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후예들/정범준 지음
외화 ‘마지막 황제’는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청나라 황손의 이야기를 담아 감명을 준 영화다. 봉건 군주제가 무너지고 그 후손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애환은 비단 중국만의 이야기일까?
대한제국이 일제 침탈로 무너진 뒤 그 황손들 또한 심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격변하는 한반도 역사의 최전선에서 온갖 질곡을 견뎌온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의 근현대사였으나 지금껏 ‘역사’로 대접받지 못한 채 풍문으로 떠돌아 다녔다.
‘제국의 후예들’(정범준 지음, 황소자리 펴냄)은 한반도 근현대사의 발화점이자 심장부인 대한제국 황실 이야기다. 망국에 대한 책임의 일차적 표적이 되었지만, 실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자리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을 있었던 모습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한반도 근현대사의 빈 페이지를 채우자는 의도를 갖고 있다.
프리랜서 르포라이터로 활동해온 저자는 수백권의 관련서와 당대 신문, 잡지를 샅샅이 살피고 관련 인물들을 만나 취재하면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복원해내고자 했다. 책에서 새롭게 조명되는 인물들은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과 의친왕 이강, 영친왕비 이방자, 딸 덕혜옹주, 영친왕의 아들 이구 등이다. 거기에 어려서 황태자 이은의 간택단자를 받았다는 이유로 평생 수절하며 살아야 했던 민갑완도 비중있게 소개했다.
영친왕 이은은 순종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를, 우리나라 역사상 단 하나뿐인 황태자였다. 이 때문에 역사의 풍랑이 일 때마다 가장 먼저 그 예봉을 얻어맞았다. 어려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그는 일제의 속박과 친일파 황태자라는 오명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광복 후에도 정치 권력자들의 이해에 의해 귀국이 한없이 늦춰졌고, 결국 귀국의 기쁨을 한 마디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병이 들어서야 이 땅을 밟았다.
영친왕과 평생을 함께한 이방자 역시 시대의 모진 바람을 전 생애로 감내한 인물이다. 정략결혼이긴 했으나 부군의 조국을 자신의 나라로 받아들이려던 그녀의 구애를 조국은 모른척했고, 일본 황족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평생에 걸쳐 ‘왕비’ 이방자에 대한 의심을 낳는 빌미가 됐다.
의친왕 이강은 무수한 풍문과 논란의 진원지였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주색으로 허송세월했다고 폄하했지만, 당시 대다수의 민중들은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고종이 고명딸로 귀여워했던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의 죽음, 일본인과의 정략결혼, 불행한 생활이 불러온 심리적 고통으로 오랫동안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한으로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MIT를 나온, 총명하고 패기만만한 청년 건축가로 장성했지만, 조국에 돌아온 이후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매몰차게 버린 전 부인 줄리아만이 남편마저 떠난 낙선재의 정신을 오롯이 지켰다. 벽안의 황세자비 줄리아는 이 땅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 황실의 여인이었다.
저자는 책 집필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의도에 의해 왜곡된 기록에서 과장과 거짓을 걷어내고자 했다. 일례로 1995년 한 방송사가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를 쓴 혼다 세쓰코의 말에 의지해 이방자의 ‘석녀설’을 사실인 것처럼 몰아갔으나, 저자가 직접 세쓰코와 접촉한 결과 방송이 근거없는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광복 후 황실재산이 정부에 의해 대부분 몰수되면서 황실 후예들의 삶은 고단해졌고, 언론과 대중들은 ‘거지가 된 왕자’와 같은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흥미를 가졌다. 이 때문에 많은 후손들이 세상의 이목을 멀리하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저자가 우직하게 기록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둠 속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던 과거 이야기가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듯하다.3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