이 크게 엇갈렸다. 영호남 출신 의원들은 ‘객관성이 결여된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판한 반면, 충청권 의원들은 대체로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는 정부 결정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영남 지역 의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배은희 대변인은 “법 절차에 근거해 전문가들의 판단과 국가 미래와 경제성을 고려한 결정”이라면서 “지역 균형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당내 영남 지역 의원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경북도당위원장인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과학벨트 입지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떠나 지역 안배 차원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결정됐다.”고 비난했다. 대구에 지역구를 둔 박근혜 전 대표는 침묵을 지켰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이 문제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말할 위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광주·전남 의원들도 ‘짜 맞추기식 정략 심사’라고 비판했다. 충청권 유치 방침을 세워 놓고 다른 지역을 들러리 세웠다는 것이다. 과학벨트 호남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인 민주당 김영진 의원은 “광주가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반 안정성, 용지확보 용이성에 대해 심사가 축소됐다.”며 일부 연구원 분산 배치에도 “생색 내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정 결과 백지화를 위한 법적 투쟁도 검토하고 있다. 충청권 의원들은 반색했다. 그러나 세종시 유치 실패에 따라 대전과 충남·북 간 입장 차는 있었다. 권선택 자유선진당(대전) 원내대표는 “정부가 충청권에 조성하겠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반겼다. 강주리·허백윤기자 jurik@seoul.co.kr
  • [5·16 50돌] 5·16을 말한다

    [5·16 50돌] 5·16을 말한다

    ■ “8기 JP가 주도했다고? 5기가 핵심 세력이었지” 주역 중 1인 김재춘 前중앙정보부장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김재춘(84·육사 5기)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은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였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김재춘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와 1955년 육군대를 졸업했다. 1957년 연대장을 지낸 뒤 1961년 5·16 당시 5·16 군사정변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지냈으며 1963년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이후 무임소장관, 자민당 최고위원 등을 거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김포·강화, 민중당) 1973년 제9대 국회의원(고양·김포·강화, 민주공화당)을 지냈다. 1974년 축산단체연합회 회장,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 “5·16前 JP가 찾아와 정치발언 하기에 내쫓아” 反혁명분자 몰렸던 김웅수 당시 6군단장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소장)이었던 김웅수(88)씨. 수도권 요충지에 포진한 6만명의 예하 병력을 법을 어겨 가며 진압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반 혁명세력으로 몰렸고 1년 뒤 군사정권의 간접적 압력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시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라는 질문에 “쿠데타로 본다.”고 했으나, 답변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5·16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단장급 이상 야전군 지휘관 회의가 5월 17일 강원 원주의 야전군사령부에서 예정돼 있었어요. 16일 열리는 체육행사에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25~26명의 지휘관들이 15일 원주에 다 모였어. 16일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는데 이한림 야전군사령관이 관사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거야. 그래서 가 보니 이 사령관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면서 “각자 부대로 돌아가 병력을 장악해라. 병력 이동의 빌미가 될지 모르니 부대에 비상을 걸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6군단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6군단의 작전지휘권은 내가 아니라 미 1군단장이 갖고 있었어요. 불법을 진압하려 불법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북한군 교신이 급격히 늘어나기에 비상을 걸었지. 비상을 걸면 자동적으로 1개 사단이 완전무장해서 특정지구로 출동하게 돼요. 이 일로 나중에 나는 반 혁명세력으로 간주되게 되었죠. →미군에는 조치를 요구했나요. -18일 나의 매부인 강영훈 육사교장이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불허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라이언 1군단장한테 “왜 1군단이 갖고 있는 서울 비상계획은 쓰지 않는가.”라고 따졌어. 그날 저녁 라이언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장군이 “I will do(하겠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 그날 저녁 이 장군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와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 다음날 아침 이 사령관이 소집한 군단장 회의에 가려고 횡성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미군 대령이 “이 장군이 이미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면서 되돌아가라고 하더라고. →결국 미군이 묵인한 건가요. -매그루더 장군이 누구를 진압할 성격이 못 됐어요. 강직하지 않았어. →미국이 5·16을 사전에 감지했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17일 마셜 그린 미국 부대사가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서한을 보내 왔거든. →6군단장으로는 언제까지 근무하신 겁니까. -20일 대통령 특사가 온다기에 군단 비행장으로 나갔어요. 도착한 비서 2명이 건넨 윤보선 대통령의 서신에는 ‘대립을 피하고 쿠데타에 협력하라.’라는 취지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그날 장도영 장군이 21일 오후 1시쯤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서울로 떠나려는데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불길하다는 거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으며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달려들어 막아서기에 내려보니 집사람이더라고. 그래서 “군인의 아내이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아이들이나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는 차에 올랐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어. 의사당 앞에 도착하니까 어떤 장교가 다가오더니 권총을 옆구리에 대고 같이 가자고 해요. 차지철이었던 것 같아. 나를 마포 형무소에 집어넣더라고. →박정희 소장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나요. -잘 몰랐어. 하지만 그 사람이 청렴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1957년 내가 군수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군수기지사령관에 추천했어요. →직접 본 박정희 소장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강직한 느낌이었어요. 군수기지사령관 취임식 참석차 부산 동래에 내려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숙소로 찾아와서는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대로 되겠습니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군인이 혁명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나.”라고 했지. →김종필씨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5·16 전에 김종필 소령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부패한 장성들은 군대에서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부패한 장성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소문으로 알지 실제로는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정치적 발언하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미국으로 떠난 이후 두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나요. -1972년인가 장모님이 위독하셔서 한국에 갔었어.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고. →청와대로 갔나요.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기에 “이제는 사회 문제보다 개인사정이 더 중요하다. 막내 아들이 대학 들어가는데 3년은 더 있어야 나올 수 있다.”고 했어. 그랬더니 박정희가 “기업체를 순방하고 군부대도 순방해 달라.”고 그래요. 내가 “장모님 병 때문에 어렵다.”고 했더니 “나이 든 사람의 병이란 늘 그런 것 아니냐.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포항제철하고 과학기술연구원인가 두 군데 돌아봤어. →김종필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만났더니 “선배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나라가 부패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고 했지. →5·16은 필요했다고 보십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날 국민 전체가 수긍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걸 보면, 5·16이 나라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구나, 국민의 감정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김웅수는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청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 김조현의 거처로 옮겨 6살 때까지 중국 하얼빈 근처 독립군 부락에서 살았다. 일본 관동군 학도병으로 끌려간 뒤 일본 센다이 예비사관학교에 편입해 장교가 된다. 일본 야마가타 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지 몇 달 뒤 일본 패망으로 해방된 한국에 들어왔고, 국군 장교가 됐다. 5·16 당시 혁명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뒤 집행유예로 석방,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등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밟고 워싱턴 DC의 가톨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일했다. 여동생이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다.
  • 김기덕감독의 신작 ‘아리랑’ 한국영화계 정면비판 화제

    김기덕감독의 신작 ‘아리랑’ 한국영화계 정면비판 화제

    2008년 ‘비몽’ 이후 침묵을 지켜온 김기덕(51) 감독의 신작 ‘아리랑’이 13일(이하 현지시간) 칸 영화제 공식 부문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으로 프랑스 칸의 드뷔시관에서 공개됐다. ‘아리랑’은 셀프카메라 형식으로 김 감독이 직접 제작한 데다, 자기와 또 다른 자아, 그것을 찍는 감독 등 김 감독이 1인 4역까지 맡으면서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 왔다. 마침내 공개된 ‘아리랑’은 자신의 주변인들과 한국 영화계를 정면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화제다. 특히 김기덕 사단 출신으로 잇따라 히트작을 내고 있는 장훈 감독(‘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고지전’ 등)과의 문제를 거론했다. 김 감독은 “장 감독은 ‘의형제’ 이후 2편을 함께 하기로 했으나 나도 모르게 메이저와 계약했다.”면서 “유명 배우들이 캐스팅됐으니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이해하나 깨끗이 떠난다고 하면 될 것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떠났다.”고 주장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정조국 2호골,박주영은 골 침묵, 모나코 18위로 강등권

     정조국(오세르)이 시즌 2호골을 터트리며 팀을 패배에서 구했다. 하지만 박주영은 골을 터트리지 못했고 팀은 강등권으로 떨어졌다.  정조국은 16일(한국시간) 새벽 프랑스 발랑시엔의 넝제세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2010~2011 프랑스 프로축구 1부리그 발랑시엔과의 경기에서 0-1로 지고 있던 후반 42분 동점 헤딩골을 터트렸다. 정조국은 지난 2일 마르세유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정조국은 패색이 짙던 후반 42분 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페널티 지역 왼쪽 부근에서 헤딩으로 동점골을 뽑아냈다. 오세르는 정조국의 천금같은 동점골로 최근 9경기 연속 무패행진(4승5무)을 이어갔다.  한편 발목 부상에서 벗어난 박주영(모나코)은 두 경기 연속 풀타임 출전했지만 시즌 12호골 사냥에는 실패했다. 모나코는 전반 14분 터진 벤자민 무칸조의 결승골로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했지만 후반 인저리 타임에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면서 1-1로 비겼다.  모나코는 이날 무승부로 8승17무11패가 돼 17위에서 강등권인 18위로 추락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김종필, 육사 8기생들이 혁명 주체세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종필, 육사 8기생들이 혁명 주체세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이날 김 이사장은 박정희 소장의 지시에 의해 당시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거사의 취지’를 알리는 서신을 전달하는 등 여러 중요 역할도 했다. “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여서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론스타와 계약 연장 협상 외환銀 인수안 강구할 것”

    “론스타와 계약 연장 협상 외환銀 인수안 강구할 것”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은 13일 긴급 이사간담회를 열고 외환은행 인수 무산위기 대응책을 논의했다. 오전에는 김종렬 사장 등 실무진과 마라톤 회의를 했다. 직원들에게는 “(전날) 금융위 결정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해석하고, 계약 만료일 이전에 매매계약 연장을 포함한 인수추진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독려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사퇴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배수진을 쳤지만, 일단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거취 문제에 대한 언급을 미뤘다. 하나금융 주가는 이날 하한가를 기록했다. 재무 담당 직원들은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유상증자에 참여한 주주 등에게 콘퍼런스콜(전화회의)로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동안 침묵하던 하나은행 노조도 “당국의 무책임한 자세가 시장 혼란을 부추기고, (관료들의) 일신상 보신을 위한 무소신한 자세가 국가경제를 좀먹고 있다.”고 강도 높은 비난 성명을 내놓았다. 론스타는 국가투자자중재(ICSID)를 통해 금융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론스타는 2006년 국민은행, 2008년 HSBC와의 계약 파기 이후 이번 계약도 파기될 경우 매각 승인 지연에 따른 직간접적 물적 피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들어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이사간담회 직후 김 회장은 기자들과 만났다. 얼굴빛이 어두웠고, 목소리는 가끔 잠겼다. 아래는 일문일답. →론스타와의 계약연장 협상에서 성과가 있었나. -전날 오후 늦게 금융위 결정이 나왔기 때문에 아직 접촉 중이다. 금융위 결정 전까지 론스타와 계약연장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서 HSBC의 인수무산 사례 등을 들어 이번에도 무산되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재판 역시 1심에서 250억원의 벌금 판결이 나왔다가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해 다시 결과가 뒤집히더라도 론스타 측이 250억원을 걸어 두고 재판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우는 에스크로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있다. →인수 보류로 인한 하나금융의 금전적 손실은 어느 정도인가. -피해가 크다. 당장 오늘 시가총액이 떨어지고 대외 신인도가 낮아졌다. (외환은행 인수 지연으로) 유상증자 투자자 등 하나금융 주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사주 매입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외환은행 인수 뒤 해외은행 M&A를 구상했는데, 인수가 혹시 무산되더라도 추진할 것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문화마당] 아우들을 위하여/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아우들을 위하여/신동호 시인

    가는 곳마다 추억이 삶을 흔들어댄다. 어느 날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은 창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나가셨다. 30분, 침묵의 시간 동안 스무 살 청춘들은 어리둥절한 채 갖가지 상상으로 창밖의 벚꽃을 쳐다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지는 꽃잎들, 한참이 지나서야 그날이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5월 18일이란 것을 알았다. 실로 이론이 아니라 인간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1980년대의 청춘들에게 강의실은 인간의 지난한 역사를 배우는 현장이었고, 거리도 공장도 감옥도 살아 있는 강의실이었다.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나간 이들의 추억이 담긴 곳,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세상이 좋아지기를 꿈꾸고 ‘그들’을 떠올리며 청춘의 열정을 끌어낸다. ‘인간은 진실이 아니라 기억으로 산다.’는 스트라빈스키의 말이 생각나는 건 그런 이유이다. 나는 지금 그 강의실에 들어선다. 그날처럼 꽃잎은 지는데, 과연 침묵으로 조카뻘 아우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 낭만은 조심스러운 일탈이며, 저항은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일 뿐인 듯. 취직을 걱정하는 젊음들에게 가난을 친구로 삼으면서 시대에 저항한 신채호 선생을 가르치는 게 가당키나 할까. 고등학교 음악선생 자리를 버리고 늦은 나이에 독일 유학길에 오른 작곡가 윤이상의 세계적 성공, 또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절된 귀국의 희망, 그 안에 담긴 절망과 낭만적 삶을 설명하는 게 어울리기나 할까. 나는 결국 인간을 가르치지 못하고 이론만 떠들다 나오고 만다. 격정적으로 사랑했고 그로 인해 견고한 지배이데올로기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괴테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를 떠올려 보는 건 그 때문이다. 인간의 시대는 감정이 살아 있어야 하고, 감정이 살아 있는 청춘들의 시대에 우리는 비로소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름 붙일 수 있을 터. 아우들의 추억에 인간 삶의 생생한 현장은 얼마나 남게 될까. 사랑했고, 고뇌했고, 미지의 세상을 동경했고, 또 절망하고 좌절했던 인간들. 그 인간들에 대한 기억이 아우들을 또 인간답게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지만… 미안하다. 인간이 기계를 만지며 인간이 수술대 위에서 메스를 든다. 인간이 만진 기계가 인간을 이롭게 하고, 메스가 지나간 자리를 봉합한 인간이 퇴원하여 메스를 만든다. 인간의 역사, 정신, 문화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자리에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한다. 서울 충무로 뒷골목의 인쇄공들은 역사의 한 시절 구텐베르크의 동료들일 수 있으며, 원양어선의 주름 깊은 어부는 산타마리아호에서 콜럼버스에게 신대륙의 발견을 알린 선원일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소를 가축화한 농부를 떠올려 보자. 그는 그 시대의 스티브 잡스와 다름없다. 존중받지 못할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의 삶을 축적해 새로운 게 나온다. 인간을 이해한 과학과 기술의 성공은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청년실업률이 높은 건 대학에서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 과잉 공급으로 인한 것’이라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은 무엇인가. 인간 없이 기술만 남기겠다는 말 같다. 이 나라를 24시간 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을 만들겠다는 말 같다. 인간은 없고 실용만 남기면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도 모두 사라질까. 그러면 좋을까. 창의적 발상은 한낱 비합리적 견해로 취급받고 책임지지 못할 행동에 대해서는 비웃음만 넘친다. 스무 살이 스무 살로 살지 못하고 서른, 혹은 마흔을 준비하는 과정의 삶으로 소비된다. 비루하다. 기성을 뛰어넘는 스무 살 작가의 탄생을 본 지 정말 오래됐다. 대학을 뛰쳐나와 세상을 뒤흔든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우들아! 부탁하건대, 인간을 가르치지 못하고 이론만 떠들고 나온, 나 같은 선생을 내쫓아라. 거리에서도 배울 건 많다. 미술관 수업이 필수로 있는 미국 예일대학의 의대생들처럼 미술 작품을 두고 토론하라. 인생들을 통찰하고 기억하면서 아우들은 세계의 주인이 될 터이다.
  • “아버지 수장은 모욕” 빈라덴 아들들 포문

    “아버지 수장은 모욕” 빈라덴 아들들 포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침묵하던 오사마 빈라덴의 아들들이 미국을 향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특히 그동안 아버지의 테러 행각을 규탄하며 ‘평화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넷째 아들 오마르(30)가 “미국이 기본적인 국제법마저 어기고 아버지를 사살했다.”며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정조준했다. 또 ‘테러의 황태자’로 불리며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막내 아들은 미군 특공대의 급습 작전을 피해 파키스탄 은신처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여 아들들이 피의 보복전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오마르는 9일(현지시간) 형제들을 대표해 발표한 ‘아들들의 성명’을 통해 “왜 미국은 빈라덴을 체포한 뒤 법정에 세워 세계인들에게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그는 성명서에서 “비무장 상태였던 빈라덴을 암살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며, 임의적 살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지난 2일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빈라덴 은신처에서 붙잡은 부인과 자녀를 석방하고 유엔이 빈라덴 사살에 대해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더불어 미국이 빈라덴을 수장한 데 대해 “유족과 추종자를 모욕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감정과 종교 규정에 도전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성명은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 흩어져 사는 3명의 아들이 함께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서명은 오마르 혼자 했다. 또 파키스탄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빈라덴의 부인들은 “은신처를 습격당한 뒤 막내 아들 함자(20)가 사라졌다.”고 밝혀 미국을 긴장시켰다. 백악관은 애초 함자가 작전 때 사살됐다고 밝혔으나 숨진 아들은 함자의 형인 할리드(22)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막내 아들이 작전 당시 은신처를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함자는 아버지로부터 훈련받으며 알카에다의 미래 지도자감으로 성장해 왔다. 그는 2007년 이슬람 극단주의 사이트에 올라온 선전용 영상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덴마크를 파괴하라.”며 테러를 조장했고 2007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 암살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미국은 알카에다가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빈라덴은 알카에다의 지도자이자 전쟁에 참여한 전투원이라며 빈라덴 사살이 국제법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아들들의 성명’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농담하느냐.”고 일축했다. 하지만 미국은 파키스탄마저 “작전 중 추락한 헬기 잔해를 중국에 넘기겠다.”고 밝혀 당황하고 있다. 이 기종은 기존의 블랙호크기에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기능을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젠(殲)20’을 개발한 중국이 스텔스 헬기의 제작 기술까지 엿본다면 미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파키스탄의 한 정부 관료는 10일 미국 ABC방송을 통해 “우리는 잔해를 관찰하는 데 흥미를 느끼며 중국 측이 이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당국자들은 파키스탄이 중국의 미사일 기술에 접근하기 위해 미국의 첨단 군사장비 잔해를 중국에 넘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미국 정부는 빈라덴의 죽음과 관련해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자 시신 사진을 상원 군사위원회 및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황우여·정의화 회동 불발… 與 힘겨루기 양상

    한나라당 황우여 신임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에 지명된 정의화 국회 부의장의 회동 요청을 사실상 거부했다. 비대위원장이라는 ‘한시적 당권’을 놓고 소장파를 등에 업은 황 원내대표 측과 주류인 친이계가 격돌하는 양상이다. 정 부의장은 9일 오전 황 원내대표에게 비대위 구성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황 원내대표는 오후 기자들과 만나 “의원총회 전에는 안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황 원내대표가 주류 중심의 당내 기류에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7일 안상수 전 대표 주재로 열린 최고위에서 친이계인 정 부의장이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됐으며, 비대위원장이 당 대표 역할을 맡도록 결정됐다. 황 원내대표는 “당헌·당규에는 원내대표가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돼 있다.”면서 “4·27 재·보궐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안 전 대표 외에 다른 최고위원들이 모두 물러나는 것은 당을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가 선출될 때까지 자신이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기존 최고위원들이 동참하는 ‘임시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11일 비대위 재구성을 위한 의총을 열 것으로 예상된다. 소장파 의원 모임인 ‘새로운 한나라’도 황 원내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 8일에 이어 의총 전에 한 차례 모임을 더 갖는 등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절차상의 문제가 있는 비대위를 의총에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장파의 리더 격인 정두언 전 최고위원은 “새 원내대표가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아야 하며, 의총을 열어 의원들의 총의를 모아 결론을 내리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어렵게 잡은 당 쇄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소장파는 2개월여 뒤로 예정된 전당대회 당권을 정조준하고 있어 여권 내 권력투쟁이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친이계는 ‘정중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침묵하지만, 언제든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친이계 의원은 “원내대표 경선 이전만 해도 비주류 측이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을 분리하는 ‘투톱 체제’를 요구하더니, 경선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둔 뒤에는 다시 원톱(원내대표)을 주장하고 있다.”면서 “원칙보다 정파적 이해를 앞세우는 것은 소장파도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의원은 “비대위도 자신(소장파)들 의도대로 운영하기 위해 판을 깨려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요구가 지나치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홍상수 연승? 김기덕 재기? 나홍진 반전?

    홍상수 연승? 김기덕 재기? 나홍진 반전?

    ‘세계 영화의 축제’ 제64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가 11일(현지시간) 개막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이트 인 파리’를 시작으로 22일까지 계속된다. 올해의 키워드는 ‘유럽’과 ‘여성’으로 압축된다. 한국영화의 선전도 기대된다. ●경쟁부문 유럽·여성 영화 초강세 경쟁부문 총 19편 가운데 유럽이 14편, 미국과 이스라엘, 호주가 각각 1편, 아시아에서는 일본 영화만 2편이 진출했다.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석권한 벨기에 출신의 다르덴 형제는 ‘로나의 침묵’(2008) 이후 3년 만에 신작 ‘셋 미 프리’로 칸을 다시 찾는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더 스킨 아이 리브 인’으로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 이후 2년 만에 칸에 도전한다. 미국의 거장 테렌스 말릭은 신작 ‘트리 오브 라이프’를 내놓았다. 2000년 ‘어둠 속의 댄서’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는 ‘멜랑콜리아’로 이들과 경쟁한다. 영화제 역사상 가장 많은 4명의 여성감독이 경쟁 부문에 진출한 가운데 2008년 ‘너를 보내는 숲’으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하네주 노 쓰키’)와 1999년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린 램지(‘위 니드 투 토크 어바웃 케빈’), 호주의 줄리아 리(‘슬리핑 뷰티’), 프랑스의 마이웬(‘폴리스’) 등이 대상인 황금종려상에 도전한다. 지금까지 여성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호주 감독이 유일하다. ●단편부문 신예 이정진 ‘고스트’ 기대 경쟁 부문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양대 공식 부문이라 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시선’에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이름을 올렸다. 역대 최다이다. 18편이 겨루는 ‘주목할’에 한 국가의 작품 3편이 초청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해 ‘하하하’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홍상수 감독의 2연패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비몽’(2008) 이후 은둔하던 김기덕 감독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아리랑’은 자전적 영화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궁금증을 더한다. 나홍진 감독이 새롭게 편집한 ‘황해’도 시선을 끌지 이목이 집중된다. 단편 부문의 선전도 기대된다. 스물네 살 신예 이정진 감독의 ‘고스트’가 모두 9편이 겨루는 공식 단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고스트’는 재개발 지역의 빈집에 숨어 사는 남자의 욕망과 황폐해져 가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봉준호·이창동 한국인 첫 심사위원장 봉준호 감독은 신인 감독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황금카메라상 부문에서, 이창동 감독은 비공식 부문인 비평가주간에서 각각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국내 영화인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MOFIA 그들의 침묵… 서민은 ‘시름’

    MOFIA 그들의 침묵… 서민은 ‘시름’

    금융권 전체의 불신을 몰고 온 저축은행 부실은 금융감독원의 감독 부실과 금융위원회의 정책적 실패가 만든 합작품이다. 금융위원회는 ‘모피아’로 구성돼 있다. 결국 총체적인 금융 불신의 뿌리에 경제 권력 ‘모피아’가 있다는 얘기다. 모피아들은 일찌감치 저축은행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을 알았으면서도 침묵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8일 “저축은행 부실을 파악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차선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밀린 숙제(저축은행 구조조정)를 지금 하려다 보니 부작용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금융위는 쓰러질 위기의 저축은행을 ‘업계 자율’ 또는 ‘시장 원리’라는 이름으로 대형 저축은행에 떠넘겼다. 비리의 온상이었던 부산저축은행도 대전·전주저축은행을 각각 2008년 11월과 12월에 인수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12개의 부실 저축은행이 같은 방식으로 처리됐다. 공적자금 투입 같은 정공법 대신 부실 떠넘기기 같은 편법으로 해결하면서 저축은행의 규제를 완화해 주는 당근으로 일관해 왔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부실을 떠넘겼으니 정부로서는 저축은행을 달래기 위해 ‘민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름을 저축은행으로 바꿔 주고 8·8클럽에는 법인 신용공여한도를 철폐해 PF 대출에 올인하도록 만든 것 등이 이런 차원의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모피아는 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전관예우라는 명분 아래 서로 자리 밀어주기를 하는 데 주력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석동 위원장은 지난 6일 금감원 쇄신 태스크포스(TF) 구성과 추진 방안 발표를 예고했으나 총리실의 제지로 이를 급히 취소했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은 오늘의 금감원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핵심적인 잘못은 금감원에 있지만 서민금융을 활성화한다면서 저축은행의 부실을 키워온 ‘관치 금융’이 금감원의 정상적인 감독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홍지민·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용어클릭] ●모피아(Mofia) 옛 재무부 출신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재무부(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를 말한다. 재무부 출신 관리들이 정계와 금융계 등으로 진출해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마피아에 빗대 모피아라는 말이 등장했다.
  • [하프타임] ‘음주운전’ 추신수 3경기째 침묵

    추신수(29·클리블랜드)가 음주운전이 적발된 이후 세 경기째 침묵하고 있다. 추신수는 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콜리시엄에서 계속된 미국프로야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원정경기에서 3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으나 5타수 무안타에 그쳤다.클리블랜드는 연장 12회 초 1사 1, 2루에서 잭 한나한과 루 마슨의 연속 안타로 2점을 올려 4-3으로 이겼다.
  • 그라운드제로의 침묵, 연설보다 강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9·11테러 현장인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해 헌화했다.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파키스탄 은신처에서 사살된 지 나흘 만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붉은색, 흰색, 푸른색 꽃들로 꾸며진 한 다발의 꽃을 바친 뒤 그 옆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묵념했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묵념할 때 진혼곡 같은 음악마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이었다. 이슬람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는 침묵을 택했다. 행사에는 찰스 슈머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 등 이 지역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재임 시 9·11테러를 겪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초청을 받았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그는 대변인을 통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뉴욕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성조기를 흔들며 오바마 대통령을 환영했다. 헌화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9·11테러 때 15명이 숨진 미드타운의 소방서를 방문해 소방관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곳은 10년 전 그 끔찍했던 날에 비범한 희생을 보여준 상징적 장소”라면서 “진심으로 여러분의 희생에 감사를 표시한다.”고 말했다. 그는 빈라덴 사살에 대해 “우리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파키스탄의 빈라덴 은신처를 습격한 미군 장병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희생 때문이었다.”며 “그들은 목숨을 앗긴 여러분의 형제들 이름으로 그 작전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맨해튼 제1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그 비극을 잊은 적이 없으며 뉴욕경찰과 긴급구조대원, 소방대원들이 보여준 용기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빈라덴 사살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한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헌화 후에는 9·11테러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비슷한 시간 워싱턴DC의 국방부 건물(펜타곤)에서도 간단한 추도의식이 진행됐다. 9·11테러 때 펜타곤을 타격한 항공기 테러로 189명이 숨진 바 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헌화를 한 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경례를 했다. 바이든 부통령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침묵의 헌화였다. 다만 경례를 할 때 진혼곡이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행사장에는 9·11테러 유족은 물론 테러 당시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던 도널드 럼즈펠드도 참석, 눈길을 끌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이재오 “분노·배신 웃어넘겨라” 트위터 글

    이재오 “분노·배신 웃어넘겨라” 트위터 글

    4·27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 침묵을 지켜 왔던 이재오(얼굴) 특임장관이 당내에서 제기되는 책임론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 장관은 3일 트위터에 “아들아, 가슴 깊이 분노가 치밀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하늘을 보고 허허 웃어 보아라.”,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허참 그게 아닌데’ 하고 웃어 넘겨라.”는 글을 올렸다. 아들에게 충고하는 식의 글이지만, ‘분노’와 ‘배신’ 등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쓴 것은 주류 퇴진론 등 자신을 겨냥한 움직임이 나오는 데 대한 불쾌감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이 장관은 재·보선 이후 현안과 관련된 언급을 피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던 터라 분노와 배신의 주체가 누구인지 등을 두고 이 글이 더욱 시선을 끌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왼손잡이는 겁쟁이?”…이색 연구 결과 눈길

    “왼손잡이는 겁쟁이?”…이색 연구 결과 눈길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공포감을 더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전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퀸마거릿대학의 심리학자 캐롤린 초드하리 박사팀은 최근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로 나눈 피실험자들에게 스릴러 영화인 ‘양들의 침묵’ 중 무서운 부분을 8분간 보여주고 그 내용을 말로 설명하게 했다. 실험 결과 왼손잡이들이 오른손잡이들보다 훨씬 더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같은 표현도 반복적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증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데, PTSD를 겪는 환자 중 왼손잡이의 비율이 오른손잡이의 두 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드하리 박사는 실험 결과에 대해 “우리 뇌의 기억 방식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났다. 공포심은 우뇌와 관련이 있는데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보다 우뇌의 활동이 우세하기 때문”이라며 “좌뇌와 우뇌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영국심리학 협회의 연례회의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사진=텔레그래프(왼손으로 서명 중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유럽 간 박근혜 정치엔 ‘침묵모드’ “국내 얘기는 국내서 할 때 있을 것”

    유럽 간 박근혜 정치엔 ‘침묵모드’ “국내 얘기는 국내서 할 때 있을 것”

    “지금은 제가 정확하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지도 못했고요.”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 중인 박근혜 전 대표는 국내에서 달아오르고 있는 ‘박근혜 역할론’과 관련, ‘침묵 모드’를 이어갔다. 지난 30일(현지시간) 네덜란드에서 베아트릭스 여왕을 예방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당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자고 총의를 모으면 수용하겠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말하고 “국내 얘기는 나중에 국내에 가서 할 때가 있을 것”이라면서 즉답을 피해갔다. 국내 정치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유럽 구상’은 한동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 수행인사는 1일 “공식 임무(행사)를 마치면 (국외 체류 기간에라도) 언급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특사임무를 끝내고 귀국하기 전까지는 관련 발언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럽 3개국 특사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청와대를 방문하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자연스럽게 여권 쇄신론에 대한 입장이 공개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편 박 전 대표는 베아트릭스 여왕 예방 때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동계올림픽의 평창 유치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베아트릭스 여왕은 “왕세자가 국제올림픽기구(IOC) 위원이고 평창도 다녀왔는데 좋은 인상을 가졌다고 들었다.”며 “여수박람회에는 하멜 표류기 원본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박 전 대표는 전했다. 두 사람은 새만금 농업전용용지에 첨단농업 국가인 네덜란드가 협조할 부분이 많은 만큼 양국이 긴밀하게 협조하자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고 덧붙였다. 박 전 대표는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이항기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부터 “이준 열사가 1907년 대한제국 특사로 온 이후 박 전 대표가 104년만에 대한민국 특사로 네덜란드를 방문했다.”는 감사의 뜻을 전달받고 “1907년엔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헤이그 만국박람회에) 입장도 안 시켜 줘 그분들 심정이 터질 것 같았을 것”이라며 “100년이 지난 후 우리 모습에 여러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부소장을 만나 격려했다. 박 전 대표는 1일 동포간담회 등을 시작으로 두번째 방문국인 포르투갈에서의 특사 일정을 시작한다. 헤이그·암스테르담(네덜란드),리스본(포르투갈)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서태지 입장표명하자 이지아 소송취하… 왜?

    서태지 입장표명하자 이지아 소송취하… 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태지·이지아 사태가 서태지의 입장 표명과 이지아의 소송 취하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그들의 결혼과 이혼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지 열흘 만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많아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서태지는 열흘 만인 지난달 30일 보도자료를 내고 “이지아와 1997년 10월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 생활을 시작했으나 성격과 미래상이 달라 2000년 6월 별거를 시작했고, 2006년 8월 부부 관계가 종결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지아와의 만남에 대해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편지와 전화로 연락하며 호감을 갖게 됐고, 1996년 은퇴 후 미국 생활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지내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둘은 결혼한 지 2년 7개월 만에 별거를 시작했고, 2006년 1월 이지아의 이혼 요청이 있은 후 6월 12일 이지아 측이 단독으로 미국 법정의 이혼 판결을 받으면서 8월 9일 부부관계가 종결됐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날 공식홈페이지인 서태지닷컴을 통해 14년 동안이나 결혼과 이혼을 숨겼던 이유와 심경을 밝혔다. 서태지는 “1996년 은퇴 후 가수 서태지가 아닌 평범한 자연인 정현철로 돌아가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평범한 생활을 소망했다.”면서 “은퇴 이후 힘겹게 얻은 최소한의 보금자리와 처음으로 누려 보는 평범한 일상을 보호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못한 데 대해서는 “2000년 이후 상대방과 헤어지는 수순을 밟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가수 서태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 헤어져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상대방을 세상에 발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내 마음에 담아둬야 할 비밀이 됐다.”고 설명했다. 서태지가 입장을 표명하자, 이지아도 같은 날 55억원의 위자료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취하했다. 서태지 측이 2주 동안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소취하가 성립되며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재판도 종결된다. 하지만 이지아가 14년 동안이나 지켜 온 서태지와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비밀이 공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번 소송을 감행한 이유와 돌연 소송을 취하한 배경을 둘러싸고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특히 서태지의 입장 표명과 이지아의 소송 취하가 같은 날 이뤄져 사전에 양측의 교감이 있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의 결혼과 이혼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인터넷에서는 둘의 사생활 파헤치기 광풍이 불었다. 이처럼 파문이 커지자 양측은 이번 소송을 장기적으로 끌고가는 데 부담을 느꼈고, 합의를 통해 서둘러 소송을 종식시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연예계 일각에서는 “양측이 10억원대의 합의금에 소송을 취하했다.”는 물밑 합의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 측은 1일 “이지아의 소 취하 사실을 몰랐다. 거액 합의설도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이지아도 이날 밤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소를 취하하며 그 어떤 합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지아가 소송을 제기한 배경도 미스터리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베토벤 바이러스’, ‘아테나: 전쟁의 여신’ 등을 통해 주연급 스타로 부상한 그가 자신의 결혼과 이혼 사실이 모두 알려질 것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이번 소송을 진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55억원이 큰돈이긴 하지만 이미지 타격으로 입을 손해는 더욱 막심하고, 앞으로 주연급 스타로 계속 활동하기 위해 포기할 수도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지아는 사건이 터진 지난달 21일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밝혔지만, 소송에 따른 파장과 결과에 대해 사전 대비나 각오가 전혀 없었는지도 의문이다. 특히 두 사람의 관계는 2000년 6월 이후 사실상 끝난 셈인데 11년이나 지나서야 재산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배경도 의문이다. 또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녀가 굳이 한국으로 와 전 남편이 활동하는 연예계에 데뷔한 이유 등 이번 소송을 통해 불거진 의문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이은주·이민영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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