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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상상력과 지혜/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시가를 물고 줄기차게 영국의 중무장을 외치는 윈스턴 처칠의 영화 속에서 우리를 본다.다른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평화를 이야기하던 상황에서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영국군의 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으로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독일이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야 영국 정가는 처칠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호치민 역시 역사의 중요 고비에서 과감하게 인기없는 방향을 선택하였다.예를 들면 제2차 대전 말기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프랑스와 협력해서 일본에 대항하기로 결정을 했다.당시 일본군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군임을 자처하던 상황이었다.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목표였던 대다수의 독립투사뿐 아니라 일반 국민정서도 일본과 협력하여 프랑스와 싸우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독 호치민만은 프랑스와의 협력노선을 선택하였다.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줄기차게 그리고 간절하게 국민들을 설득하였다.인기없는 정책을 선택하고 나서도 국민의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나라 사랑에 대한 지도자의 진정과 국민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기를 공감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에만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지혜를 구하고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과감한 역사적 상상력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보이지 않는 미래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지금은 1000년 단위의 지각 변동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반지의 제왕’ 같은 팬터지 소설들이 전 세계의 베스트 셀러가 되는 이유도 과감한 상상력을 구하는 신세대의 목마름 때문이다. 2004년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이제는 팬터지 소설의 자리에 각 나라의 뛰어난 정치 지도자의 전기가 앞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인도 뭄바이의 서점가에는 간디와 네루의 전기가 가득했고 미국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서점가의 중심에 있었다.중국도 ‘영웅’이라는 영화를 통해 진시황 시대의 천하 통일을 현재로 끌어들이고 있고 강희제,옹정제,한무제가 소설과 영화로 오늘의 중국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정치지도자를 넘어,새로운 사상에 대한 현실 또는 상상의 리포트가 나오고 있다.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관련 책이 영화로,문고본으로 나오고 있고 미국에서는 예수 생존기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다빈치 코드’가 기독교 문명과 르네상스 문명의 화해를 암시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우리도 독도 문제,고구려사 왜곡으로 이제는 천년 단위의 역사여행을 강요받게 되었다.멀리 갈 것도 없이 2004년에 1904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친러,친일,친청파의 당파적 주장 속에 몰두했던 정치 지도자 중에 영·일동맹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의미를 읽어내고 1905년과 1910년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인기없는 외로운 입장을 취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따져보자. 일본 국민문고인 이와나미 문고 제1권은 일본 외무성 관리였던 무쓰가 쓴 청·일전쟁 당시의 외교비사를 기록한 ‘건건록’이다.‘동양’과 힘을 합쳐 서세동점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청 왕조가 유능한 외교관인 리훙장을 대책 없이 전격 교체하는 것을 보고 같이 협력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개인이나 사회의 운명을 바꾸는 카이로스적 시간에는 특히 외교문제나 국내의 갈등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지금부터 100년 후 아니 5년,10년 후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두가 상상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정옥 대구 가톨릭대 사회학 교수
  •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문은 닫혀 있었다.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문은 닫혀 있었다.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 심재학-심정수 복수혈전 칼간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심정수(현대)와 심재학(두산)이 12일부터 시작되는 프로야구 플레이오프(5전3선승제) 선봉을자처하고 나섰다. 심정수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두산에서 현대로 옮겼고 반대로 심재학은 현대에서 두산으로 갔다.유니폼만 바꿔 입을었을 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이들이 이제는 친정팀을 향해 ‘칼날’을 곧추 세웠다.과거 한솥밥을 먹은 만큼 누구보다 상대를 잘 알고 있다.또두 선수 모두 “친정팀이 자신을 버렸다”는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다.당시 두산은 선수협의회 참가를 문제삼아 심정수를 방출했고 현대는 방망이가 약하다는 이유로 심재학을버렸다.두 선수 모두 ‘복수혈전’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헤라클레스’ 심정수는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의 파괴력을 다시 한번 선보일 작정이다.당시 두산 선수였던 심정수는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 결승 홈런으로 팀의한국시리즈 진출을 혼자 이끌다시피 했다.지난해 현대와의한국 시리즈에서도 팀이 3연패로 벼랑에 몰리자 다시 홈런포를 가동하며 3연승을 올리는 기적을 일궈냈다.올 시즌 중반 롯데전에서 투수의 볼에 얼굴을 맞아 2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이후 특유의 근성으로 다시 타격감을 회복했다. 강한 어깨를 가진 심재학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올 시즌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9타수 4안타의 맹타를 휘둘러김동주를 밀어내고 4번타자로 자리를 굳혔다.특히 심재학은 친청팀 현대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때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팀 우승을 도왔지만 현대는 시즌이 끝난 뒤 “거포를 원한다”는 이유로미련 없이 심재학을 내보냈다.심재학은 눈물을 삼키며 떠났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약이 됐다.지난해 .265였던 타율이 올 시즌 .344로 급성장하며 현대전에서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버림받은 친정팀에 대한 한풀이를 벼르는 두 거포의 맞대결로 올시즌 플레이오프전은 한층 열기를 더하게 됐다. 박준석기자 pjs@
  • MBC 주말극 ‘그 여자네 집’ 영욱의 시집살이 갈등 공감

    “어머 맞아맞아.저거 완전 내 이야기야.”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휴일을 보낸 결혼한 20,30대 직장여성들 사이에서 MBC 주말 드라마 ‘그 여자네 집’(오후 8시)이 화제다.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번듯한 직장까지 있는 영욱의 시집살이를 모두 한번쯤 겪었기 때문이다. “남편하고 사내커플.대학도 같은 곳을 졸업했는데 시댁에선 완전 하녀예요.아이 돌 잔치 때 시댁 식구들은 중앙에앉아 시끄럽게 떠들면서 음식을 먹는데 친청 신구들은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었어요.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나더라고요.” “난 직장이 집에서 한 시간정도 걸리고 남편은 20분도 안 걸리는데 나보고 아침상 차려주라고 시어머니가 성화래서미치겠어요.자기 아들만 굶는 것도 아닌데 말야.” “위로 전업주부인 형님이 2명 있는데 내가 명절날 늦게라도 가면 ‘일한다고 뻐기는 거냐’고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드라마 속에서 영욱의 시어머니가 ‘아들을 굶기지 말라’‘빨래를 재대로 해라’‘살림을 게을리 말라’면서 간섭하는 것이 직장여성들에게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 같이 들린다. MBC ‘그 여자네 집’시청자 게시판에도 “요즘 20∼30대여성의 삶을 피상적이지 않게 잘 다뤘다”는 공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시청률 조사 기관인 TNS에 따르면 2일 방영분 시청률은 26.8%로 전체 시청률 3위를 차지했다.그 중20∼30대의 시청점유률이 54.9%로 나타났다.2명중 1명은 ‘그 여자네 집’을 보는 것이다. ‘그 여자네 집’의 김정수 작가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직업을 가진 여성의 힘든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었지만 아직도 집안일은 여성에게전담되고 있어 직장여성에게 많은 공감을 얻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여자네 집’이 극 중반을 맞으면서 영욱과시댁과의 갈등은 더욱 고조될 예정이다.시댁 챙기느라 일에서 좌절을 맛본 영욱은 시댁과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한다.시도때도 없이 들이 닥치는 시어머니에게 열쇠를 내놓으라고 하고,시누이에게는 남의 살림에 상관말라고 엄포를 놓는다.영욱과 시댁의 대립으로 태주와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여기에 영욱의 친정부모도 가세,사돈싸움으로 번진다.결국 영욱과 태주는 별거를 거처 이혼에 이른다. 결말은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재결합을 하는것으로 설정되어있다.일방적인 여성의 희생이 아닌,서로를인정해주는 과정이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질 지 궁금하다. 이송하기자 songha@
  • 대한항공-상무 “4강 막차표 내놔”

    마지막 4강 티켓을 잡아라-.배구 슈퍼리그 3차대회 진출을놓고 상무와 대한항공의 ‘빅뱅’이 예상되고 있다. 현재 남자부에서는 삼성화재와 현대자동차가 각각 6승과 4승1패로 3차대회 진출을 확정한 상태.3승2패로 3위에 올라있는 LG화재도 약팀과의 경기를 남겨놓고 있어 3차대회 진출을 낙관하고 있다. 남은 한장의 4강 티켓을 놓고 상무와 대한항공은 2차대회가 속개되는 8일 동해체육관에서 물러설 수 없는 혈전을 펼친다.두팀은 현재 2승3패 동률. 상무는 세터 김경훈에게 또 한번 기대를 걸고 있다.지난 시즌까지 대한항공에서 뛴 김경훈은 올 시즌 1차대회 대한항공전에서 송곳같은 토스로 친청팀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 주었다.이와 함께 김기중 김종민 권순찬 트리오를 풀 가동해확실하게 4강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각오다. 상무와 LG전을 남겨놓고 있는 대한항공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상무전을 꼭 승리로 이끌어야 할 처지다.그러나 지난 시즌까지의 역대전적(6승14패)에서 보듯 쉽지만은않다.여기에다 지난해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영입한 윤관열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대한항공은 공격 4위에 올라있는 노장 김종화를 축으로 배수진을 칠 계획이다.라이트 김석호와 센터 이영택이제몫을 해준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다. 박준석기자 pjs@
  •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취임 2주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31일로 취임 2주년을 맞는다. 이 총재는 지난 97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이듬해 8월 제1야당총재로 변신,정권 탈환의 기회를 노려 왔다. 이 총재의 취임 2년은 지난 4·13 총선을 전후해 두 시기로 나뉜다. [이총재 친청체제 구축] 4·13 총선 이전까지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시기였다면 총선 이후는 수권야당으로서 정체성을 다져 나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 총재 주변에서는 “지난 50년 헌정사상 이 총재가 야당을 가장안정적으로 이끌고 간 점은 높이 사야 한다”고 자평한다. 과거 군사정권에 맞선 선명 야당도 아니고 총재와 정치적 운명을 나눈 가신들이 포진한 단일화된 야당도 아니지만,그만의 독특한 카리스마로 130명이 넘는 거대 야당을 ‘굴려온’ 것 자체만도 평가받을 대목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난 총선 과정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씨 등 당의 간판격인 일부 중진을 과감하게 ‘물갈이’함으로써 당내 입지와장악력을 확고하게 굳혔다는 분석이다. [향후 과제] 차기를 노리는 이 총재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30일 32도를 웃도는 서울 도심에서 1시간 남짓 땀을 흘리며 ‘선거부정 축소·은폐 규탄 침묵 가두행진’을 벌였지만 일반 시민들의 호응이 적은데서 보듯이 이총재와 한나라당의 앞길이 순탄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우선 제1야당으로서 성숙된 정치 운영상을 보여주기보다 여당의 악수(惡手)로 반사이익을 챙기려 한다는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총재가 ‘3김’과의 차별성을 강점으로 내세우면서도 사안별 정국 운영 과정에서는 스스로 3김식 정치 스타일을 닮아가는,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성공적인정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기 힘들다고 꼬집는다. 이는 이총재가 21세기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질서에 걸맞는 리더십을 창출해야 한다는 과제와 직결된다. ‘통일 한국’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이 총재로서는 숙제거리다. 박찬구기자 ckpark@
  • [특별기고] 守舊엔 미래가 없다

    동학농민전쟁과 그 뒤를 이은 갑오경장,그리고 그 자체가 희극이었던 ‘대한제국’의 건설. 이것이 20세기를 맞던 전야의 우리 모습이었다.500년을 간신히 버텨온 조선왕조의 변혁을 위한 위로부터의(갑신정변) 또는 밑으로부터의(동학농민전쟁) 시도들이 완고한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모두 실패하고 궁중은 친청파니 친러파 또는 친일파니 하는 사대 수구세력간의 각축장이 되어있었다.세계의 흐름이 어떻고,어떤 새로운 과학적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따위의 것은 당시 지배층의 관심 밖이었다.다가오는 20세기를 어떻게맞이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아예 사치스러웠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0년 후 지금 우리는 새 천년을 이야기하고 있다.‘산업화엔 늦었지만 정보화엔 늦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 정도로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미국 중심의 초국적 자본들이 지배하는 세계화시대가 이미 오고 있고,세계화란 실제로 미국적 ‘삶의 양식(way of life)’의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우리 현실은 이 세계화의 본질을 ‘Segyehwa(세계화)’식의 우물 안 개구리 논리로 받아들이던 김영삼시대의 상황 인식으로부터 크게 발전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국내에서는 그 놈의 ‘문건시리즈’에 이어 나온 ‘옷로비 의혹시리즈’가국민의 정신적 수준을 몇십년 후퇴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모여 ‘21세기의 진보적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있다.일각이 바쁜 미,영,불,독,이탈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주말을 이용해 당장의 현안도 아닌 ‘21세기 진보정치’에 대해 점잖게 토론을 즐기고 있는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회의장소로 선택한 곳은 바로 인류진보의 새 시대를 열었던르네상스의 발흥지가 아닌가.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들을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에 모여 세계를 향해 21세기를 향한 논의를 펼쳐 보이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제스처는 확실히 우리 현실과는 너무 먼 거리를 느끼게 한다.한 사회의 발전방향을 두고 신사회주의가 옳으니,신자유주의가 옳으니 또는 ‘제3의 길’이란 허구적인 것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무슨 학자들의학술 모임에서가 아니라 이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지도자들의 입에서나오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니 진보정치니 하는 한가한 소리는 그만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왕조 시대의 ‘대역죄’를 연상시키는 ‘국가보안법’이 반세기 이상을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나라,그래서 그 법을 위반하면 ‘주리를 트는’ 고문까지 ‘애국’의 이름으로 자행했던 나라,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많은 어버이들이 1년이 넘게 여의도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고 있지만 그 시절 고문과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했다는 인물은 금배지를 달고 여전히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나라.‘총론적인’ 개혁에는 ‘예’ 하지만 그 개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면 결사적으로 ‘아니오’ 하는 나라.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을 강조하지만 이를 현실로 변환시키는 정치,관료조직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나라.이 나라를 ‘새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 ‘어제의 논리’가 아니라 냉엄한 ‘오늘의 논리’가 필요하다.새 천년을 빙자해 ‘내일의 논리’까지 끌어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외쳐대던 ‘새 천년’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새 옷을 걸치기전에 먼저 방 한가운데 가득히 널려 있는 낡은 ‘빨랫감’들부터 해결해야한다.국회는 당장 현재 계류되어 있는 각종 개혁입법들을 통과시켜야 한다. 여당은 보다 확실한 의지로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를 관철해야 한다.야당의 반대를 핑계 삼아서는 안된다.수구세력이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것을 우리는 당장 100년 전의 역사에서 배우고 있지 않는가. [정범구 방송인·시사평론가]
  • SK 崔泰源 회장 친정체제 구축 완료

    ◎선친 최종현 전 회장 보유주식 물려받아 최대 주주로 崔鍾賢 전 SK그룹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SK그룹 계열사 주식이 장남인 崔회장에게 모두 넘어갔다.이로써 SK그룹은 계열사 인사에 이어 崔泰源 SK(주) 회장의 친청제제 구축을 완료했다. SKC(주)는 17일 崔鍾賢 전 SK그룹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392만주(24.81%)를 유산상속을 통해 장남인 崔회장에게 넘김으로써 최대주주가 변경됐다고 증권거래소에 공시했다. SK(주)도 이날 주요주주 변경공시를 통해 崔 전회장 소유주식 4만주(0.06%)를 崔회장에게 유산으로 상속함으로써 崔회장 소유주식수가 9만주(0.13%)로 늘어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SK증권은 崔 전회장 보유주식 459만주(4.00%)를 崔회장에게,SK상사는 崔 전회장 등 11명이 보유하고 있던 보통주 128만주(5.27%)와 우선주 17만주(8.21%)를 崔회장 등 10명에게 각각 상속,최대주주 변동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 기아,사장직속 15개로 축소/김 회장 친정체제 구축

    ◎임원·고문 84명 감원 기아그룹이 24일 한승준 기아자동차 부회장 등 임원 84명(고문 15명 포함)을 퇴진시킴으로써 김선홍 회장 친청체제를 구축했다.이번 인사로 박제혁 기아자동차 사장,송병남 그룹경영혁신단 사장을 중심으로 회장에서 사장으로 이어지는 직계 라인을 구축했으며 기획·대외업무통인 박제혁사장이 그룹 2인자로 급부상하게 됐다. 기아그룹 임원인사에서 관심끄는 대목은 한승준 부회장의 퇴진.경영혁신기획단의 단장으로서 그룹내 2인자였던 한부회장은 대내외적으로 김선홍 회장을 대신해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김회장이 퇴진할 경우 자리를 이어받을 포스트 김으로 여겨져온 한부회장이 물러남으로써 김회장이 친정체제를 구축하게 됐다.한부회장은 김회장과 그동안 마찰을 빚어온 것으로 알려졌다.기아측은 한부회장의 퇴진에 대해 “스스로 앞장서 용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만 설명했다.한부회장은 퇴진하지만 그룹 정상화과정에서 자문역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사는 지난달 24일 20명의 임원감축에 이어 두번째로 전체임원(340명) 31%인 104명이 줄어들게 됐다.기아자동차의 경우 사장 직속의 25개 부문을 15개로 축소하고 아산1공장과 2공장을 통합하는 한편 본부장 중심체제를 구축하는 조직개편도 단행했다. 이번 임원인사로 기아그룹 1세대들이 모두 물러났다.이신행 조래승 김영귀 이기호 김영석 고문 등은 기아와 아시아자동차의 기반을 닦았던 인물들로 지난달 부회장이나 사장직에서 고문으로 물러난뒤 이번에 완전히 퇴임했다.기아사태 이후 계열사 사장단 가운데 남아있는 사람은 유영걸 기아자동차판매 사장 정도다.그러나 기아가 처음 계획했던 임원들의 감원규모가 119명 가량이어서 앞으로 15명 정도 임원들이 더 퇴직해야 한다.기아측은 전직 배치등의 방법으로 이를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기아임원 전보내용은 다음과 같다(괄호안은 전직).△기아자동차 부사장 조병창(대경화성 사장) △ 〃 기획담당 전무 정태승(유럽현지법인 대표) △ 〃 자금담당 상무 류순봉(아시아자동차 상무) △ 〃 구매본부장 전무 주수철(소하리 공장장) △아시아자동차 상무 임동일(기아모텍 상무) △기아중공업 부사장 신영철(기아자동차 구매본부장) △ 〃 상무 이강전 (기아자동차 상무) △기아모텍 상무 황순영(한국데밍 상무) △한국에이비시스템 전무 이종현(기아자동차 상무) △대경화성 사장 오민부(기아자동차 전무)
  • JP 청와대회담후 “잰걸음”

    ◎대선겨냥 대학특강·강연 등 독자행보 강행/내각제 재부상대비 양원제 요강마련 착수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연말 대선을 겨냥해서이다.1일 청와대 총재회담 이후 더욱 그렇다.내각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나 「잠수」했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그렇지만 내각제 「부상」에 대비,양원제를 골자로 한 내각제 요강마련도 지시했다.대선과 내각제를 위해 「전방위」 대응책을 마련중이다. JP의 독자행보 가운데는 「대학원 특강정치」가 눈에 띈다.4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동의대 행정대학원 초정으로 「21세기를 향한 권력구조 개편」이란 주제로 특강한다.14일 충북대,24일 고려대,29일 충남대,30일 경기대 등 이번달만 5차례나 잡혀 있다.내달에도 27일 국민대를 비롯,숙명여대와 서강대,공주대에서의 특강을 검토중이다.젊은층과의 대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JP는 동우단체와의 연대도 강화할 계획이다.11일 서울 양재동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충청향우회와 단합대회를 갖고 12일에는 가락종친청년회 전국대회에참석한다. 이달말부터는 시·도지부와 지구당을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가질 예정이다.24일 인천시지부를 시작으로 내달 30일까지 13개 시·도지부를 방문한다.내각제 전도사 역할을 하면서 DJ보다 고른 지지를 받고 있음을 입증할 계획이다. 이와 동시에 자민련은 양원제를 바탕으로 한 내각제 요강마련에 착수했다.내각제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양원제를 채택한 것은 통일에 대비하고 지역대표성을 가미하기 위해서라 한다.내각제에 걸림돌인 15대 국회의원 임기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처음 하원은 15대 의원으로 구성하고 상원만 선거로 뽑자는 것이다.
  • 일가3명 영정 나란히…「가족재난」에 가슴쳐/대구가스참사 이모저모

    ◎30대 여인,“내 남편 시신 좀 찾아달라”절규/목숨던진 구출… 용감한 시민 미담 잇따라/잇단 정치인방문에 대책본부 직원들 “업무방해”일침 대구 도시가스폭발사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수습작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사고 이틀째로 접어든 29일 사고대책본부 등에는 전날에 이어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계속 답지하고 있으며 졸지에 중경상을 당한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도 줄을 잇고 있다. ○…이번 사고의 희생자 가운데는 일가족 3명이 포함돼 있어 최악의 가족재난을 기록. 경북대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는 김종철씨(47·회사원)와 부인 오점수씨(37),아들 동우군(대구 남중학교1) 등 일가족 3명의 영정이 나란히 놓인 채 유족이라고는 김씨의 형인 명철씨(55)부부와 누나(52),부인 오씨의 친청 식구 3명뿐이어서 주위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형 명철씨는 『동생이 93년초쯤 중국에 돈을 벌러 간다며 집을 나섰으나 별다른 돈벌이도 하지 못한 채 지난해말 귀국했다』면서 『네가 이럴 수 있느냐.동우까지 데려가다니…』라고 울부짖다가 한때 실신. ○…사고현장의 지하 30m 아래에서 일하던 우신종합건설 인부 50여명은 대폭발에도 불구,LPG가스의 특성때문에 대부분 무사했던 것으로 밝혀져 눈길. LPG가스는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일정량의 산소와 결합하면 위로 올라가면서 폭발을 일으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고당시 지하 30여m 지점에서 목공일을 하던 김유덕씨(33)는 『지하에 있으면 더 위험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우리의 피해가 적었다니 놀랍다』고 어리둥절한 표정. ○…이날 하오 5시쯤 사고대책본부가 차려져있는 달서구청에는 이틀째 소식이 끓긴 회사원 김태진씨(45)의 부인 윤인숙씨(39)가 친척들과 함께 달려와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아달라』고 통곡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평소 남편이 사고시각에 현장을 지나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 확실하다는 윤씨는 『병원에서 남편의 것이 확실해 보이는 시신이 있어 거두어가겠다고 했지만 확인이 될 때까지는 안된다고 거절했다며 한시라도 빨리 신원을 확인해달라』고 통사정. ○…사망자의 유가족 및 부상자를돕기 위한 성금이 전국 각지에서 답지,슬픔과 비통에 잠긴 이들을 다소나마 위로하고 하루빨리 재기하도록 격려. 농협 대구·경북지역본부 임직원은 이날 상오 대책본부에 성금 1천만원을 전달하고 12개 병원에 흩어져 있는 유가족에게 1천개의 도시락을 전달.대구·경북농협 주부대학 수료생 3백여명도 1백10만원의 성금을 모금. 인천시도 대구시에 성금 2천만원을 기탁하고 이날부터 공무원을 비롯한 범시민 헌혈운동을 전개. 한편 포항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훈련단 장병 1천여명은 이날 상오 대대적인 헌혈운동을 벌여 4만㏄의 피를 긴급공수. ○…대구 달서구청에 설치된 사고 대책본부에는 사고가 발생한 28일부터 정치인들이 계속 방문해 직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날 낮에는 유족들까지 들이닥쳐 책상과 집기를 집어던지는 등 한때 소란을 피워 직원들은 매우 곤혹스런 모습. 한 직원은 『정치인들의 얼굴내밀기식 방문이 바로 업무방해』라면서 『대구민심을 달래려면 과시용 방문보다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뼈있는 한마디. ○…28일 사고현장에서 이용선씨(51)는 7명의 고귀한 생명과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맞바꿔 「살신성인」을 구현. 목격자들은 『사고지점 이웃구간의 지하철공사를 맡은 화성산업 소속 교통정리반장인 이씨가 이날 부서진 차안에 갇혀 있던 부상자 2명을 구해낸 뒤 공사장 지하로 내려가 쓰러져 있던 5명을 업어 올렸다』고 증언. 이씨는 부상자 등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지하로 내려가다가 무너져내린 복공판에 깔려 그자리에서 숨졌다고 목격자들이 전언. ○…사고현장에서는 또 용감한 시민 3명이 온몸을 던져 30여명의 생명을 구출한 사실이 밝혀져 훈훈한 인간애를 발휘. 개인택시기사 손중오(42)씨와 버스기사 임해남(29)·전기배관공 제갈천(40)씨등 「의인」3명은 2차폭발의 위험도 아랑곳없이 철제빔에 매달려 있거나 지하공사현장에 쓰러져 있는 시민 30여명을 구출해냈다는 것. 특히 손씨는 지난 81년 경산역 열차사고때도 우연히 사고현장에 있다가 20여명의 인명을 구조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은적이 있어 대형사고와 묘한 인연을 갖게 된 셈. ○…이날 상오11시쯤 대구 보훈병원 영안실 합동분향소에 정호용 의원 등 민자당 대구시 출신 의원 7명이 찾아왔으나 유족들은 이들의 분향을 저지하는 등 한때 실랑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의원이 『국회의원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문상하고 정부측에 적절한 보상을 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다짐.그러나 유족들은 『시체를 눕혀놓고 보상이 웬말이냐』고 분향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의원들을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로 끌고가 강제로 밀어넣기도. ○…대구광역시교육청은 이번 사고로 학생 49명이 숨진 것과 관련,각 교육청 교육장및 각급 학교 교장회의 등을 긴급소집하고 사망자에 대한 조문을 직접 하라고 지시. 또 교사들을 보훈병원 등 8개 병원에 교대로 보내 입원·치료중인 학생을 위문하도록 조치하고 학생회및 간부학생에게도 위문하도록 적극 권장. ○…이날 사고현장감식에는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스폭발사고때 참여한 가스전문가들이 다시 등장해 관심을 증폭. 검·경합동수사본부측의 자문요청을 받고 대구에 급히 내려온 김홍일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를 비롯,김외곤 한국가스안전공사 기술지도부장·김윤회 국립과학연구소 일반물리실장 등 3명이 이날 현장감식에서도 맹활약. 김 실장은 『지난번 사고와 이번 사고는 가스누출경로나 누출경위 등 내용면에서는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 없지만 약간만 주의를 했더라도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고 아쉬움을 토로.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공주 중호마을 반촌 탐방(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3)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기개가 첫 덕목” 3백년 이어온 선비정신/효종때 거유 이유태선생 후손 모여살아/“학문·덕 갖춘뒤도 때아니면 불출사” 일관/12대 종손 등 일제때도 한학공부… “학교교육보다 도리·예절이 중요” ○노인들은 상투 틀고 계룡산 산자락이 북으로 금강에 치달아 곰나루를 향해 넉넉하면서도 온화하게 팔을 벌린곳에 자리잡은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호마을의 용문서원.등용의 옛마을로 계룡의 서기를 이어받은 우리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조선 중기 당대의 거유로 명성을 높였던 초려 이유태(1607∼1684년)의 후손들이 오순도순 마을을 이룬지 3백년.반촌의 긍지를 이어온 경주 이씨 집성촌으로 20여가구가 모여 산다.공주시내가 지척이지만 아직도 노인들은 대부분 상투를 틀고 있으며 철저하게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선비의 기개를 가정교육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초려정신의 핵심은 선비로서 불출사의 기개를 강조하는데 있다.선비는 우선 학문과 덕식을 갖추고 그 다음일단 나가면 때를 좌지우지 할수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와 은거해야 한다는 정신이다.이를테면 진퇴를 분명히 할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이를 몸소 실천,인효현소종 4대왕에 걸쳐 능참봉부터 사조참판·대사헌까지 모두 39가지의 벼슬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관직생활을 한것은 28세때 5개월과 30세때 6개월이 고작이었다. 그같이 짧은 관직생활에도 불구,그는 학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 정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로서 당대 호서산림 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았다.그는 금산 노동 태생으로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장년이 된후에는 사계의 아들 집과 교류하며 그들 부자로부터 예학의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치국경세에 있어서는 율곡이이를 숭상했다.그에 학문세계를 율사연원으로 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초려는 병자호란후에는 덕유산중에 은거,모든 벼슬을 사양하였다.그후 효종이 북벌의 큰뜻을 품고 산림학자들을 불러모으자 결연히 상경하였다.그러나 조정은 시배들의 반목과 질시속에 온갖 주의주장만분분할뿐이었고 또한 청나라 사신의 위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그같은 분위기에서 친청파의 척결을 알리는 그의 논소는 조정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마침내 그는 다시 낙향했다. ○대사헌벼슬 물리쳐 그후 효종이 말년에 다시 밀지로 초려를 부르니 그는 북벌을 위한 구체적 국정개혁안으로 2만여언의 장문상소인 「만언봉사를 거의 완성해 가고 있을 때였다.그러나 그해(1960년) 효종은 승하하고 뒤이어 즉위한 현종은 왕명으로 만언공사를 제출케 했다.그 내용은 위민정치를 근간으로한 군사및 내정개혁사상을 삼고있다.그후에도 현종은 초려의 경륜을 사기 위해 벼슬을 높여 불렀으며 숙종때는 대사헌에 제수됐지만 불출사의 뜻은 완강했다.『나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벼슬길 보다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공직관이었던 것이다. 초려의 강직한 정신은 오늘날 후손들에까지 그대로 전수돼왔다.노인들은 상투등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후손들에게는 현대식 학교교육도 애써 가르치고 있다.단지 일제때 일본식교육은시키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종손인 12대손 정우씨(52)와 그 또래의 집안 사람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그는 『우리 형제 다섯중 위로 셋은 학교를 가지 못했고 비슷한 나이의 사촌이나 육촌형제 가운데도 학교를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대신 그는 15세때 대학을 떼는등 한학을 공부했으며 초려의 책을 비롯,집에 보관중인 3천여권의 서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있다. 자식들에게는 초려가 남긴 유일한 친필족자글씨인 「징분항선 복례」(분한 생각을 경계하고,나쁜것은 고쳐 착하게 하고,예를 따라 좇으라)를 가훈으로 가르치며 학교공부를 시켰다.학교공부중에도 사서는 반드시 익히도록 했는데 이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큰아들 상익씨(30)는 철학교수로,둘째아들 상욱씨(28)는 한문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게 됐다. 공주향교의 전교를 지낸 정우씨의 당숙 종언씨(70)도 이웃에 산다.그가 해석하는 오늘날 선비정신의 의미는 이러했다. 『선비가 박력이 약하고 경제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완고하고 고집불통으로 비쳐지는 것은 잘못입니다.현대식 교육을 받기는 받되 인간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하고 잘살아야 하되 나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그것은 이웃과 국가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행동철학을 먼저 배우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도 있습니다.부모나 국가지도자는 이신교자지종(몸으로 행해 가르치는 사람을 따른다)으로 자식과 백성을 가르쳐야 하고 숭조사상의 강조도 교육의 한 방편입니다.선비는 부자가 돼도 부자티를 안내고 빈궁해도 빈궁한 티를 안내야 하는 것이지요』 용문서원은 이같은 초려의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도장으로 오늘날 활용되고 있다.제사가 올려지는 사우인 명덕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에게 공개돼있다.강당인 중화당(17평)과 재실인 존성재(〃)는 초려학연구를 위해 강의실과 침실로 제공된다.연구활동을 돕기위해 현대식 입식 부엌도 설치돼 있고 이동식 화장실,난방도 완비됐다. ○내사책 등 유품 전시 또 유물전시관인 징원당(16평)에는 초려의 저서와 함께 임금이 내린 내사책,이씨 가문의 재산분금록,9대손 성암철영의 항일옥중일기등과 초려의 상아호패와 제사날을 기록해 놓는 기일첩,과거문제 요약집인 강경첨통등 많은 유품들도 전시,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용문서원 건립및 유지 보수를 맡고 있는 사단법인 이초로 기념사업회의 이종철회장(73·전공주교대회장)은 올해의 역점사업으로 장서각 건립을 꼽고 있다.현재 3천건에 달하는 책들이 그대로 창고에 쌓여있기 때문에 이의 분류,정리가 시급하기 때문이다.이를 위한 1억원의 충남도예산중 4천만원의 삭감으로 나머지 재원마련이 가장 큰 현안이기도 하다.국역작업등 서둘러야할 과제는 많지만 현재 1백66명의 회원들이 연회비 5천원씩 내는것으로 충당하는 기념사업회의 예산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회장은 『많은 학자들이 초려사상에 대해 자발적인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그러면서 『지난 연말 부산대에서 다섯명의 교수·학생들이 와서 나흘동안 목록작업을 하고 갔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서도 기념사업회측은 연구를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시설을 무료료 사용케하고 있다.3년째 겨울이면4,5일씩 초려학 연구를 위해 이 서원을 찾고 있는 20여명의 한남대 대학원생들이 이달 중순 올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중화당과 존성재는 벌써 깨끗이 치워 놓았다.형편이 넉넉하다면 그들이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식사까지 제공했으면 좋겠지만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장손 정우씨의 마음을 늘 안타깝게 하고 있다. ◎「만언대사」 상소한 당대경세가/후손들이 서원열어 초려정신 대이어/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병자호란을 만난 것이 1636년(인조14년) 초려 이유태가 29세 되던 해였다.임진왜적이 물러나 대위국교가 재개된지 겨우 30년,또 다시 북쪽의 외적이 몰려와서 나라 안이 쑥밭이 되고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수모를 당하는 그런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국론은 크게 양분되고 당쟁의 고질병이 온 몸을 덮치는 그러한 시대이기도 하였다.치국경세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급한 때에 초려는 평소 품었던 뜻을 만언소라는 글로서 국왕에게 구민·구국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먼저 농촌경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농촌을 떠난 농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황폐화된 토지를 일구게 하여야 오늘의 정치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제의하고 고른 세제의 확립과 면세특권층의 일소를 역석하였다.또 농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여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들고 오가작통으로 범죄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육제도의 일대쇄신을 주장하여 양반의 자제들만 교육하는 제도를 고쳐서 모든 양인의 자제를 학문기관에 보내게 하여 그 능력에 따라 직업과 신분을 선택하도록 하자는 획기적인 제언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고루한 지도층은 자신의 권익만을 생각하고 그의 개혁안을 묵살하였다.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탄핵하여 유배하고 말았다.이 유태는 그 뒤 스스로 초가집(초려)이라는 자신의 호와 같이 모든 관직(이조참판·요즘의 내무차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 웅거하여 나가지 않았다.그 유명한 초려의 불출사 선비정신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초려집」 26권은 이유태의 선비정신을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오늘에 되살려야할 국민정신문화이다.다행히 최근 충남 공주 향리에 그 후손들이 용문서원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니 외래문화에 질식할 것도 같은 오늘의 세대에 이보다 더 참신한 청량제는 없다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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