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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재장관 백범친필휘호 4점 기증

    김성재(金聖在) 문화관광부장관은 ‘광복조국’(光復祖國) 등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 4점을 백범기념관에 20일 기증한다. 이 휘호들은 백범이 1948년 9월 김 장관의 부인 김미순(金美順) 여사의 부친인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선생 댁에서 쓴 것이다. 휘호는 ‘광복조국’,충성과 효도를 가풍으로 전하라는 뜻의 ‘충효전가’(忠孝傳家),그리고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등 2편의 한시다.‘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오늘 내가 걸어간 흔적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답설야중거’는 백범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전후해서 즐겨썼다. 백범기념관은 이번에 기증되는 휘호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보유하고 있는 휘호 등을 모아 ‘백범 휘호전’을 새해에 열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서동철기자 dcsuh@
  • 신상품/카레이싱화 ‘슈마허 레플리카’

    휠라코리아는 아마추어 운전자들과 마니아들을 위한 카레이싱 전문신발 ‘슈마허 레플리카’를 출하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카레이싱 경기인 포뮬러 원(F1) 대회의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미하엘 슈마허를 위해 특수 개발된 제품.겉면에는 미하엘 슈마허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유명 백화점이나 휠라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크기 260∼280㎜.특수 방염가죽을 사용한 빨간색 제품은 24만원.천연가죽을 쓴 회색제품은 16만원.(02)3470-9593.
  • [씨줄날줄]최순우 고택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으로 41년간을 박물관을 지키며 살았던 혜곡 최순우(1916∼1984)는 한국미의 독실한 구도자였다.당대 최고의 심미안에,젊었을 때 소설가를 꿈꿀 정도로 타고난 미문을 갖췄던 그로 하여 고려청자,분청사기,목조건축 등 한국의 미술품은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새로 태어나곤 했다. 그의 책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1994,학고재)는 ‘제 아무리 희한한 물감이라도 고요와 사색에 사무친 고려청자의 아득하고도 깊은 빛깔을 그처럼 물들일 수는 없다.높고 푸르고 또 맑은 하늘,(중략)고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이 맑고 조촐한 하늘색이 물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와 같은 주옥 같은 글들로 가득차 있다.‘자연과의 조화’‘겸허하고 순정한 아름다움’의 미학을 펼쳤던 그는 인품 또한 단순 소박했던 선비로 전한다. 서울 삼선교에서 성북동 쪽으로 10분정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쪽 골목에그의 고택(古宅)이 있다.아홉개의 돌계단을 올라가 대문을 넘어서면 마당의곧고 푸른 송죽(松竹)과 한옥의 오래된 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판각한 ‘매심사(梅心舍)’는 사랑채.안채에 붙은 현판 ‘두문즉시심산(杜門^^是深山,‘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의 뜻)’은 그의 친필이다.또한 봄의 첫 전령 산수유를 비롯해 돌배나무,개암나무 등 산나무를 가득 심어 놓은 뒤뜰이 바라보이는 방에는 ‘오수당(午睡堂)’이란 당호가 붙어 웃음을 머금게 한다.1976년부터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이 집에는석물(石物)들도 그대로 남아 최순우의 체취를 구석구석 느끼게 한다. 5일 이 고택에서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제1호 지정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석달전 빌라부지로 집이 헐리게 될 위기에 있는 것을 안 시민단체가 시민모금으로 이를 사들여 보존키로 한 것이다.하마터면 1920년대에 지어진,역사가 담긴 건축물을 잃을 뻔했다.시민단체에 박수를 보낸다.그런데법의 허점으로 이를 인수한 단체가 세금더미에 올라 앉게 되었다는 우울한소식도 듣게 되었다.정부는 문화재보존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세세한 근대 건축물에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내셔널트러스트는 이같은 공백을메워 보자고 나선 것이다.국가의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민간단체들의 활동을 북돋울 수 있도록 하루속히 법적 지원 체제가 마련되길 촉구한다. 신연숙 논설위원 yshin@
  • 후세인은 어떤메일 받을까

    국제사회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이메일함에는 어떤 내용의 메일이 있을까. 미국의 온라인 뉴스 사이트인 ‘와이어드 뉴스(wired.com)’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이메일함을 열어봤다고 보도했다. 이 뉴스사이트는 이달 초 이라크의 인터넷서비스업체(ISP)인 ‘Uruklink.net’에 접속,이메일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디(ID)와 비밀번호를 추측해 후세인 대통령의 메일함에 접근했다면서 이라크의 ISP는 보안상 허점이 많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이들이 접근을 시도한 이메일 주소는 ‘press@uruklink.net’으로 2000년 10월까지 이라크 대통령의 공식 홈페이지에 등록돼 있던 것이며 편지함을 열어본 결과 수많은 메일들이 읽히지않은 상태로 보관돼 있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이메일함에는 후세인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긴 사진을 요구하거나 인터뷰를 요청하는 아첨 섞인 편지에서부터 협박성 편지까지 다양한 내용의 편지들이 세계 각국에서 답지해 있었다. 그 가운데는 ‘몇초 만에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무색무취의 화학무기를 팔겠다.’고 제안하는 자칭 생화학 전문가의 편지도 있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무선기술 관련 회사를 경영한다며 사업상 거래를 제안한 편지도 있었다. 강혜승기자 1fineday@
  • [기고] 백범정신 되새겨 민족화합 실천을

    “현실이냐 비 현실이냐가 아니라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관건이다” 동학의 2대 교주로부터 직접 임명된 ‘동학혁명군 청년장교'(1894),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결행한 ‘치하포 사건'의 주인공(1896),교육 및 계몽운동가(1903∼1918),역사적인 ‘3·1 민족저항’으로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1919)·내무총장(1922)·국무령(1926),그리고 국가주석(1940.10.9∼1948.7.16),환국후에는 ‘남북회담'을 성사시킨 분단조국 최초의 통일운동가(1945.11.23∼1949.6.26)로서의 한 생애를 때로는 미풍처럼,때로는 질풍노도처럼 살다 간 백범 선생이 ‘인생의 나침반'처럼 간직했다는 글귀이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넘어 선 오늘 친필 ‘백범일지'가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각종 여론조사에서 남녀노소 모두로부터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22일 ‘백범기념관’이 개관하게 되었다. 백범기념관은 백범 선생에 대한 역사와 민족이 드리는 선물임과 동시에 ‘백범정신 실천' 도장의 개설을 의미하기에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다만 백범 선생이 ‘민족적 공인'이듯 백범기념관 또한 ‘민족적 공기'임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천 직전 암살제보를 받을 때마다 백범 선생은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오겠는 까닭이다.”는 유언을 남기며,분단조국의 ‘밀알'로서의 ‘자신의 길'을 떠날 채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범 선생을 존경하는 사람들,즉 관념적 ‘백범맨'은 많음에도 정작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나서는 인사들,다시말해 실천적 ‘백범맨'은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백범 선생의 유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105인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하면서 옥중에서 자신이 직접 지은 것으로 ‘백정범부(白丁凡夫)'의 약칭이다.‘백범'이라는 말속에는 치자(治者)가 아니라 피치자(被治者)를,특권층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을,군림이 아니라 봉사의 길을 지향하였던 ‘백범사상'이 농축되어 있다.‘백범'의 뜻이 이러하거늘 혈통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백범 선생과 ‘불가분적 관계'에 있었던 인사들 중 일부가 적극적으로 독재정권에 기생하거나 심지어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부터 ‘집단학살범' 및 ‘헌정질서 파괴범'으로 단죄되기에 이른 자들과 공생을 꾀하는,적극적 반백범 행태를 보인 경우 마저 있었다. 또한 백범은 생전에 ‘일제의 한반도 양분책략→미·소 분점→이질적 이념 및 체제 구축→동족상잔→일본의 전쟁특수→분단의 고착화→한반도 약소국화’를 꿰뚫어 보며 “이같은 일제의 책략을 저지하는 길은 ‘남북통일'이며,남북통일이 되지 않은 한 독립된 나라가 아니기에 통일운동은 ‘새로운 독립운동'이다.”고 역설한 바 있다.분단시대 백범정신은 ‘민족화합정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백범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이나 ‘남북화합' 문제에 관한 한 방관자적 자세로 취하는(소극적 반백범 행태) 경우가 비일비재할 뿐만 아니라,심지어는 ‘동서갈등'과 ‘남북분열'을 부추기는 일을 공공연히 자행해온 인사들마저 있었다. 역사적인 백범기념관의 개관을 계기로 백범정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실천적 백범맨'으로 거듭나서,백범 선생의 유언은 물론 그의 소원인 ‘민족화합과 자주독립의 아름다운 문화국가'를 앞당겨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실로 간절하다. 홍원식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사무처장
  • 한국대표시인 101인 詩선집

    문학사상사(대표 임홍빈)는 창사 30주년을 기념해 우리 시단을 이끈 ‘한국 대표시인 101인 시선집’을 펴내기로 하고 1차로 미당 서정주 편을 비롯,구상·조병화·김남조·고은 편 등 5권의 선집을 최근 출간했다. 문학사상사는 엄정한 시인 및 작품 선정을 위해 김남조·김재홍·오세영·이승훈·임영조·최동호씨 등으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했으며,선집에는 대표시와 함께 사진 자료,연보와 친필 원고,시인이 직접 녹음하거나 선·후배 및 지인들이 녹음한 ‘육성 시낭송CD’를 함께 묶어 책 한권에 시인의 모든 것을 담아 냈다. 시선집 1권으로 출간된 미당 서정주 편의 경우 화보와 작품·작가론,연보와 ‘화사집’‘귀촉도’‘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떠돌이의 시’‘서으로 가는 달처럼’‘안잊히는 일들’등 고인이 생전에 출간한 시집에 실린 대표작과 산문 등을 함께 묶었다. 2권 구상 편에도 ‘내 마음의 울 속에는’‘조화 속에서’‘인류의 맹점에서’‘연작시초’등의 시집에 실린 대표작과 산문,29편의 자작시를 육성으로 녹음한 CD등이 포함돼 있다. 문학사상측은 “이번의 시선집 출간이 우리 시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장들의 업적을 기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각권 1만4000∼1만6000원. 심재억기자
  • 경북 영주 부석사/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1000년 세월을 듣는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에 가려면 귀찮더라도 예습부터 할 일이다.여느 사찰에 가듯 뒷짐지고 두어 바퀴 거닐다가,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 나왔던 그 유명한 무량수전 앞에서 기념사진 몇 컷 찍고 나오기엔 부석사 나들이가 너무 허망하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했다는 부석사는 한국전통건축의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사찰이다.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이지 않았던 역사성,독특한 공간구조와 장엄한 석축단,당당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을 갖춘 세련된 건물들. 부석사엔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석등,조사당,소조여래좌상,조사당벽화 등 5점의 국보와 3층석탑 등 4점의 보물이 있다.이중 부석사를 대표하는 것은 대웅전격인 무량수전이다.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중건했다.무량수전의 압권은 부드럽고 탄력적인 곡선미를 보여주는 배흘림 기둥과 팔작지붕이다. 거칠게 다듬어진 주춧돌 위에 세운 기둥의 지름 사이즈는 34-49-44㎝.기둥머리에서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오면서 굵어졌다가 다시 가늘어지는 배흘림은 팔작지붕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일직선이 아닌 정사각모양으로 돌려 쓴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특이한 것은 무량수전에 오르려면 누구나 ‘극락’의 뜻이 담긴 ‘안양루’란 누각 밑 계단을 걸어올라야만 한다는 것.불자들은 부처님을 만나거나 극락에 오르는 길은 신분의 고귀함이나 미천함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이 건물은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다른 데 무량수전 앞마당과 이어진 위쪽엔 ‘안양루’,위로 오르기전 입구엔 ‘안양문’이라고 씌어 있다.무량수전에 오르기 전엔 ‘문’이고,오르고 나서는 ‘누각’인 이중의 기능을 부여했다.안양루에 서면 발아래 엎드리듯 모여 있는 경내 건물들의 지붕들,그리고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그래선지 옛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 오르면 끓어오르는 시심(詩心)을 참지 못하고 적지않은 시문을 남겼다.그중 방랑시인 김병연 등 몇몇이 지은 시문은지금도 누각 안에 걸려 있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봤더니/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백년동안 몇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세월도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안양루에서 발 아래 경치를 감상하며 김병연의 시구를 읇조려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석사 나들이는 보람이 있다. 영주 임창용기자 sdragon@ ■여행 가이드 *가는 길= 풍기를 들머리로 잡는 것이 편하다.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빠져나와 931번 도로를 타면 된다.30분 정도 달리면 소수서원,순흥향교 등을 지나 부석사에 닿는다.풍기서부터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일단 버스나 기차를 타고 영주 또는 풍기로 간 다음 부석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숙박 및 먹거리= 주차장 인근에 명성식당(054-633-3262) 등 민박을 겸한 식당이 몇 군데 있다.좀더 깨끗한 곳에 묵으려면 부석사 입구의 코리아나호텔(633-4445),또는 풍기,영주시내 호텔이나 모텔을 이용하면 된다. 부석사 인근 식당에선 산채비빔밥을 주로 낸다.조금만 시간을 내 풍기로 가면 인삼정식,인삼갈비 등 인삼을 재료로 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인근 가볼만한 곳= 신라 선덕여왕 때 두운조사가 창건한 희방사,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의상대사가 부석사 터를 구할 때 초막을 지어 기거하던 자리에 지었다는 초암사 등이 찾아볼 만하다.소백산 옥녀봉 기슭에 자리잡은 자연휴양림에선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문의 영주시 관광담당(639-6062). ■둘러 볼만한 곳/ 벽화·불상… 예술혼에 감탄 꼭 문화유적 답사가 아니라도 일단 부석사를 찾는다면 무량수전과 안양루 이외에도 아래의 몇가지는 눈여겨 둘러보자. 먼저 부석사 창건 당시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무량수전 앞 석등.화려한 귀꽃 장식과 세련된 보살상 조각이 감탄을 자아내는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의 초상을 안치한 곳이다.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희귀하게도 건물내부 입구 좌우에 보살상,사천왕상이 남아 있다. 조사당 앞엔 이중 철창 속에서 보호받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가유명한 ‘선비화’다.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가지와 잎이 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선비화 잎을 따 삶은 물을 마시면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이 생겨 뭇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철창으로 보호하게 되었다.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조사당 벽화는 고려 회화사에 귀중한 연구자료로평가되는 작품이다.불명(佛名) 미상의 보살상과 다문천왕상 등을 담은 이들벽화 6점은 고려조 예술이 지니는 아름다운 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소조여래좌상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걸작으로 꼽힌다.소조(塑造)상으로는 최대,최고의 불상으로,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의 특징이 엿보인다.특이한 점은 불상이 정면이 아닌 측면,즉 동쪽을보고 앉아 있는 것으로,호국을 기원하는 뜻으로 서라벌을 향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노벨문학상 101년과 영화전

    헤르만 헤세 박물관 건립위원회(위원장 김종인)는 ‘노벨문학상 101년과 영화전’을 21일부터 11월30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있는 옛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에서 연다.이 전시회는 대 문호들의 숨결과 영광의 흔적을 느끼면서,한국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자는 뜻에서 마련했다는 것이 헤세 박물관 건립위원회의 설명이다. 건립위는 지난 18년 동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희귀서적과 유품,친필,사진,음반,관련영화 등 1000여점을 모았다.1901년 첫 수상자인 프랑스의 쉴리 프뤼돔부터 지난해 영국의 VS 네이폴까지 98명을 망라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앙드레 지드·로맹 롤랑 등의 친필과 헤르만 헤세·토마스 만의 타이프라이터,TS엘리엇의 시낭송 육성 LP와 셀마 라게를뢰프·오에 겐자부로 등의 사인이 있는 초판본이 돋보인다.귄터 그라스 부부의 자화상 판화,윈스턴 처칠·알렉산더 솔제니친·엘리엇을 특집으로 다룬 ‘라이프’‘타임’잡지 등도 눈길을 끈다. 청소년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자 ‘노인과 바다’‘닥터 지바고’‘설국’‘일 포스티노’등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작가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상영한다. 한편 박물관 건립위는 2003년 완공을 목표로 제주도에 헤세 박물관을 짓고있다.전시회 및 헤세 박물관에 관한 내용은 홈페이지(www.hermannhessemuseum.com)참조.(02)737-5006. 서동철기자
  •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합동공연 이모저모/견우·직녀 만나는 날 함께 감동 나눈 南北

    광복 57돌을 맞은 15일 온 겨레의 통일과 화해의 염원을 담은 8·15 민족통일대회가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막을 올렸다.때마침 음력 7월7일로 칠월칠석이었던 이날 견우와 직녀처럼 한자리에 모인 남북측 인사들은 함께 손뼉치고 환호하며 가슴찡한 감동을 나눴다. ◇개막식 직전- 워커힐 호텔에서 첫날 밤을 보낸 예술단원들은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개막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9시쯤 1층 로비로 나왔다.맨 얼굴의 일부 여성 예술단원들은 의자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고 쑥스러운 듯 기자들에게 “맨 얼굴은 찍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전날 아버지 몽양 여운형의 묘소를 방문하고 호텔에 돌아온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여원구 의장은 환한 미소로 “푹 잘 잤다.”고 말했다.개막행사가 끝난 뒤 여 의장은 “마치 남북이 통일된 느낌”이라며 가슴벅찬 표정을 지었다. ◇개막식- 이날 오전 9시30분 열릴 예정이던 개막식은 남북 공동호소문 작성을 둘러싼 진통으로 1시간쯤 늦어졌다.개막식이 시작되자 행사장 입구에 도열한 남측 대표단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에 맞춰 손뼉을 치며 북측 대표단을 맞았다. 조화윤(22·여·동아대 3년)씨 등 남측 대학생 3명과 조명애(21·여)씨 등북한 예술단원 3명이 가로 200㎝,세로 145㎝의 남·북한 단일기를 함께 들고 입장하자 남북측 대표단은 모두 기립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김영대 북측 대표단장은 축사를 통해 “따뜻하게 맞아준 남녘 동포와 서울시민들에게 감사한다.”면서 “6·15 공동선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통일을 앞당기자.”고 말했다. 김명철 조선농업근로자동맹 부위원장은지난 6월 월드컵대회와 북한 아리랑축전을 나란히 언급,“아리랑 축전의 성공적 개최와 세계 축구선수권대회에서의 선전은 민족 공동의 자랑이자 긍지”라며 남북을 동시에 치켜세웠다. ◇합동예술공연- 개막행사가 늦어지자 공연도 예정보다 1시간30분쯤 지난 낮12시25분 시작됐다. 북측은 행사에 앞서 “오늘 이 자리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 같다.”고 말해 갈채를 받았다.북측 대표단의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한편 이날 오후 2시30분쯤 여원구 의장은 호텔 1층 무궁화볼룸에서 5촌 조카 여인영(54)씨 등 남측 가족 11명과 57년만에 해후했다. 남측 가족이 호텔을 찾아오자 여 의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 채로 3명의 조카로부터 큰절을 받은 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 의장은 가족의 얼굴을 일일이 감싸며 “네가 누구냐.꿈만 같다.”고 울먹였다.남측 가족은 북측의 혈육을 위해 준비한 한과를 전달했고,일부 가족은 편지를 건넸다. ◇사진·미술전- 오후 3시30분 무궁화볼룸에서 열릴 예정이던 사진전과 미술전은 북측이 가져온 일부 작품의 내용과 설명의 표현을 국정원이 문제삼는 바람에 1시간40분이 지난 5시10분쯤에야 가까스로 열렸다. 지난 7월 아들은 낳은 비전향 장기수 이재룡 부부에게 전달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 서한 전시여부를 놓고 당국과 마찰이 빚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진전에서 그대로 공개돼 많은 남측 참관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서한에는 “우리나라 인민들의 축복속에 태어난 아기 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어줍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구혜영 이세영 박지연기자 koohy@
  • 식지않는 히딩크 사랑, 네티즌 ‘아인트호벤 홈피’ 점령

    국내 네티즌이 거스 히딩크가 사령탑을 맡은 네덜란드 프로축구단 PSV 아인트호벤의 홈페이지를 ‘점령’했다.7월 네덜란드로 돌아간 히딩크를 잊지 못한 네티즌이 하루 수십건씩 히딩크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한국행을 바라는 글을 방명록에 남기고 있다.7월 현재 홈페이지 외국인 방문자 가운데 한국인이 1위를 달릴 정도다. 특히 휴가철을 맞아 현지 스포츠 관련 사이트가 한산한 가운데 국내 네티즌이 몰린 아인트호벤 홈페이지에만 방문자 수가 늘었다.최근 아인트호벤 공식 팬클럽 홈페이지가 집계,발표한 ‘주목할 만한 조회수 증가추세’에 따르면 7월중 방문자수가 130만명에 이르러 올 최대치를 기록했다.한국인 네티즌을 위한 다양한 행사도 마련됐다. 지난 주에는 네티즌이 히딩크의 자세한 프로필과 함께 실물 크기의 얼굴 사진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했다.퀴즈를 맞히는 네티즌에게 히딩크의 친필 사인이 새겨진 한국 대표팀 공식 유니폼을 나눠주기도 했다.또 아인트호벤의 한 팬클럽 홈페이지는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히딩크의 근황과 한국관련 현지 소식을 영어로 띄우고 있다. 박지연기자 anne02@
  • 문화단신/ 해인사 ‘성보박물관’개관 등

    ◇경남 합천 해인사가 새달 5일 ‘성보(聖寶)박물관’을 개관한다. 박물관은 지하 1층,지상 2층,연건평 1082평 규모.1층에 역사실과 조각실 불화실 공예실 서화실 등 5개 전시실과 지하에 기획전시실 괘불전시실,2층에 대장경 인행 체험실 등을 갖췄다.특히 2층 전시실 벽면을 고려대장경 벽화로 장식한 것을 비롯해 백남준의 고려대장경 비디오아트와 대장경 제작과정을담은 필름을 상영하는 등 고려대장경 소개에 공을 들였다. 국보 32호 고려대장경판을 비롯,국보 206호 고려각판,보물 999호 목조희랑조사상,보물 1273호 영산회상도,추사 김정희의 친필인 해인사중건상량문 등 모두 37점의 국보급 유물도 전시한다. 개관 법회는 법전 종정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일 오후2시 봉행한다. ◇사단법인 한독협회(회장 허영섭)는 29일 오전8시30분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한독포럼 창립식을 갖고 제1회 한독포럼을 개최한다. 한독포럼의 한국측 위원장은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독일측 위원장은 테오좀머 ‘디 차이트’지 발행인이 맡기로 했다. 창립식에는27∼30일 우리 나라를 국빈방문하는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을 비롯해 양국의 정치·경제·문화·통일 분야 전문가 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포럼에서는 양국간 현안과 협력증진 방안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의 주제발표와 함께 토론이 펼쳐진다.
  • 월드컵/히딩크 신드롬 급속 확산

    한국팀의 월드컵 8강 진출이 확정된 이후 네티즌을 중심으로 ‘히딩크 신드롬’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히딩크에게 바치는 찬사가 쏟아지고,그의 이름을 딴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고 있다.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히딩크 귀화 모임’ 관련 ‘카페’도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유명 격투 게임의 승자와 패자의 얼굴에 붉은 색 도복을 입은 히딩크와 이탈리아 등 상대팀 감독의 사진을 각각 합성한 그림을 메일로 주고받는 네티즌들도 많다. ID를 ‘윤성욱’이라고 밝힌 네티즌은 19일 “앞으로 한국 경기가 있을 때는 대형 태극기 옆에 네덜란드기를 같이 걸어 히딩크에게 고마움을 전하자.”라는 글을 관련 사이트 게시판에 띄웠다. 히딩크 감독의 팬 사이트(www.commany.com/hiddink/) 게시판에서 ‘히딩크 사랑’이라는 네티즌은 “히딩크 당신의 신화는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면서 “만약 히딩크가 대통령에 나온다면 한 표를 찍겠다.”고 주장했다. 한 경매사이트에서는 이날 히딩크 친필사인이 새겨진 티셔츠의 입찰가가5000원에서 4만원대로 치솟았다.포털사이트 ‘다음’에는 ‘히딩크 귀화추진연합’,‘히딩크 귀화시키기모임’ 등 히딩크 감독의 귀화추진 카페 10여개에 네티즌들이 몰리고 있다.ID를 ‘이혜경’이라고 소개한 네티즌은 법무부 게시판에 “히딩크 감독에게 돈이나 재물보다는 더 큰 차원의 감사를 표현하는 의미에서 한국 국적을 주자.”라는 글을 올렸다. 구혜영 이영표기자 koohy@
  • [帝政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4)새로 밝혀진 사실들

    러시아 문서보관소는 구한말 역사의 보고(寶庫)였다.발굴된 문서중에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졌던흥미진진한 사실들이 수두룩했다.특히 고종의 해외망명기도와 헤이그밀사 파견의 좌절,아관파천의 진실 등은 근세사를 새로 고쳐 써야 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헤이그밀사사건의 전말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주권불가침을 인정하며 국제회의에서 상기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하였다.초청장은 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에게 외교문서로 전달되었다.러시아 정부는 이범진 공사를 합법적인 공사로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그곳에있는 고종황제의 밀사에게 이 뜻을 전해도 무방하다.(1905년 11월1일 외무장관이 베이징주재 러시아공사 파그딜로프에게 보낸 지시문) 이 지시문은 고종이 서울의 프랑스어학교교사 마르텔을베이징주재 러시아공사에게 극비리에 파견,헤이그회의에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토록 요청한 데 따른 러측의 공식 답신이다.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외교적 입장은 대한제국의 독립국가유지였으며 헤이그회의 참가지원이었음을 알수 있다.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니콜라이2세가 주창해 열렸고 러시아는 이 회의의 의장국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을사늑약체결(1905년 11월17일)이후 새로운 국제정세가 전개되면서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은 혼선과 모순을 노출했다. 1907년 6월30일 회의가 막상 개막되자 러시아는 대한제국 대표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했다.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여론의힘을 빌려 국권을 되찾으려 한 고종의 마지막 시도가 무참하게 꺾이는데 러시아가 일조한 것이다.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이처럼 방향을 튼 이유는 무엇일까.일본과의 비밀협상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양국은 1907년 7월30일 체결한 협약에서 대한제국과 만주,몽골 등 3개 지역에 대한 이해득실을 각각 정리했다.두나라는 ▲만주에서 양국간 분계선을 확정하고 ▲러시아는 일본과 대한제국간에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결속에 대해 간섭과 방해를하지 않으며 ▲일본은 외몽골에서 러시아의 특수권익을 승인한다 ▲쌍방은 협약체결을 비밀로 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러·일비밀조약 체결 한달전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자당황한 러시아 외무부는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전 파리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부랴부랴 전문을 보내 입장을 거부토록 지시했다.넬리도프도 “한국인들이 왔지만 접견을거부했다”는 보고문을 본국에 띄웠다.뿐만 아니라 러시아 외무부와 주일 러시아대사 등은 대한제국의 헤이그밀사파견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일본측에 흘렸다.밀사들의 회의장 입장이 좌절된 뒤 이토(伊藤博文)가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양위를 요구한 것이 그 방증이다. 고종황제의 측근인 윤택영(순종의 장인)과 권신목(영어통역원)이 총영사관으로 찾아와 헤이그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으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설득해보냈다.또 이종호(이용익의 손자)를 위시한 일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지사에게 헤이그에 갈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해 왔다는 주지사의 전보를 받고 저지하도록 조치했다.(1907년 7월25일 플란손 총영사가 헤이그밀사사건과관련,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국제정세에 어두워 러·일비밀협상이 진행중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고종은 니콜라이2세와 러시아의 ‘변함없는우정’만 믿고 3인의 밀사를 파견했던 것이다.결국 밀사들은 황제접견은커녕 외무장관도 만나보지 못했다.러시아 외무부는 밀서를 서류철속에 보관해 놓았을 뿐이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포츠머스조약(1905년 9월5일 러·일전쟁후 양국이 미국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을엄격히 준수하려고 한다.이 조약으로 외무부는 대한제국이 러시아의 지원이나 협조를 얻어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려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때문에 러시아 지방당국은 전고종황제(헤이그밀사사건으로 1907년 7월19일 순종에게 양위)정부의 지시에 의거,러시아 국경안에서 투쟁하는 한인폭도(의병)의 기도를 분쇄하고 있다.…한인들은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투쟁을 바란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갑작스러운 대한제국 밀사의 출현은 서울에무질서를 발생시켰으며 일본은 이 기회를 활용해 분명한 본보기(고종의 퇴위)를 보였다.일본에 구실을 주는 한인들의 항일투쟁 고무발언을 삼가야 한다.(1908년 10월6일 외무장관이 새로 취임한 소모프 총영사에게 보낸 훈령) 니콜라이2세는 이 훈령문 상단에 “공감한다.”는 친필의견을 남겼다.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밀사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밀사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아관파천의 막전막후 1896년 2월2일 전문으로 보고한 바와 같이 신변의 위협을느낀 고종이 밀지를 보내 수일안에 왕세자와 함께 공사관에 피신하겠다는 희망을 밝혀왔다.전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보호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다만 궁중을 떠나는 날짜와 시간을 사전 통보해줄 것을 부탁하고 고종의 밀지를 전해온 이범진에게 궁중에서 러시아공사관까지 오는 도중 예상되는 위험성을 지적해 주었다.이범진은 고종이 궁중에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미 모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다음날(2월3일) 고종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2월9일 저녁 공사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이날 결행하지 않고 경비병 증원을 요청해왔다.공사관은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 긴급요청,2월10일 해군대령 몰라스가 100명의 수병을 인솔하고 서울에 왔다.고종은 2월11일새벽 7시30분에 공사관에 왔다.(1896년 2월11일 스페이예르 대리공사가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결심한 뒤 측근 이범진을 통해 밀지를 보내고 당초 결행키로 한 날짜를 어겨가면서 피신하기까지 10일동안의 급박했던 순간을 보고한 비밀전문 내용이다.당시 서울에는 전임 베베르 대리공사도함께 있었다.멕시코 공사로 발령을 받은 베베르가 업무인수인계를 위해 서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히토로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러시아는 고종과의 친분을 고려,스페이예르를 도쿄로 보내고 베베르를 유임시켰다. 문서내용에 따르면 아관파천은 대한제국에서의 주도권을노리고 고종과 친러파들의 공사관 피신요청을 모르는 척들어준 러시아의 ‘기획외교’의 결과물처럼 보인다.물론서울에 부임해온 지 한달밖에 안된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의 입장에서는 주재국 국왕의 공사관 피신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맞아 다소 흥분,실체를 부풀렸을 수도 있다.당시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10년가까이 근무한 베테랑 외교관이던베베르는 1903년에 쓴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에서 “뜻밖의 정변이 발생했다.러시아공사관 경비해군은 160명이었으나 서울주둔 일본군 수비대는 1000명이 넘었다.러시아는 이때부터 이전 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하게되었으며 한·러관계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외교적으로 해석했다.스페이예르는 러시아공사관에 375일동안 피신해 있던 고종이 환궁한 지 1년도 채 안된 1898년 2월21일 전문에서도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의 피신을 권했다.라고 보고하는 등 제2,제3의 아관파천을 꾀했다.이에 대해 베베르는수기에서 “스페이예르가 대한제국 정부와 독립협회,그리고 일본과 자주 충돌하는 경솔한 행동을 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상실됐다.”고 질책하고 있다. ■고종의 러시아 망명기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이후에도 여러차례 거론된다.최근 이범진 공사가 수차례에 걸쳐 고종황제가 친일파의새로운 간계 때문에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필요할경우 다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려 한다고 하며 친일파들은 의친왕 이강을 제위에 오르도록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한다.(1902년 5월15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파블로프 대리공사에게 보낸 비밀전문)고종황제가 위험에 처했다는 어떠한 증후도 현재 포착하지 못했다.(1902년 5월19일 파블로프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답신) 이처럼 러시아공사관으로의 재피신 가능성이 오가는 가운데 러시아망명에 대한 비밀보고서는 1903년에 처음 등장한다. 오늘 고종황제가 신임하는 환관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점령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서울주둔 일본군은 궁정을 포위하고 있고 그들에게 매수된 시위대가 자신을 살해할 것 같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 러시아정부의 조언을 요청했다.아마 고종황제는 자신이 위기에처하면 공사관이 러시아로 망명을 할 수 있도록 은신처를제공하겠다는 약속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1903년 12월30일 파블로프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대한제국 황제가 일신상에 위험이 있을 경우 불가피하게러시아공사관에 피신처를 구하거나 아니면 러시아로 탈출하는 문제에 대해 러시아측의 협조가능성을 은밀하게 타진해왔다.고종은 대궐을 빠져나오기 쉽고 피신을 예상할 수없도록 하기위해 대비(1904년 1월2일 서거)의 시신을 이장할때 사당에서 공사관 담장의 샛문을 통해 오겠다는 것이다.(1904년 1월21일 파블로프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서) 하지만 이에 대한 러시아 본국의 답신은 없었다.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으로 퇴위하고 난 뒤인 1908년부터 합병직전인 1910년 사이에 망명설이 집중적으로 꼬리를 물고 나오기 시작했다. 전 고종황제가 배편으로나 육로로 러시아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고종이 러시아영토에 출현하면 다시 극동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어 대한제국 문제를 둘러싼 한·러관계는 긴장이 조성될 것이다.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조치는 극동정세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고종황제의 망명계획을 거부하는 것이 좋다.(1908년 11월20일 도쿄주재말레비치대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전 고종황제가 러시아나 청국으로 피신할 마음을 갖고 있다.이는 황제자신이나 백성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권고를 했다.(1909년 1월8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당시 고종은 일본의 핍박과 잇따르는 시해기도에 몸도 마음도 망신창이 상태였던 것 같다.심지어 “차라리 해외에나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소모프 총영사에게 했을 정도였다.의병의 도움을 받아 일본 감시요원을 따돌린 뒤 러시아나 청국국경까지 탈출할 기회를 엿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은 없다지만한일합병이전에 고종의 러시아 망명이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어디로 흘러갔을지 자못 궁금한 장면이다. 노주석기자 joo@
  • 행정역사실 오늘 개관, 고려~현대 행정 변천사 정리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월급명세서,관리 임명장,전 대통령의 친필 문서 등 쉽게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과거와 현재의 행정자료가 일반에 공개된다. 국가전문행정연수원(원장 金重養)은 고려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우리나라 행정자료를 시대·종류별로 정리한 ‘행정역사실’을 17일 개관한다. 경기도 수원시 행정연수원 도서관 3층 90여평에 마련된행정역사실에는 고려·조선시대의 왕명(王命),과거·임용등 옛문서나 책자,일제시대 이후의 토지·민원문서,각종행정장비 등 594종 938점이 전시된다. 전시물 중 가장 오래된 ‘급제패지’(及弟牌旨·1205년)를 비롯한 ‘추증교지’(追贈敎旨·1745년),‘사패교지’(賜牌敎旨·1605년) 등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을 내릴때 왕이 수여한 임명장이다. 또 조선후기 관리들의 월급명세서인 ‘녹표’(祿標)나 ‘녹패’(祿牌),조선시대 임용시험 합격증서인 ‘병진사마방목’(丙辰司馬榜目)·‘백패’(白牌) 등도 눈여겨 볼 만하다. 현대 사료 중에서는 70년대 초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진필로 작성한 ‘새마을운동 계획서’가 눈에 띈다.새마을운동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이 담겨있는 이문서는 사료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행정연수원측은 “이번 전시품들 중 445점은 지난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통해 감정을 받은 결과 진본으로 확인된 것들”이라면서 “행정역사실을 통해 우리나라 행정의 역사적 변천 내용을 한눈에 파악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여경기자 kid@
  • ‘최규선 신임’ DJ친서 파장, 사본 추가공개 언저리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42)씨가 자서전 집필용으로 육성 녹음한 테이프 6개와 최씨가 외국 유력인사에게 전달한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 사본 등이 14일 공개됐다. 특히 이날 공개된 친서에는 당시 최씨에 대한 김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적지않아 눈길을끈다. 편지 형식으로 된 친서는 김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인97년 9월과 당선자 시절인 같은 해 12월 최씨를 통해 각각 미국 대서양위원회(ACOU) 한반도 전문가 스티븐 코스텔로와 국제 금융인인 조지 소로스에게 보낸 것으로 김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다. 김 대통령은 코스텔로에게 보낸 친서에서 최씨를 ‘가장최근에 임명된 보좌관’ ‘제가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또 소로스에게는 ‘혼선과 불필요한 시선 집중을 막기위해 내 보좌관 최규선과 직접,그리고 독점적으로(exclusively) 접촉하기 바란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측은 “김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IMF외환위기를 맞아 외자유치를 위해 세계 유력 금융인 등에게 많은 친서와 함께 김기환,정인용,김용환씨 등을 특사로 보냈다.”고 밝혔다. 최씨가 통상적으로 공개될 수 없는 친서를 보관한 경위와 관련,그가 김 대통령의 신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본을 만들어 보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2)오락가락하는 대 한반도 정책

    1884년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1910년 한일합병전후까지 러시아의 대(對)한반도정책은 현상 유지(독립국가 유지)와 무력점령,38선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남북 분할점령 등 3개안을 기본으로 변화해 왔다. 그런가하면 국내외의 정치 상황과 역학관계에 따라 중립국안,완충지대안,만주 및 몽고와의 거래에 의한 양보안까지 오락가락하기도 했다.특히 일본이 1896년 처음 제기한뒤 러시아도 솔깃해진 일본과의 남북 분할점령안은 광복및 6·25전쟁과 함께 남북 분단으로 현실화됨으로써 한국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서울에서 체결한 조·러 수호통상조약문을 동봉한다.외무성은 조선과의 수교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못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황제 폐하(니콜라이2세)의 윤허를 얻어 서울에베베르(전권위원,초대 대리공사)를 보내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은 독일과 영국이 체결하지 못한 영사관 설치문제가 제2조에 명문화돼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청국 영사관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그곳에 조선영사관을 허용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1884년 10월8일 기르스 외무상이 톨스토이 내무상에게 보낸 조·러 수호통상조약 13조 전문 등23쪽에 달하는 극비문서) 이 문서는 제정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찾아낸 방대한 분량의 한국 관련 문서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문서 중 하나로 한국과 러시아의 최초 공식 외교협정인 조·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배경에 대한 러시아측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러시아의 1차적인 관심은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데 있다는 사실을알 수 있다.물론 수교불가피론의 근저에는 영국과 독일 등 열강에 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함께 남하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부동항의 획득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러시아에 바람직한가.점령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1888년 4월26일 아무르 총독과 외무부 아시아국장의 특별회의록).러·일간 우호확립에 유일한 방해요인은 대한제국 문제이다.일본 천왕의 총애를 받는 야마가타(山縣有朋) 원수는 대한제국 분할에 관한 러·일간의 협정체결이 양국간의 우호증진을 위한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수도를 포함한 남부를 차지하고 동해안과 서해안의 항구와 대부분의 대한제국 영토를 러시아에 양보할 준비가돼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는 대한제국의 완전독립과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1899년 2월9일 외상이 황제에 상주한 문서). 이들 문서로 미루어 볼 때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 외무상과 야마가타 특사 사이에 체결된 모스크바의정서는 물론,1898년 로젠-니시협정으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일본측으로부터 완전히 담보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으며,남북분할점령안을 거부했지만 여전히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일본이 주도한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과 이로 인해 촉발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아관파천·1896년)으로 곤경에 빠진 일본 대신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조야를 주무르던 때였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의 대한제국 독립국가 유지정책은 조금씩 후퇴하는 조짐을 보인다.여기에는 100만명에 달하는러시아군의 대부분이 유럽지역에 주둔하고 있어 극동지역에서의 군사력 약세를 인정하는 측면도 있었다.병력을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기 전까지외교적으로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원,현상유지시키겠다는 속셈도 작용했다. 만주와 극동에서 러시아가 굳건한 기반을 확립하고 만주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25∼30년이 걸릴 것이다.만주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러시아가 일본의 민족적 자존심에 손상을 주지 않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보하는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1902년 12월 뷔테 재무상이 람즈돌프 외무상에게 보낸 러·일 협상관련 비밀문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철도 및 은행 등을 장악하는것은 무의미하다.문제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장악해야 하는데 대한제국 남부의 점령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대한제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엿봐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먼저 만주를 지배하지않으면 안된다(1902년 10월8일 도쿄(東京)주재 러시아 공사인 로젠 남작이 니콜라이2세에게 상주한 보고서).황제(니콜라이2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북쪽으로는 두만강,서쪽으로는 압록강까지점령해도 좋다는 결심을 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황제는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보하면 군사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생각한다.(1903년 6월11일 해군제독 아바자가 베조브라조프에게 보낸 전문). 로젠 공사의 보고서에 대해 파블로프 공사도 의견서를 통해 “러시아는 실제적으로 국익에 손상을 입지 않고 대한제국 문제 해결을 명분삼아 일본정부에 대한제국의 행정감독은 물론 철도,우편,전신 등에 유리한 권한을 인정하면서 재정과 군사부문까지 참여를 허용해야 하며 러시아는 만주문제에 대한 일본의 불간섭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맞장구쳤다.니콜라이2세는 문서 상단에 ‘파블로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친필로 남겼다. 니콜라이2세는 1904년 1월26일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친필서명이 든 전문을 보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는것보다는 일본이 먼저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일본이 먼저 개전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남해안 혹은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만약 38선 이북 서해안으로 상륙병과 함대가 북진해오면 적군의 첫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공격하라.”고 긴급지시했다. 러시아의 정책이 대한제국의 양보쪽으로 서서히 방향을틀고 있는 가운데 일본군이 38선 이북 서해안으로 상륙하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마지노선’을 암시하고 있다.1902년 1월 런던에서 체결된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이 시기를 전후해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이고개를 든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러시아 군부는 대한제국 전역 혹은 북부지역의 무력 점령안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러시아는 일본뿐 아니라 어떤 국가에게도영향력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점령해러시아에 합병시켜야 한다(1900년 두바소프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니콜라이2세에게 상주한 극동의 정치상황).일본은전 병력을 만주전선에 투입했다.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 진격해야 한다.현재의 16개 부대로는 병력이 부족하다.진격계획은 8월로 연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1904년 6월 아무르 군관구 참모부에서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 보낸 전문). 일본군이 만주전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대한제국 영토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국지전(局地戰) 계획이긴 하지만 점령안을 지지하는 군부의 의사를엿볼 수 있다.무력점령안에 따른 진격계획은 보다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이들 부대는 러·일전쟁 당시 한반도로 진출했으며 평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쟁불사’를 외치는 군부 및 일부 외교라인의 강경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1903년 6월 여순에서 베조그라조프 등 극동정책수립에 전권을 위임받은 수뇌부가 참석한가운데 특별회의를 갖고 한반도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회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전역혹은 북부 일부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점령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일본이 점령하면항의는 할 수 있으나 자국군대를 투입해서는 안된다.▲일본의 점령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만주와 대한제국은 별개의 문제임을 선언하고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1903년 7월4일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이 로젠 주일공사에게 보낸 비밀전문). 대한제국 러·일 분할점령안에 따른 중립지대(완충지대)설정에 대한 극비메모도 흥미롭다. 중립지대 설정에 대한 자료는 외무성에 없으며,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니콜라이 1세의 손자) 대공의 1899년 3월6일자 극비메모에는 아무르강 하구에서 원산만까지,그리고 서울과 제물포를 포함하고 있다(1903년 3월11일 외무상이황제에게 보낸 상주서). 다소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독립국 유지를사실상 포기한 채 이권 챙기기에 주력했음을 다음의 외무성 훈령은 보여준다. 러시아의 이해관계나 대한제국의 심각한 하소연이 없는한 일본 통감부의 지시에 가급적 관여하지 말 것.일본 당국에 대한 한인의 불만에 개입하지 말고 열강의 최혜국 국민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사수하라.열강이 영사관을 개설하는 지역에 러시아영사관 개설의 필요성 여부의 의견을 상신하라.특히 러시아제국 정부에 전폭적인 충성심과 믿음을 보인 고종이 실현불가능한 기대를 갖고 러시아에 요구를해올 때 일본과의 사이가 악화되지 않도록 어떠한 약속도자중하라(1906년 외무상이 대한제국에 부임하는 플란손 총영사에게 내린 훈령). 러·일전쟁에서 패배,일본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음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러시아의 비탄과 몸조심은 더욱 두드러졌다.플란손은 1905년 12월 작성한 비망록에서 “러시아는 지난 10년간 대한제국에서 이룩한 외교적 성공을 잃어버렸다.”고 자탄했다.니콜라이2세는 같은해 11월 고종의 계속되는 독립유지 지원 호소에 대해 “고종 황제에게 ‘패전 이후 혁명세력의 확장으로 더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전문을 보내라.”는 칙령을 외무성에 내렸다. 제정 러시아는 신흥 일본제국주의에 패배해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다.로젠 당시 미국대사는 1906년 외무성에 보낸 문서에서 “러시아가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국토를 확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 영향이 이제 대한제국에까지 미쳤으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30∼40년 후퇴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이같은 지적은 40년 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러시아)의 38선 이북 점령으로 현실화됐다. 노주석기자 joo@ ■러 당시 외교라인 대한제국 말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이 오락가락한 이유는무엇일까? 가능하면 일본이나 청과의 전쟁을 피하되 대한제국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에 1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당시 매파와 온건파로 양분됐던 외교라인의 분열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당시 한반도정책의 최고 결정자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였다.이번에 발굴된 러시아 극비문서에 따르면 그는 1901년 파블로프 대리공사가 “서울에서 개에 물려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으러 도쿄에 왔다.”고 보고하자 “휴가를 줘 충분한 치료를 받게 하라.”는 시시콜콜한 것부터 “일본군이 서해 38선을 월선해 상륙하면 즉각 발포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정도로 모든 사안을 직접 챙겼다. 니콜라이2세가 극동관련 문제에 대해 보고를 받는 공식외교라인은 외무상의 직접 보고,극동총독의 상주서,일본·청·조선주재 공사들이 황제 또는 외무상에게 올리는 보고서 등 크게 세 가지 경로였다.이밖에 황실근위연대 기병장교출신으로 상서(명예 무임소장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던측근 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황족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뷔테 재무상 등 비선(秘線)보고도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2세는 모든 보고서를 빼놓지 않고 탐독한 뒤 자신의 의견을 보고서에 남겨 정책에 반영토록 했다.하지만대한제국의 독립국가 유지,일본과의 분할점령안,전역 점령안 등 상황에 따라 바뀌는 외교정책의 큰 틀에 대해서는개인적인 판단은 갔다.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훈령을 통해 각국주재 공사를 통제하고 황제에게 의견을 올린 외무상이었다.기르스,로바노프,람즈돌프 등 역대 외무상들이 대체로 온건파여서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이 득세한 것으로 드러났다.여기에 뷔테 재무상과 쿠르파트킨 육군상 등이가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과의 일전불사,한반도 무력점령을 주장한 매파로는베조그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과 아바자 극동특별위원회 사무총장,플라베 내무상,알렉세이예프 극동총독,두바소프 태평양함대 사령관 등이 대표적이다.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은 극동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903년 여순에 설치된 극동총독부는 외교권을포함,극동관련 사무의 1차적인 처리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러·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러시아의 극동정책은 외무성과 극동총독부가 공동으로 관여하는 2중구조로 돼 있었다.극동총독부의 설치와 권한부여는 당시 러시아의 신(新)극동정책을 주도한 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의 작품이었다. 로젠 주일공사도 일본에서 한반도정책을 원격 조정하는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로젠 남작은 세 차례에 걸쳐 일본주재 공사를 역임했으며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도 일본공사였다.이후 미국대사로 승진,1905년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 당시 러측 협상부대표를 맡았다. 노주석기자
  • [심층분석 이회창] (1)그는 누구인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가 7일 충북지역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의 대통령후보로 확정됐다.9일 마지막 서울경선과 10일 전당대회를 통한 모양 갖추기 절차만 남겨 놓고 있는 상태다.이 후보의 신상과 이념·정책 및 인맥을시리즈로 심층 해부해 본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가리켜 측근들은 “정치권에 들어와서 망가진 사람”이라고 애정어린 평가를 하곤 한다.정말 ‘망가졌다.’는 뜻은 아니다.정계진출 이전에 법조계에서,공직사회에서 그만큼 추앙받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그러나 이 후보는 스스로를 “정치 초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기존 정치인과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그러면서 3김을 닮아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정치역정] “김영삼(金泳三·YS)전 대통령과 김대중(金大中 ·DJ) 대통령이 없었다면 이회창의 오늘은 없다.” 이 후보의 정치 입문과 성장기를 압축해놓은 표현이다.이 후보는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된 뒤 96년 4·11총선 직전 당 선대위의장으로 영입된다.이듬해 3월 노동법 사태,한보사건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YS는 그를 당대표에 앉힌다.이 후보는 YS와 끊임없는 갈등속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정치적으로 급성장,불과 정치입문 1년반만에 집권당 대통령 후보직을 거머쥐는 ‘정치 신화’를창조한다. 그러나 연말 대선에서 패한 그는 당 명예총재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가 98 년8월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복귀한다. 이 때부터는 시련의 연속이다.첫 1년은 ‘이 총재의 유리(遊離)기’로 분류되기도 한다.동생 회성(會晟)씨가 세풍·총풍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고 측근인 서상목(徐相穆) 의원의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이 불거져나왔다.대여투쟁을본격화하는 과정에서 국회는 문만 열어놓은 채 공전됐으며 ‘방탄국회를 열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됐다.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는 위험한 모험을 한다.김윤환(金潤煥) 이기택(李基澤) 신상우(辛相佑) 전 의원 등 계파 수장들을 공천과정에서 물갈이한 것이다.당의 분열 가능성을 감수한 게임에서 승리한 그는 거대야당을 만들어낸다.이어 5월 전당대회에서 김덕룡(金德龍)의원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당 총재를 연임한다. [‘대쪽 판사’] 이 후보는 고시8회에 합격,지난 60년 인천지법에서 법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 81년 46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대법원 판사에 올라 5년간은 법조계에 발자취를 남겼다.박세경(朴世俓) 변호사 계엄법위반사건,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김기철(金基喆) 상임총무의 국가모독사건,강신옥(姜信玉) 변호사의 긴급조치위반사건 등에서 그가남긴 소수의견 또는 보충의견은 법 해석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이 뒤따른다. 88년 7월 다시 대법관으로 임용된 뒤에도 그의 ‘소수의견’은 빛났다.‘국가보안법의 고무 찬양죄는 직접적이고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적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기준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관련 판결에 큰 영향을끼친다.‘육체노동자의 정년을 55세로 본 견해를 폐기한다.’는 판결로 근로자의 정년이 60세로 5년 더 늘어나는 데도 공헌했다. [공직 생활] 세간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대법관 복귀와 함께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수행했을 때다.그는 89년 4월동해시 보궐선거,이듬해 영등포을 재선거 때 당선자를 포함, 후보자 모두를 고발했고,당시 각당의 수뇌인 ‘1盧3金’에게 친필 경고서한도 보냈다. 결국 15개월여만에 불법선거를 제대로 막지못한 책임을지고 자진사퇴했지만,몇몇 언론매체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문민의 정부 감사원장 시절에는 율곡사업,평화의 댐을 도마에 올리며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으로부터 서면조사를 받아내고 감사원의 위상확보에 힘썼다.국민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을 무렵이다. YS는 93년 12월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이 후보를 국무총리에 전격 기용한다.당시 야당도 환영했다.그러나 총리의 역할을 놓고 청와대와 마찰을 빚어오다 127일만에 사표를 던진다. [성장기] 이 후보는 명가(名家)에서 출생,성장해 명문학교를 거친 최고의 엘리트이다.본가는 부친대부터 당대까지박사만 7명을 배출했다.외가는 천석지기의 부호에다 외삼촌 3명이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쟁쟁한 가문이다. 그런 그가 학창시절 신문배달을 하고,닭을길러 달걀을시장에 내다팔았고,17세에 소년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며물로 배를 채운 일을 거론하는 것은 “어려움도 모르고 온실속에서 자란 것만은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검사인 부친의 임지를 따라다니느라 자주 전학을 다녀야 했다.토박이들의 텃세에 싸움도 했고 그래서 권투까지 배웠다.뒤쳐진 성적으로 가출한 전력까지 담은 그의 자서전은 평범한 성장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이지운기자 jj@
  • [러 외교문서로 밝혀진 구한말 비사] (1)초대 대리공사 베베르의 수기

    1884년 첫 수교,1990년 재수교….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맺은지 118년이 지났지만 한·러 관계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첫 수교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은 일본과 더불어 38선 남·북 분할점령,한반도 전역 무력점령 및 보호국화,독립국가 유지안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남·북 분할점령안은 해방 및 6·25전쟁 이후 현실화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한매일은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20여개 한국관련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3000여건의 외교,정치,군사,경제관계 보고서 중 1884년 수교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을전후한 시기의 미공개 외교문서 1000여건을 해제해 최초로 공개한다. 100여년만에 햇볕을 본 이 극비문서에는 조선주재 초대러시아 대리공사였던 베베르의 수기를 비롯,1·2차 군사고문단 파견의 실상,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주고받았던 친서,러시아측의 기획외교로 인한 헤이그밀사 파견 실패 등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주 2회씩 10회에 걸쳐 계속되는 이번 연재물은 그동안 미흡했던 한·러 관계사의 복원은 물론,우리 근세사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러시아문서보관국 서고에 묻혔다가 100년만에 햇볕을 본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의 실상과 당시 우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베베르는 수기 전반부에서 자신이 공사로 재임했던 1898년 이전의 대한제국의 실정과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관해기술했다.후반부에서는 1903년 고종재위 40년을 맞아 경축 러시아특사로 다시 찾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모두 144쪽 분량으로된 이 수기는 자필로 작성됐지만 이를 보고받은 러시아 외무부가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타이핑했다. 1895년 10월8일 민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된 사실이 알려지자 복수를 위해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고종왕은 일본군의감시아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그는 사건 발생 당시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이자 궁궐경비원이었던 사바틴의 증언서와 자신의목격담을 난수표 암호전문 형식으로 러시아 외무부에 잽싸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니콜라이2세 황제는 이 보고서를 읽고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 더 자세히보고하라.”고 지시했다.이어 극동지역에 주둔하던 아무르군관구 사령관에게 비상경계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일본군의 감시하에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있던 고종은 1896년 2월11일 아침 7시30분 여인복장으로 변장하고 왕세자와 함께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오는 데 성공했다.뜻밖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고종의 탈출소식을 들은 수천명의 군중이 공사관 담벽 아래로 몰려와 국왕의 탈출을 만세로 환호했다.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온 이후 모든 국사는 러시아제국의 국기가 게양된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비해군 160명의 호위 아래 행해졌으며,각부 대신들은 공사관건물 안에 병풍을 친 임시 사무실을 사용했고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어떤 사건이든 대신과 단둘이서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옆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동안 자신이 대한제국의 국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이때부터 러시아는 이전에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했다.베베르가 분석했듯이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년간 대한제국 문제에 무관심했다.당시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청국이었으며 시베리아의 경제 여건을 호전시키는 데 있었다.따라서 러시아공사관의 임무는 청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데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년은 베베르와 러시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지만 고종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다.당시 러시아공사관 서기였던 쉬테인은[“그는 두개의 방에 왕세자와 각각 따로 앉아공사관 뜰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가끔씩은 두려움에 떨며 이웃 궁궐(경운궁)에 계신 노대비(명헌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몰래 세자와 함께 가곤 하셨다.그리고 남은 시간은 방안에 은둔하고 앉아 계셨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다를 바 없었다는 증언이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가 서울로 납입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일본인 재정관리자와 고문관이 떠나버리자국고에 잔액이 얼마 남았으며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관리들의 월급,특히 군인과 경찰관에게 제때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탁지부(재무부)의 재정실정을 밝혀야 했다. 베베르는 영국인 해관총무사 브라운을 재정고문으로 천거해 이 일을 맡겼다고 밝혔다.브라운은 지방에서 올라온 수입을 올바르게 수령,장부에 기입하고 지출을 줄여 관리들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이때부터 관리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고 기록했다.1896년말 국고는 1,660만엔의여유가 생겼으며,일본에서 차관으로 들여온 300만엔 중 100만엔을 상환하고 이듬해 가을 또 100만엔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이 환궁한 후 신변안전책으로 단행된 조선군의 개편작업에도 베베르가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에서 2차에 걸쳐 군사교관단을 초청,대궐시위대 2개 대대를 교육시켰으며 러시아식 군운영체계를 도입했다.여타의 대한제국군들은 러시아교관단이 관리하는 대대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베베르는 러시아국가회의 체제로 의정부의 개편,13개 도와 342개 군으로의 행정구역 분할,범법자에 대한 처벌 법규 시행,재정고문 알렉세예프 파견 요청,러시아어학교 개교,러청은행 지점 개설 등 자신의 업적을 열거했다.이 기간동안 서북 석탄광개발과 압록강,두만강변의 벌목이권을러시아가 따낸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대표적인 친한파인사로 알려졌지만 고종과 황실인사는 물론,한국과 한국인을 혹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을 떠난 지 5년만에 다시 와보니 거리의 남루한복장은 이전보다 두배나 많았다.…고종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嚴妃)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일본인들이 다시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한국인은 러시아,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제대로 몰랐다.…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고종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품이지만 많이 쇠약해졌으며,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1903년 다시 서울에 와보니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서도 정치,경제적 예속화를 촉진시키는 데모든 수법을 동원하고 있었다.한국인들은 일본의 속셈을알지 못했고,러시아는 법적으로 그런 정책을 중지시킬 권한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한제국의 조정과 국민자산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를열거하면서 대한제국이 조만간 일본의 정치적 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만명을 넘으며,일본인 1인당 한인 5명이 식모,사무실 서기,잡부,납품상인 등으로고용되다시피 했다.…대한제국 연간 무역액의 72%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였다.…1898년 9월 경부선철도 부설권 협정서 중 ‘철도에 필요한 역사,창고 등 대한제국측이 제공하는 부지는 철도회사에 귀속되며 역사는 필요한 곳에 건설하되 역 앞에는 일본인 이외 타민족의 거주를 금한다.’는 불평등 조항 때문에 철도부설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철도및 역사주변 땅은 일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일본은 대한제국과 다른 국가들이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서울∼부산∼일본해저 전신선을 통제했다.…개항지마다 일본은행이 개설돼 일본엔화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베베르는 누구 우리나라에 부임했던 역대 외교관 중 초대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베베르만큼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외교관은 없었다. 베베르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 동안 공사로 재직하면서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통했다.그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1년 동안 친러시아내각을 출범시키는 등 대한제국의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고종은 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나자 ‘이임이 유감스럽다.장기간 유임시켜달라.’는 친서를 니콜라이2세에게 보냈다.니콜라이2세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1902년)에 당시 야인이던 베베르를 사절단장으로 특파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 중에도 ‘베베르는 고종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베베르를 경축사절단장으로 결정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종은 서울에 온 베베르를 자문역으로 붙잡기 위해 니콜라이2세에게 서울체류 연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베르에 대한 학계의 연구실적은 전무하다시피하다.그의 출생연도와 학력,수기 등도 이번의 문서 공개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됐다. 베베르는 1841년 6월5일에 태어난 독일계 러시아인.부친은 루터교 선교사였다.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 동양어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5년동안 중국어 공부를 했으며 이후 톈진영사와 일본 총영사를 거쳐 조선주재초대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부와 중국,일본 등 주변국 외교가에서 ‘친한파’로 낙인찍힌 데다 수뢰사실(2만엔)이 외무부에 알려지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주석기자 ■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러 문서국 20곳서 10년간 자료 뒤져” “러시아에 산재한 20여개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한국과관련된 방대한 양의 비밀문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습니다.러시아가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시아 문서수집 및 번역 부문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박종효(朴鐘孝·65)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는 지난 90년 한·러 재수교 직후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자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갔다.문서보관소는전세계에서 몰려온 학자들로 만원사례를 이뤘지만 한국관계문서를 찾는 학자는 박 전 교수뿐이었다.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문서를 조사,열람한 뒤 복사하려면 기록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한국 학자들의 이름은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어와 러시아사,한국사,한·러관계사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 드문 탓도 있었지만 소장된 문서가외교,군사,경제 등 전문 분야의 필사본이어서 웬만한 학자들은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보관소의 서고를 뒤져 한국관련 문서를 찾아내기란 숨은 그림찾기나 마찬가지였다.최근에야 러시아어와 역사를 전공하는소장학자 몇명이 한국관련 자료 수집작업에 합류했다. 박 전 교수는 99년부터 2년 동안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연구비를 지원받아 문서찾기와 번역,해제작업을 해왔으며,조만간 ‘러시아국립문서국 소장 한국관련 문서 요약해제집’이란 책을 펴낼 계획이다.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비밀문서의 목록을 총망라,문서목록해제집을 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일입니다.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군사문서보관소,연방문서보관소의 서고에 숨겨져 있던 문서들을 분석해 보면 러시아가 견지해온 한반도정책의 과거는 물론,현재와미래까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박 전 교수는 러시아측의 공개 제한조치로 ‘극비문서’들이 소장된 크렘린문서보관소와 KGB문서보관소에 접근할수 없었던 점을 아쉬워했다.그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뒤 소련 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원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독토르)을 땄고 모스크바대학 객원교수로대학원생들에게 한·러관계사를 강의했다. 노주석기자
  • 홍걸씨가 유상부회장에 준 도자기 이희호여사 친필 새겨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지난 2000년 7월30일 유상부(劉常夫) 포스코 회장에게 건넨 도자기는 청와대선물용이 아니라 이희호(李姬鎬)여사가 친필을 담아 주문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포스코는 7일 이 도자기에는 이 여사가 친필로 쓴 ‘寬仁厚德 壽松堂 李姬鎬’(관인후덕 수송당 이희호)라는 글귀가 담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포스코는 “언론마다 ‘행동하는 양심’이나 ‘평화의 기도’ 등 도자기 글귀 내용이 달라 유 회장의 비서를 유 회장자택에 보내 도자기를 직접 확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이 여사가 홍걸씨를 통해 유 회장에게 도자기를선물한 배경을 놓고 의혹은 커질 전망이다. 청와대측은 이와 관련,“이 도자기는 이 여사가 자체 주문해 바자회 등에 출품하는 것으로 흔히 청와대 방문객들에게증정하지는 않는다.”며 “방문객들에게 선물로도 주지만 일반인들이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편 포스코는 이날 이 여사가 유상부 회장에게 김홍걸씨와의 만남을 요청했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유병창(劉炳昌) 홍보담당 전무를 보직해임했다.후임에는 윤석만(尹錫萬) 포스틸 관리담당 전무가 임명됐다. 전광삼기자 hisam@
  • “야호” 어린이날 행사 풍성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시내 공원 등에서 어린이들을위한 다양하고 풍성한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최근 개원한 상암동 월드컵공원에서는 사생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열리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체신비전’도 국립과학관에서 계속돼 볼거리를 더한다. 과천 서울대공원에서는 삐에로 퍼레이드와 어린이 노래자랑,공주선발대회,고적대 리듬쇼 등 10여개 특별 프로그램이 줄을 잇는다.서울대공원(동물원)은 이날 어린이들에게무료 개방된다.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는 물레를 돌리며 직접 도자기를만드는 도예촌 도자기 체험과 어린이 3대3 축구 등을 마련한다.또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한 동물공연장 애니스토리,세계최대공룡대전,대자연체험박람회,동춘서커스공연 등도 선보인다. 이곳에서는 이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에 대비해 평소보다 1시간30분 앞당긴 오전 7시30분부터 문을 연다.어린이는무료. 여의도공원에서는 ‘평화의 약속 2002’라는 제목으로 민속놀이 체험과 요술풍선 나눠주기 등의 행사를 연다.또 천호동공원에서는 어린이 노래자랑·강강술래·놀이마당 등을,보라매 공원에서는 릴레이경주·줄넘기 등 가족과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남산공원에서는 ‘안중근 평화문화제’를 개최해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무료로 나눠주고 안 의사 친필 등을 전시한다. 한편 서울시는 어린이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시와 공원관리사업소,자치구별로 각각 종합상황실을 설치하고 주요 공원에서 미아보호소와 방송실을 운영하는 한편 구급차·의료진·안전요원 등을 배치,사고에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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