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친일파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다이슨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협의회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노동부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 도림천
    2026-04-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80
  •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日 한국인피해자 소송 번번이 외면… 끝없는 절규

    [경술국치 조약체결 100주년] 日 한국인피해자 소송 번번이 외면… 끝없는 절규

    역사 속 공식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날은 1910년 8월29일이다. 그러나 강제 병합조약 체결은 이미 일주일 전인 8월22일에 이뤄졌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던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저항 앞에 혼쭐이 났던 일제와 친일파들은 일찌감치 조약을 체결한 뒤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벌이고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시켰다. 민족의 혼으로 상징되는 말과 문자, 노래, 역사, 국민과 국가의 재산과 생명 등을 모두 잃어버린 36년 일제강점기의 압제가 사실상 이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한센인 등 일제강점이 남긴 고통은 100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똑똑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제2법정은 “이러고도 일본이 인권 국가인가.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는 절규로 뒤덮였다. 군인과 군속,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 피해자 35명의 13년 법적 투쟁이 허무하게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3명의 재판관은 “원고 청구 기각, 소송비용은 원고부담”이라는 짤막한 선고 직후 법정을 빠져나갔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 등은 1991년 12월 “한일청구권 협정은 양국 국교정상화의 일환일 뿐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일본의 개인 보상책임은 해결되지 않았다.”며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33차례 심리 끝에 나온 1심 판결은 “국제법상 가해국에 대한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도쿄고등법원 역시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최근 외무성 내부문서를 통해 양 회장의 주장처럼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뒤에도 개인청구권이 유효하다고 판단했음이 확인됐다. 간 나오토 총리가 최근 “식민지 지배는 한국에 반(反)했다.”며 사과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일본은 행동으로 보여 준 적이 없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소송이 제기됐지만, 과거의 죗값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해 청구권이 소멸됐다며 피해자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인 5000여명을 태운 배를 폭파해 수장시킨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에서는 1심 재판부가 유족과 피해자 15명에게 4500만엔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지만, 2심과 최고재판소가 이를 뒤집었다. 피해자들은 일본에 제기한 소송이 기대에 못 미치자 우리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쓰비시중공업 일본공장으로 징용돼 강제노역을 했던 이근목씨 등 6명이 2000년 회사를 상대로 6억 6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처음으로 부산지법에 냈다. 재판은 무려 7년을 끌다 결국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기각됐고, “전쟁범죄에도 시효가 있느냐.”는 비판이 일었다. 피해자 중 1명인 박창환씨는 2002년 사망해 판결을 보지도 못했다. 재판부가 사건을 각하하지 않고, 일제 피해자 소송이 우리 법원 관할임을 인정해 준 것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대한변호사협회 최봉태 일제피해자인권소위 위원장은 “일본은 아직도 한일협정 문서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면서 “일본 최고재판소로부터 문서 공개 판결을 받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일부 공개된 후 우리 정부가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일제 피해자들은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국가를 상대로 법적 투쟁을 전개했다. 2006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109명이 헌법소원을 냈고, 원폭 피해자와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희생자들도 뒤따랐다. 헌법재판소는 그러나 침묵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제 강제징용자 미불임금을 당시 기준으로 1엔당 2000원으로 환산해 지급하도록 한 ‘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됐다.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부터 현재까지 일제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총 46건에 달하며, 이 중 7건은 헌법소원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소송 당사자 10만명을 모아 ▲명성황후 진상 규명 ▲일왕 공식 사죄 ▲찬탈문화재 반환 등을 제기할 예정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무능함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에 입맛을 다시던 세계 열강과 친일파들의 감시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16일부터 이틀간 오후 9시50분부터 방송되는 EBS 다큐프라임 ‘한일강제병합 100년 특별기획-잊혀진 나라 13년’은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하다고만 알려져 있던 고종이 조선을 근대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과 좌절을 했으며 얼마만큼의 성과를 일궈냈는지 살핀다. 1부 ‘제국의 꿈’은 1903년에서 1906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독일 은행에 입금되었던 ‘대한제국 국고예치금 100만마르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종이 먼 외국은행에 그 많은 돈을 예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99년 초가지붕 사이로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호기심 많은 시민들은 전차 주위로 모여든다. 당시 종로를 달리던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나 빠른, 동양에서 두 번째로 부설된 승객용 전차였다. 고종은 근대적 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파의 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 개혁과 관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도 힘을 쏟는다. 정동에는 각국의 공사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파란 눈의 선교사들에게 신식교육도 적극 허가한다. 고종의 자비로 만든 독립신문은 국민들의 자주정신을 일깨우게 되고 국민들은 만민공동회라는 토론의 장을 마련, 사회문제에 눈을 떠간다. 전신선과 전기를 가설하고, 철도를 부설하며 도시개조 사업을 전개하는 등 고종의 조선 근대화시키기 계획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아관파천 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광무황제’로 즉위한다. 방송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 유물을 출품해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대한제국 알리기에도 적극 참여하는 고종의 모습을 전한다. 2부 ‘제국의 전쟁’은 열강에 대한 고종의 치열한 투쟁을 전한다. 세계 열강들 속에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외교활동과 자주독립국가 국민의식이 중요했다. 고종은 관립외국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을 근황세력으로 끌어들여 각국에 파견한다. 방송은 고종의 기밀문서를 가지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근황세력들과 그 뒤를 쫓던 일본 스파이의 모습을 전한다. 근황세력은 고종의 강제 폐위 뒤에 해외 독립운동에 나선다. 스티븐슨 사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까지 모두 배후에 고종이 있다는 근거 자료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다.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 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고종. 방송은 고종이 조선의 끝이 아닌, 항일 투쟁의 시작으로서 그의 업적을 조명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싱어송라이터 김사랑 디지털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사이드웨이 21일 오후 7시 서울 신사동 압구정예홀. 4만 9500원. 1544-1555. ●브랜뉴 콘서트-버닝데이(2AM, 브라운아이드걸스, 비스트, 카라, 티아라 출연) 21일 오후 7시 서울 잠실동 잠실실내체육관. 6만 6000~8만 8000원. 1588-4695.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 이인규 손방일의 여의도사람들 콘서트 21일 오후 4시·7시. 서울 견지동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 3만 3000원. (02)780-8799. ●김동률·이상순 베란다 프로젝트 2010 콘서트 21일 오후 8시, 22일 오후 7시30분. 서울 신촌동 연세대 노천극장. 5만 5000~11만원. 1544-1555. 국악·클래식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특별연주회 : 2010 국악짱 재미짱 19일 오후 5시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임평용 지휘로 판소리 춘향가, 전통무용 태평무 등 교과서에 나오는 전통음악 중심의 프로그램. 1만~2만원. (02)399-1721. ●금난새와 유라시안필의 평화 콘서트 16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파니 마리 드강, 피아니스트 니콜라 브랑기에 협연.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등 연주 예정. 2만~10만원. 청소년 20% 할인. (02)3473-8744.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코러스 청소년 음악회-맛있는 클래식 음악 17일 오후 7시30분 경기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 조익현 지휘로 아프리카, 서유럽과 동유럽 등 다양한 음악 공연. 전석 5000원. (032)625-8330~2. 연극·뮤지컬 ●연극 ‘야메의사’ 19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서울 대학로 선돌극장. 제목대로 엉터리 의사가 출장 진료를 나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우리 사회 군상을 통해 한국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전석 2만원. (02)814-1678. ●뮤지컬 ‘서편제’ 11월7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이어 뮤지컬로 연출됐다. 이자람, 차지연 등 호화 캐스팅에 이지나 연출이어서 관심을 모은 작품. 7만 7000~9만 9000원. (02)703-2016. ●연극 ‘아버지를 죽여라2’ 18일부터 29일까지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친일파였던 부친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한다는 스토리로 친일청산 문제를 짚는다. 전석 1만 5000원. (02)3673-5580. 미술·전시 ●드로잉-작가들의 방 24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 김영미, 변웅필, 박재용, 알랭 카르데나스 카스트로(프랑스), 나탈리 타초(프랑스), 리처드 홀랜드(미국)등 작가 6명의 드로잉 작품. (02)734-7555. ●영국 현대 회화전 10월14일까지 경기 성남아트센터 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리처드 해밀턴 등 영국 현대 회화상인 존 무어상 수상 작가 30명 작품 70점 전시. (031)783-8000. ●한연선 개인전 18일까지 서울 안국동 갤러리담. 동양화의 먹 드로잉과 분채 기법을 이용해 연잎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의 작품 13점. (02)738-2745.
  • 순국선열·애국지사 338명 광복절 포상

    순국선열·애국지사 338명 광복절 포상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338명이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게 됐다. 1995년 광복 50주년 포상 이후 최대 규모다. 국가보훈처는 11일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안중근 선생의 4촌 동생 안홍근 선생과 유찬희 선생 부자 등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포상 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18명(독립장 5명, 애국장 108명, 애족장 105명)과 건국포장 41명, 대통령표창 79명 등이다. 이 가운데 여성은 6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안중근의사 가문 독립유공자 15명 배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안홍근 선생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그해 여름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수청(水淸)촌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도 모았다. 올해 순국 100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홍근 선생을 포함해 안명근(1962·독립장), 안춘생(1963·독립장), 최익형(1977·독립장), 안경근(1977·독립장), 안정근(1987·독립장), 안봉생(1990·애국장), 오항선(1990·애국장), 조순옥(1990·애국장), 안원생(1990·애족장), 안공근(1995·독립장), 안낙생(1995·애족장), 조성녀(2008·애족장), 안태순(2009·애족장) 선생 등 모두 1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 유찬희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지도자이다. 그의 차남 유기문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그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 한인상무총회, 대한국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1923년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동성노농공사와 국민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또 유기문 선생은 1930년 이후 중국 상하이와 톈진 등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에 가입해 일제의 주요시설 폭파, 친일파 처단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앞서 유 선생의 장남 유기석 선생이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아 3부자가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됐다. ●‘성서조선’ 김교신·송두용 건국포장 1927년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하면서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해 오다 1942년 3월 책 머리말에 ‘조와(弔蛙)’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을 계기로 옥고를 치른 김교신·송두용 선생에게도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조와’는 일제의 가혹한 지배로 인해 침체된 조선민족의 영혼을 일깨운 내용으로 지목돼 관계자들이 체포되고 잡지의 폐간까지 불러왔다.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지배로 인해 침체된 조선민족의 영혼을 일깨운 내용으로 지목되어 관계자 여럿이 체포되고 잡지의 폐간까지 불러왔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각각 수여되며, 국외에 거주하는 유족에게는 재외공관을 통해 전수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중앙기념식장에서 안홍근 선생의 손녀 안기숙(69)씨 등 7명에게 직접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수여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06명, 애국장 3669명, 애족장 4547명, 건국포장 866명, 대통령표창 2198명 등 모두 1만 2209명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자살특공대 된 조선인의 이야기

    자살특공대 된 조선인의 이야기

    동아시아 반도의 땅에 불어닥친 변화의 20세기 초.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참혹한 절망의 시기였으며, 누군가는 회의와 냉소로 몸부림치던 폐허의 시간이었다. 무너진 반상 질서의 틈바구니는 백정 집안의 협잡꾼에게는 한없는 기회였다.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음을 직감하고 온갖 비굴함으로 무장한 채 친일파로 생존하고, 군국주의자로 빌붙으며 부를 늘려간다. 그리고 족보도 사들이고, 몰락한 양반 집안의 항일독립운동가 여식을 아내로 삼는다. 거기에서 나온 자식 중 얼굴 번듯하고 공부 잘하는 첫째 아들은 ‘주의자’로 커서 감옥소를 거쳐 뒤늦게 ‘부끄러운 집안 내력’에 절망하며 전향해 친일의 길을 전전한다. 둘째 아들은 열일곱 살에 일찌감치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허무하고 재미없는’ 지경을 체험하는, 난잡하고 허랑방탕한 파락호로 큰다. 그리고 뒤늦은 순정과 사랑을 가르쳐준 한 여인을 위해, 형을 대신해 가미가제 특공대에 지원한다. 김별아(41)의 새 장편소설 ‘가미가제 독고다이’(해냄 펴냄)는 너무나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 타락하며 염세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조선인 조종사의 유장한 이야기다.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한계를 펼치는 이야기다. 비루할지언정 끓어오르는 삶에 대한 욕망과 끝끝내 피하고 싶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함께 지닌 우리네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그동안 김별아는 베스트셀러 ‘미실’을 비롯해 ‘논개’, ‘백범’, ‘열애’ 등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실재 사건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그에 비해 ‘가미가제’는 시대와 개인의 관계에 집중하며 보편성을 획득한 인물을 창조해 역사의 실체 속으로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갔다.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의 ‘지란특공평화회관’ 기록에도 조선인 조종사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원래 부대 명칭은 ‘신푸(神風) 도쿠베쓰-고게키타이’. 줄임말로 ‘신푸 도고다이’였으나 미군의 일본인 2세들이 ‘가미가제’라 부르며 더욱 유명해진 이 부대의 자살특공대원 희생자 숫자는 조선인은 물론, 전체적으로도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미가제’에는 잔머리의 대가 ‘아키히로’가 나와 공분의 대상이 된다. 또한 다쓰시로(서정주의 창씨개명 이름)는 자살 공격을 칭송하는 시 ‘오장 마쓰이 송가’를 써서 천박한 친일파 아버지마저 핏줄의 단절을 걱정하게 한다. 황군의 병사가 될 것을 재촉하는 ‘조선문인보국회’의 마쓰무라 고이치(시인 주요한의 창씨개명 이름), 최재서, 노천명 등의 이름도 새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곳곳에서 빛나는 해학적이며 눙치는 문장들은 처절한 비극조차도 희극처럼 읽을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짐짓 심각해지는 것보다 시대의 비극성과 역설적인 상황이 더욱 도드라진다. 마지막 결론까지도 유쾌하다. 김별아의 힘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이완용, 한일병합후 400억 축재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한일강제병합 이후 15년 동안 무려 400억원 이상을 축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공개한 백서 ‘청산되지 않은 역사, 친일재산’에 따르면 이완용은 1925년 당시 ‘경성 최대의 현금부호’로 불리며 최소 300만원(현재의 600억원에 해당)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에는 일제와 황실로부터 받은 은사금(恩賜)과 하사금, 뇌물, 횡령으로 모은 재산 등을 모두 합해 약 100만원(200억원)을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이완용은 한일병합 후 불과 15년 만에 400억원을 축재한 셈이다. 위원회는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보도를 인용해 이완용이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원)을 받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대가로 은사금 15만원(30억원)을 챙겼다고 밝혔다. 심지어 한·미 전기회사를 설립할 때 옥새를 위조해 황실의 내탕금 40만원(80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20) 젊은이가 보는 양국관계 해법

    [한·일 100년 대기획] (20) 젊은이가 보는 양국관계 해법

    ■韓-과거사 청산이 먼저 우리 대학생들은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과거 청산’을 꼽았다. 양국의 뒤얽힌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관계로 발돋움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경(25·여·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씨는 ‘일본통’을 자처한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현지 여행도 자주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는 일본 학생과 펜팔을 계속해 오면서 속을 다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김씨는 “민감한 문제이지만 ‘과거사 청산’이란 화두를 일본 친구들에게 꺼낸 적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그때마다 결론은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친구들은 과거에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아예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면서 “윗세대와 아랫세대 모두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의식 없이 무작정 덮어두고 넘어가려 한다거나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한·일관계를 계속 후퇴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생각하면 늘 불편 송하원(24·성공회대 사회학과 4학년)씨는 “일본의 과오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보상이라는 역사의 수순이 완료되지 않아 우리가 일본을 생각하면 늘 불편한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씨는 “매듭짓지 못한 과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내리지 못한다.”면서 “그 때문에 일본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폄훼하는데 이는 한·일 양국의 손해”라고 덧붙였다. 정다혜(23·여·연세대 총학생회장·사학과 4학년)씨는 “한·일관계 문제의 근원에는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씨는 “서로를 믿기 위해선 역사적 사건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반성,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사회의 노력이 필요한데 이런 것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친일파 잘살고 독립운동가 후손 시달려 젊은이들은 우리의 과거사 문제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환(22·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경제학과 3학년)씨는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안 돼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친일파 후손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송씨도 “친일파들이 버젓이 국가적 위인으로 숭상받고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잘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잘못을 지은 것처럼 가난에 시달리면서 조국땅에도 못 들어오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양국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씨는 “양국의 상호 발전과 관계개선을 위해서라도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씨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갈등의 원인에 대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서로 평가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와 연대해 日사과 받아야 아울러 일본의 사과를 받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연대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일본의 역사의식이 잘못됐다고 감정적으로 교역을 끊기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만행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인류적으로도 참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에게 피해를 본 다른 나라들과 이념과 정치체제는 달라도 함께 연대해 일본의 죄과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조건 일본이나 일본인을 배척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무조건 일본 사람이 싫다고 해서는 일본인을 설득할 수도 없고 우리땅을 불합리하게 불법적으로 강점한 일본인과 형식적으로 같은 모습을 띨 수 있다.”고 경계했다. ●양국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 부족 오히려 양국의 문화·사회적 교류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씨는 “양국에 대한 이해도 더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친구들은 한국의 아이돌 가수, 영화배우 등 연예인에게만 관심이 있지 한국문화나 한국인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연예인을 매우 좋아한다고 해서 한국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우리 학생들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일본 연예인, 만화를 좋아하는게 대부분”이라면서 “문화를 음악, 만화, 공연 같은 작은 범주가 아니라 생활습관과 생각하는 방식 등에까지 서로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효섭·윤샘이나·김양진기자 newworld@seoul.co.kr ■日-서로를 인정해줘야 일본 젊은이들이 지난 18일 한국 상점들이 몰려 있는 도쿄 신주쿠구 신오쿠보 도리(거리)에 모였다. 직장인과 대학원생들인 이들은 평소에도 한국에 관심을 가진 터라 새로운 100년을 맞는 한·일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앞으로 일본을 짊어져 나갈 이들이 보는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해법을 들어봤다. 몇 달만에 신오쿠보 도리에 왔다는 다야 모리(27·일본어 예비학교 교사)는 “일본의 유명 번화가에서 한국 식당이 많아져 일본 사람들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며 “해가 거듭될수록 가까워지는 한·일관계를 이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한국인 김주임(29)씨와 부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고바야시 가즈토(27)는 “몇 년 새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 커플뿐만 아니라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이 결혼하는 사례를 주위에서 자주 보고 있다.”며 “한국이 그만큼 경제·문화적으로 일본과 대등해진 게 아니냐.”고 반문하며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 기업의 선전을 꺼냈다. ●한국기업 장점 진지한 연구 시작 그는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액이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등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업체 5개사를 합친 매출액보다 많은 것에 일본 젊은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며 “30년 전에 일본이 강했던 산업이 잇따라 한국에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이 강한 게 결단력이 빠르고 국가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관·민체제가 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며 일본에서도 한국의 장점을 각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일본 중·고등학교 예비교사 교사인 와타누키 아이미(26·여)는 “최근 외무성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제3세계에서의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국기업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며 “일본 기업도 좀 더 위기감을 갖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한국기업의 최근 활약상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일본선 한국어, 한국선 일본어 교육을 그는 “앞으로 일본과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서로를 필요로 할 텐데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언어가 제일 중요하다.”며 “일본은 중학교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에서도 좀더 일본어 교육을 늘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을 한번 다녀온 적이 있다는 후지마쓰 겐스케(24·도쿄외대 대학원생)는 양 국민 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잘 모를 때는 그들의 엄격한 상하관계에 무척 답답한 느낌을 가졌다.”면서 “하지만 같은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들과 같이 술도 마시면서 대화를 자주 하다 보니 유교문화의 장점이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가 됐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공동 역사교과서 만드는 일 중요 물류회사에 다니는 미야타 다케히토(27)는 “일본인이 한·일 간의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며 “일본과 한국의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서로를 객관적으로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한국에 두 번 갔는데 정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며 “거리는 가까운데 서로 동떨어진 교육을 통해 양국을 먼나라로 만드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가진다.”고 전했다. 예비 교사로서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다야는 “얼마전에 NHK가 일본과 한국 간의 역사에 대해 방송했는데 과거처럼 일본이 한국보다 우수하다는 시각이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방송해 일본 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며 “한국에서도 그런 방송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류의 바탕은 한국의 도전정신 고바야시는 “두 나라 국민 간에 서로를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객관적인 사실도 안 보이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겉돌 수밖에 없다.”며 양 국민 간의 진지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인이 한국을 이해하는 데 한류의 열풍이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동방신기, 빅뱅에 이어 최근에는 카라, 티아라, 소녀시대 등 여성 그룹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평가한 그는 “일본 연예인들은 일본말만 하지만 한국 그룹은 한국말뿐만 아니라 일본어, 영어까지 배워 아시아를 비롯해 해외진출에 나서고 있다.”며 일본도 연예계까지 퍼진 한국의 도전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씨줄날줄] 친일파의 은사금(恩賜金) /최광숙 논설위원

    독립운동가 장태수(張泰秀·1841~1910)는 1910년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개와 말도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 있는가.”라며 통곡했다. 그는 일제가 회유책으로 권한 은사금(恩賜)을 거부했다. 24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결국 그해 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장태수가 비난한 역적들은 일왕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아 호사롭게 살았다. 일왕은 친일파 귀족들이 한일합방에 협조한 대가로 은사금 3000만엔을 하사했다고 한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은사금을 가장 많이 받은 친일 인사는 병합조약 체결에 직접 참여한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83만엔(현재 화폐가치로 약 166억원)을 받았다고 한다. 순종 장인인 후작 윤택영은 50만 4000엔(100억 8000만원), 매국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 을사오적 송병준은 10만엔(20억원)을 각각 받았다. 은사금의 시혜를 받은 의외의 인물도 있는데 박영효다. 그는 태극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개화사상의 중심 인물로 28만엔(56억원)을 받았다. 은사금으로 친일파들은 전국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완용만 보더라도 일제 초기 소유한 땅이 여의도의 1.9배나 되는 1573만㎡에 이르렀다. 1925년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인 그는 갖고 있는 현금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에 이를 정도였다. 은사금은 친일파 귀족 외에도 효자 및 효부, 홀아비와 과부, 노인, 고아, 정신병자의 구제금 등으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민심 수습용으로 복지사업에도 은사금을 뿌린 셈이다. 은사금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일왕과 관련된 단어이다 보니 일본 귀족층 등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도쿄 근교의 우거진 숲을 다니다 보면 은사림(恩賜林)을 볼 수 있는데 일왕이 내려준 돈으로 숲을 조성해 붙여진 이름이다. 올해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민족정기 회복과 과거사 청산을 위해 친일파들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할 수 있도록 특별법이 시행된 지도 벌써 5년째다. 지난해 기준으로 친일파 77명의 소유이던 여의도 면적의 70%에 달하는 토지 554만㎡를 국가로 귀속시켰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재산을 되찾으려는 소송을 계속 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 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다른 것 같다. ‘못난 조상도 다 내 복(福)’이라고 우기는 것 같아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이완용, 나라 팔고 30억 받아

    친일파 귀족 등이 한·일 병합 협조로 일왕에게 받은 돈을 일컫는 ‘은사금’(恩賜)’의 수령자와 구체적인 액수가 14일 공개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발간한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에 따르면 일제 강점 직후 병합에 협조한 조선귀족 등은 지위에 따라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은사금 액수는 작위와 일제에 대한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 등을 토대로 결정됐다. 가장 많은 돈을 받은 친일파는 고종의 친형이었던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83만엔(166억원)을 받았고,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50만 4000엔(100억 8000만원)의 거액을 챙겼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을 받았고, 같은 백작이었지만 이완용보다 공로가 작았던 이지용은 10만엔(20억원)을 받았다. 당시 1엔은 현재 가치로 약 2만원에 해당한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친일파, 나라 팔아·일왕에 최고 166억 ‘은사금’

    친일파, 나라 팔아·일왕에 최고 166억 ‘은사금’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친일재산조사위)가 14일 한일병합 등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에게 수만엔씩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은 친일파 귀족들의 이름과 액수를 공개했다.친일재산조사위는 최근 역사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를 발간, 일제 강점 직후 ‘공로자’로 인정받은 조선귀족 등이 지위에 따라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았으며 당시 1엔은 요즘 돈 가치로 환산하면 약 2만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최고액 수령자는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한일 병합조약 체결에 참가해 무려 83만엔(166억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이어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50만4천엔(100억8천만원)을 받았고 신궁봉경회 총재로 활동한 이준용은 16만3천엔(32억6천만원), 대표적인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 이지용은 10만엔(20억원)을 챙겼다.또 왕족 출신으로 후작이 된 이재각·이재완 등은 16만8천엔(33억6천만원), 조선귀족회 회장이면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박영효는 28만엔(56억원)을 받았다.백작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인 자작 중에서는 송병준과 고영희 등이 일제를 도운 공이 커 10만엔(20억원)의 거금을 받았다.귀족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병합에 일조한 이용구도 10만엔(20억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나라에 일이 있으면 국론이 양분되는 게 보통의 일일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도 있겠지만 공론이 아닌 사론일 경우도 있다.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공론인 경우에는 지도자가 앞장서 조율을 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의한 주장이라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는 60년째 6·25전쟁을 맞이했다. 필자는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때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이후 60년 만에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골드먼 삭스의 예측에 의하면 2025년에는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GDP 기준 세계 3위, 2050년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국민도 일치단결해 노력했겠지만 이를 지도한 지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 대통령까지 온전하게 대접받는 사람이 없다. 비단 대통령뿐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설혹 이들에게 약간의 결함이 있더라도 좋은 점을 부각시켜 자손들이 이를 벤치마킹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자손들이 미래의 비전을 제대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다. 서양 여러 나라엔 가는 곳마다 위인들의 동상이 즐비하다. 그들에게도 따져 보면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표상으로 이들을 위인으로 키우고 있다. 그네들이 흠이 있는 것을 몰라서일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조작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위인 만들기에 그토록 인색한가? 마음이 각박해서일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의 근·현대사는 극심한 격동기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념이 자주 바뀌고 가치기준이 자주 변화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를 겪다 보니 친일파 논쟁이 있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하다 보니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거친 충돌이 있게 되었다. 냉전을 거치다 보니 반공과 통일이 헛갈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각각 다른 기준으로 재단하다 보니 이 사람이 찬성하면 저 사람이 반대하고, 이 사람이 올려 세우려 하면 저 사람이 헐뜯는 형국이다. 이것은 사안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풍조로 굳어 가고 있다. 이러고도 국가가 잘될 리 없다.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의견을 조율하려면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하려면 상대방의 논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절장보단(絶長補短)해 공동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이른바 구동존이(求同存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공론에 의해 합의한 부분은 법률로 제정하고, 법률로 제정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준수해야 한다. 의견이 다른 것은 그대로 남겨두고 더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도 안 되면 다수결로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연한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일마다 대립이요, 정책마다 반대 일변도다. 일찍이 고속도로를 놓을 때도 그랬고, 인천공항을 건설할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요즈음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정비사업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와 인천공항을 반대하던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지금 그것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사업도 그럴 것이다. 내일의 입지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각자가 주장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 애국심에서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이익이나 당리당략으로 무턱대고 반대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론이 분열되면 되는 일이 없으니 누군가가 이를 조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양쪽의 의견을 절장보단해 합의점을 찾아야만 국가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공연 프리뷰]그대, 아직도 근대를 꿈꾸는가

    [공연 프리뷰]그대, 아직도 근대를 꿈꾸는가

    ”설명하고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TV광고가 있다. 한 꼬마가 조국 ‘Korea’를 설명하려 하지만, 아무도 못 알아봐서 실망한다는 내용이다. 국가브랜드위원회가 나랏돈 들여 하는 광고인데, 미안하지만 ‘촌빨 작렬’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해외-TV광고에서 보듯, 그 해외는 또 백인이어야 한다-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강박관념이 물씬 풍겨서다. 이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주류가 ‘근대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진화’ 구호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국연극연출가협회가 ‘한국연극 100년 재발견’을 주제로 동농 이해조(1869~1927) 선생의 1910년작 ‘자유종(自由鐘)’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런 면에서 주목된다.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과 원작을 나란히 선보이는 시도도 이채롭다. 우선 ‘2010 자유종’(박재완 연출)은 30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바통을 이어 ‘1910 자유종’(박정희 연출)이 다음달 7일부터 11일까지 같은 무대에 오른다. 엄밀히 따져 한국연극 100주년은 2008년이다. 1908년 종로 원각사에서 이인직(1862~1919) 선생의 ‘신세계’가 공연된 게 시발점이다. 그럼에도 협회 차원에서 이해조 선생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이해조 재평가와 연관 있어 보인다. 이인직은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로 유명하지만, 이완용의 비서를 지낸 친일파였다. 최근 학계에서도 이해조의 문학성이 더 높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협회 측은 이런 해석을 부담스러워한다. “원래 2009년에 100주년 기념사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이해조 선생의 자유종 출간 100주년에 맞춰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친일 논란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라는 해명이다. ‘1910 자유종’은 양반가 이매경 여사가 생일파티에 모인 신설헌, 홍국란, 강금운 등 다른 여성들과 함께 민족자주와 발전방향을 토론하는 내용이다. 지금 보면 구태의연한 계몽운동 같지만, 국운이 저물고 있다는 긴장감이 팽배했던 당시로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울분이 넘친다. 최대한 원작에 충실하게 연출한다는 의도다. ‘2010 자유종’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근대에 대한 욕망에 접근한다. “우리는 여전히 선진강대국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고, 우리 것에 대한 자만심과 수치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연출의 변이 이를 상징한다. 자본가의 장난감인 미술관 개관 기념식으로 무대를 옮기고 유학파 출신 큐레이터, 미스코리아 출신 사모님 등으로 등장인물을 재구성했다. 근대연극사를 되짚는 작업인 만큼 학술포럼도 함께 열린다. 다음달 5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다.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홍을표 이해조 선생기념사업회장, 김석만 서울시극단장 등이 이해조 문학의 의미와 현대화 가능성을 짚어 본다. 내년에는 최초의 신연극극단 ‘혁신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단장 이성구를 조명할 예정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극은 일정한 극본이 있다기보다 큰 줄거리만 유지한 채 즉흥적인 대사로 채워졌다. 2012년에는 처음으로 희곡 형태를 갖춰 집필된 일재 조중환의 ‘희극 병자삼인’ 100주년을 기념할 계획이다. 이 작품은 1912년 11월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너를 위해… 이 한마디에 안중근역 맡았죠”

    “너를 위해… 이 한마디에 안중근역 맡았죠”

    “겨레와 나라가 뭐기에 가족들을 왜 다 버렸냐는 아들 준생의 물음에 안중근이 ‘너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어요. 그 대사 한마디에 꽂혀서 하게 됐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외증손자 송일국이 안중근 의사를 다룬 연극 ‘나는 너다’에 출연한다. 뮤지컬 ‘영웅’이 영웅으로서 안중근을 조명한다면, 연극은 인간 안중근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송일국이 안중근과 그의 둘째 아들 준생 1인 2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안 의사의 가족 얘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 의사의 장남 분도는 7살 때 죽었다. 일제의 독살설이 나돌았다. 둘째 준생은 더 비극적이다. 1939년 총독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어렵게 살던 준생을 불러들여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행동은 잘못이었다.”고 사과하도록 했다. 배신자 낙인이 찍힌 것. 광복 직후 김구 선생이 중국 정부에 아비 이름을 더럽힌 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준생은 1952년 사망할 때까지 ‘호부견자’(虎父犬子·호랑이 아비 밑에 태어난 개 같은 자식)라는 욕을 들어야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아온 송일국이 ‘너를 위해서’라는 대사에 꽂힌 이유다. 지난 9일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송일국은 “극 중 대사에는 준생을 친일파, 배신자라 부르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나 역시, 그리고 누구라도 그 시대를 살았다면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저는 그렇지 않았지만, 독립운동 때문에 되레 집안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그런 얘기들을 쭉 듣고 보면서 자랐다.”면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떤 꼬리표가 달라붙을지 뻔히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준생을 이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안 의사가 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게 아니겠나.”라고 덧붙였다. 송일국 개인으로서는 연극 무대 첫 도전이다. 첫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을 넘어서게 한 것도 작품의 이런 성격 덕분이다. 연출을 맡은 윤석화의 협박(?)도 통했다. 윤석화는 “처음 출연을 제안했을 때 연극 무대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얘기했지만, 네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 이런 역할을 맡을 책임도 있다고 설득했다.”면서 “가난한 연극판의 적은 개런티에도 흔쾌히 출연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너다’는 새달 27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배우 박정자가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을 맡고, 한명구·배해선 등이 출연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송일국 “친일파를 이해한다? 피를 토할 일..”

    송일국 “친일파를 이해한다? 피를 토할 일..”

    배우 송일국이 ‘친일파 발언 논란’에 대한 억울함을 자신의 트위터에 털어놨다. 송일국은 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열린 연극 ‘나는 너다’(윤석화 연출)의 제작발표회에서 “시대적 힘에 무릎을 꿇은 이들을 이해한다.”고 밝혔다. 송일국의 이 같은 발언은 기사화되는 과정에서 ‘친일파를 이해한다.’는 뜻으로 해석돼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송일국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발언의 의미가 왜곡되었음을 밝히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송일국은 트위터에 쓴 글에서 “누가 아들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누가! 피를 토할 일이다! 내가 친일파를 이해한다니!”라고 다소 격앙된 어조로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그는 또 “대답할 때는 말 안 한거지만 안중근 의사의 아들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 또한 많이 놀랐다. 하지만 나 또한 그 상황에 처했을 때 그랬을 거라 대답한 것은 안중근 의사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일본에 의해 이용당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송일국의 발언 중 ‘시대적 힘이 무릎을 꿇은 이들’이란 친일파가 아닌 안중생을 의미한다는 것. 한편 연극 ‘나는 너다’는 안중근의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그의 삶과 거사의 의미,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되짚어 보기 위해 제작됐다. 다음달 27일부터 8월 29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사진 = 송일국 트위터 캡처, 서울신문NTN DB 서울신문NTN 오영경 인턴기자 oh@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송일국 “일제시대 친일파, 시대적 아픔 이해해”

    송일국 “일제시대 친일파, 시대적 아픔 이해해”

    배우 송일국이 “일제 시대 때 힘에 무릎을 꿇은 이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배우 송일국은 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열린 연극 ‘나는 너다’(윤석화 연출)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시대적 힘에 무릎을 꿇은 이들을 이해한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의 삶과 그의 아들 안준생을 재해석해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송일국은 안중근과 그의 아들 안중생 1인2역을 맡았다. 그는 “안중근보다 안중생이 제게 더 어울린다.”고 운을 뗐다. 송일국은 “안중생을 친일파 배신자 변절자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한다.”며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누구나 그랬을 거다. 나도 아마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랬을 것”이라며 시대적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어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거한 영웅들의 가족들이 당시 시대에서 떳떳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 역시 이해한다.”고 언급했다. 송일국은 독립운동가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외증손자로서 안중근역을 맡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할아버지가 떳떳해서 현재를 자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송일국의 이같은 발언 사실을 접한 네티즌들은 “본인 배역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서인진 모르겠지만 너무 경솔한 말이다.”,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며 강하게 분노하고 있다. 한편 연극 ‘나는 너다’는 안중근의 영웅적인 모습이 아닌 그의 삶과 거사의 의미,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되짚어 보기 위해 제작됐다. 다음달 27일부터 8월 29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서울신문NTN 오영경 인턴기자 oh@seoulntn.com / 사진=현성준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친일파 이해승 땅 돌려줘야” 항소심 “합병기여 단정못해”

    법원이 조선 왕족으로, 친일 활동을 한 이해승의 땅을 국가가 환수한 것은 위법하다며 후손들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친일파 후손이 환수 당한 재산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이 이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 박병대)는 이씨의 손자가 경기도 포천 등 전국 192곳의 땅(2007년 환수 당시 시가 300억여원)에 대한 국가귀속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익을 침해하는 행정처분은 상대방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확장 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해서는 안된다.”면서 “이해승이 한일합병 당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합병에 기여했다고 추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철종(조선 25대 왕)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대손 이해승은 한일합병 이후인 1910년 10월 조선인 귀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이후 친일파로 활동했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친일파의 조국애?

    친일파의 조국애?

    아무리 돌이켜봐도 안타깝기만한 역사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는 온 세상이 침략으로 해가 뜨고, 혁명으로 날이 지는 세계질서 재편의 시기였다. 그러나 청, 러시아, 일본 등 커다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있던 작은 나라의 무기력한 왕과 가여운 백성들의 삶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총칼을 앞세운 침략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존감이 컸고, 맞서 싸우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혁명을 준비하기에는 바깥의 변화 흐름을 턱없이 몰랐다. 100년이 훌쩍 지났건만 지금도 그 회한은 가시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만고불변의 매국노로 평가받고 있는 이의 가슴에조차 또 다른 조국애와 개혁의 열망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설적 욕망이 피어올랐을까. 장편소설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강동수 지음, 실천문학 펴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명성황후 시해의 주동자 중 하나인 우범선(1857~1903)에 대해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꾀한 반민족적 친일파로서만이 아닌, 개화당 핵심 멤버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실제 우범선은 을미사변 때 훈련대 대대장을 지내 일본 낭인들의 시해를 도왔지만,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서 국내 정치적으로는 공화제를 수립하고자 했던 철저한 개화주의자였다. 또한 육종학자인 우장춘(1898~1959)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역사 속 우범선은 1903년 일본에서 조선인 청년 고영근에게 암살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 못다 이룬 공화정 수립의 꿈을 위해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고종 직속 항일 첩보기관인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의 요원 ‘이인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인경의 아버지는 개화당으로 활동하다 참수된 인물로, 이인경은 갈등하면서도 끝내 아버지를 부정하고, 공화정의 흐름을 부인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902년 설립된 ‘제국익문사’는 겉으로는 관보를 제작하는 통신사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서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비서(秘書)로 보고해온 첩보기관이었다. 실제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제국익문사의 존재를 학계에 논문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규정집 ‘제국익문사 비보장정’과 함께 64명이 활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렇듯 소설은 사실과 허구가 교묘하게 얽혀있다. 팩션(팩트+픽션)이다. 제국익문사 요원들이 박영효, 우범선 등의 정변 계획을 하나하나 추적해 분쇄해가는 과정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그려냈다. 소설적 재미는 재미대로 좇아가는 한편, 소설 속에서 드러난 허구와 진실 사이를 따지며 역사적 사실 관계를 하나씩 챙겨나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첫 번째 장편소설을 펴낸 강동수(49)는 “최근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 등을 통해 명성황후가 마치 민족 정기의 상징인 듯 비쳐지고 있는 점에 의문이 들었다.”면서 “일본의 범죄 등에 대한 민족적 분노는 당연하지만 개화당과 수구당의 대립과 갈등이 사건의 또 다른 배경이었음을 주목하고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화당과 수구당의 대립, 외세의 한반도 침투 과정, 그리고 정변으로 점철된 정치적 혼란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면서 “개화파와 수구파가 모두 실패한 당시 상황에서 조선을 제대로 살릴 방법은 없었는지 따져보고도 싶었다.”고 말했다. 민족이라는 지상 명제에 파묻혀 환호하는 것도, 민족의 가치를 마냥 외면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100년 전에도, 지금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드라마 ‘서울 1945’ 이승만 명예훼손 무죄”

    대법원 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29일 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택상 전 국무총리 등의 명예를 훼손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의 PD 윤모씨와 작가 이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은 드라마 34회에서 장 전 총리가 이 전 대통령에게 ‘친일경찰’ 박모씨를 “사건 해결의 최대 공로자”라고 소개하는 장면을 내보내 이 전 대통령과 장 전 총리가 친일파로서 공산당 지폐위조 사건(일명 정판사 사건)을 경찰을 동원해 해결한 것처럼 묘사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과 2심은 “드라마의 특정 장면에 불과한 것으로 이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가 구체적으로 적시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실존 인물에 의한 역사적 사실보다 가상 인물에 의한 허구의 사실이 더 많은 드라마라는 점이 인정되고 구체적인 허위 사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했다. ‘서울 1945’는 해방공간을 배경으로 좌우익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로 2006년 1월부터 9월까지 방영됐다. 이 전 대통령과 장 전 총리의 후손들은 “고인들의 사회적 평가와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KBS에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함께 윤씨 등을 형사고소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시론]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다시 3·1절을 맞는다. 어김없이 오전 10시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1분간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 세련된 기념사와 우아한 독립유공자 포상, 장엄한 ‘기미독립선언문’ 낭독 등이 끝나면 “이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으로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는 ‘삼일절 노래’를 부르고는 만세 삼창을 끝으로 뿔뿔이 제 갈 길로 흩어질 것이다. 묵념의 순간만이라도 순국선열들의 고통과 염원을 상기했던가. 식민통치 압제 아래서 2000여회에 이르는, 그리고 세계 최대의 평화적인 만세 시위운동 참가자 200여만명의 함성에 귀 기울였던가. 3·1운동 후 1년간 피살 7500여, 부상 4만여, 피체 5만여, 가옥 소각 700여, 교회 소각 60여, 학교 소각 3, 헌병 즉결 태형 1만여, 약식 태형 1500여….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일제 침략자들의 각종 고문들, 대나무 바늘로 손톱 밑 찌르기, 시신과 함께 잠재우기, 철사를 달구어 남자 성기나 여자 음문·유방 난자, 발가벗겨 담뱃불과 다리미로 지지기, 기름종이를 국부에 삽입하여 불붙이기 등등…. 그런데도 신문은 일본인 순사가 시위 군중에게 음경 절단을 당했다는 등 허위 기사로 ‘불법 폭력 시위’라 우겼고 일부 비뚤어진 동포는 거기에 동조하기도 했다. 아니, 그런 비뚤어진 동포가 그때만 있었고 오늘에는 없을까. 그런 만행에도 식민통치의 경제 개발로 우리나라가 더 살기 좋아졌다는 논리에 따르면 3·1운동은 ‘불법 난동’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헌법전문처럼 ‘삼일정신’은 근대 민족혁명사의 모태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천명하면서 “인류 평등의 대의”와 “전 인류 공존동생권(同生權)”을 위한 세계평화를 주창한다. 이어 “침략주의, 강권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타매(唾罵)하고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來) 하도다.”고 절규한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세계사적 관점으로 보면 한 나라가 남의 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될 당위성을 밝힌 미국의 ‘독립선언문’(1774)이나, 현대 인권사상의 교본인 프랑스의 ‘인권선언문’(1789)에 뒤지지 않는 명문이다. 약간 번잡스러운 앞의 글이나, 너무 간결한 법률 조항인 뒤의 글이 지닌 아쉬움을 극복하고 유려 장엄한 문체로 인권과 독립정신 이념에다 민주화와 도덕의식 강조, 세계평화사상을 동시에 접합시킨 게 ‘기미독립선언문’이다. 글쓴이와 민족대표 33인 중 3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옥에 티로 거슬리지만 그 정신은 고전적인 ‘홍익사상’을 제치고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그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외의 여러 항일투쟁 세력들이 삼일정신을 면면히 승계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를 가차없이 비판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헌법전문은 삼일정신을 이어받은 유일한 적통으로 ‘4·19 민주이념’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이미 ‘5·18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화운동’ 역시 삼일정신과 4·19 민주이념의 계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찬연한 민족 민주주의 이념의 모태인 3·1운동을 기리는 ‘3·1문화상’ 역대 수상자 가운데 13명의 친일파가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친일파 명의의 기념사업이나 포상제도 역시 헌법전문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라는 삼일절 노래 가사는 선열들에게 이 나라를 봐달라고 할 만큼 우리가 떳떳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표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우리 힘으로는 헝클어진 이 나라를 어쩔 수 없으니 돌아가신 당신들께서 다시 민족을 굽어 살펴달라는 애원일까. 아무래도 우리는 아직까지 “이 날을 길이 빛내자.”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진관사 태극기’ 3·1절 맞아 공개

    ‘진관사 태극기’ 3·1절 맞아 공개

    지난해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와 항일독립신문이 3·1절을 맞아 일반에 공개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6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진관사 태극기와 ‘신대한’, ‘독립신문’ 등 항일신문 20여점을 전시한다고 24일 밝혔다. 태극기와 문건은 진관사측이 지난해 5월26일 경내 칠성각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불단과 기둥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가로 89㎝, 세로 70㎝, 태극 지름 32㎝인 태극기는 사찰에서는 처음 발견된 태극기다. 당시 불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항일운동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장기 위에 태극의 음(陰)과 4괘를 덧칠한 형태로 제작돼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됐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458호다. 함께 전시되는 문건은 3·1운동 직후 발간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6점,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4점,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 3점과 친일파를 꾸짖고 항일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경고문 2점 등 20점이다. 이들 문건은 모두 1919년 제작됐으며 태극기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신문에는 시 ‘태극기’와 태극기의 의미와 제작법을 설명한 ‘태극국기신설’ 등이 실려 있고 경고문에도 태극기가 교차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당시 진관사를 근거지로 임시정부와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던 백초월(1878~1944) 스님이 이들 태극기와 문건을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