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과거 청산과 인권/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과거사를 둘러싼 논쟁이 정계를 시끄럽게 달구고 있다.과거 청산의 본질은 과거의 일을 정확히 조사하여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일각에서는 국가가 나서지 말고 학계가 이 일을 맡으라고 하지만,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과거사’란 지금까지의 보통의 방법으로는 밝힐 수 없었던 일들,우리 역사의 일부를 구성하면서도 역사학적으로는 규명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말한다.규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누구나 알듯이,진실 규명이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진실 규명을 방해한 것은 권력이다.일제시대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광복 후 그와 관련된 집단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좌우익의 이념대립과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학살이나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은 당시의 집권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규명할 수 없었다.방해받지 말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과거 청산의 시작이므로,이 일은 정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계만이 과거사 청산을 감당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작업이 학문 영역에 속하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학계는 진실 규명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과거 청산은 학문적 대상일 뿐 아니라 민족적 대상이고 정치적 대상이다.과거사는 역사의 영역에 속하지만,정계가 이토록 시끄러운 것은 과거 청산이 정치적 행위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그렇다.과거 청산은 현재의 정치권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청산하려는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이다.
그러나 과거 청산을 단지 정치 행위에 머물게 해서는 그 의미가 반감된다.과거 청산은 기본적으로 인권의 차원에 속하는 일이다.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고 살해당한 자들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의무이자 역사적 책무이며,무엇보다도 인권의 존귀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본다면,과거 청산은 당면 과제임이 분명하다.이제 어떻게 조사하고 평가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로 남아 있다.정치권은 국회 밖에 독립기구를 설치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그러나 국가기구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다시 대립하고 있다.기능 수행의 면에서 볼 때,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고 중립적 입장에서 실사구시의 태도로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는 국가기구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국회와 정부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행·재정적 지원만 하면 된다.
조사 범위도 논란 대상이지만,그것은 과거 청산의 목적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다.과거 청산의 목적이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반인간적 행위와 반민족적 행위를 가리는 것이므로,그 대상은 스스로 명확해진다.가까운 시기부터 본다면,고문과 치사 등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각종 인권 유린 행위,좌우 대립시기와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집단 학살 등 반인간적 행위,그리고 일제시대의 친일과 반민족행위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친북용공행위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그 행위는 인권과 직접 관련된 사항이 아니다.오히려 친북용공행위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이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그것은 대개 위의 세 범주에 포함된다.
이제 과거사 청산은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을 타고 있다.광복 이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이 기회를 살려 과거의 끈을 과감하게 단절하고,진실의 발판 위에 민족 정기와 화해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자.
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