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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의 책]

    ◆공자의 이름으로… 중국의 명·청대에 한창 나이의 여성이 많이 숨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예문서원이 펴낸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전여강 지음,이재정 옮김)은그 이유로 정절을 강조하는 당시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꼽았다. 명·청대에는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의 가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국가가 보상을 하고 각 지방 관아에서는 ‘열녀’를 추앙해,결과적으로 수절과 자살을 장려했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또 당시 과거시험의 경쟁 심화로 남성들이 깊은 좌절을 겪게 되고,이것이여성 자살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자살 여성이 많은 곳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학자의 수도 많았다는 것.귀신이되면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도 여성을 죽음으로 몰게 한 주요원인이라고 책은 말한다.저자는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공자(유교)의 이름으로’ 죽었으며,‘공자가 죽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값 7,500원. ◆증언 반민특위… 해방직후 구성된 ‘반민족행위 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주요 인사 7명의 최초 증언록이다.제목은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정운현 지음,삼인 펴냄). 저자는 이 책의 가치를 사장될 뻔했던 역사의 편린을 담은 ‘행운의 책’이라고 평가했다.그래서 증언자들의 말투까지 실어 진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노력을 보였다. 80년대초 귀순한 신경완씨의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에 대한 증언은 사료적인 가치를 더한다.뛰어난 기억으로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를 소상하게 밝힌신씨는 증언 3개월만에 작고했다. 증언자들은 반민특위의 구성경위와 체포 당시의 반민족주의자들의 태도 및수감 때의 정신상태,반민특위 해체를 부른 이른바 지난 49년의 ‘6.6사건’전말,반민특위 활동자의 역사의식과 개인적인 성향,특위관계자에 대한 이승만과 친일파의 협박 및 회유책도 소상히 전하고 있다.값 9,000원. ◆정치야 맛좀 볼텨 시사 만평의 묘미는 짓눌리고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주는 데 있다. 시사 만화가 박재동씨의 ‘정치야 맛좀 볼텨’는 작가가 지난해 TV 시사만평에서 세태를 풍자한 시사 애니메이션 작품을 그림과 함께 CD로 구성한 것이다.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 사회의 환부를 촌철살인의 시각으로 날카롭게 꼬집어독자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든다. 책에는 39개의 얘기가 실려 있다.고급옷 로비사건을 비롯해 세풍사건,한일어업협정,대기업 빅딜 등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굵직한 사건을 다룬다.정치적으로 민감해 TV에 방영되지 못했던 작품들도 모두 담았다.한 시대의 정치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품마다 기획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세하게 실어,시사 애니메이션 작가 지망생의 교재로 활용될 수 있다(박재동 지음, 산성미디어 펴냄). 값 1만2,000원. 정기홍기자 hong@
  • [독자의 소리] 친일인사 인명록 발간 노력에 박수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 3,000여명을 10여권의 사전에 담는 대 사업을진행중이라 한다.전국교수 1만여명의 지지서명을 받았다고도 한다.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났지만 오늘까지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그것은 아직도 사회지도층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휘두르는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는 선열들은 물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다.민족문제연구소의 이러한 노력이 그래서 더욱 고귀하다. 친일매국인사 청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한다.이번에도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광복되지 못한 부끄러운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셈이 될 것이다. 김석영[경기도 수원시 매탄2동]
  • [특별시론] 색깔론 세력의 반역사주의

    요즘 우리사회에 참으로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해방이후 친일파들이 독재정권을 등에 업고 설쳐대듯이,그런 비슷한 양상이다. 군사독재정권시대에 민주화를 가로막고 인권을 탄압해온 하수인들,공안출신,부패관리,타락한 언론인들이 ‘천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이른바 비판세력이 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대통령의 ‘용서와 화해’무드에 교묘히 편승하면서 야당이란 방패로,언론이란 명분으로,지식인이란 구실로 개혁과 남북화해에 제동을 건다. 제동을 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되돌리려 든다. 국가부도위기를 불러온 YS의 정치재개를 비판하기보다 엉뚱하게 3김청산으로 DJ를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 작전을 펴고,정경유착과 문어발 선단경영,재산해외도피,IMF환란을 초래한 재벌에 대한 개혁을 “김대통령의 이념적 지향점에 국민이 불안하다”면서 사회주의적 노선인 것처럼 물고 늘어진다. 유엔 인권위를 비롯,양심있는 국민 사이에 보안법의 독소조항 개폐는 상식처럼돼 있는데도 이를 두고 색깔론을 전개한다. 해방후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함으로써 정의로운 민주사회 건설에 실패했듯이 DJ정부 역시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하면서 사세를 늘리고 영향력을 키워온반민주세력,언론,지식인을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개혁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있다. 군사독재의 음습한 늪에서 인적·물적 기반을 키워온 이들은 DJ집권과 함께 기득권 상실과 자신들의 힘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며 국민의 정부에 상처를입히고 DJ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에 모든 역량을 동원한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첫째,국보법 개정이 ‘북측 주장을 정부가 수용’하는것인가. 노태우정부의 7·7선언 이후 우리 정부는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기본합의서의 제1조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보안법 제2조는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또 제7조의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이적표현물 소지,제8조의 회합·통신,제10조의 불고지 조항 등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지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국내외의 비판이 따른다. 남북관계는 경수로 건설,금강산 관광,4자회담,차관급회담,기업의 남북합작투자,물품교역,종교·언론·체육인 방북 등보안법 제정 당시와는 상상도 못할 변화가 일고 있다. 이런 법조항을 고치자는 것이 공산주의자란 말인가? 둘째,독재정권과 유착하여 권력유지비를 대고 천문학적인 부채를 국민부담으로 떠넘기면서 책임도 지지 않는 일부 재벌을 개혁하지 않고는 건전한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재벌의 개혁이 사회주의적 처사라면,2차대전후 일본재벌을 해체시킨 맥아더장군은 공산주의의 수괴쯤 된다는 것일까.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뜯어쓰거나 재벌의 광고를 통해 사세를 키워온 집단이 아니고는 한국재벌의 변태성을 고치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셋째,언론의 자세문제다. 3김청산론을 펴면서 자신들이 속한 언론사의 세습과 족벌체제는 왜 침묵하는가. 외부의 부패는 질타하면서 왜 내부의 부패는외면하는가. 국세청을 동원하여 수백억원을 모으고 그것을 측근들이 몇억원씩 나눠쓴 것과 장관부인들의 고급옷 사건의 죄질은 어느쪽이더 나쁜가. 언론의 비판의 잣대는 이중적이어도 되는가. 넷째,군사독재에 부역해온 지식인들의 카멜레온같은 행동은 묵살하더라도진보적·양심적 지식인들의 처신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국가개혁의 큰 흐름과 방향에는 침묵하면서 일부 비리·비행을 총체적인 부패로 몰아치는 비판활동은 근시(近視)지식인의 행태가 아닌가. 더구나 입만 열면 보안법 철폐와 재벌개혁을 외쳐온 지식인·사회단체·학생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상대를 용공으로 모는 매카시즘에 침묵하는 이유는또 무엇일까. 이같은 침묵과 방관 속에서 수구세력은 여론을 좌지우지하며개혁을 가로막는다. 청산의 대상이 개혁세력을 청산하고자 하는 한국적 파토스는 자칫하면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걸핏하면 ‘이념적정체성’ 운운하면서 상대를 용공으로 모는 수구세력과 왜곡 언론을 방치하고는 역사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한 데는 DJ정권의 책임이 크다. 역사적 청산작업을외면한채 어설픈 온정주의에서 개혁의 동반자로 삼으려다가 역습을 당하게된 것이다. ‘강권통치 앞에서는 비굴하고 온건한 정권에는 난폭한’ 일부 언론의 전횡이 바뀌지 않고서는 남북평화공존도,재벌개혁도,부패청산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다수 지식인과 정부는 그걸 모르는 것 같다. kimsu@
  • 의열단 抗日투쟁 기록 첫 공개

    1920년대 무력 항일결사조직인 ‘의열단’의 생생한 항일운동 내용이 담긴재판판결문이 처음으로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의열단에 관해선 지금까지 개인의 회고록이나 신문보도 등에 의존해 연구됐을 뿐 단원의 인적사항과 행적이 자세히 담긴 판결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처음이다.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는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의열단 열사들의 항일운동을 담은 경성지방법원의 1921년,1923년 판결문을 발굴해 공개했다.3건의 판결문에는 의열단 열사들의 인적사항과 경력에서부터 조선총독부 파괴,친일관료 암살계획 등을 담고 있다.또 독립자금 조달과 폭탄구입·폭발물 밀반입 과정 등도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1919년 6월 중국 지린성 통화현에서 이성우(李成宇·당시 22세) 김원봉(金元鳳) 양건호(梁健浩) 서상락(徐相洛) 김옥(金玉) 등 5명은 독립을 위해 의열단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고 판결문은 전하고 있다.의열단 결성이 같은해11월이라는 그동안의 주장과 다른 대목이다. 이성우 등은 곽재기(郭在驥·당시 29세)와 함께 그해 10월 다시모임을 가졌다.이 자리에서 의열단원들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 등의 주요건물을폭파하고 총독부 고관·친일파를 살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곽재기는 윤치형으로부터 독립자금 1,000원을 받아 상해에서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사들였다. 중국 안동현으로의 운반과정에는 영국인 세관원도 개입됐다.이들은 이듬해 4월12일 폭탄을 고량주병에 넣어 경남 밀양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의열단 열사들의 거사는 일본 밀정에 의해 탄로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이성우와 곽재기는 폭발물 취급벌칙 위반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밖에도 김한(金翰) 안홍한(安弘翰)은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사이토 총독암살계획에 가담해 자금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저지르려다 구속·수감됐다는새로운 사실도 판결문에서 밝혀졌다. 까닭에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고서도 강도예비죄라는 죄명으로 80년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판결문은 의열단 결성시기 등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잡는 등 항일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정현기자jhpark@
  • [義烈 독립투쟁] (1-1) 역사적 의의와 성과 전문가 좌담

    대한매일은 광복 54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의열투쟁에 몸바친 의사·열사들의 독립투쟁 활약상과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의열 독립투쟁’을 주간 특집기획물로 연재한다.의열투쟁은 주로 개인차원에서 전개됐으나 중국의 장개석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두고 ‘중국 군인 30만이 못하는 일을 고려청년한 사람이 해냈다’고 할 정도로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의·열사가운데 상징적인 몇 분을 제외하고는 낯선 이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연재에 앞서 전문가 좌담을 통해 의열투쟁의 의의,성과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김삼웅 주필 지난해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이래 민족사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본지는 친일파들의 반민족행위를 고발한 ‘친일의 군상’에 이어이번에 새로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몸바치신 의사·열사들의 일대기와 항일정신을 되새기는 연재물을 기획하였습니다.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더러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언론매체에서 이를 집중 조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이번 좌담모임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열투쟁사 연재에 앞서 의열투쟁의 성과나 역사적 의의 등을 짚어보기 위해 마련하였습니다.먼저 역사학계에서 내리고 있는 의사·열사의 용어 정의부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동양의 고전에서는 열사는도덕적 행위,의사는 사회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동걸 교수 우선 ‘의열투쟁’이라는 용어나 개념은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의열투쟁사’를 편찬해낸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의·열사를 정의한 것을 보면,의사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져 행동으로 실천한 분’으로 대표적으로 안중근,윤봉길 의사같은 분을 들 수 있겠지요.반면 열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로 저항한 분’으로 이준 열사가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수 있죠. 채영국 연구원 의·열사 구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보이는 특이한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중국에 갔을 때 ‘혁명열사기념탑’ 같은 것은 봤습니다만 ‘의사’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치 않는 것으로 압니다.두 용어를 구분하는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신용하 교수 의암 유인석 선생이 선비의 저항정신으로,첫째 무기를 들고적과 싸우는 유형,둘째 외국으로 망명,몸을 깨끗이 보존하는 유형,셋째 국내에서 자결,자정(自靖)하여 지조를 지키는 유형 등 세 유형을 들고는 그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첫번째 유형이라고 하였습니다.바로 이 저항정신이 의·열사의 정신으로 계승됐다고 봅니다.그 중에서도 의사는 개인차원이나혹은 집단적으로 특공작전을 한 분으로 개인 차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중근 의사를,집단적인 차원으로는 의열단,한인애국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 주필 그러면 이같은 의·열사들의 의열투쟁은 언제,무슨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으며 어떠한 행태를 띠고 있었는지,또 의병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어떤 책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격분을 참지 못해 현지에서 자결한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선생의 순국을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더군요. 조 교수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 의열투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의열단체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등장한 ‘오적(五賊)암살단’이 최초라고 봅니다.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은 1908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이며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아무래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부터라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계보는 1906년 나철(일명 나인영)·오기호(일명 오혁)등이 ‘오적’ 암살을 모의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물론 이들의 오적 처단계획은 도중에 발각돼 좌절됐지만 이를 계기로 1909년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탄생하였죠.전명운·장인환 두 의사의 의거는 국내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물론 미국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불러 일으켰습니다.흔히 일제하 의사들의 의거를 ‘테러’로 규정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는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왜냐하면 제국주의 하에서 약소민족이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행한 의열투쟁은 일종의 ‘특공작전’으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조 교수 미국이나영국 같은 나라들이 약소국의 그런 행위를 ‘테러’로규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미군의 OSS작전 같은 것도 그렇게 따진다면‘테러’지요.주임무가 주요기관 파괴·요인 처단 아니었습니까? 채 박사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의 ‘선언서’나 ‘격문’ 등에 나타난 의열투쟁 정신은 근본적으로 생존권 획득과 인류의 자유·행복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는 차원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는 정당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고 불렀듯이 우리입장에서 보면 일제는 ‘강도(强盜)’나 다름없었지요. 김 주필 일제하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에서 결행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독립진영에 미친 그 성과는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안중근 의사의 의거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의열투쟁의 전개양상과시기별 특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신 교수 무기를 사용한 의열투쟁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전쟁적 성격 ▲유격전 성격 ▲특공작전 등 세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병전을 전면전이라면 유격전은 전쟁중 적을 기습공격한 후 재빨리 빠져나와 계속 작전을 하는 방식입니다.반면 특공작전은 강대한 적의 목표물을 공격,치명타를 입힌 후 특공대원 자신도 자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 교수 의열투쟁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특공대원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결행한다는 신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반면 일제말기 ‘가미가제(神風)’의 경우 자기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는 학살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신 교수 의열투쟁의 경우 거사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 의사 가운데는 의거에 성공한분도 있지만 더러는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거사 전에 좌절됐거나 또 거사는결행했지만 실패한 분들도 있습니다.그러나 ‘살신성인’의 정신은 어느쪽할 것 없이 모두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채 박사 1910년대에 작성된 한 문건에 따르면,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간도지역에서는 조선동포들이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만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신(神)처럼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시기별 의열투쟁의 특징으로는,우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대개 ‘국권수호’를 내걸었습니다.1910년대의 의열투쟁은 의병의 세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준비한 기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본격적인 의열투쟁은 1920년대 들어 의열단 결성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3·1의거후 고조된민족의식과 의열투쟁의 여건이 성숙됐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에는 중국을 무대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겠죠. 김 주필 끝으로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사 측면에서의 의의나 평가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보면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빠져있거나 또는 일제의 통치가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주로 터져나왔습니다.이로써 일제에게는 큰 타격을 준 반면 우리 민족진영에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조 교수 일제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의병이나 계몽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가 점차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의열투쟁은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그런데 의열투쟁은 개인차원의 독립운동치고는 성과가 컸고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에 활력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후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안중근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경우라든지 또 윤봉길 의사의거후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임정을 주목,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수 백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큰 것이었지요.백범김구 주석이 환국후 그 복잡한 정치상황 하에서도 의·열사들의 유해봉환을중대사업으로 취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 안의사와 윤의사 두 분의 의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안의사가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분할 계획이 좌절되자 중국의 언론과 지사들은 안의사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돼만주와 중국땅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됐습니다.또 ‘만보산사건’으로 생겨난 한·중 간의 적대감은 윤의사의 의거후 곧바로 봄눈 녹듯이사라지고 말았으며 당시 장개석은 ‘30만 중국군대가 못한 일을 고려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극찬했습니다.‘김구-장개석회담’이 바로 윤의사 의거 직후에 처음으로 성사됐으며 중국측의 지원도 이 때부터 공식 시작됐지요.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을 극복하고 의열투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론정립이필요하다고 봅니다. 김 주필 일제하 선열들의 의열투쟁정신은 해방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계승된 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의열투쟁의 정신이 더욱 값진 교훈으로 다가온다고 하겠습니다.오늘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외언내언]‘8월의 친일인물’

    친일파 청산문제를 줄기차게 추진해오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박봉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8월의 친일인물’로 선정,발표했다.연구소 쪽은 인터넷홈페이지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는데,박 전대통령이 42년 당시 일본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거쳐 45년 8·15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군 중위로 복무한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70년 여름 필자는 인도네시아에 취재를 갔다가 가루다항공 국내선에서 인도네시아 육군 소령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수하르토의 쿠데타로 축출돼 보고르궁(宮)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수카르노가 얼마전에 사망했던지라,수카르노의 정치적 공과(功過)가 화제에 올랐다.소령은 수카르노가 친공(親共)노선에 기울었고 국제정치적 명성을 얻는 데 집중한 나머지 인도네시아를 가난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그러면서도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수카르노의 독립투쟁 관련 업적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소령은 지나가는 말처럼 필자에게 물었다.“그런데,박대통령은 ‘패트리엇 헌터’였다면서요?” ‘패트리엇 헌터’라니?‘애국자 사냥꾼’이라면 ‘독립군 토벌대’란 뜻이 아닌가?나는 그가 항일 독립투쟁 시기 박대통령의 관동군 경력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그때 나는 ‘한국의 신문사 기자’이자 ‘예비역 공군중위’라고 나 자신을 소개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96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가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옌지(延吉)로 향하던 관광버스 안에서의 일이다.버스가 지린성(吉林省)안투(安圖)를 지나던 때 조선족 관광안내원이 말했다.“이곳이 바로 일본 관동군사령부가 있던 곳으로,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관동군 장교로 조선독립군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필자를 비롯해서 한국인 관광객들은 대꾸할 말을 잃고 서로 얼굴을 돌아볼 뿐이었다. 8월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國恥日)과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이 함께 들어있는 달이다.친일파 청산문제는 역사의 이름으로 엄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그것은 역사의 기둥을 올곧게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우리는 오늘날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군국주의’경향에 대해서도 경계와 대책을 게을리해서는 결코 안된다./장윤환 논설고문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범주와 그 행태

    일제강점 35년간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한 친일파는 다양한 분야에서 무수히 많았다.일반적으로 ‘친일파’라고 단순화해서 사용하는용어속에는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에 대해 우리사회 각계에서는 다양한 요구가 분출됐으나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역사’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파 청산과 관련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친일파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이다.법적 청산이든 역사적 심판이든 평가의 대상으로 삼자면 엄격한 규정이 있어야 한다.그동안 ‘일제때 친일파 아닌 사람이 누가 있나’,‘일본말 쓰고 일제에 세금 안낸 사람 누가 있나’라는 식의 허무적이고 극단적인 인식이 팽배해 왔다.그러나 이런 논리는 친일파 청산을 어렵게 만들려는친일파들의 농간에 지나지 않는다.해방후 윤치호가 “어제까지 동방요배하고 ‘황국신민의 서사’ 외우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던 자들이 오늘 갑자기친일파 청산이냐”고 한 것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해방후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의 범주는 지극히 한정적이다.이는 친일파들이 이미 정치권력과 사회 각 부문에서 확고한 자리를 장악하고 있어 현실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친일파 청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국가보안법을 민족보안법으로 상정,‘국가’를 ‘민족’으로 바꿔보면 대상자와 죄명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이렇게 되면 ‘친일단체에 가입을 권유했거나 친일행위의 선전·선동은 물론 민족정서를 혼란시킬 우려가 있는 사항을 언급한 자’도 처벌하도록 돼 있다. 한편 과거와 오늘날의 ‘친일파 규정’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즉 해방직후에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민중적 열기가 대단했고 친일파당사자가 상당수 생존해 있었고 또 관련자료도 풍부했다.그러나 현재 당사자들이 거의 사멸하고 친일파 문제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과 명분간에 상당한괴리가 있는데다 자료 또한 태부족이다.역사적 심판을 기본으로 할 경우 해방후 한국현대사에 직접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위주가 될 것이다.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특위 해체이후 친일파

    일제 패망과 함께 햇볕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어야 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은 해방후 ‘역사의 매듭’을 짓는 상징적 통과의례마저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개념과 현실이 이처럼 유리되고 결국 착종되는 현상이 개인차원에 그치지 않고 집단무의식으로까지 번져 우리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이중적 태도와 감정,의식과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경향마저 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가 중도에 와해된 것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또다른 요인으로는 미군정의 방해공작을 들 수 있다.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안을 놓고 찬탁·반탁으로 나뉜 것이 결국 좌우대립으로 굳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탁치에 반대하는 친일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복권돼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였다.상대적으로 임정세력은 통일전선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반민특위 해체의 뿌리가 된셈이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재등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건국초기 전문지식을갖춘 ‘인재부족’이었다.여기에 미·소간의 냉전으로 한국이 반공의 최일선 국가가 되자 ‘반공이데올로기’가 추가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국가가 위기를 맞자 친일파들이 본격적으로 경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주어지게 된 것이다.친일세력은 한국전쟁과 ‘반공’이념을 고리로 다시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독점적 지위는 이후 계속됐다. 군부와 경찰분야에서 친일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 때문이다.국방장관·육참총장은 일본군 출신이 아니면 결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로 일본군 출신 일색이다.경찰의 경우 미군정 당시 간부 가운데 80% 이상이일제경찰 출신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친일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등에 업고 지배세력으로 재부상한 배경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아온 정치·경제·문화적 토대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그리고 이는 민주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도 청산은 커녕 오히려 확대,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선양

    친일파 척결의 의의는 과거사 청산과 그로 인한 민족정기 선양으로 압축할수 있다.그러나 해방 54주년이 되는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두가지 모두만족스럽지 못했다.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척결은 단순히 과거사에 대한 회고나 보복차원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한 일종의 ‘정언적(定言的)명령’이었다.다시말해 일제하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새 시대를 맞는 입장에서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자 시대적 당위였다고 할수 있다. 북한정권이 해방직후 친일파를 처단하면서 국가차원의 보훈정책을 편 것은바로 이 때문이었다.반면 남한은 친일파 처단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보훈정책 역시 6·25 이후에야 겨우 시작됐다.그러나 이 역시 군·경찰을 위주로 하고 있고 독립운동가들은 여기서도 뒷전이었다. 현재 우리정부의 보훈예산은 전체 국가예산의 1%에 불과한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다.특히 독립유공자들이 받는 예우수준이 예비역 장성·영관급 장교들보다 낮은 것은 우리의 보훈정책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이같은 사정으로 우리사회에는 일제잔재문제에 대해 거의 몰역사적·무비판적 견해가 팽배해 왔다.일제의 입장에서사용한 이조(李朝)·의병토벌·정신대·징용 등의 용어가 아무 비판없이 통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매국노의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획득한 선조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매국노의 재산환수를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은 외면하고 있으며 사법부는 실정법 만능의 법정신에서 매국노의 재산을 보호해주는판결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사정이 이러고 보니 일본군 장교출신의 독재자가 ‘근대화의 기수’로 미화되고 있으며 친일파들이 사죄·반성은 커녕 역사왜곡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시작은 언제나 늦지않다’는 서양격언을 되새기며 몇 가지를 제안한다.우선 순국선열의 생애와 애국정신을 담은 역사교육,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 제거,보훈업무의 재정비,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리=정운현기자 jwh59@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친일파 연구 어디까지 왔나

    해방후 친일파 척결문제는 새국가 건설과 함께 시대적 당위로 당시 우리민족앞에 주어진 양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이들을 비호한 이승만정권의 방해공작으로무산되고 말았다.따라서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이 문제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며 결국 21세기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광복회 주최,본사 후원으로 세종문화회관대회의장에서 열리는 ‘친일파 청산과 민족정기 선양’ 학술대회는 20세기에 발생한 문제를 세기의 끝에서 되짚어 본다는데 의의가 있다. 해방후 반민특위의 활동이 좌절된 이래 한동안 이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공식 거론할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재야사학자 고 임종국씨(89년 작고)만이 평생 이 문제를 천착해왔을 뿐 학계에서조차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방치돼 왔다. 친일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의는 90년대 이후 우리사회의 민주화 열기와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점차 관련학계·재야연구자들의연구테마로 부각됐다.그러나 이미 당사자 상당수가 사멸한데다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체계적인 연구나 자료수집은 미비한 실정이다.반면 90년대 이후친일파문제가 우리사회 전반에서 공식 논쟁거리로 부각됨에 따라 관련 친일파들의 동상철거·서훈박탈·연구서 출간 등 사회운동 차원에서 큰 성과를거둔 바 있다. 한편 이번 대회는 90년대 이후 고조된 우리사회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과반성의 연장선상에서,20세기 정리차원에서 시도된 면도 없지 않다.따라서 이번 행사를 통해 친일파 문제를 매듭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연구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광복회는 서울대회에 이어 11일부터 23일까지 산하 11개 시·도지부에서 주제발표자들을 중심으로 연사를 초빙,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광복회 주최 학술대회] 반민법·반민특위 활동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방후 입법부의 활동은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구성한 것이 그것이다. 전문과 3장 22조로 구성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범주를 협소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이는 최소한의 처벌을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 속에 일제의 주구로 활동한 각계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을 검거,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해 나갔다. 그러나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행정부는 불법적인 활동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마침내 반민특위를 중도에 와해시키고 말았다.특위 출범초기부터 ‘시기상조’ 운운하며 친일파 청산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승만은 특위가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를 습격,특경대원들을 연행하였다(소위 ‘반민특위습격사건’).사건 다음날 이승만은 한 외신과의 회견에서 ‘특경대 해산은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불과 8개월간의 활동기간중 특위가 다룬 반민족행위 조사 건수는 총 682건(민간인 고발건 포함)으로 이는 당시 생존 친일파 가운데 악질적인 친일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특위는 해당자들에게 징역형·공민권 정지 등 인적 청산과 함께 재산몰수형을 동시에 적용,친일파들의 물적 기반 청산도 아울러 시도했다.이는 우리사회에서 구체적·합리적으로 친일파를 청산하려했던 노력으로 평가된다. 한편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 노력이 좌절된 것은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공격했기 때문이다.당시 이승만은 ‘치안확보’를 위해서라고 변명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오히려 친일파들이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공급하고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독립운동가 가운데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의 이같은 처사는 당시 민족세력과 민중에 대한 배신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4·19혁명은 독재자이며 배신자인 이승만에 대한 타도이자 응징이었다.
  • 본사 정운현차장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출간

    역사는 정직해야 한다.정직한 역사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그러나우리의 현대사는 권력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 얼룩져 있다.현대사의 왜곡은해방 후 당연히 단죄됐어야 했던 친일세력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불행한 일로부터 시작됐다.많은 것을 희생하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애국투사들은 독립된 조국의 무대에서 밀려나고,친일세력이 옷을 갈아입고그 무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민족적으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부끄러운자화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나왔다.(개마고원 8,500원) 이 책은 정운현 대한매일 문화부 차장이 1998년 8월14일부터 올 4월26일까지 대한매일(98년 11월11일 이전에는 서울신문)에 ‘친일의 군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에다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만들어졌다.친일파 문제가 일간지에 연재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친일파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온 지은이는 일본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등을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뛰어넘는 알찬 내용을 담아 이 책을 꾸몄다.강화도조약 체결 때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1호’ 김인승,조선인 출신신직(神職) 이산연,만주 특무공작의 거두 김창영 등은 ‘친일의 군상’ 연재를 통해 처음 공개된 친일파들이다.지은이는 또 최남선의 친일 행적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 먼저 시작됐음을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 책은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근택,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공주갑부 김갑순,박흥식,이선근,이항녕,김활란,윤치호,윤보선 일가,최남선,김성수,방응모,주요한,김동환,이광수,여자 밀정 배정자,무용가 최승희,승려 이종욱,최린,이갑성,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고등계형사 선우순·갑 형제 등많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인물별로 소개한다. 저자는 집필동기를 이렇게 말한다.“친일파 문제는 법적·역사적 청산이 안됐다.많은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권력 엘리트로 군림해 옴에따라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민족사를 더럽힌 사람은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된다는 엄숙한 경고를 보여줘야한다”. 친일파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현장은 우리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 민족의 성지인 국립묘지에도 백낙준·진의종·백두진·엄민영·황종률·이은상·이선근·조진만·이응준을 비롯,10명이상의 친일경력자들이 국립묘지에묻혀 있는 것이다. ‘위대한 3·1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된 3·1문화상 예술분야 수상자중에도 조연현·안수길·백철·모윤숙·최정희·이상범·김인승·김기창·김성태 등 모두 13명의 친일파가 포함돼 있다.정부차원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친일파가 포함됐는가 하면 ‘동인 문학상’‘난파 음악상’등 친일파 인사들의 이름은 딴 여러가지 상이 만들어졌다.최근에는 이화여대에서 친일파인 김활란의 이름을 딴 ‘우월 김활란상’을 제정하겠다고 밝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겼다. 저자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친일문제의 청산은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중요한 작업이다.그 작업은 역사의 시계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창순기자 cslee@
  • [김삼웅 칼럼] DJP협력의 역사인식

    한국현대사에서 지도자들의 협력이 절실할 때 분열함으로써 국가의 진운에큰 타격을 입힌 경우가 적지 않았다.정치지도자들의 갈등과 반목이 역사를그르친 사례가 크게 네 차례나 있었다.첫번째는 여운형과 송진우다. 해방직후 이들이 손을 잡았다면 건국준비위원회의 좌경화를 막고 임시정부를 봉대하여 정통성 있는 정권을 수립했을지 모른다. 여운형은 해방직전부터 송진우에게 민족해방에 대비할 것을 제의했다.측근을 보내 제휴를 희망하고, 해방당일에는 직접 자택을 방문하여 함께 일할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송진우가 여운형의 거듭되는 합작요청을 거절한 것은 일제협력의 자격지심과 들러리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 결과 해방정국은 엉뚱하게 흘러가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암살당했다. 두번째는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분열이다. 두사람이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의(大義) 아래 협력했다면 독립운동세력이 중심이 되는 정통성을갖춘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파는 발붙일 곳을 상실했을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김구는국민의 희망이었고 신화적 존재였다. 두 영수가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지만 국민은 힘을 합해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두 영수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는 한민당과 인민공화국이 각기두 사람을 영수급으로 추대한데서도 드러난다. 만약 이승만이 집권 후 김구를 보호하고 후계로 삼아 제2대 대통령으로 지원했다면,그리하여 김구가 북한측과 새로운 남북협상을 시도했다면 6·25전쟁과 자유당의 12년 폭정은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번째는 4월혁명으로 집권한 윤보선과 장면의 분열이다. 구파의 윤대통령과 신파의 장총리는 민주당의 한 뿌리이면서도 학생혁명이 갖다바친 정권을독식하고자 꼴사나운 이전투구를 벌였다. 내각제 대통령인 윤보선의 책임이컸다.힘을 모아 이승만정권의 부패와 사회악을 청산하며 경제건설과 민주발전에 전력해야 하는데도 권력다툼으로 1년여 만에 군사쿠데타를 맞아 탈권당하고 30여년의 군사통치가 자행되었다. 네번째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이다. 1980년 ‘서울의 봄’때 양김이 협력했다면 신군부의 쿠데타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 6월항쟁 이후 후보단일화에 성공했다면 노태우정권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헌정의 파행과 양민학살,그리고 전·노씨의 천문학적 부패의 사슬이 끼어들지는못했을 것이다. 역대 지도자들이 협력보다는 분열을 일삼아온 데 비해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는 협력하여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IMF국난을 극복하면서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두사람의 협력은 민주화세력의 본류와 근대화세력의 본류가 합류하는, 한국정치사(사상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5·16이래 갈등과 대립관계를 지속해온 두 세력이 공동정권을 수립한 것은 근현대사에서 개화와 쇄국, 독립운동과 친일매족, 통일정부와 분단정부, 민주화와근대화의 대립선상에서 처음으로 합치점을 찾았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들, 예컨대 40년 특정지역의 패권주의가 소외지역으로교체되었다든가, 반세기의 지배구조가 바뀌었다는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하겠다. 또 진보(상대적)진영과 보수(상대적)진영이 협력함으로써 ‘용공 매카시즘’을 극복하면서 대북 포용정책을 펴게되고 민족민주운동의 희생자들이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DJP협력의 진정한 가치는 신의냐 대의냐, 대통령제냐 내각제냐를 뛰어넘는, 협력해야 할때 협력할 줄 모르는 우리 지도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처음으로바로잡는 ‘역사인식’이라 하겠다. 칠순을 넘긴 두 지도자와 측근들이 항상이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 [발언대] ‘白凡 음악회’에 친일파曲 웬말

    얼마전 백범 김구선생 서거 50주기를 맞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나라사랑음악회가 열렸다.행사 다음날 방송을 통해 음악회 행사를 볼 수 있었다. 다가오는 21세기를 떳떳하게 맞이하기 위해 국민들로 하여금 백범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으로 마련된 것이라 관심있게 보고 있었다.출연진의진지한 태도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전달됐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홍난파가 작곡한 ‘봉선화’가 연주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비록 홍난파가 한국 현대음악에 끼친 영향은 컸지만 그 이전에 그는 ‘친일음악의 대부’였다.지난 92년 8월 당시 문화체육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홍난파를 선정했다가 흥사단과 연구단체들이 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자 취소했다. ‘봉선화’도 민족의 애환과 설움을 달래기 위해 작곡됐으나 일제에 의해금지곡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지난 96년 4월 친일단체였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의 42년 6월 공연에서 소프라노 김천애가 ‘봉선화’를 불렀던 당시 프로그램이 발견돼 금지곡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봉선화’가 민족의애환과 설움을 달랜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노래말을 보면 민족의 웅건한 기백이나 기상은 찾아볼 수 없다.처량하고 애조 띤 곡조로 오히려 슬픔에 잠기게 해 민족의 설움을 달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봉선화’가 우리민족의 설움을 달래는 ‘민족가곡’으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됐던 노래라고 치자.그래도 ‘정의의 개가’‘희망의 아침’ 등 친일가요를 만든 친일파 홍난파가 작곡한 ‘봉선화’만이 민족정서를 대변하는노래로 백범 서거 50년 나라사랑음악회에서 불려져야 했을까.민족의 정서와웅건한 기상을 담고 있는 다른 좋은 노래를 두고 굳이 친일 반역자인 홍난파의 곡을 선정한 의도가 무엇일까.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백범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한 뜻깊은 자리였다.이런 행사에 친일파의곡을 끼워넣어 나라사랑 정신을 희석하는 일이 다시 또 일어나지 않도록 연주곡 선정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육철희[신시민운동연합
  • 김광만PD ‘격랑의 파고‘日 다큐경연대회서 장려상

    국내 독립제작사 ‘더 채널’의 대표인 김광만PD가 기획한 ‘격랑의 파고를 넘어선 사절’이 일본의 재단법인 방송문화기금이 주최한 다큐멘터리 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김PD는 18일 도쿄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500만엔의 상금을 받았다.이 프로는 오는 8월15일 한일양국에서 방송될 전망이다. 김PD는 “한국에서 친일파로 몰리면서도 일본에 우리의 민요와 혼을 전파하려 애썼던 소설가 김소운선생과 딸인 일본교회 목사 김영,일본에서 가수가된 손녀 사와 도모에 등 3대에 걸친 한·일 문화교류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작품을 설명했다. 김PD는 KBS ‘휴전선 155마일’‘한국의 미’와 MBC ‘지리산의 사계’‘인간시대’‘그때를 아십니까’를 연출했다.프로그램의 저작권은 ‘더 채널’이 갖지만 비영리적 목적일 경우 일본방송국은 이 프로를 방송할 수 있다. 허남주기자
  • [김삼웅 칼럼] 민주열사들을 잊지말자

    피와 땀과 눈물의 양분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투쟁의 나무를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낸 것은 가신 임들이 흘리고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우리곁에 없는 김남주시인이 암울한 시대에 쓴 ‘전사2’의 중간 부분이다. 이 시에는 다음의 내용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투쟁의 초기단계에서 죽어갔다/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어떤 사람은/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이름도 없이 얼굴도없이/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쥐도 모르게 새도모르게 죽어갔다/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모레(10일)는 6·10민주항쟁의 날이다. 녹음방초의 어간에 다시 6월항쟁의 날을 맞는다. 우리는 흔히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 못하고 독립지사들을 홀대해온 것을 두고 애국심이 부족한 이승만정권과 친일세력의 발호로 치부한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와 그 시대 사람들을 원망한다.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그러면서 막상 우리는 지금 군사독재 청산과 민주열사들에 대한 추모와 대접을 소흘히 한다. 후세로부터 비판받고 원망들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 리잘(Jose Ri Zal)을 기억할 것이다.스페인 관리들에 의해 최초의 아시아 민족주의자로서 기록된 인물, 젊은 의사이자 작가·시인이면서 필리핀 독립운동가,1861년 35세로 스페인 정부군에 의해 총살된 사람, 지금 필리핀에서는 그가 사망한 12월 30일을 법정공휴일로 기념한다. 필리핀 독립운동은 리잘의 처형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리잘은 형장에서유언을 남겼다.“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을 보지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밝은세상의 사람들은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잊지 말아달라.” 적당한 강우량과 이상고온 현상으로 올 6월의 신록은 여느해보다 짙고 싱그럽다. 이좋은 계절을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밤사이에 스러져간’이들이다. 그들의죽음을 잊은채 우리는 찬란한 녹음과 햇볕을 즐긴다. 지금 국회에는‘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등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된 이래 동면상태이고 바로‘민의의 전당’건너편에서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자식과 형제 남편을 잃은 유가협과 추모연대 회원들이 200일도 넘는,기약없는 천막농성을 계속하고 있다.또 의문사 관련 회원들이‘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제정’을 요구하며 국민회의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새정부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세력이고,국민회의에는 수많은‘민주인사’들이 포진한 상태이고, 자민련은 그런 인식을 공유하는 ‘공동여당’이며, 한나라당에도 상당수의‘민주인사’들이 참여해 있다.그런데도 이 법안이 긴 잠에서 깨어날줄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민주화 참여의원들 각성을 최근 국민회의 관계자는 이 법률안을 철회하거나 심의를 보류하는 대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하기로 했다한다.‘유공자’를‘관련자’로 바꾸고 5·18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 했던 것처럼 특별법 형식으로 일시 보상금을 주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겠다는것이다. 그 이유는 일부 보훈단체와 자민련, 한나라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라 한다. 보훈단체의 경우 형평성의 이유등을 들어 반대한다 치고,자민련과 한나라당의 반대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 국민회의의 소극적 태도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국시’인 민주주의를 지키다가 희생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예우를 하자는데 반대할 명분이 무엇이란 말인가.‘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대로 ‘민주화운동하면 3대가 망하는’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국회의원 특히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주필 kimsu@]
  • [외언내언] 프랑스의 대숙청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다. 과거는 역사 속에 묻어버려야 한다.” ‘인간도살자’ 별명을 가진 나치 게슈타포(비밀경찰) 바르비가 1985년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되었을 때 남긴 말이다. 바르비의 이 말은 한국에서 가장 잘 먹혀든다.과거가 ‘어두운’ 사람일수록 ‘과거청산’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그러면서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할 일이 많은데 언제까지 과거타령이냐며 여론을 왜곡한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미래지향’을 내세우고 마치 선각자연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처럼 ‘청산’해야 할 과거가 많은 국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나라를 판 매국노와 친일파들로부터 군사독재 원흉,그들에 빌붙어 인권을 짓밟고 언론을 유린한 지식인·언론인,IMF환란을 불러온 책임자들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대로 청산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새정부의 개혁작업이 그들의발목잡기에 시달리게 되었다.만년 양지족(陽地族),기회주의자들의 농간 또한 만만치 않다. 프랑스는 달랐다.4년여의 짧은 기간나치의 지배를 받았지만 드골 정부의과거청산 작업은 준엄했다.1940년 6월 프랑스는 패전과 함께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나치 독일군, 남부는 페텡의 비시 괴뢰정권이 다스렸다.비시 정권은 온갖 방법으로 나치에 협력하면서 조국을 배반했다. 해방과 함께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에서부터 새나라 건설을 시작했다.나치 협력자 779명이 처형되고 2,777명이 종신징역,26,529명이 유기징역,3,678명이 공민권박탈형을 선고받았다.드골은 “국가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나치 부역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비시 정권의 페텡은 개인적으로는 드골의 스승이었지만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옥중에서 자살했다.드골 정부는 나치 부역자 중 언론인·출판인·작가·지식인 그룹을 가장 가혹하게 다스렸다.드골은 “지식인은 도덕의 상징이기때문에 제일 먼저 죄를 물었다”고 밝혔다.친일파와 군사독재,환란 책임자청산에 손대지 못한 우리 처지에서 프랑스의 나치청산은 훌륭한 교훈이 된다.우리는 그동안 ‘프랑스의 교훈’을 떠올리면서도 막상 프랑스의 나치 숙청에 관련한 저서 한권,번역서 한권도 나오지 못한 황무지 상태였다.이 한가지 사실로도 우리 지성풍토가 얼마나 과거청산에 소극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언론인 주섭일(朱燮日)씨가 ‘프랑스의 대숙청-드골의 나치 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을 펴낸 것은 이런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다.남들은 반세기 전에 끝낸 일을 우리는 이제야 ‘교훈’으로 읽어야 하는가. 김삼웅주필
  • [金三雄칼럼] 북한, 白凡자료 협력을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 사후 50년만에 남북한의 추모행사 관련 논의는만시지탄이지만 퍽 다행한 일이다.북한이 지난달 30일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를 통해 평양에서 ‘김구선생 회고모임’을 갖자고 제의한 것을 한국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는 7일 김구선생 추모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수정제의했다. 이수성(李壽成)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장은 백범의 묘소와 유가족,비서진 대부분이 생존한 서울에서 추모모임을 갖는 것이 고유의 전통으로 봐도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수정제의 배경을 밝혔다. 우리는 민족 지도자 백범 50주기를 앞두고 남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을 높이평가하면서 양측이 민족지도자를 추앙하는 대승적 입장으로 기일인 6월26일에는 반드시 성사되기를 바란다.아울러 북한당국에 한가지 협력을 제의하고자 한다.다름아닌 백범 관련자료다. 대한매일신보사는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와 함께 백범전집 출간을 준비중이다.국내 자료는 물론 중국·대만·미국·일본에 산일되고 묻혀있는 각종 자료를수집하여 12권짜리 전집을 발간한다. 그동안 남북한에서는 친일파들을 포함하여 각급 인사들의 각종 전집이 출간되었다.반면에 젊어서는 반봉건·반외세투쟁,청장년 시절에는 항일독립전쟁,노후에는 통일정부수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비명에 가신 20세기 한민족의 대표적 지도자요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백범의 전집이 아직까지 발간되지 못한것은 남북한이 함께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연유에서 백범과 연고가 각별한 대한매일신보사가 전집을 준비중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백범전집은 실국(失國)시대와 독립운동과 해방과 분단과정에서 항상 의롭고 정도를 걸은 민족지도자의 삶의 궤적을 집대성하는 것은 물론 민족의 근현대 정신사를 정리하는 의미가 새롭다.따라서 이번에 편찬되는 전집에는 백범과 관련되는 모든 자료가 망라돼야 한다.그런데 임시정부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6·25한국전쟁 과정에서 분실되고 그 중 상당 부분이 북한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진다.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 임정문서의 책임자는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趙擎韓)선생이었다.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11월 중국 중경(重慶)으로부터 귀국할 때 큰 가죽가방 13개에 임시정부 문서와 임시의정원자료를 간추려 가지고 귀국했다.그 다음해까지는 경교장(백범자택)에 두었으나 정국이 불안해 관계자들의 집으로 자주 옮겼다고 한다.그러다가 임정비서처 서무위원회 용도과장이던 조남직(趙南稷)씨의 집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6·25 때 조씨가 납북되고 그의 부인이 문서들은 모두 타버리고 없다고 했지만,조경한 선생은 보관된 창고나 집에 불탄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란통에 북한으로 옮겨졌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 증언이 아니라도 북한에는 백범과 임정 관련의 상당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터이다.북한 당국은 이 기회에 이들 자료(복사본이라도)를 백범전집편찬위원회에 넘겨서 전집발간에 협력했으면 싶다. 백범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라고 가르쳤다.오늘 남북한이 크게는 민족문제 해결에서 작게는 백범추모모임문제에있어서 이같은 정신으로 접근한다면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한다. 북쪽에서 태어나 제3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남쪽에서 숨진 인물,분단과정에서 그는 남쪽을 택했고 지금 효창원에 잠들어 계시다.그의 추모모임이 북쪽에서 열리면 어떻고 남쪽에서 개최되면 어떤가.장소가 타협이 안되면판문점에서 열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여(혹은 소급하여) 민족이 함께 존경하는 인물의 추모모임이 50주기에는 꼭 열려야 한다는 겨레의 소망이다.그에 앞서 북한당국이 백범의 자료를 보내주어 완결된 전집을 놓고 남북의 관계자들이 해주의 생가(터)와 서울 효창원 묘소를 교환 방문하면서 그를 추모하고 그의나라사랑 정신과 통일정부수립의 의지를 이었으면 한다. 50주기와 20세기가 저물기 전에.
  • 本報 김삼웅주필 ‘왜곡과 진실의 역사’ 출간

    ‘망국병’인 지역감정의 뿌리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통설이다.그 8조는 충청도 일부와 호남지역은 산형지세가 거꾸로 거슬러 도참설의 ‘산수배역론(山水背逆論)’에 해당되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것이었다.왕건은 과연 이같은 내용을 후세에 남겼을까?사실은 그렇치 않다.문제의 ‘8조’는 바로 위작(僞作)된 것이다. 그동안 친일파문제 등 ‘역사바로잡기’에 전념해 온 언론인 김삼웅씨(대한매일 주필)는 최근 출간한 ‘왜곡과 진실의 역사’를 통해 이를 밝힌다.‘훈요’는 왕건이 죽은 뒤 즉각 공개되지 않고 8대 임금 현종 때 최항(崔沆)의집에서 뒤늦게 발견됐는데 그는 왕건의 한반도 통일로 백제유민의 급부상과반대로 경주 출신들의 기득권 상실이 우려되자 급기야 백제출신들의 차별을골자로 한 내용으로 ‘훈요’를 변조했다는 것이다. ‘왜곡과 진실의 역사’는 우리 역사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면을 가감없이드러내 보인다.우선 ‘조선’이란 국호문제.‘조선’이란 국호는 단군조선이래 가장 오랫동안 사용돼 왔으나 근세 조선왕조의 ‘조선’은 중국 천자의 명을 받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사대주의의 전형이라는 것이 필자의 설명이다.출생에서부터 영욕을 거친 이 명칭은 해방후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좌조선 우대한,남대한 북조선’으로 편이 갈리는 등 남북 정치집단의 상징조작으로도 작용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이기주의·천무(賤武)사상 등으로 인재를 키우지 않은 우리의지난 역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계유정난때 수양대군의 손에 비운의 생을 마감한 김종서,태종의 외손자로 약관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청태종도 아까와 죽이지 않았다는 임경업 장군,시대에 앞서 서양문물을 탐구한 소현세자,북방9성(城)을 축성한 고려의 명장 윤관 장군 등.이들은 모두 정치적 견해차나 음모로 희생양이 돼 청운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반면 지난 역사속에서 처세에 능한 간신배들이 승승장구한 ‘배반의 역사’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려 무신정권하의 이규보 일파,조선조 세조때의 정인지·신숙주 등의 삶이 그것이다.저자는“사육신의 패배가 우리 역사에서 악의 세력이 승자가 되는 전통으로 굳어졌다”며 그러나 “사육신의 죽음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의(義)를 되살렸다”는 함석헌의 역사관을 탁견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사 왜곡문제도 저자가 눈여겨본 대목중의 하나다.한국사에 대한 사마천과 토인비의 역사왜곡·편견을 지적함과 동시에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역사왜곡,조선조 예종·성종의 사료인멸,또 일제하 총독부의 고대사 관련 사료말살과 역사왜곡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 만신창이가 된 우리역사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동방미디어 7,500원 정운현기자 jwh59@
  • [외언내언]김삼웅/ 心山 김창숙선생

    “우리는 일본이 가한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수 없다. 이제 거족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과 싸우고있다……. 만국평화회의는 우리 2천만 생명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을 믿는다. ”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이 ‘파리장서(巴里長書)’에서 쓴 일절이다. 광복을 도모한지 십년동안에 성명(性命)과 신가(身家)는 도시 상관않았네 뇌락(磊落)한 평생은 백일(白日)과도 같은데 무엇하려 형신(刑訊)은 이다지도 단단한가. 일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형리에게 이런 시 한 구절을 써주었다. 온갖 고문과 회유로도 전향이나 자백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일제 관헌들은 선생을 흠모하는 자들도 있었다. 병든 몸이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달성 옥살이 일년이나 넘길 줄 어찌 알았으리 모친 죽고 자식죽어 집은 이미 쓰러지고 꿈속에도 들리네 아내와 며느리 울음소리. 징역 14년을 선고받을 때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면서 밝힌 그의 항일정신은이 대목에서 더욱 광휘를 발한다. 감옥에서 당한 고문으로두 다리를 다쳐앉은뱅이가 되었다. ‘벽옹’이란 별호는 이렇게 얻은 것, 우리직하리만큼 소박하고 강직하여 가식과 타협을 몰랐던 성품은 자호(自號)를 ‘대우(大愚)’또는 ‘김우(金愚)’라 했다. ‘크게 우둔한 사람’의 행동은 해방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친일파와 기회주의들이 설치는 해방정국에서 통일정부노선을 걷고,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에 저항하다가 정치깡패들에 폭행을 당하고,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되는 ‘우둔한’길을 걸었다. 이승만을 향한 비판은 냉혹했다. “남들 피흘리고 싸울때 외국여자하고 놀다 온게 무슨 대통령이냐”라며 비판하는 심산에게 이박사의 탄압은 가혹했다. 자신이 설립한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에서 쫓아낸 것도 정치보복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타협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고독한 저항의 길을 걸었다. 1962년 5월 10일 서울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생애를 접었다. 집 한칸이 없어서 여관이나 친척집을 전전하다 외롭게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죽으면죽었지/욕되게는 살지 않으리.”심산의 시구처럼 ‘욕되게’살지 않은 그가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金三雄 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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