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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마당] ‘문화 프렌들리’ 정책은 없는가/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문화마당] ‘문화 프렌들리’ 정책은 없는가/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이상을 실험하기 위한 ‘실험용 쥐’가 되어야 했던 문화예술기관과 단체들의 지난 10년간의 시련과 몰락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고 복원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이미 복원력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설상가상이라고 행정안전부 쪽에서는 작은 정부를 위해 지난 10년간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해 운영해 온 극립극장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민영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은 펄쩍 뛸 것이다.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해 본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관료들의 실적을 위한 개혁과 혁신의 희생물은 언제나 힘없는 문화예술 기관이었다. 물론 지난 정부에서 문화예술분야가 힘이 없었다거나 ‘빽’이 없었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참여를 허용 받았던 실세들은 그 ‘빽’을 자신의 입신과 양명에 사용했을 뿐 관료들에 의한 비문화적인 문화예술개혁에는 철저히 구경꾼으로 일관했다. 이들이 철저하게 함구와 방관으로 일관할 때 실적주의와 새로운 정부의 코드에 입맛을 맞추려는 관료세력들은 오직 자신들의 실적과 개혁의 기수로서 거듭나기 위해 문화예술을 낭떠러지에서 밀기에 바빴다. 사실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철학도 없이 새로운 정책들을 남발한 것은 지난 10년간 좌파 문화권력들이 일 벌이고 자리차지하면서 문화예술계를 피폐화시킨 것보다 그 폐해가 더욱 크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개혁이란 이름과 ‘배 째 드리겠다.’는 엄포에 무대응으로 일관한 문화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문화부의 높은 곳, 힘 있는 부처 눈치 보기는 여전하다. 인수위 시절부터 나오기 시작한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의 관람료 폐지 정책은 제대로 된 검토나 고민 없이 이미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여전히 인수위 시절 대통령님의 말씀을 그저 실천에 옮기겠다는 권위주의 시대에 영혼 없는 충성심(?)으로 무장된 관료들의 무소신이 낳은 결과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행정안전부는 작은 정부를 실천하기 위해 현재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국립기관들의 민영화를 서두르고 있어 더욱더 얼떨떨하다. 참여정부는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더니 이명박 정부는 문화예술정책에 있어 민영화라는 우회전과 입장료 폐지라는 좌회전을 동시에 시도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스스로 상실할 위기에 몰리고 있다. 이는 서로 상반된 문화예술정책을 미술관과 박물관, 미술관과 화랑, 도서실과 독서실도 구분 못하는 관료들이 각 부처별로 각각 동시에 추구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입장료 폐지는 실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영화와 함께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지 별개로 다루어질 일은 아니다. 입장료 폐지가 시행된다면 민영화 이후 어떤 방법으로든 국고지원은 지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영화된 기관들은 이름만 민영화일 뿐 달라질 것이 거의 없다. 이렇게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사안을 한 정부에서 각 부처가 서로 경쟁하듯 검토하고 시행을 준비하면서 한국의 문화정책,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까지 의심받기에 이른 것이다.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개혁의 칼을 쥐어 준 것과 문화권력자들을 양산한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보호를 전제로 실적을 위한 개혁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문화예술 기관들은 책임운영기관으로 전락하고 대한민국 공연문화의 상징인 국립극장은 대관수입 증대에 내몰려야 했다. 이는 문화인들이 입을 옷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문외한들에게 주문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제라도 기업에만 프렌들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관료들의 조직보호와 실적을 위한 ‘총알받이용’이 아닌 문화인들이 ‘을’에서 ‘갑’이 되는 문화 프렌들리 정책을 기대해 본다.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다.42세, 아까운 나이의 죽음은 애처로웠지만 인열왕후는 정확히 1년 뒤 조선으로 밀어닥쳤던 전란의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금이 그녀의 상에 조문사(弔問使)를 보내 문상(問喪)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끝내 파탄을 향해 치닫게 된다. ●이상한 조문 사절단 국상(國喪)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636년(인조 14), 연초부터 흉흉한 소식들이 보고되었다.1월, 대구에서는 황새들이 서로 패를 갈라 진을 치고 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월 초에는 안산에서 황당한 보고가 올라왔다. 바다 속에 있던 바위 세 개가 저절로 움직여 육지로 옮겨왔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지나온 곳에 거의 40여 보(步)나 되는 길까지 만들어졌다고 했다. 2월8일과 10일, 대사헌 윤황(尹煌)은 연달아 인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나라가 망하려면 요상한 변고(요변·妖變)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의 나라 상황은 망하기 직전’이라며 인조에게 자세를 낮추고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요변’의 경고가 맞아들어가는 것이었을까? 2월16일,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조선의 국상에 조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사절단의 구성이 이상했다. 후금의 여진족 말고도 서달(西 )이라 불리던 몽골인 지휘관들이 77인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의아해하는 의주부윤 이준(李浚)에게 용골대는 까닭을 설명했다.‘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몽골의 여러 왕자들이 우리 한(汗)에게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조선과 의논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대원을 획득했다는 것은 후금이 차하르(察哈爾) 몽골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옥새는 바로 차하르 몽골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릭단 한(林丹汗)의 옥새를 말하는 것이다. 대호를 올린다는 것은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준의 보고를 들은 조정 신료들은 경악했다. 사간 조경(趙絅)은 몽골인들을 국문(國門)으로 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장령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통해 인조를 통박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대명천자(大明天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정묘년에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르는 바람에 지금 저들이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고 덤비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는 더 나아가 용골대 일행을 처단하여 그 목을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문관 신료들도 서달을, 명을 배신하고 후금에 붙은 반역자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속히 의주의 감옥에 가둬 상경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골을 복속시킨 후금의 자신감 후금이 용골대 일행을 조선에 조문사로 보내면서 몽골인들까지 대동시킨 것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1634년 6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명을 공략하는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공격 목표는 주로 선부(宣府)와 대동(大同) 지역이었다.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에 속하는 선부와, 산시성(山西省)에 속하는 대동은 모두 몽골로부터 북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 요충이자 중진(重鎭)이었다. 홍타이지는 당시 명을 공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부와 대동 주변의 차하르 몽골 부락들을 초무(招撫)했다. 후금이 일찍이 1632년 차하르 몽골을 공격했을 때, 릭단 한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면서 차하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634년 5월, 원정 출발에 앞서 홍타이지는 명 변경에서 유목하고 있던 차하르 몽골 부락들에 유시문(諭示文)을 보내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촉구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몇몇 성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던 사이 후금군은 주변 지역을 자유자재로 유린, 약탈했다. 당시 홍타이지의 원정에는 후금에 우호적인 코르친(科爾沁), 나이만(柰曼) 몽골 등이 동참했다. 선부와 대동 주변 차하르 몽골의 잔당들도 원정 기간 동안 속속 투항해 왔다. 더욱이 1634년 윤 8월, 도주했던 릭단 한이 사망했고 이후 그 아들들과 대신들이 나머지 국인(國人)들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해 왔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사실상 몽골을 평정했다.1634년 12월, 원정군이 개선했던 직후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의 사당을 찾아 자신의 승첩 사실을 고했다. 그는 직접 읽은 축문에서 ‘누르하치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자신이 차하르를 비롯한 몽골 부락들을 모두 복속시켰다.’고 보고했다. 또 ‘조선도 과거에는 성의를 보이지 않다가 이제 아우를 칭하며 납공(納貢)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남은 적은 이제 명나라뿐이라고 했다. 13세기 이래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던 몽골을 정복하게 되면서 후금의 자신감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더욱이 1635년에는 ‘칭기즈칸의 정통 후계자’였던 릭단 한의 옥새를 손에 넣었고, 요양(遼陽)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금불상까지 획득했다. 불상은 쿠빌라이 칸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릭단 한에게 돌아갔고, 다시 홍타이지의 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여길 법도 했다. 실제 금불상을 얻은 직후, 홍타이지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안료(顔料)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사찰을 새로 지어 불상을 봉안하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홍타이지의 오판 후금의 넘치는 자신감은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635년 11월, 홍타이지는 릭단 한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보여주면서 은근히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다. 청 측 기록에는 조선 사신 박로가 옥새를 보고 ‘진정 하늘이 내린 보물’이라고 감탄했다고 되어 있다.1636년 1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하늘의 돌보심으로 우리 대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공경(孔耿)이 귀순했으며, 차하르 몽골이 복속하여 주변이 모두 우리 소유가 되었다.’고 과시했다. 홍타이지는 그런데도 조선은 자신들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이윽고 1636년 2월, 후금의 여러 패륵(貝勒)들은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상주(上奏)하기로 의결했다. 그들은 ‘차하르 한의 아들이 투항해 오고, 대대로 전해오던 몽골의 국새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진 것’이라며 속히 황제가 되어 신민들의 여망에 부응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신료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아직 대업(大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강조하고, 그런 상황에서 먼저 황제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타이지가 고사하자 여러 패륵들을 비롯하여 만몽한(滿蒙漢) 출신의 신료들이 모두 나서서 속히 대호(大號)를 정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의 강청은 이틀 동안 계속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홍타이지의 친형인 대패륵(大貝勒) 다이샨(代善)까지 나섰다. 그는 여러 패륵들을 이끌고, 죽을 때까지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맹서했다. 고사와 강청이 거듭되는 와중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거론했다.‘만몽한 출신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권하니 거부하기 어렵다. 조선도 형제의 나라이니 마땅히 같이 의논해야 한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에 앞서 조선의 동의를 받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용골대 일행에게 몽골인들을 동행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오판이었다.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선의 추대를 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순진했던 것일까? 조선이 무모했던 것일까? 양국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사르코지 佛 대통령의 삶과 성공비결

    “내 인생 최고의 적은 바로 나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고백이다. 추진력은 좋지만, 너무 충동적이며 감정적으로 대응하다 보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약속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손해를 보는 까닭이다. 하지만 고백과는 달리 그가 정치 인생을 밑바닥부터 시작해 그 어떤 정치인 못지않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주밀하게 계산, 권력의 최고 정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 기반을 다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프랑스 언론인인 카트린 네이가 내놓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권력’(배영란 옮김, 애플북스 펴냄)은 이같이 베일 속에 가려진 사르코지의 삶의 궤적을 좇아 이면을 살핀 책이다. 이민자 출신 아버지와 유대계 프랑스인 어머니가 이혼한 뒤 외할아버지와 함께 산 사르코지는 “현재의 내 모습은 어린 시절 겪은 수치심의 총체다.”고 털어놨을 만큼 굴곡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치엘리트 코스인 프랑스 국립행정학교 출신도 아니고 이민자 출신, 유대계, 이혼 가정이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자란 그가 엘리제궁까지 입성한 드라마틱한 과정은 ‘나폴레옹 신화’로 불릴 만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승리를 위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출 줄도 아는 인물이다. 세력을 등에 업기 위해 자크 시라크와 에두아르 발라뒤르 등 프랑스 정치 거물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발라뒤르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걸 매우 좋아하는 것을 안 사르코지는 칭찬은 물론 심지어 그의 옷을 매만져 주고 머릿기름까지 발라 줬을 정도다. 저자는 사르코지의 성공 비결이 무엇보다 시라크와 에두아르 등 정치 거물을 옆에서 지켜보고 정치적 자양분을 얻은 만큼 정치적 노회함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임 1년의 기간 동안 벌인 ‘경박한’ 행위만 놓고 사르코지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지,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을지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얘기다.1만 68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64)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64)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1960년, 백제의 옛 땅인 충남 연기 출신의 동국대 학생 이재옥씨는 고향의 작은 절에서 부처님이 새겨진 돌을 탁본하여 불교미술을 강의하던 황수영 교수에게 리포트로 제출했습니다. 당시까지 우리 미술사학계에 전혀 보고되지 않았던 불비상(佛碑像)이 분명했지요. 황 교수는 곧바로 학생들을 이끌고 연기 전의면으로 내려가 차령산맥 기슭 비암사(碑岩寺)의 삼층석탑 위에서 사방에 부처와 보살이 새겨진 불비상 3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발견된 계유명 전씨(癸酉銘全氏) 아미타불 삼존석상은 당장에 국보 제106호로 기축명(己丑銘) 아미타여래 제(諸)불보살석상과 미륵보살 반가사유석상은 보물 제367호와 제368호로 각각 지정되었습니다. ●신라시대 만들어진 백제 불비상 이뿐만이 아닙니다. 추가 조사를 벌인 결과 조치원 서광암(瑞光庵)에서는 계유명 삼존천불비상이 발견되어 국보가 되었지요. 또 연기 서면 월하리의 연화사(蓮花寺)에서는 무인명(戊寅銘)석불비상과 칠존석불상을, 이웃한 공주 정안면에서는 납석제 삼존불비상을 찾아내어 모두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이렇듯 백제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것으로 알려진 연기 일대에서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7점의 불비상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불비상을 역사학계에서 크게 주목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점령지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움직임을 짐작케 해 주는 명문(銘文)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이지요. 명문은 마멸되어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합니다. ‘계유년 4월○일에 공경되이 발원하여…국왕, 대신, 칠세부모, 모든 중생을 위하여 절을 짓는다.…계유년 5월15일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한다.’ 그러고는 발원한 사람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전씨를 비롯하여 달솔(達率) 신차원, 진무 대사(大舍), 목○ 대사(大舍), 상차 내말(乃末) 등이 보이지요. 문제는 달솔이 백제의 관직인 반면 대사나 내말은 신라의 관직이라는 데 있습니다. 학계는 ‘계유년’을 일반적으로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으로 봅니다.671년 신라가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오늘날의 부여인 사비에서 몰아내자 당나라의 웅진도독이었던 의자왕의 아들 융(隆)도 당나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후 신라는 사비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당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당면과제였는데,673년 백제 인사들에게 신라의 관직을 준 것도 유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취한 조치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계유명 삼존석상에 나타난 ‘대사’나 ‘내말’은 불만스럽지만 회유책에 순응해가기 시작한 사람들인 반면 ‘달솔’ 신차원만은 백제에 의리를 지키고 신라 벼슬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볼 수 있겠지요. ‘국왕, 대신’이라는 표현에는 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없지 않습니다. 새로운 지배자인 신라의 국왕, 대신인지, 그동안 충성을 바친 백제의 국왕, 대신인지, 아니면 불사(佛事)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한 국왕, 대신인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령군 통치로 핍박받은 중생의 넋 달랜 듯 하지만 이 불비상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 삼존불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의 구세주로 인식되면서 죽음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위안을 주고, 관세음보살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자비를 베푸는 존재이지요. 백제가 멸망하고, 부흥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죽거나 핍박받은 중생의 명복을 빌고자 절을 짓고, 불비상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 불비상은 미술사에서도 독특한 존재입니다. 아미타삼존불과 광배, 그 양쪽의 인왕상과 사이사이에 보이는 나한상, 옆면의 주악천인상에 이르는 모든 조각에는 작은 원이 구슬처럼 연결된 연주무늬 장식이 화려하고, 보살의 가슴에는 일종의 목걸이인 영락(瓔珞)이 늘어뜨려지는 등 백제시대 불교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수나라(581∼619년) 양식의 특색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명문이 없었다면 이 불비상은 백제시대 것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겠지요.‘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지만 백제의 옛 땅에서, 백제의 미의식을 담아놓은 불교조각’이라는 성격만큼이나 이 불비상에는 점령군의 통치 아래 살아가야 했던 패망국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dcsuh@seoul.co.kr
  • [이용원 칼럼] 民心이 天心은 아니다

    [이용원 칼럼] 民心이 天心은 아니다

    4·9 총선이 끝나자 그 결과를 두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둥 ‘절묘한 황금분할’이라는 둥 귀에 익은 평가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민심은 과연 천심일까, 그리고 총선 결과가 역시 황금분할일까. 천심(天心), 곧 ‘하늘의 뜻’이라는 표현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당위성을 내포한다. 또 황금분할이란 말은 더이상 바랄 게 없는 바람직한 구도를 지칭한다. 결국 이번 총선 결과가 절대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그같은 평가의 바탕에 깔려 있는 셈이다. 이번 총선에서 친박연대는 지역구에서 6석을 차지했다. 정당 투표에서는 13.2%를 얻어 비례대표 8석을 추가했다. 그 친박연대는, 지난달 21일에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당명 사용 허가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급조한 정당이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정치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주장 하나로 뭉친 정당에 이념은 물론 정강정책이 있을 리 없고, 있을 이유 또한 없다. 그런 정당에 우리 ‘민심’은 14석을 안겨주었다.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자유선진당도 다를 바 없다. 대통령선거에서 거듭 패한 정치인이 은퇴했다가 대선 국면에 느닷없이 다시 등장해 만든 당이다. 그러므로 대선 패배 후 사라지는 게 당연해 보였다. 이런 정당에도 대전·충남 유권자들은 국회 의석을 몰아줬다. 현대사회에서 정치는 정당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기능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표심은 정당이 아니라 정파 보스를 뒤쫓아 움직인다. 그 당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우리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후보가 누구 뒤에 줄 섰는지를 판단하는 대로 붓두껍은 옮겨간다. 혹자는 ‘지도자(보스) 중심의 정치가 어때서?’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 전개될 정치를 예측해 보자.4년 후에는 제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이 잇따라 진행된다. 자유선진당 이 총재는 대선 출마가 쉽지 않을 게다.4수라는 부담에, 연령이 77세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때 가서 그가 은퇴라도 한다면 자유선진당은 무슨 근거로 존재할 수 있을까. 또 이번에 그 당의 이름으로 금배지를 단 정치인들은 새로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나라당·친박연대가 얽힌 범여권 사정은 더욱 심각해지리라.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 합치든 별도로 존재하든,4·9 총선에서 확인된 박근혜 전 대표의 위력은 갈수록 강해질 터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명박 대통령의 그늘에 있는 정치인들도 어느 시점엔가는 현재(이 대통령)와 미래(박 전대표) 어느 쪽에 투자할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무게중심이 미래로 기우는 순간 이 대통령의 레임덕은 시작될 테고 정치는 또한번 뒤틀리기 십상이다. 우리사회에서 민심이 곧 천심은 아니다. 때로 민심은 그저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민도(民度)일 뿐이다.‘민심이 천심’이라는 그럴듯한 수사에 현혹돼 선거 결과에 자족하지 말라. 통렬한 자기반성이 없다면 우리 정치는 만날 그 타령에 멈출 뿐이다. 앞으로도 정당 대신 정파 보스를 보고 그 대리인에게 투표한다면 국회의원이 국민을 두려워할 리 없다. 제 보스에게만 충성하면 언제라도 의원 자리는 떼놓은 당상일 테니까. 이번 총선에서도 철새들은 떼지어 날아다녔다.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급조 정당 역시 난무했다. 모두 ‘민심’의 결과물이다. 단언컨대, 민심이 천심은 아니다.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총선 D-2] 호남 후보단일화 시너지낼까

    18대 총선 종반전에 후보 단일화 바람이 불고 있다. 단일화가 선거 판세를 흔드는 시너지 효과를 낼지 주목된다. 후보 단일화는 중앙당이 관련된 이슈다. 또 지역과 후보의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총선에서 단일화가 쟁점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이 선전하고 있는 호남 지역이 후보 단일화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지난 5일 전남 목포에서 통합민주당 정영식 후보와 무소속 이상열 후보가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정 후보로 단일화했다. 현재 선두를 달리고 있는 무소속 박지원 후보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여론조사 결과를 단순 합산했을 때 정·이 후보의 지지율은 박 후보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전날엔 전주 완산갑에서 민주당 장영달 의원에 맞서, 무소속 유철갑·이무영 후보가 의기투합해 이 후보를 단일 후보로 확정했다. 같은 날 전주 완산을에선, 무소속 심영배·김완자 후보가 김 후보로 단일화해 민주당 장세환 의원의 대항마로 나섰다. 장영달·장세환 후보 모두 최근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였지만, 덩치가 커진 단일후보와 접전이 예상된다. 호남지역의 단일화는 ‘반대’ 의미가 짙다. 목포의 단일화는 ‘반(反)DJ’를 표방한다. 이상열 후보만 해도 역대 선거에서 ‘반 DJ’를 선언하며 무소속으로 당선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전주 완산갑·을의 단일화는 ‘반 민주당’ 성격을 띠고 있다. 호남에서 민주당이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더 이상 민주당에 예전같은 애정과 ‘충성’을 보여주지 않는 지역 민심을 최대한 자극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반면, 진보신당 심상정·민주당 한평석 후보의 단일화가 거론됐던 경기 고양갑의 경우 먼저 단일화를 타진했던 한 후보가 제안을 철회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심 후보측은 “지역구 주민과 심 후보를 속인 한 후보의 기만 행위는 결국 한나라당을 이롭게 할 뿐”이라며 한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부고] 지한파 우쉐첸 전 中부총리 사망

    [부고] 지한파 우쉐첸 전 中부총리 사망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지한파(知韓派)이자 중국 외교가의 대부 가운데 한 명이었던 우쉐첸(吳學謙) 전 중국 부총리가 지난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87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6일 “우 전총리는 중국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으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자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중국 외교전선의 걸출한 지도자”로 평가했다. 우 전 부총리는 중국 외교부장을 거쳐 1987년∼93년 외교담당 부총리를 지내며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과 이듬해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했다.1994년 4월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신분으로 방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면담을 갖기도 했다. 우 전 부총리는 중국을 오랜 외교 고립으로부터 탈피시키는 데 노력해 왔다.1980년대 초 외교부장 시절 영국과 홍콩 주권 반환 협상을 벌였으며,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는 리펑(李鵬) 전 총리의 강경 진압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jj@seoul.co.kr
  • 李대통령 “靑엔 실세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2일 “청와대엔 실세가 없다.”며 청와대 비서관들의 신중한 처신을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비서관 42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밖에서 누구누구 이름을 거명하는 모양”이라며 비서관 2∼3명의 실명을 거론한 뒤 “그러나 청와대엔 실세가 없다.”고 강조했다고 이동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의 이같은 당부는 최근 한나라당 공천 갈등에서 불거진 ‘실세 논란’을 불식하는 한편 청와대 내 권력 다툼을 사전 차단하려는 뜻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은 “내가 재산까지 내놓고 온갖 네거티브를 겪으며 대통령이 됐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국민들이 대한민국 어느 곳에 살든지 행복을 느끼며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성공적인 국정 수행에 대한 포부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청와대는 하나다. 서로 힘들 때 용기를 주고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면서 “나(대통령) 개인에게 충성하지 말고 자신의 목표, 우리가 공유하는 목표를 위해 뛰어달라.”고 당부했다. 임명장 수여에 이은 부부동반 오찬에서 이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는 남자를 토기, 여자를 ‘본차이나’에 비유하는 유머를 꺼내 비서관 부인들의 내조를 당부했다. 김 여사는 남자는 흙으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성경 말씀을 들어 “남자가 ‘토기’라면 여자는 ‘본 차이나’”라며 “토기는 떨어지면 깨지지만 본차이나는 깨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남자들이 밖에서 일을 잘할 수 있게 부인들이 내조를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총선 D-7 (서울신문·KSDC 여론조사)] 비례대표 한나라 30·민주 14석 예상

    KSDC가 자체조사와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분석한 결과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 각각 영남, 호남에서 초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수도권에서는 3분의1 이상 지역구에서 양당이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111개 지역구 가운데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이 유력하거나 우세한 곳은 48개였다. 민주당은 21개 지역구에서 당선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지역이 40개에 달해 18대 국회에서 어느 당이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할지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충청지역의 경우 자유선진당이 7석을 사실상 확보, 한나라당(3석)과 민주당(4석)보다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접전 지역은 24개 선거구 중 10개다. ●충청권 자유선진당 7석 사실상 확보서울신문과 KSDC의 2차 여론조사에서 ‘지역구 선거에서 어느 정당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유권자의 38.0%는 한나라당 후보를 찍겠다고 답했다. 이어 민주당(13.8%), 친박연대(3.1%), 민주노동당(2.0%), 자유선진당(1.7%), 창조한국당(1.3%), 진보신당(0.2%) 순이었다.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정당 투표에서도 한나라당이 40.8%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고 민주당이 15.3%로 그 뒤를 이었다.이와 관련,KSDC의 판세 분석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30석, 민주당은 14석, 친박연대·민노당은 각각 3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대 변수는 부동층이다. 이번 조사에서 모름·무응답과 ‘지지하는 후보 없음’의 비율을 합친 부동층이 36.6%였다.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상당수 표의 향배를 예측할 수 없는 셈이다. 선거 결과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는 바로 ‘지지의 지속성’ 여부다. 이번 조사에서 유권자의 33.1%가 지지후보를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29세 이하 젊은 유권자의 52.9%, 대학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유권자의 37.5%가 지지 정당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대학생들의 표심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대전·충청 거주자의 44.3%가 지지정당을 바꿀 수 있다고 답했다. 이 지역이 이번 선거의 최대 접전지가 되리라는 관측을 확인할 수 있다. ●친박연대·민노 비례 3석씩 차지할 듯정당별로는 민주당 지지자 68.7%, 한나라당 지지자 64.7%가 현재 지지 정당을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과거 한나라당 지지자가 높은 충성심을 보인 반면 상대적으로 지지층이 젊은 다른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 낮았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역전됐다. 지난 대선에서 충성심이 낮은 유권자의 한나라당 지지가 높아졌고 이번 한나라당 공천 파문으로 박근혜 전 대표를 선호하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눈에 띄는 결과는 친박연대의 정당 지지율이 3.4%로 한나라당(48.1%), 민주당(14.1%)에 이어 3위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지난 1차 조사와 비교해 볼 때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율은 약간 상승했지만 친박연대를 제외한 다른 소수 정당 지지율은 오히려 줄었다. 이는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주요 정당이 누리는 프리미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다.
  • [한국의 대표기업] (17) KTF

    [한국의 대표기업] (17) KTF

    KTF의 내부 분위기는 무척 비장했다. 지난해 3월 국내 최초의 3세대(3G) 이동통신 서비스 ‘쇼(SHOW)’의 출범. 경쟁업체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마지막 무기’였다. 오죽하면 서울 잠실 본사의 각 사무실마다 “이기지 않으면 돌아올 곳이 없다.”는 살벌한 문구의 플래카드가 걸렸을까. ■ 진화하는 KTF…SHOW는 계속된다 ●상용화 1년만에 423만명 가입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올 2월 말 기준 쇼 가입자는 423만명에 이른다.KTF 전체 가입자의 30%다. 초고속 성장이었다.KTF 관계자는 31일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세계 이동통신사 중 400만명 이상 가입자를 확보한 회사는 미국의 AT&T와 KTF뿐”이라고 말했다.KTF보다 1년6개월 앞서 상용 서비스를 개시한 AT&T도 첫 1년간 가입자는 60만명에 불과했다. 자금력이나 브랜드 인지도, 주파수 대역 등 거의 모든 면에서 SK텔레콤에 밀리는 상황에서 KTF에는 돌파구가 필요했다.‘쇼 올인’은 그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음성통화 중심에서 영상통화, 무선인터넷, 범용 사용자 식별모듈(USIM)을 기반으로 한 금융, 교통 등 신개념 서비스로 승부를 보자는 것이었다. 조영주 KTF 사장은 “광대역코드분할접속(WCDMA) 방식 이동통신은 불리한 요소들을 극복하고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요금제·단말기 출시 중 영상통화를 앞세워 3G 서비스를 확실히 인식시켰던 KTF는 최근 다양한 서비스와 함께 다양한 요금제와 단말기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과 올 2월 각각 ‘이마트 요금제’와 ‘주유할인 요금제’를 출시했다. 이마트 요금제는 이용요금에 따라 월 1000∼2만 5000원까지 이마트에서 할인받을 수 있는 요금제다. 주유할인 요금제로는 전국 4400여개 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주유소에서 ℓ당 최대 600원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쇼 전용 단말기도 다양해지고 있다. 오는 8월에는 ‘쇼 엠씨스퀘어 폰’을 출시한다.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양이앤씨의 ‘엠씨스퀘어’를 휴대전화와 합친 제품이다. 엠씨스퀘어와 연계한 e-러닝 서비스도 개발해 어학, 학습 등 다양한 교육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KTF 관계자는 “고객의 폭넓은 선택을 위해 다양한 컬러폰을 출시하는 ‘쇼 컬러마케팅’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이동통신 시장도 진출 KTF는 해외사업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KTF는 NTT도코모와 함께 말레이시아 ‘U모바일’에 지분투자를 하면서 현지 시장에 뛰어들었다. 최고경영자(CEO)와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경영진을 파견하는 등 직접 경영을 맡고 있다. 올 2·4분기 상용 서비스를 앞두고 있는 U모바일은 쿠알라룸푸르 등 주요 도시에서 3G WCDMA망으로 서비스할 예정이다. 서비스 시작 1년 내 가입자 60만명,2년 내 140만명을 확보해 안정적인 사업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KTF 관계자는 “U모바일은 말레이시아 3G 신규 사업자로서 이미 성공적으로 WCDMA사업을 하고 있는 KTF와 NTT도코모의 경험이 충분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 “상용화 초기부터 2세대 사업자와의 로밍, 번호이동제도 등이 실시될 예정이어서 도전해 볼 만한 시장”이라고 평가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모기업 KT와 합병 ‘초읽기’ IPTV·와이브로 사업 탄력… 업계 긴장 KTF가 당면한 최대 이슈는 모기업인 KT와의 합병이다. 이는 KTF와 KT 차원에 그치지 않고 국내 통신업계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다. 합병이 논의되는 직접적인 이유는 경쟁사인 SK텔레콤의 하나로텔레콤 인수다. 이를 통해 SK텔레콤은 시장 영향력이 ‘유선’보다 강한 ‘무선’을 기반으로 전방위 통신사업의 라인업을 구축했다. 시내·국제 등 유선사업이 더 큰 KT그룹으로서는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업계에서는 KTF와 KT의 합병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KTF가 최근 들어 전에 없이 공격적으로 가입자 확보에 나서고 있는 것을 합병에 앞서 최대한 몸집을 불려놓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영주 KTF 사장은 “SK텔레콤이 선보일 유·무선 결합서비스를 KT와 KTF는 이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이미 인수·결합된 상태나 마찬가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KT는 최근 최고재무책임자를 팀장으로 한 ‘그룹전략 협업팀(CFT)’을 신설하고 KTF의 급여체계 분석, 합병 후 경영목표·조직구성·마케팅 통합 등을 연구 중이다. 합병을 전제로 그에 따른 효과와 득실을 광범위하게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KTF와 KT의 합병이 이뤄지면 유·무선을 아우르는 다양한 결합상품 출시가 가능해진다. 그동안의 결합상품이 KT의 유선전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합병 뒤에는 SK텔레콤처럼 이동통신을 중심으로 한 유·무선 결합상품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인터넷 TV(IP TV), 와이브로(무선휴대인터넷) 등 미래사업도 더욱 탄력을 받는다. 일부 중복돼 있던 KTF와 KT간 인력, 네트워크, 유통망 등이 통합돼 비용절감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KTF와 KT가 사실상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합병의 효과가 얼마나 될지 불투명하다는 관측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CSO 자처하는 조영주 사장 ‘감성경영’ 몸소 실천 ‘쇼’ 밀어붙인 뚝심도 지난해 11월 재즈가수로 데뷔했다. 그에 앞서 두 차례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조영주 KTF 사장은 ‘감성경영’을 강조한다. 대외적으로는 최고경영자(CEO)이지만 회사 안에서는 CSO를 자처한다. 그에게 CSO는 ‘최고전략책임자’와 ‘최고서비스책임자’를 동시에 의미한다. 오히려 ‘최고서비스책임자’쪽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직원들에게 고객서비스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사장 먼저 직원들의 ‘봉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즈가수나 지휘자를 한 것도 따지고 보면 3000여명 직원들을 위한 일이었다.2006년 9월 KTF 창립 10주년 행사에서 스스로 가발까지 쓰고 등장, 훌륭하게 지휘자 역할을 해냈다. 직원들의 환호에 색소폰 연주실력으로 답례하기도 했다. 조 사장은 매월 한 차례씩 직원들에게 편지를 쓴다. 생일을 맞은 직원들에게는 생일파티를 열어준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큰 소리로 생일축가를 불러주는 ‘사장님’의 모습에 감동받는 직원이 적지 않다. “색소폰을 불고 지휘를 한 것은 우리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남다른 쇼맨십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두가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조직에 가져다 주는 거대한 힘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것이지요.” 조 사장의 감성 리더십은 직원들의 소속감과 충성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는 시 구절을 좋아하는 것처럼 필요한 데서는 대단한 뚝심을 발휘한다.2000년 KT 차세대이동통신(IMT-2000)사업 기획단장 시절 끝까지 ‘비동기식 기술’을 관철시키며 사업권을 따냈다.KTF 사장이 돼서도 3세대 서비스로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초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시할 때 ‘쇼’라는 브랜드 명칭에 숱한 반대의견이 일었지만 “알기 쉽고 짧은 것이 좋다.”며 과감히 밀어붙인 사람이 조 사장이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데스크시각] 중국식 지도자 검증이 부러운 이유/이석우 국제부장

    [데스크시각] 중국식 지도자 검증이 부러운 이유/이석우 국제부장

    중국내 티베트(시짱·西藏) 독립 요구 시위가 유혈 사태로 번지던 지난 16일 베이징에선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2기가 공식적으로 돛을 올렸다.‘중화인민공화국 주식회사’의 회장격인 국가주석에 후진타오가,‘총괄 사장’인 총리에 원자바오(溫家寶)가 재신임되면서 다시 5년동안 ‘중국 호(號)’의 조타수가 됐음을 확인했다. 시진핑(習近平)과 리커창(李克强), 차세대 양대 축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놓쳐선 안될 ‘사건’이었다. 쉰다섯의 시진핑은 국가 부주석에 선출돼 차기 국가주석 영순위 후보가 됐고 쉰셋으로 상무 부총리에 뽑힌 리커창은 차기 총리를 준비하게 됐다. 앞서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10월말 기업의 등기이사 격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4명을 물갈이, 최고정책기구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이로써 후-원 체제가 막을 내릴 2012년 이후 차기 집권 구도의 포석을 공식화한 셈이다. 후진타오나 그에 앞선 3세대 집단지도체제 핵심 장쩌민(江澤民) 등은 모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낙점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장이나 후로 상징되는 3·4세대 지도자들은 덩의 낙점만으로 정상에 오르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경쟁과 검증을 거치며, 실적과 성취로 존재를 입증해 온 그런 사람들이다. 장쩌민이 비누공장 등을 거치며 일찍부터 수완을 과시하며 두각을 나타낸 것이나 후진타오가 편벽한 깐수(甘肅)성 현장에서 실적을 이뤄낸 것도 마찬가지 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독단과 후계구도 불안정의 악영향을 몸소 겪고 느꼈던 덩 등 2세대 지도자들은 후계구도의 안정성에 대해 정책적 우선 순위를 두고 접근했다. 그 고민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검증과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일 때만 인사구도의 안정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일당 독재의 한계속에서도 그런 모습을 그려내려는 안간힘으로 이어져 왔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중·후반 과감하게 20·30대들을 간부로 기용했다.90년대 중반엔 검증과 실적 싸움에서 살아남은 일부가 중앙의 중견 간부나 중·소도시 시장, 당서기들로 자리잡으며 중국 정치의 세대교체를 이뤄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나이, 계파, 당에 대한 충성도 및 대중 지도력 등이 고려됐지만 실적을 중시하는 ‘실사구시’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졌다.‘사원 주주’ 공산당원 사이에서지만 공감과 수긍은 확산됐고 엘리트의 건강한 충원과 자칫 깨지기 쉬운 집단지도체제의 유지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는 평도 얻었다. 엊그제 입후보 등록이 마감되면서 18대 국회의원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고 있지만 공천을 둘러싼 정당성 시비는 잦아들기는커녕 확산일로에 있다. 공천 시비로 인한 분란으로 선거 판세가 달라지고 선거후 분당 등 거센 후폭풍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일당(一黨)의 국가’ 중국의 지도자 충원 방식을 감히 민주국가 한국의 선거와 비교하는 일은 불경스럽고 불손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요사이 선거판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중국의 검증과 합의 수준에 부러움과 유혹을 느낄 정도다. 앞선 ‘실용정부´ 초대 각료 인사 검증도 한숨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몇 사람의 지도자가 바뀌면 당이 생겼다 없어지는 한국적인 ‘하루살이 정당체제’에서 요즘 같은 공천 파동과 시비가 잦아들 것 같지도 않다. 인물과 정책 검증이 시원찮은 상황에선 한바탕의 흥행을 위한 바람몰이만이 성공의 지름길인 까닭에서일까. 원칙과 대화가 소통되지 못하는 곳에선 상황논리와 임기응변만이 활개칠 따름이다. 신진대사가 이뤄지듯 변신해 나가는 중국 지도부의 진화에 유혹마저 느끼는 ‘황당한 상황’속에서 피를 흘리며 쌓아올린 우리 민주화의 성취가 선거를 거칠 때마다 무색해질까 두렵다. 이석우 국제부장 swlee@seoul.co.kr
  • [사설] 복지부동보다 무서운 공무원 과잉충성

    인천공항공사가 요즘 늘어난 ‘장관급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여객터미널 2층 중앙에 귀빈실을 새로 만드는가 하면 주차장을 손질하고 있고, 의전을 담당할 직원을 8명 늘렸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국토해양부가 공문을 보내 공항 귀빈실을 이용하게 될 기업인들을 장관급으로 예우하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인들이 공항을 출입할 때 귀빈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진즉에 강조한 바 있다. 그 발언을 국토해양부가 ‘장관급 예우’라고 뻥튀기하면서 이같은 소동을 불러오게 됐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인이 우대받아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뜻을 존중한다. 아울러 시간에 쫓기는 기업인들이 공항 출입에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대통령 발언의 진의가 ‘공항에 별도로 마련된 방을 사용하면서 출국 수속이 끝날 때까지 의전팀 직원이 수행하는’ 그러한 형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의 순수한 의도에 행정부서가 개입함으로써 확대·왜곡된 것이다. 과잉 충성이 부른 추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청은 그제 ‘아동·부녀자 실종사건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휴대전화에 위성항법장치(GPS) 장착을 의무화하고 전국 놀이터·공원 등지에 CCTV 설치를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비용 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일을 고민한 흔적 없이 대책이랍시고 발표한 것이다. 같은 날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지난 정부의 대북정책이 잘못이었다는 일방적인 ‘반성문’을 공개했다. 공무원 집단의 폐해를 흔히 복지부동이라 표현하지만, 새 정부를 맞아 이처럼 과잉 충성하는 행태는 국민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 靑비서관 오피스텔서 ‘나홀로’ “새벽6시 아이 업고 집 나서요”

    부지런한 대통령이 취임한 지 1개월. 공무원들도 ‘얼리 버드(Early Bird·일찍 일어나는 사람)’ 생활에 적응하느라 공직사회에서는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업무시간을 단 1시간 앞당겼을 뿐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일찍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청와대는 대통령이 8시에 국무회의를 열면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각각 30분씩 일찍 출근해 업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후유증은 만만치 않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얼마 전 아예 청와대 근처의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매일 아침 6시까지 1시간씩 걸려 출근을 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부족한 잠을 자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 이 비서관은 “단칸방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은지 한달 이상 기다려 겨우 15평짜리 오피스텔을 구했다.”면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바로 주무시면 되지만 나 같은 공무원은 최소한 대통령보다 2시간은 덜 자는 것 아니냐.”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털어놨다. 청와대에서 파견 근무 중인 공무원들은 불만이 많다. 한 공무원은 “솔직히 말해 그만두고 싶다. 원래 근무처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 공무원들에게 ‘얼리버드’는 더 복잡해진다. 본인은 조금 일찍 일어나면 되지만 이른 시간부터 아이를 맡아 줄 어린이집은 없기 때문이다. 한 여성 공무원은 “새벽 6시에 눈도 못 뜬 채 엄마 등에 업혀 집을 나서야 하는 아이는 무슨 죄냐.”면서 “아예 여성 공무원들은 그만두라는 말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여성 공무원들이 많은 과천정부청사에서는 아예 어린이집을 2시간 정도 앞당겨 여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얼리버드’에 대한 공무원들의 탄원성 글이 매일 올라오고 있다. 한 공무원은 “무분별하게 부서간 충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조기출근, 주말회의 등을 금지시켜 달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여성의 일자리 확대, 출산 장려 등의 장밋빛 정책 앞에 이런 현실은 참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면서 “더 일찍 출근하여 더 빨리 업무에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가정의 구성원임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크렘린 反美·反서방 기조 유지”

    “크렘린 反美·反서방 기조 유지”

    “메드베데프 체제에서도 해빙 무드는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정부가 출범하더라도 러시아와 서방 관계가 쉬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5월 퇴임을 앞두고 젊고, 자유분방한 새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서방 지도자들의 기대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모스크바 근교 별장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난 뒤 기자회견에서 “메드베데프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 유연하지만 긍정적인 의미에서 나 못지않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라며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는 데 나만큼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최근 악화일로를 달려온 러시아와 서방 관계는 악재가 산적해 있다. 이란 핵프로그램, 동유럽미사일방어(MD)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확대, 코소보 독립선언 등 양보하기 어려운 사안들로 충돌 가능성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이런 배경에는 재임중 급상승한 경제성장을 무기삼아 외교무대에서 ‘강한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온 푸틴의 존재감이 크다. 때문에 일각에선 푸틴이 대통령에서 물러나면 상황이 다소 바뀌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메드베데프의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기대하기는 당분간 힘들 것임을 보여준다. 푸틴은 이날도 “나토가 유엔을 대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코소보 독립은 옛 소련을 포함한 세계 각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행위”라는 등 서방 국가를 향한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사실 지난 2일 대선에서 압승한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이 푸틴의 강경외교 정책을 그대로 계승할 것이라는 예측은 일찌감치 나왔다. 메드베데프가 당선 확정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은 “푸틴 대통령의 정책 노선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충성 맹세’였다. 메드베데프는 8일 대선 이후 서방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메르켈 총리와 만났다. 메르켈 총리가 앞서 회동한 푸틴의 발언을 전하며 “서로 힘든 관계가 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하자 그는 “푸틴 대통령과 당신이 맺은 협력 관계를 계승하겠다.”고 답했다. 한편 푸틴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일 전화통화를 갖고 다음달 열릴 러시아-나토 정상회담 의제를 논의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이 회담은 푸틴이 대통령 신분으로 부시 대통령과 만나는 마지막 만남이 될 것으로 보여 회담 결과가 더욱 주목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열린세상] 북한 군대에도 봄은 오는가/정영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열린세상] 북한 군대에도 봄은 오는가/정영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북한은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주력으로 하는 정치’, 즉 선군정치를 내놓았다.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상정한 것이다.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혁명을 위해서 군을 핵심으로, 본보기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에는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데 노동계급이 혁명의 영도계급, 주력군으로 규정되었으나 시대가 변해 노동계급은 더 이상 혁명의 주력군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군대는 단순히 ‘반혁명적 폭력을 격파하고 견제하는 기본무기, 혁명을 수호하고 조국을 보위하는 수단’을 넘어 정치적 역량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정치적 역량은 ‘수령결사옹위정신’으로 집약되는 혁명 정신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북한 군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성을 다해 보위하는 핵심수단이 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수령결사옹위를 위해 군대에 대내외 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적에 대한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대외적 체제의 적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남한을 지목하며 이들 국가들을 ‘계급적 원수’로 치부하고, 그들의 군대가 이들과 싸우는 계급투쟁의 맹수가 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남북관계 확대, 북핵 6자회담과 미국·북한 양자회담이 이어지면서 이를 평화의 계기로 인식하는 ‘평화 환상’이 북한군내에 확산되고 있는 데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한을 비롯한 외부세계에 대한 북한군의 의식변화가 뚜렷하다는 증언들이 많다. 예를 들면, 장교급에서 남한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지고 남한방송 청취율도 높아가고 있고, 한국·미국·홍콩영화를 감상하는 분위기가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 중에서는 홍콩, 한국, 미국 영화 순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에 대한 북한군 당국의 단속 역시 강화되고 있다. 보위부가 장교와 병사들의 언행을 감시한다든가, 장교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라디오, 텔레비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후 라디오는 회수하고 텔레비전은 채널을 고정시켜 버린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단속이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북한 당국은 “당이 평화적 구호를 들면 들수록 인민군대는 오직 총대로 조국통일하겠다는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남북한 대화뿐 아니라 미국·북한 간 대화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북한군의 평화 환상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북한군의 평화 환상이 확대되면 될수록 주적으로서의 반미의식은 유연하게 바뀌지 않을 수 없으며 남한에 대한 ‘계급적 원수’ 인식 또한 옅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군의 주적인식 완화는 북한체제의 변화에 대한 요구로 연결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북한군이 그들의 수령체제 유지를 위한 가장 보수적이며 충성집단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젊은 장교들은 변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띠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당간부들이나 당원들, 그리고 군 장교들은 적극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 밀담이 오가기도 한다는 증언들도 있다. 장교들이나 사관급 군인들은 어떡하면 주변 여건을 활용해 돈을 벌 것인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경제난의 지속으로 인하여 식량을 비롯한 군 보급품 부족이 지속될 경우, 북한군은 자구책으로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탈행위들에 대해 더욱 과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향후 남북관계를 비롯한 대외관계의 다변화와 활성화 현상이 심화되면 될수록 북한 군대의 이러한 부정적 인식변화는 보다 커질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에 대비하여 인민군대에 대한 정치교양교육과 통제활동을 보다 강화할 것이지만 군의 부정적 인식변화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 [정윤수의 오버 헤드킥] ‘통일축구’ 감동 평양서 다시한번

    지난 26일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을 가졌다.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대단히 미국적인 ‘신세계 교향곡’은 물론 성조기가 게양되고 미국 국가까지 연주되었으니, 얼음장 밑으로 강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같은 날, 개성에서 돌아오는 대한축구협회의 실무대표단은 안타깝게도 빈 손이었다.2010년 남아공월드컵 예선과 관련, 북한 관계자와 협상을 벌였지만 ‘애국가 연주와 태극기 게양 거부’라는 북한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북한을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도 있다. 그들은 나름의 국가 체제를 형성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허용한 적이 없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북한은 ‘적성국가’인 미국은 불가피하게 인정하지만 남한은 ‘미수복’된 영역으로 여긴다. 북한 주민들에게 태극기가 펄럭이는 광경을 제공하고 싶지 않은 내부적 요인에다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도 현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한반도기와 아리랑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우선 이 경기는 남북 양측의 친선 경기가 아니라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한다.정치적인 요소를 배제해온 FIFA의 성향으로 볼 때, 북한의 요구는 관철되기 힘들다. 국제 정세의 측면에서도 북한은 좀 더 전향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6자 회담이나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이미 남한의 ‘실체’는 북한 주민들에게 현실이 됐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 유명한 ‘광폭 정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국제 경기의 최소 요건을 충족시키면서 경기를 진행할 경우 북한 내부의 이견들을 큰 틀에서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프랑스 국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흑인 병사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말했듯이, 우연적이거나 일회적인 상징이 견고한 이미지로 굳어질 수도 있다. 지금 북한은 그 점을 우려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사례가 견고한 전례들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해 축구협회는 취재진이나 응원단의 규모를 적절히 조정하는 것을 제안할 필요가 있다. 순조롭게 경기를 마친 뒤 남북의 젊은 선수들이 북한 주민들의 박수 속에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아리랑을 부르는 건 북측의 ‘정치적’ 관점에서도 결코 유해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2002년 9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경기 종료 후 북한의 리경인과 남한의 최태욱은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그런데 두 선수는 그것으로 부족했던지 축구화까지 벗어서 바꿔 신었다. 우리는 그러한 광경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 “여론·군부·미국 내편 하나 없다”

    9년째 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베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18일(이하 현지시간) 실시되는 총선에서 야당들의 압승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 무샤라프에 대한 퇴진 압력이 거세질 것이고 군부도 무샤라프의 버팀목 역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테러와의 전쟁’ 이후 그의 막강한 후원자인 미국도 등을 돌릴 확률이 높다. 파키스탄인민당(PPP) 중앙집행위원인 바바르 아완은 15일 AP통신에 “무샤라프를 축출하는 것이 파키스탄을 민주주의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라며 “총선에서 이기면 그를 제거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지난해 12월27일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이끌던 PPP의 지지율이 무려 50%에 달했다. 무샤라프의 최대 정적인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N)의 지지율은 22%로 뒤를 이었다. 반면 여당인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Q)의 지지율은 14%에 그쳤다. 이는 암살된 부토에 대한 동정 여론과 반(反)무샤라프 정서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두 거대 야당이 범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한 상태여서 여론조사 결과가 현실화되면 무샤라프의 장기집권 시나리오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의원 3분의2가 찬성을 하면 무샤라프의 탄핵이 가능하다. 파키스탄 국민들이 무샤라프에 등을 돌린 지는 이미 오래다. 집권 후 친미정책을 펴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정책을 펴고 있는 그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14일 나왔다. 국민 64%가 무샤라프가 물러나야 정국이 안정된다고 믿고 있다고 BBC가 보도했다. 게다가 무샤라프에 대한 군부의 충성심도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11월 군복을 벗은 무샤라프에 대해 군부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군참모총장직을 물려받은 아시파크 키야니는 정부부처에 파견했던 군간부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리고 군인사의 정치인과의 만남을 금지시켰다. 군의 정치개입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일각에선 무샤라프가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 조직적인 선거 부정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 경우 야당과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핵무기를 가진 세계 3위의 무슬림대국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우려된다.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는 “파키스탄 정국 안정의 키를 쥐고 있는 3대 변수는 무샤라프, 두 거대야당, 군부”라며 “무샤라프가 야당의 압승을 막기 위해 선거 개입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럼에도 야당들이 압승을 한다면 군부가 중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어 퇴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같은 대학 장병옥교수는 “무샤라프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알제리처럼 제2의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정국 안정의 분수령으로 여겨졌던 총선이 결국 무샤라프에게는 ‘독이 든 성배’가 될 듯하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공천 잡음은 毒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공천 잡음은 毒

    얼마 전 한나라당 4·9 총선 공천심사위원회는 당을 탈당해 다른 당 공천을 받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신청자들의 재입당을 보류했다. 모두 25명. 한데 이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 A전 의원도 포함됐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그는 백방으로 사유를 알아봤다. 내용은 이렇다. 그가 재입당 보류 기준에 걸리는 건 아니었지만 이명박(MB) 당선인의 핵심 실세로부터 그의 재입당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침이 공천심사위원에게 전달됐고 결국 공심위는 그를 보류 명단에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그 실세는 대선 기간 중 A전 의원이 자신을 비판한 것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재입당 보류는 사실상 공천 탈락을 뜻한다.A전 의원은 허탈해하면서 공천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창당 이래 최고의 공천 경쟁률(4.82대1)로 이른바 ‘공천 특수’를 누리는 한나라당이지만 심사가 진행될수록 이런저런 잡음이 들리고 있다. 당사 주변에선 공천 대가 풍문도 떠돌아 다닌다. 공천 과정에서 ‘찬밥’ 대우를 우려한 사무처 당직자들은 급기야 집단 성명까지 발표했다. 자칫 공천 비리로 연결될 수 있고, 공천 불복 사태로 발전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법적 다툼 소지도 있다. 공천 특수가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할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안정 의석 확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치 발전을 위해 헌신할 훌륭한 인물을 공천하겠다고 천명한 것과 달리 현실은 ‘공정 공천’ 원칙이 훼손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MB 측근이라는 이유로, 또 박근혜 전 대표측에서 요구한 공천 보장 명단(80명)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무난하게 공천받는 일은 곤란하다.‘낙하산 공천’,‘명단 공천’이 현실화된다면 한나라당 우세지역이라도 총선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천 탈락에 반발한 인사들이 무소속 출마를 감행할 경우 표 분산으로 그 이득은 고스란히 통합민주당 후보와 자유선진당 후보가 가져갈 것이다. 특히 공천이 신청자의 능력과 경쟁력, 당선 가능성 등을 골고루 판단하는 게 아니라 특정 실세의 입김에 의해 좌우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계파 나눠 먹기도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크게는 친이(이명박), 친박(박근혜)으로 나뉘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복잡해진다. 이재오 그룹, 강재섭 그룹, 정두언 그룹 등으로 세분화된다. 일각에선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정점으로 한 원로 그룹과 이방호 그룹까지 언급한다. 실세들이다. 짧게는 오는 7월의 당 대표 경선을, 길게는 4년 뒤의 차기 대권 경선을 겨냥하고 있다.2010년의 시·도지사 경선을 목표로 하는 이도 있다. 차기 대권에 뜻을 둔 일부 시·도지사까지 공천권 확보 전쟁에 끼어들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들을 공천의 든든한 배경으로 삼으려는 신청자들은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충성 맹약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공천심사가 본격화되면 실세들의 힘 대결이 벌어질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제2차 공천 파동이다.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실망감은 커질 것이다. 계파 정치가 고착되면 MB의 당 장악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선적으로 계파 이익을 고려하는 탓에 권위의 일정부분 훼손도 불가피할지 모른다. 대야 협상에 앞서 당내 계파 설득에 진을 뺄 수도 있다. 더구나 취임도 하기 전에 인수위의 잇단 ‘헛발질’과 MB의 실언 등으로 여론 지지도가 떨어지고 여당 견제론이 부상 중이다. 희망 의석수도 축소 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천 결과는 곧바로 민심과 연결된다. 높은 지지율도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다. 그건 온전히 한나라당의 몫이다. jthan@seoul.co.kr
  • [열린세상] 대통령 옆방엔 총리,장관임기는 5년으로/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열린세상] 대통령 옆방엔 총리,장관임기는 5년으로/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는 온전하게 성공한 이가 없다. 제일 괜찮다고 하는 이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정도다. 특히 희한한 것은 꽤 괜찮다고 생각되던 이들도 ‘그 놈의 청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이상해지더라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짚어 보겠다. 첫째는 대통령의 업무가 초인적으로 과중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으로서 그 권한이 입법권과 사법권을 제외한 모든 국정에 미친다. 연방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비교하면 연방대통령과 50개 주지사의 역할을 모두 떠맡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을 챙길려면 몸뚱아리 하나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살 길은 무엇인가. 그 업무를 분산시키는 것이다.‘통반장’ 다 하려고 하다가 ‘죽’을 쑬 것이 아니라 요인들이 일을 적정수준으로 나누어 떠맡는 것이다. 둘째로는 대통령집무처 안에 언로가 뚫린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경호상 안전은 지켜져야 하지만 ‘인의 장벽’이 쳐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실제는 어떠했는가. 그곳에 상근하는 이들을 보면 대체로 대통령과 사심없이 이야기할 만한 인물은 없고 죄다 ‘비서 나부랭이’들뿐이었다. 비서란 어떤 존재들인가. 우선 대통령과의 지위적 격차가 너무 커서 무조건 복종적일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다. 다음에 더 큰 자리 하나 얻어 나가기 위해 잘 보이려 비위 맞추고 충성 경쟁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다른 것이 없다. 청와대 안에 비서 아닌 경륜있고 사심없는 인물도 몇몇 포진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이 소리, 저 소리를 거리낌없이 듣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만 제안하겠다. 첫째, 청와대 대통령 옆방에 국무총리를 들여 앉히라는 것이다. 총리는 어떤 직책인가.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에 관한 한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자리다(헌법 86조 2항). 총리의 가장 큰 임무는 대통령의 보좌업무인 것이다. 또 뒷부분에 나오는 행정 각부 통할업무도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하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나와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국가의 대소사를 논함에 있어서 맨먼저 논의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가.‘비서 나부랭이’들인가. 총리인가. 총리쯤 되어야 허심탄회하게 쓴 소리, 단 소리를 모두 다 터놓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한가지. 국무총리는 대통령 유고시 그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있다(헌법 71조). 따라서 그 승계예정자는 마땅히 인근에 위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 백악관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둘째, 행정 각부의 일은 장관들에게 몽땅 맡기라는 것이다. 그동안 이 나라에는 장관 위에 비서가 있고, 그 ‘비서 나부랭이’들이 장관들을 쥐고 흔들었다. 그래선 안된다. 행정은 어디까지나 장관 책임 아래 완전히 맡길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은 ‘통반장’‘원맨쇼’를 면하고 그 분야의 ‘대통령 같은 장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장관은 5년짜리여야 한다. 도대체 이 나라는 장관들이 조금 알 만하면 파리 목숨처럼 갈아치우곤 했다. 장관, 그 까짓게 무엇이라고 장관하려고 줄을 서곤 했다.‘섀도 캐비닛’처럼 준비된 장관들, 매니페스토정책공약을 지켜낼 수 있는 장관들,5년짜리 대통령 같은 장관들을 임명해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하기를 권한다. 대통령은 총리와 장관을 잘 쓰고 가까이 해야 성공한다. 대통령은 어떤 존재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존재다. 지휘자는 직접 연주를 하지 않는다. 대신 전체가 연주를 잘 할 수 있도록 실력을 기르게 하고 격려하고 통솔하는 일을 한다. 대통령 자리는 그런 자리다. 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분투했지만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집요한 포위 끝에 대릉하성을 무너뜨린 후금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명의 수세(守勢)와 낙조(落照)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 祖大壽, 투항을 결심하다 1631년 10월 7일, 홍타이지는 한인 출신 장수 강계(姜桂)를 대릉하성으로 보냈다. 그는 홍타이지에게 투항한 23명의 한인 장관(將官)들이 직접 작성한 투항 권유서를 들고 있었다. 조대수에게 투항하라고 설득할 참이었다. 조대수는 그를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강계는 할 수없이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투항 권유서를 쓴 사람들이 누구누구며, 원군을 이끌고 왔던 장춘(張春)도 이미 후금군에 참패하여 투항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대수는 완강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자신의 옛 부하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성에서 죽을 것이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외쳤다. 병사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어도 조대수는 좀처럼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대수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10월 20일, 편지가 묶인 화살을 성안으로 날렸다. 그는 편지에서, 명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부하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명 병졸들에게 ‘너희는 죽어봤자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데 왜 다른 사람의 고기가 되느냐.’며 ‘상관을 죽이고 귀순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명군 진영을 흔들기 위해 심리전을 폈던 것이다. 심리전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10월 25일 조대수로부터 회답이 왔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한인 출신 장수인 석정주(石廷柱)를 보내달라고 했다. 조대수는 석정주를 성안으로 들이면서 자신의 아들 조가법(祖家法)을 후금 진영에 인질로 보냈다. 조대수는 석정주에게 항복을 결심했다고 말한 뒤, 깜짝 제안을 했다.‘나는 이미 나라에 충성하기는 틀린 몸인데 목숨을 비록 구하더라도 처자를 볼 수 없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면 먼저 금주성을 함락시켜 내 처자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앞장서서 금주성을 함락시킬 복안이 있으니 홍타이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조대수의 가족들 대부분은 금주성에 있었고 둘째아들은 북경에 있었다. 어차피 상황에 떠밀려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피붙이라도 챙겨야겠다는 결심이 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대수의 변신과 홍타이지의 배포 10월 28일 조대수는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조대수는 투항하기로 결심했지만 부하 하가강(何可綱)은 그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하가강은 사실상 부사령관으로 성을 쌓는 공사를 감독했던 주역이었다. 그는 조대수에게 “공과 저는 모두 요동 사람입니다. 공이 나가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마음을 묶어둘 수 없고, 제가 죽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의리(義理)를 밝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제문을 지은 뒤 주변 사람들에게 “죽게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성을 나가서 영원히 비웃음을 사겠는가?”라고 했다. 조대수는 사람들을 시켜 그를 성밖으로 몰아냈다. 성밖에는 이미 후금군 장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가강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금군에 의해 그의 숨이 끊어지자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굶주린 명군 병졸들이 달려들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조대수는 후금군 지휘관들과 하늘에 맹서하는 의식을 치렀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몸을 맡겨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후금군 지휘관들은 ‘귀순한 한인들을 온전히 보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조대수는 홍타이지의 장막으로 인도되었다. 홍타이지는 관원들을 1리(里) 밖까지 보내 그를 환영했다. 조대수가 장막 앞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겠다고 하자 홍타이지는 극력 만류했다.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홍타이지가 포견례(抱見禮)를 행한 것은 그동안 귀순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거물이었던 조대수에 대한 배려의 표시였다. 조대수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면 직접 금주성으로 들어가 명군을 무장해제시켜 투항하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마치 후금군의 포위를 뚫고 대릉하성을 탈출한 것처럼 가장하여 금주성의 명군을 속인 다음 ‘거사’를 이루겠다는 복안이었다. 대릉하성을 포위하느라 지쳐버린 홍타이지는 조대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조대수의 ‘변신’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홍타이지의 ‘배포’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11월 1일 조대수는 출발하면서 ‘금주성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면 입성한 다음날 포 한 발을 쏘고, 성을 접수하는데 성공하면 11월 4일까지 역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홍타이지에게 ‘성공’했다는 포성을 들으면 병력을 이끌고 즉시 금주성으로 오라고 했다. 11월 2일, 금주성에서 포성이 울렸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되었지만 더 이상의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대수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장졸들과 노획한 화기들을 챙겨 철수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병력은 1만 1000이나 되는 많은 수였다. 노획한 대소 화기는 3500문이 넘었다. 병력과 무기는 고스란히 후금군의 새로운 전력(戰力)으로 보강되었다. 홍타이지는 끝까지 치밀했다. 그는 철수에 앞서 대릉하성의 성첩과 시설물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홍타이지, 자신감이 더욱 커지다 대릉하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홍타이지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11월 10일,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 일행에게 대릉하 승리의 전과(戰果)를 설명하고, 자신들이 조대수에게 보냈던 초항장(招降狀, 항복 권유서)을 보여 주었다. 당시 대릉하의 후금 진중에는 오신남(吳信男)을 비롯한 조선 사신 두 명이 심양으로부터 와 있는 상태였다. 홍타이지는 명군을 굴복시킨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사신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상국’으로 섬겼던 명의 장졸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조대수가 항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 오신남 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착잡했을 것이다. 또 어렵사리,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조선과 후금 관계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상상을 했을 것이다.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어디에 먼저 성을 쌓고, 어디를 먼저 방어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결국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갑론을박하다가 공사 착수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察哈爾)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합류한 명군 장졸들도 원정에 동참했다. 원정이 거듭될수록 후금의 힘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젠가는 조선을 향해 다가올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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