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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7~1908년 영국 법원에서 두 차례 재판을 받았다. 그가 중국으로 복역하러 간 사이 일제는 양기탁을 구속하고 베델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 의혹을 덧씌웠다. 결국 베델은 신보를 살리고 자신의 명예도 회복하려 동분서주하다가 스트레스로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양기탁 구속으로 국채보상운동 동력 약화 베델이 1908년 6월 영국 법원의 두 번째 재판으로 구속돼 상하이에서 3주 금고형을 마친 다음날인 7월 12일. 한 일본 경찰이 밤늦게 서울 광화문 대한매일신보사 사옥을 서성거렸다. 신보 건물이 영국인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양기탁(1871~1938)에게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며 밖으로 불러 냈다. 건물 안에 있던 양기탁이 무심코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곧바로 경시청에 가뒀다.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였다. 신보의 두 기둥인 베델과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역습이었다. 일본은 베델이 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양기탁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다. 베델이 조선에 있을 때 그를 구금하면 분명 영국 정부에 도움을 청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일본은 베델이 구속됐다가 조선에 오기 직전 양기탁을 잡아들였다. 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도 양기탁 구속 이틀 뒤인 14일 돌연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그가 이번 일에 간여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였다. 일본은 양기탁이 조선인이기에 베델 말고는 어느 영국인도 그의 신병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1871~1938)은 이 사건이 영국인 소유 신문사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양기탁은 구속됐다가 구타 등으로 다쳐 병원에 이송되던 중 탈출해 신보사로 숨었다. 일본은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코번은 이를 거부하고 그에 대한 고문을 끝까지 막았다. 결국 양기탁은 코번의 도움 덕분에 인도주의적 환경에서 재판을 받아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번은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과 외교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총영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해 8월 런던으로 돌아갔다. 6개월쯤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교관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당시 49세였다.●금고형 이후 달라진 여론… 당황한 베델 베델은 7월 11일 금고형을 마치고 17일 조선에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몇주 사이에 자신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크게 차가워졌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양기탁에게 도덕적 타격을 입혀 신보와 KDN을 무력화하려던 일제의 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들어올 무렵부터 한국인이 운영하던 친일 신문들은 일제히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다룬 기사를 쏟아냈다. 신보를 통해 자신의 무고함을 해명하고 국채보상금 총합소에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 매체들이 만들어낸 ‘파렴치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 국채보상운동은 한계가 명확했다. 국민들의 순수 모금만으로 조선의 1년치 국가 예산에 맞먹는 1300만원을 모으겠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설사 모금운동이 일본에 위협이 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하더라도 일본은 언제든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 그간 모은 의연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불안감이 내재된 상황에서 베델과 양기탁의 국채보상금 횡령 의혹까지 생겨나자 운동의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 둘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커졌다. 실제로 8월 10일에 열린 국채보상금 총합소 특별위원회에서 회계감사 이강호는 “베델이 의연금 운영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조선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박했다. 지금보면 적반하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베델의 횡령 의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베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같은 달 27일 열린 의연금 총합소 평의회에 직접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인생 최악의 굴욕감을 맛봤다. 그가 감옥살이를 하고 온 사이 평의회 의장 자리를 한석진 국민신보 사장이 차지하고 있어서였다. 국민신보는 한국인이 창간한 대표적인 친일지이자 매국단체 일진회(1904~1910)의 기관지였다. 1907년 7월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왕위를 순종에게 넘기자 시위 군중들이 이 신문사의 사옥과 인쇄 시설을 부수기도 했다. 일진회는 항일단체로 출발했지만 단체 간부들이 대거 일본에 매수돼 친일단체로 탈바꿈했다. 그런 신문사의 사장이 국채보상 총합소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는 것은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음을 뜻했다. 그간 친일 행적을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랄 인물이 되레 조선의 독립을 돕다가 감옥까지 다녀온 자신을 비난하며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모습에서 끝없는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일부 조선인들이 자신을 ‘의연금에 손을 댄 좀도둑’으로 취급하는 상황에 모멸감도 컸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베델 사후인 1910년 8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베델)은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조선인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운명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中 언론 “베델, 횡령 실토” 의도적 오보 8월 30일 중국 일간지 ‘노스차이나 데일리뉴스’가 “베델이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를 자백했다”는 기사를 냈다. 도쿄 특파원이 일본 당국자의 말을 듣고 쓴 기사였다. 해당 기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남아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에 빠르게 퍼졌다. 당시 조선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사였던 베델은 이 기사 하나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조선 독립운동가’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베델은 곧바로 중국 법원 등에 이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확인 결과 해당 기사는 일본 국민신보 기자가 영자신문 특파원을 가장해 쓴 것이었다. 일본의 공작이었다. 베델은 소송에서 이기며 자존심을 회복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신뢰는 크게 무너진 뒤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모두 잃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주와 담배로 달랜 탓이 컸다. 평소에도 몸을 돌보지 않던 성격이었던데다 오랜시간 명예훼손 소송과 신보 재정 지원에 나섰던 탓에 그는 이듬해인 1909년 5월 1일 심장 팽창 증세로 숨을 거뒀다. 겨우 서른일곱살이었다. 영국 출신 역사연구가 에이드리언 코웰(62·싱가포르 거주)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조선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를 이른바 ‘젠틀맨’(올바른 일에 목숨을 거는 신사도 소유자) 정신에서 찾았다. 코웰은 “베델은 당시 최고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영국 성공회 전도사의 딸인 어머니로부터 ‘올바름의 추구’라는 종교적 가치도 전수받았다. 이것이 훗날 조선에서 그의 삶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싱가포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항일 기사’ 베델 고소… 英 두 번째 재판 후 中 감옥 수감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항일 기사’ 베델 고소… 英 두 번째 재판 후 中 감옥 수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이 만든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는 조선에서 신문 이상의 위상을 누렸다. 국채보상운동(1907~1908)을 주도했고 항일단체 신민회(1907~1911)의 산파도 맡는 등 독립운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국제 여론에 민감했던 일본은 자신들이 벌이던 만행이 신보와 KDN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는 사실이 매우 불편했다. 결국 베델을 조선에서 내쫓기로 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베델, 英·日 모두에 ‘눈엣가시’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의 소설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에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일본이 그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잘 묘사돼 있다.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1904년)하고 화폐개혁을 강제(1905년)할 때 베델은 신보와 KDN을 통해 음모를 폭로한다. 이때마다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나 탁지부(재정을 담당하는 중앙관청)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는 베델의 기사에 화를 내고 괴로워한다. 아래는 베델이 실제로 1907년 9~10월 신보와 KDN에 게재한 항일 관련 기사의 일부다. “서울 용산에서 한 조선인이 어린아이를 업은 부인을 데리고 일본군 병영을 지나갔다. 이때 한 일본 군인이 장난삼아 이들에게 총을 쐈다. 탄환이 여인의 옆구리를 관통해 아이 엄마가 즉사했다. 아이의 한쪽 손도 산산조각이 났다. 아이 아빠가 일본군군 병영에 뛰어 들어가 장교에게 항의했지만 되레 길거리로 쫒겨났다.”(KDN 9월 3일자) “수원에서 10여㎞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과 조선 의병 간 전투가 벌어졌다. 30명의 의병이 일본 군대에 포위돼 대부분 잔인하게 사살됐다. 일본군 장교는 분이 덜 풀린 듯 생포한 이들을 모두 끌어내 목을 베었다.”(KDN 9월 26일자) “한국 국민들이여! 독립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지 않은가? 미국과 그리스, 이탈리아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라. 지금 이들 세대가 누리는 행복은 바로 조상들의 피로 얻은 것이다.”(신보 10월 1일자)일본은 베델이 신보와 KDN을 창간할 때부터 진의를 의심했다. 그가 반일 논조를 고수하는 이유가 신문 창간 자금이 고종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것으로 봤다. 쉽게 말해서 그가 조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종과 러시아가 재정지원에 나서기 좋을 만한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 학계에는 베델이 러시아 스파이였다고 의심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베델 연구 1인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일본은 베델과 러시아 간 연관성을 찾고자 전방위적으로 나섰지만 어떤 증거도 잡아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日, 본격적인 베델 추방 공작 추진 1906년 12월 영국 ‘트리뷴’지에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칙서가 게재됐다. 영국기자 더글러스 스토리가 목숨을 걸고 문서를 공개한 것이다. 그러자 베델도 이듬해 1월 신보와 KDN에 이 기사를 전재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렸다. “조선이 일본에 자발적으로 외교권을 넘겼다”고 주장해 온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베델은 일본뿐 아니라 고향인 영국에서도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영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이권을 함께 나눠 갖고자 체결한 조약)으로 두 나라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때여서 그의 행보는 영국 입장에서도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하면 그를 조선에서 추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공작을 시작했다.일본은 1898년 태국에서 ‘태국자유신문’이라는 영자지를 발행하다가 추방된 J J 릴리라는 영국인 사례를 베델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살폈다. 릴리가 영국 정부의 동의하에 추방됐기 때문에 베델도 같은 절차를 거치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릴리 추방 당시 영국 하원이 이를 정쟁화했던 경험이 있어 영국 정부로서는 선뜻 베델의 추방을 묵인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영국 외무부는 베델을 굳이 추방까지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신보와 KDN이 재정난으로 휴간과 복간을 반복해 가만 내버려두면 곧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영국의 불확실한 입장 등을 감안해 베델을 직접 추방하려던 계획을 접고 영국 사법당국에 그를 고소해 처벌받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국 외무부는 “가능한 한 일본의 희망을 충족시켜 주겠지만 영국인이 조선에서 누리는 치외법권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재판에 나섰다.●첫 번째 재판 ‘치안 방해’ 혐의 6개월 근신형 베델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열렸다. 한국인과 영국인, 일본인이 참석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일본은 “베델이 신보를 통해 조선인들의 폭동을 선동한다”면서 “신보의 논설이 그대로 의병대의 창의문으로 쓰인다”고 주장했다.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1871~1938)이 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베델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 방해’였다. 코번은 베델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본국의 제국주의 논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재판은 오전 11시에 시작돼 오후 4시 30분에 마무리됐다. 다음날 아침 코번은 베델에게 6개월 근신형을 명하고 보증금 300파운드를 납부하게 했다. 통감부 일간지 서울프레스는 이에 대한 보도를 최소화하고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베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을 내려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첫 재판 판결 뒤 베델은 항일 논조를 더욱 강경하게 이어 갔다. 1908년 3월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1851~1908) 암살 사건 등을 대서특필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제는 영국에 “베델을 추방해 달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영국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그를 다시 한 번 재판정에 세웠다. 이번에는 기존 ‘치안 방해’ 혐의에다가 ‘공금 횡령’을 추가했다. 그가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은 의연금을 마음대로 썼다는 죄목이었다.●‘공금횡령’ 혐의 추가 두 번째 재판선 실형 두 번째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간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렸다. 이 재판은 미국 AP통신이 직접 참관하며 취재할 정도로 국제적 관심이 컸다. 이번에도 영국총영사 코번이 판사로 나섰다. 재판 마지막 날인 18일 코번은 베델에게 3주간 금고형(6개월 근신 포함)을 판결했다. 첫 실형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었다. 결국 영국은 베델을 중국 상하이에 있던 영사관에 마련된 감옥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틀 뒤인 20일 베델은 서울역에서 기차로 인천에 이송됐다. 판결 이후 장기간 서울에 있으면 군중이 몰려와 반대 시위에 나설 것을 우려해서였다. 당시 인천과 상하이 간 정기배편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 군함 ‘클리오’호가 단 한 사람을 데리러 인천에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첫 번째 재판 때만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서울프레스는 이번에는 부록까지 발행하며 판결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상징적이나마 베델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무척 신이 났던 것 같다.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상하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4] “어진 화가로 위장해 입궁하겠습니다.”

    [황제 납치 프로젝트4] “어진 화가로 위장해 입궁하겠습니다.”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4회>그녀는 입술에 술잔을 가져가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과 빌리 두 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미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어요. 우리 임무의 첫 번째 대상은 이토 히로부미가 될 거예요.” 이 때 베델이 잠깐 대화를 끊었다. “여기서 그 문제까지 얘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우리 셋이 밤새 같이 있으면 분명 일본 끄나풀이 눈치채고 달라붙을 겁니다.” 그러면서 베델은 조선 왕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소녀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왕과 무기력한 왕자들은 첩자들에 첩첩히 둘러쌓여 있고 신하들은 말만 할 뿐 실제 조선 독립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세가와(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황제를 궁에 사실상 가둬놨지만 일본에 매수된 비겁한 대신들은 이를 모른 체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에 충성하는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끝으로 베델이 소녀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일본 감시자들 모르게 황제를 만나 망명 의사를 타진할 생각인가요?” 그녀의 대답이 매우 놀라웠다. 마치 첩보원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저는 폐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서울에 온 것으로 돼 있어요. 이미 베이징에서 연로하신 황후(서태후 1835~1908)의 초상화를 그려 드렸어요. 황후께서는 제 신원을 증명하는 친서를 써 주시고 옥으로 만든 목걸이도 하사하셨어요. 목걸이가 워낙 커 마치 제가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기분이 들 정도였죠.“(편집자주: 소설 속 이러한 설정은 실제로 고종과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린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서양화가 휘베르트 보스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입니다. 단 소설과 달리 그는 1899년 고종의 초상화를 먼저 완성했습니다. 서태후 초상화는 1906년에 그렸습니다.) 그녀는 트렁크를 열어 추천서 꾸러미를 꺼냈다. 하나는 워싱턴에 있는 ‘거물’이 준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의 것이었다. 도쿄에 있는 주일영국대사(클로드 맥스웰 맥도널드 1852~1915)의 부인이 써준 것도 있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이게 바로 제가 황제의 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베델과 나는 밤 10시쯤 그 방에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고종 납치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며 호텔의 단 하나뿐인 당구대에서 게임을 했다. 자정 쯤이었다. 권총 소리가 크게 울리며 한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호텔 주인 루이(루이 마르탱)가 사무실에서 ‘페르넷 브랑카’(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식후주로 알콜 도수가 35도 이상임)를 마시다 말고 뛰쳐 나왔다. 호텔 뒤쪽에 있던 종업원실에서도 시끄럽게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을 지키던 호텔 경비원도 연신 쇠막대기를 흔들어대다가 실수로 뭔가를 깨뜨렸다. 우리도 바에서 로비로 나왔다. 머리 위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누구 안 계세요? 누구든 제 방으로 와 주시겠어요?“ 소녀의 목소리였다. 베델과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 뒤 소리쳤다. “강도가 침입한 거면 그놈에게 총을 더 쏘세요.” (편집자주: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이 설정돼 한국법이나 일본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범죄를 저질러도 현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루이와 베델, 나 이렇게 3명은 헐떡거리며 소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소녀는 나이트가운 위로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 쪽에 두손을 모아 작지만 무거운 것(권총)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루이에게 램프를 가져오라고 부탁한 뒤 우리를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가니 소녀의 트렁크가 활짝 열려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실밥 같은 것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일본인 쿨리(짐꾼)들이 입는 외투의 색깔이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방 한켠에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베델이 그를 뒤집자 불빛에 모습이 드러났다. 이미 죽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온 얼굴을 덮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음...” 그녀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벌써 일본의 반격이 시작됐군요...그렇죠?” 5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3개국어 능통한 양기탁과 의기투합… 항일 ‘울타리’ 역할 헌신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3개국어 능통한 양기탁과 의기투합… 항일 ‘울타리’ 역할 헌신

    일본 사업을 정리하고 조선을 찾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영국 신문사에서 해고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사업가의 기질이 강했던 그는 되레 서울에 직접 신문사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도와준 한국인 통역사 양기탁(1871~1938)과 의기투합했다. 지금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신문사 로비에 나란히 있는 두 흉상이 말해주듯, 이들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위기를 기회로… 신문사서 해고되자 직접 창간 베델은 1904년 4월 16일자 ‘조선 황궁의 화재’ 단독 기사에서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화재가 일본군 소행일 것으로 추정했다가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 자리에서 쫓겨났다. 신문사의 친일 성향에 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새 삶을 시작하려고 서울에 온 베델은 한 달여 만에 직장에서 해고돼 무척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 베델은 이참에 신문사를 직접 차려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아직 조선에는 제대로 된 영자신문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언론인이라는 베델의 새 인생을 열어 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는 이렇게 기획됐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베델에게는 무엇보다도 영어에 능통하고 믿을 수 있는 조선인 조력자가 절실했다. 앞서 베델은 3월 통신원으로 왔을 때부터 덴마크인 전기기술자 헨리 예센 뮐렌스테트(1855~1915)에게 자신의 취재를 도와줄 통역사를 부탁했는데, 그가 소개해 준 이가 훗날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양기탁이었다. 그는 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정부기관 ‘예식원’에서 평범하게 일하고 있었다.●“양기탁, 이토 저격되자 신보사 2층서 만세” 그렇다면 양기탁은 누구일까. 우리에게는 ‘양기탁’으로 알려졌지만 학계에서는 ‘양기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이름 한자인 ‘鐸’은 ‘탁’과 ‘택’으로 모두 읽힌다. 베델 연구 일인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그의 영문 이름이 ‘taik’(택)으로 돼 있고 당시 한글신문들도 그를 ‘양기택’이라고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양의종’이었다. 1871년 평양 서촌에서 한학자 양시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15살이던 188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 우국지사 나현태를 만나 성리학을 수학하고 선교사들이 만든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해 영어도 배웠다. 그는 언어 습득 능력이 남달랐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이 게일이 만든 성서 번역용 한영사전인 ‘한영자전’ 편찬에 참여했다. 일본 영사관원의 소개로 나가사키현에 건너가 2년간 한국어 교사로 일하며 일어도 익혔다. 3개 국어를 할 줄 알았던 양기탁에게 예식원 업무는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옷’ 같았다. 그가 베델과 만나게 된 것도 어학능력 덕분이었다. 애초 양기탁의 역할은 통신원인 베델이 원하는 취재원을 섭외해 통역하는 정도였지만, 베델이 영국 언론사에서 해고된 뒤 신문사 창간에 뛰어들면서 그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됐다. 결국 양기탁은 1904년 7월 18일 신보와 KDN 첫 호를 발행하고 한 달쯤 뒤인 8월 23일 예식원을 그만 뒀다. 베델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한 것이다.원래 베델이 처음 만든 신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자지 KDN(4페이지)에 부록(2페이지)으로 삽지된 것이었다. 양기탁은 영문판 기사를 국한문으로 번역해 다음날 신보에 게재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자투리’였던 신보가 한국인들에게 예상 밖 반향을 일으키자 베델은 1905년 8월 두 신문을 분리하고 양기탁에게 신보 지면 제작 전권을 줬다. 신보의 강경한 항일 논조는 양기탁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09년 베델이 세상을 떠난 뒤로 신보는 더욱 양기탁에게 의존했다. 베델은 영국인이었기에 한국이나 일본의 법을 적용받지 않았다. 그가 세운 신보와 KDN이 입주한 건물 또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양기탁은 통감부의 핵심 감시 대상이었기에 건물 밖으로 나갈 경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로 신보사 건물 안에 머물며 영문기사 번역 일 등에 전념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양기탁이 신보사 2층에서 만세를 부르며 축하연을 벌였다는 보도가 친일매체 ‘대한일보’ 등에 게재됐다. 양기탁은 이를 부인했다. 정 교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양기탁의 항일 정신이 일본 당국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양기탁이 일제를 마음껏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베델이 자신의 치외법권을 십분 활용해 모든 비난과 압박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부터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1907년에는 ‘신문지법’을 제정해 언론 탄압 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외국인인 베델이 만든 신보는 검열 대상에서 제외돼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일본의 감시로부터 양기탁을 지켜 준 베델이 대한매일신보의 ‘울타리’였다면, 항일 논조를 바로세워 조선을 구하려 했던 양기탁은 ‘대들보’였다”고 평가했다.●독립운동가 임치정·이교담, 신보 경영 뒷받침 하지만 이 두 사람의 힘만으로 신보사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신보가 조선 독립을 위해 제대로 된 기사를 쓴다는 소문이 돌자 명망 있는 논객과 경영자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여들었다. 1904년 창간된 신보는 당시로서는 후발지였음에도 이들의 헌신 덕분에 일본의 여러 식민통치정책을 좌절시키며 전성기를 누렸다.우선 민족사학자들이 찾아왔다. 박은식(1859~1925)과 신채호(1880~1936) 등 유명 사학자들이 신보에 들어와 필진으로 활약했다. 황성신문(1898~1910)에서 일했던 박은식은 신보에서도 강경 항일 논설을 썼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자 해외로 나가 항일 활동을 이어 갔다. 역사서인 ‘한국통사’를 썼고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신채호도 황성신문에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이듬해 신보로 옮겼다. 그는 1910년 중국 망명 전까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일본의 삼대충노’ 등을 쓰며 항일 언론 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베델의 KDN에 대항해 통감부가 만든 기관지 서울프레스(1905~1937)는 신보를 두고 “한국어판은 영문판보다도 훨씬 나쁘고 못된 신문”이라고 비난했다. 신보사의 경영을 도우려는 이들도 있었다. 임치정(1880~1932)과 이교담(1880~1936) 등이 대표적이다. 임치정은 1905년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신보에서는 부총무와 회계주임 등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을 기획하는 등 독립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교담 역시 공립협회에서 활동하다가 신보에 합류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신보와 KDN은 한때 하루 2만부 가까이 발행하며 조선 최고의 신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일본에서 무역 일을 하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한동안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악재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9개나 되는 공장 차렸다가 못 버티고 폐업 1888년 고베에 와 아버지와 이모부 밑에서 무역 일을 배운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세워 독자 사업에 나섰다. 일본의 골동품을 영국에 내다파는 중개업에 자신감이 붙은 베델은 한발 더 나아가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어 영국에 수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델 브러더스’가 생산하기로 한 첫 제품은 바로 러그였다. 러그는 바닥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을 말한다. 베델은 형제들과 1901년 7월 오사카 남부 사카이 지역에 소규모 러그 제조 공장 9개를 차렸다. 당시 사카이에는 일본인들이 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러그 공장이 많았다. 한때 이곳은 지역 주민의 70%가 러그 생산에 매달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베델 브러더스’는 이런 사카이에 공장을 차린 첫 외국인 업체였다. 이들이 만든 러그는 품질도 꽤 좋았던 것 같다.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은 기자가 사카이 공장을 직접 방문하고 쓴 르포 기사에서 “베델의 러그는 터키에서 생산된 최고급 제품과 차이가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조업을 처음 해 보는 베델이 한꺼번에 9개나 되는 공장을 무리하게 운영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일본에서는 1899년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마무리돼 이들에 대한 소송이 급증했는데 ‘베델 브러더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품질 좋은 러그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을 대거 스카우트한 것이 일본업체들을 자극했다. 공장을 9개나 돌리다 보니 경쟁회사에서 데려 온 장인의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지역 카르텔은 ‘베델 브러더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영업을 방해했다. 결국 베델 형제들은 이들의 보이콧을 버티지 못하고 얼마 안 가 러그 사업을 접었다.●3억원대 러그 납품 분쟁… 日반감도 커져 베델은 이 시기 최소 3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수세미 사건’과 ‘러그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세미 사건’은 주방용품이나 목욕용품으로 쓰는 수세미의 납품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902년 2월 고베 상인 나리타 세이사부로는 “‘베델 브러더스’가 수세미 3만 6942개를 주문했지만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1567.31엔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905년 7월까지 3년 반 동안 재판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결론은 알려지지 않았다. ‘러그 사건’은 러그 납품 대금 관련 소송이었다. 베델이 조선에 온 뒤인 1904년 10월 러그 상인 도이 젠노스케는 베델을 상대로 대금 5026.73엔과 6%의 이자를 별도로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에서 거래된 엔화의 평균가를 고려하면 5026.73엔은 지금 가치로 27만 4870달러(약 3억 700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베델은 이 시기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고(도이)와 피고(베델)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자 손해배상 청구가 자연스레 기각돼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도이가 이듬해 2월 베델을 상대로 또 한 번 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도 처음보다 11% 늘어난 5795.73엔으로 책정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은 이 사건의 첫 공판이 있었던 1904년 10월부터 1905년 2월까지 네 차례의 공판을 기사로 다뤘다. 이 역시도 재판 결과는 기록이 없다. 사업과 관련한 두 가지 분쟁 사이에 작은 소송 하나가 더 있었다. 1903년 초 고베에 살던 히로시마 수마라는 여성이 “1902년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과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이 영국에 갔을 때 이들을 수행하고 96.91엔을 받기로 했지만 실제 대가는 40엔이 전부였다”며 재판을 걸었다. 비록 수세미나 러그 대금처럼 큰돈은 아니었지만 베델 입장에서는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렇다할 합의 노력 없이 소송부터 하고 보는 일부 일본인들의 행태에 상당히 실망했던 것 같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할아버지(베델)가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일본인들의 줄소송으로 인한 반일 감정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한다”고 전했다.●日사업하던 형제들 항일 신문 만든 베델 내쳐 베델은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베델의 후손들은 그가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1901년 8월 베델은 고베의 인력거꾼들과 요금을 놓고 시비를 벌이다가 싸움이 나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당시 ‘고베 크로니클’은 “외국인을 집단 폭행한 인력거꾼들의 잘못이 크지만 인력거 면허번호를 떼어 내는 등 불필요한 행동으로 이들을 자극한 베델도 생각이 모자랐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베델은 형제들과도 사이가 나빠져 결국 동업을 정리하게 된다. 아마도 이들은 일본인들과의 소송 과정에서 관계가 더욱 악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베델이 한국에서 신보와 KDN을 발행하던 1905년 ‘고베유신일보’ 11월 27일자에는 ‘베델 브러더스’ 고베 지사에서 일하던 S E 길스가 신문사로 찾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베델은 한때 ‘베델 브러더스’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고래였고 결근도 잦았다. 급기야 회사를 내팽개치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이제 이 회사는 베델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이 내용을 신문에 광고도 했다”고 밝혔다. 길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베델을 과음과 근무태만, 무책임 등의 단어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를 바라보는 남동생 허버트(1875~1939)와 아서 퍼시(1877~1947)의 감정이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영자신문에 베델이 해고됐다는 사실을 광고까지 한 것을 보면 한국에서 항일신문을 발간한 큰 형(베델)을 이렇게라도 내치치 않을 경우 ‘베델 브러더스’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형제들의 복잡한 속내가 읽혀지기는 한다.앞서 ‘고베유신일보’는 11월 26일자 기사에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설립해 지난해(1904년)까지 도자기업을 운영하다가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하다시피 한국으로 건너간 러시아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베델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사업에 실패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러그 사업이 실패한 뒤 도자기 판매로 활로를 모색했지만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베델은 사업 실패와 잇따른 소송, 형제와의 불화 등으로 16년간 살던 고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조선 특파원에 지원해 언론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이 조선에는 되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램 다희 근황, 활동명 김시원으로 영화 ‘전학생’ 촬영 중

    글램 다희 근황, 활동명 김시원으로 영화 ‘전학생’ 촬영 중

    이병헌 협박 사건으로 이름을 알린 글램 다희의 근황이 전해져 화제다. 다희는 최근 영화 ‘전학생’(감독 신재호)에 캐스팅 돼 촬영 중이다. 다희는 ‘전학생’에서 일진 역을 맡았다. 영화 ‘전학생’은 학원폭력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글램 다희 외에도 안용준, 김도훈 등이 출연한다. 신재호 감독은 앞서 영화 ‘응징자’ ‘치외법권’ ‘게이트’ 등을 연출했다. 다희는 앞서 김다희에서 김시원으로 활동명을 바꿨으며, 최근에는 BJ로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한편 다희는 지난 2015년 이병헌 협박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다. 항소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베델 일대기, 영화·드라마로 더 많이 알려졌으면”

    “베델 일대기, 영화·드라마로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한국 독립운동 도운 삶에 매료 1970년대부터 英·日 돌며 연구 “목숨 바친 숭고한 희생 기억되길”“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된 1904~1909년은 양기탁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안창호, 고종, 이토 히로부미, 호머 허버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 등 역사책에 나오는 근현대사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스펙타클한 시기예요. 일제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용기 있게 담아낸 대한매일신보 창업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당시 우리나라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베델의 일대기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돼 보다 많은 분들이 기억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오는 18일부터 서울신문 창간 114주년을 기념해 게재되는 특별기획 ‘베델’ 취재를 위해 만난 ‘베델 전문가’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5일 자신이 일생을 바쳐 연구한 베델의 삶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현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일본에 우호적 기사를 강요하는 회사 방침에 반발해 해고된 뒤 그해 7월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등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적으로 보도했다. 국채보상운동을 공론화하고 독립운동단체 ‘신민회’의 본거지도 제공했다. 일본인이 무단 반출한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문제를 국제이슈화해 석탑 반환에 크게 기여했다. 1909년 일제의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와 심장질환 등으로 세상을 떠난 베델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정 교수는 “베델이 만든 신보는 원래 외국인들을 위한 영자지 KDN(4페이지)에 부록(2페이지)처럼 만들었던 것”이라면서 “하지만 되레 신보가 한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자 영국인인 그는 한국법이나 일본법을 적용받지 않는 치외법권을 십분 활용해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베델의 삶에 매료된 그는 1970년대부터 영국과 일본을 찾아다니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 중이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요코하마 등을 돌며 사진과 기록을 찾아내 오류 투성이였던 베델 연구를 대부분 바로잡았다. 베델 한 사람을 취재하고자 런던정경대(LSE)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는 “베델 선생은 한·영 수호조약이 체결된 1883년 이후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영국인”이라면서 “수십년간 국내 방송사 등에 베델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반응이 없어 안타깝다.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좀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사법 농단’ 고발인 3번째 공개 소환… 대법원 압박 수위 높이는 檢

    양승태 사법부 시절의 ‘법관사찰·재판거래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자용)가 조석제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장을 고발인 신분으로 25일 소환했다. 세 차례 고발인 소환이 이례적으로 모두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검찰이 여론전을 펼치며 대법원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서 검찰은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조승현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도 불러 조사했다. 조 본부장은 이날 오전 10시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진에게 “대법원은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라며 “대법원에서 PC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검찰은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관련자 PC 하드디스크 등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지만, 대법원은 일주일 가까이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공무원노조 법원본부는 지난달 3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임 교수부터 조 본부장까지 고발인 소환을 연일 공개하고 있다. 고발인 조사는 통상적인 절차지만, 검찰이 직접 고발인 출석 시간까지 언론에 알리는 것은 무척 이례적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고발인들이 검찰에 나오며 대법원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어 대법원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현재 검찰은 20개가 넘는 고발장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검찰, 여론전으로 대법원 압박?

    검찰, 여론전으로 대법원 압박?

    사법농단 고발인 조사 이례적으로 잇따라 공개 소환 양승태 사법부 시절의 ‘법관사찰·재판거래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자용)가 조석제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장을 고발인 신분으로 25일 소환했다. 세 차례 고발인 소환이 이례적으로 모두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검찰이 여론전을 펼치며 대법원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서 검찰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장 조승현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도 고발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했다.조 본부장은 이날 오전 10시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진에게 “대법원은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라며 “대법원에서 PC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검찰은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관련자 PC 하드디스크 등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지만, 대법원은 일주일 가까이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조 본부장은 이날 지참한 추가 제출 서류에 대해선 “특별조사단 조사 보고서에는 실명으로 그동안 관여했던 행정처 관계자 명단이 적혀있는데, 그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의 명단을 사무분담표를 통해 일일이 특정했다”고 설명했다. 공무원노조 법원본부는 지난달 3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공동 학술대회에 개입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법관 동향을 파악하는 등 직권을 남용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임 교수부터 조 본부장까지 고발인 소환을 연일 공개하고 있다. 고발인 조사는 통상적인 절차지만, 검찰이 직접 고발인 출석 시간까지 언론에 알리는 것은 무척 이례적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고발인들이 검찰에 나오며 대법원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어 대법원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이라고 밝혔다. 현재 검찰은 20개가 넘는 고발장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문 대통령 개헌안…5·18 전문에 수록, 국민소환제 신설 의미는

    문 대통령 개헌안…5·18 전문에 수록, 국민소환제 신설 의미는

    청와대가 20일 공개한 문재인 대통령 개헌안에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 민주화를 이끈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부마항쟁, 6·10 민주항쟁이 헌법 전문으로 수록됐다.문 대통령은 민주이념 계승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5·18, 부마항쟁, 6·10 항쟁을 전문에 반영했다. 1987년 9차 개헌 당시 그대로인 기본권 조항 역시 시대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기본권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확대했다. 외국인 200만 시대를 맞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맞게 국적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천부인권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바꾼 것도 의미있는 대목이다. 근로는 일제와 군사독재시대 사용자의 관점에서 사용됐던 용어다. 공무원의 노동3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한 것은 공무원이 갖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현행 헌법 33조2항은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예외적으로만 노동3권을 허용하고 있다.국민의 생명과 안전 최우선하는 정부 역할 강조 무엇보다 생명권·안전권·정보기본권·주거권·건강권을 신설함으로써 기본권을 향상시켰다. 모든 국민이 안전하게 살 권리를 헌법에 천명하고 국가의 재해예방의무와 위험으로부터 보호의무를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정보기본권의 등장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나 언론·출판의 자유와 같은 소극적 권리만으로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충분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상황인식에 터잡은 것으로, 알 권리와 자기정보통제권을 명시한 것이 핵심이다. 주거권과 건강권은 사회보장을 국가의 시혜적 의무에서 국민의 기본적 권리로 변경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번 개헌안에서 기소독점주의를 상징하는 검사의 영장청구권 조항이 삭제된 점도 특별한 점이다. 이는 헌법에 영장 청구 주체 규정을 두지 않고 있는 주요 선진국들의 입법례에 따른 것으로, 비록 헌법에서 빠지더라도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 현행 형사소송법은 그대로 유효하다는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영장청구를 검사 외의 다른 주체가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는 점에서 향후 검경 수사권 조정과 맞물려 주목된다.국민발안제·국민소환제 신설로 직접참여 폭 확대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를 신설함으로써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폭을 확대하게끔 했다. 국회의원은 명백한 비리가 있어도 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기 전까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세월호 특별법 입법청원에 60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지만 입법 발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청와대는 지적했다. 이에 따라 헌법에 대해서만 국민발언제를 허용하는 기존 조항을 바꿔 국민이 입법자로서 직접 법률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권력의 감시자로서 국민이 국회의원을 소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조국 수석은 “이번 개헌은 기본권과 국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국민 중심의 개헌”이라고 강조하고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고 국민 모두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대한민국을 상상해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공권력보다 ‘문화의 힘’… 개발 사각 성매매집결지를 예술촌으로

    공권력보다 ‘문화의 힘’… 개발 사각 성매매집결지를 예술촌으로

    ‘문화의 힘’이 ‘공권력’도 뿌리 뽑지 못한 ‘성매매 집결지’를 소멸시키는 첨병으로 나섰다. 음습한 곳에 밝은 빛을 비춰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문화 햇볕정책’이다. 전북 전주시가 전국 최초로 도입한 ‘선미촌 문화재생사업’으로 윤락가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많은 지자체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사업은 올해부터 본궤도에 오른다. 2년 전에 시동을 건 선미촌 기능전환 사업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실제로 선미촌에 시청 담당부서가 이전해 교두보를 확보한 데 이어 예술촌 조성에 착수하자 난공불락 같던 이곳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매매 업소 폐업이 늘어나고 종사자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일부 종사자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겠다며 자활교육을 받고 있다. 음침하던 선미촌에 햇볕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주민들도 반색하고 나섰다. 개발 사각지대였던 이곳이 새로운 명소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에 동네잔치도 벌였다. 전주시는 앞으로 2~3년 안에 ‘음지’였던 선미촌을 ‘양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구상이다.●전주시청과 도보 1분 거리… 아직도 불법 성매매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은 기린대로를 사이에 두고 전주시청과 마주 보고 있다. 직선거리로 50m, 도보로 1분 거리에 불법 성매매 업소들이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심 한복판, 시청 코앞에서 단속을 비웃기라도 하듯 60년 넘게 영업하고 있다. 바로 옆에 대형마트, 걸어서 10분 거리에 지역 명문 전주고를 비롯한 각급 학교와 주택가가 있지만 이곳은 아직도 성매매지역이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대로변 바로 뒤쪽은 폐허처럼 낡은 옛 여인숙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건물 간 이격거리를 무시한 불법 건물들이 빼곡하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끼고 밖으로 유리문을 낸 허름한 집들은 모두 성매매 업소다. 이 지역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가 된 지 오래다. 낮에는 모두 문을 닫아 을씨년스럽지만 해가 지면 홍등가로 변한다. 선미촌의 역사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 중심가에서 번성했던 유곽이 해방과 함께 사라지면서 종사자들이 전주역 근처로 흘러들어왔다. 이들이 숙박업소, 술집 등과 연계돼 뿌리를 내리게 된 게 선미촌이 생성된 시초다. 전주 토박이들은 이곳을 ‘뚝너머’라고 부른다. 철길 건너편 부락이라는 뜻이다. 선미촌은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1983년 전주역이 이전하고 그 자리에 전주시청이 들어섰지만 선미촌은 불야성을 이루며 성업했다. 이 기간에는 100여개 업소에서 500여명의 종사자가 매춘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업소 수 전성기의 반토막… 단속 피해 숨바꼭질 영업 성을 돈으로 팔고 사는 어둡고 음습한 관행은 2002년 전북 군산시 개복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 참사로 전환점을 맞았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성매매 집결지 생활상과 인신매매, 여성인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특히 여성인권단체 등이 나서 성매매와 폭력이 점철된 어두운 공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 역사 속에서 합법화된 공간처럼 특정 상권을 형성한 성매매 집결지가 교육과 주거환경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여론도 들끓었다. 욕구를 분출시킬 기능을 하는 업소가 있어야 성범죄가 줄어든다는 궤변을 잠재울 사회적 분위기도 성숙됐다. 이 같은 지적이 끊이지 않자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제정됐다. 성을 파는 여성이나 사는 남성까지 모두 처벌 가능한 이 법률이 시행되면서 선미촌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성매매 업소는 절반가량인 50개로 줄고 종사자도 200여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경찰과 지자체의 강력한 단속도 숨바꼭질 영업을 하는 성매매 업소를 뿌리 뽑지 못했다. 단속·정비·계도를 병행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경찰도 ▲금품 제공 ▲성행위 등 두 가지 요건을 입증해야 성매매방지특별법에 의한 처벌이 가능해 단속에 한계를 드러냈다. 성매매 업소가 단속이 집중되는 선미촌에서 벗어나 주택가 원룸, 오피스텔 등으로 은밀하게 숨어들어 가는 부작용도 생겼다. 선미촌 업주들은 ‘왜 우리만 단속하느냐’며 적반하장 격으로 항의하기 일쑤였다.●작년 7월 ‘서노송예술촌 현장시청’ 입주… 사업 순조 선미촌이 ‘전통문화도시’의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지적에 고민하던 전주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띄웠다. 혐오스러운 도시공간을 문화예술마을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일반 시민들이 접근을 기피해 도시발전의 암적인 존재가 돼 버린 선미촌을 예술촌으로 재탄생시킨다는 프로젝트다. 시는 2014년 지역 주민, 토지·건물주, 업주 등과 선미촌 정비 민관협의회를 구성해 여론을 수렴했다. 2015년에는 선미촌 기능전환을 위한 용역을 실시했다. 이를 토대로 종사자나 업주들이 대안을 마련할 시간을 주면서 점진적으로 기능을 전환한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선미촌문화재생사업’의 시작이었다.전주시의 이 같은 계획이 2016년 국토교통부가 공모한 도시활력증진사업에 선정되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시는 완산구 서노송동 선미촌 일원 11만㎡를 2020년까지 정비하는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국비 30억원, 시비 44억원 등 관련 예산은 중기지방재정계획에 반영됐다. 사업 내용은 골목 경관 정비, 도로 정비, 커뮤니티 공간 및 문화예술복합공간 조성, 주민공동체 육성 등이다. 시는 다음달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을 마무리하고 6월에 도로정비, 커뮤니티공간 조성에 들어갈 계획이다. 7월에는 문화예술 복합공간 조성에도 착수한다. 이에 앞서 시는 상징적인 사업들을 추진했다. 2016년부터 선미촌 내 건물 5동을 매입해 거점공간을 확보했다. 선미촌에서 가장 큰 성매매업소 건물을 매입해 지난해 7월 시청 관련부서(서노송예술촌 현장시청)를 이전했다. 이곳에는 폐품을 재활용하는 업사이클링센터를 입주시킬 예정이다. 일부 터에는 공원을, 건물에는 창작공간을 조성했다. 올해부터는 서노송예술촌의 청사진이 확정돼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선미촌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와 음침한 골목을 정비한다. 사람들의 통행량을 늘려 성매매 업소들이 스스로 위축되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선미촌 내 도로는 ‘여행길’이라 이름 붙였다. ‘한옥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이 둘러보는 길’이라는 의미와 ‘여자가 행복한 길’이라는 뜻을 담았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선미촌 문화재생사업은 물리력과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고 문화와 예술의 힘으로 여성 인권과 마을, 도시를 살려내는 어려운 프로젝트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며 “이 사업은 시민들과 전문가, 행정의 협치를 통해 산맥처럼 도시를 점거한 선미촌을 여성인권과 공방 중심의 예술촌으로 만들어 가는 소중한 경험의 축적이자 도시 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女보좌진 “터질 게 터졌는데…” 미투 폭풍에 숨죽인 정치권

    女보좌진 “터질 게 터졌는데…” 미투 폭풍에 숨죽인 정치권

    페북 ‘여의도 옆 대나무숲’ 폭로 국회는 ‘권력 상하관계’ 견고 고위직 남자 많고 고용 불안정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 정치권의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이 본격화되자 여의도는 뒤숭숭한 분위기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의원실 보좌관 등에 대한 폭로에 이어 더 많은 고발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에 숨죽이고 있다. 국회에 근무하는 직원이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페이스북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성폭력 의혹에 대한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한 직원은 이달 초 익명으로 올린 ‘회관 남자 전반에 대한 #Me too’라는 글에서 비서관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신고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건 직후 즉시 몸 상태를 체크하고 기록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신고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며 “그 비서관의 회관 내 인맥이나 영향력이 두려웠고 경찰 조사를 받으면 기자들의 내부 보고용 찌라시가 돌 수 있는데 신원이 밝혀질 것이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가 사실상 치외법권”이라며 “저같은 여자 보좌진 분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직원은 ‘미투 운동을 지지합니다’라는 당 현수막에 대해 “의원님, 우리 방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나 있나”라고 비꼬는 글을 썼다. 지난달 말에는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인데 왜 이 나라 최고 권력의 중심인 이곳만 조용할까”라는 글도 올라왔다. ‘미투 운동’의 폭풍이 여의도를 점령하는 상황에서 실명으로 ‘미투 운동’ 글을 올리며 가해자로 지목된 보좌관은 면직됐다. 지난 5일 국회 모 의원실에서 일하는 비서관은 과거 상사의 상습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 글을 ‘대한민국 국회’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다. 가해자로 지목된 보좌관이 일하는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실은 6일 곧바로 이 보좌관을 면직 처리했다. 정치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피해 사례가 더 많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젠더폭력대책 태스크포스(TF) 회의가 끝난 뒤 “고위직급은 남자가 많고 낮은 직급은 여성이 많은데다 고용이 불안정한 국회는 성추행, 성폭행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라고 말했다. 한 여자 보좌진은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하지만 저렇게 용기를 내서 미투를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라며 “국회는 다른 일반 기관이나 기업보다 권력 상하관계가 견고한 특징 때문에 나와 내 주변에도 미투를 할 사람이 많지만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치권은 부랴부랴 대응책을 만들고 있다. 민주당은 이날 젠더폭력대책 TF를 당 특별위원회로 격상시키고 범죄신고상담센터, 인권센터 등의 설치를 논의하기로 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국회에서도 처음으로 미투 글 올라와

    국회에서도 처음으로 미투 글 올라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국회에서도 성폭력 피해로 고통을 당했다는 폭로가 처음으로 나왔다. 5일 국회에 따르면 이날 국회 홈페이지에는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는 제목으로 국회의원실의 한 보좌관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비서관이라고 소개한 정모씨는 실명 글에서 “2012년부터 3년여간 근무했던 의원실에서 벌어진 성폭력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보좌관이 ‘뽀뽀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당사자에게 항의도 해보고 화도 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가해자와 분리되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며 버텼지만 지금도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또 가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전화해 음담패설을 늘어놨고 부적절한 신체 접촉도 있었다고 밝혔다. 사회 전반에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국회에서 실명을 내걸고 성폭력 피해 사례를 밝힌 것은 정씨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가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진 해당의원실 의원은 “사실 확인을 해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 보좌진이 모인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이 접속자는 “몇 년 전 모 비서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녹취와 문자 기록을 갖고 있었고 사건 직후 즉시 집 근처 해바라기센터에 달려가 몸 상태를 체크하고 당시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고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동안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국회 의원회관은 사실상 치외법권인 곳이기 때문”이라며 “저같이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여자 보좌진분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아시나요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아시나요

    일제강점기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 대한독립의 당위를 알린 서영해(1902~1949 실종)가 3·1절을 앞두고 프랑스 현지에서 새롭게 조명됐다. 최근 파리 7대(디드로대) 한국학과를 중심으로 한 한불 독립운동사학회 ‘리베르타스’ 발표에서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서영해의 삶과 철학을 소개했다. 서영해는 반상 차별의 구시대적 인습이 잔존하고 일제로 인해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당한 조국의 현실을 답답해했다. 상하이로 건너간 뒤 본명 희수를 바다를 뜻하는 영해(嶺海)로 바꾸고 프랑스 유학을 결행했다. 고려통신사 설립…韓문제 부각 임시정부 첫 주불대표로도 활동20세에 프랑스 초등학교 2학년 과정부터 시작해 6년 반 후 모든 과정을 마치고 파리 소르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학업을 멈추고 포도농장과 식당, 도서관 등에서 일했다. 도서관에서 신문과 장서를 탐독하면서 기자의 꿈을 키우고 1928년 파리 언론학교에 들어갔다. 1929년 파리 반제국주의 세계대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한국 문제를 부각시켰고, 고려통신사를 설립해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을 간행했다. 책은 ‘레 주르날’, ‘르뷔 이스토리크’(역사비평) 등 프랑스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아 1년 만에 5쇄를 인쇄할 만큼 팔려나갔다.서영해는 도산 안창호의 석방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도산이 치외법권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체포되자, 영장을 허용한 프랑스 당국을 향해 호소문을 내고 “프랑스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치적 망명가들에 대한 환대의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에 프랑스의 사회단체도 서영해와 안창호 돕기에 나섰다. 1945년 3월 그는 임정의 첫 주불대표로서 임정과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47년 5월 귀국한 뒤 정치판과 거리를 두고 문화 부문에 힘을 쏟다가 1949년 상하이에서 실종됐다. 서영해의 일생을 정리한 장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의 불모지와 같던 유럽에서 20여 년간 독립운동을 지켜낸 주역이지만 국내에서는 한 편의 논문도 발표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해외 동포도 함께했던 독립운동프랑스에서 일제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인들의 자료가 다수 확인됐다. 왼쪽 사진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와 한인노동자들이 결성한 재법한국민회가 1920년 3월 1일 쉬프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오른쪽은 파리 7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이장규씨가 찾아낸 1920년 외국인 명부. 한인 8명의 이름 옆에 ‘한국인’(Coren)이라고 적혀 있다. 연합뉴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 시대상황 풍자…‘게이트’ 예고편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 시대상황 풍자…‘게이트’ 예고편

    범죄 코미디 ‘게이트’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영화 ‘게이트’는 금고털이단이 대한민국을 뒤흔들 비밀 금고를 건드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배우 임창정이 주연과 제작에 참여했다. ‘응징자’(2013년), ‘치외법권’(2015년), ‘대결’(2016년)의 신재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공개된 예고편에는 금고털이 설계에 타고난 백조 ‘소은’ 역의 정려원,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검사 ‘규철’ 역의 임창정, 어쩌다 같은 편이 된 야심꾼 ‘민욱’ 역의 정상훈, 한물간 금고털이 기술자 ‘장춘’ 역의 이경영, 프로 연기파 도둑 ‘철수’ 역의 이문식 등 이들의 유쾌한 앙상블을 궁금케 한다. ‘게이트’는 제작 당시 불거진 국정 농단 사건을 연상케 한다. 당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감독은 “영화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에서 시작했다”며 영화의 출발점을 밝혔다. 또 “영화를 준비하던 시기에 정치 비자금 이슈와 VIP들의 갑질 논란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현 시대상을 반영하게 됐다”고 전했다. 영화는 오는 2월 28일 개봉 예정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서지현 검사 “안 모 검사가 성추행, 당시 법무부가 무마” 지목

    서지현 검사 “안 모 검사가 성추행, 당시 법무부가 무마” 지목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가 2010년 서울북부지검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을 폭로했다.29일 밤 방송된 JTBC <뉴스룸>에는 서지현 검사가 출연, 서울 북부지검에서 근무했던 2010년에 발생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서지현 검사는 “사실 굉장히 많이 고민했다. 게시판에 글 올리는 것도 고민했다”면서 “주변에서 피해자가 직접 이야기를 해야 진실성에 무게를 줄 수 있다고 해 용기를 냈다”고 서지현 검사가 뉴스룸에 직접 출연하게된 결심을 분명히 했다. 이에 앞서 서지현 검사는 지난 26일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2010년 10월 30일 장례식장에서 안모 전 검사에게 강제 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당시 무마한 배후가 법무부 검찰국이었다고 지목했다. 안모 검사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이었던 최교일 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무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안태근 전 국장은 지난 29일 언론에 “오래 전 일이고 술을 마신 상태라 기억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다만 그 일이 검사 인사나 사무감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현재 이 사안과 관련한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평소 검찰의 내부 문제에 지적을 아끼지 않은 임은정 검사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임은정 검사는 검찰 내에서 소신 발언으로 유명한 검사다. 임 검사는 검찰에서 일종의 ‘내부 고발자’로 통한다. 한 매체에 따르면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의 성희롱 △서울 남부지검 검사의 자살 △진경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장(검사장) 특혜성 주식투자 사건 등 검찰의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또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이 치외법권인 듯, 무법지대인 듯, 브레이크 없는 상급자들의 지휘권 남용, 일탈 사례를 적시하지 않으면 간부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체하실 듯해 부득이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풀어놓았다”며 검찰을 정면으로 비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총성 없이 국경 바꾼 벨기에와 네덜란드

    총성 없이 국경 바꾼 벨기에와 네덜란드

    유럽의 소국으로 알려진 ‘베네룩스 3국’인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총성 없이 국경을 재조정한다.벨기에 리에주 지방정부는 31일 2016년 11월 체결한 벨기에-네덜란드 영토 교환 조약이 2018년 1월 1일부터 발효돼 양국 간 국경이 재조정된다고 밝혔다. 조약에 따르면 벨기에는 뫼즈강 유역의 브띠 그라비에 반도(16헥타르)를 네덜란드에 넘겨주고 네덜란드는 프레스킬 드 리랄 반도(3헥타르)를 벨기에에 이양하도록 했다. 두 나라 국경인 뫼즈강 지형변화로 접근이 어려운 상대국내 자국 영토를 맞교환하는 내용의 이번 조약 발효로 벨기에 영토는 줄고 네덜란드 영토는 넓어진다. 국경과 영토면적의 변화를 가져오는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총성 없이 평화롭게 해결했다는데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간 국경은 뫼즈 강의 가장 깊은 곳을 따라서 1843년에 결정됐다. 그러나 1961년 강을 이용한 운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구불구불한 제방을 곧게 만들면서 벨기에 땅 일부가 네덜란드로 넘겨지고 네덜란드 국토의 일부가 벨기에에 붙게 됐다.더군다나 상대국 영토에 붙은 땅으로 원래 소속 국가에서는 도로로 접근하기가 어려워 양쪽 지역은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이 됐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양국은 2014년부터 국경 조정협상을 벌여 2016년 6월 협상을 타결하고 같은 해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양국 국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영토 교환 조약에 최종서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정남 암살 남성 4명 전원 북한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하는 데 관여한 남성 용의자들이 전원 북한인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현지 언론들이 6일 전했다. 지난달 2일부터 시작된 김정남 암살 사건 공판에서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이 남성 피의자들의 국적을 명확히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김정남 암살 사건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현지 경찰 당국자 완 아지룰 니잠 체 완 아지즈는 도주한 남성 피의자 4명의 이름 등 신원을 공개했다. 그는 ‘하나모리’란 가명을 쓰며 김정남 암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동양인 남성의 정체가 북한 국적자 리재남(57)이라고 밝혔다. 또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여)와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여)의 손에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를 직접 발라주고 김정남을 공격하게 한 ‘장’과 ‘와이’(Y)의 진짜 이름은 홍송학(34)과 리지현(33)으로 확인됐다. 장과 와이 등이 김정남을 공격하는 사이 공항 내 호텔에서 체크아웃 절차를 밟은 ‘제임스’란 인물은 북한인 오종길(54)로 밝혀졌다. 이들 4명은 지난 1월 31일부터 차례로 말레이시아에 입국해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김정남을 암살한 뒤 약 세 시간 만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행 여객기에 올랐고 이후 아랍에미리트(UAE), 러시아를 거쳐 평양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항공편은 치외법권인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은신해 있다가 3월 말 출국이 허용된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이 준비했다. 북한은 사망자가 김정남이 아닌 ‘김철’이란 이름의 평범한 북한 시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리재남 등 4명이 이번 사건에 연관됐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해 왔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민주당 ‘공공기관 근무 모집 문자’ 진위 논란

    “정부부처 파견은 파악한 적 있어” 한국당 “기회균등은 거짓” 비난 더불어민주당이 당직자들과 비례대표 순번 대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공공기관 근무 희망자를 신청받았다는 보도와 관련, 민주당은 “보도 내용과 같은 문자를 보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문화일보는 25일 민주당이 지난 7월 총무조정국 명의로 부국장급 이상 당직자와 비례대표 순번 대기자들에게 ‘공공기관이나 정부 산하기관으로 갈 의향이 있는 분들은 내일 낮 12시까지 회신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은 공식 입장 자료를 내고 “5월에 청와대 파견 희망자와 6월 말에 정부 부처 파견 희망자 의사를 파악한 적은 있다”면서 “정부부처와의 인사 교류 차원에서 부처에서는 수석 전문위원이, 당에서는 관련 담당자가 각각 파견을 가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당직자가 공기업에 파견 근무로 간 사례는 없다”면서 “공기업 인사는 논공행상이 아니라 전문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민주당이 보낸 문자에는 ‘정부기관 등으로의 파견근무를 희망하는 당직자는 지원 신청을 해 달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또 ‘파견근무 기간은 1년이며, 파견근무는 순환보직으로 운영된다’는 안내도 포함됐다. 민주당 이춘석 사무총장은 “청와대와 정부부처 파견 희망자를 파악하기 위해 문자를 보낸 적은 있지만 공공기관은 아니다”라며 “현재까지 당에서 청와대로 6~7명, 정부부처 순환보직으로 2명 정도가 파견근무를 갔다”고 설명했다. 김현 대변인은 “당직자가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기관에 파견근무로 간 사례는 없다”면서 “낙하산 인사라는 규정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야당은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자유한국당 정태옥 원내대변인은 “문재인 정부는 기회균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번에 보여 준 낙하산 인사 시도는 이것이 거짓말이었음을 보여 준다”면서 “정부기관 채용비리 조사를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이 속한 당의 비리부터 제대로 조사하라”고 지적했다. 바른정당 이종철 대변인은 “채용절차를 멀쩡히 두고 ‘보낸다’는 생각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사람들이 적폐 청산을 외치며 전임과 전전임 정권을 향해 사정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민주당 대표가 직접 국민께 해명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국민의당 김철근 대변인은 “고대 전쟁의 전리품을 나누듯이 공개적 희망자를 받는다면 어느 국민이 수긍하겠느냐”면서 “문 대통령의 공공기관 취업 관련 비리 엄벌 지시가 민주당에도 적용되는지 아니면 당직자들만 치외법권 구역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최다니엘, 제이와이드 전속계약 ‘요즘 뭐하나 봤더니..’

    최다니엘, 제이와이드 전속계약 ‘요즘 뭐하나 봤더니..’

    배우 최다니엘이 제이와이드컴퍼니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2일 제이와이드컴퍼니가 배우 최다니엘과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다수의 연기파 배우가 소속된 제이와이드컴퍼니는 “배우 최다니엘과 우리는 뜻을 모아 함께 하게 되었다”며 전속 계약 됐음을 밝혔다. 이어 “최다니엘은 매 작품마다 강렬한 연기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우다. 그가 앞으로 당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더욱 안정되고, 배우로서 다양한 작품 속에서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최다니엘은 큰 키와 호감 가는 마스크로 모델로 데뷔해 ‘그들이 사는 세상’ ‘지붕뚫고 하이킥’ ‘동안미녀’ ‘학교2013’ ‘빅맨’ ‘시라노; 연애조작단’ ‘공모자들’ ‘열한시’ ‘기술자들’ ‘치외법권’ 등 드라마와 시트콤 외에 영화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쳐왔다. 다양한 장르 속 캐릭터의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할 만큼 탁월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최다니엘은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로 손꼽힌다. 한편, 최다니엘은 서울지방병무청에서 모범 사회복무요원으로 군생활을 마쳤으며 앞으로 제이와이드컴퍼니와 함께 더욱 다양한 필모그래프를 쌓아갈 예정이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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