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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묘제현 수필」등 5종/보물로 새로 지정

    문화체육부는 2일 16세기 초에 쓰여진「기묘 제현 수필」을 보물 제1197호로 지정하는 등 문화재 4종을 보물로 지정했다. 「기묘제현수필」은 조선 중종 때(1519년)발생한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성세창등 당대의 명현 24명의 친필 시문을 담은 것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사상사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기묘명현 12명의 편지 39통을 수록하고 표제를 명필 한석봉이 쓴「기묘 제현 수첩」은 보물 제1198호로 지정됐다. 이와 함께 19세기의 화가인 유숙이 그린「혜산 유숙 필 매화도」8첩 병풍이 보물 제1199호로,전북 고창군 선운사 도솔암 주변 바위에 새겨진「선운사 도률암 마애불」을 제1200호로 각각 지정했다. 이밖에 경북 울진군 불영사의「불영사 대웅보전」은 1725년 건축 당시의 내부단청과 탱화가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돼 보물 제1201호로 지정받았다.
  • 보험모집인이 청약서 일방 작성/가입자 고지위반도 보험금 지급

    보험 가입자가 고지 의무를 위반했어도 모집인이 보험 청약서를 일방적으로 작성했다면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보험감독원은 28일 분쟁조정 위원회를 열고 성모씨(50·여)가 H생명을 상대로 낸 암사망 보험금 청구 분쟁에 대해 『모집인이 계약의사만 확인한 뒤 회사에서 청약서를 작성했다면 가입자에게 고지의무 위반의 과실을 물을 수 없다』며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성씨는 남편 정모씨(54)가 지난 92년 11월 H생명사에 1천만원짜리 암보험을 든 뒤 지난 1월7일 직장암으로 숨지자 암사망 보험금을 신청했으나 고지의무 위반으로 거절당했다.H생명은 정씨가 위염 등으로 치료를 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고지의무 위반으로 계약해지의 사유가 된다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씨는 모집인이 친필서명도 받지 않고 계약 의사만 확인한 뒤 회사에서 청약서를 작성,고지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었다. 감독원은 최근 보험 가입자가 고지의무를 위반했다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 「임정 구지」 현판 만지며 감회 젖어(김대통령 방중여로)

    ◎「한민족 독립운동의 성전」 기념휘호 남겨/연도의 중국인,김대통령 알아보고 박수 ▷상해시장 접견및 만찬◁ ○…김영삼대통령내외는 상해도착직후 임정청사를 둘러본뒤 숙소인 신금강호텔 4층 백옥란청에서 황국상해시장 일행을 접견,10여분간 환담한뒤 황시장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 김대통령은 황시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처음 중국을 방문하는 것이지만 공항에서 오면서 1천3백만 인구의 상해시가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다고 느꼈다』며 『특히 우리나라 주요기업들의 간판이 거리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반가웠다』고 상해방문 소감을 피력. 김대통령은 『우리나라와 중국은 수교역사가 불과 1년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놀라운 교역량 증가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상해시는 중국 발전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큰 희망이 있다』고 언급. 김대통령은 또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청사를 돌아보면서 선조들이 그 좁은 장소에서 독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감회가 깊은 표정. 김대통령은『상해시는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을 잇는 큰 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임정청사를 잘 보관해온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명. 황시장은 이에앞서 『대통령의 상해시 방문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등 양국간의 경제협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인사. ▷임정청사방문◁ ○…상해의 숙소인 신금강호텔에서 한시간의 휴식을 취한 김대통령내외는 승용차편으로 상해시 노만구 306동4호에 있는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30여분 방문. 김대통령은 청사건물 골목을 걸어들어가 건물입구의 흰대리석에 새겨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란 현판을 손으로 만져보며 잠시 감회어린 표정을 지은뒤 건물관리소장인 장명목씨의 안내를 받으며 3층 건물내부를 돌아봤다. 김대통령은 장소장으로부터 임시정부 원년인 1919년 첫 임정국무원 요원들이 기념촬영한 사진설명을 듣고는 『너무 젊을때 사진이라 잘 알 아 볼수가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시. 김대통령은 특히 신익희선생의 모습을 보고는 『어제도 와세다대학에서 선생님 얘기를 했었는데…』라며 『그분을 모시고 정치를 처음 시작했었다』고 회고. 이어 3층에 올라가 요인숙소를 둘러본후 『이렇게 좁은집에서 많은 분들이 함께 지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느냐』고 임정요인들의 애국심을 되새기기도. 이어 숙소옆방에 마련된 전시실로 자리를 옮긴 김대통령은 임정수립당시의 활동상황이 실린 당시 신문기사·사진·그리고 도산 안창호선생의 친필휘호 「애기 애타」등을 어루만지며 관심을 표명. 김대통령은 장관리소장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잘 보관해주었다』고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1층회의실에 내려와 회의용 탁자에 준비된 방명록에 「한민주 독립운동의 성전」이라고 기념휘호. 임정청사는 건평 44평에 3층연립주택형 벽돌건물로 현재 상해시가 「노만구 문물보호」건물로 지정,관리하고 있는데 비교적 깨끗이 관리되고 있는 상태. 한편 김대통령 내외가 청사방문을 마치고 나오자 큰길 양편에 몰려있던 수백명의 중국인들이 김대통령을 알아보고 박수를 보냈고 이에 김대통령은 특유의 제스처로 손을 흔들어 답례. ▷상해도착◁ ○…김영삼대통령은 26일 하오 도쿄를 출발한 지 3시간만에 상해에 도착,4박5일의 중국 공식방문일정을 시작. 김대통령은 윤해중상해주재총영사와 중국의 전차장의 기상영접을 받고 트랩을 내려오며 태극기와 오성홍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교민 1백여명에게 손을 들어 답례. 이어 트랩을 내려와 영접나온 황국상해시장과 장정연주한중국대사내외등 중국측 인사와 반갑게 악수를 교환하고 상해시 남녀화동 2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서는 이들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 김대통령은 이어 「선진조국의 영도자 김영삼대통령」「성공적인 중국방문을 기원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걸고 환호하는 교민들에게 다가가 특히 앞줄에 선 어린이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숙소인 신금강호텔로 출발. ▷현지반응◁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날 일제히 김대통령의 약력과 치적등을 중심으로 방중관련기사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 당이론지 광명일보는 「김영삼,누적된 폐해(적폐)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란 제목의 특집기사를 통해 여론조사결과 대다수 한국인들이 김대통령의 지난 1년간의 정치개혁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보도. 이 기사는 김대통령이 그동안 한국병의 근원적인 치료를 위해 고위공직자들의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등을 추진해왔고 계속적인 개혁을 통해 문민통치하의 「청렴정치」를 실현해가고 있다고 소개. 당기관지 인민일보도 이날 1면에 김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약력등을 소개하고 2면과 3면에서도 한국관련 특집기사를 게재. 인민일보는 이어 2면에서 「합작을 확대,공동발전한다」는 제목으로 서울주재특파원이 쓴 특집에서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해외투자대상국이자 세번째로 큰 파트너가 됐다고 지적.이 기사는 또 요즘 한국에서는 중국붐이 일어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가 하면 도로표지판에 한자가 등장하고 한자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등 사그러들던 한자들이 다시 부활되고 있다고 소개.
  • 미소장 우리문화재/전적·화기발달사연구에 귀중자료

    ◎전적/「학림옥로」는 갑진자로 찍은 유일본 확인/화포/포대·받침대 완비… 신미양요때 빼앗아가 미국에 건너간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운데 이번에 확인된 전적류 4백51종 2천9백43책과 화기류 2점등은 전적 문화재분야는 물론 화기발달사등을 연구하는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우리 문화재는 미국의회도서관 한국과에 소장된 고려사등 4백9종 2천8백56책,법률자료과에 소장된 경국대전등 13종 43책,세계각국의 고지도를 보관하고 있는 지도과에 소장된 우리나라 고지도 29종 43책등 모두 4백51종 2천9백43책등이다.또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는 신미양요(1871년)때 노획해간 강희4년(1665년) 통영에서 제작된 화포(포신길이 98.6,구경 10.2㎝)와 「솔」자를 수놓은 대형깃발(450×450㎝)을 소장하고 있다.이밖에 버지니아주 해병대 박물관에서는 강희2년(1680년)에 만들어진 개량형 화포(포신길이 104,구경 8.66㎝)와 백마그림의 깃발등을 확인했다. 의회도서관 한국과는 당초 중국과 소속으로 있다가 2년전 따로 독립되었다.한국과 소장유물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집한 것으로 그 판본은 15세기의 갑진자를 비롯해 정·순조년간의 정이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활자본들로 되어있다.목판본·필사본등 여러 종류의 완질본이 많이 소장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조선조 중종년간에 인쇄된 학림옥로는 이번 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된 유일본. 중국 송나라 나대경이 지은 전적으로 당대의 문장가와 도학자들의 문장과 도학을 사건별로 정리한 고서다. 이책은 또 갑진자로 찍은 유일본이어서 당시의 인쇄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와함께 1613년 무오자로 찍은 시전대전(16책)은 국내에 완질이 없는 희귀본.그리고 영조때의 명필 원교 이광사 친필의 해동락부등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법률자료과에는 해방후에 구입된 경국대전,대전회통등 주로 조선조의 법전류들이 수장고를 차지하고 있다.지도과에는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동안 제작된 우리나라의 고지도들이 수장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화포에는 모두 약실에 음각으로 제작년대,무게,제작참여자등을 새겨놓았다.특히 해군사관학교 소장 화포는 포대와 받침대까지 완비하고 있으며 나무로 약실을 막음질한 해병대박물관 화포와는 달리 전체가 청동으로 주조되었다.신미양요때 로저스제독이 노획한 포로 밝혀졌다. 한편 우리 조사단은 이번 조사과정에서 해군사관학교의 화포가 16 65년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영문으로 잘못 표기되어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하도록 미국측과 합의했다.전문가들은 이들 화기류·깃발등은 19세기 우리나라 화기발달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군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보고있다.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미국측이 구입해간 것이어서 아직 반환청구 대상이 되지않는다는 것이 문화재관리국의 견해.문화재관리국은 지금까지 확인된 일본등 세계 17개국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는 이번에 확인한 2천9백45점을 합해 모두 5만7천6백점에 이른다고 밝혔다.
  • 행정분야/신원진술서 양식부터 고쳐라(개혁 2차연도의 과제:4)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지난 한햇동안 우리는 개혁이란 말을 하루도 듣지않은 날이 없을 만큼 소위 개혁현상속에 살아왔다.새정부가 하기 어려운 중요하고도 굵직한 개혁들을 그동안 과감하게 단행하여온 것은 누구도 부인못하는 사실이다.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다소 요란스럽기도 했던 개혁의 외침에 비해 과연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뭐라고 말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그것은 막상 생활속에서 개혁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실천이 뒤따라야 사실 여러 중요한 개혁조치들이 국민의 생활에까지 직접 와닿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평소 실명거래로 살아온 많은 시민들에게는 금융실명제라는 큰 개혁이 단행되었다고 해서 직접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오히려 주민등록증을 일일이 제시해야 하는 새로운 번거로움을 더 크게 느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은 윗물맑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그것은 순서상으로 옳았고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은 아래의 개혁으로 힘차게 내려오고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개혁은 구호나 말로써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그리고 일상생활속에서의 개혁으로 나타나야 한다.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을 언제나 대통령이나 당국자의 눈으로써가 아니라 일반 국민의 눈으로써 보려고 하는 자세가 절대로 요구된다. 신한국 창조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일반국민 또는 기업이다.국민이 신바람을 내지 않고서는,또 국민이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고서는 국제화의 물결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다.따라서 개혁은 관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며,여기서 관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그러므로 국제화의 원년이라고 하는 새해에는 좀더 국민의 눈에 명확히 들어오는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정부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당연시 해오던 행정관행 등을 일일이 다시 점검하여 국민에게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부담을 주는 것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과감하게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개혁이 여태 왜 안되고 있는지 평소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사례를 하나 들겠다. ○작은일부터 개선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원진술서 양식이다.잘 알다시피 이 서류는 여권신청이나 법인의 임원취임 등을 위해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그런데 솔직히 나는 이러한 서류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인지,그것도 왜 4통씩이나 일일이 직접 친필로 작성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정부가 신청인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신청자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만 정확히 적으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다.요즈음과 같은 정보화사회에 외국에 나가거나 법인임원 취임에 문제가 있을 정도의 인물은 관계기관이 신원을 별도로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만약 관계기관이 전혀 모르고 오로지 작성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는 상태라면 이는 보통문제가 아니다.한편 당사자의 신원에 설혹 문제(?)가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사회에서는 전과사실이 없는 시민이라면 어떤 일이든 우선 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이를 규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는다. 또한 신원진술서는 왜 타자나 대필은 안되는 것이며,여러 장이 필요하다면 왜 한장만 써서 복사하게 하거나 한번에 모두 복사되는 용지를 갖추어 줄수 없는 것인가.신원진술서의 기재사항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두사람의 친구이름은 왜 필요하며,두사람의 보증인은 또 왜 필요한가. ○과감한 단행 기대 무엇을 어떻게 보증한다는 것이며,과연 보증인으로 적힌 당자사들이 이를 동의했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사회단체에의 가입여부를 정부가 무엇때문에 알아야 하는 것이며,가입동기까지 묻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한번 작성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느꼈겠지만 참으로 국민을 불편하게 하고 번거롭게 시간을 빼앗는 서류 양식이다.문민시대에도 이러한 서류양식이 변함없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납득되지 않는다. 이런 예가 신원진술서 하나에 그치겠는가.곳곳에 아직도 많은 관위주의 불합리가 도사리고 있다. 새해에는 거창한 개혁의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국민이 직접 느낄수 있는 개혁이 좀더 과감하게 단행되었으면 한다.
  • 남산/민족의 기상 충정의 표상(서울 6백년 만가:1)

    서울이 나라의 으뜸도읍으로 정해진지 6백년.태조 이성계가 당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서울은 무수한 변화속에서도 수도의 위치를 의연히 지켜왔고 이제 세계속의 큰 도시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6백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수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해 본다. ◎옛이름 목멱산… 태조읍후 개명/고종때 공원지정… 일반인 휴식처로/“제모습 되찾기” 올해부터 본격착수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우리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아온 남산.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남산만큼 우리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도 없을 것이다.왕권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충직하고 현명한 백성들에게 믿음직한 충정의 표상이었으며 민족수난기에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국가 이상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품어안고있는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은 우리기상의 본보기 이기도 했다. 서울사람치고 남산을 보지않고 하루를 지나는 사람은 없으며 서울을 찾는 사람중에 남산을먼저 보지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해발 2백65m의 남산은 야트막하고 봉우리도 둥그스름한데다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해 온국민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정상에서 동서로 2.7㎞,남북으로 2.1㎞ 뻗어 오늘의 행정구역으로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성동구 왕십리쪽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다.면적은 1백2만9천3백여㎡. 조선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갓 작고 평범한 구릉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처음 역사의 무대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부터다.이때까지만 해도 인경산으로 불리다 서울 남쪽 끄트머리에 있다하여 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산의 본래명은 목멱산으로 목멱이란 옛말「마뫼」의 한자음 표기이다.「마뫼」는 남쪽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1910년 고종황제는 남산을 백성들의 공원으로 정해 일반에 공개,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친필로 한양공원이란 석비를 써 하사했다. 이 석비는 지금도 구통일원 자리에 남아있다. 그러나 남산은 한강 이남의 개발과함께 서울이 남쪽으로 넓어지면서 남쪽 끄트머리에서 어느틈엔가 한복판으로 옮겨 앉았다. 일찍이 한양의 남쪽 방패로 시인묵객의 풍류와 일반인의 휴식처로 사랑받아오던 남산은 근세에 들면서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이 지금의 예장터일대에 거류하면서 부터다.일제는 현 안기부자리에 통감부를,수방사 자리에는 헌병사령부를 설치했는가 하면 1926년에는 정상에 모셔졌던 우리민족의 표상이던 국사당을 폐쇄하고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는등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하는 상징물로 남산을 이용했다. 안타깝게도 남산훼손은 광복후 우리손에 의해서도 계속됐다.지난 57년부터 3공때인 75년까지 36차례의 공원용지해제로 중앙방송국·남산방송소·외국인 임대주택단지·타워호텔등 갖가지 대형 건축물들이 산허리를 깍아내고 들어앉았다. 다행히 시는 올해 정도 6백년을 맞아 남산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키로해 웅장하지는 않으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옛모습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외인아파트는 내년에 헐리며 산의 경관을 헤쳐온 정상의 서울타워와 숭의학원등도 늦어도 2000천년까지는 모두 철거된다.철거작업이 이미 끝난 수방사자리엔 남산골이 조성돼 옛정기를 확인할 수 있는 한옥등이 들어서게 된다. 외세의 침탈속에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상처받았던 남산이 제모습을 되찾으면 서울의 고풍스런 운치는 한결 돋보일 것이다.
  • 김정숙 고향 함북 회령에 도서관 건립(북한 이모저모)

    ◎평양 「성북 약수」,위궤양 등 치료에 효험 ○김정일 지시로 4층 규모 ○…북한은 김정숙의 출생 76주를 맞아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에 도서관을 새로 건립,24일 현지에서 개관식을 가졌다고 중앙방송이 25일 보도. 30만부의 장서능력을 가진 이 도서관은 4층 규모로 「김일성혁명사상학습실」「김정일혁명사상학습실」「김정숙혁명사상학습실」이 각각 별도로 되어 있으며 사회과학·자연과학열람실을 비롯해 어문별·사상별·지식수준별로 열람실을 따로 두고 있다고. 한편 김정일은 이 도서관 건립을 지시한 것은 물론 지난 11월30일 도서관 준공보고를 받고 이 곳을 「인민도서관」으로 명명했는데 24일 현지에서 거행된 개관식에는 김정일의 친필로 된 간판 제막식도 있었다. ○개발 1년만에 큰 인기 ○…평양 모란봉구역 성북동에서 나오는 「성북약수」가 최근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북한정부지관지 민주조선 최근호에 따르면 「성북약수」는 개발된지 채 1년이 안되는데 이 약수를 마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식욕이 놀라울 정도로 왕성해지고 소화가 잘되며 종아리와 허벅지,팔 등에 종전보다 더 많은 힘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기가 높아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 「성북약수」는 위·십이지장궤양 만성위염 만성소대장염 방광염 동맥경화 고혈압 뇌혈전 변비 등 질병치료에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계화 가정」 날로 증가 ○…북한은 지난 78년부터 각지 농가와 작업반을 대상으로 전개해온 「기계화가정운동」에 의해 지난 15년동안 가족구성원 전원이 농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계화가정」이 1천여가구로 늘어났다고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최근호가 보도. 「기계화가정운동」은 지난 78년 1월 김일성이 전국농업대회에서 일가족 9명이 모두 트랙터 운전수가 된 황남 용연군종합농장의 박정국·정연화가정을 농촌기계화의 모범적 사례로 들어 전체 농가에 이를 따라배울 것을 지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됐는데 황남 신천군 화산협동농장 유언석가정(15명이 트랙터운전수)을 비롯해 최근까지 1천여가구가 기계화가정이 됐다는 것. ○“평양은 민족성지” 주장 ○…북한은 21일 평양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 시원이 열린 민족의 성지』라고 주장. 북한은 중앙방송 논단프로에서 『평양은 인류 발상지의 하나이고 조선사람의 발상지이며 우리 민족사에서 첫 계급국가(고조선)가 성립되어서 번성한 고대문명의 시원지인 동시에 대대로 도읍지로 번영해온 조선민족문화 발전의 중심지』라며 그같이 말했다. 이 방송은 이어 『평양은 온 세계가 우러르는 혁명의 성지로 빛을 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 겨레의 마음이 달려오는 민족의 성지로 자랑을 떨치고 있다』고 강조. ○「모범보건군」 2곳 지정 ○…북한은 최근 중앙인민위 정령을 발표,당의 보건정책 관철에 모범을 보였다는 이유로 평북 향산군과 함북 어낭군에 「모범보건군」칭호를 수여했다고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
  • 구소 우주관련 물품경매/경제난 타개위해 2백여개 팔아…55억 수익

    ◎루나 16호 월석=3억5천만원/우주인 훈련북=9천여만원/친필 우주기행문=2억8천만원 『달에 남아있는 우주선·우주인들이 달에서 채집해온 월석·최초의 우주인인 구소련 유리 가가린의 훈련용 우주복 등을 사려면 얼마가 필요할까?』­이 우주관련 물품이 최근 미국 경매시장에서 공개 낙찰됨으로써 관심을 모으고 있다. 로이터·AFP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지난11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시장에서 구소련 우주선이 약5천6백만원에 낙찰된 것을 비롯,30년동안 구소련의 우주탐험에 이바지했던 2백개의 우주관련 물품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54억8천2백여만원에 팔렸다는 것이다. 이번 우주관련 물품의 경매는 구소련이 날로 악화되는 경제난을 조금이나마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것.특히 이날 경매장에는 전우주비행사들은 물론 필사본 중개상에서부터 어린이들까지 참관,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을 입증했다.이번 경매에서 현재 달표면에 남아있는「루노코드­1호」우주선과「루나17호」의 트랩은 약5천6백만원에 낙찰됐다.그러나 이 우주선들은 낙찰됐지만 지구로가져오는 것은 아니라 달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지난61년 역사적 우주비행을 앞두고 훈련시 입었던 특수복은 9천여만원에 팔렸다.이 가격은 미국 덴버시의「우주광」을 자처하는 한 기업인이 가가린의 훈련복을 포함,4벌의 우주복과 15점의 다른 우주관련 경매물을 약3억2천만∼4억여원에 사들임으로써 밝혀졌다.또한 가가린이 친필로 쓴 우주기행문은 예상가의 10배가 넘는 2억8천여만원에 팔렸다. 「루나16호」달탐사계획의 하나로 채집한 일련의 월석은 3억5천4백여만원,구소련 우주계획 최고책임자였던 셰르게이 코롤레프가 사용한 계산자는 1천9백여만원,과학자들이 우주선에서 식물을 기르기 위해 사용한「우주화분」등 실험기구 1세트는 6백여만원에 각각 낙찰됐다. 이밖에 박물관에 대여할 계획이라는 한 미국인이 우주선 캡슐2개를 12억8천여만원과 4억4천여만원에 각각 구입했다.지난87년 우주정거장 미르에 의해 운반된 뒤 지금도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연주용 기타는 1천여만원에 낙찰됐다. 한편 일본 도쿄방송사는 지난90년 일본 최초의 우주기자인 야키야마 토요히로기자가 우주왕복선 소유즈10호및 11호에 동승했을 때 입었던 우주복을 1억8천4백여만원에 사들였다.
  • 친필비/김부자가 직접쓴 글귀 새겨만든 우상물(북한백과)

    ◎87년 첫등장… 묘향산·이인모학교에 세워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직접 쓴 「친필글귀」를 새겨 만든 비를 일컫는 것으로 김부자의 우상물 중의 하나. 북한에서 친필비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87년 10월14일.이날 모란봉기슭의 「개선혁명사적지」에는 지난 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이른바 「김일성장군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에서 김일성이 행한 「개선연설」을 기념하기 위해 친필교시비가 세워졌다. 북한은 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맞아 묘향산의 경승지 입구 4곳에 「김일성친필비」를 제막한데 이어 황남 신천군 청산리에도 「친필명제비」를 세웠다. 김일성친필명제비는 무게 2백50t의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물은 곧 쌀이고 쌀은 곧 공산주의다.수리화된 우리 사회주의농촌은 세세년년 만풍년을 이룩할 것이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김정일친필비는 93년 8월20일 우리측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보낸빨치산출신 미전향장기수 이인모가 어린 시절 다녔다는 양강도 김형권 군(옛 풍산군)의 「이인모인민학교」(옛파발국민학교)에 최초로 세워졌다.
  • 중국 젊은이 우상이 바뀌고 있다

    ◎모택동대신 성룡·유덕화 등 스타 더 인기 중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바뀌고 있다.마르크스 레닌 모택동대신에 성용 유덕화 임청하등 홍콩의 인기스타들이 청소년들의 심중을 사로잡고 있다. 배우나 탤런트 가수등 인기스타를 따르고 흠모하는 열기가 어찌나 거센지 「추성주」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10대 후반의 중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인 이들 추성주은 중국보다는 홍콩이나 대만의 인기 연예인들을 흠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게 특징이다. 중국사회가 탈이념화 탈정치화를 추구하면서 서방세계 어디서든 쉽게 볼수있는 이같은 청소년문화가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은 왜 자신들이 배우에게 흠뻑 빠져드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중국청년보에 따르면 홍콩배우 유덕화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한 중학생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것은 그가 머리를 수그릴때의 온유함때문이다.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홀연히 머리를 돌릴때가 가장 매혹적이다』고 대답했다.정지화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과 노래와의 조화때문에』,곽부성은 『멋있게 생겼기 때문에』등등 이유도 갖가지다. 『왜들 학생들이 추성주이 되고 있느냐』는 물음에 한 여학생은 『1천명의 추성족에게는 1천가지 이유가 있다』고 대답했다.연예인들은 모두 각자의 특징과 서로 다른 경력,흥취,애호를 가지고 있다.심지어 하나의 눈길,하나의 미소가 추성족을 양산해내는 이유가 된다. 청소년들 가운데서 스타들의 면모,예를들어 나이 별명 체중 취미 식성 등등의 분야를 잘 알고 있으면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수도 있다.그래서 적지않은 청소년들이 「스타신상명세표」를 만들어 휴대하고 다닌다.스타로부터 친필서명을 받았다하면 그 학생의 위신은 백배나 높아진다.그래선지 요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가장 숭배하는 인물을 조사해보면 모택동이나 주은래등 정치인은 거의 찾아볼수 없고 대신 인기스타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으며 장래희망을 조사해봐도 60%가량이 스타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중국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중국대륙에도 많은 유명가수와 배우들이 있다.하지만 홍콩이나 대만의 명배우가 한번 중국대륙에 발을 디뎠다하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다.이곳 신문들은 『광기』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유는 『그들은 포장이 좋다』는등 특별한게 거의 없다.그저 좋으니 좋다는 정도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왕숭광박사는 『요즘 청소년들이 찾고 있는 것은 직관적인 형식이지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다.상업성이 농후하고 속식주의인 항대문화가 청년들의 구미에 잘 맞는다』고 설명한다.그런가하면 중국예술연구원의 한 간부는 『변혁의 시기에 금전만능주의등 일부 불량한 사회풍기의 영향으로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한 청소년들이 홍콩이나 대만의 문화나 생활방식에 신선감을 느끼고 흠모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요즘 중국신문들을 펼쳐보면 청소년들의 머리속에는 「명성」(인기스타)밖에 없어서 평상시의 생활이나 학습이 큰 영향을 받는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많아지고 있다.중국공산당의 이론지로 불리는 광명일보는 최근 『하필이면 추성인가』라는 한 사회중심 이슈 분석기사에서 『많은 학교와 학부모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학생들의 학습성적과 건강에 그치고 있다.정상적인 문화오락활동마저 제대로 경험할수 없으니 그들의 개성이나 가치관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고 개탄했다.또 당기관지 인민일보도 독자투고란을 통해 홍콩이나 대만가수들이 중국TV에 너무 범람하고 있는데 대해 자제하도록 권고하는 서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 시인 이용상씨가 펴낸 「용금옥시대」

    ◎해방후 「거물 술꾼」들 일화 생생히/변영로·오상순·박정희·박종화씨 등장/서울 무교동 추탕집 「용금옥」 무대의 반세기 명정애기/북측통역 「추탕 맛」 물어본뒤 추방당해 용금옥은 서울 한 복판 무교동 골목에 있는 추탕집이다.자리는 한번 옮겼지만 해방 무렵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드문 노포다.서울식 추탕 한가지 만으로 이같은 역사를 이어왔다는 점만으로도 용금옥은 충분히 이야기 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용금옥의 이야기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는다.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치 문화 언론의 중심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광화문과 태평로 일대였고 특히 40∼50년대의 용금옥은 거기서도 한다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인 이용상씨(69)가 펴낸 「용금옥시대」(서울신문사간)는 「한국근대인물비화」라는 부제가 일러주는 것처럼 용금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거물 술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이씨가 「술스승」으로 모시던 수주 변영로와 팔봉 김기진·이영세선생을 비롯,중국군시절의 친구이자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공초 오상순,정지용,조병옥,유진오,홍종인,고정훈,선우휘,박정희등과 술로 3각관계가 되어 얽힌 일화들이 담겨 있다. 이씨는 「용상,술깨나마나」라던가,보이는 술집마다 모두 들르는 바람에 「지프타고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일주일」이었다고 구상시인이 회상할 정도의 호주객.또 장면총리가 그의 국무원 사무처 보도과장 전입승인서에 「과음 삼가라」는 친필메모를 남겼다는 일화도 가지고 있다.이 책은 그가 당초 1년으로 예정했다가 주위의 「협박에 가까운 권유」로 만 6년 동안이나 신문협회보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다. 내용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고려대교수였던 김동석은 6·25때 월북한뒤 판문점 휴전회담때 북측통역으로 나왔다.그는 남측 취재기자들에게 『용금옥 추탕 맛 여전한가』라고 물었다가 이 기사가 나간 다음날부터 회담장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9 46년5월 이씨는 중국에서 함께 돌아온 김일선(김영주)과 용금옥에 처음 들어섰다.그곳에는 이씨의 형님과 정지용 이영세등이 있더라는 것.지용은 이날 눈시울을 적시며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고 한다.이씨가 학도병으로 입대하기 전날 지용은 일장기의 여백에 「용감히 싸워 일제의 무공훈장을 타오라」는 내용의 글을 써주었기 때문이다.이씨는 지용의 참뜻이 일본을 부수고 오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6·25가 일어나고 서울2차수복전 유엔군을 위한 영자신문「코리언 리퍼블릭」회장이던 수주는 용금옥에서 한잔하고 당시 국방부장관이 참전국장성들을 초청한 덕수궁으로 걸어들어가다 헌병들의 제지를 받는 봉변을 당했다.이때 안면이 있던 국방부장관이 본체만체하고 지나쳐버렸던 것.수주는 연회장에 들어간뒤 그를 찾아내 뺨을 세차례 갈겼다.다음날 당시 서울신문의 박종화사장과 김팔봉고문이 수주를 위해 연 위로회는 물론 용금옥에서였다.이 자리에서 수주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에게 그렇게 했으니 그 박해를 어찌 견디겠느냐』는 말에 『큰일났다』면서 『더러운 피부가 내 손에 닿다니,이 주먹을 잘라버려야겠어』라고 되뇌이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어느날 육사골프장에 나갔다가 진해별장에 있다는 기사를 방금 신문에서 보고온 「지만아버지」(이씨는 박전대통령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와 함께 골프를 치고 「각하 특실」로 초대를 받았다.그런데 그 자리에는 국방장관을 지낸 정모씨가 아들과 함께 와 있고 잠시 뒤에는 육영수여사가 장녀 근혜를 데리고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씨는 그 혼사가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관심밖이지만 당시 육여사에게서 혼기가 찬 딸을 가진 보통사람의 심정을 발견할수 있었다고 되돌아보고 있다.
  • 한국 고서 2천여점 미 의회도서관 방치

    ◎도은시집 등 귀중본… 일부는 크게 훼손 【워싱턴 연합】 지난 1406년 간행된 도은선생 시집을 비롯,귀중본 다수가 포함된 한국고서 2천여점이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채 일부는 곰팡이가 필 정도로 허술하게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 고서는 더욱이 고 백락준박사가 미유학시절인 지난 1936년 기초목록을 작성한 뒤 여지껏 재분류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적지않은 분량이 책이름 등만 적힌 채 아예 분류번호가 없어 소재조차 불투명한 실정이다. 실제 도서관측이 고 백박사의 친필이라고 밝힌 옛 목록뭉치 사본을 토대로 도은선생 시집과 1915년 간행된 야은선생 언행습유의 열람을 도서관측에 요청한 결과 컴퓨터에 입력조차 돼 있지 않음이 확인됐다.도서관 한국과 직원들도 일부 한국고서가 보관된 서가에서 이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 한국과 서가에서 직접 확인한 결과 지난 1865년 간행된 조선조 법전인 대전회통 목판본과 회재록은 곰팡이가 쓸어 겉장부분이 반쯤 없어지는등 이미 크게 훼손됐으며동국문헌비고(1770년)도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에 반해 일본과 중국등의 고서중 귀중본 등은 보존여건이 좋고 자물쇠까지 채워진 별도서가에 비치돼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그러나 미도서관 고위관계자는 이같은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에따라 김영삼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미의회도서관은 물론 미국립문서보관소와 미해군사관학교 등에 분산돼 있는 한국고서와 문화재들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교명·지명까지 체제유지 활용

    ◎김일성 일족이름 붙인 학교 10여곳 넘어/거의 교원양성기관… 최근 「이인모학교」도 생겨/풍산·신파는 김형권군·김정숙읍으로 바꿔 북한은 최근 양강도 김형권군에 있는 파발인민학교를 「이인모인민학교」로 개칭했다.여기서 군이름인 김형권은 김일성주석의 삼촌을 가리키며,파발인민학교는 우리측이 지난 3월 북한으로 되돌려 보낸 빨치산출신의 미전향장기수 이인모노인이 다닌 곳이다. 때문에 우리측이 인도적 견지에서 조건없이 방북시킨 이노인을 체제선전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이는 북한당국이 이 학교에 『신념과 의지의 화신 이인모동지를 우리 당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는 김정일의 친필비를 건립한데서도 명확히 입증된다. 이처럼 북한에는 북한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인물의 이름을 딴 학교나 오랜 역사를 지닌 옛이름 대신 김일성부자체제의 북한정권에 충성을 강요하는 새로운 지명이 부지기수다.김일성종합대,김책공대와 같은 학교 이름과 김정숙읍이니 「붉은별」이니 하는 북한식 지명이 그것이다.이 가운데서 김일성일가의 이름을 딴 학교명과 지명이 가장 많은 것은 물론이다.이같은 김일성일족의 성가주화 작업은 유사종교집단과 같은 북한사회의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일로 개교 47주년을 맞은 북한 유일의 종합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은 최초로 김일성일가의 이름을 딴 교육기관이다. 김주석과 그 가족의 이름으로 세워졌거나 개명된 학교의 수는 10여개가 넘고 있다.그의 전처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이름을 딴 김정숙사범대학과 김정숙교원대학을 비롯해 김형직사범대학과 김형권사범대학 등이 있다.김철주사범대학,강반석고등중학교,강반석혁명유자녀학원,정일봉고등중학교,김정숙여자고등중학교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물론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이며 강반석은 김주석의 어머니이다. 김형직사범대학은 평양교원대학이 그 전신이며 지난 75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김형권사범대학은 함남제1사범대학에서,김일성의 동생 이름인 김철주사범대학은 평양사범대학에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이밖에 김정숙교원대학은 회령교원대학을 그 모체로 하고 있으며 김정숙사범대학은 지난 81년 혜산제2사범대학이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일가의 이름을 딴 이들 교육기관들은 주로 교원을 양성하는 학교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김일성종합대학과 일부 고등중학교를 제외하곤 모두 사범 및 교원대학으로 북한의 교육이 그 만큼 김일성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유도하는데 맞춰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학교 이외에도 북한에는 「봉화」「복흥」「건설」등의 개념으로 된 「북한식」지명과 김일성일가의 이름을 빌린 지명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나진과 함께 북한당국에 의해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된 웅기는 최근 선봉이라는 전투적 이름으로 개명되었다.지난 89년 건설된 백두산 케이볼카의 아래쪽역은 백두이지만 정상에 있는 역은 「향도」이라고 불린다. 압록강에 인접한 김형권군은 원래 명칭이 풍산군이며 역시 중국과의 접경에 자리잡고 있는 신파는 김정숙읍이라는 엉뚱한 지명으로 개명되었다.
  • 조선 서예 절정기 작품 한자리에/예술의 전당서

    ◎이황·한석봉 등 180명 명품 전시 중국에서 건너온 서예필법이 우리 고유의 예술로 발전,찬란한 절정을 이룬 조선중기의 서예작품들이 이달말 가을 정취 그윽한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일제히 나들이를 한다. 국내유일의 서예전문 전시관인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계속하는 「조선중기 서예전」이 바로 화제의 행사. 예술의 전당 미술부가 작년 6월부터 1년5개월여에 걸친 준비끝에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는 퇴계 이황,고산 황기로,원교 이광사,한석봉등 당대의 명필 1백80여명의 작품2백여점이 소개된다. 이중 이황의 「퇴도선생필법」은 보물548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며 율곡 이이의 「친필서간문」,황기로의 「초서시고액자」,한석봉의 「영낭호첩」등도 보물급에 준하는 희귀자료로 10여점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작가및 작품선정은 국내최고의 한학자 청명 임창순씨(전문화재위원장)와 최완수 간송미술관학예연구실장,한국서예사가 이완우씨(정신문화연구원)등 세명이 맡았다. 전시작은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박물관,성균관대박물관등 공공기관 소장품과 기타 70여명의 개인소장품들로 구성돼 있다. 역사학자들이 규정하고 있는 조선중기는 중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로 건국주체세력인 관학파들이 4대사화를 통해 퇴진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근거로 활동하던 사림파가 정치·사회·문화전면으로 부상하던 시기. 따라서 서예도 초기의 조맹부체가 극복되고 한석봉에 의해 독자적인 석봉체로 개발돼 국서체로 발전한다. 또 17세기 중반에 들면서 옥동 이서­공제 윤두서­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동국진체가 완성돼 조선고유의 서법으로 자리를 잡는다. 주최측은 서예의 이같은 시대적 변화를 쉽게 파악하도록 ▲송설체의 조선화 ▲초서의 명가 ▲석봉체의 형성과 전개 ▲명인들의 시서와 간찰 ▲양송체와 전예의 전통 ▲다양한 서풍의 발전 ▲동국진체의 맥락이란 7개의 소주제로 작품을 분류했다.
  • 고전의 보존(외언내언)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조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했다.규장이란 임금의 글씨와 그림을 뜻하는 말.창덕궁 비원의 부용정 일대에 세워진 규장각엔 세조의 친필 현액이 걸리고 역대 국왕의 시문·서화등이 보존됐다.이곳을 혁신정치를 위한 기획연구기관으로 활용,도서를 수집 발간하기도한 정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강화도 행궁에 비상용 서고,즉 외규장각을 짓는다.규장각을 만든지 5년만인 17 81년이었다.강화도의 외규장각은 「강도외각」이라고도 불리고 규장각은 궁궐 안에 있다 하여 「내각」이라 불리기도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약탈된 외규장각도서가 한불 정상회담 결과 규장각으로 돌아 오게 됐다.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의 규장각 귀환은 우리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준다.규장각 도서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일제의 조선강점후 조선총독부를 거쳐 경성제대로 이관됐다가 해방후 서울대가 관리를 맡게된 규장각은 연구관리인원과 예산부족으로 귀중한 자료들을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조선왕조실록,일성록등 5종 3천8백33책의 국보를 포함 총22만여점의 보관자료가 해제작업은 커녕 목록도 완전히 작성되지 않은채 서가에서 먼지를 둘러쓰고 있다.심지어 조선왕실의 인쇄원판 1만8천여장은 경복궁 보관 당시 묻은 비둘기배설물 조차 닦아지지 않은 상태다.자료의 영인작업은 겨우 20%에 머물러 있다.규장각 자료를 제대로 정리 연구하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그만큼 규장각은 우리 문화유산의 보고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국내 문화재의 보존에도 눈을 돌려야 겠다.규장각뿐만 아니라 장서각과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희귀도서들도 관리부실로 2∼3년후면 보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될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정부는 물론 기업이나 개인들도 우리 문화유산의 보존에 적극 나서야겠다.
  • 강화도 외규장각/1781년 축조… 조선조 왕들의 친필 등 보관

    외규장각은 1781년 세워졌다.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등을 관리하는 규장각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강화도에 별고를 지어 보관물의 일부를 옮겼다.강도외각이라고도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1천42종,6천1백30책이 보관돼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3백40책은 약탈해 가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사라졌다. 현재 프랑스측에서 보관중인 문화재중에는 세자책봉,왕세자의 혼례·제례등 왕실의 의례를 기록한「왕실의궤」를 비롯,당시 조선의 산업현황과 물가,각 지방의 특산물,정치적 변란사실등을 기록한 전적들이 포함돼 있어 19세기 조선의 왕실살림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더욱이 이들 전적은 국내에는 없는 유일본이거나 희귀본이 대부분이어서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반환받게 되면 학계의 연구에 큰 진전을 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서궐영건도청의궤」는 경희궁의 개축·보수공사에 대한 기록과 그림등을 담고 있어 경희궁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어제어필영릉비첩」은정조가 친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이복형이자 자신의 양아버지인 진종(실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왕의 아버지로서 추존된 경우)의 왕릉에 직접 짓고,직접 쓴 비문이다.
  • 구소,대일전쟁 피하려 한인 무장해제/러 가제타지,비밀문서 인용보도

    ◎레닌,“독립군부대 활동 전면중지” 명령/20년이후 항일무장투쟁 결정적 타격 일제시대 무장독립 투쟁사의 큰 획을 그었던 재러시아 한인 독립군부대들이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던 레닌정부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된 경위가 처음으로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 일간 로시스카야 가제타지는 21일 레닌비밀문서보관소의 자료를 인용,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정권이 처음에는 연해주 한인을 이용,극동에서 세계혁명의 불길을 지피려 했다가 이를 포기하고 오히려 한인 독립군부대들의 활동을 전면 중지시킨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다음은 이 신문 보도의 요약이다. 1차대전 직전 남우수리지방 국경관할 판무관은 보고서를 통해 일본이 한인 밀집지역인 연해주 포시에트(현재의 하산지역)를 추후 여러 구실을 달아 보호령으로 귀속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10월혁명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계속 남아 있었다.1919년2월 작성된 비밀경찰 체카(KGB전신)의 보고서는 당시 수많은 한인들이 소련국적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스파이로 취급당해 마구 구속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음을 지적했다. 이때 체카의장인 크세노폰토프는 모든 산하기관에 긴급지령을 내려 「한인들이 반일투쟁에 동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모든 구속자를 면밀히 조사해 석방하라」고 지시했다.이와 관련,레닌에게 제출된 한 보고서에는 「1919년 1·4분기중 극동에서의 노동단체 운영비및 선동요원 활동비로 20만루블을 외무부에 배당해야 한다」고 돼있고 이 문서에 레닌이 친필로 「내각에 회부할 것」이라는 메모를 적어 놓았다.당시 외무차관 카라힌은 이 문서에 다시 「외무부는 모스크바 보고슬로프스키가 6번지에 있는 한인민족연합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이 단체의 신문발행을 지원하고 한국에 선동요원을 밀파하며 1인당 왕복여비조로 1만루블을 주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1920년 들어(한인을 동원해)극동에서 세계혁명을 불붙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오히려 한인 무장조직을 반일투쟁에 가담하지 않도록 하는 문제를 들고 나왔다. 치체린 외무장관은 1921년 6월10일 공산당중앙위서기 몰로토프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당시 러시아를 근거지로 활동중인 대부분의 한인 독립군부대들의 활동중지를 제의했다.레닌도 찬성했다.레닌정부는 그해 6월12일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이 결의안은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있는 한 「한인부대들이 극동공화국내에 계속 체류하거나 극동공화국과 소비예트 러시아로부터 한국으로의 이동은 금지된다.부대를 해산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 부대들이 일반의 눈에 띄게 해서도 안되며 특히 공개적인 대일투쟁은 금지된다」고 못박음으로써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빛나는 전과를 자랑해 온 한인 독립군부대들이 졸지에 무장해제 당한 것이다.
  • 안중근의사 휘호 이달중 환국될듯

    【부산=김정한기자】 안중근의사의 친필 휘호 「경천」이 이달중에 환국할 것으로 보인다. 휘호 환국교섭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5일 귀국한 박삼중스님(52·부산 자비사)은 6일 안의사의 휘호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인 히로마 혼마씨(60)로부터 「경천」의 「기증」과 함께 오는 10일쯤 한국을 방문해 환국시기를 결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밝혔다.삼중스님은 당초 한국의 독지가들로부터 받은 일본의 보물 10여점과 안의사의 휘호를 교환하려고 했으나 혼마씨가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의 혼이 담긴 글을 거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무상기증을 확약했다고 전했다.삼중스님은 이 휘호는 만주의 여순 형무소장이 안의사로부터 받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가 골동품 수집상인 일본인의 손을 거쳐 혼마씨가 소장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한편 안의사의 휘호가 돌아오면 정부측과 협의를 거쳐 독립기념관이나 안의사추모기념관등에 전시될 예정이다.
  • 「기록물전시실」 오늘 오픈/정부보관 희귀문서 등 8백여점 공개

    ◎역대대통령 취임식 영상시청도 가능 얼마나 급했으면 3군 총사령관임명장을 편지지에 대통령이 직접 썼을까. 23일 문을 여는 「기록물상설전시실」(서울 종로구 창성동소재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층)에 오면 희귀한 자료들을 다수 접할수 있다.그중 하나가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임명장.50년6월30일 남쪽으로 한창 쫓기던 시절,이 전대통령은 당시 정일권중장을 육해공 3군 총사령관및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면서 편지지에 만년필로 임명장을 직접 써 수여했던 것이다. 정부는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소장 김기옥)가 보관하고 있는 주요 문서와 사진류등 시청각자료 8백여점을 선별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는 이 전대통령의 친필임명장 이외에도 대한민국정부수립이후 각급 행정기관이 작성한 주요문서와 조선시대·대한제국·일제시대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문서등 희귀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전시실은 「대통령기념코너」「청백리코너」등의 특별코너와 정부기능에 따른 18개 주제별 코너로 구성되어 있다.문서·사진류와 함께 30년대의 무성기록영화 「경성」및 각종 비디오테이프등 시청각자료도 입체전시되어 있다. 역대 대통령기념코너에는 초대 이 전대통령으로부터 김영삼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결재문서등 핵심적 역사기록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휘호,동정사진등 대통령재임시의 상징적 기록물이 시대순으로 배치·전시되어 있다.특히 컴퓨터시스템에 의해 육성녹음과 취임장면의 시청도 가능하다. 주제별 코너에서는 헌법개정원본등 법제자료,관보 제1호등 행정자료,공문서식변천,상훈자료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중 흥미를 끄는 부분은 수결전시장.역대 대통령과 총리,각 부처 초대장관,조선조 국왕은 물론 케네디,대처,네루,장개석,모택동등 외국 유명인사의 사인이 소개된다.김일성의 수결도 있다.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관청에서 사용하던 인장류 1백60여종도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일반인들의 관람시간은 평일 상오9시에서 하오 6시까지.토요일은 하오 1시까지 공개한다.개관후 한달동안 일요일에도 관람할수 있으며 방문객이 많을 경우 계속 일요공개를 한다는 방침이다.관람료는 무료이며 문의는 720­2705,4549.역사교육을 위해 학생들의 단체관람을 기대하고 있다.
  • 「화성살인」 2차례범행 자백/경찰,용의자 김종경씨 자술서 공개

    ◎“오토바이 이용,4·5차 범행” 진술/흉기 등 증거물 찾기 주력/어제 부인입회아래서 재차자백 경기도 화성부녀자연쇄살인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12일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해온 김종경씨(41·수원시 권선구 매탄1동)로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9차례의 사건가운데 네번째와 다섯번째 살해사건의 범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내고 범행당시 사용했던 흉기와 피해자로부터 뺏은 물품등 증거물을 찾는데 주력하는 한편 다른 사건과의 관련여부도 캐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지난4일부터 김씨를 임의동행형식으로 불러 4차례 조사를 벌인 결과,지난86년 12월14일 이계숙씨(당시23세·여·회사원·화성군 태안읍 정남면 관항리49)살해사건과 87년 1월10일의 홍진영양(당시 18세·학생·태안읍 황계리 77)의 살해사건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와함께 용의자 김씨가 범행일체를 자백한 내용을 담은 친필자습서를 공개했다. 이날 중간수사내용을 발표한 서대문경찰서 김상구형사과장은 『수사대를 화성군 살해사건현지에 급파,김씨의 진술내용을 토대로 증거물을 찾고 있으며 나머지 사건의 관련여부를 캐기 위해 이사건 종합수사를 맡아왔던 경기도경과 공조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경찰이 공개한 용의자 김씨의 자술서에서 김씨는 『지난 86년 12월 중순 밤 10시30분쯤 평소 아내가 운영하던 통닭가게에서 알게된 이씨가 인근 관항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오토바이로 뒤따라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김씨는 오토바이로 이씨를 앞질러 다리밑에서 기다리다 오토바이뒤에 있던 줄로 이씨의 등뒤에서 목을 졸라 실신시킨뒤 농로를 따라 30여m쯤 끌고가 성폭행했다고 진술했다.김씨는 이어 이씨의 핸드백에 있던 스타킹으로 이씨 목을 졸라 숨지게 하고 손목시계와 반지를 빼내 근처 다리밑에 숨긴뒤 달아났다고 자백했다. 김씨는 또 홍양 살해사건 역시 홍양이 매일밤10시쯤 귀가 하는것을 알고 87년10월10일 밤10시쯤 횡계리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뒤따라가 철물점에서 미리 구입한 길이 30㎝의 칼을 들이대고 『소리치면 죽인다』고 협박,범행을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김씨는 당시 버스정류장앞 경부선 철길건널목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30여분쯤 홍양을 기다리다 혼자 철길을 건너 걸어오던 홍양을 5백∼6백여m 떨어진 논으로 끌고가 성폭행하려다 홍양이 『살려달라』며 반항하자 미리 준비한 60㎝길이의 나일론 노끈으로 팔을 뒤로 묶고 홍양의 핸드백에 있던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범행뒤 볏짚속으로 홍양을 머리 부분부터 집어넣고 범행에 사용한 칼과 밧줄을 사체에서 50㎝쯤 떨어진 볏짚 좌측 상단에 감추고 오토바이를 타고 근처 안영리 검문소를 피해 용주사방면으로 달아났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또 이날 밤 김씨의 부인 오모씨(40)를 입회시킨 가운데 재조사를 벌여 김씨로부터 범행사실에 대한 자백을 재차 받아냈다며 13일 중으로 변호사 입회하에 진술을 다시 받아 자백의 임의성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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