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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풍’ 김대업동생 의문사위 채용 한나라 “대통령 당선 보은” 비난

    지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의혹을 제기해 이른바 ‘병풍’ 파문을 일으킨 김대업씨의 친동생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채용되자 한나라당이 맹비난하고 나섰다. 군의문사위 관계자는 이날 “상근 조사전문위원 3차 모집 전형에서 최종 합격한 김모씨가 김대업씨의 친동생”이라며 “1년 계약인 ‘가급’으로 채용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특히 김씨 동생이 의문사위의 채용 자격요건과 달리 의문사 조사와 관련한 경력이 사실상 없는 것으로 전해진 것과 관련,“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데 대한 보은성 채용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계진 대변인은 구두논평에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대통령 직속 기관에 채용한 것은 김대업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보은의 채용을 한 게 거의 확실시된다.”고 주장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서울대 총장후보 이장무·조동성교수

    서울대 새 총장 후보로 1위 이장무(61·전 공대학장),2위 조동성(57·전 경영대학장) 교수가 뽑혔다. 서울대는 11일 치른 2차 결선투표 결과 “이장무 교수가 524.7표(35.8%)를 획득해 1위를 차지했고 490.3표(33.4%)를 획득한 조동성 교수가 2위,450.9표(30.8%)를 얻은 오연천 교수가 3위가 됐다.”면서 “학칙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에 1·2위 교수를 총장 후보로 추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제청을 받아 두 명의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총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서울대 총장 직선제가 도입된 1991년 이후 지금까지 다섯 차례 모두 1위 후보가 총장에 임명됐다. 이날 결선투표에는 선거권을 가진 서울대 교수 1622명과 교직원 990명(교직원 1명의 표는 교수의 10분의 1로 계산) 가운데 교수 1377명, 교직원 910명이 참여했다. 총 유효투표수는 1468표, 투표율은 88%다. 이번 선거에서는 서울대 최초로 총장 선거에 참여한 교직원들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투표에 참여한 직원 91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467명이 이장무 교수에게 표를 몰아줬다. 조 교수에게 표를 준 직원은 163명에 불과했다.1위와 2위의 차이 34.4표는 실질적으로 직원들의 표에서 갈렸다. 이보다 앞서 치러진 1차 투표에서도 교직원 표에 의해 1위와 2위가 뒤바뀌는 등 교직원들의 표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바 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이장무 교수 온화한 학자적 외모를 지녔지만 별명은 ‘마징가’로 통할 정도로 당찬 성격이다.1997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이나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만큼 조직 융화에 뛰어나다는 평.‘끈기’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의 난제들을 풀어가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듣는다.2002년부터는 한국과학재단과 삼성이건희장학재단 등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총장에 임명되면 서울대의 뛰어난 연구 역량을 집중시켜 2015년까지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낼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장무 교수의 친동생은 이건무(59)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서울 출생(61세) ▲1967년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1970∼75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공학 석·박사 ▲1976년∼ 서울대 공대 교수 ●조동성 교수 경기중·고교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8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직을 맡아오고 있다. 단정한 신사 같은 느낌을 주는 조 교수는 2001∼2003년 경영대 학장을 지냈고, 현재는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 이사 및 모금위원장을 지내고 있는 등 다양한 외부 활동도 펼쳐 오고 있다. 친화력이 높다는 것이 조 교수의 가장 큰 장점. 조 교수는 서울대 기획부실장(1988∼1990년) 재임 당시 서울대 발전기금 설립을 주도했고 이어 발전기금 초대 상임이사로서 서울대 540억원 기금 조성에 공헌한 바 있다. 조 교수는 1위를 차지한 이장무 교수와 끝까지 경합을 벌이는 등 막판까지 선전했다.▲서울 출생(57세) ▲1971년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 졸업 ▲1973∼76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박사 ▲1978년∼ 서울대 경영대 교수
  • 한지붕 밑에 살고 있는’1男 2女’의 종착역은

    ‘한 지붕 아래 1남(男)2녀(女)가 함께 오순도순 동거했다.그러나 사내는 매일 억병으로 취하거나 야바위판을 기웃거리는 그런 양아치와 같은 부류였다.두 여자는 힘을 합해 그 사내를 열명길로 보내려고 했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살인 미수에 그쳤다.’ 중국 대륙에 두 아내가 짜고 합심해 노름하고 술에 취해 괴롭히기만 하는 백수건달 남편을 살해했으나 요행히 살아남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동부 장쑤(江蘇)성 창저우(常州) 진탄(金壇)시 진청(金城)진에 살고 있는 20대 중반의 남성은 최근 큰 아내와 작은 아내가 각각 칼로 찌르고 몽둥이를 때리는 것을 그대로 맞아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광주일보(廣州日報) 인터넷 신문인 대양(大洋)망이 9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두 아내에게 살해당할 뻔한 장(蔣)씨는 올해 25살로 놈팡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백수건달이었다.하지만 여자 낚는 솜씨만은 대단해 한 지붕 아래 두여자와 함께 동거하는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 ‘1남2녀’의 황당한 동거생활을 해온 이들 세 사람이 만나 악연이 시작된 것은 2003년 8월,남부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시 한 완구공장에서 같이 일을 하면서부터. 그당시 ‘큰 아내’로 통하는 장메이(張美)씨는 17살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구이저우(貴州)성을 떠나 이곳에 와 돈을 벌고 있었다.‘작은 아내’로 불린 저우훙(周紅)씨는 16살로 장씨와 같은 구이저우성 출신이다.이들은 고향을 떠나 우연히 기찻간에서 만나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었다. 같은 직장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장씨와 그가 먼저 사귀었다.서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얼마되지 않아 장씨는 아이를 가졌다.저우씨는 당시 장씨에게 ‘큰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장씨가 임신을 하자 그는 저우씨에게 눈을 돌렸다.그는 저우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 공세를 폈다.결국 저우씨도 선물 공세에 무너져 동거에 들어갔다.두 지붕 한 남자-두 여자의 동거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조금 지나 장씨는 아이를 낳았다.딸이었다.장씨는 기분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우씨를 친동생처럼 생각해 그와 저우씨의 동거를 눈감아주기로 했다.하지만 장씨는 참을 수가 없었다.저우씨가 그의 사랑을 빼앗아버릴 것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한 지붕 아래에 한 남자-두 여자가 동거하는 것.장씨의 제의에 그와 저우씨도 동의를 해 세상에서 보기 드문 ‘한 지붕 아래 한 남자-두 여자’가 동거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저우씨도 아이를 낳았다.아들이었다.아이를 낳은 순서에 따라 장씨는 ‘큰 아내’,저우씨는 ‘작은 아내’로 불리게 된 소종래이다. 이들은 동거를 하면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분담했다.‘큰 아내’ 장씨는 집안에서 두 아이를 맡아 기르고,저우씨는 의류공장에 취업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장씨는 놈팡이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마작을 하거나 억병으로 취해 주정을 하거나,야바위판에 끼어들어 돈을 잃어 두 여자를 괴롭혔다. 두 여자는 그가 없을 때마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하고 통곡을 하곤 했다.그를 버리고 집을 떠나려고 여러번 결심을 했지만,재롱을 떠는 두 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 떠날래야 떠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지난 1월 5일 저우씨가 속옷을 사와 장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잔뜩 술에 취한 그가 들어오자마자 저우씨의 귀싸대기를 십수차례나 때렸다.그녀는 그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이때 이들 두 여자는 그를 죽이려고 결심했다. 두 여자는 차에 독을 탄 뒤 먹이려고 생각했으나,겁이 많아 그리 쉽지 않았다.그래서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생각되는 칼과 몽둥이로 해결하려고 기회를 엿봤다.이를 위해 먼저 두 아이를 구이저우 고향으로 보냈다.만일 실패하면 장씨가 모두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고 저우씨는 남아 두 아이를 맡아 키우기로 하고서…. 1월 11일,그가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돼서 집으로 돌아왔다.이때를 놓치지 않고 장씨는 몽둥이로 때리고 저우씨는 칼로 찔렀다.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중상을 입히는데 그쳤다. 술에서 깨어난 그는 곧바로 도망을 가 죽음은 모면했다.두 여자는 공안에 붙잡혔다.지난 4월말 장씨는 고의살인죄(미수)로 5년 6개월,저우씨는 5년형을 선고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부적절한 관계는 불행만 자초할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 준다. 온라인뉴스부
  • ‘가구 본고장’ 伊 진출한 한국침대

    |밀라노(이탈리아) 서재희특파원| “세계 가구 전시장인 이탈리아에 침대 전문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침대만은 꼭 전문 회사에서 사도록 만들겠습니다.” 침대 전문회사인 에이스침대와 시몬스침대가 함께 자사의 고유 기술을 접목한 고급 제품으로 ‘가구의 본거지’ 이탈리아 공략에 나섰다. 두 회사는 6일(현지시간) 밀라노 인근 메다에 있는 가구업체 ‘자나(ZANA)’ 전시장에서 진출 설명회를 가졌다. 이탈리아는 ‘가구의 본토’ ‘멋의 나라’여서 두 회사의 진출은 의미가 크다.‘자나’는 지난해 두 회사와 현지 가구업체인 미노티 세디에가 함께 설립한 침대 생산 전문업체다. 에이스와 시몬스는 형제가 운영한다. 에이스는 안성호(39) 사장이, 시몬스는 친동생인 안정호(36) 사장이 경영을 이끌고 있다. 안성호 사장은 “지난 1년간 준비를 거쳐 5월 중순 본격 판매에 나선다.”면서 “23명의 에이전트(총판)와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올해 매출 목표는 100만유로로 잡았다. 이를 위해 침대 틀(프레임) 16개 모델과 색상별 80여종의 제품을 100여개 대리점을 통해 선보인다. 현지 판매가는 한화로 250만∼300만원대이다. 안 사장은 “한국산 모델을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이 현지 취향에 맞게 새로 디자인했다.”면서 “현지 가구 관계자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두 회사는 ‘전문성’에 무게를 실었다. 안정호 사장은 “이탈리아에 수많은 가구회사가 있지만 침대 전문회사는 거의 없다.”면서 “이곳 회사들은 일년에 침대 신상품을 한 두개 내놓지만 우리는 한해에 많게는 100개까지 새 제품을 개발하는 만큼 제품 생산력에서 앞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에이스의 개발능력, 시몬스의 마케팅능력, 미노티의 현지 사업감각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형제의 용단에는 부친 안유수(72) 에이스침대 회장의 뜻도 크게 작용했다.30여년 전부터 이탈리아 진출을 꿈꿔온 안 회장은 30년 친구인 지오바니 미노티 회장을 통해 그의 아들이자 자나 대표인 스테파노 미노티(39)를 두 아들에게 소개했다.‘스타벅스’가 발 붙이기 힘들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곳이지만 두 회사는 이곳에 ‘한국 매트리스 공장’을 세울 계획도 갖고 있다. 한국의 매트리스 기술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s123@seoul.co.kr
  • [경제플러스] 최재원 부회장 SK가스 공동대표에

    최태원 SK㈜ 회장의 친동생인 최재원 SKE&S(옛 SK엔론) 대표이사 부회장이 SK가스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됐다.SK가스는 최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돼 김세광 대표와 함께 공동 대표를 맡게 됐다고 24일 공시했다. 최 대표는 미국 브라운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재료공학 석사,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 [마이너리티 리포트] (6)외국인 이주노동자

    [마이너리티 리포트] (6)외국인 이주노동자

    저는 올해 서른다섯살 된 이주노동자입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왔죠. 이름은…, 그냥 퐁(Pong)이라고만 할게요. 불법체류자여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산업연수생으로 합법적으로 왔는데 3년이란 체류 허가기간이 지나 버렸어요. 불안한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제 꿈을 위해 좀더 많은 돈을 여기에서 벌어야 해요. 오늘은 제 얘기보다는 동생들의 딱한 사정을 말해 볼까 해요. 아이들의 이름은 홍(24·Ha Van Hung)과 콩(21·Nguyen Thanh Cong). 친동생은 아니지만 같은 하노이 출신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려고 의형제를 맺었죠. 동생들은 저와 달리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합법 체류자입니다. 홍의 아버지는 택시운전사, 콩의 아버지는 의사예요.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한국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지닌 평범한 젊은이들입니다. 지난달 말이었습니다. 함께 플라스틱 사출성형업체에서 일하는 홍과 콩이 “큰일났다.”고 사색이 돼서 달려 왔습니다.“형, 우리 추방당하게 생겼어. 사장이 우릴 쫓아내서 불법체류자가 됐대.”그들의 인생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빚을 내 인력송출회사에 500만원 이상 주고 한국에 온 것인데. 저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도움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로 달려 갔습니다. ●“저질 인간쓰레기야.” “홍과 콩은 인간쓰레기예요. 온갖 이유를 만들어 이 회사 저 회사 전전하면서 한국기업에 피해를 주는 악질 철새들이에요. 쓰레기들은 출국시켜야 한다니까요.” 고용안정센터의 외국인담당 공무원은 동생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주러 찾아간 인권센터의 활동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외국인 노동자 담당 공무원이 할 소리입니까. 법규는 바뀌었지만 일선에 있는 공무원들은 철저히 사장님들의 대변인 노릇을 합니다. 실상은 이랬습니다. 동생들은 평일은 물론 토요일에도 규정된 시간을 넘겨 1시간 이상 잔업을 했습니다. 물론 초과근무 수당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합법체류자라고 해도 매년 근로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죠. 문제는 토요일이었어요. 저녁 7시까지 일을 했는데 사장이 잔업을 더 하라고 시킨 모양입니다. 분노가 폭발한 베트남 노동자 6명이 전원 잔업을 거부했는데 이 일로 사장의 눈 밖에 났죠. 회사는 고용안정센터에 동생들이 지시를 어기고 멋대로 일하기를 거부했다며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강제출국 조치를 요청했습니다. 서류에는 ‘이유 없는 작업 거부자로 추방’이라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회사가 ‘허위보고’를 했지만 고용안정센터에서는 사실 확인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린 겁니다. ●“법이 변했다고요. 현실은 변한 게 없어요.” 다행히 우리를 위해 애써줬던 그 인권센터 선생님 덕분에 동생들은 추방 대신 사업장 변경 조치를 받았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죠. 살인적인 야근에 잔업을 하다가도 사장에게 잘못 보여 출국당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거든요. 외국인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법률책에만 나오는 얘기일 뿐이죠. 동남아시아 같은 데서 온 사람들은 주말이건 휴일이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일만 해야 한다고 대부분 사장님들은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합법적인 신분인 제 동생들이 이럴진대 저 같은 불법 이주노동자들은 오죽할까요. 열심히 일해도 임금을 떼이기 일쑤고 추방을 각오하지 않는 한 두드려 맞아도 꾹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자 이주노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 회사들이 우리를 쓰는 것은 당연히 임금이 싸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지 기계나 노예는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도 예전엔 우리처럼 외국에 나가서 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번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 보시면 어떨까요. ●만(萬)자 돌림 삼형제의 소망 얼마 전 저희 삼형제는 그 고마운 인권센터 선생님한테서 한국이름을 얻었어요. 저는 만수, 한자로는 ‘萬壽’로 쓰지요. 오래 살라고 지어 주셨어요. 홍은 ‘오랫동안 변치 말라.’고 만석(萬石), 콩은 ‘오랫동안 이곳에 터잡고 살라.’고 만기(萬基)예요.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에는 좋은 분들도 많습니다. 동생들은 새로 들어간 공장에서 이름 덕을 많이 본다고 하네요. 같이 일하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친근하게 “만석아.”“만기야.” 하고 불러 준다며 좋아하더군요. 저희 삼형제는 이제 함께 삽니다. 한달에 70만원이 조금 넘는 임금으로 주말에 외식 한 번, 영화 관람 한 번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각자 꿈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한국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생들과 함께 좋은 기억을 안고 한국을 떠나고 싶습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피해신고 꺼리다 불익만 키워” 이주노동자들과 관련 인권단체, 민주노동당 등의 ‘노동허가제’ 도입 등 주장에 정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노동부 외국인력고용팀 이상근 사무관을 통해 정부의 입장을 들어봤다. 이 사무관은 “고용허가제는 불법과 합법 여부를 불문하고 외국인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면서 “현재 국내 노동시장을 고려할 때 민노당 등이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노동허가제’는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그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들이 합법적 신분으로 당당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한 덕에 실제로 외국인근로자 인권유린과 근로자들의 사업장 이탈 등 부작용이 뚜렷하게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잔업 강요와 수당 미지급 등에 대해서는 “고용안정센터나 노동부 근로감독관에 신고하는 것만으로 고용주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 신고율은 적은 것으로 안다.”면서 “외국인 근로자들 사이에 정부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런 것들이 스스로 더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 사무관은 “체불임금이나 노동착취 등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것은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물론 국가신인도와 관련이 있는 만큼 문제가 많은 산업연수생제는 예정대로 2007년 폐지할 것”이라면서 “고용허가제로 제도가 일원화되면 부작용이 충분히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전문가에 듣는 ‘독소조항’ 국내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제’와 ‘고용허가제’ 등 두가지 제도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두 제도 모두 인권침해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이주노동자 인권단체와 민주노동당은 대대적인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1993년 11월 처음 시행돼 내년 1월 사라지는 산업연수생제는 출발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지의 민간송출기관이 노동자들을 모아 한국에 보내다 보니 브로커를 통한 수백만원대의 돈거래가 기승을 부리는 등 온갖 비리가 만연했다. 또 이주노동자에 대한 교육을 명분으로 저임금과 인권유린이 심하게 일어나 상당수 노동자들이 사업장에서 이탈, 불법체류자가 됐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내 고용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2004월 8월 시작된 고용허가제에도 개선해야 할 대목이 많다는 지적이다. 현재 고용허가제에서는 ▲회사가 망했을 때 ▲장기간 또는 극심하게 임금이 체불됐을 때 ▲심각한 인권유린과 고용계약 위반이 확인됐을 때에만 사업장을 바꿀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우삼열 사무국장은 “임금의 20% 이상이 지급되지 않아야 심각한 계약위반에 해당한다고 정해놓는 등 황당한 규정이 많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기본 계약기간 3년에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게 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박천응 목사는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해야 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사업주에게 아무런 항의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관련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은 개선안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인구의 1%를 넘어선 시점에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취지다. 이들은 ‘노동허가제’ 실시를 한 목소리로 요구한다. 고용허가제와 노동허가제를 병행하는 싱가포르처럼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허가증을 제공해 그들 스스로 일자리를 고를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최현모 사무국장은 “혈통주의에 따른 편협된 사고로 이주노동자들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는 우리의 의식구조를 바꾸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노동당은 오는 6월 ‘외국인근로자 고용 및 기본권 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노동허가제 시행이 핵심으로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일반 노동허가와 특별 고용허가 이원화 ▲10년 만기 노동비자 발급 등 내용을 담고 있다. 민노당 홍원표 연구원은 “사업주와 내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이해 당사자들이 노사정위원회 형식으로 참여하는 기구를 만들어 실질적인 이주노동권 개선을 논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주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큰 大 믿을 信’ 하면 대신증권을 단박에 떠올린다.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광고 카피가 알반인의 뇌리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만큼 회사의 규모나 역사는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신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여타 대형 증권사와 다른 몇가지 ‘독자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재벌 계열이나 은행 계열이 아니면서 40년간 업계 상위권을 지켜왔다.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이나 은행을 끼지 않은 증권사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속에서도 여전히 ‘빅5’ 안에 든다. 대신증권은 또 선진국형 증권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으로 꼽힌다. 증권사 흑판에 분필로 시세를 적던 시절 최초로 ‘전광판’을 도입했다. 이후 ‘온라인 거래의 최강자’란 명성을 얻었고 사이버 누적거래 1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3세 경영’을 잇게 된다.‘거상(巨商)의 꿈’ 하나로 빈손으로 대신증권을 일군 양재봉(81) 명예회장의 역할을 현재 아들과 며느리, 사위가 잇고 있으며 머지않아 손자가 이 역할을 대물림받을 전망이다. ●빈손 ‘송촌’ 거상의 꿈 양 명예회장은 1925년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호를 ‘송촌(松村)’으로 지었고 훗날엔 이 명칭을 딴 ‘송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거상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은 송촌을 떠나 당시 ‘수재의 집합소’로 불리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5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나주에서 간 유일한 합격자’가 된 양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일본인들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꿈도 키웠다. 그의 첫 목표는 한국은행 전신이었던 조선은행 입사였다. 양 명예회장은 “대학 졸업자들도 번번이 낙방하는 판에 상업학교 재학 중에 그 좁은 관문을 뚫어 자부심이 컸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 때 생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은행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거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장사를 할 기회를 살피며 아이디어만 생기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목포와 나주 일원의 쌀을 사서 부산에 파는 미곡상을 하기도 했고, 양조 사업에도 손을 댔다. 겁없이 뛰어든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다시 조흥은행 신입 은행원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고, 이후 여러 은행을 거치면서도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새 사업 궁리끝에 시작한 극장 사업에서 성공하면서 그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금융업 경영자로서 본격 나선 것은 한일은행 서울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초 무렵이다. 지점장 부임 1년도 안 돼 예금 계수를 2배로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단자회사 설립을 권유받던 양 명예회장은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증권 회사 설립은 그로부터 1년 뒤 일본 방문을 계기로 추진한다. 도쿄에 있던 ‘노무라증권연구소’의 선진적 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돌아오자마자 증권업 진출을 서둘렀다. 당시 정부는 소규모 증권사 난립을 경계해 새 증권회사 설립 허가를 꺼려했다. 양 명예회장은 75년에 직원 11명의 ‘망해가던’ 증보증권을 전격 인수한다. ●망해가던 증보증권 잘나가는 대신증권으로 증보증권은 경영 실적이 형편없는 하위권 회사였지만 그는 ‘꿈에도 그리던 증권회사를 세웠다.’는 생각에 희망에 넘쳐 있었다. 우선 회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신증권’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름을 바꾼 뒤부터 대신증권은 연일 승승장구했다.75년 대기업들이 탐내던 명동 국립극장 입찰에 성공해 ‘주식 투자자들의 베이스 캠프’로 만들었다. 77년 양 명예회장은 대한투자금융 전무이사직을 버리고 대신증권 사장으로 나섰다. 이어 업계 최초로 ‘전광시황 속보판’을 세우는 등 혁신을 거듭한 끝에 업계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성공 가도를 달리던 양 명예회장에게도 암흑기는 찾아온다. 사장 취임 4개월만에 회사 영업부장이 고객과 회사의 돈을 빼돌려 피해자만 100명에 이르는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켰다. 대신증권과 자신의 신뢰에 엄청난 손상을 입힌 사고였다. 그 여파가 얼마나 컸던지 양 명예회장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간 시골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며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다시 증권계로 돌아온 것은 81년. 대신증권의 대주주들이 양 명예회장을 찾아와 쓰러져가는 대신증권을 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가 대신증권 사장에 복귀했을 때, 회사는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다. 그는 “죗값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흐트러진 임직원들을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구두쇠 100일 작전’,‘개미작전’ 등 전 직원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짜냈다. 잘 나가던 대한투자금융 주식을 주고 미원 임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대신증권 주식을 인수, 최대 주주가 됐고, 회사 재건에 ‘올인’했다. 다행히 80년대 중반 국내 증시는 최고 활황의 시기를 맞이한다. 양 명예회장은 대신증권의 회생에 성공해 84년 대신경제연구소,86년 대신개발금융,87년 대신전산센터,88년 대신투자자문,89년 대신생명보험,90년 송촌문화재단,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대신을 명실상부한 종합금융그룹으로 만들었다. ●신뢰 중시 경영으로 IMF 극복 하지만 그에겐 또 한번의 어려움이 닥친다.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연 2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 상황이 발생해 수많은 기업이 어려움에 빠졌다. 대형 증권사인 동서증권, 고려증권이 환매 사태로 하루아침에 부도에 이르면서 ‘재벌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비재벌 단독 증권사인 대신증권에도 이 분위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대신증권은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빚이 없는 상황이었다.90년대 말 펀드 열풍으로 시중의 자금도 증권사로 몰렸다. 하지만 양 명예회장은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 판매를 전면 중지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한다. 예상은 맞았다. 대우그룹 부도, 하이닉스 사태,SK사태 등이 연이어 터지며 회사채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들은 잇따라 위기를 겪었지만 대신증권은 안전한 국공채를 편입한 수익증권만 판매한 덕에 손실을 입지 않았다. 결국 90년대 초반 업계를 대표하는 5대 대형사의 주인이 모두 바뀔 정도로 부침이 심한 증권업계에서 대신증권은 살아남았다. 양 명예회장이 이처럼 오뚝이처럼 일어선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부문에 대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결단력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전산부문이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본 양 명예회장은 전산부문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초기 집중 투자를 통해 온라인거래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로 인해 99년 이후 온라인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자 대신증권은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게 됐다. ●내실화 일군 고 양회문 회장 양 명예회장은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나고, 차남인 양회문(2004년 작고, 당시 53세) 전 회장에게 회사 경영을 물려줬다. 양 명예회장의 4남4녀 중 차남인 고 양 회장은 7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신증권 공채 1기로 입사했다.10년동안 지점영업에서부터 인수, 법인, 자산운용, 기획, 인사 등 증권 전부문에 걸쳐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고 양 회장은 회장 취임후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재무 구조 정비에 나섰다. 생명, 정보통신 등을 계열 분리하고 대신증권, 투신운용, 경제연구소 중심으로 그룹을 정리했다. 그는 2002년 초 폐암진단을 받은 후 2004년 작고 때까지 약 3년간 초인적인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신증권이 외국인 지분율이 가장 높은 내실있는 회사로 재탄생한 것은 고 양 회장의 공이 크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양 회장 작고 이후 대신증권을 이끄는 주역은 고 양 회장의 부인이자 양재봉 명예회장의 둘째며느리인 이어룡(52) 회장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이 회장은 남편이 투병생활을 하던 3년여동안 집중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은 뒤 2004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종종 비교되는 이 회장은 특유의 세심함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 달만에 109개 전 영업점을 순회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뿐만 아니라 강단도 함께 갖췄다. 최근에는 자본통합시장법 제정에 따라 일본의 SPARX그룹과 자본 및 업무 제휴를 통해 향후 종합금융투자회사로의 전환에 대비하고 있다. 대만의 IBTS와 제휴하는 등 외국 금융기관과 국제적인 제휴를 진두지휘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 회장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며 조용히 책읽기를 좋아한다. 남편의 투병 중에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암 관련서적을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서울과학종합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 다녔다. 동기로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SK텔레콤 김신배 사장이 있다. 이 회장과 함께 대신증권의 제2도약을 이끌 인물로는 양재봉 명예회장의 사위이자 차녀 회금(52)씨의 남편인 노정남(53) 현 대신증권 사장이 있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온 노 사장은 지난해 10월 대신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노 사장은 77년 한일은행에 입사한 뒤 29년간 금융업에만 종사해온 탁월한 금융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87년 대신증권에 입사해 영국 런던사무소장·지점장,IB담당임원, 상품운용본부장, 국제본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99년부터 6년 동안 대신투신운용 대표이사로 재직해 왔다. 런던 소재 코리아유럽 펀드의 이사를 지내는 등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신증권의 1대 주주이자 실질적인 대신증권의 차세대 주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은 양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이어룡 회장의 아들인 홍석(25)·홍준(22)씨다. 장남인 홍석씨는 현재 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며, 차남 홍준씨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이다. 홍석씨는 올해안에 대신증권에 입사해 아버지인 고 양회문 회장이 밟았던 것처럼 말단에서부터 시작해 경영 수업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이자 장녀인 정연(27)씨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외국계 컨설팅회사 베어링포인트에서 근무하다 현재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단출한 혼맥… 정략결혼은 없다 양재봉 명예회장은 부인 최갑순(78)씨와의 사이에 고 양 회장 외 3남4녀를 두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연애결혼을 해 평범한 집안에 시집·장가를 갔다. 양 명예회장이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해 정략적 결혼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송촌 회장 및 전 광주방송 회장을 역임한 장남 회천(57)씨는 대구 교육자 집안 출신의 문홍근(58)씨와 결혼했다. 회천씨는 처음부터 대신그룹에 근무하지 않고 대신전기 등 제조업체를 경영했다. 문홍집(56)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이 회천씨의 처남이다. 문 사장은 비즈니스 위크에서 아시아를 이끌 50인으로 선정하기도 한 금융 IT부문 한국 최고의 전문가로 꼽힌다. 대신증권 IT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개발한 온라인거래 시스템인 ‘U-사이보스’는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는 등 전산부문을 한국 최고로 이끈 실력자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인 고 양 회장과 현 이어룡 회장 역시 연애결혼을 했다. 이 회장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부친이 한학자였다. 이 회장 동생인 제봉(43)씨는 대학 교수이고, 제영(41)씨는 대신증권 IB 1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남인 용호(48)씨는 코스닥 상장 창업투자회사인 대신개발금융회장과 아인스 회장을 역임했다. 아인스는 세계 유명 건축물 모형 전시시설인 경기도 부천의 아인스월드를 운용하는 회사다. 서울시 공무원 집안의 조선미(45)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두고 있다. 4남인 정현(37)씨는 현재 코스닥 상장 금융 IT전문 회사인 대신정보통신 전무이사로 있다. 부인 이현아(30)씨는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의 손녀이자, 민주당 이정일 국회의원의 딸이기도 하다. 장녀 영애(59)씨는 대학때 연애를 통해 만난 나영호(60) 현 경원대 겸임교수와 결혼했다. 재무학 박사인 나씨는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2005년 은퇴했다. 차녀 회금씨와 노정남 대신증권 사장도 연애결혼했다. 노 사장은 한국행정연구원장을 역임했던 노정현(77) 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의 친동생이다. 3녀 미경(42)씨는 이시영(46) 현 중앙대 교수와 결혼했다. 이시영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받은 뒤 중앙대에서 사회과학대학 상경학부 교수와 동대학 국제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의 부친은 전북지사와 공보부 차관을 지낸 이춘성씨다. 4녀 회경(41)씨는 이재원(46) 현 대신정보통신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이 대표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93년부터 금융솔루션 업체인 대신정보통신에 근무하고 있다. s123@seoul.co.kr ■ 슬로건 ‘큰大 믿을信’ 어떻게 지었나 대신증권을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은 ‘큰大 믿을信’이라는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양재봉 명예회장의 작품이다. 양 회장은 증보증권을 인수해 새 회사를 만들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신념으로 ‘대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큰 대 믿을 신’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86년부터다. 당시 증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증권사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양 회장은 주식 투자의 대중화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홍보활동을 강화했다. 86년 3월 처음으로 TV CF를 제작했지만 시청자에게는 크게 파고 들지 못했다. 새로운 홍보전략을 구상하던 양 회장은 어느 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열차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소리가 매우 경쾌하다고 느낀다. 그는 “마치 옛날 서당에서 ‘하늘천 따지’하고 천자문을 읽을 때의 리듬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곧 우리 정서에 잘 맞는 3·3조 가락과 닮았다는 생각에 바로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후 TV 광고에는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슬로건을 빠짐없이 사용하게 됐다. 이 슬로건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증권회사 하면 ‘큰大 믿을信=대신증권’을 떠올리게 할 만큼 히트했다. 이후 ‘큰大 믿을信’은 20여년간 대신증권 광고의 슬로건으로 사용되면서 대신증권을 증권명가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s123@seoul.co.kr ■ 금융통 대거 배출한 ‘증권계 사관학교’ ‘증권업계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신증권은 금융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인물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주택은행장과 중소기업은행장을 지낸 박동희(76)씨, 정해왕(59)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 김정태(59) 전 국민은행장, 이강원(56) 한국투자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986년 대신경제연구소에 대표이사로 입사한 박 전 중소기업은행장은 대신개발금융, 대신투자자문, 대신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대신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정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미국 켄터키 주립대에서 경영대 조교수로 있다가 대신경제연구소 상무이사로 입사,89년부터 4년간 대신경제연구소를 이끌었다.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도 대신증권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조흥은행 출신인 김 전 행장은 양재봉 명예회장이 설립한 대한투자금융에 74년 스카우트됐다. 양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대신증권 비서실장으로 발령났고,80년 34세의 나이로 대신증권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강원 한국투자공사 사장은 89년 대신증권 국제영업담당 상무이사로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퇴사 후 아시아개발은행을 거쳐 외환은행장, 굿모닝 증권 사장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밖에 이준호(61) 대한화재 사장은 77년 대신증권 종합기획실 실장으로 입사한 뒤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94년에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한(52)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89년 대신증권에 입사한 뒤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사직에 올랐다.97년까지 대신증권에서 국제본부장, 인수본부장, 기획본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증권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s123@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정려원 “해피 바이러스 퍼뜨릴래요”

    정려원 “해피 바이러스 퍼뜨릴래요”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싶어요.” 가수에서 연기자로 완전 전업한 정려원에게 2005년은 즐겁고도 쓰라린 한 해였다.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최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한 축을 담당하며 연기자로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가을 소나기’에서 끝없이 추락했다. 적어도 숫자를 따지면 말이다. 그녀를 향한 첫 질문은 역시 지난해 롤러코스터 분위기에 대해서였다. 정려원은 “마음을 최대한 비우고 있다.”면서 “노력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연기하는 자체가 너무 좋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선물’을 받고 있다는 설명. 거기에 시청자 사랑까지 받는다면 덤으로 주어지는 ‘보너스’라고 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할 뿐이라며 다소 짧아진 머릿결을 쓸어올렸다. 모든 시청자들을 전부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며 정신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13일부터 시작하는 MBC 새 월화미니시리즈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연출 표민수, 극본 정유경, 제작 김종학프러덕션)에서 이혜수와 김복실,1인 2역을 맡았다. 젊은 영화감독 최승희(김래원)와 연인이었던 부잣집 딸 혜수는 첫 회에 자동차 사고로 숨진다. 복실은 혜주의 친동생이지만 곡절 끝에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난 밝고 털털한 처녀. 승희는 우연히 복실을 만나게 되며 아픔을 보듬게 된다. 정려원이 이번 작품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복실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자신의 인생 목표와 닮았기 때문.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한 기운을 퍼뜨리는 게 그것이다. 마치 맞춤형 옷을 입게 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복실이를 연기하며 팬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싶다는 바람이다. 복실은 강원도 산골에서 자라난 캐릭터. 때문에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등을 보며 사투리 연습도 많이 했다. 실제 촬영장에서도 사투리 대사 때문에 배꼽 잡을 정도로 웃음꽃이 피었다고. 하지만 코믹 분위기로 흐를 것 같아 그냥 평범한 대사 톤으로 가기로 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주 앞서 시작한 KBS ‘봄의 왈츠’와 경쟁해야 한다. 이 작품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을 같이 했던 다니엘 헤니가 나온다. 헤니나 현빈, 김선아 등과 가끔 통화나 문자로 격려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현빈이 무슨 드라마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자 “본방은 ‘넌’를, 재방은 ‘봄’를 보라고 했다.”며 웃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아침을 먹자] 군침 돌게하는 상큼한 봄나물

    [아침을 먹자] 군침 돌게하는 상큼한 봄나물

    서울신문과 CJ가 함께 진행하는 ‘아침을 먹자’ 이번 주 식단은 상큼한 봄나물을 마련했습니다.CJ의 한식 레스토랑 ‘한쿡’에서 냉이, 달래, 풋마늘대로 만든 도시락을 배달했습니다. 조리법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 도움말 김영배 한쿡 조리개발팀장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냉이 나물 재료:냉이(300g), 된장 소스 75g(된장, 다진파, 간마늘, 참깨, 참기름, 소금, 다시다 육수) 1. 냉이는 뿌리 부분을 칼로 다듬고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30초간 데친다. 2.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뒤 물기를 제거하고 소스에 무쳐 그릇에 담는다. ●풋마늘대 무침 재료:풋마늘대 200g, 초고추장 50g 1. 풋마늘대는 깨끗이 손질해 2cm 간격으로 자른다. 2.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1의 풋마늘대를 넣고 2분 정도 데친다. 3. 데친 풋마늘대는 찬물에 넣어 깨끗이 씻은 뒤 물기를 제거한다. 4. 초고추장에 무쳐 그릇에 담는다. ●원추리 나물 무침 재료:원추리 300g, 고추장, 된장 소스 40g(고추장, 된장, 다진파, 간마늘, 깨소금) 1. 원추리는 뿌리 부분을 자르고 3㎝ 간격으로 자른다. 2. 자른 원추리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은 뒤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넣고 1분간 데친다. 3. 데친 원추리 나물은 찬물에 넣어 깨끗이 씻은 뒤 물기를 제거한다. 4. 고추장, 된장 소스에 무쳐 그릇에 담는다. ●씀바귀 재료:씀바귀 150g, 고추장 소스 40g(고추장, 고추가루, 깨소금, 식초, 다진파, 다진마늘, 설탕) 1. 씀바귀는 누런 잎을 떼고 다듬어 찬물에 담가 양손으로 비벼 씻은 뒤 4cm 크기로 자른다. 2. 소금을 넣은 끓는 물에 2분간 데친 뒤 찬물에 담가둔다.(쓴맛을 없애기 위해 하루정도 담근다. 단 한두번 정도 물을 갈아준다.) 3. 씀바귀는 물기를 제거한 뒤 고추장 소스에 무쳐 그릇에 담는다. ●달래 무침 재료:달래, 간장 소스(간장, 설탕, 다진 홍고추, 풋고추, 참기름, 후추가루, 간마늘, 깨소금) 1. 달래는 윗부분을 손질한 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는다. 2. 씻은 달래는 4㎝ 크기로 자른 뒤 그릇에 담고 소스는 따로 제공한다. ■ 친언니처럼 저를 사랑하던 언니께 민영애(서울 중랑구 묵1동) 어머니가 없는 제게 엄마 같이 절 아껴주던 언니가 있었습니다. 봉제공장을 다니며 야학하러 다니던 시절.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된 지숙 언니는 절 친동생처럼 예뻐해 줬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거의 밤마다 배달해 주었고 생일엔 잡채에 갖은 음식, 앙증맞은 카드 한 장을 기숙사로 가져왔습니다. 친구들의 시샘 어린 눈빛을 언니와 나의 웃음으로 녹여 버렸었지요. 얼굴도 곱고 마음도 천사처럼 맑은 언니였습니다. 힘들었던 지난 날을 꽃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준 언니에요. 이름은 윤지숙. 여름 아침에 돌담 밑에 수줍게 피어 있는 봉숭아 꽃을 닮은 언니였습니다. 나이는 그때 당시 마흔이 조금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주말이면 늘 언니네로 절 초대해 맛있는 걸 만들어주며 제 외로움을 녹여주었어요. 엄마가 없는 제게 엄마가 돼 주겠노라 약속했던 지숙언니. “다음에 영애 네가 아기를 낳으면 네 산후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내가 해줄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언니를 끌어안고 얼마나 많은 행복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지숙언니가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우린 자주 만나질 못했습니다. 가끔 찾아갔지만 구멍가게 같은 슈퍼를 하며 장사가 안 돼 무척이나 힘들어했어요. 언젠가부터 연락이 잘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언니와의 연락이 끊기고 전 결혼을 했습니다. 첫아이를 갖고 입덧이 얼마나 심했던지 석 달동안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엄마 같던 지숙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언니의 얼굴을 생각하며 소리없이 눈물 흘렸어요. 아이를 낳던 날. 시댁 부모님도 친정 부모님도 계시지 않았던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고 둘이 서로 “축하한다, 힘내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와 셋이 껴안고 “꼭 행복하게 살자.”는 맹세를 하며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언니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안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아이가 크자 제일 먼저 제가 찾아간 곳은 언니네 슈퍼였습니다. 옛 기억을 되살려 힘들게 찾아 간 그곳엔 이미 다른 주인이 앉아있었습니다.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더군요. 언니에게 아이를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몇달 전 지숙언니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쑥쓰러운 마음에 아직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아침을 선물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네요. ■ 식사도 못하고 출근하는 남편이… 전수미(서울 강서구 방화2동) IMF 커플 1호라고 자칭 떠들고 다니던 우리 부부. 그때보다 더 힘들어졌지만 남편은 “더 열심히 일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자기일을 펼친지 5년째 접어듭니다. 힘들다는 말도 너무 식상해서 안하고 산 지 오래입니다. 입덧 하는 저 때문에 아침을 스스로 대충 챙겨 먹더니, 아예 안먹고 일찍 잠 깨울까봐 몰래 빠져 나갑디다. 아이를 낳고 돌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아침은 커녕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도 봐주기 어렵네요. 어려워도 우리 딸들 덕분에 언제나 즐겁게 지내고는 있지만 항상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남편의 사무실에 훌륭한 아침을 배달해 주고 싶네요. 직원들과 작은 행복이나마 함께 했으면 합니다. ■ 병환중인 장인·장모께 사위가… 남기훈(서울 마포구 염리동) 당뇨가 심해 거동이 불편 하신 장인어른, 심장병으로 무척 힘들어 하시는 장모님. 손수 식사하셔야 하는데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맞벌이를 하느라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하고……. 따뜻한 도시락으로 연로하신 장모님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맛있는 식사로 기쁨을 맛볼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 [일요영화]

    [일요영화]

    ●맨 온 파이어(캐치온 오후 3시45분)아카데미상에 무려 다섯 차례나 후보에 올랐고, 두 번을 수상했던 흑인 남자 배우가 있다.7살 때 출연했던 ‘아이 엠 샘’(2001)으로 전 세계 영화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천재 아역 여자 배우가 있다. 덴젤 워싱턴과 다코타 패닝이다. 이들이 4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호흡을 맞춘 액션 스릴러다. 게다가 연출은 토니 스콧. 리들리 스콧 감독의 친동생으로 액션 영화의 장인이다. 대표작으로 ‘탑건’(1986),‘폭풍의 질주’(1990),‘크림슨 타이드’(1993),‘트루 로맨스’(1995),‘에너미 오브 스테이트’(2001) 등이 있다.1987년 A J 퀸넬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를 리메이크했다.‘LA 컨피덴셜’(1997)의 각본가 브라이언 헬겔런드가 각색한 점도 믿음이 간다. 전직 CIA 암살요원이었던 존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은퇴했지만, 과거에 저질렀던 일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다. 자살 유혹 속에서 술에 의지해 삶을 꾸리던 크리시는 오랜 친구 레이번(크리스토퍼 월켄)의 소개로 납치가 성행하는 멕시코시티에서 보디가드를 하게 된다. 그의 임무는 사업가 새뮤얼 레이모스(마크 앤서니)의 9살 난 딸 피타(다코타 패닝)를 보호하는 것.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피타에게 크리시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웃음을 되찾아 간다. 어느 날 피아노 교습을 받고 나오던 피타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고, 이를 목격하고 피타를 구해내려던 크리시는 총격을 당해 쓰러지고 마는데….2004년작.147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조지 오브 더 정글(KBS1 밤 12시30분) 타잔이나 정글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67년 등장해 인기를 모았던 만화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유쾌 상쾌 통쾌한 코미디. 특수효과와 결합한 갖가지 동물들의 연기가 볼 만하다. 조지(브랜든 프레이저)는 갓난 아이 때 비행기 사고로 아프리카 정글에 남겨져 자라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얼슬라는 약혼자 라일(토머스 하든 처치)과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났다가 혼자 뒤처져 사자에게 공격당하지만, 정글의 왕 조지가 구해주게 된다. 얼슬라는 조지와 그의 동물 친구들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한편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 라일은 조지와 맞닥뜨리고는 다투게 되지만, 권총 무장한 라일에게 조지가 당해낼 수 없다. 불법 밀렵을 하던 라일은 감옥에 투옥되고, 얼슬라는 조지를 샌프란시스코로 데려가는데….1997년작.91분.
  • 동생위해 하향할까 싶어 - Q여사에게 물어보셔요 (33)

    [사연] 동생위해 下鄕할까 싶어 15세의 중학교 3년 생입니다. 저의 성적은 뛰어나지도 못하고 별로 못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남을 잘 지도한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래서 동생들도 저를 잘 따릅니다. 저의 원 집은 청주고 아버지는 사업을 하십니다. 상당한 부자예요. 그렇지만 작은엄마(서모)가 청주에 살고 있고 그 소생으로 다섯 꼬마가 있읍니다. 저의 친동생들도 청주에 있어요. 한편 저의 어머니는 제가 서울의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저의 동생들은 배다른 형제에게 꿀리고 풀이 죽는 모양인지 자꾸 저에게 청주로 와달라고 편지질입니다. 가엾은 동생들을 돌보러 내려가야 합니까? 또는 어머니 뜻을 좇아 이곳의 좋은 학교에 들어야 합니까? 제가 사회인이 되어 살곳은 청주입니다. 제가 만일 청주고등학요에 수석으로 붙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다면 서울의 좋은 학교에 붙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서울 답십리 숙이) [의견] 어른과 털어놓고 의논을 착한딸 착한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숙이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작은 엄마보다도 어른인 것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혼자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 숙이의 속마음을 어른들께 툭 털어 놓으세요. 그리고 나면 세가지의 변화가 올 것이에요. 작은 엄마가 조금은 배다른 동생들의 사이를 친절하게 조종하는 거예요. 둘째, 아버지께서도 숙이 친동생들에게 좀 관심을 가질 거예요. 그리고 나면 3년쯤 서울에 떨어져 있어도 동생들 형편이 좀 나아질텐데다가 친어머니의 고집도 누그러져서 淸州에서 공부하는 것을 기쁘게 허락하실지 모르겠네요. <Q> [ 선데이서울 69년 6/8 제2권 23호 통권 제37호 ]
  • 삼성인사 화제의 인물

    삼성 인사에서 ‘별’을 단 최연소 주인공은 삼성전자 박길재(40) 상무보.4월생이므로 굳이 따진다면 30대에 임원이 된 셈이다.1991년 무선연구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임원 반열에 올랐다.98년부터 개발2그룹(무선)부문, 하드웨어 랩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삼성전자의 무선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블루블랙폰2’를 개발했다. 이해진(58) 삼성자원봉사단 단장(사장급)은 이해찬 국무총리의 친형으로 70년 중앙일보 자금부에 입사한 이후 제일합섬과 삼성 비서실 등을 거쳤다. 그에게 자원봉사단장을 맡긴 것은 이건희 회장의 ‘나눔경영’과 ‘상생경영’ 철학을 적극 실천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천방훈(49) 삼성전자 전무는 천정배 법무장관의 친동생이다. 천 전무는 2003년 IMT-2000 단말기용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개발한 공로로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다. 김광태(51) 삼성전자 전무는 지난해 한국PR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PR인’으로 선정된 대표적 홍보맨. 삼성 공채 출신 가운데 홍보업무를 맡아 전무까지 승진하기는 그가 처음이다.1978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85년 이후 20년간 홍보 외길을 걸어왔다. 자칫 딱딱하기 쉬운 IT(정보기술)부문에서 감성이 함께하는 감동 홍보로 유명하다. 특히 97년 외환위기 위기 이후 시작한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 홍보는 그의 공이 크다는 평이다.97년 삼성전자 홍보그룹장을 맡아 언론홍보와 광고, 사회공헌 등 다양한 홍보활동으로 기업 이미지를 끌어올렸다.5년 연속 외국인 정규 임원 선임의 맥은 삼성전자 미국법인에 근무하는 피터 위드폴드(52) 상무보가 이었다. 북미총괄 마케팅 담당으로 마케팅 귀재로 불린다. 특히 그가 기획한 ‘4계절 희망’ 자선행사는 미국 주류 사회의 주요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에서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인 주역이다. 류찬희 김경두기자 chani@seoul.co.kr
  • 한진2세 유산다툼 법정으로

    창업주 고 조중훈 전 회장의 유산분배 문제를 둘러싼 한진그룹 2세들의 다툼이 법정에 갔다. 조 전 회장의 차남인 조남호 한진중공업 부회장과 4남 조정호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28일 “비상장법인 정석기업의 주식 일부를 내놓으라.”며 장남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 및 3억4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조중훈 전 회장 사망 이후 유족들간 법정상속 분할에 따라 잔여재산을 분배하기로 약정했다.”면서 “조양호 회장이 고인의 친동생 조중건씨 명의 주식 4만 8000여주 등을 원고들에게 넘기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한진그룹은 “소송에 휘말린 주식은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조양호 회장이 처분할 수 없다.”면서 “조 회장은 형제간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동생들과 협의할 생각”이라고 전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워커힐 지분 전량매각 왜?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이 보유하고 있던 워커힐호텔 지분을 전량 매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최 부사장은 최근 워커힐호텔 지분 2.23%(17만 8700주)를 주당 4만 1341원에 모두 매각했다. 액수로 환산하면 73억 8700만원에 달한다. 이유가 뭘까? 우선 두 가지로 좁혀진다. 먼저 최 부사장이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해서 지분을 매각했을 가능성이다. 새 사업에 대한 투자나 SK케미칼 및 SKC 관련 투자를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다른 추측은 최근 불거지고 있는 계열분리설과 관련됐다는 것이다. 최 부사장이 매각한 지분은 공교롭게도 사촌 형제이자 최태원 SK㈜ 회장의 친동생인 최재원 SK E&S 부회장이 절반 가량 매입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최 부회장은 9만 1700주를 같은 가격에 매입해 지분율이 1.15%로 늘어났다. SK그룹의 경영구도가 최신원 SKC 회장과 최창원 형제의 화학·생명공학 부문, 최태원·재원 형제의 에너지·정보통신 부문으로 나눠질 것에 대비한 ‘교통정리’의 성격이 짙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최창원 부사장이 최대 주주로 있는 SK케미칼이 지난달 22일 SK㈜ 보유지분 200만주를 처분해 이 회사에 대한 지분율을 0.83%(106만 5826주)로 낮춘 것도 이같은 관측에 무게를 더한다. 현재 워커힐호텔은 최태원 회장이 지분 40.70%(325만 5598주)로 최대 주주이고,SK네트웍스가 9.68%(77만 4226주), 한국고등교육재단이 8.75%(69만 9718주),SKC가 7.50%(60만주) 등을 갖고 있다. 여기에다 최 부사장이 1.15%를 보탬으로써 최태원·재원 형제는 우호지분을 합쳐 59.3%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SK측은 이같은 해석에 대해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SK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측이 워커힐호텔 지분을 이미 절반 가량 확보해 굳이 최 부회장이 추가 매입할 이유가 없었다.”며 “다만 최 부사장이 아무한테나 팔 수 없으니까 대주주간에 서로 매수하게 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GS칼텍스사장 나완배·허진수씨

    GS칼텍스는 21일 신임 사장에 나완배 정유영업본부장과 허진수 생산본부장을 임명하는 등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허 사장은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친동생이다.
  • 고장난 남성 꿰매주고 고쳐주고

    고장난 남성 꿰매주고 고쳐주고

    산부인과 의사는 대부분이 남자다. 어느 면에서는 인기도 남자 의사쪽이 여자 의사보다 더 많다. 반대로 남성만의 비경(秘境)인 비뇨기과를 보는 여자 의사는 없을까. 있다면 남자 비뇨기과 의사보다 더 인기를 모을 것이라는 단순 논리가 적용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선 단 하나뿐인 여자 비뇨기과 의사 - 김진복(金鎭福·36)씨가 지금 서울에서 개업을 하고 있다. 고장난「남성」들이 말하자면 여인의 섬섬옥수(纖纖玉手)로 수리되는 곳.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동 대로변에 있는「대생(大生)의원」이 그 곳이다. 머뭇머뭇 들어서는 청년, 얼굴만 보아도 알아차려 무척 앳돼 보이는 청년이 수줍은 듯 들어선다. 머뭇머뭇 진찰실 안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시쳇말로「왔다」다. 『진찰받으러 오셨어요?』 이 집 여의사의 부드러운 미소 공세가 우선 청년을 안심시킨다. 얼굴을 일별하는 순간, 이 집 여원장은 벌써 모든 것을 간파한다. 청년은 그「지역」의「이상」을 치료하러 온 것이라고…. 성병진료, 포경수술, 정관절제수술 이것이 이 병원 여원장의 주특기인 진료과목이다. 산부인과와 외과도 함께 본다. 『범상한 판단으론 여자 의사에게「그 곳」을 보이는 게 한층 부끄러울 것 같지만 그렇질 않아요. 오히려 엄숙한 분위기가 없어 더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난「여자」가 아니라「의사」고, 그러면서도 분위기는「여성적」으로 꾸밀 수 있으니까요』 전문의는 아니고 GP(일반의). 표방한 진료과목이 비뇨기과, 산부인과인 것뿐이다. 꽤나 뚱뚱한 체구. 『원래 비뇨기과가 아니라 정관절제수술을 좀 공부했어요. 소록도 나(癩)병원에 근무할 때 나환자들의 정관을 절제하는 시술의(施術醫) 노릇을 했죠. 그때 직접, 간접으로 간여한 정관수술이 한 5, 6백 건 될까요? 내친 김에 비뇨기과를 그대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의대 나오자 소록도 자원, 신랑들의 정관절제(精管切除) 맡아 58년에 우석의대를 졸업. 이듬해 7월 소록도 병원 근무를 자원해 남해의 유적지로 내려갔다. 「비뇨기과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스물 일곱의 꽃다운 처녀였다. 그 싱싱한 나이의 처녀가, 아무리 의사의 몸이기는 하지만, 남성들의 그것을 꿰매고 수리하는 작업으로 매일 매일을 소일한다는 게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주위의 눈총이 우선 무서웠다. 『전공할 게 없어 하필이면 비뇨기과냐…』. 측근들도 그녀를 심히 못마땅해 했다. 『정관절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내 나름의 어떤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을 찾아오는 부인들의 많은 수가 인공유산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난 생각했습니다. 가족계획의 실천을 남성 쪽에 돌릴 수는 없을까고요. 그래서 정관절제수술을 우선 연구하게 되었어요』 소록도 병원엔 전국에서 발견된 나환자들이 들어 온다.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들의 계층은 각양각색. 남자 환자와 여자 환자 사이에「로맨스」가 싹튼다. 이들은 결혼을 할 수가 있다. 단, 결혼 직전 남성쪽이 정관절제수술을 받아야 한다. 소록도 병원 개원 이래 지금까지 실천되어 오는 그들 나름대로의 단종법(斷種法). 김진복씨는 여기서「시집도 안 간 나이」에 단종의「메스」를 들었다. 처음엔 부끄러워 환자 얼굴 못봤으나 의료조무원이 옆에서 거들어 준다. 생식기 아래 부분을「메스」로 짼 다음 실오라기 같은 정관을 찾아 낸다. 그것을 다시 잘라 양쪽 끝을 동여매면 수술이 끝나는 것이다. 처음엔 아무리 의사지만 부끄러워 환자 앞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메스」를 쥔 손이 경련을 일으켜 수술을 못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쌓은 이력이 3년여. 6백 명에 가까운 나환자들의 정관수술을 김씨는 손수 해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분명히 정관절제를 받고 결혼을 했는데 그 부부 사이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난 거예요. 모두들 수근댔죠. 「옆치기」(다른 남자와의 정교)임이 분명하다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어요. 끈질기게 캐봤더니…』 「옆치기」가 아니었다. 정관수수을 받은 지 1년 만에 이들 부부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아이가 갖고 싶어졌다. 의료조무원을 매수해 비밀히 정관복원수술을 자기 집에서 실시했다. 마취도 안하고 바느질 하는데 쓰이는 보통 바늘과 실로 잘라진 정관을 이었다. 수술 소요시간 3시간. 참으로 기적 같이 이 수술은 성공되어 그로부터 1년 뒤인 59년에 이들은 아이를 낳았다. 소록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신화. 『이상한 일이었죠. 그땐 복원수술이란 말조차 없던 때거든요? 바느질 하듯 꿰맨 정관이 이어졌다니 놀랄만한 일이었죠』 61년 5월 국립의료원으로 전입된 김진복씨는 몇 달 뒤 공무원 생활을 청산, 선명회 특수피부진료회에서 1년 남짓 근무한 뒤 곧 지금의 자리에다「대생의원」을 차렸다. 62년부터 가족계획이「무시」되면서 그녀는 정관절제 시술의(醫) 교육도 받았다. 시술의사 교육은 서울의대에서 있었는데 물론 그녀는 거기서도 홍일점. 교실엘 들어갔더니 모인 의사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아주머니 무얼하러 오셨죠? 여긴 아주머니가 오실 곳이 못 됩니다』. 하룻밤 실수로 찾아오는 청년을 친동생처럼 여겨 보건소에 등록을 하려 했더니 거기서도「점잖게」사양했다. 『여자가 할 일이 못된다』는 게 담당자의 말. 간신히 시술의 지정을 받았다. 「대생의원」주위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 차 있다. 20 전후의 젊은 공원들이 이 병원의 단골이다. 「어쩌다 당한 하룻밤의 실수」로 온통 구겨진 얼굴을 하고 오는 청년들을 보면 의사라는 직업인으로 보다는 친동기간 같은 애정과 연민을 함께 갖게 된다고. 따라서 김씨의 의료 시술엔 모성애적인 분위기가 있다. 가난한 환자에게선 치료비도 탐하지 않는다는「인술」의 참모습을 그녀는 여성만의 입김으로 실천하고 있다. 『며칠 전에 환자 측근에게서「테러」를 당했어요. 병 고쳐준 대가로는 너무 가혹한 일이죠. 의사 노릇 못해 먹겠습니다』 전송하는 얼굴이 온통 퉁퉁 부어 있다. 한국 유일의 비뇨기과 여의사가「남성」에게서「테러」를 당했다는 것이다. 「테러」이유는 진단서를 요구하는 대로 꾸며 주지 않았다는 것. 남성에게는 더 없는 협조자인 그녀가, 남성에게서 폭행을 당했다니 좀 슬픈 마음이 들었다. [ 선데이서울 69년 5/4 제2권 18호 통권 제32호 ]
  • 그린벨트 무차별 훼손

    그린벨트 무차별 훼손

    한강 상수원보호구역내 그린벨트를 훼손해 불법 임대수익과 시세차익을 챙긴 대학교수, 시의원, 변호사 부인, 연예인 등 부유층 인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경찰은 양평·광주 등 경기도내 5개시에서 이루어진 1954건(약 94만평)의 상수원보호구역내 산지전용 허가 및 개발 과정에서도 이런 식의 불법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30일 현지 주민의 명의를 산 뒤 그린벨트내 산림을 훼손해 전원주택지로 개발, 부당이득을 챙긴 부동산업자 변모(50)씨 등 2명에 대해 산지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부동산 업자 등 3명 구속영장 또 변씨에게 돈을 받고 담당 공무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산지전용 허가 청탁을 한 김모(51)씨에 대해서도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시세차익을 챙길 목적으로 빌린 명의를 이용, 산림을 훼손하고 전원주택 등 마구잡이 개발을 한 지방대 Y교수,6급 공무원, 가수, 변호사 부인, 중소기업 대표 등 부유층 60명도 산지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변씨는 2003년 11월부터 올 7월까지 현지 주민들에게 건당 100만원 정도의 사례금을 주고 명의를 빌렸다. 빌린 명의는 경기도 양평군 그린벨트내 산지전용 허가를 받아 산림 5000여평을 전원주택지로 개발하는 데 이용됐다. 분양을 맡은 변씨는 이 과정에서 50억원을 챙겼다. ●“한강 상수원 심각오염 가능성” 부유층 등 60명이 훼손한 산림은 모두 1만 9700여평으로 객실 400개 규모의 리조트가 들어서고도 남을 면적이다. 경찰은 “훼손지역이 상수원보호구역 내에 있어 한강 상류가 심각하게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이와 별도로 경기도 하남시 그린벨트 내에 축사 등 농·축산 시설 허가를 받은 뒤 이를 음식점 등 상업시설로 불법개조한 시의회 전 의장 조모(63)씨와 시장의 친동생 이모(41)씨 등 친인척과 현 시의원을 포함해 9명을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불법 증개축 5억 임대수입 조씨는 농지 1200평을 콩나물 재배지로 신고한 뒤 건물을 무단 증·개축해 2001년 3월부터 최근까지 5억여원의 불법 임대수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한편 하남시가 2002년 7월부터 3년 넘게 불법 용도변경에 대해 자체단속을 해온 것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에 영향력 있는 인사라고 ‘봐주기 단속’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경찰은 관련 공무원이 향응을 받고 산림훼손을 방조하거나 선별적인 단속만 했다는 정황을 잡고 수사 중이다. 하남시측은 “단속 공무원 숫자가 워낙 적고 관내 축사만 8000여개가 넘어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을 뿐 일부러 봐준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1981년 ‘걱정 반 기대 반’속에 등장한 20대의 젊은 총수가 사반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중년의 관록이 물씬 풍기는 회장이 됐다. 재벌가(家)의 어린 도련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영자로 바뀌었으며, 패기만만하고 저돌적인 성격은 다소 무뎌진 대신 기다림의 여유를 알게 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 25년째. 당시 국내 최연소 10대그룹 총수로, 풋내 나는 젊은이로 알려진 김 회장의 이미지는 싹 가시고, 어느덧 성공한 2세 경영인, 구조조정의 마술사, 의리파 총수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김 회장은 재계에서 2세 경영의 성공적인 착근을 넘어 제2의 창업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여줬다. 선친인 고 김종희 창업주 때보다 규모면에서 2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뤘으니 세간의 평가가 그리 터무니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시련도 적지 않았다. 또 그의 성공을 시대상황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검찰과 악연이 있기도 했으며, 생존을 위해 선친의 손길이 잔뜩 묻은 우량 계열사들을 매각해야 했다. 또 한화의 부활을 알리는 대한생명 인수 때에는 로비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시절에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던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2세 경영인의 실패가 다반사인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이너마이트 김’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겁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이며,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실록 김종희) 한화그룹(옛 한국화약그룹) 김종희 창업주가 얼마나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집착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들이 선뜻 하려 하지 않는 사업이었지만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화약업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통했다.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의 외곬 성격과 경영 방식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확히 터져야 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속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리역 폭발사고.“이리역 폭발사고는 창업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친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 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당시 이리시 재건에 총예산 130억원을 잡았는데, 한화가 내놓은 돈이 91억원이었으니 선친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김승연 회장) 김 창업주는 1922년 충남 천안에서 부친 김재민(작고)옹과 모친 오명철(작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1952년 부산 피란 시절에 한국화약을 창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역과 건설, 정유, 기계 등 기간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김 창업주가 손을 댄 회사 가운데 성격이 다른 유일한 기업은 대일유업(현 빙그레)이다.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일유업의 거듭된 적자로 골치를 썩던 정부는 한국화약(현 한화)에 대일유업 인수를 요청했지만 김 창업주는 기간산업이 아닌 탓에 인수를 꺼려했다. 그러나 축산농가가 쓰러지고 있다는 정부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그는 대일유업을 떠안았다. ●김 회장의 뚝심경영 패기만만한 김승연 회장의 뚝심 경영은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인수와 합작사인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의 경영권 확보에서 시작됐다. 모든 임원들이 당시 한양화학 인수에 반대했지만 김 회장은 혼자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대주주인 다우케미칼의 한양화학 철수는 본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지, 석유화학 업계의 불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가계약으로 협박하던 다우케미칼측을 ‘편지’ 한장으로 저지한 김 회장의 놀라운 협상 전략이 더해지면서 한화는 당초보다 싼값에 한양화학을 인수하게 됐다. 이는 불안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잠재우며 ‘김승연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미국 유니언오일사와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의 경영권 확보에서도 김 회장의 ‘뚝심’은 잘 드러난다. 한화측에 불리한 계약서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 회장은 유니언오일의 한국 경영진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 같은….’이라는 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5공 시절에 더욱 화려해진다. 명성그룹 5개사를 인수해 콘도를 비롯한 레저산업에 진출했다. 또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을 인수, 유통 분야로의 사업 확장도 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경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장인인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이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탓에 김 회장의 이같은 공격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다. 서 전 장관이 사위인 김 회장의 사업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에서다. 91년에는 빙그레와 제일화재가 계열 분리되면서 2세들의 분가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나는 가정 파괴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도 외환위기 파고는 쉽게 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 그는 매각 금액을 줄이더라도 고용은 100% 승계를 원칙으로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사내 방송에서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해서 발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뛰어보기도 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 때문에 체중이 5㎏ 이상 빠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때는 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날 각오로 경영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끝나면서 그에게 ‘구조조정 마술사’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그는 이에 대해 가슴 아픈 별명이라고 했다. 한화는 2000년 동양백화점 인수를 시작으로 2001년 대덕테크노밸리 설립,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외환위기 시절 위축됐던 사세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이로써 한화는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과 대한생명의 금융, 한화국토개발과 한화유통이 포진한 유통·레저산업을 3대 축으로 하는 성장엔진을 마련하게 됐다. ●강태영 여사의 외유내강 강태영(78) 여사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조용하지만 강단있다.’고 평한다. 지난해 4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할 때다. 김호연 회장은 이 상에 자부심이 유독 컸다고 한다. 한때 ‘경영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비난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탓이었다. 강 여사는 작은아들의 수상 소식에 들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시상식장을 직접 찾아 격려할 정도였다. 강 여사는 특히 90년대 초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우의가 상했던 탓에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주변에선 전한다. 강 여사는 또 남편인 김 창업주와 사별한 이후 한번도 생일 잔치를 벌인 적이 없다고 한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2003년 어머니가 희수를 맞을 때 온 가족이 뜻을 모아 잔치를 해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생일 잔치는 하지 않겠다.’는 모친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강 여사도 김 창업주 생전에 큰 목소리 한번 내는 일 없이 묵묵히 내조를 했다고 한다. 두 아들의 평은 한결같다.“어머니는 유교적인 태도를 간직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김 창업주와 강 여사는 1946년 장남인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룬 덕분에 인연을 맺었다. 차남인 김 창업주가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집안간 혼처가 결정난 곳으로 먼저 상투를 틀었기 때문이다. ●백두진 국회의장 부인의 중매로 김 창업주 생전에 치른 혼사는 맏딸 영혜(57)씨밖에 없다. 영혜씨의 남편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인 이동훈(57)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서정화 당시 내무부장관의 장녀 영민(44)씨를 배필로 맞았다. 영민씨는 당시 김 회장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신부로, 서울대 약대 3학년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김 회장과 영민씨의 만남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백두진씨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맺어졌다. 서 전 장관과 김 회장 양가를 잘 알고 있는 백의장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연결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과 영민씨는 교제를 시작했고,82년 10월에 식을 올렸다. 동생인 김호연(50) 회장도 형이 결혼하자 곧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48)씨를 배필로 맞아 혼례식을 치렀다. 영민씨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약대를 수석 졸업했다. 현모양처 스타일로 자식 뒷바라지에 애쓰며, 바깥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영민씨 친가도 만만치 않은 유력 가문이다. 부친인 서 전 장관은 29세 때 군수를 지냈으며,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 전 장관의 친동생이며, 고 서정귀 호남석유 사장은 6촌형이다. 영민씨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서상환 장관이다. ●천안의 명문가 김 회장의 방계도 화려하다. 백부인 고 김종철 의원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현 파그베어링)과 태평물산(현 한화무역) 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경영엔 관여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 유성은(83) 여사 사이에 요섭-신연-수연-진연-규연-광연 등 5남1녀를 뒀다. 둘째숙부인 김종식(70) 전의원은 큰형인 김종철 전 총재가 작고하자 선거구인 천안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인 문영숙(59) 여사 사이에 정연-서연-도연-원필 등 3남1녀를 뒀다. 고모인 김종숙(64) 여사는 미국에서 UC미클릭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영일(70)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한화에너지(현 인천정유) 부사장을 맡는 등 그룹 경영에 참여했지만, 김 회장 취임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친인척 가운데 현재 한화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는 인사는 김신연 한화폴리드리머 대표가 유일하다. 김 대표는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의 차남이다. ●‘한화호’를 이끄는 전문경영인 총자산 37조원의 ‘거함’ 대한생명을 이끄는 신은철(58) 부회장은 보험업에 30년을 몸담아온 생명보험업계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사내에서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취임 직후 대전 영업현장을 방문, 처음 만나는 지점장 20여명의 이름을 외우고, 친근한 선배처럼 대화를 나눠 참석자들이 헹가래를 쳐주기도 했다. 신 부회장은 평소 ‘3선(先) 경영’(선견, 선수, 선제)을 강조한다. 사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신속하게 실행하는 조직만이 경쟁에서 앞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 출신으로 삼선고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나왔다. 진영욱(54) 신동아화재 사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23세의 나이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수재다.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잔뼈가 굵었다.99년 한화증권 사장으로 전격 발탁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한화증권을 우량 금융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2002년 대한생명과 함께 한화 계열사로 편입된 신동아화재를 만성적 적자 구조에서 흑자로 전환시켰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허원준(59) 한화석유화학 대표이사는 68년 한화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한 이후 줄곧 석유화학 한 분야에 매진한 전문가이다. 엔지니어와 연구실장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한화석유화학의 구조조정 실무 책임자로서 비핵심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해외 자본을 유치해 재무구조를 향상시켰다. 경남 출신으로 부산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관수(54) 한화국토개발㈜ 사장은 79년 태평양건설 입사 이후 제일화재 총무부장, 한화종합화학 기획실장, 한화석유화학 관리담당 임원, 여천 NCC 관리 임원, 한화건설 기획담당 임원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뿐 아니라 스킨십 경영을 중시한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김현중(55) ㈜한화건설 사장은 건축 기사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실전형 경영인’이다.2000년 개발사업 전문가로서 한화건설로 스카우트된 김 사장은 아파트 브랜드 ‘꿈에그린’과 주상복합 브랜드 ‘오벨리스크’를 내놓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4년만에 회사 규모를 4배로 키워냈다. 인천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왔다. 남영선(52) ㈜한화 사장은 78년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해 인사와 총무, 기획 등 관리업무를 두루 거쳤다. 또 그룹 홍보팀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폭넓은 대외 활동과 원만한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 충남 출신으로 배재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golders@seoul.co.kr ■ 김승연회장의 자식교육관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 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깁니다.”(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동관(22)-동원(20)-동선(16) 등 3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한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육활동을 오히려 권한다. 이는 선친에게서 받은 자식 교육에서 비롯된다. 김종희 창업주는 평소에 “남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보고 그래야 해. 어차피 될 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제대로 되니까. 남자의 과정은 여자와 다르지.”라고 했다고 한다. 선친의 기대 때문일까. 자식들 모두 수재인 데다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김 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김호연 회장도 경기고와 서강대,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또 전인교육을 강조한다.“교육 문제는 집사람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저는 큰 방향만 잡아줄 뿐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도 공부뿐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갖췄으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입니다.” 3형제도 김 회장의 기대대로 공부뿐 아니라 체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이 크다. 특히 막내 동선은 취미로 시작했던 승마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장남 동관은 미국 하버드에 재학 중이며, 차남 동원은 예일대, 막내 동선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재계에서 손꼽히는 2대째 미국통 고(故) 김종희 한화 창업주와 김승연(53) 한화 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미국의 마당발’이다. 그룹 모체인 화약부문이 방위산업과 연관이 많은 데다 창업주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한미군 및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또 김 회장은 한·미교류협회 회장으로서 선친의 인맥을 미국 정계로 더욱 발전시켰다. 부자는 자연스럽게 ‘다이너마이트 김과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불렸다.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와의 2대(代)에 걸친 약속은 한화 김씨 부자의 미국 인맥 관리를 잘 보여준다. 창업주는 워커 전 대사의 60세 생일 잔치를 한국식 환갑 잔치로 열어주기로 했지만 1981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인 김 회장이 82년에 환갑 잔치를 열어줌으로써 선친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워커 전 대사의 팔순 잔치도 2002년 서울에서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20년 이상의 약속을 대를 이어 지킨 셈이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선친은 1960년 말부터 워커 전 대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워커 전 대사가 두세달 빨리 태어나 워커 대사는 한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자신이 형님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선친은 또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났고, 만남의 횟수만큼 우정도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였던 세니도 모친(강태영 여사)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 회장은 또 한·미교류협회를 만들어 미국 인맥을 더욱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이사장, 데니스 헤스터트 하원 의장,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딕 체니 부통령, 얼 포머로이 민주당 의원, 클린턴 전 대통령 등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인연은 2002년 미국 하원에서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결의서가 통과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노회찬 ‘떡값’ 실명공개에 김 법무차관 사퇴

    노회찬 ‘떡값’ 실명공개에 김 법무차관 사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에게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파장이 일고 있다. 노 의원은 18일 오후 국회 법사위에서 “삼성이 명절 때마다 떡값 리스트를 작성해 체계적으로 떡값을 제공했으며,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은 J전무대우 고문”이라고 밝혔다. 노 의원이 공개한 전·현직 검사는 K(대검 수사기획관·이하 당시 직책)·H(서울지검 형사6부장)·C(법무차관)·K(성균관대 이사)·K(서울지검 2차장)·A(서울지검장)·H(서울고검 차장) 등이다. 노 의원이 공개한 도청 테이프 녹취록에는 떡값 수수액이 액수를 밝히지 않은 ‘기본떡값’에 개인에 따라 500만∼3000만원이 보태진 것으로 돼 있다. 노 의원은 이날 오전 법사위가 열리기 직전 발언록 전문을 홈페이지(www.nanjoong.net)와 보도자료를 통해 미리 공개했다. 노 의원은 “K검사는 명절 때마다 전달되는 ‘기본떡값’말고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직접 500만원을 전달한 것으로 나와 있다.”면서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으로서,97년 대선 이후 대선자금 수사를 담당하게 될 요직임을 감안한 특별대우”라고 지적했다. 노 의원은 “홍씨의 친동생인 H검사는 검찰내 ‘주니어’(후배검사)들에게 떡값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H검사는 오래 전부터 후배검사를 관리하는 임무를 담당했고,2003년 검찰 인사를 총괄하는 법무부 검찰국장에 있으면서 삼성맨을 요직에 앉혔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7명 가운데 현직 2명은 형법상 알선수뢰죄와 뇌물죄 혐의가 짙다.”며 법무부의 즉각적인 감찰 실시와 파면, 법사위 차원의 청문회 등을 요구했다. 한편 K검사로 거론된 김상희 법무부차관은 이날 오후 사표를 제출했다. 김 차관은 “삼성이나 중앙일보 홍석현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없고, 공직수행중 이들 회사와 관련된 일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도 “경위야 어떻든 검찰수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서는 안된다고 판단해 공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박찬구 김효섭기자 ckpark@seoul.co.kr
  • [안기부 도청 X파일 파문] MBC “삼성 昌지원액 100억대 추정”

    MBC가 22일 밤 9시 뉴스에서 ‘X파일’에 대해 보도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녹음 테이프 1개와 안기부 문건 3개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다.●이회창 후보 지원액 100억 넘어 문건에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이 여당 대선 후보인 이회창씨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전달 계획을 논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계획대로 실행이 됐다면 100억원이 넘는 규모다.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홍 사장과 이 부회장은 이회창 후보 지원 방안을 논의한다. 홍 사장은 이 후보가 안을 짜가지고 올 테니 기다려 보겠지만 15개 정도가 아닐까라고 예상한다. 문건은 15개가 15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경선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홍 사장은 이 후보의 한 측근을 통해 30억원을 줬는데 다 써버렸다, 또 다른 측근을 통해서는 18개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홍 사장이 이어 이 대표의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으로 대충 11억원이 소요되는 것 같다고 하자 이학수 부회장은 그 자리에서 승낙한다. 한달 후 이 부회장은 홍 사장에게 회장님의 방침이라며 추가 지원 지시를 전달한다. 이회창씨에게 30개를 주라는 내용이 포함된다.30억원으로 추정되는 돈이다. 홍 사장과 이 부회장의 계획대로 돈이 모두 전달됐다면 이 후보측에 넘겨진 불법자금은 모두 100억원을 넘게 된다.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아 이 후보 캠프로 전달하는 역할은 이 후보의 고교후배인 서상목 의원과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고홍길 의원이 맡은 것으로 문건에 나타났다. 홍 사장은 이 부회장에게 우리가 주는 것이 얼마인지 서가 알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서씨는 이회창 후보의 고교 후배인 서상목 의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문건은 해석했다. 서 의원도 자신의 역할을 인정했다. 홍 사장은 이 부회장에게 고흥길을 통해 모두 18개나 줬는데 그걸 다 바친 모양이라면서 이번에 좀더 생각해 줘야겠다고 건의한다. 문건은 18개가 18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 사장과 이 부회장은 서씨, 고씨와 이회창 후보와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대화도 나눴다.●이회성씨로 창구 단일화 서씨와 고씨가 맡던 삼성과 이 후보간의 정치자금 창구는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이 후보의 친동생인 이회성씨로 일원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97년 9월 초, 홍 사장은 이학수 부회장에게 이 후보를 만난 결과를 보고한다. 관심사 중 하나는 자금지원 창구였다. 앞으로 돈문제에 대해 누구를 창구로 했으면 좋겠느냐고 논의한 끝에 이회성으로 하자는 데 합의했다고 홍 사장이 전했다. 이회성씨는 새 자금창구로 선정된 다음날 전화를 걸어 오리발을 요청했다고 홍 사장은 말한다. 오리발은 정치권에서 안 받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되는 현금을 뜻하는 은어다. 이에 홍 사장은 이회성씨를 집으로 오라고 해 2개를 차에 실어 보냈다고 밝혔다.2개가 얼마를 뜻하는지는 문건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뒤 홍 사장은 이 부회장을 다시 만났다. 홍 사장은 2명이서 15개를 운반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30개는 무겁더라면서 삼성 비서실 임원과 자신, 이회성씨 세 명이서 백화점 주차장에서 만나겠다고 말한다. 이 돈이 두 명이서 운반할 수 없을 정도의 거액임을 나타낸다. 홍 사장은 서상목씨가 당과는 따로 비밀리에 이 대표의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데 11억원이 소요된다, 삼성이 도와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학수 부회장은 ‘그러지요.’라고 즉각 승낙했다. 이 후보 홍보비용 11억원을 삼성이 내준다는 내용이다.●DJ에게도 지원 ‘양다리 걸치기’ 삼성그룹은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DJ) 대통령에게도 접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홍 사장은 97년 9월 초 야당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간 사실을 이학수 부회장에게 보고한다. 홍 사장은 DJ가 회장께 편지를 보내왔다며 곧 보내겠다고 말한다. 김 대통령과 홍 사장 사이에는 당시 해당 언론사 부국장이었던 모씨가 중개역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홍 사장은 모 국장이 DJ쪽의 모든 분위기를 보고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DJ가 어떻게 될지 몰라 괄시를 못하고 더블플레이를 한다고 말했다. 홍 사장은 여야 대선후보들을 번갈아 만나며 선거전략까지 조언했다고 말했다. 한 대선 후보에게 노조와 호남한테 아부해 봐야 안 되니 확실하게 보수편에 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선 2달 전에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측근이 중앙일보 고위 간부를 찾아와 이회창 후보를 교체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자 이 간부가 반대했다고 홍 사장은 말했다.홍 사장은 또 여와 야에 양다리걸치기를 해야 한다며 중앙일보의 또 다른 간부가 야당 후보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사장은 당시 다른 언론사가 야당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강도높은 취재에 들어갔다는 언론계의 내밀한 정보까지 삼성측에 제공했다.정리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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