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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NGO’ 시민운동에 새바람

    시민단체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NGO속의 작은 모임’이 시민운동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 등 대표적인 시민단체에는 현재 10여개씩의 소모임이 결성돼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다. 국제소비자연맹이 정한 ‘화학조미료 안먹는 날’이었던지난 16일 서울 명동성당 앞.주부 10여명이 조미료 회사의광고를 흉내내며 화학조미료 안먹기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환경운동연합의 소모임인 ‘주부 환경지킴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부들이었다. 이들은 18일에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쓰레기 없는 월드컵을 치르자”며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페스티벌’ 캠페인을 벌였다. 98년에 만들어진 이 소모임은 시민단체 소모임의 ‘원조’격으로 20여명이 ‘맹활약’하고 있다.3년전부터 꾸준하게 펼쳐온 1회용품 줄이기,장바구니 생활화운동은 큰 성과를 거둬 대표적인 소비자운동으로 자리잡았다. 주부들이 즐겨보는 방송 드라마를 꼼꼼히 모니터해 1회용비닐봉투를 사용하는 장면 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시민단체들이 사용한 플래카드의 천을 수거해 장바구니를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모임을 이끌고 있는 구희숙 회장(52)은 “우리 소모임의주부들은 모두 환경운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환경박사’들”이라면서 “집안 일에 소홀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남편들도 이제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에는 이 모임말고도 야생동물 보호 소모임인 ‘하호’,어린이 소식지를 만드는 어린이 기자들의모임 ‘푸름이 기자단’, 노래패 ‘솔바람’, 등산 동호인들의 ‘산화’ 등이 있다. 14개 소모임이 활동하고 있는 참여연대에서는 답사 모임인 ‘우리땅’이 눈에 띈다. 매월 1번씩 테마여행을 떠나는 우리땅 회원들은 여행 전에 2차례 정도 만나 답사 예정지에 대해 토론한다.최근에는 공동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참여연대 발전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올해 하반기의 여행 주제를 ‘근현대사 기행’으로 정한 우리땅은 오는 21일 친일파 인사인 문명기와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인 경북 영덕을 찾아 ‘근대사의 두얼굴’을공부할 예정이다. 회장 최근배씨(35)는 “우리땅 회원들은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라면서 “참여연대가 벌이는 운동에도 열심히 동참하고,끈끈한 우정도 쌓아가고 있다”고 자랑했다.최씨는 이 모임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도했다. 녹색연합에도 산을 찾아 환경보호활동을 하는 모임인 ‘녹색친구들’을 비롯해 ‘야생동물 소모임’,‘환경농장’,‘생태도시 모임’,환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녹색다큐’,청년들의 모임인 ‘늘청모’,‘생명운동공부모임’등이 활동한다. 생명운동공부모임은 매월 조계사 등에 모여 요가,참선을배우고 생명사상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이 모임의 회장격인 ‘틀지기’ 조태경씨(30)는 “소모임 활동을 통해 회원들은 자신의 취미를 마음껏 즐기며 생활의 활력을 얻을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토론한다”고말했다. 왕성한 소모임 활동은 시민단체에 적지 않은 힘이 되고있다.소모임에 매력을 느껴 그 단체의 회원으로 정식 가입하는 사람도 많다.때문에 시민단체에서는 소모임 활동을크게반기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상근 간사들은 “소모임활동이 회원과 시민단체 사이의 거리감을 없애고 시민운동이 시민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참여연대 시민사업국 김창엽 간사는 “전문가그룹, 상근자,회원 및 자원봉사자의 3바퀴로 굴러가는 시민운동에서 소모임의 활동은 바퀴를 회전시키는 엔진과 같다”고 평가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黨·靑 개편 어떻게

    10·11일 단행될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민주당 주요 당직자 인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민주당] 김원기(金元基)최고위원 등 지명직 4명의 사표가반려됨에 따라 최고위원은 한나라당 이회창 (李會昌) 총재에 대한 ‘친일파’발언 파문으로 사퇴한 안동선(安東善)전 최고위원의 자리만 바뀔 전망이다.안 전 최고위원의 자리는 당 대표로 화려하게 컴백하는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이 맡게 된다. 사무총장은 기획력과 균형감을 갖춘 중량급이 기용될 전망이다.이해찬(李海瓚) 정책위의장이 “쉬고 싶다”며 고사하고 있지만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인 최재승(崔在昇) 의원도 거론되고 있다. 정책위의장에는 경제부총리를 지낸 홍재형(洪在馨) 의원,농림·환경부 장관을 지낸 강현욱(姜賢旭) 의원의 임명이점쳐진다.강운태(姜雲太) 제2정조위원장의 ‘파격 인사’도 제기된다. 선출직인 이상수(李相洙) 총무는 유임될 것으로 보이나원내 대책전략 부재론이 제기됨에 따라 사표 수리를 전제로 임채정(林采正) 의원 등이 거론된다.전용학(田溶鶴) 대변인도 유임 가능성이 크나 바뀔 경우 이낙연(李洛淵) 설훈(薛勳) 김민석(金民錫) 의원 등의 기용이 점쳐진다. [청와대] 수석 비서관 교체 폭은 크지 않을 것 같다. 주중대사에 내정된 김하중(金夏中) 외교안보수석을 비롯, 2∼3명 정도 교체될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재임기간이 긴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과 신광옥(辛光玉) 민정수석 등이 교체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도다.지난 3월 들어온 이태복(李泰馥) 복지노동수석은 10·25 구로을 재선거 출마여부가 변수다. 홍원상기자 wshong@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8) 궁핍했던 시인 이용악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절창 이용악(李庸岳·1914∼1971)의 시 ‘북쪽’이다.같은 고향을 노래하는 데도 곰살스럽지 않게 식민지의 비애가 묻어나면서도 기개와 투지가 넘친다.민족정서를 노래한 시인 중 드물게 건장한 구리빛 얼굴의 농투사니 심경에 바탕한 남성적 세계를 형상화한 이용악은 여성적인 김소월과 대조를 이뤄 오히려 이 시인이야말로 우리의 민족시인이라는 주장이 확산되어갈 지경이다.그가 노래한 ‘북쪽’은 바로 함경북도 경성(鏡城),파인 김동환과 같은 곳이다.지연만으로도 이용악은 충분히 삼천리사와 가까울 수 있는 처지인데 거기에다 그 특유의 마당발식 사람됨까지 겹쳐 북도 출신 문학인의 재경(在京) 친목회장 격이었다. 누구나 서울 오면 그를 앞세워 고향 선배에게 찾아 다녔음이 여러 편지에서 드러난다.꼿꼿하기로 소문난 황순원조차도 평양에서 상경하면 최정희를 직접 만나지 않고 “이용악형과 함께 찾아 뵈올까 했으나 그날 사와 댁에 계실 것같지 않다는 이형의 개의(改意)”로 만나기를 포기하고 하향했다고 전한다. 황순원의 발신지는 평양시 무림리 156-6.숭덕학교 교사로3.1운동에 관련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아버지의 기개를 이은 듯한 고결한 시인이자 작가였던 황순원은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에 머물다가 1943년고향인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로 낙향하여 학대받던 한글로창작에 전념하며 상처 없이 8·15를 맞은 깨끗한 문사였다. 평양에서 낙향 직전에 보낸 이 편지로 이용악은 최정희의일정을 꿰고 있다는 것과 황순원을 비롯한 서도(평안도)와북도 문인들을 연계지어 주는 중개역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도 잡지사와 작가를 연계시켜 주는 단순한 뚜쟁이가 아니라 집필 상담도 해주는 자문역을 수행하고 있다. 장사꾼이었던 아버지가 객사한 뒤 어머니의 국수 떡 계란을 팔아 연명했다니 이용악 집안의 어려움은 알만하다.일본 유학시절에는 온갖 품팔이를 다 해본 이 시인은 가난의무서움을 알기에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민망할만큼 애절하게 취업을 청탁하고 있다.“매신(每日新報) 건(件) 지금으로부터 잘 운동하면 될 것 같은데 김선생(파인)께서힘써 주셨으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아무튼 수일 내로이력서 다시 써서 김선생께로 보내 볼 작정이 올시다”고이용악은 숫제 사정조다. 다른 한 편지에서는 “김동진(金東進)씨”를 언급하면서 “김선생께선 그후 만나실 기회가있으셨는지” 구체적으로 묻는데, 김은 바로 평양출신 언론인으로 1940년 11월부터 매일신보 상무로 있었던 인물이다.입사하기만 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매일신보에 그렇게 기를 쓰고 들어가려 했던 이용악의 소망은 좌절당했는데,대체 그가 얼마나 호구지책이 어려웠기에 이 지경이었을까.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1939)한 이용악은 물 불 가릴 틈새 없이 생활난에 허덕이며 ‘인문평론’같은 별로 평판이좋지 않던 잡지에 몸담았다가 서울 생활이 어려워져 귀향한 것이 1942년이었고,그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다 이때 쓴 것들이다. 바로 이 해에 최정희 주변에는 어떤 일이있었던가. 편지에 보면 우선 김동환과 신원혜 부부의 장남영사(英士·1926년생)가 죽었는데,파인은 매우 침통해 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용악은 최정희에게 “최선생 조차곁에 없다면 김선생께선 도저히 이번 슬픔에서 헤어나지못할 것입니다.잘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고 했는데,신원혜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은 천진스런 시인의 눈치가 엿보인다. 이용악 서간문의 발신지는 청진시 신암동이나,잠시 “극히가난한 월급 봉투를 받고 있던” 청진일보사였다. 그러나이 시인이 아이를 가지고도 “내지인(일본인)이 아니면 배급도 주지 않는다”는 가난 속에서 “입고 있던 와이셔츠등속이랑 뜯어서 기저귀를 만들었답니다.그러나 댁(최정희)에서 애기 낳을 때 쯤에는 혹은 얻을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란 구절은 너무 서럽다. 콩트처럼 이런 가난한 시인의 집에 도둑이 들어 단 한 컬레뿐인 ‘백화(白靴)를 훔쳐 가버렸는데,“용악이 보다도더 비참한 사람이겠습니다.덕분에 며칠이고 들어앉아 독서나 해야 밑지지 않겠습니다.취직되면 구두 한 켤레야 사겠죠”란 구절에 이르면 이용악의 인간됨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판세에 최정희에게 아기(지원)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설래발은 여전히 널리 펼쳐져 있었던 것 같다. 이 각박한 시대에 우리의 민족시인이용악이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채근담(菜根譚)’과 헤세의 ‘데미안’을 탐독했었다는 삽화는 그의 문학론 이해에 새 조명을 쏘게 해준다. 이 고난의 시기에 이용악이 쓴 시 ‘길’(‘국민문학’ 1942.3)은 자칫하면 “싱가포르 함락이라는 ‘지극히 복된기별’을 듣고 별을 우러러 ‘즐거운 백성’된 것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했다는 엉뚱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실은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식민지 지식인의 부끄러운 자기 확인의 사회적 의미”(윤영천,‘이용악론;민족시의 전진과 좌절’)로 보기도 한다.사족이지만 이용악은 이 혹독한 가난의 체험 때문에 8.15직후상경하여 ‘조선총독부 도서관(국립도서관의 전신)’ 일본인 관장 관저가 적산가옥으로 접수된 걸 불하받는 민첩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조선문학가동맹에 적극 가담,활동했으나,정부수립 전후해서는 정인택(鄭人澤) 등과 정릉 이웃에 살다가 6.25 직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전쟁중 현덕·설정식 등과 월북한 그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관계는 얽히고 설키기 마련이어서 이용악이 그토록 들어가고자 했던 매일신보사의 ‘사진순보(寫眞旬報)’에 근무했던 작가 정인택은 직장 관계로 꽤나 친일작품을 지저분하게 남긴 심리주의적 경향의 작가로 이상·안회남(安懷南) 등 서울내기 중 몰락한 집안 출신들과 가까웠다.안회남은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우국지사인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고독한 작가로 술을 즐겼다.진도로 유배당한 안국선이 현지 처녀와 결혼,방면 후 서울에서 얻은 아들이 바로 회남이다.지사 기질을이어받은 회남에게 식민지 교육은 배포가 안 맞아 아버지의 타계와 비슷한 시기인 고교 4학년 때 등록금을 유용한채 자퇴,문학과 술과 연애라는 일제 통치 아래서의 전형적인 절망의 문학병에 빠져들었다. 최정희에게 언제나 술타령 구절이 들어있는 편지를 보냈던곳은 종로구 체부동 시절로 안회남이 1940년대 초반 충남연기군 전의면으로 낙향하기 직전에 쓴 글들이다. 편지에는 친하게 지냈던 작가 현덕(玄德),이석훈(李石薰)이 등장하고,원고료를 받으면 “아내가 월여를 두고 조르던 전기다리미를 하나 사고는 최정희에게 점심을 사겠다”는데 그메뉴가 “정식을 취하시든지 또는 50전 영화 구경 50전 맥주 50전 런치를 취하시든지”하라는 제안은 당시 문인들의취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엽서는 오히려 노골적인 사과내용을 담아낸다. “저녁에 댁에 간 것은 저의 잘못이올시다.용서해 주시옵소서.술이 대취했습니다”고 정중히 사과하는 안회남의 자세는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지사형 작가로서의 풍모가 드러나 있다. 이용악을 중심축에 둘 때 그 양쪽에 배치되어야 할 인물은당연히 같은 고향인 재주꾼 김종한과 문단에 별 기반을 못잡은 박찬모(朴贊謨)일 것이다. 원산 북선매일신보를 발신지로 한 박찬모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연 ‘용악형’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현덕인데,작품 경향으로 볼때 용악과 현덕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통한다.“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이번 삼독째 덤벼 중권을 읽는 참에 독소전단(獨蘇戰端)의 보(報)를 받았다는 것이 요즈음 마치 살아나게 되는 것 같은 자극입니다”는 구절은 이 젊은 작가가시골에 몸은 두고서도 세계정세를 정확히 독파하고 있구나싶은 대목이다.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독일의패배는 예견된 필연이었다. “딱 엎드려 동면을 하고 싶은가 하면 느닷없이 어디 부딪쳐 보고 싶어 못 견디겠고”라고 이어지는 구절은 심상찮은 암시다. 아들 자랑과 가정을들먹이는 대목은 역사의 격랑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자괴감을 달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7)임화의 처 지하련

    1940년대 이후 모윤숙의 내면세계를 읽을 수 있는 편지가 두 통 있다.“일요일날 선희랑 도오깐(김동환)상이랑 또아바이(안호상)랑 윷놀이 하면 어떠냐”는 편지의 윗 부분에 “나는 황도학회(皇道學會,1940.12.25.결성) 이틀 가서 졸고 이틀 빠지고 오늘 또 가는데 조선호텔 케익 먹은 죄로다”라는 구절이나,“청년회관에 가서 저축 연설”을 해야 된다는 등등은 일말의 양심에 조금은 어줍잖아 했었던모습과 함께 친일의 대가를 호사롭게 받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네 여인 중 개방적이고 가장 말을 아끼지 않았던 모윤숙은 종종 친구들 사이에 말썽을 일으켰는데,대개는 비밀 누설과 험담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가 나중에사과하는 내용들이다.노천명의 편지에도 모윤숙 때문에 신문사를 그만 둬야겠다는 취지의 문구가 나오는 걸로 미뤄볼 때 그녀가 야기시킨 말썽은 적잖았던 것 같다. 네 여인 중 둘(이선희.최정희)은 어쨌건 결혼을 했고,하나(노천명)는 연애의 불꽃이라도 타올랐으나,그녀 하나(모윤숙)만은 사랑에 관한 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던 탓으로친구들을 만날 때 심사가 약간은 뒤틀렸대도 할 말이 없다.여류문인 좌담회에 나와 달라는 최정희의 요청에 “놈팽이나 좀 끼면 몰라도” 우리끼리 무슨 재미냐고 맞대거리할 배짱은 모윤숙 밖에 없었다.“정신의 고향도 몸의 고향도 다 잃어버린 유랑녀의 심금”이었던 모윤숙에게 민족사적인 과업은 춘원을 향한 사랑처럼,조선호텔 케익처럼 녹아버렸을 터이다.8.15직후 종이가 귀했을 때 모윤숙은 일제 시기의 봉투와 편지지를 그대로 쓰고 있다.최정희가 덕소에 머물렀던 주소를 “경경선(京慶線,오늘의 중앙선.완전 개통은 1942.4.1)덕소역전 김동환 방”이라고 쓴 걸 보면 한가한 시골풍경이 떠오른다.출판 기념회를 한다는 구절은 두 번째 시집 ‘옥비녀’(1947)를 가리킨 것이기에그때 쓴 편지이다. 이 무렵 모윤숙의 활약은 너무 유명하여 소개하기조차 쑥스럽지만 간략히 개관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1945년 11월 이기붕의 연락으로 이승만을 만난 그녀는 친일파 결속과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절명의 과제를 위하여 적극 협력하게 되었다.당시 유엔 소총회는 한국의 단정 수립을 반대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쿠마라 P.S.메논 위원장을 한국에 파견(1948.1.8)했는데,그 접대를 모윤숙이 맡아 메논의 정치적인 신념을 뒤바꿔서 거뜬히 이승만의 소망을 성취시켜 주었다.실로 국제 첩보전의 박력을 느끼게하는 이 대목,하지 중장의 감시 눈초리를 피해 이승만과메논의 단독대좌 자리를 마련하는 등 그녀의 활동은 역사를 바꿀 만큼 민첩했는데,그 와중에도 연인 이광수를 초치하여 메논과 셋이서 심야의 정담을 나눌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1948년 2월 26일,유엔소총회는 유엔한국위원회가 접근 가능한 지역(남한)에 국한하여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남북한 분단은 고착되었다.모윤숙은 회고록에서 노골적으로 메논에 대하여 “고마운 사람! 나만 아는 잊을 수없는 은인,그는 정치가라기 보다 우정과 신의에 가득찬 영혼을 가진 세계의 외교관이었다.이박사는 실로 그 은혜를잊을 수도,또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호반의 밀어’)고 썼다.못잊는 건 이박사만이 아니다.삼천만 겨레의 운명이 어쨌건 그녀로 말미암아 한순간에 바뀌었기에 우리들도 못 잊는다.위대한,그러나 때로는 추악해질 수도 있는 여성의 능력을. 근대 문단사에서 뭇 남성의 시선을 모았던 여성으로 이현욱(李現郁)을 빼놓을 수 없다.이름만으로는 남성스럽지만당대 문단의 총아 임화(林和)를 사로잡은 여인이라면 그고혹성은 입증될 법하다.오죽했으면 이미 임화가 임자인줄 알면서도 서정주가 넌지시 넘보며 회기동 집엘 들락거렸겠는가(필자가 서정주 생존시 직접 청취한 말임).그는노골적으로 이현욱의 글재주가 “임화보다 나았다”(‘광복 직후의 문단’)고 할 정도였으니 사태의 추이를 상상할만 하다.이현욱은 1912년 거창에서 태어나 도쿄 소화(昭和)여고를 나온 뒤 “아무런 경력도 없음”이랄 정도로 마산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그녀는 소설 ‘결별’로 ‘문장’지(1940.12)를 통해 ‘지하련(池河連)’이란 필명으로 등단했는데,추천자 백철은 약간 파격적인 소개를 했다. “지하연씨는 모 친우의 부인되는 분으로 내가 기왕부터경애하는 분이다.”바로 임화의 부인이란 뜻이다.초기의다다이즘적 도시의 아이 문학을 거쳐 카프로 방향전환한임화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그리 좋지 않다. 무일푼 시절 임화를 거둬 준 것은 박영희였는데,아랫방에 눌러 앉아 밥을 갖다 주면 “먹은 다음에 얼른 상이나 번쩍 들고 나와서 안으로 갖다 놓을 줄 알아야 하겠건만 임은 그러지 않고서 밥을 다 먹고서도 그냥 앉은자리에서 담배 한 대를 모두 피운 다음에 밥그릇 두껑에다 비벼 꺼버리고 담뱃재는 밥상 위에다 함부로 털어놓기 때문에,박의어머님께서는 몇 번이나 아들더러 임을 얼른 딴데로 보내버리라고 꾸중”했었다.“그를 속으로는 싫어하면서도 데리고 있다가 노자까지 장만해 주어 일본으로 보냈던 것”인데,정작 임화가 귀국하여 처음 한 활동은 카프로부터 박영희를 규탄하는 것이었다(김팔봉 ‘카프문학 시대’). 임화가 동료 평론가 이북만(李北滿)의 누이동생 이귀례(貴禮)와 사실혼을 한 게 1930년,이듬해 귀국한 그는 카프차세대 주자로 시인·평론가·영화인 등 전천후의 능력을발휘하다가 두 차례나 구속당했지만 곧 석방되었다.특히카프 2차검거(1934) 때는 압송 중 졸도하여 지병이었던 폐결핵 때문에 석방,마산 결핵요양소에서 휴양생활을 했는데,여기서 민족운동을 했던 청년을 통하여 그의 누이동생으로 제2의 아내가 될 여인 이현욱을 만나게 되었다.임화의아내 이현욱 보다는 여성작가 지하련으로 일약 유명해진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은 애인을 따라 이내 상경,신설동 361-1과,회기동 64-15에 기거했는데,통상 이 시기에 임화와 동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편지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임화는 들락날락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련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다분히 의혹에 휩싸여있다.꼭 와 달라는 간곡한 편지에다 그녀는 “혼자 오시기 뭐하시건(면) 회남(安懷南)씨나 임화씨와 함께 와 주십시오”라고 끝맺는다.왜 여자 집에 여자가 혼자 오기 뭣할까란 어리석은 질문이 나올법하다.다른 한 편지를 보자.“이런 말 하면 웃을지 모르나,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나는 다시금 잘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구 까지합니다.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단 것을 어느 날 나는확실히 알았었고.…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편지에 따르면 이미 이들은 지하련이 시골에 있을 때부터 익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꽤나 보통 이상의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순리대로라면아마 지하련의 편지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도저히 몇 차례의 서신 왕래로는 다다를 수 없는두 사람만의 은밀한 정서적인 합일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정희야.나는 네 앞에 결코 현명한 벗은 못 됐었다.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정희야.나는 이제너를 떠나는 슬픔을,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하지만 정희야,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나를 찾거던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던,너는 부디 내게로 와다고!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 일인지 모르겠다.네 적은 입이 좋고,목덜미가 좋고,볼다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희야,너를 위해,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야공(夜空)에 별을 알아보듯 잠잠이 살아가련다.…” 무엇이 이 두 여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뜨겁게 갈구토록만들었을까.우정이나 어떤 이해관계,혹은 지하운동? 너무먼 이야기다.아마 이들은 파격적이고 첨단적인 사랑을 나눴는지도 모른다.편지는 그만 두자면서도 계속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마력에 이끌려 본의와는 상관 없이 억누르려는 그리움과 다시 만나고픈 욕정이 뒤엉켜 새로운문장을 만들어 내곤 한다.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 드리겠습니다.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는 대목은 이제까지의 절절했던 사연과는 판이한,글을 쓰는 동안에도 쾌락추구 욕구와 도피의식이란심경의 격변이 반복되는 현상을 간파할 수 있다.그러면서도 욕망의 활화산을 잠 재우지 못한 채 “금년 마지막 날,오후 다섯 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만나기로합시다”고 끝맺는다.그 뒤 이들은 어찌 되었을까? 지하련은 8.15후 창작집 ‘도정’(1948)을 내는 등 맹활약하다가 월북,임화의 남로당계 비판과 함께 비참하게 사라졌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이총재, 영수회담 조건부 수용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는 23일 여야 영수회담과관련,“야당 총재로서 대통령을 만나 열린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중요한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 해법을 찾는자리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회담에 응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이날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그러나 진실성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국민을 위하는 영수회담을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친일파’ 발언 등에 대한 여당의 선사과를 거듭 촉구했다. 이에 청와대측은유감을 표명한 뒤 “이 총재는 영수회담을 하자는 것인지,말자는 것인지 분명하게 답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해 영수회담 성사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한나라당 권철현(權哲賢) 대변인은 “‘신뢰 회복’이란민주당 안동선(安東善) 최고위원의 사퇴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유감 표명, 재발방지 약속 등 3가지 전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현 시국에 대해 “정치·경제·안보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복합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고 진단하고,평양대축전 참가단의 돌출행동에 대해서는 “일부 방북단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이념적 혼란상과 내부 분열이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관련자 엄벌을 요구했다.또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기본질서를 확고히 하는 바탕위에 원칙있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할 것”이라며 대북정책의 재검토를 촉구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금은 경제와 민생,남북관계에 대해서만이라도최소한 여야가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면서“이 총재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답할 것을 기대한다”고말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대한광장]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미국이라 믿지 말고,소련이라 속지 마라.중국은 중흥하고,일본은 일어선다.조선아,조심하라.조심하라.” 이는 아마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이땅에 광복의 환희가크게 한바탕 휘몰아치고 난 뒤 얼마 안돼서부터 전국 방방곡곡 동네 아이들 사이에 뜻도,근원도 모른 채 불리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당시의 기억이 아슴푸레하지만 노랫말은동네마다 조금씩 다르게 불렸던 것 같다. 이와 거의 같은 시점에 아이들의 술래잡기 놀이에서는 술래가 “하나,둘,셋,넷,…” 열(10)까지 숫자를 세는 대신,“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열마디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백범 김구의 민족자주독립 및 통일노선이 좌절되고이승만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외쳐지던무렵의 이야기들이다.누군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노래와놀이를 통하여 나라와 겨레의 걱정스러운 앞날과 나아갈길을 점지하려 한 것 같다. 돌이켜 보면,최근세 우리나라(國權)는 국민들의 자유의사와는 관계없이 외세와 열강들의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그운명이 결정되어 왔다. 청일 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당시까지 청나라가 쥐고 흔들던 구한국 정부의 외교권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 의해 회복되고,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는다. 이는 장차 일본이 조선병탄의 기초를 닦는 조약이었다. 그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을 통하여 구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월권을 확인받는다.이보다 두달 앞서 미국과 일본정부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을 맺어일본의 한국 병탄과 미국의 필리핀 소유권을 맞바꿔 보장하였다.미국과 구한국 정부가 훨씬 앞서 체결한 한미수호조약(1882년)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당시 강대국인 청·러·미·영국의 축복하에 보무도 당당히 한국을 병탄하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맺었으며,구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10년 강제로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았다.이것이 일본의 왕정복고(1867년)와 더불어 주창되기 시작한 사이고(西鄕隆盛) 및 소에지마(副島種臣)등 샷슈 군벌들의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40여년만에 한반도에 일으킨 대변혁이다. 국내에서는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이 끝없는 정쟁과 외세를 끼워 넣은 정권쟁탈에 여념이 없을 때,그리고 무조건적인 ‘쇄국론’과 자주성 없는 ‘문호개방주의’만이 판을 치고 있는 사이에,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40여년의 일제 침탈행위가 자행되고 백성들은남부여대로 만주,시베리아,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국내 잔류 친일파나 해외독립군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열강들에 의해 또다시 한민족의 운명이 결정된다.미·영·중·소 연합국은 일제 패망을 앞두고 얄타협정과 포츠담선언(1945년 7월)을 통해 한반도를 38도 선에 따라 둘로쪼개어 미국과 소련이 나눠 갖기로 한 것이다.그 결과 조국광복과 더불어 우리는 동강이 난 두 개의 체제와 정부를갖게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지금도 이 지구상에 유일한 민족분단국가로 대치해온 것이다. 이미 일본은 다시 일어나 국수주의적 군국주의를 부활하고 있으며,중국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의 종주국 행세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남쪽에서는 국내 제정치세력들이 정파의 이해득실에 얽매여 모처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마저 외세를 빙자해 폄하하는가 하면,북쪽에서는 맹목적인 민족자주통일론에 매달리고 있다.신사대주의와 맹목적인 자주통일론 모두가 한반도의 평화유지와 민족의 화해·협력 및 통일의 길목에서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다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나서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노래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할 때인 것 같다. 김성훈 중앙대교수
  • ‘사과’ 없이 ‘자리’ 박찬 안동선

    민주당 안동선(安東善) 최고위원이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친일파’ 비난 발언 파문에 책임을 지고 20일 최고위원직 사퇴의사를 밝혔다.영수회담의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안 위원은 이날 사퇴는 하되소신을 앞세우며 사과는 하지 않았다.갈수록 가파르게 전개될 대선정국을 앞두고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그는 이날 회견 등을 통해 “독립운동가 3대는 망하고 친일파들은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말이 있다”면서 “아버지는 부를 누렸고,이 총재는 못할 것 없이 다했으며,아들은군대도 안간 것이 3대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그러면서 이 총재 부친의친일설과 이 총재의 민족일보 재판 참여 문제에 대한 해명을 촉구하며,“이후에도 이 총재가 국민앞에 심판 받도록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위원은 정치적 고비마다 소신을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저돌형’이다.다섯번의 낙선을 하면서 4선의원이 된 ‘야당투사’출신으로 민주당의 집권 전후 이따끔 투박한 화법으로 인해 ‘설화(說禍)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김중권(金重權) 대표의 임명에 대해 당의 뿌리와 개혁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 대표를 공개비난하기도 했다. 부천원미 갑 출신인 안 최고위원은 지난해 8월 선출직 최고위원에 낙선한 후 지명직 최고위원이 됐으며,동교동계와 두루 친하다.그의 사표수리 여부는 당 총재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결정한다. 이춘규기자
  • [사설] 영수회담은 열려야 한다

    여야 영수회담이 민주당 안동선 최고위원의 저질 발언과한나라당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 위기에 처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안 최고위원이 지난주 국정홍보대회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일가를 ‘친일파’로 몰고,‘놈’으로지칭하는 등의 발언을 한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것은물론 저질스러웠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최근 정국은 언론사 탈세 고발 및 수사를 전후로 고착된데다가 남북관계와 경제 현안들이 산적해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여야 총재회담의 개최가 기대돼 왔다.이런 가운데여당 중진의 사려깊지 못한 막말 시비로 회담 성사 자체가불투명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당 김중권 대표도 유감의 뜻을 표했고 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도 안 최고위원을 강하게 질책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한나라당은 안 최고위원의 사퇴,진정한 사과,재발 방지 등을 여당이 약속하지 않으면 회담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한편으로 영수회담을 제의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야당총재를 비방하는 것은여당이 야당을 진정한대화 상대자로 보지 않는 것이라는한나라당의 판단에 이해는 간다.그러나 한나라당이 ‘저질발언’문제에 너무 매달리면 정국을 여당과 함께 풀어야한다는 대의를 저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 최고위원은 야당의 사퇴 주장을 수용하는 듯한 입장을취하면서도 다시 이 총재 부친의 친일문제와 이 총재가 과거 판사 시절에 내렸던 민족일보 사장의 사형언도 판결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중진 정치인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자유지만 자칫 영수회담 분위기조성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김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영수회담을 제의했고야당도 당초 원칙적인 수용을 밝힌 이상 여야는 ‘돌출 사안’때문에 국민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이번 회담이설사 성사된다 해도 8개월만에 열리는 것이다.최근 계층간,지역간, 집단간 갈등이 크게 증폭되고 사회 분열 현상까지나타나고 있다.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이를 치유하고 국정을 풀어가는 물꼬를 터야 한다.
  • 여야 화해무드에 또 ‘파열음’

    막 싹이 트려던 화합정국이 다시 얼어붙을 위기를 맞고 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영수회담 제의에 한나라당측이화답해 어렵사리 성사된 대화국면이 민주당 안동선 의원의돌출발언과 야당의 장외집회로 다시 난기류에 휩싸였다. ◆ 민주당. 여권은 안동선 최고위원의 발언에 대해 지도부가 나서 신속하게 유감을 표명하고,이날 개최할 예정이던 대야 규탄장외집회도 취소하는 등 영수회담을 의식한 ‘유화책’을계속 시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야당이 이날 장외집회를 강행한 것을비난하고 나서 현 정국이 얼마나 ‘살얼음판’인가를 실감케했다. 민주당 김중권(金重權) 대표는 아침 당4역회의에서 한나라당이 이날 서울에서 열기로 한 대여 규탄 장외집회에 대해“국민들이 이제 그런 것 싫어하지 않나.서로 욕하고 비난하고 헐뜯고…”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국민 정서가 이제는 건전한 정치를 희망하고,여야가 서로 협력하고 지혜를 모으는 것을 바라고 있다”며“우리가 오늘 서울 국정홍보대회를 취소한 만큼, 한나라당도 마땅히 장외집회를 중단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상규(朴尙奎) 사무총장은 “한나라당이 대규모 집회를하더라도 우리는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시급한 민생현안을위해 일노일소(一怒一笑)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인내’를 강조했다. 전용학(田溶鶴)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장외집회를 굳이강행한다면, 영수회담 분위기에 저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남궁진(南宮鎭) 청와대 정무수석은 “여야가 공방을 하면문제가 해결이 안된다”고 정쟁중단을 강조한 뒤 “한나라당 김무성(金武星) 총재 비서실장과 영수회담 실무접촉을위해 만나자고 전화했는 데,안동선 최고위원 발언을 이유로뭐라 대답하지 않더라”며 실망의 뜻을 내비쳤다. 김상연기자 carlos@. ◆ 한나라. 한나라당은 17일 여의도 문화광장에서 이회창(李會昌) 총재와 주요 당직자와,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강연회를갖고 언론사주 구속 문제 등 정국현안을 소재로 여권을 강력히 성토했다. 특히 여야 영수회담 추진중 민주당 안동선(安東善) 최고위원이 이 총재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사실을 적시하며 거칠게역공을 폈다. 이 총재는 “시정잡배만도 못한 저질스러운 비방과 인신공격을 일삼는 한심스런 여당의 행태를 보면서 영수회담 제의에 어느 정도 진실성이 담겨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이어 경제문제,대북 정책,언론사 세무조사 등 국정전반의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면서 “대통령은 작금의 상황을 총체적 국가위기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정권연장에 집착하지말고 민생과 경제살리기에 전력을 다하고,국정쇄신 의지를행동으로 보이라”고 촉구했다. 이 총재는 또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햇볕정책은 포용정책이 아니라 조공(朝貢)정책”이라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김정일(金正日)에 대해 항의 한번 못하면서 서울답방만 애걸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손학규(孫鶴圭) 의원은 “김대중 정부는 개혁이란 미명하에 사회의 기본을 뒤흔들고 국민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고 가세했고,비주류인 김덕룡(金德龍)의원도 “김대통령은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판하며,대통령의 당적이탈,범국민내각구성을 요구했다. 이날 대회는 지난달 20일 의정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전국순회 강연회를 마무리하는 장외집회로 120여명의 소속 의원과 수도권 지역 당원 등 1만5,000여명(경찰추산)이 참가했다. 이지운기자 jj@. ◆안동선최고 돌출발언 파장. 민주당 안동선(安東善)최고위원의 ‘돌출 발언’으로 대화정치 복원에 제동이 걸렸다.한나라당은 17일 배포된 당보에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흠집내기 위한 ‘사진’등을 게재,안 위원의 이회창(李會昌) 총재 비난 발언에 맞불을 놓으면서 파문을 확산시켰다. 한나라당은 이날 이총재까지 직접 나서 안의원 발언을 지적하는 등 격앙된 모습이었다.이총재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야당총재에 대해 시정 잡배만도 못한저질스러운 허위 비방과 인신공격”이라는 표현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당직자들도 나서 안의원의 발언을 앞다퉈 성토했다.이어 대통령의 사과와 안 최고위원의 징계를 거듭 요구했다. 특히 안 위원을 비롯,민주당 박상규(朴尙奎)사무총장,김희선(金希宣)의원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고발할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당보에 김대통령의 목포상고 시절 일본군복을 입은 김 대통령의 사진을 공개하고,김 대통령이 방일 당시 일본인 스승과의 전화통화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것 등을 원색 비난했다.이총재 부친에 대한 ‘친일의혹’을 실은 민주당보에 대한 보복인 셈이다.이경재(李敬在)홍보위원장은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앞으로도 당보를통해 김 대통령을 계속 공격할 것”라고 밝히는 등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민주당은 김 대통령의 목포상업학교 재학시절 일본군복을 입은 사진을 당보에 게재한 것과 관련,자서전과 관련자료를 제시하면서 “전시체제하에서 학생들이 강요에 의해입었던 복장”이라고 해명했다.김 대통령도 안위원이 중요한 때에 적절하지 않은 발언을 했다고 질책했다는 후문이다. 논란의 불씨를 던진 민주당 안동선(安東善) 최고위원은 이날 유감을 표시하긴 했으나 “원래는 더 심하게 말하려 했다”며 발언을 전면 철회하지는 않았다.다음은 안 위원의일문일답.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총재가 야당총재로서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행태를 개탄한것이다.친일파의 후손이란 의혹이 있는 그가 제 발이 저리니까 기념식에 못나온 것 아닌가. ■한나라당측에서 사과를 요구하는데. 당내 행사에서 당원들을 상대로 한 말인데 왜 사과를 하나.한나라당은 그동안우리를 빨갱이라고 모함하지 않았나.단,연설 과정에서 나도모르게 ‘놈’이란 말이 튀어나온 것 같은데,그것은 언론을통해 사과한다. 강동형 김상연 홍원상기자 yunbin@.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3)지조와 훼절

    파인과 최정희의 연애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강력한 방해자로 등장한 인물이 시인 김종한(金鍾漢,1914∼1944,일부 문학사전에는 1916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착오임)이었다.‘문장’지를 통해 정지용으로부터 “경쾌한 코닥 카메라 취미”의 “명암이 적확한 회화”란 평을 들으며 그는 1939년 보무도 당당하게 등단했다.이미 그는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한 경력에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1937)이란 후광까지 입었던 터라 정지용 사단인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이한직·박남수와 더불어 시인으로서의 앞길이 창창한 유망주였다.“조금 더,단 1년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청록집’은 4인 시집이 되었을지 모른다”(大村益夫 ‘윤동주와 한국문학’ 중 ‘김종한에 대하여’)고 할 정도로 암흑기 그의 시는 돋보였다.고향이 파인과 같은 함북 경성(鏡城)이었다는 사실을상기하면 필시 배신자는 고향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을까. 김종한은 최정희에게 끈질기고 추잡하며 노골적이고 야성적인 글을 끊임없이 보냈을 뿐만 아니라 신당동 집으로 찾아가기까지 했던근대 한국문단 ‘스토커’의 챔피언급이었다.그는 삼천리사와 신당동 두 곳으로 여러 형태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사연은 노골적인 사랑의 고백이자,위협이고 유혹인데한글과 일어를 뒤섞어 썼다.“승녀(僧女)는 되지 마시기 바라오며”란 구절을 미망인에게 함부로 한 걸로 볼 때 그는진작부터 최정희에게 깊은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나는 고독한 시계입니다.당신은 내 안의 진자(振子)입니다”는 고백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고,“두 번 주신 엽서에 의하면생존본능의 정력이 소모된 듯한 표정이 보이는 고로 근심하고 있습니다.피차 일반이기도 하려니와,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깨트려 가려는 자세를 강조하기로 결심했습니다.이것이 연애편질 수가 있다면 나는 좀더 행복자였을 텐데”에 이르면 매우 노골적이 된다.즐겁게 지낸다는 최정희의 편지에 대하여 애인이라도 생겼는지 걱정이라고 덤비는 김종한의 방자함은 한계가 없다.“좋은 동무를 얻었으니 반생이나 동반하려고 공상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는데--벌써 절교의 자세를취하십니다 그려.크게 반성하시고 회신을 주시기 바라오며,동경은 오늘도 비가 옵니다.참,”이란 글로 미뤄 보면 어지간한 스토커였던 것같다. “애기(지원,어렸을 때 아란으로 부름.1942년)가 났다지요? 애기 어미는 아마 고양이가 낙태한 듯한 거룩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추측하오며,여하간 크게 축복지지(祝福之地).여무언야(餘無言也)”란 편지를 보낸 이 시인에게 아무리 사람 좋은 최정희인들 고분고분하진 않았을 터이다.이내 절교장을 받은 듯 “이제는 신사로 대접해 주세요”라는 애원조가되지만,“지금 떠나갑니다.명년 춘삼월,다시 뵈올 때까지,연애도 많이 하시고 소설도 많이 쓰시기 바라오며”란 야유가또 등장한다. 이렇게 끈질겼던 김종한은 대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었던가.일본대학 예술과 학생 때부터 부인화보사(婦人畵報社)에 아르바이트로 나가다가 졸업(1939) 후 정식직원이된 그는 고구려 문인 을파소(乙巴素)를 필명으로 삼았다가‘달밭집’(月田茂)이라는 고향의 택호를 창씨개명으로 정한 괴짜였다.“순수하고 자아가 강한 만큼,서울에 나와서도 가는곳마다 충돌하여 문단 동료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다.그는 1942년 도쿄로부터 귀국,‘국민문학’ 편집을 맡았는데,한 때(1943.5)는 경성일보 기자였던 유명한 재일동포 작가김달수(金達壽)와 종로구 사간동 같은 집에 하숙을 하며 가깝게 지냈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은 김종한을 일언지하에 친일파로 몰아댔는데 오무라 교수는 그가 싱가포르 함락을찬양했던 친일시를 예술성이 없다고 몰아친 용기나,“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온돌에 누워 있어도 훌륭한 황민이 될 수 있다”(좌담 ‘국민문학의 방향’)고 한 말을 주시한다.‘국민문학’에 1년3개월간 근무하다 사직한 그는 정지용을 비롯한 토착적인 민족정서가 강한 홍사용·백석·김동환·주요한·유치환 등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려 진력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이루지 못한 연애처럼 그의 문학적 위상 또한아직도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다. 시인이라고 다 김종한처럼 경박하지는 않다.그 반대편에 이육사(李陸史)의 편지는 무게를 보탠다.이 강철의 투지를 지닌 대륙적 남성 시인은 절친했던 이병각(李秉珏)시인 부부가 폐병으로 눕자 아예 동거하며 주위의 만류를 듣기는 커녕자신이 피하면 친구가 병이 더 심한 줄 알고 불안해 한다며오히려 가까이 지냈다.1941년은 그에게 액운의 해였다.이병각과 부인의 장례를 다 치른 그는 부친상까지 당했다.너무쇠약해 졌음을 느끼고 여기 저기 요양을 다닌 건 1942년이었는데,항상 바빴던 그에게 여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건강의 악화 때문이었다.최정희에게 보낸 ‘무량사(無量寺)에서’란 편지는 이 무렵의 글일 터인데,대체 무량사란어떤 절인가.김시습이 난세를 피해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의탁했던 곳이다.“백제란 나라는 어디까지나 산문적이란것을 말해줍니다”는 함의는 무엇일까.신라의 지배계급 문학이었던 향가와는 달리 백제의 전설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설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뜻일까.“깨어져 와전(瓦)을 비치고 가는 가냘픈 가을 빛살을 이곳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는모양”이라고 나라 잃은 몽매한 백성들을 안타까워 하면서,“무량사만은 오늘 저녁에도 쇠북 소리가 그치지 않고 나겠지요”라고 문학인의 사명을 쇠북소리에 빗대어 토로하는 이 행동주의 시인의 심경을 꿰뚫어 보라. 이 삭막해 보이는 민족해방투사 시인에게도 연인이 있었던가.모든 선진 사상을 흡수 실천했으면서도 정작 가풍을 좇아 조혼으로 결코 행복스럽지 못했던 부부생활이었던 이육사. 신석초는 “그에게도 단 한 사람의 비밀한 여성이 있었다는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다”(신석초 ‘이육사의 인물’)고 귀띔했지만 그게 누군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너는 무삼 일로 사막의 공주같아 연지 찍은 붉은 입술을내 근심에 표백된 돛대에 거느뇨 /오--안타까운 신월(新月)”(‘해후’)이라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를 닮은 시가바로 그녀를 그린 작품이라 전한다.비밀결사 대원답게 그는영원히 자신의 연인을 철저히 숨긴 채 친구가 옮겨준 폐병으로 쇠잔해져 자신이 동양의 파리라며 동경했던 도시 북경에서 옥사했다.지조와 사랑은 일치하는 것일까. 이육사와는 사뭇 다른 사랑의 실천자에 이효석이 있다.“이효석씨 하고는 그가 결혼하기 전부터 가깝게 사귀었다.…수송동 그 방에다 살림을 꾸미고 여기서 먹고 자고 했는데,얼마 안돼서 부인이 친정으로 가고 그 방에서 나는 칼도마질이랑 하는 여자를 목격할 수 있었다.…이효석씨는 ‘칼도마 위의 여자’를 ‘넥타이 갈아매는 기분’으로 사귀었다고 나중에 부인에게도,내게도 말했다”(최정희 ‘조광·삼천리 시절’)는 대목은 유명한 문단 야사의 한 토막이다.자신의 바람기까지 익히 알고있는 최정희에게 이효석은 마음 놓고 편지로 모든 아픔을 털어 놓는다.경성제대의 수재였던 그가 18세의 이경원과 결혼하자 호구지책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는데 입 빠른 평론가 이갑기(李甲基)가 “너도 개가됐구나”라고 모독하자 파인의 고향 경성 농업학교 교사로내려갔다가 평양 숭실전문 교수로 자리를 바꾼 게 1934년.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이 1938년 폐교당하자 대동공업전문학교로 옮겼는데,편지는 이 내역을 말해준다.메밀꽃 분위기보다는 장미,된장보다는 버터를 더 사랑했던 이 수재는 편지에서 보듯이 함북 주을(朱乙)온천을 끔찍히 좋아했다.길명지구대란 명승과 함께 68도의 라듐이 내뿜었던 전국 1위의 이휴양지가 이국취향의 유미주의자 이효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아내가 죽은(1940) 뒤 실의에 빠진 모습이 편지에 역력히 나타나있는데,그 자신도 1942년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꼭 편지에 깊은 뜻이 담긴 것만이 중요하진 않다.화가 김환기(金煥基)의 풋감 그림이 싱싱한 편지는 내용에 못지 않게글씨 자체가 예술품이다.문인과 화가의 관계가 늘상 가깝듯이 김환기도 그림 재료를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김동환·최정희를 조우했었는데,헤어져 전차에 올라 생각해 보니 최에게는 건강 안부를 놓쳤고,김은 화가 이종우(李鍾禹)로착각하고 인사를 했다는 고백이다.이 편지는 행간을 읽을 필요가 있다.김환기가 이종우로 알고 인사를 한 뒤 헤어져서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동환’이었다는 사실은 뇌리에 최·김 둘이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을 개연성도 있다는 묘미가 느껴진다.사람을 몰라 봤던 데 대한 사과의 편진데 이럴 경우 대개는 어물쩍 넘기는 게 오히려 예의일 듯 하건만 굳이밝히면서 다음에 만나면 오토밀이라도 사 드리겠다는 화가의 진솔성이 애교롭다.김환기가 눈치를 챘든 않았든 이 무렵은 파인과 최정희가 꽤나 깊어졌던 때일 것 같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기고] 아직 할말 있다는 친일파

    우리가 20세기에 못 푼 과제는 분단극복과 민주화이다.이과제를 못 푼 이유중의 하나가 일제잔재,친일파 청산이 좌초된 것 때문이다.이미 해방후 단죄받아야 마땅한 친일주구가 한국사회를 지배해 왔다.우리에게 일제식민지배는 해방이란 시점에서 마침표가 찍히지 않고 계속해 이어져 온 것이다.그래서 지금 친일파청산의 문제는 현재의 문제로서 민족자주의 문제이고,참된 나라찾기의 문제이다.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는 민족지사나 민주인사의 암살과 모략중상에 의한 매장의 배후에는 늘 친일파의 그림자가어른거리는 것을 보아오고 있다. 비판의 자유와 민주화를체질적으로 가장 싫어해 음해하여 온 부패 기득권부류가 누구인가?친일 정상배와 모리배,졸부들과 친일관료,명망가라는 위선자들이 아닌가? 친일파문제는 결국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이며 그래서 반통일적 세력의 청산 문제이다.해방이래 지금까지 친일파는반공주의란 간판을 걸고 매카시즘의 수법으로 반대파를 제거해 오고 있다.그들은 정·관계뿐만 아니고 사회 각계에서명망가로 행세한다. 친일파가 만든 구도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못배운 사람들은 민족문제에 색맹(色盲)이 되고 역사의식이 거세된 속물이 되어 버렸다.친일파의 우민정책이 성공한 것이다.친일파는 눈을 뜨는 백성을 두려워 해서 일찍이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고 했다. 친일논쟁을 보면 친일파문제 자체를 김빼려는 것이 친일파쪽의 대응자세이다. 흔히 그들은 ‘일제하에서 세금내고 산사람치고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있느냐?’고 호통을 치며친일파 문제를 싹쓸이식으로 배제하려 든다.민족문제에 대해 색맹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왜 지나간 과거만 따지느냐? 미래지향적이어야 하지 않는가?’하는 말을 그럴듯하다며듣는다. 과거가 없는 현재나 미래가 없다는 말은 싹둑 잘라버리고 딴전을 피우는 것이다.나아가서 친일파 편을 드는사람은 용서와 화해를 들먹인다.그렇지만 친일파가 언제 어떻게 용서를 빌고 참으로 사죄했는가? 이 사회의 윤리와 정의감을 깡그리 뭉그러뜨려 웃음거리로만든 것은 이 세상이 친일파 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친일행위가 용납되고 출세한 친일파와 부자가 된 친일파가 행세하는데 무슨 정신이 있는가?그런데도 친일인사의 문화예술을친일행위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얼빠진 소리를 하는이가 있다.여기서 물어보자.원래 글이나 예술 등 정신적 작품은 그 자체가 창조자의 인격이고 정신이다.그런데 민족반역의 매국노와 민족배신의 비열한 정신에서 나온 것이 어떻게 우수한 창작품인가? 니체는 ‘피로써 쓴 글’만이 참 글이라고 했다.말장난과 글자속임수 놀이가 시이고,예술이라면 그러한 예술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려라! 지금 우리 친일논쟁은 어느쪽으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아직도 반민족적 ‘친일’을,그렇지 않은 ‘지일(知日)’과선의의 ‘교류’와 혼동할 정도인가? 아직도 친일파에 대한동정론이나 변호론을 지껄이고 있을 시기인가? 21세기에 살아남을 민족으로서 우리는 친일의 반민족성이 왜 반민주로되고, 반통일로 되어 왔는가를 바로보는 안목도 못가질 정도로 친일병에 오염된 환자인가? [한상범 동국대 법학과교수]
  • [씨줄날줄] 친일파 명단

    지난 94년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청산하지 못한 역사’시리즈 3권(청년사 간)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해방후 그늘에 숨어 있던 일제부역자(친일파)의 면면과 그들의 행적이 대중 앞에 낱낱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이 책에는 오카모토 이노부(岡本實)라는 이름아래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 전대통령을 필두로,한국 현대사를 누빈 각계 ‘지도자’60명이 일제 강점기에어떠한 행동을 했는지가 소상하게 실려 있다.지난해 말 타계한 뒤 여태껏 ‘친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당서정주가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행적은 사실 해방공간을 산 세대에게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당시 직접 보고 듣고 했을터이니 말이다.그런데도 1990년대 중반 상황에서 새삼 충격을 준 이유는,그 일제부역자들이 해방이후 치죄(治罪)되지 않고 정권의 변천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성장해 지도자 노릇을 해왔기 때문이다.또 그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는바람에 ‘친일 문제’가 수십년간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은 점도 주원인이다.그런 까닭에 우리사회는 아직도 ‘친일파’의 정의 및 그 적용 범위를 갖지 못해,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매번 감성적이고 인물평가적인 수준에서 겉돌고있다. 최근 일제부역자 명단을 정리하는 사업이 여러 갈래에서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광복회는 지난 1999년 ‘친일 반민족 행위자 문제 연구기구’를 만들어 900여명을 대상으로친일파를 가려내고 있다.작업이 마무리 단계여서 다음달열리는 정기국회에 그 명단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파총서’의 핵심으로 친일 인명사전 2∼3권을 준비하고 있다.다만 사전 출간 계획이 발표된 지 여러해가 지났는데도아직 착수조차 하지 못한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쉰 여섯번째 맞는 광복절 아침이다.우리가 친일을 했느니,하지 않았느니 가려낼 대상은 적어도 해방 당시 스물은됐을,지금은 일흔여섯은 넘겼을 노인들이다.그런데도 새삼 친일 기준을 논의하고 친일파를 가려내자고 목청을 높이는 까닭은 그들에게 이제 와서 보복하려는 것도,망신을 주려는 것도아니다.다시금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과거를 엄정히 평가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반일·극일 관련사이트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어느때보다 숙연하게맞는 8·15.인터넷에도 과거 역사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하는 홈페이지 개설이 늘어나는 추세다.특히 8.15를 맞아 네티즌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민족문제연구소’(http://www.banmin.or. kr/).‘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을 위한 온라인 서명, 이달의 친일인물 코너 등을 운영하고 있다.또 오는 26일까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 침략 만행과 역사왜곡 실태를 기획 전시하는 오프라인 행사도 진행한다. 또 일반인이 운영하는 사이트도 있다.인천대 이호상 씨가운영자인 ‘친일’(http://user.chollian.net/~choker/)에는 친일파 예술가들의 면면을 소개해놓고 있다.현직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김용휘 씨(http:/y.netian.com/~s1gma/) 홈페이지에도 친일파 코너를 개설하고 있어 이채롭다. 한편 ‘안티일본사이트’ (htp://www.fuck-japan.com/)는최근 이용자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일본 반대 사이트를공식 표방하면서,군국주의,정신대 문제,독도영유권분쟁,독립운동 등 일본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게 해두었다. 최진순 kdaily.com기자 soon69@
  • 8·15특집 한일 관계 갈등을 넘어/ 친일논의 현재적 의미

    친일논쟁의 끝은 과연 언제쯤일까. 광복 56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친일논쟁’은 그칠 줄모르고 거듭되고 있다.이해당사자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이지만 뚜렷한 결론도 없고,논쟁이 정리되지도 않은 채 끝나곤 한다.겉으로 보기에는 소모적이고 분열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친일논쟁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라는 점에서 이른 시일안에 매듭지어져야 할 사안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친일논쟁중 가장 크게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안은 박정희 전대통령과 미당 서정주 시인을 둘러싼 논쟁이다.이들둘을 둘러싼 논쟁은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박정희기념관’의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직 그에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기념관을 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또 중앙일보가 추진하고 있는 ‘미당문학상’의 제정을반대하는 사람들은 미당의 문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친일경력 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이와 관련,강창일 배재대 교수는 “특정인물의친일행적을 둘러싼 논쟁을특정인에 대한 비방으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어 논의 자체가 진지하게 이뤄진 경우가 드물었다”면서 “시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논쟁은 불가피하며 이를 비난으로 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실제로 박정희 전대통령과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친일행적을 아예 도외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현대사 연구자는 “대중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인물일수록 역사적·민족적 평가는 엄정해야 된다”고 전제하고 “특히 식민지시대를 겪은 현대인의 경우 그가 친일 활동을 했는지 여부는 인물평가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잣대”라고 말했다. 거듭되는 친일논쟁에 대해 ‘전국민의 친일파론’을 들고나와 친일논쟁의 논점을 흐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최근 소설가 이문열씨는 조선일보와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친일파가 되지않았다는 보장이 없다는 주장을 펴,그의 역사인식 자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친일문제연구가인 고 임종국씨가 “친일인사들은친일행적을 희석시키기 위해 친일문제를 전국민적 차원으로 걸핏하면 확대시킨다”고 지적한,그런 현상을 나타내는것이다. 흔히 친일논쟁을 소모적인 ‘비난전’으로 보는 사람들은공정한 평가 잣대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엄격히 말해 적절치 못하다는 게 학계의다수설이다. 많은 학자들은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이 하나의 기준이라고 본다.다만 이 법에따라 구성된 반민특위가 활동 도중 와해됨으로써 평가(단죄)의 잣대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친일논쟁을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자신이나 선대의 친일행적을 사죄하는 경우도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박사는 자신이 일제말기군수를 지낸 사실을 수차례에 걸쳐 글과 강연을 통해 민족앞에 사죄했었다.또 친일문인인 파인 김동환 시인의 3남김영식씨는 선대의 친일행적을 공개 사과했었다.2공화국당시 국방부장관을 지낸 현석호도 회고록에서 친일행적을사죄하기도 했다.독립운동가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인간에게 과오는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이를 참회하고 사죄할 줄 아는 것”이라면서 “친일인사 역시 민족앞에 사죄한다면 화해의 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새천년의 입구에서 과거사에만 매달리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그러나 이는 우리나라가 중국 등 아시아국가나 프랑스 등 유럽과 달리 ‘역사청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국민적 합의를 통해 친일논쟁을마무리짓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단죄의 대상자들이대다수 사망해 법적 청산은 불가능하게 됐지만,대상자들의친일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역사적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광장] 친일파 논쟁을 보면서

    필자는 월간중앙 8월호에 임정 국무위원 김승학 선생이 작성한 친일파 명부에 해제를 붙이면서 이 문제가 아직도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느낄 수 있었다. 1945년 8월15일,일본 ‘천황’이 떨리는 음성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수많은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어디에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알 수없는 태극기가 새 하늘에 펄럭였다. 반면 친일파들은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한 순간에 뒤바뀐 세상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운명은 사형,장기구금,재산몰수로 구체화될 민족의 심판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1944년 8월25일,불과 5년간의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대대적인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나섰다.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나치하의 비시 정권의 총리를 지낸 라발 총리 등에게 사형을 선고 집행했고,일반법원은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779명의 사형을 집행했다.지방법원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약 3,000여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보다 수십배의 나치 협력자들이 종신 강제노동형 등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이광수와 최남선을 비롯한 일부 친일지식인들이서둘러 반성문을 쓴 것은 프랑스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한 공포감도 작용한 것이다.이런 지식인들보다 더욱 공포에 떨었던 일단의 반민족 행위자들은 일제 고등계 경찰들과 친일 검사·검사보들이었다.이들은 실제로 독립운동가를 직접 체포,고문한 독립운동가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포가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고 다시 독립운동자 박해에 나서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효용성과 반공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등용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박해하게 한 것이다. 48년 국회가 개원하면서 설치된 반민특위는 온 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친일 경찰들에게 특위 사무소가 습격당하는 등 수난을 겪다가 문을닫고 말았다.그리고 이 땅에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담까지 생겨나는 가치관의 혼돈이 난무하게 되었다.이런 점에서 친일파 명단을 작성했던 김승학 선생이 64년그의 마지막 유고가 된 한국독립사 서문에 쓴 글은 아직도 심금을 울린다.“무릇 한국가를 창건하거나 중흥시키면 가장 먼저 유공자를 논공행상하고 반역자를 엄격하게 치죄하는 것은 후세 자손들에게 유공자의 우국충정을 본받게 하고 반역자의 그 죄과와 말로를경계케 하여 국가주권을 길이 반석 위에 놓고자 함이다…건국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를 범한 것은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던 항일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전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施政)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執政)10년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 ‘이 중대한 실정’의 과오가 오늘까지 이어져 대다수 국민들이 창씨개명했으니 모두가 죄인 아니냐며 친일행각을 두둔하는 가치전도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지하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자손들이 살아야 할 이 나라가 ‘항상 악이 승리하는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친일파 문제를 둘러싼말장난만큼은 즉각 중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한 말장난에 분개하는 것은 지하의 독립운동가들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씨줄날줄] ‘두고 보자’

    마산YMCA가 행정기관의 잘못을 감시하는 홈페이지 ‘두고보자(www.dugoboja.or.kr)’를 지난달 초 개설했다.“잘못된 행정,밀어붙이기식 행정의 폐해를 두고 두고 지켜보면서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는 취지로 시작해 그 대상 1호로 ‘무학산 산불감시 철탑’을 골랐다.자연 경관이 수려한 무학산 정상에 지난 5월 철탑을 설치해 환경을 해쳤다는 것이다.홈페이지에는 철탑 설치 결정에 참여한 공무원5명의 이름이 공개돼 있으며 관련 동영상도 올라 있다. 한국인 성격을 비웃을 때 쓰는 말로 ‘냄비근성’이 있다.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속성을 말한다.그런가 하면 모든 일을 빨리 끝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해서‘빨리빨리 증후군’이라는 표현도 있다.‘냄비근성’과‘빨리빨리 증후군’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계되는 말인데,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지적을 부인할 자격이 없을는지도 모른다.마치 집단망각증에나 걸린 것처럼 과거를 너무쉽게 잊기 때문이다. 멀게는 일제부역자(친일파)들을 반세기가 넘도록 청산하지 못한 것을 비롯해 최근에도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넘어가거나,참담한 사고가 거듭된 사례가 적지 않다.예컨대 1999년 6월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청소년수련원에서불이나 유치원생 등 23명이 사망한 뒤 우리사회는 소방대책을 마련하라고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하지만 정확히 넉달 뒤 인천의 호프집에서 57명이 숨지는 대형화재가 발생했고 이는 지난 5월 대입기숙학원 화재로 이어졌다.사건·사고가 나면 그때마다 ‘안전 불감증’을 개탄할 뿐 실제로 개선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두고 보자’는 말에는 앙심을 품고 언젠가 보복할 기회를 기다린다는 섬뜩한 뉘앙스가 있다.그러나 ‘두고보자는놈 겁 안난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두고 보자’가 실현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약해지고일 자체도 잊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사회도달라져야 한다. 하나의 사건·사고가 터지면 발생 원인을캐고 책임을 추궁하며 그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해야 한다.‘두고 보자’는 마음을 끝까지 지켜나가자는 뜻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정지용 친일논쟁 새국면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鄭芝溶)시인을 둘러싼 친일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충북 옥천 일대에서 지난 5개월동안 펼쳐지던 ‘정지용 친일논쟁’에 최근 학계까지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히면서, 논쟁의 무대가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 시인의 친일시비가 일어나게 된 것은 ‘안티조선운동’때문이다. 지난해 8월 옥천에서 안티조선모임인 ‘물총닷컴’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수감소 등 타격을 입은 최영배(47) 조선일보 옥천지국장이 던진 한마디가 논쟁을 촉발했다. 최씨는 지난 3월 인터넷신문 ‘피알한닷컴’과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한 것이 조선일보 뿐이냐.동아일보도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보자면 이 지역 대표적 인물인 정지용도 친일파였다”며 정지용 시인을 거론했다. 최씨의 이같은 발언 이후 옥천 출신 인사들이 정지용의 친일여부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면서 문제가 날로 확대됐다.문학평론가 김성장씨(42·옥천상고 교사)는 옥천신문에 글을기고하고 “친일시로 지목된 ‘이토(異土)’는 이광수·서정주등의 노골적인 친일성향의 시들과 비교해 볼 때 친일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김씨는 “정지용 시인의 친일시비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글을 썼다”고말했다. 정지용 친일논쟁이 이같이 꾸준히 진행되자,친일문학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헌영씨(중앙대 겸임교수)는 최근 ‘문학사상’ 8월호에 ‘정지용 친일론의 허와 실’이라는 글을 싣고,“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이토’는 친일시로 보기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런 시 한편을 남겼다고그를 친일파로 몰아붙인다면 이는 전국민을 친일파로 몰아친일논의 자체를 ‘물타기’하려는 일각의 음모”라고 풀이하고 “정지용을 친일파로 몰아서 이런 훌륭한 시인도 친일파니까 아예 이 문제는 넘어가자는 속셈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최씨는 3일 “단정적으로 정 시인이 친일파라고 말한적은 없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시작

    예산문제로 그동안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문제가 전기를 맞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는 지난 20일 편찬위원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워크숍을 갖고 사전 편찬일정과 주요 내용 등을 토의했다. 준비위에 따르면,친일인명사전은 총론(5∼7권),인명사전(2∼3권),자료집(10권 내외) 등 총20권 분량의 ‘친일파총서’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단순히 친일파 명단만 사전으로 펴내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정책과 친일파 육성정책,친일파들의 구체적인 활동내용,해방후 친일파 청산실패 및 재등장등을 망라해 친일파문제를 ‘집대성’하려는 것이다. ‘총서’ 가운데 핵심은 친일인명사전이다.편찬위는 자체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근거자료를 토대로 대략 3,000명안팎을 인명사전에 담아낼 계획이다.편찬위는 해당인물의 친일행적 정도,근거자료의 확보 정도에 따라 A·B·C 3등급으로 나눠 서술할 방침이다.예를 들어 춘원 이광수처럼 친일행적도 분명하고 관련자료도 풍부한A급은 100매 정도,B급은 50매,C급은 20매 정도 분량으로 다룰 계획이다.이밖에 구체적인 인적사항 확인이 곤란한 경우에는 ‘자료집편’에서 조선총독부와 각종 관변·어용 친일단체 관련자 명단수록으로 대신한다. 사전 편찬의 1차적인 관건은 관련자료 수집이다.그동안 관련자료를 수집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당시 발행된 각종신문,총독부 관보 및 직원록,각종 인명사전,개인회고록,문집 등을 수소문하여 분야별,지역별로 데이터베이스화를 진행해 왔다.자료 가운데 문학·음악·미술 등 예술분야와 행정관료들은 이미 DB구축이 완료된 상태다.그러나 관료 가운데서도 경찰·군인 등은 자료접근 자체가 어려워 아직 상당수가미비한 실정이다.해외 친일자료의 경우 현지 연구소나 연구자와 자매결연을 맺고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한 예로만주 친일파 관련자료는 중국 연변대 민족연구소가 도맡아작업중이다.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실장은 “예산과 인력이 뒷받침될 경우 자료수집·가공작업은 그리 큰 문제는아니다”고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소문이 나돈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른 사회적 비판도 없지 않았다.한상범 소장은 “올해중 1차로 ‘총론’의 일부를 출간한 뒤 국민적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기고] 이문열씨의 ‘위험한 얘기’

    근래 들어 각종 사회문제에 대해 좌충우돌하는 소설가 이문열씨가 또 한번 자신의 표현대로 ‘위험한 얘기’를 꺼냈다. 요지인즉 ‘함부로 친일파라 비난하지 마라.범위가 모호하면 그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다.따라서 범위와 정도를 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너도 한번 그때 태어났어 봐라.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이것은 친일문제를 논의,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인 데다 발언의 이면에 담겨 있는 불손한 의도 때문에 필자 역시 ‘도저히 참을수 없어’ 논쟁에 개입하고자 한다. 우선 ‘내가 만일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이라는 가정 아래서 친일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문제 제기부터 보자.내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따라서 절대적인 선의 위치에서 친일을 단죄할 수도 있다.이문열씨의 우려가 이것이라면 전적으로 동의한다.필자 역시 ‘일제시대의 지식인이나 지주였다면 친일을 했거나 또는 베트남전에서 총을 든 군인이었다면양민을 학살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과거의 죄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이문열씨의 암시는 이렇다.우리 모두가 친일파일 수 있다.따라서 함부로 조선·동아를 친일했다는 이유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이것은 복거일류의 ‘친일파 공범론’과 유사하다.일제시대에 세금을 낸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는 식으로 몰아감으로써 친일에 대한 면죄부를부여하려는,전형적인 친일파들의 자기변호 논리다.우리 아니 이문열씨가 우려한 ‘젊은 사람들’의 주장은 이렇다.우리역시 잘못할 수 있다.문제는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가 아닌가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적인심성이다.그러나 한번 두번 잘못이 되풀이돼 몸에 배어버리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게 되고 결국에는 자기 최면과 주술에 빠져 자신의 죄조차 합리화하게 된다. 이문열씨가 예로 든 조선일보가 바로 이 지경에 있다.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저지른 ‘친일’이라는 죄를 죄로 인정할능력마저없다.오랜 세월 이것이 일상화돼 마침내 자신들이저지른 탈세라는 범죄까지도 언론탄압으로 몰아세우는 행패를 부리고 있다.가치관의 부재와 뒤집힘이 극에 이른 것이다.이문열씨가 변호하는 것이 이것인가.아니면 문제의 본질을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 무지의 소산인가.그리고 그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에 친일에 대한 합의나 기준이 과연 없는가.그렇다면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자 처벌에관한 특별법’(약칭 반민법)에서 제시한 친일파 기준은 무엇인가.그가 제시한 ‘자발성’‘대가성’‘상쇄효과’ 따위의 총체적 고려는 이미 그때부터 충분히 있어 왔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친일을 했는가 안했는가라는 일차원적인 논쟁 수준에 머물러 있다.왜 그런 정도밖에 안돼 있는가는 이문열씨 자신도 잘 알 것이다.‘위험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그만한 준비나 생각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제 그의 대답을 기다려 보자. ▲김민철 민족문제硏 연구실장
  • [김삼웅 칼럼] ‘일왕의 음모’에 도사린 음모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싸고 현해탄의 파고가 높아간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국·대만 등 과거일제 침략을 당한 많은 나라가 일본의 ‘신군국주의 교과서’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동북아 평화질서를 교란하는 일본의 처사에 분노가 치솟는다. 일본은 전후 미국의 핵우산 아래 급속히 경제성장을 이루는 한편 ‘전범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침략주의보수본류세력이 지금까지 일본사회를 지배해왔다. ‘도쿄재판’으로 A급전범 몇명이 처형됐지만 미국이 주도한 재판이고 그나마 미·일간의 유착으로 최소한에 그쳤다. 일본군국주의 만행이나 독일·프랑스 등과 비교할 때 형식적인 처리에 불과했다. 오늘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여기서 배태되고, 한국이 친일세력을 척결하지 못하여 수구세력이 득세한 것과 비슷하다. 흔히 일본의 이중성을 비판하여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제시되지만 일본의 이중성과 교활성은 ‘일왕의 음모’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일본 왕실은 은밀하게 우수한 인재를 골라 미국에 유학을보냈다. 패전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일본의 로비스트로 육성하려는 원려지계(遠慮之計)였다. 실제로 패전후 이들의 역할은 대단했다. 일본을 잘 모르는 미국은 이들의 자문으로 전후처리에 나섰다. 일왕(천황)제 유지, 전범처리최소화 등 일본의 명운에 크게 기여하고 전후 복구와 미·일동맹관계에도 역할을 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적국에 간첩이 아닌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 그것도 왕실에서 은밀히 추진한 저들의 이중성과 교활함에 전율을 느낀다. 도쿄의 고서점가를 둘러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의 저력은고서점에서도 찾게 된다. 도쿄중심지의 최신건물에 진열된어마어마한 고서들, 분야별·국가별·전문서적을 갖추고 그것이 사업으로 번창하는, 일본독서층을 볼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1900년대 초기에 한국의 가축, 도로, 하천, 귀신, 무당…등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전문분야를 연구하고 출판하고 보존·유통하고 있다. 일제의 한국병탄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여 먹어삼킨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한국의 족보를 연구하는 사람이 수십명이라고 들었다. ‘족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저들의 한국연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열하고 치밀하다. 우리는 어떤가. 사학자들은 너도 나도 독립운동사에 매달린다. 국가정통성에서 볼때 중요하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보다 몇십배 많은 친일파·매국노문제를 본격적으로, 필생의과제로 연구하는 학자는 드물다. 유학이라면 대부분 미국행이다. 서울대교수 64%가 해외유학출신이고 미국이 전체 유학파의 78.6%다. 미국으로 가야 출세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군국주의는 누가 뭐래도 갈데까지 갈 것이다. 우리 정부의 군사교류 중단이나 문화개방연기, 일본함정입항불허 등 대책이나 국민의 규탄시위로 시정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김치 하나라도 ‘기무치’를 이기는 전략과 치밀함이다. 세계적 석학 앨빈 토플러가 정보통신 정책연구원의 의뢰로청와대에 제출한 ‘발전전략’에는 음미할 대목이 많다. “한국정부는 민간기업 및 대학과 공동으로 ‘바이어벤처펀드’를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이 펀드를 통해 미국·유럽·중국지역의 최첨단 생명공학 신생업체 100곳을 선정, 한국과학자와 대학원생이 연구에 공동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투자해야 한다. 투자과정에서 일부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가장 진보된 지식영역에 한국을 진출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는 내용이다. ‘일왕의 음모’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정부나 기업, 민간단체들이 서둘러야 할 지적이다. 일제가 침략하던 100년전과 비교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이얼마나 변했는가. 국토는 여전히 두동강이고 정쟁에 날이저물고 수구언론은 족벌이해에 얽혀 사회정의와 민족문제를왜곡한다. 일본을 깊이 알자. ‘일왕의 음모’속에서 또 무엇이 ‘음모’되는가를. 김삼웅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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