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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전체를 서울시 소속으로 되돌려야”

    “북한산 전체를 서울시 소속으로 되돌려야”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북한산 일부가 경기도에 속해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므로 북한산 전체를 서울시 소속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사카 교수는 11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산의 서울시 이전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북한산은 서울시와 경기도에 걸쳐 있다. 주봉 백운대는 행정구역상 경기 고양시 소속이다. 호사카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북한산은 한성부(서울) 소속으로, 나라의 중심 산인 ‘조종산’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4년 경성부의 범위는 5분의1로 축소됐다. 호사카 교수는 “이 과정에서 북한산이 경기도로 편입됐고, 1945년 이후 서울은 원래의 한성부 범위로 복원됐으나 북한산 일부 지역은 원상 복귀가 안 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의 도읍(수도)은 오로지 도쿄였기 때문에 경성부가 당시 경기도청 소재지로 바뀐 것”이라며 “이것이 경성부 축소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는 일본인이 주로 사는 청계천 남쪽을 중심으로 경성부의 도시화를 추진했다”며 “일본은 조종산인 북한산을 경성부에 소속시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독립운동가나 의병들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치안의 관점에서만 북한산을 바라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산은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을 수가 없다”며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부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구역만 변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 호사카 유지 “북한산 서울로 이전해 日잔재 청산해야”

    호사카 유지 “북한산 서울로 이전해 日잔재 청산해야”

    “경성부 축소 과정서 경기도로 편입국립공원이라 토지 갈등 있을 수 없어”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북한산 일부가 경기도에 속해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므로 북한산 전체를 서울시 소속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사카 교수는 11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산의 서울시 이전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북한산은 서울시와 경기도에 걸쳐 있다. 주봉 백운대는 행정구역상 경기 고양시 소속이다. 호사카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북한산은 한성부(서울) 소속으로, 나라의 중심 산인 ‘조종산’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4년 경성부의 범위는 5분의1로 축소됐다. 호사카 교수는 “이 과정에서 북한산이 경기도로 편입됐고, 1945년 이후 서울은 원래의 한성부 범위로 복원됐으나 북한산 일부 지역은 원상 복귀가 안 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의 도읍(수도)은 오로지 도쿄였기 때문에 경성부가 당시 경기도청 소재지로 바뀐 것”이라며 “이것이 경성부 축소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제는 일본인이 주로 사는 청계천 남쪽을 중심으로 경성부의 도시화를 추진했다”며 “일본은 조종산인 북한산을 경성부에 소속시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독립운동가나 의병들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치안의 관점에서만 북한산을 바라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산은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을 수가 없다”며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부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구역만 변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 광주지역 학교,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대응 긴급 계기교육

    광주지역 학교,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대응 긴급 계기교육

    광주시교육청은 광주지역 각급 학교들이 오는 8일까지 일정으로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에 대응하기 위한 긴급 계기교육을 실시한다. 1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이번 계기교육은 최근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개정 추진에 맞선 것으로, 학교 구성원의 토론과 협의를 거쳐 시행한다. 계기교육은 △독도 침탈,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쟁점 관련 교과 연계 수업 △방송 교육 △교육청 제작 계기교육 자료 활용 수업 등 다양한 형태로 추진될 예정이다. 광주시교육청은 산하 기관들과 단위 학교에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현수막도 함께 게시해 교육청의 적극적인 대응의지와 일본을 향한 개선요구도 널리 알릴 방침이다. 특히 광주시교육청에서 직접 개발·보급한 ‘달마다 만나는 민주시민 이야기’ 자료집을 활용, 일본의 침략·만행 은폐를 실증적으로 반박한다. 앞서 장휘국 교육감은 일본의 침략 만행 왜곡 교과서의 즉각적인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장휘국 교육감은 지난달 30일 일본의 침략 만행 역사 교과서에 대해 결연히 반대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즉각적인 시정을 촉구하는 성명문을 발표한 바 있다. 장 교육감은 “광주시교육청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교육과정 운영과 연계해 교육 현장의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사업, 학생독립운동 정신 계승 사업, 독도전시관 체험 프로그램 운영, 학교로 찾아가는 역사교육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발행과 독도영유권 주장에 적극 맞서 진실된 역사교육에 매진해 학생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3·1운동 103주년…광복회는 왜 사과해야 했을까

    3·1운동 103주년…광복회는 왜 사과해야 했을까

    “3·1 선열들과 국민 앞에 앞에 하는 다짐·결심”횡령 의혹 김 전 회장 사퇴 후 직무대행 체제 中국가보훈처 조사 결과 사실 정황 드러났으나…김 전 회장, 끝까지 의혹 부인김원웅 전 회장 횡령 의혹·사퇴로 내홍을 겪은 광복회가 3·1절 103주년을 맞아 대국민 사과문을 내고 철저히 바뀌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광복회 자금을 개인적으로 쓴 정황이 드러난 김 전 회장이 자진사퇴한 후 조직 내부를 하나부터 열까지 바꾸겠다는 포부를 전한 것이다. ● “민족 위하는 이미지 회복하겠다” 김 전 회장 횡령 의혹·사퇴로 내홍을 겪은 광복회는 1일 대국민 사과를 내고 철저히 바뀌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광복회는 103주년 3·1절일 이날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오늘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온 국민과 기리고 본받는 3·1절을 기해 최근 자진사퇴한 김 전 회장의 일부 잘못된 광복회 운영을 깊이 반성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복회 위신이 추락한 것과 관련해 국민·회원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조속히 정상화를 기해 존경받는 광복회, 국가·민족을 위하는 광복회로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했다. 광복회는 또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을 초월해 조국 독립에 헌신했던 것처럼 대화합과 국민통합의 정신을 회복하겠다“면서 ”오는 5월 정기총회에서 바르고 신망받는 광복회장을 뽑아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광복회는 횡령 의혹을 받는 김 전 회장이 지난 16일 전격 사퇴한 이후 허현 부회장 회장 직무대행 체제 상태다. 광복회는 이어 ”103년 전 남녀노소·빈부귀천·도시와 농촌·종교 교리를 초월해 민족화합과 단결의 상징이 된 3·1 선열들과 국민 앞에 앞에 하는 다짐·결심이 반드시 지켜져 ‘국민 속의 광복회’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한 ”친일잔재 청산과 독립운동사 교육은 민족정기 선양의 시대적 과제이다“라면서 ”분단 극복 노력은 현실을 직시하는 통일조국 촉성의 역사 인식인만큼 회원의 염원을 온전히 받들어 진정한 광복을 완성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카페 수익금 부당 사용비자금으로 한복 구매가족 회사 세웠다는 의혹까지 앞서 국가보훈처는 10일 “광복회(에 대한) 특정감사 결과, 광복회의 국회 카페 수익사업(헤리티지 815) 수익금이 단체 설립 목적에 맞지 않게 부당하게 사용되고 골재 사업 관련해 광복회관을 민간기업에 임의로 사용하게 하는 등 비위가 확인됨에 따라 수사 의뢰하고 해당 수익사업에 대한 승인 취소 등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광복회는 국회 카페 중간 거래처를 활용해 허위 발주 또는 원가 과다 계상 등의 방법으로 61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비자금 가운데 1000만원가량은 김 전 회장 개인 통장으로 입금된 후 여러 단계를 거쳐 현금화된 후 사용됐다”고 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서 운영해온 야외 카페 헤리티지 815 수익금으로 수천만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비자금이 김 전 회장 한복·양복 구매비, 불법 마사지 업소 출입, 이발비 등으로 사용된 사실도 확인됐다고 보훈처는 전했다. 김 전 회장이 광복절이나 3·1절 행사 때마다 입고 나왔던 한복 여러 벌을 비자금으로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훈처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의 ‘가족 회사’가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4층에 사무실을 몰래 내고 공공기관들을 상대로 영업 활동을 벌였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 ● 김 전 회장, 끝까지 ‘남탓’ 김 전 회장은 이러한 수익금 횡령 논란 등에 대해 “제보자의 개인 비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부인은 언론과의 통화에서 “쓴 일은 있지만 돌려줬다”는 등의 답을 해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또한 보훈처는 김 전 회장을 상대로 1차 서면, 2차 대면 조사를 벌였다. 김 전 회장은 “절대 내가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다. (제보자인) A씨가 과잉 충성을 하느라 제멋대로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후 사실을 안 뒤에 금액을 모두 채워넣었다”고 주장했다. 광복회 수익금을 전용, 김 전 회장 개인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본인이 시킨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본래 김 전 회장은 2019년 6월 취임해 임기는 내년 5월까지였다. 그러나 논란에 따라 일부 광복회원은 22일 임시총회를 소집해 김 전 회장 불신임 투표를 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김 전 회장은 16일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김 전 회장의 사의 표명은 자신의 탄핵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광복회 임시총회를 이틀 앞두고 예고 없이 이뤄진 것이다. 광복회 안팎에서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진 데 따른 결정이다. 김 전 회장은 입장문에서 “전적으로 제 불찰”이라면서도 “사람을 볼 줄 몰랐고 감독 관리를 잘못해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라고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주장했다.
  • 버티던 김원웅 광복회장 결국 불명예 사퇴

    버티던 김원웅 광복회장 결국 불명예 사퇴

    수익금 횡령 의혹을 받아 온 김원웅 광복회장이 취임 2년 8개월 만에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김 회장은 16일 입장문에서 “회원 여러분의 자존심과 광복회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것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김 회장은 국가보훈처가 지난 10일 비자금 조성 및 사적 유용 의혹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한 지 엿새 만에 자진 사퇴했다. 광복회장이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은 1965년 광복회가 설립된 이후 처음이다. 김 회장은 물러나면서도 전직 간부 A씨에 의한 ‘허위 언론 제보’라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몰랐고 감독 관리를 잘못해서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 전적으로 제 불찰”이라며 횡령을 부인했다. 이어 “반평생을 친일 청산에 앞장서 왔다. 친일 반민족 언론 ‘조선일보’와 대척점에 서서 싸워 왔다”며 “그 조선일보, TV조선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앞서 TV조선은 A씨의 주장을 인용해 김 회장이 지난 1년간 광복회가 국회에서 운영해 온 카페 수익금을 유용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감사 결과에 따르면 김 회장의 비자금 사용액은 총 7256만원에 이른다. 한복·양복 구입비 440만원, 이발비 33만원, 미등록 마사지 60만원 등의 사용 내역도 확인됐다. 김 회장은 감사 결과 발표 직후만 해도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며 사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날 예고된 일부 회원들의 광복회관 점거 농성과 18일로 예정된 회장 불신임안 표결을 위한 임시총회를 앞두고 물러났다. ‘회장 탄핵’을 위한 임시총회 자체가 광복회 창립 이후 처음인 데다 정치권에서 사퇴 압박이 거세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훈처는 입장문에서 “유감을 표명하며 광복회가 조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지도·감독해 나갈 것”이라며 “광복회는 정관에 따라 이사회를 통해 회장 직무대행을 지명하고, 이후 총회를 거쳐 새 회장을 선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복회는 17일 이사회를 열고 회장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한다. 오는 5월에 정기총회를 열어 새 회장을 선출할 계획이다. 김 회장이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사퇴를 촉구해 온 단체 회원들은 집행부도 책임을 지고 전원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광복회개혁모임, 광복회정상화추진본부, 광복회재건 비상대책모임 등은 이날 광복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사태는 김원웅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며 집행부가 알고도 묵인하고 방조했다”고 주장했다.
  • 김원웅 광복회장 사퇴…“사람 볼 줄 몰라” 끝까지 ‘남 탓’

    김원웅 광복회장 사퇴…“사람 볼 줄 몰라” 끝까지 ‘남 탓’

    金 자진 사퇴 의사 밝혀“광복회장의 직을 사퇴합니다” 입장문국가보훈처, 金 사퇴에 “유감”광복회 수익사업 관련 사적 유용 정황이 드러난 김원웅 광복회장이 16일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 김 회장은 이날 ‘광복회장의 직을 사퇴합니다’라는 입장문에서 “최근의 사태에 대해 부끄럽고 민망하다”며 “회원 여러분의 자존심과 광복회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것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했다. 국가보훈처 최근 감사 결과에 따르면 김 회장은 광복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서 운영해온 야외 카페 ‘헤리티지 815’ 수익금으로 수천만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 옷 구매, 불법 마사지 업소 출입 등 사적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반박했다. 이날 입장문에서 “전적으로 제 불찰”이라면서도 “사람을 볼 줄 몰랐고 감독 관리를 잘못해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라고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주장했다. 김 회장은 그동안 비자금 조성은 전직 직원의 비리이고 본인은 지시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김 회장은 이날 입장문에서 “친일 미청산은 민족공동체의 모순”이라며 “민족의 갈등과 분열은 친일 미청산이 그 뿌리다. 난 떠나지만 광복회는 영원해야 한다. 민족정기의 구심체로 광복회가 우뚝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 회장의 사의 표명은 자신의 탄핵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광복회 임시총회를 이틀 앞두고 예고 없이 이뤄진 것이다. 광복회 안팎에서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진 데 따른 결정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김 회장의 사의 표명에 유감을 표하며 당분간 광복회가 회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될 것이라고 했다. 보훈처는 이날 “김 회장 사퇴에 관련해 지도·감독기관으로서 유감을 표명한다”며 “광복회가 조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지도·감독하겠다”고 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광복회는 17일 회장 직무대행 지명의 건을 놓고 이사회를 연다. 이어 18일엔 임시총회에서 회장 사퇴 결의의 건을 다룰 예정이다.
  • [임창용 칼럼] 한 번 더 생각하는 2022년을 위하여/논설위원

    [임창용 칼럼] 한 번 더 생각하는 2022년을 위하여/논설위원

    새해를 맞는 건 설레는 일이다. 무한반복 일상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21년에서 2022년으로 숫자 하나 바뀌는 것이지만 사실 변화가 크긴 하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거나 졸업을 하고 새 학교에 들어간다. 회사에선 회계연도가 바뀌고 새 사업이 시작된다. 정부도 새 계획에 의해 정책을 집행한다. 그러고 보면 거의 모든 세상사가 숫자 하나 바뀌는 데 종속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설렘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란 희망을 전제로 한다. 작심삼일일지언정 새로운 계획을 한두 개쯤은 세우고 시작하는 게 이맘때 아닌가. 올해는 우리 국민에게 유독 그런 설렘과 기대가 크고 절실할 듯하다.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다. 문 정부는 헌정 최초로 대통령 탄핵 후 탄생했다. 그만큼 국민 기대가 컸다. 하지만 임기 5년간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무주택자들의 박탈감이 역대급으로 커져 있다. 5년 전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지만 구적폐 못지않은 신적폐가 나라를 혼탁하게 했다. 정권 초기 해빙되는 듯하던 남북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엔 도돌이표가 찍혔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대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질 새해엔 국민의 기대가 얼마나 충족될까. 새 대통령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정치인들은 정말 사심 없는 공복의 자세로 국민을 섬길까. 너무 비관적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껏 기대를 모은 문재인 정부가 실망만 안겼듯이 말이다. 사실 어느 정부에서건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폐는 남에게만 적용됐다. 정권의 사전에 정책 실패는 없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정권의 기저엔 내로남불이 깔려 있었다. 그 와중에 진전과 성과가 있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생각이 깊은 국민이 정치인들의 감언이설과 선동가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감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뿐이었다. 이번 정부만 해도 국민은 조국을 비롯해 정권을 오염시킨 이들에게 신적폐 딱지를 붙였다. 생각이 깊은 국민들은 친조국 세력의 친일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념에 매몰된 정권의 허실을 꿰뚫어 본 국민의 눈과 비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국정농단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탄핵시킨 주체도 깨어 있는 국민이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하고 감시하고 요구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대선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네거티브 공격과 의혹 제기가 난무하고 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선 권력을 위임할 자를 뽑을 때부터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할 듯싶다. 무엇이 좀더 진실에 가까운지, 왜 이런 공격이 지금 나왔는지, 언론 보도가 형평에 맞는지 등 의문과 답을 찾으려는 노력 말이다.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진영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과 선동가들의 주장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일단 거르자. 검증된 논객인 듯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되는 게 너무 많다. 장관 출신의 한 논객은 검찰이 노무현재단의 계좌를 들여다봤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현직 검사가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기록을 조작하는 세상이다. 도덕성과 국정 능력을 완벽히 갖춘 후보는 없다. 결국 비교우위의 후보를 뽑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 번 더 생각하고 검증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짓 정보에 속아 투표한 뒤 나중에 후회하는 악순환은 끝내야 하지 않겠나. 나아질 것 없을 것이란 내 비관론이 2022년에는 제발 틀렸으면 좋겠다.
  • [황성기 칼럼] ‘프레임 선거’ 다루는 법/논설실장

    [황성기 칼럼] ‘프레임 선거’ 다루는 법/논설실장

    헛발질을 사과하고 끝냈다지만 간단히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5선 여당 대표의 가짜뉴스보다 못한 ‘친일 프레임’ 말이다. 대통령 선거가 D-100일을 끊고 본격전에 돌입하면서 시대에 역행하는 마타도어, 흑색선전 같은 네거티브 캠페인도 도를 더해 가는 중이다. 미래를 연다는 2022년 대선이 구습과 악태로 얼룩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숨만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이 ‘친일 카드’를 꺼내는 걸 보면서 열세는 열세인가 보다 싶었다. 대한민국을 ‘친일’과 ‘반일’로 나누고 유권자를 갈라치는 하수 중 하수를 쓰다니 말이다. 송영길 대표 주장대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60년 전 돌상에 올라간 천환권이 엔화라고 치자. 그게 윤석열이 친일이란 증거가 되는 것인가. 하물며 “돌상에 우리나라 돈 대신 엔화가 놓였을 정도로 일본과 가까운 연세대 교수의 아들”이란 프레임은 더욱 경악스럽다. 대한민국 헌법은 어떠한 연좌제도 금지한다. ‘모든 국민은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13조 2항을 다시 읽어 보길 바란다. 일본 대학에서 공부한 윤석열의 아버지가 일본에 친근감을 느끼고 있을지 없을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 배웠다는 이유로 ‘친일’이라 모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의 영역을 넘어선 사술(詐術)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 아들을 ‘일본과 가까운 교수 아들’이라 프레임을 씌운다. 해도 너무 했다. 송 대표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에 34년 전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86세대다. 그런 그가 과거 독재 세력이 민주 세력에 들이댔던 ‘빨갱이’ 프레임을 서슴없이 써먹는다. 민주화에서 고작 배운 게 민주 진영에 대한 반민주 진영의 나쁜 수법인 프레임 걸기라면 거꾸로 가는 역사요, 못된 시어머니에 못된 며느리 된 셈이다. 정권을 잡고서도 ‘빨갱이’ 소리에서 못 벗어난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내내 ‘친북’ 소리 들어온 문재인 대통령을 생각한다면 해서는 안 될 일을 송 대표는 한 것이다. 1945년 해방 전 ‘친일’은 역사적으로 단죄를 받아 왔다. 아직도 한국 사회의 친일과 잔재가 깔끔히 청산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마냥 틀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 부역자’에게 엄밀히 적용해야 할 ‘죽창가’ 같은 단죄 프레임을 주머니 쌈짓돈처럼 꺼내 쓰는 민주당의 고얀 버릇을 이번 대선에서만큼은 안 볼 줄 기대했지만 역시나다. 선거가 제 뜻대로 안 돼서 골든 크로스(지지율 역전)를 위해 양심을 악마에게라도 팔고 싶겠지만 지켜야 할 금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도쿄에 집을 보유했던 민주당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진영이 “도쿄시장 후보”라고 역으로 친일 프레임을 걸어 실소를 자아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친일 부역자 후손들이 한국 곳곳에 남아 여전히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 세력의 지형은 해방 이후 76년간 많이 바뀌었다. 전통적인 부자가 퇴조하고 정보기술(IT)·연예산업 출신의 신흥 재력가가 속속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정치 지형도 마찬가지다. 과연 친일 부역자 후손이 얼마나 국회에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와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건가. 86세대를 중심으로 진보를 칭하면서도, 실은 권력에 탐욕적인 자들이 한국 요소요소에서 중앙·지방 할 것 없이 정치적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2020년 인구총조사를 보면 국민 5013만 3493명 가운데 해방의 해인 1945년까지 태어난 75세 이상은 351만 193명에 불과하다. 친일을 했다면 이 7%가 했을 것이고, 해방 직전 성인이 된 사람으로 생존해 있는 분은 소수점 단위의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쉽게 말해 해방 이후 출생자가 93%를 차지하는 게 지금의 한국이다. 살아 있는 친일 부역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이미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재산 압류 등으로 만족스럽진 않지만 역사적 청산은 일정 부분 이뤄졌다. 반일 감정에 기대는 저질 정치야말로 2022년 3월을 계기로 사라져야 하는 낡은 유물이다. 이번 대선에서 친북이건 친일 프레임으로 상대를 곤란에 빠뜨리려는 진영에 유권자들은 ‘비선택’이란 철퇴를 가해야 한다. 일제강점과 분단의 굴곡진 역사를 선거에 악용하려는 자들에게 낙선의 쓴맛을 안겨야 하는 것이다. 불행한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열어 온 한국사에서 역사적 퇴행을 시도하려는 후보를 유권자들이 매서운 투표행위로 심판하는 길 말고는 없다.
  • 이재명 “해방직후 미군 스스로 점령군이라 했다”

    이재명 “해방직후 미군 스스로 점령군이라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앞서 불거졌던 ‘미 점령군’ 발언 논란과 관련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했고 객관적 실체도 점령군이었다”면서 “그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10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주한미군의 성격은 시기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후보는 “정부수립 이후 주둔하는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과 합의에 따라 합법적으로 대한민국과 미국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관계로 합법적으로 주둔하는 것”이라며 “이건 점령군이 아니고 동맹군이다. 둘을 뒤섞어 시점상 전혀 다른 것을 같은 것처럼 하는 것은 정략적 왜곡”이라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다만 “미군에 계속 작전지휘권을 양도하고 미국의 국가적·군사적 이익이 관철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국민적 공감이라고 본다”며 “전시작전권의 반환이 신속히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는 2017년 대선 당시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반대했던 것과 관련한 질문에는 “유동적 국제상황에 즉시 적응하고 유연하게 움직여야 할 외교에서 벽창호 같은 태도를 취하면 큰일 난다”면서 “원칙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우리 국익에 전적으로 부합하느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이후 실전에 배치됐으니 지금 상태에서 사드 배치에 반대해서 철수하자고 할 수 없다. 추가 배치는 충분히 검토해야 하고 하지 않는 게 맞지만 이미 배치된 사드는 수용하고 그 위에서 가능한 대안을 찾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에 대해서는 “당연히 반대한다”며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는데 여기에 일본을 끼워 넣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이 독도를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는 것은, 언젠가 인계철선으로 관리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는다”며 “영토 문제나 과거 문제가 완전히 정리돼서 정말 영속적으로 교류·공존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영토 문제나 제국주의 침탈에 태도가 애매모호한 점을 고려하면 한미일 군사동맹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7월 1일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고향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찾은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 체제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고 언급했다가 ‘점령군 발언’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 윤보선 생가에 ‘윤씨 일가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 갈등

    윤보선 생가에 ‘윤씨 일가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 갈등

    “독립운동을 한 대통령에게 ‘친일파’ 연좌제를 씌우는게 말이 되나”(주민들) “가옥을 관광자원화하면서 그 집에 살았던 친일파들에 대한 설명을 뺄 수 있느냐”(민족문제연구소) 윤보선 전 대통령(1897~1990) 생가 등 윤씨 집성 가옥에 ‘친일행적 안내문’을 설치하는 것을 놓고 마을 주민들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갈등을 빚고 있다. 충남 아산시는 10일 둔포면 신항리 윤 전 대통령 생가 옆 마당에서 ‘해평윤씨 일가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 주민설명회를 연다고 9일 밝혔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 신항리 1구 이장 임춘길(63)씨는 “윤 전 대통령은 20대 때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했다”면서 “우리 마을 해평윤씨 가옥 전체를 윤보선 생가처럼 생각하는데 윤보선 일가 중에 친일파가 있다고 해서 그런 안내문을 설치하면 윤 전 대통령도 친일파인줄 오해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임씨는 “헌법이 연좌제를 금지한다”며 “임기가 짧지만 충청도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으로 주민들 자부심이 컸는데 스스로 먹칠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란은 아산시가 2018년부터 20억원을 들여 ‘윤보선대통령 기념관’ 등 근대문화마을 조성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애초 사업계획에 안내문 설치는 없었으나 지난해 12월 충남도의회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에서 자문위원들이 건의했다. 2009년 국가지정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해평윤씨 5명이 올라 있고, 이 중 일제강점기 때 중추원 고문 등을 지낸 윤치호와 윤 전 대통령의 부친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 등 친일파 4명이 이곳 근대문화마을 가옥에서 태어났다. 박창봉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역사에는 명과 암이 있다. 윤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윤치호 등 친일파들이 태어난 마을인데, 모든 인물의 행적을 방문객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 양민규 서울시의원 “교내 친일잔재 청산, 조례 통과 이후에도 진전 없어”

    양민규 서울시의원 “교내 친일잔재 청산, 조례 통과 이후에도 진전 없어”

    서울특별시의회 교육위원회 소속 양민규 의원(더불어민주당, 영등포4)은 9일 제303회 정례회 교육위 행정사무감사 질의에서 교내 친일청산에 대한 교육청의 안일한 태도를 지적했다. 양 의원이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받은 ‘교내 일제잔재 전수조사 집계 결과표’에 따르면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의 사용 제한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이후에도 교내 친일잔재 청산에 진전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의회에서는 지난 해 9월 서울 시내 초·중·고에서 욱일기 등 일본 군국주의 상징물과 조형물 사용을 제한하는 조례가 통과됐다. 해당 조례에 따라 교육감은 친일잔재 사용현황에 따른 실태조사를 지시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교육청은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초·중·고 내 유·무형 일제잔재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 항목을 ‘교가’, ‘교표’, ‘학교 시설물’, ‘학교 문화’ 등 네 개로 구분하여 ‘1차 교내 일제잔재 전수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1차 조사 집계 결과표를 보면 교가, 교표, 학교 시설물 등 3개 항목의 집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조사의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실정이다. 이는 조사방법을 ‘학교 자체 모니터링’으로 진행했고 교육청은 총 864개교가 제출한 자료만을 수집했기 때문이다. 올해 9월부터 12월까지 전문가 그룹의 구체적인 현장 조사를 통해 2단계 전수조사가 진행된다는 것이 교육청의 계획이지만, 1300여 개의 서울 관내 학교를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모두 현장 조사할 수 있을지 실현 가능성에 문제가 대두된다. 양 의원은 “이미 친일 잔재 청산이 70% 이상 진행된 전남 등 다른 시도를 벤치마킹하여 대안점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 “윤보선 대통령에 연좌제하냐”…부친 친일 안내문에 주민 반발

    “윤보선 대통령에 연좌제하냐”…부친 친일 안내문에 주민 반발

    “독립운동을 한 대통령에게 ‘친일파’로 연좌제하는 거냐”(주민들) “가옥을 관광자원화하면서 그 집에 살았던 인물들 설명을 뺄 수 있느냐”(민족문제연구소) 윤보선 전 대통령(1897~1990) 생가 등 윤씨 집성 가옥에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하는 것을 놓고 마을 주민들과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갈등을 빚고 있다. 충남 아산시는 10일 둔포면 신항리 윤 전 대통령 생가 옆 마당에서 ‘해평윤씨 일가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 주민설명회를 연다고 9일 밝혔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이 커 계획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신항리 1구 이장 임춘길(63)씨는 “윤 전 대통령은 20대 때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했다”면서 “우리 마을 해평윤씨 가옥 전체를 윤보선 생가처럼 생각하는데 조상 중 친일파가 있다고 해서 그런 안내문을 설치하면 윤 전 대통령이 그런줄 알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임씨는 “헌법이 연좌제를 엄격히 금지한다”며 “임기가 짧지만 충청도 유일의 대통령으로 주민들 자부심이 컸는데 스스로 먹칠하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들은 생가 주변에 반대 플래카드를 수십개 내걸기도 했다. 이는 아산시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도비 등 20억원을 들여 ‘윤보선대통령기념관’ 등 근대문화마을 조성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사업계획에 안내문 설치는 없었으나 지난해 12월 충남도의회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에서 자문위원들이 건의했다. 2009년 국가지정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해평윤씨 5명이 올라 있고, 이 중 일제강점기 때 중추원 고문 등을 지낸 윤치호와 윤 전 대통령의 부친으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 등 친일파 4명이 이곳 근대문화마을 가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윤 전 대통령 생가는 윤치소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윤 전 대통령은 부친의 막대한 재산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활동도 해 대통령이 됐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로 1년 5개월 만에 하야했다. 임씨는 “몇년 전까지 생가를 방치해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아무나 주차해 방문객들이 ‘외암민속마을처럼 관리하지 않고 왜 방치를 하느냐’고 불평했다”며 “문화마을 조성으로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데 친일행적 안내문을 설치하면 어찌 하느냐”고 반문했다. 신항 1구에는 100 가구, 230여명 주민이 산다. 박창봉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역사에는 명과 암이 있는 거 아니냐. 윤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유치호 등 친일파들이 태어난 마을인데 모든 인물의 행적을 방문객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안내문이 설치돼야 문화마을사업이 끝나는 만큼 시에서 주민들을 적극 설득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 언론개혁·친일청산… 아직 ‘집토끼’만 챙기는 이재명

    본선 4주차 여전히 강성 지지층 의식전 국민지원금 외 중도 포용 행보 없어“정권교체 강세 속 개혁 기조 유지 시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언론개혁, 친일청산 등 연일 강성 지지층 이슈를 쏟아내고 있다. 후보 선출 이후 본선 4주차에 접어들었는데도 친문(친문재인) 등 강성 지지세력을 의식하느라 중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민주당에 따르면 이 후보는 오는 6일 ‘검언개혁촛불행동연대’에서 온라인으로 개최하는 ‘4차 검언개혁 촛불행동’에 참석한다. 이 단체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 언론개혁, 정치검찰 해체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 후보는 전날 박병석 국회의장을 만나서도 “국민 주권주의라는 측면에서 가짜뉴스들은 엄정하게 책임을 묻긴 해야 한다”며 언론중재법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전날 광복회를 방문해서는 친일청산을 강조했다. 언론개혁과 친일청산 모두 강성 지지층의 관심사로, ‘드림원팀’을 내세우고 출범한 선거대책위원회와 달리 화학적 결합이 요원한 이낙연 전 대표의 지지층을 아우르기 위한 발언으로 꼽힌다. 통상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에는 당내 지지층이 아닌 중도층을 포용할 수 있는 이슈를 제시해야 하지만, 이 후보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외에는 이렇다 할 민생 행보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내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불안한 후보´ 입장에서 당내 이슈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언론개혁, 검찰개혁 모두 선거 때마다 나오는 강성 지지층의 최대 관심 이슈”라며 “이낙연 전 대표 지지층의 비토 정서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론이 정권재창출론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개혁 기조를 이어 가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도 있다. 본선 레이스 초반에 개혁 이미지를 선점하지 않으면, 국민의힘 후보가 확정된 뒤 정권교체 주장에 끌려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에 대한 야권의 공세에 대비한 프레임 전환 의도도 녹아 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정권교체론이 정권재창출을 압도하는데 개혁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정권재창출 명분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 후보가 불쑥 들고 나온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대한 실무 검토에 착수했다. 당과 조율이 없었다고 해도 대선 후보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당장 재난지원금을 정기국회 예산 심의에 반영하기도, 추경을 하기도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박완주 정책위의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 후보가 말한 것처럼 (그동안의 지원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충분하지 않은 지원이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정책본부에서 검토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재정 당국과 논의하고 야당하고도 협의해야 한다. 좀 고차원적인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시행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100만원이냐 50만원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 안에 할 수 있느냐’, ‘100만원을 주느냐’ 이런 것은 답을 줄 수 없다”면서 “시기와 규모를 쓰면 다 오보”라고 말했다.
  • 언론개혁·친일청산…‘집토끼’만 챙기는 이재명

    언론개혁·친일청산…‘집토끼’만 챙기는 이재명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언론개혁, 친일청산 등 연일 강성 지지층 이슈를 쏟아내고 있다. 후보 선출 이후 본선 4주차에 접어들었는데도 친문(친문재인) 등 강성 지지세력을 의식하느라 중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민주당에 따르면 이 후보는 오는 6일 ‘검언개혁촛불행동연대’에서 온라인으로 개최하는 ‘4차 검언개혁 촛불행동’에 참석한다. 이 단체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 언론개혁, 정치검찰 해체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 후보는 전날 박병석 국회의장을 만나서도 “국민 주권주의라는 측면에서 가짜뉴스들은 엄정하게 책임을 묻긴 해야 한다”며 언론중재법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했다.  전날 광복회를 방문해서는 친일청산을 강조했다. 언론개혁과 친일청산 모두 강성 지지층의 관심사로, ‘드림원팀’을 내세우고 출범한 선거대책위원회와 달리 화학적 결합이 요원한 이낙연 전 대표의 지지층을 아우르기 위한 발언으로 꼽힌다. 통상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에는 당내 지지층이 아닌 중도층을 포용할 수 있는 이슈를 제시해야 하지만, 이 후보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외에는 이렇다 할 민생 행보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내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불안한 후보‘ 입장에서 당내 이슈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언론개혁, 검찰개혁 모두 선거 때마다 나오는 강성 지지층의 최대 관심 이슈”라며 “이낙연 전 대표 지지층의 비토 정서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론이 정권재창출론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개혁 기조를 이어 가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도 있다. 본선 레이스 초반에 개혁 이미지를 선점하지 않으면, 국민의힘 후보가 확정된 뒤 정권교체 주장에 끌려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에 대한 야권의 공세에 대비한 프레임 전환 의도도 녹아 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정권교체론이 정권재창출을 압도하는데 개혁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정권재창출 명분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 후보가 불쑥 들고 나온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대한 실무 검토에 착수했다. 당과 조율이 없었다고 해도 대선 후보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당장 재난지원금을 정기국회 예산 심의에 반영하기도, 추경을 하기도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박완주 정책위의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 후보가 말한 것처럼 (그동안의 지원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충분하지 않은 지원이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정책본부에서 법, 규모, 절차 등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재정 당국과 논의하고 야당하고도 협의해야 한다. 좀 고차원적인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시행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100만원이냐 50만원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 안에 할 수 있느냐’, ‘100만원을 주느냐’ 이런 것은 답을 줄 수 없다”면서 “시기와 규모를 쓰면 다 오보”라고 말했다.
  • 홍성룡 서울시의원, 제10대 후반기 도시안전건설위 부위원장으로 보궐 선임

    홍성룡 서울시의원, 제10대 후반기 도시안전건설위 부위원장으로 보궐 선임

    서울특별시의회 도시안전건설위원회(위원장 성흠제)는 2일 제303회 정례회 제1차 도시안전건설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전임 부위원장의 교섭단체 탈당에 따라 홍성룡 의원(더불어민주당·송파3)을 제10대 후반기 도시안전건설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보궐 선임했다. 홍성룡 부위원장은 한양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독도수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청산 특별위원회 위원장,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윤리특별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홍 부위원장은 “제10대 후반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위원회가 지금까지 이룬 결실보다 남은 기간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선임 소감을 밝혔다. 성흠제 위원장은 후반기 남은 임기동안 더욱 발전하는 위원회를 만들 것이며 시민의 안전과 복리증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도시안전건설위원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 이재명 “역대 기관장들 친일 행적 표시해야”

    이재명 “역대 기관장들 친일 행적 표시해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행적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1일 이 후보는 서울 영등포구 광복회를 방문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집권했을 경우 경기도지사 때 추진했던 역대 도지사 친일 이력 병기 정책을 확대 시행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이 후보는 “친일 인사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중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역대 기관장들을 표시할 때 그 이후 행적만 기록하고 있다”며 “일각에서는 친일 인사들의 기록을 폐기하자는 주장도 하는데, 저는 생각이 다르다. 지울 것이 아니고 그마저도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것도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경기도지사들의 이력 밑에 친일 행적을 추가로 기록해 붙여놨다”며 “앞으로도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계속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이 완전히 백지 위에서 선량한 국민들로 이뤄졌다기보다는, 친일 청산을 못하고 오히려 일제에 부역했던 인사들이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의 주축으로 참여했던 안타까운 역사가 아직도 지금의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공동체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치렀던 분들을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하고 상응하는 보상과 예우를 해야 공동체가 언젠가 또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던지고 나라를 위한 일에 앞서나갈 수 있다”며 “일상적 삶 속에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존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정착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광복회에서 제시해준 내용도 있고, 경기도에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이 있다”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에 말씀드릴 것”이라고 전했다.
  • 안철수 “이재명, 아무데나 ‘친일파’ 붙이는 외눈박이…대통령 후보 자격 없어”

    안철수 “이재명, 아무데나 ‘친일파’ 붙이는 외눈박이…대통령 후보 자격 없어”

    윤석열 징계 판결에 李 “친일파가 위장”에安 “정치적 필요 따라 정통성 부정하는 李”安 “이재명 친일 청산 모델은 북한과 중국”李 2019년 “北·中의 ‘친일문화’ 정리 참고”安 “대선, ‘역사전쟁’ 아닌 ‘미래전쟁’ 해야”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17일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겨냥해 친일파에 비유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이재명 경기지사를 겨냥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거듭하는 이재명 후보는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로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안 대표는 이 후보의 다양한 친일파 발언을 언급하며 “이 후보의 친일 청산 모델은 북한과 중국”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극심한 위기감 느끼는 모양” 안 대표는 이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윤 전 총장에 대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지휘한 법무부의 징계가 적법했다는 법원의 ‘정직 2개월 인정’ 판결이 나온 후, 이 후보가 “친일파가 신분을 위장해 독립군 행세를 한 것”이라고 한 발언을 겨냥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 대표는 이 후보의 해당 발언을 두고 “극심한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이라면서 “아무데나 ‘친일파’ 또는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외눈박이’ 또는 ‘색안경’ 전략은 몰리는 쪽에서 먼저 내미는 절망의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안 대표는 “이미 이 후보는 7월1일 좌판을 깔았다”며 당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 후보가 “대한민국은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고 한 발언을 겨냥했다. 안 대표는 이 외에도 이 후보의 “우리 사회 모든 악, 몰염치, 무질서, 비양심 부정의 원인인 친일매국 미청산”(2015년11월6일 페이스북) “친일청산 꼭 해야 한다, 쓰레기 걷어내지 않으면 농사 안 된다”(2016년7월21일 방송인터뷰) 등의 과거 발언도 끄집어냈다. 안 대표는 2019년 이 후보가 언론인터뷰에서 “중국, 북한을 참고하며 ‘친일문화 정리’에 시동을 건다”고 한 발언도 겨냥, “이 후보의 친일 청산 모델은 북한과 중국”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는 ‘역사전쟁’이 아니라, 북핵과 미래의 도전 앞에서 어떻게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지 ‘미래전쟁’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尹측 “정치 편향성 예단 우려” 항소 시사“종전 재판부와 견해 달라 수긍 어려워”추미애 “尹, 석고대죄 후 정계 은퇴해야”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정용석 부장판사)은 지난 14일 법무부가 내세운 윤 전 총장에 대한 징계 사유 4건 가운데 3건인 ‘재판부 사찰’ 문건 작성·배포와 채널A 사건 감찰·수사 방해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윤 전 총장이 재직 중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발언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징계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앞서 총 6건의 징계 사유를 내세웠으며 이 가운데 검사징계위원회는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실의 주요 사건 재판부 사찰 의혹 문건 작성·배포, 채널A 사건 감찰 방해, 채널A 사건 수사 방해, 검사로서의 정치적 중립 훼손 4건을 인정했다. 이에 대해 윤 전 총장은 언론에 “징계 사건 가처분은 좀처럼 인용되지 않는데, 2건이나 인용됐다. 그런데도 본안 재판에서 징계 취소 청구를 기각한 것은 황당하다”고 말했다. 소송대리인(이완규·이석웅·손경식)들도 판결 직후 “절차에도 문제가 있고 법무부가 내세운 사유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소명해왔다”면서 “수사와 재판은 오로지 법률과 증거에 입각해 처리돼야 하며 정치적 편향성이나 예단이 판단의 논거가 되지 않았는지 크게 우려한다”고 항소 의지를 밝혔다. 소송대리인들은 또 “재판부가 매우 당황스럽게도 원고(윤 전 총장)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면서 “종전에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와 견해를 달리한 이유를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추 전 장관은 법원 판결에 대해 “윤 전 총장은 지금이라도 국민께 잘못을 석고대죄하고 후보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수사에 성실히 응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라고 직격했다. 추 전 장관은 이날 SNS에서도 “정치검찰의 권력 찬탈로 민주주의의 퇴행과 역사의 퇴보를 가져올 위험성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윤 전 총장은 법원이 인정한 중대 비위행위 이외에도 드러난 청부 고발 사건과 검찰조직으로 하여금 장모 변론서를 작성하고 수사에 개입한 정황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혐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추 전 장관은 “민주주의적 헌법 가치를 파괴하고 사정기관인 공권력을 사유화한 행위에 대해 대선 후보를 사퇴하고 조속히 수사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 김용연 서울시의원 “친일잔재청산 위해 진취적이고 다각적인 의정활동 전개”

    김용연 서울시의원 “친일잔재청산 위해 진취적이고 다각적인 의정활동 전개”

    서울특별시의회 교육위원회 김용연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강서4)은 지난 16일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회장 박우섭) 서울특별시친일잔재청산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는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조선의열단의 애국정신을 계승해 민족정기 선양, 조선의열단 항일애국투쟁 자취와 유적 발굴 및 복원, 올바른 역사인식 정립과 민족통일문화발전 기여를 목적으로 한다. 김용연 의원은 “평소 올바른 역사인식 정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친일잔재청산을 위해 진취적 활동을 펼치겠다”고 말하며 위원장으로 선임된 소감을 밝혔다. 덧붙여 김 의원은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관점에서 역사를 통찰할 수 있도록 시의원으로서, 그리고 특위 위원장으로서 노력하겠다. 역사교육 조례 발의 등을 포함한 다각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전남지역, 친일 잔재 기록 남겨 역사인식 확립 도모 ‘눈길’

    전남지역, 친일 잔재 기록 남겨 역사인식 확립 도모 ‘눈길’

    전남지역의 친일 잔재가 기록으로 남겨져 역사인식 확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목포는 일본 수탈 잔재의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구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수백채의 적산가옥 등 일본 잔재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 시는 이 건물들을 상징적인 근대문화유산으로 개발해 전국적인 관광 상품으로 활성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모습에 지역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저항정신과 일본 수탈의 아픈 현장들은 외면된 채 관광자원으로만 부각되고 있다는 반발도 일고 있다. 이같은 모습에 전남도의회가 해결 방안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신민호 (더불어민주당·순천6) 전남도의원이 지난 10일 대표발의한 최근 ‘전라남도 일제강점기 식민잔재 청산 및 연구활동 지원 조례’가 제정됐다. 뿌리 깊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친일 행적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에 속도를 내겠다는 복안이다. 조례의 주요 내용은 전라남도 식민잔재 실태조사 실시, 식민잔재 청산활동을 위한 연구활동 및 지원 사업, 일제식민잔재청산활동위원회 설치 및 구성, 식민잔재 청산활동에 필요한 재정 지원 등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인해 전남에 남은 일제 잔재 청산과 연구활동 지원을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 확립을 도모하는 게 목적이다. 현재 전남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친일 잔재 유적지로는 군사작전을 했던 목포 고하도 해안동굴과 방공호, 강제동원 노역장 이였던 해남 옥매광산과 흑선산 은굴이 있다. 또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사용했던 구 목포 일본 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순천 별량농협 창고와 원창역사 등이 있다. 신 의원은 “앞으로 친일잔재조사TF팀 운영과 전문기관 용역을 통해 비석, 누정현판, 군사·통치시설 등 일제 잔재물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례 제정을 통해 친일 인사의 행적을 검증된 기록으로 적시하고, 일제 잔재 시설물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는 일은 올바른 역사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신 의원은 지난해 ‘전남도교육청 일제 잔재 청산 조례’를 제정했다. 이를 통해 도교육청은 일제 잔재물에 대해 안내문을 설치해 해당 석물이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의 공적비이거나 일제식 양식임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특히 친일음악가가 제작한 교가를 사용하는 14개 학교에도 예산을 지원해 교가를 새로 제작하도록 지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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