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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잃어버린 핵무기/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잃어버린 핵무기/임병선 논설위원

    미사일 발사 시스템이 자리잡기 전에 미국과 옛소련은 비행기로 핵폭탄을 실어 날랐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에 떨군 인류 최초와 두 번째 원자폭탄도 전폭기들이 운반했다. 보통 핵무기를 분실하면 ‘부러진 화살’(broken arrow)이라 부르며 회수 작전에 들어간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이 잃어버린 핵무기 셋은 지금도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1958년 2월 5일 조지아주 타이비섬 상공을 날던 전투기 조종사는 안전한 착륙을 위해 핵폭탄을 떨궜다. 수면에 떨어지며 다행히 폭발하지 않았다. 숱하게 수색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65년 12월 5일 미국의 타이콘데로가급(級) 순양함에서 추락 사고로 전투기와 함께 사라진 B43 핵폭탄도 오키나와 근처 바다에 잠들어 있다. 1968년 5월 그린란드 툴레의 미군기지 화재 때 핵무기를 탑재한 비행기가 바다에 빠진 뒤 행방이 묘연하다. 1966년 1월 17일 스페인 팔로라메스 바다에서 벌어진 일은 더욱 놀랍다. 핵무기를 탑재한 두 대의 B47 폭격기가 비행훈련 도중 충돌해 네 개의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셋은 지상에서 곧바로 회수한 반면 바다에 떨어진 하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찾았다. 미국이 핵무기를 분실한 것은 적어도 32건, 세 건을 제외하고는 회수했다. 이런 사실은 1980년대 기밀 해제된 국방부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중국, 특히 옛소련 사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옛소련은 1986년 4만 5000개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소련 붕괴 와중에 상당수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것은 잠수함 침몰처럼 도저히 감추지 못해 드러난 것들뿐이다. 1970년 4월 8일 대서양 비스케이만에서 에어컨 화재로 수장된 옛소련 K8 핵잠수함이 대표적이다. 4개의 핵어뢰가 탑재돼 있었다. 4년 뒤 K129 핵잠수함도 태평양에서 자취를 감췄다. 77년 전 일본에서의 핵 참화를 목도하고도 사람들은 핵무기를 관리하는 이들과 시스템이 여느 사람보다 똑똑하고 완벽할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믿는다. 하지만 그들도 실수하고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으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 잃어버리고 위치도 모르는 미국 핵폭탄 적어도 셋, 옛소련은 “비밀”

    잃어버리고 위치도 모르는 미국 핵폭탄 적어도 셋, 옛소련은 “비밀”

    미국이 냉전이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와 60년대에 적어도 세 개의 핵폭탄을 잃어버렸는데 아직껏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는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 기사는 충격적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왜 이렇게 무책임하지? 질문들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무지했거나 관심이 너무 없었구나 하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1966년 1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스페인의 새우잡이 어민이 하늘에서 흰색 물체가 뭔가를 길게 드리우며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거의 같은 시간 근처 팔로라메스 항구의 주민들은 두 개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건물이 흔들렸고, 파편이 땅에 꽂혔다. 사람들의 신체 일부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뒤 몇주 동안 전 세계 신문은 끔찍한 사고를 풍문으로 전했다. 두 대의 미 군 B47 폭격기가 공중에서 충돌해 4개의 B28 열핵폭탄을 떨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세 개의 폭탄은 지상에서 재빨리 회수했는데 하나는 남동쪽 바닷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110만t의 TNT 폭발력과 1.1메가t의 위력을 갖춘 탄두를 찾기 위한 사냥이 시작됐다. 사실 이 사건은 핵무기를 분실한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보통 핵무기를 분실하면 ‘부러진 화살’(broken arrow)이라고 한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게는 최소 32건이 있었다.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비상상황에 투하한 다음 회수하곤 했다. 하지만 세 개의 미국 핵폭탄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1958년 2월 5일 조지아주 타이비 섬 근처에 떨어진 폭탄이 첫 번째였다. 조종사는 안전하게 착륙해야 한다며 기체의 무게를 덜기 위해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두 번째 핵폭탄은 1965년 12월 5일 미 해군 순양함 티콘데로가 함상에에서 바다로 떨어뜨린 B43 열핵폭탄이었다. 세 번째는 1968년 5월 22일 그린란드 툴레의 미 공군기지에서다.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했고, 승무원들은 탈출해야 했으며, 비행기는 핵무기를 탑재한 채 바다에 추락했다.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제임스 마틴 비확산 연구 센터의 동아시아 비확산 프로그램 책임자인 제프리 루이스는 “우리는 대부분 미국 사례에 대해 알고 있는데 전체 목록은 1980년대 미국 국방부의 기밀 해제가 이뤄졌을 때에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나라에 대해 잘 모른다.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셈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소련의 핵 과거는 특히 흐릿한데 1986년 기준 4만 5000개의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국가가 핵폭탄을 분실하고도 회수하지 않은 건들이 제법 알려졌다. 미국과 달리 모두 잠수함에서 발생한 점이 특이하다. 해서 접근할 수는 없지만 해당 위치가 알려져 있는 건들이 있다. 1970년 4월 8일에 소련의 K8 원자력 잠수함이 대서양 북동쪽의 위험한 물길인 비스케이 만에서 잠수하는 동안 에어컨 시스템을 통해 화재가 확산됐다. 잠수함에는 4개의 핵어뢰가 탑재돼 있었고 곧바로 침몰했을 때 방사능 화물이 잔뜩 있었다. 1974년에도 소련의 K129 잠수함이 태평양에서 의문의 침몰을 했는데 세 개의 핵미사일이 탑재돼 있었다. 미국은 곧바로 회수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결정했는데 루이스는 “그 자체로 아주 미친 얘기였다”고 말했다. 조종사와 영화감독 등 다양한 활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괴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갑자기 심해 채굴에 관심을 갖게 된 척했다. 루이스는 “사실은 심해 채굴이 아니라 해저까지 내려가 잠수함을 잡아 다시 들어올릴 수 있도록 작업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조리안(Azorian) 프로젝트였는데 불행히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 잠수함이 인양되는 과정에 부서져 버린 것이다. 물론 핵무기는 다시 바다 밑바닥으로 떨어져 녹슨 무덤에 갇혀 오늘날까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따금 미국의 잃어버린 핵무기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있었다. 1998년 퇴역 장교 데릭 듀크와 파트너가 40년 전 타이비 섬 근처에 떨어뜨린 폭탄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두 탐험가는 문제의 조종사와 수십년 동안 폭탄을 수색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대서양 근처 바사우 만으로 수색 범위를 좁혀 몇년 동안 두 사람은 샅샅이 뒤졌고, 그들은 조종사가 지목한 지점에서 다른 곳보다 10배 많은 방사선 패치를 확인하고, 정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즉각 조사팀을 파견했는데 핵무기가 아니었고, 해저 광물에서 나온 방사선 영향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미국의 잃어버린 수소폭탄 3개와 소련 어뢰 다수가 바닷속에 잠들어 있다.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묘비마냥 보전돼 있지만 대부분 잊혀지고 있다. 왜 우리는 이 모든 불량 무기를 아직도 찾지 못했을까? 폭발할 위험은 없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팔로마레스 폭탄 수색 과정을 장황하게 방송은 소개했다. ‘베이지안 추론’과 최첨단 심해잠수정 알빈(Alvin)을 이용하고 낚싯바늘을 이용해 폭탄을 들어올리는 작업을 했는데 실패를 거듭하다 마침내 성공했다. 잃어버린 세 개의 핵무기가 폭발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방송은 전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초기의 것으로 비키니섬 실험 당시에도 개발자들은 에너지의 연쇄 폭발 반응이 멈출 것이란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1950년대와 60년대 사용된 차세대 핵무기는 중수소와 삼중수소(방사성 수소)를 포함해 수천 배 강력해졌지만 안전장치를 더욱 충실하게 보강했다. 해서 앞의 타이비 섬 상공 9144m 지점에서 B47 폭격기끼리 충돌한 뒤 넓은 지역을 방사성 물질로 오염시켰는데도 핵분열 반응에 필요한 핵 물질을 무기 자체와 분리한 덕에 연쇄 폭발로 이어지지 않았다. 낙하산이 펼쳐져 지상이나 바다와 접촉할 때의 충격을 줄여준다. 나중에는 핵 장치가 활성화되지 않고 꺼지지 않도록 하는 ‘원포인트 안전’ 기능이 더해졌다. 하지만 항상 안전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안전 기능을 갖추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1961년에도 B52 폭격기가 노스캐롤라이나주 골드즈버러 상공을 비행하다가 두 개의 핵무기를 지상에 떨어뜨렸다. 낙하산이 잘 펼쳐쳐 핵무기 하나는 비교적 손상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4개의 안전 장치 중 3개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1963년 기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당시 국방장관은 “약간의 기회, 글자 그대로 두 개의 전선이 교차하지 못해 핵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다른 핵폭탄은 땅에 떨어졌고, 그곳에서 부서져 결국 들판에 묻혔다. 대다수 부품은 회수됐지만 우라늄을 함유한 부품 하나는 15m가 넘는 진흙 아래에 남아 공군은 주민들이 흙을 파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 땅을 매입했다. 어떤 사건은 너무 놀라워 거의 꾸며낸 얘기처럼 들린다. 1965년 티콘데로 함상에서 A4E스카이호크가 B43 핵폭탄을 탑재한 채 비행기 엘리베이터에 잘못 앉혀졌다. 갑판원이 조종사에게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손을 휘저었다. 불행히도 중위였던 조종사는 수신호를 보지 못했고 필리핀해로 사라졌다. 오키나와 근처 수심 4900m 아래에 여전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는 잃어버린 세 개의 핵폭탄을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눈으로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고, 블랙박스나 위성위치측정(GPS) 송신 장치가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또 타이비 섬 수색 때처럼 방사능 스파이크를 찾는 것도 어렵다. 핵폭탄이 실제로 특별히 방사능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1984년에는 또 다른 소련 핵잠수함 K-278 콤소몰레츠가 노르웨이의 바렌츠 해에서 침몰했다. K8과 마찬가지로 원자력 추진력을 갖고 있으며 핵어뢰 두 발을 탑재하고 있었다. 수십 년째 그 난파선은 북극해 1.7㎞ 아래에 누워 있다. 루이스에게 핵무기 분실 얘기는 그것들이 지닌 잠재적인 위험이 아니라 위험한 발명품을 안전하게 취급하기 위해 겉보기에 정교해 보이는 시스템을 갖췄다고 우리는 자신하지만 실은 취약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핵무기를 다루는 이들은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든 다르고 실수가 적거나 더 똑똑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핵무기를 취급하는 조직이 다른 모든 인간 조직과 같아 실수를 저지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핵폭탄이 모두 회수된 팔로마레스에서도 토양은 여전히 재래식 폭발물로 터진 방사능으로 오염돼 있다. 토양의 표면을 삽으로 떠 넣은 미군 일부는 정체 모를 암에 걸렸다. 생존자들은 미국 보훈처 장관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는데 상당수가 70대 후반과 80대다. 루이스는 냉전 기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핵폭탄을 탑재한 비행기가 더 이상 비행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핵잠수함이며, 오늘날에도 아찔한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현재 14척의 탄도미사일잠수함(SSBN)을 운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4척을 운용하고 있다. 핵 억지력으로 작동하려면 이 잠수함들은 해상 작전 중 위치가 탐지되지 않아야 한다. 2018년에도 영국 군의 SSBN이 페리에 거의 부딪힐 뻔한 것을 비롯해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 핵무기를 잃어버리는 시대는 끝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방송은 섬뜩한 경고로 마무리했다.
  • “총기난사는 사기극’ 음모론자에 美 법원 ”643억원 물어내라”

    “총기난사는 사기극’ 음모론자에 美 법원 ”643억원 물어내라”

    지난 2012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정부가 총기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꾸며낸 사기극이라고 주장해 온 극우 음모론 방송인이 무려 4520만 달러(약 589억원)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법원으로부터 명령받았다. 전날 법원으로부터 명령받은 손해배상액 411만 달러(약 53억원)와 합쳐 4930만 달러(약 643억원)을 배상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실과 다른 주장을 그럴 듯하게 꾸며대 돈벌이를 하는 극우 성향 유튜버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이만큼 단일 사건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이 법원 판결로 나온 전례가 없다. 그만큼 헛소리를 늘어놓는 음모론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여론에 법원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10년 전에 일어난 샌디 훅 총기 참사는 20명의 어린이와 6명의 어른이 한꺼번에 희생돼 이 나라에서 일어난 총기 참사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사건으로 꼽힌다. 그런데 극우 방송인이자 음모론자인 알렉스 존스(48)는 이 참사를 정부가 총기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꾸며낸 사기극이라고 자신이 만든 음모론 사이트 인포워스(Infowars)에서 여러 차례 주장했다.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들을 가리켜 “위기 연기자”라고까지 조롱했다. 10년 전 총부리에 아들 제시 루이스(당시 6세)를 잃은 닐 헤슬과 스칼렛 루이스(아들은 이혼한 어머니의 성을 따름)는 존스의 헛소리 때문에 오랜 시간을 지옥처럼 보냈다며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트래비스 카운티 법원에 소송을 제기, 1억 5000만 달러(약 1956억원)의 손해 배상을 명령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법원 배심원단은 2주 간의 심리 끝에 전날 손해배상 평결에 이어 5일(현지시간) 거액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평결했다고 영국 BBC가 보도했다. 이날 평결에 앞서 배심원단은 인포워스와 모회사 프리 스피치 시스템의 자산 가치가 2억 70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증언을 들었다. 다시 말해 존스의 회사들이 손해배상액을 감당할 능력이 된다는 점이 입증됐다. 아울러 그가 지난해 6200만 달러를 회사에서 인출해 어느 은행에 은닉해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원고들 청구액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지만 이렇게 거액의 손해배상이 평결로 나온 것은 커다란 경종을 울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전날 배심원단의 평결문은 “당신도 말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거짓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고 훈계했다. 또 존스의 변호인이 배상액을 8달러로 제한해 달라고 주장해 온 데다 만약 배상액이 200만 달러(약 26억원)를 넘기면 “우리를 침몰시킬 것”이라고 말해 온 점에 비춰보면 이번 평결액만으로도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재판의 1심은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다른 소송들이 줄줄이 존스에게 제기돼 있기 때문이다. 코네티컷주의 한 법원 판사는 다른 희생자 유족과 이 사건 수사를 담당한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존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오스틴에서도 다른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도 존스는 전날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그는 배상액이 크게 줄어든 것은 “대승”이라고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밝혔다. 이어 “내가 틀렸고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난 잘못된 정보를 따랐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난 가족들에게 사과했고 배심원들은 이해했다. 내가 그 가족들에게 한 짓은 잘못이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정말 뉘우치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표현들이다. 인포워스가 앞으로도 명맥을 유지할지는 의문이다. 이미 유튜브와 스포티파이, 트위터에서 혐오 발언을 이유로 이용이 금지돼 있다. 존스는 또 최후진술을 통해 벌써 파산했다는 주장도 늘어놓았는데 그의 회사는 다이어트보충제, 총기 비품, 생존장비 등을 판매해 하루 매출이 80만 달러를 기록한 적도 있어 믿을 수가 없다고 방송은 전했다.
  • 뒤집힌 보트 속 기포가 살렸다…대서양서 16시간 버틴 60대 구조

    뒤집힌 보트 속 기포가 살렸다…대서양서 16시간 버틴 60대 구조

    62살의 한 프랑스 남성이 전복된 보트 안의 기포를 이용해 대서양에서 16시간 동안 버틴 끝에 무사히 구조됐다. 3일(이하 현지시간) BBC 보도에 따르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12m짜리 선박을 타고 출항한 이 남성은 지난 1일 늦은 저녁 대서양에서 조난 신호를 보냈다. 스페인 해안경비대는 뒤집힌 배를 발견했지만, 바다가 너무 거칠어서 그를 구조할 수 없었고 이튿날 아침에야 구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해안경비대 잠수부들은 이 남성의 생존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보트는 1일 오후 8시23분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 인근 시사르가스 제도에서 22.5㎞ 떨어진 곳에서 조난 신호를 보냈다. 잠수부 5명과 헬기 3대를 태운 구조선이 남성 구조를 위해 출발했다. 보트를 발견한 구조선이 생명체의 흔적을 찾기 위해 윈위치로 배를 들어올리자 이 남성은 배를 쾅쾅 치며 응답했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고 해가 졌기 때문에 구조대는 침몰을 막기 위해 부력 풍선을 배에 부착한 후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튿날 구조를 위해 배 밑으로 헤엄쳐 들어간 잠수부 2명은 구명복을 입고 뒤집힌 배 안에 형성된 기포 안에 있는 남성을 발견했다. 남성은 잠수부들의 도움을 받아 바다 표면으로 헤엄쳐 나올 수 있었다. 이 남성은 병원으로 이송돼 진찰을 받았지만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대론 4대 대도시도 20년 못 버텨… 지방소멸 못 막으면 ‘국가소멸’ [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이대론 4대 대도시도 20년 못 버텨… 지방소멸 못 막으면 ‘국가소멸’ [마강래의 함께 살아가는 땅]

    수도권 밖 지역은 저출산과 인구감소, 수도권 집중화라는 삼각파도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방이 살아야 서울도 살 수 있다고 믿는 도시계획가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가 지방소멸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국토를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3주마다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컵에 물이 반이 채워져 있다. 어떤 이는 물이 반이나 채워져 있다고 안도하고, 또 다른 이는 반밖에 채워져 있지 않다고 불평한다. 검은 렌즈의 안경을 쓴 사람은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느끼고, 파란 렌즈의 안경을 쓴 사람은 원래부터 세상은 푸르뎅뎅했다고 믿는다. 언제부턴가 나도 내 안경이 어떤 색깔일까 궁금했다. 혹시 삐딱한 유전자가, 아니면 내 제한된 경험이 세상을 곡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불안감 때문일까. 나는 유난히 통계에 집착한다. 숫자가 보여 주는 경향성에 집착한다. 그래서 내 주변은 온통 숫자로 가득하다. 직장과 거주공간이 왜 불일치하는가를 검증한 박사 논문도 숫자로만 얘기했다. 대학에선 추론통계를 통한 가설검정 방법을 강의한다. 책을 쓸 때도 가능한 한 숫자 없이 내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표현하길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겠다.●인구·산업경제·건물 노후도 모두 추락 지방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느낀 것도 숫자를 통해서다. 인구뿐만 아니라 산업경제 지표, 건물의 노후도까지 어느 하나 꺾어지지 않는 게 없었다. 쇠락 추이가 20년 이상 ‘매해’, ‘어김없이’ 지속됐다. 그리고 그 추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숫자를 통한 기술적 통계는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줄 뿐이다. 하지만 추세를 해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숫자와 경향성이 보여 주는 현실에 설레기도 또는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지방에 관한 통계는 내게 두려움을 줬다. 마치 조작된 통계를 보는 듯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졌을 즈음 대학원생들과 답사팀을 꾸렸다. 주말마다 쇠퇴지역의 현실을 확인했다. 수년간 ‘월화수목금금금’이 이어졌다. 이즈음에 마스다 히로야의 ‘지방소멸’이 우리나라에 번역됐다. 2040년에 과반의 일본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소멸 위기를 맞을 것이란 분석을 담은 책이다. 일본도 수도권(도쿄권)의 집중현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지방소멸’이란 단어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공간 쏠림 통계를 비교했다. 우리나라 수도권 쏠림의 속도와 강도는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고 강했다. 수도권 일극화에 대한 각종 통계자료를 모아서 대중서와 논문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각종 토론회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접했다. 지방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특히 지방소멸이란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먼저 지방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백년간 쌓아 온 공동체의 내공이 한번에 무너질 리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도시나 마을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점과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도시들이 있다.●주민 사라진 공간… 장소·기억도 소멸 ‘공간’이 어찌 사라질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물리적 공간 자체가 소멸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주민들은 사라질 수 있다. 또한 주민이 사라지면 장소와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셋째로 ‘소멸’ 지역이라 불리는 것 자체가 낙인을 찍어 사람들이 지방을 더욱 기피하게 한다는 반발도 있었다. 여기에 지금 지방이 ‘낙인효과’를 걱정할 때냐고 반문했다. 현실을 그대로 알려야, 그리고 위기의식을 공유해야 보다 센 정책도 나오지 않겠느냐는 나름의 의견을 밝혔다. 얼마 전 한 영향력 있는 인사가 쓴 칼럼을 읽었다. ‘지방소멸론이 지방소멸을 부추기고’ 있고, 그 ‘지방소멸론에는 농촌을 무너뜨리려는 음모가 있다’는 게 칼럼의 논지다. 소멸할 수도 없고, 소멸해서도 안 되는데 왜 지방소멸을 이야기하느냐며 노여워했다. 심지어 ‘지방소멸은 가짜뉴스’고 그 뒤에 위기의 지역을 중앙정부의 정책 대상에서 잘라 내려는 음모가 숨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선택과 집중’, ‘압축과 연계’ 논리에 기반한 메가시티 논의 또한 시장주의로 무장한 강자의 논리이며, 공항, 광역철도망, 도로 등의 인프라에 투자해도 지방이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고도 했다. 그럼 대안이 무얼까 궁금했다. 칼럼의 일부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지역경제의 실핏줄인 농산어촌이 살아야 한다. 농산어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의료, 교육, 교통, 주거, 돌봄 등)를 누리고, 기본적인 소득을 실현할 수 있도록 국토·환경·문화·지역지킴이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주장에 일부 공감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공간발전의 메커니즘이 약자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위협받는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전략을 짜야 할지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씁쓸한 무기력감이 밀려왔다.●4차 산업혁명으로 도시화 더 가속화 수도권 독식의 흐름은 이미 되돌리기 힘든 임계점을 넘어섰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 과정 속에서 ‘덩치 큰 도시’만 빠르게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시는 덩치가 커질수록 주변 인구와 산업을 흡입하는 능력이 커지는 특성이 있다. 서울은 인근 도시의 산업과 인구를 빨아들이면서 더 큰 흡입력을 갖게 됐다.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보다 더 큰 힘을 얻은 서울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슈퍼스타 도시로 떠올랐다. 그리고 비대화된 서울 버전인 수도권은 슈퍼메가시티(super-megacity)가 됐다. 수도권은 대도시권의 이점을 살려 다른 지방이 제공하지 못하는 일거리, 놀거리, 먹거리, 볼거리, 배울거리를 제공해 왔다. 이런 ‘거리’들은 청년들에게 ‘내공’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혁신기업들도 인재들을 좇아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고, 이 과정에서 지방 전역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규모가 큰 플랫폼 기업이 지배적 지위를 확보해 승자독식의 횡포를 부리듯, 도시도 크기가 중요해지는(‘size does matter!’)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게 지방위기의 본질이다. 특히 인구가 적은 지역일수록 인프라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인구 20만명 이하의 지역은 ‘응급의료센터’나 ‘고급 백화점’ 같은 상위 위계의 생활 인프라를 유지하기 어렵다. 인구 10만명 이하인 경우는 산부인과가 들어서기 힘들다. 심지어 스타벅스나 서브웨이도 인구 10만명 이하의 도시에 문을 열지 않는다. 인구가 적은 곳에 이들이 있다면, 거긴 관광객과 같은 유동인구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인구증가 나주·예천도 주변인구 흡수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 중 66곳엔 영화관이 없다. 젊은이들은 더 큰 도시로 터를 옮겼다. 인구 20만명 이하의 지자체 중 지난 10년간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곳은 ‘혁신도시’가 들어선 나주시와 ‘경북도청 신도시’가 들어선 예천군으로 딱 두 곳밖에 없다. 이 두 곳은 쇠퇴의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는 이웃 지자체로부터 인구가 유입됐다. 지방 중소도시와 농어촌에서 이렇게 인구가 감소하니 재정자립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세입만으로 공무원 인건비도 댈 수 없는 지자체가 절반이 넘어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울산권, 대전·세종권, 대구권, 광주권 등의 지방 4대 대도시권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주변 농어촌의 인구를 흡수하며 버텨 왔지만 이들도 한계를 맞고 있다. 2015년을 기점으로 청년인구의 유출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지방 5대 광역시도 매년 1~2% 정도의 청년인구의 순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100명 중 1~2명의 청년들이 매해 수도권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방의 거점대학조차 정원을 채우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상황까지 왔다. 여기에 무슨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겠는가. 이 상태가 지속되다간 지방 대도시도 20년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지방 위기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농어촌지역에서 지방 광역시로 옮겨 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흐름을 되돌릴 뾰족한 대안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공간쏠림으로 인해 침몰해 가고 있다. 어떤 통계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든, 지방의 현실은 그보다 좋지 않다. 수도권도 마찬가지다. 집값은 폭등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청년들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있다. 농산어촌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는 말에 십분 공감한다. 농산어촌이 살기 위해서는 주변 중소도시가 활성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인근 대도시에 활력이 있어야 한다. 농어촌은 중소도시의 인프라를 공유하고, 중소도시는 대도시의 인프라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당위론이 난무한다면, 그리고 지방의 위기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미래 세대가 지게 될 것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운동장이 기울수록 이를 복구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흐름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게임체인저’이다. 지방소멸론의 본의를 왜곡하지 말길 바란다. ●행정구역만 합친 메가시티 ‘따로국밥’ 그리고 메가시티에 대한 오해도 걷어 냈으면 한다. 메가시티란 ‘연대’와 ‘협력’을 통해 대도시-중소도시-농어촌의 상생체계가 구축된 ‘공간적 그릇’을 말한다. 단순히 ‘행정구역이 합쳐진’ 혹은 ‘특별자치단체로 만들어진’ 덩치 큰 빈껍데기가 아니다. 행정구역 통합이나 특별자치단체는 연계와 협력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처럼 지자체들이 따로국밥식 행정을 하는 상황에선 지역위기를 극복할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도시-중소도시-농어촌이 어우러진 광역적 공간 내에서 산업, 문화, 교육 전략을 함께 짜내야 한다. 수도권이라는 거대 공간에 맞대응할 또 하나의 대도시권을 만들어야 한다. 한두 시간 거대 생활권 구축을 위해 공간을 압축하고 연계해 양질의 의료, 교육, 문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유치하고 일자리도 만들어 지역 인재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소지역주의로의 회귀에 솔깃해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공염불에 우왕좌왕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날려 버릴 수 있다. 지방소멸은 신기루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분들에게, 잠시 시간을 내서 지난 5년간 우리 국토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각종 통계를 살펴보시길 권한다. 코앞에 다가온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조만간 지방소멸이 아닌, ‘국가소멸’이라는 화두를 놓고 또 다른 갑론을박을 벌이게 될 것이다.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 [영상] 여객기 불나자 승객 버리고 ‘꽁무니’ 제일 먼저 탈출한 조종사

    [영상] 여객기 불나자 승객 버리고 ‘꽁무니’ 제일 먼저 탈출한 조종사

    이륙 직전 여객기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비겁한 조종사는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여객기에서 탈출했다. 23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더선과 데일리메일은 스페인 저가항공사 '부엘링' 조종사가 불이 난 여객기에 승객과 동료 승무원을 남겨 두고 혼자 조종석에서 뛰어내렸다고 보도했다. 2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영국 버밍엄으로 향할 예정이던 부엘링 VY8754편 여객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매캐한 연기가 기내를 가득 메우자 승객들은 혼란에 빠졌다. 영국인 승객 앤드루 베니온(50)은 "승객 대부분은 영국인이었고, 이륙을 위해 이미 벨트까지 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 뒤쪽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는 냄새가 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든 불이 꺼지고 비상등이 켜졌다. 정말 무서웠다"고 덧붙였다.승무원들은 사태 파악을 위해 여객기 통로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포에 질린 승객들을 안심시키고 위험을 알리기 위해 조종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기장은 이미 조종석에서 탈출한 뒤였다. 승객 베니온은 "스튜어디스 한 명이 조종석 문을 열었을 때 기장은 이미 비행기 옆쪽으로 난 조종석 문을 열고 탈출 중이었다. 기장이 여객기에서 제일 먼저 뛰어내렸다"고 황당해했다. 선장이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도망치듯, 여객기 운항을 책임져야 할 기장은 그렇게 꽁무니를 내뺐다. 조종사가 도망가자 승무원들도 모두 그를 쫓아 줄행랑을 쳤다. 승객은 "전부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비행기에는 단 한 명의 스튜어디스만 남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선 두려움이 읽혔다"고 밝혔다.혼자 남은 승무원은 최선을 다해 승객들을 대피시켰다. 승객은 "스페인 승객이 비행기에 불이 났다고 통역해 줬다. 승무원은 모두에게 비행기에서 내려달라고 소리쳤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장이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조종사는 혼자 안전지대로 달려갔고, 우리는 그저 나그네처럼 여객기에 앉아 있었다"고 분노했다. 승객들이 내리자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가 활주로를 에워쌌다. 승객은 "그들은 마치 테러라도 벌어진 것처럼 행동했다. 비행기에 물을 뿌리며 화재를 진압하면서도 우리와의 대화는 거부했다" 부연했다. 스페인 공항 당국은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기까지 몇 시간 동안 승객을 방치했다고 그는 덧붙였다.또 "도망간 기장은 어디로 가고, 다른 기장이 비행기에 나타나 사과했지만 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승객은 "단지 불편하게 해 죄송하다, 가능한 한 빨리 버밍엄으로 가겠다는 말뿐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아무도 비행기에 타고 싶지 않아 했다.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만약 이륙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재앙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엘링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하는 저가 항공사로, 국영 이베리아 항공 자회사다. 영국 언론은 이번 사고에 대해 항공사 부엘링 측에 설명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게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임기 초 긴장관계 빠른 시간에 극복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 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 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아홉 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 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 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 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참모장으로 충무공 출정명령 하달 그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의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하다.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 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9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 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 하다.  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쫒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최악 가뭄에…가라앉은 2차 세계대전 美 상륙정 호수 위로 ‘쑥’

    최악 가뭄에…가라앉은 2차 세계대전 美 상륙정 호수 위로 ‘쑥’

    최악의 가뭄 탓에 호수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1940년 대 제작된 상륙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근 미국 현지언론은 북미 최대 인공 호수 미드호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작된 히긴스 상륙정이 절반 정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접경에 있는 인공호수 미드호는 북쪽의 콜로라도 강을 막아 만든 190㎞에 달하는 거대 호수로 대부분의 물을 농업 관개용으로 쓴다. 문제는 계속되는 심각한 가뭄으로 수심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1일 기준 현재 호수의 수위는 317m로, 한달 전보다 1.3m, 작년 같은 기간보다 7.6m, 2년 전 보다 무려 16m 이상 낮아졌다. 이처럼 기록적으로 낮아지는 수위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가뭄 때문이다.  이번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히긴슨 상륙정은 지난 1942~1945년 사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을 수송하기 위해 제작된 수천 대 중 하나다. 실제 이 상륙정이 전쟁에 투입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전후 콜로라도 강의 측량을 위해 이곳에서 사용돼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그러나 기록적인 가뭄으로 인해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현재 상륙정의 절반 정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 국립공원관리국은 "호수의 수위가 계속 감소함에 따라 침몰한 상륙정이 모습을 나타냈다"면서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싶은 방문객들을 위해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에는 호수의 수위가 내려가면서 바닥에 잠자고 있던 신원 미상의 유골이 연이어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달 1일에는 1970~1980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상 흔적이 있는 유골이, 1주일 후에는 또다른 유골이 발견됐다.  
  • [포착] 토네이도가 할퀸 중국…지붕 날아가고 나무 뽑히고 ‘초토화’(영상)

    [포착] 토네이도가 할퀸 중국…지붕 날아가고 나무 뽑히고 ‘초토화’(영상)

    중국 광둥성(省) 일부 지역이 태풍의 직격탄을 맞아 초토화된 가운데, 도심을 휩쓰는 토네이도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미국 CNN 등 해외 언론의 4일(이하 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일 광둥성 차오저우시(市)에서 3호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토네이도가 발생했다. 직경 20m의 원을 그리며 맹렬한 기세로 이동하던 토네이도에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공장 건물이 파손되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토네이도는 약 5분간 주변을 집어삼키듯 움직이다 소멸했지만, 토네이도가 할퀴고 지나간 곳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한 상황이었다. 광둥성은 지난달 말에도 토네이도로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달 19일 광둥성 포산시에 발생한 초속 10.5m의 토네이도는 포산시 난하이구를 1분가량 강타했다. 폭발음이 잇따르고 정전이 발생했으며, 나무가 뿌리째 뽑히거나 주택과 차량이 파손됐다. 앞서 지난달 16일에도 초속 12m가량의 토네이도가 약 5분 동안 광둥성 광저우시를 강타해 5000여 가구에 정전이 발생하고 가옥이 파손됐다.태풍 차바로 광둥성 인근 바다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 관영 CCTV에 따르면, 2일 오전 광둥성 양장시 해역에서 해상 풍력 발전기를 건설하던 이동식 선박 ‘푸징호’가 태풍 차바가 몰고 온 거센 풍랑으로 침몰했다. CCTV는 “당시 사고 해역에는 시속 144km의 강풍이 불면서 높이 10m의 파도가 일었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푸징호’가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해 피해가 컸다”면서 “이번 사고로 선박에 타고 있던 30명 가운데 4명만 구조됐고 나머지 26명은 아직 실종 상태”라고 전했다. 이어 “생존자 구조와 실종자 수색 작업에 홍콩에서 파견된 구조대도 참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홍콩 정부는 비록 4명의 승무원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추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 [열린세상] 보물선 산호세호는 누구의 소유일까/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장

    [열린세상] 보물선 산호세호는 누구의 소유일까/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장

    카리브해 보물선 산호세호(San Jose)가 화제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함대에 속했던 산호세호는 1708년 콜롬비아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싸우다 침몰했다.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에서 끌어모은 20조원의 보물을 싣고 있어 ‘모든 난파선의 어머니’로 불린다. 300년 전의 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이면서, 보물선을 둘러싼 소유권 분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산호세호는 누구의 소유일까. 스페인은 산호세호가 자국 군함이며, 군함의 법적 지위는 기국(旗國) 외에 어떠한 국가 관할권으로부터도 면제된다는 국제법 원칙을 원용할 것이다. 유네스코의 ‘수중문화유산보호에 관한 협약’에는 100년간 수중에 위치해 온 ‘국가 선박 및 항공기’는 수중문화유산에 해당되나(제1조 제8호), 군함에 대한 각국의 권리를 훼손할 수는 없다(제2조 제8호)고 돼 있다. 그러나 전투력을 이미 상실한 침몰군함에는 주권면제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팽팽하다. 침몰군함의 소유권 문제를 다룬 것으로는 갈가(La Galga)호와 주노(Juno)호 사례(1996년)가 대표적이다. 미국 법원은 “주권면제를 누리는 난파선의 포기는 명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모두 스페인 소유를 인정했다. 침몰군함에 대한 국제법적 논의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로 소유권 변동을 주장할 수 없다”는 기조가 강하게 형성돼 있다. 콜롬비아는 산호세호가 자국 앞바다에서 침몰됐다는 점 등을 들어 소유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유엔 해양법협약과 유네스코 협약은 모두 연안에서 24해리(약 44㎞) 범위에 있는 수중문화유산에 대한 연안국의 우선적 규제를 인정하고 있다. 산호세호에 실린 보물이 중남미 식민지에서 약탈한 것이라는 점도 스페인에는 불리하다. 약탈된 유물은 원래 소유했던 나라에 돌려줘야 한다는 논쟁은 국제사회의 끊임없는 화두였다. 스페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칫 식민주의를 종식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국가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결국 산호세호의 발굴은 군함 소유국인 스페인과 연안국인 콜롬비아의 양자협정을 통해서만이 해결 가능하다. 보물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1976년 신안해저유물(1323년 난파, 2만 2000점 발굴), 2001년 옹진 고승호 발굴(1894년 침몰), 울릉도 앞바다에서 확인된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호(Dmitrii Donscoi, 1905년 침몰) 등이 대표적이다. 근래에는 러시아가 러일전쟁(1904~1905년) 때 일본 군함에 의해 1904년 대한해협에 침몰된 군함 류리크(Ryurik)호 수색 허가를 우리 정부에 문의한 바 있다. 2004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러시아는 수색을 요청해 왔다. 신안 침몰선은 우리 영해에서 발견된 중국 상선이었고, 고승호는 영국 상선을 청나라가 임차한 군수물자 운반선이었다. 전자는 상선이라는 점, 후자는 중국 국내법에 다른 나라 영해에서 발견된 유물 처리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 측의 발굴에 문제가 없었다. 다만 돈스코이호와 류리크호는 침몰군함이라는 점에서 소유권 주장은 산호세호와 같은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바다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수백만 척의 난파선이 있다. 바다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박물관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누군가 소설 ‘보물섬’의 주인공 짐 호킨스를 꿈 꾼다면 카리브해와 발트해, 남중국해와 말라카, 필리핀해는 여전히 매력적인 항행지일 것이다. 그러나 바닷속 보물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교류했던 선조들의 영혼과 역사, 궤적 그 자체다. 금전적 평가로 무조건적인 발굴을 하는 것보다 인류 공동의 역사로 ‘스토리텔링’(이야기 만들기)하는 접근이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의 기록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 일본군과 전투 중 침몰한 美 군함, 78년 만에 6895m 심해서 발견

    일본군과 전투 중 침몰한 美 군함, 78년 만에 6895m 심해서 발견

    무려 78년 가까이 깊은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던 미 군함이 특수 잠수정 덕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CNN 등 현지언론은 지난 1944년 10월 25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침몰한 USS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이하 새미 B.)가 필리핀 해(海) 심해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무려 6895m 심해에서 찾아내 역대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된 새미 B.는 전쟁 당시 필리핀 사마르섬 앞바다에서 세계 최대 전함이었던 일본 야마토를 비롯한 3척의 전함과 맞서 싸우다 침몰했다. 당시 선박에는 총 224명의 승무원이 탑승했으며 이중 89명이 사망했다. 보도에 따르면 침몰한 새미 B.는 심해 경사면에 반으로 쪼개진 채 잠들었으며 3연장 어뢰 발사기도 확인됐다.이번에 특수 잠수정을 조종해 선박을 찾아낸 캘러던 오시애닉사의 창립자 겸 대표인 빅터 베스코보는 "8일 동안 6번의 잠수를 통해 배를 찾아냈다"면서 "당시 선원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전설적이었으며 마지막 안식처를 찾게돼 영광"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발견은 실종자 가족에게 있어 이 함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베스코보는 지난해 4월에도 같은 해전에서 침몰한 미 해군의 구축함 USS 존스턴(USS Johnston)을 수심 6500m 바닷속에서 발견한 바 있다.USS 존스턴 역시 일본군 거함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다 침몰했으며 당시 함선에 타고있던 327명 중 함장을 포함 총 181명이 목숨을 잃었다.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쟁 영웅’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오대양의 심해 중에서도 가장 깊은 지점만 골라 탐사하는 베스코보 덕이다. 그는 미국 사모펀드 인사이트 에퀴티 홀딩스의 창립자이자 억만장자로 이미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 세계 7개 대륙의 최고봉을 정복한 베테랑 탐험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그는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도 탐험을 시작해 이번과 같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 [씨줄날줄] 홍콩 점보/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홍콩 점보/박록삼 논설위원

    점보(Jumbo)라고 불렀고, 전바오(珍寶)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황궁을 본떠 1976년 만들어진 세계 최대 수상 해산물 식당이었다. 80m 길이에 23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관광 명소 그 자체였다. 자신의 통치 지역을 살피기 위해 홍콩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기꺼이 찾았음은 물론이다. 홍콩 관광객이라면 음식값이 비싸 직접 먹어 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보트 투어로 주변을 돌며 사진 찍고 구경하는 것만큼은 빼놓지 않았다. ‘용쟁호투’, ‘무간도2’ 등 숱한 홍콩영화와 ‘007 시리즈’, ‘컨테이전’ 등 할리우드 영화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점보가 지난 20일 남중국해 시사군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2013년 이후 1300만 달러(약 168억원)의 적자가 쌓인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2020년 영업 종료 뒤 매각을 기다리며 조선소로 이동 중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홍콩은 대륙에서 숱한 왕조가 명멸했음에도 별 관심 받지 못한 채 적은 수의 어민들이 고기 잡으며 살던 섬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39년 중국에 불법으로 아편을 팔기 시작했고, 아편 금지령을 핑계 삼아 영국은 군함을 보내 청나라 군대를 굴복시켰다. 3년에 걸친 ‘아편전쟁’의 결과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영국에 할양됐다. 이를 시작으로 중국 땅 곳곳이 조차지, 조계 등의 이름으로 서구 열강에 빼앗기게 됐다. 덩치만 컸지 무기력하기 짝이 없던 중국은 1898년 아예 홍콩과 주룽반도 일대의 땅에 대해 99년간 영국에 조차권을 내줬고 1997년 7월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치욕의 역사를 복원하게 된 중국은 환호했지만, 많은 홍콩인은 슬퍼했고 사회주의와의 공존을 두려워한 이들은 떠났다. 봉건 잔재 타파의 문화대혁명 기운이 중국 대륙을 휩쓸며 정점을 이루던 무렵인 1976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 카지노로 막대한 돈을 번 재벌이 중국 황궁의 외형을 복원하는 상업 식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거나 기묘하기도 하다. 중국과 홍콩, 영국을 모두 기억한 채 가라앉은 점보는 경제성이 없어 인양하지 않을 계획이라 한다. 수장(水葬)된 점보가 홍콩의 쇠락을 상징하는 듯해 씁쓸한 기분이다.
  • [포착] 최대 해상 식당 ‘홍콩 점보’ 침몰 사고…“홍콩의 몰락 같다”

    [포착] 최대 해상 식당 ‘홍콩 점보’ 침몰 사고…“홍콩의 몰락 같다”

    홍콩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해상 식당 ‘점보’가 예인선에 이끌려 동남아 국가로 이동하던 중 침몰했다고 영국 BBC 등 해외 언론이 20일 보도했다. 점보는 1976년 마카오의 카지노 재벌인 스랜리 호가 세운 세계 최대 수상 식당이다. 궁궐을 연상케 하는 외관과 구조로 홍콩 관광의 필수 코스였고, 1000만 명의 관객이 본 영화 ‘도둑들’(2012)에 등장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 중국 배우 주윤발 등이 이곳을 찾았고, 매년 약 300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점보는 2019년 위기를 맞았다. 홍콩 반정부 시위로 관광객이 급감하기 시작하더니, 이듬해인 2020년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결국 점보는 1억 홍콩달러(한화 약 165억 원)의 누적 적자를 내고 영업을 중단했다. 이후 2년간 새로운 주인을 물색하거나 식당을 기부하는 방안 등이 모색됐지만 모두 실패했고, 지난달 30일 폐업을 선언했다.폐업이 선언된 지 약 3주 후인 지난 19일(현지시간), 애버딘 항구에 있던 점보가 예인선에 이끌려 동남아시아 국가로 이동하던 중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점보 측은 최근 배가 남중국해 시사군도(중국 하이난성에 딸린 군도, 파라셀 군도)를 지나던 중 배에 물이 들어오면서 전복됐다고 밝혔다. 점보 측은 “바다를 항해하기 전 전문가를 고용했고, 이동을 위한 모든 승인을 받았다”면서 “그러나 이동 중 해상 악조건에 직면해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결국 가라앉았다. 현장 수심이 1000m가 넘어 인양작업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매우 안타까운 사고지만, 다행히 승무원의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지만, 세계 최대 해상 식당의 정확한 목적지를 공개하진 않았다. 한편, 동양의 진주로 불리던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 이후 번영했던 과거와 다른 길을 걸었다. 2019년 20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열렸고 미국 등 서방국가가 이를 지지했지만, 결국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을 막지 못했다. 홍콩 국가보안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2020년 5월 통과시킨 법안으로,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다.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주요 인사와 시민들의 탈홍콩 행렬이 빠르게 이어졌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활력을 잃은 홍콩은 결국 동양의 진주이자 특별행정구에서 중국의 수많은 지방정부 중 하나가 됐다. 국제사회는 “동양의 진주 홍콩이 추락했다”며 중국을 비난했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이끌지는 못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홍콩의 상징과도 같았던 세계 최대 해상 식당 ‘점보’의 전복이 홍콩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 340년 전 침몰 英군함 ‘HMS 글로스터’ 발견…미개봉 와인도 나와

    340년 전 침몰 英군함 ‘HMS 글로스터’ 발견…미개봉 와인도 나와

    1682년 5월 6일, 차기 영국 왕 제임스 스튜어트를 포함해 330여 명을 태운 채 항해 중 좌초, 침몰한 군함 HMS 글로스터. 이 난파선의 위치가 34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됐다고 CNN 등 외신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HMS 글로스터는 침몰 당시 해저에 반쯤 묻혔다. 공식적인 승객 명단은 없지만, 선원을 포함해 최대 250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함에 타고 있던 스튜어트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찰스 2세의 동생인 그는 3년 만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 제임스 2세이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7세로 즉위했다가 다시 3년 만에 명예혁명으로 축출됐다.영국 해양역사 전문가인 클레어 조윗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교수는 이번 난파선의 발견을 두고 “1982년 메리로즈호 인양 이후 가장 중대한 해양 역사상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이미 난파선에서는 의복과 신발, 항법 장치, 해군 장비 등의 유물이 회수돼 보존 작업이 이뤄졌다. 와인병도 다수 발견됐는데 그중에는 미개봉 와인도 있다. 와인병 중 하나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조상인 레기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은 성조기의 전신으로 알려졌다. 영국 노리치성 박물관 예술갤러리에서는 내년 봄 난파선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난파선의 발견은 얼마 전 발표됐지만, 선체 자체는 2007년 처음 발견됐다. 어느 함인지 확인하는 작업과 현장 보전에 시간이 필요해 발표를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난파선은 앞으로 우리나라 문화재청에 해당하는 히스토릭 잉글랜드에 의해 보전될 방침이다.
  • 伊 최악 가뭄에 2차대전 침몰 선박이 ‘슥’…기후변화의 재앙

    伊 최악 가뭄에 2차대전 침몰 선박이 ‘슥’…기후변화의 재앙

    유럽 대륙 곳곳이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전례없는 자연 재해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에서는 최악의 가뭄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몰한 선박까지 강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AP통신 등 외신은 이탈리아 북부를 흐르는 가장 긴 강인 포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침몰한 바지선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전체 길이가 약 50m에 달하는 이 바지선은 전쟁 당시 목재를 운반하던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1944년 독일군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군에 의해 폭격돼 이곳 포강에 수장됐다.약 80년 가까이 강물 속에서 잠자던 선박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근 이탈리아를 강타한 70년 만의 최악 가뭄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110일 이상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올해 강설량도 약 70% 감소했다. 현지언론은 "최근 한 포강 주변 마을의 강물 흐름이 평균에 비해 약 6분 1로 줄었다"면서 "극심한 가뭄으로 농업지역의 물 공급과 에너지 생산을 위한 수력발전소가 위협을 받고있다"고 보도했다.실제 현재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곳곳은 기후변화로 인한 전례없는 폭염과 자연 재해로 몸살을 앓고있다. 프랑스의 경우 70여 년 만에 가장 이른 폭염이 찾아와 지난 18일 남서부의 인기 휴양지인 비아리츠는 무려 42.9°c를 기록했다. 또한 스페인과 독일 등 일부 지역에서도 40°c에 육박하는 때이른 폭염으로 곳곳에서 산불이 나는등 크고 잦은 화재가 이어졌다. 세계기상기구(WMO) 클레어 눌리스 대변인은 “기후 변화의 결과로 폭염이 과거에 비해 일찍 시작되고 있다”며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며 우려했다.  
  • 비평이란 미학적 언어의 모험…문학적 감동의 순간과 만나다[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비평이란 미학적 언어의 모험…문학적 감동의 순간과 만나다[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문학의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30회 연재를 마쳤다. 시인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씨로부터 얼마 전 별세한 김지하 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른 분을 만났다. 실제로 만나 인터뷰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고인인 경우에는 그분에 대한 회상의 내용을 쓰기도 했다. 비평가로서 최대 행복을 누린 순간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형식에선 그분들의 언어를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평가로서의 본연적 임무는 유보되거나 실종되기 쉬웠다. 그러고 보니 이 코너를 통해 나는 한국 문학의 중요한 순간을 열어 갔던 시인,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아동문학가, 출판인, 문인 유족들의 고백과 증언을 경청하는 데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다. 독자분들께 그분들의 이야기를 투명하고 곡진하게 전달했다는 자긍심으로 위안을 삼는다. 마지막 지면에서 나는 비평가로서의 소회랄까 다짐이랄까 하는 것을 고백적으로 담음으로써 스스로와 대화를 해 보고자 한다.●판사 같은 비평가 여느 국문과처럼 우리도 교련복과 청바지로 대변되는 단색 필름을 켜 놓고 살았다. 유명한 시인도 스승으로 모셨지만 1980년대는 강의에 집중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가장 엄혹했다는 그 시기에 나는 의외롭게도 후배들과 세계문학 명작을 읽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지나치게 서쪽으로 치우친 목록이었지만 민족문학이 대세이던 시절에 서양 근대고전을 읽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엉뚱한 일이었다. 물론 문학회에서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으니 문학 쪽만 편식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기억의 고고학자가 되겠노라는 야심으로 근대문학 정전을 파고들었다. 지금도 또래 누구보다 근대문학 정전의 세목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편이다. 이때 가졌던 독파의 열정과 기억에의 욕망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원래 꿈이었던 창작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한때 그렇게 열심히 시를 썼던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망각의 시간이 흘러 버렸다. 창작 부문에선 못 했던 신춘문예 당선을 비평 부문에서 했다. 서울신문사 시상식에 갔더니 현직 교수로서 당선된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괜히 우쭐해졌지만 곧바로 그만큼 늦었구나 하는 생각이 따라왔다. 그때부터 정식으로 글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해 나는 지금까지 가장 분주한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문학을 처음 꿈꿀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이다. 그때그때 시인이나 작가들의 신작을 읽고 비평하는 일이 삶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게 됐고, 이제는 이름도 잘 모를 정도로 작가군(群)이 많아졌지만 우리 세대 나름으로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대화한 시간들에 감사할 따름이다.최근 어느 시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비평가에는 세 종류의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검사, 변호사, 판사 같은 비평가다. 검사 스타일은 창작 위에 군림하면서 억압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폭력적 계도형이고, 변호사 스타일은 매사에 창작자를 옹호하는 얌전한 덕담형이고, 판사 스타일은 이러저러한 징후나 사례를 따지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 제언하는 엄정한 판단형이다. 검사와 변호사만 넘쳐나는 시대에 판사처럼 균형을 가진 비평이 새롭게 충전돼 갈 때 우리 비평은 문학의 위기 국면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물론 이는 모든 비평가가 지고 있는 실존적 부채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의 정확성과 가치 생성력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이라는 성취를 이룬 이후 한국 소설은 세계시장에서 우뚝한 주인공이 돼 가고 있다. 그러한 역량 신장에 따라 한국 문학을 읽고 따지는 비평 장르에 대한 기대도 서서히 활력을 보이고 있다. 많은 이가 비평과 상업주의의 원칙 없는 야합을 경계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비평 활동을 하는 이들의 눈매와 손길은 날카롭고 섬세하다. 물론 비평의 비속화와 평균화를 부추기는 무책임한 동어반복 비평, 작품의 표층만을 따라가며 작가의 의도를 인준해 주는 헌사 비평, 이해관계를 반영해 이너서클 사람들에게 과도한 호의를 보이는 주례 비평과 결별해야 한다는 요청은 여전히 비평의 실존을 감싸고 있다.비평을 둘러싼 이러한 활력과 위기의 모순 양상은 지금이 비평에 대한 반성과 갱신이 강력하게 진행되는 시대임을 일러 준다. 이때 우리는 비평의 가장 핵심적 요건인 창의성과 공정성 그리고 타당성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비평은 엄정하고 합리적인 가치 준거에 입각한 해석과 평가의 행위이고 비평가는 자신이 선택한 준거에 대해 논리적으로 옹호해 가야 하지 않는가. 그 근거가 바로 비평의 창의성과 공정성, 타당성이다. 그것이 결여된 비평의 범람은 위기 국면을 더욱 심화시키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빚을 뿐이다. 우리 비평의 위기는 그렇게 비평의 창의적 갱신 가능성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이러한 균형 감각 못지않게 비평이 이겨 나가야 할 징후들은 제법 많다.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론의 서구 편향이고, 다른 하나는 독해의 부정확성, 마지막 하나는 비평과 상업주의의 밀월 관계다. 이러한 것들이 얽혀 문학의 위기를 비평이 초래했다는 진단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강조돼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평의 정확성이다. 모든 비평 행위가 텍스트나 문학 현상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기초로 하는 것이고, 그것의 최종적 존재 근거 역시 텍스트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비평은 텍스트로부터 받은 매혹을 적정한 해석 논리로 바꾸어 내는 능력에서 시작해 비평가 스스로의 가치평가를 반영하는 지점에서 완성된다. 나는 비평을 문학 행위나 현상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이자 그것의 논리적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 안에서 비평가는 작품과 독자를 이어 주는 해석자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심미적 텍스트로 나아가려는 충동을 가진다. 유행의 코드 밖에 소외된 고유하고도 독자적인 언어 세계를 발굴해 그것을 독자의 기억 속으로 편입시키는 노력 역시 비평가에게 부여된 몫이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도구로서의 언어와 절연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비평가야말로 실존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미학적 언어의 모험가”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비평의 기능이 이론의 증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창조적 차원을 암시하면서 삶에 반성적 조건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생각해 보면 비평의 정확성이나 가치 생성력은 비평의 위기 극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거가 돼 줄 것이다. ●‘무항산 무항심’을 생각하는 시간 선후배 비평가 가운데 느지막이 창작을 병행하는 이들이 있다. 부럽기는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것을 포기했다. 조금 차분히 생각해 보면 비평이라고 창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언어를 가지런하고 풍부하게 분석하고 해명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양도할 수 없는 비평가 자신의 언어가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꼭 창작이 아니더라도 나는 비평을 통해 일인칭 자기표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 과정으로 근대문학 유산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골몰하면서 오래전 작가들의 빛과 빚을 한없는 연민과 경이로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삼인칭을 향한 감동이 일인칭의 가치 표현으로 숱하게 전이돼 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순간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기억한다. 이러한 기억은 이 땅에서 문학을 한 이들의 언어에 대한 실존적 외경으로서의 비평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할 터다. ‘정서적 연루’(emotional involvement)라는 말이 있다. 문학 수용자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를 텍스트에 집어넣어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나만의 ‘문학적 순간’은 훌륭한 작품에 스스로를 투영시켜 감동을 체험하는 연루 과정에 있었다. 훌륭한 작품은 이 참혹한 침몰과 퇴행의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들려주지 않던가. “무항산(無恒産)에 무항심(無恒心)”이라는 말은 ‘맹자’에 나온다. 생산이 중단되면 마음도 사라진다는 말이다. 서울신문으로 비평을 시작해 여기에 성장 서사의 일편을 써 보니 그동안 항산을 통한 항심을 가져온 것에 감사할 뿐이다. ‘문학의 순간’에서 만난 스승, 선배, 동료, 문인 유족들께, 특별히 소중한 지면을 주신 서울신문 문화부에 깊은 사의를 드린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포착] 불타오르네…‘푸틴 살인병기‘ 바그너 용병 300명 전멸 (영상)

    [포착] 불타오르네…‘푸틴 살인병기‘ 바그너 용병 300명 전멸 (영상)

    우크라이나군이 동부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군 탄약고를 폭파하면서 ‘푸틴의 살인병기’로 불리는 바그너 용병 수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르히 하이다이 루한스크주(州)의 주지사는 현지시간으로 10일 “전날 우크라이나군이 루한스크주의 한 스포츠 경기장에 있는 러시아군의 기지를 공습하는데 성공했다”면서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해당 기지에는 최대 300명의 바그너 용병이 있었다”고 주장했다.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실은 “현재 우리 쪽 정보에 따르면 이번 공습에서 살아남은 바그너 용병은 단 한 명”이라면서 “이는 흑해 모스크바 함대 침몰 이후 최대 규모의 러시아군 손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측은 바그너 용병 그룹의 전투력이 동부 지역에서 사실상 제거된 상태라고 설명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와 물자 파괴 현황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이와 관련해 미국 정보 당국은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바그너 용병들이 머물던 기지를 파괴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다만 바그너 용병 그룹이 동부 돈바스 지역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전해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의 타격 목표가 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고 전했다. 이어 “러시아가 최근 극심한 병력 수급 부족으로 바그너 그룹을 포함해 시리아와 리비아 등에서 용병 1만 명 이상을 (우크라이나로)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중 바그너 용병은 1000명 이상으로 추산한다”고 덧붙였다. 바그너는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하려고 설립된 회사로, 그동안 러시아가 개입된 전쟁에서 꾸준히 작전을 펼쳐왔다는 점에서 ‘푸틴의 비밀병기’라 불린다.러시아가 2014년 크름반도(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할 당시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이후 아프리카와 중동, 시리아 내전 등에서 활동했다. 바그너 소속의 ‘푸틴 비밀병기’는 지난 2월 젤렌스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입국했지만, 임무 완수에는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지난달 24일, 민간인 살해 혐의 등으로 바그너 용병 한 명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해당 용병을 전범으로 규정하고, 현재 수배 중인 러시아 군인 및 용병 7명과 함께 이름과 사진 등을 공개했다. 남부 헤르손주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격전 이어져  한편, 현재 우크라이나군은 남부 헤르손주(州) 일대에서 러시아군에 대한 반격을 강화하고 있다. AFP 통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10일(현지시간) “헤르손 주 내 5개 정착촌 주변의 적 진지와 야전 기지, 장비 및 인력 집결지를 공습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전날에도 “헤르손에서 반격을 가해 일부 영토를 회복했다”라며 “러시아군은 인력과 장비를 잃었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헤르손주는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병합한 우크라이나 크름반도와 맞붙은 지역이다. 우크라이나 최대 물동항인 오데사로 가는 길목인데다 크림반도에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북크림 운하가 있어 러시아가 개전 직후 가장 먼저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이에 우크라이나군은 헤르손 탈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 세월호 침몰 원인 못밝힌 사참위...3년 반만에 활동 종료

    세월호 침몰 원인 못밝힌 사참위...3년 반만에 활동 종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세월호 침몰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10일 활동을 종료한다. 문호승 사참위 위원장은 9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 사침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3년 6개월 동안 정확한 진상규명과 온전한 치유, 안전한 나라 건설이라는 국민이 부여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 묵묵히 걸어왔다”면서도 “참사 피해자분과 국민이 보시기에는 조사 내용이 부족하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실 것으로 짐작돼 대단히 송구하다”고 말했다. 사참위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세월호 참사 관련 각각 8건의 권고와 참사 공통 권고 4건도 발표했다. 사참위는 양 참사 희생자에 대해 국가 차원의 추모사업을 실시하고 중대 재난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위원회를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재난피해자 알 권리 보장 및 정보제공·소통개선과 부처 간 안전 정보 소통 및 공유 활성화 체계 구축 방안도 권고안에 포함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서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공소시효 연장, 피해 입증책임 기업으로 전환, 조속한 피해판정 실시 등이 권고안에 담겼다. 박근혜 정부 시절 피해 유가족 사찰 및 사참위 조사방해 행위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나 자체 감사를 실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끝내 미결의 과제로 남았다. 사참위는 지난 7일 전원위원회에서 “세월호가 외력에 의해 침몰했는지 조사했으나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종합 결론을 최종보고서에 기재하기로 했다. 문 위원장은 “‘외력 가능성도 있지만 여러 반론도 있어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조사국의 결론과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위원회 결론은 상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세월호 침몰 원인을 명확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점도 조사 활동의 한계로 피해자와 국민께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증거가 불충분하고 여러 한계가 있어 명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사참위 전원위원회 위원의 임기는 10일 종료된다. 이후 9월 10일까지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사참위의 모든 활동은 마무리된다.
  • ‘천안함 좌초설’ 신상철, 12년 만에 무죄 확정

    ‘천안함 좌초설’ 신상철, 12년 만에 무죄 확정

    2010년 ‘천안함 좌초설’을 주장했다가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상철(64) 전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이 최종 무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9일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신씨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신씨는 정치평론 인터넷 사이트 ‘서프라이즈’에 천안함 피격사건 관련 글을 게시한 것을 계기로 민주당 추천을 받아 2010년 4월 합동조사단 위원으로 위촉됐다. 신씨는 모두 34회에 걸쳐 인터넷 게시글, 인터뷰, 강의 등을 통해 천안함 좌초설을 지속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국방부 장관, 해군참모총장, 합동조사단 위원 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1심은 신씨의 글 가운데 생존자가 살아 돌아올 수 없도록 구조를 일부러 늦추고 있다는 글과 국방부 장관이 증거를 인멸했다는 글 등 2건이 허위사실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신씨의 글에 허위성에 대한 인식과 비방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신씨는 정부나 군 관계자를 추상적으로 지칭했을 뿐 대부분의 게시글, 인터뷰 등에서는 표현의 상대방, 즉 피해자가 특정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개별 문장 중에는 허위사실로 볼 수 있는 표현이 포함돼 있기는 하다”면서도 “당시 천안함 침몰 원인에 관한 국방부 발표, 언론을 통해 보도된 각종 의혹, 합동조사단의 조사 경과 등을 고려할 때 신씨의 입장에서 그런 사실이 허위임을 알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신씨 글의 전체적인 취지는 천안함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침몰 원인에 관한 의혹이 충분히 해소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설령 사실 적시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공적 관심 사안에 대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비방의 목적이 있다거나 악의적 공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에 법리 오해 등 문제가 없다고 보고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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