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친일파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무혐의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참가자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주의보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 양계장
    2026-04-1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80
  • 이낙연 “길동무 돼 달라”… 비서실장에 정운현씨

    이낙연 “길동무 돼 달라”… 비서실장에 정운현씨

    친일파 연구… “율곡처럼 쓴소리 할 것”신임 국무총리 비서실장(차관급)에 정운현(59) 상지대 초빙교수가 임명됐다. 정 실장은 경남 함양 출생으로 대구고와 경북대 문헌정보학과를 거쳐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중앙일보를 시작으로 서울신문 문화부 차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과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를 역임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 연구에 매진했다.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는 살아 있다’, ‘친일, 청산되지 못한 미래’ 등의 책을 썼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에 이낙연 총리가 자신에게 비서실장을 어떻게 제안했는지를 자세히 적었다. 이 총리는 정 실장을 총리집무실로 불러 “길동무가 좀 돼 달라”고 말했다. 정 실장은 이에 대해 “아둔한 나는 길동무가 돼 달라는 말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새삼 놀랍다”면서 “그런 얘기를 그렇게 멋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다”고 전했다. 이어 “총리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은 전혀 뜻밖이었다”며 “MB 정권 초기인 2008년 10월 언론재단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10년간 야운비학(野雲飛鶴)을 벗 삼아 초야에 묻혀 지냈다. 일개 서생인 나는 정치에 대한 감각도 없고, 책략가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총리는 내가 부족한 두 가지를 가진 분이니, 꼭 도와 달라. 하나는 역사에 대한 지식, 또 하나는 기개라고 말했다”고 정 실장은 소개했다. 그는 “단소리보단 쓴소리를 많이 하면서 마치 선조에게 극언조차 서슴지 않던 율곡 이이처럼 하겠다”면서 “공직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총리는 전부 승낙했다”고 적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김정은 위원장에게 최인훈의 ‘광장’ 읽기를 권함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김정은 위원장에게 최인훈의 ‘광장’ 읽기를 권함

    확실히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화법과 태도는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이전의 북한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스스로 속한 체제의 한계와 부족한 점을 깨달은 자의 시선이자, 남한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이해한 자의 자세였다.이를테면, 그가 북한 인프라의 미비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거나 “많은 사람이 답방을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가겠습니다. 태극기부대(가) 반대하는 것 조금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며 서울 방문을 수락하는 대목이 그렇다. 적어도 그의 이런 발언에는 역지사지의 정신이 배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면에서는 여느 정치가보다도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그의 지난 평양 연설(2018년 9월 19일)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평화를 향한 강렬한 소망을 드러낸 기념비적인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이런 마음과 노력이 2018년 남북평화와 대화의 획기적 진전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리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 ‘역지사지’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있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가질 필요가 없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깊게 각인된 상대에 대한 선입견과 맹목적 분노에서 탈피하는 결단과 용기도 필요하다. 서로 문화적 차이, 전통, 역사에 대한 밀도 깊은 이해, 바로 그만큼만 남북대화와 평화도 진전될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런 과정에 비약과 공짜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남북한의 지도자에게 올해 여름 밤하늘의 별이 된 이 땅의 귀한 작가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북한의 김 위원장에게 ‘광장’을 간곡한 마음으로 추천한다. 이 작품만큼 해방 직후 남과 북의 현실에 대해 서늘하게 성찰하고 깊게 사유한 소설은 달리 없다. 당시 남북의 문화적 차이가 생성되는 역사의 기원과 생생한 풍속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의 현실에 모두 절망해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중립국행을 선택한다. 그에게 당시 남한은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은 곳이며 친일파가 “인민들을 호령하”는 곳이다. 동시에 그는 북한에서 “잿빛 공화국”을 목도하며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라고 반문한다. 그곳은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잿빛 광장’(북)과 ‘부패한 밀실’(남)에 모두 깊은 환멸을 느낀 이명준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 즉 연인과의 사랑에 기댄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고 되뇌는 이명준의 독백은 남과 북의 현실에 절망해 연인의 품과 육체를 선택한 자의 쓰라린 실존을 참으로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명준의 고뇌와 절망, 저 도저한 개인주의의 표정을 김 위원장이 각별한 마음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은 자신이 속한 체제의 현황과 한계, 남과 북의 차이에 대해 또렷이 인식하는 시간이기도 할 테다. 이러한 상호이해의 도정을 통해 이 땅의 평화는 한 걸음 더 진전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주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 대통령에게 “멈추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서로의 차이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광장’ 읽기는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창문이 될 수 있다. 저세상에 계신 최인훈 작가가 때로 설레는 마음으로, 때로 불안한 심정으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올해로 73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일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동산과 부동산을 광복된 이후 사람들은 ‘적산’(敵産)이라고 불렀다.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적산은 미군정법령 제33호에 따라 조선 군정청으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 주체가 이관됐다. 한마디로 적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는 게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친일파 재산은 물론 적산 환수도 난항을 겪었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토지대장 상당수가 소실됐고, 일본인 명의의 토지 ‘적산’ 가운데 상당수의 땅은 소유권이 묘연해졌다. 아직도 등기 말소 등 행정절차를 밟지 않아 일본인 이름으로 된 건축물과 토지들이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재산의 소유주를 명확히 바로잡는 것은 일제강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물론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앞장선 두 명의 공무원을 만났다.●사대문 안 일제 잔재 없애라 김영균(53) 서울시 중구청 지적행정팀장은 건축물대장이나 등기부상에 일본인 명의로 기재돼 있는 건축물에 대해 주인을 찾아 주는 작업을 한다. 1989년 서울시에 입사한 김 팀장은 2015년 중구로 발령이 나자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건물 소유주도 모르게 일본인이 이중 등기되어 있어서 건물을 처분하지 못한다는 사연과 등기말소를 하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일본인 재산 등기말소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제는 1912년 한반도 지배·수탈을 위해 들여온 기존 등기와 연계해 건축물대장 기초자료를 구축했다. 해방 후 ‘가옥대장’으로 불렸던 건축물대장은 1962년 건축법 시행과 함께 도입됐다. 때문에 건축법 시행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소유권 변동, 철거 등의 변화가 있어도 건축물대장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일본강점기 때 자료가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 단층 건물은 1979년에 지어져 공장과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건축물대장에는 1933년 사용 승인이 난 일본인 소유 목조주택과 함께 등재돼 있다. 목조주택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건축물대장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건축물의 실소유주는 소유권 이전, 금융권 대출, 신축 등의 경우가 아니면 말소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들어 이를 정리하기보다는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정들 탓에 ‘일본인 소유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2015년 이후 소유자 신청에 따라 일본인 명의 건축물대장과 등기를 말소한 것은 101건에 불과했다. 김 팀장은 “특히 중구는 서울 사대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례가 많다”면서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전국 최초로 일제청산 작업을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적행정팀원들과 함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4월부터 건축물대장에 올라 있는 관내 건물 11만 3509곳에서 일본인 명의 건물 627곳을 찾아냈다. 건축물대장 97건과 등기부 530건이다. 이런 건물은 을지로와 충무로에 198곳이 집중돼 있다. 오장동 84곳, 묵정동 41곳으로 뒤를 이었다. 이 밖에도 예관동, 남대문로, 남창동 등 대부분 사대문 안에 모여 있다. 김 팀장은 직원들과 함께 일본인 명의 건물이 있는 627곳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육안 확인을 비롯해 항공사진 판독, 재산세 납부 여부 등으로 건축물 존재 여부를 가려내는 등 청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건물이 없는 경우 직권으로 건축물대장을 정리하고 법원에 등기말소를 의뢰할 예정”이라면서 “등기에만 존재하는 건물은 소유자가 법원에 등기말소 신청을 하도록 안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구는 말소 신청을 한 소유자를 대상으로 촉탁의뢰 등 이후 절차를 무료로 대행할 계획이다. 김 팀장은 “구 방침이 알려지자 민원인 한 분이 26건을 신청하기도 했다”면서 “하나의 지번에 없어져야 할 건물등기가 26건이나 있었던 셈인데 법무사에게 위임했으면 건당 10만원 정도로 최소 260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 명의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면서 “부동산 공적장부 일원화를 통해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라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숨겨진 일본인 재산 찾아라 일본인 명의 토지 즉 ‘적산’에 대한 관리와 환수는 1945년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부실했다. 정부가 적산 청산을 제대로 못 해 여전히 토지대장상 땅 주인이 일본인으로 돼 있거나, 전쟁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없어졌거나, 시스템 미비 탓에 소유권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토지 소유권을 정리하고자 3차례에 걸쳐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실시했다. 하지만 1·2차 특별조치법 시행 당시 정부는 이·동별로 보증인 3~6명을 위촉한 뒤, 보증인들이 토지 소유주에 대한 보증만 해 주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대부분 현장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정체가 모호한 ‘적산’들이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조달청이 2015년 일본인 명의 은닉재산, 즉 ‘적산 의심 토지’의 환수작업에 착수한 이유다. 주 담당자로 송명근(50) 국유재산기획과 사무관이 뽑혔다. 동국대 전산통계학과 출신인 송 사무관은 정보통신 자격증을 소유한 정보통신 사무관이어서 ‘친일파 재산 환수’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대형국책사업 업무를 맡아 국무조정실에 1년간 파견됐다는 이유로 2016년 조달청에 돌아오자마자 국유재산 환수 작업에 투입됐다. 송 사무관은 업무를 맡자 6개월간 자료 분석에 매달리는 한편 관련 서적 읽기에 몰두했다. ‘친일인명사전’ 3권을 여러 번 숙독한 것을 비롯해 ‘한국근대사 산책’과 ‘친일파와 일제시대 토지’, ‘일제의 한반도측량 침략사’, ‘창씨개명’, ‘창씨개명 법제연구’ 등 일본인 토지와 재산과 관련한 서적 20여권을 탐독했다. 환수 작업을 원활히 하려면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아예 충남대 대학원 북한통일학과에 진학해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울 정도로 적산 환수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송 사무관은 팀원들과 함께 지난 7월 말까지 귀속재산과 부당하게 사유화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명의 재산(은닉재산) 3373필지, 228만 9805㎡(토지 가액 848억원 상당)를 국유화했다. 여의도와 거의 맞먹는 면적이다.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31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26필지), 일본법인(88필지) 및 일본인 개인(1201필지) 소유지 등 일본 정부 및 법인 명의 재산도 포함됐다. 이들 재산 중 특별조치법 시행과정에서 불법으로 취득한 무단 점유자가 자진 반환을 거부하면 소송까지 불사해야 한다. 실제로 70필지가 소송을 통해 국가 소유가 됐다. 현재도 1만 필지에 대해 조사나 소송이 진행 중이다. 환수작업은 쉽지 않았다. 송 사무관은 “일부 적산에 대한 조사와 환수가 광복 이후 70년이나 지나 너무 늦게 진행된 탓이었다”면서 “토지 조사는 매매 계약서 존재 여부, 주변인 진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닉재산 국가환수는 일본인 명의 재산을 불법으로 취득한 개인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과정으로, 재산을 빼앗기는 상대를 조사해야만 한다”면서 “재산소유자가 면담에 불응하거나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힘이 들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조사과정에서 “‘몇십년 동안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땅을 환수하느냐’는 협박에도 시달려야 했다. 송 사무관은 “저를 비롯해 여성 직원들은 ‘밤길 조심하라’거나 ‘앞으로 가족을 제대로 챙겨야 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들었다. 여성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혁명의용군 조작 사건, 해방 후 친일파 군부 보호의 신호탄이었다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혁명의용군 조작 사건, 해방 후 친일파 군부 보호의 신호탄이었다

    지난 5월 4일 ‘일베’ 게시판에는 이런 제목의 ‘뉴스’가 떴다. “탁현민 뒤를 졸졸 따라다닌 육사 교장 김완태(중장)/백선엽 장군 기념관 없애.” 출처는 박근혜 인터뷰로 유명한 ‘정규재TV’로 돼 있었다.“육군사관학교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념 비석을 빼서 야산에 방치” “박근혜 대통령 기념 물건 모두 폐기” “백선엽 장군 기념관 없애고” “육사의 기원은 조선 독립군이라 역사 바꾸며” “탁현민(청와대 행정관) 방문 때 3성 장군(김완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뒤를 졸졸”. 육사총동창회(회장 김병관)는 감사단을 편성해 육사로 ‘파견’했다. 이른바 감사단은 육사 안 교회에 진을 치고 김완태 교장을 비롯해 관계자들을 오라 가라 하며 따졌다. 당시 무자격 감사단의 강짜가 얼마나 심했던지 교회가 이들에게 ‘퇴거’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확인 결과 소문은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김완태 교장은 지난 5월 말 결국 경질됐다. 수도군단장 시절, 훈련 중 물의를 빚은 예하 부대의 노모 중령에 대해 경징계를 찾아내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결과였다. 이들의 회를 뒤집은 것은 육사의 기원 문제. 김 교장은 육사의 정통성을 신흥무관학교나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 속에서 새로이 세우려 했다.육사는 지금까지 그 뿌리를 미군정(美軍政)이 설립한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두었다. 이 학교의 전신은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육사가 이렇다 보니 국군 역시 연원을 미군정이 설립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두었다. 1946년 1월 15일에 출범한 경비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교 110명으로 출범했다. 이 가운데 87명은 일본군 출신, 21명은 일본의 괴뢰국 만주군 출신이었다. 1, 2대 사령관은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였던 이형근과 원용덕이었다. 이형근의 장인 이응준(일본군 육군 대좌 출신)은 미군정 군사 고문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말 통위부장(미군정기 국방장관)과 경비대사령관을 유동렬(광복군 총참모장)과 송호성(광복군 훈련처장) 등 독립군 출신으로 교체했다. 독립군을 우대한 것이 아니라 여론 때문이었다. ‘이게 일본군이지 대한민국 군대인가!’ 제1연대에선 “이 따위 경비대 해산시켜라. 빨갱이 노랭이 같은 놈 몰아내라”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놀란 이응준은 미군정에 수뇌부를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유동열·송호성 체제는 서둘러 독립군 출신을 특임 장교 형태로 충원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경비대의 뼈대는 이미 일본·만주군 출신 장교들이었다. 정부 수립 후엔 이런 노력마저 제동이 걸렸다. 초대 국방장관이 광복군 제1지대장 이범석이었지만 그는 김구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김구 계열이었다. 그는 초대 총참모장에 이응준, 육군사령관에 이형근을 앉혔다. 이들에게 김구 계열의 광복군 출신들은 눈엣가시였다. 광복군 출신들은 친일파 청산을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제헌국회가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을 제정, 공포했으며, 10월 22일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반민특위)를 설치했다. 총참모장, 육군사령관 등 핵심 간부는 형사처벌을 당하거나 경질돼야 했다. 조병옥, 장택상 등이 장악하고 있던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특별법 공포 후 6일 뒤인 9월 28일 독립군 출신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체포됐다. 사흘 뒤 최능진 전 경무부 수사국장 등이 체포됐다. 10월 5일자 도하 각 신문엔 이런 경찰 발표가 실렸다. “1일 오후 3시경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 등이 수도청 형사대에 체포됐다. 지난해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정부를 붕괴시키려 한 바, 군자금으로 15만원을 제공한 혐의라 한다.” 해방 후 첫 조작사건인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친일 군부와 경찰이 합작한 ‘숙군’의 신호탄이었다. 그 칼날은 정치권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오동기는 항일전선에 투신했던 독립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경비대 감찰총감직에 있으면서 군내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부패를 단호하게 처리하려 했다. 상층부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다가 결국 야전으로 밀려났다. 좌익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14연대장 시절, 김지회 중위를 요시찰 인물로 찍어 작전과장에서 포병중대장으로 전보시켰다.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최능진은 일제 치하에서 2년간 복역한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소련군의 압박을 피해 월남했다.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경찰 내 친일파 청소를 주장해 친일경찰의 대부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청장과 마찰을 빚었다. 두 사람은 노덕술, 이익홍, 최연, 최운하, 김정빈, 김홍걸, 백원교, 박경후 등 일제의 조선인 악질 경찰관들을 요직에 앉힌 터였다. 최능진은 10·1 대구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당국에 조병옥과 장택상의 처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5·10선거 때는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한 이승만을 낙선시키기 위해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려다 정권의 방해로 실패했다. 두 사람은 군과 경찰의 상징적 민족주의자였다. 그 둘을 좌익과 연계한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엮은 것이다. 10월 19일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1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이튿날 김태선 수도청장은 ‘혁명의용군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충, 김진섭 등이 남북 노동당과 결탁해 (그들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으로 …이번 여수 사건을 야기했다.” ‘극우 정객’이란 김구였다. 이후 군과 경찰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무력화와 군내 민족주의 계열 제거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물론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총리가 지원사격을 하고 있었으니, 거칠 게 없었다. 만주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국장의 지휘 아래 육군 정보국은 1949년 7월까지 전체 국군의 10%에 이르는 4700여명을 제거했다. 이 중에는 좌익 외에 광복군, 학병 출신 등 친일파를 혐오하는 중간계열이 광범위하게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송호성 사령관도 끼어 있었다. 처형된 장교 중 김종석, 오일균, 최남근 등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중간계열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김종석, 오일균은 미 군사고문관 하우스만이 구명에 앞장설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그러나 ‘진짜 남로당원’ 박정희가 일관되게 두 사람을 군내 좌익 책임자로 몰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박정희에게 ‘스네이크(독사) 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4연대장이었던 최남근은 반란군에 잡혀 고초를 겪다가 탈출했지만, 다시 진압작전에 나서라는 요구에 ‘동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들은 형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 군내 숙청이 정리되면서 군은 정치권을 정조준했다. 육군 헌병대는 1949년 5월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을 수사했다. 친일파 처단을 앞장서 주장해 온 소장파 10여명을 국제공산당 프락치로 몰아 처벌했다. 국회가 얼어붙자 경찰은 6월 6일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했다. 이승만은 10일 반민특위 해체를 명했다. 13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군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체의 파괴행동에 대해 용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군의 정치개입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13일 뒤 육군 정보국 소속 포병 소위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했다. 이른바 ‘숙군’의 대단원이었다. 당시 수사본부장으로 헌병대 실세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으로서 경찰 최고직위에 올랐던 전봉덕이었다. 의열단 출신에 중국군 상위였던 장흥이 사령관이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장흥은 김구 암살 다음날 경질됐다. 잔불 정리만 남았다. 이범석은 ‘숙군’에 앞장섰지만, 순망치한의 화를 자초했다. 광복군 계열이 정리되자 그의 사조직 대한민족청년단(족청)도 이승만의 압박으로 해체되면서 국방장관에서 밀려났다. 전쟁 발발 이후 내무장관으로 기용돼 ‘부산정치 파동’에서 크게 이용당한 뒤 결국 ‘팽’당했다. 이른바 ‘숙군’으로부터 70년 뒤, 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는 작업이 육사에서 시도됐다. 그러나 불과 7개월여 만에 지휘관은 정치적으로 ‘저격’당했다. 더러운 ‘숙군’의 칼날은 여전히 자주와 독립을 겨냥한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배우 김의성, ‘쌍용차 전원 복직’ 바라며 위안부 할머니에 티볼리 기증한 사연

    배우 김의성, ‘쌍용차 전원 복직’ 바라며 위안부 할머니에 티볼리 기증한 사연

    2009년 대규모 구조조정에 격렬히 저항하다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 119명의 전원 복직이 14일 결정된 가운데 쌍용차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배우 김의성의 선행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쌍용차 노사와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14일 해고자 119명 중 60%는 올해 말까지, 나머지는 내년 상반기까지 단계적으로 채용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이른바 쌍용차 사태가 9년 만에 마무리됐다. 배우 김의성은 지난 2015년부터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응원해왔다. 경기 평택에서 굴뚝 농성을 벌였던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을 도우려 광화문광장 1인 시위에 나섰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두 노동자를 응원하는 ‘굴뚝 데이’ 캠페인을 제안하고, 장기농성자를 위한 밥차 운영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당시 김의성은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해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볼리’를 만들면 그 차를 사서 타고 다니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6년 2월 이창근 실장 등 해고 노동자 18명이 먼저 복직해 생산라인에서 티볼리를 출고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성은 약속을 지켰다. 신차 티볼리를 본인이 타는 대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증하면서 김의성의 선행은 더욱 빛났다. 위안부 할머니를 돕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같은해 4월 14일 공식 페이스북(@womenandwar)을 통해 김의성의 티볼리 기증 사실을 알렸다. 정대협은 “배우 김의성씨가 지역 할머니 방문이나 수요시위 등에 할머니들을 편안하게 모시고 다닐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쌍용차 티볼리를 기증해 주셨다”며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모시고 시승식을 한 뒤 차량에 세월호 노란 리본과 나비 스티커를 붙였다”고 밝혔다.김의성은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이창근이 만든 뜻 깊은 티볼리를 좀 더 의미있게 사용하자는 생각을 하던 중 정대협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모시는 차량이 매우 노후해서 교체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쌍용차 복직 노동자들이 만든 티볼리를 할머니들이 타신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고 기증 배경을 설명했다. 김의성은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해고자 복직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같이 지켜봐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며 “차 한 대로 쌍용차 해고자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연결된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 아닐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의성이 기증한 은색 티볼리는 정확히 2년 5개월이 지난 오늘도 할머니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정대협 관계자는 서울신문과 통화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은 수요시위에 한나절만 다녀오셔도 며칠씩 힘들어 하신다”며 “티볼리에 휠체어를 싣고 병원도 가고 지방도 방문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 전원의 복직이 결정된 것에 대해 “9년이라는 긴 시간 싸워오셨는데 모두 복직하실 수 있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1900년대 초 일제에 국권을 팔아넘기는 친일파 ‘이완익’을 열연한 김의성. 그의 실제 삶은 극과는 정반대다. 김의성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기만하는 화해치유재단의 즉각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단독] 친일파 사진이 임금님 사진으로 둔갑... 황당한 서울시 국외문화재환수사업

    서울시가 수억원을 들여 추진중인 국외문화재 환수사업이 졸속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는 자료를 과장해서 홍보하거나 심지어 친일파 사진을 임금 사진으로 둔갑하는 등 행태로 물의를 빚고 있다. 사업을 감독해야 할 서울시는 정작 사실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놓고 있다. 10일 정의당 소속 권수정 서울시의원에 따르면 서울시가 민간단체에 보조금 2억원을 지급해 지난해부터 시행중인 국외소재 문화재 환수에 참여하는 민간단체인 문화유산회복재단이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을 찍은 것이라며 공개한 사진이 알고보니 대표적인 친일파 이하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하영은 최근 인기를 끌고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등장하는 친일파 이완익의 실제 모델 가운데 한 명이다.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은 지난달 30일 미국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종과 순종 사진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 다수를 확인했다며 일부 사진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이 이사장은 미국 오하이오주를 방문해 구한말 조선에서 활동했던 외교관 겸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알렌의 유족을 찾아 알렌이 남긴 편지와 일기장, 사진 등 100여점을 기증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권 시의원과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이 미국 지역신문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의 복장과 얼굴 생김새에 의문을 품고 자료를 조사한 결과 사진의 주인공은 이하영이었다. 이하영은 1905년 당시 법부대신을 지냈고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기업을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했다. 이 이사장은 서울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다. 미국 지역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사진을 누가 제공했느냐”는 질문에는 “확인해줄 이유가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 이사장이 ‘자기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면서 “서울시가 민간보조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에 직접 개입하긴 힘들다”고 밝혔다. 권 시의원은 “서울시가 진행중인 국외소재문화재 보호·환수 지원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철저한 검증을 촉구할 것”이라면서 “문화재청 산하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이미 존재하는 마당에 서울시 차원에서 별도로 똑같은 사업을 할 필요가 있는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 소장은 “감정적인 애국주의에 편승해 검증도 안된 단체들이 문화재환수운동에 나서는 것은 문화재환수에도 해가 되고 자칫 불필요한 외교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국외문화재 환수 관련 활동을 하는 근거는 지난해 시의회가 제정한 ‘국외소재문화재 보호 및 환수 활동 지원 조례’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국외문화재 환수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가 작성한 사업 추진계획 문건은 사업대상을 “서울시 소유 문화재 중 도난·분실된 것, 서울시 소유로 가능한 것” 등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실제 사업은 대부분 지방자치제 실시 이전 문화재이기 때문에 서울시 소유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빼돌린 경천사 석탑 집요하게 추적 보도… 반환 이끌어내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빼돌린 경천사 석탑 집요하게 추적 보도… 반환 이끌어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신문의 항일 비판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대세가 기울었다’며 일부 조선 언론이 스스로 친일 성향을 드러내던 것과 정반대의 행보였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멀쩡한 석탑을 조각내 훔쳐가고 조정에 억지로 차관을 도입하게 해 빚더미에 앉게 했다. 무력했던 조선 정부가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자 베델이 분개해 나섰다. 국제열강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 주변국 여론에 민감하다는 일제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반일 기사를 쏟아냈다.●‘문명 제국’ 일본의 반달리즘을 꼬집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천사지 10층 석탑 반환’이다. 현재 이 석탑은 원래 위치인 개성 경천사를 떠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와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국보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베델이 없었다면 이 석탑은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이 탑은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경천사에 13.5m 규모로 세워졌다.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1907년 1월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당시 조선 황태자였던 순종의 결혼 축하를 위해 조선에 왔다. 하지만 속내는 우리 문화재인 경천사 석탑을 일본에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2월이 되자 군대를 동원해 석탑을 140여점으로 조각냈다. 주민들이 반발했지만 일본은 이들을 총칼로 제압했다. 조각들은 달구지로 실어 항구가 있던 제물포까지 운반한 뒤 배로 일본에 반출했다.우리 국민들로서는 분한 일이지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신보가 나섰다. 같은 해 3월 7일자 기사로 석탑 밀반출 사건을 전하며 “다나카는 우리 국민을 만만히 봤다. 조선 인민은 그 만행과 모욕에 결연히 항거할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후 신보와 KDN은 10여 차례 기사와 논설을 실으며 일본의 석탑 밀반출 만행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이에 고종의 외교 자문이던 미국인 호머 허버트(1863~1949)도 움직였다. 허버트는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조언하는 등 ‘고종의 밀사’로 불린다. 그는 신보와 KDN 보도 이후 일본의 독립성향 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4월 4·18일자에 각각 ‘일본이 한국에서 보인 반달리즘(문화 파괴)’, ‘사라진 탑과 다른 사건들’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베델과 함께 개성 경천사를 다녀와 쓴 르포 형식의 글이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세세히 기록해 감성에 호소했다. 베델과 허버트의 노력 덕분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6월 2일자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도 주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여론이 일본에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도 모를 리 없었다. 스스로 ‘문명화된 제국’임을 강조하던 일본이 이런 일로 조선 지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미치자 조선총감부도 마지못해 “석탑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베델의 첫 보도 뒤 10년쯤 지난 1918년 11월 경천사 석탑은 조선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경복궁에 있었지만 이후 방치되다가 2005년 최종 복원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잡았다. 원래 자리인 개성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해 보인다.●‘쾌한 자의 쾌한 일’ 기사로 항일하다 을사늑약 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공고화하던 1908년 3월,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전 세계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조선은 일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는 게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는 일본에 매수돼 이들의 하수인으로 행동하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스티븐스 발언에 격분한 재미교포 전명운(1884~1947)과 장인환(1876~1930)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스티븐스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향하려던 3월 23일, 전 의사가 스티븐스에게 다가가 저격했지만 실패했다. 전 의사가 스티븐스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장 의사가 이를 보고 스티븐스를 다시 저격했다. 장 의사의 총에 맞은 스티븐스는 이틀 만에 병원에서 죽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티븐스 저격사건’이다. 소식은 바로 한국에 알려졌다. 하지만 상당수 친일매체들은 이를 기사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의식 있는 언론들 역시 일제의 검열이 워낙 심해 이를 타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신보는 주저하지 않고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신보는 3월 25일자로 ‘쾌한 자의 쾌한 일’이란 제목으로 “한국 외부 고문관 미국인 슈지분(스티븐스의 한국 이름)이 미국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총을 쏜 자는 상항에 사는 한국인”이라고 전했다. 이어 “우리가 두 사람과 거사 현장에 같이 있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이들의 애국 열성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내용의 논설도 게재했다. 뒤이어 28일자에는 스티븐스가 사망한 소식과 함께 실명이 밝혀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행적을 상세히 다뤘다. 이후로도 신보는 이들의 속보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훗날 미국 법원은 전명운에겐 무죄를, 장인환에겐 25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장 의사는 미국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19년 가석방됐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 미국인을 죽인 전명운과 장인환을 위로하는 논설을 싣는다는 건 당시 영국인 베델 소유의 신보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IMF 구제금융 때 금모으기의 원조가 되다 베델은 기사로만 항일 투쟁을 이어가지 않고 직접 행동에도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일본은 조선을 경제적으로도 예속시키려고 조선 정부에 차관 도입을 압박했다. 당시 조정은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다. 차관은 한없이 불어나 1300만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로 정부가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애국심이 강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차관을 갚자는 운동이 시작됐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때 나랏빚을 갚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의 원조 격으로, ‘경제주권 찾기’ 노력의 하나였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1850~1913)과 김광제(1866~1920), 윤필오(1860~1924) 등이 시작했다. 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지였다. 베델은 의연금을 보관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신보사에 설치하고 이 운동을 주도했다. 신보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꾸준히 알리고 지원했다. 1907년 4월까지 4만여명이 참여했고 5월에는 모인 금액이 20만원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조선의 침략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할 뿐 아니라 아예 조선 독립까지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베델의 행보에 대해 일본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길섶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손성진 논설고문

    당상관(堂上官) 자리와 막대한 재화, 목숨까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던진 권세가 출신의 숨은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독립, 광복이란 말에 무관심한 우리.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시금 생각해 볼 때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란 이 말에 대한 이 시대의 관념은 무엇일까. 조선 양반들이 아무리 썩어빠졌더라도 충효(忠孝) 사상의 근본은 깨우쳤고 누란의 위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에 옮긴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 비하면 작금에 우리의 민낯은 부끄럽기만 하다. 권재(權財)를 움켜쥔 자들은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고 세상을 짓밟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야합하는 자, 타협하는 자, 맞서 싸우는 자. 난국에는 이렇게 세 부류로 패가 나뉜다고 한다. 광복 후 더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친일파가 첫 번째 부류다. 타협한 자도 그럭저럭 잘살고 있다. 맞서 싸운 자에게 돌아온 것은 가난과 고통뿐이니 정의의 존재에 대해 회의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취재하면서 느낀 점이다. 한·중·일 3국 청소년 중에서 국난이 닥치면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대답한 비율이 우리가 제일 낮다고 한다. 마땅히 어른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 선생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러자 선생은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곧 사형이 집행됐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나이 53세였다.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였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국치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죄수들과 도성(都城)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다. 박상진은 하얀 천으로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상주인 장남 허학을 비롯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회유하는 이완용에게 “넌 죽일 것” 호통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던 선생은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에게 거사 밀명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었다. 강제로 퇴위당하기 직전인 1907년 4월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쓰인 의대조(衣帶詔·옷 속에 넣어 비밀리에 전하는 임금의 편지)가 선생에게 전달됐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인영도 다시 뛰어들었다. 이인영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1907년 12월 각도의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토록 했다. 경기도에서 거병한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의병 총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1908년 1월 연합의병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화승총에 짚신을 신은 의병은 애초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울 진공 계획을 알아챈 일제는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선생은 선발대 격인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지휘해 선두에 서서 서울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도 뒤이어 1월 28일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인영에게 부친의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이인영은 후사를 허위에게 맡기고 급히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은 부대별로 흩어져 유격전에 들어갔다. 선생은 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덮쳐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의 의병들이 수많은 전과를 올리자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 내부대신 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선생은 “너(이완용)는 반드시 죽일 것이로되 심부름 온 놈이야 죽여서 뭐하겠느냐”고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 있던 선생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생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아카시가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자 선생은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선생에게 존경을 표했다. 또 선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데라우치 통감에게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선생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월위대장군 성위만병수)라는 글을 지을 만큼 한학에 능통했다. 관직에 나선 것은 44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평리원 재판장(지금의 대법원장 격),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의 본관과 고향은 김해다. 임은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에서 서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허위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에 정착했다고 한다. 임은동은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과 붙어 있다. 드넓던 평야는 구미산업공단으로 바뀌었고 공단 아래쪽 허씨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은 빌라와 주택이 들어서 고가(古家)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추서… 서울시 ‘왕산로’ 명명 다행히 생가터는 남아 있었다. 선생의 장손 허경성(91·둘째아들 허영의 장남)씨가 자신은 전세를 살면서도 큰돈을 대출받아 1990㎡의 터를 사들여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생가 건물은 자료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건너 쪽 야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유허비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세워졌다. 김교홍 기념관장은 “선생의 집안은 논 3000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쓰는 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묘소 옆에 위패를 모실 사당 경인사(敬仁祠)가 조성되고 있지만, 예산 편성이 미뤄져 공사가 답보 상태다. 기념관 아래에 선생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가 있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1945년 ‘소련 신탁통치 주장’ 가짜뉴스에 통일정부 수립 물거품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1945년 ‘소련 신탁통치 주장’ 가짜뉴스에 통일정부 수립 물거품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파쇼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인데 성명 석 자가 반파쇼의 위원장이 되고, 나는 총동원 조직을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성명 석 자가 위원회의 상무가 되어 있다. 이만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대하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는 1946년 1월 5일자 서울신문에 개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의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극우와 극좌 진영이 벌인 헤게모니 싸움에서 양쪽이 그의 이름을 멋대로 도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홍명희는 당시 서울신문 고문이었다. 당시 한민당과 이승만이 주도하던 극우 진영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앞세워 ‘반탁’ 대중운동에 총력전을 펴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이하 총동원)를 결성해 대중운동으로 미군정 권력을 이양받으려 했다. 공산당, 인민당 등 좌익도 30일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이하 반파쇼)를 결성해 ‘반탁’의 주도권 다툼에 뛰어들었다. 양쪽에 일제 병탄기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한 신간회를 주도했던 홍명희는 명분 확보와 외연 확장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해가 바뀌면서 반파쇼 측은 돌연 반탁의 기치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 지지’(찬탁)로 바꿨다. 반파쇼는 1월 3일 개최한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시민대회’를 애초 공지한 것과 달리 외상회의 결정 지지 행사로 진행했다. 본의 아니게 ‘반탁’과 ‘찬탁’에 양다리를 걸치게 된 홍명희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탁통치는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밝힌 바 있었다. 좌익의 시민대회 이후 국론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길로 들어섰다. 정국 주도권은 극좌와 극우의 손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가장 강력했던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 혹은 좌우합작 추진 세력은 민주통일전선 기치를 꺼내기조차 힘들었다. 이들은 우선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운 뒤 신탁통치를 거부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지만, 흥분한 대중들에게 먹혀들 리 만무였다. 한민당의 공식 입장과 달리 ‘반탁 운동’에 회의적이었던 수석총무 송진우가 12월 30일 암살당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국론 분열에 이어 분단, 나아가 골육상잔의 길로 내몬 찬탁·반탁의 충돌은 어이없게도 한 토막 ‘가짜뉴스’에서 비롯됐다. 1945년 12월 27일 석간신문들은 합동통신을 받아 미국 번스 국무장관이 정부로부터 받았다는 훈령 한 토막을 보도했다. “번스가 (3국 외상회담) 출발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것을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소련이 한반도 38도선 이북을 집어삼키기 위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의 자주독립은 어디로, 독립·신탁론 대립”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 서울신문은 “아(조선) 독립 문제 표면화” “미, 즉시 실현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훈령 내용이라고 전해진 것만 간단히 보도했다. 출처도 애매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이 기사는 미군 태평양사령부가 발행하는 태평양판 성조지에 보도된 것을 합동통신이 전재한 것으로 취재원도 없었다. 훈령 내용 역시 그동안 미 국무부가 밝힌 입장과 전혀 달랐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내용도 알려진 것과 정반대였다. 그러나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28일자에서 1면 전부를 ‘탁치’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채웠다. 29일 미 군정청에서 외상회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한국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하되 미국과 소련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회의가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확정한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신탁통치만 앞세워 간단히 처리했고, 나머지 지면은 ‘반탁 운동’으로 채웠다. “한국은 신탁통치를 받게 되겠지만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기간은 최장 5년”이라고 보도한 서울신문과 대조를 이뤘다. 신탁통치를 한사코 밀어붙인 것은 미국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전후 식민지 신탁통치 구상을 처음 밝힌 이래 1943년 영국의 앤서니 이든 총리와의 워싱턴 회담에 이어 11월 스탈린과의 테헤란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공식화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선 ‘신탁통치 20년’ 안을 제시했다. 루스벨트에 이은 트루먼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0월 20일 존 카트 빈센트 미 국무부 극동국장은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조선은 자치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미국은 따라서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조선에서 반탁 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빈센트는 1월 16일 “조선 임시정부가 통일적인 통치와 치안의 능력을 보여 줄 때에는 탁치를 실현하지 않겠다는 것이 미국뿐만 아니라 연합 3국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그날 동아일보는 소련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소련이 한국에서 ‘신탁통치의 원흉’으로 악마화되자 스탈린은 1월 23일 윌리엄 해리먼 주소련 미국대사를 불러 ‘회담 과정을 공개하겠다’고 통보했다. 24일 관영 타스통신은 회담 과정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다짜고짜 “근거 없는 타스통신 보도”라고 비난했다(1월 26일자). 27일 미 국무부는 “타스통신 보도가 맞다”고 확인했다. 가짜뉴스임이 드러났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들은 즉각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세력의 일원이 됐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친일 매판의 과거를 세탁하고 ‘민족지’로 분식했다.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염원은 분단 정부 건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이승만과 한민당의 꿈은 성큼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대성공은 이후 가짜뉴스의 거대한 뿌리가 됐다. 그 대상이 소련과 좌익에서 북한과 민주세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 관련 뉴스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교수의 말마따나 “백지수표”처럼 이용됐다. 아무렇게나 쓰고 말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 조선일보 25일자 사설엔 이런 대목이 있다. “(남파 간첩들이)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리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 남파간첩 배후설이다. 1986년 11월 16일자엔 ‘세계적 특종’이라며 1면 톱으로 김일성 주석 암살 의혹을 보도했다. 김 주석은 다음날 조선중앙TV에 나타났다. 이후 성혜림 망명설,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신병설, 평양 계엄령 선포설, 조명록 전 군총정치국장 쿠데타설 등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 기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때는 북한의 인간어뢰설을 제기해 세계적인 비웃음을 사더니, 2012년엔 김정남이 일본 도쿄신문 고미 요지 편집위원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통해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필요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는 기사를 창작했다. 2018년 1월 북한 공연단을 이끌고 남쪽을 방문한 현송월은 이 신문 보도에 따르면 2013년 ‘음란물 제작 취급 혐의로 공개 총살’당한 인물이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할 때 방문 취재기자들에게 1인당 1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가짜뉴스에 청와대 대변인이 발끈했지만, 이런 전례를 생각하면 특별한 ‘가짜’도 아니었다. ‘해방일기’의 저자 김기협 교수의 1945년 12월 27일 ‘일기’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동아일보가 아직 살아 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이 기사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짜뉴스의 거대한 뿌리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가짜뉴스를 잘 활용해 최고의 영향력을 구가하는 매체가 달라졌을 뿐이다. 혹자는 법적 처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북한 관련 오보는 처벌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눈 밝은 시민들의 양심과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게 현실이다. 논설고문
  • [곽병찬 칼럼] ‘평화’엔 좌우가 없다

    [곽병찬 칼럼] ‘평화’엔 좌우가 없다

    6·13 지방선거 결과는 흔히 하듯이 여야 또는 보수ㆍ진보의 승패로 재단할 수 없다. 유권자의 선택이 정치적, 이념적 성향 나아가 후보자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 이슈에 의해 좌우됐기 때문이다. 평화의 염원이 이처럼 유권자들의 무의식 깊이 내면화되고, 정치적 선택으로 표출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자유한국당 후보들이 남북 및 북·미 대화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지도부의 지원을 기피한 것이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을 앞세우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대신한 것은 그 좋은 본보기였다. 선거운동 초반 입만 열면 문 대통령을 비판하던 한국당 후보들은 중반 이후 아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거나 오히려 문 대통령이 운전자가 된 평화의 여정에 동승하려고 했다. 자유한국당이 ‘제대로 망하는 길’로 들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은 이른바 ‘통일대교 점거’였다. 2월 25일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 김무성ㆍ장제원 의원 등 당 지도부는 통일대교를 가로막고,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한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 일행의 남쪽 방문을 막아섰다. 27일에는 통일대교 상행 차선을 막았다. 김 부장 일행은 샛길로 방남하고 또 역주행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러자 홍, 김 대표는 ‘들어올 때는 개구멍, 나갈 때는 역주행’이라며 대첩이라도 거둔 양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을. 김 부장은 25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북·미 대화를 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부장은 중재자 혹은 보증인 역할을 문 대통령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6·12 북·미 정상회담은 그렇게 시작됐고, 회담은 70여년의 적대 청산과 평화 정착의 토대를 마련했다. 정상회담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미국 쪽이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전 상영한 영상이었다. 메시지는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평화인가 고립인가, 전진인가 후퇴인가, 이제 선택만 남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김 위원장에겐 몹시 불편했겠지만, “그가 흥미롭게 보았고, 공개해도 좋다고 했다”고 트럼프는 전했다. 이 메시지는 그 예리한 촉이 북한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평화가 두려운 집단’에게도 날아드는 것 같아 특별했다. 지난 70여년 ‘전쟁과 적대’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고 패권을 유지해 온 집단 말이다. 그들은 한반도의 분단과 분쟁을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이용해 온 자들과 보조를 맞춰 가며, 심지어 북·미 정상회담의 좌절을 기도하기도 했다. ‘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넘기시겠습니까.’ 4·27 남북 정상회담 직전 한국당이 내건 지방선거 슬로건이었다. 북·미 회담 결과가 나오자 홍 대표는 ‘대한민국 안보가 벼랑 끝에 달렸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그와 동고동락했던 족벌 언론들은 ‘북한의 완승’이라고 깎아내렸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서로 핵 단추 자랑과 함께 핵전쟁 위협을 하며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었다. 70년 적대의 결과인 북핵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과연 정상일까. “평화인가 고립인가, 전진인가 후퇴인가.” 회담장의 동영상은 남측에도 선택을 촉구했다. 독일 통일의 밑돌을 놓은 건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였지만, 통일의 결실을 이룬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콜 총리였다. 전략적 인내 운운하며 북한이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도록 한 것은 미국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이었지만, 그 해결의 밑돌을 놓은 것은 보수적인 공화당의 트럼프 대통령이다. 김구, 김창숙 등 이 땅의 참보수주의자들은 평화와 통일의 기치를 죽는 순간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이들을 암살하고 억압한 것은 보수의 가면을 쓴 기회주의 패권주의자, 이승만과 친일파였다. 평화에는 좌우도, 진보ㆍ보수도 없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 보수ㆍ진보가 따로 있겠나.
  • 경찰, 여주 목아박물관 방화 용의자 영장신청 방침

    경기 여주경찰서는 1일 불교미술 조각 작품 등을 보관·전시해 놓은 박물관에 불을 지른 A(74)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그러나 불을 내고 자진신고 했던 방화 용의자 A씨는 조사 과정에서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A씨는 전날 오후 5시 8분쯤 경기 여주시 강천면 소재 목아박물관 내 목조건물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목아박물관은 1993년 6월 개관한 사립 불교 박물관으로,대방광불화엄경 등 보물 3점과 2천800여 점의 유물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A씨는 방화 후 “친일파들 용납할 수 없어서 불을 질렀다”라며 112에 스스로 신고해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으나,경찰 조사에서 말을 바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물관 관계자는 “A씨는 사건 발생 3주 전에도 찾아와 목아박물관장이 조성 과정에 참여한 바 있는 강원 영월군 김삿갓 묘역에 대해 한국식 삿갓을 씌워야 하는데 왜 일본식 삿갓을 씌웠느냐라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횡설수설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불이 난 건물 ‘한얼울늘집’은 대한민국의 시조인 환인과 환웅 그리고 단군을 모신 민족관” 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박물관 내 CCTV 영상을 분석하고 화재 현장 감식을 통해 A씨가 어떻게 불을 냈는지 등을 파악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CCTV 영상 등으로 미뤄 볼 때 혐의가 인정돼 구속영장을 신청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친일파 싫다“ 여주 목아박물관에 불 지른 70대 검거

    친일파가 싫다며 불교 목공예 작품이 전시된 사립박물관에 불을 지른 7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 여주경찰서는 31일 방화 혐의로 A(74)씨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 A씨는 이날 오후 5시 8분쯤 경기 여주시 강천면 소재 목아박물관 내 목조건물 ‘사후재판소’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이불로 목조 건물 한 채가 전소되고 박찬수 박물관장 개인 작품 30여 점이 소실 되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다행히 소장중인 보물 제1146호인 대방광불화엄경 등 보물 3점은 안전한 곳에서 보관 중 이어서 피해가 없었다”고 밝혔다. 목아박물관은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 관련 조각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며, 사후재판소는 저승에 가면 죄를 심판하는 곳을 연출한 곳이다. 경찰에 붙잡힌 A씨는 ”친일파가 싫어 불을 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A씨가 불을 낸 사후재판소나 A씨가 친일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불이 나자 소방당국은 펌프차 등 장비 29대와 소방관 85명을 투입해 50여분 만에 진화했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영세중립 평화통일로 한반도 평화 제도화하자”

    [인터뷰 플러스] “영세중립 평화통일로 한반도 평화 제도화하자”

    “5000년 역사의 새로운 운명의 길에 꽃이 피려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세계 평화의 중심 국가입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와야 동북아 평화가 있고, 세계 평화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남북은 이 기회를 잘 살려 평화를 먼저 제도화시키면서 경제협력을 하고 통일로 나가야 합니다. 제도화란 영세중립입니다.” 강종일 한반도중립화연구소 소장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제도적 방안으로 영세중립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걱정하는 통일비용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다”면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인력과 자원이 만나고, 여기에 미·일의 자본이 덧붙여지면 되레 남한은 국민소득 4만 달러 북한은 2만 달러를 10년에서 15년이면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의 글로벌 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가 예측한 ‘통일 한반도 세계 2등 국가 된다’는 예측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또 “남북경협은 개성공단과 같은 특구를 10개에서 15개 정도 건설해 북한 사람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먼저 올려 줘야 한다”면서 “이때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기업들이 북한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강종일 소장은 1937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1962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수료(1964),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1992)를 거쳐 1997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강 소장은 1964년 대한일보 기자를 거쳐 주미얀마 대사관 1등 서기관, 원광대학교 외래교수, 인하대학교 외래교수, 선문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1999년부터 한반도중립화연구소 소장을 21년째 맡아 한반도의 평화정책을 위한 제도방안으로 영세중립을 주창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고종의 대미외교(2006), 한반도 중립화로 가는 길(2007), 한반도 생존전략 중립화(2014·오른쪽 사진),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2015)이 있다. 편집자 주→4·27 남북정상회담의 성공개최를 계기로 한반도가 새로운 평화시대의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북미정상회담도 앞두고 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판문점 선언은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런데 평화란 제도적 장치로 뒷받침돼야 지킬 수 있습니다. 남북이나 북미나 평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점에서 남북 간 1단계는 4·27 정상회담의 성공개최로 끝났고, 이제 2단계로서 북미정상회담이 있습니다. 북미정상 회담 결과에 따라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는 새로운 질서가 나오게 될 겁니다. 동북아 역사는 상당히 바뀔 것으로 봅니다. →한반도 평화가 동북아질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시네요. -지구상에 평화가 오려면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전제조건입니다. 그 이유는 세계 1·2·3·4등 국가들의 이해가 한반도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가 세계평화의 중심국가인 거죠. 아직도 한반도는 세계평화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국들의 싸움터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한반도가 영세중립을 함으로써 완전히 4개국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겁니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으로 발동이 하나 걸렸어요. 북·미, 남·북·미, 남·북과 미·중으로 이어지는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히 결판을 내야 합니다. 어찌 됐든 한반도 입장에선 5000년 역사 운명의 길이 꽃을 피우려 하고 있잖습니까. 우리가 먼저 평화를 해 놓고, 제도화시키면서 경제협력을 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선은 평화입니다. 그다음 북미회담 후에 개성공단 열고, 금강산도 열면 남북경제공동체 논의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북한에 개성공단 같은 것을 최소한 10개에서 15개 정도 개발할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합니다. →남한의 투자로 북한의 경제특구를 열자는 말씀인가요. -네, 그래요. 다만 북한에 제1차로 들어갈 기업은 남한의 기업체여야 합니다. 이때는 국내에 있는 기업체가 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기업체가 들어가야 합니다. 한국에 있는 기업체는 한국을 먹여 살리고,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 나가 있는 기업체들이 북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지하자원 등 4가지 생산요소가 결합되도록 해야겠죠. 그렇게 10년을 가면 한반도는 세계에서 1등 국가가 됩니다. 우리는 4만 달러 이상 올라가고, 북한도 2만 달러로 올라가면 코리아가 세계 1~2등 국가가 된다는 골드만삭스의 예언대로 되는 겁니다. →평화와 함께 남북경협이 당면과제란 말씀인가요. -남북과 북미정상회담이 판을 크게 흔들고 있어요. 이때 우린 바로 경제협력으로 들어가서 남북경제공동체로 가야죠. 북한 사람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올려 줘야 해요. 그래야 통일 비용도 안 들어가요. 북한은 북일수교를 조건으로 북한이 일본에 요구한 200억 달러 청구권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요. 미국도 북한에 그 대가를 내놔야 될 겁니다. →평화가 정착단계에서 비전이 좀 필요한데요. 그 제도적 장치가 영세중립화란 말씀이죠. 평화는 제도적으로 지켜내지 않으면 또 무너집니다. 제도적 정착이란 중립화가 됨으로써 가능합니다. 만일 중국의 시진핑이 중국몽을 이뤄가지고 영구집권을 하면 우리가 영세중립화하기가 어려워요. 미국은 이제 평화를 외치는 국가로 재탄생하면, 제국주의 미국은 가고 중국이 제국주의로 올라서서 군사력과 국력 면에서 미국을 능가했을 때는 또 제1국이 되어가지고 세계를 좌지우지합니다. 그러기 전에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립화 통일 운동의 저변확대였습니다. 다음은 정책화를 거쳐 제도화로 나가야죠. 우리가 통일을 했다 하면 인구가 8000만에 가까워요. 세계 10위 권에 들어 있어요. 유럽의 독일, 프랑스 레벨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4대 강국 속에 끼어 있어요. 이것은 소위 지정학적 문제로 숙명인데요. 숙명은 바꿀 수 없어요. 그러나 운명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바꿀 수 있습니다. →제도적 장치로서 보통 ‘자립· 동맹·중립’의 세 가지를 말하는데요. -지구상에 192개의 독립국가가 있다고 하지만 이 3가지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자립을 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어렵습니다. 자립을 못 하면 그다음은 동맹인데요. 우리가 미국과 동맹하고, 북한은 중국하고 동맹하는 체제가 굳어지면, 동맹은 강자와 약자가 하는데 약자는 서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동맹도 그렇고, 3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영세중립이에요. 그래서 안보를 영세중립으로 하면 국방비로 쓰던 돈을 복지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들 잘 살아요. 북한은 연방제로 체제유지를 원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연합제나 북한의 연방제가 시스템 면에서 거의 동일하므로 남과 북이 통일을 위해 이제는 양편의 안을 모두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이 덩샤오핑식의 개혁개방으로 간다는 말씀이신가요. -중국이 개방을 하면서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를 꽉 쥐고 있으니까 발달은 발달대로 되고 있잖습니까. 북한이 덩샤오핑의 모델을 도입하면 평화가 돼서 우리는 물론 일본, 미국이 또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평양의 대동강변 트럼프타워 가능성이 있지요. 만약 평양에 트럼프타워가 건설되면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는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앞서 제도화를 말씀하셨는데요. 국내적으로 영세중립법 제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직은 정책화가 안 돼 시기적으로 좀 이릅니다. 정부가 우리 영세중립에 대해서 검토할 때가 정책화입니다. 정부의 안이 국회에서 입법화되었을 때 제도화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중립화 방향, 방법은 무엇입니까. -현재 중립화에는 4가지 사례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방법은 외국의 승인을 받아서 하는 스위스 모델입니다. 스위스 모델은 1515년에 우리는 영세중립을 하겠다고 국회가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300년 후인 1815년에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이 됩니다. 그때 8개국이 보증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오스트리아 모델입니다. 1945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오스트리아를 4등분 했어요. 그래서 4개국 군대가 주둔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1945년에는 우리가 패전국이니까 좋다 했는데, 46년 되니까 숨을 못 쉬겠어요. 4개국 주둔비 줘야 되죠. 46년부터 ‘자, 우리는 영세중립으로 나가겠습니다’ 하고 세월이 흘러 1954년이 되었어요. 거의 9년 만인데 10년째가 되니까 소련이 ‘프라하의 봄’으로 그 병력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어요. 그래서 1955년에 영세중립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추인으로 찬성해 영세중립국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모델은 코스타리카 모델이에요. 그 나라는 2차 대전 이후에 과거에 군대들이 태국처럼 계속 혁명을 해요. 미국하고 손잡고 혁명을 하고, 그러면 미국은 무기 팔고… 국민들은 가난하게 됐죠. 그러자 소위 애국지사들이 중심이 된 국회가 영세중립을 한다고 선언을 함과 동시에 군대 해산 명령을 내려 버렸습니다. 스스로 원한 영세중립 선포예요. 과거 우리 고종이 그렇게 했잖아요. 고종 1904년 1월 20일 조선은 영세중립국이라 선포했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네 번째는 유엔에 요구한 방법입니다. 1995년 9월에 투르크메니스탄 모델로서 유엔이 승인한 경우입니다. 이상과 같은 모델이 있으니까 우리가 미·중·러의 동의를 못 받아도 남북만 합의해 버리면 어떤 모델로 하든 상관이 없어요. 유엔에서 코리아 영세중립국이다고 승인하면 되는 거죠. 물론 미국이나 중국이 비토하면 어렵습니다만 한반도를 영세중립하지 않으면 미국은 한반도를 중국에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은 발도 못 붙여요. 한반도가 완전히 중국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어요. 미국이 1953년 남한의 영세중립국을 거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영세중립국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동기는 무엇인가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 근대사를 연구했는데,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을 알고부터입니다. 고종의 대미정책은 초기에 갈등이 있었어요. 우리는 신미양요라고 하는 한미전쟁이 있었잖아요. 그때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지요. 당시 미국은 조선을 개방하려고 들어왔다가 전쟁하고 그냥 나간다, 그래서 미국이 실패했다고 했죠. 그래서 고종은 기대를 했어요.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이 수호해 줄 거로 알았죠. 미국이란 든든한 배경이 생겼으니 일본도 이제 우리를 못 먹는다고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이후에 미국이 우리를 배반한 거죠. 그것이 1905년 7월 29일의 카쓰라 태프트 밀약 아닙니까. 그다음 2주 후인 8월 12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9월 5일 일본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친일파로 만든 후에 러일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것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아요. 그리고 11월 17일이 옵니다. 을사늑약이죠. 그리고 나자 미국은 11월 30일 철수해 가버립니다. 우리가 비참한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적 과정의 책임입니다. →영세중립에 대해 현실에서 국민적 관심, 학계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연구를 꾸준히 해 오셨습니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어요. 왜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우리 국민들에게 첫째 내가 만든 용어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외세지향성입니다. 5000년 역사에서 자주독립보다는 어떤 큰 나라하고 동맹이냐 보호냐 이런 데 기대고 살려는 우리나라 국민성입니다. 처음에는 안보를 위해서 강한 국가에 붙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개인의 욕심이 나와 버려요. 그래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좋은 모델 하나가 있죠. 우리나라가 망한 거죠. 두 번째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지정학은 강대국 4개에 좌지우지 당하는 이 숙명을 운명학적으로 바꾸고 싶어요. 지정학적 숙명은 못 바꿉니다만 지정학적 운명으로 하면 바꿀 수 있습니다. 외세 지향적 국민성을 바꿔 보겠다는 거죠. 지금도 우리 국민의 외세 지향성의 뿌리는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제가 중립화 통일 운동을 21년째 하는 이유입니다. 한반도에 씨 뿌리는 사람도 필요하잖아요. 지정학적 숙명을 바꾸려면 씨 뿌리는 자가 있어야겠죠. 나는 씨 뿌리는 자예요. →마지막으로 중화(中和)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한반도의 영세중립화로 지정학적 숙명을 운명으로 바꾸기 위한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박사님에게 중화란 무엇인가요. -중화를 연구해 보니까, 우주 만물에 연관되어 있어요. 중화에서 주역이 나옵니다. 주역이라는 것은 4500년 전에 나오는 이론으로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주역이, 그 다음에 중용이 나옵니다. 공자가 완성을 했죠. 주역은 공자가 완성을 했고,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거의 연결이 됩니다. 중용에서 다시 중립이 나옵니다. 중립에서 이제 영세 중립화가 나와요. 중화란 한반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뿌리입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하태경 “북한은 핵 폐기, 남한은 홍준표 폐기해야”

    하태경 “북한은 핵 폐기, 남한은 홍준표 폐기해야”

    바른미래당 하태경 최고위원은 1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에서는 핵 폐기를 해야 되고 남한에서는 홍준표 폐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 최고위원은 이날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자리에서 “일제에서 해방될 때 친일파 인증을 했듯이 지금 한반도가 평화로 대전환을 하는 이 시기에 홍 대표 본인 혼자서 ‘나는 전쟁 기생 세력의 대표다’고 떠들고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하 최고위원은 “지금 변화의 동력은 ‘김정은’한테서 오고 있다“며 “‘김일성’, ‘모택동’이 ‘박정희’, ‘등소평’으로 바뀐 것과 같은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 북한 체제가 수령사회주의체제에서 수령자본주의체제로 노선전환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홍 대표가 ‘김정은하고 청와대 주사파가 일종의 밀약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게 안 먹히는 이유는 북한 노선 전환은 김정은이 사회주의자에서 자본주의자로 전향했기 때문”이라며 “청와대에 옛날 주사파가 그대로 있었다면 김정은이 답답해서 회담이 안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나도, 나도...” 민주당 내 드루킹 피해자 증언 잇따라

    “나도, 나도...” 민주당 내 드루킹 피해자 증언 잇따라

    더불어민주당 안팎에서는 15일 인터넷 댓글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민주당원 김모 씨(필명 ‘드루킹’)로부터 자신도 피해를 본 적이 있다는 증언이 잇따라 나왔다.보수 야당과 일부 언론이 드루킹과 메신저를 주고 받은 것으로 알려진 민주당 김경수 의원을 마치 댓글조작에 관여한 것처럼 몰아가자 오히려 민주당과 김 의원이 이 사건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며 적극적으로 엄호에 나선 것이다. 앞서 포털사이트 댓글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더불어민주당 당원 3명 중 1명이 친(親)노무현·친문재인 성향이었던 유명 블로거로 드러났다. 전날(14일) 정치권과 경찰 등에 따르면 네이버 기사 댓글 추천수 조작 혐의(업무방해)로 구속된 김씨는 ‘드루킹’이라는 필명으로 네이버에 시사 블로그 ‘드루킹의 자료창고’를 운영하던 인물이다. 드루킹을 직접 겪어봤다고 증언한 이들은 그가 특정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인터넷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입을 모았다. 블로그 소개란에는 좋아하는 것으로 ‘원칙과 상식’이, 싫어하는 것으로 ‘친일파, 이승만과 그 후예들 독사의 자식들’이 언급돼 있다. ‘나는 진실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혜의 힘으로 삿된 어둠을 깨트린다’는 문구도 보인다. 불교철학과 동양 점성술 자미두수(紫微斗數)를 취미로 삼는다는 내용도 있다. 해당 블로그는 이날 오후까지 누적 방문자가 984만여명에 달할 만큼 인지도가 높았다. 2009년과 2010년 시사·인문·경제분야 ‘파워블로그’로 선정됐다. 그는 민주당에 주기적으로 당비를 납부한 ‘권리당원’이었고, 지난해 19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을 온라인에서 공개 지지했다. 그해 12월까지만 해도 블로그에 ‘나는 노무현의 지지자, 문재인의 조력자이며 문 대통령의 시각으로 정국을 본다’는 글을 올리는 등 여전한 친문 성향을 드러냈다. 김씨는 자신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2014년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열고 소액주주 운동을 통한 사회 변화에 나서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경공모 활동 과정에서 유력 정치인들을 여럿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 회원들에게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6·13 지방선거’ 경기지사 후보 경선에 출마한 이재명 전 성남시장은 자신도 드루킹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 전 시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도 작년 이 사람으로부터 음해공격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고 근거없는 것이었지만, 그의 큰 영향력 때문에 나는 졸지에 ‘동교동 즉 분당한 구 민주계 정치세력이 내분을 목적으로 민주당에 심어둔 간첩’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댓글 조작은 ‘조작과 허위로 정부조차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 범죄자가 김 의원과 정부를 겁박해 이익을 얻으려다 실패한 후 보복과 실력 과시를 위해 평소 하던 대로 댓글 조작을 한 개인적 일탈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미키루크’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이상호 전문건설공제조합 상임감사도 드루킹에게 당한 경험을 공개했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에서 “2년 전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자가 온갖 ‘카더라’ 정보를 짜깁기해 사실을 왜곡하고 나를 음해하는 글을 게시해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사실이라 믿고 나에게 댓글로 욕을 하도록 만든 자”라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중요한 선거를 앞둔 이 시점에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 자유한국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자가 그 드루킹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머리에서 갑자기 ‘스팀’이 올라오면서 뚜껑이 확 열린다”고 꼬집었다. 당 디지털소통위원회 조승현 수석부위원장도 “드루킹은 워낙 유명했던 파워블로거로 6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추미애 대표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비판해 트위터 등을 찾아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드루킹이) 글도 잘 쓰고 하니까 정치 쪽에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김 의원이 부탁을 냉정하게 거부해 앙심을 품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선 드루킹은 아니지만 비슷한 열성 지지자로부터 여러 요구를 받고 응대한 경험이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 초선 의원은 이날 “당원들이 메신저로 이러저러한 요구를 해오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도 드루킹에게 그런 정도로 응대했을 것”이라며 “이를 드루킹의 일탈과 엮어 김 의원이 댓글조작에 관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의적인 정치 공세”라고 했다. 김씨는 공범 2명과 함께 자동화 프로그램(매크로)을 이용, 문재인 정부 관련 기사에 달린 비판 댓글에 ‘공감’을 클릭하는 수법으로 여론을 조작한 혐의를 받는다. 김씨는 경찰에서 “보수진영에서 벌인 일처럼 가장해 조작 프로그램을 테스트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경찰은 민주당원이 문 정부를 비판하는 쪽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행위가 상식적으로 민주당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술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보고 정확한 범행 동기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씨의 행적을 지켜봐 온 일각에서는 그가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지원한 데 대한 대가를 민주당에 바랐으나 돌아오는 것이 없자 이 같은 행위를 저지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문수 서울시의원 “고려대 내 인촌 김성수 동상 철거해야”

    김문수 서울시의원 “고려대 내 인촌 김성수 동상 철거해야”

    성북구청장 출마를 선언한 김문수 서울시의원(더불어민주당·성북2)은 대법원에서 친일 행위가 인정된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1891~1955)씨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학교에 설치돼 있는 친일파 김성수 동상을 철거하고 김성수 호로 지은 성북구 인촌로 도로명도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인촌 김성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과 인촌기념회가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패소를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인촌의 친일행적을 인정한 것이다. 후속조치로 정부는 지난 13일 국무회의를 열어 인촌이 1962년 받은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 대통령장·2등급)을 취소 의결하며 56년 만에 서훈을 박탈했다. 김 의원은 이와 관련, “자랑스러운 모교이지만 대학시절부터 가장 부끄러웠던 것이 고려대 본관 앞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이었다”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대법원 판결과 서훈까지 취소된 김성수 동상은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족고대’라 말하기 민망하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북구 인촌로 도로명 주소 역시 같은 이유로 즉시 개정돼야 할 것”이라면서 “한용운 선생님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유적지에 친일파의 호를 딴 도로명이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국공유지는 법이나 조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어느 정도 강제할 수 있지만 학교는 사유지이다 보니 현행법상 어렵게 돼 있다”면서 “강제 철거 등 폭력적인 방법 대신 고려대가 자발적인 방법으로 (철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이은재 ‘겐세이’ 두둔한 홍준표, 과거 자신도 ‘겐세이’ 사용

    이은재 ‘겐세이’ 두둔한 홍준표, 과거 자신도 ‘겐세이’ 사용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이 국회 상임위에서 ‘겐세이’(견제)라는 단어를 사용해 논란이 된 가운데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참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홍준표 대표는 1일 페이스북에 “3·1절을 앞두고 이은재 의원이 일본말인 ‘겐세이’(견제)를 사용했다고 막말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참 어이가 없었다. 본질은 제쳐 놓고 지엽 말단적인 말꼬리만 잡아서 막말을 운운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글을 올렸다. 홍 대표는 “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신조 총리에게 가볍게 목례한 것을 두고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대일 굴욕외교를 했다고 비난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면서 이 의원을 두둔했다. 이어 그는 “나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에 끌려갔던 아버지를 둔 사람이다. 그것을 일본 정부에게도 당당하게 말하고 회담했다. 영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가 혼용되어 사용하는 세계화 시대가 되어 버렸는데 유독 일본어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정서법만 고집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홍준표 대표 역시 2016년 경남지사 시절 도의회에서 여영국 경남도의원(정의당)과 설전 도중 ‘겐세이’라는 발언을 했다. 2016년 9월 28일 도의회에서 낙동강 녹조와 식수 정책 등에 대한 홍 지사의 답변이 길어지자 여 의원은 “지사님 짧게 하세요. 답변을”이라고 제지했다.그러자 홍 대표는 “짧게 하든 안 하든 내 답변하는 시간을 제한이 없다. 겐세이는 여 의원 할 때 겐세이 하고 마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했다. 이어 “여영국 의원은 잘 모르잖아 그러니까 설명을 해줘야지. 저런 사람들 때문에 도의회가 시끄럽다니까”라며 덧붙였다. 전날 노컷뉴스는 자유한국당 소속 일부 의원들이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이은재 의원에 칭찬 릴레이를 이어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장제원 수석대변인은 “20대 국회 최대 히트작, 겐세이”라며 웃었고 다른 의원은 “어제 겐세이 멋있었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은재 의원의 ‘겐세이’ 발언을 들은 당사자인 민주평화당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은 “‘겐세이’라는 말은 당구장 다닐 때 말고는 처음 들어봤다”면서 “위원장에게 겐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느냐. 게다가 일본어다. 3·1절을 앞두고 공개석상에서 적절치 못한 발언”이라고도 유감을 표시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언론 통해 국권회복에 힘쓴 신채호 선생 82주기 추모식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서 대일 항쟁에 나섰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순국 82주기 추모식이 21일 오전 10시 30분 충북 청주에 있는 단재 선생 사당 및 묘정에서 열린다. 사단법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은 각계 인사와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단재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언론을 통해 국권회복에 힘썼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강력 비판했다. 안창호 선생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창립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단재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뤼순 감옥에 수감돼 1936년 옥사했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