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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목조로 복원한다/문체부,2009년까지/옛터에 방향 바로잡아

    ◎경복궁 전각 48개 제모습으로/조선총독부 미술관 98년 철거 오는 2009년까지 광화문이 본래의 위치에 목조건물로 복원되고 경복궁내에 모두 84개의 전각이 들어서게 된다.또 현재의 조선총독부자리에는 회랑이 설치되며 조선총독부 미술관(구 민속박물관)도 98년까지 모두 철거된다. 문화체육부는 27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경복궁 복원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총예산 1천7백89억원을 책정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원래 근정전과 수평으로 세워졌으나 지난 68년 철근콘크리트건물로 복원되면서 원래 위치보다 14.5m뒤로 물러난채 그 축도 경복궁 남북측에서 3.5도 동향으로 틀어졌다.이는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려는 목적으로 남북의 중심축을 막고 그 축을 파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3.5도 동향으로 지은 것에 맞춰 그대로 광화문을 복원했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의 콘크리트건물인 광화문을 2003년이후 철거하고 2009년까지 본래의 자리에 본래의 각도로 목조건물의 광화문을 복원한다는 것이 문체부의 계획이다. 광화문복원계획에는 문의 양측 담장을 전래의 궁궐담장양식에 따라 복원하는 것과 함께 지금은 없어진 서십자각을 복원,동십자각과 연결하는 것도 포함돼 있는데 이렇게 될경우 광화문 앞차선을 침범하게 돼 이를 놓고 문체부는 서울시측과 협의중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흥례문과 주변회랑이 설치되고 명당수가 흐르는 궁내 어구와 영제교도 설치된다.또 일제가 경복궁 남북 주축의 맥을 끊기 위해 세운 조선총독부미술관(구 민속박물관)을 98년까지 철거해 그자리에 고종과 황후의 처소인 건청궁을 복원한다. 한편 전각은 왕과 왕비의 처소인 침전 12동(95년말까지)을 비롯,왕세자가 생활하던 곳인 동궁 4동(97년까지)과 태원전 10동(2000년까지) 등 모두 48동이 복원된다.경복궁안의 전각은 고종당시만 하더라도 모두 3백30여동이 있었지만 일제침략으로 파괴돼 현재는 36동만 남아있다.따라서 오는 2009년까지 복원계획이 예정대로 끝나면 전각은 모두 84개동이 되는 셈이다.
  • “일제가 끊어놓는 민족정기 잇자”/쇠말뚝 제거운동 확산

    ◎「혈」 차단하려 전국 62곳에 박아/민관 합심,지금까지 35곳 뽑아 광복50주년을 맞아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 곳곳의 명산에 박아놓은 철주를 뽑아내는 운동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반도의 지세와 경락을 끊기 위해 혈맥에 쇠말뚝을 박아놓은 한반도의 풍수침략 사례는 모두 1백54건.이 가운데 일제가 한반도 명산의 혈을 찾아 철심을 박은 곳은 62건에 달한다. 45건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이여송이 저질렀고 그 나머지는 불명이다. 서경대 서길수교수는 그러나 실제 건수가 5배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0년동안 2곳에서 30개의 철심을 뽑은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구윤서·58)은 쇠말뚝뽑기작업을 올해 최대 역점사업으로 정했다. 회원들은 처음 자료수집에 나서 경기 이천군 설봉산,강원 인제군 미시령,속리산 문장대,마산 무학산,전남 영암군 월출산 천황봉 등 남한지역과 개성 송악산 등에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놓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이때부터 쇠말뚝제거작업에 나서 85년4월초부터 86년7월까지 1년여동안 백운대 정수리 바위에서 직경 3㎝,길이 40㎝쯤의 쇠말뚝 22개를 뽑은 것을 비롯,93년9월에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길이 30㎝의 철주 8개를 제거했다. 마산산악회회원들도 86년8월 마산 무학산 학봉 정수리부근에서 철심 1개를 제거한뒤 올초 다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양구사랑회」(회장 박상구)는 현재 양구읍 중리 제일봉 정상을 비롯해 고등골 계곡,방산면 뒷산 등 5∼6곳에도 일제가 심은 쇠막대가 있다는 주민제보에 따라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민간차원의 운동에 힘입어 정부의 철심제거작업도 활발해 행정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경북도청이 지난 14일 청도군 화양읍 소사리 주구산의 쇠말뚝을 뽑아냈으며 이어 관내 9개소에 쇠말뚝이 있다는 주민제보에 따라 조만간 이들 모두를 뽑기로 했다. 포항시도 20일 포항시 북구 청하면 용두리 해발 4백m의 속칭 용산에서 길이 1m50㎝,직경 1.5㎝의 쇠말뚝 2개를 뽑아냈다. 구미시는 23일 해발 9백76m의 금오산 정상부근 바위에서 쇠말뚝 1개를 제거했다.
  • 예멘­사우디/국경분쟁 종식/양국 어제 평화협정 서명

    ◎분계선 획정·경제교류 확대 등 합의 【사나(예멘) 로이터 연합】 예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26일 양국의 국경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고 사나 텔레비전 방송이 보도했다. 사나 텔레비전 방송은 이날 양국 대표가 메카에서 양해각서에 서명하는 광경을 생중계하면서 양국대표는 앞으로 국경선을 획정하고 국경지대에서 병력의 이동을 감시하는 한편 경제 및 문화관계를 발전시킬 위원회를 각각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양측은 자국 영토를 상대국가를 침략하는 기지로 사용하지 않고 또 상대국가에 대해서 비방전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이 방송은 보도했다.
  • 카자흐 자치주 이리계곡(서역 문화기행:12·끝)

    ◎천산 산맥자락 초원… 기마민족의 터전/18세기 들어 영·러 등 열강 각축… 중,54년 자치주 선언/아편전쟁 승리 이끈 임칙서 장군 동상 혜원성에 남아 밤낮을 부리나케 보름을 달리면서 겨우 서역의 중로와 남로를 말 타고 꽃 보듯 하였다.이제 남은 것은 사막에 논을 일구고 초원을 비단으로 가꾼,그래서 서역의 낙원으로 불리는 북로를 결코 빠뜨릴 수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이닝(이령)까지 공로 한시간은 정말 미의 여로였다.중로나 남로가 백색 아니면 적갈색의 질식적인 영토였다면 북로는 적갈색이 마르고 청록색이 살 찌는 낙원이었다.멀리 아이비호와 사이리무(새리목)호의 쪽빛 물결이 굽어 보이고 카자흐의 팔카스호로 흘러가는 이리강의 굽이치는 맥류조차 역력히 보인다.그보다는 하얀 만년설의 천산산맥과 파란 초원과 바둑판인양 구획 정리된 논밭들을 보면서 그 장관과 풍요를 읽고 있을 때 저 땅에 흥망과 공방이 오갔던 역사,그 소용돌이가 들리는 듯했다. ○꼬마들도 말타고 사냥 여기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로부터 동점한 스키타이들이 유목하면서 행국을 형성하던 곳.기마민족의 마당은 초원이었었다.따라서 초원위에서 꼬마조차 말을 타고 새를 쏜다는 흉노와 한무제때부터 동맹을 시도했던 오손과의 밀고 당기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그래서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5년 사이의 일이었다.한무제의 사신 장건이 오손의 곤막왕을 찾아 명마 천필을 요구하자 오손왕은 한왕조의 공주를 소망하였다.오손과의 동맹으로 흉노를 치고 명마 천필을 위해 이를 응낙하였다.무제 조카의 딸인 세군공주를 구천리밖 오손에게 보냈다.공주가 왕의 우부인이 되었지만 멀지 않아 곤막조차 노환으로 죽었다.오손의 풍습대로 곤막의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두었다지만 고향을 그리다가 끝내 백조가 되어 환고향하겠다는 슬픈 시를 남겼었다. 아름다운 이리계곡에 싸움은 쉬지 않았다.18세기에 들면서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야기된 서터키스탄의 무장 침입을 비롯,영국·러시아등 열강의 침노로 영일이 없었다.19 54년 중국 중앙정부가 이닝에다 「이리지역카자흐자치주」를 선포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리강 유역은 뎅구리(카자흐말로 하늘이란 뜻)신앙에 뿌리 깊은 기마민족과 세계최대의 농업민족인 한족과 교전으로 얼룩진 「화성」이요,「백양성」이다. 「사기」,「대원전」에 따르면 오손은 흉노보다 작은 행국으로 준갈분지의 남역과 천산북로를 무대로한 천산유목민이었다.그들은 늘 몽골 고원으로부터 침노하는 흉노나 서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월씨,대원등과 쫓고 쫓기면서 혼혈을 거듭하였다.그래서 옛날 오손국을 점거한 카자흐사람이 혈맥상 오손의 후예일 가능성도 없지않지만 유목적인 생활모형만은 오손의 계승자임이 틀림 없다. 이닝지역의 인구는 비록 카자흐·위구르·한의 삼분천하였지만 카자흐의 자치주인 만큼 카자흐의 색깔이 진했다.거기서 손을 뻗치면 옛날 소련연방이었던 카자흐공화국과 맞닿는 국경이다.텁수룩한 수염에 뾰죽하면서도 결코 높지 않은 코.형상은 사뭇 위구르사람을 닮았지만 살갗은 흉노쪽,역시 알타이가 가까워선지 모르겠다. ○위구르사람 얼굴 닮아그러한 카자흐사람을 보면 옛날 한나라때부터 이곳에 죽치고 살았던 터주들임에도 그들이 뽐내는 천마를 기르고 천산 산마루나 초원을 질풍처럼 달리면서 함성을 지르는 기마술 말고 그들 스스로의 역사는 쓸쓸하리만큼 한산하다. 1978년 북경의 고고학자들이 이닝의 서쪽 고을 신웬(신원)에서 오손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필자는 그때 의아했었다.유목민에게는 성토해서 봉분을 만드는 습속이 없어서였다.오손족은 그만 두고 천하를 휩쓸었던 칭기즈칸의 무덤조차 알 길이 없지 않았던가? 그들은 시신을 풀밭에 묻고 그 위로 말이 달리고 새풀이 돋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밭이 되었었다. 그럼에도 차푸차알(찰포사이)에 있는 시보(석백)족 자치현에 오손 고분이 있다는 말을 듣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 고분이 있는 진첸(김천)읍은 이닝의 동남쪽 4.8㎞지점.진쳰읍 이라치뉴루(의랍재오록)마을엔 크고 작은 고분 2기가 있었다.그들은 모두 만두모양의 대머리 무덤,그 위에는 풀 한포기 없는 황토의 언덕이었다. 진쳰 씨앗공장뒤편에 있는큰 무덤은 그 높이가 10m에 직경이 25m쯤,거기서 서쪽으로 4백m지점인 시보중학교 교문옆에 있는 작은 무덤은 큰 무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임은 마찬가지였다.다만 아무 곳에도 2천년전의 오손 무덤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없었다.1978년,신웬고분의 발굴조사에서 이미 밝혀진대로 비록 2천년의 연조는 밝혀졌지만 그 속에서 고작 유골과 약간의 목기만 출토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다만 흙 둥주리뿐인 오손 고분을 답사하고 돌아오면서 결코 허행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차푸차알에 들러 시보족들의 마음을 참관하고서였다.그곳은 이닝 남쪽 20㎞지점,서역에서는 유일하게 시보족이 집단 거주하는 촌락이었다.그 마을 이름이 시보말로 「곡식의 창고」라는 뜻,그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필자가 서역을 떠돈지 스무날,이제 귀로에 올랐는데 뜻밖에도 타관서 동향을 만난 설렘이 있었다.글세,차푸차알을 거닐다가 거리에서 만난 얼굴들은 몹시 낯이 익었었다.작은 키에 둥글 넙죽한 얼굴,낮은 코에 가는 눈.그뿐이랴? 그들의 민속촌에서는 울긋불긋한 과녁에 활쏘기와 장사들의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거기다 서너근이 될법한 무와 빈대떡 비슷한 밀떡을 부침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2년여 남짓 귀향살이 그들은 벌써 백여년전,빈발하는 청로전쟁에 만주로부터 파견된 청군의 후예들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민족과 가장 사촌민족인 만주족이었는데 그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만주어 보존 구역이었다. 그러나 풍운의 현대사가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중·카국경옆 훠청현에 있는 후이웬(혜원)읍이었다.후이웬은 이닝 북서 40㎞지점.거기는 청대 이리장군(총통이 등진장군의 약칭)의 주둔지였다. 청나라는 1757년,준갈분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서역을 재통일하고,1762년,거기다 「이리장군」을 설치하여 신강지역 최고의 행정및 국방의 수장으로 천산산맥의 남북로는 물론 팔카스호 동쪽지구를 총관장했었다.1764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다 둘레 7㎞의 성을 쌓았지만 1871년의 러시아침략으로 무너졌던 것을 18 82년에 오늘의 후이웬성으로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이웬성이 역사의 무게를 지니게 된 것은 2백30년에 달한 연조 그 자체보다는 그를 다스리던 사람과 역사와 예술을 한 곳에 응집 표현한 몇채의 건물이 있다.그 사람은 임칙서(1785∼ 1850년)요,그 건물이란 후이웬루(혜원루)와 장군부·장군정이다. 임칙서는 애국의 장군이었다.광동광서의 총독으로 금연운동을 펼치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군대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면서도 면직 당한 채,1842년12월부터 이리장군으로 전임,1845년1월 사면 받기까지 2년남짓 귀양살이하면서도 농지를 확장하고 농산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자취는 사방에 있었다.후이엔성안에 보존되고 있는 당시 이리장군의 거소요 지휘본부였던 「장군부」와 「장군정」이 중국 남방의 소박한 건축양식과 정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가하면 후이웬성 북쪽 5백m쯤엔 임씨가 손수 심었다는 청강수 네그루가 「임공수」란 이름으로 빨간 벽돌담안에 모셔 있었다.거기에 그치지 않았다.이닝시 서북쪽 교외의 경제개발구역에는 이닝시문화국에서 1994년8월에 완공한 「임칙서기념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안에는 임씨의 동상과 사적전시실이 꾸며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리지역을 상징하는 마크는 뭐니뭐니해도 후이웬성밖에 북경의 고루를 본 떠서 1897년에 축조한 「후이웬루」다.벽돌 축대위에 날듯한 처마와 울긋불긋한 기둥의 3층 누각은 어쩌면 중국 서북단을 지키고 카자흐 자치주에 세워진 가장 한족적인 문화의 축도로 서 있다.
  • “사죄거부라니…일본은 차라리 침묵하라”/휴코타지 전 주일 영국대사

    ◎“명백한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 망언/식민 지배 극도 잔학… 피폭책임 일 군부에 일본의 보수·우익세력들은 전후 50주년을 맞아 과거 아시아침략에 대한 반성·사죄를 거부하고 오히려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시아 해방전쟁」이었다는 망언을 되풀이 하고 있다.일본 우익세력들의 이러한 망언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휴 코타지 전주일영국대사는 산케이신문 기고에서 『일본은 차라리 침묵을 지켜라』고 충고하고 있다.다음은 기고문 내용. 대지진의 비극으로 한 해를 시작한 일본은 올해 전후 50주년을 맞아 쓰라린 코멘트를 많이 듣게 될 것이다.나는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러한 논평에 주의깊은 반응을 보이기를 바란다.분노로 성급하게 반응하면 감정이 악화될 뿐 일본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부주의한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의 정치가들이 위엄있는 침묵을 지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올해는 화해에 역점이 두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올해는 승리와 패배를 각각 기리기보다는전쟁이 가져다 준 고통을 공감하고 되새겨보는 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들은 지금 제2차 대전중 일본제국군대가 점령한 지역의 주민에 대해 일본과 「천황」의 이름으로 얼마나 광범위하게 불행한 일들을 저질렀는지 또 그 행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되새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취급을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나는 종전직후 싱가포르에서 나의 친척을 포함한 포로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다.하지만 기독교인은 「너의 적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나는 화해를 바란다. 우리는 일본제국군대의 일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나는 이곳 영국에서 일본인의 친구로서 일본인은 다른 국민과 이질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문제는 인종이나 선천적인 특징이 아니다.나는 일본인 가운데 괴로움을 주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한 군인이 있는 한편 연합국측에 복수심에 불타 문명인으로서의 행동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군인이 있음을 알고 있다.슬픈 이야기이지만 인간에게는 나쁜 짓과 잔학한 행동으로 치달리려는 경향이 잠재해 있다.이 잠재적 요소는 상황과 사상의 교화에 따라 표면화된다.러일전쟁과 1차대전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공정한 취급을 받았다.왜 2차대전 당시 일본의 태도와 행동은 돌변했는가. 나의 설명은 이렇다.명치시대의 지도자들은 단결을 강요하고 일본을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신도의 의식과 「천황」숭배를 생각해 냈다.지도자들은 주로 농촌으로부터 징집한 장정들로 강력하게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잔혹한 신병 이지메(가학행위)를 포함한 엄한 훈련을 강요했다.이지메를 당한 인간이 다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이지메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무라이 윤리는 이 과정에서 땅에 떨어졌다.무사도의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렸다.충성심이 변질돼 젊은이들에게는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의식이 심어졌다.하지만 「천황」의 마음이 장군들에의해 강제되고 있는 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장교들 가운데는 사물에 대한 태도가 비뚤어져 포로에 대해 생물무기 및 세균무기의 실험을 한 자도 있다.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확신한다.나는 민주주의적인 절차와 제도가 일본에 뿌리내렸으며 일본인은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고 믿는다.일본 헌법 9조(교전권과 집단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음)가 개정된다해도 일본의 평화에의 서약은 지켜질 것이다. 물론 항상 위험은 있다.그 가운데는 전쟁중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할 위험도 있다. 때때로 일본의 동남아시아점령은 서구의 식민지 지배가 빨리 끝나도록 했다며 정당화 하기도 한다.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식민지 지배는 전쟁전에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다.영국은 그 이상 식민지 지배를 유지할 경제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게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영국의 지배보다 훨씬 가혹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자폭탄에 대해서는 우리는 투하된 뒤에조차 일본정부가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쇼와(소화)일왕의 개인적인 개입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은 「천황」의 항복방송마저 막으려 했던 것이다.원폭으로 죽은 사람들과 피폭자에는 동정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히로시마의 비극의 최종적인 책임은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있다. ▷약력◁ ■1924년 영국 요크셔 출생 ■세인트 앤드루스대,런던대서 수학 일본어로 학위취득 ■1949년 영 외무부 근무시작 1980 ∼ 84년 주일본대사 역임 ■저서「황금의 섬들,일본의 고지도」 「동의 섬나라,서의 섬나라」 「속 동의 섬나라,서의 섬나라」
  • 「김영삼 정부의 성취」 서울의 외국특파원 평가

    ◎사라진 시위·최루탄… 세계화 “기대”/구로다 가쓰히로 일 산케이신문 지국장/「경제우위·탈정치」 사회기류 주시해야 얼마전 서울에 10년 이상 주재한 일본 기업인의 송별회가 있었다.그때 그는 한국생활을 되돌아보는 인사말에서 한국사회의 최대 변화는 학생시위와 최루탄이 없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5공화국 초기인 1982년 1월 오랫동안 계속돼 왔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불편했던 「야간통행금지 시대」를 떠올리지 않으며 훌륭한 역사적 정책결정이었던 「통금해제」를 평가하지 않는다.그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로부터 학생시위와 최루탄이 사라진 것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평가하여야 한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 정권 출범후 2년간을 돌이켜 볼때 학생시위와 최루탄이 없어진 것은 틀림 없는 한국사회의 위대한 변화다.그러한 변화는 문민정권의 탄생으로 이루어졌다.확실히 김 정권의 최대의 업적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김 대통령의 그러한 문민정부 성과는 어려운 과도기에민주화를 정착시킨 노태우 정권의 노력 연장선 위에 있다.따라서 문민정부라 해도 과거를 부정만 해서는 안된다.역사에는 정직하지않으면 안된다. 학생시위와 최루탄의 소멸로 상징되는 김 대통령 정권의 2년은 한국 현대정치사상 국내 정치가 가장 안정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그때까지 한국의 대외 이미지는 학생시위와 정치불안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반정부운동이 없어졌다.외국인의 눈에는 가장 감명 깊은 변화다. 그러나 국민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요구 사항이 많다.정부의 훌륭한 업적을 강조·자랑하고 싶어도 국민들은 「당연한 일」 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며 또 다른 것을 요구하면서 불만을 말한다.국민들에게는 정치안정이나 개혁이라는 업적은 이미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예상 이상의 경제성장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김 대통령은 이때문에 또 다른 업적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최근 김 대통령 정권의 정치스타일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민자당의 당명 변경 중지와 대표지명이다.국민을 상대로 새로운 당명까지 모집하다가 갑자기 당 이름의 변경을 중지했다.국민들에 대한 공식 사과·헤명도 없었다고 생각된다.새로운 대표자 임명도 당대회 때까지 비밀이었다.김종필씨가 탈당, 신당을 선언하며 지적한 「독선·독단·충격에 의한 정치스타일」 이라는 비판은 당연하다. 김 대통령은 인품이 훌륭해 득을 보고 있으나 그의 정치스타일은 「선의의 지도자 한사람 정치」라 할 수 있다.한국정치는 역시 지도자 한사람의 정치가 아니면 안되는가. 그러나 문민정부의 업적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정치의 비중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한국도 경제 규모가 커지며 근본적으로 국가를 움직이고 있는 힘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로 옮겨지고 있다. 김 대통령의 최대의 업적은 한국사회를 탈정치화의 길로 이끈 것이 될지 모른다.학생시위의 소멸로 학생들은 이미 탈정치화 되고 있다.6월의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한국은 「정치의 계절」을 맞지만 국민들은 사실 탈정치화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앤드루 스틸 영 로이터통신 지국장/정치안정 바탕,통일에 과감한 도전을 서울 중심가를 조금만 걸어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2년간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변화를 곧 알수 있다.그러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은 앞으로 하여야 할 주요 과제를 안고 있다. 서울 중심에 있는 시청을 출발하면 여기저기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그것은 김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기업안정의 상징적 조형물이다.김 대통령의 등장으로 실현된 30년만의 문민정권 탄생은 한국의 군사통치와 권위주의의 어두운 시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음을 세계에 알리는 분명한 신호였다.공정한 자유선거를 통해 권력에 오른 그의 길은 번영하는 민주국가로서의 한국의 성공적인 등장을 더욱 확실히 입증하고 있다. 서울시청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울신문을 비롯한 언론사들이 있다.언론은 김 대통령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비교적 자유를 누려왔다.세계의 언론감시단체들도 한국의 언론은 자유롭고 민주적이라고 선언했다.물론 한국의 언론자유가 완전히 장미빛만은 아니다.군사통치시대에 만들어진 언론자유를 제약하는 낡은 법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김 대통령도 폐지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그러한 법률은 김 대통령 만큼 훌륭하지 못한 미래의 지도자가 등장할 경우 언론제약으로 악용될 잠재적 위험성이 있다. 김 대통령은 개방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그러나 한국의 개방화는 아직 초기단계이다.서울에는 세계 주요 수도보다 여전히 외국인이 적다.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은둔의 나라」 시대는 지났으며 한국은 새로운 자화상을 만들고 있다. 김 대통령은 클린턴 미국대통령, 옐친 러시아대통령,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강택민 중국국가주석 등 세계적 지도자들과 함께 국제무대를 활보하며 한국의 외교적 위상을 높여 놓았다.한국의 다음 목표는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다.그러한 목표의 실현도 그리 멀지않은듯 하다.그러나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은 아직도 관료주의와 한국사회의 복잡함에 당혹할 때가 있다.김 대통령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 혁명이 공허한 슬로건의 의미 없는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지않으면 안된다. 세종로 끝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여전히 경복궁과 청와대의 시야를 막고 있다.그러나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인 국립박물관도 많은 논란 끝에 김 대통령이 철거를 결정함에 따라 멀지않아 사라질 것이다.그 결정은 일본및 「빅 브라더」 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의 점증하는 자신감과 함께 김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독소를 제거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청와대 뒤에는 그러나 북한의 잠재적 침략가능성에 대비한 장벽이 있는등 무거운 남·북대결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김 대통령은 수십년간 계속돼온 북한의 불신과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그런 가운데 김 대통령은 폭발성을 갖고 있는 미지의 인물인 김정일과 조만간 거래하지 않으면 안된다.김 대통령은 한국을 안정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키고 있지만 과감한 통일에의 도전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그의 성공적인 대통령상은 심각하게 평가절하 될 것임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 하롱베이로 가는 길(송정숙 칼럼)

    1968년 전쟁중의 사이공을 본 눈으로 오늘의 하노이와 만나는 것은 많은 감회를 느끼게 한다.무엇보다도 그때 「월맹」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했던 적대세력의 실체가 어떠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일이 고소를 머금게 한다.하노이사람들은 조그만 체격이 다부지고 질기고 영악하다.그리고 매우 호전적이다. 하롱베이로 가는 길에는 그런 모습의 베트남 인민들이 열매처럼 다글다글하게 열려 있었다.하롱베이는 우리에게 「인도차이나」라는 영화로 알려진 아름다운 만이다.3천개나 되는 석회암의 섬들이 에메랄드 빛 바다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용이 누운 것 같은 형상의 기막힌 경색의 만이다.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돈맛을 안 암팡지고 영악한 사회주의 베트남 인민들이 엉겨붙어 있고 어른보다 더 야무진 2세들도 합세하고 있다. 학교는 『부모님이 돈부터 벌어오라고 해서』 집어치웠다는 열네살짜리 구두닦이 소년은 밤 11시에도 여행객의 신발을 벗겨간다.값은 『1달러!』.그들의 조상이 13세기에 바다를 타고 침략해 온 몽골군을3번씩이나 기지의 전술로 물리쳤다는 자랑스런 역사를 가진 백등강나루에서는 5살도 채 안된 유아기의 어린이가 바나나 한송이를 내밀며 말한다.『마담,텐사우센드 동!』.베트남돈 1만동은 1달러다.그걸 안사면 죄를 받을 것 같아 값을 치르고 받아 들었더니 아주 분명한 발음으로 어린이는 말했다.『메르시!』.흑요석처럼 맑고 깜찍하게 예쁜 얼굴이다.그 뒤에서 그의 어머니임이 분명해 보이는 여인이 이번에는 다른 상품을 쥐어주었고 그 아기 장사꾼은 다시 젖내나는 음성으로 『텐 사우센드 동…』을 뇌며 저쪽으로 아장아장 걸어간다. 가슴아프다.옛날 그와 비슷했던 우리 처지를 회상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많은 예쁘고 영특한 아이들을 길에 내세워 「1달러!」벌이를 시켜야 하는 오늘의 하노이 현실이 가슴아프다.혁명에 성공한 그들도 다른 여느 발전도상국과 꼭같은 과정을 생략없이 겪고 있다는 사실도 서글프다.프랑스도 미국도 중국까지도 이 맹랑한 나라에 물리고는 오금을 못썼다.그 거인들이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하고 빠져나갈까 고민하게 만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달아나게 만든 것이다.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그 금욕적인 이념의 덕이 아니었을까.그걸 저버려가며 의무교육도 못마친 어린 싹들을 「1달러」벌이로 먼지나는 길가에 도열시켜야 한다는 것은 남의 일이지만 우울하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이 만든 소책자를 보면 그들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95%지만 이후 중등과정의 진학은 40%만이 하고 있다고 한다.놀랄만한 검소함과 금욕이 그들을 지탱해 온 지주였던 것에 비하면 경제발전이 최우선의 덕목이 된 오늘의 정신적 혼란을 그들은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하롱베이로 가는 확장되는 도로변 집들은 거의 모두가 길로 향해 가게를 열고 있다.물건이라야 빈약한 좌판수준이거나,위생이나 볼품에 대한 고려가 전혀 안된 쌀국수정도가 몇개의 의자와 함께 놓여 있을 뿐이다.그리고 의외로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당구장이다.그런 당구대에는 어김없이 깜깜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귀가할 생각을 않는 것 같은 청소년들이 그득그득 둘러싸고 있다.맨발이거나 슬리퍼뿐인 발에 헐렁한 바지와 셔츠차림의,윤끼도 장식기도 전혀없는 청소년들이 당구놀이에 이렇게 탐닉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강이 많고 겨울이 없는 베트남은 중부 이북에서는 2모작이,남쪽에서는 3모작이 가능한 나라다.그래도 만년 식량부족으로 한해에 수십만t을 수입해 와야 했는데 개방정책을 실시한 이후로 지난 해에는 2백5십만t의 쌀을 수출해서 세계에서 3번째 쌀 수출국이 되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강과 호수가 많은 이 나라에서는 물이 가장 큰 자원임을 알 수 있다.그러나 하노이 중심가조차도 도로에 하수도 공사가 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모든 생활오수가 바다로 강으로 직접 뚫린 길을 따라 곧장 흘러드는 것 같다. 경제적 도덕성의 지표인 환경오염과 정신적 도덕성의 기본인 윤리의식이 극도의 혼란을 예측시키며 달리고 있는 길.베트남에 속했지만 신이 인류에게 함께 즐기도록 마련했을 그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가는 길에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 청·일 전쟁 선전포고문 국내 첫 공개

    ◎국경연구단체 토문회 양태진 박사 입수/전쟁 발발 1백돌… 관련 논문·자료도 선보여 올해는 청·일전쟁(1894∼95)1백년이 되는 해.청일전쟁은 그 무대가 주로 한반도라는 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된다.특히 이를 구실로 일본이 한국침략을 굳혔기 때문에 더욱 주목되는 전쟁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이 분야의 연구는 아주 부진한 상태.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청·일전쟁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논문과 함께 희귀한 관련자료가 공개되었다. 화제의 논문은 국경연구단체 토문회 회장 양태진 박사가 내놓은 「청일전쟁과 한반도」.국방연구소 학술지 「군사」 제29호를 통해 발표한 이 논문은 전쟁 발전과정과 한반도 피해에 초점을 맞추었다.청·일전쟁은 18 94년 7월25일 상오7시 충남 아산군 풍도 앞바다에서 요시노호(길야호)등 일본함대가 광을호 등의 청국함대를 만나 포문을 연 것으로 시작되었다.18 95년4월까지 싸운 이 전쟁은 한국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양박사는 이 논문에서 충남 성환과 평양등의 내륙전,압록강 도강등의 일본군 작전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상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 제10여단장 다츠미(입견상문)가 황해도 신계 일대에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린 자료 「일청전쟁실기」(1895년 발행)도 발견한 양박사는 특히 평양 약탈에 주목했다. 청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출병한데서 비롯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실리를 강제로 챙겼다.경부선 철도부설권 장악,통신수단의 일본군 전용화,개항장을 통한 경제수탈등이 그것이다.이는 결국 일본의 정한론이 시행된 것으로 우리나라가 주권상실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박사는 최근 휘귀자료인 일본의 청·일전쟁 선전포고문을 일본으로부터 입수,공개했다.「조선국의 안녕질서가 필요하여 청의 독선적 태도를 묵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이 선전포고문 표제는 「선전조칙」.메이지(명치)의 초상도 들어있는 인쇄본 두루마리(가로 27.5㎝·세로 48㎝)의 선전포고문은 당시 도쿄 외교가에 돌렸던 자료.먼저 전쟁을 벌이고 난 다음에 국제여론을 못이겨 8월 1일자로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을 뚜렷이 입증하고 있다.
  • 풍수침략(외언내언)

    우리조상들은 몸에 혈관이 있듯이 땅에도 생기의 통로인 혈맥이 있다고 믿어왔다.이른바 지기라는 것이 땅의 혈맥을 통해 순환한다는 것이다.고려시대이후 풍미한 풍수지리설은 이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집을 짓거나 묘를 쓸 때 풍수지리를 따졌고 기를 쓰고 명당을 찾았다.이와 함께 마을이나 산의 형세를 빌려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기도 했다.「이 고장이 배모양을 하고 있어 돛대를 세우고 우물을 깊이 파서는 안된다」는 등의 풍수설화도 도처에 산재해 있음을 보게 된다.연못속의 용을 쫓아내고 절을 세웠다는 경주 황룡사의 창건설화는 유명하다. 일제때 이 땅을 강점한 일인들은 전국도처의 명당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지맥을 끊어 우리의 민족정기를 차단해보겠다는 흉계에서였다.식민지지배를 영구히 계속하겠다는 미망이 담겨져 있었다.『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랴』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북한산 백운대에서도,속리산 문장대에서도 지맥끊기 쇠말뚝을 뽑아내지 않았는가.아직도 전국 1백30여곳에 이 「치욕의 쇠말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제가 저지른 최대의 지맥끊기는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세운 총독부건물.4백여칸의 전각을 헐어내고 식민지통치의 상징건물을 세운 것은 왕기를 막고 왕조에 대한 백성의 그리움을 차단하기 위한 술책이었다.오는 광복절에 구총독부청사의 해체작업이 시작되지만 철거된 뒷자리에서 또 무슨 「풍수침략」의 흔적이 나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엊그제 국무회의에서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모두 제거하기로 했다.민족정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산 정상에 박힌 것뿐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속에 박힌 일제의 쇠말뚝은 없는가 점검해볼 일이다.
  • 「지구촌 안방」 공략(일본 「21세기 야망」:8)

    ◎치밀한 문화 침투… 「의식의 일본화」 모색/위성방송 활용,아시아전역 24시간 “장악”/전세계 가정용 만화영화시장 65% 석권/「종합안보」 일환… 친일세력 저변확대 노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엘 헌팅턴 하버드대학 교수는 『냉전후 국제정세는 문명·문화의 갈등과 충돌의 세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문화의 갈등이 국제정세의 핵심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그의 유명한 「문명 충돌론」은 세계를 7∼8개의 문명권으로 분류하며 그 중에는 일본 문명권도 포함된다. 헌팅턴 교수는 문명충돌론에서 일본문화를 「이질적 문화」라고 지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아시아경제 지배가 강화되면서 「이질적 문화」라는 일본문화가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아시아지역에서 범람하고 있다. 일본문화는 국경 없는 전파매체를 타고 아시아 전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홍콩에 본부를 둔 스타TV는 일본의 드라마 만화 등 많은 프로그램을 방송한다.아시아의 많은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일본의 대중문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본문화는 NHK 위성방송의 전파를 타고도 하루 24시간 한국·중국·대만등 아시아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일본문화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재팬」을 통해 미국과 유럽에도 전파되고 있다.텔레비전 재팬은 더욱이 오는 4월부터 아시아 방송국들과의 계약을 통해 NHK등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아시아방송을 본격화한다.일본문화가 더욱 빠른 속도로 아시아 곳곳에 침투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해외전파는 고유한 전통문화보다는 대중문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그중에서도 만화영화,TV프로그램,만화,가요,비디오,컴퓨터게임등의 해외시장 진출은 놀랍다.자국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프랑스에서도 일본만화영화의 인기는 대단하다.한국의 어린이들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어린이들도 일본만화영화 「드래곤 볼Z」를 즐기고 있다.일본만화영화는 세계의 가정용 만화영화시장(연2조8천억원 규모)의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이같이 아시아등지에서 범람하게 된 것은 자연발생적이 아니다.일본은 50·60년대 동남아시아국가등과 국교정상화를 이룬 후 수십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문화보급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다.일본은 특히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70년대부터 「종합국가안보전략」 차원에서 문화외교를 적극화했다. 적극적인 문화외교의 첫작품은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내각때 만들어진 「일본재단」.72년 다나카 총리의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순방때 방콕·자카르타등에서 격렬한 반일시위를 경험한 일본정부는 아세안국가와의 상호이해를 위한 문화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재단을 설립했다.그러나 70년대 초의 석유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재단의 실패이후 본격적인 문화외교는 70년대 후반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이른바 「후쿠다 독트린」으로부터 시작됐다.후쿠다 총리는 일본의 아세안 프로그램으로 5백만달러의 「아세안 문화기금」을 창설했다.그후 81년 스즈키 젠코 총리는 아세안 순방중 「인적자원개발기금」으로 1억달러를 지원하고 아세안 각국에 연수원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은 이같이 아세안 국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다.일본은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침략자라는 굴레에 얽매어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를 주저했던 일본문화의 정체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일본은 특히 아시아국가들의 반일 감정을 고려,문화교류에서 아세안과 동등한 파트너임을 강조하며 신중한 접근을 했다. 그러나 문화교류는 대부분 외형상으로는 호혜·평등의 형식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방적 유입」의 형태를 나타낸다.할리우드의 영화,코카 콜라,팝송,블루진으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확산이 그 좋은 예이다.일본과 아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본대중문화가 일방적으로 아시아국가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은 또 미국이 2차대전후 세계지배를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문화를 활용했듯이 일본문화 보급을 적극화하고 있다.문화의 보급은 문화상품의 판매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가이익과도 직결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요인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일본문화의 확산은 수요자들의 민족적 고유성을 위축시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일본화」할 위험성이 있다는데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그런 가운데 일본은 문화확산을 통해 아시아등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영향력을 증대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 30여개의 일본문화원은 일본문화보급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으며 저질·퇴폐의 비난 속에서도 일본 대중문화의 세계적 확산은 멈추지 않고 있다.경제·정치·군사대국화에 대한 경계만을 논의하는 사이 일본은 문화보급을 강화하며 세계 곳곳에 친일세력을 키우고 있다.일본의 그러한 문화확산전략은 21세기에 더욱 적극화될 것으로 보인다.
  • “북­미는 여전히 교전관계”/기관지 「민주조선」 논평

    【내외】 북한은 10일 미­북기본합의문 채택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은 변하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이 북한에 반대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단호히 맞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은 이날 논평을 통해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여전히 친선·화해의 관계가 아니라 교전관계라고 지적하고 최근 미국내에서 일고있는 반북 군사위협 책동에 대해 결코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페루군 최후공세 돌입/전투 다시 격화/에콰도르군 거점 맹폭

    ◎후지모리,휴전제의 거부 【리마·키토 AFP AP 연합】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대통령은 16대의 페루 공군기가 에콰도르군과 지난 3주일간 무력충돌을 벌여온 국경지대에 최후공세를 단행하기 위해 에콰도르군 거점을 폭격했다고 9일 발표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이날 자정(현지시간)에 임박해 전격 TV회견을 갖고 에콰도르가 페루 도시를 공격할 경우 페루는 「3배의 강도로」 보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그동안의 전투로 숨진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의 휴전에 들어가자는 에콰도르측 제의를 전략적·외교적 의도가 담긴 술수라고 비난하며 거부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이번 국경전쟁이 『침략군을 페루영토에서 격퇴하는데 그 목적이 있을 뿐』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에콰도르영내로 진격해 사태를 악화시킬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식스토 두란 바옌 에콰도르 대통령은 이날 아마존강유역 정글지대에서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급거 전선시찰에 나섰다. 바옌 대통령은 군사작전지역을 방문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야전병원도 방문했다. 에콰도르군사령부는 페루공군기들이 세네파강 상류의 에콰도르군 기지 2곳을폭격했다고 주장했다.
  • 최팔용선생/3·1운동전 「2·8독립운동」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주일 한인유학생 학우회서 맹렬 활동/일제 고문·투옥생활 후유증… 32세 순국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또 국가·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1918년4월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중이던 당남 최팔용(당남 최팔용)선생이 도쿄 YWCA에서 열린 「와세다대 동창 웅변대회」에 참가해 외친 내용이다. 선생은 이같은 신념 아래 1919년2월8일 2·8독립선언을 주도,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일제 때 있었던 3대 독립선언 가운데 하나인 이 2·8독립선언은 간도에서 조소앙 선생등이 2월1일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에 이어 두번째 나온 것으로 20여일 뒤의 3·1독립선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리 남당읍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신학문 습득을 위해 일본 유학을 하던중 항일의식을 갖게 됐다.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에 입학한 선생은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일제의 민족차별을 몸으로 겪으면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갔다.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는 도쿄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1927년10월27일 조직된 단체로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선생은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통해 갖가지 글을 발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선생은 이후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학지광 편집위원 최승만에게 제의,비밀리에 동지규합에 나섰다.당시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는 영자지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대표 이승만과 민찬호등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는 기사와 조일신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류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의 거액을 모금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고무돼 있던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이어 1918년12월28일 유학생망년회에서 「민족자결론에 의한 한국독립론」을 주제로 의견을 나누고 이듬해 1월6일 도쿄에서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운동방법을 숙의했다. 웅변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민족자결대원칙에 입각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이 대회에서 송계백·전영택등과 함께 10명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돼,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방법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선생등은 우선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그리고 독립과 관련한 결의문을 작성,일본 조야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선생등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문을 비밀장소에서 등사판으로 작성하고 거사 하루전인 2월7일 밤 와세다대 부근에 후배들을 불러놓고 『내일 붙들려가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2월8일 날이 밝자 선생등은 독립운동서를 각국 대사관·국회·조선총독부와 각 신문사·저명인사등에게 우송,거사에 돌입했다.선생등은 이어 하오2시쯤 YWCA에서 6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학우회총회를 열었다. 선생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발족을 선포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독립선언문은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침략을 강행했으며 한민족은 독립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회의가 끝난 뒤 가두행진을 펼치려 했으나 일경이 회의장주변을 둘러싸고 가두진출을 막아 충돌 끝에 대부분 체포됐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일경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재판에 회부돼 1년전후씩 금고형을 선고받았다.송계백의 경우 옥중 순국했으며 선생은 수형생활 9개월만인 1920년3월26일 만기출소했다. 선생은 그러나 옥중에서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2년여 뒤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진보­퇴행 국가」로 이원화/독 언론인 좀머,「냉전종식 5년」진단

    ◎유럽­미주­아태 경제통합·중동평화 “합창”/종교·민족분쟁지역선 자원파괴­낭비 심각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 테오 좀머씨(독일 차이트지 공동발행인)는 6일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냉전후 세계는 2분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진보의 나라」와 「퇴행하는 나라」로 분화되고 있는 가운데 신질서의 형성은 어려운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음은 좀머씨 기고문의 요약이다. 5년전 냉전의 종결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프랜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예언자는 밝은 모습으로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긴장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출현했다.민족적 열기와 종교적 원리주의에 자극받은 공격적 내셔널리즘이 대두됐다.94년은 환멸·붕괴 ·절망의 해였는가,진보와 공동성장·희망의 해였는가. 비관론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많다.유럽의 안마당인 보스니아가 킬링필드화하는 등 50여곳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1914년의 사라예보와 달리 94년의 사라예보는 유럽의 전쟁으로 연결되고 있지 않다.강대국 외교는 성공했다.이슬람원리주의의 위협도 지중해를 넘어서는 대규모 난민의 흐름을 발생시킬 정도는 아니다.유럽,미주,아·태협력체(APEC) 여러나라에서는 통합의 움직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중국·인도등도 진보하는 국가에 들어간다. 퇴행하는 국가로는 아프리카등 개발도상국을 꼽을 수 있다.구소련의 남부 공화국들은 진보와 퇴행의 가운데 놓여있다.중동도 평화의 움직임이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고 한반도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영속적인 데탕트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공산주의가 몰락한지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2분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한쪽은 희망의 과실을 향수하고 사태가 개선되고 있으며 노력을 기울일 가치있는 목표도 있다.다른 한쪽은 절망에 닫혀 있다. 이러한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앞으로 수십년동안 2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현대적인 세계에서 여러나라의 부는 증대하고 각국은 마찰을 빚으면서도 전쟁은 포기하게 될 것이다.협력,네트워크화,상호의존의 증대가 예견된다.새로운 패턴의 통합이 다양한 주권형태,다양한 동맹관계의 진화를 촉진할 것이다.여기에 역행하는 세계는 흘러드는 부가 민족중심주의에 의해 낭비될 것이다.무력충돌이 평화창조의 본능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첫째는 즉효약은 없다는 것이다.둘째는 어떤 종류의 문제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셋째로는 서둘러서는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다.현재의 불투명한 상황을 참고 견디며 미래에의 길을 탐색해 나가는 데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릴 것이다. 94년을 지나면서 나에게는 3가지 생각이 자리잡게 됐다. 첫째는 5년전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단순히 철의 장막이 걷힌 것뿐만이 아니고 서방측 민주주의의 진화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이 진화는 냉전기간동안 정지돼 있었다.변화는 일본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둘째로는 신질서의 모색은 어려운 일임이 이해되게 됐다.유엔이 분쟁지역 어디든지 개입할 수는 없다.유엔의 개입은 성공보다도 실패로 끝나는 쪽이 많다.국제사회는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할 의욕도 없고 힘도 없다. 셋째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 세계는 냉전기간동안 성공을 가져다준 지도원칙을 상기해 두는 것이 좋다.그것은 침략적 의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신뢰성 있는 억지력을 구축하는 것,비참한 생활을 경감하기 위해 가능한 어디든지 인도적 원조를 행할 것,자유의 영역을 힘으로 확대하지 말고 물 표면의 기름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가도록 한다는 것등이다. 이러한 생각은 89년당시 우리가 품었던 높은 희망에는 못미치는지 모른다.그러나 2분화의 시대에 이상주의적인 창조력의 산물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원칙이 바람직하다.현재의 세계에서는 낮은 자세로 땅에 발을 붙이고 실무적인 어프로치를 하는 쪽이 실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 일 「부전결의」 반대 확산/산케이 보도/자민·신진당 일부 주동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과거 침략행위 등에 대한 국회 차원의 사죄 결의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계에 국회의 부전 결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고 일본의 산케이신문이 3일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자민당의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쿠노 세이스케 중의원)이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는데 이어 야당인 신진당에서도 2일 「올바른 역사를 전하는 국회의원연맹」이 발족돼 사죄결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전했다. 신진당의 국회의원연맹은 사회당의 구보 와타루(구보선)서기장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대표 질문을 통해 사죄 결의의 실시를 명확히 하도록 요구한데 대한 반발로 과거사에 대한 망언을 한 바 있는 나카노 시게토 전법상 등이 중심이 돼 설립됐다. 자민당과 신진당 등에서 사죄결의에 대해 강력한 반대 움직임이 표출됨에 따라 앞으로 국회차원의 결의안 채택은 상당히 불투명해지게 됐다.
  • 새로운 군사전략(일본 「21세기 야망」:6)

    ◎자위대 행동반경 전세계로 확대/전수방위전략 탈피… PKO명분 적극 파병/군비 계속 증강… 93년 방위비 지출 세계 2위/“미안보그늘 벗고 독자노선 걷자” 보수·우익 세력 꿈틀 1992년 9월17일.일본 히로시마 하늘에 옛일본 해군이 애창하던 「군함행진곡」이 울려퍼졌다.그 장엄한 군함행진곡을 울리며 일장기의 물결속에 3척의 자위대 함정이 히로시마현에 있는 구레기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교쿠지쓰(욱일)기를 휘날리며 떠난 자위대 함정에는 4백20여명의 자위대원들이 타고 있었다.캄보디아로 파견되는 자위대원 제1진이었다.일본군이 47년만에 아시아대륙에 다시 상륙하기 위해 발진하던 역사의 현장 구레기지.미야시타 소헤이(궁하창평)당시 방위청장관은 출정식에서 『자위대의 캄보디아 파견은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라고 격려했다.미야시타 전방위청장관의 말대로 자위대의 캄보디아 파견은 일본의 군사전략이 전통적인 전수방위(전수방위) 개념에서 세계전략으로 대전환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일본은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을 바탕으로 캄보디아의 재건과 평화유지를 위해 자위대를 파견했다.국내의 많은 논란과 당시 야당이었던 사회당등의 강력한 반대속에 92년6월 만들어진 PKO협력법은 일본군이 다시 해외에 파견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평화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이 세계 곳곳에 파견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자위대가 파견된 캄보디아 남부 다케오 기지에도 일장기와 함께 평화의 상징인 유엔기가 나란히 게양돼 있었다.PKO협력법은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함으로써 일본의 과거 침략자적인 이미지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군비증강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침략자 이미지 제거 일본의 군비증강과 군사적 대외전략의 확대는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집단자위권과 교전권을 인정하지않는 평화헌법아래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 전략과 평화주의를 유지해왔다.1969년 사토 에이사쿠(좌등영작) 총리는 자위대의 행동반경을 일본 영토에 한정시키겠다는 「전수방위」개념을 도입했다.그러나 일본은 옛소련이 75년 통일된베트남을 후원하고 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등 아시아에서 군사적 팽창주의노선을 강화하자 미·일안보조약을 바탕으로 군사력 증강전략으로 전환했다. 군사전략의 전환은 군사력및 국방예산의 증가와 자위대의 행동반경 확대를 축으로 하고 있다.스즈키 젠코(영목선행)총리는 81년5월 미국을 방문,레이건 당시 대통령에게 「1천해리 해역」의 방위를 일본이 맡겠다고 약속했다.과거의 전수방위 개념이 지역방위전략으로 확대된 것이다.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총리도 83년 미국을 방문,「1천해리 방위」를 재확인하고 일본열도의 「불침 항모론」을 공언하며 군사력 증강을 역설했다.그는 그동안 유지돼온 군사비의 GNP 1% 한계론을 깼다.87년부터 89년까지 방위비 예산은 GNP의 1%를 넘어섰다.그후 방위비는 다시 GNP의 1%이하로 낮아졌지만 방위비의 증가는 멈추지않고 있다. ○세계 군축조류 역행 일본의 방위비 증가는 냉전후 미국과 러시아·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국방비를 줄이고 있는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일본은 군축의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93년10월에 발표한 「군사균형(1993∼94)」에 따르면 일본의 93년 방위예산은 약4백억달러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나타났다.일본은 더욱이 앞으로도 방위예산을 계속 증가시킬 예정이다. 일본은 군사력의 증강과 함께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적극화하고 있다.자위대의 캄보디아 파견이 성공적이었다고 분석하고 있는 일본은 자위대를 아프리카 대륙에 파견한 데 이어 골란공원등 중동과 다른 지역의 파견도 검토하고 있다.일본은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통해 군사대국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미국과 유엔과의 협조체제를 바탕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일본은 냉전이 끝났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위협적이며 중국의 계속되는 군비증강및 북한의 핵개발등 주변의 안보위협 때문에 미국과의 협조체제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일본은 또 아시아 주변국가들의 불안을 없애고 정치적 신뢰를 얻기위해서도 미·일안보조약및 유엔의 틀안에서 군비증강을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연 방위비 4백억불 일본의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국익에도 맞는 일이다.미국은 세계전략 차원에서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고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하지만 그 역할이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증강되는 것은 원치않고 있다.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그러나 일본사회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강경 보수·우익세력의 「미국으로 부터의 독자노선」과 21세기 어느날 심각한 마찰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지금과 같은 미·일안보체제가 언제까지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미·일안보조약의 수정속도나 그 방향은 아직 미지수다.그러나 미국이 일본이나 아시아에서 안보부담을 덜기 위해 미군을 감축한다면 이 지역의 안보균형이 깨질지도 모른다.그럴 경우 일본·중국등이 군비증강을 가속화하여 동북아시아에 불안한 긴장이 조성될 위험성이 있다. 일본은 물론 독자적인 군사대국화는 한동안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역사는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역사는 많은 변수를 안고 영속하며 중요한 것은 시대흐름의 방향이다.군사력 없는 경제대국의 실험을 끝낸 일본.그 일본이 전후 50년을 계기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갖춘 대국으로의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 펜타곤,상황별 대응 시나리오 마련

    ◎미,「걸프보다 한반도 우선」 전략 확립/한반도 단독전쟁때/북한남침 40일만에 반격… 3개월내 승리/걸프와 동시전 경우/한국반격에 충분한 병력·장비 먼저 배치 걸프지역과 한반도에서 거의 동시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먼저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승리한 후 쿠웨이트 지역에 병력을 재배치하는 계획을 마련했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약 4∼5개월 만에 2개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다는 가상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미국방전문지 디펜스 위크가 보도했다. 디펜스 위크는 미국방부의 비밀문서를 인용,미국방부가 걸프전 발발,한반도 전쟁,걸프지역 및 한반도에 동시 전쟁 발발,이란의 호르무즈해협 장악,여타 작은 지역분쟁 등 8개의 전쟁·분쟁 가상시나리오를 작성,2천1년까지의 대응 군사전략을 수립했다고 밝혔다.8개 가상시나리오 가운데 한반도와 걸프전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 가상시나리오 2천년께 북한이 남한에 기습공격을 가한다.북한은 서울을 향해 7개 군단을 투입하고 동해안을 따라 2개 군단을 별도로 투입한다.또미군이 배치된 전선 후방지역을 북한 특공대가 공격한다.침략 병력은 총 52만5천명.북한은 제한된 핵능력을 갖고 있으나 국가생존이 위험에 빠지거나 재앙적 패퇴를 당하기 전까지는 핵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상정돼 있다. 미국은 ▲5개 육군사단 ▲2개 해병사단,2개 해병항공단,2개 해병지원그룹 ▲7백20대의 공군전투기와 1백대의 폭격기 ▲항공모함 5대,2백70대의 해군 전술전투기 ▲3개군의 특공대 등을 파견,이에 대처한다.또 20만명의 예비군이 동원된다.한국군은 5개 기계화사단,23개 보병사단,2개 해병사단,4개 장갑여단을 동원한다. 이 시나리오는 북한 침략 후 40일만에 미군 병력이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으며 3개월 내에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걸프전과 한국전 동시 발발 시나리오 2개 전쟁이 동시에 발발했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2개 전쟁에 물자 등을 수송할 수송기와 해상수송선의 활용에 있다.미국은 『한반도에서 반격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한 후 해상 및 공중수송의 자원들을 쿠웨이트로 돌린다』고 우선순위를밝혔다. 이같은 「스윙」전략의 핵심적 요소는 F117 스텔스전폭기,EF111 전파방해 항공기,J스타즈 정찰플랫폼 등 특수 군사장비들이다. 일단 한반도에서 승리한 후 많은 미군병력들은 쿠웨이트로 재배치된다. ◇걸프전 가상시나리오 96년 경제제재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2천년경 재무장을 마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사우디 북부를 위협한다. 미국은 걸프협력위원회(GCC)의 지원 요청에 따라 20만 예비병력을 동원하는 한편 이집트,프랑스,독일,일본,시리아,터키,네델란드,영국과의 연합군 구성을 모색한다.미군병력은 ▲5개사단과 1개 기갑연대 ▲2개 해병사단,2개 해병항공단 등을 포함한 2개 해병원정군 ▲7백20대의 공군항공기와 1백대의 전폭기 ▲5개 항공모함전단 ▲합동특별작전부대 등을 포함한다. 이 시나리오는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나 또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상정했으며 이라크의 침략 약 10일 전에 미군이 걸프지역으로 배치되는 것을 가상하고 있고 미국은 이라크의 침략 이후 약 2달 만에 반격을 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일단 역습을 가하기시작한 후 1∼2주일 후에는 미국이 승리한다.
  • 일 자민당 의원 143명/침략사죄 저지회 결성

    ◎일 총리,“한반도 분단 책임” 하룻만에 번복 【도쿄 로이터 연합 특약】 일본 자민당 소속 의원 1백43명은 1일 일 의회가 아시아국가들을 대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에 대한 사죄를 하려던 결정을 막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사키가케등 자유연합은 지난해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정부가 구성될 당시 2차대전 종결 50주년을 맞아 지난날의 침략을 사죄하고 앞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공언할 예정이었다. 자민당 의원 모임이 사죄를 막을 지는 의문이지만 몇몇 의원들은 이같은 논쟁이 무라야마의 좌우연합을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이 모임 소속 의원들은 사죄결정이 의회에서 통과된다면 이는 왜곡된 역사관을 인정하는 것이며 아시아국가들로부터 전쟁에 대한 보상요구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사죄반대이유를 밝히고 있다. 【도쿄 연합】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가 일본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 분단에 일본이 역사적으로 책임이있다고 밝혔다가 하루만에 이를 전면으로 번복해 국내외에 적지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3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답변을 통해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점에 관해서 일본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 두고 싶다』면서 『이는 전승국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날 발언을 뒤집었다.
  • 미 박물관/스미소니언/원폭투하기 전시계획 취소

    ◎“살상미화”·“일을 희생자 오도” 거센 반대/일선 “원폭공포 알릴 기회 무산” 아쉬움 워싱턴의 세계적 박물관 스미스소니언이 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당시의 B29 폭격기를 우주항공박물관에 전시하려는 계획이 많은 찬반 논란 속에 1일 전격 취소됐다. 스미스소니언측은 지난해부터 1945년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3일 후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어뜨린 당시의 B29 폭격기 「에뉼라 게이」(조종사의 어머니 이름을 따라 명명됨)의 동체를 실물 그대로 박물관에 상설 전시하는 계획을 마련,오는 5월 개장할 예정이었다. 스미스소니언은 『역사의 사실을 기록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킴으로써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논리로 반대에도 불구,전시 계획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중요한 압력단체의 하나인 재향군인회 등은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진주만을 기습당하는 등 분명히 침략을 당한 나라임에도 이것을 전시하면서 마치 우리가 침략자이고 일본이 희생자인 것처럼 역사를 오도하고 있다』는 논리로 반대했다.또 평화그룹들은 한 순간에 21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폭투하는 인류의 수치라는 또 다른 주장으로 반대운동을 폈었다. 이처럼 반대운동이 격해지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마이클 헤이먼 사무총장은 지난 30일 박물관의 운영이사회의 소집을 앞두고 이사들에게 계획 자체의 전면취소를 고려하고 있음을 알렸으며 마침내 1일 이를 취소한 것이다. 일본측은 오히려 『원폭의 공포를 알리기 위한 기회가 없어진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취소 방침에 반대 입장을 보였는데,미의회가 이 계획이 입안·취소된 과정에 대한 청문회를 요구한데다 미·일 양국간에 2차대전에 대한 현격한 입장 차이가 다시 노출된 만큼 이에따른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 대담/주돈식 문화부장(국정 어떻게 돼갑니까)

    ◎“한국문화 세계화” 신르네상스 운동 적극 추진/주요정책 심층보도… 국민과 정부를 잇는 기획/문화·관광·체육분야 초고속정보망 구축/세제 등 혜택으로 기업 문화사업 유도/2002년 월드컵축구 한국유치 꼭 성사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29일 『구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신축 이전되면 현재 경복궁안에 있는 민속박물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왕의 영정을 모시던 옛 선원전 건물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주장관은 이날 임영숙 서울신문 문화부장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민속박물관 철거는 장기계획으로 추진될 것이며 이전 장소는 검토중』이라고 말했다.주장관은 또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의 한국 유치를 꼭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하고 한국문화의 세계화와 이를 뒷받침할 「신르네상스 운동」에 대해서도 의욕적인 청사진을 밝혔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현 정부의 문화에 대한 배려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문체부가 관광업무까지 맡게 되고 청와대 교문수석실이 폐지된 것에 대한 우려지요. ▲그렇지 않습니다.지난 정부조직 개편으로 오히려 문화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강화됐습니다.문화와 체육과 관광을 접목시킴으로써 범 국가적 명제인 세계화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으며 공보처의 해외문화원이 문체부로 이관돼 우리 문화의 해외소개라는 문화원 본래의 기능이 회복됐습니다.문체부가 관광업무를 맡았다는 것은 관광의 내용이 예전과 달리 「문화」가 된다는 의미입니다.청와대 교문사회수석실의 폐지는 기존의 다른 수석실의 업무와 중첩돼 간소 일원화 차원에서 폐지된 것일 뿐입니다. ­한국문화의 세계화 방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우리문화」가 중심이 되어 다른 외국문화와 대등하게 어울리고 교류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원숙한 우리문화를 보편적인 세계문화로 승화시켜 전인류의 행복한 삶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을 뜻합니다.따라서 5천년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우리 문화를 관광자원화해서 외국관광객 유치에 힘써야 합니다.이를 위해 해외문화원등을 중심으로 문화네트워크를 만들고 외국의 지한인사와 한국학 관련자 등으로 문화봉사단을 구성하여 우리문화 세일즈단으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세계화가 가능한 우리 문화상품으로는 무엇이 있으며 앞으로 어떤 것이 개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우리 민화를 현대판화기법으로 재현한 것과 칠기공예품 및 고구려 고분벽화 문양을 활용한 스카프·넥타이등이 현재 개발돼 있습니다.석존제,민속축제,한강의 연날리기대회 등 우리 고유의 행사들도 당장 문화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겠고 전통공예·도자기·음식문화도 상품화 할 수 있습니다.한지자체를 포장지·카드·엽서 등으로 상품화해도 좋겠지요.문화캘린더를 만들어 공항과 해외문화원 등에서 배포,문화행사도 문화관광상품화할 계획입니다. ­일본의 기업들은 일본문화의 세계화에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우리 기업들의 문화투자를 유도할 획기적인 대책이 있으신지요. ▲대통령께서도 기업인들에게 정치자금 대신 문화에 투자하라고 당부하셨고 문화지원을 위한 기업메세나협의회가 발족돼 있습니다만 기업의 문화투자를 적극 유도할 인센티브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기업의 문화투자 비용의 손비인정,조세감면 등을 꼭 실현시킬 계획입니다.기업의 문화활동 영역과 투자범위,투자 상한선 결정이 선행돼야 하고 세금감면이 탈세수단으로 악용되거나 문화단체를 편법운용하는 등의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현재 재정경제원과 실무적 차원에서 협의중에 있습니다. ­광복50주년이 되는 올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결국 철거 됩니다만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민속박물관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일제가 변형 훼손시킨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오는 2009년까지 단계적으로 복원합니다.경복궁의 기본궁제와 연계하여 장기적으로 민속박물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옛 선원전 건물을 복원할 계획입니다.민속박물관은 가족단위로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에 더 넓은 장소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올해 문체부 업무보고중 정보화시대에 대처하는 문화마인드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앞으로 문화행정의 중심이 될 정보관리에 대한 대책은 있으신지요.▲문화·관광·체육분야의 초고속정보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범정부 차원의 초고속 정보통신망과 연계할 예정이지요.올해는 문예진흥기금 22억원을 투입,문화예술기초정보베이스 및 한국문화공간 데이터베이스 시스템 개발,박물관·미술관·저작권 관련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지원합니다.또한 정부의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에 전자박물관 전자미술관 국내학술자료 화상서비스 등 6개 과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문체부는 올해를 「신르네상스 운동」의 원년으로 정했는데 추진배경을 설명해 주십시오. ▲문민정부 출범과 국민의 문화수요 증대,경제여건의 성숙 등을 바탕으로 민족문화 중흥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우리문화는 조선조말 외세침투와 일제침략,광복후의 사회혼란과 전쟁,그리고 군사쿠데타 등으로 계속 왜곡돼 왔습니다.주요 추진내용은 국민 문화수요의 충족 및 문화활동 촉진,중앙과 지방간의 문화예술교류 강화,기업의 문화투자 확대,미술의 생활화 추진 등입니다. ­「미술의 해」가 시작됐습니다만 너무 늦게 미술의 해로 지정돼 준비에 차질이 빚어졌고 그동안 유보돼 왔던 미술품 양도소득세가 내년부터 실시됨으로 인해 미술계가 큰 활기를 띠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술품 양도소득세 실시는 조세형평의 원칙상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행정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부과대상 작품가격의 상향조정 혹은 세율인하 방안 등을 검토해 미술계의 희망을 가능한한 반영하도록 할 생각입니다.예술의 해 지정은 올해 3월중에 완료할 계획입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지 결정이 15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대회유치에 승산이 있으신지요 ▲우리나라와 일본·멕시코가 유치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경쟁이 본격화됐습니다.일본이 방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활발한 유치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86아시안 게임 및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경험 등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이 많습니다.또한 남북 공동개최가 실현될 경우 국제축구연맹이 지향하는 축구를 통한 세계평화의 증진과 우리 민족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점도 있습니다.이런 우리의 장점을 심층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월드컵축구대회의 한국 유치를 꼭 성사시키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 왜 유치하려하나/통일의 촉매제로 월드컵축구 개최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는 88올림픽 개최에 못지않은 국가적 사업이다. 21세기를 열어가는 시기에 첫 월드컵대회를 개최하여 세계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들임으로써 국정의 지표로 삼고 있는 세계화의 주역국으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을 유치하게 되면 4년이상의 준비과정과 예선 및 본선대회를 치르는 동안 각 분야에서 빈번한 국제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국제사회의 주변국가에서 중심국가로 떠올라 세계에 대한 발언권이 강화되는 것은 물론 국민 의식을 고양시켜 세계화를 앞당길 수 있게 된다. 지난 93년 12월 2002년 월드컵유치위원회를 출범하면서 유치활동에 불을 댕긴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범정부 차원의 유치지원반을 편성한데 이어 지난해 12월16일 국회문화체육공보위원회에서 「월드컵유치지지 결의안」을 채택,총체적 경쟁체제를 갖추었다. 2002년의 월드컵 개최지는오는 96년 6월에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총회의 집행위원회(21명)에서 투표로 결정된다. FIFA는 개최지 결정에 앞서 월드컵 유치를 희망해온 나라로부터 경기장 및 교통·숙박시설 등 구비조건을 담은 「월드컵유치신청서」를 오는 9월말까지 접수한뒤 내년 5월안에 실사팀을 해당국에 보내 준비상황을 최종 점검한다. 문화체육부는 올해의 유치활동에 따라 개최지가 판가름날 걸로 보고 서면에 의해 1차적으로 개최지 여부를 심판받게 되는 월드컵신청서 작성에 승부를 걸 참이다. 월드컵 유치신청서는 FIFA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다는 방침아래 ▲경기장시설 ▲안정 및 재정 ▲교통·통신등 분야별로 나누어 10명 내외의 실무작업반을 두어 작성하기로 했다. 월드컵유치신청서를 작성할 실무작업반은 전문가들로 내달안에 구성,올 상반기에 완성할 계획이다. 최근 멕시코가 유치신청을 함으로써 3파전의 양상을 띠고 있으나 결국 일본과의 대결로 좁혀질 것으로 보고 월드컵 유치신청서에는 다음 두가지 측면을 강조,일본보다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복안을갖고 있다. 최근 중동세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일본이 프로축구 J리그를 출범시켜 새로운 붐을 조성하고 있으나 전통적으로 한국이 「아시아축구의 대명사」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는 대목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아시아국가로는 유일하게 월드컵 3회연속출전을 기록하는 등 모두 4차례 월드컵 본선에 나간 사실이 이를 뒷밤침해주고 있다. 특히 한국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지난 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축구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높은지를 세계에 알렸다. 다른 하나는 지난 72년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를 통해 관계 정상화를 이루었듯이 근세들어 스포츠가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에서의 월드컵 개최는 남북통일의 촉매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당장은 어렵다 하더라도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까지는 통일의 기반이 조성될 걸로 보여 월드컵의 남북공동개최도 가능하다는 점을 부각시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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