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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ㆍ소수교 8월초 협의

    ◎고르바초프,노대통령 6월 친서에 답신/경제대표단 공식 초청/정부,김종인 수석단장 새달 4일 파견 한소수교및 경제협력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양국 정부차원의 첫 각료급회담이 8월초 모스크바에서 개최된다. 정부는 18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노태우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답신을 통해 양국 관계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협의를 하자고 제의한 데 대해 정부대표단을 8월초 소련에 파견키로 했다. 우리 정부대표단은 김종인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장관급)을 단장으로 하고 김종휘대통령외교안보보좌관을 포함한 관계부처 고위관계관들로 구성되며 소련측의 대표단장에는 유리 마슬류코프제1(경제담당)부수상겸 각료회의제1부의장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정청와대대변인은 이날 『지난 6월4일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한소 정상회담이 끝난 뒤인 6월9일 노대통령이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각료급사절단을 조속한 시일내에 소련에 파견해 양국 관계증진및 정상화를 협의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히고 『이에대해 고르바초프대통령은 7월6일자로 답신친서를 보내 노대통령이 전하고 싶은 사항을 위해 필요한 어떤 인사를 포함시켜도 좋은 한국 경제대표단의 소련방문을 초청했다』고 발표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답신친서에서 『노대통령이 좋다고 한다면 지난번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때 배석했던 마슬류코프 제1부수상이 한국경제대표단을 초청토록 하겠다』고 말했으며 이에따라 우리 정부는 김종인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8월초 소련에 파견할 것이라고 이대변인이 밝혔다. 이대변인은 이날 한소 양국정상이 친서를 교환한 것과 관련,『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이 양국 관계정상화의 첫 걸음이었다면 이번 친서교환은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대변인은 또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노대통령이 전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이를 위해 필요한 어떠한 인사도 포함시켜도 좋다』고 말한 데 대해 『이는 소련측이 비단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국교문제등 어떠한 협의도 할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대변인은 이어 『정부는 이미 우리 대표단의 파견의사를 소련측에 전달했다』면서 『정부는 한소 관계정상화를 신중히 단계적으로 추진해 상호국가이익에 합치되도록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의 친서는 지난 6월9일 도브리닌 소련대통령 외교고문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한 신현확삼성물산회장편으로 전달됐으며 7월6일자의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답신친서는 지난 12일께 공로명주소영사처장을 통해 먼저 내용이 전달되었으며 외교행낭을 통해 16일 친서문서를 공식 접수했다. 한소 양국 관계정상화는 북한이라는 장애요인에도 불구하고 연내 수교전망이 매우 밝아진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방소 정부대표단 단장인 김경제수석은 이날 하오 삼청동 안가에서 외무부ㆍ통일원ㆍ경제관련 부처 기획실장급회의를 주재,방소 대표단구성ㆍ일정문제 등을 협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정부대표단을 가급적 10명이내로 한다는 원칙아래 경제기획원,외무ㆍ재무ㆍ상공부,과기처 차관보 또는 관계국장급 이상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대표단은 오는 8월4일 대한항공편으로 출국,6일부터 8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2∼3차례 회담을 갖는 한편 김단장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면담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민자의원ㆍ원외 지구책회의 안팎

    ◎「장외투쟁」에 대응논리 마련/조기총선의 법리적 허구성 공박/“논란만 벌였다면 종이호랑이 됐을 걸” 18일 상오 서울 가락동 민자당 중앙정치교육원에서 열린 당소속의원및 원외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는 여야간 격전을 치렀던 지난 1백50회 임시국회 당시 여권의 입장에 대한 대국민 홍보방향및 하한정국의 귀향활동,지역활동지침 등이 폭넓게 제시돼 야권의 장외투쟁에 대한 역대응전략을 논의하는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이날 모임은 지난 5월말 의원세미나가 3당통합이후 3계파의 결속을 다지는 단합대회의 성격을 지녔던 데 반해 범야권의 반민자당 투쟁움직임에 정면대응하고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적시하는 적극적인 대야 공격논리 전개에 초점을 두었다. ○…이날 참석자들에게 배포ㆍ시달된 귀향활동대책에는 지난 임시국회의 성과와 민자당이 주요안건을 단독으로 처리한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평민당의 속셈과 국회해산,조기총선 주장의 부당성을 집중 소개토록 강조. 김동영원내총무는 원내보고를 통해 『지난 임시국회는 평민당의 주투쟁ㆍ종대화라는 비의회ㆍ반평화적인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원만한 국회운영을 위해 참을 수 있는데까지는 참고 양보할 수 있는데까지는 양보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시끄럽게 끝나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며 총체적인 책임이 원내 사령탑인 자신에게 있음을 지적. 김총무는 그러나 『흑백논리와 계획적인 파괴공작으로 무정부상태를 유도,이를 3당통합의 탓으로 전가하고 민자당을 종이 호랑이로 만들려는 평민당의 저의를 알면서도 회기내내 현안에 대한 결론없이 논란만 벌였다면 여당의 존립가치는 상실했을 것』이라며 현안법안의 강행처리가 소수의 횡포에 대응,집권여당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 김총무는 특히 이번 국회에서 헌정사상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여당상을 보인 실례로 △소수야당에 상임위원장 4석 할애 △국무총리의 과거잘못에 대한 사과 △국군조직법ㆍ방송법 등의 야 주장 대폭수용등을 지적하면서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한 평민당의 집단적 조직적 의사방해,유혈폭력 유발 등이 없었다면 모범적인 국회가 됐을 것이라고 해석. ○…주요당무 보고에 이어 열린 자유토론에서 당내 법이론가로 손꼽히는 이진우의원(포항)은 야당측이 내세우고 있는 조기총선 주장에 대해 『현행 헌법상 국회해산은 불가능하며 국회의원의 임기가 헌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더라도 총선이 아닌 보궐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법이론에 입각,야당측을 공박. 이의원은 『야당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법을 무시하고 국회를 해산할 경우 앞으로 여당도 자신의 편의에 따라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잘못된 관행을 남기게 된다』면서 『3당통합을 국민의 의사에 반한 야합이라고 주장하던 야당이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면 이것이야말로 직무유기이며 선거구민에 대한 배신행위라는 논리로 귀향활동을 해달라』고 주문. 또 3당통합이후 민정계 소장파의원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김중위의원(서울 강동을)은 민자당의 법안 일방처리에 대한 비난여론을 의식,『꼭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 뒤『토론문화가 정착될 수 있고 폭력이 배제되고 순조로운 의사진행이 될 수 있는 제도장치가 강구돼야 한다』고 주장. 한편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조기총선을 원치 않는다면서 『야당이 사퇴한다 하더라도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의 길을 당당하게 나아가면 된다』고 역설. 김대표는 이어 이날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노태우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온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속에서 노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굳게 단결하자』고 호소.
  • “일 사회당대표 방북때 가이후총리 친서 휴대”

    ◎대 북한 관계개선 희망 피력 【도쿄 AFP 연합】 가이후 도시키 일본총리는 7월 하순 북한을 방문하는 사회당 대표단에게 일ㆍ북한 관계개선을 희망하는 일본정부의 메시지를 북한측에 전달하도록 요청했다고 구보 와다루 사회당 대표단장이 12일 말했다. 구보단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가이후 총리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적절한 기회가 있으면 이같은 가이후총리의 메시지를 북한측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이곳의 정치 분석가들은 사회당대표단의 방북이 일ㆍ북한 관계개선의 좋은 기회로 가이후 총리가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부시도 친서 보내와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23일 6ㆍ25사변 40주년을 맞아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노태우대통령 앞으로 친서를 보내고 6ㆍ25 당시의 충격과 한국민의 용기를 상기한 뒤,자유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한국군및 유엔군의 방어노력이 침략을 격퇴시킨 본보기 였다고 말하고 번영과 민주화및 정치적 안정과 국제적 지위 고양을 이룬 대한민국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기원했다.
  • 북한개방ㆍ평화통일 노력/노대통령,6ㆍ25 참전국에 친서

    노태우대통령은 23일 6ㆍ25 40주년을 맞아 미국 영국 호주 등 유엔참전국 국가원수들과 스웨덴 덴마크 등 의료지원 5개국 국가원수들에게 각각 친서를 보내 한반도의 평화와 자유세계의 안전을 위해 바친 고귀한 희생과 인류애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를 갖출수 있도록 그동안 지원해준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노대통령은 『화해와 개방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으며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성실과 인내을 가지고 남북대화에 임하겠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는 것만이 각국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이를위한 우방국의 계속적인 지원을 요망했다.
  • 신현확씨 초청 오찬 방소 결과 설명들어/노대통령

    노태우대통령은 19일 낮 청와대에서 최근 소련을 방문하고 18일 귀국한 삼성물산회장인 신현확 전총리와 오찬을 함께 하며 방소결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신 전총리는 도브리닌 소련대통령고문의 초청으로 지난 9일 출국,노대통령의 친서를 도브리닌고문을 통해 고르바초프 소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답신 친서를 받아왔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노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신 친서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같은 것은 일체 없다』고 말하고 『신회장의 방소는 삼성의 대소 전자ㆍ기계분야수출과 소련의 기초ㆍ첨단기술 도입이 주목적』이라고 밝혔다.
  • 대통령친서 휴대 방소 신현확씨 오늘 귀국

    노태우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휴대하고 소련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신현확삼성물산회장이 18일 하오 귀국한다. 신회장은 소련과학아카데미 초청으로 지난 9일 출국,마르초크 소련과학아카데미소장을 비롯해 소 극동연구소의 티타렌코소장,말케비치 소연방상의회장 등을 만났으며 노대통령의 친서는 지난번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도브리닌을 통해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관련,신회장이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노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신 친서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어 주목된다.
  • “한ㆍ미 과기협정 곧 체결”/정과기처,미 에너지장관과 합의

    ◎부시에 노대통령 친서도 전달 【워싱턴=김호준특파원】 미국을 방문중인 정근모과기처장관은 미국의 초전도 입자가속기(SSC) 사업에 한국의 참여의사를 밝히는 노태우대통령의 친서를 조지 부시 미대통령에게 전했다고 14일 말했다. 앞으로 한미 양국간의 과학기술협력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란다는 노대통령의 희망도 아울러 피력된 이 친서는 제임스 와킨스 에너지부장관을 통해 부시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정장관은 이번에 와킨스장관을 비롯하여 브룸러 미대통령과학고문및 국무부 관계자들과 일련의 요담을 갖고 지난 88년 10월 기간 만료로 폐기된 한미 과학기술협정을 조속한 시일내에 재체결키로 합의했다.
  • 한국학 발전에 기여/미 스칼라피노에도

    노태우대통령은 오는 19일 정년퇴임하는 스칼라피노 미버클리대 동아시아 연구소장에게 한국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는 친서를 15일 보냈다. 노대통령의 친서는 이날 김학준대통령사회보좌역이 휴대하고 출국했는데 김보좌역은 19일에 열리는 스칼라피노교수의 퇴임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소 정상회담이후 한국의 국내외 정책이란 연제로 특별강연도 할 예정이다.
  • 대전엑스포 조직위 허남훈총장에 듣는다

    ◎“우리산업 도약의 경제올림픽으로”/1천만명 관람 예상… 「한국비전」전세계에 과시 BIE(국제박람회기구)의 대전엑스포93 공인을 계기로 허남훈 대전국제무역산업박람회 조직위 사무총장을 만나 대전엑스포93의 준비상황과 앞으로의 대책을 들어봤다. ­대전엑스포93이 마침내 BIE의 공인을 받았다. 대전엑스포의 개최 의의는. ▲우리나라가 지난 30여년간의 국민적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발전의 실상을 돌아보고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시점에서 엑스포를 통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발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대전엑스포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긍지를 바탕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화합의 축제이며 청소년에게 21세기를 향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는데 큰 뜻이 있다. 또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소중한 발전경험과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개발도상국에 희망을 주고 서울올림픽으로 부상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다시한번 떨치게 될 것이다. ­흔히들 대전엑스포가 88서울올림픽에 이어 「경제올림픽」이라고 불릴 정도의 큰 규모라고 하는데 그만큼 국제적인 과시효과가 있는지. ▲올림픽은 체육ㆍ문화적인 행사로 국위선양에 도움이 됐지만 엑스포는 산업ㆍ경제적 차원에서 한단계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기술ㆍ산업수준면에서 급템포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이 과거 오사카엑스포70을 개최함으로써 10년 이상의 외교적 성과를 얻었다는 점은 유념할만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약 1만명의 직ㆍ간접 고용효과를 거둘 수 있고 약 30만명으로 예상되는 외국관광객유치와 10억달러의 수출증대효과가 기대된다. ­대전엑스포가 국제공인을 받은 최초의 박람회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성격인가. ▲현행 국제박람회기구(BIE)협약상 박람회는 종합박람회와 전문박람회로 구분된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인류노력에 의해 성취됐거나 성취될 발전과 그 방법을 전시하는 것은 종합박람회,어떤 단일 분야를 전시하는 경우는 전문박람회라고 한다. 그러나 BIE는 국제박람회의 난립방지와 참가국들의 경비절감을 위해 현재 추진중인 협약개정을 통해 등록된 박람회와 인정된 박람회로 구별,현재 회원국들의 비준을 받고 있다. 대전엑스포93은 현재 전문박람회로서 공인받아 추진되고 있으며 앞으로 발효될 신협약상의 인정박람회의 정신을 살린 박람회로 개최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대전엑스포가 과거의 박람회나 무역전시회와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특히 BIE의 공인을 받지 못한 박람회와 다른 점은. ▲무역전시회는 특정상품의 상거래촉진을 목적으로 판매업체가 구매자를 대상으로 개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박람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순수히 제품의 판매 및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매년 열리는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나 한국전자박람회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엑스포는 주최국 및 참가국이 국가단위로 참가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발전상 및 발전가능미래상을 전시하는 점에서 단순한 무역전시회와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85 쓰쿠바박람회」「86 벤쿠버박람회」등이 대표적인 엑스포사례다. 또 BIE공인을 받을 경우 BIE회원국은 자국명의의 국가관으로 참가가 가능하나 BIE비공인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지방박람회에 그치고 있다. ­대전엑스포의 주제인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 갖는 의미는.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에서의 기술개발과 기술흡수축적 과정을 제시,각국 여건에 맞는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접목,발전과정에서 소외된 인간성회복에 기여하기 위한 취지를 담고 있다. ­대전엑스포개최에 따른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 ▲당초 91년 개최를 전제로 2천1백51억원으로 잠정 결정한 바 있으나 개최시기가 93년으로 연기됨에 따라 3천7백억∼4천억원정도가 소요되리라고 본다. ­처음 개최시기를 91년으로 했다가 93년으로 연기하게 된 이유는. ▲최근 수출과 투자의 부진으로 전반적인 기업환경이 어려워짐에 따라 당초 계획대로 91년에 박람회를 개최하게 되면 기업에 새로운 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고 박람회장 주변의 숙박시설이나 도로ㆍ교통 등 기반시설의 완벽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일부에서는 대전엑스포가 92년 총선을 앞둔 정치행사라는 오해가 있어 이를 불식하기 위한 점도 있다. ­들리는 말로는 BIE공인을 받기 위해 정ㆍ관ㆍ재계가 합동으로 대외로비를 벌이는등 대단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BIE에서는 빈번한 박람회개최로 인한 회원국들의 과중한 경비부담 때문에 2000년까지 이미 확정된 박람회를 제외하고는 박람회를 개최하지 않기로 했으나 이번에 그 필요성을 인정해 대전엑스포의 공인을 하게된 것이다. 다른 나라는 국제공인을 받기 위해 통상 10년전부터 사전 교섭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2000년 박람회개최를 놓고 캐나다는 수상의 친서를 보내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대전엑스포의 예상 관람객수와 수송ㆍ숙박대책은. ▲93일동안의 엑스포기간동안 약 1천만명의 관람객이 예상되며 1일 최대 30만명,1일 평균 10만명이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관람객 수송을 위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간 편도 2차선 증설을 92년에 완공할 계획이며 숙박시설,신ㆍ개축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방안도 강구중에 있다. ­대전엑스포가 끝난뒤 박람회장의 활용계획은. ▲행사후 대덕연구단지 및 둔산동 문예공원과 연계,세계굴지의 과학공원으로 발전시켜 국민과학기술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 노대통령,고르비에 친서/9일 출국 신현확씨 통해 전달

    노태우대통령은 지난 9일 소련방문을 위해 출국한 신현확삼성물산회장편에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낸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이 친서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으나 청와대의 한 고위소식통은 이날 『극히 의례적인 것으로 안다』면서 『한소 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이 회담이 양국 관계발전은 물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발전과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친서는 신회장이 지난달 22일 서울에서 열린 전직국가수반회의(IAC)에 참석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고문으로 지난번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도브리닌을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회장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초청으로 방소,오는 17일까지 소련에 머무르면서 한소관계에 관한 연설을 하며 마르초크 소련 과학아카데미 소장을 비롯해 소 극동연구소의 티타렌코소장,말케비치 소 연방상의회장 등을 만날 예정이다.
  • “대북친서 없었다”/청와대 당국자

    청와대당국자는 8일 「노태우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대통령을 통해 북한 김일성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외신보도에 대해 『노대통령이 고르바초프대통령을 통해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한소 정상회담의 대화내용이 와전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정상회담 성사배경과 전망(한ㆍ소 새 시대:1)

    ◎한반도 냉전종식의 역사적 전기/북방ㆍ개혁정책 일치… 양국수교 “초읽기”/통일여건 조성에 큰 파급효과 예상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6월4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은 한소 수교임박이라는 양국관계에 뿐 아니라 냉전체제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그 의의가 엄청나게 크다. 노ㆍ고르비회담은 우선 한소 수교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한소 양국간에는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가 교환설치된 이래 1년도 채 못돼 금년 2월과 4월에 주모스크바 한국영사처,주서울 소련영사처가 설치되었으며 이번에 한소 정상회담이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성사됨으로써 양국수교는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 노ㆍ고르비회담에서는 한소 관계정상화가 핵심적인 의제로 등장될 것이 틀림없으며 미수교국간의 정상이 회담을 갖는 사실 자체가 이미 수교에 대한 기분적인 인식이 일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는 「조속한 시일내에 한소 관계를 정상화 한다」는 수교원칙에 합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수교원칙을 토대로 양국 수교교섭단이나 양국 외무장관이 빠르면 7월중에 1∼2차에 서울과 모스크바 및 유엔본부 등을 오가며 수교에 따른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소 수교는 9월이전에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한소간의 관계긴밀화 발전속도에 따라서는 노대통령의 연말 방소,2차 한소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한소 정상회담의 전격 성사배경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를 경제적 번영으로 귀결시키려는 소련측의 실질적 욕구와 남북관계개선 방법을 「서울­모스크바­평양」이라는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구사해야겠다는 우리의 입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는 신흥공업국인 한국의 건설ㆍ제조업분야 등을 유치,자국의 시베리아개발,일반국민들의 생필품수급확대 등 경제번영의 촉매가 되게하고 또한 한국경제의 소련진입이 경제대국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경제부흥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겠다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한국으로서는 남북관계진전,나아가 민족공동체로서 남북 통일시대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해야하나 북한이 한사코 폐쇄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북방외교를 통해 북한을 개방쪽으로 움직이게할 필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북방외교의 관건인 「모스크바」를 평양으로 가는 우회징검다리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 바로 이번 노ㆍ고르비회담 추진의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소 정상회담의 또 하나의 의의는 남북한 관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소련의 개혁ㆍ개방물결이 베를린장벽을 허물고 동구에 자유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2차대전후 지속되어온 냉전체제의 급속한 붕괴가 이뤄진 최근의 세계적 화해 무드가 「분단 한반도」에 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냉전체제의 최후의 산물인 남북한 분단의 해소없이는 진정한 데탕트가 이뤄질 수 없다는 인식이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차 있었다면 소련과의 관계정상화 없이는 방북외교의 완결을 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노대통령에게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ㆍ고르비회담은 북한에 대한 개방압력,남북통일 여건조성이란 면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은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을 절대 고립시키지 않으며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노대통령의 솔직하고도 진지한 메시지를 확인한 뒤 이를 북한측에 전달하면서 남북대화재개 등을 종용하고 북한도 개방의 길을 걷도록 권고할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이 소련의 충고를 끝내 거부할 경우에 구사할 수 있는 대북압력카드는 매우 다양할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폐쇄노선을 고수하면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핵 개발관련 기술지원의 중단을 들 수 있다. 이미 소련은 북한의 핵개발을 공식비판한데 이어 소련핵기술팀을 철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한의 고도무기체계가 소련무기체계로 이뤄져있는 점을 감안할때 군사적 압력이 용이하고 석유공급도 압력수단으로 구사할 수 있으며 북한외채의 80%가 소련채무인점도 충분한 영향력 행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비록 사회주의가 어렵더라도 자본주의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포기는 물론 사회주의가 얻은 전리품도 포기하는 것』(5ㆍ24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이라는 폐쇄노선을 다짐했지만 결국은 소련의 압력을 점진적으로 수용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단된 남북대화나 인적ㆍ물적교류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으로 다시 가동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러한 남북 관계진전은 통일시대 개막의 여건을 성숙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한소 관계발전이 가속화될 경우 시베리아개발에 한국의 자본ㆍ기술이 지금도 현지에 나가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그같은 「결합」은 남북한 관계진전에 새 전기를 제공할 것이다. 한편 한소 정상회담→양국 관계정상화로 이어질 북방외교성취는 집권후반기를 맞고 있는 노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위상제고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되며 내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외치로 보상하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은 분단시대를 열게 했던 주역과 관계정상화를 통해 분단을 해소하고 청산해간다는 의미에서 북방외교의 완결이자 분단시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결정적 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한ㆍ소 최근 접촉 일지 ▲78년 4월=KAL기 소 무르만스크 남쪽 2백마일 빙판에 강제착륙 ▲〃 9월=한국각료로는 처음으로 신현확보사장관 세게보건기구총회참석자 소련입국 ▲79년 4월=한소 국제전화 개설 ▲83년 9월=KAL기 사할린부근 상공서 소전투기에 피격 ▲88년 1월=소련,서울올림픽참가 공식발표 ▲〃 8월=박철언대통령정책보좌관 극비방소,수교교섭 개시 ▲89년 3월=최호중외무부장관,방콕에서 아태 경제사회위원회 총회에 참석한 리가초프 소 외무차관과 접촉 ▲〃 4월=소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 개설,대한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사무소 개설 ▲〃 6월=김영삼민주당총재 방소 ▲〃 11월=한소 영사처 상호교환 개설 합의 ▲90년 2월=주모스크바영사처 개설 최호중외무장관 한소 외무장관회담제의 ▲〃 3월=공로명 초대 주소 영사처장부임,주한 소련영사처 개설,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일행 방한 ◎한ㆍ소관계 7백50년 약사/1884년한ㆍ노 수교조약… 공식외교 개시/무역사무소 작년 개설,양국관계 급진전 한국과 소련 양국은 서기 1246년 당시 고려 왕자인 왕준ㆍ왕전형제가 몽고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고왕 정종즉위식을 계기로 러시아 수스달 공국의 제로슬라브대공과 솔란게스왕자와 첫 접촉을 가진 이래 이번 노태우대통령ㆍ고르바초프 소대통령간 정상회담성사까지 7백50여년간 공식ㆍ비공식관계를 유지해왔다. 한소 양국이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861년 중로 북경조약체결로 연해주땅이 러시아영토가 됨에 따라 한로 국경이 두만강을 경계로 접하면서부터. 이후 부동함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1884년에는 한보 수교통상조약이 체결돼 양국간 공식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한국전쟁이후 한소 양국간 적대관계가 지속됐으나 70년대 들어 한국정부는 6ㆍ23선언등을 통해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류및 관계개선용의를 표명했다. 6공들어 한국정부의 적극적 북방정책추진과 함께 한소간 인적 교류가 증대되었으며 88년 8월 박철언 당시 대통령정책보좌관이 극비 방소,양국 수교교섭을 시작했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선수단이 참가함으로써 양국관계진전에 결정적 전기가 됐으며 한소 양국은 지난해 4월 서울과 모스크바에 각각 무역사무소를 교환개설했다. 이어 11월 공식관계의 시초라고 할 영사처교환설치에 합의,양국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에따라 지난 2월 주소 영사처가 개설되고 공노명대사가 초대 주소 영사처장으로 부임했으며 소련측도 3월 중순 시로추크를 영사처장대리로 임명,영사처업무를 정식개시했다. 이에앞서 지난해 6월 당시 김영삼민주당총재가 소련과학원산하 세계경제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했으며 3월에는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과 박철언 당시 정무1장관 등 당정고위인사들이 소련을 또다시 방문,고르바초프등 소련측 고위인사들과 만나 한소 관계정상화에 합의했다. 이어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간에 이를 뒷바침하는 친서가 교환됨으로써 양국은 1904년 국교단절이래 86년만에 다시 공식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평을 열었다.
  • 통일「예멘공화국」출범/살레 초대대통령취임… 5인평의회 구성

    ◎“국방비가 경제피폐 주인”인식… 이념벽 넘어/81년 협정체결,동서화해무드 타고 급진전 아라비아남단에 위치한 중동유일의 분단국가인 남북예멘이 꾸준한 노력끝에 마침내 22일 통일을 선언,단일국가인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을 수립했다. 통일예멘의 통치기구는 지난 4월 22일 양국정상회담에서 합의된 헌법초안에 따라 앞으로 30개월의 과도기간동안에는 인구비례에 의해 북예멘 3명,남예멘 2명으로 구성된 5인대통령회의가 구성돼 합의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과도기간이 지나면 선거를 통해 행정부수뇌와 입법부를 구성한다. 입법권은 북예멘 국가자문평의회 의원 1백59명과 남예멘 인민의회의원 1백11명에다 대통령회의가 주로 야당인사로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명직 31명의 의원을 합한 3백1명 정원의 통일의회가 행사한다. 대통령회의는 양국간 사전 합의에 따라 알리 압둘라 살레 현북예멘대통령을 통일예멘의 새대통령으로,남예멘 집권 사회당 사무총장 알리살렘 알바이드를 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하이데르 아부 바크르 알아타스 현남예멘대통령이 총리에 임명됐다. 헌법초안은 21일과 22일 양국의회에서 통과됐으며 오는 11월 30일 국민투표로 확정되게 된다. 친서방 자본주의 회교국가인 북예멘과 친소 사회주의 세속국가인 남예멘이 급속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것은 통일을 향한 꾸준한 노력과 동서화해무드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예멘은 15세기이래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1918년 제1차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영국이 패전국 오스만터키로부터 이 지역을 분리시키면서 북예멘만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남아라비아연방」에 편입,계속 지배해 왔다. 남예멘지역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중심이 돼 67년 독립했다.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지 50년만에 남예멘이 독립하자 곧 통일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양국은 같은 민족,같은 언어,같은 종교(수니파 이슬람교)를 갖고 있었지만 이데올로기 차이는 현격했다. 동서대결무드가 고조됐던 79년에는 국경분쟁으로 전쟁도 치렀다. 그러나 이 전쟁도 양국민의 드높은 통일열망으로 한달만에 휴전에 이르렀고 81년에는 통일을 목표로 한 아덴협정이 체결돼 양국통합의 기본원칙이 천명되기에 이르렀다. 81년 11월 북예멘 살레대통령이 남예멘을 방문,통일노력을 본격화시켰고 83년 예멘최고평의회가 구성돼 통일방안을 구체화시켰다. 86년 남예멘에서는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득세하기도 했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새로운 평화공존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통일노력이 기울여졌다. 당초 오는 11월 30일로 예정된 통일이 5월 26일로,또 다시 22일로 6개월이나 앞당겨진 것은 외세의 개입,북예멘 북부지역의 시아파 원리주의자와 남예멘 극좌파의 반통일움직임을 조속히 배격해야 한다는 양국지도자들의 공통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밖에도 양국의 정치ㆍ경제사정도 통일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분석된다. 북예멘은 독립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쿠데타도 빈발해 왔다. 아직도 북예멘 사회는 부족중심적이며 중앙정부의 행정이 지방에서 잘 집행되지 않고 있다. 1인당 GNP도 6백50달러,총 GNP57억달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국방비가 5억3천만달러나 이르는 등 경제사정도어렵다. 남예멘도 86년 내전을 겪는 등 정정이 불안하며 총 GNP 10억달러,1인당 GNP 4백30달러에 국방비는 2억달러 수준에 이르고 있어 통합의 필요성이 절실한 형편이다. 더욱이 양국 국경지역에서 8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유전의 공동탐사필요성과 공동탐사경험도 통일에 일조했다. 시바여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예멘땅에 통일이 옛날의 영화를 한꺼번에 가져다주지는 않겠지만 양국은 이미 양국국민의 자유왕래를 보장하고 있고 20일 군통합도 완료한 터라 통일에 큰 어려움은 따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서독통일과 함께 남북예멘의 통일은 동서화해시대를 확인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 서구 곳곳 유태인묘 훼손행위의 충격파(특파원 코너)

    ◎「나치즘망령」에 시달리는 유럽/「거대독일」 출현ㆍ극우파준동에 주변국 공포/“반유태주의 경고”… 파리선 10만명 침묵시위 유럽에 인종차별을 앞세우는 극우세력의 확산과 함께 반유태주의의 부활징후가 나타나고 있어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각국에서 잇따라 발생한 유태인묘지훼손사건은 동서독의 통일에 따른 거대 독일출현의 가능성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는 주변국들에게 다시 나치즘의 망령을 되새기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지난 14일 상오 파리근교 클리시 수 브와지역의 마을 공동묘지안에 있는 유태인 묘역에서 32개 무덤의 묘석이 깨지고 파헤쳐지거나 더럽혀진 채로 발견됐다. 쓰러지거나 파괴된 비석에는 예외없이 나치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같은날 역시 파리근교의 이시노지역의 공동묘지에서도 유태인 묘지만 10기가 파괴됐다. 이들 사건은 특히 지난 9일 프랑스남부 카르펑트라마을의 유태인 공동묘지에서 34기의 무덤이 훼손된 사실이 알려져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히다 시피한 상황에서 대담히 저질러져 사람들을 더욱 아연케 했다. 카르펑트라마을에서는 봉분이나 묘석ㆍ비석 따위만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사지낸지 2주밖에 안되는 시신을 꺼내 쇠꼬챙이로 난자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 분노를 사게 했다. 이 사건이 있던날 프랑스남서부 바욘느시의 공동묘지에서도 유태인묘지 파괴사건이 일어났다. 유태인묘지 훼손행위는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4일 이탈리아 베론시에서 40여개의 무덤이 파헤쳐 졌고 폴란드의 베이에 로보마을에서도 10개의 묘지가 파괴됐다. 또 스웨덴에서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만을 골라내 10여기를 훼손했으며 유태인의 고향인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올리비에마을과 하이파마을에서는 무려 2백50기의 무덤이 파괴되거나 오손된 것으로 보도됐다. 누가 왜 이같은 짓을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느곳에서도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반유태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또한 극우나치주의자들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산사람에 대한 어떠한 못된 행위보다도 더욱 심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묘지 훼손행위를 유태인을 대상으로 저지를 부류들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프랑스에서는 매스컴을 비롯한 각계에서 일제히 반유태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으며 지난 14일 저녁에는 10만여명이 참가,유태인 배척행위와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침묵시위가 파리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현직대통령부부가 데모에 앞장서기는 프랑스역사상 처음이라는 화제까지 낳은 이날 시위에는 프랑스의 거의 모든 정당 종교단체 인권단체들이 참가했다. 프랑스사회가 이번 사건을 얼마나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정치 지도자들의 거동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카르펑트라마을사건이 보도되자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은 그날로 조셉시트뤼크 프랑스유태교회장 자택을 직접 방문,유감을 표시 했으며 카르펑트라 마을 유태교회목사에게는 따로 조문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로랑 파비우스국회의장,야당인 공화국연합의 자크 시라크당수,공산당의 조르지 마르세서기장,시몬 베이유 전유럽의회의장 등이 모두 시위대의 앞열에 섰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천인이 공노할 만행』『짐승같은 행동』또는 『야만인의 행위』라고 비난했다. 다만 정당중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가장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국민전선당(FN)만이 불참했다. 장 마리 르 펭당수가 이끄는 국민전선당은 외국인의 국외추방,외국이민의 입국금지 등 인종차별적이며 국수적의적인 정강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극우파 정당이다. 르 펭당수는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자 『우리당을 음해 하려는 정치적 모략』이라고 맞서고 있지만 과거의 행적이나 반유태주의 반대데모 불참 등 이번 사건이후의 거동이 비난을 자초한 셈이 됐다. 프랑스유태교단체협의회의 장칸의장은 『국민전선당이 직접 저지르지는 않았더라도 그와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온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유태인묘지 오손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프랑스에만도 80년대들어 한해 한 두건씩은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의 파문이 의외로 넓게 번지고 있는 것은 최근 극우파가 눈에 띄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여러나라에서 동시다발로 빚어진데다 나치즘의 악몽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프랑스 이외의 사건들은 연대성 보다는 카르펑트라 사건의 모방성이 짙은 것으로 보고 있으나 유럽각국의 골칫거리인 스킨헤드족들로 대표되는 반유태주의의 극우파 행동대원들의 소행임이 거의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럽의 극우파 정당들은 오히려 정치적 목적으로 사건을 확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묘지파손 행위 자체의 부도덕성은 말 할 것도 없고 그와 같은 행위가 국가간 민족간 화해를 바탕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는 유럽통합작업에 역행하는 처사일 뿐만아니라 앞으로 유럽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독소로 커나갈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데 유럽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 미ㆍ소 외무,한반도 긴장완화 논의/워싱턴회담 무슨얘기 나눌까

    ◎미 리투아니아 사태 평화적해결 요청/소 경제개혁 가속위한 교류확대 촉구 제임스 베이커미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이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위싱턴에서 미소외무장관회담에 들어갔다. 지난해 말 몰타미소정상회담 이후 양국 외무장관은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외무회담 및 나미비아 독립기념식에 참석,회담을 갖는 등 자주 만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외무회담은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취임과 리투아니아 분리독립문제로 소련정치구조가 변화를 겪은 뒤 처음열리는 외무회담이며 오는 6월로 예정된 미소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대좌라는 점에서 중요한 회담으로 평가되고 있다. 약국 외무장관은 회동기간중 매일 한차례씩 3번회담을 가지며 실무자들은 군축ㆍ지역문제ㆍ환경ㆍ양국관계ㆍ인권 등 5개분과로 나뉘어 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에서 다루어질 주요 의제로는 ▲한반도를 비롯한 지역문제▲전략무기 감축협상(START)등 군축문제▲미국의 대소경제제재의 해제등 양국간 경제관계 개선문제가 꼽히고 있다. 한반도문제를 비롯한 지역문제는 5일 협의될 예정인데 한국과 소련의 연내수교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고 북한의 핵개발이 「관심사」로 떠오른 상황에서 미소가 남북한대화 촉진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관측통들은 양국 외무장관이 한소수교 및 이에 따른 미ㆍ북한관계개선,한국의 유엔가입,북한 핵시설 현장검증등의 문제가 의제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있다. 양국 외무장관은 이미 지난 2월 모스크바회담 공동발표문을 통해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한간의 대화촉진을 지지하며 이를 위한 조속한 협의를 갖기로 다짐한 바 있어 이번 회담은 한반도긴장완화에 촉진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양국 외무장관은 이밖에 독일통일, 리투아니아독립 기타 지역문제도 논의할 예정이다. 리투아니아 독립문제는 이번 회담의 복병. 애초 의제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으나 미국측은 리투아니아를 주요의제로 삼을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은 소련이 리투아니아에 대해 폭력을 쓰지않고 평화적으로 문제를처리토록「보장」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미국은 리투아니아문제로 인해 미소간에 조성된 화해무드와 냉전종식의 신국제조류의 흐름을 역류 시키면서까지「밀어붙일」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소련은 리투아니아문제가 「내정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요미우리(독매)신문에 따르면 셰바르드나제장관이 고르바초프의 친서를 부시에 전달할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미소간 회담의 주요 단골메뉴인 군축에 관해서는 미소양국이 이미 유럽주둔양국군 규모및 재래식전력감축협상에서 상당한 합의에 이르고 있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한편 소련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의 대소경제제재조치 완화,더 나아가 경제교류활성화를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소련의 정치개혁과 이민법 개정등을 계기로 대소교류 활성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오는 6월 고르바초프가 군축합의를 공식화하면 무역제재조치를 완화한다는 일정표를 마련해 놓고 있다.〈강석진기자〉
  • “한­소 연내 완전수교 합의/북한,고립·좌절감 심화”/WP지 보도

    【워싱턴연합】 한국과 소련의 완전한 수교합의는 한국에게 있어 50년 한국전쟁이후 가장 중요한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기록될수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31일 논평했다. 이 신문은 이날 외신면에 게재된 장문의 서울발 기사에서 노태우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친서교환이후 한국정부는 금년내에 양국간 외교관계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이같이 논평하고 그러나 지난 수세대동안 소련과의 밀월을 즐겨온 북한에게는 이같은 사실이 또 하나의 커다란 좌절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통일문제로 눈코 뜰새없이 바쁜 동독을 제외한 동구는 물론 몽고까지 한국과 수교하는 가운데 북한은 더더욱 고립을짙게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소련이 경제적 측면에서 대한관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르바초프가 소련경제를 20세기수준으로 진입시키려 시도할 경우,정부와 기업 지도자들이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경제를 진입시킨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와 교류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의미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한소수교와 선결문제/한종태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김영삼민자당최고위원일행의 방소활동이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둔데다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간에 주고받은 친서및 답신내용이 공개됨에 따라 한소양국간 수교가 목전에 다다른 느낌이다. 양국관계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남북관계개선과 이에따른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구조정착이라는 점을 인식할때 이같은 움직임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정부는 또 소련측과 정부차원의 공식수교접촉을 갖기위해 대표단을 5월께 모스크바에 보낼 계획으로 알려져 한소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급진전할 것으로 보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북한과 함께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했던 소련과 어느새 수교협상을 벌이게 됐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는 냉엄한 국제정치적인 현실은 차치하고라도 화해와 협력의 신데탕트기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소간의 수교가 양국간의 보다 성숙한 관계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수교이전에 몇가지 문제에 관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의 공동책임자인 소련은 당시 그들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1천만 이산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소련은 이산가족들에 대한 응분의 유감표시를 해야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83년 KAL기 격추사건의 희생자및 유가족에 대한 소련측의 유감표명도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함께 소련이 85년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추진하면서 동구권에 대한 군사지원을 격감시켰음에도 불구,오직 대북한군사지원만은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있어야할 것 같다. 또 북한의 철저한 폐쇄정책을 개방으로 유도하지 못해 긴장이 지속되고 북한주민생활이 피폐화된데 대해서도 소련은 일종의 공동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여하튼 지난 65년 한일기본조약체결당시 그때까지 양국간에 걸려있던 현안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지금까지도 재일동포3세의 법적지위문제,사할린교포송환,원폭피해자및 태평양전쟁희생자에 대한 보상문제등 중요현안들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한일관계를 교훈삼아 한소관계의 개선에 너무 서두르다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정부관계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이같은 문제해결은 양국외무부를 통한 정통외교로 차분하게 추진했으면 한다.
  • 한반도에 새 평화기류 기대/노대통령친서ㆍ고르바초프 답신의 함축

    ◎양국정상 공감대 형성… 연내 수교 가능성/5월 대표단 방소때 일정 매듭 지을듯/수교ㆍ경협 우선순위 줄다리기 예상도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사이에 주고받은 친서 및 답신내용이 30일 노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의 청와대 회동에서 밝혀짐에 따라 한소간의 연내 수교가 가시권내에 들어왔다. 특히 양국 정상간의 친서 및 답신은 양국관계 정상화에 대한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양국 정상간에는 이미 국교수립 원칙에 사실상 합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대통령은 친서를 통해 남북한 관계개선 의지를 천명하면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한소양국의 공동이익 증진을 위해 한소관계 정상화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이제 그 실천의 시기가 되었다』며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우리측의 강력한 의지를 전달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신에서 『노대통령의 양국관계 증진과 관계정상화에 대한 견해에 전적인 공감을 표한다』고 밝혀 양국간 국교수립에 아무런 이의가 없음을 분명히했다. 노대통령의 친서 및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답신은 모두 북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박철언정무1장관에 의해 전달되고 전달받았다. 박장관은 이번 방소기간 중 부르텐스 소련공산당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등 소련측 정부관계자와 22,26,27일 등 세차례에 걸쳐 정부차원의 공식접촉을 가졌는데 노대통령의 친서는 첫번째 접촉에서 전달됐고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답신은 두번째 접촉에서 전달받았다는 것이다. 미수교국 정상간의 의견교환은 외교적으로도 드문 사안일 뿐만 아니라 양측간의 관계 접근의사가 합일점을 찾지 못하면 불가능하다는 일반론에서 볼 때 양국 관계정상화 장정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양국정상간의 의견교환에서는 그러나 『양국간 국교수립이 빠른 시일내에 달성돼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합의했으나 언제 양국간 수교의정서에 서명하고 상주대사관을 설치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수교예정 스케줄에 대한 합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번 김최고위원의 방소를 계기로 양국간 공식접촉의 물꼬를 튼 만큼 5월 중에 범정부차원의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 양국간 정치ㆍ외교적인 현안을 비롯,경제ㆍ문화ㆍ과학 등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협력증진 방안까지도 논의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정부대표단의 단장은 이번 방소를 통해 소련측 고위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넓힌 데다 소련측과 상당한 고위채널을 보유하고 있는 박철언장관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대표단의 5월 모스크바행은 따라서 양국간 수교일정을 거의 마무리지을 것이 분명하고 소련측이 강력히 원하고 있는 우리 민간기업의 대소 진출을 위한 전제조건인 투자보장협정ㆍ이중과세협정ㆍ무역협정 등 투자에 따른 「안전판」 마련을 매듭짓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사실 소련측은 지금까지 대한관계 개선에 있어 「선경제협력 후국교수립」이라는 노선을 견지,경협 증진에 보다 주안점을 둔 반면 우리측은 『경협을 무기로 이번 기회에 곧바로 국교수립까지 달성하자』는 입장,즉 정치ㆍ외교적인 관계개선에 체중을 실어왔었다. 이러한 현상은결국 한소간의 수교시기는 양국간 실질적인 경협의 폭에 따라 좌우됨을 의미한다. 정부관계자들도 이같은 점을 충분히 인식,「수교」와 「경협」이라는 양저울을 적절하게 조율해 대소관계개선 외교의 이니셔티브를 잡아 나가겠다는 전략을 짜놓고 있다. 양국관계 개선과 관련,이번 방소에서도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지만 상호 상주대표부 설치가 양국간 주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최호중 외무부장관은 30일 기자와 만나 『이번 방소에서 상주대표부 설치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소련측이 강력히 원할 경우 대표부 설치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는데 바로 이점은 대표부가 현재 양국간에 설치돼 있는 영사처보다 격상되고 상주대사관과 거의 맞먹는 수준의 외교적 특권을 향유만 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무부의 고위당국자가 이와 관련,『소련측이 수교직전 단계로 상주대표부 설치를 제의해 온다면 충분히 검토하겠지만 대표부의 성격이 ▲대표부의 장은 대사여야 하고 ▲정무ㆍ영사 업무는 물론 협정체결권과 외교교섭권을 가져야 하며 ▲빠른 시일내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이 전제돼야 한다』고 밝혀 주목되고 있다. 이를테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대표부를 설치할 경우 대표부의 수준은 지난 88년 당시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 합의 때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대표부 설치가 오히려 수교의 촉진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다른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에서도 그랬듯이 영사관계나 대표부 설치 등 중간단계 없이 곧바로 수교로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여하튼 양국 정상간 공감대 형성을 계기로 오는 5월부터 본격화할 양국 정부간의 공식수교 교섭은 한소외무장관 회담을 거쳐 최종 마무리되어 연내에 양국간 수교의정서에 대한 서명이 이뤄질 전망이다. 이럴 경우 수교를 기념하는 노대통령의 소련방문과 함께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내년 4월경 방일에 이은 한국방문도 조심스럽게 점쳐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아직까지 「장미빛 기대」일 수 밖에 없다. 우리측에서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경우 오히려 대소관계 정상화 일정이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음을 외교 관측통들은 지적한다. 또 이러한 조급함은 양국관계 개선의 주도권을 완전히 소련에 빼앗겨 우리측은 수교교섭상 입지가 상당히 불리할 수 밖에 없다고 이들은 설명한다. 특히 우리가 소련과 수교를 맺는다 해도 소측이 40년 넘게 맹방관계를 유지해온 북한을 쉽게 저버리지는 못한다는 점과 소련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움직이는 초강대국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명백히 인식해야 할 것같다.〈한종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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