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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징용자상 세우는 데 일본보다 한국서 시간 더 걸려”

    “강제징용자상 세우는 데 일본보다 한국서 시간 더 걸려”

    “강제징용 피해 노동자들의 고통을 하나의 형상으로 압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서울 용산역광장에 세워진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만든 작가 김운성(52)씨는 지난 12일 동상 제막식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징병, 광산, 농장, 군수공장, 토목공사 등 너무나 다양한 형태로 고통을 겪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용산역은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거나 모집해 일본으로 데려간 전초기지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해 최소 100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광장에 집결해 나가사키 군함도 등 일본과 사할린, 쿠릴 열도, 남양군도 등으로 끌려갔다.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질병과 지진,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사망했다.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부인 김서경(53)씨와 제작했던 김씨는 이번 노동자상 제작에 대해 “일본에는 바로 세워졌는데 오히려 한국에 세우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면서 “(동상을) 만들긴 작년에 다 만들었다. 이는 아직도 친일파들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는 걸 방증하는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노동자상은 지난해 8월 24일 일제 강제징용 역사를 증언하는 일본 교토시 단바 망간광산 기념관에 처음 세워졌다. 이어 두 번째 동상을 바로 제작했지만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초 올해 삼일절에 제막식을 하려고 했으나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 부지라 부적절하다’며 건립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번 노동자상은 평화의 소녀상과는 달리 ‘예술로의 승화’ 측면에서 성에 차지 않는다”면서 “동상을 세우기에 앞서 조사를 하다 들은 애절하고 애잔한 많은 얘기를 형상화해야 하는데 이를 승화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고 고백했다. 김씨는 “이번에는 탄광에서 일한 피해자만을 형상화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착취당한 피해자들도 반드시 작품으로 다뤄 사람들이 강제징용 피해자 모두를 기억하게 하고 싶다”면서 “앞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시리즈’로 만들어 나갈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인 피해자뿐 아니라 이들을 도와준 일본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작품에 담아 내고 싶다”면서 “예술을 통해 슬픔과 아픈 과거를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고, 그래야지 더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육종학의 아버지’ 故 우장춘 박사 나팔꽃 유전 연구기록물 첫 공개

    ‘육종학의 아버지’ 故 우장춘 박사 나팔꽃 유전 연구기록물 첫 공개

    ‘육종학의 아버지’ 고(故) 우장춘 박사의 나팔꽃 유전에 관한 연구 기록물이 국가기록원을 통해 공개된다. 국가기록원은 10일 우 박사 서거 58주년을 맞아 8일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과 기증 협약식을 열었다.협약식을 통해 1930년대 생산된 우 박사의 연구 기록물 713점을 기증받은 국가기록원은 앞으로 이 기록물을 영구 보존할 계획이다. 유족은 연구 결과물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연구소에 기증했고, 연구소는 국가 차원에서 이 기록을 보다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다시 기증했다. 우 박사는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0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에 취임해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육종개량 연구에 전념, 식량 자급의 길을 열었다. 우 박사는 일본인 처와 여섯 자녀를 남겨 둔 채 귀국하기 전 히로시마에 있는 부친의 묘비 앞에서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노력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에 뼈를 묻고자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속이 꽉 찬 배추와 무, 제주 감귤, 대관령 감자 등을 만들어 낸 우 박사는 친일파란 주홍글씨에 시달리다 사망 3일 전에 민간인으로서 최대 명예인 문화포장증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우 박사의 넷째 사위는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교토세라믹)의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공효진, 정윤철 ‘군함도’ 발언에 “사이다” 댓글..뭐라고 했길래?

    공효진, 정윤철 ‘군함도’ 발언에 “사이다” 댓글..뭐라고 했길래?

    [서울신문 김채현 기자]배우 공효진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정윤철 감독의 글을 캡처한 사진을 게재하며 “사이다”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정 감독이 전날 페이스북에 ‘군함도를 잽싸게 탈출한 극장들 택시를 잡아타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국 극장의 행태를 비난했다. 페이스북에 정 감독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건 옛말? 돈 앞엔 같은 패밀리라도 팔을 아예 꺾어버린다. 새로운 상품 ‘택시운전사’를 최대한 깔기 위해, 같은 그룹 CJ엔터가 투자한 대작 ‘군함도’를 개봉 2주차에 과감히 교차 상영하는 CGV 극장들의 쏘 쿨한 모습. 알파고를 능가하는 냉철함이다”고 말했다. 또한, “‘군함도’처럼 극장들이 무리하게 2000개 스크린을 독과점해 영화가 온갖 욕을 들어먹게 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의 초반 마케팅에 엄청난 부정적 요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친일 영화 운운하는 가짜뉴스가 판쳐도 독과점 논란에 묻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는 모든 극장은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해 버린다”고 주장했다. “영화가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 한국 영화 대표 감독과 배우 및 스텝들의 피땀 어린 결과물이 이처럼 허망이 1주 천하로 끝난다는 건 분명 비이성적이고 소모적인 집단 광기”라며 “그 중심엔 바로 통제 불능의 슈퍼 울트라 갑 극장들이 있다. 그들은 매번 새 영화가 나오면 욕을 먹든 말든 엄청난 스크린을 잡아 무리하게 관객몰이를 해 대며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는 힘빨이 딸리면 곧바로 야멸차게 내던진 후 새로운 신상으로 우르르 갈아탄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러한 극장 유통업자들의 행태는 품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천민 자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옥의 섬 군함도에서 조선인을 착취하던 일본제국주의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한국에서 개봉되는 모든 영화들은 하시마 섬의 끔찍한 탄광에서 석탄 파는 기계로 죽어가던 조선인들처럼, 극장에서 금맥을 캐내기 위해 동원된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윤철 글을 캡처한 공효진은 “사이다”라는 옹호하는 댓글을 남겼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우종범 EBS 사장 사의 표명…지난해 ‘최순실 인사개입’ 의혹

    우종범 EBS 사장 사의 표명…지난해 ‘최순실 인사개입’ 의혹

    우종범 EBS 사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EBS는 4일 “우종범 사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당초 우 사장의 임기는 내년 11월까지였다. MBC 라디오 피디 출신인 우 사장은 제주MBC 사장, 한국교통방송 대전본부장, 국가보훈처 산하 공기업 88관광개발 상임감사 등을 지냈다. 우 사장은 지난 2015년 EBS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사장 공모 과정에는 “박근혜 청와대가 친일·독재 미화 논란을 빚어온 뉴라이트 인사를 교육방송 사장에 내정했다”는 설이 무성했는데, 내정설 당사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아닌 우 사장이 선임되며 논란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지난해 뉴스타파는 최순실씨 소유 회사에서 우 사장의 이력서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당시 선임 과정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고, 우 사장은 올해 1월 국회에 출석해 “저는 방통위에 제출한 이력서밖에 모르겠다. 최순실은 옛날에 회오리 축구단 다닐 때 만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모른다”고 전면 부인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왜색 금지’ 방파제 넘나들던 일본 문화 파도

    ‘왜색 금지’ 방파제 넘나들던 일본 문화 파도

    일본을 禁(금)하다/김성민 지음·옮김/글항아리/260쪽/1만 5000원일본 SF 애니메이션의 전설 ‘아키라’가 만들어진 지 29년 만에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다는 소식이다. 제3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의 도쿄를 질주하는 소년들을 그린 이 일본 작품에 대해 국내 팬들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사실 ‘아키라’는 1991년 국내 극장에 걸린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작품은 아예 극장 개봉을 할 수 없었는데 왜색(倭色)과 자극적인 장면을 걷어 내며 두 시간짜리를 80분짜리로 줄이고 ‘폭풍소년’이라는 홍콩 작품으로 신분 세탁까지 한 뒤 한국어 더빙판으로 상영됐다. 뒤늦게 일본산(産)으로 알려지며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지만. 비슷한 시기 일본 만화는 정식으로 들여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왜색이 없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기는 했다. 1992년부터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국내에서 정식 연재되며 열풍을 일으켰다. 작품 속 배경과 캐릭터는 한국식으로 바뀌었는데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가 사쿠라기 하나미치, 루카와 가에데, 아카기 다케노리라는 일본 이름 그대로였다면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의 인기를 끌었을지 물음표다. 1970~1980년대 TV를 통해 푹 빠져 살았던 ‘마징가Z’나 ‘은하철도999’가 나중에 커서 일본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배신감을 느꼈다는 경우도 많다. 번안곡 수준의 주제가도 신나게 따라 불렀는데, 훗날 한·일 축구 경기에서 양측 응원단이 ‘마징가Z’를 각자 응원가로 불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해방 이후 1998년 이전 일본 문화 금지 시대에도 일본 문화는 우리 일상 깊숙이 월경(越境)해 들어와 대중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화사회학자이자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인 저자는 오늘날 한·일의 문화적 관계를 되짚기 위해 수십년간 지속된 금지와 월경 현상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탈식민지화 차원에서 시작된 금지가 ‘일본 제국에서 미국 제국으로의 재편’을 통한 동아시아의 정치적, 문화적 동질화 과정이기도 했다고 분석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금지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발을 억제하고 정권의 친일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 실시된 상징조작 중 하나로도 해석한다. 이 시기부터 금지는 정치적 검열 성격도 갖게 된다. 저자는 “아무리 힘을 들여 경계를 긋고 바깥의 존재를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규정하고 공고한 방어 장치를 작동시켜도 어느새 뒤섞여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과 만나게 되는 그 과정이야말로 문화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새 검정 역사교과서 ‘독재’ ‘친일파’ 용어 부활한다

    2년 늦춰 2020년 3월부터 사용 새 교육과정(2015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검정 역사·한국사 교과서가 애초 계획보다 2년 늦춰진 2020년 3월부터 중·고교에서 사용된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박근혜 정부가 강행한 국정화의 흔적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지우겠다는 얘기다. 특히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 빠진 ‘독재’, ‘친일파’ 등 용어를 다시 넣는 방안도 검토한다. 교육부는 26일 “국정 역사 교과서가 폐지됐지만 개발 중인 중학교 역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화의 연장선에 있으며 집필 기간도 너무 부족해 졸속 집필 비판이 지속됐다”면서 “이 때문에 새 교육과정 적용을 2년 미루기로 했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이달 말쯤 검정 역사 교과서 적용 시기를 2018년 3월에서 2020년 3월로 미루는 교육과정 총론 부칙을 개정한다. 이어 내년 1월까지 역사과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도 새로 만든다. 새 집필 기준을 세울 때 지난 1월 공개된 국정 역사 교과서 최종본 내용 중 논란이 컸던 부분을 수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 우선 유신 독재 시기를 기술하면서 ‘독재’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점, 친일파라는 용어 대신 ‘친일인사’, ‘친일행위’로만 기술한 점 등 독재와 친일 문제를 미화했다고 지적 받은 부분을 다시 들여다본다. 또 1930년 국내 독립운동 실태를 비롯한 독립운동사와 조선후기 경제발전, 자발적 근대화 등 근현대사 비중을 축소한 것도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근대화 추진 과정을 경제 성장 일변도로 서술하는 등 ‘친재벌’ 논조가 강하다는 비판을 받아 온 부분도 재검토 대상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거장 4인 ‘4색 무대’…묵직한 울림과 소통

    거장 4인 ‘4색 무대’…묵직한 울림과 소통

    평생 연극 한길만 꿋꿋이 걸으며 ‘뜨거운 현역’으로 무대 위의 삶을 살고 있는 연극계 거장들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한국연극협회는 오는 28일부터 새달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늘푸른연극제’를 개최한다.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는 지난해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열렸다. 지난해에는 원로 연출가 김정옥,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 극작가 하유상, 극작가 천승세 등 연극계 산증인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객석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 한국연극협회는 현재 연극계를 떠나지 않은 70세 이상의 연극인 중 배우 오현경(81), 연출가 김도훈(75), 극작가 노경식(79), 배우 이호재(76)를 선정했다. 정대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관객들에게는 평소 만나기 힘든 거장들의 명작을 만나볼 기회가, 연극인들에게는 세대 간 소통을 꾀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개막작은 무대에서 60년 넘는 세월을 보낸 배우 오현경의 대표작 ‘봄날’(28일~8월 6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이다. 이강백이 쓰고 이성열이 연출한 이 작품은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 아버지와 그에 반기를 든 자식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1984년 초연한 이후 2009년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2011년 극단 백수광부 15주년 기념작, 2012년 명동예술극장 공동제작 공모선정작으로 공연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고집 세고 가부장적인 우리들의 아버지상을 보여준 오현경은 탁월한 연기로 2009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연출가 김도훈은 미국의 대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8월 4~1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을 무대에 올린다. 김 연출가가 1976년 극단 뿌리를 창단하며 공연한 작품으로 지금까지 수차례 재공연을 거듭하며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인정받았다. 경제공황의 절정기 미국 중서부 세인트루이스의 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각자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톰, 로라 남매와 어머니 아만다가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환상이란 유리같이 깨지기 쉬운 것임을 그린다. 배우 최종원, 차유경, 장우진, 전지혜 등이 출연한다.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리얼리즘 연극의 대표 극작가 노경식의 ‘반민특위’는 2005년 극단 미학이 초연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력하며 반민족 행위로 해악을 끼친 친일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기구로 등장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여러 방해공작으로 비극적인 해체와 파탄을 맞이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노 작가가 특유의 역사 사실적 안목을 바탕으로 기록극 형식으로 구성하고 다듬은 작품이다. 원로배우 권병길, 정상철, 이인철, 김종구 등 30여명이 출연한다. 마지막 무대는 이만희 극작가가 배우 이호재에게 헌정한 ‘언덕을 넘어서 가자’(8월 17~2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가 장식한다. 2007년 초연 당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인 공연가에 실버세대를 겨냥한 작품으로 많은 이목을 받았다. 노인들을 향한 따뜻하고 유쾌한 시선, 맛깔스러운 대사로 중장년층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작품이다.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세 친구가 기억의 저편에 묻어뒀던 첫사랑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로 최용훈 연출가와 배우 최용민, 남기애가 함께한다. 관람료는 전석 3만원. 티켓은 인터파크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구매할 수 있다. 1544-1555, (02)3688-0007.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계속되는 역사전쟁

    [이덕일의 역사의 창] 계속되는 역사전쟁

    일제강점기 때 두 종류의 전쟁을 치렀다. 하나는 빼앗긴 강역을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관을 둘러싼 역사전쟁이었다. 역사전쟁의 최전선은 고대사였다. 지금도 한국 고대사가 역사전쟁의 최전선인 것은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업보가 반영된 것이다. 식민사학이라고 통칭돼 왔던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왜곡한 한국사상(像)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한국사의 시간 축소고, 다른 하나는 공간 축소다. 시간 축소의 대표적인 사례가 ‘단군’을 말살하고,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라는 책을 발간해 대종교, 천도교, 동학교, 단군교, 보천교, 증산교 같은 민족종교와 ‘미륵불교, 불법연구회’ 등의 불교 단체들을 ‘유사종교’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한마디로 항일 민족정기를 고취시키는 단체를 ‘유사종교’라고 낙인찍고 탄압한 것이다. 이렇게 단군을 말살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지우는 것으로 한국사의 시작을 서기전 24세기에서 서기 4~5세기경으로 대폭 끌어내렸다. 지금도 해외 한국사 서적들은 한국사가 서기 4~5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의 공간 축소를 위해 이용한 것이 낙랑군의 위치다. 일제는 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 편찬 작업에 나섰다. 한국사의 무대에서 대륙과 해양을 잘라 버리고 ‘반도사’의 틀에 구겨 넣은 것이다. ‘조선반도사’의 상고부터 통일신라까지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집필했는데 ‘낙랑군의 군치(郡治)는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했다. 낙랑군 위치 비정의 기본이 되는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낙랑군은 고대 요동, 즉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거듭 서술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 사례만 들자.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 산하에 열구(列口)가 있는데, 열수(列水)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후한서 군국지’는 ‘열수는 요동에 있다’(列水在遼東)고 서술하고 있다. 열수가 요동에 있으니 열구현도 요동에 있고, 낙랑군도 요동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마니시 류는 ‘열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했다. ‘후한서 군국지’에 요동에 있다고 말한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주장하려면 다른 사료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사료가 있을 턱이 없다. ‘반도사’의 틀에 따라 우긴 것뿐인데 이런 논리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정설, 통설’로 행세한다. 또 ‘후한서 광무제본기’ 주석에는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在遼東)”는 구절도 있다. 낙랑군의 위치가 고대 요동이라고 쓴 중국 사료는 차고 넘친다. 반면 지금의 평양이라고 쓴 사료는 없다. 그러자 역사 해석의 기초인 문헌 사료는 팽개치고 고고학으로 도망갔다. 평양 일대에서 한나라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고고학으로 ‘낙랑=평양설’을 확립한 자는 도쿄공대 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다.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고적도보’의 편찬자로도 유명한데, 총독부 사관 추종론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이 유물들에 대한 일기장을 남겼다. 1918년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漢)나라, 낙랑 유물들을 사서 총독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문성재 박사가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라는 저서에서 이 일기들을 공개했는데, 한 대목만 인용하겠다.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 (북경)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세키노 다다시 일기).” 평양 일대에서 출토됐다는 이른바 한나라 유물들과 낙랑 유물이란 것들은 모두 이런 경로로 나온 것이다. 문헌 사료는 물론 고고학 근거도 다 무너졌는데 이른바 전문가들은 ‘낙랑=평양설’을 ‘정설, 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이 문제에 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은 의아해하면서 전문가 자체를 불신한다.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불신받는 사회는 위태하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초래한 사람들 또한 전문가들이기에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
  • “해방 직후 민초들 삶의 하루하루 그렸어요”

    “해방 직후 민초들 삶의 하루하루 그렸어요”

    “최근 현실을 보면서 삶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나 친밀도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대상에 대해 자기만의 틀로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사회에서 반목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공동체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기억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거예요.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공동체가 공유한 기억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시대의 대표 극작가 배삼식(47)이 3년 만에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한국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국립극단의 의뢰로 쓴 이번 작품의 제목은 ‘1945’(5~30일 명동예술극장)다. 제목만 들으면 떠오르는 일련의 생각들이 있을 터다.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과 급변하는 시대의 파고에 휩쓸린 사람들의 고단한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 시대극은 이러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의 삶을 좇기 마련이지만 배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냈다. 작품은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창춘, 조선행 기차를 타려고 전재민 구제소에 모인 다양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췄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며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과 미즈코를 포함해 각자 저마다 사연을 품은 15명이 작품을 이끈다. 이들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가도 피란민 중 한국 사람인 줄 알았던 일본인을 냉대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는 등 생존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가장 흔들리던 시대,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야만 했던 시기를 생각하다 1945년에 주목하게 됐어요. 그런데 1945년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앞서 그 시절을 다룬 많은 이야기는 친일이냐 반일이냐, 부역이냐 혁명이냐, 용기냐 비겁함이냐 등과 같은 관념적인 틀 안에서 만들어졌죠. 한 개인으로서 평범한 하루하루의 생활과 그 속에서 욕망하던 것들을 담은 세계를 충실하게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70여년 전 시절의 구체적인 일상을 그리는 것은 작가에겐 어쩌면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배 작가는 그 시절 삶에 생생하게 다가가기 위해 근대 작가들의 소설을 비롯해 당시 신문 기사, 구술사 등 다양한 자료의 힘을 빌렸다고 했다. 머리로 그릴 수 있는 삶의 핍진한 모습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 무모한 일이죠. 살아 보지도 않은 시절을 그린다는 것이요. 쓰고 나서도 이 작품에 대해 자신을 가지기 어려웠어요. 채만식, 염상섭, 김만선, 허준 등 당시 만주를 체험했던 선배 작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통해 상상하면서 더듬더듬 썼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창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큰 틀은 제가 썼지만, 선배들의 작업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죠.” 전작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 온 그는 앞으로도 중심에서 조금 비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다행히 예전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 정치, 경제, 사회사 같은 거대한 역사에만 갇혀 있진 않은 것 같아요. 미시사, 생활사, 문화사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연구 성과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요. 이런 성과를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때로는 불온하기도 하지만 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해요. 통계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 인간들이 욕망하는 세계를 제시하는 건 때로 학문 분야에서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앞으로도 거대 담론에서 밀려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할 생각입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길섶에서] 독립유공자의 비애/오일만 논설위원

    얼마 전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후예를 만난 적이 있다. 친인척 47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을 정도로 ‘항일 명문가’였다고 한다. 99칸의 집과 전답을 모두 팔아 일가 전체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지만 해방 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난과 냉대였다고 한다. 그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한다. “만주서 귀국한 석주 후손들은 집도 땅도 없는 남한에서 끼니조차 잇지 못했다. 생활고 때문에 중학교 이상의 교육은 사치였다. 더 힘든 것은 친일파 정권들이 석주 후손들을 연좌제로 몰아 ‘빨갱이’ 취급을 한 것이다. 고문을 받고 풍비박산 난 집안이 한둘이 아니다.” 가난과 울분 속에 독립운동가와 그 후예들은 이 땅의 최하층민으로 전락했지만 ‘친일 명문가’들은 반대로 승승장구했다. 일제에게 받은 하사금과 토지를 밑천으로 떵떵거렸고 해방 후에는 최고의 학맥과 혼맥을 통해 부와 권력을 늘려 갔다.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친일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유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이런 꼴을 당하니 누가 애국하겠나” 그의 절규가 귓가에 맴돈다.
  • [사설] ‘표절왕’ 논란 후보자에게 교육 맡길 수 있겠나

    야당이 장관 부적격 ‘신 3종 세트’로 지목하고 있는 김상곤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어제 열렸다. 예상대로 김 후보자에게는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한 질의가 집중됐다. 자유한국당 이종배 의원은 “김 후보자가 1982년 발표한 서울대 경영학과 석사 논문을 분석한 결과 일본 문헌에서 3편 119곳, 국문 3편에서 16곳 등 135곳을 출처 표시나 인용 따옴표 없이 가져다 썼다”면서 “친일 잔재 청산을 외친 김 후보자가 일본 문헌을 베낀 것은 실망스럽다”고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같은 당 이장우 의원도 “후보자가 서울대 경영학과 박사 논문에서도 80여곳을 표절하면서 논문 복사기, 표절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후보자는 “1992년의 박사 논문은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정한 것”이라며 표절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김 후보자 박사 논문을 예비조사한 데 따르면 국내 문헌 4개의 내용을 20곳에, 일본 문헌 5개를 24곳에 정확한 출처 표시 없이 사용했다. 위원회는 이런 것들이 ‘연구 부적절 행위’에 해당하나 연구윤리 위반 정도는 경미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본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석사 논문은 위원회가 구성된 2006년 이전 것이라 아예 검증을 하지 않았다. 2014년 김 후보자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던 민간단체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 따르면 박사 논문의 경우 다른 연구자의 문헌에서 따온 11개 문장을 표현만 일부 고쳐 들어갔으나 출처 표시는 마지막 문장에만 넣었다. 교육부의 지침을 적용하면 이는 명백한 표절이다. 표절보다 오히려 석·박사 논문과 27년간 한신대 교수를 지내면서 쓴 논문을 합쳐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는 사실이 심각하다는 지적도 흘려들을 수 없다. 2006년 7월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논문 표절 의혹에 휘말려 취임 18일 만에 사퇴한 적이 있다. 당시 전국교수노조위원장이던 김 후보자는 “우리나라 교육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퇴뿐”이라는 성명을 냈다. 어제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하지 않은 김 전 부총리는 논문을 80편 가까이 쓴, 김 후보자와 비교도 안 되는 건실한 학자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이런 후보자에게 교육의 백년대계를 맡길 수는 없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고종이 쓴 ‘한양공원비’… 불행했던 남산을 품었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양공원비는 서울 중구 소파로 57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여m 올라간 지점에 무심히 서 있다. 차를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다. 한양공원비의 내력을 설명하는 표석이나 안내문은 없다. 비석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한양공원은 기억이나 사건 목록에 없는 이름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08년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임대받아 조성한 위락시설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0년 공원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의 정체는 표지석이었다. 표지석 앞에 또 표지석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혼자 서 있는 상황이 이해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85년 불과 19가구 89명에 불과하던 국내 일본인 수가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1986가구 7677명으로 불었다. 열도에서 건너온 일본인 가족용 놀이터였다. 앞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네 글자는 고종의 친필글씨이다. 1910년이면 끈 떨어진 권력이지만 황제의 글씨를 함부로 길거리에 세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친필을 내렸을까. 남산땅을 야금야금 잠식한 채 곳곳에 신사와 공원을 세우는 것을 보다 못한 고종이 이곳이 조선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지명이 들어간 비석을 하사한 게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비석은 왜 이곳에 있을까. 한양공원은 공원 구실을 못했다. 일제는 공짜로 얻은 땅에 13만평 규모의 조선신궁을 짓기로 하면서 무성하던 소나무를 송두리째 뽑았다. 해방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됐다. 비석 뒷면은 곰보딱지처럼 무참하게 정으로 쪼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비석 뒷면을 놓고 말이 많았다. 비석을 세우는 데 돈을 댄 친일 부역자의 명단이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 건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사진집인 ‘은뢰’에 실린 비문 뒷면 사진을 통해 문구 대부분이 해독됐다.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에 불과했다. 한양공원비는 홀로 남산의 불행했던 과거를 품고 비바람 앞에 서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서울시의회 김문수의원 ‘2017 대한민국 유권자대상’ 수상

    서울시의회 김문수의원 ‘2017 대한민국 유권자대상’ 수상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김문수 의원(더불어민주당, 성북2)은 6월 15일 여의도 사학연금관리공단 강당에서 열린 2017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 시상식에 참석하여 유권자시민행동에서 수여하는 ‘2017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수상했다. ‘2017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은 매년 유권자의 날을 맞이하여 유권자시민행동, 직능경제인단체총연합회,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 한국시민사회연합 등 290여 시민사회단체, 직능단체, 중소상공인들이 공동 출범한 ‘유권자시민행동’이 주관하여 유권자와의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지역사회와 정책현장에서 본연의 책무에 충실하여 국민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 공직자를 표창하는 상이다. 김 의원은 골목상권 및 전통시장보호를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울시 유통업 상생협력 및 소상공인지원과 유통분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일명 SSM규제 조례)을 발의해 지역 중소상인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시장으로 하여금 대형유통기업 및 SSM에 대해 영업시간 제한 또는 의무휴업일 이행, 특정 영업품목의 제한 등의 권고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권역별 대형유통기업 등의 입점적정 비율 및 총량 공표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대형유통기업 등의 지역상권 진출을 억제하고 지역 중소상인을 보호함으로써 지역경제의 상생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제9대 서울시의회 전반기 교육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누리과정 예산 국고 지원을 강력히 촉구한 바 있으며, 친일인명사전 필사운동, 계성고교 성북구 이전(서울시 토지 매각), 학생인권 교사교권 보완 강화 등에 힘썼다. 이 날 김문수 의원은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받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며 경제민주화 실현과 지역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시민의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잠룡들의 땅… 600년 권력의 용광로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잠룡들의 땅… 600년 권력의 용광로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서울사방 서촌, 사람을 품다’ 편이 지난 3일 서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투어 참가자 30여명은 이날 10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를 출발, 통의동 백송터-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겸재 정선 생가터-청와대 무궁화동산-우당기념관-벽수산장터-노천명 가옥-윤동주 하숙집-수성동 계곡-이상의 집-통인시장-이상범 가옥-배화여대 캠벨기념관-필운대 등 순으로 2시간 30분에 걸쳐 서촌의 골목 골목을 누볐다. 이번 코스 중 서울미래유산은 청와대 무궁화동산, 우당 이회영선생기념관, 노천명 가옥, 이상의 집, 통인시장, 캠벨기념관 등 모두 6곳이다.초여름의 햇살이 따가운지 서울미래유산 로고가 찍힌 빨간색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쓴 참가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햇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이나 손목, 가방에 스카프를 맵시 있게 장식하며 멋을 냈다. 해설자 한세화 서울도시문화지도사의 구수한 입담에 탄성을 내뱉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코스는 길고 시간은 짧다 보니, 한 해설자는 지름길을 찾아 꼬불꼬불한 서촌 골목길을 내질렀고, 일행은 선두에 따라붙느라 잰걸음을 놓아야 했다. 부부, 친구, 자매 등 젊은층이 주를 이뤘고, 일본인 여성도 동행해 ‘장안의 핫플레이스’ 서촌의 인기를 실감 나게 했다.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며,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겨진다”고 갈파했다. 사람이 사는 장소와 집이 그 사람을 존재케 한다는 뜻이다. 거주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집에 대한 관념이 이전처럼 그리 절대적이진 않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서촌의 형성사를 알면 애정도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서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을 좀 아는 사람은 ‘북촌보다 서촌’이라는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작위적인 북촌에 비해 격은 좀 떨어지지만 서촌의 편안함에 점수를 더 얹는 식이다. 서촌에는 서울말을 사용하는 중류사회의 서울토박이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외국인 관광객을 안내해봐도 화려한 삼청동, 가회동보다 소박한 옥인동, 통인동에서 오히려 ‘한국을 더 많이 느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골목마다 만갈래 사연과 곡절 숨어 서촌의 이 같은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투어 참가자들에게 물어보니 북촌은 사대부와 벼슬아치 같은 지배층이 살았고, 남촌에는 퇴락한 선비들이 산 반면, 인왕산 아래 서촌에는 궁이나 관청일을 보는 아전(衙前)계층이나 고관대작의 일을 봐주는 겸인(?人)같은 중인 이하 서민층이 산 동네로 알고 있었다. 서울 걷기 열풍이 불면서 해설자들이 알려준 판에 박힌 답변이기도 하다. ‘오래 묵은 도시’서울의 정체성을 단숨에 설명하기 쉽지 않고, 뾰족한 답도 없는 게 사실이다. 서울의 역사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가치는 거대한 랜드마크가 주는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안에 녹아있는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 도시가 안고 있는 기억이 도시의 주인인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서촌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거대한 실타래’ 같다. 골목골목마다 천 갈래 만 갈래의 사연과 곡절이 숨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모습 바뀌어 인왕산 기슭 서촌에 대대로 서울의 서민층이 살았을 것이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오해다. 조선 초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최고 권력의 핵심 배후지였다. 북촌보다 한 수 위였다. 지금 서촌은 해방 후 한국전쟁의 부산물이다. 월남한 피란민과 일거리와 학교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지방민이 무작정 정착한 결과 반세기 만에 오늘의 모습으로 변했다. 서촌의 또 다른 지명인 웃대(상촌·上村)는 경복궁 서쪽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백운동과 청풍계의 물줄기가 수성동천, 옥류천과 합류하는 위쪽을 말한다. 경복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역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족 이외엔 거주가 불가했다. 태종의 셋째 아들 세종대왕의 잠저가 통인동(옛 준수방)에 있었다는 얘기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태종의 집도 그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방원과 왕위를 다툰 배다른 동생 무안대군 방번의 옛집도 자수궁터(옥인동 군인아파트)였다. 퇴위한 정종은 사직단 근처 인덕궁에서 머물렀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수성동 계곡에 있었고, 효령대군이 비운에 간 조카의 집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버린 뒤 세도가와 중인층이 야금야금 틈입했다. 서촌은 광해군의 잊혀진 영토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왕기가 있다’며 경덕궁(경희궁), 인경궁(사직동과 내자동 일대), 자수궁 등 인왕산 아래 3곳에 3개의 왕궁을 짓느라 민가 수천채를 허물고 공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인조반정의 원인을 제공했다. 누각동, 누상동, 누하동이라는 지명은 이때 지은 궁궐의 누각에서 비롯됐다. 답사단이 처음 찾아간 통의동 백송터는 영조가 태어난 창의궁이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재위 52년간 무려 247번 이곳을 참배, 바느질 무수리였던 어머니 숙빈 최씨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영조의 부마집에 입양돼 창의궁에서 자란 추사 김정희는 서촌에 흘러들어온 서당 훈장 천수경이 결성한 문학동인 송석원 시사(詩社)와 인연을 맺어 ‘송석원’이라는 바위각자를 썼다. 인왕산이 백악산과 이어지는 기슭인 지금의 청운동과 효자동, 궁정동은 장동 김씨의 옛 터이다. 안동 김씨 서울파인 장동 김씨가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누린 세도정치의 산실이다. 답사단은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에 있는 겸재 정선의 옛 집터와 그 집터에 세워진 자화상 ‘독서여가도’ 동판비를 둘러보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사치를 누렸다. 300여년전 겸재가 인왕산을 바라보던 바로 그 앵글이다. 한 지도사는 인쇄해 온 한성부 지도와 인왕제색도를 일행에게 나눠줘 이해를 도왔다. 장동 김씨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장동팔경첩도, 인왕제색도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다음 코스 궁정동 무궁화동산은 장동 김씨의 영화를 있게 한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집터이다. 척화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가 새겨진 시비와 궁정동 안가, 효자동에 살았던 시인 박목월의 연애담으로 귀가 즐거웠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 터에 세워진 국립 농학교와 맹학교를 지나 우당 이회영기념관을 만났다. 인왕산의 또 다른 이름 필운대의 주인 백사 이항복의 직계 11대손이다. 전 재산을 팔아 간도로 독립운동을 떠난 우당과 육형제를 기리는 기념관이 서촌 신교동에 자리잡은 것은 사필귀정이다.서촌 분위기를 깨는 유리건물 GS남촌리더십센터 고갯길을 내려가면 옥인동47번지 옛 벽수산장이 나타난다. 한때 이 땅의 주인이 서촌의 주인인 시절이 있었다. 장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고종 대의 외척 여흥 민씨에 이어 순종 대의 외척 해평 윤씨 등 조선 말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의 권력 각축장이었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하려던 무학대사를 물리친 정도전의 후예들이 지향한 신권(臣權)정치의 무대였다. 왕의 산, 인왕산을 차지한 신하들이 왕권을 윽박질러 당파정치, 외척정치, 세도정치를 일삼는 바람에 사화(士禍)와 반정(反正)이 되풀이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조선 권력의 배후지, 매국노가 삼켜 인왕산 기슭에서 사직단 북쪽을 일컫는 서촌은 조선초기부터 권력의 배후지이자 왕족의 세거지로 금역이었다. 장차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룡들의 사저이자 왕위에서 배척당한 왕족의 도피처였다. 성종 이후 사대부 세력이 조금씩 틈입해오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전소되면서 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가자 통제가 풀렸다. 장동 김씨, 남양 홍씨, 기계 유씨를 비롯한 경화사족들이 청풍계와 백운동, 옥류천을 중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들의 뒤를 따라 천수경을 위시한 중인들이 필운대와 인왕산동을 오가며 송석원시사를 열었다. 이들이 이룬 중인문화가 서촌의 한 축을 형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친일 매국노들의 독무대였다. 옥인동의 절반인 2만평이 윤덕영의 차지였고, 이완용도 옥인동 19번지 4000평을 매집해 못지않은 저택을 지었다. 둘 다 팔지 못할 것(나라)을 팔아서 갖지 못할 것(서촌)을 차지하고 아방궁을 지었다. 옥인동 윗동네는 윤덕영, 아랫동네는 이완용이 나눠 지배했다. 중인문화가 꽃피었던 옥류동 계곡 전체가 개인 사유지가 됐다. 지금의 서촌은 해방 후, 한국전쟁 이후 두 집의 필지를 분할한 수많은 작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것이다.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다. 송석원의 역사는 곧 서촌의 역사요, 서울의 역사이자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3대 세도정치를 편 장동 김씨에게서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여흥 민씨에게 넘어갔다가, 순종효황후의 큰아버지 해평 윤씨 윤덕영이 벽수산장을 지어 소유했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을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청사로 사용됐고, 미군과 유엔청사로 차례로 쓰였다. 프랑스풍 조선 최대의 건물, 벽수산장은 1966년 화재로 불탔고, 1973년 철거됐다. 유일한 증거가 박노수미술관이다. 청전 이상범의 제자 박노수는 집과 작품, 소장품 1000여 점을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진정한 서촌사람이다. 노주석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文대통령, 이틀 연속 ‘추경 지원사격’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을 항목별로 보면 각 정당이 평소에, 그리고 지난 대선 때 모든 대선 후보들이 필요하다고 공약한 것이니 잘 살펴보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국회 예결위원장 및 간사단, 상임위원장단과 80분간 오찬 간담회를 갖고 전날 국회 시정연설에 이어 다시 한번 추경안의 신속한 국회 처리를 호소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소속 간사와 상임위원장은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지만 자유한국당 소속 간사와 상임위원장은 불참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도 인사청문회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추경안을 집중적으로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와 국회가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고 국회에서도 여야 간에 생각이 다를 수 있다”면서도 “그래도 결론만큼은 좀 빨리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건의 사항을 문 대통령에게 전했다. 장병완 산업통상자원위원장은 “민주당이 여당이 됐으니 규제프리존법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말했다. 바른정당 홍철호 예결위 간사는 “현재 조류 인플루엔자(AI) 대책은 거점 방역 초소 중심인데 효과가 적은 것 같다”면서 “각 농가의 계사마다 차단 방역을 하면 훨씬 더 효과적이니 농가 자부담과 정부 지원으로 이를 시행하는 것을 검토해 달라”고 제안했다. 국민의당 황주홍 예결위 간사는 “재정이 소요되지 않는 공약을 실천하면 갈등도 적고 경제나 사회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이부분을 꼭 실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김영우 국방위원장은 지난 10일 미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콘서트가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로 파행된 것을 언급하며 “다시 또 고개를 드는 반미 감정에 대해 청와대가 나서서 갈등 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굉장히 큰 낭패가 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시민단체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제도에 동상 건립을 반대했던 김백일 장군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이런 일은 정말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미2사단 콘서트 현장에 있었던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에 대한 위로 전화를 권하자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문 대통령, 미2사단 콘서트 파행에 “정말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

    문 대통령, 미2사단 콘서트 파행에 “정말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미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콘서트가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로 파행됐다는 우려가 나오자 “우리가 이런 일은 정말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국회 국방위원장인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은 이날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회 상임위원장단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전했다. 김 의원은 오찬장에서 “미 2사단은 한국전쟁 때 7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부대다. 한미연합사령관과 8군사령관이 다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가수들이 노래도 못하고 울면서 무대에서 내려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부친이 6·25 당시 흥남 철수작전 때 월남했다고 전한 뒤 피란민을 군함에 태우도록 미군을 설득한 김백일 장군의 예를 들면서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김백일 장군이 군 내부에서는 아주 유능한 분이었는데 일본 육사를 나왔기 때문에 친일파로 몰렸던 것 같다”며 “그분의 동상을 거제도에 세우려고 했는데 못 하게 했다. 우리가 이런 일은 정말 잘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의원이 미2사단 콘서트 현장에 있었던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로 전화를 권하자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이 일부 주민의 반대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가동을 위한 유류반입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지적하자 문 대통령은 쪽지에다 ‘유류반입 문제’라고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식민사관의 ‘도종환 역사 검증’/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식민사관의 ‘도종환 역사 검증’/오일만 논설위원

    1919년 부임한 일제 3대 총독 사이코 마코토의 취임 일성은 새로운 역사 편찬이었다. 조선인의 독립 정신을 말살해 식민지 지배를 영구화하려는 음모였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이런 배경으로 탄생했고 1935년 조선사편수회로 확대된다. 이완용 등 친일 매국노들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조선인 학자로서 핵심 인물은 이병도 박사였다. 목적에 어긋나는 사료와 유물은 철저히 배제됐고 역사 왜곡과 유물 날조도 난무했다. 광개토대왕비의 왜곡 날조와 맥이 닿는다.고대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 뼈대도 이때 완성됐다. 조선사편수회를 뿌리로 하는 친일 사학자들은 해방 공간에서 힘을 발휘했고 이후 역사의 해석을 독점한 사학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실증사학을 내세운 이들은 스승과 다른 논리를 펴는 학문적 탐구 분위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의 해석을 틀어쥐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려다 철퇴를 맞은 국정 역사교과서 파문을 연상시킨다. 광복 이후 70여년 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 뼈대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최근 문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도종환 의원은 이른바 주류 역사학계로부터 역사 검증을 이유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도 의원은 2015년 동북아역사왜곡 특위 활동을 통해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을 중단시켰다. “47억원 예산의 동북아 고대 역사지도가 조선총독부와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따랐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강단 사학계는 “도 의원의 역사관이 그릇된 재야 사학에 경도됐다. 장관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공격했다. 도 의원은 “부실 논란 때문에 사업이 중단되자 일부 학자와 제자들이 맺은 한을 풀려고 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최근 “일부 국내 학자들이 일본 지원을 받으며 임나일본부설에 동조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7일 140여개 단체로 구성된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협의회’(미사협)가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식민사관)와 다른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장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학문은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한 걸음씩 발전하는 법이다. 주류 역사학계는 그동안 재야 사학자들이 제기한 역사 논쟁을 고의로 무시하거나 회피한 정황이 많다. 역사의 해석을 독점하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국민이 보는 앞에서 당당한 공개 토론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오일만 논설위원
  • [사설] “애국에 보수, 진보 없다”며 통합 강조한 文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애국은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이라며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통합의 가치이자 언어로 ‘애국’을 제시한 것이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 현대사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갈려 극단적인 대립과 불신을 키워 왔다. 상극의 이념 대결은 옳고 그름을 외면한 채 경멸과 증오심을 앞세워 서로를 원수 대하듯 해 왔던 게 사실이다. 촛불과 태극기로 나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도 그렇고, 지난 대선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만큼 국민 통합은 시대의 요청인 동시에 더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 대통령 말고도 통합을 외친 정치지도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통합의 당위성과 필요성만 언급했지 통합을 이뤄 낼 이데올로기, 즉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안철수의 새 정치나 안희정의 선의가 공격받고 배척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구호만 있었을 뿐 통합을 담아낼 구체적 이념이 없어서다. 이런 까닭에 문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통합할 새로운 이념으로 애국을 전면에 내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강조한 것은 더는 좌우 이념에 사로잡혀 우리의 미래가 저당잡히는 불행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 6·25전쟁에 참가했던 군인과 청년들, 베트남 참전 용사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산업화의 역군, 서해 용사와 그 가족 등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민주열사를 모두 애국자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다”고 한 것은 애국 그 자체를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편 가르기를 치유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우리 사회를 지치게 하고 훼손했던 좌와 우, 보수와 진보라는 낡은 이념은 이제 펄펄 끓는 용광로에 넣어져 애국으로 승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 못지않게 형식 또한 중요하다. 애국을 담아낼 단단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애국을 언급하면서 보훈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자를 국가가 예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국가의 의무이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첫걸음일 것이다. 언제까지 독립운동가 후손이 천대받고, 친일파가 자자손손 흥하는 비상식적인 나라가 될 것인가. 문 대통령이 차관급인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시키겠다는 것은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과 같다. 국회의 협조가 필요하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화답해야 한다.
  • 제62회 현충일 추념식…문 대통령 “이념 정치, 편 가르기 정치 청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문 대통령 “이념 정치, 편 가르기 정치 청산”

    6일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추념사를 통해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며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뉘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한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며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지만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다. 지난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하다.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며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되고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국군이 있었다. 한 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셔 명예를 지켜드리겠다”며 “베트남 참전용사의 병과 휴유장애도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로,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이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며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다. 그것이 애국”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린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분들”이라며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이 애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분들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린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 위에서 펄럭였고, 파독 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다. 서해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다”며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제도상 화해를 넘어 마음으로 화해해야 한다”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 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며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 갈등을 끝내주실 분들이고,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회가 동의해주신다면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해 위상부터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며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예순 두 번째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거룩한 영전 앞에 깊이 고개 숙입니다. 가족을 조국의 품에 바치신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가유공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습니다.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습니다. 지나온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킨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이었습니다. 항일의병부터 광복군까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태극기에 새겨졌습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굳건하게 살아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리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목숨을 바친 조국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전선을 따라 늘어선 수백 개의 고지 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우리 국군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짧았던 젊음이 조국의 땅을 넓혔습니다. 전선을 지킨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 위에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후방의 청년과 학생들도 나섰습니다.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을 날랐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철원 ‘백마고지’, 양구 ‘단장의 능선’과 ‘피의 능선’,이름 없던 산들이 용사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이 서린, 슬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전우를 그곳에 남기고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오신 호국용사들에게 눈물의 고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백골로 묻힌 용사들의 유해, 단 한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시겠습니다. 전장의 부상을 장애로 안고, 전우의 희생을 씻기지 않는 상처로 안은 채 살아가는 용사들, 그 분들이 바로 조국의 아버지들입니다. 반드시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념에 이용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도록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응당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입니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께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위에서 펄럭였습니다.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도상의 화해를 넘어서, 마음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갈등을 끝내주실 분들입니다.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보훈정책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군사원호에서 예우와 보상으로,호국유공자에서 독립, 민주유공자, 공무수행 유공자까지그 영역도 확대되어 왔습니다. 국가유공자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함께 기려야할 군경과 공무원, 의인들을 예우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들의 공적에는 많이 못 미칩니다.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국회가 동의 해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하겠습니다.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입니다.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이 동시에 애국의 길이 되는 정정당당한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다시 한 번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열사의 애국헌신을 추모하며,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6월 6일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고법,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 공소제기 명령

    허위 사실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한 혐의를 받고 있는 보수 성향 학부모단체 대표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렸지만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공소제기를 결정했다. 서울고법 형사29부(부장 김주현)는 방모(48)씨가 민족문제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사건에 대해 검찰에 공소제기를 명령했다고 24일 밝혔다. 검찰 등에 따르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등재된 것에 불만을 품은 방씨는 2014년 10월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일본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한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게시했다. 이어 방씨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인 사진에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만 오려 붙인 조작 사진으로 전 국민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결과 민족문제연구소는 해당 사진을 조작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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