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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종이 땡땡땡…」작곡가/재미 김메리 할머니 자서전 출간

    ◎13세때 첫 교사생활… 90평생 남위해 봉사/근대화의 격랑 헤쳐온 삶 진솔하게 드러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해방후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교과서,그 가운데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에 실렸던 동요 「학교종」은 여지껏 애창되는 노래이다. 요즘도 노래 자리에서 사람들이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그럼에도 이 노래를 작곡한 김메리할머니(92·미국 거주,미국이름 Mary Kimm)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김할머니의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이 최근 출간됐다(현대미학사 펴냄).이 책에는 90여 인생을 자기계발과 이웃사랑으로 치열하게 산 한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김메리는 1904년 서울에서 김익승의 셋째딸로 태어났다.아버지가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냈고,해방정국에서 이승만·김구와 함께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은 김규식이 4촌오빠인 명문가 출신.「메리」는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다. 평생 자기 공부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남을 가르치는그의 삶은 어려서 시작된다.배화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가 논산의 한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할 때의 나이는 열세살.김메리는 『새 선생이 온다고 교장과 학생들이 마중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나 「아기 선생」노릇은 여섯달만에 끝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그러자 집에서는 결혼을 서둘렀고,김메리는 삼촌을 따라 만주 용정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3년을 보낸다.귀국후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친 그는 1930년 미시간대학으로 첫 유학을 가 거기서 전공을 피아노로 바꾼다. 이후 남편이 되는 조오흥씨와의 만남,석사학위 취득과 귀국,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부임,약혼자의 뒤따른 귀국과 결혼으로 이어진다.남편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고,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산가족이 된다. 해방이 되자 김메리는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편수에 참여,「학교종」을 비롯한 동요들을 작곡한다.해방된 조국의 모교에서 후진양성에 애쓰던 그는 어느날 음악과 학과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다시 미국길에 오른다.남편과 합쳐야 하는데다 새로운 학문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 이때부터 평범을 거부하는 그의 치열한 삶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웨인대학에서의 화학·미생물학 공부,칠순 나이에 평화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의 2년 활동들이 그것.아울러 미국에서 한국민요집을 발간하거나 서예전을 갖는등 한국문화 홍보에도 애쓴다. 지난 89년 뇌일혈로 쓰러졌던 김메리할머니는 젊은이 못잖은 의지로 건강을 회복했다.국내에서 자서전을 출간한 것과 관련,5월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이용원 기자〉
  • 전직원 재충전 적금/제일제당 신복지정책

    제일제당은 12일 「재충전 적금」과 배우자부모를 포함한 임직원 부모사망시 장의차량비 지원 및 부모칠순 휴가,경조비 지원을 골자로 한 「96년 신복지정책」을 발표했다.전 직급에 걸쳐 기본급을 6.1% 인상하는 임금협상안도 마련했다. 재충전적금은 해외연수나 레포츠 활동,해외 여행 등 임직원들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의 활동을 지원하도록 직급별로 연간 36∼72만원의 적금을 개인별로 가입시켜 주는 제도다.
  • 정신대 할머니 “눈물의 망향가”/중국거주 칠순의 이춘도씨

    ◎15살때 갖은수모… “죽기전 고향 가봤으면…”/국내단체 초청… 가족·친지없어 허가 안나 일제때 중국에 정신대로 끌려간 열다섯살 조선 처녀가 고희의 노인이 돼 귀국을 갈망하고 있다.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50년 전처럼 순탄치 않다. 중국 신강성 합밀시에 사는 이춘도 할머니(69).어릴 적 이름은 금순이.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5살이던 44년 수원역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기차로 만주에 도착한 뒤 몇차례의 탈출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무한으로 옮겨졌다.일본군 34군과 제5야전보충부대·병기공장 등에서 모진 수모를 겪었다. 고통을 참다 못해 동료 4명과 자살을 결심했다.서로 상대방의 가슴과 팔에 자기이름을 새겨넣고 강물에 몸을 던졌지만 혼자만 살았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팔뚝에 당시 숨진 4명 가운데 가장 친했던 「이옥주」의 이름이 남아 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됐다.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몰랐다.식모살이와 농사일로 근근이 살아가다 중국 청년과 결혼했다.중국정부의 변방지원정책에 따라 신강성으로 이주,정착하면서 새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가 남긴 상처는 가시지 않았다.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끝내 이혼을 당하고 조선족인 장금자씨(54·여)의 도움을 받으며 지금껏 홀로 살아왔다. 이 사정을 접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연말 2주일의 일정으로 이할머니를 초청했다.하지만 당국은 신청서를 반려했다.국내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다는 이유였다. 정대협측은 『지난해 5월 이할머니와 같은 처지인 강묘란할머니(73·중국 상해시)가 국내로 초청돼 영주귀국절차까지 밟고 있다』며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을 요구한다. 이할머니는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회상하는 증언의 말미에 이렇게 호소했다.『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고향에 가보고 싶습니다.』
  • 러시아 총선 투표 순조/소붕괴이후 두번째

    ◎추코트카 시발로 25시간동안 계속 【모스크바=유민 특파원】 17일 새벽 4시(한국시간)) 극동지역 추코트카에서 시작된 러시아 총선은 18일 새벽 5시 러시아 최서단의 칼리닌그라드까지 25시간 동안 계속됐다. 옛 소련 붕괴이후 두번째인 이번 총선은 개혁정책의 지지부진과 생활고 가중에 따른 불만 증가로 공산당이 우세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으나 어느 당도확실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내년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의 향방을 가늠하는 전초전이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날 선거 결과는 18일쯤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모두 11개 시간대를 갖고 있는 러시아에서 이날 투표는 각 지역시간대의 상오8시에 맞춰 서쪽방향으로 옮겨가며 진행됐는데 극동지역에선 투표소가 문을 열자마자 유권자들이 줄을 서서 일찌감치 주권을 행사,투표가 신속히 진행됐다고 관리들이 전했다. 투표를 마친 유권자의 대부분은 노년층으로 이들은 옛 소련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향수를 표명하며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공개한반면 청년층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했다. 이날 선거결과는 18일 하오쯤 대체적인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중앙선관위측은 이날 하오 『하오2시 현재 가장 먼저 투표가 진행된 추코트카주가 30∼35%의 투표율울,모스크바지역이 20∼30%의 투표율을 각각 보이고 있다』고 발표했다.이 투표율은 지난 93년 첫민주적 투표 때의 같은 시각 투표율보다 평균 8∼10% 정도 높은 것이어서 개혁정당들의 선전이 예상되고 있다. ◎‘모스크바 제75선거구」 르포/유권자들 “후보 모르고 찍었다”/“오스트리아인도 선거참관” 공정성 자랑/“3명중 2명은 공산당 지지” 젊은층 우려 투표가 시작된지 두시간 남짓 흐른 17일 상오 10시.(현지시간) 모스크바시 중앙구역 제75 선거구가 들어선 투베르스코예 공업특수학교 건물 주위.아주 많은 수는 아니지만 투표권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2층 건물의 이 학교 주위엔 러시아 내무부소속 무장경찰들이 2∼3명씩 짝을 지어 검문을 강화하고 있었다.이들은 혹 있을지 모를 테러에 대비하는 듯 가끔 주위를 지나는 차량들을 세워 차량 안팎을 뒤지기도 했다. 영하 14도의 차가운 겨울날씨 탓인지 유권자들의 모습은 아직 한산하다.이른 시각 투표를 마친 사람은 이 시각 현재 88명.75선거구의 전체유권자 2천2백46명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투표율이다.그러나 줄지어선 사람들은 조금씩 불어나고 있다. 1층 중앙복도.중앙홀을 중심으로 사각으로 테이블이 마련된 투표장에는 지역선관위 관계자와 정당 참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만이 북적거리고 있다.얼핏보기에 투표장에는 유권자명부확인 담당자만 10여명이 넘는다.이들은 주로 30∼50대 여성들로 구성돼 유권자 성의 첫 글자(알파벳)를 따라 배치돼 있다.기표소는 복도 한쪽벽을 베니어판으로 가려 만들었다.취재기자를 의식한 듯 한 선관위 관계자는 『이곳 투표소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국제참관인도 있다』고 공정성을 자랑한다.기표소를 출입하는 쪽은 흰 천으로 드나들기 쉽게 막아놓았다. 75선거구에 출마한 지역구 의원 후보자는 모두 18명.때문에 투표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떤 후보가 어떤 정당 소속인지도 모른 채 투표를 끝내는 모습이다.공산당측 선거참관인이라고 밝힌 그리빅 니코바 알레비나씨(50·여)는 『투표하러 온 사람들이 후보의 이름이나 특성을 거의 모르고 나오는 것같다』면서 43개 정당이 난립한 이번 총선을 꼬집었다.그녀는 『우리집은 아버지 때부터 공산당원이며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한다』며 공산당의 부동표를 뽐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몇사람을 불러세웠다.알렉세이 시고틴씨(33·개인출판사경영)는 『가이다르의 「민주선택당」 후보를 찍었다』면서 『경제안정이 시작됐으므로 이같은 방식으로 개혁은 지속돼야 한다』며 표를 던진 이유를 설명했다.그는 『공산당의 확고한 부동표가 문제다.투표양상은 3명중 두명이 공산당을,다른 한명이 개혁당쪽을 찍는 것같다』며 공산당의 활약을 우려했다.20대 초반의 한 여성은 누가 이길 것같으냐는 질문에 『후보가 많아 모르겠다』면서 『야블로크블럭의 야블린스키 당수가 젊고 똑똑하고 잘생겨서 이 정당을 찍었다』며 활짝 웃는다. 칠순쯤 돼보이는 한 노파를 인터뷰하려다그냥 지나쳤다. 그녀는 『나는 전생애를 통해 공산당원이다.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한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러 촐선 이모저모/선관위,냉장고 등 경품 내걸고 투표 독려/공산당당원 “서방측은 나를 두려워 말라” ○…흰눈이 내린 모스크바에선 유행성 독감에도 불구,유권자들이 투표장을 향해 몰려들고 있고 극동지역에선 투표시작 10시간만에 투표율이 유효선거투표율인 25%를 넘어서는등 러시아 전역에서 투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또 태평양 연안지역에서는 투표시작 6시간만에 35.4%의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이타르 타스통신이 보도. ○…열악한 통신사정으로 투표율 집계가 늦어져 정확한 투표율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이처럼 투표율이 대체적으로 높은 것으로 전해지자 개혁진영에서는 좋은 징조라고 희색이 만연한 모습.개혁진영에서는 연금생활자 등 개혁의 부진에 따른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노년층이 높은 투표성향을 보이는데 반해 개혁진영을 밀어줄 젊은 층은 날씨 등에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해 선거직전까지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자는 캠페인을 벌여왔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투표를 마친 유권자의 대부분은 노년층으로 이들은 옛 소련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향수를 표명하며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공개.올해 63세의 한 할머니는 『마피아가 등장하고 물가가 폭등하는 등 현실이 혼돈에 가깝기 때문에 공산당에 표를 찍었다.과거 공산당은 무엇이나 해주었지만 지금 정부는 해주는게 아무 것도 없다』면서 옛 소련시대가 훨씬 더 좋았다는 의견을 피력.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계층별로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차별화가 뚜렷해진 양상.노년층이 대부분 공산당을 지지한데 반해 장년층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정당을,청년층은 대체로 개혁진영의 정당을 지지했으며 가난한 층에서는 공산당이나 민족주의 계열에 대한 지지가 비슷하게 나뉜 반면 신흥기업가 등 부유층에서는 한결같이 개혁진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번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공산당의 제나디 주가노프 당수는 서방세계에대해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촉구. 그는 투표를 마친후 기자들과 만나 『나는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어떻게 나를 두려워할 수있는 가』라고 반문. 반면 개혁주의자 지도자인 이고르 가이다르는 『이번 총선에서 공산당의 승리는혼란과 경제개혁조치에 손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 그는 그러나 전체주의 통치는 절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 ○…러시아선관위는 몇몇 지역에서 맥주,진공청소기,냉장고등 경품을 내거는가 하면 또다른 지역에선 투표소에 간단한 음식을 뷔페식으로 준비해 놓는 등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러시아 공영TV가 보도.
  • 극작가 차범석(이세기의 인물탐구:83)

    ◎리얼리즘 바탕 「정통극 파수꾼」 40년/대표작 「산불」 전쟁의 인간파괴 신랄하게 묘파/부당한 것 거부하는 「연극계 면도칼」로 한평생/최승희 무용보고 「무대 인생」 예감… 이해랑·유치진 문하서 엄격한 수련 희곡작가 차범석은 연극계의 로맨티시스트다.동숭동 마롱카페에 나가보면 젊은 연극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맥주를 마시며 연극과 인생을 논하고 있다.「주역만 있고 조연 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다.우리의 삶은 큰 배역만 탐내는 한편의 연극 같이 보이지만 작은 배역 없이 큰연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파우스트보다 메피스토 텔레스가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이듯이 무대 구석구석에 세워둔 단역조역들의 몫에서 극중 희열과 비감,완미가 성취된다.무릇 물이 얕으면 큰배를 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깊고 다양한 여러 경험이 크고 광활한 연기력을 키운다」고 후배들을 가르친다. 한배우가 무대에 등장했다가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퇴장하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이다.그런만큼 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분장을 지우고 무대를 떠나는 사람을 보면 「자기포기와 무책임」이 느껴지지만 연기의 온기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는 배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친다」고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가 63년부터 20년이나 이끌던 극단산하를 해체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연극을 지상목표로 삼으려는 의지는 눈비비고도 찾아볼 수 없이 연기를 가르쳐 무대에 설만하면 그들은 철새처럼 돈을 따라 텔레비전으로 가버린다」고 했다.「연극은 집단예술인만큼 인간적인 결합 없이는 아무런 작업도 가능하지 않다.그럼에도 정신적인 반항이 없는 정지된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껍질을 깨는 아픔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환멸스럽다」고 그는 한 글에서 개탄하고 있다.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것에 얽매어 질척대는 것은 자기비하이자 존재를 흩트리는 추일 수 밖에 없으며」「부나비처럼 떠도는 인간불신풍조속에서 나만이 홀로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것은 명분 없다」고 절규했다. 적자를 면치못하는 극단의 영세한 상황속에서도 「산불」「밀주」「대리인」「손탁호텔」등 알찬 창작극으로 꾸준히 「좋은 무대」를 이끌던 산하는 「연기자의 연극정신부재」「저질공연우려」등을 내세워 83년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채 이렇게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칠순의 나이와는 상관 없이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옛 예술가의 낭만과 니힐과 반항과 순수를 지금도 면면히 지니고 있다.그가 「한달이면 29일」을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람들과의 따사로운 온정에 굶주려 「정을 마시기 위해 술잔을 든다」는 것이며 인생의 어둡고 뒤틀린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긍정에의 동경이 너무 강한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40년간 「연극계의 면도칼」로 불리면서 그는 과연 부당한 것을 굳이 옳다고 양비론을 펼치거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수 있다고 과장한 적이 없다.연극상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무의미한 공연기록과 긴 연륜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질과 연기력을 따져 날카롭게 자격여부를 가려낸다.또한 스스로의 조로를 경멸하여 연극의 모든 일에 은근히 참여하고 옳바른 소리를 주저 없이 하면서도 「번뜩이는 재기나 교변」 사물에 대한 심정의 움직임에서 세말적인 기미대신 싱그러운 미소로 만사를 감싸기 때문에,각층의 폭넓은 호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단산하를 잃은후 그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대한민국예술원회원과 청주대 예술대학장등 여러 역할을 전전했다.86년에는 88올림픽을 앞둔 88서울예술단 초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창단기념 시연회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관련장관이 코를 골고 잔 것에 자존심을 심하게 상한 나머지 사표를 내던진 씁쓸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간과 함께 그의 까다로운 일면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반항과 증오와 충동에서 시작한 초기의 경험을 버리고 「삶이란 양파를 벗겨내듯 아무리 벗겨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나보다.그 때부터 톡쏘는 옳은 소리를 줄이고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계신공구의 자세로 전환했다. 그의 지나온 인생은 평온한 중에 끝 없는 파고가 잔물결처럼 파동치는 것이 남과 다르다. 목포의 개화되고 풍족한 집안에서 일본 메이지대(명치대) 법학과를 나온 차남진씨의 3남3녀중 차남.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집안의 서고에 파묻혀 아리시마 다케오(유도무낭)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무자소로 실독)의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 히메지(희로)고교에 시험을 보러갔다가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후지자와 다케오(등택)의 「신설」을 가슴에 품을 만큼 열렬한 문학지망생의 시기를 보냈다.어릴 때의 아명은 평균.광주고보시절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최승희무용공연을 보고 「정중동의 미세한 움직임과 끊어질듯 이어지고 멈춘듯 움직이는 유현미와 고담미」에 반해 그는 훗날 「무대」와 관련을 갖게 되리라는 예감을 굳혔다.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뒤늦게 23세에 대학에 진학해서 문자그대로 「경마장의 말처럼 정해진 코스를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엄격한 스승인 이해랑 유치진문하에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정통극」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연극계는 언제부턴가 「리얼리즘의 희곡작가」 또는 「리얼리즘의 파수꾼」으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쳐왔다.나라는 인간은 일관성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온 모순덩어리라는 생각 때문이다.그 증거로 나의 인생행로에는 투쟁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다.적극적인 동참이나 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나는 뭐란 말인가」.그러나 평론가 유민영은 「그의 작품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구시대의 붕괴와 전후의 사회변화,변천하는 사회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삶을 끈질기게 묘파」하고 있고 특히 대표작 「산불」은 「전쟁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를 미사여구나 기교 없이 신랄하게 파고든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으로 손꼽고 있다. 지난해 출판한 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에서 그는 「지금까지 나는 대과 없이 살았고 욕심부리지 않았고 하고싶은 일과 가고싶은 길을 지칠줄 모르고 살았으니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영원한 동반자인 박옥순여사와의 사이엔 3남2녀.자녀는 모두 출가하고 송파구 가락극동아파트에서 부부가 노후를 함께 하고 있다. 언제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시민」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이성을 정으로 융해시킨 처절한 삶의 애가와 뜨거운 인간애의 정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참으로 「큰배우」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이제 그의 퇴장은 「한편의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이며 연극계가 그를 두고 「이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고 한 말대로 그는 지금도 동숭동 마롱카페에 앉아 「배우가 되기전 먼저 인간이 될 것」을 젊은 연극인들에게 당부하며 그의 「정」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연보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42년 광주고보 졸업후 도일 ▲1946년 연희전문 문과 입학 ▲1949년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희랍극 「오이디푸스왕」연 출 수상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 공연(목포문화협회 주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당선,제작극회 창단 ▲1961∼71년 문화방송 제작부장·편성부국장 역임 ▲1962년 「산불」 초연(국립극단) ▲1963∼83년 극단 「산하」대표 ▲1965년 이대·연대 출강 ▲1966년 연세대 영문과졸업,국제PEN대회 뉴욕회의 참가 ▲1968∼74년 한국연극협회이사장 ▲1969년 신연극 60주년기념 「그래도 막은 오른다」 공연 ▲197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 ▲1973년 예총부회장 ▲1975년 ITI베를린회의 참가 ▲1978년 ITI한국본부 부위원장,대한민국연극제 심사위원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1983년 서울극작가그룹 발족,회장 ▲1984∼86년 청주예술대학장 ▲1986년 서울88예술단장 ▲1988년 청주대 교수협의회회장 ▲1991년 「연극의 해」집행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회원·한국연극협회이사·공연윤리위 심의이원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대리인」「산불」「학이여 사랑일레라」「식민지의 아침」,수필집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차범석문학전집(12권·융성출판)등 대한민국 문화예술상(70)·대한민국 예술원상(82)·동랑연극상(83)·대한민국 문학상(91)·이해랑연극상(93)
  • 간담췌외과학회 참석 스웨덴 저명의 벵 마르크

    ◎병 침대에 오래 누워있으면 악화/근육의 힘·면역기능 떨어져 저항력 약화/김치에 항암성분 있는듯… 한국음식 의학적 분석 계획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 간담췌외과학회(27∼30일) 참석차 이 분야의 세계적인 거두 스티그 벵마르크 교수(66·스웨덴 룬드의대·외과)가 한국을 찾았다. 벵마르크교수는 의사로서는 유럽최고의 명예인 유럽의학아카데미위원을 역임했으며 그동안 2천여편의 논문과 교과서를 집필했다.특히 간담췌(간·쓸개·췌장)외과부문에서는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그는 유럽의학발전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에서도 「간담췌외과와 수술후 패혈증」이란 특강으로 외과학부문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그의 입을 통해 「건강과 의학」에 관해 들어본다. 그가 주장하는 병의 치료는 서양의학자답지 않게 독특하다.『침대는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환자들을 병상에 가둬둔 것이 서양의학의 가장 큰 실수』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어떤 환자라도 오랫동안 병상에서 누워있게 되면 각종 염증이 생기는 것은 물론 몸의 면역기능과 근육의 힘이 떨어져 결국에는 병에 대한 저항력을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환자가 침대에 누워있을 경우 젊은 사람은 하루에 1.5%정도 근육의 힘이 떨어지지만 노약자의 경우 5%가량 떨어지므로 열흘만 병상에 누워있어도 몸의 기운이 절반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이론은 벵마르크교수가 지난 수십년간 연구해왔던 과제와도 그대로 연결된다.유산균에 특히 관심이 많은 그는 『우리몸에 있는 모든 유해한 균을 막아주는 균이 바로 유산균』이라며 『활동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면 될수 있는한 많이 움직이고 유산균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먹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또 『이제는 환경운동을 건강에 적용시켜야 할때』라고 강조하며 『동양인이 일반적으로 서양인보다 장수하는 이유도 일찍부터 몸의 생태학을 체득해 자연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의욕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벵마르크교수는 『비타민C,비타민E,베타카로틴을 건강의 빅 스리로 부른다』며 『식물성 기름,오렌지,당근 등의 식물에 빅 스리가 많이 들어 있어 이것들을 자주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한국을 처음 찾는다는 그는 『한국인이 즐겨먹는 김치의 성분중에 각종 암을 예방하는 화학물질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김치등 한국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을 의학적으로 분석해 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 칠순 아버지 고인된 아들/수필집 2권 함께 출간

    ◎김풍식 박사 「세월은…」·도형씨 「나는…」/부­예총 지부장 역임한 병원장의 향토애·자식사랑 그려/자­의협심 강한 의사 지망생의 현실 갈등·효심을 일기로 고희를 맞은 의학박사 아버지와,의대 재학 중 세상을 떠난 아들의 글이 각각 한권의 책으로 나란히 발간됐다. 아버지 김풍식 박사(충주 호서병원장)의 자전적 수상록은 「세월은 가고 그리움은 오고」(의계신문사 펴냄).신경외과 의사인 김박사는 서울신문 향토문화상 후보 추천위원을 비롯해 충주시 문화원장,국제라이온스 충북총재협의회장,한국예총 충주지부장 등을 지내며 다방면에서 향토사랑을 실천해 왔다.특히 우륵문화제 창설과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발굴에 큰 공헌을 했다. 따라서 그의 수상록에는 의사생활의 회고,문화재 사랑,자식을 잃은 슬픔 등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유려한 문장에 담겨 있다. 함께 나온 「나는 하얀 새가 되어」(영언문화사)는 지난 92년 숨진 김박사의 아들 도형군이 남긴 일기와 시,아버지에게 보낸 엽서,학술교육보고서들로 구성됐다.또 아버지가 아들을그리며 쓴 시들도 들어 있다. 도형군은 아버지를 뒤이으려고 순천향의대에서 공부하다 본과 1학년 때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재학 중에는 의대생의 학업 부담에도 불구하고 학생회 교육부장을 맡는 등 적극적이고 의협심 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고2 때부터 쓴 일기에는 청년기의 고뇌와 의학도로서의 각오들이 솔직하게 표현돼 있고 부모에의 효심도 잘 나타난다.이와 함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모순에 대한 분노·절망도 틈틈이 엿보인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산 70평생과,20여년만에 끝났지만 활기찼던 삶이 얼핏 대비되는듯 하지만 부자가 쓴 이 두권의 책은 풍성한 가을에 인생을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만든다.
  • 원로 연극인 장민호(이세기의 인물탐구:78)

    ◎평생을 연극으로 살아온 연기자의 대명사/파우스트 간판배우… 별명은 “파우스트 장”/이순신서 햄릿까지 어떤 배역도 무난히 소화/칠순이 눈앞에…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기생활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는 관객을 계속 끌고 나가는데 있다』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수로 활약한 샬리아핀은 말한다.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연기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집념어린 정열을 불태우는 이가 있다면 국립극단의 원로배우 장민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그는 평생을 연극으로 일관한 연기자의 대명사다.양심적이고 본질적인 그의 연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일시적인 경이감이나 전율만은 아니다.연기를 통한 인간정신의 승화를 그는 무대 곳곳에서 증명해 내고 있다.예의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인 관객을 이끌어 나가는데」 한번의 실수나 실책이 있을 수 없다는 주의다. ○솔직하고 직선적 성격 그는 언제나 의욕적이다.성격은 명쾌하고 성급하며 솔직하고 직선적이다.항상 모범생과도 같은 이런 유의 성격이란 한가지 일에 몰두하면 끝장을 봐야만직성이 풀리게 마련이다.또한 철두철미하고 다혈질적인 기질로 인해 곧잘 흥분하거나 저항하거나 마찰을 빚기 십상일 것이다.그러나 「칼날처럼 날카롭고 정의감에 넘치건만」 막상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에는 흑백을 가리거나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우회적인 유연성을 지니는 것이 남과 색다르다.이는 아마도 오랜 세월 어지러운 세파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터득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또는 이북에서 혼자 월남해온 그로서는 사방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당연한 견제일 수도 있다.그래선지 국립극단에서 40년이 넘게 한 솥밥을 먹은 동료들도 『그의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다만 무대에 서면 「온몸의 연기로 관객을 압도」하기 때문에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면 모든 것은 침묵」일수밖에 없다. 그는 해방직후 황해도 신천에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연극배우가 된 케이스다.20세되던 해 원예술좌가 공연한 성극 「모세」에서 타이틀 롤을 맡으면서 연극에 입문,그로부터 10년후 하유상의 「딸들자유연애를 구가하다」로 「노역」을 완성시키면서 「성공적인 연기자」의 반열에 올라섰다.이후 「대수양」「세종대왕」「성웅 이순신」에서 완곡하며 기질이 장대한 성군,「오델로」「맥베스」「줄리어스 시저」의 다이내믹한 개성,「밤으로의 긴 여로」「안네 프랑크의 일기」「햄릿」에서의 차분하고 섬세한 내면 연기 등 그에게 돌아오는 모든 배역을 「생생한 극중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한치의 허술함을 보이지 않았다.그중에서도 「역을 최후로 완성시키는 것은 디테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진실성」이라고 믿는 그가 평자들에게 어필된 것은 단연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수 있다. ○66년에 파우스트 초연 66년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로 초연된 「파우스트」에서 그는 학문과 지식에 실망한 노박사 파우스트가 현세적 향락에 침몰되는 과정을 고뇌에 찬 연기로 그려내었고 두번째는 8년후인 74년,순결한 헬렌과의 사랑에서 미마저 구하지 못한채 이상향을 꾀하는 허탈한 파우스트,또다시 84년 한독 1백주년 기념공연에서 독일의 저명한 기싱이 연출한 세번째「파우스트」에서는 지금까지 축적된 파우스트의 진면목을 함축하여 관객은 감전된 듯 박수갈채를 멈추지 않았었다.그때 이 연극을 연출한 기싱은 『그는 인물을 스스로 움직이되 얼굴 표정이 아닌 눈빛만으로 이미 단숙을 성립하고 있다』고 했다.즉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을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에서 그는 감정을 절제하거나 적절히 노출하여 역이 가리고 있던 사상의 베일을 한장 한장 벗겨내고야만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배를 띄우고 그리고 끝없이 높은 탑들을 불태운 얼굴이었던가.사랑하는 헬렌이여 단 한번의 키스로 불멸케 해다오.오! 그대는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밤하늘보다 더 아름답구나­ 가슴속에 박힌 사랑을 고백하는 이 장면은 「드라마틱한 다이너미즘과 명쾌한 표현적 리듬,응축된 긴장감과 생명의 맥박이 충만」하여 이를 앞서 연출했던 이해랑씨는 『중진 장민호의 연기가 폭풍같은 성공을 거둔 근본 요인은 이러한 관념을 최후까지 지킨 지치지 않은 탐구의 결과』라고 못밖았다.이는 50년대 후반국산 영화붐으로 연극계가 부진하자 전 연극인이 분발하여 만든 「대수양」(김동인 작 박진 연출)을 보고 『그곳에 군계일학이 있었다』고 한 이진순씨의 지적과 맥을 함께하는 찬사이기도 하다.이로써 그는 「파우스트」간판 배우로서 평생동안 영광스러운 「파우스트 장」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배우는 무대위에서 기왕에 정해진 다양한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따라서 짙은 분장속에 감추어진 배우의 모습은 다시 그 자체가 그의 얼굴일수도 있다. 더구나 그의 묵직한 바리톤의 음색은 푸짐한 볼륨과 풍부한 음조의 변화,감정의 뉘앙스가 격하게 풍겨나와 어느 대목에서도 무기미를 느낄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중후한 음의 압력은 라디오 드라마에서도 특출난 개성을 돋보여 67년부터 그가 해설자로 등장한 대하드라마 「광복20년」은 10년 장기 연속방송으로 장안의 성가를 높인바 있다. ○연출가로도 한때 활동 그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유치진의 「소」,체호프의 「봐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린 창조적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이며연극적 감각과 지성을 겸비한 영화배우·TV탤런트이기도 하다.한때는 경화 프러덕션을 설립,그가 제작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60년대 초반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인생만사 만능은 없다」는 교훈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절감하고 그는 고향에 돌아오듯 무대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하고싶지 않은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간혹 주변에서 자서전을 내라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해 오거나 방송 대담프로그램등에서 초청하면 일언에 외면한다.「배우는 무대에서 말할 뿐」,연기와 무관한 일은 그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가족은 산행 동반자인 부인 이영애(63)씨와 출가한 남매가 있다. 지금도 젊은 후배 연극인들 사이에서 대사를 가장 잘 빨리 외우고 「내가 만약 저 역할을 맡으면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간파하여 선명하고 강렬한 생명체를 그때마다 새롭게 탄생시킨다.또 주역에서 차츰 비켜나고 있지만 역이 크든 작든 「연기자는 계급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자부심과 열의로 자신의 위상과 예성을 의식하는 도도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양한 인생편력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대하려는 생의 충동은 그가 맡았던 파우스트의 일면이며 결국 「연극은 눈과 귀를 통해서 영혼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연극예술과 미와 환희를 이 세상에 가져다준,우리 연극사상 그는 투철한 한 존재에 틀림없다. 그리고 더이상 열띤 대사를 읊조리지 않아도 「오델로」의 이야고나 브루터스의 배반의 이미지를 물흐르듯 되살리는 경지에서 오늘도 그는 그만의 적광의 광채를 어두운 객석에 뿌리고 있다. 기 자 입 력 □연보 ▲1927년 황해도 신천 출생 ▲45년 월남,조선배우학교 졸업 ▲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제1기 성우 ▲47년 원예술좌 입단,성극「모세」의 타이틀 롤로 데뷔 ▲50년 국립극장산하「신협」입단,유치진 작 연출「원술랑」 조우 작「뇌우」출연 ▲53년 국립극단 입단,오상원 작 「녹슬은 파편」이후 해마다 출연 ▲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셰익스피어 작 「햄릿」출연 ▲66년 괴테 원작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 「파우스트」초연서주역,일본 일생극장 개관기념공연 참가 ▲67∼71년 국립극단 단장 ▲68∼89년 한국 연극협회 이사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북벌」 ▲79∼90년 국립극단 단장 ▲88년 조우 작 이해랑 연출「뇌우」 38년만의 재공연 주역 ▲현재∼예술원 회원,국립극단 원로배우,연극협회 자문위원 제1회 방송문화상(58년) 서울시문화상(63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68·73·78년) 연극평론가 협회상(79년) 대한민국예술상(81년) 목련장(8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88년) 예총예술문화상(89년) 연극­유치진 작 「자명고」(54년)를 비롯,「박쥐」「오델로」「느릅나무 그늘의 욕망」「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인생차압」「시라노드 벨주락」「붉은 장갑」「세자매」「안네프랑크의 일기」「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다」「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빌헤름 텔」「죄와 벌」「결혼중매」「베니스의 상인」「이순신」(신명순 작 66년)「갈매기」「북간도」「수전노」「인종자의 손」「남한산성」「전쟁과 평화」「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73년)「세종대왕」「허생전」등 1백70여편과 영화 TV드라마 다수 출연.8월2일부터 「눈꽃」(11일까지 우봉규 작 김석만 연출 국립극장 대극장공연 예정).
  • 배고픈 지식인(두만강 7백리:16)

    ◎콩나물 장수만도 못한 의사·작가 수입/자금난에 출판사들 잇달아 문닫고/문인들은 천직 버리고 장사꾼 전업/이욱·윤동주시인 후대들에 「우리정신」 심어줘 이욱의 시비를 찾아 덕화로 가는 산길을 걸었다.그의 시비는 북한땅 무산이 바라다 보이는 두만강가 산 언덕에 서 있었다.이욱은 1907년 러시아 극동지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숨을 거둔 곳은 연길이었는데 그해가 1984년이다. 시비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한동안 묵도를 올렸다.나는 그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비 앞에서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반동학술 권위자로 몰려 연변대에서 쫓겨났다.그래서 화룡시 서성진으로 하방되었다.시인 이욱을 그때 만났다.어린 중학생이었던지라 시인이 쌓아놓은 책들을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탐독했다. ○반동학술로 몰려 수난 이욱 시비의 정면에는 19 57년에 쓴 시가 새겨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비의 시에서 어떤 명언을 떠올렸다.내일 세상이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민족의 선각자들은 후대를 위해 사과나무와 같은 정신을 심어왔다.이상설,김약연,윤동주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용정시 백금향의 최몽필 문화잠장의 말에서 오늘날 조선족의 문화,선인들이 뿌린 정신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친은 가수였디요.광복 전에 회령 음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서리 축음기와 판 20장을 상으로 받았다고 기래요.아버님은 김정구 이화자 백년설 남인수와 같이 목단강에 가서 공연했다는 말도 들었시요.공연기간이 끝나기 전에 소련 홍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진격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다 귀국했는데 이화자만 남았다는 거디요.이화자가 못떠난 것은 전염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합데다.데려다 치료를 해준 어떤 한족의 은공을 못 잊어 이화자는 한족과 살다가 문화대혁명 때 결국 잘못되었다는 겁네다』 이렇듯 고급문화나 대중문화 모두가 한반도에 뿌리를 두었다.그러나 광복후 소련의 영향을 똑같이 받은 중국과 북한의 문화가 연변 조선족 문화를 좌우했다.19 58년에 일기시작한 문화대혁명의 대우파 투쟁에서는 또 사정이 바뀌어 북한의 문화가 밀려났다.그 이후 70년대 초에는 중국과 북한관계가 다시 개선되었다.조선어는 평양을 기준 삼아야 한다는 주은래의 담화가 나올 정도였다.따라서 언어규범이 북한을 닮아갔고 모든 분야의 문화가 중국과 북한의 혼합형으로 변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는 더 큰 변화를 맞았다.그것은 한국문화였다.한국문화를 닮아보려는 노력을 무던히 했고,실제 한국문화는 급속도로 번져나갔다.이에 대한 투쟁도 만만치 않아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해에도 한국노래의 범람을 경계하는 광대극을 놀았다. ○북한의 언어규범 닮아 문화의 목적은 인간이 중시되어 세상이 보다 편리하게 열리는데 있다고 한다.연변의 원로작가 김학철선생은 미발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문제되어 옥살이를 한 분이다.그가 연변 작가모임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은 적이 있다.반우파투쟁 당시 북경에서 실제 본 목격담이었는데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북경의 한 단위모임에서 어느작가를 우파로 몰아붙이고 있을 때 다른 작가가 발언권을 얻었다.발언에 나선 작가는 『이 분은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당하고만 있는 작가를 변호하고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이다. 용정시 고급중학교 운동장에는 시인 김성휘의 시비가 서 있다.1933년 용정시 백금향에서 태어나 1990년 작고한 이시인의 시 「시냇물의 흐름을/천천히 보아라/천리만리/먼먼 길도/자신 만만타/흐르고/흐르고/내처 흐르며/한생을/말숙하게/가는 나그네」.역대를 살면서 민족과 영혼을 팔아먹고 편히 살아온 좌파들의 양심을 두드리는 소리다.성급한 투쟁은 역사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정치투쟁은 이제사 끝났다.하지만 문인들은 요즘 경제사정에 충격을 느끼고,또 고민하고 있다.수술칼을 손에 쥔 의사가 면도칼을 든 이발사 수입만도 못하고 교수나 작가의 수입이 콩나물장수를 못 따라간다.그래서 많은 지성인들이 천직을 버리고 장삿길에 나서는 이른바 하해로 뛰어드는 것을본다.더구나 출판업이 곤경에 빠져들어 문인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 연변인민출판사는 국가로부터 해마다 1백90만원의 자금을 지원받는다.그럼에도 1백43명의 재직자와 50여명의 퇴직자들의 인건비,기타 경비를 빼고나면 책을 찍어낼 돈이 남지 않는다.내가 근무하는 아리랑편집부에서 80년대 초에 1년에 30여종 문예도서를 발간했는데 지난해는 계획도서가 겨우 4종 뿐이었다.다른 몇종은 위탁출판으로 돈을 받고 대신 출판한 것인데 그것마저 몇종 안된다.그래서 한문도서를 찍어 번 돈으로 조선어책을 발간하고 있지만 그것도 근근득식이다. ○출판은 하늘이 별따기 요즘 작가들은 글을 써도 발표할 수가 없다.장편소설 한권을 발간하는데 자비로 1만5천원을 내야 하는데 그것은 교수급 지식인의 거의 2년 노임이니 개인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혹시 정부나 기업인들의 찬조를 받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하늘의 별따기다.아무리 좋은 명작이고 좋은 글이라도 그것은 원고상태에서 죽어가는 형편이다.그리고 민간예인과 민담가들이 발굴되지 못한채 인생을마치는 경우도 있다. 이에따라 책을 통한 출판문화가 사라지는 경향이다.연변신화서점은 우리 민족도서가 가장 많은 곳인데 조선어책이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종수가 적다.그리고 변강 향진의 상점엔 책이라곤 전혀 없다.그만치 농촌의 문화생활이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화룡시 덕화진에서는 원래 1년에 한번씩 운동대회를 열어왔다.지금은 2년에 한번으로 줄어들었다.그리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가 있는 날이면 영화관이 관중들로 꽉 찼다는 영화관이 문이 다 떨어져 나간 폐물로 되어 버렸다.용정시 백금향은 원래 문화보급이 잘되어 소문난 곳이었는데 지금은 문화잠은 있어도 문화활동은 없다.용정시 개산툰진 문화잠 책임자의 말에서 그 실상이 잘 드러났다. 『촌의 노인협회,부녀회,청년회의 활동차수로 보면 가관입네다.모여서 트럼프를 쳐도 통계에 넣으니깐요.경비난으로 지난해부터 문화활동이 정지됐지 뭡네까.촌마다 문화실이 있고 손풍금이 있지만 손풍금을 칠 사람이 없고 더구나 활동을 조직할 만한 청년 골간은 더욱 없습네다.똑똑한 사람들은 도시로 들어갔디요.연말회보를 하면서 이것저것 숫자는 많이 말하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다 이말입네다』
  • 시인 박두진(이세기의 인물탐구:75)

    ◎신·자연·인간을 노래한 “해의 시인”/불의·적당주의·시속과 타협 단호히 거부/독학으로 인생행로 개척한 극기의 인물/등산·수석채집 30여년… 붓글씨·서화에도 능해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혜산 박두진의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그를 일컬어 문단은 「해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대교수)은 『밤과 밤을 몰아내는 해와의 대조위에 전개되는 「해」에는 혜산이 희망하는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세계는 꽃과 새와 사슴과 칡범과 인간이 한 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동심을 이루고 있지만 과연 현실이 기다림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그의 시적 변모는 이러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혜산 박두진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신앙의 영향은그로하여금 인간중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고 가장 위대하게 사랑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언덕과 하늘과,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집단이 감동속에 결속되고 있음을 「갈보리의 노래」로 절규하고 있다. ○“위선과 탐욕 버려야”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같은 치욕을,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 눈을 돌려 「이제 사물과 인간은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하나의 사건이 되고,가식과 위선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의 특징은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추구하지 않는 점이다.86년 한 신문에 발표한 칠순기념 특별기고에서 「가난이라든가 개인적인 슬픔,사람에 대한 배반감이나 기쁨을 시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문학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인류공동의 문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로 천착하여 진실에 대한 투시력을 보여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즉 「시의 사상,시의 윤리,시의 심미적 창조가치는 언제나 그 창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만 시적 진실이 획득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면서 「나이든 사람은 젊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업고 나와 학연·지연을 앞세워 설쳐대는 것은 문학의 권위와 문학인의 자존심을 잃는 일」이라고 우려해 마지않았다. 혜산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고 그의 시의 소재들은 이런 다양한 지란을 이겨낸 심혼의 결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인 신대철은 팔순을바라보는 나이에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와 순수무결한 시심을 잃지 않는 혜산을 향해 『자기초월의지를 가진 인격과 고고한 학자의 기풍과 시인의 기상을 흐트리지 않아 문단에서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기도 안성 「고장치기」로 불리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청렴한 선비이던 선친으로부터 일찍이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고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 외엔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4세때 「문장」지에 등단 24세에 「문장」지의 시 추천을 거쳐 문학활동을 전개하기 이전까지 그는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원 생활을 전전했고 45년 해방과 함께 그 당시 유일한 출판사이던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것이 조지훈·박목월과 만나 「청록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된다.이후 자연과 신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더니 60년대말부터 수석취미에 침몰하여 「돌」 하나만을 주제로 하는 「수석열전」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수년간 연재,지금은 「돌의 시」로써 시인만의 청복을 누리는 시기다. 서대문구 창천동 그의 집에 가보면 마당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는 「뇌뢰낙락하고 고하고 괴하면서 관용자수 한 명석」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고 그의 돌에 대한 사랑은 3천여편 이르는 시작 외에도 서화나 수필에 넘치도록 표현되어 있다. 「작은 한개의 돌이 갖는 형태미와 색채미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막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난이 정의 극치라면 수석은 의 극치,난이 부드러우면서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표일 불기이면서 차라리 성자롭다」등,그리고 「시를 쓸 때의 사무사의 맑은 마음,맑은 눈만이 석격이 심웅하고 석품이 우귀」한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혜산의 취미는 다양하다.시를 쓰는 것과 동시에 30년남짓 등산을 하고 난을 키웠으나 그는 이를 굳이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붓글씨와 서화에 능하여 앞을 향해 질주하는 듯 한 아름다운 필체는 「혜산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서도를 감히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어떤 것은 너무 높은 경지라그렇고,어떤 것은 나 자신이 족히 미치지 못해 모자라는 것을 취미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를 좋아하면서 산을 좋아했는지 산을 좋아하다가 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산은 심약한 그를 「의지적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일목일초에 기울이는 정서적·감각적 운치를 알게 했으며 「한개의 돌에 얽힌 정신적 파동」은 그의 시심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돌아본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진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연포 이하윤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잔의 술실력으로 「도도한 무애의 웅변,월탄의 호통,공초의 무언,수주의 독설속에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철저하게 밤을 새운 이야기」는 문단사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수석에 물을 뿌리고 돌보면서 가슴속에 들끓는 정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그럼에도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의식해 본 일이 없다」고 끝내 도도하다.다만 「시는 한낱 감상이 아닌 인간이 신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덕윤과 경외의 념」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언제나 쓸 것이 밀려 있고 생각에 쫓겨 「한없이 즐겁고 한없이 탄력을 느끼면서 고양된 감정,맑은 생각,투지와 저항,여유와 절박감이 뒤섞인 속에서」 그는 총체적으로는 어떤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껴왔다고 수필집 「돌과 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후엔 일주일에 두번 추계예술대 강의,그외엔 2박3일정도로 수석채집을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수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 지루해 하지 않는다.가족은 동화작가인 이희성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만 4형제.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부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혜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 속에는 시가 있고 시를 상실한 사람은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신의말씀」이라는 그의 시론을 시로써 실천해냈고 마지막 붓끝까지도 신과 자연과 인간의 결속을 불후의 명시로 성취할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연보 ▲19 16년 경기도 안성출신,호 혜산 ▲39년 「향현」「묘지송」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 ▲46년 첫시집 조지훈·박목월등과 「청록집」(을유문화사)출간 ▲48년 한국청년문학협회 시부위원장,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49년 제2시집 「해」(청만사)출간,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51∼81년 연세대 교수 ▲65년 우석대 조교수 ▲70년 이화여대 부교수 ▲81년 단국대 초빙교수 ▲86∼현재 추계예대 전임대우교수 시집 「오도(오도)」(54년)「박두진 시선」(56년),수필집 「시인의 고향」(58년),시론집 「시와 사랑」(60년),시집 「거미와 성좌(성좌)」(61년)「인간밀림(인간밀림)」(63년)「하얀날개」(67년)「청록집·기타」「청록집 이후」(68년),시론집 「한국현대시론」,수상집 「생각하는 갈대」(70년),영역시선집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역 「Sea of Tomorrow」(71년),수상집 「언덕에 이는 바람」,시집 「고산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한국현대시문학대계 「박두진」(73년),시집 「속·수석열전」(76년)「야생대」(77년),시선집 「예레미야의 노래」,시집 「포옹무한」「하늘까지 닿는 소리」「박두진 전집」(범조사 81년)「나 여기에 있나이다,주여」(82년)「청록시집」(83년),수상집 「돌과의 사랑」「그래도 해는 뜬다」,시선집 「일어서는 바다」(86년) 「불사조의 노래」(87년),시집 「빙벽을 깬다」(90년),산문전집 「햇살,햇볕,햇빛」(91년)「박두진 전집」(신원문화사 95년) 아세아자유문학상(56년) 서울시문화상(63년) 3·1문화상 예술상(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76년) 인촌(인촌)상(88년) 지용문학상(89년)
  • 치매 70대 아버지「고려장」/50대구속/“단칸방서 모시기 어려워”

    【수원=김병철 기자】 경기도 수원남부경찰서는 25일 치매증을 앓고 있는 칠순 아버지를 내다버린 이준석(51·수원시 권선구 매산로 2가 99의4)씨를 존속유기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지난달 17일 하오 집에서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이모씨(74)를 데리고 나가 다음날 하오 10시쯤 대구시내 한 주택가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이씨는 5형제중 장남으로 지난해 9월 어머니가 숨진뒤 혼자된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둘째 동생이 가정형편으로 더이상 모실 수 없게되자 지난 3월부터 단칸 전세방에서 아버지를 모셔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씨는 경찰에서 『아버지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등 치매증을 앓고 있는데다 어려운 가정살림에 모시기 어려워 이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 고속도 3중 충돌… 3가족 10명 사망/김천

    ◎승용차 앞바퀴 펑크… 분리턱 넘어 【대구=한찬규 기자】 16일 상오 1시20분쯤 경북 김천시 신음동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서울기점 2백29.5㎞)에서 경기 4그 3594호 무쏘승용차(운전자 정춘식·38·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벽산아파트)가 중앙선을 침범,마주오던 인천 2고 5814호 스쿠프승용차(운전자 유진학·35·인천 서구 석남동 중앙빌라)와 충돌했다.이어 스쿠프승용차는 뒤따라 오던 경기 9차 2555호 탱크로리(운전자 이인선·35)에 받히면서 불이 났다. 이 사고로 무쏘승용차 운전자 정씨의 부인 진형숙씨(38)와 큰딸 지혜양(11)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둘째딸 지연양(8) 등 2명이 중상을 입었다.또 스쿠프승용차 운전자 유씨 일가 4명과 동생 진고씨(33·회사원·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일가 4명 등 두가족 8명이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찰조사 결과,이날 사고는 추월선을 달리던 무쏘승용차가 앞바퀴가 펑크나면서 핸들을 지나치게 왼쪽으로 조작,높이 20㎝의 중앙분리턱을 넘어서는 바람에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스쿠프 승용차는 무쏘승용차에 부딪히는 순간 튕겨져 옆차선을 달리던 탱크로리에 다시 받혀 불이 났다. 스쿠프승용차 운전자 유씨 일가는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아버지 칠순잔치에 참석한 뒤 돌아오다가 이같은 변을 당했다. 사망자명단은 다음과 같다. ◇무쏘 승용차 ▲진형숙 ▲정지혜 ◇스쿠프 승용차 ▲유진학 ▲부인 이해숙(34) ▲아들 일준(11) ▲딸 한나(5) ▲유진고 ▲부인 김영란(28) ▲맏딸 리(2) ▲둘째딸 애리(2개월)
  • 40대 복역 70대 “다시 철장행”

    ◎절도전과 12범… 취객털다 7년 보호감호형/6년전 결혼 아내 “선처해 주오” 눈물의 호소 꼬박 40년을 감옥에서 보낸 칠순노인이 또다시 절도죄로 실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서울고법 형사항소2부(재판장 이강국 부장판사)는 5일 취객의 호주머니에서 8만원을 털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구속기소된 문주식(70·서울 성북구 정릉동)피고인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재범의 위험성이 높다』며 보호감호(7년)처분을 내렸다. 6·25 전쟁때 머리 등 온몸에 파편을 맞고 부상으로 제대한 문씨는 수술후에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통증을 달래느라 진통제와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다.술만 먹으면 남의 물건에 슬그머니 손이 가는 못된 버릇도 이때부터 생겨났다.88년까지 절도전과 12범으로 모두 40년을 감방에서 늙어야 했다.살아온 인생의 반이상을 수인으로 보낸 셈이다. 폐인과 다름없던 문씨는 89년 정모씨(여)를 만나 늘그막에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새삶의 기회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문씨는 지난해 8월 또다시 도벽이발동,길가에 쓰러져 자고있는 취객의 호주머니를 털려다 붙잡혔다.법원도 이날 더이상 관용을 베풀지 않고 보호감호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문씨와 부인은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며 『아내와 함께 여생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는 눈물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지만 때늦은 「참회」가 되고 말았다.
  • 먼로 우표(외언내언)

    세기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사후30여년이 지났지만 그녀가 누리고 있는 「섹스 심벌」의 여왕자리는 아무도 넘보지 못한다.할리우드 영화계의 어떤 글래머나 뇌쇄적 미녀배우라 하더라도 먼로의 신화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그녀의 죽음 자체도 자살이냐,음모에 의한 타살이냐로 엇갈려 있다.그런 신화 때문인지 먼로에 관한 화제는 지금도 심심찮게 이어진다. 그런 먼로가 이번에는 미국의 우표에 등장해 또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6월에 발매될 이 우표는 미 대중문화의 스타들을 담는 우표시리즈의 제1호.빛나는 금발에 백만불짜리 가슴을 자랑하는 농염한 그녀의 상반신이 측면으로 찍혀 있다.세계의 뭇남성들을 현혹시킨,조금은 퇴폐적 분위기의 관능미가 그대로 살아난 얼굴표정이다. 사람들은 먼로의 이런 표정을 「백치미」라고 했지만 유명한 전기작가 도널드 스포토는 먼로의 전기에서 다른 평가를 내렸다.『항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먼로는 멍청하고 행실 나쁜 금발미녀가 아니라 지적인 여자였다』라고. 우표에서 현직 대통령이나 역사상 유명한 위인·예술가·학자의 초상만 보아왔던 우리의 눈에는 먼로의 우표는 낯설게 느껴진다.『아무리 유명 스타라해도 영화배우가 어떻게…』라는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하긴 대중문화 스타의 천국인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10여년전 칠순의 원로 대중가수가 정부의 훈장을 받게 됐을 때 사람들은 자격이 있네없네 시비를 걸었다.한국 최고의 인기가수인 이미자가 세종문화회관서 첫 공연을 가질 때도 장소 사용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기도 했다.좁은 소견탓이다. 수년전 일본의 유명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한국계 미조라(미공) 히바리가 죽었을 때 일본신문들은 1면과 사회면 톱,그리고 사설로 그녀를 애도했다.먼로의 우표와 함께 부러운 일이다.
  • 회장님의 골프 스타일은

    ◎장타 즐기는 파워형/정세영회장/내기 안하는이론가/권종현회장/실력 수준급 매니아/박용학회장/“나홀로 퍼팅” 독립파/이건희회장/핸디25 또박또박형/구자경회장/정확한 룰의 「매너박」/박용곤회장 흔히들 골프를 매너의 운동이라고 한다.에티켓과 룰을 중시하면서도 유일하게 심판이 없는 게임이다.때문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국제화를 위해 모든 사원이 골프를 쳐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재벌 총수들의 골프 스타일은 어떨까. 현대그룹 정세영 회장은 점수보다는 호쾌한 타구를 즐기는 편이다.힘이 좋아 장타이며 핸디는 20.한 번의 연습 스윙도 없이 곧바로 치는 스타일이다.평소처럼 왼 손으로 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어색하다.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은 대충 치는 편이다.머리 식히러 와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지론.젊었을 땐 싱글 수준이었으나 지금의 핸디는 15.옛날과 달리 허리가 돌아가지 않아 요즘은 팔로만 친다.이론이 밝아 코치를 잘 하며 내기는 절대로 안 한다.OK골프를 즐긴다.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은 골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회사가 어렵던 70년대 『개인 재산은 처분할 망정 골프장은 곤란하다』며 금융당국의 매각 종용을 뿌리쳤을 정도이다.핸디 12로 싱글에 가까운 수준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토요일마다 관악골프장을 찾는다. 삼성의 이회장은 주로 혼자 친다.비디오와 책을 통해 익힌 이론으로 드라이버의 속도와 비거리의 관계를 따지는 수준이다.최고 점수는 71. 그러나 줄담배 탓인지 퍼팅하는 그린에서 담배를 피우고,남들이 퍼팅할 때 연습구를 놓고 혼자 연습한다.「연습 광」인 셈이다.요즘엔 취미를 바꿔 안양골프장에 있는 승마장을 즐겨 찾는다. 럭키금성의 구자경 회장은 골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거리가 나지 않아 손으로 던지는 것이 낫겠다는 농담도 듣지만 나이칠순에 비해선 잘 치는 편.핸디 25의 또박또박형이다. 과묵한 성격 때문에 직원들에게 「무서운 회장」으로 통하는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은 골프를 칠 때만은 활달하다.워싱턴 주립대학 시절 서클활동을 통해 배운 실력은 핸디 12.룰을 거의 완벽하게 지켜 「매너 박」으로 통한다.
  • 성인 49% “경조비 연30만원이상”/6대도시 1천명 설문조사

    ◎1백만원이상 지출도 9.8%나/1회평균 3만2천원… 14회 참석 성인들은 1년에 평균 17회의 경조사에 초대받아 14회가량 응한다.절반정도는 연간 경조비로 30만원이상씩 쓴다. 16일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서울 등 6대도시의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작년 한해의 경조사실태를 조사한 결과 결혼식 9.6회,백일·돌잔치 2.6회,장례식 2.5회,회갑·칠순잔치 2.4회 등 평균 17.2회의 경조사에 초청받았다.이중 장례식 92%,결혼식 81.3%,백일 또는 돌잔치 80.8%,회갑 또는 칠순잔치 79.2%의 순으로 참석했다. 경조사참석이 가장 많은 달은 4월(24.5%)·5월(22%)·10월(13.9%)이며,일요일 또는 휴일 67.8%,토요일 29.1%다. 49.2%가 경조비로 연간 30만원이상을 지출하며,1백만원이상도 9.8%나 된다.직장동료 또는 친지에 대한 1회 평균경조비는 3만2천1백64원이지만 가족이나 친인척의 경우는 2.7배인 8만9천2백14원이다. 결혼식이 3만2백9원,회갑 또는 칠순잔치가 3만3천6백21원,백일 또는 돌잔치가 2만9천5백46원,장례식이 3만5천2백78원이다. 경조비의 액수는 42.4%가 친숙정도를 기준으로 정하며 35.1%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낸다.79.9%가 현금으로,13.4%는 현금 또는 선물로,5.2%는 선물로,1.5%는 축전 또는 조전으로 한다. 가족이나 친인척을 제외한 경조비로는 작년에 지출한 3만2천1백64원보다 2천7백31원이 적은 2만9천4백33원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경조사별 평균소요비용은 결혼식이 1천3백96만원,장례식 6백65만원,회갑 또는 칠순잔치 4백78만원,백일 또는 돌잔치 81만원이다. 한편 경조비로 받은 금액은 장례식 7백16만원,결혼식 6백99만원,회갑 또는 칠순잔치 4백31만원,백일 또는 돌잔치 91만원이다.
  • 인간문화재 만정 이소희(이세기의 인물탐구:62)

    ◎맑고 구성진 목소리 “당대의 명창”/13세때 이화중선 소리에 매료… 송만갑 문화 입문/19세때 「춘향전 전집」 내고 72년 미 카네기홀 공연/“팔순기념무대 열어 사그라진 목소리 펼쳐 보이고파” 「천지 삼겨 사람이 나고,사람 삼겨 글만글저,뜻정자 이별별자 어이허여 내셨던고.뜻 정자를 내셨거든 이별 별자를 없었거나…’ 이는 「춘향가」중 「옥중장탄」이다. 「천지삼겨」는 정정렬 바디로 박녹주이후 만정 김소희만이 꿋꿋한 옛맛을 이어받고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만정은 국악의 대가이자 우리가 세계에 자랑해 마지않는 인간문화재다. 만정을 둘러싼 찬사는 책한권을 꾸며도 넘칠 것이다. 이대교수이며 국악작곡가인 황병기는 그의 소리를 「가을밤 기러기소리」에 비유했고 음악평론가 서우석은 「낭랑하고 확실하게 뻗어나가는 절세의 명창」,소설가 박경수는 「민족의 한이 담긴 애원성의 절창」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만정은 그 음색이 맑고 차가우면서도 그 안에 이른 봄의 매화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더구나 그의 비절한 계면조는 억지 눈물을 강요하는 청승푸념과는 달리 안으로 한을 참아낸 고고한 유열이 깃들여있다. 이는 곧잘 강주 사마의 청삼을 눈물로 적신 「비파행」의 한구절에 비유되어 「옥반에다 크고 작은 구슬을 떨어뜨리듯」 「홀연 은병이 깨지며 물줄기 쏟아져내리듯」 애절한 사연이 굽이굽이 엮어지고 우조 또한 「철갑두른 기마병이 돌격하여 창칼을 부딪치듯」 웅장청원과 기염만장을 토해낸다. 1936년 일본 빅터레코드가 출반(서울음반 복각)한 「춘향전 전집」을 들어보면 열아홉살의 앳된 목이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이 청순하고 수줍은 느낌을 살려 그의 가락위에서 듣는 이의 흥취가 잦아들고 휘몰아친다. ○동·서편제 나눔은 무리 애원성의 진양조로 인해 만정은 서편제의 일인자로 손꼽히고 있지만 넉넉하면서도 화평한 평조와 경드름 설렁제를 두루 구사하여 어느 한 창제에 그를 못밖는 것은 무리가 아닐수 없다. 명인의 자질은 무엇보다 타고 난 소리와 홍진을 뛰어넘는 격조라면 이를 고루 갖춘 이가 아마도 만정일 것이다. 만정은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자태와 인물과 예인으로서의 조건에서 한치의 허점도 찾아볼 수 없다. 「노래를 하다보니 노래가 모두 시라 가사와 창을 올바로 알고 노래부르기 위해」 그는 등불을 돋워놓고 고전을 탐독하고 묵필을 가다듬어 묵정 그윽한 속에 노래의 진수를 아로새겨왔다. 여기에 가야금 거문고와 양금 살풀이춤이 뛰어나 그에게 가야금 가락을 닦아주던 김윤덕은 「만정은 창의 최고이지만 만약 가야금을 했다면 누구도 미치지 못할 명인이 되었을것」을 아쉬워했고 원로국악인 성경린은 「김소희의 춤은 소리보다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판소리 더늠은 방정하고 단아하다.그리고 단순한 득음이 아닌 심득의 창성으로 관중을 사로잡아 지금까지 그가 공연한 판소리 무대는 흥청거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연이 있는 날은 자주 댕기들인 쪽진 머리에 옥비녀,옥색치마로 화사하게 단장하고 쥘부채 하나만으로 만마를 다스리고 천하를 호령한다. 수많은 공연중에서도 지난 84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명인명창초대 공연은 그의 판소리의 위력이 얼마나대단한가를 한눈에 증명한 감동의 무대였다. 그날의 청중은 대학생에서 직장인,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촌로에 이르기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구름같이 메웠고 객석은 시종 박수와 추임새로 「국창」에 대한 예우를 지켰다. 만정 역시 칠순을 눈앞에 둔 나이와는 상관없이 정확한 발음에 적절한 극적표현 그리고 구성진 수리성과 질감이 풍부한 방울목으로 목을 굴려 공연이 진행되는 2시간을 정교하게 수놓아갔다. ○전 일본 순회공연 가져 특히 「춘향가」중 「오리정 이별」대목은 자진모리 장단을 엇박으로 바꾸면서 원박으로 되돌아가 중모리로 마무리짓는 상성의 극치를 보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아무리 「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소리목에 깃든 공력앞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공연은 그의 전성기인 60∼70년대에 미 카네기홀과 링컨센터에서의 기립박수를 꼽을수 있다. 또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초청한 전일본 순회 공연도 한국 국창의 긍지를 마음껏 과시한 역사적 무대의 하나다. 만정은 평소 겸허하고 따사로우나저속하고 부당한 천격을 용납하지 않는다.후학들이 실수로라도 경박한 언행을 저지르면 그 자리에서 엄히 나무라고 자세를 바로잡아준다.그러나 사소한 일에 연연하거나 사적인 인맥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상대방이 지닌 기량과 미점을 적소에 둘줄 안다. 예를들어 국악계는 계보에 엄격한 편이지만 그는 자신이 키운 성창순을 정권진에게 보내 강산제를 이어받게 했고 신영희를 박초월에게 소개하는등 그 스승의 좋은 대목을 제대로 배울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2년전 동숭아트홀에서 외동딸인 박윤초가 판소리 독창을 열었을때는 딸에게 『너 비위도 좋다.그 소리를 가지고 어떻게 노래하느냐』고 나무라면서도 막상 공연날은 무대에 나와 『아직 미거하나 후진을 키운다는 뜻에서 격려해달라』고 부탁하기를 잊지 않았다.후계자 자리를 딸에게 물려주게 되느냐는 문제도 『제가 잘하면 물려줄 것이요 잘못하면 어쩔수 없다』고 냉정한 면을 지킨다. 만정은 이제 국악계의 어른으로서 국악이 발전되어지는 과정을 그 한가운데서 지켜보는 위치다.지난해 신병으로 협회이사장 자리를 물러나면서 『원래 이사장 자리라는 것은 국악실력보다는 단체를 잘 이끌고 운영할수 있는 실무자가 바람직하다』는 이유로 이성림을 추천했고 이사장 선출로 야기될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는 결단을 보였다. 만정의 어린시절은 모든 「끼」있는 예인의 삶이 그러하듯 모진 가난과 슬픔의 기록이 점철된다. 판소리의 태두인 동리 신재효를 배출한 고창 흥덕에서 출생,부모의 불화로 부친은 타관으로 떠돌고 모친마저 친정으로 가버리자 친척집에 얹혀서 고아처럼 자라났다. ○「천에 하나」 어려운 천재 광주여고보에 들어간 13살 되던해 당대 명창이던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장래 「소리하는 사람」이 될것을 결심했고 동편제 소리의 대가인 송만갑문하에 입문한지 1년만에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송만갑은 미려청아한 소리를 지닌 어린 소녀를 향해 「천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천재」임을 인정하여 수업료도 받지않고 그의 모든 것을 전수시켰다. 이어서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비롯,화순의 박동실에게 「수궁가」「적벽가」,김계문에게 향제가곡을 사사하고 이승환에게 거문고,강태홍 김윤덕에게 가야금등 금과옥조와도 같은 스승들을 거치면서 국악의 가시밭 길을 무난하게 헤쳐나갔다. 21살에 결혼하여 10년만에 부군을 잃고 3남매를 혼자서 키우면서 속창 속악의 천시속에서 서너명을 앉혀놓고 공연을 한적도 있고 조선창극단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때문에 왜경에게 붙잡혀 유치장 신세를 진적도 있다. ○소희이름 이모가 지어 조선성악연구회에 드나들던 소녀시절 본명 김순옥을 버리고 이모인 김남수씨가 지어준 「소희」란 이름을 가졌다.아호 「만정」은 「날이 갈수록 잔잔히 이름을 날리라」는 뜻으로 사주를 보는 이가 지어준 것이다. 만정은 지난 25년간 살았던 종로구 화동 골목안의 한옥을 떠나 84년 삼청동 쪽에 위치한 소격동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연탄불갈기에서 벗어났다. 지금도 결혼하지 않은 아들(준석·46·상업)과 둘이 살면서 손님이 오면 손수 문을 따주고 제자를 가르치고 밥짓고 빨래한다. 그만큼 그의 생활은 궁핍이 펼날이 없이 조금이라도 여유가생기면 가난한 제자들을 데려다 가르쳤다.지금은 국악계의 중진이 된 김소연 안향련이 그들이고 영화 「서편제」로 스타가 된 오정해는 8년간 이집에 머물면서 그가 세운 서울국악예고를 나왔다. 찬연한 오늘은 참담한 어제가 있었기에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지난 1,2년 병치레로 쇠잔해졌을 망정 그에게선 여전히 「닦은 자의 비어있는듯 차있는(수자 여하이유실)」예술불멸만이 돋보인다. 그리고 모진 시간속에서도 국창의 기개를 잃지않아 『만약 그때까지 살수 있다면 팔순 기념무대에 서서 사그라지면 사그라진대로 나의 목을 숨김없이 펼쳐보이고 싶다』고도 말한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화려한 흔적을 감추고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 서려는 예인의 모습에는 자신을 끝없이 탁마하며 살아온 정제된 아름다움만이 하나의 구둣점처럼 선명하게 찍혀있다. □연보 ▲1917년 전북 고창 출생,본명 김순옥 ▲1930년 흥덕공립보통학교 졸업 ▲1932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2년 수료 ▲1929∼34년 송만갑에게 「심청가」「흥보가」사사 ▲1936년 일본 빅터 오케이레코드 전속,「춘향전전집」취입 ▲1948년 여성국악동우회 설립 ▲1954년 민속예술학원(서울국악예고 전신)설립 ▲1959년 국악30년 김소희 판소리첫번째 독창회(서울 원각사)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파리국제민속예술제 참가이후 해마다 세계 각국순회 공연,신호열씨에게 서예사사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제5호 판소리 기능보유자),뉴욕 아시아학회 초청 미국공연 ▲1967년부터 국전서예부 연3회입선 ▲1969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주최 요미우리홀 공연,전일본지역 순회 ▲1972년 미국카네기홀서 김소희 판소리독창회,뮌헨올림픽 참가공연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심청가전집」(5장)출반 ▲1977년 불우이웃을 위한 회갑공연(서울시민회관)「춘향전」완창 출반 ▲1979년 김소희 국악50년 기념공연(세종문회회관),고향 흥덕에「만정 김소희여사 국창기념비」건립 ▲1982년 제1회 한국국악대상 수상,첫민요 발표회(공간사랑),민요전집 출반(성음사),이대 한양대 출강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동아일보주최 「명창 김소희 판소리의 밤 대공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88년 서울 올림픽폐막식 공연,「김소희 구음과 민요」출반(성음사) ▲1993년 국악협회 이사장,94「국악의 해」지정기념 국악제 총지휘 ▲1994년 제1회 방일영국악상 및 11월28일 수상기념공연
  • 오구라 컬렉션/박정호 일본주재 문화원장(굄돌)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는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가 상설전시·보관되고 있다(현재는 동양관 개수중).일제하 대구전기사장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씨가 1921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삼국시대 금동유물등 상당량의 한국문화재를 수집,패전과 동시에 일본으로 가지고 갔는데 그 1천30점이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이다. 이 오구라 컬렉션을 조국의 품에 되돌리겠다고 40여년간 반환운동을 해 온 재일동포 할아버지가 있다.­현위헌씨,70세. 우리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지만 1949년 일본에 건너간 현씨는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집념으로 11년의 수소문끝에 오구라씨를 찾아낸다.현씨는 속마음을 숨긴채 4년간의 교분을 쌓은후 오구라씨를 설득,오구라씨는 마침내 대구의 옛집 지하에 묻어둔 도자기중 자신이 아끼는 몇점만 찾아주면 우리문화재의 대부분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그 무렵(1964년),대구에 묻혔던 도자기들은 전기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으로 넘어가고 오구라씨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오구라 컬렉션은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고 만다. 그래도 집념을 버리지 않은 현씨는 한일간 체결된 「문화재와 문화협력에 관한 합의의사록」(65년12월18일)을 보고 92년부터 탄원의 뜻이 담긴 질문서를 두차례에 걸쳐 일본외무성과 문화청에 보낸다.질문요지는 『의사록에 따르면 일본국민이 갖고있는 한국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에 기증하도록 권장토록 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국가가 소유하는 한국문화재는 한국에 건네준다는 취지아래 협정된 것임.따라서 국립박물관 기증에 의해 일본국가 소유가 된 오구라 컬렉션중 한국문화재 1천30점을 한국에 반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느냐』는 것. 내년은 한일국교 정상화 30주년. 우리 문화재를 되찾겠다고 40여년간 이국땅에서 애써 온 현씨도 이제는 칠순 할아버지가 되었다. 현위헌 할아버지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은 언제인가.
  • 나는 사형수의 아들이었다/조동진 지음(화제의 책)

    ◎50년대 지리산서 목희활동 경험담 평북 용천 출신으로 신학자이자 칠순 목사인 지은이가 53년 한국전쟁이 휴전할 때까지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한 단면을 기록했다. 「지이산으로 간 목사」란 부제에서 보이듯「여순사건」이 휩쓴 뒤 뒤숭숭했던 전남 여수·순천·구례등지의 지리산 산자락을 돌며 5년동안 벌인 목회활동이 특히 현장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와 함께 ▲광복직후 북한지역에서 벌어졌던 민족및 교회의 분열 ▲「6·25」당시의 체험담 ▲53년 1월 다대포 앞바다에서 침몰해 2백50여명의 승객이 숨진「창경호 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등을 담담한 어조로 밝혔다. 지은이가 3부작으로 예정한 회고록 가운데 첫째권이다. 별 7천원.
  • 「자굴산에서 악양루로」 발간/전상배·이영숙씨 가족

    ◎“아버님 칠순기념 가족문집 냈어요”/일가·사돈 등 32명의 작품·이야기 담아/3대에 걸친 가족사랑 글로 곱게 표현 3대에 걸친 사랑을 곱게 표현한 가족 문집­「자굴산에서 악양루로」. 정신과의사인 전상배씨(49·동민신경정신과 원장)와 부인이영숙씨(42·불교방송 아나운서) 가족들은 지난달 이 집안 어른 전병조씨의 칠순(고희)을 기념, 잔칫상 대신 조촐한 가족문집(삶과 꿈간)을 출판했다. 고향집인 경남 의령군의 진산 자굴산과 강변의 악양루에서 제목을 뽑고 결코 적지않은 2백70쪽 분량의 책 5백부를 찍어 냈다. 전국 각지의 친지들에게 책이 전해진 요 며칠 축하 인사를 받느라,또 글읽은 소감을 나누느라 전화통이 한창 바쁘다.10여권은 조카딸들의 혼수품으로 챙겨두었다. 문집에 원고를 낸 사람은 모두 32명.조부모 전병조·이섭씨(71) 직계후손중 차남 형배씨(47)의 늦동이 한돌배기 아들만 빠졌고 미국에 사는 전병조씨의 막내동생과 두 사돈이「사향곡」등의 글을 보탰다. 이 일을 기획한 것은 이집안 6대 종며느리인 이영숙씨다.10년전설날 아침 한시를 즐겨 짓는 시아버지가 즉석감회를 적어 준 한시에 감명을 받아『꼭 책을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10년만에 이루어졌다. 특히 시어머니 이씨는 틈틈이 해온 서예연습에 혼신을 기울여 지나온 생을 회상하는 글들을 요즘은 보기 힘든 내방가사체로 작성,22쪽이나 채웠다. 『아버님에 대한 사랑을 담는 뜻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조부모·엄마·아빠와 숙부·숙모,그리고 사촌 형제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어떤 길을 가고 생각을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틈틈이 모여 가족회의겸 편집회의를 한 끝에 어른들의 직업과 관련된 「나의 길을 걸으며」란을 넣은 것도 이때문이라고 이영숙씨는 설명한다. 대기업체에 다니는 막내 시누이 남편 김지용씨(38),고등학교 국사교사인 둘째시누이 남편 김환길씨(42)와 의사·아나운서가 직업인 이영숙씨 부부들의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특히 맏아들 전상배씨는 정신과 의사로「우리집안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부제가 붙은 「술과 정신건강」칼럼을 쓰기도 했다.유교관습에 달통한 시아버지 전병조씨는 자작 한시 외에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옛관모이야기」를 썼고 아이들은 독후감에서부터 엄마 아빠에게 주는 편지·일기·작문들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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