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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

    1ㆍ4후퇴때 월남해 온 인사가 이런 말을 한다. 『내려와서 가관이다 싶은게 하나 있더군. 북에서 망나니 파렴치범이 남에 와서 반공투사로 저명인사가 돼 있더란 말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반공투사」더러 말하라 한다면 반공운동 하다보니 망나니 파렴치 행위도 더러 있었던 것 아니냐 할 수 있겠고. 그건 일제와 광복된 조국 사이에도 해당되는 것이 세상사다. 일제 때 그 앞잡이 노릇 하던 사람들이 광복된 조국에서도 현달하여 떵떵거린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 아닌가. 독립유공자도 그렇다. 꼭 끼여야 할 사람이 빠진 대신 끼이지 않아도 될 사람이 혹 끼였을지도 모르는 일. ◆얼마전 프랑스 낭트시에서 발견된 독립운동 사료는 그 점에서 뜻이 깊다. 빠진 곳을 보충하는 한편 새로운 사실도 알려 줄 것이기 때문. 더구나 그것은 내국인의 기술이나 일본 관헌의 보고서 혹은 그밖의 문서가 아닌 객관적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임정 요원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 썼다,감리교의 웰치목사는 친일파였다... 등등의 사실이 중간검토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건 그것에 「전폭적」 신뢰를 보낼 일만은 아니다. 가령 홍범화장군의 사망지가 소련이냐 중국이냐 하는 논쟁이 왜 일어나는가. 전봉준장군의 태생지가 전주냐 태인이냐 정읍이냐 고창이냐 하는 논의가 왜 일어나는가. 기술이나 고증에 주관ㆍ오류가 개재하기 때문이다. 또 똑같은 하나의 사상도 그를 대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시각의 차이에서 달라질 수 있는 법. 이 문서에는 여운형이 『한국인 사이에 인기 없는 인물』로 돼 있다는데 그 표현에 과연 주관은 개재 안됐던 것일까. ◆어쨌든 낭트문서의 전모는 기다려진다.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바른 고증과 취사선택. 「웰치목사 친일파」 같은 충격적 내용이 또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 불 낭트보관소의 문서 임시연구 새사료 확인

    ◎박국사편찬위원장 【낭트(프랑스) 연합】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및 기타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을 기록한 당시 프랑스 영사관의 기록문서가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 등 한국관계자들에 의해 27일 낭트소재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확인됐다. 상해주재 프랑스 영사관의 보관문서로 1919년부터 1930년사이 프랑스 조계내 한국인들의 활동상황및 관찰보고서 등이 포함된 2백13페이지 분량의 이 관련문서는 제3국인 프랑스 당국의 한국관련 기록문서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일본및 독립운동 관련 개인자료에 주로 의존해온 임시정부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부여해 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날 낭트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를 검토한 박위원장은 『정확한 평가는 검토가 끝나야 알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임시정부 활동과 관련한 프랑스측 기록문서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또 비교적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당국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검토결과가 크게 주목된다고 말했다. 49년 중국공산정권 수립후 스위스 영사관(상해)으로 옮겨졌다 62년 프랑스로 이송된 이 문서에는 또 김구 이승만 김원봉 등 이미 독립운동사에서 알려진 인물외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명들이 상당수 등장,관계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박위원장은 당시 독립운동관련 인물들의 행적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남에 따라 학계에 논란이 돼온 독립,친일인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한국인을 둘러싼 프랑스및 일본 영사관간의 「경찰관할권」분야가 대부분으로 한국인및 단체에 대한 실태,관찰보고및 「한국인 범죄자」 처벌과 관련한 일본영사관과의 교신 등으로 구성돼 있어 임시정부 및 조선공산당 관계자 등 당시 프랑스 조계내 한국인의 움직임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김원봉및 윤해,상해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등에 대한 동태와 함께 첩자로 몰려 암살한 왕선빈에 대한 일본측의 부검기록 등이나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왕상빈이 형인 왕선빈에 보낸 편지에는 『첩자인 김창수(김구의 별명)를 믿지 말라. 김에게 폭탄을 준 적이 없다』는 대목도 포함돼 있다.
  • 임정수립 71주년 기념식/광복후 처음 정부주관 행사

    ◎문창범선생등 18명에 훈장 추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제71주년 기념식이 13일 상오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재경광복회원,3부요인,정당대표,전직주요인사,각계대표등 2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렸다. 올해 처음으로 정부행사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서 상해임시정부 교통부총장을 지낸 문창범선생에게 건국훈장대통령장,정인보선생등 납북인사 5명을 포함한 17명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이 각각 추서됐다. 이날 훈장이 추서된 독립 유공자는 그동안 공적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분단국가로서의 제약때문에 포상을 받지 못하다가 민족동질성회복,국민대화합,민족정기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첫번째 임정수립 기념행사에서 그 유족들이 포상을 받게 된 것이다. 강영훈국무총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3·1독립운동의 결정체로서 71년전 오늘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퇴하는 날까지 나라잃은 겨레의 유일한 정통정부로서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지적하고 『임시정부는 민족사상 처음으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기틀을 확립했다』고 말했다. □건국훈장 포상자 공적 ▲문창범(1870∼1934,건국훈장 대통령장)=1908년 만주 노령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피선. 1919년 대한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해삼위에서 3·1독립만세운동 주도. 같은해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총장피선. ▲정인보(1885∼납북,건국훈장 국민장)=1910년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등과 동제사조직,조국광복운동. 1919년 귀국,연희전문대 교수로 재직중 1926년 「6·10만세운동」과 중앙고보학생들의 「5인독서회」등 학생운동 지원. ▲김의한(1900∼납북,〃)=1919년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에 가입,중국으로 망명. 1928년 한국청년동맹 재정위원으로 활동. 1932년 임정 항주로 이전시 김구등과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임정활동참가. ▲오영선(1896∼1939,〃)=1919년 상해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1931년11월까지 임정국무원비서장·국무원·법무총장·군무부장·외무부장역임. ▲이관식(1883∼1972,〃)=1907년 육군부위로 근무중 군대가 해산되자 유인식·김동등과 경북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구국계몽활동. ▲김일곤(1912∼1943,〃)=1938년 조선의용대 입대후 각지에서 항일전에 참전. 1943년 중국 호북성에서 일본군 탱크 2대를 파괴하는등 활약하다 순국. ▲김상덕(1891∼납북,〃)=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회원과 2·8독립선언후 체포돼 7개월의 금고형받음. 1920년 중국으로 망명,28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추진. 42년 임시의정원의원·임정선전위원으로 활동. ▲이광민(1900∼1945,〃)=1915년 만주 신흥학교수료. 1924년 전만통일회주비회 발기회에 군정서 대표로 활동. ▲이병화(1906∼1952,〃)=1921년 통의부에 가입,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순사살해. ▲이종건(1887∼1958,〃)=1923년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재통일을위해 10개단체를 통합,정의부를 조직,중앙행정위원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징역 7년. ▲최이붕(1897∼1973,〃)=1919년 간도에서 철혈광복단 청년단조직, 조선은행자금 15만원탈취해 무기구입,북로군정서에제공. ▲윤 해(1888∼미상,〃)=1915년 만주에서 간민회조직,활동. 1918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창립,부회장으로 활동. ▲명제세(1885∼납북,〃)=1919년 이동령 주도로 상해서 불변단조직시 총무로 활동. 박은식 등과 함께 제2독립선언문 발표. ▲장철호(1892∼1945,〃)=1928년 국민부중대장. 1919년 조선혁명군 소대장으로 일군과 항전. ▲김형빈(1894∼1943,〃)=1919년 독립단에 입단,친일파 김하룡처단,군자금모집활동. ▲박건웅(1906∼납북,〃)=1932년 조선의열단대표로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결성,조선인군관학교에서 혁명투사양성. ▲장도빈(1888∼1963,〃)=1908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취임,애국 계몽운동 전개. ▲조지영(1916∼1950,〃)=1937년 중국군에 배속돼 대일전에 참전. 1942년 임정군무부 비서·군사과장 역임.
  • 이찬구의원 발언 규탄/이북 5도민회 1천명

    이북5도민회 등 실향민 1천여멍은 5일 하오1시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앞에 모여 지난2일 실향민의 상당수는 친일파라고 말한 평민당 이찬구의원의 대정부질의와 관련,평민당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북한당국이 싫어하는 실향민이 남한측 대표에 끼어있어 남북대화가 진척이 안된다는 이의원의 발언은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겪어온 1천만 실향민에 대한 모독』이라며 『또다른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이의원의 무책임한 발언을 즉각 취소ㆍ사과할 것』을 주장했다.
  • 이 의원 「친일파」 발언/평민,속기록 삭제키로

    평민당은 5일 총재단회의를 열고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당소속 이찬구의원의 대정부질문중 문제가 되고 있는 『월남민중 상당수가 친일파』라는 부분을 삭제키로 결정했다.
  • 「월남인사 친일파」 국회발언 파문/평민 이찬구 의원

    ◎“남북 협상대표에 포함,대화 그르쳐”/이북 5도민ㆍ실향민 단체서 해명ㆍ사과 요구/국회의장단ㆍ민자서도 긴급대책 마련나서 평민당 이찬구의원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질문을 통해 월남실향민의 일부가 친일파였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국회의장단과 민자당이 3일 대책을 논의할 방침인데다 이북5도민회 등 월남 실향민 단체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어 이의원의 발언이 정치쟁점화될 전망이다. 민자당의 한 고위당국자는 2일 밤 『이의원의 발언은 대다수 실향민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내용인 만큼 당사자인 이의원이 발언경위 등에 대해 해명하고 이를 시정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게 일고 있다』고 말하고 『국회의장단으로부터 이의원 발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3일 상오 의장단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민자당도 이의원 발언을 중시,3일 통추위 전체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발언경위와 사과를 받는 문제 등 대책을 논의할 방침이며 50여개 실향민단체들도 이의원이 적절한 해명과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규탄대회 등을 가질 움직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이의원은 2일 하오 통일ㆍ외교ㆍ안보분야 대정부질문도중 『우리측의 일부 남북협상대표중 북한측이 가장 혐오하는 극좌성격의 월남인사들이 포함돼 있어 협상을 그르쳤다』며 『월남인사 중에는 과거 친일파인사들도 포함돼 있다』고 말해 여야간에 2∼3분간 고함과 야유가 오갔었다. 이의원은 이어 민자당 이광로의원의 속기록삭제 요구에 대해 『월남인사의 일부분이 친일파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거듭 주장했었다.
  • 「김정일 후계」 반대자 대거 수용/북한 정치범 왜 늘어났나

    ◎전 부수상 박금철ㆍ이근모 등 포함/군 고위층ㆍ북송교포까지 대상에/하루 5시간 잠자며 “종신 강제노역”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는 1956년에서 58년에 걸친 「8월종파」 사건 연루자와 가족들을 특정지역에 집단수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후 1958년에서 60년에 걸쳐 실시된 중앙당 집중지도와 1966년에서 70년에 걸쳐 계속된 주민등록사업 과정에서 반혁명 적대분자로 「위해하다고 지목되는 자」들을 색출,수용함으로써 본격화 됐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1개리 정도의 지역에 설치됐던 정치범 집단수용소의 규모는 점차 확대,수개 리를 합친 1개군 절반정도의 크기로 늘어났으며 그 수도 크게 증가했다. 특히 1973년부터 김정일 후계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치투쟁조직인 3대혁명 소조활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그 수용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규모도 더욱 확대됐다. 80년 10월 노동당 6차대회 이후에는 김정일이 당권을 장악,반대자 또는 방해자들을 「반당종파」라는 딱지를 붙여 계속 숙청했고 이 결과 82년 현재 8개지역에 약 10만5천여명이 사상개조사업이라는 명분아래 사회와 격리된 채 종신강제노역에 처해진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된 바에 의하면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는 1월 현재 지난 82년 보다 그 수와 수용인원에서 각각 50%씩 늘어난 12개지역 15만2천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북한당국은 이들 12개지역 수용소에 대해 비밀번호를 부여,관리하고 있음도 새롭게 확인됐다. 이번에 확인된 북한의 정치범 집단수용소 12개지역(지도와 별표참조)중 함경북도 온성군과 회령군 경성군에 있는 것은 전 부수상 박금철을 비롯,전 당비서 김도만ㆍ김광협,전 당정치국후보위원 유장식 등 주로 김일성ㆍ김정일 체제에 반대 또는 비판적 입장을 보였던 반당ㆍ반혁명분자를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자강도의 희천시ㆍ동신군등에는 전 국가보위부장 김병하,전 제7집단군사령관 김양춘,전 제3집단군사령관 정병갑 등 군부와 권력기관내의 불평ㆍ불만분자 등을 주로 수용하고 있으며 함경남도 요덕군,정평군 덕성군에는 대부분 휴전선에 인접한 황해도 강원도 주민을 비롯해 친일ㆍ반동분자로 분류된 자들을 집단이주시켜 사회와 격리해 놓고 있다. 이밖에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 있는 집단수용소에는 유사시 평양에 대한 위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주로 부화범등 잡범과 경미한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다. 정치범 집단수용소의 수용대상 및 수용생활 관리실태 등은 다음과 같다. ▷수용대상◁ 처음에는 주로 반당ㆍ종파분자 또는 반혁명분자ㆍ악질지주ㆍ친일파ㆍ종교인 등과 그 가족들이었으나 점차 노동당의 간부나 당원으로 있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정치인과 그 가족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희생된 정치적 피해자들이 수용인원의 주류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귀국한 북송교포 가운데 북한체제를 비판한 사람들도 상당수 수용되어 있다. ▷수용소생활◁ 수용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새벽 4시에 기상,6시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작업장에 들어가 작업량을 부여받고 7시부터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하오 8시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이들이 하는 작업은 주로 석탄과 광물을 캐는 갱도작업과 벌목,개간 등 중노동이며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하오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자기비판을 위주로 한 학습시간을 갖고 난뒤 취침에 들어간다. 이같은 일과는 휴일도 없이 연중 계속된다. 이들이 주거하는 주택은 통나무로 엮어 만든 귀틀집(4평정도)이나 토굴을 파서 살고 있으며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통나무로 만든 집단주택에 합숙토록 하고 있다. ▷관리 및 운영실태◁ 국가보위부가 수용소의 모든 업무를 총괄 관장,조정 통제하고 있으나 경비업무는 사회안전부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김정일 체제강화를 위해 김정일이 직접 실질적인 모든 권한행사를 총괄하고 있다. 정치범과 그 가족이 일단 수용되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는 공민증을 우선 압류하고 모든 기본권의 박탈은 물론 친지의 면회,외부와의 서신연락 등은 완전히 차단한다. 집단수용소는 표준시설로 외곽철책선,경계초소,내부철책선으로 탈주의 방지와 외부와의 격리를 목적으로 한 방호구조물을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는 관리소ㆍ수용막사ㆍ집단농장ㆍ사상학습소를두어 자급자족체계와 사상개조를 위한 기본적 요소만을 구비하고 있으며 처형장도 설치되어 있다. □수용중인 주요인사 ●성명:김도만 숙청 연월:1967.3 당시의직책:당비서 숙청 이유:당정책에 불만 ●성명:박금철 숙청 연월:1967.4 당시의직책:당정치위원,부수상 숙청 이유:당정책에 불만 ●성명:김창봉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부수상,민족보위부장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김양춘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7집단군 사령관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정병갑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3집단군 사령관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허봉학 숙청 연월:1969.1 당시의직책:대남사업총국장 숙청 이유:종파,유일사상 체계문란 ●성명:김광협 숙청 연월:1970.11 당시의직책:당비서 숙청 이유:반당ㆍ종파분자 ●성명:유장식 숙청 연월:1975.9 당시의직책:당정치국후보위원비서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동규 숙청 연월:1977.10 당시의직책:부주석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병하 숙청 연월:1982.1 당시의직책:국가보위부장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김경련 숙청 연월:1982.1 당시의직책:부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홍성룡 숙청 연월:1986.2 당시의직책:부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성명:이근모(?) 숙청 연월:1988.12 당시의직책:총리 숙청 이유:김정일후계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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