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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픈상처 묻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자”/「5·18」수사 각계의반응

    3만여명이 넘는 고소·고발인에다가 10만쪽이 넘는 수사기록,1년2개월여를 끌어온 수사기간 등으로 초미의 관심을 모은 「5·18」 고소·고발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공소권 없음」으로 끝나버리자 고소·고발인과 시민·재야단체·야당정치권 등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발했다.반면 피고소·고발인 당사자와 여당 정치권등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그러나 이번 사건 수사는 일단 매듭지어진 것으로 비춰짐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대정부 강경투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어 앞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시민/불법 쿠데타에 면죄부 준것… 모든 문제 법테두리서 △안상수(변호사)씨=군주정치시대의 산물인 통치행위의 개념으로 불법적인 쿠데타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헌법에 명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치행위를 인정해서는 안되며 이같은 법의 적용에는 어떤 예외도 있어서는 안된다.법은 행위의 결과뿐 아니라 동기부터 따져야 하며 민주정치의 확립과 법해석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피고소·고발인들을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나은경(29·회사원)씨=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광주시민으로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으면 했으나 다소 실망스러웠다.그러나 역사란 당장 평가될 수 없는 만큼 5·18의 진정한 평가는 후세에 맡겨두는 것이 옳다고 보며 이제는 아픈 상처는 묻어버리고 국론을 모을 때라고 본다. △허경(연세대 법학과교수)씨=법치국가에서는 모든 문제를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이번 수사가 통치권 차원이라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마무리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본다.정치적인 결단을 위해 전제군주에게 주어지던 통치권을 민주국가에서 법적인 심사에 앞서 운운한 것 자체가 법치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것이다. △이남숙(38·주부)씨=이른바 신군부들이 처벌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 밝혀져 다행스럽다.특히 일부 군인이 민간인을 사살한 게 밝혀진 것은 당시의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이제평가는 역사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과거를 파헤치는 것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으면 싶다.이 기회에 아직도 비탄에 잠겨 있는 광주시민을 위한 대화합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유종성(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연구실장)씨=검찰의 결정은 쿠데타와 시민학살의 주범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으로 검찰이 스스로 역사적인 책무를 포기한 처사다.특히 지난번 12·12 주동자들에 대한 기소유예처분보다도 후퇴한 이번 결정이 지방자치선거 패배 등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여권세력 끌어안기라는 현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천우(사업)씨=5·18 당시 광주에 있어서 상황을 잘 안다.군의 무리한 투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어쨌든 국가에 대항한 것은 「반란」죄에 해당하므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본다.이번에 5·18 수사발표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끝내고 더 이상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 ◎정치권/여,“검찰의 고유권한” 야,“진실외면” 비난 ▲민자당박범진 대변인=5·18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검찰의 고유권한으로 검찰의 결정을 존중하며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번 검찰의 결정을 계기로 이제 과거 문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국민적 힘을 모아가는 건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지난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논란을 계속하는 것은 국력만을 소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권위주의 정권이나 독재정권을 청산하는 방식에는 두가지의 길이 있다.남아공처럼 과거를 묻지않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국민 화합속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방식이 하나다.6·25전쟁을 겪은 우리가 통일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남북간 용서와 화해의 정신없이는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먼저 국내적으로 과거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신당창당모임 박지원 대변인=검찰의 「공소권 없음」결정은 사법적·정치적 혼란은 물론 사회교육적·도덕적·역사적 혼란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검찰이 국민의 편이 아니라 범죄자의 편에 선 것을 우리는 규탄하며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음을 정부에 경고한다. ▲민주당 이규택 대변인=진실규명을 바라는 국민 여망을 무시한 반역사적 폭거다.신군부일당을 사법처리하지 않은 것은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고 군사쿠데타를 합법화·정당화하는 처사로 또다른 역사의 오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자민련 안성렬 대변인=우리는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광주의 불행한 사건이 민족 화합을 위한 역사적 교훈이 되기를 바라며,진실을 밝힌뒤 대화합과 포용의 조치도 뒤따라야 한다. ◎피고소인/“당연한 귀결” 분위기속 직접 언급 자제 ○…전두환·노태우씨 등 전직대통령측은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내심 『큰 줄거리는 우리의 주장대로 된 것 같다』는 분위기이면서도 조사과정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전 전대통령측의 한 측근은 이날 『전 전대통령과 광주문제는 관계가 없다고 진작부터 말해오지 않았느냐』면서 『이번 조사결과로 광주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나돈 많은 얘기가 유언비어였음이 입증됐다』고 주장.이 측근은 또 검찰이 5공집권과정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관련,『그런 어정쩡한 결정을 하려고 전직대통령을 조사했느냐』면서 『이런 식의 조사가 헌정사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조사자체가 불쾌했다는 반응. 측근은 『일부에서 이번 검찰의 결정뒤 현 정부와 5·6공세력과의 화해가 이뤄질거라는 전망이 나오는데 성급한 추측』이라고 말했다. 노 전대통령은 이날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이 인사는 『법률이론에서 볼때 80년의 일련의 정부조치가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우리 주장이 큰 줄거리에 있어서는 수용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원 줄거리에 대해 공소권이 없다고 검찰이 결정을 내린 만큼 세세한 발표 내용을 놓고는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고소·고발 상대측이 항고등을 하는 경우에도 대비하고 있으며 우리의 주장은 변함이 없다』고 설명.한편 이번 조사와 관련,검찰조사에 끝내 응하지 않았던 최규하 전대통령측은 검찰 수사발표에 대해서도 노코멘트로 일관. ○…민자당의 정호용·박준병·허삼수·허화평의원 등 핵심관련자들은 직접언급은 자제하면서도 『처음부터 사법적 심판대상이 아니었다』고 반기는 표정. 허화평의원은 지역구인 포항에서 검찰발표를 전해 듣고는 『15년이나 지난 역사적 일을 국가기관이 실정법의 잣대로 시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이라면서 『이렇게 종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홀가분한 소감을 피력. 정 의원측의 이상범 보좌관은 『특히 관심이 대상이었던 발포경위와 광주파견부대의 지휘권 이원화여부등에 대해 합리적으로 조사된 것 같다』고 코멘트. 박준병·허삼수의원은 지역구인 옥천과 부산에 머무르며 비서진을 통해 검찰발표를 보고받았으며 비서진들은 『미묘한 사안이라 의원님께서 직접 발표문을 읽어보기 전에는 논평하기 곤란하다』고 조심스런 답변. ◎고소인/“상식 무시한 법집행은 역사왜곡 행위” △이해찬(서울시 정무부시장)씨=검찰의 발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공소권 없음」이란 결론을 내려 놓고 목적없이 조사만 한게 아니냐하는 생각이 든다.검찰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부끄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이러한 결과를 내리려면 무엇하려고 수사를 했는가.수사를 말았어야 한다.이번 사건은 12·12사건보다 더 큰 사안이다.검찰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문영(경기대 대학원장)씨=문민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당시 피해자들은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 등 법률적인 심판을 받은 반면 가해자들의 행위는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법률적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송기원(문인)씨=검찰의 결정이 정치적 판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최근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검찰의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나 「공소권 없음」 결정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조비오 신부(광주봉선동성당 주임신부)=사법부의 존재의미를 포기한 것이다.명백한 쿠데타를 통치권 행위로 규정한 것은 현정부가 5·18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동년(5·18 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씨=김영삼대통령이 「현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연장선상에 있다」고 선언한 「5·13 특별담화」는 거짓으로 드러났다.5·18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인 만큼 항고·재항고·헌법소원 등의 방법으로 다시 5·18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윤광장(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장)씨=검찰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법권의 독단이다.5·18 책임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바랐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것이다.법의 운용은 상식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상식과 정의를 무시한 형식적인 법집행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광주권/검찰경정 납득못해… 「기소서명」 나설터 본다.정치적인 결단을 위해 전제군주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민주국가에서 법적인 심사에 앞서 운운한 것 자체가 법치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것이다. ▲명노근씨(61·전남대 영문과교수)=국민의 일반 감정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결정이다.한마디로 검찰의 직무유기행위다.5·18 당시 진압군의 살인행위가 인정됐음에도 검찰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것은 검찰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을 저버린 처사다.특별검사제도 도입 등을 통해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려야 한다. ▲김원희씨(34·은행원·광주시 광산구 월곡동)=현 정부가 「5·18문제」를 역사에 맡기자고 선언했듯이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그러나 검찰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압을 정치적 행위에만 국한시킨 것은 형평성을 잃은 법적용이라고 생각한다.앞으로 가해자 기소를 위한 서명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관철토록 돕겠다. ▲박병모씨(37·전남일보 기자)=광주시민의 정서와 너무나 동떨어진 결정이다.학생과 재야·시민 등이 이미 「피고소·고발인에 대한 기소촉구」집회 등을 계획하고 있어 자칫 공권력과의 충돌 등 혼란이 예상된다.정부는 검찰의 이번 결정이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 부여라는 일반 시민의 격앙된 감정에 귀기울여야 한다. ▲정웅태씨(37·변호사)=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검찰의 입장을 이해 못하진 않는다.그러나 국민의 법감정과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결정이다.특별검사제 도입등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애초부터 5·18문제를 푸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김대원씨(23·전남대 국문과 3년)=명백한 살인행위를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라고 규정한 검찰의 결정은 납득할 수 없다.민주화를 외치다 쓰러져 간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이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달라진 정치상황 “시험무대”/5일 임시국회 운영 전망

    ◎민주·자민련내 연대 목소리 높아질듯/“시도지사,국회출석 의무 부여” 논란 예상 제1백76회 임시국회가 5일 문을 연다.민주당이 소집한 제1백75회 임시국회가 민자당의 불참으로 자동폐회된 것이 지난달 6일이었으니 꼭 29일 만이다. 불과 한달여만에 다시 열리는 이번 국회는 그러나 여러가지 의미에서 그동안 달라진 정치상황의 시험무대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6·27 지방선거 결과 서울시장을 민주당이 차지하는등 야당이 지방행정의 책임을 분담하는 상황이 됐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이다. 이번 국회의 최대 관심사 역시 1일 취임한 조순서울시장이 이번 임시국회에 출석할 것인지,출석한다면 여야 의원들의 공방수위는 어느 정도일 것인지에 모아지고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가 조시장 취임 이전에 일어났고 관리책임 역시 전시장에게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현직시장으로 사고 수습의 책임이 있고 희생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 역시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적어도 이번 임시국회에서 서울시장을 비롯한 각 시·도지사의 모습을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울시장은 그동안 임명직일 때도 국회본회의에 출석한 적이 없다.행정위나 내무위에는 출석한 적이 있으나 그것도 서울시가 내무부 산하에 있을 때 산하단체 부서장의 자격으로 출석했다.여기에 국무총리실의 지휘감독을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상임위에도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 시·도지사도 내무부 산하기관에서 독립법인체로 위상이 변화한 만큼 국회에 참석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국회사무처쪽의 유권해석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해석은 좀 다르다.국회법은 「본회의 결의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정부위원의 출석을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지방자치단체장은 물론 국무총리도 국무위원도 아니다.그러나 정무직지방공무원인 시·도지사는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을 일컫는 정부위원에는 포함시킬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따라서 시·도지사도 정부위원에 준하는 국회출석의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않다.따라서 이번 임시국회에서 이 문제가 상당한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임시국회는 이와함께 신생 자민련이 그동안 원내교섭단체로 발돋움했다는 것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민련은 현재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인 20명을 간신히 턱걸이한 21명의 국회의원만을 보유하고 있다.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4곳의 시·도지사를 확보함에 따라 의석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확실시된다. 김종필총재는 일단 『정부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추궁할 것은 추궁한다』는 정국운영의 원칙을 천명해 놓고 있다.국익이 걸린 외교문제나 정부차원에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사고는 정부에 최대한 협력하나 국내정치현안과 남북한과 연관된 이념문제등에 대해서는 과거의 어떤 야당보다 날카롭게 추궁하겠다는 것이다. 김총재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마음은 우리보다 더 아플 것』이라며 대정부 비판을 자제할 것을 지시해 놓고 있는 반면 대북 쌀 수송선의 인공기 게양사건은 집중추궁키로 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민련의 이같은 정국운영원칙은 그러나 정부여당에 대해서 뿐 아니라 민주당에 대해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민주당에도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견해를 달리하는 것은 반대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국운영원칙은 이번 임시국회의 외교문서변조사건대책에서 확실히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자민련은 먼저 이 사건 이후 재외공관들이 경쟁하듯 민주당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놓은 것을 두고 국가를 대표하는 공관으로 지극히 경솔한 행동이라며 성명발표 경위를 따지는등 민주당과 연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이 과연 정부쪽 주장대로 민주당의 변조인지,아니면 민주당쪽 주장대로 정부의 변조인지에 대한 진상조사 자체에는 중립적인 입장에 선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거에서 뿐 아니라 정국운영에서도 철저히 「캐스팅 보트」역할을 자청해 정부·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입지를 넓혀간다는 계획이다.정부·여당이나 민주당 모두 자민련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게된 셈이다.
  • 「전문가 진단→관할구청 심사」도입해야(「삼풍」참사/건물 안전관리)

    ◎안전점검 의무화 대상범위 확대를/「시정조치」 어기는 건축주 처벌강화 건물은 병들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환부를 드러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안전불감증」이 사회도처에 만연됐다. 삼풍백화점도 이 징후의 희생자다.물론 부실공사가 주원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그러나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안전관리부재는 이번 「참사의 공범」이라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안전관리정책에 낙제점을 매긴다.사고가 날 때마다 정밀진단을 한다고 부산을 떨지만 늘 형식에 그친다는 것이다.예산과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안전관리는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 다중이 이용하는 민간건물에 대해 안전관리를 정한 법령은 지난 4월부터 시행된 「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있다.지난해 성수대교가 붕괴되자 건설교통부가 부랴부랴 만든 「면피용」 법률이다. 이 법은 건물 한채의 연면적이 5만㎡이상이면 분기마다 일상점검,3년마다 정기점검을 받고 지은 지 10년이 넘으면 5년마다 정밀안전진단을 받도록 돼 있다.또 3만∼5만㎡의 건물은 분기마다 일상점검과 3년마다 정기점검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형식적으로는 안전관리정책이 엄연히 존재하는 셈이다.그러나 이 법의 실효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이는 누가 시설을 점검하고 어떤 기준으로 판정을 내리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삼풍백화점은 이 법을 적용받기 전인 92년 건축법시행령에 따라 대지·설비·형태 등의 관리점검을 받았다.당시 합격점을 받았으니 채 3년이 지나기 전에 건물이 급격히 낡아버린 것이다.게다가 붕괴의 조짐을 알고도 이를 간과한 것은 고객을 볼모로 안전도를 시험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한국건설안전기술협회의 이상렬 부회장은 『현행 법률체제에서 극장이나 백화점 등 다중이 이용하는 민간건물은 안전의 「사각지대」다』라면서 『안전검사를 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가 형식에 그친 검사에 익숙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공공건물을 포함해 민간의 이용이 많은 건물은 전문가가 진단하고 관할구청이 심사·결정하는 전문관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서울에 있는 한 백화점의 관계자는 『지금까지 3년마다 안전점검을 받았으나 건물구조의 이음새나 골조의 부식상태 등을 확인한 적은 한번도 없다』며 『대개 식사를 같이 하면서 서류에 점검필을 찍는 정도다』고 밝혔다. 한양대 이이형교수도 『규정대로만 한다면 안전관리에 허점은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건물의 상태를 판단할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그는 『안전점검시 2명이상의 전문가를 지정,기술적 판단을 맡기고 건축물의 점검대상도 3만㎡이하로 크게 늘려야 한다』며 『건축주도 전문가의 진단을 의무적으로 따르게 하고 어길 경우의 벌칙을 강화하도록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시설안전물관리법은 3만㎡미만의 민간건물은 소유자 및 관리자의 자체판단에 따라 안전점검을 하도록 규정,소규모상가나 극장 등은 안전점검의 무방비상태다. 건설교통부의 관계자는 『소규모건물은 민간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고 안전점검대상의 확대에는 반대입장을 밝힌 뒤 『그러나 건축주들이 자체적으로 안전점검을 하도록 적극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백화점 안전의 필수요소/정확한 하중 설계·시공에 반영 중요/매장은 ㎡당 3백㎏ 기준해야/완공후 잦은 구조변경도 금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백화점 가기가 겁난다는 주부들의 걱정의 소리가 높다.평소 바겐세일이나 각종 이벤트행사를 자주 이용해온 주부들은 사고현장을 중계하고 있는 TV를 보면서 많은 인파에 섞여 있는 백화점속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섬뜩해 하기도 한다. 한양대 이해성교수(건축공학)는 이번 사고에 대해 『건축전문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라며 『위치상 견고한 암반이 바로 밑에 있는 지역에서 철근 콘크리트건물이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설계·시공상의 문제점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 김선환박사(토목구조)는 『건물붕괴에는 그에 앞서 반드시 사전징조가 있게 마련』이라면서 『평소 건물관리를 제대로 하고 이상을 발견했을 때 적절한 사후조치를 한다면 이같은 대형참사는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번 사고의 원인은 본격적인 조사를 해봐야 밝혀지겠지만 구조계산과 설계잘못,시공품질의 불량등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건축기준상 백화점건물이 받는 하중계산은 매장의 경우 ㎡당 3백㎏을 기준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3백60㎏까지 계산해야 하고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의 경우 내용물의 종류에 따라 ㎡당 최고 1천㎏까지 잡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그러나 상품진열 상태나 고객숫자가 수시로 바뀌는 백화점에서 설계 때 하중고려를 잘못했거나 완공후 설계하중을 넘어선 초과하중이 건물에 걸릴 경우 건물에 무리가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히 삼풍백화점의 경우 바닥이 플랫 슬래브구조로 돼있어 기둥주위에 응력이 집중,기둥주위 바닥부분이 취약점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플랫 슬래브구조란 보통 건물의 바닥을 칠 때 기둥과 기둥사이에 보(빔)를 보내고 보위에 바닥슬래브를 치는 것과는 달리 보가 없이 기둥위에 바로 슬래브를 얹는 최신 공법. 플랫 슬래브공법을 쓰는 경우 슬래브의 두께는 더 두껍게 쳐야 하지만 보(기둥의 간격이 10.8m인 삼풍백화점의 경우 80∼90㎝두께)가 차지하는 만큼의 공간을 줄일 수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층당 50∼60㎝의 높이를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때문에 플랫공법은 같은 건물높이라도 더 많은 층수를 지을 수 있어 고도제한을 받는 지역에서 선호되고 있는데 슬래브와 기둥이 직접 맞닿기 때문에 하중계산이 정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설계가 제대로 됐음에도 불구하고 설계를 무시한 부실시공을 했을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이의 여부는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코어)을 채취,콘크리트강도와 철근인장력 실험을 통해 설계가 요구한 자재를 썼는지,구조계산과 철근사용량이 부합하는지 등을 조사함으로써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건물주의 잦은 용도변경과 구조변경도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다.많은 백화점이 그렇듯이 걸핏하면 매장이나 주차장확장을 위한 구조변경등으로 건물자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결론적으로 백화점건물은 다른 건물에 비해 많은 인파와 상품에 따른 과다한 하중을 이겨야 하며 잦은 구조변경등 안전과 관련된 특수성을 갖고 있는 곳이다.그런만큼 설계와 시공,사후관리에 완벽을 기해야만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지방자치에 대한 우려들(임춘웅칼럼)

    한국의 정치현실을 접하다 보면 우리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이번 「6·27」지방선거의 결과도 그런 것중의 하나다. 지방색이 철저히 지배하고만 선거였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지방자치제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됐다.이런 정치상황에서 지방자치가 과연 제대로 될것이냐 하는 것에서 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정치적으로 다른 색깔일때 행정이 제대로 운용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금 이런 의문들에 누구도 자신있게 대답하긴 어려울 것이다.경험도 없고 시작하는 마당이다.한세대전 잠깐 지방자치란 것을 해보았고 지난 4년간 지방의회 경험을 갖긴 했으나 그것으로 경험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미지의 제도에 대한 불안이 있다. 우리는 또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속에서 살아왔다.유교적 관습도 그렇고 그동안의 정치체제도 그러했다.자치와 자율에 대한 확신이 없다.일사분란한 체제에 익숙해있는 것이다. 야당출신의 장이 된 자치단체와 중앙정부와의 관계랄지,지방자치제의 여러 문제들을 염려하는 것은 나쁠게 없다.항상 대비하고 만일의 경우를 상정해두는 것은 안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인 것이다.그러나 우려가 지나치면 일을 공연히 뒤틀어 놓을 수도 있다. 이런때 이웃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일본의 지방자치 역사는 메이지(명치)시대(1890년)로 거슬러 올라간다.벌써 1백여년의 역사다.종전후인 1946년 현대적인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때부터만 따져도 반세기가 된다.우리의 지방자치는 출발이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당이 지방정부를 장악했을 상황도 70년대 도쿄의 경우를 돌아볼 필요가있다.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민당정부에 사회당 출신의 미노베(미농부) 도지사가 공존했다.일본도 도쿄도 다 무사했다.현재도 도쿄도의 지사는 무소속 출신이다.미국의 경우는 민주당연방정부에 공화당지사주가 18개에 이르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헌법이 조정하고 재단할 것이다.국회에서 지방자치법을 고쳐 문제점을시정해 나가도 될 것이다.우리의 우려는 경험이 없는데서 오는 기우일 가능성이 크다. 선거의 결과가 지나치게 지방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자치의 의미와 그 중요성이 훼손돼서는 안된다.사회과학원의 김경원 박사는 『선거는 아직 지방화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선거의 결과는 지방자치를 가능케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지방자치가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되면 지방선거도 그만큼 중앙정치의 압박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선거전의 어떤 병폐도 자치제의 중요성을 희석하거나 퇴색시켜서는 안될 것이다.자치는 민주주의의 뿌리이고 본질인 것이다.
  • 외무부 강공에 민주 슬그머니 발뺌/「문서변조」 공방 제2라운드

    ◎“전모 밝혀 명예회복” 최씨 사봅조치 총력­외무부/“외무장관에 변조책임” 주장속 추이 지시­민주 외무부 전문 변조·유출사건은 27일 민주당측에 문서를 제공한 최승진 전 외신관이 고의로 변조,유출한 것으로 사건 윤곽이 드러나면서 외무부가 공세,민주당이 수세로 몰리는 형국으로 반전됐다. 지방선거 투표일인 27일 외무부는 검찰수사 및 자체조사결과 최씨가 변조를 해 민주당에 유출했음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명예회복을 위해 마치 외무부가 공문변조를 공관들에 지시한 양 정치공세를 벌였던 민주당에 대해 사법적으로 강력히 대응키로 했다. 이에 반해 민주당측은 권부총재 등이 최씨에게 현혹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외무부가 직원인 최씨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는 등 한걸음 물러서는 자세를 보였다.이에 따라 선거후 최씨가 귀국한뒤 이 사건이 사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될지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외무부◁ 27일 상오 공로명 장관 주재로 실국장회의를 열어 지방선거이후 외교전문 유출,변조 사건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인지 대책을 논의했다. 공장관은 회의에서 민주당측이 『외무부가 문서변조를 지시했다』는 주장에서 후퇴하는 등 「꼬리를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선거결과나 정치상황과 관계없이 사건 전모를 명확히 밝혀 외무부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며 고삐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외무부는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전문을 변조,유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승진 전 외신관을 뉴질랜드로부터 귀국시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로 했다. 외무부는 이날 회의에서 최씨의 흥분을 가라앉혀 스스로 서울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되,여의치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뉴질랜드 정부와 협의해 강제송환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뒤 김항경 기획관리실장은 『간부들은 물론 직원 전체가 이 사건이 정치쟁점화하면서 외무부의 명예가 크게 훼손되고 신뢰성도 떨어졌다고 개탄하고 있다』면서 미국,일본,그리스,태국,호주 등 8개 공관직원들이 연명으로 타전해 온 민주당 비난 전문을 공개했다.전문들은 한결같이 민주당의 처사를「울분」「모독」「경악」「터무니없이 날조」 등의 격렬한 표현으로 비난했다. ▷민주당◁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최승진 전 외신관의 변조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자 『우리가 최외신관에게 놀아난 게 아니냐』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외무부가 변조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에서 한발 물러서면서 파문의 방향을 문서변조의 진위여부에서 외무부장관의 관리책임을 추궁하는 쪽으로 틀기 시작했다.하지만 공로명 외무장관 고발방침은 불변이라는 주장이다.박지원 대변인은 『당명으로 고발할 것인지,권노갑 부총재 명의로 고소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구체적 법률검토가 끝난뒤 공장관 고발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박대변인은 『민자당이 우리가 한발 물러선 것처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권부총재 등도 『최전외신관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의심치 않는다』고 검찰의 중간수사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변인은 『정부 주장대로 최전외신관이 공문서를 변조했다면 그책임은 외무부장관이 져야 할 것』이라고 당초 「외무부가 변조를 지시했다」고 주장하던 당당한 입장에선 크게 후퇴한 「책임론」을 들고나왔다.최씨가 제공한 문서를 공개한 민주당보다 이를 변조,공개하기까지 직원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외무장관의 책임이 더욱 크다는 「퇴로확보용」주장인 셈이다. 박대변인은 또 『만약 최전외신관이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고 공문서위조 전과가 있다면 왜 그런 사람을 암호해독과 국가기밀문서를 다루는 자리에 보임했느냐』며 『최전외신관이 공문서위조 전과가 있건 실제로 공문서를 변조했건 그는 민주당원이 아니라 외무공무원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고 궁색한 주장을 했다. 설훈 부대변인도 『사건경위야 어찌됐건 외무부직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인 만큼 외무부 직원들은 자숙해야 한다』며 외무부를 비난했다.
  • 북한/1백만t 요구 하향조정 시사/북­일 쌀회담 이모저모

    ◎“큰 매듭완결,많이 주면 좋고…” 여유­북한/“무상·다량제공” 여당,대정부 촉구­일본 ○…순항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제공물량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던 북·일쌀교섭은 4일째를 맞은 26일 합의를 향해 급박하게 움직이는 인상. 북한측 이종혁 대표는 이날 상오 연립여당측과의 회담에 앞서 양을 줄여서라도 빨리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어제(25일) 한국에서 쌀도 갔는데』라고 여유있게 응대하면서 『일본에 1백만t의 쌀도 없는 것 같고…』라고 말해 3일동안 줄기차게 요구하던 「1백만t」을 하향조정해 제시할 것임을 시사. 회담을 마치고 나온 이대표는 『큰 매듭은 지어졌다』면서 『이제 일본쪽이 논의할 차례』라고 여전히 낙관적인 자세.그는 『절에 가면 중이 말하고 교회에 가면 목사가 말하고 여기서는 초청한 주인이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크를 던지기도. ○…일본측은 이날 상오 북한측과 연립여당 회담에 앞서 당정협의를 가진 데 이어 회담후 고위 당정협의와 총리등 관계각료회담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는등 부산한움직임. 북한측과의 회담에 앞서 와타나베 미치오 의원은 일본정부가 군사용 전용금지등 투명성을 요구한데 대해 『쌀 갖고 원자폭탄 만드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면서 『빠가(바보)』라고 정부쪽 태도를 힐난. 이날 여당측 인사들은 대체로 무상제공과 다량제공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 당정협의에서 정부측 입장의 변화를 촉구할 것임을 시사. 하지만 우에노 식량청장관은 『차이가 있어서…』라면서 회담전망에 대해서는 『잘 되길 희망한다』는 정도로 신중한 태도. ○…일본측은 회담후 총리관저에서 무라야마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고위당정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 회의후 와타나베 의원은 『1백만t은 비현실적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낼 만큼은 내겠다는 의견들이었다』면서 『무상도 포함된다』고 분위기를 전언. 일본의 쌀 재고량은 지난해 양곡연도말(3월말) 84만t에 이르렀으나 사료용과 가공용으로 전용,5월말에는 78만t으로 줄었으며 6월말에는 약 70만t으로 감소될 전망이라는 것. 외무성측은 『15만t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무상지원도 포함된다』고 브리핑해 3할인 15만t의 무상원조를 포함해 50만t안팎에서 조정이 시도되고 있는 듯.하지만 이가라시 고조 관방장관은 『현재 정부측이 생각하고 있는 30만t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 물량조정을 둘러싼 진통이 예상밖으로 심함을 보여주기도. ◎마이니치 보도 「대북 쌀교섭」 뒷얘기/일측,작년말부터 물밑교섭 시작/2월 성항접촉때 일서 먼저 거론 진통을 거듭하고 있는 북한과 일본의 쌀제공 교섭과 관련,뒷말들이 무성한 가운데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26일 일본측이 지난해 연말부터 대북한 쌀제공을 모색해 왔다고 그동안의 전말을 보도해 눈길을 모았다. 마이니치신문은 이 기사에서 쌀지원의 공식적인 이야기는 한달 전인 지난달 26일 북한의 이성록 국제무역촉진위원장이 일본을 방문,와타나베 미치오 전외상등과의 회담에서 요청한 것이 발단이지만 수면하의 모색은 지난 연말부터라고 보도. 자민당의 주요 농수산당직을 역임한 새 실력자 가토 고이치(가등굉일) 정조회장이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부터라는 것.남아도는 쌀도 처분하고 가네마루 신(김환신)전의원의 퇴장으로 공석이 된 대북한 창구역도 한발 들어놓으려는 것이었다고 이곳의 외교가에서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자민당 오부치 게이조(소연혜삼) 의원쪽의 한 간부는 『가토씨가 북한의 쌀지원에 열심인 것은 유력한 농림족의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가토회장은 북한과 직접적인 접촉선이 없어 지난 90년 가네마루의원과 함께 북한을 방문,대북한 파이프가 있는 노나카 히로무(야중광무) 자치상의 루트에 부탁해 북한과의 접촉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지난 90년 「3당공동선언」의 북한 책임자인 김용순 노동당 비서와 연결이 됐다.이에 따라 북한과 일본의 접촉은 김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평화위원회와 가토측이 각각 창구로 부상. 가토 회장은 이에 따라 지난 1월 한국을 방문,북한과 일본의 대화 재개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가토는 이때도 쌀문제는 직접 언급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측이 쌀문제를 거론한 것은 지난 2월 국교정상화교섭의 재개를 모색하기 위해 호리 고스케 의원을 싱가포르에 파견했을 때.당시 쌀문제를 꺼낸 것은 북한측이 아니라 일본측이라는 것.이 때문에 쌀교섭을 벌이고 있는 이종혁 대표등 북한측이 「당초 약속과 다르다.항의하겠다」면서 강력하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뒤 와타나베 의원등이 3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측으로부터 쌀지원요청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합의서 작성때문에 여유가 없어」 북한측이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후 4월에 북한측으로부터 방일단 파견의 의향이 전해졌다.북한이 그때까지 거부해 왔던 한국쌀의 수용을 「검토하겠다」고 시사함에 따라 가토와 함께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고 있는 야마자키 다쿠 의원이 방한,한국정부에 전달했다.
  • 일 여객기 공중납치/3백65명 탑승/하코다테공항 대치

    ◎일경,옴교신도 소행 추정 【도쿄=강석진 특파원】 승객과 승무원 3백65명을 태운 전일본항공(ANA) 소속 보잉 747 점보여객기 857편이 21일 상오 11시20분 일본 하네다(우전)공항을 출발,홋카이도(북해도) 하코다테(함관) 공항으로 가던중 11시57분쯤 야마가타(산형)현 상공에서 공중납치됐다. 납치범들은 당초 옴진리교 신자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날 하오 10시 35분쯤 한 스튜어디스를 통해 NHK­TV에 전화를 걸어 이를 부인했다. 이날 납치된 여객기는 예정대로 낮 12시42분 하코다테 공항에 착륙했으나 범인은 승객과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급유와함께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공항이 폐쇄된채 대치상태가 계속되면서 승객과 승무원들이 비행기안에 억류돼 있다. 주일 한국대사관측은 승객중 한국인은 없는 것으로 잠정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승객 3백50명과 승무원 15명중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은 이날 정오직전 기내 2층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스튜어디스를 얼음깨는 송곳으로 위협한뒤 조종석으로 접근,비행기를납치했으며 자신을 옴교신자 「고바야시 사부로」라고 말하고 『존사(아사하라 쇼코 옴교주)를 석방하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ANA에 따르면 범인은 객실에 동료들이 있다고 밝히고 「외부사람은 기체에 접근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 폭탄·무기 소지 “폭파” 위협/일 여객기 납치 이모저모

    ◎“옴교보복 일수도…” 일 열도 공포/“얼음송곳 위협” 기장 첫 타전/F15기 긴급배치… 비상 대비/아사하라 부인 납치범에 투항 호소 ○…죽음의 독가스테러 사건으로 세계를 놀라게했던 옴진리교의 공포가 21일 다시 일본열도를 강타했다. 도쿄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의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날 옴교 신도로 알려진 범인에 의한 전일호(ANA)여객기 납치사건이 다시 발생, 옴진리교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비난과 증오가 증폭되고 있다. ○…비행기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자위대는 하코다테 공항에 화학방호부대를 긴급대기태세에 들어가도록 하고 상공에는 항공자위대의 F15 전투기와 F전투지원기를 각각 2대씩 포진시켜 긴장된 초계 태세에 들어갔다. 삿포로에 진주하고 있는 육상자위대도 화학방호부대원 약30명에 대한 출동령을 발동. ○…범인은 얼음깨는 송곳만으로 여객기를 납치했으며 항공관계자들은 범인이 어떻게 얼음송곳을 지니고 비행기를 탈수 있었는지에 대해 큰 의문을 제기. 일본 당국은 일본항공(JAL)기 요도호사건 드어을 계기로공항에 금속탐지기를 비치해 승객의 몸을 철저히 뒤지고 있기 때문에 금속성 칼이나 총기류는 유대가 사실상 불가능 하도록 되어 있다. ○…일정부는 가능한 모든 방책을 강구해 승객들의 안전구출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으로 법질서유지를 위해 범인의 요구에는 단호한 입장으로 대처할 방침. 일정부는 특히 75년 적군파사건 당시의 비난등을 계기로 78년 후쿠다(복전)내각 당시 마련된 「항공기 공중납치에 대한 대처방침」에 입각,아사하라 쇼코(마원창황)옴교 교주의 석방요구 등에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노나카 히로무 자치상(국가공안위원장)과 경찰청장관, 이가라시 고조 관방장관등을 불럴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 ○…범인이 스스로 옴 진리교 신도라며 「고바야시 사부로」라고 밝힌데 대해 ANA측은 그같은 사람이 탑승했음을 확인했으나 옴교측은 짚이는 곳이 없다며 현재 그런 신도가 있는지를 조사중이라고 발표. ○…아사하라 쇼코 옴진리교주의 아내이자 옴진리교주의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마쓰모토 토모코는 21일 여객기 납치범들에게 투항하라고 호소. ○…밤이 깊어지자 공항에는 불안한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대치상황이 계속되면서 일부 승객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조종사가 보고.또 단체관광객 안내원으로 기내에 억류돼 있는 여행사 관계자들이 이날 휴대전화로 회사에 연락해온 내용에 따르면 승객들은 눈가리개와 마스크를 한 채 전원 자리에 앉아 있으며 손을 결박당한 상태라는 것.그러나 ANA측은 여행사 안내원들의 이같은 보고에 대해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라며 의문을 제기.납치여객기의 창문은 대부분 가려져 있고 기내 등도 일부 꺼져있으나 에어컨 작동을 위해 보조엔진은 가동. ○…일본당국은 기장을 통해 여객기 납치범과 계속 교섭하고 있으나 당국의 선 인질석방요구와 범인의 연료급유 및 도쿄 회항 요구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태.ANA에 따르면 범인은 조종석에 들어가 기장을 통해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며 당국 역시 기장을 통해 범인과 직접 교섭,승객 석방 및 환자 발생시 병원 후송 등을 요구했으나 범인은 이를 거부.일본정부도 연료급유를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 ○…승객 가운데는 유아 등 어린이 7명과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95명이나 포함돼있다고 ANA측이 발표.이 가운데 최고령자는 92세인 것으로 확인됐는데 당국은 저녁시간이 되자 3백70여명분의 오니기리(주먹밥)와 음료수 등을 준비했으나 납치범이 거부. ○…납치된 여객기에 타고있는 한 여승무원은 NHK TV에 전화를 걸어 『납치범들이 폭탄과 다른 무기들을 갖고있다』고 말했다면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납치범들의 협박메세지를 전달.범인은 특히 이날밤 10시35분 6번째 전화를 NHK방송국에 걸어 얼음 송곳은 밖에서 비행기 안으로 갖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서 자신은 옴교 신도라고 말한적도,이름을 댄 사실도 없다고 강력히 부인. ◎납치기장과 교신 내용 ▲12시3분=2층 객실에서 남자가 얼음송곳으로 위협하고 있다.옴 신자인 것 같다. ▲12시30분=범인의 요구다.활주로에서 연로를 보급하라.객실 유리창의 빛 가리개를 모두 내려라. ▲12시33분=기장이 승객들에게 공중납치사건 발생을 밝혔다.승객들에게는 기내방송으로 12시40분 하코다테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12시47분=(범인으로부터) 활주로에 누구도 접근시키지 말라는 요구다. ▲12시55분=기체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 수를 확인해달라. ▲12시59분=범인은 연료보급을 빨리 하라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 ▲1시18분=(범인이) 연료보급을 하지 않으면 플라스틱 폭탄 시한장치를 풀겠다고 말하고 있다.
  • 제헌국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2)

    ◎내각­대통령책임제 공방… 대통령제로 결말/여·순 발란 등 소용돌이속 국가보안법 통과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칭이 등장한 것은 19 48년 7월 12일이다.국가의 기본골격인 헌법이 이날자로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그 헌법은 5·10 선거에 의해 개원한 국회가 제정했는데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과도입법의원 맹활약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었다.제헌국회는 물론 민주주의 방식의 첫 대의기구다.미군정 아래서 개원되었던 절반의 대의기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염두에 두면 사정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그러나 제헌국회는 과도입법의원의원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예행을 거친 국민들이 확실하게 뽑은 1백98명의 선량들이 참여한 국민의 대의기구였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5명이 국회에 진출,제헌국회개원에 깊숙이 간여했다.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존중되었던 것이다.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경선 상대가 없이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의 역할이 컸다.그는 미군정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면에 나섰다.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법안이 이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 개원을 맞았다.제1차 본회의는 당시 최고령자였던 임시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열렸다.국회의장단 선거에서 1백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부의장에는 신익희(76표)와 김동원(77표)이 선출되었다.이날 서울 시내에는 경축 꽃전차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하오2시 제헌국회 개원식이 베풀어졌다. 국회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다.이 위원회는 먼저 헌법학자 유진오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유진오 전문위원은 내각책임제 및 양원제,3권분립을 중심으로 한 안을 내놓았다.그리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비롯,임시정부헌장,과도입법의원 제정의 약헌,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기초에 착수했다. 내각책임제안은 곧 바로 이승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양원제를 단원제로 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이의없이 채택했다.이승만은 마침내 분노하고 말았다.6월15일 기초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내각책임제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책임제로 번안해줄 것을 요구했다.그러면서 측근을 시켜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계속 밀고나가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은근히 위협해왔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그를 제외시킨 정치문제논의는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에서 이승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던 것이다.유일한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이로써 6월22일 제17차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대통령책임제헌법안으로 번안하기에 이른다.이어 6월 23일 제17차 국회본회의에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이 상정되어 20일간에 걸쳐 17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헌법안 20일간 격론 대통령책임제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한 것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이라고 분명히 적었다.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2일 자정을 약간 넘긴 0시28분에 제3독회를 마쳤다.그렇게 해서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었다.기초과정부터 풍파를 일으킨 제헌국회의 헌법제정은 파란만장한 헌정사의 장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은 7월 16일 제31차 본회의에서 제정되었다.17일 공포된 헌법절차에 따라 7월 20일 제37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8월 3일 제37차 본회의는 이범석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가결시켰다.그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선출에 따라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김약수가 부의장이 되었다.이어 8월 5일 제40차 본회의에서 김병로 대법원장 임명 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조치를 매듭지었다. 제헌국회에서 원내 세력판도의 윤곽이 드러난 시기는 의장단 선거를 전후해서다.이승만의 의장피선은 초당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2명의 국회부의장 선출에서는 그 색깔이 드러났다.신익희와 김동원의 부의장 피선은 원내세력을 국민회와 한민당이 주도했다는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 때부터 각 정파 및 무소속의원들은 지연·인연을 따라 독자적 원내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 이론파였던 성인회를 비롯,동인회,청구회가 연합하여 이른바 소장파 그룹을 만들었다.이 그룹은 한민당·이정회와 정립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이는 10월 13일 긴급동의로 제출한 미군철수 결의안과 한미간의 여러 협정에 극력 반대하는 것등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군철수 결의안은 북한 최고 인민위원회가 미·소 정부에 두 나라 군대 철퇴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직후에 나왔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1948년 10월부터는 국군에 침투했던 남로당 세포조직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월 2일 제주도군 경비1대대의 반란,10월 20일 제40연대의 여수·순천 반란,11월 20일 대구 제60연대 무장반란이 그것이다.엄청난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곧 진압되었지만,그 잔여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유격전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농개법 등 획기적 조치 그래서 국회는 11월 21일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준엄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당시 상황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에 앞서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1949년 2월 3일에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이들 법률의 내용과 집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혼란과 대립도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다.국회안에서 소장파 그룹을 형성했던 노일환,김약수,김옥주등 13명의 의원들이 1949년 5월 20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실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제헌국회의 얼룩이었다. ◎하버드대 소장 「사찰요람」/「국회 남노당 프락치사건」 북노당도 개입/당시 부의장 김약수 「배후 조종자」 분류/전 북노당 고위간부 “남북 합작” 증언 1949년 5월 20일 제헌국회의원 노일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경우도 없지않다.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통해 이 사건 배후에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뿐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친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찰요람에 따르면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김약수는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분류했다.이 문서는 그가 1947년 조선공화당을 조직,서기와 선전부장이라는 당직을 맡았던 사실도 들추어냈다.그리고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주한미군 정보처(G­2)의 주간정보보고서는 제헌국회 개원초기 이들이 들어가 있던 무소속구락부를 반우파적 집단으로 평가했다. 이어 주간정보보고서는 무소속구락부가 앞으로 좌익성향 구성원들의 집합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미 군정의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되어 국회활동을 통해 미군철수 결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출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동조하고 나섰다.국회 프락치 사건에연루한 이들은 주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어 모두 3차례에 걸쳐 13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만난 전 북로당 고위간부의 증언에서 북로당도 깊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 증언에 따르면 북로당원 성시백(김삼룡·이주하와 함께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7일 서울에서 처형되었음)이 관련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남로당과 북로당의 공작이 횡적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포섭된 인물은 황윤호(진양출신),김옥주(함양출신),강욱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 러,「신속대응군」 창설 거부 시사/「지위」 등에 의문점 많아

    ◎인테르팍스 통신/유엔안보리승인때 반대할 듯/유럽주둔 미군 실전훈련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보호를 위해 파견할 신속대응군 창설을 위한 유엔안보리 계획에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지 모른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5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정부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러시아는 NATO 주도의 신속대응군 파견 제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많은 의문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속대응군의 지위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NATO의 결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프랑스,독일이 참여하는 NATO의 신속대응군 창설은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본 로이터 연합】 유럽주둔 미군 1천9백명이 4일 보스니아주둔 유엔군의 비상배치상황에 대비하는 10일간의 실전훈련을 개시했다. 유럽주둔 미 제5군은 이날 헬리콥터지원을 포함한 실전사격훈련과 재급유,재무장훈련등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번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리처드 브리지스 미육군대령은 『우리는 보스니아로부터의 긴급출동명령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리지스 대령은 『우리는 아직 현지 배치명령이나 비상대기명령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보스니아에서의 가능한 비상임무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인천상륙작전 전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0)

    ◎스탈린,소 군사고문단에 “작전 실책” 추궁/“병력 이동­탱크사용 전술 결정적 과오” 격노/김일성,연합군 「38선 진격」 당황… “소 개입” 요청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시와 지원하에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0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평양주재 슈티코프대사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 마트비예프장군 앞으로 보내는 지시문 채택을 승인했다.이 지시문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해 서명한 것이었다.여기에서 스탈린은 서울을 비롯,남동부전선에서 전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대한 작전변경을 결심했다. ○병력철수 작전 못마땅 스탈린은 작전부진의 주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의 실책으로 몰아붙였다.다음은 이날 당 정치국 회의록에 기록된 지시문의 내용.(19 50년 9월7일.당 정치국회의록 N78.조선전쟁문제회의록p.1) 『최근 수일간 전선상황이 심각해졌음(서울과 동남부전선 모두).이는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병력지휘부 특히 전술분야의 병력구성분야에서의 중대한 실책으로 야기됐음. 소련군사고문단들은 이들 실책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우리 고문단들은 4개 사단을 주전선에서 서울외곽으로 철수시키는데 있어 총사령관의 명령을 제때 충실하게 이행치 못했다.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그 결과 7일을 허비해 미군이 서울 이남에서 큰 전술적 이득을 획득케 했다.만약 이들 사단의 철수가 제때 이루어졌더라면 서울 이남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임』 스탈린은 이와함께 탱크사용 전술이 크게 잘못됐다는데 대해 격노했다. 『탱크를 투입할 때는 사전에 박격포공격을 통해 탱크가 진격할 길을 치워야 하는데 최근 이 원칙도 지키지 않고 탱크를 투입했다.이 때문에 우리 탱크들이 쉽게 적에게 파괴됐다』 스탈린은 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며 군사고문단들이 이에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슈티코프대사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프라우다신문 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며 『이런 전략경험의 미숙,맹목성이 남부의 병력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의문을 야기시켰다』고 질책했다.이와함께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장군에게 인민군사령부가 병력을 동남부로부터 신속하고 질서있게 이동시켜 서울 동·남·북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그는 병력이동시 작전수칙 8개항을 직접 지시했다. ○「8개 수칙」 직접지시 『①주력군 철수는 강력한 후방지원하에 시행할 것.경험많은 전투사령관들이 후방지휘를 책임질 것.대전차포부대,탱크가 후방방어를 지원할 것.②후방방어는 지뢰등을 이용한 장애물을 설치,이중삼중의 방어선을 만들 것.주력군 철수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후방방어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돼야함.③주력사단은 분리이동이 아니라 전체가 이동해야 함.주력군 선두는 포,탱크부대를 앞세워 전투태세를 갖춘상태에서 나아가야 함.④탱크는 반드시 지상군과 함께 투입하되 사전에 포공격을 한 다음 투입할 것.⑤선두부대는 주력군이 도착하기 전 교량,교차로,주요도로 등을 점령해야 함.⑥철수시 정보수집과 부대간 통신유지에 특별히 신경을쓸 것.⑦방어선 구축시기에는 병력의 전선배치를 피할 것.공격작전 개시 전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⑧인민군사령부와 병력간 통신시 무선암호를 사용할 것.…중략…이미 지시한 바대로 군사고문단은 단 한명도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할 것』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전세는 북한측에 더욱더 어렵게 전개됐다.스탈린은 김일성과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의 긴급요청을 받고 마침내 소련공군 부대를 북한에 주둔시키기로 동의했다.즉각 관련부대에 대한 명령이 소련군지도부에 내려졌다. 50년 9월 21일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11 72SS)『①평양방어 임무를 맡은 「야크­9」전투비행여단의 전속에 관해 보고함.이 여단의 전속배치를 위해 연해주 보로실료프시 인근에 주둔중인 147비행사단 전력에 의존할 것을 제의함.전투기의 이동배치시 안동­평양지구에서 공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중략… ②북조선내 비행단 정비인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위에 언급한 여단의항공기술대대 1개를 안동 경유 철도를 이용,평양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음.동시에 북조선이 탄약,연료가 부족하다면 이를 평양에 공급할 것임.③북조선이 공군관제기술과 공중경보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장비를 공급해 주어야 함.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공군기들이 활주로에서 적군기의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가 높음.…』 이틀 뒤인9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위한 최종계획을 보고했다. 바실리예프스키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아군 조종사들이 평양부근에서 1차 교전만 가지면 미군기들에 의해 즉각 정체가 탄로날 것임.왜냐하면 공중전에서 조종사들간 무선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임』이라며 이 부분에 각별한 신경을 써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소련공군기의 참전태세가 완료된 즈음,북한군의 전세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스탈린으로부터 전황파악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간 마트베프 장군은 9월27일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60 0262sh) 『서부전선(서울)과 동남전선(부산 방향)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매우 불리함.미군은 인민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음.제물포에 상륙작전을 폈고 이곳으로부터 북쪽과 대구 북서방향으로 진격중임. ○김,6개사단 창설 계획 미군은 강력한 공군력의 지원을 엎고 인민군의 후방과 전방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가하고 있음.미군은 수원 동쪽과 동남쪽 25∼30㎞까지 진격했음. 9월 25일 19:00,김일성은 서울일원과 북부전선과 동남방향의 제2군에게 최선을 다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음.9월 26일 소련군고문단들이 김일성을 만났음.이 면담에서 김일성은 전시 총사령관과,전쟁상 직을 자신이 모두 맡겠다고 밝혔음.김일성은 특히 남쪽으로부터 동원가능한 최대인력을 데려와 이들로 6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겠다고 말했음.중국철도가 조선으로 오는 군수품 때문에 크게 붐기기 때문에 이들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 수송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했음.이 면담에서 우리는 김일성과 다음 사항에 합의했음.①효율적인 병력통제체제 확립.②물자,기술공급,수송,도로이용을 원활하게 할 것.③방어선 구축.북조선군은 운전병이 부족함.김일성이 중국측에 운전요원 1천5백명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임.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전선상황을 브리핑했음. 슈티코프대사가 전한 바에 따르면 김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마트베프 장군은 9월 30일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계속했다.『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이같은 요청에 대해 자기는 현재 인민군의 정확한 위치,사정을 알지 못해 충고할 수는 없으나 38도선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함. 김일성은 본인에게 적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음.본인은 이에 대해 그것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38도선의 방어선 구축은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싶다고 말하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그러나 만약 적이 38도선 넘어 진격해올 경우 새로운 사단창설은 물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했음. ○모에도 공군지원 요청 김일성은 이와 관련,스탈린동지께 서한을 보내 충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음.본인은 이와 관련,들려줄 충고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음.김일성은 이 서한에 공군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음.최근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부탁이 포함돼 있었음.본인 판단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매우 초조해 있음.당황하고 비관적이었음.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음.서울이 함락됐음.38도선을 향해 신속히 진격하는 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저항을 펼수있는 병력이 없음.정치상황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김일성은 마침내 강경한 어조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9월초 “인천상륙작전 대비” 지시/「소 공군 투입계획」 중 공군 참전에 확정 9월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직접 지시문을 채택하였다는 점은 소련이 한국전쟁을 지도부 전체 수준에서 논의하였음을 보여준다.즉 그것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이날의 지시문에서는 작전 부재의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직접 묻고있다.서울부근에서 지체한 것도 소련고문단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심지어 사령부와 예하부대와의 협조 및 통신 연락미비 탱크사용전술에 있어서의 오류 등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까지 직접 지시하고 있다.다른 한가지 새로운 점은 스탈린이 이미 9월초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서울부근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고까지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거대한 전쟁을 여러 번 치렀던 스탈린으로서는,특히 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함께 치렀던 그로서는 이미 미국의 고전적인 상륙전술을 깊이 인지하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공산진영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거의 알고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세번째로 소련공군의 참전방침이 이미 중국군의 참전 이전인 9월에 결정되었다는 점이다.이 역시 아주 새로운 사실로서 지금까지 소련공군참전결정은 10월에 중국군의 참전교섭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통설의 부정인 것이다.또한 흥미있게도 조종사들에 의한 러시아어무선교신의 위험성을 이미 지적하고있다는 사실이다.이는 실제로 소련공군이 참전한 후 위장을 위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점에 비추어 그러한 위장의 계획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을 알게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초등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사설)

    변혁이라는 의미에서 건국이후 가장 야심찬 개혁의지를 보이고 있는 새 교육개혁안을 대하며 「가슴 벅찬」기대를 거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남은 일은 어떻게 현실화시켜 성과를 거두느냐다. 그런 뜻에서 이번 개혁안의 미진한 부분에 대해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우리의 교육에 대한 지향은 늘 고등교육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초등교육,그중에서도 국민학교교육은 늘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이번 교육개혁안도 그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보인다.중등교육에 관한 관심도 「대학입시」의 방향을 위한 것이므로 대학중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교육도 지능이 발달되기 시작하는 만3살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시기에 모든 가능성의 85%가 결정된다는 것이 모든 교육학의 정설이다.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의 발사로 우주전쟁에서 소련에게 졌던 미국이 서둘러 착수한 교육혁신은 SMSG같은 국민학교과정의 기초교육 강화였다.연전에 한국을 방문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석학은 물리학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10살에 이미 판가름이 난다고 말했다.25살이면 「환갑」이라 일컫는 것이 이 분야다. 이렇게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시기의 교육에 대한 개혁이 함께하지 않는 교육개혁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교육내용,교육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과 변혁의 시간표가 고등교육의 그것보다 먼저 세워져야 한다.적어도 함께는 세워져야 한다.이번의 개혁안에서 아직은 그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유아기만 되면 태권도에서 피아노까지의 온갖 교육을 거의 무자격 교사가 이끄는 「학원」에 맡겨두고 국민학교과정까지 방치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 어린이들이다.이런 현상은 전국이 거의 평준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학원 시간표에 묶여 뛰어놀 자유도 없어진 우리 어린이들의 교육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검토야말로 교육개혁에 우선 포함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후속되는 실천과정에 기대한다.
  • 여성전환 남성 성폭행 20대 둘 강간죄 쇠고랑(조약돌)

    ○…서울지검 형사3부 박종환 검사는 22일 법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성전환수술을 받은 길모씨(36·유흥업소 종업원)를 성폭행한 최종원(27·회사원)씨 등 2명을 강간치상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부녀」를 상대로 한 범죄에만 적용돼왔으나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을 여자로 보아 성폭행범에게 강간죄를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법원의 판결이 주목된다. 최씨 등은 지난달 24일 상오 서울 중구 장충동 주택가골목길에 있던 길씨를 꾀어 승용차로 끌고가 번갈아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 민주 「경선내분」 진통 계속/양측 “새후보 추대”·“불가” 팽팽

    경기도지사후보 경선파동으로 빚어진 민주당의 내분은 이종찬 고문 추대기도를 공식 철회한뒤 제3자를 후보로 내세우자는 동교동계와 「장경우후보」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기택총재측이 타협점을 찾지 못해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이총재는 18일 『장의원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대의원들의 뜻에 따라 후보가 됐다』면서 장후보사퇴 반대의사를 거듭 분명히 했다. 동교동계는 장의원이 후보로 부적절하다며 이총재가 모든 권한을 갖고 새 인물을 후보로 내세워줄 것을 집중 설득했었다. 이같은 대치상황속에 이부영부총재등 「개혁 성향」의 국회의원 10명이 이날 계파이익에 초연한 중립적 인사들로 조속히 진상조사위를 구성,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관련자의 엄중문책을 촉구하고 나서 내분사태는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 조짐이다.
  • NATO 팽창이 능사 아니다(해외사설)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고 소련이 붕괴된 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필요성이 과거만큼 뚜렷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이제는 사라진 옛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위해 19 49년에 만들어진 NATO의 재편을 고려하기보다는 NATO 팽창을 유럽정책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이것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해칠뿐만 아니라 유럽에 대한 종전의 접근방식을 고착화시키는 잘못된 것이다.물론 군사적 위협이 다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장래 유럽에서 NATO나 그와 같은 기구가 존재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 워싱턴당국은 무엇보다 중부및 동유럽의 경제·정치적인 문제들을 다루는데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냉전논리나 미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NATO의 방위영역을 동쪽으로 넓힌다는 아이디어는 상상력의 부재를 드러낸다.그것은 미국의 중요한 안보이해가 걸려있지 않은 곳에서 미국의 군대를 개입시키게 하는 행위이다.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안보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유럽국가들을 유럽연합으로 통합시키는 것과 같은 좋은 방법들이 있다.중부및동유럽 국가들은 군사적인 통합을 이루기에 앞서 경제·정치적 통합의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NATO는 40년동안 유럽방위에 참여했으나 오늘날의 유럽안보문제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러시아는 더 이상 적대적인 초강국이 아니다.90년대 초반의 밀월관계가 끝나긴 했지만 모스크바는 서방과의 대결이 아닌 협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한다.미국은 NATO 팽창이 러시아에 이익이 된다고 말하지만 모스크바측은 NATO 팽창에 대해 냉전시대의 전선이 모스크바쪽으로 수백마일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다.오늘날 러시아를 위협적인 공격세력으로 취급하는 것은 장래에 전쟁을 고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체코나 폴란드,헝가리같이 NATO회원국이 될 전망이 있는 나라들은 민주체제를 수립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밟고 있으나 슬로바키아,루마니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성급한 팽창은 NATO를 결성한 원칙들을 해칠 수도 있다.
  • 「미·북 평화협정 대응방안」 평통정책 포럼

    민주평통자문회의는 15일 서울 장충동 사무처 회의실에서 「미·북관계 평화협정 제기,그 대처방안」에 관한 전문가 정책포럼을 갖는다.북한에 대한 한국형경수로 공급문제가 북한의 거부로 교착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열리는 이 포럼은 최근 북한이 펼치고 있는 평화협정체결 공세에 담긴 뜻을 집중해부하고 정책 대응방안을 모색하게 된다.포럼에서 발표될 최대권 서울대교수의 「평화협정의 법적 성격과 대응」이라는 논문과 김구섭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의 「한반도 평화체제,체결가능성과 한계」라는 논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최대권 교수 서울대법대/“남북기본합의서 UN에 등록을”/유엔 결의로 남북당사자가 체결해야 한반도의 평화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언뜻 볼때 평화협정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는 첫째 6·25전쟁이 법적으로 과연 전쟁이냐,둘째 비록 전쟁이라 하더라도 평화협정이 없으면 평화상태는 수립되지 아니하는 것이냐,셋째 전쟁상태를 종결시키는 평화협정의 당사자는 누가 되는 것이냐,넷째 6·25전쟁을 마무리짓고 평화상태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평화협정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의 의문점이 규명돼야 한다. 6·25전쟁은 실질적으로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이해하자면 북한이 일으킨 「평화에 대한 위협 또는 침략행위」에 대하여 국제연합이 UN의 기치하에 UN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서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휴전협정을 대체하는,평화협정에 상당하는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면 UN이 취할 수 있는 조치의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며 만약 평화협정이 요구된다면 오히려 UN과 북한 및 중국 사이에서 맺어져야 한다.그러므로 미국이 개별국가의 자격에서 북한과 평화협정의 이름으로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협정이나 합의를 행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백보를 양보해 6·25때 실제로 군대를 파견해 공산군과 싸운 실질적인 전쟁당사자로 말한다면 UN군 기치하에 군대를 파견해 싸운 미국을 비롯한 한국등 16개 참전국을 거론해야 한다. 남북간 진정한의미의 평화협정이란 남북 양측이 각각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공존체제의 승인이며 이것을 담보하고 증명하는 장치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법적으로 지금 남북이 모두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경우에 따라 결국엔 남북이 서로 국가로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는지 모르나 설령 서로를 국가로서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들어가면서 평화체제의 구축을 합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통일달성의 최선의 시나리오는 남북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미국등 참전 16국 및 중국과 주변국가인 러시아와 일본이 국제보장적 차원에서 이에 참여하며 이렇게 해서 형성된 평화체제를 유엔차원에서 담보하는 유엔 결의를 얻어내는 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북기본합의서가 현상태에서 이룩할 수 있는 평화협정이라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평화협정 이행 의사와 진전노력을 담보하기 위해 평화협정은 더 큰 국제법체제(UN체제 포함)에 연계시키는 것이 보통이며 이같은 관점에서 남북합의서도 UN과 연계시키면 좋을 것이다.즉 UN헌장 102조에 따라 남북합의서도 UN에 등록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안이다. ◎김구섭 실장 국방연구원/“정전협정 폐기는 교전관계 의미”/한반도 전쟁때 미 개입 차단이 북 속셈 북한은 50년대와 60년대에 한국에,70년대에는 미국에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또 80년대에는 한국을 옵서버로 참석시킨 3자회담을 주장하기도 했다.이후 9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과는 불가침선언을 체결하고 미국과는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물론 현재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평화협정은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북한간에 체결돼야 한다는 내용이다.한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휴전협정 체결 후 40여년간 정전상태가 지속돼 왔는데 오늘날 새삼스럽게 한국전쟁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다.또 휴전협정은 군사적 성질의 조약으로서 교전자가 협정의 당사자가 되며 교전 쌍방의 군사령관이 교전자를 대표해 체결하는 것이 통례이며 이 휴전협정은 모든 교전당사국들에게 적용된다. 한국 휴전협정의 체결 「서명자」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인 팽덕회,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였고 휴전협정의 「당사자」는 당연히 한국전쟁의 교전당사자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는 한국과 참전 16개국이 일방이 되고 북한과 중국이 타방이 된다.북한은 조약당사자와 조약서명자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정전협정 폐지,대미 평화협정체결」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현재의 남북간 대치상황 속에서 관철된다면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큰 틀이 사라져 우리 안보는 심각한 우려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다.정전협정이 폐지되면 유엔사령부가 해체되어야 하고 미북 관계의 정상화로 주한미군의 주둔명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평화협정에서 한국이 배제될 경우 남북관계는 정전협정의 파기로 전쟁상태가 회복되어 결과적으로 교전관계가 되고,미북 관계는 평화협정으로 관계정상화를 이루게 된다.그러므로 북한의 속셈은 한반도내 내전상태를 유도하고 미국의 개입을 차단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북한의 이같은 문제제기에 대해 유엔 총회나 안보리에 해결을 요청하는 한편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측 참여국들이 북한에 외교적·경제적 압력을 행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우리측 입장을 선명하게 정립해야 하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지속하되 한국군의 위상증대와 독자능력증대에 힘써야 한다. 현단계에서는 군사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미평화협정 반대 및 군사정전위 기능회복에 노력하면서 북한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남북협상 전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9)

    ◎김구·김규식 잇단 제안… 하지,“북 음모” 비난/평양,인민군창설 선포… 「정치 제스처」 드러나 남한에서 남북협상론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머리를 들었다.1948년1월26일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한 김구의 담화로 시작되어 다음날 같은 맥락의 김규식의 담화로 이어졌다.남한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응은 냉랭했다.미군정사령관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비난과 함께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18일전 선제안 우리는 여기서 하지의 불편한 심기를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는 일찍이 북한이 제안한 사안으로 김일성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특히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이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담화가 나오기 직전 1월8일의 김일성의 발언에 주목했다. 김일성은 이 발언에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제국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우익민족주의세력,특히 김구와 대담하게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1월13일 자신의 발언과 부합되는 내용의 편지를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남한의 좌익세력들도 물론 가세했다.2월초 홍명희의 비밀방북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인 것이다.그는 북한에 머물면서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이면통합활동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그리고 나서 김구·김규식·조소앙·여운홍등과 접촉했다. 홍명희는 이보다 앞서 1947년11월에도 북로당위원장 김두봉의 편지를 통해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할 것과 광범한 세력과의 연대로 통일전선을 강화해야 된다는 주문을 받았다.이 시기에 공산주의진영의 민전도 남북을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이 무렵 북로당은 대남연락부장 임해(임해)를 서울로 밀파했다.남한의 정치상황을 체크하고 2월25일 평양으로 돌아갔다.그는 민전확대회의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제의는 애국적 결단』이라고 극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의도와 먼 거리 북로당은 이 보고를 토대로 남북협상 주요대상의 연합을 적극 모색한다는 정치노선을 채택한다.주요대상은 과거 반탁진영에 속한 우익세력 가운데 단정에 반대하는 그룹을 지칭한 것이다.북한이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공작차원에서 계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남북협상 움직임은 사실상 이율배반적 정치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남북협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2월 북한은 이미 작성해놓은 헌법초안에 대한 지지결의대회를 확산시키고 있었다.그리고 인민군 창설까지 선포하고 난 뒤였다.이러한 북한의 정치행보는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는 소련의 뚜렷한 목표를 따른 것이어서 수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울에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장 메논이 두 이데올로기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한국적 정치조직의 탄생을 기대한 적이 있다.그러나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려는 소련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유엔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엔총회가 유엔감시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한 것은 1948년2월26일이다.그러니까 북한이 서둘러 취한 일련의 조치,헌법초안에 대한 이른바 전인민적 토의와 지지결의라든가 인민군창건 선포등이 있고 나서다. 2월10일에는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는 임시헌법초안이 공포되었다.이렇듯 북한은 정권수립과정을 재빨리 밟아나갔다.그들대로의 단독정권의 기틀을 남한보다 먼저 다져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북한에 독자적 공산주의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민족자결원칙에 충실한 민주적인 동시에 민족의 분열을 막는 구국적 대책이라고 선전했다. 김일성은 인민군창설을 정식으로 선포하는 열병식 연설에서는 「북조선 민주기지에 의거한 무력통일」의도를 처음 드러내 보였다.이때 남로당은 북한정권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2·7폭동을 일으켰다.김일성의 열병식 연설에 나타난 민주기지에 의한 무력통일은 당시 남한의 2·7폭동과 맞물린 것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내려오는 북한의 통일전략이다.남북의 역량을 3으로 볼 때 남북혁명세력을 2,나머지 1을 남한의 보수세력으로 계산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이를 가리켜 흔히 「1+1/2전략」이라 부른다. 소련이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반대하면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한 이면에도 이 전략이 깔려 있었다.미·소 양군이 철수하고 한반도문제를 한국인에게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은 북조선공산당(북로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남한의 남로당을 포함하는 좌익세력을 신뢰한 데서 비롯됐다. 1948년3월9일 북한의 민전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김일성은 소련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그는 소련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펼치자고 선동했다. 이러한 남북의 정치상황 속에서 3월25일 북한의 9개 정당과 단체이름으로 내놓은 성명문이 평양방송의 전파를 탔다.「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성명문이었다.조국의 민족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남한 정당·사회단체들을 4월19일 평양에서 여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초청한다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그 속에 포함된 남한인사는 좌·우·중간파 15명이었다. ○북,대외적 선전거리로 어떻든 북한은 정부수립으로 가는 모든 절차를 갖추어놓은 상태에서 남북협상을 절호의 선전기회로 삼았다.이 성명이 나온 이틀 뒤인 3월27일 「소범위 지도자연석회의」소집에 동의한다고 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했다. 김구가 주도한 한독당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자주연맹은 자신들의 협상제의를 전적으로 무시해버린 북한태도에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북한 민전이 사실상 단독결정으로 준비하고,또 개최할 남북연석회의에 초청객으로 참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심했다.결국은 참가를 결심했고,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한 남북연석회의 초청편지는 2월27일 밤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달되었다.이 편지는 공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북로당 연락부 요원이 직접 가지고 내려와 좌익계열의 성시백을 통해 전달했다.편지내용은 흰 인조견에다 썼다고 한다. 북한은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발표한 나흘 후인 3월28일부터 평양에서 북로당 제2차 대회를 열었다.이 날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석회의에 앞서 북한의 정치세력을 과시하는 한편 회의에서 기선을 잡자는 술수를 깐 것이다. ◎“북,남공산주의자에 「단선 방해」 지령”/UNTCOK작성 「공당 활동」/“미군 철수” 주장… 정세분석 협조도 거부/우익계 대동청년단 등에도 “붉은 손길” 한반도정치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들어온 19 48년의 봄은 혼란스럽게 다가왔다.남북총선을 위해 입북하려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저지한 북한은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려는 온갖 투쟁수단을 동원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미국에서 기밀이 해제된 UNTCOK 관계문서를 입수,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문서는 48년1∼3월 사이의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처(G­2)와 방첩대(CIC)의 정보보고및 평양의 대남방송내용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UNTCOK의 임무를 혁명적 방법으로 반대한다고 전제한 이 문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의 지령에 의해 군대철수를 주장하고 있다고 적었다.이어 남한의 정세를 기록하기 위해 좌익계열의 허헌 등 4명을 UNTCOK에 나오도록 초청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38선이 지나가는 경기도 옹진반도의 공산주의활동을 소상히 기록했다.공산주의자는 성인인구의 10%에도 못미치지만 우익에 극력하게 침투,효과적인 간첩행위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추어냈다.또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있는 우익계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체에까지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2·7폭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했다.이 2·7폭동은 주모자들의 검거로 행동반경이 위축되는 듯하다가 3·1절과 3월25∼29일 사이에 재개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소련에 의해 통합된 임시헌법의 초안내용,인민군의 창군행진,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군중의 숫자를 평양방송이 연일 선전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이와 더불어 평양방송이 3월25일 방송한 북한 민전의 남북연석회의 제안내용을 전하면서 이 역시 소련의 전략으로 평가했다. 끝으로 북한사람들은 한반도를 소련이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확신있게 분석하고 남한에 장차 수립될 단독정부가 장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이는 6·25 당시 남하한 인구를 보면 실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임투와 선거연계 경계한다(사설)

    대검이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 등 재야 노동단체 간부 9명에 대한 특별검거령을 내린 것은 임금투쟁을 지방선거와 연계하려는 재야 노동단체의 전략을 차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재야 노동단체의 임투 전략은 오는 6월1일부터 5일까지 「민노준」과 공공부문노조대표자회의 산하 노조들이 일제히 쟁의발생신고를 하고 쟁의 냉각기간이 끝나는 16∼20일 쟁의에 돌입한다는 것이다.이는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올해의 정치상황을 임금투쟁과 연계해 최대의 성과를 거둬 세불림을 한뒤 오는 11월로 계획하고 있는 제2노총 출범 입지를 강화한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재야 노동단체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활동 허용 쟁취,제3자 개입금지의 노동법 개정,사회개혁등 자신들의 정치·사회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한 「법 안지키기 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이들의 요구사항들은 모두가 노동조합법 또는 쟁의 조정법에 위배되는 것들이어서 당국의 제재를 받아왔다.이번에 특별검거령이 내린 사람들도 이때문에 이미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에서 수배중이었다. 선거분위기라는 것이 이성적인 협상보다는 불법행위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약화되는 호기로 인식돼 온 것이 과거의 경험이다.이번 선거를 앞두고 그같은 조짐이 이미 나타나 전체 단체협상에 지장을 주고 있다.9일 현재 전체 임금협상의 타결진도는 23.6%로 지난해보다 다소 높은 편이나 공공부문은 20.3%로 지난해의 절반수준에 지나지 않는다.이는 올해의 임금협상이 지역별·직종별로 추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다 선거분위기와 맞물림으로써 기대욕구가 커 협상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노사간의 임금협상이 선거의 볼모가 되어서는 안된다.정부는 탈법적 임금투쟁에 대해서는 강력히 단속해 선거철이라 해도 정책선택의 제약이 없음을 보여줘야 한다.
  • 김 대통령 서울주재 일 특파원 합동간담내용

    ◎“일은 위안부문제 역사인식 바로해야”/대일 대중문화 개방 중의수렴 안된 상태/차기대선서 세대교체 이뤄지도록 노력/대구사고 수습 중앙정부 중요성 보여줘/북한 새주석 취임하면 정상회담 실현 기대 김영삼 대통령은 4일 상오 청와대에서 이시하라 도시히로 도쿄신문 특파원 등 서울주재 일본특파원 16명과 합동간담회를 가졌다.이날 간담회의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4일 상오 청와대에서 이시하라 도시히로 도쿄신문 특파원등 서울주재 일본특파원 16명과 합동간담회를 가졌다.이날 간담회의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께서는 30년전의 한일 국교정상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요.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내 입장에서는 극렬히 반대했었습니다.그때 합법적인 민주정권이 5·16 쿠데타로 붕괴되었고 그로 인해 생긴 군사정부가 나를 유혹하기도 했었고 당시 나는 처음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와서 그 얘기를 가지고 한일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대통령이 되기전부터 얘기했지만 과거에 대한역사인식을 바로 하면서 미래를 지향해야 합니다.여러 문제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 따로 얘기한 것은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보상비용을 우리 정부가 부담하겠지만 일본은 역사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전결의는 일 문제 ­부전결의 문제를 둘러싼 일본 국회내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해 한국에서 대일감정이 악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문제를 한국국민이나 정부가 생각해 본적은 없으며,일본정부와 국회에서 일어났던 일이기에 우리는 예상치 않았던 일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전적으로 일본정부와 국회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문제와 관련하여 공로명 외무장관이 상당히 전향적인 발언을 했었는데,그 후에는 이와 관련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 문제는 관계부처에서 검토하며 공청회등을 통하여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국민정서인데 아직 중의수렴이 안된 상태입니다.시간이 가면서 일본의 대중문화가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임기중에 일본 국왕의 방한을 실현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이 문제는 일본의 국민과 정치지도자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일본의 정치인들이 정직하고 역사인식을 바로해야 하는데 기회가 있으면 망언을 하여 우리 국민에게 감정의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따라서 이는 일본국민과 정치지도자에 달려 있는 문제이며 일본 국왕의 방문은 임기중 실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일본이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근본적으로 일·북한 수교에 반대입장은 아닙니다.대단히 민감한 문제인데 아시다시피 일본은 선린관계에 있어서 중요시 되는 나라입니다. 한반도가 왜 분단돼서 고난을 당하는가를 일본이 알아야 합니다.일·북한수교는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되고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는데 따라 생각할 문제입니다.한일 양국 정부가 긴밀히 협조·의논해 가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은 불확실한 체제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설도 나오고 있는데,북한이 제안한다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지요. ▲북한 내부에 대해서 아는바 있지만 공개 않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불확실한 체제이며 언론의 불확실한 보도도 그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년에 나와 김일성 주석은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었지만 그의 유고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북한은 편지를 보내 유고로 연기한다고 했는데 새로운 주석이 취임하면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제네바 미·북합의 이행 문제와 관련하여 미·북간의 경수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경수로 문제와 관련,미국·일본·한국은 협력이 잘되고 있습니다.KEDO 합의의정서를 만들 때에도 3국간에 이론이 없었습니다.즉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데 대해 3국이 합의했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원치 않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며 경수로 문제 해결없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지 않을 것입니다.미국입장에서 한국이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는 6월에 실시될 지방선거가 현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을 여당 총재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본의 지방선거의 경우 오사카와 도쿄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지만 정국에 미치는 영향은 없습니다.한국도 같을 것입니다.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지방자치는 문자 그대로 지방자치입니다.지방의 일꾼을 선출하자는 것입니다. ○일 경제회생에 도움 큰 문제가 있을 때 정부의 지방에 대한 직접 지원없이 문제해결이 안됩니다.우선 재정적으로 불가능합니다.대구 가스폭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정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며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따라서 지방자치의 의미를 과대포장할 필요는 없으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와는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중간평가라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대통령이자 민자당 총재로서 말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정국에 미치는 영향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지요. ▲문제는 대일수출은 늘어나지만 수입도 많이 늘어나 결국 금년에도 무역수지역조가 더욱 커질 전망입니다.그 문제의 해결이 양국관계의 발전에 매우 중요합니다.국민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항이고 언론에 항상 보도되는 내용입니다.최근 엔고현상과 관련,일본이 외국에 부품공장을 이전하고 제조업을 진출시키는데 이런 투자를 한국에 해야할 것입니다.한국은 타국에 비해 기술등 여러면에서 더 낫다고 생각되며 또한 외국인 투자시 여러가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이 진실로 노력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며 정부간 협력도 중요하지만 민간차원의 협력이 제일 중요합니다.일본 언론에서도 이런 점에 대해 공정한 보도를 통해 해결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한일관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간 한일양국간 경제협력이 한국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한일간의 협력이 한국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일본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북한 전쟁은 불행한 전쟁이었지만 일본경제를 살리는데에는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임기중 개헌 없을 것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정계복귀와 관련된 추측들이 많은데. ▲그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기자들의 질문에 답한적이 있습니다.김대중씨의 정계은퇴는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고 김대중씨 자신이 스스로 국민에 대해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입니다.따라서 내 자신은 김대중씨가 정계를 완전히 은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내각책임제를 도입해서 남북한 통일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얘기하겠는데 결코 내 임기동안 헌법개정은 없을 것이며 또한 불가능합니다.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북대치상황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국민의 절대적 지지속에서 탄생하였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장면 정부가 무너졌었습니다.과거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불행하게도 쿠데타를 발생하게 한 내각책임제는 우리가 채택하기 어렵습니다.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은 꿈에도 생각한 바 없습니다.그리고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면 충분합니다.정말 열심히 대통령이 일하면 5년으로 충분합니다.또 하나 중요한 것은 2년밖에 안됐는데 당적을 옮긴 국회의원수가 2백99명중 65명에 달하니 만약 내각책임제를 할 경우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간다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바다로 갈것인가 산으로 갈것인가. ○중간평가 아니다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정치권의 세대교체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분명하게 말씀드려서 다음번 대통령 선거에서 분명히 그리고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있을 것입니다.이는 국민이 합의하고 동의한 사항입니다.세대교체를 위해서 대통령으로서 노력할 것입니다. ­경수로 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은 한국형을 거부하고 있는데…. ▲경수로 문제는 북한의 입장에서도 만일 거부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이는 우선 40억달러에 달하는 사업이고 또 미국이 이미 지원한 중유 5만t을 포함,50만t을 지원할 계획입니다.또한 북한은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과의관계개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려는 것은 미국과의 회담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한 전략입니다.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정전협정 준수가 중요합니다.그리고 이는 남북한간의 양자간의 문제입니다.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은 남북한간의 문제라는 것을 미국도 잘 알고 있습니다.미국은 한국이 반대하는 것은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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