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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찜질방 피란민, 김포 임시거처로 1차 이주

    지난달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 인천의 찜질방 등에 머물던 연평주민들이 19일 경기 김포시 임시거처로 이주했다. 주민들은 오후 3시부터 버스와 화물차 등을 이용해 임시거처가 마련된 양곡3지구 LH아파트로 옮겼으며 일부는 김포 현지에서 합류했다. 입주대상은 피란 연평주민 가운데 LH아파트 입주를 희망한 1046명(125호)이며, 이날 임대 약정서를 체결한 887명(114호)이 1차로 입주했다. 이들은 두달간 이곳에 머물면서 향후 연평도 복귀에 필요한 준비와 생업 피해 보상 협의 등에 나서게 된다. 협의 등이 여의치 않을 경우 거주기간이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 김포로 가지 않는 일부 주민은 연평도로 돌아가거나 친척집 등에서 기거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찜질방 생활을 접는 것에 대해 안도했지만 한편으론 막막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김한성(83)씨는 “가라니까 가는 거지 좋을 것이 없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집이다.”라고 착잡한 심경을 전했다. 김모(74·여)씨는 “지긋지긋한 찜질방을 떠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내 가족하고만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야 해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연평도로 들어가는 주민도 있었다. 변진식(66)씨는 “집이 유리창 조금 깨진 정도여서 고친 후에 들어가서 살 생각”이라면서 “김포로 가는 사람이든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든 다들 개운해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연평도 피란민을 돕기 위한 각계 온정이 몰려들어 옹진군이 접수한 구호금이 24억여원에 달했다. 100여종, 12만여점의 구호품도 전달됐다. 배식, 청소 등 봉사활동을 펼친 단체는 48개, 2026명으로 집계됐다. 김학준·이민영기자 kimhj@seoul.co.kr
  • [나눔 송년 릴레이 인터뷰] ② 27년간 기부한 류양선 할머니

    [나눔 송년 릴레이 인터뷰] ② 27년간 기부한 류양선 할머니

    서울 지역 아침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내려간 지난 16일 오전 11시. 칼바람이 안쪽까지 들어오는 서울 노량진동 수산시장 젓갈부의 ‘충남상회’에서 노란 옷을 겹겹이 껴입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를 만났다. 37년간 젓갈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으로 책과 장학금 기부를 이어가는 ‘젓갈 할머니’ 류양선(77)씨가 그 주인공. 할머니는 가게 한편에 있는 좁은 구들장 위에 앉아 손님맞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온기가 도는 바닥과 할머니 앞에 놓은 작은 전기난로 덕분에 그나마 따뜻한 엉덩이와 발을 제외하고는 시장 안까지 불어닥치는 찬바람에 코가 시렸다. 할머니는 전기세가 아까워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 이틀 전에야 비로소 난로를 켜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습관이 돼 있는 까닭이다. 류 할머니는 이렇게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어’ 모은 돈을 전부 책 사고 장학금 마련하는 데 사용한다. 얼마 전 국어사전 1억여원어치를 구입해 전국의 초·중학교 200여곳에 기부한 것이 알려지면서 할머니의 기부 열정은 또다시 화제가 됐다. 수없이 찾아오는 인터뷰 요청이 귀찮을 법한데도 할머니는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을 흔쾌히 환영했다. 할머니의 선행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져야 할머니를 닮은 제2, 제3의 기부 천사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젓갈이 더 많이 팔려야 더 많은 학생들에게 책을 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할머니는 가게 벽면에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뽑아 걸어뒀다. 생각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도 사진과 기사를 보고 나서는 할머니를 알아보고 젓갈을 구입해 가기도 한다. “장사가 잘돼야 애들 책 한권이라도 더 사줄 수 있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온통 학생들 생각뿐인 듯 보였다. 말할 때마다 입에서 김이 나오는 날씨 속에서도 두 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가 힘들지 않았던 것은 할머니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란 옷만큼이나 따뜻한 ‘기부 천사’의 마음씨 때문이었다. 100촉짜리 백열전구 7개가 환하게 비춰 아늑하게 느껴지는 9.9㎡(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할머니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날씨가 추운데 장사하시느라 고생 많으시죠. -날씨가 추워서 문제지. 여기 앉아 있으면 찬바람이 슝슝 들어와. 위아래로 잔뜩 껴입었는데도 춥네.(이날 할머니는 상의로 내복, 티, 양털조끼, 노란색 바람막이, 노란색 점퍼 등 5겹을, 하의로 내복, 기모바지, 방수 재질 바지 등 3겹을 겹쳐 입고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여기 구들장이 있어 엉덩이는 따뜻해. 전기난로 켜놓으면 그나마 낫지. 이것도 한서대학교에서 보내준 건데 잘 틀지도 않어. 젊었을 땐 새벽 4시에도 나왔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못 나와. 아침 7~8시 사이에 나와서 그래도 제일 늦게까지 장사하지. 밤 8~9시면 닫아. 그런데 어제오늘 날씨가 추워서 손님이 더 없네. →젓갈이 잘 팔려야 기부도 많이 하실 텐데요. -많이 팔아야 하는데. 올해는 완전히 적자야, 적자. 10월 20일부터 며칠 김장철에만 ‘빤짝’하고. 4월에서 9월까지는 정말 손님 없었어. 그전에 모아둔 돈 없었으면 나도 파산할 뻔했지. 임대료랑 창고 사용료 230만원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 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부할 용의가 있는데 기부도 못 하게 생겼어. →적자가 났는데도 기부는 그치지 않으셨어요. -내가 벌고 남은 돈으로 기부하는 것도 아닌데 뭘. 형편 따라 기부하나? 애들 책 사주고 하려고 적금을 미리미리 들어놓지. 1000만원짜리고 2000만원짜리고, 3년짜리 4년짜리 있어. 그거 탈 때 기부하는 거지. 이번에도 3000만원 3년짜리 그게 만기돼서 그걸로 책 산 거야. 4~5번에 걸쳐서 줄 테니까 미리 책을 보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떼먹을 사람은 아니니까 보내주시더라고. 고맙지. 크는 애기들이니까 얼릉 공부해야 하잖아. 죽기 전에 최대한 많이 (기부) 해야지. 나머지는 1년에 한번씩 계속 해서 갚아야지. (할머니는 지난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어대사전’ 201세트, 1억 854만원어치를 구입해 전국의 초등학교, 중학교에 보냈다. 사전 구입비로 3000만원을 내고 나머지 돈은 앞으로 5차례에 걸쳐 고려대 측에 분할 납부하기로 했다.) →처음 기부를 시작하신 건 언제인가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처음한 게 1983년도일 거야. 아, 완도. 완도초등학교 애들이 여기에 견학을 왔더라고. 그래서 걔들한테 책을 보냈지. 동화책. 그게 계기가 돼 가지고 책 기부를 시작했지. 어린 애들이 할머니가 보내준 책 잘 읽었다고 편지도 보내고 하니까 참 마음이 좋더라고. 거기도 책 여러 번 많이 보냈지. 나중에는 완도초등학교에서 애들이랑 학교가 같이 감사패도 보냈더라고. 여기서 감사패를 제일 먼저 받았는데 계속 기부하다 보니까 감사패가 나중엔 줄줄줄…지금은 한 100개는 돼. →지금껏 어느 정도 기부하셨는지 가늠하세요. -(손사래 치며) 모르지 그걸 어떻게 기억해. 무조건 주면 그만이지. 그런 걸 뭐라고 일일이 다 적어 놓나? 버는 대로 모이는 대로 족족 주는걸. →기부하시면 어떤 점에서 보람을 찾으시나요. -책 사주고 장학금 보내고 하는 그 자체가 좋아. 그러다 아이들이 고맙다고 편지라도 쓰면 그냥 엔도르핀이 팔구월에 목화송이 피듯 피지. 그런 편지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해. 이번에도 서산 국민학교 6학년 애가 편지허구 장갑허구 봉투에 같이 넣어서 보냈더라고. 할머니따라 기부 천사가 되겠다고 그렇게 썼더라고. 내가 이번에 사전을 그 동네 학교마다 쫙 보냈거든. 그걸 받은 아이가 기사에서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편지를 보낸 모양이야. →할머니 뒤를 이어 기부 천사들이 늘겠어요. -그게 제일 좋은 판단이여. 내가 자식들이 없어. 할아버지는 4년 됐나, 5년 됐나 돌아가셨고. 나 혼자 사는데 내가 준 장학금이나 책 받은 학생들이 자식처럼 손주처럼 찾아오면 반가워. 내가 준 장학금 받은 대학생들도 종종 가게로 찾아와. 젓갈도 사 가고 할머니도 뵙고 그런다고. 할머니가 기부하니께 우리도 같이 기부하는 거라고 젓갈도 더 많이 사 가고 하지. 기부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녀. 자기가 스스로 허고 싶어야 허지. 자기가 받아보면 주고 싶은 마음도 더 생기는 법이야. 그래서 내가 어린 친구들한테 더 많이 나눠주려고 해. (인터뷰 도중 할머니는 기자에게 추운 날 고생한다며 간식을 이것저것 꺼내주셨다. 장사를 하다 보면 끼니 때 사이에 배가 고파져 두부, 고구마 등 새참을 드신다고 한다. 이날도 할머니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흰 두부를 잘라 양념간장에 찍어 드셨다. 이 두부는 할머니가 장학금을 기부하는 대학 관계자의 친척이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운영하는 두부공장에서 직접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한다. 두부를 다 드신 할머니는 점심·저녁 밥을 지어 먹는 작은 전기밥솥에서 찐 고구마까지 꺼내 드셨다. 할머니는 “새참은 나눠 먹어야 제맛”이라시며 기자에게도 작은 밤고구마 한개를 건네셨다.) →얼마 전에는 학생들에게 또 사전을 사주셨는데 유난히 책을 많이 사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내가 사주는 건 전부 책이지 뭘. 돈으로 하면 고루고루 가간? 책으로 하면 1학년이 보고 나면 2학년, 2학년이 보고 나면 6학년 다 보잖아. 보고 나면 또 보고, 찢지만 않고 두면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으니 책이 좋지. 돈은 그냥 쓸데없이 쓰기도 하고 쓰고 나면 없고. 그니께 책 선물이 제일 좋은 거야. 그리고 또 내가 못 배웠응께. 어렸을 때 배워야지. 나 지금도 모르는 거 무슨 소린가 하고 사전에서 찾아보고 그러면 이튿날 보면 다 없어졌어. 어렸을 때 배운 건 지금까지도 아는데. 배움에도 때가 있지. 나무도 어린 나무에 거름을 줘야지 고목나무에 거름 줘봤자 소용없어. →학생들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원래 꿈은 뭐였나요. -배우고자 하는 애 가르쳐야 혀. 내가 돈 벌면 내 고향에다가 하버드 대학보다 더 좋은 놈 지어서 돈 많은 사람은 돈 받고, 돈 없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한테 받아서 주고 그렇게 하는 게 꿈이었어. 그랬는데 돈 많은 부자가 나보다 먼저 짓데. 내가 지으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선수 치네(웃음). 그런 시골은 가난하니까 이런 서울에 와서 공부 못 해.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붙어도 하숙비도 없고 생활비도 없어서 올라오지도 못혀. 그게 내 최종 목표였는데 이미 서산에 대학교가 생겼네. 그래서 내가 이제 거기다가 장학금도 보태주고 땅도 보태줬지. 할머니는 1998년부터 한서대학교에 20억원대의 부동산을 기부하고 현재 한서대학교 ‘류양선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할머니가 기증한 부동산에서 나오는 세는 이 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인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한서대학교는 1992년 개교했다.) →보통 사람들은 돈 벌면 자기 자식한테 물려주기 바쁜데 할머니는 어떠세요. -다 그렇지. 난 자식은 없어.(할머니는 28살에 결혼해 3년 정도 함께 산 남편이 두 번째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간 뒤 쭉 혼자 사셨다고 한다.) 돈 많은 재벌들도 다 번 돈 자기 자식한테 주려고 하지 뭐.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저 자식들은 뭐 두 손 두 발 붙들어 맸나. 저희들이 벌어서 먹고살아야지. 그러니까 자립심이 없어. →올 겨울에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비리로 기부가 크게 줄었다던데요. -그렇다 하대. 안한다고. 그런 돈을 가져간다냐. 지가 노력해서 먹고살아야지. 아주 못 쓰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 그런 사람은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혀. 기부가 어그러졌어. 허먼 뭘 혀. 그런 사람들이 다 가져가는걸. 난 그래서 책으로 하지 돈으로 안 해.(이 대목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할머니는 등을 떼고 몸을 일으키며 언성을 높였다.) →기부 계획이 더 있으신가요. -건강이 허락해서 장사를 하는 날까지는 천원짜리 하나라도 더 보태줘야지. 우선 얼마 전에 애들 사전 보내준 거, 고려대학에 남은 돈 채워넣어 줘야지. 사전값이 1억 좀 넘는데 처음에 적금 탄 돈 3000만원만 일단 주고 나머지는 차차 갚기로 했어. 장사해서 차곡차곡 돈 모아서 일단 그것부터 갚고. 그 뒤에는 또 학생들 책 사주고 대학교 장학금도 보태주고 할거야. 죽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주고 가야지. 나이는 공짜로 먹다 보니까 어느새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얼마나 남았을지는 몰라도 죽을 때까지는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기부해야지. 허허.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류양선 할머니는 37년간 노량진서 젓갈장사 서산 한서대에 20억 기증 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중 1933년 충남 서산읍(현재 서산시) 양대리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얼마 안 되는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류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학업을 잇지 못했다. 류 할머니의 기부가 대부분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과 책 마련에 쓰이는 것은 가난해서 공부를 더 할 수 없었던 본인의 아쉬움 때문이다.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다 28살에 남편을 만난 류 할머니는 1972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먹고살 궁리를 하던 끝에 ‘장사가 안 돼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 젓갈 장사를 택했다는 할머니는 그 후 지금까지 37년간 서울 노량진동 수산시장에서 ‘충남상회’를 운영하며 수익금의 대부분을 기부와 나눔에 쓰고 있다. 장사를 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27년 전부터 기부를 시작한 류 할머니는 고향인 충남의 양로원, 재활원, 보육원 등을 비롯해 낙도와 지방의 초등학교 등에 책과 물품을 전달해왔다. 1983년 수산시장에 견학 온 완도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동화책을 보내준 것이 기부의 시작이 됐다. 충남 서산 한서대에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세번에 걸쳐 20억원대의 부동산(경기 광명시 소재)을 기증해, 현재 한서대 ‘류양선 장학회’ 이사장으로 장학 사업에 힘쓰고 있다. 류 할머니는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고향인 서산에 대학교를 지으려 했던 꿈을 대신해 앞으로도 장학금과 책으로 기부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길섶에서] 고향의 맛/최광숙 논설위원

    고향이 강원도라 감자를 좋아한다. ‘감자바위’라고 불려도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쪄서 먹어도, 튀겨 먹어도, 부침개로 먹어도 일품인 게 감자다. 그중 압권은 감자 옹심이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 동그랗게 빚어낸 뒤 멸치 육수에 수제비처럼 띄워 먹는 게 바로 감자 옹심이다. 고향이 아니면 먹기 어렵다 보니 엄마 품처럼 늘 그립다. 그러니 모처럼 고향에 갈 때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감자 옹심이 식당이다. 하지만 이번 고향 방문길에는 어찌어찌하다가 이곳에 들르지 못했다. 오리고기집에서 외가 친척들과 저녁식사를 끝으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같이 간 먹성 좋은 남동생이 오리고기에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왜 안 먹냐.”, “오리고기 안 좋아해.” 결국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식당주인에게 문 닫지 말라는 당부전화까지 하는 극성 끝에 옹심이를 먹을 수 있었다. 잘나가는 실세도 아니면서 우리는 감자 옹심이 때문에 저녁을 두번 먹었다. 사람의 입맛까지에도 깊이 스며드는 게 고향인가 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자녀들에 전라생활 강요…엽기부모의 속셈은?

    자녀들에 전라생활 강요…엽기부모의 속셈은?

    자녀 5명에게 집에서는 옷을 모두 벗을 것을 강요하고 심지어 부모의 몸을 더듬으라고 시킨 엽기적인 부부가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미국 폭스방송에 따르면 뉴멕시코 주 베르날리오에 사는 셰릴과 매튜 콕스 부부는 10대자녀 3명을 포함한 아들딸 5명을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오히려 가족 간 사랑이 끈끈해 보였던 콕스 부부의 가정에는 사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엽기적인 자녀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나체주의자였던 콕스 부부는 자녀들에게 집에서는 옷을 벗고 생활할 것을 강요했다. 매일 아침 옷을 벗은 채 둥그렇게 모여앉아 가족회의를 주관했으며, 12세·14세·16세인 사춘기 자녀가 옷을 벗기를 거부하면 반성문을 쓰도록 시키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심지어 부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만지도록 했으며, 옷을 홀딱 벗은 채 가족사진을 찍은 뒤 이를 집에 걸어뒀다가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이를 불태워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엽기적인 행동은 10대 딸이 친척에게 부모의 만행을 알리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성인이 돼서도 함께 살고 있던 2명을 제외한 10대 자녀들의 양육권은 정부가 박탈했으며, 현재 이들은 정부운영 보호시설에서 보호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지난해 콕스 부부는 자녀들에게 술을 주다가 이웃의 신고로 경찰에 한차례 체포된 바 있다. 경찰은 아버지 매튜 콕스가 온라인 채팅으로 근친상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정황을 포착, 부부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압수해 구체적인 혐의를 조사 중이다. 사진=매튜와 셰릴 콕스 부부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통계로 본 ‘우리나라 고3’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둔 고교 3학년 나열공(18)군은 주중에 평균 11시간 3분을 공부한다. 잠자는 시간은 5시간 24분이다. 공부하는 시간은 전체 학생 평균(8시간 1분)보다 3시간 남짓 많고, 수면 시간은 18분 적다. 휴일이 아니면 아침밥은 꿈도 꾸지 못한다. 같은 반 친구들 3명 중 1명이 나군과 같은 처지다. 통계청이 5일 발표한 ‘사회조사 등을 통해 바라본 우리나라 고3의 특징’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고3 수험생의 모습이다. 올해 고3 학생은 64만 9500명이며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생은 71만 2200명이다. 고3 학생은 지난해(63만 4300명)에 비해 1만 5200명, 수능 응시생은 지난해(67만 7800명)에 비해 3만 4400명 늘었다. 반면 내년도 대학 모집인원은 66만 600명으로 2010년 68만 1300명보다 2만 700명이 줄었다. 고3 학생이 진로와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준 존재로 부모(41.5%)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인터넷(10.8%), 친구·선후배(8.1%), TV·라디오(7.3%), 형제·친척(6.1) 순이었다. 담임교사라는 응답은 5.8%에 그쳤다. 고3 학생의 최대 고민은 공부(69.1%)였고 외모(7.1%)와 직업(7.0%)이 뒤를 이었다. 고3 10명 중 1명(10.5%)꼴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자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이라도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고3은 51.0%였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후] 피란민 긴급 생활지원금 대상·금액 확정

    연평도 주민 보상 대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주민비상대책위원회와 인천 옹진군 관계자들이 고심하고 있다는 서울신문 보도 이후 피란민에게 일시 생활위로금의 대상과 금액이 확정됐다.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은 긴급 생활지원금의 성격이지만 앞으로 보상 대상 선정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30일 옹진군 등에 따르면 앞으로 지급될 보상금도 이번에 마련된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의 3가지 지급 대상기준에 미달할 경우에는 지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앞서 옹진군과 대책위는 주민등록 거주자 1756명과 실거주자 1326명 가운데 보상대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이번에 마련된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 지급기준은 ▲주민등록상 연평도에 적(籍)을 두고 실제 거주할 것 ▲최소 연 3회 여객선 승선 기록이 있을 것 ▲학생은 주소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지급할 것 등이다. 다만 주소지가 연평도로 되어 있어도 업무 특성을 고려해 공무원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무원 가족은 지급받을 수 있다. 옹진군은 이날 622명의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 5억 9150만원의 입금을 마쳤다. 전날 오후 옹진군 관계자와 연평도 주민비상대책위원회 등 11명으로 구성된 연평도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 심의위원회는 지급 대상과 금액을 결정했다.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은 연평도 주민 가운데 1089명이 신청했다. 대책위는 인스파월드에 머물고 있는 600여명 외에 친척집 등 외부 숙소에 머물고 있는 피란민에게도 일일이 전화를 걸어 생활위로금 지급 사실을 알렸다. 금액은 0~13세는 50만원, 14세 이상은 100만원이다. 옹진군에 따르면 622명을 제외한 나머지 467명은 실제 거주 여부나 승선기록이 확인되는 즉시 지급할 예정이다. 또 이번에 신청하지 못한 주민들에게도 추가로 주민 일시 생활위로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어렵게 기준이 마련됐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피란 나온 주민 가운데 상당수는 급하게 섬을 빠져 나오면서 통장을 미쳐 챙기지 못했다. 고령인 주민들은 은행계좌를 못 외우는 경우도 많았다. 또 신분증이나 도장이 없는 경우도 많아 보상금이 입금되더라도 당장 은행에서 이를 찾을 방법이 없다. 인천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일주일만에 수업… 되찾은 친구·웃음

    일주일만에 수업… 되찾은 친구·웃음

    “하하, 호호. 친구들과 모여 수업을 들으니까 연평도 교정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29일 인천 당하동의 인천영어마을 교실. 북한의 포격 이후 인천으로 피신했다가 엿새 만에 다시 모인 100명의 연평 초·중·고생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정말 반가운 듯 예전처럼 서로 장난을 걸기에 바빴다. 연평중 3학년 원지희(15)양은 “찜질방으로, 친척집으로 흩어졌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돼 기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포토] 한미연합훈련 실시…美항공모함의 위력 인천에서의 피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제대로 학교수업을 받지 못했던 연평도 학생들이 5박 6일간의 합숙 영어캠프에 참가했다. 40만원이 넘는 비용은 모두 영어마을과 인천시가 부담한다. 이번 캠프는 피난민들의 임시숙소인 찜질방에 머물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되살리고 아픈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계획됐다. 수업에 참여한 연평초 5학년 이강훈(11)군은 “찜질방에만 있을 때 너무 답답했는데 영어마을에 와서 수업도 받고 놀이도 해서 신난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캠프에 도착한 학생들은 10명씩 한반을 이뤄 오후 6시까지 매 시간 다른 수업을 들었다. 고교생에게는 ‘셰익스피어 연극’, 초·중학생들은 ‘레스토랑 매너’와 ‘세계의 리더’ 같은 다양한 주제의 수업이 마련됐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지만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담임교사가 한국어로 수업진행을 도왔다. 김성겸 인천영어마을 교학부장은 “오늘 반나절 수업을 받은 아이들이 아침 입소식 때와 달리 표정도 밝고 원어민 교사에게 먼저 말을 거는 등 많이 활발해졌다.”면서 “길어지는 피난 생활에 지친 아이들이 활동적인 수업에 몰입하면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하루빨리 잊길 바란다.”고 밝혔다. 인천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3년전 죽은 아들 가방에 넣어 버린 끔찍엄마

    3년전 죽은 아들 가방에 넣어 버린 끔찍엄마

    죽은 아들은 가방에 넣어 버린 여자가 사건 발생 3년 만에 경찰에 체포됐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에 살고 있는 30대 여자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고 현지 언론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건은 발레아레스에서 가장 작은 마을인 메노르카에서 발생했다. 3일 전 이 마을의 한 숲에서 청년 두 명이 천으로 만든 빨간 가방을 발견했다. 무심코 열어본 가방에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나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가방에서 시계, 만화책, 색연필, 인형, 빛바랜 영수증 등을 추가로 발견하고 바로 신원확인에 나섰다. 경찰은 3일만에 어린이의 신원을 확인했다. 인구 8만의 작은 섬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수사 결과 어린이는 30세 여자의 아들이었다. 소년은 9살 때인 3년 전인 2008년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주변에선 그에게 신경을 쓴 사람이 없었다. 현지 언론은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고, 엄마 곁에서도 모습을 감췄지만 교사나 이웃들이 경찰신고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여자가 주변에 아들을 조카라고 소개했다.”면서 “그리스에 있는 친척과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 깜빡 속은 사람들이 있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손영식 voniss@naver.com
  • 50일의 기적… 뉴질랜드판 ‘허클베리 핀’

    50일의 기적… 뉴질랜드판 ‘허클베리 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아야 했다.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이려 바닷물을 삼켰다. 갈매기도 잡아먹었다. 그리고 끝내 살았다. 남태평양을 50일간 표류하던 10대 소년 3명이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실낱같은 기대조차 내려놓은 가족들이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다. 최근 광산 붕괴로 29명의 광부를 잃었던 뉴질랜드인들이 사지에서 돌아온 이들 소년 3명의 생환에 환호하고 있다. ●생환기대 내려놓은 가족, 장례도 치뤄 뉴질랜드령 토켈라우제도에 사는 사무엘 펠레사(15)와 필로 필로(15), 에드워드 나소(14)는 지난달 초 바로 건너편 섬으로 건너가려고 작은 모터보트에 몸을 실었다. 친척 사이인 이들은 추억을 쌓으려 여행길에 나선 것. 그러나 소년들의 즐거운 여행은 불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으로 변했다. 출항 몇 시간 만에 방향감각을 잃고 조류를 따라 하염없이 바다로 흘러내려 간 것이다. 이들은 표류 이튿날까지 간식거리로 가져왔던 코코넛을 쪼개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소년들의 사투는 먹을거리가 동난 사흘째부터 시작됐다. 펠레사 등 3명은 몸에 걸쳤던 방수포를 벗어 빗물을 받아 마시며 침착하게 탈수증세를 막았다. 그러나 빗물이 주린 배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수면 가까이 헤엄쳐 가는 물고기나 멋모르고 보트에 내려앉은 갈매기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표류 한달을 넘기면서 하늘마저 소년들을 버리는 듯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이 며칠째 이어지자 아이들은 바닷물에 손을 뻗었다. 염분이 섞인 물을 많이 마시면 자칫 콩팥을 해쳐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릿 속이 뿌옇게 변해가던 소년들은 무의식적으로 바닷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매몰광부 잃은 뉴질랜드 소년들 생환에 환호 조난 50일째. 소년들에게 마지막 생환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 배를 탔던 토켈라우제도에서 1300㎞ 떨어진 피지섬 인근까지 떠내려온 10대들은 3㎞ 남짓 떨어진 곳에서 어스름한 물체를 발견했다. 참치잡이 어선이었다.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소년들은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선은 천천히 조난보트로 다가왔고 선원들은 소년을 한명씩 어선 위로 끌어올렸다. 선원들의 침착한 대응도 빛났다. 항해 직전에 배운 대로 소년들에게 구급약을 먹였고 자신들이 먹으려 했던 흰 빵과 오렌지, 사과 등을 기꺼이 내줬다. 50일 만에 꿀맛 같은 식사를 한 소년들은 천천히 힘을 찾아갔다. 1등 항해사인 타이 프레드릭슨은 “(소년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지만 정신력은 매우 강해 보였다.”면서 “우리가 이 바닷길로 항해하는 것은 4년 만에 처음이다. 소년들을 마주친 건 기적”이라고 말했다. 소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향 마을은 초상집에서 잔칫집이 됐다. 실종 직후 뉴질랜드 당국은 공군 정찰기까지 동원해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고 2주 만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가족과 친구 등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소년들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필로의 아버지 타누 필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기적이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울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생명의 窓] 세계 평화와 내면적 비무장/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생명의 窓] 세계 평화와 내면적 비무장/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지난달 서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열리던 시기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제11회 세계 노벨평화상 수상자 세계 정상 회의’가 있었다. 1990년 평화상 수상자였던 옛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의해 매년 한 번씩 세계 여러 곳을 돌며 개최되는 이 모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평화를 사랑하는 단체 및 개인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을 위해 지혜를 모은다. 올해에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65주년을 맞아 히로시마에서 ‘히로시마의 유산-핵무기가 없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고르바초프는 건강을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고, 2009년 수상자인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G20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같이하지 못했다. 올 수상자 중국의 류사오보와 1991년 수상자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 대리인을 보내 인사말을 전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989), 북아일랜드 평화운동가 메이리드 맥과이어(1976), 넬슨 만델라와 함께 남아프리카 인종 차별 정책을 종식하는 데 공헌한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1993), 지뢰금지국제운동(ICBL)을 이끈 미국인 조디 윌리엄스(1997), 이란의 인권운동 지도자 시린 에바디(2003), 국제원자력기구의 이집트인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2005), 기타 국경 없는 의사회, 노동운동이나 사회봉사로 수상한 단체의 대표 등이 참석했다. 1945년 8월 6일 인구 30만명이던 히로시마에서는 원폭투하로 14만명이 죽었다. 필자의 부모님도 2차 대전 당시 일본 도쿄에 살고 계셨는데, 폭격이 너무 심해 친척이 살고 있던 히로시마로 갈까 하다가 결국 한국행으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그때 만약 히로시마로 결정이 났다면 필자도 이렇게 살아서 아내와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할 수 있었겠나 생각하니 이번 히로시마 방문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이 핵무기가 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세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왔다. ‘가난이 세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므로 가난을 퇴치해야 한다. 이제 국가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개별 도시 간의 공조, 젊은이들 간의 우의를 통한 협력으로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제 무력이나 군사력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생명, 평화, 문화, 교역 등 소프트웨어가 힘임을 자각해야 한다.’ 등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발언이 의미 있게 들렸다. 그는 20세기를 세계 인구 2억명을 희생하면서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유혈’의 세기로 규정하고, 이제 21세기를 ‘대화’의 세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전쟁이 없는 세상, 평화로운 세계라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방법으로 ‘외적 비무장’과 ‘내적 비무장’을 들 수 있지만, 결국 궁극적 해결은 내적인 비무장에 있다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와 가슴을 가리켰다. 세계 평화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과 미움과 어리석음을 없앨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권력이나 물질에 대한 욕심을 기본으로 하는 ‘물질적 견해’에 지배되면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적 견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으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과 저것, 너와 나,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있는 존재이기에 세상이 잘못되면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집단만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원수를 파멸하는 것이 곧 나를 파멸하는 것”이기도 한데 왜 싸우겠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이런 안목이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불교인뿐 아니라 종교인이라면, 아니 인류의 장래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히로시마에서 배운 교훈을 곱씹어 본다.
  • 北 안으론 ‘승전 분위기’ 띄우고 밖으론 ‘北·中혈맹’ 과시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연일 ‘북중 우호’를 강조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승전 분위기’ 띄우기에 혈안이다. 안으로 단결을 강조하면서 밖으로는 철통 같은 북·중 혈맹 관계를 과시하는 모양새다. 한·미의 강력 대응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돌파하려는 ‘양면작전’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 25일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에 있는 마오안잉(毛岸英)의 묘에 화환과 함께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등을 보내 마오안잉의 60주기를 추모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26일 보도했다. 김 부장은 함께 참배한 류훙차이(劉洪才) 평양 주재 중국대사에게 “김정일 총서기의 명을 받아 마오안잉 열사의 영웅적인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의 장남인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중국이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자 가장 먼저 자원해 참전한 뒤 한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연합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최근 북한에서는 마오안잉 전사 60주기를 맞아 중국중앙방송(CCTV)이 방영한 34부작 드라마 ‘마오안잉’ 시사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전날에도 중국의 지원으로 건설된 평양 인근의 대안친선유리공장을 김정은과 함께 방문, “부단히 생산량을 늘려 북·중 우호관계의 충만한 활력을 과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대안유리공장은 중국으로부터 2400만 달러를 지원받아 2005년 건설된 곳이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이런 김 위원장의 행보에 대해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중국에 대해 지원을 호소하는 성격이 짙다.”고 분석했다. 한편 북한은 이번 연평도 포격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내부적으로 선전전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자행된 지난 23일 전후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가 중국 베이징으로 돌아온 재일 한국인 남성이 “북한에서는 모두 (남한으로부터) 선제공격을 받아 격렬하게 반격해 대승리를 거뒀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전했다. 신문은 또 북한이 연평도 포격전과 관련, 한국 측이 ‘영해’를 먼저 포격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지난해 입수한 북한 당국의 내부 문서에 김정은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포술을 공부해 포술에 밝다.”고 소개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번 포격전을 김정은의 공적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도쿄 이종락·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난생 처음 ‘피난’… 어디 더 머물수 있겠나”

    “난생 처음 ‘피난’… 어디 더 머물수 있겠나”

    “세 번째 악몽이네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길 바랐는데….” 25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당섬선착장. 배에서 내린 염흥권(63)씨의 다리는 후들거렸다. 굳게 다문 입술과 미간의 주름에서 불안과 착잡함이 묻어났다. 염씨는 북한 포탄 170여발이 쏟아지던 지난 23일 연평도를 빠져나왔다가 이날 다시 섬을 찾았다. 늦둥이 아들 민섭(27)씨가 북한의 포격이 이어지던 시각 옹진수협연평출장소에서 근무 도중 떨어진 문짝에 허리를 다친 것. 염씨는 아들을 인천의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배를 얻어 타고 뭍으로 향했다. 연평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낸 염씨는 난생 처음 타의에 의해 섬을 빠져나와야 했다. 염씨는 북한의 공격에 아들이 다치고 이웃집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공포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했다. 줄담배를 피워대던 그는 “병원에서 아들을 간호하다 깜박 잠이 들면 포탄이 하늘을 뒤덮는 악몽을 꾼다.”면서 “연평도에서 6·25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들도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라며 모두 두려워하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염씨에겐 1999년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역시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농부인 염씨는 바다에 나가지 않아 당시 멀리서 포성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 심각한 공포는 없었다. 눈 앞에서 북한이 쏜 포탄이 터지고, 자식이 다치고 이웃들의 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난생 처음 느끼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1·2차 연평해전 때는 ‘쾅쾅’하는 포소리만 들렸는데, 8년만에 다시 찾아온 북한의 위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지옥이었다.”며 눈을 감았다. 염씨는 더 이상 연평도에 머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집이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잠시 들어가지만 무서워 어디 연평도에 더 머물 수 있겠느냐.”면서 “인천에 친척도 없고, 연고도 없어 나가도 막막하지만 섬에 머무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염씨는 “우리 자식 세대에서는 반드시 남북이 하나가 돼 삶의 터전인 연평도에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소망한다.”면서 “정부가 남북 간 화합과 신뢰가 회복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염씨 등 뒤로 저무는 서해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었다. 연평도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류샤오보 사진이 참석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류샤오보 사진이 참석

    다음 달 10일 오슬로에서 열리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수상자인 중국 민주화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는 물론 대리인도 없이 열리게 됐다. 수상자가 불참하는 것은 1936년 나치 치하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74년 만에 처음이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류샤오보나 가족들의 시상식 참석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수상자 없는 시상식을 계획했다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원래 시상식은 메달·상장 수여, 수상자 강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고 수상은 수상자 본인이나 그를 대리해 가까운 친척만이 할 수 있다. 때문에 오슬로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는 이런 순서들이 생략될 예정이다. 그 대신 무대 앞에 류샤오보의 사진을 세우고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여배우 리브 울만이 류샤오보의 에세이 중 한 대목을 낭독하는 것으로 수상자 강연을 대신한다. 게이르 룬데스타드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은 이와 관련해, “다른 반체제 인사가 에세이를 읽으면 별도의 수상자로 보이니까 배우가 읽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얀 에겔란트 전 유엔 인도 지원 담당 사무차장 겸 긴급구호조정관은 “(류샤오보의 부재는)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南 인도주의 사업 파탄 책임져야”

    북한이 23일에 이어 24일에도 우리 군의 ‘호국훈련’을 비난하면서 “남측은 인도주의 사업을 파탄시킨 데 대해 온 민족 앞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우리 정부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25일로 예정됐던 남북 적십자회담 연기를 통보하고, 대북 수해지원 등 인도적 지원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힌 것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북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는 ‘괴뢰패당은 대화와 인도주의사업을 파탄시킨 데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최근 우리 공화국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모처럼 마련되었던 북남관계개선의 긍정적인 분위기는 남조선 괴뢰패당의 무분별하고 악랄한 반공화국 대결과 전쟁책동에 의하여 또다시 전면파탄의 위기에 처하였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뢰패당은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그 누구에 대해 감히 ‘도발’이니, ‘응징’이니 하며 11월 25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북남적십자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고 비난했다. ‘보도’는 또 “남조선 적십자사가 괴뢰호전광들의 시녀가 되어 회담의 무기한 연기를 선포한 조건에서 우리도 더 이상 인도주의 문제 해결에 연연할 생각이 없다.”면서 “남조선 적십자사는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정상화를 비롯한 인도주의사업을 파탄시킨 데 대해 온 민족 앞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태의 책임을 우리 측에 전가했다. 북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는 특히 “북남관계 개선 분위기를 짓밟고 정세를 전쟁상태로 몰아간 이명박 패당의 반민족적, 반통일적 범죄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위협했다. 이어 전날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 “괴뢰패당이 연평도 일대의 우리 측 영해에 수십발의 포사격을 가해 물리적 타격으로 대응하는 군사적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했다. 한편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인터넷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남조선 당국이 진정 북남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부당한 구실에 매달리지 말고 관광 재개를 위한 회담에 나와야 한다.”며 금강산관광 재개에 매달렸다. 그러나 전날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우리 측의 적십자회담 무기 연기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학교에서도 北 사격연습 소문 돌았다”

    “학교에서도 北 사격연습 소문 돌았다”

     ‘11.23 연평도 포격 사건’의 와중에 있었던 김준휘(사진·16·연평고 1년)군은 24일 오후 1시30분쯤 인천 해경 전용부두에 도착하면서 그제서야 22시간 쌓였던 긴장의 끈이 풀렸다.“이제야 살았구나.”는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언제 돌아갈 지 모르는 고향 땅 연평도쪽 바다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봤다.김군은 23일 밤 연평도 대피소를 찍은 동영상을 서울신문에 보내 단독으로 보도하게 한 장본인이다.다음은 1박2일간 그와의 통화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북한군 사격연습한다는 소문 돌아”  23일 오후 3시쯤 연평고등학교 교실에서 모의고사를 보던 김군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창문이 깨지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학교 뒷산에 포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떨어진 것이다.  김군은 “아침에 학교에 나왔는데 북한군이 사격 연습을 할 것이란 소문이 있었다”고 증언했다.사격 연습을 한다는 소문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친 것이었다.뒷산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태가 즉각 북한군에 의한 포격이라고 직감했다.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김군을 비롯한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학교 교문 앞 대피소로 급히 피신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딱 한번 대피훈련을 받아봤다.”는 김군이었지만 급박한 상황인데도 비교적 신속하고 차분하게 학생과 선생님이 대피했다고 전했다.  ●“대피소엔 음식 없고 촛불만”  원룸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되어 있는 대피소는 교실 2개쯤 크기였다.잠시 있으니 연평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그리고 마을 주민 50여명이 모였다.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격려해 가며 시간을 보냈다.전쟁이 난 것 아닌가 하는 공포와 불안이 엄습했다.더 이상의 포격은 없었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공포감은 극대화 됐다.  가족들 안부도 걱정됐다.형 귀휘(18.연평고 3년)군은 함께 대피했으나 부모님의 소재는 몰랐던 것이다.다행히도 휴대전화가 통했다.부모님은 김군이 있는 대피소에서 걸어서 5분쯤 거리에 있는 연평농협 앞 대피소에 무사히 피신해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공포와 불안은 더욱 커졌다. 대피소 안에는 전기는 고사하고 랜턴도 없었다.간신히 촛불 8개를 켜놓고 50여명이 불안을 달랬다.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바닥에 깔 스티로폼 몇 장과 침낭이 전부였다. ▲ 대피소에서도 끝나지 않은 대낮 ‘포격 공포’ <김준휘 군 제공> [현장사진] “온동네가 불바다” 연평도에 北 포탄  ●“밤사이 인천으로 나간다는 소식 들어”…밤 9시 넘어 라면 공급  그런 가운데 간간이 바깥소식도 들려왔다. 마을 주민 일부는 개인 어선을 이용하여 인천으로 나가고 있고, 오후 7시쯤 마을에 번진 불은 진압이 되었지만 산불은 아직 번지고 있는 것 같다는 등 여러 소식을 바깥에 나갔던 어른들이 알려주었다. 어두컴컴한 대피소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 떨다 오후 9시쯤 외부에서 누군가가 가져온 라면과 빵,물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컴컴한 밤길을 걸어 부모님이 있는 농협 앞 대피소로 가봤다.김군의 아버지(55)와 어머니(51)는 김군 형제를 보자마자 울먹거렸다.그렇게 가족 4명이 무사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울컥했다.부모님과 합류하고 싶었지만 농협 앞 대피소는 김군 형제까지 있기엔 너무 비좁았다.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비록 몇시간이지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그 와중에도 대피소 상황을 외부에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을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찍었다. 이 동영상(23일 서울신문 홈페이지 보도)을 서울신문 기자에게 보냈는데 국내외 TV와 인터넷 등에 널리 보도됐다는 얘기를 인천항에 도착하고서 알게돼 깜짝 놀랐다.  ●“밤 10시 지나자 통신마저 두절”  일단 학교 대피소로 돌아왔지만 외부와의 소식은 두절된 상태였다.게다가 언제까지 이런 대피소 생활이 계속 될 지 모른다는 상황이 김군을 더욱 답답하게 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휴대전화로 서울신문 기자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마저도 오후 10시 이후로는 통신두절이 됐다.  대피소에는 학생 10여명,선생님 10여명만 남았다.나머지는 부모님과 합류하거나 집 근처 대피소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추위가 엄습했다.침낭에 몸을 넣었지만 추위와 함께 공포가 가시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다.  ●“정든 고향 등졌으나 다시 돌아오는 건 두려워”  24일 오전 6시쯤,면사무소 직원이 “곧 인천으로 나갈 것”이라고 통보를 했다.몇가지 옷가지와 세면도구만 챙긴 김군 가족들은 아침을 거른 상태에서 오전 6시30분쯤 면사무소 앞에 모였다.이들이 해경 선박에 오른 것은 1시간쯤 뒤.이웃과 함께 악몽 같은 하루밤을 지낸 연평도를 출발할 수 있었다.  안산에 있는 친척이 인천항으로 마중을 나왔다.뜻하지 않은 북한의 포격으로 고향을 떠난 김군은 “모든 것이 정상화 되더라도 무서워서 연평도에 돌아 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민수 영상콘텐츠부 PD globalsms@seoul.co.kr
  • 美 경찰 511명 심장 뚫다

    美 경찰 511명 심장 뚫다

    경찰관 2명이 살해된 사건과 관련해 조사할 게 있다며 형사들이 현관에 앉아있던 해티 루이즈 제임스 할머니의 집을 찾아왔다. 올해 72세인 이 할머니는 형사들한테 자신이 1991년에 총기상에서 샀던 권총이 경찰관 두명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말을 들었다. 제임스 할머니는 총을 산 지 1년 만에 남편 차에 넣어뒀던 총을 도둑맞았는데, 이 총이 돌고 돌아 15년 뒤인 2007년 25세 청년 손에 들어갔고 결국 경찰 두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청년은 지난 9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경찰관은 511명, 부상자도 1900명이나 된다. 경찰관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1년에 걸친 취재 끝에 21일(현지시간) ‘총의 숨겨진 삶’이란 탐사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살인자들이 총을 손에 쥐게 된 경로를 밝혀냈다. WP는 이를 위해 350명에 이르는 경찰·검사·법관·총기상 등을 인터뷰했다. 신문은 범죄에 사용된 총 중 341건의 이력을 밝혀냈고, 이 가운데 107건은 합법적인 경로로 구매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총상으로 순직하는 경찰관 3명 중 1명은 미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총기상에서 판매한 총에 목숨을 잃는다는 의미다. 반면 훔친 총이 원인인 경우는 77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46건은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유한 친척이나 친구한테서 빌리거나 훔친 것이었다. 총에 맞아 사망한 경찰관이 가장 많은 곳은 캘리포니아(47명), 텍사스(46명), 루이지애나(28명), 플로리다(27명) 순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뉴욕에서는 경찰 사망자가 13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뉴욕이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총기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총기 규제가 약한 주일수록 경찰관들이 총에 맞아 숨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했다. 한 경찰서장은 이와 관련, “미국에서 권총을 손에 넣는 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다.”면서 “법으로 총기 소유를 규제하지 않는 한 경찰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금까지 부하 5명을 총 때문에 잃었다. 범죄에 이용된 총은 대부분 중화기가 아니라 권총이었다. 권총에 살해된 경찰은 365명이나 되는 반면 소총이나 산탄총에 살해된 경우는 140명이었다. 무기 판매상은 이에 대해 권총이 일반적으로 더 저렴하고 옷 속에 쉽게 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찰관들이 총에 맞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은 ‘시내에서 운전 중 정차’하거나 가정 분쟁이 일어나 출동했을 때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도로에서 잠시 차를 세운 사이에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가정 분쟁을 돕기 위해 출동했다가 변을 당한 경찰관이 각각 91명과 76명이나 됐다. 전자는 합법적으로 확보한 총을 사용한 비율이 13%에 불과했지만 후자는 47%나 됐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英 윌리엄왕자 ‘세기의 결혼’…청혼반지 화제

    영국 다이애나비의 아들인 윌리엄(28) 왕자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알려져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윌리엄 왕자는 8년간 열애한 약혼자인 케이트 미들턴(28)과 내년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더욱 화제가 된 것은 윌리엄 왕자가 미들턴에게 청혼할 때 썼던 반지다.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약혼반지로도 유명한 이 반지는 18캐럿의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기품을 더했다. 윌리엄 왕자는 지난 달 미들턴과 함께 케냐를 방문했다가 이 반지로 청혼했으며, 이와 관련 “애초부터 아프리카에서 청혼하려고 많은 계획을 세워왔다.”고 고백했다. 영국 왕실의 공식발표문에 따르면 결혼식은 내년 봄이나 여름에 런던에서 치러질 예정이며, 신접살림은 윌리엄 왕자가 공군 조종사로 복무중인 웨일스 북부에 차릴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스스로 ‘행운의 여신’이 된 미들턴은 영국 남부 버크셔의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그의 부모나 친척이 왕족·귀족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부러움을 샀다. 두 사람은 지난 1002년 9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같은 강의를 듣다 연인으로 발전했으며, 2005년 스위스에서 함께 스키를 즐기다 파파라치에 포착돼 세상에 공개됐다. 뛰어난 패션감각과 외모로 ‘제2의 다이애나’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유명 매거진이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로 수 차 례 꼽히기도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마약조직 보복 경고에 멕시코 피난민 속출

    멕시코에서 때아닌 피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이미 피난민이 수백 가정에 이른다고 전했다. 미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미에르. 지난 12일 이 도시에선 ‘폭풍의 토니’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거물급 멕시코 마약카르텔 두목이 마약조직 소탕작전에 나선 군에 사살됐다. 그의 죽음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마약조직들이 원한을 갚겠다면서 피의 복수를 예고한 것. 멕시코 현지 언론에서 “마약조직의 무차별 공격을 경고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자 주민들은 허겁지겁 짐을 꾸려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웃도시 미겔 알레만의 시장 세르반도 로페스는 “라이온스클럽에 대피소를 만들어 피난민 100가정을 수용하고 있다.”면서 “집을 얻거나 친척을 찾아 피난을 온 사람은 훨씬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멕시코 언론은 “군이 군용차량을 동원해 최소한 350가정을 대피시켰다.”면서 “미에르와 인접한 고을 카마르고에서도 피난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중남미 언론은 “마약 조직의 경고에 도시가 유령도시로 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일간지 레포르마에 따르면 올해 멕시코에선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뒤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국회의원에게 3500만원 후원금 고양시의원 입건… 대가성 수사

    경기 고양시 일산경찰서는 9일 지역 국회의원에게 차명으로 수천만원의 후원금을 낸 고양시의회 A시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시의원은 지난해 초 B국회의원의 후원계좌에 자신 명의로 500만원을 입금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 친척과 가족 등 6명 명의로 500만원씩 3000만원의 후원금을 내는 등 모두 3500만원의 후원금을 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A시의원과 그의 친인척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지난해 12월 친인척 6명 명의의 후원금이 한 통장에서 동시에 빠져나간 사실을 확인해 이 돈이 A시의원이 관리하던 돈일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경찰은 또 이 돈이 A시의원이 지난 6·2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공천을 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 대가성 여부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세대공감]알콩달콩 신혼일기

    [세대공감]알콩달콩 신혼일기

    최근 실시한 한 결혼 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선호하는 신혼여행지로 1~6위가 모두 몰디브·유럽·하와이 같은 해외 관광지였다. 신혼여행이라는 말이 곧 ‘해외 신혼여행’을 뜻한다고 이해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30년 전에는 경주나 설악산도 선망하는 신혼여행지였다. 그마저도 못 가 가까운 도시 여관에서 신혼여행을 보냈다는 사람도 있었다. 만약 당신의 남편이 1박 2일 신혼여행을 떠나자고 한다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정색하고 그렇게 제안한다면 이혼하자고 덤빌지도 모른다.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짬뽕으로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면? 하객들 가운데 일부는 혼주에게 공식 항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30년 전엔 흔했다. 세월에 따라 신혼기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알콩달콩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함없다. 세대마다 서로 다른 신혼 사랑법을 들여다봤다. ■ 당신과 함께라면 가시밭길도 꽃길 ●자장면 피로연, 1박 2일 경주 신혼여행 1979년 가을, 김정식(62)·오경자(58)씨 부부는 강원도 삼척의 한 교회에서 화촉을 밝혔다. 부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당시 교회의 예배당은 공짜라서 선호하는 결혼식 장소였다. 피로연은 신랑·신부가 서로 다른 곳에서 했다. 신부 측은 하객들에게 중국집에서 자장면·짬뽕을 대접했다. 당시에는 융숭한 대접이었다.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려웠던 신랑은 평범하게 집 앞뜰에 멍석들을 깔아 놓고 국수랑 떡을 나눴다. 지금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대접이었지만, 친지·친척·이웃들은 지금과 달리 밤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편안하게 덕담을 나눴다. 신혼여행은 경주로 갔다. 1박 2일 짧은 일정이었다. 불국사에서 한복을 곱게 입고 남편과 찍은 신혼여행 기념사진은 아직도 거실벽 한가운데에 걸려 있다. 결혼 때 찍은 사진이 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씨는 “아니에요. 짧았지만 좋고 싫고를 말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제 친구들 절반은 아예 신혼여행을 못 갔던 걸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당시 경상도·전라도 등 남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설악산으로, 강원도·경기도 등 북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경주로 신혼여행을 가는 게 상례였다. 그나마 살림살이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나 신혼여행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이 오씨의 설명이다. 형편이 안돼 여행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종종 제주도를 찾는 사람도 있었지만 드물었고 그러면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몸에 받았다고 했다. 오씨의 첫 신혼살림은 주인집 옆에 딸려 있는 단칸방이었다. 보증금도 없는 사글세 3만원짜리 방이었다. 당시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월급이 10만원 남짓이라 사글세가 버거웠던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시동생의 학비·생활비를 대고 저금도 조금 하고 나면 넉넉하게 살림을 꾸릴 형편이 아니었다. 신혼 하면 빼먹을 수 없는 기억 중의 하나로 오씨는 ‘새벽 연탄불 갈기’를 꼽았다. 혼례를 올리고 금세 찾아온 겨울, 연탄불 온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까지 따뜻하게 자려면 새벽 1~2시에 반드시 연탄불을 갈아야 했다. 문제는 오씨 부부가 살던 집의 구조가 지금처럼 부엌까지 실내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 방문을 나가 한겨울 찬바람을 몽땅 맞으며 방모퉁이를 꺾어 돌아야 부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남편과 하루하루 번갈아 가며 불을 갈았는데, 돌아오면 서로 손을 비벼줬던 일이 신혼의 낭만으로 기억된다. 그 뒤 1982년 5월 정부에서 공급한 17평짜리 국민주택에 입주할 때까지 세 번이나 그 집에서 겨울을 났다. 김씨는 “이런 소릴 하면 무슨 도사냐고 할 것 같다.”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 조금 힘들다고 다투고 갈라서려고 하지 말고, 현실에 만족하면서 잘살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생했어도 좋아. 사랑했으니까.” 경기 수원에 사는 김정순(53·여)씨는 나이가 8살이나 많은 남편과 1981년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씨는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다.”고 돌이켰다. 김씨의 부모가 나이 차이·직업·가정형편을 이유로 결혼에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사였던 김씨는 집안이 극구 반대하는 결혼을 “우겨서” ‘쥐뿔도 없는’ 대학원생 남편과 결혼했다. “순박한 게 좋았다.”고 털어놓았다. 박사학위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남편 때문에 그 달콤하다는 신혼을 만끽하기는커녕 공부 뒷바라지를 하느라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야 했다. 부부는 작은 방 하나를 전세로 얻어 첫 살림을 살았다. 부엌·화장실을 다른 집 식구들과 함께 쓰는 공동주택이었다. 방 아랫목 연탄아궁이 구들은 장판이 눌러붙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다른 쪽은 꽁꽁 언 냉골 방이었다. 밤에 화장실에 가는 건 공포에 가까울 정도였다. 결혼한 지 6개월쯤 됐을 때 김씨의 언니가 포도를 사서 집에 놀러 왔다. 살림 때문에 과일도 사치라고 여겼던 때다. 김씨는 포도알을 씹다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언니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하지만 김씨는 “그때로 되돌아간다 해도 남편에게 관심을 쓰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듯하다.”면서 “원래 사랑·인연이란 건 설명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 연애할 때 더 달콤했는데… ●주말 녹초 되는 남편 “너무 변했어” 서울 응암동에 사는 김주연(가명·25·여)씨는 지난해 9월 웨딩마치를 올린 새댁이다. 김씨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요즘, 주말마다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어댄다. 김씨는 결혼 전 전국 곳곳을 여행하며 열애를 했고, 결혼 후에도 변치 말자고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불만이다. 주말이면 녹초가 돼 집에만 있으려는 남편을 보면 속이 상해 죽을 맛이다. 지난 주말, 횡성의 한 펜션으로 떠나자고 제안을 했더니 남편은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가면 어떠냐.”며 단박에 말을 잘랐다. 김씨는 혼자만 추억을 간직하는 것 같아 서운했고, 남편이 1년 만에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것 같아 서러웠다. 2004년 여름에 처음 만나 연인이 된 부부는 연애하는 5년 동안 거의 매주 빼놓지 않고 여행을 했다. 산으로, 들로, 도서지역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비록 함께 머무는 고정된 보금자리는 없었지만, 곳곳에다 서로의 추억을 수놓았다. 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강원도 횡성. 2007년 1월, 펜션에 여장을 풀고 산책을 하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 위에서 말 그대로 ‘영화’를 찍었다. 김씨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세상이 하얗게 변했고 세상에 우리만 덩그렇게 남은 것 같았어요.”라고 당시를 돌이켰다. 김씨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남편의 어깨에 기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이 남자와 살면 참 행복하겠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남편은 토요일에 늦잠을 자는 일이 버릇이 됐고, 일요일은 다음 주 업무 준비를 한다며 집 안에서 꼼짝을 않는다. 김씨는 “이제 애도 태어나고 하면 여행은 더더욱 꿈도 못 꿀 텐데….”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신세대 부부의 ‘독한 결혼’ 올 10월 결혼한 ‘따끈따끈한’ 신혼부부 정성규(31)·문미진(26·여)씨 부부는 ‘독한 결혼’을 했다고 주위에 소문이 자자하다. 이들은 ‘집 장만은 남편, 혼수는 아내’라는 기존 결혼 공식을 깼다. 결혼의 모든 과정에 드는 비용을 정확히 반씩 부담했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신들이 번 돈으로 살림을 차렸다. 정씨 부부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진했다. 처음엔 집안 어른들이 이런 방식에 대해 반대했다. 특히 문씨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다. 처음에 문씨의 부모는 “우리 애가 뭐가 부족해 남들만큼도 못 받느냐.”고 사위에게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래도 부부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정씨는 “먼저 결혼한 친구·선배들 말이 결혼 준비기간 동안 혼수·집 등 돈 문제로 많이 싸운다고 들었다.”면서 “그런 일로 싸우기도 싫고, 비용을 공평하게 부담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좀 독하다는 소리 듣더라도 우리 식대로 결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고 허름한 원룸이 첫 살림집이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각자가 대출받은 금액을 보태 전세로 마련한 집이다. 가전제품과 가구 등 혼수비용도 결혼 전 2년 남짓 동안 각각 모은 1000만원의 결혼 자금으로 충당했다. 남은 돈으로 동남아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문씨는 “돈 때문에 누가 우위에 서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면서 “둘이 더 행복해지려면 시작부터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 변함없는 사랑… 가족웨딩 은혼식 경기도 일산에 사는 이남경(52·여)씨는 올 4월 다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결혼한 지 25년째 되는 기념일을 맞이해서다. 결혼 25주년은 ‘은혼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기념해야 한다는 남편 최수훈(56)씨의 주장 때문이었다. 여기에 자식들까지 가세해 이씨는 일명 ‘리마인드 웨딩’을 치를 수 있었다. 거창할 건 없었다. 하객들을 모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25년 전에는 못 해 봤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스튜디오에서 결혼사진을 찍었다. 몇 장 안 되는 결혼식 사진이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웠던 최씨다. 새로 찍은 기념사진 속에는 대학생이 된 두 딸이 함께한다. 딸들도 곱게 차려입었다. 이들은 촬영 며칠 전부터 엄마·아빠 얼굴에 영양팩을 해 주는 등 부산을 떨었다. 당일에는 미용실에서 함께 머리 손질도 하고 신부 메이크업도 받았다. 이씨는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미는 일본 규슈지역의 온천으로 떠난 ‘리마인드 신혼여행’이었다. 2박 3일 여행비는 두 딸이 아르바이트로 마련한 돈이어서 특별했다. 이들 부부는 신혼 때 꿈과 사랑으론 부자였지만, 결혼식도 가까스로 올릴 만큼 가난했다. 신혼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혼 1년 만에 첫째 딸이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딸이 연이어 태어나면서 “설악산이라도 가자.”는 남편의 약속은 끝없이 미뤄졌다. 이들 부부가 처음 떠난 여행은 두 딸과 함께였다. 최씨는 “변함없이 사랑해. 여보.”라고 말하면서 아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씨는 “두 번이나 결혼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답례하며 방긋 웃었다. 김양진·윤샘이나기자 ky029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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