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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권, 사소한 논란 키워 국민 둘로 분열… 성찰의 공간 회복 절실

    정치권, 사소한 논란 키워 국민 둘로 분열… 성찰의 공간 회복 절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원서동 74 송진우 자택에서 13발의 총성이 울렸다. 건넌방에 있던 양자 송영수, 외사촌 양신묵이 쫓아갔지만 고하는 얼굴과 심장 등에 6발의 총을 맞고 절명해 있었다. 송진우는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자 지주와 친일파가 주를 이루고 원세훈 등 독립지사들이 일부 참여한 한국민주당(한민당) 수석총무(지금의 대표최고위원)였다. 당색으로 보면 조선공산당과 대척점에 있는 극우 정치세력을 대표하지만, 송진우 개인적으로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서 충칭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던 중간파였다. 송진우는 전날 오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만난 뒤, 그날 밤 경교장의 반탁운동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좌우익은 물론 중간파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김구 등 충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미군정과 실력대결까지 주장했고 송진우는 신중론을 개진했다. 송진우는 평소 미군이 2년쯤 머물러야 한다는 ‘훈정론’을 펴 왔던 터였다. ●하나의 조국 꿈꾸던 이들 암살·투옥·납북당해 12월 27일 동아일보 등의 ‘신탁통치 가짜뉴스’로 말미암은 반탁운동은 해방정국을 급랭시켰다. 송진우 암살은 좌우 극단세력의 테러와 유혈 충돌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송진우 피살 12시간 전인 12월 29일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기관지 조선인민보가 수류탄 테러를 당했다. 해방 후 언론사에 대한 첫 테러였다. 다음날 송진우가 암살당하고, 이듬해 1월 2일 한민당 기관지 동아일보가 좌익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 6일엔 중도적 서울신문까지 습격을 당했다. 좌파 성향의 중앙신문도 당했다. 7일엔 극우 성향의 대동일보가 피습됐고, 8일엔 좌익 성향의 자유신문사 공장에 다이너마이트가 날아들었다. 1월 2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3상회의 지지로 돌변하는 성명을 내면서 대결 정국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제야 충칭 임정은 ‘신중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김규식 임정 부주석, 한국국민당의 안재홍,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그리고 임정 안의 조소앙·김원봉 등 비주류가 포함된 중간파들은 이미 정국의 안정을 위한 해결책 마련에 나서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과 한민당 내 중간파들과 개별적인 회합 끝에 7일 전체 모임을 갖고 4당 코뮤니케(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3상회의 결정에 따라) 탁치는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 자주독립 정신에 의하여 해결하고”,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 행동은 국가 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므로 절대 반대한다.” 당시 긴급하고 중요한 것은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코뮤니케에 서명한 대표들은 인민당의 이여성·김세용·김오성, 한민당의 원세훈·김병로, 국민당의 안재홍·백홍균·이승복, 공산당의 이주하·홍남표 등이었다. 하지만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8일 한민당 주류는 이를 거부했다. ‘반탁 정신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역시 코뮤니케가 마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전면 지지하는 것으로 선전했다. 해방 후 첫 남북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연합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는 그렇게 극단세력의 방해로 무산됐다. 안재홍은 그 전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탁치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 독립정신에 준하여 해결하기로 한 약정을 (한민당은) 어구가 철저치 못하다고 취소를 발표하고, (공산당 측은) 4당 전부가 3상 결정 전면지지에 기울어진 것처럼 선전하여 민중의 의혹과 불만을 조장하였다”, “4당 코뮤니케가 불발로 끝난 것은 1차적으로 한민당, 2차적으로 공산당에 책임이 있다.” 반탁과 찬탁의 대결은 해방공간을 ‘애국과 친일의 대결’에서 좌우익의 대결 구도로 바꿔 버렸다. 우파는 비상국민회의로 집결했고, 좌파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결집했다.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국가 건설을 추구하던 중간파의 공간은 좁아졌다. 대신 허약했던 이승만, 한민당 등 극우세력은 확고한 기반을 확보했고, 좌익도 중도좌파의 광범위한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렇다고 물론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국민은 극좌·극우의 패권주의가 아니라 중도파의 합작활동에 주목했다. 일제하에서는 비타협적 항일독립투쟁을 벌였고 해방 후엔 민족, 민주, 자주, 통일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데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소련과 미국에 기대 집권하려던 좌우 극단주의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해방 1년을 맞아 800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인이 추구하는 정치형태는 대중정치(대의정치) 85%, 계급독재 3%였으며, 한국인이 원하는 체제는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이었다. 앞서 1945년 11월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서울시민 978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 갈 지도자’ 조사에선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33%로 가장 앞섰다. 그 뒤가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김일성(9%), 김규식(5%)이었다. 이승만을 밀던 미군정은 1946년 3월 자문기구인 민주의원 의장을 이승만에서 김규식으로 바꿨다. 1차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자 여운형·김규식 등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간파를 지원했다. 당시 미군정은 김구·이승만 등을 극우로, 김규식·원세훈 등을 중도우파, 여운형·김성숙·장건상 등을 중도좌파, 박헌영 등을 극좌로 분류하고 있었다. 합작위원회는 7월 19일 김규식(우파 주석)·원세훈·김붕준·안재홍·최동오(이상 우파), 여운형(좌파 주석)·허헌·정노식·이강국·성주식(이상 좌파)를 대표로 출범했다. 합작 원칙을 놓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10월 4일 7원칙을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양극단이 발목을 잡았다. 한민당은 토지개혁 원칙(몰수 혹은 체감몰수 및 무상 분배)을 문제 삼아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공산당은 좌파 3개 정당의 합당 공작을 통해 합작위원회의 중도좌파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가 열리면서 다시 좌우합작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이번엔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좌우합작 활동은 사실상 좌초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감도 멀어졌다. 이후 하나의 조국을 꿈꾸던 이들은 김구처럼 암살을 당하거나, 안재홍·조소앙·원세훈·조완구·김약수·김원봉처럼 납북됐거나 북행했고, 남에선 김창숙·김성숙·장건상처럼 끝없는 감옥살이를 견뎌야 했다. ●중간 지대 없애 억지·폭력에 의지하게 만들어 가짜뉴스에서 시작된 신탁통치 논란은 한국인을 좌와 우로 단절시켰다. 38선에 중립지대가 없었던 것처럼, 좌우 극단 이외의 중간지대를 없애 버렸다. 그 후유증은 해방정국과 남북의 극우·극좌 정권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성찰과 대화 대신 억지와 폭력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정치권은 사소한 논란조차 증폭시켜 국론과 국민을 둘로 분열시킨다. 가짜뉴스로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거짓 선동으로 대중을 동원한다.●檢개혁·조국사퇴 집회 공감 합친 수치도 97.9% ‘조국 사태’는 73년 전의 분열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실례였다. 8월 말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때부터 장관에 임명되던 9월 초까지 리얼미터의 조사에서 찬반 응답자는 전체의 93.7%(8월 23일), 96.8%(9월 8일)이었다. 10월 초 조국의 장관직 사퇴 여부를 묻는 조사에서 찬반 응답자는 전체의 96.8%였다. 서초동의 검찰개혁 집회와 광화문의 조국 사퇴 집회에 대한 공감도를 합친 수치도 전체의 97.9%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에도 중간지대는 사라졌다. 긍정과 부정을 합치면 8월 셋째 주(96.8%), 9월 셋째 주(97.2%), 10월 둘째 주(97.5%) 모두 100%에 가까웠다. 앞선 대통령의 집권 3년차 2분기의 경우 김영삼 69%, 김대중 64%, 노무현 87%, 이명박 90%, 박근혜 90%였다. 이런 현상도 나타났다. 이른바 ‘빤쓰 목사’가 “대한민국에서 보수의 중흥을 이끄는 지도자”(뉴욕타임스 아시아판)로 언급됐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그가 벌이는 ‘문재인 퇴진’ 농성장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른바 진보 논객들은 성찰이 아니라 진흙탕 싸움에 몰두했다. 사실 ‘조국 문제’는 좌건 우건 정쟁과 시비에 앞서 성찰의 문제였다. 지금 우리에겐 숨쉴 틈이 없다. 이편 아니면 저편이어야 한다. 생각할 공간도 없다. 옳고 그름을 두부모 자르듯 쪼개야 한다. 숨쉬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공간은 과연 회복될 수 있을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역사 다큐 ‘백년전쟁’/전경하 논설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원래 명칭은 반(反)민족문제연구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공격으로 겨우 1년여 뒤인 1949년 해체됐고, 반민특위 판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수록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이 1940년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2년 뒤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으로 편입, 1944년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는 이유에서다.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당시 법원에 게재금지·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혈서로 지원했다는 1939년도 신문 기사도 제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2년 11월 박 전 대통령을 다른 각도에서 재비판했다. ‘한강의 기적’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 정책 덕분이라는 것이다. 수출주도형 전환의 근거로 1978년 미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및 비밀 해제된 미 기밀보고서 등을 인용해 역사 다큐로 제작했다. ‘백년전쟁-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라는 제목이었다. 이 다큐는 2013년 1월 시민방송 RTV를 통해 방송되면서 그해 출범한 박근혜 정권의 역사 논쟁에 불을 댕겼다. 결국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과 함께 그해 7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객관성, 공정성, 명예훼손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도 유죄가 유지됐다. 그런데 대법원은 어제 방송 내용의 공정성 등을 심의할 때 매체별, 지역별,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방통심위의 제재가 부당하다며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백년전쟁은 공적 인물과 공적 관심사를 반영해 시청자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라면서 “사자의 명예 존중 규정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역사적 논쟁은 피할 수 없으며 인류의 삶과 문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건전한 추진력이 된다고도 했다. 친일 논란은 아직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했다. 광복 72년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이런 상황 탓에 일본이 한국에 뻣뻣한 태도를 보이나 싶어 떨떠름하다. lark3@seoul.co.kr
  • 대법, 이승만·박정희 비판 다큐 ‘표현의 자유’로 인정했다

    대법, 이승만·박정희 비판 다큐 ‘표현의 자유’로 인정했다

    전합 13명 중 7명 “공정·균형 위반 아냐” 박근혜 정부 방통위서 징계·제재 처분 시민방송, 재심 청구 기각 되자 소송 제기 ‘명예훼손’ 기소 다큐 감독·PD 무죄 확정2013년 박근혜 정부 때 방송통신위원회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제재한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기존의 역사적 평가와 다른 해석을 제기했다고 해서 행정기관이 제재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청자 제작 TV채널 시민방송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방통위의 제재가 정당했다는 반대 의견(6명)도 만만치 않았지만, 전합 13명 중 7명(다수 의견)이 “이 사건 각 방송은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2012년 11월 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병합한 1910년부터 100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 4부작으로 기획된 독립 다큐다. 같은 시공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한 화면에 함께 보여 주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이 중 이 전 대통령 편인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 편 ‘프레이저보고서’ 영상이 유튜브 등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독립 다큐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시민방송에서도 이 두 영상은 각각 29차례, 26차례에 걸쳐 방영됐다. 하지만 이 영상으로 논란이 일자 방통위는 2013년 8월 “공정성과 객관성, 명예훼손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방송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징계 조치하고 관련 사실을 방송을 통해 고지하라고 명령했다. 방통위는 “이 전 대통령이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내용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 등 미국 입장의 사료와 부정적인 기사·인터뷰만을 인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또 여대생, 백인 여성들과 데이트를 즐겼다며 사생활을 거론하거나 독립자금을 횡령한 인물로 묘사해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도 “그는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내용의 프레이저보고서(1978년 미국 의회에 보고된 문건) 등 부정적 보고서를 인용한 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했다.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였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을 언급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봤다. 이에 시민방송은 방통위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날 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안철상·이동원 등 대법관 6명도 같은 논리를 폈다. 앞서 이 전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다큐 감독 김모(52)씨와 프로듀서 최모(52)씨는 지난 6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그대로 확정됐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이승만·박정희, 친일파로 묘사한 다큐 ‘백년전쟁’ 제재는 부당”

    “이승만·박정희, 친일파로 묘사한 다큐 ‘백년전쟁’ 제재는 부당”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재한 것은 부당하다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6년 만의 결론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가 방송통신위원회를 상대로 “제재조치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방송이 공정성·객관성·균형성 유지의무 및 사자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다큐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알려져 사실상 주류적 지위를 점하는 역사적 사실과 해석에 의문을 제기해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라면서 “그 자체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한다”면서 편향적인 내용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어서 “역사적 인물 평가는 각자 가치관·역사관에 따라 때로는 상반되게 나타나고, 역사적 논쟁은 인류의 삶과 문화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건전한 추진력이 된다”며 “방송내용 중 역사적 평가 대상이 되는 공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사실이 적시됐어도 심의 규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방송된 백년전쟁은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 그 적절성을 두고 진보·보수 세력 간 논쟁을 촉발했다. 다큐는 이 전 대통령이 기회주의자로서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친일·공산주의자로 미국에 굴종했으며 한국 경제성장의 업적을 자신의 몫으로 가로챘다고 해석했다. 방통위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내용에 대해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뤘다”며 프로그램 관계자를 징계·경고하고 이를 방송으로 알리라고 명령했다. 앞서 1·2심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혹 제기에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재구성해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며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6년만에 오명 벗은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대법 “제재 부당”

    6년만에 오명 벗은 이승만·박정희 다큐 ‘백년전쟁’...대법 “제재 부당”

    대법 “객관성·공정성 위반 안해”이 전 대통령 명예훼손도 무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을 단독으로 점령해달라는 내용의 러브레터를 보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 때 한국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였다.” 2012년 11월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은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 미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등을 인용한 이 다큐가 유튜브 등에도 올라오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소위 ‘대박’을 쳤다. 2014년 5월까지 누적 관람객이 500만명(민족문제연구소 추산)을 넘었다.이 다큐를 놓고 진보-보수 역사 논란이 불거졌고, 소송까지 이어졌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에 대해 한쪽 면만 보여줬다 해도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백년전쟁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부터 2011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 4부작으로 기획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다. “왜 우리나라 역사 다큐는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를 다룰 때 친일파를 제외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한 화면에서 함께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2012년 개봉한 1부는 1945년 해방까지를 다뤘다. 이후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을 조명한 다큐가 나왔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제작비 2500만원을 들인 이 다큐는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시청자 제작 TV 채널 시민방송에서도 이 전 대통령 편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 전 대통령 편 ‘프레이저 보고서’가 각각 29회, 26회 방영됐다. 하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2013년 8월 시민방송에서 방영한 이 두 영상이 공정성과 객관성, 명예훼손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방송 프로그램 관계자들을 징계·경고 조치하고 관련 사실을 방송을 통해 고지하라고 명령했다. 시민방송은 방통위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자 소송을 냈다. ‘두 얼굴의 이승만’ 영상에는 이 전 대통령의 초대 대통령 선출 과정 등을 1948년 CIA 문서 등을 통해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방통위는 “이 전 대통령이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CIA 문서, “이 전 대통령은 한인 학교에서 반일 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을 부인했다”는 내용을 실은 미 지역 신문 등을 인용한 것을 문제 삼았다. 또 “이 전 대통령이 피 튀기는 테러까지 동원해 국민회를 장악하고 현란한 부동산 재테크에 착수했다”, “나은 마흔 여섯에 스물 두살짜리 여대생과 여행도 하고 틈만 나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잤다. 미국 수사관들은 그를 기소해버렸다”는 영상 속 나레이션도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방송해 시청자를 혼동케 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 편인 ‘프레이저 보고서’ 영상도 방통위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봤다. 이 영상에서는 1978년 미국 의회에 보고된 프레이저 보고서 등이 인용됐는데,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중장년층은 박 전 대통령이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수출주도형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이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동료들을 전부 밀고해서 죽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는 미국 기밀보고서 내용도 영상에 소개됐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업적을 가로챈 인물로만 묘사한 것으로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 방법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후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한 시민방송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은 연달아 방통위 편을 들었다. 1심은 “새로운 관점이나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정 입장에 유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 조장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희화화했다”고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이에 시민방송 측은 “역사 다큐는 특정한 시각을 전제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달리 해석될 가능성이나 입장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방송의 공정성·객관성을 갖추지 않은 근거로 봐선 안 된다”는 취지로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역시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고, 관련 당사자 의견을 균형있게 반영할 의무는 해당 방송이 역사 다큐 형식을 취했어도 면제되지 않는다”고 1심 판단을 유지했다. 이후 2015년 8월 대법원에 상고된 이 사건은 대법원 1부에 배당됐다가 지난 1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한편, 이 전 대통령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이 다큐 감독 김모(52)씨와 프로듀서 최모(52)씨는 지난 6월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1심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는데 김씨에 대해선 배심원 9명 중 8명이, 최씨는 7명이 무죄로 판단한 바 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차 서울의 문학 4(외솔 최현배의 사주오 두부장수)’ 편이 지난 16일 수필의 주무대인 서대문구 행촌동과 외솔선생이 반평생을 보낸 신촌 연세대 캠퍼스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했다. 먼저 3·1독립선언 기념탑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독립문을 차례로 돌아봤다. 탐방 다음날인 11월 17일이 마침 순국선열 추모제 80주년이어서 뜻깊은 방문이 됐다. 천주교 무악동 성당은 서울에 5개 있는 빈민사목 성당이다. 단아한 ‘ㄷ자’형 한옥 성당은 안방과 마루를 튼 공간에 제대 역할을 하는 교자상이 놓였고, 건넌방에 십자가상이 설치된 소박한 초기교회의 모습이다. 석교교회~영천시장 길은 작품 속 두부장수가 외치고 다니던 길처럼 정겨운 옛 골목이다. 일행은 독립문공원 극동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7737번 버스를 타고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하차했다. 외솔선생을 기념하는 외솔관과 선생의 흉상을 보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수필 ‘사주오 두부장수’와 유형유산인 석교교회, 영천시장 등 3개였다. 해설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첫 데뷔한 김윤정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맡았다.해마다 한글날이면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지은 ‘한글날 노래’가 방방곡곡 울려 퍼진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 노래를 지은 외솔은 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고 지킨 ‘수호신’이다. 외솔은 외로운 한 그루 소나무라는 뜻이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외솔 최현배 평전’에서 “외솔이라는 자호가 선생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외솔은 조선의 사육신 성삼문의 단심가에서 취한 호”라고 풀이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단심가 중 일편단심에서 ‘붉을 단(丹)’자를 얻었듯 외솔은 단심가 중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됐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의 낙락장송에서 ‘소나무 송(松)’을 취했다. 선생의 임은 조국이었으며, 한글이 곧 목숨이라는 각오로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실제 선생은 숱한 지식인들이 친일 변절했을 때 한글을 지킨 최고의 국어학자인 동시에 독립지사였으며,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생은 “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라면서 나라흥성의 법칙이 말과 글을 지키는 데 있다고 갈파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저항해 우리말과 한글을 유지하는 말과 글을 통한 독립투쟁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한자 전용과 영어공용어 채택 주장에 맞서 한글전용, 한글 가로쓰기, 한글 자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외솔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견지에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 한흰샘 주시경(1876~1914)의 수제자였다. 외솔은 “나는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정신에 깊은 자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나는 주 스승에게 배우고 또 배워, 가위 그 당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되었다. …나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오늘날까지 갈고닦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 이 사명을 다한 뒤에는 스승에게로 돌아가서 복명을 할 작정이다”고 술회했다. 실제 숨진 뒤 평소의 바람대로 스승이 잠든 경기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묘소 옆에 안장됐다. 그러나 후학들이 무심함 탓에 스승은 2013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제자는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돼 떨어졌다. 살아서 함께했고, 죽어서도 함께했던 사제를 떼논 것이다. 주시경 선생의 묘비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세종대왕 다음으로 한글 연구에 공헌한’ 주시경 선생은 언어가 민족의 얼이라고 생각한 언어민족주의자였다. 문하에는 최현배·김두봉·김윤경·이윤재·이병기·신명균·권덕규·이상훈·이극로·김선기 등 기라성 같은 애제자가 있었다. ‘외솔 최현배 평전’에 따르면 체제는 달랐지만 남한의 최현배, 북한의 김두봉이 중심이 돼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었다. 부산 동래출신 김두봉(1889~1961?)은 울산 염포 출신 최현배보다 5살 연상이었으나 절친한 친구사이로 지냈다. 이 둘은 스승을 쫓아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 대종교에 입교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을 지낸 김두봉은 1958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할 때까지 북한의 한글전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두 분이 없었더라면 미국과 소련 두 절대강국 치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외솔의 3대 저술은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이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유학하던 32살 때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집필, 일약 유명인사가 된 외솔은 귀국하자마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어국문학과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강의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대다수가 친일로 전향했을 때도 외솔은 끝까지 신념을 지켜 학교에서 쫓겨났다. 복직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우리말본’과 ‘한글갈’을 저술했다. 우리말본은 우리말 문법 연구의 분수령을 이루는 역저이며 한글갈은 훈민정음에 관한 역사적 문제와 한글의 이론적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구한 노작이다. 외솔 선생은 1970년 3월 23일 입원 중이던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77살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평생 동지 노산 이은상(1903~1982)은 ‘마지막 드리는 노래- 외솔 최현배 님 영 앞에’를 낭송했다. “고난도 파란도 많은/이 땅에 오셔 칠십 칠년/얼, 말, 글 겨레의 성벽/한 몸으로 지키시더니/붓 놓고 입 다무시고/어디로 멀리 가시옵니까./바람찬 거친 들에/뚜벅뚜벅 걸어간 자취/바람은 가고 없어도/발자욱만은 뚜렷하구려/이 길로 가야 한다고/일러주신 노정표외다./나라 잃은 그 시절에도/조국의 말과 글이 같이 살았고…금 글자로 새기오리다/해마다 솔씨 떨어져/자라난 다복솔 보소/생전에 외솔일러니/인제는 외롭지 않소/새 솔밭 돌아다보며/웃고 가시옵소서.” 외솔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시조시인 노산은 옥중에서 “미처 다 못 배워/인제사 여기 와서/ㄹ(리을)자를 배웁니다/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제 ‘말’ 지켜라/제 ‘글’ 지켜라/제 ‘얼’ 붙잡고…”라는 ‘평생을 배우고도’라는 글을 남겼다. 외솔은 늘 검은 두루마기, 흰 고무신에 머리는 중 마냥 빡빡 깎은 시골 생원 같은 모습이었다. 미끈한 양복에, 학자나 예술가 풍채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이 실망은 갈수록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경모의 정이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사주오 두부장수’에 나타나 있는 소박한 정겨움의 실체이다. 외솔의 숨결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늘 쓰는 도시락, 반올림, 마름모꼴, 꽃잎, 짝수와 홀수, 지름 같은 숱한 고운 말을 만드신 분이다.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한글자판에도 선생의 고혈이 스며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31회 서울역 뒷동네-서계동 ■집결장소: 11월 23일(토) 오전 10시 서울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

    후손들 문중 소유 생가 서당서 26년 살아 “의사 부인 노년에 병마와 굶주림에 신음” 형언하기 힘든 곤궁한 사정 신문에 실려 장승원 후손들은 권세 부리고 부귀 누려박상진 의사의 사망과 함께 그 많던 재산은 남의 손으로 넘어갔고 부모와 부인, 후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대대로 겪었다. 일본 밀정들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의사의 아들과 손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 사상범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취업은 엄두도 내지 못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씨에 따르면 후손들은 의사의 사후 문중 소유인 울산 북구 송정동 생가 옆의 낡은 서당에서 26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 1957년 부산으로 이사해 부암동의 방 세 칸짜리 집에서 12식구가 살며 닭을 길러 내다 판 돈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당감동 골짜기로 옮겨 가 살았는데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멀건 죽, 우거지 밥과 개떡을 먹으며 비참하게 살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의 고생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생존해 있는 의사의 손자며느리(박씨의 어머니) 이갑석 할머니는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양식이 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의사 후손들의 어려운 사정이 부산일보 1961년 3월 5일 자에 실리기도 했다. 의사의 부인 최영백 여사가 당시 81세의 나이에 먹을 양식도 없이 냉방에서 병마와 굶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날마다 먹어야 했던 죽에 질린 할머니(의사의 며느리)가 1982년 돌아가실 때까지 굶을지라도 죽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박 의사처럼 극한의 가난과 싸우면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일제의 권력에 빌붙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권세를 부리고 부귀를 누렸다. 대한광복회가 처단한 장승원의 후손들도 그랬다. 장승원의 장남 장길상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일본인 자본가들이 은행을 설립할 때 투자해 거부가 된 친일파이자 악덕 지주였다. 둘째 장직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 인사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셋째 아들 장택상은 미군정 수도경찰청장으로 부임해 친일 경찰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 장승원의 원한을 품고 있었다. 광복회의 재건을 두고 볼 수 없다며 경찰력을 동원해 방해했다는 것이 박씨는 주장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64년 광복회원의 후손들이 충남 천안삼거리공원에 순국한 광복회원 7인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는데 모종의 방해를 받아 중단됐다고 한다. 모종의 방해라는 것이 바로 장택상 일족의 짓임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장택상이 사망하고 두 달 후인 1969년 10월에야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런 점은 분명해진다. 그런 장택상은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박상진 의사 가문과 장승원 가문의 악연은 계속됐다. 장택상의 딸 장병혜는 1990년대 초 ‘역사를 고발한 자, 그를 고발한다’ 등의 책을 펴내면서 광복회를 떼강도 집단, 박 의사를 파렴치한 살인강도라고 썼다. “무슨 놈의 애국지사가 일본 사람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동포를 죽이는 애국투사가 있겠는가. 박상진을 애국투사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판결문에 기재된 대로 살인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살인교사를 한 일당을 독립투사로 변신시키기 위한 활동”이라고 쓰기도 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일부 학자가 안중근 의사 등의 독립투쟁을 테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등의 책을 발간하기도 한 장병혜는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아시아 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지소미아 연장 강요 말라” 미국규탄대회…文, 원칙론으로 日압박

    “지소미아 연장 강요 말라” 미국규탄대회…文, 원칙론으로 日압박

    지소미아 종료 일주일 앞두고“지소미아 종료는 국민 명령”“美, 한반도 평화에는 무관심…군사동맹으로 한국 결박 속셈”트럼프, 방위비 500% 인상 6조 요구美국방, 韓국방에 지소미아 중요성 압박文, 美국방에 ‘지소미아 종료’ 재확인명분 속 원인촉발 日의 결자해지 강조文 “한미일 지속적 노력” 여지 남겨한국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경제보복 조치로 촉발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16일 일본과의 지소미아 연장을 압박하면서 한국 정부에 거액의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이 규탄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등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꾸려진 ‘민중공동행동’과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은 이날 서울 종로구 남인사마당에서 규탄 대회를 열어 “미국은 지소미아 연장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미국은 한반도 평화에는 무관심하면서 변화하는 정세 속에 한국을 한미 군사동맹으로 결박하겠다는 속셈을 전방위적으로 노골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지소미아 연장 강요, 방위비 분담금 인상 강요, 한미동맹 위기관리 각서 개정 시도 등이 미국의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며 “(한미 간) 종속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달 18∼19일 서울에서 제11차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3차 회의가 열리는 점을 언급하며 “국민의 96%가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은 인상 요구를 중단하라”라고 거듭 요구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내년 방위비 분담금을 올해 1조 389억원보다 약 500% 늘어난 50억 달러(약 5조 8000억 원)로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고 CNN이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엄미경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지소미아 종료와 방위비 분담 저지는 국민의 요구이자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모임인 ‘아베규탄 시민행동’도 이날 오후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 규탄, 친일 적폐 청산 10차 촛불 문화제’를 열어 지소미아의 완전 종료를 촉구했다. 시민행동은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미국은 협정 연장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으며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 판결 취지를 훼손하는 타협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시민행동은 “지소미아 종료는 국민의 명령”이라며 정부에 단호한 대응과 지소미아 종료를 촉구하는 의미를 살려 협정문을 형상화한 문서를 찢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청와대에서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참석 차 방한한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지소미아와 관련해 ‘안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일본에게 군사정보를 공유하기 어렵다’는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서 에스퍼 장관은 이날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회의 후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지소미아 같은 경우에는 특히 전시상황에서 생각을 했을 때 한미일 간에 효과적으로 또 적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중요하다”며 지소미아 유지를 간접적으로 촉구했었다. 사실상 문 대통령이 오는 23일 0시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에스퍼 장관은 한국을 방문해 지소미아 유지를 압박한 데 대해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철회 없이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 재검토는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미국의 요청을 거부한 모양새가 됐다.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이 ‘결자해지’ 하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원칙론을 고수한 것은 ‘명분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버티지 못해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하면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세운 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결과를 낳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진다.일본은 지난 7월 4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에 대해 불만을 품고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 핵심소재 3종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1차 경제보복을 단행했다. 이어 8월 2일에는 수출 절차 간소화 등 수출 우대 혜택을 주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대상국 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2차 경제보복을 감행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의 자동갱신기한인 8월 24일 도래 직전인 8월 22일 청와대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고 일본과의 지소미아에 대해 연장 없이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지소미아는 한국과 일본이 2016년에 체결해 1년마다 연장하고 있으며 어느 쪽이 매년 8월 24일까지만 통보하면 협정을 파기할 수 있다. 당시 회의 결과를 발표했던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일본 정부가 수출관리 우대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서 “양국 안전보장 협력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안보상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계속 하는 것을 우리나라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전날 에스퍼 장관의 만남에서 “한미일 간 안보 협력도 중요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언급해 극적인 봉합 가능성을 열어뒀다.또 갈라진 주말 도심 집회서초동선 ‘검찰 개혁’ 촉구광화문에선 보수단체 집회 한편, 주말 서울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모임이 주축이 된 진보집회와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보수집회가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각각 열렸다. 시민 모임인 ‘끝까지 검찰개혁’ 측은 이날 오후 6시부터 서울중앙지검 부근에서 시민 참여 문화제를 열고 조 전 장관 일가를 겨냥한 과잉 수사를 비판하며 검찰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끝까지 조국 수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설치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반면,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는 이날 정오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국민대회’를 열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며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특수단·특조위 투트랙… 세월호 남은 의혹 해소될까

    특수단·특조위 투트랙… 세월호 남은 의혹 해소될까

    임관혁 단장 “기존 수사했던 부분도 재수사”5년이 지났는데도 해소되지 않는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검찰이 특별수사단을 꾸리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특수단과 국가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가 같은 사안을 들여다보게 됐다. 수사권을 가진 검찰의 합류로 묻혀버린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7일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진상을 규명 중인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해방 이후 국가적으로 특조위가 구성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48년 친일 청산을 위해 꾸려진 ‘반민족행위특조위’(반민특위)와 2015년 1기 세월호참사 특조위 때와 다른 점은 검찰도 특수단을 설치하고 특조위 활동에 힘을 실었다는 점이다. 내년 12월 초까지 조사를 벌일 예정인 사회적참사 특조위는 특수단과 사실상 ‘공동운명체’가 돼 진상규명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검찰도 올해 가습기살균제 수사 때 사회적참사 특조위와 협조 체계를 갖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월호 참사 전면 재수사에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참사 특조위에는 부부장급 검사 1명이 파견돼 있다. 특수단 출범 전이지만 이날 임관혁(안산지청장) 수사단장은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고검 청사로 출근했다. 전날 윤석열 검찰총장은 임 단장에게 “모든 의혹을 남김없이 정리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특수단은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고 정치적 수사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현판식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는 11일 임 단장이 전면 재수사에 임하는 각오 등을 언론에 밝히면서 본격 출범을 알릴 계획이다. 임 단장은 서울동부지검에서 수사한 ‘1기 특조위 활동 방해 사건’, 서울중앙지검의 ‘참사 당일 대통령 7시간 행적 사건’ 수사 기록과 함께 사회적참사 특조위가 지난 4월과 지난달 각각 수사 요청한 자료를 먼저 살펴보면서 퍼즐을 맞출 것으로 전해졌다. 참사 당일 구조 수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추가 수사 요청도 이르면 다음 주중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임 단장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조사가 많이 이뤄졌지만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도 (조사가) 덜 된 게 있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다”면서 “수사권을 가진 검찰이 한 번쯤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만큼 역사적 의의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누구를 겨냥한 (정치적) 수사는 전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임 단장은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등 기존 검찰 수사도 “문제제기가 있다면 당연히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수단에 합류하는 용성진 청주지검 영동지청장은 대통령 7시간 행적 사건의 주임검사였다. 사회적참사 특조위도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진행 중이다. 박병우 사회적참사 특조위 진상규명국장은 이날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조사 진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조사 중에 분명한 위법 사실이 있으면 (특수단에)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독립운동가 후손 보금자리 만든 서대문

    독립운동가 후손 보금자리 만든 서대문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나라사랑채 2호를 공급할 수 있어 더 의미가 큽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에 실패해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 후손이 기득권 세력이 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 후손은 생활고를 겪는 역설적인 현실을 보면 늘 가슴이 아픕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나라사랑채 2호에서 열린 입주식에서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이같이 말하자 현장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3개 동 지상 5층 24가구 규모의 나라사랑채 2호는 SH공사가 매입한 신축 건물을 구가 공급하고 유지·관리한다. 당초 16가구 규모로 계획했으나 실태조사에서 필요성을 확인하고 24가구로 확대했다. 전용면적 54~63㎡에 방 3개로 구성됐으며 임대료는 주변 시세의 30~50% 수준이다. 나라사랑채는 독립·민주유공자와 유가족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다. 서대문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이 있는 지역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전국의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독립·민주유공자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있다. 2017년 8월 천연동에 나라사랑채 1호를 조성하고 14가구가 입주한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서대문구는 지난 4월부터 한 달 동안 신청 가구를 방문해 생활 실태를 살피고 5월 24일 독립·민주 관련 기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입주자 선정심의위원회를 개최해 입주자를 선정했다. 수요가 높아 나라사랑채 3호 조성을 검토 중이다. 문 구청장은 “유공자와 후손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서대문구가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기강해이 트라우마’ 문체부 “자회사 비리까지 해명하라니…”

    ‘기강해이 트라우마’ 문체부 “자회사 비리까지 해명하라니…”

    문화진흥·예술인복지재단 잇따라 비리 “기타기관 비위 해명은 과해” 내부 불만 본부 책임·해명에 정확한 기준은 없어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과는 지난달 15일 한 언론 보도에 대해 ‘공공기관 기강 해이 보도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입장을 알려 드립니다’란 제목의 해명 자료를 냈다. 문체부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자회사 ‘한국문화진흥’의 비위에 관한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문화진흥이 운영하던 골프장에서 성추행·성희롱 사건이 수년에 걸쳐 이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문화진흥은 또 공사대금 지급과 관련한 소송에서 패소하자 골프장 회원에게서 사채를 빌려 메운 뒤 해당 회원에게 부당 특혜를 주기도 했다. 예술정책과 관계자는 이와 관련, “기타 공공기관 자회사의 직원 비위지만, 문체부 역시 관리·감독 책임이 있다. 본부가 직접 알리는 게 옳다고 생각해 해명 자료를 냈다”고 설명했다. 문체부 소속·공공기관 비리가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불거지며 논란이 일었다.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지난달 4일 낸 자료에 따르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국고보조금으로 부적절하게 기념품을 대량 구입해 지적을 받았다. 재단은 국고보조금으로 받은 예산 가운데 일부를 세부사업 및 비목 조정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사용했다. 홍보 기념품을 ‘재단 운영지원’ 사업비가 아닌 ‘불공정 관행 개선 지원’ 사업비로 해 8건에 4608만원가량 썼다. 기념품 손톱깎이 구매에 1380만원, 보조배터리 구매에 742만원, 볼펜 구매에 665만원 등 이해하기 어려운 명세도 있었다. 기념품 배부처도 불분명하고, 기념품 관리 대장도 없었으며, 관리도 부실했다. 문체부는 이와 관련, 재단 측에 기관주의 조치했다. 올 9월 현재 문체부 전체 직원은 2852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본부 직원은 667명, 나머지 2185여명이 18개 소속기관 직원이다. 이는 공기업과 준정부 기관, 그리고 한국문화정보원, 세종학당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같은 기타 공공기관 32곳은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문체부 본부 직원이 18개 소속기관과 32개 공공기관 전체를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체부 기획혁신담당관 측은 이와 관련, “다른 부처와 본부 인원을 비교하면 문체부는 본부 직원에 비해 소속·공공기관이 다소 많은 편”이라면서 “지도·관리·감독 책임이 본부에 있다고는 하지만, 본부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문체부 대변인실은 이와 관련, “따로 기준을 두고 있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문체부에 파급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후속 조치가 필요한지에 따라 해당 부서와 논의하고 나서 설명·해명 자료를 낸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문체부 본부에 화살이 지나치게 돌아간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문체부 한 직원은 “본부가 기강 해이를 바로잡는 데에 노력하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기타 공공기관의 자회사 비리에 관해서도 해명 자료를 낸 건 다소 과하다고 본다”면서 “언론에서 보도하면 본부가 자료를 내 사과하고 보도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데, 이런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소속·공공기관뿐 아니라 가끔 ‘복병’이 튀어나와 문체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한모 전 문체부 국장이 이런 사례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장으로 일하다 총리실 한 공공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광복절 전날 “지금은 친일을 하는 것이 애국이다”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불렀다. 여기에다 “이런 미개한 나라 구더기들과 뒤섞여 살아야 한다니…” 등 비하성 짙은 표현도 문제가 됐다. 현 정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도 다수 올렸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감찰반에 소환돼 4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수차례 글을 올려 급기야 지난달 20일 국가공무원법 56조(성실 의무)와 63조(품위 유지) 위반으로 파면됐다. 이후 보수 언론에서 그의 반정권 표현을 높게 평가하는 인터뷰를 잇달아 내 논란을 키웠다. 문체부 한 직원은 “글의 표현이 워낙 센 데다 너무 자극적”이라면서 “본인 정치색을 두고 뭐라 하긴 어렵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그런 정치색을 표현한 것은 다소 과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문체부 전 국장’이란 타이틀을 계속 붙여 기사를 내고 있어 당혹스럽다”고 덧붙였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취임 직후 “문체부 직원들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지난 7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에도 “직원들이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일로써 정체성이나 자존심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소통을 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 기자들과 만나서도 “지난 4월 장관 취임해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조직이 굉장히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최근에는 많이 회복됐다. 예전과 비교하면 90% 정도까지 좋아진 것 같다”고도 했다. 잇따라 알려진 소속·공공기관 비리는 문체부의 사기와 직결하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다. 연이어 터지는 비리가 이런 박 장관의 노력에 재를 뿌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문체부 한 직원은 이와 관련, “박 장관이 직원 사기 진작을 위해 직원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항상 고충을 경청하고 공무원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하자고 허심탄회하게 말하곤 했다”면서 “여러 비리 사건이 직원들 사기 진작에 악영향을 주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북 매체 “이총리 일왕 즉위식 참석, 사대굴종 배신행위”

    북 매체 “이총리 일왕 즉위식 참석, 사대굴종 배신행위”

    북한 매체가 일왕 즉위식에 이낙연 국무총리를 축하사절로 보낸 우리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북한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2일 “일제에 대한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친일적폐 청산 투쟁에 떨쳐나선 남조선 민심에 역행하는 용납 못 할 배신행위”라고 지적했다. 특히 “남조선 당국의 추악한 행위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결정을 철회하고 일본과의 갈등 해소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사대굴종과 외세의존 정책의 집중적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일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사무친 원한은 섬나라 족속들이 아무리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어도 풀릴 수 없다”며 “과거 죄악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데 대한 남조선 민심의 요구를 짓밟으면서 오만무례하고 횡포하기 짝이 없는 왜나라 족속들과 관계개선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민족의 수치이고 우롱”이라고 주장했다. 이 총리는 지난달 22일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에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한양대 교수 “위안부 연구자들, 민족주의적 거짓말“…학생회 강력반발

    한양대 교수 “위안부 연구자들, 민족주의적 거짓말“…학생회 강력반발

    한양대 한 한국계 미국인 교수가 강의 중 “위안부 연구자들은 민족주의적 거짓말쟁이”라는 등의 발언을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다. 학생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교수는 3년 전에도 위안부 비하 발언으로 단과대학 차원의 경고를 받았다. 1일 한양대 모 학과 학생회에 따르면 A교수는 이번 학기 전공수업에서 “위안부를 연구하는 한국 역사학자들은 정량적 연구를 활용하지 않고 5∼10명의 최악 사례에 주목해 전체 위안부를 일반화한다”며 “민족주의적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또한 “위안부와 같은 민감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 수가 몇이었는지, 그중 좋지 못한 대우를 받은 수는 몇인지를 밝히라”라고도 했다. A교수는 친일 논란을 빚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등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를 수업시간에 인용하며 “한국 사학자들이 민족주의에 기반해 조작해낸, 진짜 현실이 아닌 ‘합의된 현실’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책”이라고 호평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학과 학생회는 지난달 30일 대자보를 통해 “반성의 태도와 개선의 의지가 없다”며 A교수에게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학생회는 영어로 진행된 강의 녹취록을 확보했으며 교내 인권센터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학생회는 “(문제가 불거지자) 교수가 면담을 통해 ‘다양한 방법론을 보여줘야 하는 강의에서 위안부에 대한 연구들을 단지 언급한 것뿐’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학문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편향적 시각으로 인권 침해적 발언과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강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모독”이라고 반박했다. 한양대 측은 “이번 사안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자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고, 절차와 원칙에 따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A교수는 2016년 자신의 위안부 관련 발언이 문제가 된 당시 단과대 학장의 구두경고를 받고 나서 이를 수용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새 여주의 노래 가사 공모

    새 여주의 노래 가사 공모

    작곡가 김동진의 친일 논란으로 여주의 노래가 지난 2월말부터 사용 중단된 가운데 여주시가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 위해 가사 공모전을 연다고 31일 밝혔다. 여주의 노래 가사 공모는 오는 11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 49일 간 진행되며, 1차 심사위원 심사와 2차 시민투표 심사를 통해 최종 당선작이 결정된다. 전 국민 누구나 참여가능하며 입상자에게는 최우수 150만원, 우수 100만원, 장려 50만원(각 1명)의 시상금이 주어진다. 여주시 홈페이지에서 신청서식을 다운받아 ‘자랑스러운 여주인이 만들어가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행복도시 여주’라는 주제에 맞도록 가사를 작성하여 시청 시민소통담당관실에 방문 또는 우편과 이메일로 접수하면 된다. 시 관계자는 “이번 가사 공모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쉽고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여주의 노래 가사가 탄생되기를 바란다”며 “시민참여와 공감을 바탕으로 더욱 의미있는 여주의 노래 개정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시는 기존 여주의 노래 작곡가 김동진의 친일인명사전등재로 인해 올해 2월 말부터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시에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93%가 개정에 찬성했으며 75%가 새로운 곡에 맞는 노랫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미당 친일 행적에 방치됐던 봉산산방… 뜰에는 쓸쓸함이

    [미래유산 톡톡] 미당 친일 행적에 방치됐던 봉산산방… 뜰에는 쓸쓸함이

    1970년 예술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창작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사당동(현 남현동)에 예술인마을이 조성됐고 미당 서정주는 25년 동안 살았던 마포구 공덕동을 떠나 황순원, 이원수, 이해랑 등과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았지”라는 서정주의 말처럼 기반시설이 없어 초반에 고생도 했지만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집을 짓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온 ‘봉산산방’을 지었다. 이곳에서 서정주는 관악산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 듣기를 즐겼다. 초기의 개척민들은 하나둘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만 서정주는 이 집에서 2000년까지 30여년을 살게 된다. 6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1972년)부터 15번째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년)까지 10권의 시집을 발표하는 등 서정주 후반기 대부분의 주옥같은 시들이 이 집에서 탄생한다. 서정주는 2000년 ‘겨울 어느 날의 늙은 아내와 나’를 발표하는데 이 시가 그의 유작이 되고, 10월 10일 63년을 해로한 아내 방옥숙을 떠나보낸다. 서정주는 70여일 후 함박눈이 내리는 12월 24일 아내를 따라 떠났다.서울시는 2001년 봉산산방을 미당 기념관으로 조성해 보존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70여년에 걸쳐 1000여편의 시를 남긴 ‘대시인’이었지만 ‘친일’이라는 그의 발자취는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히게 되고 봉산산방은 10여년간 방치된다. 그러다 2010년 원형 복원 및 보수공사를 시작하고, 동국대에 보관하고 있던 유품 중 60여점을 다시 가져와 전시하며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2012년 3월 개관했다. 말년에 서정주가 사용한 돋보기와 안경, 파이프, 여권 등의 소품과 한복과 모자, 가방, 지팡이 등 다양한 패션 소품, 생전 사진 및 시들도 전시돼 있어 시인의 체취와 일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부엌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시인이 마지막 마시던 맥주캔은 이곳이 실제 생활의 터전이며 현장이었음을 보여 준다. 뜰 앞에 내려서니 주인 없는 마당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황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부일장학회 설립자 유족, 나경원 등 고소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 씨의 유족이 30일 고인을 ‘친일 인사’라고 주장한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과 나경원 원내대표, 민경욱 의원 등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유족은 “곽 의원 등은 근거 없이 고인을 ‘골수 친일파’,‘친일 행각을 벌인 자’라고 비난해 고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한국당이 고인을 친일파로 모는 이유는 언론 장악과 개인 자산 형성을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선친의 재산을 빼앗은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라며 “유족은 장학회를 뺏긴 한을 안고 산다”고 주장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김경협 의원 “친일파 재산 끝까지 쫓는다” 친일재산조사위 부활법 발의

    김경협 의원 “친일파 재산 끝까지 쫓는다” 친일재산조사위 부활법 발의

    더불어민주당 김경협(경기 부천시 원미갑) 의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친일재산귀속법)을 발의한다. 29일 김경협 의원에 따르면 ‘친일재산귀속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반민족 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해 2005년 제정됐다. 법에 따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을 비롯해 일본인 명의 재산 조사 등 업무를 수행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임기는 4년이었는데 대통령 승인 하에 1회에 한해 2년 연장 가능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 당시부터 연장불허 방침을 정해 임기 연장 없이 2010년에 종료됐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활동 기간 동안 친일파 168명 토지 1300만㎡, 시가 2000억원 상당을 환수했다. 위원회가 끝난 이후 법무부가 일부 귀속업무를 수행했으나 실적은 2014년과 2015년 각각 1건씩, 총 5억 4300만원에 그쳤고 현재 사실상 귀속업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일본인 명의 재산 국가귀속 업무는 조달청에서 수행하고 있다. 과거 친일재산조사위원회와 달리 자료요구 권한이 한정적이고 법조인·사학자 등 전문 인력이 부족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친일재산귀속법 제정안’은 기존 법안을 폐기하고 새롭게 제정한다. 새 제정안은 친일 재산을 제보한 사람에 대한 포상금 규정을 신설했고 위원회 임기는 4년이다. 대통령 승인으로 2년마다 횟수 제한 없이 연장할 수 있다. 김경협 의원은 “이명박 정부 당시 친일재산조사위가 충분히 활동하지 못하고 종료돼 현재 친일재산 귀속업무는 전혀 없고 일본인 명의 귀속재산 조사도 원활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친일재산조사위 부활을 통해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근간을 바로세우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한일문제는 문재인씨 탓” 日기자 발언 내보낸 KBS 사과

    “한일문제는 문재인씨 탓” 日기자 발언 내보낸 KBS 사과

    산케이 기자 “친일의 뿌리 박근혜 정권이 해온 일 바로잡으려고 해”조선일보 기자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돈이 과거사에 대한 배상” KBS 1TV 시사 프로그램 ‘시사 직격’이 국내외 보수 언론 종사자들의 한일관계 관련 주장을 그대로 내보냈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사과했다. ‘시사 직격’은 지난 25일 ‘한일관계, 인식과 이해 2부작, 2편’을 통해 양국의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들의 대화를 방송했다. 이 방송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 산케이신문 구보타 루리코 해설위원은 “한일관계가 어려움에 봉착한 원인은 문재인 씨의 역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보타 위원은 “문재인 정권은 친일의 뿌리를 가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해온 일을 외교적 실패로 규정하고 그걸 무너뜨리고 바로잡으려고 한다”며 “반일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신념은 바뀔 리가 없다. 그런 신념이 있는 한 한일 대화는 불가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선우정 조선일보 부국장도 방송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돈이 과거사에 대한 배상이라는 생각을 발했다. 방송 이후 해당 프로그램 게시판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인 씨’라고 부르는 일본 극우 인사의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한 KBS가 공영방송인지 의심스럽다며 거세게 항의했다.‘시사 직격’ 제작진은 28일 공식 입장을 통해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1965년 청구권협정, 2018년 대법원 판결, 한일관계 갈등의 원인 부분에 있어서 50분이라는 편성 시간으로 인해 충분한 공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제작진은 “산케이신문은 우편향된 아베 정권과 같은 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한일관계에 대한 아베 정부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는 산케이신문과 같은 보수우익 매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구보타 위원의 ‘문재인씨’라는 호칭과 관련해서는 “일본에서는 ‘~씨’라는 표현이 격식을 갖춘 존칭어로 사용된다. 아베 총리를 지칭할 때도 출연자 모두 ‘~씨’라는 표현을 총리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했다”며 “다만 제작진이 자막을 사용하면서 국민 정서를 더 고려하여 신중하게 사용하지 못한 점은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제작진은 마지막으로 “일부 발언을 가지고 비판에 비판이 이어지는 상황이 안타깝다.전체 프로그램을 보시면 조금 이해가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며 “앞으로 방송을 제작하면서 한일관계에 대한 문제를 더 깊이 있게 성찰하고 책임감을 갖겠다”고 약속했다. 진행자인 임재성 변호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한국 매체에서는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 지식인들의 발언이 선별돼 소개되지만, 현실을 온전히 인식할 필요도 있다. 극단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에 ‘대면’할 필요가 있다”면서 “‘반론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 것 아니냐’, ‘산케이-조선일보 기자들의 입장만이 부각되었다’라는 비판은 새기겠다”고 사과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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