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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콕의 오토바이 택시/홍철 국토개발연구원장(굄돌)

    오토바이면 오토바이고,택시면 택시지 ‘오토바이 택시’는 무어란 말인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는 신사·숙녀 할 것없이 영업용 오토바이 운전사의 허리를 껴안고 시내를 질주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벤츠 자가용의 뒷좌석에 점잖게 앉은 ‘사장님’도 길이 막혀 약속시간에 늦을 듯하면 체면불고하고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에게 매달린다. 길은 좁지만 월부 자동차 덕분에 ‘마이 카’시대가 빨리 도래하다 보니 오토바이 택시가 등장하고,차안에 소변통을 갖고 다녀야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방콕에서 벌어진다. 같은 동남아국가의 도시이긴 하지만 싱가포르는 완연히 다르다.10년후의 교통상황을 예측하여 40㎞ 에 달하는 지하고속도로까지 계획해 두었다.고율의 세금때문에 한국산 쏘나타 승용차 값이 원가보다 3배가 넘는 5천만원에 달하니,아무나 자동차 가질 엄두를 못낸다.싱가포르는 도시교통뿐만 아니라 주택·환경·시민의식 등 모든 면에서 신이 질투할 정도로 완벽한 도시국가이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가 시민들의 주 교통수단인 북경은도시순환도로를 4환까지 건설했다.앞으로를 대비해 북경시 외곽지역에 5번째 순환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할 예정이다.북방 호족의 침략을 막느라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인들의 면모가 도시교통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지난 겨울 서울의 도시교통이 IMF사태 때문에 한결 나아졌다고 하지만 봄이 되면서 서서히 과거로 돌아가는 듯하다.2∼3년후 우리가 고통스런 IMF 터널을 통과했을 때 서울에도 방콕처럼 오토바이 택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지금부터 신호등·주차관리·병목지점 등 도시교통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 DJ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32세때 공산주의 비판 논문 발표

    ◎1955년 10월호 사상계에 게재 안기부의 ‘북풍공작’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고문이 발굴돼 눈길을 끌고있다. 김대통령은 노동상담연구소를 운영하던 지난 55년 사상계 10월호에 투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논문에서 공산주의를 극렬하게 비판했다. 이 논문은 김대통령이 지난 1월 이기호 노동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50년대 중반에 내가 노동운동과 관련해 사상계에 기고한 글이 있다”고 밝혀 수소문 끝에 국회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김대통령은 이 논문에서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로에 대한 논리를 전개하기에 앞서 2쪽 분량을 공산주의 비판에 할애했다. 김대통령은 “공산주의자의 간교하고 달콤한 선동에 현혹된 ‘로서아’를 위시하여 각국의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낙원을 꿈꾸면서 온갖 희생을 돌보지 않고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공산독재를 실현시킨 결과는 과연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일언이 폐지하면,이리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것밖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직업과 거주선택의 자유가 말살되고 감당할 수 없는 초과노동의 강요,최소한의 생활유지조차 불가능한 저임금과 가혹한 배급제도,그리고 공산주의의 명령에는 추호의 비판이나 반대도 용허하지 않을 뿐 아니라,갖가지 구실과 모략으로 무고한 노동자를 살육,투옥,강제노역시키는 것이 소위 노동자의 정권과 그들의 천국을 구가하는 공산치하의 숨김없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김대통령은 “현재 우리 민족의 최대의 과업이 공산침략자를 타도해서 남북을 통일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굳건히 수호하는 것이라는 점은 췌언을 요치 않는 문제”라면서 “한국노동운동의 사명 역시 이와같은 민족적 지상명령에 대해서 등한히 함을 불허함도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러한 민족적 입장을 떠나서 노동계급 자체의 처지에서 볼때 기술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자들이 노동계급에 갖은 궤변과 감언이설로 꼬여서,그들의 집권과 독재와탐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써 제멋대로 부려먹고 궁극에는 이를 숙청 유형하는 류의 천인이 공노할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대통령은 32세의 나이에 ‘노동문제연구가’라는 직함으로 기고한 이 논문에서 노동운동지도자들은 구호로만 반공을 외칠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실체와 허구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탐구할 것을 주문했다.
  • U자형 국토개발/홍철 국토개발연구원장(굄돌)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국토개발이 시작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다.일제는 식민지수탈과 중국침략을 위해 부산∼서울∼신의주,목포∼서울∼원산∼청진을 잇는 X자형 국토개발을 추진하면서 철도와 항만을 건설했다.목적은 한반도의 발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빼앗을 수 있을까 하는 침탈의 효과에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남북이 갈라지면서 X자의 윗부분이 떨어져나가고 X자의 아랫부분인 인자,즉 남한만 남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공업화시대에도 국토개발은 인자형 개발구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서울과 부산을 잇는 인자의 오른쪽인 경부축을 주축으로 삼았다.왼쪽인 호남축은 보조역할을 하도록 하는 전략을 취해왔지만,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 중국이 경제성장에 속도를 내자 우리도 여기에 대응,그동안 소외되었던 서남해안을 개발해야 한다는 L자형 국토개발 방안이 제기돼 우리나라의 국토개발 전략은 전면 수정됐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구소련이 붕괴하고 북한이 나진·선봉지구 개발에 나서면서,그동안 꽁공 얼었던 동해바다의 얼음이 녹고 있다.바로 환동해경제권의 등장이다. 세계화시대에 서남해안 뿐만 아니라 동해안까지 포함해서 바다 3면 모두를 적극 활용하는 U자형 국토개발을 추진해야만 한다.더구나 남한 해안만을 개발대상으로 설정하는 u자형 국토개발이 아니라,신의주에서 남해안을 돌아 동해안 꼭대기의 나진·선봉으로 이어지는 U자형 국토개발이 되어야만 한다. 전국토의 해안선을 십분 활용해 U자형으로 뻗어나가면,그 힘은 돋보기의 원리처럼 만주대륙으로 집중될 것이다.만주대륙을 우리의 활동무대로 삼는 길은 바로 바다를 공략하는 데 있다.
  • ‘한국과 일본,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출간

    ◎왜곡으로 얼룩진 한일역사/‘칠지도’ 논쟁 등 54가지 주제 해부/춘추필법 정신살려 객관적 고찰 한·일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국과 일본은 고대의 적극적인 국가교류에서 중세의 소극적인 접촉,근세의 상호교린,근대 이후의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변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그 관계는 가히 숙명적이라고 할 만큼 여러 방면으로 깊숙히 얽혀있다.그러나 두 나라 국민의 역사인식의 벽은 영원히 넘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높다. 최근 도서출판 자작나무에서 펴낸 ‘한국과 일본,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전2권,한일관계사학회 지음)는 한일간의 역사적 쟁점을 객관적 시각에서 다룬 역사교양서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논쟁적인 주제는 모두 54가지.이 가운데 하나가 헌상품인가 하사품인가를 놓고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칠지도 문제다.특히 칠지도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최근 TV방송을 통해 집중 조명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석상신궁)에 보관돼 있는 일본의 국보다.이 칠지도에대해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백제 조정의 헌상품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 배경에는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의 삼한정벌 기록을 사실로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칠지도의 진실은 무엇일까.이와 관련,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영식 교수(인제대)는 칠지도에 새겨진 61자의 금상감 명문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4세기 중·후엽 백제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이전까지 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수한 모양의 칼을 만들어 보냈다” 이 책은 또한 그 제작자와 제작 장소를 놓고 오랜 논쟁에 시달려온 우리나라의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지(광륭사) 보관 반가사유상,임진왜란때 조선에 귀화한 왜장 김충선의 실존여부를 둘러싸고 일본 학계에서 벌어진 논란에 대해서도 소상히 살핀다. 일본 교토의 우즈마사(태진)에 있는 고류지라는 절에는 나무로 만든 2구의 불상이 안치돼 있다.침울하게 우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우는 불상’이라고 불리는 1구의 미륵반가상과,이와는 달리 소박하고 단순한 모양이지만 한일 고대 불교미술사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또 다른 1구의 미륵반가상이 그것이다.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논란을 빚고 있다. 일본 것은 나무이고 우리 것은 금동이라는 재질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양식이나 조형적인 감각이 너무 비슷하다. 이 책은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720년에 완성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그런 다음에 백제 제작설이나 신라 제작설,그리고 한국의 금동반사유상을 일본이 본떠 만들었다는 모작설 등이 규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에 귀화한 항왜의 한 사람인 김충선을 둘러싼 논란도 관심을 끌만한 대목.본명이 사야가인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귀화한 인물이다.그는 조선인이 된 뒤에는 여진의 침구를 막아내고 이괄의 난과 호란 때도 공을 세우는 등 조선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현재 대구 우록동에는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우록서원은 후손들의 배움터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지 조이치(산도양일)·가와이 히로타미(하합홍민)·아오야기 츠타나로(청류강태랑) 등 일본의 사가들은 김충선의 저서인 ‘모하당집’은 위작이며 사야가는 매국노라고 강변한다. 이 책은 김충선의 사후 행해진 일본의 엄청난 역사왜곡상을 빈틈없이 소개,우리들로 하여금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이 책은 최근 한일간의 쟁점이되고 있는 일본의 일방적인 어업협정 파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요컨대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연안국주의,즉 조업단속 권한을 어선의 소속국이 아닌 연안국이 갖는 원칙을 채택하자는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최단거리는 53㎞.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대마도의 산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비에서 최근의 어업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의 골이 깊이 패여 있다.이것은 한일관계의 역사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함으로써만해결될 수 있다.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한일관계에서 특히 빠져들기 쉬운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버리고 춘추필법의 정신을 살려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 해외 유출 중국 명화 총 2만3천점/청나라 말기 강대국 약탈

    ◎미국·유럽·일본 등에 집중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찬란한 역사를 지닌 중국의 역대 명화가운데 어떤 것들이 해외로 유실됐을까. 최근 중국정부가 조사한 ‘해외에 수장된 중국 역대 명화’자료에 따르면 현재 외국으로 유실된 중국의 역대 명화는 원시사회에서 청대에 걸쳐 모두 2만3천점에 이른다.이 가운데 중국인들이 아까워 하는 작품은 청나라 말 영국 프랑스 등 8국 연합군이 원명원을 침략,약탈해 간 동진때 고개지의 여사전도.이 그림은 세계미술계에서 공인하는 중국의 특급 국보로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개지의 또다른 한폭의 명작 낙신부도의 최초 모사본은 미국 워싱턴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명한 실크로드에 위치한 돈황 장경동의 약 5만점에 이르는 사경수견화 및 각종 문물이 제국주의 시절 영국·프랑스에 의해 해외로 유실됐다.돈황 장경동 한 곳의 중국 국보만 세계 11개국에 흩어져 있을 정도로 약탈국가들이 많았다. 유실된 중국명화는 지역적으로 볼 때 미주(주로 미국·캐나다)와 일본,유럽에 각각 3분의 1씩 보관돼 있다.이 가운데 유럽에서는 주로 독일 영국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등 국가에 산재돼 있다.그 대부분은 돈황 장경동에서 빼앗아 갔고,다른 것은 20세기 들어 항일전쟁 전후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의 ‘해방전쟁’ 후 국가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외국인들이 사가거나 중국인들이 해외로 빼돌린 것들이다. 해외로 유실된 명화중 또 다른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있는 동녀해상(전국시대의 유물로 1928년 출토)과 당나라에서 전해진 염립본의 작품 역대제왕도중의 진무제 사마염상,당나라 장훤의 도련도가 있다.미국 뉴욕에 있는 북송 때 무종원의 작품 조원선장도와 마원의 한강독조도,미국 프린스턴 미술관에 있는 청대 연화도,러시아 동방박물관에 있는 남송 때의 사미인도 등이 유명하다. 해외로 흘러나간 이러한 명화들은 상당히 높은 예술 및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이 가운데 원시사회의 채도회화,하·상·주 시대의 청동기와 옥기·동기,중국 호남성에서 출토된 초증서화와 초백화,전국시대부터 양한,위진남북조 시대까지의 각 왕조시대의 명화 등이 포함돼 있다.이 그림들은 중국예술의 휘황찬란한 성과와 당시 사회의 경제상을 충분히 반영하고,상당히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그래서 중국정부는 최종 자료정리가 끝나는 대로 해당국가에 반환을 청구하는 문제를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 미 지상군 6천명 걸프 증파/1만명으로 늘어

    ◎클린턴,오늘 국민 설득 행사 【워싱턴·유엔본부 AP 연합 특약】 윌리엄 코언 미국방장관은 16일 자신이 5천∼6천명의병력을 쿠웨이트로 추가파병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코언 장관은 이날 CNN방송의 ‘래리 킹 라이브’ 프로에 출연,이같이 말하고 이들 병력을 파병하는 것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한 순수한 방어 목적에서라고 덧붙였다. 이들의 파병이 이뤄지면 걸프지역에 배치될 미지상군은 현재 쿠웨이트에서 훈련중인 1천500명과 이미 이동 명령을 받은 3천명을 포함해 모두 1만명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며 전함과 항공기를 조종할 해군병력들까지 합치면 2만5천명 수준에 달한다. 한편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자신이 바그다드를 방문,이라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을 펴겠다고 밝혔으나 유엔 안보리는 유엔 사무총장의 바그다드 방문을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의 바그다드 방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미해군 대변인은 미군 해병 2천여명이 헬기모함 USS괌호 등 4척의 수륙양용함대에 승선,이날 걸프만에 도착했다고 밝혔다.또 F­117 스텔스 폭격기 6대가 이날 쿠웨이트에 도착하는 등 걸프지역에서의 미국 병력증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해병대 파견은 이라크가 인근 국가들에 지상 공격을 가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고 대변인은 말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쿠웨이트 북서부 사막에서 약 150명의 미국 지상군 병력의 실탄 훈련이 실시된 가운데 이날 백악관 보좌진들은 모임을 갖고 이라크 군사공격을 염두에 둔 국민 설득 작업을 숙의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에 따라 17일 군 주요 지휘관들을 만나고 18일에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국민과 대화를 갖는다.
  • 출병의 현장 의란(흑룡강 7천리:21)

    ◎청­러전 참전 조선군 함성 들리는듯/효종,청 지원요청 따라 포수부대 262명 파견/1658년 ‘송화강 전투’서 러시아군 270명 섬멸 지난해 12월 2일 나는 하얼빈에서 가목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96년 여름 송화강 답사차 가목사로 갈 때는 장장 9시간을 밤기차를 탔고 1년 전 가목사에서 하얼빈으로 갈 때만 해도 택시로 근 10시간을 달려야 했던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 1급 도로가 완공돼 화장실까지 갖춰진 독일제 호화버스로 345㎞를 4시간만에 닿았다. 신나는 여행이었다.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조선족역사 연구’(고영일 저)에서 인용했던 ‘이조실록’의 한 토막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면서 역사의 귀곡성이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효종 5년(1654년) 2월 이상진이 국왕에게 상소했다. “지금 나선(러시아를 가리킴)의 정형은 걱정거리로 되었나이다.만일 강변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또 어떤 군대로써 이를 방어하겠나이까. 신하의 소견은 문신중에서 덕재를 겸비한 자에게 북노병마사의 직책을 지우고 그 지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의염려의 덕택을 알도록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정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보나이다” ○영고탑서 청군과 합류 효종은 찬동을 표시했다. 1643년 외흥안령 야크츠크의 보야코브가 흑룡강을 넘어 살륙을 시작하면서부터 침략이 빈번해지자 청 정부는 경차도위 명안달례를 파견,‘송화강전투’를 발동하게 하면서 조선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청군 주력이 모두 관내에 진출한 불리한 조건이라 청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지원군은 150명.그들의 행군노선을 보면 함북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오늘의 연변지역을 경과하여 8일만에 영고탑(오늘의 흑룡강성 영안시)에 도착,거기서 청군과 합류하여 목단강 뱃길로 닷새만에 회통강(송화강)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단강이 송화강과 합수하는 곳이면 바로 오늘의 흑룡강성 의란현의 소재지 의란이다.하얼빈에서 235㎞,가목사로 가는 길옆에 있는 현성인데 36만 인구중 조선족은 겨우 4천592명이 살고 있다.서쪽은 소흥안령,동과 북은 완달산,남쪽은 장광재령에 둘러싸인 분지다.만족의 조상이 거주했던곳이라 청실의 ‘조종발상중지’라고도 한다.의란을 만족어로는 ‘의란허라’라 부른다.의란은 셋,허라는 성이라는 뜻으로 의란의 원이름은 삼성이다.지금도 도시 안에는 ‘삼성전화공사’ ‘삼성관상대’ ‘삼성상점’ 등 간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삼성이란 갈,노,호씨인데 청나라 천명원년(1616년)에 태조 고황제의 초무를 받아 기적에 든 허저족 커이거러(갈의극륵),누예러(노업륵),허리(합리)씨족을 지칭한다.이들은 만주 팔기에 들어 누르하치,황태극,순치 등을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전공을 세웠다.그 공으로 천명 5년에 의란땅을 세습지로 하사받았던 바 영고탑,훈춘과 나란히 길림삼변으로 유명했다. ○오국성유적 그대로 12월 3일 의란현성에 이르자 나는 당시 청군과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과 혈전을 벌였으리라 짐작되는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목으로 달려갔다.얼어붙은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봄이 오고 강이 녹으면 배들은 짐을 싣고 송화강을 거슬러 하얼빈으로 가기도 하고 또 물결을 따라 흑룡강으로 가기도 한다.그런데 애석하게도 송화강 물결을 따라 의란과 가목사로가는 항로에는 암초가 많아서 큰 배는 통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작은 배는 무난히 오갈 수 있다고 했다. 조선 지원군이 적선에 불벼락을 안겼던 곳인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엔 오국성 유적이 남아 있다.의란진 북쪽 변두리에 ‘오국성옛터’라고 쓴 커다란 시멘트판이 서 있다.그 뒤로 세월의 흐름속에 겨우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낙엽진 버드나무의 쓸쓸한 형상을 띠고 언 대지위에 누워 있었다.역사의 기록에 보면 오국성 성벽의 둘레는 2천210m,높이 4m,기관 8m,정관은 1.5m였다고 한다. 오국성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역사상 ‘정강지란’이 이곳에서 있었기 때문이다.의란진에 있는 자운사의 용왕묘 옆에 세워진 시멘트 푯말에는 ‘휘흠이제유금지지’라고 적혀 있다.바로 여기서 송조 말기의 두 황제가 연금생활 끝에 1133년 한많은 생을 마쳤다. 자운사가 선 때가 1928년,바로 용왕묘 자리는 의란 부도통의 포병진지였다고 한다.1900년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포격으로 이곳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17세기 중반 조선 지원군의 포화에 쫓겨갔던 러시아는 20세기 초입에 다시 포화로 진격해왔다.역사는 톱질과 같이 밀고 당기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 와중에 인간은 애향심에 울며 세상을 떠나갔다. ○아군 8명 전사 25명 부상 1658년 6월 조선정부는 신류를 대장으로 소관 2명,포수 200명,고수와 화정 60명의 군사들에게 군량 3개월분을 휴대시켜 두만강을 넘어 영고탑으로 진군시켰다.이들은 6월 5일에 출발,10일 흑룡강에 이르렀다.전투는 도착날인 6월 10일(양력 7월 11일) 흑룡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오늘의 흑룡강성 동강시)에서 벌어졌다.싸움은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쓰제바노브의 러시아군은 270명이 섬멸되고 47명이 겨우 도망했다.아군은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그들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거친 북만주에서 시신으로 쓰러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던 순간 나는 분명 애끓는 귀곡성을 들었다.
  • 열린 한반도/홍철 국토개발연구원장(굄돌)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대륙으로부터,바다로부터 침략을 당한 ‘수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병자호란·임진왜란 등으로 우리의 3천리 금수강산은 외적의 말발굽에 짓밟혔고,우리 민족은 살인과 약탈을 당해야만 한 수모를 기억한다. 해방과 더불어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렀고,조용한 아침의 바다 동해는 미국과 소련의 항공모함이 으르렁대는 무력의 바다로 변하였다.황토빛 서해바다는 죽의 장막인 중국으로 인해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다.다만 부산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뱃길 하나만이 유일한 해외로의 통로였을 뿐,바다는 꽉 막혀 있었다.우리의 북쪽은 아직도 남북한 2백만명의 군대가 DMZ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80년대 후반 미소냉전이 종식된 데 이어 세계가 WTO라는 무한경쟁 시대로 돌입함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여건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태평양을 중심으로 환태평양경제권이 형성돼 APEC 국가들의 정상회담이 매년 개최되고 한반도의 양날개인 동해와 서해도 활짝 열리고 있다. 무력의바다 동해가 교역의 바다로 변모하면서 인구 3억명,GNP 3조달러에 달하는 환동해경제권이 형성되고 있다.죽음의 바다였던 서해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심을 꿈꾸는 중국의 도약으로 환황해경제권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시베리아와 중국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목인 북한에는 김일성의 대를 이은 김정일이 과도기적으로 통치하고 있긴 하지만,막힌 북쪽길이 열릴 날도 그리 머지않다.‘막힌 한반도’가 ‘열린 한반도’로 변모하면서,동북아의 관문에 위치한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교류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망상이 아닐 것이다.
  • 이라크,미에 대화 제의/대통령궁 등 68곳 두달간 무기사찰 수용

    【워싱턴·바그다드 AFP AP 연합】 미국이 대이라크 군사행동을 위한 수순을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가 8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제의하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부통령은 이날 카타르 위성텔레비전 알-야지라흐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미행정부와의 대화를 요청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면서 “미행정부가 중동지역에서 국익을 보호하기 원한다면 이라크와 대화를 갖고 내정간섭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마단 부통령은 “미국이 대화에 응하면 이라크는 원유공급이나 상품수입등 이라크에서의 미국 이익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러나 군사공격이 이뤄지면 침략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카이로 AFP 연합】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유엔 무기사찰단에 생화학무기 은닉,생산장소로 의심받고 있는 자국내 68개 장소에 대해 앞으로 두달동안 사찰을 허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아랍연맹의 에스마트 압델 메기드 회장이 9일 밝혔다. 지난주유엔 무기사찰을 둘러싼 위기의 해결을 돕기 위해 바그다드로 후세인 대통령을 방문했던 압델 메기드 회장은 문제의 장소들 중 8군데는 대통령궁으로 이라크는 특별사찰팀이 새로 구성돼 이곳을 사찰할 것을 원하고 있고 나머지 60군데는 기존의 유엔무기사찰단이 조사하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라크가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대통령궁 사찰을 담당하는 특별위원회의 의장을 임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고 밝혔다.
  • 미 우방국은 이라크 공습 반대말라(해외사설)

    프랑스,러시아,중국,터키 등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은 미국 만큼이나 대량파괴 무기가 불안정한 걸프지역에서 함부로 나도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국 안보 측면에서도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태도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라크 위기가 악화된 가운데 오로지 프랑스만 방관 자세를 버리는 부분적이나마 전향적 태도를 보일 따름이다.무력사용을 배제했던 프랑스는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면 무력사용도 고려하겠다고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말했다.미국은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우방국에게 천명했는데 여기에는 외교주의의 프랑스와 러시아를 무기사찰단 대치상황의 진정한 해결책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무력사용 배제는 결국 이라크의 후세인에게 생화학무기 개발을 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11월 프랑스와 러시아가 미적거린 대치상황 때 후세인은 이들을 농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미국인 사찰팀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곧 유엔 사찰정책에 더 한층 노골적으로 도전한 것이다.프랑스는 이런창피를 알아차린 기색이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후세인을 달래 옛 소련 시절의 외교 역할을 회복하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물론 프랑스도 군사적 해결에 회의적인데 공습만 할 경우에 대해 특히 그러하다.미국이라고 공습의 한계를 모르겠는가.문제의 무기는 숨기기가 아주 용이하고 공습을 당한 이라크는 오히려 동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그럼에도 후세인은 외교란 것을 본질적으로 경멸하고 있으며 그저 책략으로 이용할 따름이다. 용의주도한 공습은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몇몇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그의 정권에 상당한 정치적 불안정을 가할 수 있다.이라크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결코 가벼운 업적이 아니다.이론의 여지가 없는 침략자가 계속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시하도록 하고 위험한 무기를 휘두르도록 방관하는 것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이런 결과를 생각하면 법을 존중하는 나라들은 당연히 합심해 후세인에 대항해야 할 것이다.
  • IMF와 역사 되씹기/송일 외국어대 교수·경영학(시론)

    ○예측불능시대의 해법 찾기 무인년 새해는 대란의 해이며,개혁을 향해 몸부림치는 빅뱅의 해이다.외환대란 금융대란 물가대란 부도대란 실업대란 등 전대미문의 국란시대가 전개되고 있다.한편 외환,금융,주식시장에 빅뱅 도미노가 국가경제 전반에 걸쳐 경천동지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개혁의 바람은 이 위기가 선진국으로 가는 천로역정이라는 희망도 예고되고 있다. 한국이 국제사회로 편입하는 과정은 항상 외세의 개입에 따른 타율적이고 강압적이라는 부끄러운 특징을 수반에 왔다.국제통화기금(IMF)대란도 따지고 보면 외세에 의한 세계화의 빅뱅이다.IMF 구제금융의 발단이 된 외환위기는 결과적 현상에 불과하며 화근의 본질은 한국경제가 국제수준의 규범과 관행에 맞는 경쟁체질로 미리 거듭나지 못한데 있다. 앞으로 고통분담은 세계화로의 엑소더스를 위해 국민 정부 기업이 다함께 참여할 지옥훈련인 것이다. 최근 한국사람치고 나름대로의 IMF신드롬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필자가 겪는 IMF 신드롬은 오늘의 딜레머를 구한말 비운과 좌절의역사에 조명해 보는 ‘역사되씹기’이다.왜 이렇게 어리석은 역사를 후렴처럼 반복하는지 되씹으면 씹을수록 뒷맛이 쓰다.역사속에서 예측불능시대의 해법을 찾아 방황하며 반성하고 또 자성할 뿐이다.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년),조미수호조약(1882년),갑오개혁(1885년) 그리고 을사조약(1904년)에 이르기까지 개방과 개혁의 역사는 우리의 국운과 장래를 놓고 외세가 갑론을박하는 타율과 굴절로 얼룩져 있다.1세기가 지난 오늘도 개발연대의 자만과 구각,악습과 시대적 오류를 우리 힘으로 털어버리지 못한 죄과를 IMF 문전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말 통상을 요구해 온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하고 쇄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세운 대원군의 척화비와,외국인이 한국기업을 소유하는 것을 찬성하는 한국인이 겨우 4%에 불과하다는 지난 연말 어느 외국기관의 보고서는 과연 무엇이 다를까.1세기 동안 변한 것이 없다. 이처럼 우리민족이 국제물정에 등을 돌려온 탓으로 개방과 관련된 협상은 늘 선택과 저항의 여지가 없는피동과 압박의 역사의 반복이다.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도열시킨 구로다(흑전청융)의 무력적 위압에 의한 강화도 조약이나,지난 연말 벼랑끝 위기에 몰려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IMF 협상 사이에는 우리가 자초한 강박과 궁박의 차이 외에는 없다. 이처럼 강압적이고 수동적인 개방화의 이면은 불평등과 굴욕이며 내적인 준비없이 골육지책으로 이루어진 문호개방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침탈의 발판이 되고 말았다.19세기 말 열강과 체결한 각종 통상조약의 불평등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일본이 구한말 당시 1년예산에 맞먹는 1천300원의 차관을 공여하며 제멋대로 1할의 수수료를 떼어도 우리는 말 한마디 못했다.특히 일본이 파견한 재정고문 메가다(목하전종태랑)는 화폐정리를 통해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 금융제도를 조선에 연장,실시함으로써 가격기구에 의한 경제침략의 첨병역할을 십분 발휘했다. ○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 이번에 세계은행(IBRD)과 IMF에서 제공한 차관조건은 이들 기관 50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불공정 사례(사상 최고의 이자율과 최초의 전후수수료 징수 등)를 남겼다.또한 신용등급의 추락으로 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린 한국의 외채연장을 놓고 끝없이 벌어지는 외국금융기관의 탐욕이나,바닥으로 추락한 주가와 천정부지로 치솟은 환율 덕으로 코카콜라주식의 10분의 1이면 한국의 상장주식을 송두리째 장악할 수 있다는 언론보도는 우리의 방만과 실책을 다시한번 뼈아프게 만들 뿐이다. 한편 일제의 예속적 차관에 저항하여 남자들은 담배를 끊어 푼돈을 모으고 부녀자는 가락지와 비녀까지 내놓아 모금하던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을 연상시키는 ‘금모으기 운동’이나 국산품 애용운동,그리고 60·70년대의 수출드라이브 역사는 반복해도 좋다고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다.혹시 이것이 IMF 조건이나 심기를 또 어떻게 건드릴까 싶어 필자의 역사되씹기 신드롬은 바람잘 날이 없다. ○지원효과 극대화 노력 절실 분명한 것은 공존공영의 지구촌 자본주의 시대에 IMF는 점령군이 아닌 지원군이란 사실이다.그러나 IMF 개혁이 갑오개혁과 다르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지난날 못다가졌던 선견지명으로 우리가 자주적으로 창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IMF 조건의 원론은 최단시일내에 가시적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추락한 국가신인도를 조속히 회복하는 것이 국가존립의 필요조건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충분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IMF 프로그램의 각론을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게 도출할 수 있는 정부의 지혜와 협상 여백의 확보가 필요하다.피지원국의 풍토나 사정의 이해없이 일률적으로 처방된 IMF의 단칼 수술방식에 탄력성과 융통성을 제공해 지원효과를 극대화하는 작업은 세계 11대 경제대국인 한국의 조기회복을 염원하는 IMF목표와 우리의 목표와 정확히 합치하는 접점이기 때문이다.
  • 지난해 미와 관계개선 진전없어

    북한은 지난 1년 동안 미국과 여러 갈래의 회담과 접촉이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측에 전가했다. 북한은 6일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우리에 대한 미국의 불신임과 적대시 정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테러 포기 및 대남무력침략정책 변화 등을 그 예로 제시했다. 이 신문은 이들 문제와 관련,“우리는 테러와 아무런 인연도 없고 어떤 형태의 테러도 반대하여 왔으며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테러를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노동신문은 이어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백년숙적으로 보지 않으려하고 있다는 데 대해 천명했다”면서 미국에 대해 “진실로조·미 관계개선을 바란다면 우리에 대한 불신임과 적대시 정책을 버리고 신뢰조성을 위한 행동조치부터 취해야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 대제국과 기마민족(중앙아시아를 가다:11)

    ◎보편 가치에 동화된 유목민 팽창주의/흉노·투르크족 점령지 문화말살 한때 일뿐/불교·이슬람교·기독교문화권에 편입­소멸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한 기마술은 제국의 형성에 없어서는 안될 요인이었다.따라서 인류역사상 가장 방대한 대제국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 첫번째가 스키타이 세력이다.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은 아직도 베일에 싸인 구석이 많다.그들은 도전적인 기마 집단으로서 여러 지역을 국지적으로 점거하면서 황금문화를 전파했다.그래서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제로서의 제국이라고 부르기에 미흡한 점이 있다. 진정한 대제국은 흉노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그 흉노라는 민족은 서양에서는 훈(Hun)으로 기록된다.기원전인 BC 318년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5개국이 흉노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협정을 맺었다는 기록도 보인다.그리고 기원후인 AD 447년 유럽 훈제국의 아틸라 칸이 발칸반도에 제2차 원정을 시도한 일이 있다.그러자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그의 재상 아나톨리우스를 보내서 이른바 ‘아나톨리우스 협정’을 맺었다.이 협정에는 ‘투나강 남쪽 5일 거리에 비잔틴(동로마제국) 병력을 두지 말고,양국 무역시장은 훈의 변경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이 명시되었다. ○흉노의 강대제국 설명 또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금 6000지브레(악 2천700㎏),그리고 연공을 3배 인상하여 금 2천100리브레(약 945㎏)를 낸다’는 조항도 들어갔다.이 협정내용은 흉노가 얼마나 강대한 제국이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와 같은 종족의 뿌리를 두고 그 뒤를 이은 제국이 투르크 또는 돌궐이다.‘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하나의 깃발 아래 복속시키겠다’는 것이 투르크의 정복 의도였다.따라서 그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물밀듯이 제압하면서 공전의 대제국을 이루었다.그러나 그 통치영역이 워낙 방대하고 다양한 지정학적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분열되기도 하고 다양한 제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그 대표적인 제국이 세계 제1차 대전까지 지속된 오늘의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 터키제국이다.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족은 언제나 하늘님 텡그리를 신앙했다.그리하여 돌궐비문에 ‘나의 부친 카간과 모친인 하툰(카간의 비)은 하늘이 권좌에 앉혔다’.그리고 ‘하늘이 명하고,쿠트(하늘의 뜻)를 주었기 때문에 카간이 되었노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투르크의 생득적인 팽창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12세기 몽골 정복에 의하여 일대 도전을 받아자체 변용이 이루어진다. 몽골 제국역시 투르크의 기마제국이 지닌 전형적인 팽창주의 태도를 그대로 전수받았다.따라서 흉노,투르크,그리고 몽골 제국들은 한마디로 기마제국이다.항가리를 복속시키고 폴랜드를 함락시키던 몽골의 바투 칸의 다음 공격목표는 게르만이었다.이에 전 유럽이 풍전등화의 공포에 휘말렸다.그러나 1242년 초 몽골 황제 오고데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바투가 황제후계자 선출에 참여하기 위하여 몽골 수도 카라코룸에 가기 위해서 군대를 철수했다.이에 유럽은 뜻하지 않게 몽골의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누가 역사를 예측할 수있단 말인가. ○생존차원서 영토 확장 흉노,돌궐,그리고 몽골 곧 원나라는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기마 제국이었다.이들만큼 방대한 통치 영역을 가졌던 왕조나 국가는 아직 없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정복지역이나 로마제국은 비교가 될 수 없다.유목 기마민족은 방대한 초원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된다.유목에 필요한 초원은 자주 가물기 때문에,더 넓은 초원이 필요했다.따라서 넓은 땅과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적 충동다.정복이라는 공간적 팽창주의는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이념고,그 이념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이러한 팽창주의 꿈이 군사력으로 분출히여 공전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처럼 강대했던 제국을 탄생시켰던 이념과 세계관들은 미구에 사라졌다.오히려 피정복민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정복 유목민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그래서 정복유목민들이 역사에서 마치 사라진 것과 같이 보인다.예컨대 중국 중원에 들어온 서역인이었던 북위나 몽골 민족은 오래지 않아 중국의 길을 걸었으며,고창이나 구차국과 같은 위글 왕조는 조로아스터교나 불교에 개종했었다.그러나 대부분의 중앙아사아의투르크족은 후에 이슬람 국가가 되었으며,유럽에 정착한 훈과 쿠르크족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따라서 오늘날 흉노나 투르크족은 이슬람이나 기독교 문화권으로 편입되어 외견상으로는 민족이 사라진 것 같이 보일 수도 있다. 불교,기독교,그리고 이슬람과 같은 고전종교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그 안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이상사회를 이루는 방향을 제시했다.시대와 지역을 넘어선 보편적 이상과 꿈을 제시하는 것이다.이 보편적 이상과 세계관 앞에서 유목민족의 그 것은 너무나 소박하여 그 빛을 잃고 만다.투르크의 각 민족들은 보편적 세계관인 이슬람에 편입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팽창주의 이념 역사 파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 종교는 불교가 아닌가 한다.불교는 어떤 군사력이나 정체세력에 기대지 않고 비단길을 따라 전세계로 퍼졌다.그리하여 불교의 이상과 세계관을 당나라와 멀리 신라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다.그러나 불교가 지나가던 비단길의 길목을 장악하고 교역을 주관하던 서역인 자신들은 그들의 고대 문화를 잃고 말았다.고전적 가치관이 팽창주의에 비해 역사에 보다 더 큰 힘을 실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단길의 대 초원에 부는 모래 바람은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21세기에 온 인류가 당면할 ‘무한 경쟁’은 기마제국의 공간적 팽창주의 이념을 재현한 것인지 모른다.팽창주의 이념은 인류역사를 파괴했을 뿐이다.그것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가치관 속에서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 명동성당 100돌/임영숙 논설위원(외언내언)

    명동성당이 올해로 100돌을 맞는다. 지난 1898년 5월29일 축성돼 교회로서의 기능을 시작한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그 역사만으로도 가톨릭의 한국전래와 뿌리 내리기가 설명된다. 명동은 원래 한국천주교가 출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가톨릭 신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이벽은 다시 김범우에게 세례를 준다.지금의 명동인 명예방 장예원 앞에 살았던 김범우는 자기집에서 신앙집회를 열었고 이승훈을 비롯,이벽·정약전·정약용 등 초기 신자들이 이곳에 모였다. 몇달후 이 집회는 형조에 의해 해산되고 김범우는 단양으로 귀양갔다가 죽지만 한국 천주교는 박해를 이겨내고 굳건한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한국 천주교는 나중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아 종현이라 불리던 명동언덕에 1892년 교회를 세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신부(한국명 고의선)가 당시 대한제국에 고용되어있던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 건물은 총건평 1천498㎡(약360평)에 길이 69m,너비 28m,지붕높이 23m,종탑높이 45m의 라틴십자가형신고딕 양식. 6년만에 준공식을 갖고 처음엔 종현성당으로 불렸으나 해방후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적 258호로 지정됐다. 명동성당 100돌이 뜻깊은 것은 그러나 교회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성지일뿐만 아니라 한국민주화의 성지로서 우리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어 왔다. 1904년 가톨릭청년들은 이곳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의하는 모임을 가졌고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은 벨기에 국왕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이곳에서 이재명 의사의 칼침을 맞았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물론 최근까지도 명동성당은 공권력도 침범하기를 삼갔던 성역으로 학생시위의 종착점이자 농성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등 재야인사들이 지난 76년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3·1시국선언을 발표한 곳도 명동성당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빛과 소금 역할을해온 명동성당의 100돌을 마음 깊이 축하한다.
  • 중국에 귀 기울인다(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서구사회 팽배한 ‘중국 위협론’ 반박/자국의 가치·배경 바탕으로 국가건설 강조/미­일 신안보체제 국제평화 위협 강력 비판 【북경=이석우 특파원】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을 세계는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뜨거운 갈채와 환영인가,아니면 경계와 두려움으로 대하고 있는가.강택민 중국 국가 주석의 미국 공식방문,백악관에서 열린 클린턴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등에도 불구,중국의 빠른 성장에 대한 의구심과 걱정의 눈길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광동 인민출판사가 최근 펴낸 ‘중국에 귀기울인다’는 냉전종식 이후의 국제정세의 변화·발전에 대한 중국의 입장 및 시각,그리고 중국 위협론에 대한 중국의 반박과 변명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하덕공,포위충,김용 등 3인의 공동 저서다.하덕공씨는 관영 신화통신이 펴내는 시사 일간지 ‘참고소식’의 국제시사문제 편집담당자이고 포위충 박사는 중국공산당 중앙 직속 교육기관인 북경 청년정치학원의 교수.김용 박사는 ‘중국부녀보’의 기자며 홍콩문제 전문가다.저자들의 신분에서도 이책이 중국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 책을 통해 중국측의 논리와 주장,대외관계등 정책 방향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이 서양의 질서와는 다른 사회가치와 정신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국가건설은 ‘서구와는 다른 중국적인 가치와 배경’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인권문제,소수 민족지역에 대한 입장,홍콩문제 등과 관련,이 책은 단호하게 서구의 여러나라와 서구적 가치의 침투를 거부하고 있다.중국은 중국적 잣대로,중국공산당과 중국인들에 의해 통치하고 경영해 나갈 것임을 강조한다. 중국적인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방법과 관련,전통문화의 재해석을 통해 문화적 토대를 마련하고 민족주의 및 애국사상을 고취,국가 건설의 기본 정신으로 삼을 것을 제시한다.민족주의 및 애국사상에 대한 강화는 강택민 등 현 중국 지도부의 국가건설의 핵심 사업중 하나고 이 책은 그 의의를 재강조한 것이다.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21세기 중국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하는 끈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특히이 책은 ‘새로운 권위주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어 눈길이 간다.강택민을 정점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 국내외적인 도전을 극복하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물질·정신 건설을 완성하는 길이란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다.“개혁초기 중앙의 권력을 하부에 이행하는 것은 경제의 활력을 위해 필요하고 효과있는 조처였다.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국민총생산액에서 중앙정부가 차지하는 몫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고 반면 지방재정수입은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다.지역간 격차를 줄이는데 필요한 수단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중앙의 거시 조정·통제 능력도 떨어지고 있다. 안정은 일체의 것을 넘어서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중국적인 발전 방법 및 목표,그를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한에 대해 이 책은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이와함께 이 책은 일본의 우익화 경향 및 군사 대국화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미국과 일본의 신안보체제확립,이를 통한 일본의 유사시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활동 영역의 확대 등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진정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의 잠재적 위협은 일본의 우익화 경향과 미국·일본의 신안보체제라고 꼬집는다. 냉전이 끝난뒤 21세기를 바라보는 다극화 시대에 대해서 이 책은 ‘포탄과 연기는 없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며 서구세력의 ‘문화침투’ 정책 및 각종 압력 행사에 대해 경계와 함께 비판을 가하고 있다.“미국은 지난 96년9월 ‘자유아시아 방송’을 개국하고 뉴스매체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며 정치 및 사회 안정을 흔들어 대고 있다.이는 아시아 국가들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다”. 이 책은 중국의 성장을 위험스럽게 바라보는 서구 시각은 중국 문화와 현상을 잘못 이해하는데서도,또 서구의 패권주의적·냉전적 발상에서도 기인한다고 공격했다.특히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중국 위협론의 배경이론이 되고 있다면서 문명 충돌론의 오류를 지적했다.“문명 충돌이론의 개연성은 인정될수 있다. 그러나 헌팅턴씨는 일부 단면을 갖고 일반화하려는 오류를 범했다.금세기의 주요한 충돌은 문명간의 충돌이 아닌 같은 문명안에서의 갈등이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려는 국가 이익간의 부딪침이었다”. 저자들은 냉전종식 이후 국제무대에서 독주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미국의 독주가 국제갈등의 원인중 하나라고 공격한다.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 등은 미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미국의 패권주의는 쿠바 등에 제재를 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같은 문명권에서 프랑스 등과 갈등을 빚고 있다”.반면 중국은 현재 경제건설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고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국제환경을 중요시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중국은 등소평 시대에 ‘세계 혁명’전략을 버렸으며 세계를 적과 동지로 나누는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논조다. 또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3백여건의 법률을 제정했고 4천여건의 지방 법규를 만들었다.또 공무원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직접 선거의 확대 등 풀뿌리민주주의를확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중국도 국민 개개인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최대한 발현시키고 민주적이고 안정된 사회확립을 위해 노력해 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중국을 독재국가의 전형으로 생각하거나 침략적인 위험한 국가로 보는 것은 착오라고 이책은 재삼 강조한다. 원제 경청 중국:신랭전과 미래전략.광동 인민출판사.22위안. 하덕공·포취충·김용 공저
  • 깊어지는 미의 한국 불신/나윤도 워싱턴 특파원(오늘의 눈)

    한국의 금융위기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국에의 ‘불똥’에 신경을 써오던 미국의 언론들이 마침내 ‘한국의 붕괴’를 상정한 보도를 내놓아 가뜩이나 움츠러든 한국민들의 어깨를 더욱 움추러들게 하고 있다. IMF에 구제신청만 하면 즉시 금융위기 사태가 진정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현실에 불안해 하고 있는 한국민들에게 난데 없는 ‘붕괴’ 운운은 날벼락 같은 소리가 아닐수 없다. 11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서울이 실패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전개했다.미국이 한국의 위기를 돕기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망하게 손을 뗌으로써 다른 신흥공업국들에게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된 위기로부터 구해줄 국가나 기구는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IMF가 한국에 지원하기로 했던 5백70억달러의 돈은 한국의 붕괴로 심각한 영향을 받을 국가들에게 그 피해를 최소화 하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collapse’(붕괴),‘fail’(실패),‘fall’(추락),‘implosion’(내부파열) 등 용어도 다양하게 구사됐다. 그같은 주장의 근거로는 한국의 붕괴가 미국에 별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이 한국에서 받을 채권 1백6억달러는 전체대외채권의 2.6%밖에 안된다는 수치까지 제시했다. 이같이 미국의 여론이 ‘한국의 붕괴’에까지 다다르게 된것은 다분히 IMF 신청 이후 국내의 움직임과 관련이 크다.한마디로 한국에 대한 총체적 불신의 정도가 훨씬 깊어진 것을 의미한다. 협상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자국의 외채통계 하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무책임 했으며,정치권은 IMF와의 국가생존을 건 협상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들었고,언론을 비롯한 한국민들은 도와주려는 자신들을 마치 점령군이나 침략자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2∼3주동안 한국의 반응을 지켜본 미국 주류사회의 한국에 대한 여론을 우리가 좀더 냉철히 분석해 행동했다면 이같은 ‘붕괴’주장까지는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 강화도/양이 침략 몸던져 물리친 호국의 섬(테마 탐방)

    ◎고려말∼구한말 수난·항쟁의 역사로 점철/덕진진·초지진·광성호 등 국방유적 많아/고려건축미 간직하 전등사 등 들러볼만 ‘애국’이라는 말의 의미가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국제통화기금(IMF)으로 부터 달러를 차입할 정도로 나라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경제 우등국으로 불려온 우리로선 창피하기 그지 없다. 강화도는 문화유적지와 관광자원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특히 강화에는 역사의 생채기가 많다.고려말부터 구한말까지 수난으로 점철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수선한때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영욕의 현장을 둘러보는 것도 새삼스러운 감흥을 던져준다.특히 주말이 되면 정체를 빚던 강화도 가는 길은 최근 한결 넓어졌다.강화대교가 개통된데다 김포 누산리에서 강화대교까지의 48번 국도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이 덕분에 소요시간은 30분 가량 당겨졌다.겨울철로 접어들면서 낚시꾼들의 발길도 많이 끊겨 도로사정도 훨씬 원활해졌다.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역사관이 반긴다.학생들의 역사학습장으로많이 이용되는 이곳은 강화의 상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인근에는 갑곶돈대가 있다.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겨 몽고와 항전을 할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였다.구한말에는 프랑스군이 상륙했다 양헌수군대에 밀려 퇴각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와 같은 국방유적지는 강화 전역에 분포돼 있다.대표적인 것이 초지진,덕진진,광성보.특히 신미양요의 최후 격적지인 광성보에는 천혜의 요새인 용두돈대,미국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 장군 비각과 무명용사비가 남아있다. 이밖에 고려궁지 및 강화산성,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연무당터도 빼놓을수 없다. 강화도가 고려말과 구한말에 걸쳐 수난의 현장이 된 것은 수로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즉 한강,임진강,예성강이 강화 앞바다에서 서로 만나는데다 한강을 통하면 바로 서울까지 갈수 있다.또 강화 앞바다는 물살이 빨라 적군과 교전하기에 적격이었다. 사찰로는 전등사와 보문사가 있다. 강화도 남쪽 정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전등사에는 고려의 건축미를 간직한 대웅전,약사전을 비롯한 범종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전등사 경내 숲길은 운치가 있어 여기저기 거닐면 산책정도의 운동이 된다.삼산면 낙산 기슭에 있는 보문사는 한국 3대 기도사찰 중의 하나로 카페리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서해 낙조가 절경이다. 화도면 흥왕리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으로 전해진다.전국체전때 이곳에서 칠선녀에 의해 성화가 채화돼 대회장으로 봉송,점화된다. 이밖에 강화의 구경거리로는 서해를 넘으며 서쪽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강화도 전체가 여행길로 좋지만 특히 장곶돈대에서 동막리를 잇는 코스는 ‘강화도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갯벌이 넓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 동서문화 장벽 ‘천산’(중앙아시아를 가다:7)

    ◎당,751년 ‘천산전투’ 이슬람에 패배/중의 중앙아 포기,이슬람화 가속 천산을 넘었다.우루무치를 떠나 알마아타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설산은 장관이었다.사막을 풍요로 가꾸어주는 만년설을 인 설산 준봉들이 끝없이 늘어섰다.그 천산은 알마아타공항에 내렸을때도 마치 군림하는 자세로 여전히 우뚝했다.카자흐말로는 티엔산이다.옛 소련연방시절에도 그랬지만,자연풍광이 수려한 천산을 넘으면 늘 푸근한 감회가 안겨왔다. 그것은 천산너머 첫 도시 알마아타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들 카자흐인들은 우리민족과 아주 가까운 친연관계의 문화를 지녔다.그래서 문화에서는 친근감이 우러나고 사람들은 정겨웠다.처음 알마아타를 찾았을때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전화교환원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은 ‘차이나(중국)’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구르족도 불교서 개종 그들은 중국을 러시아말로 ‘기타이’라 했다.이말은 알고보면 우리말에 뿌리를 두었다.우리말의 거란을 중국식으로 발음한 ‘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인을 요나라 사람들인 거란족으로 알고 있었다.우리 역사속에서 비중있게 조우한 중국 동북지방의 그 거란족이다.중국인들이 회홀 또는 회골이라 부르던 위구르족들의 종교라는 뜻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 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밝혀 두었다.그러나 위구르족이 불교에서 실제 이슬람으로 완전 개종한 시기는 14세기의 일이다. 이들 두가지 사례는 참으로 놀라운데가 있다.중국은 한대이후 22세기 동안의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유목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그렇다면 중국은 기마민족의 주무대인 서역의 정보를 언어체계 안에제대로 반영했을 법도 하다.하지만 중국의 언어문화체계는 이러한 상식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기마민족들 역시 22세기동안 교역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역사의 실체에 무지했다.얼마나 몰랐으면 중국인을 거란족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화의 장벽은 천산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천산을 넘으면 중국은 없었다.751년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지아드 이븐 살리히 휘하의 이슬람군이 천산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맞붙었다.닷새간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당군이 패배했다.이는 중국세력이 천산너머의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부추겼다. 그렇듯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한획을 그었고 또 천산의 문화장벽을 한층더 높였다.중앙아시아에 가면 한문은 실제 신화에 나오는 문자에 불과했다.중국문화가 배어들어 온 흔적이 없는 것이다.다만 한무제가 서역정벌에서 남긴 차를 마시는 습관만이 있을뿐이다.그 천산너머의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발효한 검은차를 마셨다.검은차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몽골이나 알타이,또 중국과의 국경지대가 아니면 중국과 직접 교역하던 민족의 후예다.그들 문화가 얼핏 이슬람 일색인듯 하면서도 문화전통과 인종학적 혈통이 다른 까닭도 여기 있다. ○한문은 신화속의 문자로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는 참으로 혼돈스럽다.그 혼돈의 문제를 중앙아시아 종교사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았다.인종과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가장 두드러진 까닭은 기마민족 탄생에 있다.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기마민족은 기마술을 이용한 민족의 대이동을 재촉했다.기원전인 BC 13세기쯤 인도유럽족의 한 갈래인 힉소스족의 기마병이 이집트를 쳤을때 이집트인들은 기마병을 처음 목격했다.그래서 말을 괴물로 여겼다. ○기마술로 민족의 대이동 인도유럽족이 기마술을 선도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보다 앞서 BC15세기말에 말을 처음 보고 산에서 자란 큰 당나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떻든 BC2000년쯤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에 와서 아파나시에보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인도유럽족은 일찍 기마술을 터득했다.이는 정착농경이나 반농경생활로 삶을 꾸려오던 스텝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했다.농경 대신에 가축으로 부를 가늠하는 유목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활동무대도 차츰 넓어졌다.그리하여 그리스어로 스키타이,이란어로 사카라는 왕조들이 BC8세기부터 기원후인 AD4세기까지 스텝지방과 북인도를 지배했다.그무렵 동서인종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몽골지역에서는 BC4세기부터 흉노가 일어나 서쪽으로 나갔다.AD5세기 중엽에는 아틸라왕이 중부유럽 전역을 완전히 휩쓸어 동서로마제국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넣었다.흉노의 서진은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을 가져왔다.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이 등장하고,오스만터키는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흉노의 후예가 돌궐이다.이들은 여러 종족이 혼합한 정치세력이어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다.그러나 언어만큼은 동양어족의 말인 투르크어를 썼다.그러니까 인종으로 보아서는 복합적이었지만,문화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투르크족이 8세기쯤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얼핏 투르크민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특히 중국과 유럽 양쪽 눈에 비친 투르크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어로,때로는 인종적 혈연을 매개로민족의 정체성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그들 투루크족들에게는 아직도 같은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외래품 가게는 그래도 북적인다지(박갑천 칼럼)

    국난속에서도 제 살길과 제이끗만을 찾는 사람은 어느 시대고 있다. 고려가 원의 침공을 받았을때 홍복원과 그 아비 홍대선,그 아들 홍차구와 같은.그들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 고려를 괴롭히는게 아니던가. 에는 임진왜란때의 그런 옹춘마니 얘기를 써놓고 있다.첨지 성세영·전직장 성세강은 녹봉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있다가 왜군에 항복했다.더구나 성세령은 손녀를 왜장에게 바치면서까지 비나리친다.이를 개염낸 각관서의 아전따위도 항복하여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하며 도박판을 벌였다 한다.구한말 등 역사를 뒤지자면 그런 무리가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이런 옛일을 떠올린 것은 그같은 핏줄을 이은 것만 같은 오늘의 일부 ‘나몰라라’ 족속들의 작태를 보면서다.승천하려다 개천에 떨어진 이무기꼴로 국제통화기금이란데다 대고 “돈좀 빌려줍소사” 고개숙이는 나라형편 속에서도 고치지 못하는 외제병.4억원 가까운 롤스로이스차가 2대나 팔린 추세는 백화점의 외국물건 매장 등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지 않은가.허허.달러로 사들인 물건들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지.대양 한가운데서 암초에 부딪쳐 기울기 시작하는 배.이물쪽에선 물퍼내랴 못질하랴 정신없는 터에 고물쪽에서는 잔치판 벌이는 것과 뭐가 다른가.옛 사람들이 ‘성안의 적’이라 했던 것은 오늘의 그들을 이름이었구나. (법법편)에 불목지민이란 말이 보인다.기를 값어치가 없는 백성을 이르고 있다.그들은 군주의 명에 따르지 않을뿐만 아니라 마을풍속 또한 좇지않는 ‘법밖에 있는 인간’이다.“이런 인간은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의 생각.그런 자들이 있는한 나라의 주권은 올바로 설수없기 때문이다.‘신국채보상운동’이 일고있는 이 울분에 찬 비상시국에 외계인같이 구는 외제병 환자들이야 말로 오늘의 불목지민이 아닐수 없다.근자에 한번더 유행하게된 말을 그들에게 던져주자면―“같은 배 탄 우리가 남이가?”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자제하고 근검절약하면서 가지고있는 달러를 예금하는 등 은결든 마음들의 자구노력이 국내외적으로 번져난다.예나 이제나 망치는자 따로있고 일구는자 따로 있구나 싶어지는 마음.이 국제망신은 어디에 말미암은 것인고.우선 기우는 배부터 바로잡고서 차근차근 따져보아 두고두고의 교훈으로 삼아 나가야겠다.
  • 흑하시의 비극(흑룡강 7천리:12)

    ◎러 1643년 침략 주민 50명 살해/흑룡강변 60만㎢ 점령 ‘애훈조약’ 강제 체결/강건너 러시아 땅 ‘자유시’엔 독립군 참상이… 비극 흑룡강 한 구간을 흑하로 부른다.발원지에서 900㎞에 이르는 대하의 한 구간이다.‘상고교통개항’ 등 문헌기록에 나오는 ‘흑하’와 무관치 않는 이름이다.그러나 역사에 등장한 지명 ‘흑하’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바로 오늘날의 흑룡강성 흑하시가 근·현대사에 나오는 지명인 것이다. 옛날에는 막하에서 흑하로 가자면 배편을 이용했다.요즘에는 짐배만 다닐뿐 여객선은 없다.강을 따라 뺀 육로가 있기는 하다.그러나 비포장길인데다 막하와 탑하,탑하와 호마를 거쳐 또 버스를 갈아 타야하기 때문에 꺼리는 길이다.그래서 막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도중 눈강역에서 내려 다음날 새벽 흑하행 버스를 타는 여정을 택했다.막하∼하얼빈∼흑하를 잇는 철도여행 보다 230㎞를 줄인 것이나 흑하에 도착했을때는 한낮이 기울었다. 흑하시 일대는 참으로 넓다.눈강,손극,손오,덕도 등의 4개 현과 북안,오대련지 등 2개 시가 몰려있다.6만8천726㎢의 면적에 인구는 겨우 1백50만.이 일대의 땅 넓이는 남한 면적 4분의3이나 되지만 인구는 30분의1 정도니까 헐렁하게 사는 셈이다.망망한 수림에는 짐승이 뛰어놀고 일망무제한 들판에는 갈가마귀가 무리지어 울어댈 뿐 인적은 드물었다. 흑하시에 여장을 풀고 30㎞ 떨어진 애휘진를 먼저 찾았다.본래 이름은 애훈이었는데,1956년 국무원이 지명을 애휘로 바꾸었다.중학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애훈은 청나라 흑룡강성장군아문과 흑룡강 부도통아문의 소재지로 오늘의 흑하시는 여기서 출발했다.풍수설에 따르면 애훈은 열 명의 장군이 나올 땅이라는 것이다.그런데 탑을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나비 한마리가 날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그 나비 한마리 때문에 장군이 아홉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청조때 아홉 장군의 거주지였던 애훈성 유적은 오늘날 애휘진 외이도구툰에 있다. ○6만8천㎢에 인구 150만 애훈성은 붉은 벽돌을 쌓아 축조하고 푸른색 기와를 이어 망루를 지었다.성안으로 들어서면 나비가 날아오는 자리에 지었다는 탑이 첫 눈에 들어왔다. 1900년 제정 러시아군에 의해 불타버린 애훈성내 유일의 탑으로 ‘괴성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흑룡강성 전 성장 진뢰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쓴 현액이 걸려있다.한문으로 열가지 이상 표기되는 애훈은 다우르족말로 사납다는 뜻이다.당시 어마어마했던 흑룡강장군의 위세를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애훈성은 흑룡강성이라고도 했다.1683년 10월 흑룡강장군인 영고탑 부도통 사푸수가 1천500명 병졸을 거느리고 이성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사푸수까지 모두 아홉 장군이 살았다. ○러 체호프 석조상 눈길 ‘애훈현지’는 인구 4만이었던 이 성은 흑룡강연안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러시아와의 국경에 있는 청나라 성이라는 하지만 성안쪽 진열관 기념품상점 앞에서 만난 체호프의 석조조상은 이채로웠다.러시아의 대문호는 애훈에 들렀다가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애훈성 진열관 왼쪽에는 ‘애훈조약체결기념탑’이 있다.애훈조약이란 러시아가 총칼을 앞세워 흑룡강유역의 중국땅 60만㎢를 빼앗은 불평등조약이다.이굴욕적인 조약을 중국쪽에서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울리 만무다.그렇다고 러시아쪽에서도 침략역사를 부러 드러내보일리 없고 보면 기념비는 누가 세운 것일까.이 기념비가 선 곳은 흑룡강 부통아문 자리다.동시베리아 총독 부르디요프는 부통아문에서 청나라 흑룡강장군 혁산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이끌어냈다.물론 강압적인 조약이었다.그래서 1939년 일본은 중국을 힘없는 나라로 얕잡아 보려는 뜻에서 이 비석을 세웠다. 어떻든 러시아는 흑룡강 건너 자기들 땅 지명에다 중국침략의 기수들 이름을 모조리 붙여 놓았다.손극현 기극진 대안의 러시아 지명은 1643년 중국을 처음 침략한 포야코프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다우르족의 거점을 점령하고 50명 주민을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이다. 원동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하바로프스크도 마찬가지다.대지주 하바로프스크는 1649∼1651년 여러차례 흑룡강을 건너와 다우르족을 죽였다.그리고 포로로 잡은 여인들을 자신이 강간했다.1651년에는 애훈성 자리의 토얼쟈성을 함락하고 성주와 주민을 가리지 않고 죽였던 그의 동상이 지금도 하바로프스크역 광장에 버젓이 서있다. ○러군 성주 등 무참히 살해 그리고 흑하시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마주한 러시아의 블라고베시첸스크가 보인다.러시아말로 기쁨을 주는 성,다시 말하면 보희성이 블라고베셴스크다.그러나 기쁨은 커녕 다른 민족에게는 비극만을 안겨주었던 러시아의 침략기지가 분명했다.우리 민족 역시 잊어버리지 못할 이른바 ‘자유시사변’의 자유시가 바로 블라고베시첸스크다.1921년 일본군 토벌대에 쫓겨 흑룡강 건너로 집결한 우리 독립군이 러시아 홍군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자유시사변’이 아니던가.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홍군 제29연대 4개중대의 공격으로 독립군 272명이 죽고 31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행방불명 250명에 포로는 917명이나 되었다. 우리 일행이 흑하시에 갔을때 시내에서 4㎞ 떨어진 오도활용도에서는 촬영이 한창이었다.중국인 자신들의 흑룡강유역 역사 비극을 담은 3부작 54집의 TV대하드라마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우리 독립군이 재기불능으로 치명적 상처를 당한 ‘자유시 사변’을 제대로 아는 조선족들은 흔치 않다.강룡권·김택 공저의 ‘홍범도장군’(1991년·연변출판사)이 고작이어서 그럴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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