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