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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무/만주 일대서 16년간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독립군 정예요원… 일 기관 습격·친일파 처단/「흑하사변」이후 국내잠입 활동… 35세때 순국 「5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성상 이진무(1900∼1934년5월18일)선생은 짧은 생애를 조국에 아낌없이 바친 애국자였다. 19세때 만주땅에서 항일투쟁에 처음 나선 이후 일제에 붙잡혀 35세로 순국하기까지 16년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른 투사였던 것이다. 평북 정주 출신의 선생은 체구가 비록 작고 애꾸눈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열화와 같이 격노하는 성격이었다.만주일대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할 때 「일목장군」이라 불렸다.또한 중국의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1백8명 두령 가운데 한사람인 흑선풍 이규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만주의 흑선풍」이란 별명도 있었다. 선생이 독립의식을 확고하게 갖추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이었다.3·1운동이후 일제가 심한 감시와 탄압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고 독립의식에 눈을 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선생은 우선 만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총영에 가입,독립군으로 무장활동을 시작했다.광복군총영은 임정이 만주지역의 교민통치와 군사훈련을 위해 설치한 독립군의 정예부대였다. 선생은 광복군총영이 1920년8월 미국 상·하의원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하는데 맞춰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침략원흉을 처단키로 하는 계획을 세운데 따라 처음 무장활동에 참가했다.광복군총영은 이 계획에서 서울과 평양·해주·신의주등 5곳을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삼아 일제기관을 폭파하기로 했었다. 신의주로 잠입한 선생은 신의주역과 호텔에 폭탄을 던지는등 맹활약을 펼쳤다.선생은 이어 동지들과 함께 선천군에서 일경과 일제의 주구 몇사람을 제거한 뒤 신의주감옥을 습격하려다 일제에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만주로 되돌아왔다. 선생을 포함한 독립군들은 그러나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일제를 대거 무찌르는 대승을 거둔 이후 1922∼1923년까지 2∼3년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독립군들은 「복수」에 돌입한 일제 관동군의 대대적 공세를 피해 노령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레닌의 정책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고 거의 소멸할 뻔한 처지에까지 몰린 것이다.레닌의 「코민테른」은 당초 독립군을 받아들였다가 일제의 눈치를 보고 방침을 전환,무장해제를 이유로 독립군을 공격했다. 후세에 자유시참변(흑하사변)으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수많은 동지를 잃는 아픔을 맛봤다.어쩔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새롭게 진열을 정비,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자연스레 통의부에 가입한 선생은 4개 중대로 편성된 통의부 의용군에 소속됐다. 선생은 통의부가 국내진입작전을 지시한데 따라 통의부 2중대소속으로 1924년 동지 수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군자금모금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곧 1925년 통의부가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대한광정단·대한독립단·노동친목단·학우회등 다른 독립단체와 통합,정부성격의 정의부로 확대됨에 따라 정위부 5중대로 소속을 옮기고 국내진입작전을 수차례 펼쳤다. 선생은이어 철산군으로 들어와 일경주재소를 습격,일경 4명을 사살하는등 1927년까지 국내에서 일경과 독립군 밀고자 처단등의 활동을 끊임없이 벌였다. 선생은 이후 정위부와 참의부·신민부등 독립운동단체가 서로 모여 민족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자 예하인 조선혁명군에 가담,잠시 활동을 같이 하다 동료들과 1929년 재만조선인 혁명군을 결성,독자적 독립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그러던중 1932년 안동에서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나라를 되믿기 위해 몸을 바친 선생의 염원은 미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좌우합작 실패의 두안(새로쓰는 한국현대사:15)

    ◎“미군정을 인민위 넘기라” 「민전」 일방발표/방헌영,우익 수용못할 「5원칙」 내세워 결렬/미군정고문 버치 개입… 친미세력구축 노력/중도우 김규식·여운형 「합작의 꿈」 무산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이 1946년5월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과 소련,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남북의 정치세력은 단독정부수립을 향해 나아갔다.비록 2차회담이 19 47년 열리긴 했지만 그 회의는 예정된 수순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이처럼 남북분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대응은 어떠했나. 외세에 영합해 정파이익 찾기에 앞장선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민족통일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도 등장했다.남쪽에서 가시화한 통일독립시도가 바로 좌우합작운동이다.좌우합작운동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돼 남북분단이 민족 앞에 현실로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차공위 결렬후 손잡아 좌우합작운동을 이끈 양날개는 우파의 김규식,좌파의 여운형이다.김규식은 미·소공위 휴회 직후 열린 「독립쟁취국민대회」에서 『남의 손에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한다(한성일보 1946년5월14일자).그리고 그 방안으로 ▲남쪽에서 먼저 좌우파간에 합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좌우합작론」을 내세웠다.당시 김규식은 우익의 집결체이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의장이었다. 김규식의 제안에 좌파모임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장단의 한 사람 여운형(조선인민당위원장)이 대뜸 지지하고 나섰다.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까지 때로는 단둘이서,때로는 좌우파 각 정당·사회단체대표와 함께 만나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합작운동에 쉽게 동의한 것은 무엇보다 민족통일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를 가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임시정부수립」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민족이 우선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구성하면 신탁통치문제,일제잔재청산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들이 이데올로기상에서 색깔이 희미했던 사실도 도움이 됐다.당시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김규식을 중도우파,여운형을 중도좌파로 일단 구분한 뒤 『근본은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 46년7월25일 덕수궁에서 열린 좌우합작위 1차회담에는 우파의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등 5명,좌파에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등 4명이 참석했고 김규식이 사회를 맡았다.또 미군정측 연락장교로 정치고문인 L 버취중위가 출석했다.1차회담에서 양측은 합작의 기본원칙으로 3개 항을 합의했다.곧 ▲진정한 대의에 의한 민주공화국수립 ▲진정한 애국자,혁명가,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하여 민족통일달성 ▲북한에서도 진정한 민주적인 언론출판의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기초 위에서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합작위의 좌파 파트너인 민전은 1차회의 다음날에 양쪽 합의사항을 무시한 새로운 「합작5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그 내용은 「미군정의 정권을 인민위원회에게 넘기라」는 등 미군정과 우파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5원칙은 박헌영이 제안한 것으로,그 목적은 좌파내 지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좌파는 이어 7월29일 열린 2차회담에 불참했다. 그리고 나서 8월에 접어들어 정국이 일대격변에 휩싸이는 바람에 좌우합작은 뒷전으로 밀린다.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해 「9월총파업」「10월폭동」이 잇따라 벌어졌으며 이에 따른 견해차이로 남쪽의 좌파세력이 4분5열돼 합작운동에 눈돌린 겨를이 없었다. ○기본원칙 3개항 합의 더욱이 미군정이 그해 9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좌우합작운동은 위기를 맞는다.미군정은 김규식이 처음 좌우합작에 나설 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어떤 때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의를 쏟았다.정치고문 버취중위는 매번 회의에 참석해 회의진척상황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군정측에 냈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입수한 문서로 확인됐다(별도기사 참고). 이 문서에서 드러나듯 미군정은 자체 필요에 의해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며 합작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 배후조종을 시도했다.미군정의 목적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에 좌파를 참여시키는 데 있었다.미군정은 친미세력기반을 안정시킬 의도로 과도입법기구인 「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선출방식은 지역유지들을 통한 간접선거였다.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령을 46년8월 제정하지만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숨겨왔다. 그러나 9월 언론에 관련보도가 나가자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버취중위를 통해 좌우합작위에 눈길을 보낸다.합작위에서 입법위원의 절반을 선출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이는 합작위의 위상을 높여주는 제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합작위 자체를 입법의원으로 수렴하려는 시도였다.미군정의 제의는 거센 찬반논쟁 끝에 좌우합작위에 받아들여진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합작운동에 참여한 숱한 정파가 떨어져나갔다. ○「남 단독정부」로 기울어좌파대표 여운형은 9월23∼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좌우합작에 쌍방이 매우 접근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중지된 것은 유감』이라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을 위하여는 좌우협의가 절대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계속 접촉을 가져 10월7일 「좌우합작의 7대원칙」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그 주요내용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선임시정부수립,후신탁통치해결」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숙청은 임시정부의 입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입법의원에 대한 합작위원회의 입장을 정리,하지에게 통보했다. 두 사람이 발표한 합작원칙에 대해 김구 주도의 한독당 등 대부분의 정파는 크게 환영했지만 좌우의 대표정당격인 조선공산당과 한민당,그리고 이승만 진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좌우합작위는 입법의원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격이 변질된다.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은 거의 우파들이었고,합작운동보다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기울어졌다.입법의원은 1947년1월 「신탁통치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해 단정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입법의원을 좌우합작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오히려 그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미·소공위 2차회담이 6월25일 열리자 합작파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등 안간힘을 쓰지만 단정으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그리고 7월19일 합작운동의 좌파지도자인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는 듯하다가 1948년 봄 김구·김규식이 주도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로 마지막 불꽃을 되사른다.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 원인은 ▲미·소의 한반도 제패전략 ▲정파이익추구에 몰두한 극우·극좌파의 견제 등에 있었다. 그러나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해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좌우합작파가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어떻게든 통일자주정부를 세우려 애쓴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남북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현시점에서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이 시대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박헌영·여운형 갈등… 회담 깨졌다/버치보고서 내용/박헌영,“좌파대표에 회의참석 말라”/버치,좌우양쪽 움직임 낱낱이 파악 미군정 공보국 소속 레너드 버치중위는 하지사령관과 아놀드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이었다.1946년 5월 전임자인 굿펠로의 귀국후 정치고문을 맡았지만 그해 1월5일 박헌영과 존 스톤(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의 기자회견에 간여해 그 내용을 왜곡시키는 등 일찌감치 정치공작에 뛰어들었다.그는 『스스로를 마키아벨리처럼 착각,남한 정계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정치적 책략에 부심한』(마크 게인 저 「해방과 미군정」속에서)인물이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버치의 공작은 미군정측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다음은 좌우합작위원회 2차회담이 예정된 1946년 7월29일 작성된 「좌우합작회의에 관한 버치의 4번째 보고서」내용이다. 『일요일인 7월28일 저녁 박헌영이 합작위 좌파대표들에게 회의 불참을 지시했고 이 문제로 박과 여운형이 논쟁을 벌였다.다음날 상오 10시 김규식은 여운형으로부터 「몸이 아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며 며칠동안 입원해야겠다」는 사신을 받았다』 버치는 이어 2차회담 연기가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또 김규식으로부터 좌파 대표인 김원봉·허헌등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보듯 버치는 좌우 양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양쪽의 이견을 조정하거나 한쪽을 설득하는 일도 맡았음을 알 수 있다.미군정의 지원은 초기 좌우합작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는 합작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에게 끝내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 가고 온 사람들(두만강 7백리:5)

    ◎광복­6·25이후­문혁때 귀향 줄이어/60년대말까지 쉽게 도강… 65% 다시 연변에/“지금은 갈수 없는 땅”강 건너 바라보며 눈물 ○보따리 이고 강 건너 끼룩 끼룩 끼루룩…. 한떼의 기러기가 일찍 얼음이 녹은 강 한구석을 박차고 북한땅을 멀리 돌아 날아간다.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았다.한낱 짐승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강.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두만강은 늘 한을 던져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월강곡」을 되뇌어 보았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척민에 뽑혀 산길을 찾아 나선 선조들은 밀물처럼 강을 건너왔다.그리고 또 광복 후 이주 당사자들과 후손들은 고국이 그리워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강을 되건너 썰물같이 대거 고국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귀향은 광복 당시였다.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나라가 독립을 맞자 조선족들은 보따리를 싸지고 두만강을 건넜다.당시 귀향민들은 두가지 부류다.대부분의 사람들은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귀향했다.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고향을 찾았지만 살수가 없어 이남으로 곧장 월남했다.광복이 되자 연변과 북한의 공산당 정부는 일제주구 청산부터 시작했다.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 당했다.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용정의 박도끼는 북한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청진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화룡현 신선대 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1940년 3월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자기의 병졸들을 휘몰아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받아 1백20여명의 졸개를 잃었다.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히 목숨은 건졌다.이남으로 건너간 그는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대 귀향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였다.한국전쟁(6·25)이후의 일인데 전후복구 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49호가 나갔다.그리고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굶어 죽게 되자 다시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최태경 일가는 19 62년에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이사했다.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중 5학년 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서 「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 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재들이 많이 갔다.중국에서의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떠나들 갔다.유명한 시인 주선우,작곡가 정진옥,소설가 김동구,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떠나갔다.용정시 삼합향 승적 신재룡은 길림성 공업학원 학생이고 축구를 잘 했다.지금 그는 조선체육대 교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너왔다 도로 가고 용정시 삼합향 북흥촌 이기희(54)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인 1961년 7월 북한에 들어가 만 6년을 살고 다시 돌아왔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살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당시 회령의 사탕공장건설은 연변에서 건너간 귀향민이 대부분이였댔습니다.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 공무직장에 배치 받았디요.직장장의 이름을 딴 김희진작업반에 배치합데다.그때 국가 철도상이자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파견나왔던 김주봉이 하루는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을 하면서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또 매일 백여명씩 되넘어갑니다.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것이 뭡니까」라고 비판을 했디.어떤 날 출근하면 많은 사람이 없어집데다.알아보면 중국으로 돌아간거디요.67년 7월에 나도 가정을 데리고 도강을 했으니 아마 이튿날 내 자리가 비어 야단이었을 것이 뻔합데다.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호구를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 정부에서 한꺼번에 복적시켰댔시요』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이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 모두가 귀순 분자로 투쟁을 맞았으니 2백50호 중에 70호가 적이된 셈이었다.그중 10여호가 북한으로 도망갔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사실이 간첩조건이 되어 투쟁을 맞았다.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 딸이 친척 집에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사이섬에서 총 사격을 받고 수백명이 종성으로 집체도주 한 일이 대표적 사건이다.선구촌 문영기(54)씨도 그 사건에 끼었던 한사람이다.캉다(강대)요 홍색이요 하는 조직간에 말로하던 시비질이 주먹질,돌팔매질,몽둥이 싸움으로 번졌다. ○“북에 남아라”만류도 1967년7월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에 와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을 쳤다.싸움은 공장울안에서 일어났는데 쌍방은 돌멩이를 던지고 창으로 찔렀다.홍색에서는 열세에 몰리자 해관의 총을 내다 불질을 해댔다.캉다패들은 결국 선구 대안 두만강 복판 사이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8월2일 홍색은 사이섬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공포를 놓았는데 총소리를 들은 북한땅 종성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를 쳤다.3백여명이 모조리 강을 건너갔으나 여자 하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북한에서는 대우를 제법 해주었다.그러면서 돌아가면 잘못 된다고 북한에 남으라는 선전을 했지만 몇사람 이외에 모두가 두달 후 되돌아왔다.주모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1년씩 구류를 사는 것으로 그쳤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당시의 일들이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때 북한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갔다.용정시 삼합진 승지촌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 죄로 투쟁을 당하다 죽었다.그래서 온 가정이 야간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92년에 아들 김상연이 와서 용정시 민정국에 상소,3만원(인민폐)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현재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내 숙부(유인상·77)는 낮이면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시기 일쑤다.내 고모가 60년도에 조선 청진으로 간 이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조카들은 60년대 초에 다녀갔고 몇해전까지는 편지라도 오갔는데 벌써 5년째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앞길이 멀지 않은 숙부는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부친(유민상·84년 별세)께서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말끝마다 외우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다.
  • 해방후 식량·농지문제(새로쓰는 한국현대사:11)

    ◎남북 모두 흉년… 귀환동포 늘어 식량난 심각/소,살 북송 않으면 대남 전력중단 위협/미군정 쌀시장 자유화… 가격뛰자 폐지/미,일인소유토지 환수… 소작농 선발나서 인구는 때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다시 말하면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을 의미한다.광복 이듬해 19 46년의 남한인구는 1천9백36만8천2백70명.이는 해방직전에 비해 자그마치 2백80만3천8백53명이 더 늘어난 것이다.북한으로부터 남하한 인구에 일본이나 북지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의 민생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해방원년 19 45년은 그런대로 풍년이 들어 쌀 1천2백83만5천섬을 수확했다.그 다음해인 46년에는 장마가 져서 흉년이 드는 통에 1천2백5만섬을 수확하는 것으로 그쳤다.오늘날 3천4백만섬을 해마다 웃도는 쌀 생산량에 비하면 분명히 격세지감이 있다.농촌의 쌀 과소비 탓도 있었지만 하여튼 해방이후 군정하에서 식량사정은 매우 심각했다.쌀 산지로 유명한 경기도에서도 45년 한해에 15만4천섬이 모자랄 정도였다. ○경기서만 15만섬 부족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쌀은 대단한 존재다.쌀농사 문화권(미작문화권)에서 쌀은 주식이려니와 재화의 척도가 되었다.그럼에도 1945년 미군정은 쌀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군정은 10월11일 쌀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쌀 시장 자유화 시책을 시행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미국적 사고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이 적용되었다.또 일제의 수탈로 위축된 농촌경제에 활로를 열어준다는 의도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쌀 자유시장 시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2주일이 걸렸다.그래서 군정은 한국경제를 위해 언제라도 식량을 통제하겠다고 선포했다.자유시장이 개설되고 나서 쌀 값은 해방전 암시세인 1말 1백50원선을 웃돌았다.도시민들은 자유시장 기능 정지와 배급제 실시를 연일 외쳤다.미군정은 다음해 1946년 2월 자유시장 폐지와 아울러 긴급법령으로 전년도에 생산한 쌀 수집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하지장군의 경제고문 A C 번스는 쌀 자유시장 채택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생각으로는 작년에 도입한 쌀 자유시장을 큰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본다』고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나섰다(서울신문 1946년9월4일자).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수집령을 내린 1946년 2월은 수확기로부터 3∼4개월이 지난 뒤였다.마침 2월2일은 마음놓고 선호할 수 있는 해방후 첫 구정이어서 농촌 쌀 소비량은 절정을 이루었다. 군정이 전국에서 수집한 쌀은 68만3천섬에 불과했다.서울시민 1백20만명에게 하루 1홉꼴씩 일곱달 반을 배급할 양을 겨우 수집한 것이다.이에앞서 1월2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소련은 지체없이 북한에 쌀을 보내지 않으면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왔다.그러나 미국산 잡곡으로 간신히 배급제를 유지하는 남한 실정으로는 어려웠다.북한은 8만㎾가 넘게 송전하던 전력을 4월부터 최하 3만2천㎾로 실제 내려버렸다. 한반도의 민생경제가 몹시 궁핍했다는 사실은 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도 보여주었다.최종 확정한 15개 항목 의제가운데 민생 경제관련 분야가 6개항목을 차지했다.쌀과 전력을 포함한 원자재,연료,화공품 교역과 철도차량 운송문제 등이 그것이다. ○미,쌀 수집령 긴급공포 철도는 북한에 미군보다 먼저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8월27일 자정을 기점으로 이미 끊긴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물자교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남한에서는 농사짓는데 쓸 비료가 당장 필요했다.그러나 비료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당시 북한에 있었다. 1946년 2월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급히 막을 내린 이유의 하나도 쌀이다.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다른 어떤 사안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소련대표 스티코프 대장은 쌀 공급요청을 되풀이하면서 더이상 토론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일방적 폐회 결론을 내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5일).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 노린 소련쪽의 주목적은 쌀이었다.소련은 북한에 쌀만 준다면 남한에서 아주 필요한 전력,석탄,비료를 보내줄 수 있다고 매달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7일).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재산,특히 농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23만1천3백㏊에 달했는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선 법령을 만들어 1945년 9월25일부로 일본인 재산 모두를 확보했다.이어 미군정은 이상한 현상들을 발견한다.그 하나가 해군대위로 전남도 미군정에 참여한 바 있는 E G 미드(전 버지니아대 교수·90년 작고)의 저서 「주한미군정 연구」에 나온다.「내가 전남에 도착했을 때 마침 수확기였는데 아무도 일본인 논의 벼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일본인 소유농지를 법적으로 귀속시킨 미군정은 1945년 11월 신한공사(신한공사·New Koean Co.)를 서둘러 만들었다.과거 일본의 농촌수탈 법인격인 동양척식회사 보유 농지는 물론 다른 개인소유 토지를 인계받은 신한공사는 농사를 지을 소작농을 선발했다.미군정의 농지정책은 소련과 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세력의 비난이 늘상 따라다녔다.왜냐하면 북한은 명목상 임시인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19 46년 초반기에 토지개혁을 끝내고 이를 선전자료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론도 토지개혁 반대 미군정도 토지개혁을 그냥덮어둔 것은 아니다.하지장군은 일본인의 재산,그중에서도 농지처리문제 결정을 워싱턴에 요청했다.국무부는 이를 지지하면서도 정작 행정지침은 내려보내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결국 사문화한 1946년 2월 미군정의 농지령 역시 농지개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15년동안 농지를 점유한 농민에게 자작을 허용하고 대신 일정액의 현물지대를 내는 것을 골자로 한 이 법령은 군정기간 내내 빛을 못보았다. 미국의 입장은 새로 태어날 한국정부에게 농지개혁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실제 군정이 1946년 3∼6월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분의2 이상이 장래의 한국정부가 담당하길 희망했다.이 조사에서 서울에서는 응답자의 89%,농촌에서는 68%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와 비슷한 입법여부를 물어본 결과 서울의 73%,농촌의 56%가 반대했다는 것이다(미외교문서시리즈·1946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소련군 명령에 의해 거의 몰수성격을 띠고 19 46년 1월부터 강력히 진행되었다(별도기사 참조).김일성은 그해 4월10일 「토지사업을 결산하는 보고서」에서 『북조선 경제생활 향상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자찬했다.그러나 북한은 지금 혹독한 식량란을 겪고있다. 역사의 존재가치는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존중되느냐에 있다고 한다.그럼에도 역사를 무시한 북한의 고립주의적 주체철학은 「다 함께 침몰하는 운동」을 가속화시켰는지도 모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미( 〃 〃) ▲김경운(조사부 〃) ◎「꼭두각시」 북정관 연구에 큰가지/서울신문 입수 미 노획문서를 보고/토지·농업 등 정책 배경 드러나/당시 행정 소군 사령부서 명령 서울신문이 입수한 미국의 노획문서는 해방 이후 북한 실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어떤 자료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특히 이 문서와 같이 북한의 각급 행정당국 간에 내부적으로 전달된 문건일 경우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간 혹은 발표한 자료에 포함되지 않는다.그래서 구체적인 정책 입안과정이나 배경등이 파악된다는 점에서 가치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들문서 2건은 1945년 12월과 1946년 1월 초에 생산된 문서로서,모든 농업및 토지 문제에 관련된 자료이다.모두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작성되었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1945년 12월 문서의 경우 『북조선 농림국은 소련군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임시조치 시정요강을 좌와 여히(왼쪽과 같이) 포고함』이라고 명기했다.이로 보아 이 당시 북한의 행정은 명백히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마치 자치정부인양 선전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가 실제로는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하부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6년 1월의 문서는 제목 자체가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이기 때문에 「북조선주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참모부장 벤코프스키」의 이름으로 발령된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1945년 12월의 문서는 「북조선 농림국장 이순근」의 이름으로 포고되었는데 이는 외형적으로 당시 북한의 각종 정책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정부기구에 의해 자율적으로 제정 집행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된다. 농림국 문서 내용 중에 각별히 눈에 띄는 것은 1945년 12월 이전에 이미 전일본인 소유 재산과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위원회 혹은 농민단체에서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이 문서에는 조선인 지주들이 「건국성납」이란 명목으로 토지등을 내놓았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 1945년 12월에 『전도농호등록을 행하고 매년도 말까지 그 이동을 보고』토록 한 뒤 46년 1월부터는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관이 전농호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여기에는 각종 토지사용자들(농민·소작농·지주·사원 소유지 기타)과 일체 국유지,이전 일본인 소유지들이 세밀하게 포함되었다.토지면적조사는 46년 2월15일 이전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어떻든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토지개혁 준비에 필수적인 과정이다.그래서 북한의 토지개혁이 1946년 3월에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료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도 이처럼 1945년 말부터 그 준비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북한 토지개혁 소련군이 배후조정”

    ◎서울신문 입수 미 문서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 명령서」등 통해 밝혀져/초기 북한정권 「소련군의 하부기관」 입증/“조선인민위 자율적인 조치” 주장은 허구 해방 이후 초창기 북한정권의 성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다.서울신문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아낸 이들 문서는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와 「북조선농림국 임시조치시정요강」.소련이 일찍부터 북한 토지개혁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소련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참모부장 벤코프스키 명의로 19 46년 1월2일에 작성된 「소련군 사령관의 명령서」는 우선 각종 토지사용자의 소유면적 조사를 2월15일 이전에 끝내도록 지시했다.여기서 소련군은 조사대상을 농민,소작농,지주등 계급적으로 분류하고 조사목적을 「토지사용에 대한 성질결정」으로 밝혀 토지개혁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또 조사가 제때 수행되게 경찰동원을 명령한 흔적도 남겼다.모두 3개 항목으로 된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는 토지개혁이 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자율적 주도아래 짧은 기간내에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허구였음을 증명했다.지금까지 북한당국과 국내 일부 학자들은 일련의 개혁조치를 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주장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이 문서는 객관적 평가기준을 제시한 사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북조선농림국 임시조치 시정요강」에도 소련군의 영향력이 전적으로 나타나 문서 서두에 「소련군 명령에 의해 시정요강을 포고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해방원년인 1945년 12월에 작성한 이 문서에서도 농수산업에 대한 시정을 밝히면서 친일파와 반동분자를 분류해 놓았다.또 건국성납토지라는 낱말이 보여 위협을 느낀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발신자는 농림국장 이순근으로 되어있는데 그는 1900년 경남 함안 출신으로 해방전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인물로 알려졌다. 북한은 결국 19 46년 3월8일 「토지개혁법령에 관한 세칙」을 만들어 몰수대상 토지를 결정하고 농민군중을 선동,지주들을 고립시켰다.그리고 3월5일 제정한 「북조선 토지개혁법령」등에 따라 66만 농가에 1백6만6천㏊의 농지를 분배했다.한 농가에 평균 0.15㏊(4백50평)씩 돌아갔다.남한보다 먼저 실시한 토지개혁을 위대한 업적으로 선전했지만 북한은 지금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있다. 이들 문서는 1950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평양을 점령한 미군이 대량 입수한 이른바 노획문서의 일부.이 자료를 검토한 농지개혁 연구학자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석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 초기의 토지개혁정책 입안과정이나 배경을 처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면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소련군 사령부의 하부기관임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 본사,「소대표지원… 공산당 지침」 발굴/랭던보고서

    ◎미군정청 입수… 좌익 투쟁정책 수록 )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19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때 조선공산당이 소련대표단과 동일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긴급입수 했다.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이 소장한 이 문서는 미국대외정책(FRUS·1946년)에 들어있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마셜 국무위원에게 보낸 보고서의 첨부물인 노획문서.당시 좌익의 선전및 시위는 소련대표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집중화한 형태로 조직된 공산당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첨부물들은 미 군정청 대공정보부대 장교들이 46년 5월께 입수한 것이다.조선공산당 부산시와 인천시인민위원회가 같은 해 3월말부터 4월3일까지 미소공동위와 관련,각 지역 지부 당원들에게 지시한 선전및 투쟁정책을 고스란히 담고있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한 조선공산당은 이 문건을 통해 반민주적 정당과 조직및 개인이 포함된 친일파 반역자는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는 당 기본노선을 밝혔다.그리고 임시정부 구성 협의대상이 선정되면 미국측이 최우선 해결과제로 내세우는 38선 철폐를 비롯,경제·행정적 문제등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소련대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인물속성도 소련측과 대동소이하게 박헌영 여운형 허헌 김두봉 김일성 이주하 최무정 김원봉등은 임시정부 협의대상으로 최적격자로 분류해 놓았다.이어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성수 조완구 조만식 장덕수 조소앙은 배제돼야 할 반동인사,김규식 김병로 홍명희 등은 찬·반탁이 명확지 않은 중도파로 못박았다. 이와 더불어 팸플릿과 영상물 뿐만 아니라 신문·잡지등 간행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과 모든 조직과 인민을 총동원,미소공위에 결의문과 청원서·서신등을 보내는 운동전개등 투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울신문 발굴 「공산당 지령문」을 보고/“추측 입증한 가치있는 사료”/당시의 정황과 일치… 신뢰도 높아/김창순 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 해방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협상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신문사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조선공산당 지령문은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1945년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서도 이 문서는 상당한 신뢰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남한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46년 1월2일이고 당시 남한 공산당 책임자였던 박헌영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인 46년 1월과 4∼5월쯤에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소련군 사령부가 조선공산당에 대해 사실상 모든 지휘 감독 권한을 행사한 시점이기도 하다.소련이나 북한의 직접적인 문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공산당이 소련과 일사분란하게 보조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특히 해방 당시 수집한 정보보고와 각종 문건들을 정리 분석한 첫 문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이 문서에서 보여주는 투쟁방법등은 오늘날 북한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선전선동과 맥락을 같이한다.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본사 「김구 특무대」 해체 성명서 발굴

    ◎항일투쟁하다 광복후 정치라이벌 제거 해방정국에서 테러는 하나의 정치수단으로 악용됐다.애국애족을 외친 숱한 청년단체들이 실제로는 온갖 명분을 내세워 반대파 또는 정치적 라이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같은 테러단체의 뿌리는 일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일본인·친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테러단체는 해방 이후 좌우 대결에 그대로 이용된다.그러나 테러단체가 비밀결사 조직으로 유지돼온 특성 때문에 이들의 실체를 알려줄만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시피한 실정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이같은 상황에서 해방 직후 크게 활약한 한 테러단체의 성격·구성들을 분석할만한 자료를 최근 발굴했다. 워싱턴의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 슈트랜드분소에 보관된 「주한미군 군사실 문서」더미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김구특무대」의 성명서이다.「김구특무대」는 광복 직후부터 악명을 떨치다가 45년 11월29일 김구의 지시로 해체하면서 이 성명서만을 남겼다. 「김구특무대」는 성명서에서『민족 천년의 운명을 좀먹으려는 역적의 무리들에게 향하여 단연코 일도양단 할 숙청의 칼을 뽑은 것』이라고 활동목적을 밝혔다.이어 회원숫자를 수백명이라고 내세운 뒤 『회고하면 조국광복 일념에서 중명을 띠고 내지에 파견됐다(중국의 임시정부에서 한반도로 파견됐다는 뜻)』고 해 일제 때 조직됐음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자주독립의 절대적 명제를 완수하기 위해 질풍신뢰(질풍신뢰)적 숙청과 응징으로 우리 특무대의 빛나는 임무의 막을 내릴 것』이며 『도적 일군의 시산혈하속에서만 피흘린 선배의 원혼은 비로소 고이 잠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 부모와 멍에/문희자 시인·서울대어학연(굄돌)

    나는 어머니를 바꾸고 싶었다.내 친구인 경애 어머니가 내 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시고 쪽을 찌고 계셨다.흰 옷에 화장도 하지 않으셨다. 경애 어머니는 신식 어머니여서 양머리에다 언제나 예쁘게 화장을 하고 계셨다.12월8일 같은 전쟁 기념일,경애 어머니는 소매가 있는 일본식 앞치마를 입고 「애국 부인회」라고 쓴 흰 천을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뜨리고 학교에 와 일본말을 하며 선생님의 일을 돕곤 했다. 우리 어머니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나는 그것이 서운했다.그래서 어머니를 바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지금 나는 물론 생각이 다르다.친일파 성향이 있었던 경애 어머니보다 내 어머니가 더 좋다. 며칠 전 친일파의 증손자가 자기 땅을 좋은 일에 쓰려고 헌납하겠다는 뉴스에 접했다.이 증손자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부모가 매국노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다니느라고 남 모를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스스로에겐 아무런 죄가 없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매국노의 증손자였으니 어찌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부모를 바꾸어도 백 번은 더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못 바꿀 바에야 「자기」를 바꾸어야 한다고 그 증손자는 생각했을지 모른다.그래서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일생동안 멍에를 지고 다닌 사람이 있다면 그 이상 가슴 아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 “「모래시계」 아성에 도전하자”/방송사들,시청자 끌어안기 안간힘

    ◎KBS/김정호 일대기 그린 「땅울림」 준비/MBC/가요 표절문제 다룬 「노래만들기」/SBS/20일부터 「장희빈」으로 수성 다짐 방송 3사가 3·1절 특집극을 필두로 「모래시계」로 한껏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도전한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에 찰만한 드라마를 내놓지 못하면 시청자들의 불만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모래시계」는 2년여의 시간과 25억여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작품.이런 수준의 역작을 항상 내놓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 방송가의 실정이다. 그러나 「모래시계」가 드라마의 수준도 한 차원 높여야한다는 과제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이제는 그럴듯한 줄거리로 대충 만드는 특집극이나 유치한 말장난과 흥미위주의 소재로 일관하는 안일한 일상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그래서 「모래시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도전하는 드라마 제작진들의 마음은 무겁다. 「모래시계」에게 빼앗긴 자존심의 회복에 나서는 MBC­TV가 선보일 3·1절 특집극은70분짜리 2부작 「노래만들기」.다국적 메이저 음반회사에 소속된 한 인기가수를 통해 대중음악의 표절문제를 집중조명한다.지난해 8·15특집극으로 방영된 「영화만들기」의 후속이다. 대중스타로 부상했다가 음반표절이 폭로돼 몰락하는 대중가수역은 뮤지컬 스타 남경주가 맡았다. KBS­TV는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4부작 「땅울림」을 준비하고 있다.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김정호의 역정어린 삶을 그릴 이 특집극에서 김정호역은 김영철이 맡았다. 「모래시계」로 한껏 주가를 올린 SBS­TV는 2부작 「꿈꾸는 초인」을 방영한다.친일파 제거를 둘러싼 암투를 그린 이 특집극은 우리 민족에 내재된 반일감정을 파헤친다는 다소 거창한 기획의도를 갖고 있다. 이들 특집극 이외에 새 미니시리즈와 주말극도 3월부터 잇따라 선보인다. S­TV는 「모래시계」의 후속으로 22일부터 미니시리즈 「다시 만날 때까지」를 내보낸다.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한 남성과 이해타산적 여인의 운명적 만남과 헤어짐을 최민식과 전인화,그리고 영화배우 나영희 등 30대 연기자들이 그렸다.정선경이 주연하는 사극 「장희빈」도 20일부터 방송한다. M­TV는 부유층의 사랑과 재산을 둘러싼 욕망을 그린 미니시리즈 「호텔」을 3월 13일부터 월화드라마로 내보내는 데 이어 4월 초에는 새 수목드라마 「숙희」를 방송한다.「아들의 여자」후속으로 방송되는 이 드라마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여자의 서로 다른 욕망과 사랑,갈등을 그렸다.심은하와 고소영이 주연으로 나온다. 또 4월부터 주말연속극도 「사랑과 결혼」으로 바뀐다.입사동기인 패션디자이너 세 여자의 개성 있는 삶을 그릴 김희애·김혜수·이영애가 한석규·임성민 그리고 음악인 송병준과 함께 나온다. K­TV는 가요 드라마 「갈채」를 제작중이다.
  • 미 군정 3년의 공과(새로쓰는 한국현대사:7)

    ◎일 관리 47년 8월까지 행정 참여/초기 미군정요원 배치안해 정책 혼선/친일파 중용… 「부일배경찰」 85% 넘어/소 의식한 본국반대불구,「한국군」 창설추진은 성과 한국의 미군군정은 미 제6·7·40사단으로 구성된 제24군단의 38도선 이남 점령임무 수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일본 민간인의 본국귀환,법과 질서유지,미국의 정책 속에서 정부역할 수행이 당초의 주임무였다.미군정은 1945년 9월12일 주한미군 본부 내에 독립된 사령부 성격을 띠고 「주한미군정」(USAMGOK)이라는 명칭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진주한 제24군단 병력 가운데는 군정을 수행할 요원은 하나도 없었다.군정부대는 그로부터 40여일이 지난 10월21일 인천에 내렸다.그것도 한국점령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주요지역 통치를 위해 훈련받은 요원들이었다.그 병력은 4개 전술보조부대와 캘리포니아 몬테리에서 민정훈련을 받은 20개 중대로 충원되었다.그들은 먼 항해 끝에 도쿄에 도착하고 나서 한국으로 가는 사실을 인천상륙 1주일 전에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의 군정은 전술부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이는 점령지역을 통치하는 과정에 혼란을 가중시킨 요인이 되었다.지방이 특히 심했다.서울에서는 인공 산하의 치안대 활동이 멈추었으나,일부 지방에서는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미군들을 체포할 정도였다.이 가운데는 행방불명이 된 미군도 있다.전남의 경우 제40사단과 교체한 제6사단 20보병연대는 인민위원회를 반대하면서 치안대를 공공건물로부터 몰아내는 등의 강공책을 썼다. 미군정의 군정장관으로 육군소장 A V 아놀드가 임명되었다.지난날 총독이 행사한 권한을 손에 쥔 군정장관은 전술부대에 소속하지 않은 모든 군정요원을 지휘했다.군정장·차관 밑에 총독부 정무총감 위치와 비슷한 민정장관을 두었는데,그 자리는 B B 프레스코 대령이 맡았다.그리고 8개의 부와 9개의 국을 설치했다.이들 기구는 1946년 5월10일 확정한 새 편제에 따라 11개위 부,4개의 처,86개의 국으로 개편되기까지 존속했다. 「주한미군정청」(USAMGIK)이라는 공식명칭은 1946년 1월4일부터 사용되었다.처음의 「주한미군정」의 약어 「USAMGOK」의 끝자리 3자 GOK가 조롱하는 말 GOOK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해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어쨌든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약 한달이 모자라는 3년 동안 한국을 통치했다. 그러면 미군정의 정책은 어떤 것이었으며,한국에 남긴 군정의 유산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미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저서 「한국의 해방과 미국정책」에 적은 표현을 빌리면 「점령당국(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래서 한국은 마치 모래수렁 같았고 점령당국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고 기술한 그는 비싼 댓가를 치르더라도 한국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성채를 쌓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인 바 있다. ○워싱턴뜻과 배치 미군정은 초기의 정책을 수정,선회할 기로에 서게 되었다.이에따라 1945년 11월 무렵에 수립된 새로운 정책은 크게 네가지를 목표로 했다.그것은 앞으로 탄생할 한국정부를 고려하면서 보수진영과의 제휴,경찰력 강화,군대의 창설,좌익의 탄압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들 정책은 워싱턴 고위층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그러나 군정에 파견한 국무성 관리들이 이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일본군출신 두각 한국군 창설과 경찰력 강화 등 미군정의 새로운 정책은 남한 통치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했다.미군정은 1945년 11월13일 국방경비대,육군부와 해군부를 통괄하는 군사국을 설치했다.J R 하지는 점령 초기부터 한국군 창설문제에 관심이 있었다.소련을 의식한 워싱턴 고위국으로부터 많은 반대도 있었지만 실천에 옮겼다.1946년 6월 국방경비대는 통위부로,군사국은 조선경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이 군조직은 국군의 모태가 되었다. 군정은 1945년 12월초에 60명의 장교를 선발,군사영어학교에 입교시켰다.이들은 당시 국방경비대 고문 이형근의 추천에 의해 선발되었다.이가운데 40명은 일본군 출신이고 광복군 출신은 20명에 지나지 않았다.일본군 출신들이 유독 두각을 나타내 국군 창건 이후에도 중요 보직을 차지했다.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광복군 출신들은 저만큼 뒤쳐져 있었다. 경비대에게는 내부소요 진압임무가 돌아갔다.1946년 후반기가 저물면서는 파업,폭동과 더불어 몇몇 경찰서가 불타는 등 소요가 잇따랐고 좌익좌파 3당은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었다.1947년 9월에는 좌익검거 선풍이 불었다.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연표」에 따르면 남로당과 민애청등의 지하 좌익세력들이 10월15일부터 한라산에 입산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비대는 폭 넓은 소요를 진압하는 두가지 무기의 하나로 평가되었다.다른 무기는 국립경찰이었다.군정은 1945년 9월17일 조선총독부로부터 경무국을 인수받았다.경찰을 헌병사령관 L E 쉬크 준장의 통제 하에 두었는데 일본인 경찰관들에게까지 「USMG」라는 군정 완장을 지급했다는 것이다.이는 한국인들과 미국 특파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제서야 일본인 경찰관들의 자리를 한국인들로 메꾸었다. 헌병사령관 밑에 있던 경찰은 11월30일부터 국방군 사령관이 지휘했다.그리고 해방이 되던해 10월 워싱턴 3성조정위원회로부터 한국 경찰 내의 친일파와 미움을 사는 기구를제거하도록 하는 지시가 내려왔다.하지만 경찰의 볼썽 사나운 관행은 계속되었다.군정청이 피의자에 대한 폭행 금지명령을 내리자 대신 소방관을 시켜 폭행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1946년 4월 소방서가 경찰과 분리되기 이전까지는 동료였던 터라 그런 부탁쯤은 들어주었을 것이다. 해방된 이 땅의 경찰은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다.일제에 강한 충성을 보였던 사람들을 다시 썼기 때문에 부일배 경찰이 차지하는 비율은 85%나 되었다.1945년 10월 당시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간부의 53%,하위직 25%가 일본경찰 출신임을 시인했다고 한다.A W 그린이 「경찰의 오만 무례는 끝이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경찰의 일제 잔재청산은 요원했는지 모른다.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 기간동안 군정에 참여했다.1945년 12월 군정청에 지방행정과가 생겼을 당시 일본인이 감독책임을 맡고 있었다.1947년 8월15일까지도 일본인들이 군정에 참여한 증거가 있다.미 대통령 특사인 육군 중장 A C 웨드마이어가 작성한 「한국의 정치·군사 상황보고서」가 그것이다.이 보고서는대일 전승기념일(V J­DAY)이후 북한지역 5백명을 제외하고 남한에서는 일본인 관리들이 모두 철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청산 장애로 웨드마이어 보고서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보인다.「한국에서는 과거 70만명의 일본인들이 모든 경제요소는 물론 기술계층까지를 지배했다.그래서 지금 부산역장을 지냈던 한국인이 철도청장이 되고,직업학교 출신이 큰 수력발전소 책임자 자리에 앉았다고 이상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대목이다.일반 관료직도 예외가 아니어서 철저하게 승계되었다. 그래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사가들은 혹독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미국은 한국 점령기간 내내 군,관료,정치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자손을 출산하기 보다는 일본인 임신에 산파 역할 만을 해왔다」고….이는 군정의 유산으로 한국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요소로 작용했다. “영어 아는 보수적 인사 많이 썼다”/군정고문 2인의 전문·보고서 발굴/“「일서 완전 해방」 한국인 열망 외면”/미학자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포함한 보수인사들을 그토록 많이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일까.이에대한 해명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찾아낸 W R 랭던의 「국무성장관에게 보내는 전문」(1945년 11월26일)에 잘 나타나 있다. 랭던은 당시 미 국무성이 한국에 파견한 하지장군의 정치고문.그가 작성한 전문 보고서는 「초기에 보수적 인사들을 많이 뽑아썼다」고 시인하면서 「생면부지의 대중 가운데 누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이어 보고서는 「고위직을 보수인사에서 고른 까닭은 한국인들이 사치스러워하는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역시 NARA에서 입수한 미군정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1945년 10월10일)에도 같은 맥락의 내용이 보인다.랭던의 전문보다 앞선 이 보고서는 다만 당시의 한국적 상황을 「한국인들은 친일파를 일본인보다 더 증오한다」고 밝히면서도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다.「보수주의자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했지만,이런 낙인이 곧 사라질 것」으로 보고 「많은보수주의자들의 존재는 고무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대해 미 미들버리대 C L 호그 교수는 「한국분단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남한의 초기 통치과정에서 일본인 관리들과 일제의 경찰을 그대로 썼다는 사실은 정복자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열망에 무감각했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정부와 경찰을 운영하기 위해 충분히 훈련된 요원들을 일본에만 보낸 워싱턴과 최고사령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 송병준 증손자 송돈호씨/7천억대 5백만평 땅 기증

    ◎“조상 친일의 속죄로…”/복지법인 숭덕원과 장애인대 설립/5조원 상당부동산소유권도 위임/“15평전세 살지만 무거운 짐 던 느낌” 『친일파 조상이 남긴 국내외 5조원대의 땅을 되돌려받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역사에 속죄하고 싶습니다』 이완용의 증손자에 이어 구한말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국내와 일본에 있는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시가 7천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회복지시설에 무상기증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50·송파구 잠실동 주공아파트)씨는 10일 증조부와 조부의 명의로 돼 있는 부동산 5백20만여평을 사회복지법인 숭덕원(이사장 김건준)측에 장애자들을 위한 기술대학 설립비용으로 기증했다. 이와함께 송씨는 현재 정부기관 등의 명의로 된 국내와 일본의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절차를 숭덕원측에 위임했다. 이에따라 숭덕원측은 등기부상 산림청·국방부·교육부 등의 명의로 된 시가 7천억원대의 또다른 국내 부동산 5백만여평과 일본 농림성 명의로 된 동경·북해도 등 일본내 4곳의 시가 4조원대 부동산 7백60만여평을 넘겨받기 위한 법적 절차를 벌이고 있어 추이가 주목된다. 5조원대의 어마어마한 부동산이 걸린 이 송사에서 숭덕원측이 승소할 경우 이 재산이 모조리 복지시설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송씨가 기증동의서에서 『숭덕원측이 추적발굴한 증조부와 조부명의의 부동산을 재단에 기증한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날 송씨가 기증한 부동산은 인천시 북구 산곡동 15일대 대지 30만평,경남 사천군 서포면 금진리 36일대 대지 10만8천평 등 전국에 산재한 5백20만여평에 이른다. 또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작업을 추진중인 국내 부동산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 246일대 국방부 명의의 대지 90만여평을 포함,5백만여평에 이르고 있다. 이와함께 일본 북해도(북해도 천상군웅오정 대자 48번지) 일대 농경지와 방목지 7백50만평과 현재 귀족별장지인 동경도(동경도) 조포시 소재 3천여평 등 일본내 7백60만여평의 부동산에 대해서도 오는 5월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이에대해 숭덕원측은 『올해부터 개인의 해외부동산 취득이 자유화된만큼 일본 정부와의 송사에서도 승소할 자신이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현재 산림청과 국방부명의로 된 인천시 북구 산곡동 산20의 2일대 등 2필지 공시지가 10억6천여만원상당의 6천2백여평에 대해서는 송씨 등 후손7명이 이미 지난해 10월 서울민사지법에 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냈다. 이들은 당시 소장에서 『상속받은 부동산을 등기하지 못한 사이 국가가 진정한 소유자가 나올때까지 잠정적인 조치로 보전등기를 한 것』이라며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송씨가 엄청난 재산을 숭덕원에 기증하게 된 사유는 친일파이자 민족 반역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선대의 땅을 물려받아 편안히 살기에는 양심이 허락치 않을 뿐더러 이를 되찾는 과정에서 친일파 시비에 말려들기도 싫기 때문이라고 10일 기자에게 밝혔다. 그는 젊은 시절 큰 회사의 중견 간부로 근무하던중 친일파의 자손이란 사실이 드러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사직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 비화도 간직하고 있다. 전세 4천만원짜리 15평 주공아파트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는 송씨는 5년전부터 조상의 산소 소재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러나지 않은 문중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재산환수작업에 몰두해왔다. 송씨는 『재산환원을 통해 역사에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기를 바랄뿐』이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송병준(1858∼1925)은 조선 고종때 무과에 급제,1904년 러일전쟁때 매국노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황제양위운동을 벌였으며 이완용내각에서 농상공대신·내무대신을 지내며 한일합방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매국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 “팔봉 인간적면모 생생”/원로성악가 김복희씨 「아버지 팔봉…」펴내

    ◎자식에 대한 사랑·교우관계 자세히 밝혀 일본 유학시절 토월회를 조직해 한국 신극운동의 횃불이 되고 현실인식이 강한 프로문학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던 팔봉 김기진(1903∼85).프로문학에 대한 신념을 바꿨으나 친일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의 여생을 굴절되게 살아가야 했던 팔봉의 삶을 주위에서 회고한 책이 발간됐다. 팔봉의 딸이자 원로 성악가인 소프라노 김복희(67)씨가 펴낸 「아버지 팔봉 김기진과 나의 신앙」(정우사 펴냄)이 그것.김씨는 이 책에서 10년전 타계한 아버지 팔봉을 애타게 그리면서 가까이에서 본 아버지 팔봉의 인간적 면모까지 되살리고 있다. 김복희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팔봉에 대한 인상은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이다.그에 따르면 팔봉은 화장실 휴지도 아껴쓰는 근검절약형이고 자녀의 가정교육에 철저한 사람이었다.그러나 김복희씨가 결혼 10년후 이혼을 생각했을때 『나는 네가 시집가서도 잘 살라고 아직까지도 계속하여 마지막 한숟가락을 물마른 밥을 먹는데 이게 웬말이냐』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 보인 아버지였다. 김복희씨는 또 해방이후 친일파에 분류돼 괴로워하고 6·25때 인민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의 팔봉을 전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팔봉은 해방직후 좌·우익 양측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에 『나는 앞으로 5년동안은 아무 것도 안하겠오.나 같은 친일을 한 사람은 조용히 자숙하며 근신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만년까지 일제를 향한 문필활동이나 전쟁통에 다니던 순회강연을 한탄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한 청전 이상범화백,문인 박영희씨,무용가 최승희씨,박정희 전대통령 등 팔봉과 친하게 지냈던 인사들에 대한 회고담도 등장하고 있다.팔봉에게 편지를 너무 자주해 여자로 오해받은 박영희씨,인간적 면모에 서로 반해 이해관계를 배제한 교유를 지속했던 박대통령가족 등.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씨를 기억하는 김씨는 해방직후 최씨 부부의 월북을 사뭇 안타까워 하고 있다. 『살아있으면 아흔 고령이 되었을 최승희씨를 북한의 선전도구로 전락시킨 것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손실이며 통탄할 일』이라고 그는 쓰고 있다.
  • 외교수석의 문제 제기(청와대)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이 청와대에 들어오기 직전 자리는 주유엔대사였다.탈냉전이후 세계외교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돼가고 있는 곳이 유엔이다.유수석이 지난주 청와대수석회의에서 「세계 속의 한국인」에 대해 두가지 이야기를 했다.참석자들을 잠시 생각에 잠기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우선 유엔대사 시절의 경험을 들어 「왜 한국에서 근무했던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모두 반한인사」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우리정도의 국력과 근대화된 나라라면 서울에서 근무했던 외교관들은 한국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친한국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그런데도 유엔에서 보면 서울을 거쳐간 동남아나 유럽지역 외교관의 대부분이 반한인사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그들이 유엔에서 한국 외교관들을 오히려 기피하는 현상,쳐다보는 눈매조차 곱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개선하느냐 하는 문제제기였다. 유수석은 이문제를 제기하면서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외무부와 관료사회에 책임의 일단을 돌렸다.관료사회부터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본국에서 면담을 하려는 손님이 와 면담을 요청해도 미국이나 일본을 빼고는 면담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미국과 일본 중심의 외교와 문화가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를 한다는 해석이었다. 그는 그러나 일반국민의 외국인에 대한 태도나 문화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외교안보수석이 정리할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인듯 했다. 청와대의 한 외교관계자는 유수석의 문제제기에 대해 『일본에 근무한 외교관은 친일파가 되고 한국에 근무한 외교관은 반한파가 된다는 게 외교가의 일반화된 인식』이라고 말했다.그는 그러나 일본도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60∼70년대엔 한국과 비슷한 이미지를 동남아에 남겨놓은 바 있다면서 일본의 전철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풀이했다. 그는 『아마도 유수석이 사석이었더라면 잘못된 민족우월주의가 서울주재 외교관을 반한파로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을 것』이라고 유추해석했다.우리는 분단된 상황에서 국가발전에 국민적 에너지를 집약시키는 수단으로 「우리민족은 우수하다」「하면된다」등의 민족우월주의를 알게 모르게 심어왔다.이 논리들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임에 틀림 없지만 세계화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유수석은 여기서 더 나아가 외국에서 일어나는 우리공직자들의 못마땅한 행태에 대해 이야기했다.싱가포르 정부가 얼마전 그곳 주재 한국대사관에 시찰·조사단의 파견을 자제해주도록 요청했던 실례를 들면서 이는 싱가포르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를 갖고 전세계 우리공관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임을 설명했다. 유수석이 설명한 내용은 이렇다.어떤 특정주제를 다루는 시찰단이 서로 다른 기관에서 A·B·C·D조를 이뤄 특정국의 유관기관을 방문한다.해당국 기관에서는 A팀에게 충분한 설명과 자료를 제공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B·C·D가 차례로 찾아와 똑같은 질문에 똑 같은 내용의 자료를 요청한다.이때쯤이면 주재국 기관에서는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한국에는 복사기도 없느냐』고 비꼬기 시작한다.급기야는 더이상 한국에서 오는 조사단은 받지 않겠다는 통보로 이어지고 만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대우문제가 새로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유수석은 세계화를 위해 우리가 개선해야 할 일의 일부분을 지적했을 뿐이다.그것은 새로운 국정지표로 제시된 세계화가 결국 「의식」을 바꾸는 일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이야기한 것이다.
  • 광복 50년에 할 일(임춘웅칼럼)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그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간대에 매듭을 만들어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일 것이다.달이 바뀌는 것 보다 해가 바뀔때 감회가 더하듯 50년,1백년 마디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큰 의미를 지닌다.바로 금년은 광복 50년이 되는 해여서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정부대로 사회단체는 사회단체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여러가지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그중에는 우리의 청와대를 가로막고 서있는 구 총독부 건물을 헐어내는 일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동안 줄곧 문제가 돼 왔던 친일의 청산문제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특별한 기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않다.어쩌면 광복 50년에 해내야 할 가장 적절한 문제일지 모르는 이런일이 지나쳐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아마도 문제의 복잡성,문제의 난해성이 이런 문제를 덮어두고 가고싶은 이유일지 모른다. 어떤 이는 세계로 뛰어야 할 때에 지나간 과거사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론을 펼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과거가 바르게 정리되지 않으면 새출발은 언제나 뒤뚱거리게 돼있다.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는 잘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에도 친일문제에 전혀 진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80년대에 들면서 학계등 민간분야에서 친일파 연구를 계속해왔고 이 분야 저술만도 30여가지나 나와있다.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질시와 보이지 않는 압력속에 해낸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공인이라고 할까,공정성에서 검증을 거쳤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또 그것으로 친일의 문제가 정리됐다고 볼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친일의 문제는 자료가 불충분하고 오랜시간이 지난 일들이어서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또 친일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도 난해한 일이다.그렇다고 해서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민족사적 일을 영원히 방치할 수 는 없는 일이다. 반민족연구소의 김봉우소장도 『이 문제에 대한 총체적 점검 없이는 자연의 시간은 흐르겠지만 역사의 진전을 기대할 수 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우리는 이 문제로 10년 20년을 또 허비해서는 안된다.빨리 끝내기위해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가 나서기 어렵다면 민간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짚어야 한다. 「6공」초기 광주사태 청문회가 실제로 무엇하나 풀어준 것은 없었으면서도 광주사태를 정치적으로 걸르는데 얼마간 효험이 있었듯이 친일의 문제에도 하나의 「의식」이 필요하다. 국민적 차원의 대토론회도 좋고 일주일쯤 시간을 내어 TV에서 마라톤심야토론회를 벌여도 좋을 것이다.죽은 자나 산 자나 역사의 심판은 면할 수 없듯이 친일의 문제도 하나의 이슈로서 역사의 심판없이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 “반민족청산”…「친일사전」만든다/반민족연구소 97년완간목표 대작업

    ◎오욕 역사 8백쪽짜리 25권에 담아/인명 2만5천명·단체 수백곳 망라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지 어느새 50년. 아직도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씁쓸한 현실 탓에 광복 50주년을 맞는 새해 벽두부터 민간차원의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어느 단체보다도 바쁘게 한해를 열고 있다. 『일제잔재의 명쾌한 정리 없이는 선진화도,세계화도 불가능합니다』 을해년을 맞은 반민족문제연구소의 김봉우(45)소장은 새해인사도 다닐 겨를이 없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친일파관계자료와 친일논문들을 정리하느라 눈코뜰 새가 없다. 적어도 올해안에 숙원사업인 「친일사전」의 골격을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사명감 때문이다. 『친일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민족의 불행이요,수치이지만 해방이후 반세기동안 지속돼온 역사의 치부를 더 이상 덮어둘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소장의 반문처럼 반민족연구소 연구원들이 민간차원에서 오욕의 친일역사를 정리해 역사의 물꼬를 바로잡겠다는 당찬 포부을 갖고 연구소문을 연 것은 91년. 처음엔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뜻을 같이 하는 대학교수 10여명이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곧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주택가 20평남짓한 공간에 정식으로 연구소간판을 달았다. 또 「친일파99인」「청산하지 못한 역사」등의 관계서적등을 출간해 세간에 친일역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밑거름을 다지기도 했다. 친일사전 발간은 그중에서도 이 연구소의 설립기반이라 할 만큼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다. 사전은 친일인사와 단체,친일을 부추긴 그릇된 이론및 역사적 평가등을 모두 담아 권마다 8백여쪽짜리 25권의 전집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15권은 인명편으로 구한말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준 을사오적에서부터 친일관료·경찰·군인등에 이르기까지 친일인사 2만5천명을 망라할 예정이다.또 다른 5권은 일진회·조선임전보국단등 수백여개의 친일단체및 식민사관등 친일이념을 따로 모은 「단체·이념편」으로 인명과 함께 이 사전의 기본골격을 이루게 된다. 나머지 5권은 조선총독부 공식문서와 반민족재판기록,친일인사의 일기·논설등 저작물,프랑스등 외국의 반민족자처벌사례등 1,2차사료만을 따로 모은 참고자료의 성격을 띤다. 현재 자료정리가 한창인 이 작업은 그야말로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침투한 「친일」과 그 이후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친일잔재」에 대한 총정리인 셈이다. 오는 광복절안으로 자료수집과 정리작업을 마치고 그뒤 1천여 필자를 동원해 집필작업에 착수,97년 완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4년동안 친일파와 관련된 자료및 정보수집을 위해 일본정부 문서보관실과 박물관은 물론 국내 산간오지등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한길만을 걸어온 김소장은 『지금 청산에 나서지 않으면 일제잔재청산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상투어구 속에 묻혀버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 광복 50/「부민관사건」 주역 조문기옹은 말한다

    ◎“일본은 진심으로 사죄 한 적 없다”/속죄는 한풀이 아닌 선린우호 위한 “첫발”/일부 젊은이 왜색 심각… 「한국혼」 회복 절실/45년 친일파대회 폭탄투척… 건국포장 받아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 가장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한다.그러기 위해 일본은 진심으로 과거사를 사죄해야 합니다』 일제때 국내 마지막 무장항일운동인 부민관사건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씨(68·광복회 경기지부장·경기도 수원시 천천동 주공아파트)는 광복 50주년인 새해를 맞아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일본」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애국청년단」 결성 부민관사건은 해방직전인 45년 7월24일 서울 부민관에서 친일민족반역자 박춘금의 주최로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라는 친일어용대회장에 조씨,유만수(작고)등 애국지사들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이들은 같은해 5월 서울 종로구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 모여 「대한애국청년단」을 조직하고 일제를 단죄하면서 조국의 독립정신을 떨칠 기회를 믿고 있던 중이었다. 조씨등은 부민관사건으로 당시 5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는등 일제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고향인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 야학운동을 펼치다 광복을 맞았다. ○약탈문화재 반환을 조씨의 경우 광복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어왔으며 지난 82년 건국포장을 정부로부터 수여받았다.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의 관계에서 벗어나 선린우호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바로 일본이 과거를 사죄하는 것입니다』 조씨는 일본의 사죄요구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서의 한풀이가 절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사죄가 첫번째』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지의 여부는 일제 강점동안 한국으로부터 「도둑질」해가고 약탈해간 것을 모두 돌려주고 피해를 갚을 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즉,한­일간에 문제로 지적돼온 문화재반환·재일한국인 처우향상·역사왜곡 시정·정신대 문제등 각종 현안에 대해 성의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재일한국인의 경우 그들 대부분이 자의가 아닌 일제의 징용등으로 일본땅에 끌려간 만큼 일본은 그들을 내국인 보다 더 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한국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본 스스로 더 잘 알것』이라면서 『일제의 무죄성을 주장하는 망언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는 2000년대의 새로운 한­일관계 형성을 위해 일본의 사죄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국내의 「한국혼」되살리기가 더 시급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여기가 일본땅인지 한국땅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고 온나라가 질서를 잃고 있는데 이 것은 바로 우리나라가 「혼」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일본 동경대 역사교수로부터 「한국사람은 겉으로 반일을 외치지만 오늘 이 시간 일본이 한국을 재침할 경우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국기를 만들어 거리로 나와 일본군을 환영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부터라도 국가적으로 한국혼 되살리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교육 바로서야 그는 『대화혼을 숭상하는 일본과 한국혼을 잃은 한국이 충돌했을 때 누가 이길지는 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가 지난 5000년간 변변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어도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조들이 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라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앞으로 정부에서 민족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혼 살리기 교육」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이번 광복 50주년 행사는 지난 50년간 되풀이 돼온 일회성 행사 차원에서 한단계 높은 행사로 승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광복절 행사의 참석자들은 모두 동원된 공무원으로 자리에서 몸을 비비꼬며 한시바삐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면서 『물론 행사도 있어야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후세에 민족정신교육자료로 활용될 문화유산을 만드는 일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노 독립운동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관계의 정립과 한국내부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을 끝냈다. 조씨는 10여년 전 외동딸을 출가시키고 부인 장영심씨(66)와 8년전 입주한 16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광복회일에 열중하고 있다.
  • “왜곡된 한·일관계사 바로잡자”/이성적 극일의 길 어디에

    ◎일학계 논거 침략합리화서 출발/뒤틀린 「그들의 논리」 극복이 과제 근대 이후 공식적인 한일관계는 흔히 불평등조약으로 불리는 1876년 2월의 「조일수호조규」로 시작되었다.일본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피해 또한 이때부터였다. 「조일수호조규」는 일본측에 치외법권 및 연안측량권·해도작성권 부여,조계지 설정,무관세 및 일본화폐의 국내유통 허용 등 정치·군사·경제부문에 걸쳐 광범위하게 불평등한 조항을 명기했다.더구나 조약의 유효기간 및 폐기조항을 명시하지 않아 불평등 조약의 무기한 존속을 허용한 꼴이나 다름 없었다.그러나 당시 조선정부는 이 조약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일본은 일찍부터 우리를 알았지만 우리는 일본을 몰랐던 결과였다. 일본의 한국연구는 에도(강호)시대(1603∼1867)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이미 이퇴계의 학문을 존경해 연구하는 주자학자들과 「일본서기」 등 일본 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그리고 국방상 필요에 의해 조선을 인식하는 「해방론자」들이라는 세 부류의 조선연구자가 있었다.특히 이때 「국학자」들에게서 형성된 조선관은 「일선동조론」에 따른 「정한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일본은 1885년 도쿄제국대학에 사학과가,그 2년뒤에 국사과가 설치되면서 근대역사학이 출발했고 한국사 연구도 본격화됐다.이 때 이들의 관심사는 역시 「국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사가 중심이었다.이후 일제의 한국병탄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침략행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갔다. 일본에선 지금도 교토대와 규슈대 오사카대 도쿄대 메이지대 덴리대 등 대학연구기관과 동방학회 동양문고 역사학연구회 조선사연구회 조선학회 등 민간연구기관에서 한국학 관련 학술지를 내는등 한국연구 열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일본연구는 해방뒤 각 대학의 사학과와 일어일문학과가 중심이 됐으나 성과는 부진했다.그러다 1970년 이후 「한국일본학회」와 「한국일어일문학회」「한일경상학회」「한일 법과 사회 연구회」「현대일본연구회」같은 일본관계 연구기관이 나타나며 본격화되었다.또 계명대 「일본문화연구소」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부산대 「일본문제연구소」,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중앙대 「지역연구소」,덕성여대 「한일문화비교연구소」 등이 차례로 문을 열며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이 연구소들과는 별도로 개별적인 일본학 연구도 비교적 활발해지고 있다.연구기관들이 역사나 정치 어문 등 분야를 중심으로 한다면 사회·경제·인류학 등 분야는 아직까지 개별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양에서 앞서 나간 일본의 한국연구는 그 아전인수격 해석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학설로 굳어져 우리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우리 일본연구는 일본인들의 논리를 완전히 극복하는 순간 비로소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는 셈이나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일본연구를 국가·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관계전문가들은 말한다. ◎“「특수한 나라」 아닌 객관적 접근 필요”/일본전문가 한경구 교수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은 세대는 누구나 자신이 「일본을 안다」고 생각하지요.젊은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그러나 일본의 실상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일본전문가인 한경구 강원대 교수(38·인류학)는 『우리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서 『그 때문에 일본여행을 하거나 심지어는 몇년씩 머물러 책까지 쓴 사람도 「볼 준비가 되어 있던 것」밖에는 못 보고 온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교수는 『일본 대중문화개방에 대한 논란도 「일본은 특수한 나라」라는 인식 때문』이라면서 『이제 일본을 다른나라와 같은 하나의 외국으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적용할 기준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교수는 『불과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연구자는 거의 「친일파」쯤으로 대접받았으나 이제는 분위기가 바뀌어 거의 1만명이상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일본을 알기 위한 분야보다는 일본을 이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분야에 국한되어 오히려 고급인력의 유출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일본대중문화개방… 분야별 파장과 대책 ○영화/성인용 비디오시장 무방비… 쿼터 제한해야 일본 영화의 전반적인 수준이나 규모로 볼때 우리 영화시장에 대한 일본영화의 잠식력은 그리 크지 않으리란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다만 성인용 만화비디오는 빗장이 풀릴 경우 우리 업계에 만만찮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일본 만화영화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65%에 이를 정도로 일본이 애니메이션 왕국일뿐 아니라 국내업계가 하청제작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구조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디오매출의 일정비율을 영화진흥기금으로 징수하는 방안과 영화관의 의무상영일수에 준하는 비율로 극영화 비디오 의무배급제(비디오쿼터제)를 시행하는 방안 등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대비책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점은 산업적인 피해보다는 정서적인 악영향이 심각할 것이라는 점이다.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상품은 단순한 상품만이 아니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기 때문이다.일본 영화와 비디오의 폭력성과 외설성을여과할 수 있는 장치가 든든하게 마련돼야 할 것이다. ○가요/자본력 취약한 국내 음반업계 도산 우려 국내에서 일본가요를 즐기는 20세전후의 청소년층에게 일본가요는 2∼3년전에 비해 다소 인기가 떨어진 상태.현재는 신예그룹 「X」,가수 요시키 및 나가부치의 음반등이 인기를 끌고있다. 이 음반들은 현재 공식수입되지 않기때문에 서울 청계천 일대나 일부 레코드가게 그리고 리어카 행상등을 통해 음성적으로 유통된다.연간 2천5백억∼3천억원에 이르는 우리 음반시장에서 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될 경우 문제는 일본 가요 자체보다는 우리 가요가 일본에서 제작돼 역수입되는 것.일본은 음반제작기술,특히 효과음을 삽입하는 기술이 발전해 있다.일본은 국내가수 일부를 이미 국내에 진출한 자회사등에 전속시켜 놓고 있으며 「무시로」등 국내 가수들이 일본어로 취입한 음반이 역수입돼 인기를 끌고있는 상황이다.음반시장 개방시 일본 음반회사들이 자본과 기술력을 내세워 우리 가수를 고용,우리말로 취입한 뒤국내시장에 내놓는다면 열악한 국내음반회사들이 받는 타격은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만화/이미 70%이상 잠식… 제조업수준 지원을 일본의 대중문화가 개방되면 가장 빠른 기간에,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가 만화산업이다.동아시아에서 만화가 인기높은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태국 등인데 이 가운데 일본만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대만·홍콩·태국에서는 일본만화가 이미 시장의 95%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화업계는 일본만화가 정식으로 들어온다면 국내 만화시장도 2∼3년만에 이 나라들과 비슷한 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지난해 나온 만화 6백여만권 가운데 70% 가량이 일본만화에 국내작가 이름을 붙였거나 대사만 우리말로 바꾼 사실상 일본만화라는 것이 업계의 추산이다. 따라서 만화계 인사들은 『개방시점을 되도록 늦추고 그동안 정부와 만화계가 힘을 합쳐 경쟁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만화산업에도 제조업에 준한 세제혜택을 주고 ▲4년제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만화 전문과정을 설립,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방송/매체 영향력 커 개방시기 가능한 늦춰야 매체의 영향력이나 파급효과면에서 파장이 엄청날 것을 감안,방송은 당분간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책당국의 방침이다. 그러나 일본서 수입된 TV만화영화,우리 방송의 폐습인 일본프로의 모방·표절,파라볼라 안테나를 타고 들어오는 위성방송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거의 개방된 셈.특히 위성방송은 매년 수신가구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현재 80만가구 이상이 수신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위성방송은 해외정보 습득이라는 순기능 보다 저질 일본문화와 일본식 사고·행동방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역기능 때문에 문제다.또 시장에서 일본상품의 수요창출을 부추기는 간접효과도 초래한다. 내년 4월 방송통신위성 무궁화호 발사로 12개의 가용채널이 생기고 여기에 외국 위성방송까지 합치면 97년 80여개,2000년까지는 1백60여개의 채널이 시청가능해 진다.이같은 방송환경 변화와 일본 대중문화 침투가 연결되면 어떤 사태가 빚어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방송관계자들은 일본 대중문화개방에 앞서 방송프로그램 제작능력이 제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를 위해 ▲프로그램 제작단지의 조성 ▲전문인력 양성기관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이다.아울러 시청자 교육도 병행해야 할 것으로 지적한다.
  • 새해 광복 50년… 어떻게 맞아야 하나/특별대담

    ◎민족역량 이젠 통일에 모으자/일제 36년 원망에 너무 긴 세월 보내/민주정치·경제발전 성취… 우리 실상 재점검을 광복 5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왔다.지난 반세기에 우리나라는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역량을 높여왔다.장년한국의 자랑스러운 모습 뒤에는 급속한 발전의 그늘에서 파생한 문제점 또한 없지 않다.서울신문은 창간 49주년을 맞아 다가온 광복 5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고 아직도 남아 있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성숙한 대일관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21세기 바람직한 한국의 모습을 전망하는 대담을 마련했다. ▲이만열교수=광복 50년은 일제통치 36년만을 원망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지요.기독교계에선 50주년을 희년이라고 하는데 광복 반세기는 우리 민족사 측면에서도 뚜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용하교수=일종의 성년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요.따라서 광복당시의 상황을 다시 짚어보면서 지난 50년간의 발자취를 검토,성과를 음미·반성해볼 때입니다.지난 시절의 검토와 반성을 통해우리의 현위치를 정확히 점검하고 21세기를 구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이교수=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난 50년은 민족사에서 3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첫째 최초의 근대화국가를 성립,발전시켰고 둘째 봉건적인 사대관계와 식민지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국가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입니다.셋째는 과거 국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관계 이외는 거의 폐쇄적이다가 지난 50년간은 세계사에 개방적으로 진출하여 이제는 세계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50년발전상 괄목 ▲신교수=많은 일본인 학자들은 광복후 50년간의 우리의 근·현대화 성과를 일제 식민지정책의 역사적 산물로 주장하고 있지만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억지이지요.일본이 36년간의 식민통치에서 정치적으로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소멸시켰고 경제적으로는 한국인의 산업발전을 극도로 억압하면서 반봉건적 지주제도를 적극 엄호했으며 사회적으로는 한국인은 어떠한 시민권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저극 저지했습니다. ▲이교수=성과측면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문민정부의 출범이란 정치적 업적을 달성했고 제3세계에 대한 원조등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자유·평등권 신장등 사회·교육및 문화적 성과가 괄목했지요. ▲신교수=그중에서도 「건국」을 그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당시 우리의 건국은 민주공화국체제의 출발을 의미합니다.한국전쟁으로 타격을 받고 61년 군사정변이후 오랫동안의 군사통치와 독재의 양상을 띠었지만 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적으론 일단 민주체제를 확립했다고 보여집니다.경제적으로도 1인당 국민소득이 62년 82달러에서 지난 연말 8천달러에 육박한 수준이고 보면 그간 한국의 경제적 성취는 인류사에 기록할만한 업적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물론 문제점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이교수=그처럼 괄목할만한 업적을 성취한 동인은 여러가지가 있지요.무엇보다도 저는 36년간의 식민통치와 동족상잔의 6·25전쟁등 민족적 비극을 자기발전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변통성을 꼽고 싶습니다.전통사회와 식민통치시절,그리고 해방이후에 일관되게 나타난 교육열도 큰 역할을 했고요.여기에 근면성이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지요. ▲신교수=사회·문화측면에서 각계각층이 모든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과 여성의 사회참여도 적지 않은 부분입니다.이젠 정치민주화에 사회민주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국민의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게끔 됐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는 낙관적으로 예견되기도 합니다. ○사회도덕 큰 위기 ▲이교수=흔히 문화발전의 지표로 간주되는 출판만 보더라도 지금은 연 2만6천여종의 책이 출판되면서 아시아권에서 절대·상대적으로 일본과 비슷하거나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니까요.그럼에도 반성할 부분이 많습니다.과거미청산문제 말고도 빈부격차 심화나 지역·집단이기주의의 극성등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말입니다. ▲신교수=건국직후 친일파척결을 못한 점은 가장 큰 과오라고 할 수 있지요.친일파의 해악은 자유당 집권시절 만연한 부정부패 말고도 이후 정·관계에 진출해대일자주외교를 방해한 점이나 민족이익과 자주성·민족정기확립에서 결정적인 저해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이교수=반민특위 조사대상 6백80여명 가운데 집행유예 5명,실형 7명,공민권제한 18명등 처벌대상자가 30명에 머문 것은 식민잔재청산노력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4년밖에 안된 나치점령에 대해 프랑스는 사형과 수감 2천여명,공직제한 2만여명 수준이었습니다. ▲신교수=경제적으로 한국경제의 대일종속도는 심각한 수준입니다.미국등 여타지역에서 벌어들여 일본에 쏟아붓는 실정이니까요.국내적으로도 중소기업의 취약성과 농업대책의 소극성,실직자나 극빈자등 최저변층에 대한 사회복지대책의 빈약함이 피부에 와닿을 정도입니다. ▲이교수=맞습니다.사회통합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지요.거시적으로 볼 때 통일문제까지가 당면문제임에 틀림없구요.지방색과 집단이기주의 만연,심지어는 종교간 갈등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교수=현재 사회적으로 군데군데 보기 흉한 반점이 생겨난 데는 고도발전에 기생하여 나온 불로소득층이 가장 큰 원인이지요.이 과정에서 정당한 절차와 규범이 무시된 채 일확천금등 일시적인 성취욕구와 군사문화가 혼합돼 불로소득층이 생겨났고 이들이 생산적인 생활양식을 침범한 채 퇴폐문화등 모든 문제를 일으켜온 셈입니다. ○일본알아야 극일 ▲이교수=대가족주의에서 서양문화 유입에 따른 핵가족주의로의 이행도 이런 부작용과 연결돼 있지 않을까요.이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공동체의식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제도와 함께 정직·근면·절약등 그 정신도 제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교수=과학기술지식등 고급문화는 배우되 퇴폐·향락적인 측면은 심각하게 걸러내는 문화정책을 적극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이교수=흔히 대일관계에서 「극일」을 거론하지만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정직」은 우리도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정직은 정밀공업등의 각종 산업활동에서 양심의 척도로서 제품을 생산토록 합니다.그런 점에서 최근 성수대교참사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신교수=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도덕과 규범이 도전받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위기임엔 틀림없습니다.도덕과 규범에 관한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사회교육을 철저히 강화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지요.더욱이 일본이 아시아를 자국의 철저한 영향권아래 두려는 「신대동아공영권」구상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는 분위기에서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일본의 정책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말려들지 않는 국가·대외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국제사회 흐름 능동대응 기틀 마련 ▲이교수=최근 활발히 논의중인 일본대중문화개방도 같은 맥락에서 숙고할 필요성이 있겠지요.일본은 「신대동아공영권」구상을 순탄하게 실행하려는 차원에서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적고 접근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대중문화개방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신교수=일본은 대중문화개방을 요구하면서 보편적인 관계를 들지만 한·일 양국은 결코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특수한 관계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교수=특수관계라는것은 무엇보다도 양국간에 식민지시대의 청산이 안됐고 재일한국인차별대우나 문화재반환등 양국간의 특수한 현안처리가 답보상태에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예겠지요.따라서 한·일관계는 아직도 세계사적인 보편적 원리를 적용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비단 대일감정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일본대중문화의 속성상 개방이후의 파급효과와 대책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신교수=일본의 호혜주장에도 문제가 있지요.호혜는 양쪽이 모두 헤택을 본다는 뜻이지만 시장성을 앞세워 경제적인 침투를 염두에 둔 일본대중문화개방압력은 호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이것 말고도 한 영화에서 칼로 사람을 30∼50명씩 참혹하게 죽이는 사무라이·야쿠자영화는 현실적으로 모방가능한 위험성을 동반하여 어쩌면 우리 청소년교육을 송두리째 망칠 우려가 짙지요. ▲이교수=문제는 일본을 철저하게 알아내려는 노력입니다.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통상조약에서 우리가 핵심조항인 치외법권과 관세권에 문외한인 채 일방적으로 당한 것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손해가 적지 않은 만큼 일본의 핵심을 철저하게 파악해내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합니다.정서적인 거부감을 이유로 「일본탐구」를 외면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신교수=일본문화개방만 하더라도 일본정부의 숨겨진 의도와 정책을 충분히 검토끝에 추진중이냐 하는 데는 회의적이지요.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과 선진대열 합류,남북통일등 현재 추진중인 정책은 계속 추진하되 실속 있는 실상점검과 대책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교수=지난 50년간 민족적 역량이 커진 만큼 대일관계를 포함해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화·성숙해야 합니다.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민족사적인 과제로서 민족통일의 문제가 있습니다.분단은 우리 세대가 후손에게 남겨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통일문제와 관련,정부가 취해온 창구단일화의 논리는 지양해야 합니다.우리가 성장한 만큼 지금부터는 제3세계와 약소국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등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지혜롭게 감당해야 합니다.21세기 한국은 우리와 이웃과 세계를 다같이 풍요롭게 하는 데에 공헌하는 진정한 문화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더욱 전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 친일파 등 오류부분 전면수정·보완키로/교육부

    교육부는 산하기관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간하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수록된 친일파및 북한항목중 오류부분에 대해서는 연구성과등을 최대한 반영,전면 수정하거나 보완키로 했다. 26일 교육부가 국회에 낸 주요업무 보고자료에 따르면 친일파에 관련된 내용의 경우 「실록친일파」 「친일파 99인」 「친일파군상」 「민족정기의 심판」 「반민족대공판기」등 최근까지 발굴된 문헌및 자료,연구성과등을 철저히 검토한 뒤 오는 12월 발간예정인 「보유편」에서 우선 보완키로 했다. 특히 교육부는 사계의 권위있는 학자·전문가 2백여명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의 철저한 검토를 거쳐 친일경력자의 친일행적이 누락됐을 경우 민족정기의 회복차원에서 2000∼2001년 발간예정인 「증보개정판」(30권)에 전면반영할 계획이다. 이와함께 북한항목의 경우 관계전문가들로 전담반을 편성하고 남북관계의 변화와 학술교류 진행등에 따른 성과를 적극 반영키로 했다.
  • 친일파(외언내언)

    우리사회에서 일제때의 친일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친일청산만이 민족정통성 회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친일에 관한 언급자체를 경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친일문제를 지나간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집착정도로 폄하하여 『언제까지 과거사에 매달려 있을 것인가』하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광복후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반민족친일문제가 청산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현상인 것이다.일부친일세력이 해방후 반공국가건설과정에서 지배세력으로 계속 이어지게 됨으로서 왜곡된 역사의 흐름탓이라 할 수 있다. 평생을 친일문제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씨에 의하면 친일파는 제헌국회의 의석 5%정도를 차지했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나 제4대 국회때는 10%를 넘어섰다.자유당시절 장관중에는 34%가 과거의 친일파였고 허정과도내각때는 60%에 이르렀으며 경제계에는 더욱 많아 55∼65%가 친일파였다고 한다.심지어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자명단에서도 30여명의 친일파를 그는 발견해냈다.물론 친일파논의가 오늘 우리에게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자진해 나선 적극적 친일파와 피동적으로 끌려나가 활동한 소극적 친일파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그러나 어느쪽이든 친일행적을 지닌 인사가 독립유공자나 민족주의자로 미화돼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족문제에 의견을 같이 하는 의원들」의 친일논의는 의미가 있다.그들의 시정요구에 의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간)에 수록된 친일경력자의 기록수정이 95년 증보개정판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서를 담은 것으로 알려져 특별한 사랑을 받은 홍란파의 「봉선화」도,윤해영의 「선구자」도 그들의 친일경력이 밝혀진 후엔 빛을 잃었다. 상처를 깨끗이 씻지 않고 약을 바르면 상처위에 새 살이 돋긴 한다.그러나 그 상처는 결국 덧나게 마련이어서 새 살을 도려내고 상처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아픔을 겪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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