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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찰 洪斗杓사장 구속 안팎>

    20일 홍두표 (洪斗杓·64)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대한 구속은 말 그대로 ‘전격적’이었다. 경찰청 전 정보국장 박희원(朴喜元) 치안감이 알선수뢰 혐의로 구속된 지 하룻만의 일이다.검찰은 19일 밤 10시40분쯤 박 국장의 구속 수감과 때를 맞춰 홍사장을 임의동행 형식을 빌려 비밀리에 연행,15시간의 조사 끝에 구속했다. 검찰은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의 한결 날카로워진 칼날에 대해 정·관계 등에서는 ‘제2의 사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검찰은 최근 한달 동안 박규석(朴奎石)해양수산부 차관보,강정훈(姜晸薰)조달청장,박동수(朴東洙) 금융감독원 검사1국장 등을 비롯,이수휴(李秀烋)·이정보(李廷甫) 전 보험감독원장 등 전·현직 고위 관리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검찰 관계자도 “지금까지의 사정(司正)이 기간을 정해 놓고 몰아치기식으로 했다면 이제는 요란을 떨지 않고 전방위에 걸쳐 쉼없이 진행하는 ‘지속형’”이라고 털어놓았다. 홍사장의 경우도 이같은 수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특별히 언론계를 지목한 것이 아니라 최회장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홍사장의 혐의가 포착됐다는 것이다. 홍사장은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시절인 96년 12월 63빌딩 양식당 ‘가버너스 챔버’에서 최순영(崔淳永)신동아그룹 회장으로부터 100만원 짜리 수표 100장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홍사장은 최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장소와 시기 등을 인정하면서도 “대가성은 없었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최회장은 당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홍사장에게 전화로 점심약속을 제의했다.삼성그룹 출신인 홍사장이 KBS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KBS 직원의 퇴직적립금 등 사내기금이 삼성생명쪽으로 쏠리고 있는데다 KBS 사장직을 연임하는 등 실세로 부각되고 있어 알아둬서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는 게 최회장의 진술이다. 최회장은 홍사장과 점심을 하며 “언론의 보도가 기업에 중요하다.퇴직금을 우리쪽에 더 많이 넣어달라”는 등의 얘기를 나누었다.점심식사를 마칠 즈음 최회장은 100만원짜리 헌수표 100장이 든 봉투를 홍사장에게 건넸다.검찰은 이들 수표는 이미 세탁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계좌추적을 포기할 수밖에없었다.최회장은 이수휴씨 등에게도 세탁된 헌 수표를 건넸다. 검찰은 결국 최회장의 자백을 통해 홍사장의 혐의를 입증했다.63빌딩 양식당의 종업원이 당시 최회장과 홍사장이 만난 사실을 적은 쪽지도 수사에 보탬이 됐다. 박홍기기자 hkpark@
  • “국민여망 저버린 행위 깊이 반성”

    김광식(金光植) 경찰청장은 20일 오전 박희원(朴喜元) 정보국장의 수뢰사건과 관련,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김청장은 성명을 통해 “경찰 고위간부가 알선수뢰 혐의로 구속된 사건은경찰에 치안을 맡긴 국민은 물론 일선에서 불철주야 고생하는 15만 경찰의기대와 여망을 저버린 행위로 깊이 자성해야 할 일이라고 뼈저리게 느끼고있다”고 사과했다. 김청장은 이에 앞서 실·국장 간부회의에서도 “경찰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근신하고 자숙해야 한다”면서 “수뢰혐의가 사실로 드러난 이상 표적수사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경찰 일각에서 수사권독립 문제와 연결지어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지운기자 jj@
  • 경찰청 정보국장 구속 안팎

    검찰은 경찰청 정보국장 박희원(朴熙元)치안감의 조사와 관련,자칫 경찰의 수사권 독립 주장에 대한 ‘표적수사’로 비춰질 것에 우려하는 모습이역력했다. 서울지검 김규섭(金圭燮) 3차장검사는 19일 오후 브리핑에서 박국장에 대한 조사상황을 밝히기에 앞서 “이번 수사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과는 아무런관계가 없다.검찰은 소인배처럼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박국장의 수사에 대해 “경찰이 대대적으로 한 아파트관리 비리수사에서 대형업체가 빠진 점을 중시,10개의 대형업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국장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박국장은 대원종합관리 대표 김광철씨의 수첩에 기록돼 있었으며,김씨가 검찰에서 박국장에게 돈을 준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박국장은 전북 부안 고향 후배인 김씨를 최근 소개받아 알고 지내는 만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게 검찰 관계자의 말이다. 박국장은 검찰이 소환한 현직 치안감 가운데 3번째이다. 검찰은 지난 87년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에 연루됐던 당시 치안본부 5차장박처원(朴處源)치안감,93년 문민정부 초기 슬롯머신사건의 경찰청천기호(千基鎬)치안감 등을 구속했었다.이인섭(李寅燮) 전 경찰청장은 퇴직한 뒤 93년 7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됐었다. 경찰청은 박국장이 정보국장이라는 핵심요직을 맡고 있는 고위간부라는점에서 충격에 휩싸여 있다. 특히 자치경찰제 도입과 관련,수사권 독립을 주장하면서 검찰과 신경전을치른바 있어 박국장의 소환을 수사권 독립을 봉쇄하려는 검찰의 의지와 관련시키는 분위기까지 배어나오고 있다.최근 경찰에 흠집을 내기 위해 “검찰이 경찰 고위 간부를 손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청측은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것 외에는 일체의 공식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박국장은 검찰 출두에 앞서 김광식(金光植) 경찰청장에게 검찰 소환 사실을 보고한 후 “수뢰사실이 전혀 없다”고 결백을 주장한뒤 검찰청사로 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지운 김재천기자patrick@
  • 조직범죄·마약사건 수사 신고자·증인 보호제 도입

    검찰은 앞으로 조직범죄 신고자 및 증인에게 은신처와 자금을 제공하는 ‘미국식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도입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또 조직폭력배비호·은닉 사범은 조직폭력배와 같이 원칙적으로 구속수사하는 등 처벌을강화할 방침이다. 서울지검 강력부(朴英洙 부장검사)는 19일 서울시·경찰청·국세청·세관등 민생치안 유관기관 관계자 22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반기 민생치안 서울지역 대책협의회’를 열어 이같은 대책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검찰은 조직범죄·마약사건의 수사와 재판에서 범죄 피해자 및 목격자 등이 안심하고 수사에 협조할 수 있도록 서명없이 신고할 수 있는 간이신고제 도입 조서에 가명기재 허용 보복 우려있는 피고인의 보석제한 비공개 또는 피고인 퇴정후 증인신문 허용 등을 검토중이다. 조직폭력의 단속도 기존의 ‘계파별’ 위주에서 ‘이권별’ 심층·기획수사 체제로 전환,조직폭력이 개입하고 있는 사채업·신용카드업·주점·사설도박장·기업경영권·증권·건설 등 이권 분야별로 수사하는 등 단속의 실효성을 높이기로 했다. 박홍기기자 hkpark@
  • 정부 조직개편 모두 48차례

    대한민국 정부가 48년 수립된 뒤,조직개편은 지금까지 모두 48 차례나 있었다. 이 가운데 현행 정부조직의 기본틀은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공화당 정부에 들어와서 마련됐다.중앙정보부가 신설되고 77년 12월 개편 때 경제기획원이 설치되는 등 2원·14부·4처·14청으로서 틀을 갖췄다. 제5공화국 때 몇 차례 기구개편을 했으나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6공화국은 국토통일원을 통일원으로 개칭하고 부총리급 부처로 격상시켰다. 또 환경청을 환경처로 개편하고 문화공보부를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개편했다.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바뀐 것도 이 때다. 문민정부 들어와서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으로,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상공자원부로 통합,다시 통상산업부로 개편했다.또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개편했고 해양수산부와 해양경찰청 및 중소기업청이 발족됐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모두 2차례에 걸쳐 조직개편을 단행했다.정부 출범과 함께 1차 개편을 단행,기획예산위원회 등을 신설하고 총무처와 내무부는 행정자치부로 통합했다. 그러나 정부개혁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2차 개편이 단행되게 됐다.2차 개편은 정부수립이후 민간전문가들이 처음으로 정부조직에 대해 진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그러나 부처의 반발로 일부 개편안이 없었던 일로 되는 등 적지않은 진통을 겪었다. 박현갑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 경찰 수사권 독립 찬성/ 반대

    *찬성 자치경찰제 실시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경찰 수사권 독립문제가 반드시 검토돼야 한다. 영국 미국 일본 등 자치경찰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가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하고 있다.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검사를 수사 주재자로,경찰은 보조자로 해 검사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있어 수사 진행상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고 있다. 경찰은 매년 발생하는 150여만건의 범죄 가운데 96.7%를 실질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그런데도 경찰은 제도상으로 수사의 주체가 아닌 보조자에 불과하다.이는 책임과 권한이 일치하지 않는 엄청난 모순이다. 현행 소송법상 경찰은 시종일관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지만 소수의 검사 인원으로 연간 150만건에 이르는 범죄사건 수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경찰에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경미한 사건도 절차상 검사의 검토와판단을 거치게 돼있는 점은 국민의 불편과 심리적 부담감만 가중시킨다.사법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어 피의자나 참고인이 검찰에서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서장 등 경찰간부의 지휘와 검사의 지휘가 중복되다보니 지휘·명령체계가 이원화돼 있어 수사지연과 업무혼선이 초래된다. 이처럼 중첩된 검·경의 수사업무는 국가 인력과 예산의 비효율적인 집행이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경찰 수사권 독립에 대해 수사상 인권 침해의 가능성이나 법률소양 부족,법 적용의 형평성과 일관성 결여 등을 우려하고 있다.하지만 영장실질심사제도나 국가인권위원회,시민단체의 감시 등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경찰 또한 그동안 고시특채나 경찰대생,간부후보생,법대생 특채 등을 통해 고급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경찰이 처리한 사건 전부를 검찰에 송치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고사건 처리기준에 관해 통일된 지침 등을 마련한다면 법집행의 통일성과 형평성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金學培 총경]*반대 경찰이 이번에는 자치경찰제 도입과 관련하여 검사의 수사지휘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즉 수사권 독립 주장을 하고 있다. 경찰은 모든 사건 사고에 대해 검찰이 일일이 지휘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자치경찰제의 정착이 어렵다며 경찰 수사권 독립을 자치경찰제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적극 추진중이라고 한다.그러면서 수사 소추 재판을 각각 경찰 검찰 법원에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자치경찰제도는 경찰 내부의 조직 인사 예산 등 권한 일부를 지방자치단체에 이양,자치단체가 치안분야에 대해서도 책임행정을 하도록 하자는것이다.반면 검사의 수사지휘는 인권침해 사례를 방지하고 수사의 적정성을확보하기 위해 법관과 같은 자격을 가지고 신분이 보장된 검사의 지휘통제를 수사절차 진행과 동시에,또는 사전에 철저히 하자는 형사사법절차의 기본원리에 속한 것이므로 서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이다. 지역갈등이 심화되어 있는 현단계에서 자치경찰이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지않고 지역의 이해만을 고려한 경찰권 행사를 할 경우 전국적인 법집행의 형평성 통일성을 해할 뿐 아니라 통치권 행사에도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독일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일찌감치 그 논의가 종결됐고 최근에는 경찰의 기능 중 수사기능은 법무부에 편입시켜 그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미국 영국 일본 등도 현실제도와는 상관없이 검찰의 경찰수사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감독권한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수사 소추 재판을 경찰 검찰 법원에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는 마치 병원에서 수술준비,수술,수술후의 회복과정을 3분하여 별개의 자격을 가진 자가 담당해야 견제와 균형이 이뤄진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수사권 독립문제는 기관간의 권한쟁의 문제가 아니라 수사와 소추의 불가분성,국민의 인권 및 적법 절차보장이라는 형사사법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검토돼야 한다. [尹錫正 변호사]
  • 지방경찰제 내년중 시행

    정부는 시·도지사에 행정·치안·교육 등 지방자치 3권을 부여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우선 2000년중 지방자치경찰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정부는 또 2001년엔 교육자치를 지방자치와 통합 시행,교육감을 없애고 시·도지사가 지방교육의 책임을 맡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이와 관련,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 1일 전국 지방의회 의장단을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지방경찰제를 내년중 실시하려 하며,교육자치도 지방자치와 연계하거나 통합해 2001년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배석한 김기재(金杞載)행자부장관에게 “지방의정 활동비를 출석한 날만 지급하는 현행 방식을 회기별로 주는 방안으로 개선하는 문제를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사설] 경찰, 왜 이러나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지난달 27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이 폭력계장에게 얻어맞는 하극상이 벌어지더니 그보다 앞서 서울에서 경찰서장이 부하 경관을 폭행해 어금니를 부러뜨린 일이 뒤늦게 밝혀졌다.그뿐인가.근무중인 순경이 만취상태로 옆자리에 내연의 여인을 앉히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낸후 뺑소니치던 중 또 사고를 내 함께 탄 여인을 죽게한 사건도 있었다 한다. 수원에서 지방경찰청장이 어처구니없는 하극상을 당한 날 양평에서는 무기고의 총을 훔친 혐의를 받은 한 경찰관이 감사담당관실의 수차례 소환요구에불응하며 “내가 왜 가느냐.너희들이 오라”며 거부하다가 전격 구속된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경찰 기강이 무너져도 너무 무너진 것 같다. 경찰관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또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남이 보기엔 정신 나간 일을 저지른 경찰관들에게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경기경찰청의 하극상 사건은 단순 술주정으로 변명되고 있다.그러나 우발적인 실수라 하더라도 겨우 1주일 남짓 사이에 이런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는 것은 경찰 조직으로서는 용납해서는 안될 일이다. 시민의 재산과 안녕을 책임져야 할 경찰의 근무자세가 이처럼 풀어져서는민생 치안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그러고 보면 탈주범 신창원(申昌源)이 아직도 잡히지 않고 고관 집을 털었다는 도둑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수사결과 발표보다 더 믿는 것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경찰 기강의 해이는 지난 3월부터 이미 지적돼 온 사항이다.3월초 단행된경찰 사상 최대규모 인사 후유증으로 기강이 흔들린다는 우려가 제기됐었다. 경찰의 지휘 보고 체계가 엉망이어서 축소·늑장 보고가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것이다.경찰청장이 농협 영등포 지점 현금 도난사건을 이틀 뒤에야 보고받았는가 하면,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집 강도사건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야 알고 격노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인사 후유증이 가라앉을 때가 지났다.그럼에도 경찰 기강이 해이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사회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경찰이 흔들려서는 우리 사회가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경찰은 시민들이 평소에 피부로 실감하는 국가 공권력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찰이 무너지면 국가 공권력이 무너지는 것이고 이는 사회 해체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땅에 떨어진 경찰의 근무기강 확립과 윤리의식을 높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 한국, 외국인 거주여건 아시아 최악

    싱가포르 AFP 연합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 국가들중 외국인이 살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로 평가됐다고 싱가포르에 본부를 둔 정치경제위험투자자문사(PERC)가 25일 밝혔다. PERC는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12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479명을 대상으로 거주,국가의 치안,주택,자녀교육,의료여건과 문화적 친화성 등을 평가하도록 하는 연례조사 실시결과 이같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한국은 각 항목별로 가장 만족스러운 수준을 0점,가장 나쁜 수준을 10점으로해 실시한 평가에서 평균 6.75점.중국 인도네시아 인도는 물론 베트남보다도 나쁜 점수를 받았다.PERC는 한국이 대기오염과 높은 언어장벽 등으로 인한 문화적 친화성 결여,외국인을 위한 서비스와 시설부족 등의 요인 때문에가장 나쁜 점수를 받았다고 분석했다.반면 필리핀은 이 조사에서 평균 3.35점을 얻어 아시아 국가중 외국인이 살기에 가장 좋은 나라로 평가됐으며 싱가포르가 3.55점으로 2위,일본과 말레이시아가 각각 4.14점으로 공동 3위를기록했다.
  • 유고, 국제감시단 주둔 수용

    [워싱턴 최철호특파원·모스크바 베오그라드 외신종합] 나토가 전략을 수정해 유고연방에 대한 지상군 파병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슬로보단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은 22일 국제 감시단을 코소보 주에 주둔시키는방안을 수용했다고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러시아 총리가 전했다.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사태 러시아 특사인체르노미르딘 전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나토가 폭격을 중단하고 유고접경에서 병력을 철수한다면 러시아가 참여하고 유엔이 관할하는 국제감시단의 코소보 주둔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이 통신은 국제감시단의 무장여부와 활동지침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밀로셰비치의 제안을 보는 나토의 시각은 회의적이다.우선 코소보 주둔 감시군의 무장 여부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또 코소보 난민들의 안전한 복귀는 물론 자치안에 대해서 확실한 태도표명이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나토 회원국 간에 이견을 만들어 내겠다는 밀로셰비치의 속셈을 읽는 분석가도 많다. 클린턴 대통령은“국제보안군을 수용하는 의미일 경우 사태가 진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으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이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일축했는데 이 반응이 나토의 주조로 보여지고 있다. 한편 나토군은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이같은 제의설에도 불구하고 23일 새벽(현지시간) 연방수도 베오그라드 중심에 위치한 세르비아 국영TV 방송(RTS)본부건물을 폭격,꼭대기 2개 층을 파괴했으며 건물에 입주해 있던 3개 채널의 방송을 중단시켰다.
  • 金대통령 전주MBC회견“16대총선 연합공천 당연”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3일 전주 MBC 창사기념 회견에서 “자민련과 공동정권을 한 이상 선거에 나가면 거기서도 공조체제를 갖추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그래야 내년 16대 총선 이후에도 국민회의와 자민련 양당간 공조체제가 굳건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또 지방자치 확대 문제에 대해 “도지사가 지방에서 행정,치안,교육의 3권에 대해 책임지게 할 것”이라면서 “지방경찰제 도입 등 지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언급,“지난 1년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성과와 영향이 좋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남북관계에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고 내다봤다. 김대통령은 오는 2010년 동계올림픽의 전북 무주 개최에 대해서는 “2002년 신청서를 내면 정부도 보증서를 낼 것이므로 무주개최는 거의 된다고 봐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승현기자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22)-창작과 비평사

    진시황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었다.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앗은 자들은 늘 그러했다.저항을 부르고 수많은 ‘금지’를 낳았다.우리 현대사에도 ‘지상의 양식’을 지향하다 ‘잉크를 묻힌 죽은 물체’가 돼버린 옥고들이 많다. 시집 ‘신동엽전집’(75),‘국토’(조태일),‘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82)‘대설 남(南)’(〃,82),‘8억인과의 대화’(리영희,77)…등도 그 대열에있다.당국의 붉은 딱지가 붙은 이 책들은 모두 모태가 같다.69년 등록한 출판사 ‘창작과 비평사’다. 저항의 첫 발은 약간 거슬러 올라간다.66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문우출판사에서 발행한 132면의 문예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그것. ‘…대중의 소외가 혹심한 사회일수록 철저한 수준을 고수하는 소수 작가·지식인의 비중이 커지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국토분단과 기성사회의 모순을 유지함으로써만 자신의 특권을 간직할 수 있는 소수를 제한다면,적어도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잠재적으로나마 우리의 이상에 동조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창작과 비평’창간호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자세’의 일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영문학자 백낙청교수의 의도에 공감한 국악인 황병기씨 등 지인들과 문우출판사 오영근사장 등이 쌈지돈을 모았다.‘비평의 정신’을 싹틔운 주역은 백교수와 소설가 한남철,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조교 김상기,기자이던 임재경·이종구씨 등 5인이었다.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69년 백낙청교수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염무웅교수(영남대 독문학)가 편집장으로 바통을 이어받아 암울했던 70년대를 버텼다.염교수는 ‘창비의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과학이나 현실에 발딛고 기본 민주주의 성취,실학·국학시리즈로 민족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분단 극복 지향,기층 민주주의 역량성장에 이바지등 3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학의 고유한 미적 가치를 최대로 추구하면서 이런 과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목적주의 문학이나 천박한 참여문학과는 차별성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에 발행한 ‘신동엽전집’(창비신서 10,75년)이 긴급조치 9호의 미움을 사면서 창비의 ‘화려한 금서 리스트’가 막을 연다.이어 77년에 ‘8억인과의 대화’(창비신서 18)로 편역자 리영희교수와 발행인 백낙청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리교수는 구속되고 백교수는불구속 기소되었다. 수난속에서도 명맥은 유지하던 ‘창비’는 80년에 이르러 ‘절망적인 탄압’에 직면한다.7월말 국가보위입법회의로부터 계간 ‘창비’의 강제 폐간이라는 철퇴를 맞은 것이다. 암중모색하던 ‘창비’는 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창비시선 33)로 새벽을 열려고 나섰다.이화여대·연세대 앞에서 불티나게 팔리던시집은 학원사찰팀의 눈에 띄여 판매금지·압수라는 공식적인 과정을 거쳤다.“압수된 책이 작두로 잘렸다”는 ‘창비인’들의 회고는 당시 검열의 상징이다.심지어 국세청 세무사찰로 추징금 1,000만원을 부과하는 비열한 수단도 동원했다.이에 굴하지 않고 ‘대설 남’ 1권을 내놓았으나 문공부가 판매금지하고 전량을 봉인했다. 끊임없이 ‘비판의무기’를 갈던 ‘창비사’는 85년 부정기간행물(무크)로 얼굴을 달리하여 ‘창비’ 57호를 간행했다.이번에는 서울시가 불법으로 정기간행물을 냈다는 꼬투리를 잡아 ‘출판사 등록 취소’로 탄압했다. 그러나 이제 ‘창비’는 혼자가 아니었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항의농성 및 성명발표와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등 11개 출판사 대표의 항의성명이 이어졌고 문인·학계 인사가 중심이 돼 등록취소에 항의하는 ‘범지식인 서명운동’을 펼쳐 2,853명의 서명록을 문공부에 전달했다. 당시 발행인이었던 김윤수교수(영남대)는 “회사가 없어져 책임자로서 어깨가 무거웠다”면서 “‘창비’를 살리려고 문공부 담당국장과 10개월의 마라톤 협상에 들어갔다”고 밝힌다.그 과정에 당국은 ‘창비’ 회생조건으로 백교수가 손을 떼고 이름도 바꾸라고 강요했다. 어렵사리 사태를 수습한 김윤수 발행인은 86년 8월5일 ‘창작사’로 신규등록했다.87년 2월6일 부정기간행물 형태로 ‘창비 1987’(통권 58호)을 간행했다.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 ‘창작사’는 87년 2월17일 ‘창작과 비평사’라는 출판사 이름을 되찾았고 다음해 계간 ‘창비’도 다시 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평탄한 앞날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어 다시 수난시대로 접어든다.이시영주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시영 상임고문은 “11월 23일 퇴근 길에 남산으로 끌려갔는데 안기부는그동안 저를 통해 최대로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문단에 대한 총점검을 하려고했다”면서 “‘창비’ 매호를 낱낱이 분석하고 필자들 성향까지 꿰뚫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숨가쁜 ‘창비’의 발자취에는 일그러진 현대사의 모습이 오롯이 녹아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기름지게 한 거름이기도 하다.정해렴 김윤수 고세현씨등으로 이어지는 발행인을 중심으로 현대사의 주역들을 일궈냈다. 고은 조태일 김지하 신경림 이성부 이시형 김용택 곽재구 김남주 고정희 김명수 등이 시로 독재자에‘침을 뱉었다’.이문구 황석영 현기영 방영웅 김한수 등이 소설이라는 쟁기로 척박한 땅에서 리얼리즘의 열매를 일구었다.송건호 리영희 박현채 강만길씨 등은 우상을 깨고 이성을 외쳤다.‘창비’는이들의 ‘사상의 거처(居處)’였다. 이제 ‘창비’의 나이 33세.‘잔치를 끝내지 않으려’는 과제가 남아 있다. 지난 96년 ‘영원한 창비인’ 백낙청교수(하버드대 교환교수로 재미)가 창비 30년을 정리하면서 밝힌 입장에서 ‘창비’의 앞날은 여전히 튼실할 것임을 예고한다. “정말 중요한 일은 시장경제의 논리와 ‘창비’ 고유의 지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혹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이겠습니다”이종수기자 vielee@
  • 「지방행정 개혁 보고」金대통령 시·도 순시 이렇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5일 인천시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 대한‘지방행정개혁보고회의’에 참석한다. 중앙부처의 업무보고를 ‘국정개혁보고회의’로 명명했듯이,지방도 21세기와민생개혁과제 보고에 회의의 중점을 두겠다는 의미다. 실제 김대통령은 먼저 지난해 업무보고때 약속이 제대로 이행됐는지를 점검,지방행정의 실천여부를 살피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다.또 지방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에 대한 예산지원 건의가 잇따를 것으로 보고,국정전반에필요한 사업으로서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가리겠다는 구상이다. 박지원(朴智元)청와대대변인은 “국정의 전체적인 틀 속에서 중앙의 예산지원이 필요하고 예산상 지원여력이 있는 경우에는 지방정부와의 재정분담을전제로 최대한 지원해준다는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또 중앙부처와 마찬가지로 토론중심으로 바꿔 ‘생동감있는 회의’가 되도록 할 방침이다.시·도지사 구두 업무보고를 15분 이내로 줄이고 지방간부들과의 토론시간을 30분 정도 늘려,대통령과지방공무원들간 토론을 중심으로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시·도지사 구두보고 시간을 줄인 것은 중앙부처 회의가 장관들의 구두보고로 다소 지루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그 지역언론과의 회견 및 지역주민들과의 오·만찬을 통해 지역의생생한 여론과 정서를 파악,국정운영에 참고하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김대통령은 이날 인천 보고회의에서 최기선(崔箕善)시장을 비롯 교육감,지방경찰청장 등 지역간부들과 토론을 벌였다.특히 최시장에게는 지역 최대 현안인 인천국제공항과 송도미디어밸리 건설사업에 대한 인천시의 지원대책을 물었고,학생들의 적성교육 실태와 학교폭력 현황,심지어 ‘왕따’학생의 신고율까지 캐물었다.배석한 金杞載행자·李海瓚교육·李廷武건교장관에게도 인천시가 요구한 예산지원 및 용지확보 등에 대해 의견제시의 기회를줬다. 지방보고회의는 김대통령의 15분동안의 지시사항으로 마무리됐다.김대통령은 인천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주변국가와 서로 협조,광대한 시장에 진출하고 투자유치 등의 협조를 이끌어야 한다.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 인천이어서 맨 먼저 방문한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인천시의 교육,치안,주요 사업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21세기 무한경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무엇보다도 큰 관심은 인천의 높은 실업률에 있었다. 김대통령은 우려를 표시한뒤 ▲중소기업 및 벤처기업의 육성과 문화관광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시급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주문했다.그러면서 “미국이 경기변동론과 관계없이 7∼8년동안 호황을 맞고있는 것은 지식정보사업을 육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이는 인천시가 중점을 둬 추진중인 송도미디어밸리에 대한 기대의 표시이기도 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유고에 평화안 수락…나토,압박강화 합의

    워싱턴 최철호 특파원 · 브뤼셀 외신 종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은 11일밤과 12일 새벽(현지시간)에 걸쳐 전폭기와 크루즈 미사일로 유고연방제2의 도시인 노비사드와 공업도시 판체보등의 정유소를 비롯한 산업시설을집중폭격했다. 유고 관영 탄유그통신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15㎞ 떨어진 판체보에서 여러 차례의 폭발이 발생했다고 전했으며 세르비아 텔레비전은 판체보 정유공장에서 발생한 거대한 화재로 불기둥이 밤하늘을 밝히는 장면을 방영했다.판체보 정유소가 폭격당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한편 나토 회원국들은 12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브뤼셀에서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20일째를 맞은 유고연방 공습과 코소보 난민 대책등을 논의했다. 공습 개시 이후 처음 열린 이번 나토 19개국 외무장관회담에서는 슬로보단밀로셰비치 유고대통령에게 회원국들의 단결된 의지를 보여주고 국제사회가제시한 평화안 수락을 종용하기 위해 압박을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의는 13일 오슬로에서 열릴 올브라이트장관과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회담을 앞두고 소집된 것이어서 공습과 관련한 러시아의 반발을 무마할 외교적 방안도 심도있게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나토 소식통들은 현재 거론되고 있는 정치적 해결방안 중 코소보 독립 방안은 알바니아계가 많은 마케도니아,그리스,터키등을 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실현성이 낮은 것으로 보고 있고 코소보 보호령 설치안도 장기간 나토병력 주둔을 필요로 해 실현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올브라이트장관은 11일 “코소보 해결방안의 하나로 유고군의 코소보 주둔을 일부 허용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 규모는 유고측이 제의한 수준보다 훨씬 축소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또 코소보 분리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있다고 밝히고 다만 “코소보 분리시 세르비아계 그리스 정교의 성지는 제외할 수 있다”는입장을 보였다. 나토가 공습 중단 조건으로 현재 유고에 요구중인 사항은 ?코소보내 전투중단 ?유고군 철수 ?국제평화안 수락 ?난민 귀환 ?코소보사태의 정치적 해결 약속등이다. hay@
  • 국민회의 지도부 과제/黨 추스르고 野아우르기 첫 관문

    국민회의 金令培총재권한대행 체제가 9일 공식 출범했다.긴급 소집된 당무위원회의 인준을 받았기 때문이다.12일 의원총회에서 韓和甲전총무의 후임을 선출하면 일단 8월 전당대회까지 지도부의 라인업은 갖춰진다. 새로운 국민회의 지도부 앞에 놓인 과제는 정치개혁이다.金대행은 취임 일성(一聲)으로 “당면 정치과제인 정치개혁을 처리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국민회의 安東善지도위의장과 자민련 金宗鎬부총재를 각각 대표로 하는 8인정치개혁특위 위원들은 10일 첫 모임을 갖는 등 정치개혁에 대한 발걸음도빨라질 것 같다.공식적인 8인정치특위와는 별도로 ‘찰떡궁합’이라는 국민회의 韓光玉부총재와 자민련 金龍煥수석부총재 라인도 가동될 것 같다. 金대행은 “공동여당의 상호관계도 과거보다 더 철저하고 공고한 협조관계로 성숙돼야 한다”고 말했다.한나라당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후유증을 수습하려는 의지와 공조 강화를 역설한 것이다.조직 장악문제도 새로운지도부의 과제다.金대행은 과거 통일민주당과 평민당의 사무총장 출신이라조직장악력은 정평이 나 있지만 여권은 어느 때보다 조직 장악에 신경쓸 수밖에 없다.제 2의 ‘4·7파동’을 막기 위해서다. 鄭均桓총장이 “조직 장악이 됐으면 徐의원 체포동의안이 일사분란하게 처리됐을 것”이라며 “앞으로 조직 장악과 양당 공조에 신경쓰겠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그동안 무기력했다는 말까지 들었던 지도부의 ‘말발’이 더 세질 것은 확실하다.金대행과 趙世衡전총재권한대행의 스타일 차이도 그렇지만 ‘4·7파동’변수까지 합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타협보다는 대립적인 관계로 비춰졌던 여야 관계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도 시급하다.金대행은 “개혁과 경제회복의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려면정치안정이 있어야 한다”며 “여야 관계가 대립보다는 상호협력 관계로 전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게 이런 이유에서다.일단 분위기는 괜찮은 것같다.정치개혁의 성패도 여야 관계에 달려 있다. 金대행의 수명이 8월 전당대회까지의 ‘시한부’로 끝날지 내년 16대 총선때까지 장수를 누릴지는 대행기간의 성과에 달려 있다.
  • 李서울경찰청장-형사반장 대화…”고소·고발사건관련…”

    李茂永 서울경찰청장은 6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청 2층 강당에서 ‘형사반장 및 조사관들과의 대화’를 통해 일선 경찰관들의 애로사항과 열악한 근무여건 등에 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들었다. 이번 행사가 마련된 것은 서울청장이 일선 형사·조사관들을 직접 만나 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효과적인 민생치안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다. 李청장은 “일선 형사들의 수사활동과 범인검거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계급을 초월한 한 명의 ‘수사관’으로 대우해야 한다”면서 “일선 형사들이 자긍심을 갖고 적극적인 수사·조사활동을 할 때 민생치안과 경찰개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모처럼 마련된 ‘윗분’과의 대화마당을 적극 활용,형사·조사계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사전 전문교육 미흡 등 당장 눈앞에 닥친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영등포경찰서 조사계 安贊洙 경위는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사전 전문지식이 필요해 업무숙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적절한 사전교육이 부족한 상태”라면서 “조사관 1명당 60∼70건의 사건을 맡고 있는 만큼 과다한업무량을 줄이기 위한 인원보강도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李청장은 이같은 문제제기에 “적극 검토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이날 행사에는 李청장과 閔昇基차장을 비롯,31개 경찰서장과 수사·형사과장,일선 형사반장·조사관 등 550여명이 참석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31)문명기

    ◆경북 영덕 최고부자 文明琦 잊을만 하면 한번씩 기자를 찾아와 친일파·현대사 인물 등에 관한 자료(정보)를 제공해주는 분이 한 분 계신다.겨우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 그 분의 신상에 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다.다만 그 분이 건넨 자료 가운데는 대단히 우수한 것들이 많음에 번번이 놀랄 뿐이다.자료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통해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혀를 내두를 뿐이다. 특히 누구는 누구의 부친이고,누구는 누구와 사돈간이고… 등등의 ‘사람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공간(公刊)된 자료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때로는 문헌자료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지난 겨울에 찾아와 건넨 그 분의메모 속에는 일제때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에 군납(軍納)을 하면서 떼돈을 번 손창식(孫昌植)을 비롯해 여러 명의 친일파가 등장한다.그런데 그중 한명은 한 때 자신이 그의 ‘괴짜인생’을 교훈으로 삼을 뻔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70년대 초반 어느 신문에서 그 사람의 출세비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그때는 그의 친일행적을 전연 몰랐다는 것이다.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일제때 경북 영덕 읍내 영덕경찰서장집 마당에 아침마다 팔뚝만한 삼치 한마리가 떨어져 있곤 했다.이를 이상히 여긴 그 집 식모가 어느날 아침 이를서장에게 고하자 서장은 주인공을 찾아보라고 하였다.며칠 만에 식모가 삼치를 떨어뜨리는 주인공을 잡고 보니 그는 지게에 생선을 지고 다니며 파는 생선장수였다.마침내 서장이 나와 무슨 연유로 매일 아침 마당에 생선을 놓고가느냐고 묻자 그 생선장수는 “서장님께서 치안을 잘 유지시켜 주시니 덕택에 저 같은 사람도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달리 보답할 길은 없고 해서제가 파는 생선이나마 드려서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탄복한 서장이 “내가 뭐 도울 것은 없소?”하고 묻자 그는 “특별한 부탁은 없습니다만…밑천이 달려 물건을 많이 받아올 수가 없어서 겨우 지게꾼 행상을 하는 것이…”하고는 말끝을 흐렸다.그러자 서장이 “그럼내가 생선도매점에 소개장을 하나 써주겠소” 하고 약속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경찰서장의 소개장 덕에 그는 이 일대에서 생선장사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생선을 미끼로 출세길을 튼 이사람은 일제 당시 경북 영덕 일대 최대의 부자 문명기(文明琦·창씨명 文明琦一郞)였다.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민족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문명기는 187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문승환(文承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씨 부자가 언제,어떤 경로로 경북 영덕에 뿌리를 내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으로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1935년 간행)에 따르면 그는 29세 때인 명치 40년(1907년)쯤 제지업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있다. 생선장사로 돈을 모은 그가 제지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 일대가 종이원료가 풍부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그는 자기 공장에서 종이를 생산하면서 다른 공장의 종이를 사서 이를 만주로 내다팔기도 하였다.사업이 번창해지자 그는 제지업계의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하에 광제회(廣濟會)라는 재단법인을만들어 종이 생산·판매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아울러 그는 이같은 이권단체를 통해 일제 관헌과 조직적으로 유착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산업과 제지업에서 자본을 축적한 그는 당시 유행하던 금광사업에투자하였다.일제 당시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일본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조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운(運)을 담보로 한 금광사업 정도였다. 따라서 이 분야는 조선인 사업가들이 일제로부터 별 간섭 없이 진출할 수 있던 분야이자 조선인 토착자본의 집중 투기대상이기도 했다.1932년 영덕군 지품면 도계에 있던 금은광산을 인수,자신의 이름을 따 ‘문명광산’으로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향후 사업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경북지방의 모퉁이인 영덕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35년 그가 육·해군기 각 1대씩 비용으로 10만원을 헌납하면서부터다.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금광을 일제 당국의 주선으로 일본유수의 미쓰코시(三越)측에 12만원을 받고 매각하고는 그 대금 가운데 10만원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이다.어림잡아도 현재의 10억원 규모의 거액을 비행기 헌납금으로 내놓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일제는 그를 ‘애국옹(愛國翁)’이라고 치켜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에 활용하면서 그가 헌납한 돈으로 구입한 비행기를 ‘문명기호(文明琦號)’로 명명하였다.경성비행장에서 열린 명명식에는 일본의 해군대신 대리가 참석하였고 행사 후 해군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 요란을 떨었다(매일신보 1935.4. 7). 이후 그는 곧바로 영덕 국방의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다시 재향군인회 특별회원,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 등에 선임되었다.일약 이 지역의 명사로 등장한 그는 뒤 이어 경북도회 의원,중추원 참의에 피선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명성과 함께 그의 친일 행위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그는 조선 전역에서 ‘1군(郡) 1대(臺) 헌납운동’을 펴자고 주창하고는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만들어 여기에 1만원을 기부하면서 대대적인 헌납운동을전개했다.이후 전국에서 군 단위나 단체별로 헌납 주체의 이름을 딴 ‘애국기헌납운동’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밀양 지역의 ‘밀양호 (密陽號)헌납운동’의 경우 총모금액은 10만원,모금대상은 전 밀양주민인 것으로 나와 있다. 한편 당시 ‘헌납병 환자’ 또는 그의 이름을 빗댄 ‘야만기(野蠻琦)’ 등으로 불린 그는 두 차례의 헌납에 이어 다시 육군과 해군에 각각 2만원,4만원을 헌납하였다.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에는 비행기로는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번에는 ‘헌함(獻艦)운동’을 제창하고는 솔선하여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동광(銅鑛) 3개를 기부하였다(매일신보 1943.1.24).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일제의 강요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동적·소극적 친일을 한 반면 그의 친일은 다분히 의도적·적극적이라는 데 분명한 차이가있다.중일전쟁이 발발(1939.7.7)하자 그는 황군(皇軍·일본군) 위문차 북지(北支·북중국)로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전쟁 미화를 골자로 한친일연설을 하였으며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경부선 주변 각도시를 순회하며위문결과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듬해에는 의남(義男)단원을 강제로 모집,수많은 조선청년을 북지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일어판 친일지 ‘조선신문’사장,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협조에 광분하였다. 그의 대표적 친일행각 중 하나는 그가 전시하 황도(皇道)선양을 목적으로조선 내 각 가정에 ‘가미다나(神棚)비치운동’을 전개한 사실이다.‘가미다나’란 일본의 개국신(開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영부(靈符)를 안치한 것으로,이를 집안 높은 곳에 비치해 조상신으로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전국으로 보급하기 위해 광제회라는 보급단체를 조직,자신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경성부윤(현 서울시장)을 명예회장에 추대,남산 조선신궁에서 가미다나 분포식을 거행하고는 1차로 서울시내 각 정회 총대(町會 總代,동장) 130여명에게 가미다나를 나눠주었다.이후로 조선 내 각 가정에서는 신사참배와 함께 일본황실의 조상을 강제로 받들어야만 했다. 평소 일본 신도(神道)의 철저한 맹신자였던 그는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것으로도 유명하다.집안 치장이나 의복·언어는 물론 생활방식까지도 전부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였다.1943년 7월 그는 황도선양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1949.1.29)돼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호적에 따르면 이후 행방불명돼 생사확인이 곤란하다.
  • [제2공화국과 張勉](11)신구파 대립과 分黨(下)

    張勉총리는 조각(組閣)을 발표한 다음날인 1960년 8월24일 아침 기자회견을 가졌다.새 내각의 포부,국민에의 바람 등 기본사항 몇가지에 관해 질의·응답이 오간 뒤 한 기자가 신파 일색의 조각 결과를 염두에 둔듯 ‘거북한 얘긴데…’라며 물었다.“이 내각이 얼마나 오래갈 것으로 생각하는가.” 張총리는 각료 13명을 한번 훑어보고는 “이 내각은 잠정적인 것이며 언제든지 거국내각을 짜겠다”고 답변했다.이어 “민주당 구파도 좋고,무소속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거국내각을 조속히 구성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신문들은 이를 두고 “張총리 자신이 아마 신파 단독내각에 몹시 불만이 있거나여론의 압박을 느끼는 모양’이라고 풀이했다. 국민에게 내각출범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개각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것이 張勉이 처한 현실이었다.‘7·29 총선’에서 80% 가까운 의석을 독점했으나 그것은 민주당 신·구파를 합한 숫자일뿐,신파건 구파건 단독으로는 의회에서 안정세력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였다. 張총리가 이처럼 기자회견 석상에서 공식적인 ‘구애(求愛)’를 했는데도구파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尹潽善·張勉·郭尙勳·柳珍山 등 청와대 4자회담에서 ‘신·구파 장관 비율을 5대5로 한다’고 합의한 내용을 깼으므로 더이상 신파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구파의 반격은 즉각 나타났다.8월31일 민의원(民議院)에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했다.가입한 의원은 86명이었다.9월3일에는 柳珍山을 원내총무로 선출했다.내각책임제 아래 힘의 원천인 민의원에서 신·구파는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간 것이다. 張총리는 9월2일 “구파의 교섭단체 등록은 사실상 분당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한쪽으로는 구파를 품에 안는 개각을 추진했다.“장관 5석을 줄테니들어오라”는 제의였다. 사태에 큰 진전이 없자 洪翼杓내무,玄錫虎국방,李泰鎔상공,吳緯泳 국무원사무처장 등이 9월7일 사표를 낸다.구파를 받아들이려고 빈 자리를 미리 만든신파의 고육지계(苦肉之計)였다.이틀뒤 구파는 조건부로 입각을 결정한다.입각은 단순히 ‘파견’이며 지도부가 ‘소환’하면 언제라도 그만둔다는 내용이었다. 張내각은 출범 20일만인 9월12일 權仲敦국방,金佑枰부흥,朴海楨교통,趙漢栢체신,羅容均보사 등 구파 5명을 새로 받아들인 개각을 단행했다.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鄭憲柱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사무처장으로 옮겼다. 2차내각이 비록 ‘연립’의 모양을 갖추긴 했지만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張勉 회고록에 따르면 “尹潽善씨는 구파에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말했다”는 것이고,또다른 구파 지도자인 金度演도 “어느 부 장관에 누구를 배정해달라고 시사했는데도 무시했으니 참다운 협조정신으로 보기 어렵다”고 공식적으로 평했다. 이제 분당(分黨)이라는 물줄기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구파는 내각 참여 나흘만에 분당작업에 착수해 민의원 65명,참의원 17명에게서 서명을 받았다.이에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미루던 신파도 민주당 명의로 교섭단체를 공식화한다. 60년 9월23일 현재 민의원의 교섭단체별 의원 수는 민주당(신파)95,구파동지회 86,무소속 모임인 민정구락부가 41,그밖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의원9명 등이었다.아직도 신파만으로는 과반수에서 21명이 모자란,여당의 ‘안정다수 확보’와는 거리가 먼 세력판도였다. 분당이 현실로 나타나자 구파 내에서 이를 거부하고 신·구파 화합을 이루려는 의원들,세칭 ‘합작파’가 등장한다.합작파에는 구파의 공식참모기구인 ‘7인위’의 閔寬植을 중심으로 31명이 참여했다. 합작파는 9월30일 성명을 발표한다.“내각책임제 정치는 원내 안정세력 유지에서만 가능한 것인데,신파나 구파나 단독으로 안정세력을 구축할 수 없음은 사실상 입증됐다.그러므로 신·구파가 일치단결하여 난국타개의 힘찬 기개를 국민 앞에 실증해야 한다”는 요지였다.아울러 ‘분당을 추진하는 자를 제명처분하라’는 등의 5가지 사항도 요구했다. 그러나 구파는 한발한발 분당의 길로 나아간다.11월8일 신당발기준비대회를 열어 이때부터 신민당(新民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민주당과 별개의당으로서 독립한다.민주당은 창당 5년한달여만에,또 7·29총선에서 국민의전폭적인 지지를 받은지 석달여만에 신파의 민주당과 구파의 신민당으로갈라선 것이다. 그렇다면 신·구파 분당을 당시에는 어떻게 평가했을까.7·29총선 직후인 8월3일 서울신문은 ‘민주당은 갈려야 하나’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를 실어분당에 대한 학계인사 3명의 찬반론을 소개했다. 먼저 金成熺 서울대교수(정치학)는 “신·구파는 전연 노선 차이가 없고 문제는 관직의 분배에 있다”고 지적하고 “민주당이 구체적인 정책실현도 해보지 않고 분당한다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金相浹 고려대교수(정치학)도 “민주당이 분당하려면 절차를 밟아 다시 총선거를 함으로써 국민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申奭鎬 고려대교수(역사학)는 “민주당이 7·29총선에서 예상외의 압승을 함으로써 국민은 또다시 일당독재를 염려할 현실에 처하였다”면서 “대국적인 견지에서 일당독재를 방지하려면 절대적으로 분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분당을 찬성하는 여론은 일부 있었다.그러나 그후의 역사는,분당과정과 그후 민주당(신파)·신민당(구파)의 대립이 내각책임제에서 정치안정을 무너뜨리고 張내각의 정책수행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신·구파 정쟁이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다만 국민 여망을 저버리고 내부의 권력투쟁에만 집착하는 정치세력은스스로를 망치고 국민에게도 큰 불행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60년 11월 발기준비대회를 열어 딴살림을 차린 신민당은 61년 2월20일 창당식을 갖고 정식 출범한다.위원장에는 金度演이 선출됐고 당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는 간사장에는 柳珍山이 뽑혔다. 李容遠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7)

    한국판 ‘주홍글씨’라 평가받는 ‘순애보(殉愛譜)’의 작가 박계주는 기독교적 휴머니즘과 민족주체성의 추구자세를 바탕삼아 대중소설을 계몽의 도구로 활용했다.만주의 간도 용정 출생답게 그는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분단현실을 어느 대중소설가보다 더 많이 다뤘으며,6.25 때는 박영준,김용호,김수영 등과 같은 문인처럼 납북 도중 탈출한 경력이 있다. 장편 ‘여수’는 1961년 6월 11일부터 같은 해 11월 28일 게재 중단 당할때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정치 이데올로기가 문제되어 신문 연재소설이 중단되기는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시기적으로는 5·16군사쿠데타 직후의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이 소설이 정면으로 주장했던 남북한 교류와 반공정책의 허울 아래 빚어진 독재권력의 부패상,여기에다 치명적인 쟁점이 된 8·15직후의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안(세칭 신탁통치안)에 대한 비판은 당시 정치·역사학계에서도 미처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민감한 이데올로기적인 금지구역이었다.문제의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11월 28일자에대학교수이자 작가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소설을 써서 반정부 작가로알려진 이춘우가 유럽 여행 중 오스트리아에 들렸을 때의 착잡한 사념들을서술한데서 발단되었다.오스트리아는 제2차대전 후 미·영·불·소 4강국의분할통치라는 비운을 맞았으나,한국과는 달리 이를 수용하여 1955년 7월 분단이 아닌 통일 독립국가로,11월엔 영세중립국이 된 나라이다.이런 나라를여행하면서 작가 이춘우는 분단 조국을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상념에 빠져든다. “춘우는 문득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를 생각했다.그는 신탁통치를 찬성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던 것이다.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당시 송진우의 의견대로 오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다.국제신탁통치를 하게되면 북한남한으로 양단되지 않은채 몇 개 통치국가들이 남북을 공동감시하며 공동통치하게 되기 때문에 양립된 불가침의 군정은 없었을 것이다.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의 인사들은독립투쟁을한 애국자이기는 하지만 앞을 내다보거나 앞을 저울질할 줄 아는 정치가가못되는 반면 송진우는 독립투쟁은 하지 못하였을망정 앞을 내다보는 구안(具眼)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대체 해방직후 아무런 경제적 지반도 없고 경찰력도 군대력도 없고 행정적 정치적 훈련도 없고 산업도 마비상태였는데 ‘돈립국가’라는 문패만 붙잡고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아닐수 없다” 마지막 부분의 ‘돈립국가’란 ‘독립’의 오자인지 ‘돈으로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풍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었다.물론 이 서술이 역사적인 진실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나 그 당시구전되어오던 금기사항을 이렇게 문자화 해 버리자 반격은 의외로 빨랐다.‘동아일보’ 29일자 1쪽에는 아래와 같은 2단 상자 사고(社告)가 실렸다. “ 사고.그간 본지 조간 4면에 연재해 오던 박계주씨 집필인 소설 ‘여수’는 비록 소설이라할지라도 지난 27일자 조간 게재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현저히 상이하므로 본사는 해 소설을금후 게재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독자 제현에게 알리오며 아울러 사전에 발견하여 시정치 못하였음을 송구히 여깁니다.이 점 독자제현의 양찰을 바라마지않습니다.동아일보사” 이 소설은 비판적인 작가 이춘우의 유럽일대(프랑스·영국·독일·오스트리아 등) 여행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북한에서 모스크바까지 다녀와 최승희 무용단에서 활약 중 6·25 때 서울로 위문공연차 왔다가 도주한 김미전은 고모네 마루 밑에서 몇 달 동안 피신할 때 만났던 이춘우를 사모하게 된다.그녀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으나 간첩으로 몰리는 등 갖은 수모와 고생을 하면서도 무용가로 활동 중 춘우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김미전을 비롯한 주변 여인들과 남편의 관계를 의심하던 춘우의 아내 의숙은 홧김에 춤바람으로 놀아나면서 남편의 불륜을 기사화시켜 교수직에서 쫓겨나도록 만드나 후회코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다.국내 망명자 신세가 된 춘우는 먼저 프랑스에 들러 미전을 만나야 하지만 미적대다가 6·25때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둔 파리의 창녀 이본느를 만나게 된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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