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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노래 속의 낭만 연인/ 이민홍 편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사랑만큼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있을까?그래서 서구에선 고대로부터 신화와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사랑이었다. 이미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은 풍요의 신인 아버지와 빈곤의 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도 또 만나고 싶은 것은 어머니의 빈곤의식을 닮았고, 만남의 장소를 화려하고 근사한 곳으로 택하고자 하는 속성은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신화적 해석이 그럴 듯하다. 하지만 유가이념이 지배한 동아시아에서 상류층 사람들은 내심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도 이를 말하거나 글로 표현하는데 인색했다. 도덕군자로 알려진 저명한 선인들 대부분이 열렬한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건만, 이들이 남긴 ‘사랑의 시’는 가뭄에 콩나듯 희귀하다. 삼국시대의 향가나 고려조의 몇몇 가곡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랑노래는 아니다. 대부분은 남녀간의 애정에 의탁해 왕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내 님이 그리워 우는 것은 산 두견새와 비슷하다.”는 피맺힌 노랫말을 남긴 ‘정과정’,“이 몸 생기실 때 님을 쫓아 생겼으니, 천생연분이 하늘 모를 일이런가.”의 ‘사미인곡’을 애절한 사랑노래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이같은 이치에 있다. 그러나 작자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만횡청류(漫橫淸流), 이른 바 사설시조엔 애정과 애욕이 넘쳐 흐른다. 조선시대 풍류와 사랑의 ‘진정한 주인’이랄 수 있는 명기들의 사랑노래는 애틋하고 진솔해 지금 읽어도 그 절절함이 가슴을 적신다. 또 일부 지식인들도 솟구쳐 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시로 남겼다.‘낭만연인·浪漫戀人’(이민홍 편역, 국일미디어 펴냄)은 이처럼 우리 선조들이 남녀간 애정을 꾸밈없이 읊은 한시 108수를 뽑아 해설을 붙인 것이다. 편역자의 표현대로라면 ‘조선시대의 3년간 나눌 애정을 3일 동안에 탕진할 수 있는 요즘, 애틋한 중세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한 수 한 수 뽑아 해설을 붙인 책이다. 책은 사랑이 싹트기 전부터 시작해 이별과 죽음 이후의 감정까지, 마치 사랑의 일대기를 그리듯 9개의 테마속에시를 담았다. 이성에 대한 설렘, 불꽃 같은 사랑, 이별, 그리움, 외로움, 꿈속의 사랑과 기다림, 체념, 다음 생의 사랑 등등. “열 다섯 아리따운 아가씨(十五越溪女)/부끄러워 이별의 말도 못하고(羞人無語別)/중문까지 닫아걸고 들어가서는(歸來掩重門)/배꽃 사이 달 보며 눈물 흘리네.(泣向梨花月)” 이성에 대한 설렘과 부끄러움이 잘 드러난 이 시는 임제(1549∼1587)의 ‘규원’(閨怨)이라는 한시. 열 다섯이면 요즘 중학교 2학년. 시대가 바뀌어 사내아이보다 더 기운이 넘쳐 악을 쓰며 뛰어다니기도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말도 잘 못하는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편자는 기대를 가져 본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 남곤(1471∼1527)의 첩이었던 조운. 첩이었던 것이 못내 한스러웠는지 그녀는 “…초가집 한 칸이면 당신과 누울 수 있으니/가을바람 밝은 달과 오래도록 삽시다.”라며 사랑의 도피를 애원한다. 조선 영조 때 평양의 명기로 소문났던 계월은 누구를 그리 떠나보내기 괴로웠는지 “대동강 강가에서 정든 님 보내는데/천가지 버들로도 잡아매지 못하네….”(送人)라고 으며 애를 끓이고 있다. 파격의 지식인답게 다산 정약용도 ‘꿈속의 아내에게’(如夢令寄內)란 사랑시를 남겼다.“…언제나 침실에서 아름다운 인연 맺을까나/그리워 말자 그리워 말자/서글피 꿈속에서 본 그 얼굴을.”시국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귀양살이를 하던 그는 언제나 보고 싶은 아내랑 한 방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괴로워하고, 결국은 “그리워하지 말자.”며 체념을 드러낸다. 근엄과 격식의 사회에서도 ‘꿀과 설탕’같은 사랑이 흘렀고, 많지 않은 한시를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9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배트맨 비긴스’ -탄생, 왜! 어떻게?

    올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는 약속이나 한 듯 ‘탄생의 비밀’을 벗기는 데 초점을 모았다.‘스타워즈 에피소드 3’편이 제다이 기사 아나킨이 악의 화신이 되는 과정을 밝히더니,24일 개봉하는 ‘배트맨 비긴스’(Batman Begins)는 브루스 웨인이 왜, 어떻게 배트맨이 됐는지를 되짚는다. 배트맨의 1인 영웅담에 집중하기는 전편들과 다를 게 없으되 덕분에 드라마는 한결 강해졌다. 장기 시리즈물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주인공의 면모일 것. 마이클 키튼, 발 킬머, 조지 클루니에 이은 4대 배트맨으로 크리스천 베일이 종횡무진 스크린을 활강한다. 상처입은 영혼을 가진 배트맨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영화는 시작부터 초점을 맞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어이없이 길거리에서 피살되는 광경을 목격한 그날 이후 브루스 웨인은 죄의식과 분노를 떨칠 수가 없다. 악을 물리칠 방법을 찾겠다며 고담시를 떠나 들어간 곳이 범죄자들의 소굴. 그곳에서 자신도 범죄자에게 아내를 잃은 아픔을 겪었다며 접근해오는 듀커드(리암 니슨)를 만나 다양한 수련법을 익힌다. 그러나 듀커드가 범죄자들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주도의 강경조직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웨인은 고담시로 돌아와 사회를 구원할 자신만의 방식을 찾는다. 배트맨 탄생을 설명하는 일련의 사연들이 전반부에서 압축된 이후 스크린은 본격적인 영웅담을 풀어놓는다. 고담시에 만연한 부패와 범죄를 소탕하려는 웨인의 시도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이를 부각시키려는 흔적이 곳곳에서 역력하다는 점이 이번 시리즈의 특기항목. 충성스런 집사(마이클 케인)와 응용과학 전문가 폭스(모건 프리먼)의 도움으로 첨단소재의 배트슈트, 최신 무기들을 제조하는 과정에 진지한 시선을 보낸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불굴의 의지, 강도높은 훈련, 거대한 자본으로 이뤄진 배트맨은 ‘던져진 영웅’이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이었음을 웅변하는 데 영화는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영웅담의 기본재료로 동원되는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가 이번 시리즈에선 흐릿하게 뭉개진 대목도 흥미롭다. 동양무술의 달인인 라스 알굴이 어둠의 세력으로 묘사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배트맨과 방식을 달리했을 뿐 악을 응징한다는 점에서는 배트맨에 맞서는 캐릭터는 아니다. 고담시로 돌아온 브루스 웨인의 대립대상은 부패권력과 밀착한 갱두목 팔코니(톰 윌킨슨). 어렸을 적 여자친구이자 검사보인 레이첼(케이티 홈즈)이 팔코니의 음모로 위험에 빠지자 신출귀몰하며 이를 막아낸다.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는 마니아들에겐 배가 좀 고프지 않을까 싶다. 배트맨이 공포를 대면하고 그것을 초극하기까지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탓에 팬터지를 부르는 액션 시퀀스는 그리 많지 않다. 톰 크루즈의 새 애인으로 한창 외신 가십난을 채우고 있는 케이티 홈즈가 지적이고도 당찬 캐릭터로 감칠맛 나는 양념 구실을 했다.‘메멘토’‘인섬니아’ 등을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12세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儒林(36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자들의 질문은 임금이 성문을 닫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성을 나가버린 두범의 행동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두범의 행동을 빗대어 스승의 진의를 엿보려는 다목적용 질문이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옛 군자였던 범순인(范純仁)은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임금 휘종(徽宗)이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고 곧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범순인을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범순인은 ‘내가 평생을 통해 배운 것은 충(忠:충성)과 서(恕:용서) 두 글자뿐이다. 이것은 평생을 두고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였던 송나라 최고의 명신. 범순인의 이 말은 일찍이 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였을 때 다른 제자들이 뜻을 몰라 증자에게 묻자 대답한 증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에 있다.’는 대답으로 공자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는데 범순인은 그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을 용서함의 중요성에 대해 범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 ‘범순인은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늙고 병들었다고만 대답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고사를 불의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퇴계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음인 것이다. 퇴계의 대답은 다시 이어진다. “또 오징(吳澄)은 나라를 버리고 떠나가는 날에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좇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곧바로 가버렸다. 이를 본다면 옛 군자들도 또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말하였던 오징은 오초려(吳草廬:1249∼1333)라 불리었던 원나라의 유학자. 원래 그는 남송의 학자였으나 남송이 멸망하자 나라를 버리고 원나라의 벼슬에 올라 경서를 깊이 연구 발전시킨 성리학자였다. 오초려가 나라를 버리고 원나라에 입주하려는 것을 임금이 말렸으나 오초려는 단호히 나라까지 버렸던 것이다. 오초려는 자신의 학문을 위해서 나라까지 버렸던 행동을 변호하는 퇴계의 대답은 위인지학(爲人之學)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로 바뀌어 가는 퇴계의 학문관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음인 것이다. 위기지학.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 덕행의 향상과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곧 군자학(君子學)이야말로 자신이 전념해야 할 학문의 방향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모두가 죽령 고갯마루 위에서 깨달은 절대원칙이었으니 소백산은 퇴계에게 있어서 과거를 청산하는 대발심(大發心)의 출가처인지도 모른다. 공자는 68세에 이르러 13년에 걸친 주유열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48세 때 죽령고개를 넘으며 내린 퇴계의 결단은 마치 고향으로 돌아오는 공자의 행위에 비할 수 있다. 또한 주자는 28세 때 이르러 남악에서 세속을 버릴 것을 결심하는데 그렇게 보면 죽령은 퇴계에게 있어 남악의 결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자에 비한다면 20년 늦은 출가행위이고, 공자에 비한다면 20년 빠른 출가행위이니 그렇다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가장 알맞은 때에 단행한 퇴계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제2의 출가행이었던 것이다.
  • 맞춤형 이색펀드 봇물

    맞춤형 이색펀드 봇물

    ‘영웅시대, 백두대간, 생로병사, 알부자참스승, 충성!신고합니다….’ 요즘 증권사에서 내놓은 펀드의 이름이다. 고객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이색펀드가 쏟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펀드 전성시대를 맞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적금식으로 매월 일정액을 불입해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적립식 펀드는 가입계좌가 이미 250만개나 된다. 일반 펀드까지 합치면 500만 계좌가 넘는다. 현대증권은 최근 ‘영웅시대’와 ‘백두대간’이라는 펀드를 출시했다. 영웅시대는 한국 재벌의 창업기를 다루다 얼마전 종영된 TV드라마에서 착안했다. 현대그룹 계열사 주식에 50%를 투자하고 나머지 50%는 안정형 우량주식에 투자한다. 백두대간은 기업의 지배구조가 개선돼 기업가치가 높아진 종목을 골라 펀드액의 50% 이상을 투자한다. 높은 수익률이 예상되는 만큼 출시되자마자 펀드액이 100억원을 훌쩍 넘었다. 바이오 주식에 주로 투자하는 ‘생로병사’, 금융주에 투자하는 ‘머니마니’ 등 톡톡 튀는 이름의 펀드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은 지난 4월 교사만 가입할 수 있는 ‘알부자참스승’ 펀드를 내놓아 두달 만에 3억 3000만원을 팔았다. 투자는 투자대로 하다가 학생에 대한 집단따돌림(왕따)이나 체벌 등으로 교사 책임의 문제가 발생하면 배상액과 법률비용을 물어주는 보험서비스가 장점이다. 각종 보너스 상품도 고객들을 유혹한다. 한국투자증권은 군 입대 예정자나 직업군인을 위한 ‘충성!신고합니다’ 펀드를 팔고 있다. 적립기간이 군 의무복무 기간과 비슷한 2∼3년. 군 복무중 상해사고가 생기면 최고 3억원까지 보상되는 보험에 무료로 가입해준다. 현대증권 이하영 차장은 “사내 관련 실무자들이 매월 1회 이상 모여, 딱딱한 펀드명에서 벗어나 신선한 아이디어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상품개발 전략회의를 한다.”고 말했다. 굿모닝신한증권은 펀드 홍보를 위해 ‘우리 아들 잘 되라고 알부자∼’로 시작되는 경쾌한 리듬의 ‘알부자 송’을 만들었다. 미래에셋증권은 개그맨 김용만이 출연하는 경제교육 드라마를 DVD로 제작, 무료 배포하고 있다. 이색펀드가 빠르게 진화하며 눈길을 잡고 있지만 펀드에 가입할 때에는 여건과 형편에 맞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자녀를 위해 어린이 펀드를 불입하다 나중에 수익을 자녀 학자금으로 사용하려면 내지 않아도 될 증여세를 따로 물어야 한다. 자산운영업계 관계자는 “투자의 본질과 동떨어진 기발한 마케팅에 현혹돼 펀드의 생명인 수익률을 고려하지 않고 불필요한 펀드에 가입한다면 원금을 까먹었을 때 당황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기고] 제대로 된 지방분권, 국가경쟁력 이끈다/오재일 전남대 행정학 교수

    민선 단체장이 재출범한 지 10년이 지났다.1950년대 자유당 정권이나 1960년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지방자치는 실시되었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지방자치가 주어진 지방자치였다면,1990년대의 부활된 지방자치는 민주화의 일환으로서 쟁취된 지방자치였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년전 민선 단체장 선거가 실시된 바로 이틀 후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민선 단체장 재출범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다. 당시 여야가 첨예한 대립과 정쟁 속에서 지방자치 실시에만 지나친 관심을 가진 나머지, 지방자치의 본질에 걸맞은 제도적 설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바, 올바른 지방자치 정착을 위한 논의를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지방자치란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만을 뽑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주권자인 국민(주민) 가까이에 있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지방자치인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남용을 막고, 주인인 국민이 가까이에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제도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의 자치의식과 함께 시민주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헌법 정신이 국정관리와 연계되어 잘 구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방자치에 대한 헌법적 보장(헌법 제8장)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지방자치가 헌법기구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아왔는가는 의문이다. 헌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국정운영은 너무나도 중앙중심적인 국정관리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 사무(73%)나 국세(80%)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집중이 더 강화되어 가고 있어,‘지역’부재의 현상이 더욱 심화됨으로써 세계적 추세인 ‘지방화’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헌법과 지방화의 본질에 걸맞은 국가시스템을 재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점은 지방자치의 주요 원리 중의 하나인 보충성의 원칙에 충실하도록 하여야 하며, 아울러 분권가치가 국민들에게 체험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자치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며, 자치경찰이 창설되지 않으면 아니된다.19세기말 우리나라가 국제적 환경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가 어떠하였던가를 거울삼아, 민족적 생존이라는 차원에서 분권형 국정운영 시스템의 기반을 공고히 하여야 할 것이다. 분권적 국정운영을 해 본 경험이 아주 미약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지난 10년간의 지방자치는 실제로 나타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권재민의 정신을 구현시키는 등 풀뿌리 민주주의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여 오고 있다. 관청의 문턱이 낮아지는 등 주민지향의 정치·행정이 뿌리내리고 있으며,199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기에도 중앙의 혼란이 지역사회에로 파급되는 것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단체장의 제왕적 권력에 대한 비판은 시민사회의 성숙과 단체장에 대한 견제장치의 제도화로 개선되어야 할 과제이지, 지방자치 그 자체를 부인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은 중앙집권적 국정운영보다는 지방분권적 국정운영이 국가경쟁력 강화나 부패방지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선진국에서의 중앙정부는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교육이나 치안 등 미시적인 정책은 지방정부에 맡기고, 외교나 국방 등 민족적 생존을 위한 거시적인 정책에 집중하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선진국과 같이 ‘작은 중앙정부’·‘커다란 지방정부’구현이라는 차원에서 과감한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과 거기에 따른 재정분권을 실현시킴으로써 주민 생활 속에 체험된 지방자치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재일 전남대 행정학 교수
  • [옴부즈맨칼럼] 저널리즘의 생존전략/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최근 주요 일간지의 편집정책에 의미 있는 변화가 눈에 띈다. 심층탐사보도의 증가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본란을 통해서 여러 차례 탐사보도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는 이른바 ‘팩트’(fact·사실)를 중시하는 저널리즘 세계에서 사실은 진실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명제 하에,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보도방식이다. 언론사나 기자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된다는 비판적 입장도 있지만, 사건의 본질을 발견하여 보도함으로써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함은 물론 독자가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도와주며, 지면이 활성화된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서울신문은 여러 차례의 기획탐사기사를 보도했다. 보도의 내용은 우리사회의 급속한 고령화 문제(‘큐! 아름다운 노년’)로부터 미래 농업의 문제점과 활로에 대한 탐색(‘위기의 축산농 비상구를 찾아라’), 한류에 가려진 열악한 기초예술현장 고발(‘연극인 월소득 23만원…빚더미 무대인생’), 베트남 통일 25주년을 즈음한 기획연재기사(‘테마로 읽는 호찌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베트남 관련 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탐사보도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방법에 대한 논의의 방향을 제공하면서 사회구성원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기획탐사보도의 증가는 사회와 언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먼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사건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며, 국가의 사회문화정책 담당자의 각성을 촉구하여 책임있는 정책 수립을 촉진시키기 때문에 공익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 특히 언론사의 입장에서 기획탐사보도는 신문의 질을 높이는 전략적인 수단 중 하나이다. 신문의 질적 수준이 신문사의 경영수지 개선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연구결과를 고려하면 기획탐사보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미국의 언론학자 필립 메이어는 자신의 저서 ‘소멸하는 신문 : 정보화시대의 신문 구하기’(The vanishing newspaper: Saving journalism in the information age)에서 질적 수준이 높은 신문(quality journalism)이 더 잘 팔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문은 정보가 아닌 영향력을 판매하는 매체라고 전제하면서, 신문의 영향력이 커지면 그 신문의 가치 또한 증가하고, 영향력 있는 신문은 독자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에 광고주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매체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에 의하면 신문이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사의 정확성을 제고한 신뢰의 확보이다. 즉 문맥과 맞지 않는 인용이나 과장, 흥미 본위의 내용을 배제한 정확한 기사는 뉴스원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고 이는 곧 신문의 독자 유지능력 강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서울 지역의 유료구독 가구주 6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제49회 신문의 날 ‘신문가격과 독자마케팅 정책’ 세미나 발제문)에 따르면 신문에 대한 독자의 충성도는 매우 낮아 2년이 지나면 30∼40%의 독자가 구독신문을 변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신문사의 주요 수입원인 구독료는 신문의 이미지 및 편집특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결과이다. 즉 신문이 기사의 정확성과 신뢰도를 제고하여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한다면 독자들은 구독료 인상에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조·중·동 3사와 다른 중앙일간지 사이에 질적 차이가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전략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기획기사나 심층분석 기사를 확충하는 것 이외에도 거시경제보다는 미시경제를, 돈 버는 정보보다 돈 쓰는 정보를, 그리고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내용을 폭넓게 취급하는 한편 작은 글씨를 사용하고, 뚜렷한 목표독자를 설정하는 새로운 편집정책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널리스트나 광고주의 관심보다는 독자들의 관심사항이 무엇인지를 탐색하여 보도하는 편집의 특성을 확보하여 신문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이 정보화시대에서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생존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코드로 읽는책] 일본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아베 긴야 지음

    많은 일본 전문가들은 현대 일본인의 뿌리를 전국시대에서 찾는다. 임진왜란으로 악명높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했던 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서로 물고 물리는, 잔인한 피의 역사였다. 형제·자매·친척 중 그 누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생존법은?‘자신을 철저히 숨기기’다. 만인의 연인처럼 굴되 머리 속으로는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이것이 극단으로 내몰리면 심각한 폐해를 남긴다. 세상 모든 것을 오직 냉정한 힘의 관계, 즉 ‘파워게임’으로 환산하는 것. 이는 이해와 공감을 핵심으로 하는 역사의 실종을 뜻한다. 히토쓰바시대학 아베 긴야 명예교수의 ‘일본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이언숙 옮김, 길 펴냄)’는 이런 문제의식 위에 서 있는 책이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김정일 우상화는 비난하면서, 일제시대 강제노역과 위안부는 부정하고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만세)’를 외치던 파쇼적 습성은 미화하기에 급급한 일본 우익의 이상한 역사의식. 저자는 이처럼 일그러진 역사의식의 원인을 일본인 특유의 ‘세켄(世間·세간)’개념에서 찾았다. 중세사 전공인 그는 불교의 철학적인 이 개념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세속화됐는지 추적한다. 세켄은 3가지, 증여·상호보답의 원칙, 장유유서의 원칙, 공통된 시간의식의 원칙이 있다. 표현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파쇼적 무사집단을 상상하면 금방 그 뜻이 짐작된다. 증여·상호보답은 신임과 절대충성을, 장유유서는 윗사람의 고압적 태도를, 공통된 시간의식은 오직 관계만을 의식하는 태도를 뜻한다. 힘에 대한 절대적 숭배, 무슨 일만 터졌다면 TV에 나와서 고개부터 조아리는 행동 등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민주주의, 권리, 개인이란 아예 없다. 사실 저자의 역사의식은 용기에 넘치지만 새롭지는 않다. 공식제도는 민주적인데, 행태는 반민주적이라는 이중적 근대화. 저자 입장에서야 진보적인 일본 학자조차 이런 부분에 무관심하다는 데 놀라겠지만 우리에겐 숱한 일본 비판론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감상 포인트를 꼽으라면 차라리 우리의 세켄을 찾아나서는데 길잡이를 할 수 있다는게 될 듯싶다. 핏빛 전국시대 3인방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책들이 한국 CEO들의 리더십으로 수용되고 있는 현실은 그 출발점이다.1만 2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은행들, 블루오션전략 ‘올인’

    은행들, 블루오션전략 ‘올인’

    ‘블루오션(Blue Ocean)을 찾아라.’ 은행들의 출혈경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리딩뱅크’를 자처하는 대형은행들이 저마다 특화전략 수립에 고심하고 있다. 비슷한 금융상품을 내놓고 무차별적인 고객 확보 경쟁을 벌이다가는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산되면서 차별화된 ‘블루오션’을 찾아 나섰다. ‘레드오션’이 한정된 곳에서 비슷한 먹잇감을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전장이라면, 블루오션은 과거에 없던 발상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독주하는 공간이다. ●발상의 전환 전국민의 절반인 2500만명의 고객을 보유한 국민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가계대출 점유율이 32.7%로 2위권 은행들과 배 이상의 격차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매금융만으로는 ‘선두 수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국민은행은 요즘 기업을 상대로 한 ‘트랜젝션 뱅킹’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트랜젝션 뱅킹은 전통적인 예대마진 수익 구조에서 탈피, 기업자금을 종합관리해주며 수수료 수익을 얻는 것을 뜻한다.2∼3년 안에 수수료 수입 비중을 전체 영업이익의 40%대까지 끌어올릴 계획인 국민은행은 매출 500억원 이상의 중견 대기업에 사이버지점을 설치, 계좌관리와 자금운용 등을 지원하며 새 수익 창출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은행 역시 ‘발상의 전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황영기 행장 등 최고위층이 최근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운 것은 여신관리 시스템 강화다. 우리은행은 우선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미국 금융회사 전문 연수기관인 RMA의 첨단 여신심사기법을 도입했다. 은행내 여신전문가 20명을 선발해 RMA의 심사기법을 전수받도록 했다. 전국 지점장 580여명을 대상으로 7차에 걸친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후 ‘여신사관학교’를 운영해 전 영업점의 여신담당자를 전문가로 키울 계획이다. ●새 시장을 선점하라 엄격한 리스크(위험) 관리로 정평이 난 하나은행도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나은행은 최근 여신 제한 업종으로 분류했던 숙박·음식·목욕 등 소호(SOHO·자영업자) 대출을 재개했다. 도소매 및 부동산 업종에 부과했던 0.5∼1.5% 수준의 대출 가산금리를 0.5%포인트씩 깎아 주기도 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모든 은행들이 소호 대출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섣불리 대출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동안 축적된 리스크 관리를 바탕으로 소호쪽에서 확실한 우위를 잡겠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의 최대 화두는 ‘백화점 은행’이다. 신한은행은 한 점포에서 펀드 방카슈랑스 카드 증권 등 신한지주 자회사들이 운용하는 모든 상품에 대해 상담하고 구매할 수 있는 ‘BIB(브랜치 인 브랜치)’지점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 은행은 지주회사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상품간 교차판매를 위해 은행중에서는 유일하게 시너지영업추진본부를 운영하고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우리가 백화점 은행에 ‘올인’할 수 있는 것은 직원들의 은행에 대한 높은 충성도와 일사분란한 조직문화가 튼튼하기 때문”이라면서 “갈수록 치열해지는 은행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차별화만이 살 길”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은 이번 여름호에서 박정희 재평가를 쟁점 기획으로 다뤘다. 여기서 과거 반독재 지식인 진영의 중심에 섰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개혁 없는 경제개발의 추구는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에서처럼 결국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쇠퇴를 낳거나 이란의 이슬람혁명에서처럼 원리주의적인 신정(神政) 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이라면서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건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의 공과를 따져 경제개발의 업적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주제로 매월 한 차례 콜로키엄(전문가 토론회)을 열고 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를 부각한 만화 ‘박정희’가 지난 16일 출간되자 박정희 추종 세력이 반발하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영웅’이면서 ‘독재자’다. 양면성을 가진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본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박정희가 비난받을 점 박정희의 허물로 지적되는 점들은 대통령이 되기전의 친일 행각과 좌익활동, 대통령이 된 다음의 장기집권과 독재정치, 인권탄압 등이다. 반(反) 박정희 진영에서는 박정희가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다시 대한민국 장교로,‘빨갱이’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을 다하는 장군에서 쿠데타의 수괴로 변신을 거듭하며 조국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버린 것은 오로지 권력욕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음은 반 박정희 진영의 친일에 관한 주장. ▲친일행각=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는 1940년 23세의 나이에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 입대, 일본군 장교가 됐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도 했다.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대표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를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박정희는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썼다. 다시 일본 육사에 들어가 3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천황에게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박정희는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을 거쳐 제8군단에 배속돼 독립군 토벌에 출정했다. 독립군 토벌에 나갈 때 “조센진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책에 나온다. ▲좌익활동=해방후 군 창설에 참여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한 뒤 좌익활동에 빠진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군내 ‘남로당 조직책’임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뒤 박정희는 수사에 협력해 공모자들을 수사대에 알려주기도 했고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동료 장교들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했다. ▲독재정치·인권탄압=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에 들어간 박정희는 1972년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유신 반대세력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이 가해졌다. 수백명의 언론인을 쫓아냈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했다.1973년 최종길 서울대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고문을 해 숨지게 했고 같은 해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했다.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사형시켰다. 언론인 장준하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8년 집권기간에 10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계엄령, 위수령, 비상령이 발동됐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1만여명이 검거됐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 대통령 취임 이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는 등 경제성장에 힘을 쏟은 것은 사실이다.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고 해외공관을 통해 수출 확대에 주력했다. 포항제철, 울산 중화학공업 단지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힘썼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산업교통망을 늘렸다.‘잘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농어촌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개혁 운동을 펼쳤다. 이런 성장정책으로 박정희는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인당 국민소득을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1년 82달러였는데 죽을 때인 1979년 1636달러를 기록해 외형상 연평균 18%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이런 경제적 치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60년대의 고도성장은 다른 개도국에도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수출도 늘었지만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이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정희,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인물이든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공 때문에 과가 묻혀서도 안되고 그 반대가 돼서도 안된다. 특히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묻혀지고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인물과 동시대에 살지 않은 후손들에게 어떤 한 면만 부각돼 인물 평가가 잘못될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과를 분명히 따져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내려놓는 일이다. 경제난이 지속되는 요즈음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의 한 쪽면만 보고 무턱대고 추종하는 것은 잘못이고 허물 때문에 공적을 폄하해서도 곤란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성장의 업적은 노동자의 희생과 인권침해, 천민자본주의 등의 폐단과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단기간 성장을 박 전 대통령이나 집권·지도층의 공만으로 돌릴 수 없다. 박정희가 경제적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점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 닦은 경제적 기반 위에 1인당 GDP(국내 총생산) 1만달러를 넘는 중진국이 된 한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지역갈등은 박정희가 추구한 성장지상주의와 개발편향주의가 한 원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친자확인 확산… 위기의 중국 가정

    중국에서 성(性) 도덕의 위기가 가정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친자확인 검사’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친자확인은 개혁·개방 이후 성문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혼전 성행위와 미혼모 출산, 혼외 정사가 증가했고 결국 배우자 정조에 대한 의혹이 확산되는 까닭이다. 지난 1998년 중국 최초로 설립된 광저우(廣州) 중산(中山)대학 법률의학검증센터는 지난해 의뢰인이 1300여명으로 초기보다 20배 이상 늘어났다고 인터넷 신문인 첸룽왕(千龍網)이 최근 보도했다. 베이징(北京) 화대사법검증센터(華大檢定中心)가 발표한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친자 확인을 요청한 600여건 가운데 15%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이 센터의 루후이링(陸惠玲) 연구원은 “친자확인 요구의 90% 이상은 배우자의 정절을 의심하며 자신의 아이가 맞는지를 가려 달라는 주문”이라면서 심각한 중국의 가정위기 현상을 우려했다. 친자로 확인될 경우 의뢰자의 4분의 3 이상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의혹을 풀고 애정을 되찾지만,25% 정도는 배우자의 정절에 대한 의혹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 끝내 파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친자검증 제도가 결혼제도를 위협하는 ‘첩(二·얼나이) ‘애인(情人·칭런)’ 확산을 막는 견제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뢰자들은 보통 부유층 남자들이 대다수로 부양 의무와 재산 승계 문제가 주요인이다. 일부 농민 의뢰인의 경우 오랫동안 외지에서 떠돌다 귀향해서 부인을 의심하는 경우다. 비용은 보통 3000위안(약 39만원) 안팎으로 신분증과 호구증명만 있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2주일 정도면 결과가 나온다. 중국에서 확산 중인 친자확인은 ‘부부간의 상호 충성’을 과학적으로 확인해야 가정이 유지될 만큼 개혁·개방 이후 불어닥친 중국의 성도덕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oilman@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야구에 빠진 ‘정치1번지’ 워싱턴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야구에 빠진 ‘정치1번지’ 워싱턴

    |워싱턴 이도운특파원|14일(현지시간) 밤 9시40분. 미국 워싱턴 시내 남쪽의 RFK(로버트 케네디)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4만 2829명의 야구팬들은 서로 경이에 찬 눈빛을 교환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워싱턴 시내에는 세상이 뒤집어질 듯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과 비는 오후 6시가 넘도록 그치지 않아 7시로 예정됐던 워싱턴 내셔널스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는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야구팬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켰고, 새벽까지 이어진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양팀 선수들에게 뜨거운 환호와 응원을 보내며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내셔널스 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날 밤의 감격을 기록한 팬들의 글이 15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론이란 이름의 내셔널스 팬은 “2시간30분을 넘게 기다리며 온몸이 젖어버렸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매 분마다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고 적었다. ●“야구는 가족 사랑이다” 15일 낮 가족과 함께 RFK스타디움을 찾은 톰 타이는 “야구는 가족 행사”라면서 “온 가족이 함께 나와 내셔널스를 응원하는 것은 정말 흥겨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첨단기술 업체인 마인드시프트에서 근무하는 톰은 해외 근무를 마치고 최근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올해 메이저리그 야구팀이 35년 만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것은 그에게는 너무 큰 ‘귀향 선물’이었다고 한다. 톰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내셔널스 팀의 시즌 티켓(1년 동안 모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다.6가족이 10∼12경기 정도씩을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톰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야구팬이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야구장을 다니며 컸다.”라면서 “큰 아들 에단(5)이 축구와 야구를 배우고 있지만 나를 닮아 야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리암(3)은 너무 어려 야구장에 오면 먹는 즐거움에 더 빠진다고 했다. 톰이 에단과 리암을 돌보는 사이 부인은 계속 매점을 오가며 팝콘과 핫도그, 아이스크림 등 가족이 먹을 음식을 날랐다. ●“야구는 데이트다” RFK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만난 조시 크레폰과 페이지 매컬리는 이날 야구를 보며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웹 콘텐츠 매니저인 크레폰은 지난해까지 보스턴 레드삭스 팬이었지만 올해 몬트리올 엑스포스팀이 워싱턴으로 옮겨오면서 응원팀을 바꿨다. 스스로를 ‘야구광’이라고 지칭한 크레폰은 김병현과 박찬호, 최희섭의 근황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크레폰은 역시 야구를 좋아하지만 룰에는 익숙지 않은 매컬리에게 ‘지명타자’(투수 대신 공격하는 타자)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해준 뒤 “내년 3월에 미국·한국·일본·도미니카공화국·푸에르토리코 등이 참가하는 야구 월드컵이 열리게 되면 지명타자를 쓰는 아메리칸 리그 규정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까지 했다. ●“야구는 형제간의 우애다” RFK스타디움은 내셔널스의 홈 구장이지만 15일 맞붙은 시카고 컵스의 팬들도 적지 않게 몰려들었다. 내셔널스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 사이로 컵스의 파란 모자가 3분의1은 돼 보였다. 동생 크리스와 함께 3루측 상단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댄 포스나트는 “워싱턴에서 일하고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컵스 팬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컵스를 응원한다.”고 말했다. 크리스는 “컵스와 레드삭스 팬들은 팀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커서 절대 응원하는 팀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아마 두 도시의 야구 역사가 오래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밤에도 야구장에서 비를 맞으며 끝까지 경기를 봤다는 댄은 “멋진 시간이었으며, 내셔널스의 팬들도 컵스 팬 못지않게 충성심이 대단해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야구는 동료애다” 이날 경기가 끝난 뒤에도 1층 응원석 상단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남성 1명과 여성 3명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평화군의 충원 및 배치 담당 부서에 근무하는 직장동료들. 청일점인 로버트 스컬스는 “휴일을 맞아 야구를 보며 동료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소개했다. 야구장을 찾는 이유에 대해 미첼 기셀리는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팬들간의 상호교감이 느껴지지 않느냐.”면서 “그런 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신디 스트레브는 “TV로는 야구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릴랜드대학에서 일하는 페이지 존슨은 “사람들 속에 묻혀 흥분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야구장 분위기를 예찬했다. ●“야구는 직업이다” 버지니아주 헌든중학교 야구 선수인 매튜 라인은 어머니 파멜라, 친구 드루 심슨과 함께 경기장을 찾았다. 이 날은 헌든 지역의 리틀 리그 선수 1000명이 단체로 관람을 왔다고 한다. 포수인 매튜는 “앞으로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좋아하는 선수는 신시내티 레즈의 켄 그리피 주니어. 유격수를 맡고 있는 드루도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일주일에 6∼7일을 연습한다고 말했다. ●내셔널스, 어린이 홈베이스 돌기 서비스 오후 1시에 시작한 야구 경기는 4시쯤 끝났지만 관람객들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수들의 경기가 끝나면 팬을 위한 서비스가 이어진다. 내셔널스는 낮 경기가 끝나면 야구장을 찾은 어린이들이 1루,2루,3루를 거쳐 홈베이스까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걷기 어려운 어린이들은 부모가 안고 돌아도 된다. 왼손으로는 큰딸 에마(4)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작은딸 올리비아를 안은 채 내야를 한 바퀴 뛴 매트 호트는 “에마의 생일을 기념해 함께 달렸다.”면서 대견스러워했다. 미국의 프로야구가 어린이들에게 서비스를 집중하는 것은 부모들이 원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어린이들이 장래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경기 중 파울이 난 공을 볼보이가 잡으면 꼭 관중석의 어린이에게 주는 것도 같은 이유다. dawn@seoul.co.kr ● 부시, 리틀리그 출신 첫 대통령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정치와 외교가 주력산업인 워싱턴에서는 야구도 정치의 도구가 되곤 한다. 워싱턴에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표적인 야구 마니아다. 부시 대통령은 리틀 리그 출신의 첫 대통령이며, 지금까지 250개의 ‘사인 볼’을 수집했다고 한다. 부시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영에 참여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도 야구 경기를 TV로 관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들이 “야구를 보느냐.”고 묻자 “텍사스 경기를 봤다.”면서 “박찬호가 잘 던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정치 상황을 야구에 빗대 표현하곤 한다.“도널드 럼즈펠드(국방장관)식 야구가 있다. 좀 성마르지만, 뭘 하고 있는가는 정확히 안다.”라고 럼즈펠드 장관을 편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부시 대통령의 ‘야구 어록’을 소개하는 웹 사이트도 생겼다. 부시 대통령의 비유 대상이 됐던 럼즈펠드 장관 본인도 야구를 화두로 사용하곤 한다. 일리노이 출신인 럼즈펠드 장관은 시카고 컵스 팬이다. 그는 이라크전과 관련한 기자들의 날카로운 추궁이 쏟아지면 “그런 질문은 컵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느냐 여부보다도 덜 중요한 것들”이라고 받아넘기곤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야구가 아니라 미식축구 팬이다. 한때 미식축구리그(NFL) 위원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또 최근까지 미식축구 선수 출신과 데이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대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스턴 레드삭스 팬. 보스턴 출신인 힐 차관보는 최근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가 레드삭스 전에 등판하는 날 “살살 던져 달라.”고 애교있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힐 차관보는 지난 주말 LG트윈스 잠실 홈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힐 차관보의 바로 다음 자리인 에번스 리비어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레드삭스와 앙숙인 뉴욕 양키스 팬이다. 이 때문에 힐 차관보와 리비어 부차관보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나온다. 워싱턴에서 야구를 둘러싸고 진짜 ‘정치적 세대결’이 벌어진 것은 지난 4월15일의 내셔널스 개막전 입장권 확보전이었다. 당시 공식적인 입장권의 가격은 자리에 따라 750달러(75만원)까지 책정됐고, 암표는 1000달러가 넘게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요인들과 상·하원 의원 등 워싱턴의 실세들이 개막전 입장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dawn@seoul.co.kr
  • 전두환이 멋있다? ‘제5공화국’ 이덕화 연기 호평

    전두환이 멋있다? ‘제5공화국’ 이덕화 연기 호평

    ‘이덕화 때문에 전두환이 미화된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MBC 드라마 ‘제5공화국’ 연출진이 펄쩍 뛸까, 아니면 방영을 반대한 신군부 인사들이 펄쩍 뛸까. 그것보다는 차라리 이덕화의 연기를 칭찬하는 게 정답일 듯하다. 현대사 관련 드라마는 항상 민감했다.‘제5공화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출진은 대법원 판결문에 따라 스토리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문에 실린 권위에 기대서서 민감한 문제를 과감히 뚫고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방영도 되기 전에 신군부 인사 10여명은 방영중지를 요청했다. 대법원 판결문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이 정도면 전두환이 악역이겠다 싶은데 정작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멋있다.’거나 ‘카리스마 넘친다.’는 호의적 평가가 나오고 있다. 회사원 이주환(33)씨는 “최규하, 정승화, 장태완 등은 상황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전두환은 명확한 목표의식과 강력한 행동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돼 있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전체적인 배경 설명이나 의미 부여가 부족한 상황에서, 결정적 사건과 관련 인물들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꾸밀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반 전두환측은 유약하게, 때로는 스쳐가듯 다루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전두환에 대한 호평에는 이덕화의 연기가 한몫하고 있다. 최근 방영분에서 정승화와 갈등을 빚으면서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카메라 가득 잡히는 이덕화의 복잡미묘한 표정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요즘 흘러넘치는 성공·러브스토리 드라마 연기자들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정통연기라는 평가다. 사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는 ‘장세동’ 묘사가 관심이었다. 아무래도 전두환은 5공청산으로 백담사로 쫓겨간 뒤 끝내 쇠고랑을 찬 데다,1000억원대 비자금을 주물렀으면서도 ‘전재산 29만원’ 발언으로 비웃음거리가 됐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장세동은 주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의리의 돌쇠’라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5공화국은 6·29선언까지 다룰 예정인 데다 이덕화가 워낙 카리스마 넘치게 전두환역을 소화해내면서 장세동역을 맡은 홍학표가 이를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이라크 ‘피의 보복’ 악순환

    이라크 ‘피의 보복’ 악순환

    미군의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면서 무장세력들이 연쇄 납치, 자살 폭탄으로 강력 대응하는 등 이라크에서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11일 하루동안 이라크 전역에서는 무장세력의 잇단 폭탄공격으로 최소 62명이 숨지고 110여명이 다쳤다. 최근 들어 뒤늦게 출범한 이라크 새 정부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무장세력 미군 공세에 납치테러로 대응 미군은 10일(현지시간) 알 자르카위 추종세력의 본거지인 이라크 서북부 시리아 접경지역 안바르에서 사흘째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여 100여명의 저항세력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미군이 대대적인 무장세력 소탕전을 펼치기는 6개월 만이다. 이에 무장세력은 10일 오전 이 지역의 주지사를 납치했다. 안바르 주지사인 라자 나와프를 납치한 무장세력은 100여명의 저항세력이 사살된 카임 지구에서 미군이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나와프 주지사는 10일 오전 바그다드에서 320㎞ 떨어진 카임에서 주도인 라마디로 이동하던 중 보디가드 4명과 함께 납치됐다. 알 자르카위를 추종하는 무장단체는 카임 에서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나와프 주지사를 석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앞서 이슬람 무장단체 ‘안사르 알 순나군’은 9일 일본인 사이토 아키히코(44)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밝혔다. 호주인 기술자 더글러 우드(63)는 지난 6일 ‘이라크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라 자칭하는 단체에 의해 납치돼 최후통첩 시한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새정부 앞날 불투명 지난 4월 구성된 새 정부 이후 늘어난 무장세력의 폭탄 테러는 이라크를 대학살의 현장으로 몰아가고 있다.11일에만 다섯 차례의 자살 폭탄이 이라크 전역에서 터져 62명이 사망했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고향인 티크리트에서는 경찰서 근처 시장에서 자살 폭탄차량이 터져 28명이 죽고 70명이 다쳤다.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240㎞ 떨어진 하위자에서도 경찰과 군대 신병 모집센터에서 폭탄이 터져 31명이 사망했다. 바그다드에서는 3대의 차량 폭탄이 터져 4명이 죽고,14명이 부상했다고 경찰이 밝혔다. 지난 2주 동안 이라크 전역에서 저항세력의 게릴라성 공격으로 300명이 넘는 이라크인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다쳤다.7일 이후 사망한 미군이 13명에 이르는 등 미군 피해도 늘고 있다. ●호주·일본 철군 여부 놓고 냉가슴 이라크에 각각 1400명,550명을 파병한 호주와 일본은 자국인 납치에도 불구하고, 철군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중이나 무장세력의 외국인에 대한 공격이 격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라크 관리들은 지난 1월 총선 이후 석달동안 새 정부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알 자르카위 추종세력과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충성세력이 재결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성공시대] 유럽 축구선수 미니어처店 ‘미니 플레이어’ 박용범 사장

    [성공시대] 유럽 축구선수 미니어처店 ‘미니 플레이어’ 박용범 사장

    인터넷과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 덕에 유럽축구에 푹빠진 마니아들을 보는 것은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스포츠 관련 시장에서 마니아들은 곧 충성도가 가장 높은 고객으로 통하기 마련이다.‘미니 플레이어’ 박용범(43)씨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10~30대 마니아가 주고객층 박씨가 경영하는 ‘미니 플레이어’는 유럽 프로축구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본떠 만든 플라스틱 인형(미니어처)을 직수입해 판매하는 회사다. 회사라고 해봐야 박씨가 사장이면서 직원의 전부인 ‘소호(SOHO:집이나 작은 사무공간에서 인터넷을 활용해 창업하는 것을 이르는 말)’다. “미니어처의 크기가 5∼15㎝에 불과해 굳이 큰 매장을 열 필요가 없었습니다.10∼30대가 주고객층이고 매출의 절반 정도가 인터넷으로 판매되는 만큼 오프라인 매장에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원래 해외 유명의류회사에 옷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12년 동안 의류 수출업무를 담당해오던 박씨는 우연한 기회에 유럽축구 선수 미니어처를 알게 됐다. “지난 2001년 영국으로 출장갈 때 동대문에서 축구용품점을 운영하는 한 친구가 미니어처를 수입할 수 있는 거래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일단 축구경기장에서 미니어처가 어떻게 판매되는지 살펴보기로 했죠.” 영국 런던의 하이버리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순간 박씨는 뭔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열기에 압도됐습니다. 또 경기장 내 기념품 매장에는 그날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의 미니어처를 사는 사람들로 북적이더군요. 업무 스트레스로 창업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한번 도전해볼 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산량 4000~5000개 정도에 불과 이후 친구를 대신해 미니어처 수입을 해주던 박씨는 2003년 8월 독립해 직접 미니어처를 직수입하는 온라인 판매회사를 차렸다. 당시는 월드컵 경기의 ‘후폭풍’도 제법 남아 있었다. 유럽축구 마니아들도 점점 늘어가던 때라 사업에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창업한지 3∼4개월 동안은 정말 수지 맞았죠. 물건을 들이기만 해도 팔릴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이후에는 손님이 끊어져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박씨는 가게 홈페이지(www.miniplayer.co.kr)의 콘텐츠를 강화하고 나섰다. 판매제품과 출시예정 제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비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마니아에 의존했던 전략도 바꿔 도매·위탁매매 등 판매전략과 고객층을 넓혔다.2004년에는 사무실을 겸하는 오프라인 매장도 명동 회현지하상가에 마련했다. “미니어처는 단 한번 4000∼5000개 정도만 생산될 정도로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에 고객을 대신해 외국의 수집가들로부터 이전에 생산된 제품을 사오기도 합니다. 명동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일본 축구선수들의 미니어처도 판매합니다.” 이렇게 해서 박씨는 매달 평균 400만∼500만원씩은 순이익으로 남기고 있다. 다만 주고객층이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수요가 방학기간에만 몰리는 계절적 수요변화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중학생 아들과의 대화가 더 큰 소득” 하지만 박씨는 월소득보다 더 큰 소득이 있다고 귀띔한다. 바로 중학생 아들과의 대화시간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미니어처를 만지작거리며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아들의 가슴속 깊은 고민거리를 나눌 수 있게 되더군요. 어쩌면 한달벌이보다 아들녀석과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이 제게는 더 큰 소득입니다.” 박씨는 우리나라 축구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점도 꼬집는다. “월드컵 직후 대한축구협회에서 나온 우리나라 대표팀 미니어처가 너무 조악해 마니아들이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니어처 하나에도 선수들의 유니폼과 표정 등을 정교하게 재현해 축구 마니아들을 만족시키고 시장을 만들어가는 유럽의 사례를 배우고 연구해야 합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역사물 스크린 점령할까

    새달 4일 동서양 역사물이 나란히 간판을 건다.100여년 전 조선시대가 배경인 국산 액션사극 ‘혈의 누’와,12세기 십자군 원정길로 카메라를 옮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서사액션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미스터리 스릴러의 현대적 감각을 버무린 국산 퓨전사극, 장중한 사실액션이 화면을 압도하는 스콧 감독의 신작 사이에서 관객은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 ●혈의 누 사극과 스릴러.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어감의 조합이다. 영화 ‘혈의 누’(감독 김대승, 제작 좋은영화)의 파격은 이뿐만이 아니다. 근대와 현대, 이성과 광기, 과학과 무속, 양반과 상민 등 격변의 시대를 배경삼아 다층적인 충돌구조가 일으키는 스파크가 기존 어느 영화보다 강렬하다. 여기에 작정하고 덤벼든 잔혹한 연쇄 살인장면 묘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다. 조선 후기인 1808년, 제지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외딴 섬 동화도. 조정에 바칠 제지를 실은 수송선이 원인 모를 화재로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하자 뭍에서 수사관 원규(차승원) 일행이 파견된다. 그런데 이들이 섬에 도착한 첫 날부터 참혹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범상치 않은 살인 행각을 목도한 마을 주민들은 7년 전 ‘천주쟁이’로 몰려 온가족이 참형을 당한 강객주(천호진)의 원혼이 저주를 내린 것이라며 술렁거린다. 냉철한 이성과 과학수사를 표방하는 원규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은 제지소 주인의 아들 인권(박용우).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대립구도일뿐 극이 진행되면서 섬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베일을 벗을수록 원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을 직감하고,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남의 목숨까지 거침없이 해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처절한 확인이다. 영화가 내포하는 상징이나 감독이 의도한 다층적인 의미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혈의 누’는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거나 감성적으로 충분히 설득당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중반 이후 극적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건 스릴러 장르로서의 이 영화가 지닌 치명적인 결함. 촘촘하게 덫을 놓아 관객의 두뇌게임을 부추기던 영화는 갑자기 클라이맥스에서 원규의 입을 빌려 범인을 드러내는 게으른 방법을 택했다. 중요한 건 누가 범인이냐가 아니라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낸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라는 감독의 설명은 이 지점에서 구차한 변명처럼 들린다. 비주얼한 화면과 끊임없이 뇌를 자극하는 청각적인 효과는 기존에 보아온 여느 사극과 비교해 월등히 낫다. 흥행 코미디배우로 각인된 차승원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기대 이상의 밀도있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햄릿형 인간’ 원규를 100% 표현하기에는 아직 힘이 달려 보인다. 캐릭터를 충분히 체현하지 못하기는 두호역의 지성도 마찬가지. 다만 인권역의 박용우는 모처럼 제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18세 관람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킹덤 오브 헤븐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 5개 부문상을 휩쓸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역사에 스케일의 외피를 입히는 주특기를 또 한번 화면에 구현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시간적 배경은 십자군 원정대가 활약했던 12세기 초. 스펙터클 서사액션을 다시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은 성지 예루살렘을 놓고 기독교와 이슬람이 세력다툼하는 중세전쟁의 소용돌이 깊숙한 곳으로 앵글을 돌렸다. 결론부터 귀띔하자면,‘글래디에이터’‘트로이’류의 장중한 서사액션을 챙겨보는 관객에겐 기본적 흥미요건을 무리없이 갖춘 영화로 다가갈 듯하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기독교도들이 급속히 세력을 키운 이슬람 군대에 압박당하자 영주 출신의 십자군 노장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가 젊은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을 찾아온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발리안 앞에 갑자기 나타난 고프리는 자신이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함께 성지를 수호하러 떠나자고 제안한다. 이야기 아귀를 맞추려 느닷없이 돌출된 가족사의 비밀에 실소가 터진다. 하지만 이후 착실히 서사액션의 강도를 높여가는 영화의 공력에 그쯤은 눈감아 줄만하다. 고프리 영주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은 발리안이 예루살렘 사수에 나서고, 일관되게 그 영웅담을 쫓아가는 것이 줄거리 얼개. 서사액션물에서 빠질 수 없는 멜로 요소도 물론 끼어있다. 예루살렘의 국왕 볼드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발리안은, 교회 기사단의 우두머리 루지앵과 정략결혼한 국왕의 여동생 시빌라(에바 그린) 공주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특기는 속도감이다. 시대물(상영시간 2시간17분)은 장황한 서사 때문에 빠른 진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통념을 깨부순다. 사실적인 대규모 전투를 잇달아 펼쳐 놓으면서도 영화의 몸놀림은 대단히 재빠르다.‘글래디에이터’‘반지의 제왕’‘트로이’ 등 서사액션 블록버스터들의 스펙터클을 압축해 놓은 듯한 전투장면들은 그 자체가 톡톡한 감상포인트다. 할리우드의 많은 감독들이 엄두를 못 내고 밀쳐온 시나리오를 선뜻 스크린에 옮긴 감독의 용기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전투의 엄청난 규모 말고 ‘리들리 스콧의 것’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서구 기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편향된 시각으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것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 예컨대 당시 이슬람의 대영웅이었던 살라딘(살라흐 앗딘)의 존재는, 주인공 발리안을 영웅으로 띄워올리는 부속장치로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 레골라스로 나와 여성팬들을 사로잡은 빅스타 올랜도 블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영화의 소득이다. 강인함과 비애를 함께 지닌 그의 캐릭터는 ‘트로이’의 브래드 피트와 견줄 만하다. 나병으로 죽어가는 가면 속의 볼드윈 국왕은 에드워드 노턴이 연기했다.15세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주님께 문열면 위대한 삶 찾을것”

    |파리 함혜리특파원 외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4일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5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 미사를 갖고 제 265대 교황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날 즉위 행사는 베네딕토 16세가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초대 교황 성베드로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황금색 성직복을 입고 주교장(主敎杖)을 짚은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붉은색 십자가를 수놓은 하얀색 양털 영대(領帶)와 성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을 새긴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 등 교황권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서 “나는 주님의 나약한 종복”이라며 자신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와 비신자, 유대인 형제들도 기도해달라고 호소했다. 선출 후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론에서 그는 “나의 통치 계획은 전체 교회와 주님의 말씀과 의지를 듣고 주님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라며 가톨릭의 정통성을 충실히 이행할 뜻을 밝혔다. 그는 또 인류의 목자로 세상에 온 예수가 길잃은 양떼 곁에서 한 마리 양이 되었듯이 “우리는 한 무리 양떼이자 동시에 (타인을 구원하는)목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78년 즉위 미사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을 향해 문을 열어라.”라고 했던 강론을 상기시키며 “주님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에게 문을 열어라. 주님은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앗아가지 않으시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는 말로 강론을 끝맺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시성(諡聖) 문제는 언급 안해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천국의 성인들 사이에서 편히 쉬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를 성인(聖人) 명부에 올리는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는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미사에 이어 지난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피격됐을 때 승차한 흰색 무개차를 타고 광장을 돌며 신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했다. 이날 미사에는 세계 각국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독일인 신도 10만명을 포함한 일반 신도 등 35만명이 참석했다. 미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성베드로 광장 근처에서 스크린을 통해 지켜본 인원도 5만여명에 이르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교황의 모국인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 각국 지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유럽 각국 왕실 대표들과 영국 성공회의 수장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 교황의 친형인 게오르크 라칭거(81) 신부 등도 미사에 참석했다. ●한복 차림 한국인 가족 등 충성 서약 베네딕토 16세의 즉위 미사는 모든 추기경들이 충성 서약 의식으로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던 관행 대신 12사도를 상징하는 12명만 의식을 치르는 등 전통을 현대식으로 적용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칠레 출신 요르헤 메디나 에스테베즈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바티칸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등 3명이 교황에게 차례로 충성을 서약했고 이어 주교 1명, 사제 1명, 부제 1명, 수녀 1명, 수도사 1명, 어린이를 동반한 한복 차림의 한국인 부부, 젊은이 2명이 나와 충성을 서약했다. 35만여명이 모여든 이날 행사의 안전을 위해 이탈리아 당국은 1만명의 경찰을 동원해 로마 안팎을 경비했다. 당국은 또 취임 미사가 열리는 동안 로마 상공 반경 8㎞를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했고 로마 제2의 공항인 참피노 공항의 비행 금지령도 내렸다. 로마시는 바티칸시티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미사를 생중계했다. ●추기경 시절 집사가 관저 살림맡아 교황의 관저 살림은 추기경 시절 14년간 집사로 일해온 수녀 잉그리트 슈탐파(55)가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독일 서부 클레베 출신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중세음악을 전공했으며 쇤슈타트 수녀회 소속으로 1991년부터 현 교황을 보필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에 앞서 23일 비성직자 중에서는 첫번째로 기자들과 만나 “진리를 추구하고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책무를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전임 교황처럼 언론과의 대화를 계속 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날 회견에는 4000여명이 참석했다. lotus@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68)夫婦有別(부부유별)

    夫婦有別(부부유별) 儒林 (318)에는 ‘夫婦有別’(지아비 부/지어미 부/있을 유/나눌 별)이 나오는데,‘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分別(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分別은 調和(조화)를 前提(전제)한 區分(구분)이기 때문에 差別(차별)과는 의미가 다르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역할에 충실한 가정은 和睦(화목)하다. 반면 남편과 아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愛情(애정) 전선에도 이상이 온다. 따라서 夫婦有別을 男性(남성) 優位(우위)를 강조하는 前近代的(전근대적) 遺産(유산)으로 보는 것은 短見(단견)에 불과하다. ‘夫’자의 본 뜻은 ‘성인 남자’인데,‘지아비,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 다스리다, 돕다.’의 뜻으로도 쓰였다. ‘婦’자는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婦女子(부녀자)의 모습을 나타낸 會意字(회의자)에 속한다.用例(용례)에는 ‘婦德(부덕:부녀자의 아름다운 덕행),婦人(부인:결혼한 여자),婦人之仁(부인지인:여자가 지니는 좁은 소견의 인정)’ 등이 있다. ‘有’는 ‘고기 덩이를 손으로 잡고 있는 모양’을 뜻한다.‘有口無行(유구무행:입에 발린 말만 있고 실행하는 바가 없음),未曾有(미증유: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 등에 쓰인다. ‘別’자는 ‘月’(고기 육의 변형)이 없는 ‘骨’(뼈 골)과 ‘刀’(칼 도)를 합하여 ‘분해하다.’는 뜻을 나타내었고, 다시 ‘다르다, 나누다, 떠나다, 구별하다.’ 등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用例에는 ‘別故(별고:특별한 사고),別種(별종:다른 종류),判別(판별: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구별함)’ 등이 있다. 栗谷(율곡) 李珥(이이)는 學問(학문)이란 일상생활의 實踐(실천)을 통해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孝道(효도)하며, 신하는 忠誠(충성)하고, 부부는 分別(분별)이 있고, 형제는 友愛(우애)하고, 젊은이는 어른을 恭敬(공경)하고, 붕우는 信義(신의)가 있도록 하는 것’, 즉 五倫(오륜)을 體得(체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五倫(오륜)의 첫째는 父子有親(부자유친)으로 ‘아버지와 자식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간은 가장 가까우면서 사랑으로 맺어진 인륜의 출발점이다. 시작을 다지기 위해서는 慈愛(자애)와 孝誠(효성)을 돈독히 해야 한다. 둘째,君臣有義(군신유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義’란 자기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道理(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는 君臣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君을 國家(국가)로,臣을 國民(국민)으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셋째,夫婦有別(부부유별)은 冒頭(모두)의 설명과 같다. 넷째,長幼有序(장유유서)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序란 순서와 질서를 말한다. 연장자는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젊은이는 연장자를 인생의 先輩(선배)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朋友有信(붕우유신)은 ‘벗과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친구 사이에는 信用(신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친구 사이에 신용을 잃으면 그 사람은 설자리가 없다. 신용은 값으로 換算(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財産(재산)이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김형욱 살해설’ 취재 뒷얘기

    “국회나 법원은 장식품이었고 헌법은 왕이 백성에게 내리는 서릿발 같은 칙서에 불과했다. 유신으로 박정희는 사실상 박씨 왕조를 세웠다.” 해외를 떠돌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회고록에 남긴 글이다. 한 때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자로 변했기에 김 전 부장의 죽음 뒤에는 박정희의 음모가 있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최근 보도한 파리 양계장 살해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기사를 취재했던 정희상 기자가 방송에 직접 출연해 취재 뒷얘기들을 들려준다.22일 오전ㆍ오후 10시 15분 케이블·위성방송 CBS TV에서 방송되는 ‘정범구의 시사토크’을 통해서다. 단순한 취재 뒷얘기뿐 아니라 김 전 부장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함께 설명한다.
  • 인혁당 8명 최후기도 집도 박정일목사 “이제는 말한다”

    인혁당 8명 최후기도 집도 박정일목사 “이제는 말한다”

    1975년 4월8일 오후 3시쯤. 육군교도소 군종(軍宗)실장이던 박정일(63·당시 33세) 목사는 교도소장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중앙정보부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내일 특별한 일이 있으니까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명령이었다. 엄혹한 유신체제에 준계엄상황이라 사형집행장의 종교의식을 일반 목사 대신 군목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서울 서대문구치소 근처에 있는 여관방을 향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나섰던 길에는 군의관 김모씨와 관계기관 요원 몇명이 동행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박 목사는 다음날인 9일 새벽이 돼서야 구치소장의 방에서 부여된 임무를 들을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어제 대법원에서 기각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의 교수형이 있으니 박 목사가 마지막 가는 길을 잘 인도해달라.”는 말이 떨어졌다.‘철저한’ 보안 당부도 덧붙여졌다. 백열등만 켜져 있는 사형집행장.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덜 깬 ‘인혁당 재건위’사건 관련자들이 한 사람씩 교도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특별면회가 있다는 구치소측의 말을 듣고 사형집행장으로 왔다는 것이 박 목사의 증언이었다. 이름과 본적, 주소, 생년월일이 불려진 뒤 “긴급조치 위반으로 형 집행에 처한다.”는 사형집행문이 떨어지면 종교의식이 치러져야 했다. 그러나 박 목사는 단 한 사람에게만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아들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가 하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며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우리의 삶을 증언해달라.”고 간곡한 눈길을 보내던 분위기에서 도저히 종교의식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 목사는 “하나같이 억울하다며 희생양이라는 말만 했지. 유신체제는 없어져야 한다면서 나는 아무 죄도 없다며 울부짖었어.”라고 회고했다.8명의 형 집행은 3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대법원 판결이 난지 20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법살인’ 현장을 마지막으로 지켜보았던 박 목사. 최근 대법원이 판결문을 공개하고 국가정보원이 조사를 하는 등 뒤늦게나마 국가가 나서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지난 세월은 박 목사에게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박 목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그날 일은 중앙정보부의 과잉충성과 짜여진, 각본에 의해 치러진 일인 것 같았다.”면서 “때가 되면 마음의 짐을 다 털고 싶다.”고 전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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