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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시론] 安重根 의사 의거 90주년

    이달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한지 꼭 90년이 되는 날이다.그의 의거는 당시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세계를긴장시켰다. 안 의사의 의거는 20세기 초,동아시아가 일제의 침략적 야욕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전개되었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하려던 야욕을 노골화하였다.1907년부터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만주 외몽고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는데,그 일괄타결을 위해 1909년 10월말하얼빈에서 이토와 러시아 재무상 코코후초프 사이에 회담이 계획돼 있었다. 이 회담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분할을 논의할 참이었다.또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그간 한일간에 맺은 제반협약을 확인시켜 기정사실화하려 했고,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외몽고에 대한 러시아의 복수이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이런 시점에서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는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다가 안 의사에게 포살된 것이다.안 의사는 곧 체포돼 적법하지 못한 재판에서 사형에 언도되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1910년 3월26일,거사한지 꼭 5개월만에 순국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의연한 자세로 의거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그러나 일제가 사형을 조기집행하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안 의사는 이 글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일제의 침략논리를 반박하였다. 올해로 안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대의를 결행한 지 꼭 90년이 되지만,의거지를 돌아보는 이들은 아직 그곳에 기념표지 하나 세우지 않은 후예들의무성의를 부끄러워 한다.일제하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를 되찾은지 50년이 넘었건만 남북의 정권들은 이제껏 그 역사적인 유적지에 한 점의 표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이 자기의 영토 안에 그런 기념물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변명되지 않는다.안의사의 의거가 한국인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중국의 반제운동사에도 큰 충격과 파장을 미쳤던 만큼 항일 반제의연대를 굳건히 한다는 점에서 중국정부를 설득,기념물을 건립했어야 했다.이런 점에서 북한이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을 때 왜 그런 기념물 하나를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 그 뿐인가.내년 3월 26일이면 안 의사가 순국한지 꼭 90년이 된다.그는 순국하기에 앞서 그의 두 동생에게 조국광복이 이루어질 때 유해를 고국으로옮기라는 유언을 남겼다.그런데도 아직 그의 무덤이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남북 당국은 중국의 비협조를 핑계대면서 자신들의 무성의를 합리화했고,상대방이 안 의사의 유해를 어떻게 하지 않나,서로 의심만 하면서 중국정부를상대로 남북한이 합의된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다.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작태다.국권이 회복됐으면 가장 먼저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의 유해를찾아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이거늘,남북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와 정통성 과시에 도움이 되는데만 선열의 유해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남북은 안 의사 의거지 기념사업과 그의 유해발굴을 위해서라도 함께의논하여 합의된 의견을 가지고 중국정부를 상대로 교섭해야 한다.이것은 중국이 안 의사의 의거지 기념사업과 유해발굴 문제를 두고 더이상 남북한의눈치를 보거나 저울질하는 자세를 갖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도 있다.남북한이 안 의사 문제를 두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면,중국과의 교섭통로를 단일화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이 일이 실마리가 되어 남북의 논의구조가 해외에있는 다른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와 선열들의 유해발굴 보존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면,아직도 조국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을 헤매는 선열의혼령들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안 의사는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인들도 숭모하고 있다.안 의사의거지에 기념물을 세우고 그의 유해를 찾아내는 데에 남북한 당국이 계속무성의하게 대처한다면,중국이나 일본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운동을 벌이는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이런 연대는 20세기 초반 동아시아에서 풍미했던 침략주의 강권주의가 더이상 기를 펴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안 의사가 주장했던 한중일 3국이 평등과 호혜를 기초로 한 진정한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李萬烈 숙명여대 교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金대통령-李光耀 前총리…다시 보는 ‘아시아적 가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리콴유(李光耀) 전싱가포르총리를 면담한다.김대통령과 리전총리의 만남은 각별한 관심을 끈다.지난 94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를 통해 벌였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 때문이다.김대통령은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과거 아시아에서도 서구와 같은민주이념이 존재했다”고 주장했고 이에앞서 리전총리는 ‘문화는 숙명이다’는 인터뷰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했다. 다음은 김대통령의 기고문과 리전총리의 대담 요지. ●문화는 숙명인가(김대통령) 리콴유 전총리는 미국인을 향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을 (아시아 등의)사회에 미국의 체제를 무분별하게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했다.이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지난 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는 퇴각의 일로를 걸었다.나는 이것이 독재에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믿는다.인터뷰에서 리콴유는 줄곧 문화적 요인을강조한다.그러나 문화만이 사회의 운명을 결정한다거나 불변하는 것이라고생각하지 않는다.인간의 역사에서 영원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보다 철저한분석을 해보면 아시아에 민주주의적인 철학과 전통이 풍부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아시아는 민주화에 있어서 상당히 발전했으며,서구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보다 거의 2,000년 앞서 중국의 철학자 맹자는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해 왕을 권좌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다.중국의 민본정치 철학에 의하면 ’민심은 천심이다’ ‘백성을 하늘로 여겨라’하고 가르치고 있다.한국의 토착사상인 동학은 그보다 더나아가 ‘인간이 곧 하늘이다’고 했으며,‘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분명히 아시아에는 서구사상만큼이나 심오한 민주주의 철학이 있다.나는 다음 세기 초에는 아시아 전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것으로 확신한다.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저항이다.아시아의 풍부한 민주주의적 경향의 철학과 전통은 전지구적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문화는 반드시 우리의 숙명일 수만은없다.민주주의가 우리의 숙명인 것이다. ●문화는 숙명이다(리전총리) 무분별하게 자신의 시스템을 다른 사회에 강요하지 말라고 미국에 충고하는것이 나의 임무다. 동아시아 사람으로서 미국을 보면,매력적인 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예컨대 사회적 지위와 종교,인종 따위를 떠난 미국식열린 관계를 나는 좋아한다.그러나 전제 시스템을 보면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총기,마약,폭력,부랑인,공공에서의 무례한 행위 등.시민사회의 붕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함부로 처신할 수 있는개인적인 권리가 확장되면서 질서정연한 사회를 대가로 지불했던 것이다.나는 아시아적 모델 그 자체는 없다고 본다.그러나 아시아적 사회는 서구적 사회와는 다르다.사회와 국가에 대한 서구적 개념과 동아시아적 개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족속에존재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집약하는 중국 격언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정부는 끊임없이 명멸하지만,아시아 문명의 기초적인 개념인 이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자립에서 출발한다. 서양은 정반대다. 우리는경제적 성장을 진작하기 위해 가족을 활용했다.문명이 붕괴하고 왕조가 침략자들에게 쓸려나간다 해도 가족·친족·족벌이라는 생명의 뗏목이 문명을 계승해 다음 단계로 전수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서구식 정부가 모든 상황에서 개인을 부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종말의 위기에서,지진이나 폭풍 같은 재해에서도 당신을 보살펴 줄 것은 바로 당신의 인간관계인 것이다. 양승현기자 yangbak@
  • [21세기 여성시대](4)군인

    지난 97년 개봉됐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지 아이 제인(G.I.Jane)’은 오락물에 불과하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금녀(禁女)지대인 해군특수부대(SEAL)조차 이제는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왔음을 보여줬다.1차대전때 여성 군입대가 공식화되고 2차대전때 병과(兵科)확대가 이뤄진 이후 불과 50여년만에 여성의 군(軍)진출은 비약적인 속도로 이뤄져왔다.여성은 사병에서부터 장관까지,단순 사무직에서 전투기조종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병과에 진출,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이같은 개방화 속도로 미뤄볼때 21세기여군의 역할증대는 거역할수 없는 추세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사상 첫 여성 학과장직을 맡았던 실라 위드넬 박사는미 역사상 최초의 공군장관을 역임한 인물.그녀는 93년 30년간 몸담았던 강단을 떠나 현역군인만 38만명인 공군을 거느리고 군현대화,조달부문 개혁 등탁월한 업적을 쌓았다.97년 퇴임,강단으로 돌아간후 지금까지도 이름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예비역 해군소장인 로버트 해자드는 미군내 최고위 계급 여성으로 알려져있다.작전,훈련,인사 등 다양한 경험이 그녀를 해군 인사참모부장까지 이끌어갔다.이들은 현재 미군내 여성의 지위와 여군의 미래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역사상 여성의 군대 진출은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도 기원전 1300년전 중국상왕조 우딩(武丁)의 푸하오 왕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그러나 정식 여군으로 복무하게 된것은 1차대전때부터.그 전까지 여성은 남자로 변장한 다음에야 군인이 될 수가 있었다.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오를레앙의 처녀영웅 잔 다르크도 ‘남자’로서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지 여군은 아니었다. 여성이 정식으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대전때.물론 간호와 사무에 한정됐으나 대우는 ‘최고’였다.1차대전말 미 여군 간호장병만 총3만4,000명에 달했다.여군 병과확대가 이뤄진 것은 2차대전때로 수송,기계수리,항공,첩보 등에까지 진출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50만여명의 여성이 암호해독과 레이더기지 운용 등 지원업무는 물론 적지에 투입돼 정보수집과 후방교란업무를 수행하는 특수작전도벌였다.인도계 영국인 베굼 누르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낙하된 최초의 여성스파이였다.암호명 ‘메덜린’으로 암약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1년여동안 정보를 보내다 독일군에 발각돼 44년 처형됐다. 유태계 폴란드인인 한나 세네쉬 역시 유고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23살의 나이에 총살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러시아 여군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80만명의 여군중 70%가 전방에서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다.티토의 빨치산 투쟁에는 200만명의 여성이 가담했다가28만2,000명이 처형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여성은 독립투쟁의 선봉장이었다.나이지리아에서1929년 일어난 ‘아바봉기’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기를 든 ‘여성의 전쟁’으로 유명하다.국민당과 싸웠던 중국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에는 35명의 여성당원이 끝까지 길을 같이 했다. 현재 미군내 여군은 육군과 해병대만 각각 3만2,000명과 4만8,000명.공군장교의 15%,사병의 10%가 여성이다.아파치 공격헬리콥터를 몰며 탱크를 호위하는 여군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사막의 폭풍’작전때만 4만1,000명 여군이 참전했다. 박희준기자 pnb@ * 韓·日 여성지도자 세미나 개최 여성의 힘을 빌어 ‘21세기 한-일관계’를 새롭게 모색해보려는 대규모 한일(韓日) 교류행사가 열린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회장 이춘호)은 창립 30돌을 맞아 일본 여성 지도자 500여명을 초청,오는 24일∼26일까지 서울 힐튼 호텔에서 양국 여성지도자 세미나를 가진다. 세미나 주제는 ‘21세기 여성의 정치적 역할’.한일 여성국회의원을 비롯해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의 배우자,학계 및 여성단체 대표,여성 경제인,여성 언론인 등 한일 여성지도자 1,000여명이 참석하는 이번 세미나는 여성계최초의 대규모 한일 양국교류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번 세미나는 일본 자민당의 모리야마 마유미 의원을 비롯,양국 모두 초당적인 입장에서 여성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해 양국 여성정치발전에 관해 진지한토론을 열 예정이다. 구체적인 논의과제는 제1주제인 ‘새천년을 향한 여성의 정치세력화’와제2주제인 ‘21세기 여성의 가치변화를 주도할 주요 요인’.이중 제1주제에대해선 ▲21세기 정치세력으로서의 여성의원의 비전(김정숙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정치인 배우자는 정치자원이 될 수 있는가(김정옥 이해찬 국회의원 배우자)▲여성지방의원과 생활정치의 이상(안상현 강원도 의원) 등의소주제로,제2주제와 관련해서는 ▲멀티미디어를 통한 여성의 가치변화(신낙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한일대중문화와 여성(하윤금 방송진흥원 연구원)▲사이버시대의 여성경제활동에 대한 전망(최영희 내일신문 발행인)▲여성의 정보화와 정치세력화(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등의 소주제가 토론된다.일본측에서도 각 1인이 발표자로 나선다. 특별행사로는 참가비(각 10만원)로 마련한 장애인 전용버스 증서(1억2,000만원)를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 전달하는 뜻깊은 행사와 함께 이번 세미나를위해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야시로 에이타(八代 英太) 일본 우정장관 등에 대한 공로패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다. 연맹의 이춘호 회장은 “한일 여성지도자들의 잦은교류를 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국 여성이 진정한 동반자로서 여성문제 뿐 아니라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2000년에는 일본 삿뽀르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한일 양국 여성지도자 교류세미나를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경옥기자 ok@ * 한국 女軍의 어제와 오늘 한국 여군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50년 9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 491명으로 창설됐다.당시 여자 의용군은 정보수집,수색활동을 비롯,군가보급,간호활동을 벌였다.의용군은 곧 해체되고 51년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설치돼 여군에 대한 인사행정업무를 처음으로 다루게 된다. 여군의 독자적 훈련기관인 여군 훈련소가 서울 서빙고에 창설된 것은 55년. 이후 여군은 여군처로 개편(59년)되고 70년대 들어 여군훈련소와 여군대대를예속부대로 한 여군단으로 확대되는등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기갑,포병을뺀 모든 병과에서 남자에 못지 않은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여군은 간호장교 800명을 포함,2,000명 가량.창설이후 2만명의 여군이배출됐다.엄옥순(嚴玉順·43)여군학교장과 민경자(閔慶子·47) 육군본부 여군담당관이 현역중 최고직위인 대령으로 재직하고 있다.예비역으로는 13대여군 병과장을 지낸 정영숙(鄭瑛淑) 여성단체협의회 수석부회장과 김화숙(金和淑)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이 사회에서 활동중이다. 여군의 최대숙원은 장군 배출.엄옥순·민경자 대령이 입대 26년이 되는 2001년 육사 31기와 함께 장군진급심사 대상에 들어간다.보수적인 군문에서 최초의 여성 장군이 탄생될지 관심을 끈다. 황성기기자 marry01@ *역대 최고의 女戰士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여전사(女戰士)는 누구인가.미국의 인터넷 정보제공 업체인 ‘네트 사라소타’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중국의 화무란(花木蘭),미국의 몰리 피처,베트남의 트룽 자매를 꼽았다. 잔 다르크는 15세기 백년전쟁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에 놓인 나라를구해낸 프랑스의 여걸.소작농의 딸로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영국의 침략야욕을 분쇄했다. 1429년 영국군에 의해 포위된오를레앙에 군대를 이끌고지원을 나간 잔 다르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서서 병사들을 독려,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다.1920년 5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됐다. 화무란은 5세기 중국 북위(北魏)시대때 흉노족의 침입으로 강제 징집령을받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미국의월트디즈니사가 화무란을 ‘뮬란’이라는 제목의 만화영화로 제작,98년 전세계에 개봉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특히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그해 중국 방문전 이 영화를 보고 동양적 충효사상에 감명을 받아 중국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미 독립전쟁 때 맹활약한 몰리 피처는 본명 메리 매컬리보다 별명 ‘몰리피처(물주전자 몰리)’로 더욱 유명하다.남편 헤이스와 함께 뉴저지의 몬머스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쉴틈없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부상병과 갈증에허덕이던 병사들의 목을 축여줘 이 별명을 얻었다.포병인 남편이 쓰러지자자신이 직접 포수가 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베트남의 트룽 자매도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여전사들.트룽 트락과 트룽니 자매는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의 공주들이다. 중국군이 트락을 성폭행하고 남편을 살해하자 8만명의 반군을 조직,거대 중국에 대항했다.뛰어난 게릴라 전으로 당시 중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은 것은 물론 세력권을 중국 남부까지 확대했다. 김규환기자 khkim@
  • [사설] 주목되는 日고법 판결

    일본의 전후 보상과 관련하여 최근 오사카(大阪)고등법원이 내린 판결은 일본정부의 보상방침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위헌의 소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2차대전때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들의 보상청구소송에 대해재일한국인들이 처한 딱한 사정을 깊이 동정한다며 법적 구제의 필요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은 그동안 여러차례 있었다.그러나 위헌소지를 지적하며 관련조항의 개폐 등을 제시한 상급법원의 첫 요구에 대한 일본정부와 의회의후속조치가 주목된다. 일본 오사카고등재판소는 지난 15일 2차대전때 일본군의 군무원으로 강제징용돼 중상을 입은 재일한국인 강부중(姜富中·79)씨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장애연금지급청구 각하처분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재일한국인에게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호법에 따른 장애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법앞에 평등을 정한 헌법과 국제인권규약에 위반된다는 의심이 있다’고 판결했다.재판부가 연금지급 등 원호의 내용은 입법정책에 속하는 문제라는 이유로 강씨의 청구를 기각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국회가 관련조항의 개폐 등 신속한 시정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국가배상법상의 위법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보상문제를 적당히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일본정부에 따끔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2차대전중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돼 전쟁터로 끌러간 한국인은 20여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이중 3,000여명이 현재 일본에 생존해 있지만 죽을 때까지 연금을 타고 있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푼도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연금법 및 원호법의 지급대상이 일본인으로 국한돼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보상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는 일본정부는 최근들어 재일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연금대신 일시금을 지급하는 특별보상법의 제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21세기를 맞아 한·일 양국은 새로운 동반·협력관계를 다짐하고 있다.이는 일제 강점과 침략전쟁으로 이웃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주었던 20세기의 불행한 과거사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을전제로 하는 것이다.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솔직한 사죄와 함께 충분한 전후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강제징용된 재일한국인 뿐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문제도 마찬가지다.정부 차원의 보상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책임지고 과거사를 깨끗이 마무리하는 것이 마땅하다.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하는 길이고 일본의 국제적인 위상과 역할에도 걸맞은 일이라고 본다.오사카고등법원의 판결을 계기로 일본 정부와 의회의 대승적인 후속조치가 신속히뒤따르기를 기대한다.
  • [발언대] ‘노근리학살’ 철저 규명

    1950년 7월 충북 영동에서 황간방향으로 피난중이던 우리 동포들이 노근리다리에서 미군에 의해 사살당한 사건이 미 언론에 의해 확인됐다.미 지상군이 31년전 월남 밀라이에서 500명이상의 양민을 희생한 다음으로 큰 규모의학살이라 한다. 사건피해자와 유가족들은 60년 10월과 12월,94년 7월과 10월,네차례에 걸쳐 미 정부측에 손해배상요구를 했지만 미국은 묵무부답이고 우리 정부를 상대로한 손해배상신청은 기각됐다한다.오히려 우리 정부의 조치에 대해 분개를 금할 수 없다. 미국이 6·25이후 실종된 미군의 유해를 찾기위해 아직까지 수많은 채널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취하는 조치를보면 미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은 이유를 간단히 알 수 있다. 50년전에 발생한 사건이어서 손해배상청구권이나 형사시효가 만료되기는했겠지만 국제협약상 전쟁범죄의 경우 시효를 정지시키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피해 당사자들이 미국이나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라 한다.클린턴 대통령이행정부차원의 조사를 지시했다는 소식에 접하며 이제사 우리 국방부에서 진상조사에 나서는 모습을 보는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사회적이란 말의 의미가 유형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중 가장 엄숙하고도 고귀한 형태가 국가이다.그 안에서 각 개인은 운명을 같이하고 또한 그것은 ‘소속감’과함께 든든한 ‘울타리’의 역할을 제공해준다.그래서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때는 피를 흘리며 그 울타리를지켜낸다.그러나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가 있어야 국민은 애국심으로 뭉칠 수있다. 진준근[부산시 남구 우암1동]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美증시 재채기에 국내시장 감기 몸살

    현명한 투자자라면 이제 국내보다 해외시장에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것같다. 추석연휴 기간 중 떨어졌던 미국 다우지수 등의 하락세가 27일 국내증시에한꺼번에 반영됐다.반도체 값 급등 등 호재가 있었지만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정부의 채권시장 안정조치가 증시에 미친 영향은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베테랑 투자자들은 벌써부터 정부가 더욱 확실한대책을 내놓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귀엣말을 주고받고 있다. 외국인투자자들이 전기요금 인상을 철회할 것으로 알려진 한국전력을 중심으로 대거 ‘팔자’에 나섰다.삼성전자는 이미 일개 반도체주식이 아니라 국내증시의 지표종목이 됐음을 삼성전자 주가가 떨어진 데서 감지할 수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 ‘美의 남침유도說’에 이의 제기…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 연구자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의 ‘한국전쟁’(원제 조선전쟁)이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창작과비평사가 펴낸 이 책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미국 중국 소련 일본 등각국 사정을 다루면서 전쟁발발과 진행,휴전,영향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저자는 ‘동북아 전쟁’의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다뤘다고 말한다. 이 책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한단계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쓰여,96년 출간된 박명림씨의‘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과 함께 한국전쟁을 분석한 주요 저작으로 꼽힌다. 와다 교수는 한국전쟁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선제공격을 해발발한 ‘내전’이었으나 ‘중·미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판단한다.이는 한국전쟁은 ‘북한의 침략전쟁’이며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박씨의 관점과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그는 특히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이 개시된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국이 사전에 북한의 계획을 알면서 이를유인했다는 커밍스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오히려 북한을 소련의 괴뢰로 간주한 미국이 소련의전쟁결단 조짐을 간과한데 문제가 있었다고 봤다. 와다 교수는 특히 이승만 전대통령의 역할에 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북진통일 의도는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던 이승만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유엔군 참전 이후 한미연합군으로 하여금 38선을 넘어 북진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북한이 모두 한차례씩 무력통일을 시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현재의 (남북한간)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북한과미국, 북한과 일본의 국교수립이 앞서야 한다”면서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제안한 ‘햇볕정책’의 한 축”이라고 말했다.1만6,000원. 정기홍기자
  • [김삼웅 칼럼] 동티모르파병 무엇이 문제인가

    국군 보병부대가 베트남에 이어 두번째로 해외파병길에 오를 것 같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는 지난 16일 420명 규모의 보병부대를 동티모르에 다국적 유엔평화군으로 파견키로 결의했다. 파병문제는 오늘(21일)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동의를 거치는 최종 절차가 남았지만 여론의 흐름은 파병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해외파병은 국가적으로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명분과 실리, 국제 역학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최종결정해야 한다. 파병문제는 찬반에서 당위론과 불가론, 그리고 조건부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기 때문에 충분한 토론을 거쳐 빠른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파병규모를 특전사 250여명을 주력군으로 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의무·공병·수송·통신 등 170여명 등 모두 420여명으로 확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파병에 따른 문제점과 주변환경을 점검해 보자. [평화애호민족의 전통] 우리는 조선(朝鮮)이란 오랜 국호(고조선·기자조선·근세조선)가 의미하듯이‘조용한 평화의 나라’로 상징된다. 중국‘산해경(山海經)’에도 ‘호양부쟁(好讓不爭)’이라 하여 서로 사양하며 싸우지 않는 평화민족임을 평가했다. 평화애호의 민족답게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 그대신 한(漢)나라의 고조선 침략 이래 무수한 외세의 침략을 당했다. 그때문에 평화의 소중함과 약소민족의 설움을 잘 안다. [식민지시대 국제사회의 외면] 일제식민지 시대 외국의 도움이 절실할 때 중국정부 외에는 모두 외면했다. 동티모르가 인구 3분의1을 희생하면서 독립투쟁을 벌이는 데 망국시절 우리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도와줘야 한다. [유엔을 모태로 태어난 한국] 대한민국은 유엔을 모태로 하여 건국한 신생국가다.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동티모르에는 23개국 8,000여명의 다국적 유엔 평화군이 파병된다. 유엔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여기서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6·25전쟁당시 유엔군참전] 6·25전쟁을 치를때 우리와는 생소한 16개국이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하여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구하고 전화 복구를 도와주었다.유엔군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개인이나 국가나 어려울때 돕는 것이 참된 우정이요 문명국의 의무다. [인권문제는 인류보편가치] 동티모르 주민은 주민투표에서 78.5%의 압도적다수로 독립을 원했다. 수백년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주민들의 독립의지를짓밟는 식민지배 동조세력의 반인륜적, 반인권적 학살극을 방관할 수는 없다. 우리가 70∼80년대 인류의 보편가치인 인권과 민주주의 투쟁을 벌일때 국제사회의 지원과 성원은 큰 힘이 되고 용기를 주었다. [베트남 참전의 득실] 우리는 8년5개월 동안 국군 32만명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월맹군 4만1,000여명을 사살하고 5,000여명의 아까운 아군희생자를 냈다. 베트남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가 아닌,미국측이 파병 대가로 전력증강과 차관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용병’이란 비판도 따랐지만 약 10억달러의 외화를 획득하여 연평균 12%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자원부국으로 인구 2억이 넘는 인도네시아에는 이미100억달러 상당이 투자되고 교민·근로자 등 2만여명이 거주한다. 민족주의세력이 군부를 앞세워 외국군대 주둔에 저항하거나 현지 민병대와 충돌할 경우 두나라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없지 않다. 우리 군은 민병대와 현지주민사이에서 평화와 안전의 중재자 역할만 해야 한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교민과 상사 주재원들의 안전문제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비상사태시의 보험] 우리는 세계유일의 냉전지대라는 화약고를 안고 산다. 여러가지 안전장치를 마련중이지만 언제 열전화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비하는 일종의 ‘보험’으로 국제사회에서 필요한 책임을마다해서는 안된다. [파병부대의 성격] 자위권 행사와 평화유지기능 행사를 위해서는 경무장보병요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호전적’이란 인식을 불식시키려면 특전사보다 다른 정예부대를 선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파견부대원 선발은 지원자를원칙으로 하고 사회지도층 자제들의 참여가 많았으면 한다. 김삼웅
  • [외언내언] 한국철도 100년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1899년 9월18일 경인선 노량진∼제물포 구간이 개통된 후 꼭 100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한국의 철도 개통은 영국 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울린 지 74년,동양에서는 인도 철도가 1853년 처음 부설된 지 46년 만의 일이었다.당시 독립신문은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이 문명의 이기에 경탄을 보내고있다.이 기차의 평균시속은 20㎞ 정도였다.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구한말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었다.그는 귀국하면서 철도모형을 가져왔다.그러나 민족자본에 의한 철도건설은 자금난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고 미국인 J R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이 주어졌다.모스는 다시 대륙진출 야망을 품은 일본에 철도 부설권을넘겼고 결국 일본인에 의해 우리 철도가 개통되는 기구한 운명으로 한국 철도사는 시작된다. 경인선에 이어 1905년 경부선,1906년 경의선,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1931년 장항선,1942년 중앙선이 잇달아 개통됐으며 일제는 조선 식민지 착취와침략을 위한 군사물자 수송 수단으로 철도를 이용했다.해방후 한때 철도는국가 기간수송망으로서 화물수송 분담률 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침체의 길을 걷는다.낙후된 서비스도 철도 만성적자의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철도의 대량수송기능과 안정성,정시성 등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한국 철도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다.눈꽃 순환열차,정동진 해돋이 열차 등 철도와 낭만을 결합시킨 테마관광열차 상품을 개발한 철도청의 새로운 시도 역시 큰 호응을 얻고 있다.세계적으로도 비행기와 경쟁하는 고속철 시대가 열리고 환경친화적 교통수단으로 철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 33.2㎞에 불과했던 총 철도길이는 현재 6,570.2㎞로 거의 200배로 늘었다.앞으로 남은 과제는 2001년 민영화,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통일에 대비한 남북철도망 구축이다.우리 철도가 허리가 동강난 국토의한쪽 절반을 벗어나 단절된 경의선(서울∼신의주),경원선(서울∼원산),금강산선(철원∼내금강)을 잇고 더 나아가 중국 횡단철도 및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돼 대륙을 힘차게 달리는 날이 언제쯤 오게 될지 궁금하다.지난 97년 아셈회의에서 아시아 철도망 구축이 합의된 만큼 아시아 철도와 유럽 철도가 이어지는 날도 멀지 않다.‘코레일패스’(Korail-Pass) 한장으로 ‘신(新)실크로드’를 달려 유럽까지 여행하는 날을 꿈꾸며 한국 철도의 새로운 100년을 기대해 본다. 임영숙 논설위원
  • [義烈 독립투쟁] (6)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30분쯤 상하이(上海) 홍구(虹口)공원(현 노신공원)에서는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의 승전기념식을 겸해 일본국왕의 생일잔치,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이날 한국의 의혈청년 윤봉길(尹奉吉)이 그 단상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침공의 우두머리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원흉들을 쓰러뜨렸다. 당시 현장에서 러시아 여행객이 찍은 비디오를 보면,사열대와 함께 엎어지고 쓰러지는 원흉들의 모습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와 세계 제국주의가 함께무너지는 장쾌함을 보였다.윤의사가 세계로부터 정의의 삶을 대변한 ‘의사'로 불리고 있는 것는 바로 이 때문이다.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상하이를 주목했는데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일수록 제국주의를 맹타한 윤의사를 높이치켜세웠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들먹였다.국내외 동포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특히 ‘상하이의거’를 주도한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그리고 한인애국단 단장 백범 김구(金九)를 주목하기 시작했다.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그러한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왜냐하면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파리강화회의의 안정기조라고 하는 신제국주의적 질서에 온 세계가 눌려 독립운동도 외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질서를 깨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때마침 뉴욕 월가(街)의 증권파동을 계기로 경제공황이 몰아쳐 왔고,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하더니 다시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의 한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것을 파리강화체제를 무너뜨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만들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세웠다.이봉창(李奉昌)의사로 하여금 일제의 심장인 도쿄 궁성을,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의사로 하여금 만주침략의 아성인 관동군사령부를 공격토록 한데 이어 윤의사로 하여금 상하이 침공의 선봉을 꺾어놓는다는 소위 ‘삼면작전’을 세웠다.이같은 작전을 구상한 사람은 백범이었는데윤의사의 ‘상하이 의거’ 성공으로 전세계를 진동시켰다. 윤의사는 원래 농민운동을 통해 고향의 부흥을 꾀하던 진보적 계몽주의자였다.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야학당과 청년회·체육회·부흥원을 조직하였으며 ‘농민독본’도 저술했다.그러나 경제공황까지 덮친 식민지 하에서 농민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윤의사는 마침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는 뜻을 세워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중국 대륙으로 향했다.그것이 1930년 윤의사가 23세 때의 일이다. 처음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윤의사는 이듬해5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상하이사변이 일어나 일본군과중국군이 싸우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어머님께 보낸 편지에서 “민족과 민족이 부닥치는 소리가 꽝꽝합니다”라고 표현했다. 그 꽝꽝하는,민족과민족이 부닥치는 소리를 들으며 윤의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꿈을 키웠다. 청년 윤봉길은 백범 김구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자신의 생명을불태워 정의를 현양하는 꿈을 실현코자 했다. 윤의사는 ‘성인군자는 살아서영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는‘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1932년 4월29일 아침 윤의사는 일본식 도시락과 물통,일본 국기를 들고 홍구공원을 향해 떠났다.도시락과 물통이 바로 폭탄이었다.이 폭탄은 당시 중국군 장교로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명 王雄·전광복회장)이 만든 것이었다. 의거 당일 아침 윤의사는 백범과 살아서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했다.그리고 윤의사는 자신의 시계와 백범의 시계를 바꾸어 찼다.자신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백범의 것은 2원짜리였다.“선생님,나는 한시간밖에는 시계가 필요치 않습니다”라며.죽음을 앞에 둔 청년이 보여준 태연한 여유를 보면서 백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렇게 떠나간 윤의사에게 시계는 아니나 다를까한 시간밖에 필요치 않았다.11시반쯤 홍구공원의 폭음과 함께 그 시계도 멈추고 말았다. 윤의사의 의거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이 생기를 찾고 활기를 띠게됐다.또 국내외 동포가 다시 임시정부로 마음을 모으게 됐고 국제적으로도 한국독립을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중일전쟁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중국대륙 곳곳으로 이동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나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8·15광복때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의사의 의거로 국내외 동포들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고 중국정부를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의사는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19일 가네자와(金澤)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일제는 윤의사의 시신을 길거리에 묻어 행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는데 이같은 야만성은 일본제국주의밖에는 없다.해방후 윤의사의 유해는 백범의 지시로 이봉창·백정기(白貞基)의사등과 함께 봉환,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尹의사의 사회개혁 활동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초창기 야학·문맹퇴치운동 등에 헌신한 개혁주의 성향의 농촌운동가였다.윤의사가 20세 되던 해인 1927년에 출간한 ‘농민독본(農民讀本)’은 윤의사의 계몽사상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권은 유실되고 현재 제2·3권만 전해오고 있다. 제2권은 ‘계몽편’으로 편지 쓰는 법,인사법 등 생활교양과 조선지도,백두산 등에 대한 소개 등 일반상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현재 8과까지만 보존돼있다. ‘농민의 앞길’이란 제목의 제3권은 농촌개혁 방향과 농민의 당면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앞부분에는 ‘소리의 갈래’등 한글맞춤법도 소개돼 있다. 총 25과로 구성된 제3권은 현재 7과까지만 보존돼 있다. 제2권이 기초학습자료라면 제3권은 일종의 사상독본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윤의사로부터 야학지도를 받은 예산군 덕산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농민독본’을 암송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은 윤의사 평전에서 “매헌은 한낱 시골의 야학당교사가 아니라 이미 이 무렵부터 사회개혁과 이상국가 건설을 꿈꾼 선각자적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정운현기자 jwh59@kdaily·com *윤봉길의사 직계후손들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윤의사 의거 당시 장남 종(淙)씨는 세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둘째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하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67·서울 동작구 상도동 거주)씨.김씨는 딸 여섯에 끝으로 아들 하나를 두어 겨우 윤의사의 대를 이었다.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29)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현재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 재직중인데 97년에 결혼,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정운현기자]
  • [외언내언] 酒稅率 조정

    정부와 여당이 소주세율을 현행 35%에서 80%로 인상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내년부터 소주값이 크게 오를 전망이다.많은 국민들이 마시는 소주는 고려후기 몽고에서 전래된 것으로 전해진다.페르시아를 정복한 칭기즈칸의 몽고군이알코올 증류법을 배워와 술을 만들어 마시다 고려를 침략할 때(1274년)가져온 것이다.몽고군이 주둔했던 제주도에서는 소주를 노주(露酒·밑술을 고아서 이슬같이 받아낸 술이란 뜻)라고 불렀다.아랍어로는 알코올을 아라그(Arag)라고 발음하고 해방 전까지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려 때는 사찰이 여행자의 숙박지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술을 판매하는풍습이 있어 사찰을 중심으로 다양한 술들이 개발되면서 술로 인한 폐해가심하자 고려 현종(1140년) 때는 사찰에서 술을 빚고 마시는 것을 금지한 일도 있다. 이번에 소주값 인상원인이 된 위스키(양주)는 19세기 조선조 말에 외국과교역이 이뤄지면서 도입되었다.위스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지금 소주와 양주를 놓고 통상분쟁이 일어나주세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유럽연합(EU)과 미국이 지난 97년 한국이 소주 세율 35%,위스키 세율은 100%로 차등 적용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국이 패소함으로써 세율을 동일하게 조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이에 따라 정부와 여당은 소주와 위스키 세율을 똑같이 80%로 결정한 것이다. 그동안 주세조정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이유가 나왔다.정부는 ‘고도주 고세율’원칙에 따라 소주세율을 올려야 한다고 밝혔다.조세연구원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심으로써 야기되는 각종 사회적 비용을 감안해서 도수가높은 술에 대해서 높은 세율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했다.정부가 ‘고도주 고세율’원칙을 지키려면 소주 세율을 올리면서 저도주인 맥주 세율을 소주 세율보다 낮게 책정했어야 사리에 맞다.그런데 맥주 세율은 현행 130%에서 내년부터 10% 포인트씩 내려 2002년 100%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2002년에 가서도 맥주 세율이 소주 세율보다 높다는 것은 ‘고도주 고세율’원칙에 맞지않는다. 또 술로 인한 폐해를 감안해서 소주 세율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설득력이 약하다.정부는 WTO 판정에 따라 소주 세율과 위스키 세율을 같게해야하기 때문에 세율인상이 불가피하고 이로 인해 소주값이 오르게 됐다며국민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궁색하지 않은 설득방법이 아닐까. 최택만 논설위원
  • [대한시론] 日국왕 訪韓前 풀어야 할 일

    지난 9월 2일 김종필 총리는 한·일 총리회담에서 아키히토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면서,“2002년 월드컵 이전에 방한이 이뤄지면 한·일관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내년이나 2001년의 방한을 거듭 요청했다.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한 한국정부의 자세가 국민의 미묘한 대일 정서까지 고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먼 시각에서 볼 때 일말의 전진적인 점을 엿볼 수있다. 그러나 김 총리가 지난번 방일에 이어 이번에도 공식석상에서 일본어 실력을 과시한 것이라든가 국민의 대일 정서에 앞질러 ‘일본국왕’의 방한을 요청하는 정부의 자세는 아무래도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개인적으로는일본이 과거 저지른 문제의 해결 없이 방한하는 것은 반대한다. 한국정부의 거듭된 일본국왕 방한요청에 대한 오부치 총리의 답변은 ‘환경 조성에 양쪽이 노력해 나가자’는 것이었다.‘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뜻’을밝힌 것이지만,뒤집어보면 한국이 분위기를 잘 조성해 더 간절히 요청하면방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도 볼 수 있다.대답의 이면에는 일본국왕의방한이 그동안 잠재우고 있던 한국인의 대일 정서를 자극해 예측할 수 없는결과를 돌출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점도 숨겨져 있다고 본다. 오부치 총리의 대답은 한국민의 내면에 흐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대일 정서를 한국정부보다 더욱 면밀하게 간파한 것이지만,환경 조성은 오히려 일본측이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무엇이 일본정부로 하여금 ‘일왕방한’ 요청에 ‘환경 조성’을 이유로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하게 하는가.또 그 소리냐고 역정을 낼지 모르지만,한마디로 그것은 일본이 청산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과거사의 문제이다.한·일관계에서 아킬레스건처럼 중요한 대목마다 소리없이 나타나 양국 관계의 진전을 괴롭히고 있는 망령같은 존재가과거사이다.일본은 잊어버리기를 원하지만,한국인은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아직 그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일본국왕’의 방한이 바로 그런 과거사의 고리를 끊는 ‘환경 조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한국민은 한국정부만큼 그의 방한을 환영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언제 이뤄질는지 알 수 없는 방한에 앞서,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사의 앙금을 걷어내려는 일본국왕의 노력과 결단이 기대된다. 불행했던 과거사 청산문제를 다시 건드리는 것은,그같은 잘못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촉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한·일간 과거사청산문제는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고 현재의 문제이며,한·일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북한과 일본,중국과 일본의 문제이기도 한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세계는 지금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지역간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동북아시아지역만 분단과 냉전체제,일본 군국주의의 미청산으로 지난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한·일간 과거 청산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관계,나아가 세계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일본국왕은 그의 증조부 이래로 왜곡된 한·일관계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만큼 방한에 앞서 과거 군국주의 침략행위에 대한 명백하고 솔직한 사죄가 있어야 한다.이것은 한국에 대한 표명일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것이며,일본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더 높이는 계기도 된다. 일본이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이제 일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동학혁명 이래 부당한 군대 파견으로 동학군과 의병·독립운동자 수십만을 사살하였고,불법적으로 행한 한국 강점에 수많은 문화재의 강탈과 수탈통치,일제말기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의 강제연행과 사할린 동포,강제연행자들이 저축해놓은 저축금의 미반환 문제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지금도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377차까지 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보여주듯이,일본정부가 관여를 부정하고 있는 약 10만∼20만의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는 유엔 소위에서까지 결의된 것이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한국인들은 제사 때마다 일제에 의해 무참히돌아간 조상의 죽음에 동참하며 일본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한다. 한국인의 이런 고통의 한가운데 아직도 ‘일본국왕’이 자리하고 있다.과거사에 대한 앙금을 걷어내려는 가시적인 조치가 취해진다면,일본국왕은 한국의 국립묘지에서 일본 국민들을 대표하여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향불을 피우는 것도 거리끼지 않을 것이다.일본국왕의 방한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그때 한국민도 마음으로부터 일본국왕을 환영할 것이다. [李萬烈 숙명여대교수·한국사]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인간존재 의미 되묻는 日 희곡 ‘친구들’

    일본의 대표적 극작가 아베 고보의 ‘친구들(友達)’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지난 93년 예순아홉의 나이로 타계한 아베 고보는 생전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될만큼 탁월한 소설가이자,연극집단 ‘아베 고보 스튜디오’를 거점으로 독자적인 연극활동을 편 극작가로도 이름높다. 이번 무대는 국립극단이 올 한해 의욕적으로 기획한 ‘한·중·일 동양3국연극 재조명시리즈’의 하나로,‘아Q정전’(중국)‘무의도기행’(한국)에 이은 마지막 작품.일본 신극협의회,베세토 일본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선정된‘친구들’은 67년 발표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브로드웨이,유럽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각광받는 일본의 대표 희곡이다. 국내에서는 70년대초 영역본을 중역해 간이극장에서 잠깐 공연된 적이 있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겨 정식 무대에 올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국립극단이 일본 작품을 공연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의미가 더욱 새롭다. ‘친구들’은 실제 일어나지는 않지만 ‘있을 법’한 얘기를 통해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블랙코미디.어느날 밤 결혼을 앞둔 독신 샐러리맨 아파트에 아홉명의 낯선 일가족이 들이닥치면서 극이 시작된다.이들은 공동체의식과 휴머니즘이란 ‘선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침입’을 정당화하는가 하면,‘친구’라는 미명하에 집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한다. 폭력을 쓰지않는대신 ‘미소’와 ‘딴소리’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경찰도 별 도리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 혹은 공동체의식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우스꽝스런 현실에 대한 신랄한 조롱인 셈이다.연출을 맡은 임영웅씨는“웃으면서 보지만,보고나면 소름끼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극중 공동체의식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임씨는 “공동체의식은 군국주의,제국주의의 광기와도 연결된다”며 “일본 우익이 한반도 침략을 ‘내선일체’‘대동아공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립극단 단원으로 지난해 TV드라마 ‘홍길동’에 캐스팅된 이후 ‘흐린날에쓴 편지’‘토마토’등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김석훈이 주연을 맡았다.“대사가 많은데다 주로 고성을 질러야 돼 체력소모가 많다”는 그는갑자기 스타가 된 이후 점점 본래 모습을 잃고 있는 듯한 요즘의 자신과 극중 주인공간에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예진흥원장인 차범석씨가 원작에 충실한 번역을 했으며,‘명성황후’에서진가를 발휘한 박동우(무대미술)최보경(무대의상)이 스태프로 참여한다.15∼24일 국립극장 소극장.(02)2274-1151∼8. 이순녀기자 coral@
  • [깊이읽기]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리치,기억의 궁전’

    사람들이 자기가 익힌 지식과 정보를 마치 집을 짓듯이 원하는 형태로 정돈해 두고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한 이런 바람이 실제로 고대 유럽에서는 특별한 훈련,즉 기억과 관념을 구체적 형태를가진 기억용 이미지로 만들어 ‘기억의 궁전’에 보관하는 기억술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16세기 후반,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전교를 위해 파견된 중국에서 기억의 궁전을 건설한다.리치는 ‘기법(記法)’이라는 저술을 통해 이런 유럽의 기억술을 중국 지식인들에게소개한다.그는 기억술을 통해 중국인이 유럽 문화에 관심을 갖고 나아가 가톨릭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오늘날,중국사학계의 거장 조너선 스펜스는 시간에 묻혀 잊혀졌던 리치의 기억의 궁전을 재건했다.스펜스는 궁전의 문을 여는 단서로 ‘기법’에서 제시된 무(武),요(要),이(利),호(好)의 4글자로 만든 4개의 이미지와,리치가 ‘정씨묵원(程氏墨苑)’이라는 화집에 실은 4장의성화를상호 연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글자와 그림의 이미지들은 바로 리치가 속했던 고전 라틴문화와 유럽 문명의 산물임과 동시에 그의 갖가지 인생 경험이 축적된 내면세계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이 이미지를 통해 리치의 일생의 핵심을 이루는 주요한 주제들,즉 분쟁 항해 교리 학술 경제 배덕 성모신앙 등으로 궁전을 구성하였고 리치가 거쳐간 유럽과 인도,중국의 각 문화권에서 이 주제들이 어떻게 형성,변화되어 가는지를 추적하고있다.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에는 낯선 땅에서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분투하는 한 선교사의 일생과 함께 16세기 후반의 유럽 및 동아시아세계가 다면적으로 재현된다.당시 유럽은 지리적 발견과 대항해 시대로 대표되는 팽창기에 들어섰고 리치의 중국 파견도 그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동서의 양 세계는 교역 등의 물리적 차원에서부터 리치의 파견과 같은 문화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으로 상호 접촉과 충돌을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리치의 기억 속에서 동과 서는 상호의 지적체계의이해를 통한 내면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리치는 놀라운 의지와 능력으로동아시아의 정신 문화의 핵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고 중국의 지식인들과 여러방면에서 지적 교류의 단서를 만든다.이 만남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얼룩진 이후의 역사에서는 단절되어 잊혀지게 된다. 양 세계의 굴절된 상호인식,오해와 편견 등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오늘날,리치의 기억의 궁전으로의 여행은 16세기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함께 우리의고정된 기억들에 새로운 의문을 안겨주는 의미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차혜원 연세대 강사
  • [외언내언] 재일동포 참정권

    2일 도쿄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총리회담에서 김종필(金鍾泌)총리와 오부치게이조(小淵惠三)일본총리는 재일동포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상당한의견접근을 보았다고 한다. 선거권을 먼저 부여한뒤 추후에 피선거권도 주는 단계적 방안이긴 하나 재일동포사회의 숙원중 하나였던 참정권 문제가 뒤늦게나마 가닥을 잡게되었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재일동포수는 98년말 현재 55만을 약간 넘어서고 있다.여기에는 물론 조총련이 포함돼 있다.4∼5세에 이르도록 재일동포로남아있는 것은 유독 민족적 순수성을 고집하는 우리민족 특유의 결벽성 때문. 일본에서 재일동포는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다.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됐다가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귀화(歸化)를 하지 않았다는이유로 이들에게 참정권은 물론 공직 취업마저 봉쇄해 왔다.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에게 제한적이긴하나 투표권을 주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서는 주지사 선거에도 투표권을 주고 있다.유럽은한발 더 앞서 가고 있다.스웨덴 핀란드 아일랜드에서는 지방선거에서 투표권만이 아니라 피선거권까지 부여하고 있다. 법률적으로도 헌법상의 국민과 구별해서 지방자치법에 주민이란 개념을 도입하는 경향이다.아직은 외국인의 참정권이 지방선거에 제한돼 있으나 점진적으로나마 전국적인 선거에까지 확대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 세계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국제화하고 있다.어느 곳에 오래도록 살고있는 사람에게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은 제한하는 쪽에도 피해가 가게된다.공동생활권내의 다양한 이해와 의견이 적절히 수렴되지 못하면 공동체로서의 통합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미국에 이민가 사는 동포들도 미국시민권을 기피하고 영주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그래서 한때는 교민회 같은데서 미국시민권 얻기 캠페인을 벌인일까지 있다.투표권을 확보해야 소수민족으로서 발언권이 커지고 미국사회가보장하는 각종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법률적으로 미국국민이 됐다고 해서 미국사람이 되는게 아니다.어디까지나 한국계 미국인일뿐이다. 이번 일본에서의 참정권 부여문제와 관계없이 재일동포들도 이제는 귀화를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때가 됐다.물론 일본의 경우는 미국과는 여러가지 사정이 다르다.그러나 일본귀화를 조국에 대한 배신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포1∼2세 시대에는 바람직했을 지 모르나 이제는 꼭 그런것 만은 아니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당당히 사는게 보다 나은 선택일 지도 모른다. [林春雄 논설위원 limcw@]
  • [義烈 독립투쟁] 金祉燮 의사(3)

    ‘동지 여러분 앞.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제(弟)는 288시간만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참말 지저(地底)의 생활이었습니다.그 속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 비애,적막,번민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이 사람의 흉중으로 총집되어 경도광랑(驚濤狂浪)의 소리만 들릴 적에 할 일없이 어서 나와 어복(魚腹)으로 들어가라고 유인하고 최촉하는 공포를 주던 것이 마치 왕생(往生)의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1924년 1월 5일 도쿄 소재 일왕(日王)의 궁성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친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상하이(上海)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모두 부분이다.무려 12일간을 석탄 운반 화물선의 창고에 몸을 숨긴채 일본에 도착한 김의사는 당시의 고통스런 상황을 마치 죽었다 살아 나온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김 의사는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20대 청년시절 한때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귀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모아 국권회복의길을 강구하였다.이후 김 의사는 만주·연해주·상하이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22년 4월에는 고려공산당에,그 해 여름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중교 의거’에 앞서 김 의사는 1923년 3월 같은 단원인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과 함께 국내에 있는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기로 하고 대량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국내로 반입하려 했다.그러나 이 계획은 동지로 위장침투한 경기도 경찰부 소속 조선인 경찰 황옥(黃鈺)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김 의사는 다행히 사전에 피하였으나 김시현·유석현 등은 일경(日警)에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그 해 12월 김 의사는 거사 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선인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5만원을 요구하였다.그러나 백은 요구를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에는 배신,동지 윤병구(尹炳球)만 체포되고 말았다.백방으로 거사자금 마련을 하던 중 1924년 초 도쿄에서 일본 총리를 비롯하여 조선총독 등이 대거참석하는 ‘제국의회(帝國議會)’가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김 의사는 일제 침략주의자들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동지 최윤동(崔允東)에게서 입수한 폭탄 3개와 여비 100원을 준비하여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도쿄로 향했다.당시 김 의사는 일본인 소유 석탄운반선 천성산환(天城山丸)의 창고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 과정에는 일본인 공산주의자 히데시마 히데지(秀島廣次)와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小林幹一)·구로시마 리게이(黑島里經)의 도움이 있었다. 1923년 12월 31일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에 도착하여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彦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여관에 투숙한 김 의사는 여기서 3일을 보낸후 모포·외투·시계 등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마련한 다음 도쿄로 향했다.기차 안에서 제국의회가 휴회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 의사는 거사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왕(日王)의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 1월 5일 도쿄에 도착한 김 의사는 우선 궁성의 규모·구조를 사전답사한 후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오후 7시경 일본인 관광객과 뒤섞여 이중교 앞으로 접근하자 감시 경찰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더 이상 궁성 쪽으로 접근하지 말 것을 종용하자 김 의사는 일경을 향해 폭탄 한 발을 던지고 재빨리 이중교를 건너 궁성 정문쪽으로 향하였다.이에 궁성 보초병 2명이 달려들며 김 의사에게 총을 겨누자 김 의사는 나머지 폭탄 2발을 일경들이 달려드는 궁성쪽을 향해 연속적으로 던졌다.그러나 김 의사가 던진 폭탄 3발은 모두가 불발이었다.김 의사가 타고온 배는 습기가 많은 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 의사의 의거로 일본전역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자신들이 ‘신(神)’으로 받드는 일왕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내무차관의 견책에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궁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파면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히비야(日比谷)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김 의사는 1924년 9월 9일 열린 공판에서 직업을 묻는 판사에게 “조선 독립당원과 혁명사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또 10월 11일 공판에서는 장문의 ‘진술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통박한 다음 “이번에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도취된 왜국(倭國)관민을 각성시키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밝혔다. 재판정에서 김 의사는 자신에게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무기징역을 언도하였다.1927년 20년으로 감형된 김 의사는 옥중에서도 의거 당시의 의기를 굽히지 않았으나 고문 후유증이 악화돼 이듬해 2월 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 때 김 의사의 나이는 44세였다.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金祉燮 의사 후손 근황 김지섭 의사의 직계 유족으로는 며느리 최수희(崔秀禧·75·대구 거주) 여사와 손자 3형제가 있다.김 의사의 외아들 재휴(在烋)씨는 생전에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94년 78세로 노환으로 작고했다. 김 의사의 손자 3형제는 모두 각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장손 두현(斗鉉·47)씨는 경북고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수재로 현재 전남 여수에거주하고 있는데 독일계 외국인회사인 한국바스프(주)생산부장으로 재직중이다.슬하에 1남1녀. 둘째 손자 광현(洸賢·44)씨는 대학졸업 후 롯데건설에 근무중이며 경기도부천에 거주하고 있다.셋째 손자 기현(己鉉·39)씨는 모친 최 여사를 모시고 대구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장손 두현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님으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며 “할아버님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현재 선산에 안장돼 있는 할아버지를 국립묘지로 이장하고싶다”고 말했다. 김 의사의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대지동에 자리잡고 있다.김의사를 기리는 기념물로는 경북 안동 영호루에 있는 기념비와 독립기념관 경내 시비(詩碑)가 있다.매년 2월 20일 김 의사 순국일에 추모행사가 거행되고 있으나 별다른 기념사업회는 없는 상태.1962년 김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다.정운현기자 jwh59@*日 궁성 어떤 곳인가 일본인들은 그들의 왕이 거주하는 궁성을 ‘황거(皇居)’라고 부른다.수도도쿄(東京)시내 치요다구(千代田區)에 위치한 일본의 왕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고 막번체제(幕藩體制·1603∼1867)를 이끌 시기에는 에도성(江戶城)으로,제122대 왕인 메이지(明治·1868∼1912)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이후에는 도쿄성(東京城)으로 불렸다.막번시기에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이 궁성의 주인이었으며 메이지 이후부터는 왕의 거주지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자신의위엄을 살리기 위해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大阪城)보다 훨씬 더 큰 궁성을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따라서 이 궁성은 그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이같이 오랜 기간 대규모로 축조된 궁성의외부에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자(垓字·궁성 밖으로 둘러서 판 연못)가 이중으로 설치돼 있다.해자는 간다천(神田川)에서 북서방향으로 우시고미·이치가야·요쓰야·아카사카 등을 띠를 두르듯 감싸고 있다.그리고 궁성에는 아카마쓰 성문(파수꾼이 망을 보는 바깥쪽 성문) 등 36개의 성문이설치돼 있다.현재는 안쪽 해자로 둘러 싸인 약 30만평의 땅에 궁성이 조성돼 있고,현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이 곳에 살고 있다. 일본의 이같은 왕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부터는 한국 의·열사들이 폭파대상으로 삼은 주요 목표물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그곳에 거주하는 일왕 역시 처단대상이었다.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이중교의거’ 이외에도 1932년 1월 8일에는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왕궁의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김 의사가 폭탄을 던진 이중교는 궁성 정문 앞에 있는 다리.이중으로구성돼 있다고 해서 이중교(二重橋)라고 부른다.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다. 채영국 연구원
  • [민속마을을 찾아서] 낙안읍성

    우리나라에는 많은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남아 있다.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살았던 전통 마을의 모습은 산업화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그 잃어버린문화유산을 되찾고 전통 마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고향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우리의 옛 모습이 그리울 때 찾아갈 수 있는 민속마을들을 부정기로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석류가 빨갛게 익어가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자연 속에 포근히 잠겨 있는 풍광이 정겹다.수줍은 듯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은 토속적인 정취를 살포시 드러내고 있다.옛 고을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살아 있는 민속마을’의 고즈넉한 돌담 골목길에서는 숱한 세월을 모질게 살아온 조상들의 숨결이느껴지는 듯하다. 풍수지리에 도통한 도선 국사가 “하늘이 감추어 두고 땅이 숨겨 놓은 곳”이라고 말했다는 전설의 땅.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분위기와 옛 정취는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잠깐이나마 안식을 준다. 왜구의 침략을 견뎌내고 동학농민혁명에 휩싸였던 역사의 현장.그 과거의역사를 접고 이제는 민속마을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민속마을은 1983년 마을과 성이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후 조성됐다.사각형의 조선시대 성으로 둘러싸인 민속마을에는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초가와 동헌,객사,임경업장군비,옛농기구와 생활용품등이 보존돼 있는 역사문화당,향토미술관 등이 우리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동문을 들어서면 마을 한가운데를 시원스럽게가르는 큰 길을 만난다.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왼쪽에는 야트막한 초가들이 전통의 아름다움으로 관광객을 유혹한다.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가끔씩 ‘전통 찻집’이나 ‘민박’이라고 쓴 팻말이 붙은 초가집들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초입부터 어지럽게 널려 있는 상점들은 ‘전통’을 찾아 온 이들의 기대를 거스른다. 복원된 초가집들도 고증 보다는 거주자들의 편의에 치중된 듯한 느낌이다. 집들은 본래의 모습 보다 높고 크게 지어졌고 기둥 등도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 집 대문마다에는 또 ‘주인 허락없이는 들어가지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관광객에게는 달갑지 않은 ‘경고’로 받아 들여진다.그러나 주인의얘기를 들어보면 그 ‘경고’가 이해된다.한 주민은 “처음에는 모든 집을공개했었죠.그러나 집에 들어와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초가지붕만 옛 모습일 뿐 집안에는 전통적인 물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화장실도 마구 사용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민속마을을 전통이 살아 숨쉬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민속마을 관리사무소는 여러가지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불법 영업행위 정비계획도 포함돼 있다.장기적으로는 60%에 이르는 개인재산을 모두 순천시에서 구입,위탁 경영토록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민속마을은 우리의 옛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린우리 삶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할 수도 있다.그러나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인생의 황혼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노인들의 쓸쓸함처럼그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젊은이들이 모두 마을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그쓸쓸함을 관광객의활력으로 만회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전통을 충실히 되살리고 보존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순기자 cslee@ *낙안읍성 관광 가이드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해발 50m의 분지.사각형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성의 높이는 4m이며 너비는 3∼4m,길이는 1,410m.총 면적은 6만7,490평(성안은 4만1,000여평).108호에서 280여명이 살고 있다.삼한시대에는 마한 땅,백제시대에는 파지성이었으며,고려 때 낙안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연 100만여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낙안민속문화축제가 매년 5월에,남도음식문화축제가 매년 10월에 열린다. 입장료(문예진흥기금 포함)는 개인 1,100원 학생·군인 600원 어린이 450원. 관리사무소 전화 (0661)754-6632,2799. ■주변 관광지 조계산 도립공원,송광사,선암사,제석산,동화사,주암호,고인돌 공원. * 주부 최무희씨가 본 낙안읍성 내가 사는 진주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민속마을이 있다는 것은다행한 일이다.서울 근처 용인에 있는 민속촌을 가지 않고서도 전통마을의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옛날에 살던 초가집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니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그것은 바쁜 현대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이다. 그러나 초가집들이 너무 깨끗하게 정비돼 있어 오히려 옛 맛이 없다.(매년초가지붕을 교체한다).난립해 있는 상점들도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객사 등건물들은 잘 보존돼 있는 것 같으나 그곳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관광객들이 많아 보기에 안좋다.관광객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고 활력도 부족한 것 같다.
  • [대한포럼] 베를린시대의 개막

    “하늘에는 영광,땅에는 축복이 가득했다.독일 국민들은 희망과 기대에 들떠 보는 이마다 얼싸안고 열광했다.” 90년 10월3일 당시 동베를린 제국의회(Reichstag) 광장에서 벌어진 독일통일 축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 기사 내용이었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오는 9월1일 베를린에서 첫 내각회의를 주재하고 의회가 종전후 처음으로 새로 단장한 제국의회 청사에서 개회함으로써 통일독일의 ‘베를린 시대’가 막을 올린다. 통일독일의 ‘베를린 시대’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하다.베를린은 1871년 독일의 첫 통일국가로 군사강국이었던 프로이센왕국의 수도가 된 이후 1945년 2차세계대전 패망때까지 제3제국의 수도로서 독일과 유럽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광기(狂氣)의 패권주의·민족주의·권위주의의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베를린 천도(遷都)는 독일내에서뿐만 아니라 인접 유럽국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돼 왔다. 베를린의 중요성은 종전후 승전국인 미·프·영·소 4개국이 베를린을 분할통치하며 전후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옛소련은 자유사상의 침투를 막기 위해 61년 베를린장벽을 쌓았고 이어 베를린봉쇄에 대항해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베를린을 방문해 “나는 베를린시민(Ich bin Berliner)”이라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 사실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역사의 짐’을 벗고 ‘민주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천도가 필요하다고 찬성하는 여론과 베를린이 독일 역사에서 갖는 부정적 이미지와 200억마르크(약 12조2,00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이전 비용을들어 반대하는 여론이 맞섰다. 전후 사민당(SPD)과 기민당(CDU) 등 역대정권들은 통일정책을 전개하면서이같이 좋지 못한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초대 에르하르트 총리로부터 브란트·스미스·콜 등 역대 총리들이 일관되게 추진해 온 통일정책의 기조도 ‘강력한 통일독일’을 경계하는 주변 국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유럽속의 독일(Deutschland in Europa)’정책이라 하겠다.이 때문에 독일은 정치적으로는 유럽연합(EU) 창설에,경제적으로는 유럽단일통화 제정에,군사적으로는 ‘나토 안에서의 작전’에 어느 국가보다 앞장서 왔다. 독일은 2차대전후 처음으로 지난 3월 나토군의 일원으로 유고에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패전국의 멍에를 벗고 국제사회에서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력을발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이는 독일이 과거 역사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베를린 천도는 독일의 이같은 입장을 강화시켜줄 것으로 예상된다. 대전의 피해자로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독일통일의 마지막 과정인 베를린 천도는 부러움이 아닐 수 없다.독일이 ‘유럽속의 독일’을 강조하며 통일대업을 성취하는 동안 2차대전의 같은 패전국인일본은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동북아 안정 추구보다는 경제적 이윤을 바탕으로 한 군사대국화·우경화(右傾化)에 힘을 기울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짙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독일이 통일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외교적으로는 주변국의 경계심을해소시키는 ‘유럽속의 독일’ 정책과 더불어 물적·인적·통신교류라는 3통(通)정책을 꾸준히 벌여 동서독 민족간의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한 결과라 하겠다.세계 대전의 피해자인 우리지만 뒤늦게나마 포용정책을 펴게 된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더욱이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4+2회담’이 성공한다면 통일의 내외적인 여건은 이루어질 것이다. 통일은 인내심과 먼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며 스스로 준비하는 길만이 첩경이라 하겠다. [이기백 논설위원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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