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침략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동의대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군포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고독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축적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550
  • 「중·일전쟁」 발발 58돌에 부쳐(해외사설)

    올해는 반파시스트 전쟁승리 50주년을 맞는 해다.이러한 때 우리는 항일전쟁의 발단이 된 「7·7사변」 58년을 계기로 그 특수한 의의를 되새겨본다. 37년 7월7일,일본제국주의는 완평성과 노구교를 폭격·침공하면서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드러냈다.이후 8년 항전을 중국인민은 위대한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는 위대한 교사다.미래를 열고 민족진흥의 위대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그 고귀한 경험을 흡수해나가야 한다.역사는 말한다.낙후되면 억울함을 당하고 짓밟히게 된다.민족의 자립자강을 위해선 경제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강대한 종합국력을 유지해야 한다.58년전 중국이 일본에게 침략당한 것은 약한 국력 때문이었다.경제와 과학기술은 국방의 기초다.발달된 경제와 과학기술 없이 국가독립과 안녕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이 피와 생명을 바꿔 얻은 역사의 교훈이다. 오늘날 중국은 58년전 중국은 아니다.지난 17년동안의 개혁개방과 건설을 통해 우리 경제실력과 종합국력은 크게 성장,활력을 지닌 국가로 일어섰다.우리는 계속 등소평동지가세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이론과 당의 기본노선을 견지,개혁심화·개방확대하며 「과학흥국」의 전략방침을 끊임없이 실천해 사회주의 현대화수준을 높여나가야 한다. 공산당의 영도는 민족해방과 진흥의 가장 중요한 정치역량이었다.이것은 중국공산당원이 짊어지고 나가야 할 신성한 사명이다.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영도아래 전국 각 민족의 단결로 조국을 부강·민주·문명의 사회주의 현대화국가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7·7사변」을 기념해 우리는 중·일관계를 생각하게 된다.대다수의 일본국민은 일본군국주의 침략역사를 반성하고 있다.그러나 지금도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하고자 획책하는 자들이 있다.정치계에도 그러한 대표적인 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정확한 역사반성을 통해서만 민족의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두 나라가 우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써가기를 바라고 있다.역사의 비극이 또다시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일 군국주의 부활 획책/중 인민일보 강한 비판

    【북경=이석우 특파원】 일본 정계인사중에서도 과거 군국주의 침략역사의 부활을 획책하는 대표적인사들이 있다고 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가 7일 일본정치인 등 집권당의 과거사 처리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인민일보는 이날 중일전쟁발발 58주년을 맞아 1면 기념사설을 통해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인민들은 큰 희생과 피해를 입었으며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일본군국주의 침략역사에 대한 반성을 진행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 하고자 획책하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한반도정책 급선회(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20)

    ◎모·스탈린 “휴전협상” 합의… 김일성 당황/중,말리크 소 대사의 「유엔 제의」 전폭 지지/평양측,북경에 「미국 호응때의 전략」 문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낸 51년 6월13일자의 이 전문에서 중국공군 8개 비행사단의 전선투입을 최우선 요구로 내놓았다.다음은 이 전문의 계속.『최소한 8개 중국군 전투비행사단의 투입이 시급함.2∼3개의 미그 15 비행사단과 중국 중남부에 배치돼 있는 5∼6개의 미그 9 비행사단을 투입시켜주기 바람.특히 미그 9기는 적폭격기에 맞설 최고기종임.이 8개 사단만 출정하면 전선사정이 호전될 것임』.스탈린은 이 비행사단들이 이미 출격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가능한한 조기출격시켜 줄 것을 모택동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아울러 스탈린은 영·미군이 남조선을 위해 참전중인 16개국 군대를 대표해 휴전제의를 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주고 미확인 첩보임을 전제로 『이들이 휴전협상 제의 직전 대규모 공격작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에 대비하라』고 모택동에게 당부했다. 이 전문을받은 모택동은 같은 날 즉시 답전을 띄웠다.(51년 6월13일.전문번호 N20772.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미 휴전제의 가능성” 『스탈린동지의 전문을 받은 날 고강,김일성동지로부터도 전문이 당도했음.우리의 휴전협상 전략은 고강동지가 스탈린동지께 직접전달한 그대로임.전선의 팽덕회동지는 소련군사고문단 파견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가능한 빨리 이들을 파견해 주기 바람.8개 비행사단 투입은 출정계획을 세울 것을 이미 총참모부에 지시했음.팽덕회에게는 제2,제3의 방어선을 확고히 사수할 것을 지시하고 아울러 새방어선 구축을 지시했음.6월에 아군전력은 적에 비해 약했음.하지만 7월이면 6월보다는 호전될 것이고 8월이면 더 강해질 것임.8월중 적에게 매우 강력한 타격을 가할 준비를 세우고 있음』. 이 전문이 오간 바로 이튿날인 6월14일,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김일성은 고강과 연명으로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제출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모택동동지가 보낸 답전을 스탈린동지께 전달하고자 함.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늘 스탈린동지를 면담하고 싶음.그게(면담이) 가능하다면 우리 일행은 동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내일 귀국하고자 함. 공산주의의 인사를 전하며. 고강 김일성』 그리고 두사람은 이 서신에다 모택동이 6월13일자로 자기들 앞으로 보낸 전문사본을 첨부했다.앞으로 휴전협상에 임할 중국의 입장을 상세히 담은 내용이었다.구체전략으로 모는 다음의 5가지 방안을 지시했다. 『1.적이 휴전제의를 할 때까지 기다릴 것. 2.단 소련정부가 미국정부를 상대로 휴전협상 제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함.즉 두가지 방향에서의 동시접근이 가능함.한편에서는 소련정부가 휴전제의를 하고 또 다른 한편,적이 휴전제의를 먼저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북조선과 중국정부가 이에 응하는 것임.이와 관련,필리포프동지의 의견과 지시를 받을 것. ○“38선을 국경으로” 3.휴전의 조건:38도선을 국경으로 회복할 것.38도선 양측에 소규모의 중립지대 설치.북쪽에만 중립지대를 설치하는 것은 절대반대.중국의 유엔가입이 휴전협상의 전제조건은 아님.왜냐하면 중국정부는 유엔이 사실상 침략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유엔가입문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음.협상전략상 대만문제는 제기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함.만약 미국이 이 문제를 분리처리하자고 제의하면 우리도 적절한 양보를 하겠음. 4.현전선 사수명령을 내렸음.만약 적이 추가병력을 파견하거나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8월중 아군전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것임. 5.비행사단은 즉시 전선으로 투입하겠음. 모택동』.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모택동은 당시 휴전협상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할 자세를 보였다.스탈린은 무엇보다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을 최우선 목표로 기다리고 있었다.이것이 차일피일 늦어지자 스탈린은 6월 16일 북경에서 중국공군을 지도하는 소련고문단 앞으로 매우 신랄한 질책을 담은 전문을 보냈다. 고강으로부터 스탈린과의 면담결과를 보고받은 모택동은 추가지원 무기의 조속한 인도를 스탈린에게 요구했다.다음은 6월21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내용.(전문번호 N21039). 『1.귀국한 고강동지로부터 여러 문제에 대한 스탈린동지의 견해를 전해들었음.동지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함. 2.8개월동안 조선에서 전투를 해본 결과 중국군은 장비면에서 적과 비교해 현격한 열세에 있음을 알게 됐음.우리 군의 장비개선이 절실함.고강동지를 통해 스탈린동지께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을 요청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임.이는 동지께서 동의한 바 대로임.이는 조선에 나가 있는 우리 군대가 금년도에 필요한 최소분의 무기임. 3.북조선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소련 총참모부에서는 금년도에 16개 사단분 무기만 인도하고 나머지 44개 사단분은 1952­53년중에 인도할 예정이라고 함.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량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임. 4.본인은 동지께 7월부터 금년말까지 우리가 요청한 무기를 매월 6분의 1씩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함. 물론 수송문제 등에 있어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나 가능한한 빨리 무기를 인도해줄 것을 요청함』. 그러나 이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그해말까지 60사단분 무기를 다 인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적어도 53년도 이전에 무기인도를 완결짓기는 어렵다고 분명히 밝혔다.다음은 6월24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35177). 『1.우리가 제기한 휴전협상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음.우리는 말리크대사(유엔주재 소련대사)가 유엔에서 휴전협상을 제의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기하기로 한 귀측과의 약속을 지켰음. 2.60개 사단 무기공급건은 솔직히 말해 이를 금년중에 마무리짓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우리 산업체 종사자들과 군사전문가들은 51년중 10개 사단분 이상을 공급키는 불가능하다고 말함.60개 사단분을 모두 보내는 것은 워낙 어려운 일이고 열심히 해도 54년도 상반기는 돼야 완료될 수 있을 것임』. ○의견 긴급통보 간청 모택동은 무기인도에 관한 스탈린의 이 주장을 이의없이 받아들였다.그러나 말리크대사의 유엔발언과 때를 맞춰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주관심은 휴전협상쪽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위 전문에서 모택동은 휴전협상대표는 정부대표나 군사령관들이 돼야한다는 말리크 대사의 제의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동의했다. 스탈린,모택동양자간 사전합의에 의해 분위기가 휴전협상쪽으로 급선회하자 가장 당황한 것은 김일성이었다.김일성은 휴전협상에 임할 전략자문을 구하기 위해 모택동에게 긴급전문을 띄었다.다음은 51년 6월29일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내용.(전문번호 21336) 『6월 26일 말리크대사의 연설로 미국도 휴전협상에 관심을 갖게됐음.…중략…뉴스보도에 따르면 리지웨이장군은 미국방부의 지시가 내려지는데로 북조선군 사령관과 휴전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함.만약 리지웨이가 휴전협상제의를 해올 경우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동지의 구체적인 의견을 긴급히 통보해 주실 것을 간청함. 김일성』. ◎새로 밝혀진 사실/휴전협정의사 모택동이 먼저 제기/소선 소극적… 스탈린 사후에야 종전 이번 자료에는 1951년 소련이 휴전협상을 제의하게 되는 과정이 나와있다.우선 모택동이 이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소련의 의사표시에 앞서 모택동이 먼저 적극적으로 휴전협상의사를 표현하고 있음이 밝혀져 있다.우리는 이에서 하나의 논쟁적인 사실에 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왜 한국전쟁은 3년이나 끌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야 종전이 되었느냐는 점이다(스탈린의 사망은 1953년 3월,한국전쟁의 종전은 1953년 7월).이는 곧 스탈린이 이 전쟁의 종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자료적 뒷받침을 이번 자료에서 볼 수 있듯 휴전협상의 개시여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모택동은 소련의 군사지원이나 휴전협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 비해 스탈린은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에 더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점도 밝혀져 있다.스탈린은 중국군 비행사단의 투입이 늦어지는 데 대해 신랄한 질책을 가하고 있기 까지 하다.스탈린은 모택동의 지원요청에 대해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이번 자료를 통해볼 때 중국과 소련간의 중소갈등의 뿌리가 한국전쟁에서 놓여졌다는 그동안의 해석은 전적으로 옳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미국이 소련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이자 김일성이 이에 당황하여 모택동에게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문의하는 장면도 흥미롭다.이는 이미 언급한대로 전쟁이 김일성의 손을 떠났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일 대학생 70% 침략전쟁 시인

    【도쿄 연합】 일본의 대학생들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며 전후보상은 국가책임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9일 교토(경도) 류고쿠(용곡)대학이 법학부 1∼3학년 재학생 2천명(응답자 1천65명)을 상대로 지난 5월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인가라는 질문에 70%가 그렇다고 대답,침략전쟁의 일면도 있다고 응답한 사람을 포함해 93%가 침략전쟁이었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또 전후보상의 방법에 대해서는 54%가 「국가에 의한 개인보상」을,39%가 「국가가단체,시설등에 기부하는 형식」을 지지,거의 모든 학생들이 전후보상은 국가책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 일 국교 사회교과서/「정신대」 표현 삭제/문부성 검정과정서

    【도쿄 연합】 내년부터 사용되는 국민학교 교과서에 대한 일본 문부성의 검정결과 종군위안부에 대한 표현은 삭제된 반면 히노마루(국기)와 기미가요(국가)에 대한 내용은 보다 강조된 것으로 밝혀져 일본 정부의 역사교육 방침에 적지않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부성의 28일 발표에 따르면 일부 사회교과서에 『젊은 여성을 정신대 등 명목으로 전지에 보냈다』는 표현이 당초 들어 있었으나 검정과정에서 정신대라는 말을 국민학생이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삭제했다. 또한 『일본군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여러가지 목적으로 전쟁터에 끌고 갔다』는 표현도 『일본군은 많은 사람을 전쟁에 동원했으며 여성과 어린이도 협력시켰다』는 문구로 완화시킨 것으로 드러났다.문부성은 반면에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에게 히노마루는 침략의 상징으로 비쳐졌다』는 말을 송두리째 삭제하는 등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 대한 부분에서는 구체적으로 「존중」하는 취지를 강조하도록 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커나가는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 마저도편향된 시각으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와타나베 미츠노시 저 「일본천황 도래사」 번역 출간

    ◎“일 왕가의 뿌리는 비류백제”/“비류백제 설왕이 360년 일 건너와 건국”/일 학자로는 처음 「천황 한민족 설」 인정 일본왕(천황)가의 시조를 한국 왕조에서 찾은 일본 사학자의 연구서 「일본천황 도래사」가 최근 국내에서 번역,출간됐다(채희상 옮김,지문사 펴냄).이 책은 일본 학자가 「천황 한민족」설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한 것이어서 지난 93년 출판됐을 때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지은이는 아직 한국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한 「비류백제」설에 바탕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 이번 국내 출간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비류백제설은 지난 82년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제시한 학설로,온조가 건국한 백제말고도 그의 형 비류가 세운 또 하나의 백제,곧 비류백제가 있었다는 것.비류백제는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4백년 가까이 강력한 국가로 존재했으며 4세기말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왕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세운 망명정권이 천황국가라는 내용이다. 지은이 와타나베 미츠토시(도변광민)씨는 이같은 학설을 모두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비류백제가 실재했으며 천황가의 뿌리라는 큰틀은 인정했다.그가 정리한 일본왕가의 성립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온조 형제는 각각 나라를 세운다.온조는 위례성에 백제를,비류는 미추홀에 또다른 나라를 건국했다.이 나라가 곧 목지국으로 삼한을 지배했다.서기 2세기 중엽 일본 큐슈에서 비류계 구노국이 일대를 통합한다.그 왕 비미궁호가 제1대 천황인 신무이다.한때 일본에는 비류계와 신라계 왕조가 함께 서 세력을 다툰다.360년 비류계인 백제 설왕이 일본으로 건너오니 이이가 곧 응신 천황이다.현재 일본 천황가가 건국신으로 모시는 대상은 고구려 시조 주몽과 그의 아들 비류이다… 지은이는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이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했다.결국 고사기는 비류왕조의 역사를,일본서기는 이에 백제왕조사를 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일본 황국사관의 대표격인 「신공 황후의 신라정벌」설에 대해 신공황후는 가공인물이라며 이를 거짓으로 판정했다.일본서기에는신공이 신라를 정복한 것처럼 기록돼 있고 일본 학계는 이를 근거로 일본이 삼국시대 때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해 왔다. 와타나베씨는 일본인류학회 회원으로 자신의 이론에 한국·중국·일본의 역사서는 물론 동아시아 각 민족의 언어 및 풍속을 두루 활용했다.현재 공주대와 백제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그는 『비류계 국가의 존재와 거기서 일본 왕가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직 한국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일 지방의회도/전후결의 난항

    【도쿄 연합】 일본국회의 「전후 50년결의」와는 별도로 지금까지 지방의회들이 채택한 결의문안중 「침략」,「사죄」라는 표현이 포함된 결의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요미우리(독매)신문이 전국 47개 도도부현의회를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후50년과 관련한 결의를 채택한 의회는 19개현에 그쳤으며 대부분이 침략,사죄,식민지지배등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 결의 채택과정에서 대다수의 현의회가 이같은 표현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돼 난항을 겪는 등 전원일치로 전후 50년결의를 채택한 의회는 아오모리(청삼)현등 4개현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결의는 이와테(암수)현등 4개현 뿐이었다.
  • 안보의식 다잡는 김대통령/6·25격전지 방문·참전용사 위로연 참석

    김영삼 대통령은 6·25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상오 6·25당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전투 현장에 건립된 「구국용사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했다.하오에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국내외 참전용사가 초청돼 열린 「6·25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했다. 김대통령은 최근들어 군부대 방문,군관련 인사 접견 때뿐만 아니라 일반 인사들을 만나서도 안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김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경수로 및 쌀지원문제가 타결됐음에도 안보의식이 약해지면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김대통령은 이날 충혼비 제막식 치사에서도 『우리의 안보가 튼튼해야만 자신있게 남북대화를 이끌어 가고 우리의 번영과 통일을 힘차게 이뤄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선엽 다부동전투 전우회고문 등의 영접을 받으며 전적기념관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55일간이나 계속된 다부동전투는 3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가장 처절한 격전이었다』면서 『다부동전투에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침략자들을 섬멸함으로써 6·25의 전세를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북진의 기틀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전면에 「구국용사 충혼비」 후면에 「대통령 김영삼 서」라는 친필휘호가 새겨진 충혼비를 제막한 뒤 헌화·분향했다. 김대통령은 전적기념관내 구국관에서 다부동전투 전우회회원 등 참석자 대표 1백20명과 오찬을 함께하며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장태완재향군인회장,데이비스 한국전 참전기념사업위원장(미국) 등 국내외 참전용사와 각계 인사 8백40여명이 참석한 「6·25 참전용사 위로연」의 격려사를 통해 『참전용사 여러분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은 시간과 더불어 더욱 빛나고 있다』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은 우리 국민의 호국의지와 안보태세를 더욱 강화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해 달라』고 당부했다.
  • 강택민,일 「역사왜곡」 경고/“중­일 관계 부정적 영향 미칠것”

    ◎방중 가이후 신진당수에 불만 표출 【북경 AFP 연합】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은 24일 일본에 대해 역사왜곡은 그 국가적 이미지는 물론 중국과의 쌍무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주석은 이날 전직 총리를 지낸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신진당 당수가 이끄는 일본 사절단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하고 『신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부여하는 것이 양국 정치인들의 공동책무』임을 강조했다. 강주석은 이 자리에서 일본이 침략전쟁을 솔직히 반성하느냐 여부가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역사를 왜곡하려는 기도는 중·일 양국간의 장기적인 우호관계에 해로울 것이라고 밝혔다고 관영 신화통신은 전했다. 강주석의 이같은 언명은 최근 일본 의회가 채택한 종전 50주년 결의안에 대한 국 정부의 불만을 재삼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경주 황룡사 금동보살상(한국인의 얼굴:34)

    ◎통통한 뺨… 순진무구한 웃음/머리엔 삼보관… 두툼한 눈두덩에 가는 눈/작고 예쁜 입·살짝 패인 보조개 복스러워 신라 제일의 가람은 황룡사다.삼국통일의 원동력을 불어 넣은 대가람으로,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함축했던 명찰이었다.서기553년 새 궁궐을 착공했을 때 황룡이 나타나 불사로 고쳐지었다고 한다.서기562년 불사를 마무리하기까지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절터는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다.본래의 가람은 12 38년 몽고군의 병화로 모두 불타버렸다.지난 19 76년 부터 8년동안 문화재 연구소의 발굴결과 2만여평의 절터가 확인되었다.황룡사를 다 짓고나서 서기 574년 신라 삼보의 하나 장륙상을 세웠다고 하나 역시 몽고침략으로 사라졌다.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이 금당 자리앞에 남아 있다.장륙은 1발(장)6자(척)다.요즘 수치개념으로는 4·5∼5m에 해당한다.「삼국유사」를 보면 장륙상 석가삼존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신라 보물의 하나 장륙상은 만날 수 없게 되었다.다만 절터에서 웃는 모습으로 출토된 8.3㎝ 높이의 금동보살머리 1점을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본디 반가사유상이었는데,머리만 남고 다른 부분은 모두 떨어져나갔다.이 보살의 머리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머리와 비슷하다.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황룡사 출토 보살의 얼굴이 더 아름답다고도 말한다. 이 보살의 아름다움은 미소에 있다.삼국시대 최고의 미소로 평가받아 마땅한 웃음인 것이다.머리에는 지극히 간결한 삼보관을 썼다.이는 국보 83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관과 같다.그러나 이마 한 가운데 표현한 머리카락 묘사가 이 보살에서는 생략되었다. 어떻든 황룡사 출토 보살상의 얼굴은 짧고 둥글다.순진무구한 웃음을 머금었다.눈두덩이 약간은 두꺼워 보이는데 눈은 가늘게 떴다.통통한 코,작고 예쁜 입과 보조개,적당히 살이 오른 뺨 등이 복스럽다.그래서 국보 83호 미륵반가사유상 얼굴에서 마음을 깊이 가라앉혀 생각을 한데 모은 침잠한 모습을 굳이 읽지 않아도 좋다.이 보살에서는 선동의 장난스러운 표정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황룡사 보살상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끝이 닿았던 흔적을 남겼다.이 보살이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었던 반가사유상임을 단적으로 일러 준다.6세기 후반 걸작의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이 분명하건만,이렇듯 머리만 남아 있다.하지만 황룡사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불보살상이기도 하다. 역사는 황룡사에 전체높이가 자그마치 2백25자(80m)나 되는 거대한 9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그 목탑의 존재는 최근 발굴한 기둥자리 주춧돌에서 확인되었다.신라는 이 목탑을 세우는데 백제의 공장 아비지를 초빙했다.그가 목탑을 지을때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그런데 당시 신라의 젊은이들은 9층목탑과 장륙상등 스케일이 큰 황룡사 가람을 바라보면서 기상을 키웠다.그들은 뒷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으니,역사에는 아이러니한 구석도 있다.
  • 야마시타 신타로 주한 일대사 인터뷰(한·일수교 30년)

    ◎“한·일 이젠 수평적 협력파트너”/“다수 일본인들 과거 침략행위 깊이 반성/한국서도 일본을 있는그대로 보았으면” 한·일기본조약 체결 3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사는 22일 야마시타 신타로 주한일본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양국관계의 변화와 전망을 들어봤다. ­한·일 양국관계의 30년전과 오늘을 비교해 주십시오. ▲먼저 일본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양국간 우호관계의 가일층의 개선과 강화를 외교정책의 중요항목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일관계는 정상화이후 30년동안에 인적교류·경제교류 등 다방면에서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긴밀해져 왔습니다. 일본을 찾은 한국인 여행자수는 작년에 1백23만여명으로 국교정상화가 이뤄진지 얼마 안되는 지난 68년에 비해 30배를 넘어선 한편,한국을 찾은 일본인 여행자수는 1백62만5천여명으로 68년에 비해 66배나 됐습니다.양국간의 교역규모도 94년에 3백89억달러에 이르러 과거 30년사이 1백80배나 늘어났으며 일본정부의 자금협력도 무상자금이 78년까지 1천3백30억엔,유상자금이 90년까지 6천억엔에 달했습니다. 더욱이 양국의 경제관계는 양적 확대만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기술고도화에 따라 대등하고 수평적인 협력 파트너로 질적 발전을 하여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됐습니다.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일본 지도자층의 망언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주주의 사회인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저마다의 견해를 가지고 이를 표명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으며,이는 역사인식면에서도 자신의 체험 등을 바탕으로 한 역사관이 존재하므로 일본정부나 국민 대다수의 의견과는 다른 견해들도 표명되는 적이 있었습니다.나로서는 한국인 여러분의 심정을 일본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늘 노력해온 터이나,일본에서 이런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발언들이 이따금 나오고 있는데 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비록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압도적 다수의 일본국민은 과거 일본의 침략행위나 식민지 지배가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세계평화 창조에 진력해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일본정부로서도 이와 같은 대다수 일본국민의 인식을 토대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전후청산은 끝났다고 봅니까. ▲자칫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만,2차대전과 관련된 배상 및 재산청구권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2국간 평화조약 및 기타 관련조약 등에 의거,성실히 대응해 왔으며,한국과의 관계에서도 65년의 기본조약,청구권 경제협력협정 등에 따라 법적으로는 해결이 끝난 상태입니다. 그보다도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이 일본에 던지고 있는 것은 역사인식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이와 관련해 무라야마 총리는 역사의 교훈을 미래에 살려나가기 위해 아시아 근린제국과의 과거사를 직시하고 올바로 이를 후세에 전하며 아시아 각국과의 상호이해와 상호신뢰를 증진시켜 간다는 뜻아래 전후 50년이 되는 올해부터 「평화우호 교류계획」을 추진해가겠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이 계획은 역사연구를 지원촉진하고 각국과의 교류를 강화해가는 자주적인 노력이며 이는 곧 한국등 각국의 일본 신뢰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진정한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를 위해 양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선진국 진입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이제 두 나라만의 협력이나 현안 해결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사회 전체에 관련된 과제를 향한 협력을 지향해야 합니다.환경문제에의 대처,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나 세계무역기구(WTO)에서의 협력이 그 한 예입니다.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는 한·일협력관계의 확충 및 강화가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라는 의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편 이러한 협력이야말로 상호신뢰관계를 그 전제로 하는 만큼,양국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일본측으로서는 과거를 솔직히 직시하고 역사인식을 심화시킬 노력이 중요한 반면,한국측으로서도 현재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줄 압니다. 가령 한국언론에는 여전히 일본이 군사대국화나 핵무장을 지향하고 있는 듯한 논조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일본을 둘러싼 국제환경을 불안정하고 긴장된 상태에 빠뜨릴 따름으로 각국과의 상호의존 속에서만 살아나갈 수 있는 일본에는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합니다.더구나 핵무장은 NPT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은 북한의 핵문제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 양국이 상대국의 실체에 맞는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균형있는 정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양국 언론의 책임과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일 새 3각관계(한·일수교 30년)

    ◎일의 「남·북 줄타기 외교」 대비해야/대북 수교협상 자세따라 한·일갈등 소지/끊이지않는 「망언」… 선린의 앞날 불투명 국교가 정상화된지 30년,한일양국관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지난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에 서명한 이후 양국 관계는 발전과 퇴보를 되풀이하고 있다.지난 30년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측면에서 양국 관계는 양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65년 2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무역액은 그동안 2백배 가까이 늘어 지난해에는 3백89억 달러를 기록했다.양국간 인적 교류도 65년 1만명에서 지난해 2백7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이 이웃국가로서 결속력있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한국쪽에선 「동반자」보다는 「반일감정」이나 「망언」이,일본쪽에선 「혐한」「추한 한국인」이란 단어가 언론에 더 많이 등장한다. 지난 연말 한국 외무부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들이 여느해 보다 강하게 새해를 맞는 흥분을 느낀다고 털어 놓는 것을 본 일이 있다.광복 50년(일본에는 종전 50년이다),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1995년의 역사성이 양국관계를 다루는 당국자들에게는 팔을 걷어붙일만한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몇차례 천명했듯 95년을 과거를 극복,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원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당국자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의욕은 국민감정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일본과의 수교 30년을 기념하는 것 같은 공식행사를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엄연한 우리 국민의 평균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기념행사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이를 반민간 단체로 볼 수 있는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윤환/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으로 넘겼다.그러나 연맹측이 계획했던 행사조차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경북 예천 출신으로 「일본의 이미자」로 불리는 재일동포 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서울,부산 공연은 문화체육부의 불허로 무산됐으며,한일청소년회관의 건립계획도 변경됐다.이달 일본에서,오는 12월 우리나라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것 정도가 확실히결정됐을 뿐이다. 의원연맹측이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사내정의)가 한반도에서 수집해간 문화재를 반환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 정도가 계속 기대를 걸만한 사업이다. 양국 관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차원에서 시각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분석한다. 우선 한일 관계를 양자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자간 관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사회 내에서라면 한일 양국의 이익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양국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국가발전 전략을 꾀하고 있으며,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 이념도 같다. 일본 관계를 다루는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선출과정에서 김철수후보를 적극 지원하거나,우리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양국의 이해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국익이 일치하는 구조 속에서도 양국 국민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 지적이다.일본인들 스스로의 지적처럼 『괴롭지만 과거를 바로 보지 않으면,미래는 없다』는 것이 한일관계의 현실이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군대 위안부문제,사할린동포 문제등은 양국이 해결해야 할 오랜 현안이지만,일본측은 어느것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며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일의원연맹의 지철민 사무총장은 올해 사회당,자민당,신당 사키가케등 여당연합과 신진당이 추진하던 일본 국회의 과거사죄와 부전결의가 결국 신진당이 불참한 채 반성과 평화추구라는 용두사미로 끝나고,때를 맞춰 터져나온 와타나베(도변미지웅) 전외무장관의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이 아직 한일관계의 미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일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의 대북 쌀 제공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미묘한 자세는 우리 국민과 정부 당국자들이 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원초적 우려감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인가.일본은 과연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가.한국민은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를 이끌어낸뒤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저울질하는 줄타기 외교를 전개하며 이문을 챙기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올해가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서가 아니라,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에,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일본 태도에 따라 한일 관계는 또 한차례 갈등하며 후퇴의 시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측 외교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지난 1월 고베 대지진 때 한국 국민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구호물자를 보낸 바 있다.전문가들은 광복후 50년이 지나고 양국을 움직이는 세력이 전전세대에서 전후세대로 교체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양국관계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세대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인식을 전세대보다는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또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낮에는 반일,밤에는 친일」이라는 식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은 있다」의 저자 서현섭씨(외무부 외교정보관리관)는 『한일관계의 지난 50년은 두나라 국민이 무시(DISREGARD)→불신(DISTRUST)→혐오(DISLIKE)라는 3D를 만들어온 세월』이라고 말했다.그는 『앞으로의 50년은 세 단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DIS」 세글자를 떼어버리고 상호인정(REGARD)→신뢰(TRUST)→선린(LIKE)의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일관계 30년 일지 ▲1965년 6·22=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서명 ▲8·28=한일협정 반대 학생 데모 및 위수령 발동 ▲12·18=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발효 및 주한·주일대사관 상호개설 ▲1966년 1·17=한일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발효 ▲5·27=일본 문화재 2천3백28점 반환 ▲19 67년 6·30=사토 에이사쿠 일본총리 방한,박정희대통령 취임식 참석 ▲1970년 6·16=한일 정기여객선(부관페리호) 취항 ▲1971년 2·5=일·북 재일교포 북송합의서 조인 ▲1973년 8·8=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년 8·15=조총련계 문세광,육영수 여사 저격 ▲1975년 9·15=조총련계 동포 성묘단 모국 방문 ▲1982년 7·26=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외교 문제 비화 ▲1983년 1·11=나카소네 일총리 첫 공식 방한 ▲1984년 9·6=전두환 대통령 첫 공식 방일 ▲1986년 5·18=일,대한 2백해리 어업수역 선포 ▲7·24=후지오 문부상 교과서 왜곡관련 망언 ▲1990년 5·24=노태우대통령 방일 ▲9·24=가네마루 자민당부총재 등 3당 대표 방북,일북수교 원칙 합의 ▲1991년 1·9=가이후 총리 방한,한일 우호협력 3원칙 발표 ▲1992년 7·6=일본정부 종군위안부 조사결과 발표,정부관여 인정 ▲11·8=노태우 대통령 실무 방일 ▲1993년 10·4=사할린 동포 관련,한일 실무협의회 ▲11·6=호소카와총리 실무 방한 ▲1994년 3·24=김영삼대통령 방일 ▲7·23=무라야마 총리 방한 ▲1995년 1·19=한국정부,고베지진에 구호품 전달 ▲6·5=와타나베 전외상 한일합방 관련 망언 ▲6·14=일본의회 과거 반성,평화 추구 결의 ◎지표로 본 양국관계/교역규모 급속 증가… 1백85배 늘어/경기둔화·국민감정 악화… 90년초 주춤/대일 누적적자 1천억불 시정 과제로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80년대 말까지 교역과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다가 90년대 초 국내 경기둔화와 노사분규 여파로 잠시 주춤했다.그러다 엔고에 힘입어 지난 해부터 기계류와 부품을 중심으로 산업협력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그러나 30년간 누적돼 온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65년 국교정상화 당시 대일 수출은 4천4백만달러였다.이것이 지난 해에는 1백35억2천만달러로 늘었고,대일 수입도 1억6천만달러에서 2백53억9천만달러로 커졌다.교역규모만 1백85배 신장한 셈이다. 반면 교역확대속에 65년 1억2천만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가 86년 50억달러를 넘은 데 이어 지난 해에는 1백억달러 돌파(1백18억6천만달러)라는 반갑지 않은 기록까지 남겼다.그간의 누적적자만 이미 1천억달러를 넘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국교정상화 이후 계속 늘던 대일 수출은 89년 1백35억달러를 고비로 줄기 시작,92년 1백16억달러로 떨어졌다.수입도 91년 2백11억달러에서 92년 1백95억달러로 감소했다. 일본의 대한투자가 전체 외국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92년 건수기준 30.5%,금액기준 17.3%로 82∼86년 평균(건수 47.7%,금액 49.6%)에 못미쳤다.고임금으로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과거사 문제로 국민감정이 악화돼 소원한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93년 초 양국 모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 경제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됐다.국민감정과 정치논리보다 경제논리로 문제를 풀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한 뒤 우리 정부가 먼저 수입선다변화 품목을 해제하는 등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역액이 92년 3백11억달러에서 지난 해 3백89억달러로,일본의 한국투자는 92년 72건,1억5천달러에서 지난 해 1백32건,4억2천만달러로 각각 늘었다. 교역형태도 기계류와 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다 경공업제품을 생산,제3국에 파는 「산업간 교역형태」에서 반도체와 철강 등 중화학제품을 서로 주고받는 「산업내 교역」으로 바뀌었다.일본으로서도 가격과 품질경쟁력이 있는 한국산 부품과 소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일본기업들의 투자도 저임금을 겨냥한 해외 생산기지화 전략에서 전략적 제휴형태로,기술협력도 한국의 일방적 기술이전 요구가 아닌 경제논리에 기초한 교류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엔고 지속과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미국과의 협상실패에 따른 무역마찰로 일본은 우리와 산업협력의 끈을 단단히 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일본기업을 적극 유치,대일역조를 개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그렇게 되면 기술이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양국관계가 호혜와 동반의 관계로 성숙돼 갈 것이다.
  • 와타나베 공직사퇴/일 민간단체서 촉구

    【도쿄 연합】 일본 마쓰야마시의 민간단체인 「새로운 침략자를 만드는 전쟁찬미 결의 반대 모임」(대표 추야미지자)은 16일 항의문을 통해 한일합방조약이 원만하게 체결됐다고 망언한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부총리는 의원직 등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 일본… 상처낸 자리 쑤시고 되후비고(박갑천 칼럼)

    『누에와 같다』는 일본말이 있다.「누에」는 딱새과에 속하는 호랑지빠귀를 이르는 한편으로 전설상의 괴상한 동물을 뜻하기도 한다.『누에같다』고 할때는 후자쪽이다. 「헤이케모노가다리」(평가물어:권4)에 무장이며 가인인 미나모토노요리마사(원뢰정)가 누에를 쏘아죽였다는 얘기가 나온다.이 괴물의 모습은 이렇다. 즉,머리는 원숭이요 몸뚱이는 너구리이며 꼬리는 뱀이고 손발은 호랑이인바 우는소리가 호랑지빠귀 비슷했다.이괴물 따라 정체불명인 사람,아리송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기이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누에같다』며 빗대었다. 그말그대로 누에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나라가 일본이다.아리송하게 처신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들에게는 또 「우미센 야마센」(해천산천)이란말도 있다.뱀이 『바다에 천년,산에천년』살면 용이 된다는 말을 줄여서 쓰는 것인데 그렇게 풍상을 겪는사이 교지가 발달했음을 이른다.그 「우미센 야마센」의 나라가 일본아닌가 한다. 「망언」으로 표현되는 「소리」를 한두번 나달거린 것이 아니다.구보다(구보전관일낭)로부터 치자면 정부요로의 사람이 한 것만도 열번은 넘는 것 아닐는지.그들이 낸 상처를 헤집는 살똥스런 화살이다.아프고 분해서 소리치면 「그래?그럼 약을 주지」 하는양 「사과」한다.그러고서 조금있다가 또후벼댄다.이짓을 몇십년 계속해온다.당하는 우리의 대응은 어떤가.그들이 들쑤시면 왁자하게 단세포적 반응을 일으키다가 이내 사그라든다. 이웃나라끼리는 침략하고 침략당하고 하는게 대체적인 세계사의 흐름이다.하건만 한일관계는 좀 유별나다.한국은 일방적으로 당해만 오는 것이니 말이다.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은 그들을 그느르며 은혜를 베푼 나라.그 은혜를 원수로 갚아내려오는 일본이다.그맥락 따라 시나리오라도 써놓은 듯이 침략합리화발언을 뜨문뜨문 내뱉는다.「누에」낯짝이다. 며칠전 같은날짜 신문에 난 독일 콜총리의 나치학살에 대한 발언과 일본연립여당의 「전후결의안」표현의 차이는 엄청나다.전자의 솔직함에 비겨 후자는「우미센 야마센」의 말재주.이웃집이 고약할때 내가 떠나면 되지만 이웃나라 보기싫다고 나라가 떠날 수도 없다.그들 속담대로 『독사새끼는 독사(마무시노고와 마무시)』.그런 독사의 용골대질을 당하며 살아가야 할 처지가 괴롭다. 「헤이케모노가다리」 첫머리에는 노자의 말을 빈 『오만한 헤이케(평가)는 오래 못간다』는 대목이 있다.이말을 천지신명 앞에서 곱씹어봐야 할 일본이다.
  • 일 사학/학교이름으로 침략 사죄/메이지학원 5백명 이례적 행사

    【도쿄 연합】 일본의 유서깊은 기독교계열 사학인 메이지(명치)학원은 10일 과거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를 고백하고 공개 사죄하는 이례적인 행사를 가졌다. 메이지학원은 이날 하오 도쿄 미나토(항)구 학내 예배당에서 나카야마 히로마사(중산홍정·57)학원장의 「메이지학원의 전쟁책임과 전후책임 고백」이라는 공개강연 형식을 빌려 전시에 메이지 학원이 군국주의에 협력,조선의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신사참배와 학도병지원강요에 앞장섰던 사실을 내외에 공표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했다. 개교 1백18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메이지학원의 나카야마 학원장이 재학생과 졸업생,교직원등 5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 고백강연은 중·고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메이지 학교법인이 지난해 학내교수,동창생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전후50년 메이지학원의 자기검증」이라는 취지로 학원의 과거 역사등을 검증해온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학교전체이름으로 전쟁범죄행위를 스스로 공개하고 사죄한 것은 처음이다.
  • 소의 「북영토 포기」 시나리오(6·25내막 모스크바 새증언:12)

    ◎스탈린,「평양정권 중·소로 완전 철수」 검토/“계속 저항 무의미… 모든 병력·장비 후송” 전문/중군군 참전 결정따라 당일 철수명령 백지화 스탈린이 3번째로 생각한 대안은 보다 충격적인 것이다.바로 김일성정권 자체를 몽땅 철수시키겠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50년 10월13일 스탈린은 김일성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0월13일 스탈린이 김일성 앞으로 보낸 전문)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함.중국동지들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음.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소련으로 완전철수를 준비해야 함.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모두 가지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함.이와 관련한 활동계획을 상세히 보고할 것.향후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한 역량을 유지시켜야함』.슈티코프대사는 이 전문을 같은 날 즉각 김일성·박헌영에게 전달했다.슈티코프는 두사람과의 면담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10월14일 슈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김일성,불만속 동의 『10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났음.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전문내용을 전해듯고 의외라는 반응이었음.그러나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스탈린 동지가 그런 충고를 한다면 이를 이행하겠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스탈린의 충고를 다시한번 읽어달라고 요청한 뒤 박헌영에게 이를 받아적도록 지시했음.김일성은 이와 관련한 준비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음』 그러나 김일성정권 자체를 북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이 구상은 같은 날 잇따라 전달된 다른 전문에 의해 백지화됐다.바로 중공군의 참전결정을 알리는 긴급전문이었다.김일성에게 정권과 군대를 모두 데리고 북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전문을 보낸 직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슈티코프앞으로 내려보냈다. 『평양.슈티코프대사앞.김일성에게 전달할 것. 모택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상황을 재검토,조선동지들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받았음.중국군의 불충분한 무기사정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결정을 내렸다고 함.본인은 모택동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중국지도자들의 새 결정에 따라 어제 날짜로 보낸 북조선군을 북조선 북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의 전문은 실행을 보류할 것. 1950년 10.13. 핀시(편집자 주:스탈린의 가명)』 중공군참전이 결정된 직후인 11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60 06 03sh 50년 11월 2일.스탈린이 슈티코프에게 보내는 전문) ○군사고문단 잔류요청 『중국동지들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군 병력이 향후 전투에 대비 만주영토로 이동배치됐음:9개 보병사단,1개 사관학교,1개 탱크연대,훈련비행연대 1개를 포함한 항공사단.아울러 6개 전투사단이 규모가 상향조정돼 조선영토에서의 전투준비에 임하고 있음.본인은 경애하는 핀시동지(스탈린의 가명)에게 위 병력의 훈련지도를 위해 소련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국방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쿠드리야초프 중장의 보고.11월 11일.대통령문서소.p.51) ⑴만주지방:제6군(제18·제68·제36 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씩.제7군(제13·제32·제37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제8군(제42·제45·제76보병사단).사단별 병력 1만명.사관학교 병력 1만 5천명. ⑵조선지역:제1군(제8·제46·제47 보병사단.제17기계화사단).각 사단병력 1만명.제3군(제1·제3·제15 보병사단,제26보병여단,제105탱크사단,제10사단,제6여단).제5군(제1·제12·제38·제24 보병사단).그외 4개의 독립사단(제2·제4·제5·제7)등 총20여개의 사단. ⑶적의 후방에 잔류병력.제2군(제31보병사단,제27보병여단,그외 독립 해병여단). 종합하면 총병력 25만∼27만명.8개군.25개 보병사단,3개 보병여단,1개 탱크사단,1개 기계화사단,해병여단 1개,독립보병연대,1개 독립탱크연대,사관학교 1개등이다. 한편 4번째 시나리오인 향후전투준비편을 살펴보자. 50년 9월 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달했다.(슈티코프가 김일성의 서신을 첨부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60 03 82sh). 『미제국주의자들은 이제 조선영토 전역을 점령해 이를 향후 극동침략의 군사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것임.독립·자유·국가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은 장기화되고 매우 어려워질 것 같음. 미군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조종사,탱크운전요원,통신전문가,기술장교를 시급히 훈련시켜야 함.이와관련,다음 사항을 요청함. ⑴소련에서 수학중인 북조선학생중 2백∼3백명을 선발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해줄 것. ⑵재소한인중에서 1천명의 탱크운전요원,조종사 2천명,통신요원 5백명,기술장교 5백명을 양성토록 허락해줄 것』 바로 이튿 날인 10월 10일 모스크바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을 찾아가 소련에서 유학중인 북조선학생 전원(남학생 6백69명,여학생 69명)을 모두 항공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건의했다.다만 통신전문대학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군사무선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요구했다.(그로미코차관과 주영하와의 대화록.외교문서). ○북,공군1개 연대 창설 한편 10월 20일 그로미코차관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주영하 대사를 통해 받은 요청과 슈티코프 대사가 보내온 요청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다.(그로미코가스탈린에게 제출한 보고서.N255­GE.50년 10월 20일)즉 주대사는 항공학교와 무선학교 양쪽에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한 반면 슈티코프가 전문으로 보낸 요청서에는 항공학교 한곳만 적혀있다는 것이었다.그로미코차관은 주대사가 이 경우 슈티코프 대사의 보고내용을 따르라고 말해 그대로 시행했다고 보고했다. 한편 11월 11일 소련군사고문관 자하로프 장군은 모스크바로 보낸 전문을 통해 11월 1일자로 훈련시킨 29명의 조선조종사들로 공군1개 연대를 창설했다고 보고했다.그리고 11월 1일 이 연대소속 전투기 8대가 완주방면으로 최초출격,B­29기와 무스탕등 2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했다.야크­9기를 타고 출격한 조선조종사들은 귀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자하로프 장군은 안동지역에 리 파르트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인 혼성사단이 창설됐다고 이 보고서에서 밝혔다.(자하로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6 416.50년 11월 11일) 11월 13일 모스크바 주재 주영하 북한대사는 소련국방부의 E 쿠르두노프 국장서리를 찾아가 소련유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에게무선훈련을 가르치는 문제를 재차 요청했다.주대사는 이밖에도 재소한인들중에서 조종사,탱크운전요원,무선요원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문제를 김일성이 이미 요청했음을 상기시켰다.김일성은 이 문제를 서둘러 실행에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고 주대사는 전했다.(E 쿠르드노프 국방성국장서리와 주영하 북한대사의 대화록.50년 11월 13일) ○연해주서 조종사 훈련 11월 20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조선인 조종사 훈련계획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전문번호 N75 835)『1.조선유학생 2백∼3백명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계획은 만주 양지에 있는 조종사학교에서 시행될 예정임.소련교육관을 파견하겠음.2.폭격기 2개 연대에 배속될 조종사 훈련은 만주주둔 소련군 사단중 한곳에서 실시할 수 있음.훈련은 미그­15를 이용하고 훈련을 마친 뒤 미그­15를 조선조종사들에게 제공하겠음. 폭격기 조종사 훈련은 연해주에 있는 조종학교에서 실시하는 것이 편리함.TU­2 폭격기가 폭격연대에 제공될 것임』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철수 위기에까지 몰렸던 김일성정권은 중공군의 참전결정으로 이렇게 다시 반전의 계기를 마련,대반격에 나설 준비를 갖추어갔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한군 9개사단 만주이동 첫 공식 확인/재소한인·유학생 군사훈련→참전 드러나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북한정권의 생존문제였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자료에서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가 새로이 밝혀져있다.19 50년10월13일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중국·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문은 이 시점에서 소련이 북한영토를 완전히 포기하려하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한다.이 시점은 김일성과 북한정부가 평양을 막 탈출한 직후 시점이었다.전쟁을 일으키도록 동의,지원해 놓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을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이는 스탈린식 이중전술이었다.이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및 소련의 대북한정책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점을 재공해줄 것이다.물론 이러한 사실 자체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에서도 일부는밝혀졌던 것이지만 그것이 자료를 통하여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일성은 이러한 스탈린의 제의에 대해 못마땅해하였으며,그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음도 처음으로 밝혀졌다.중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세 역전에 직면하여 산악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투쟁을 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그러나 스탈린이 『지원불가­철수』를 통고하자 이를 이행하려하였던 것이다.이러한 철수계획이 중국군의 참전결정으로 당일날 변경되었다는 점도 아주 흥미를 끄는 새로운 사실이다. 한편 50년11월 현재 만주와 북한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의 병력 분포현황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실이다.만주지방으로 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동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이 자료는 공산측 자료를 통해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흥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번 회에는 재소한인을 훈련시켜 참전케한 사실도 새로이 밝혀져있다.
  • 일 「전후결의」 여 단독처리/야의 “되풀이 않겠다”삽입 요구 묵살

    【도쿄 연합】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민당과 사회당 등은 9일밤 통합야당인 신진당이 불참한 가운데 중의원 본회의를 열어 전후 50주년에 즈음한 국회결의를 일방적으로 채택했다. 「역사를 교훈삼아 평화 결의를 새로이 하는 결의」라는 제목의 이 결의는 먼저 전세계 전몰자 및 전쟁희생자를 추도한 뒤 『세계 근대사에 있었던 수많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적 행위에 집착해 우라나라가 과거에 행한 이런 행위와 타국민,특히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준 고통을 인식해 깊이 반성의 염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부전과 사죄라는 표현이 빠져 일본 국민은 물론 한국·중국 등으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은 이 결의는 성격상 여야 합의가 바람직한데도 불구하고 그나마 연립여당이 단독 처리함으로써 상당 부분 무게를 상실했다. 앞서 열린 여야 간사장 및 서기장회의에서 야당측은 연립여당측 결의안이 미흡하다며 『반성의 염을 표명하고 아울러 그같은 행위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는 부분을 삽입하자고 제의했으나 여당측은 이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본회의를 소집,다수결로 의결했다.
  • 가슴에 와닿는게 없는 「전후50년 결의」(해외사설)

    단어는 나열돼 있지만 가슴에 와닿는게 없다.이 정도의 문안을 정리하는데 왜 이만큼 시간이 필요했을까.연립여당이 작성한 전후 50년 결의안을 훑어보면 이런 느낌을 갖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문안이 되길 바랐고,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주문해 왔다.그러나 결의안은 매우 애매해 감동이 결여돼 있다. 결의안을 정리하지 못해 세계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라도 정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그렇더라도 합격점과는 거리가 먼 결의안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핵심표현인 「식민지 지배」 「침략행위」 「반성」을 다룬 방식에 있다.결의안에는 「세계 근대사에 있었던 많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적 행위에 집착해 우리나라가 행한 이런 행위와 타국민,특히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준 고통을 인식해 깊이 반성의 염을 표명한다」는 표현으로 3개 단어가 모두 들어있지만 잘 읽어보면 식민지 지배와 침략 행위는 일반적인 역사흐름으로서 이해됐을 뿐 주체적으로 일본은 무엇을 했는지 언급돼 있지 않다. 3당측은 그 뒤의 「우리나라가 과거에 행한 이런 행위」란 문장으로 일본에 해당되는 경우가 표현돼 있다고 설명하지만 불명확하다.자민당 간사장은 『문맥상 간접적인 표현이라는 비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애매성을 인정한다. 무라야마 총리는 이 결의안으로 아시아 각국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는 것같지만 세계의 반응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과 중국의 언론 논평을 보면 결의안에서 부전이나 사죄 요소가 빠져있다는 실망과 불만이 팽배해 있다. 자민당내 결의 반대파의 압력으로 상징되는 국회의원간의 역사관의 차이,어떻게 해서라도 연립정권을 유지해 정권의 약체화는 피해야 한다는 정치적 우려와의 사이에서 계속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타협에 이른 것같다. 아무튼 이번 결의를 종군위안부 문제를 위시해 많이 남아 있는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으면 결의의 취지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결의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심에 부끄러움을 주는 것을 스스로 반성하는 행위는 과거를 직시하는 작업을 빼고는 불가능하다.이번 결의는 역사교육 문제를 포함해 무거운 숙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 일 전후결의안/“전쟁만행 사죄 회피”/NYT 비판

    ◎“모호한 표현으로 의미 축소” 【뉴욕=이건영 특파원】 미국 뉴욕타임스지는 7일 일본 연립정부가 합의한 전후 50주년 국회결의안 내용이 진정한 사죄라기보다는 뜻을 모호하게 만들어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도록 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이 결의안이 아시아의 이웃국가들을 안심시킬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일본정부가 결의안 문안에 과거의 침략행위와 관련해 「후회」와 「사죄」라는 용어를 빼고 「반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반성」은 일본에서 어린아이가 숙제를 잊어버렸을 때 갖는 느낌 정도로 사소한 의미라고 지적했다.이 신문은 와타나베 미치오 전일본외상의 망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한편 일본의 침략행위를 뉘우치지 않는데 대한 반감이 한국과 중국국민이 일본을 불신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으며 다수의 아시아국가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원치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