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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3총선 시민혁명](6.끝)정치학자가 본 낙선운동

    한국정치가 중대한 변화국면을 맞았다.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낡은정치의 파괴이다.게다가 정치파괴가 정치영역의 바깥에서 본격화되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격랑을 타고 있다.국민들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던50년 낡은 정치질서의 썩은 밑둥을 통째로 허물고 있는 것이다. 총선시민연대가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낙선운동은 시민정치혁명 혹은 국민주권선언으로 불리고 있다.그것이 시민정치혁명인 것은 정치혁명이 시민의힘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민주권선언인 것은 침묵했던 유권자 국민들이 헌법에 보장된 국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들이 국민주권을 명시한 우리 헌법 제1조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외치고 있다. 지난 50년,우리 정치에는 몰상식이 상식인양 통용되었다.정치는 정치가들만 하는 것이라는 몰상식.정치는 현실이며 타협은 미덕이라는 몰상식.물고기가 맑은 물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는적당히 부패해야 한다는 몰상식.이몰상식이 국민주권을 무덤속에 매장해 버렸고 국민을 정치적 노예로 만들어버렸으며 정치권을 부패무대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정치가 소수 정치가들에게 독점되고 ‘타협의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흥정과 야합이 지배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그러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아 ‘몰상식한 상식’이 해체를 강요받고 있다.오랫동안 참아왔던 깨어있는 국민들이 몰상식 거부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지금 정치가들의 심장에 이렇게 비수를 던지고 있다.왜 당신들 몇몇이서 공천을 좌지우지 하는가,왜 선거구를 당신들 입맛대로 획정하는가,왜선거자금을 투명하게 집행하지 않는가,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가. 시민운동단체의 낙선운동에 국민들이 뜨겁게 성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정치권에 부패한 인사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국민들의 바람은 더욱 간단하다.정치개혁의 첫걸음으로 부패한 정치인,무자격 정치가들은 퇴장하라는것이다. 현시점에서 낙선운동을 ‘불법’이라 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낙천기준이모호하다느니,억울한 사람이 있다느니,소명기회를 주어야 한다느니 하는 것도 사태의 핵심은 아니다.핵심은 정치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변화하지못한다는 것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제도가 동시에 바뀌어야 한다.낙선운동은 운동의 전부가아니라 일부이며,끝이 아니라 처음이며,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낙선운동의 목표는 썩은 정치의 개혁이요 무능한 정치가의 교체이다.국민들이 그것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가들도 국민들이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영리한 정치가라면 무식을 침묵으로 가장하고,무능을 돌격대식 충성심으로 보완하고,부정부패를 협상능력으로 미화하던 ‘물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 간단한 사실마저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치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고 이 변화의 흐름을 수용하기 어렵다면 옷을벗어야 할 것이다.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를수록 고통도 작은 법이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 정치학
  • [사설] 재벌금융사 私金庫 안된다

    현대,삼성,SK등 재벌그룹산하 금융회사들의 계열기업 부당자금지원 사실을적나라하게 밝힌 금융감독위원회의 특검결과는 재벌금융사들의 사금고화(私金庫化)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경종으로대책마련이 시급하다.금감위는 현대 5개사(증권 투신증권 투신운용 캐피탈울산종금),삼성 7개사(생명보험 증권 투신증권 투신운용 생명투신운용 카드캐피탈),SK 3개사(증권 투신운용 생명보험)의 임직원 127명을 무더기 징계한것으로 보도됐다. 이들 재벌금융사의 부당지원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지능적이며 신종기법이 계속 개발되고 있어 징계 강도를 높이고 금융사의 재벌주식지분을 제한하는 등 금융지배구조 개선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현대 등 3개 재벌금융사들은 그동안 다른 계열사가 보유한 부실채권을 고가로 매입하거나 은행계정을 통한 우회 방식으로 계열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온 것으로 드러났다.또 계열사 부실채권을 고객신탁재산으로 운용하는 펀드에 편입시켜 결과적으로 고객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대출한도를 초과해서 단기성 콜자금을 지원하는 등 무려 20조원을 웃도는 거액을 부당지원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재벌금융사의 사금고화는 재벌의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킴은 물론 재벌기업들의 구조조정을 더디게 만들고 계열사에 이익을 안겨주기 위해 투자고객에게 손실을 입히는 등 갖가지 폐해를 가져온다.특히 증권시장의 활황세로 재벌산하 증권·투신사들의 자금동원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체부실계열사지원은 물론 다른 재벌기업과도 상호 불법지원함으로써 부실계열사매각 등재벌개혁을 지연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부실계열사라도 마음대로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으므로 공정한 경쟁풍토의 시장경제가 이뤄지기 힘들게 된다.게다가 이러한 금융자본 독점현상은 소수재벌그룹에 의한 경제력집중을심화시켜 또다른 위기를 부를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재벌금융사 부당행위가 전체 국가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영향을 고려,임직원 징계는 몇달동안의 업무집행정지 수준에 그치지 말고 상당기간 금융업종사를 전면금지하는 방향으로 강화해야할 것임을 강조한다. 현행 징계수준은 실효를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오히려 그룹에 대한 충성심만 확인해줄 뿐이란 지적이 많다.이와 함께 5대재벌의 은행주식보유상한이 4%로 제한돼 있는 것처럼 현재 무한보유를 허용하고 있는 증권·투신등 비(非)은행 제2 금융권기관의 주식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보유상한선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이밖에 재벌금융사의 불법·부당자금거래를 막기위해 계좌추적권을 통한 금융감독기능을 강화,자금운용의 투명성을높이는 등 다각적인 보완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 국민회의“잔류 당직자 불이익 없다”

    국민회의 지도부가 ‘새천년 민주신당’창당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잔류 중·하위 당직자들의 불만해소에 나섰다.잔류 당직자들의 신분 불안감이 도를넘었다는 판단에서다.국민회의 지도부는 “어떠한 차별도 없도록 하겠다”며이들 및 사무처 요원들을 진정시켰다. 한화갑(韓和甲)총장은 3일 오전 전체당직자회의에서 “내년 1월 20일 신당창당에는 우리의 역할을 그대로 지닌 채 참여하게 될 것”면서 “신당 창당때까지 신당준비위의 총무위원장과 협의해서 인력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신당에 나가 있는 당직자와 잔류 당직자 간엔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내년 총선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충성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면서 “모든 것을 지도부에 맡기고 당무에 열중해달라”고 다독였다. 그는 이어 사무처 요원들에 대한 신상필벌과 전문성 제고를 강조했다.“정당에도 기업경영 마인드를 도입해 엄격한 평가에 의해 당무 참여기회를 결정할 것”이라면서 “여러분도 시대변화에 맞춰 전문성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날 회의에서 사무처 당직자들은 당지도부에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했다.최근 잇따른 악재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대해 한총장은 “이제까지는 당에 정보가 없어 뒷마무리만 하는 형국이었으나 청와대에 한광옥(韓光玉)비서실장과 남궁진(南宮鎭)정무수석이 들어간 만큼 청와대와 당간에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이뤄질 것”이라면서 “이제는 뒷북만 치지 않고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물론 선제공격도 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주현진기자 jhj@
  • [양승현의 취재수첩] “저는 죄인입니다”

    박주선(朴柱宣)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26일 오전 출입기자실에 들러 사퇴성명서를 돌렸다.성명서에서 스스로를 “대통령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표현했다.기자들이 잠시 자리(청와대 수석들의 브리핑을 위해 기자실 중앙에마련된 의자)에 앉기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옷로비 사건을 명쾌하게 규명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친 사람이…” 그는 기자들의 쇄도하는 질문에도 서서 짤막하게 대답했다.김태정(金泰政)전 법무장관에게 사직동팀의 최종보고서를 보낸 경위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사직동팀의 내사를 통해 진상이 규명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참고차원에서 보낸 것이다.현직총장으로서 부인이 관련됐고,음해성 루머가 돌아다닌 상황에서 본인도 실체적 진실을 알고 싶어해 그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대통령 보고문서를 (김 전장관에게)보낸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 박비서관은 “이제 특검수사를 지켜보자”는 말을 끝으로 기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돌아가며 악수를 하다 “개인적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영광스럽게 일했다”고했다.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박주선 비서관.그는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일하다 새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공직기강 확립과 사정업무를 기획하는 중책을 맡았다.그는 담백한 사람으로 공사(公私)를 구분하려고 노력한 충성심 강한 검사였다는게 주위의 평이었다.취임초 친구들이 모아준 300만원을 “청와대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되돌려준 것은 그의 신중한 처신을 엿보게 하는 일화중 하나다. 그는 상황이 어려우면 “내가 어떻게 그 얘기하느냐”고 비켜갔으면 갔지,거짓말은 하지 않았다.자신에게 ‘옷로비 사건 축소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있던 지난 25일에도 김 전 법무장관 부부의 자진출두를 자신이 요청했다고털어놨다.“진실규명을 위해서다.그 이상은 없다” 지난 79년 서울지검 검사로 출발한 그는 김 전 장관을 7차례나 직속상관으로 모셨다고 한다.그는 언젠가 사직동팀 내사단계에서 김총장이 부인 연정희(延貞姬)씨에 대한 조사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네가 어떻게 나에게 한마디 귀띔도 없이 그럴수가 있느냐. 일국의 검찰총장이 봐달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러느냐”는 항의를 받고 인간적인 고뇌를 수없이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이따금 진실규명과 동떨어진 정치권의 공세와 언론의 보도에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그의 분노가 다시 검사의 길을 걷게 할지, 아니면 정치인으로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할지 주목된다.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직업공무원제 비효율·폐쇄적”

    현행 직업공무원제가 계급제로 인해 안정성과 충성심 및 권위는 확보했지만 폐쇄성과 비효율성을 감수하고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은 1일 대한상공회의소 상의클럽에서 중앙인사위원회 창립을 기념해 열린 한국행정학회 특별세미나에서 최병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실적주의 인사행정의 재검토’라는 주제발표에서 지적했다. 최책임연구원은 공무원들의 정년보장도 직업공무원제의 확립에 기여할 수있으나 공무원들에게 무사안일을 확산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고 주장했다. 최연구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능력한 공직자의 퇴출▲민간 전문인력 충원 ▲엽관(獵官)제적 요소의 부분적 확대 ▲공직 외부의직무훈련 이수 등 실적주의의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정길 서울대교수는 ‘신국정관리와 인사 개혁의 방향’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21세기를 대비한 인사개혁은 새 국정과제와 행정과제를 정립하고,이에 필요한 엘리트관료들의 능력과 자질을 판단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주장했다. ‘개방형 임용제도의 허실’이라는 주제를 발표한 고려대 이선우교수는 “정부조직법에는 3급 이상 직위 중 20%를 개방직으로 허용하고 있으나 산출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면서 “직무분석에 따라 개방형 직위를 재선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세미나 개회식에 참석,치사를 통해 “중앙인사위 활동으로 공직사회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김총리는 또 “정부의 기구와 인력을 감축하는 이른바 하드웨어적 개혁은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아직도 인사제도와 관행의 개혁같은 소프트웨어 개혁은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홍성추기자 sch8@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처음 대한매일에서 원고청탁을 해올 때,재미있는 주제로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주제’ 자체가 ‘국민의 정부’가하는 일들을 국민에게 바르게 알림으로써 국민의 이해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되어,그런 내용으로 두 차례에 걸쳐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이번만은 생활 주변의 소재로 써달라는 청탁이지만,사실 나는 하는 일이나생활 자체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재미있지 못한 사람이다.9년여째 새벽에 집을 나서면 자정께 들어가고 휴일이나 주말,휴가는 생각지도 않은 지 오래다.이게 내 ‘생활’이고 ‘재미’다.그래도 무척다행인 것은 착한 아내가 그 생활을 이해하고 보살펴주며,두 딸이 아주 건전하고 바른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신나게 일할 때는 역시 기자들과 소주라도 앞에 두고 국정에 대한 설명을 할 때이다.나는 사실상 9년째 김대중대통령의 ‘입’노릇을 해왔다.야당총재일 때는 우리가 집권해야할 당위성에 대해,집권 후에는 우리 정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쉬지않고 설명하고 있다.나는 일요일에도 출근한다.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론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다.그러다 보니 1주일중 하루를 제외하고는 점심·저녁시간은 언론인과 함께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나는 국가에서 공보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정열과 충성심이 중요하며,부지런히 언론인을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때로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속담에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정부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국민이 알아야 하고,국민의 비판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학자나 사상가는 책 한 권이 안 팔리더라도 학문과 사상을 위해 책을 쓸수 있다.그러나 모든 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정치·시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 등 모든 운동은 국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다.물론,비판도 겸허히 수용하여 정책에 반영해야 하고,그럴 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보업무는 정부의 시책을 열심히 알리고,여론을 듣고 분석해서 상급자에게 보고하여,정책을 세우고 홍보해야 하는 일이다.구슬을 꿰는 업무다.나는 오늘도 구슬을 꿰려고 노력한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3)박양호의 우화소설 미친새

    유신 후반기의 억압장치였던 긴급조치 9호는 ‘미친 새’의 작가에게 “독재는 인정한다.또 그렇게 쓸 수도 있다.그런데 그 독재를 없애는 방법이 무엇이냐”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우화소설인 이상 문학작품 그 자체를 심판하기에는 부담을 느낀 수사기관이 정부 전복을 위한 조직사건으로 몰아가고자 시도했으나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던 게 이 작가의 주된 석방 이유였을것이다. ‘미친 새’는 닭 사육장을 무대로 삼는다.“사육사가 엄격히 정해 놓은 규율에 따라서” 행동하는 닭들은 철조망에 갇혀,주는 먹이로 자라다가 언젠가는 통닭집으로 끌려가는 신세이다.작가는 닭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해 준다. “…주는대로 먹고,살라는 곳에서 살고,낳으라는 만큼의 새끼를 까고,드시겠다는 만큼 아낌없이 몸을 바치고,조용하라,하면 조용하고,떠들라,명령하면싫어도 떠들고,웃음과 슬픔과 기쁨은 이미 아득한 옛날에 잊어버린 닭이라이겁니다.옛날을 생각하며,풀 많고,물 많고 한없이 자유스러웠던 전설 속의고향을 그리워 하며,이리 가라면 짹소리 못하고 이리 가고,목포 가라면 또수긋수긋이 거기 가면서 속절없이 세월만 보내고,복종과 충성심이 강하고,맹목적으로 속기 잘하는 개떡같은 닭새끼의 무리랍니다.” 이런 울타리 속에 갇힌 닭들에게 사육사는 “바깥 세상은 무서워.나가기만하면 당장 삵괭이한테 물려 죽을 거야.너희들을 가두어 놓는 것은 다 너희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살게하기 위해서야”라는 복음주의를 설파해 대며,닭들은 긴가 민가 하면서도 별 뾰죽한 수가 없기에 숙명적인 삶을 수용한다.그들은 수시로 저항력의 상징인 발톱을 잘리면서 개의 감시 아래 사육사의 소망대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는 사라지곤 한다. 이런 무리 속으로 뛰어든 미친 닭(곧 자칭 새라기에 미친 닭이 된다)은 처음엔 다른 닭들로부터 온갖 잔혹한 학대를 받지만 “나는 닭이 아니라 새다”며,“우리들에게는 일찍이 날개가 있었고,지금도 있다.그러나 사육사들이갖다붙인 갖가지 이유에 의해서 날개를 사용하는 데 대한 규칙이 까다로워지고,또한 은근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요되어온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우리는 항용 우리 자신에게 과연 날개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또는 그것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하고 의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고 깨우쳐 준다.이어 그는 닭장의 왕초를 향하여 “당신도 샙니다”는 신념을 심어주어 드디어 둘은 철조망과 그물을 벗어나려는 듯이 날기 연습에 열중한다. 미친 새는 왕초에게 자신이 겪었던 비참한 체험이었던 양계장,밤낮도 없이전깃불 아래 갇혀 계속 알만 낳아야만 했던 곳에서 탈출하고자 자신의 알을쪼아대다가 주둥이를 뭉퉁하게 잘려 쫓겨나 이곳으로 오게된 경위를 설명해준다.그리곤 이곳의 닭들도 알을 낳을 수 있게되면 바로 그 전깃불 밑으로가게 되는데,그런 꼴을 안 당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새가 되어 날아 도망치는 길 뿐이며,그걸 위해서라면 차라리 굶어도 좋다는 신념을 전파했다. 감동 받은 왕초와 미친 새는 날기 연습에 열중하다가 너무 몸통이 무겁다고 느껴 이튿날부터 단식을 단행하게 되었는데,그게 빌미가 되어 둘은 처참하게 살해 당하고 말았다.다른 닭들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조상 대대로물려받은 비굴한 전통”을 고수하면서 침묵 속에 “서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모이통에 접근해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친 듯이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포만 속에서 누군가 “우린 새가 아니고 닭이야”란 독백으로 끝나는 이 우화는 유신 독재의 상황을 통열하게 풍자해 준 문제작이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忠犬 상징 ‘임실 오수개’ 캐릭터로 관광상품화

    충견(忠犬)의 상징인 ‘임실 오수 개’가 캐릭터로 개발돼 상품화된다. 전북 임실군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오수 개’의 충성심을 널리 알리고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이를 캐릭터로 개발하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군은 오수 개의 이름을 ‘누리(nuri)’로 결정한데 이어 이달중으로 서울의캐릭터 전문개발회사인 ‘애니멀 툰씨네’측에 개발을 의뢰하기로 했다. 군은 오는 10월쯤 이 개의 캐릭터가 나오면 임실지역에서 생산되는 쌀과 고추,담뱃대 등 각종 농특산물과 수건,저금통,장난감 등 팬시용품 등에 사용해상품화할 예정이다. 군은 특히 공문서도 캐릭터를 사용해 임실군이 충견의 고장임을 널리 알릴방침이다. 한편 ‘임실 오수 개’는 불이 난 풀밭에서 술에 취해 잠 자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물을 묻혀와 주인이 잠들어 있는 풀밭 주변을 뒹굴어주인은 살리고 자신은 탈진해 끝내 숨진 충견으로 고려시대 학자인 최자가쓴 ‘보한집’에 기록돼 있다. 임실 조승진기자 redtrain@
  • 고시촌 산책-전문직 考試 도전 섣부른 결정 말길

    “의사인데요.사법시험을 2년째 준비하고 있는데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요?”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어떤 의사가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상담을해 왔다.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다는 게 이유다.그는 합격하고도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의사출신으로서 불이익은 없는지,경제적인 문제는 없는지 등을상담해 왔다.그만큼 장래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너나없는 얘기다.직장인들도 마찬가지이다.늦기전에 자격증을 따려는 이런저런 문의가 잦다.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자는 것이다.몸은 회사에 있지만마음은 이미 ‘자격증’을 향해 있다. 의사·경찰·회계사·공무원 같은 전문직 출신의 사법시험 합격이 늘고 있는 것은 요즘들어 나타난 새로운 경향이다.전문직 출신들의 법조계 진출은법조계뿐 아니라 전문직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더구나적성에 맞지 않아 뒤늦게라도 인생의 새 길을 찾으려는 용기와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도전에 비해 성공하는 경우가 너무나 미미하다는 현실을 생각하면섣불리 결정할 일은 아니다.더우기너나없이 고시에 뛰어든다면 어떻게 될것인가.그것은 분명 ‘고시과열’이 될 것이다.고시가 과열된다면 엄청난 부작용과 사회적인 왜곡현상을 불러올 것은 뻔한 일이다.사법계의 전문직 확충을 뛰어 넘어,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릴 수도 있을 것이다.지금까지우리나라의 경쟁력을 떠받쳐온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그 공백은 어떻게 메울 것인가. 과열에 가까운 고시열풍을 지켜보면서 일본의 장인제도를 떠올리게 된다.우동집이나 초밥(스시)집 같은 자그마한 가게를 몇 대째 가업(家業)으로 물려오면서 전문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일본의 얘기는 부럽게 느껴진다.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하고,대접을 받는 성숙된 사회 분위기가 아름답게 비쳐진다.고시도 좋지만 자격증 하나만으로 평생을 보장받는 시대는 이제는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할 것같다.
  • 국민회의 신임당직자 프로필

    ♣ 林采正 정책위의장 재야출신으로 개혁성향이 강한 편이다.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난 뒤 79년 10·26사태 후 ‘통일주체대의원 대통령선거 반대 국민회의’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재야에서 활동.14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을구에 도전해처음에는 낙선했으나 재검표에서 뒤집어 금배지를 달았다.부인 기영남(奇永男·57)씨와 1남1녀. ▲전남 나주·58세 ▲고려대 법대 ▲동아일보 기자 ▲평민연 부이사장 ▲민주개혁 정치모임 이사장 ▲국민회의 홍보위원장 ▲14·15대 의원♣ 鄭均桓 총재특보단장 정권교체 후 1년4개월간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초보 여당’살림을 무난히꾸려온 3선의원.정국의 고비마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설득력과 협상력을 잘보여줬다는 것이 야당인사들의 평이다. 총재특보단장에 임명되면서 DJ의 신임을 다시 입증한 셈.내무통으로 총장시절 단행본인 ‘자치경찰’과 ‘경찰개혁’ 등을 펴내 전문성도 인정받았다. 부인 이옥자(李玉子·47)씨와 1녀. ▲전북 고창·56세 ▲성균관대 정외과 ▲13·14·15대의원 ▲연청 중앙회장▲지방자치위원장 ▲사무총장♣ 李圭正 지방자치위원장 11대 때 민주당 이기택총재의 공천으로 원내에 진출한 뒤 세번의 고배 끝에 15대 때 배지를 단 재선의원.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지난해 9월 한나라당에서 국민회의로 당적을 옮겼다.95년 ‘6·27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울산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심완구후보에게 패하기도 했다.민주당 정책위의장과 원내총무,사무총장을 역임했다.부인 이두이(李斗伊·53)씨와 1남1녀. ▲경남 울산·58세 ▲고려대 정외과 ▲근로농민당 총재 ▲국회 환경포럼 총무 ▲국민회의 울산시지부장♣ 서한샘 홍보위원장 대학 입시생들에게는 ‘한샘’시리즈로 잘 알려진 학원강사 출신.10년간의교사 및 학원강사 경력을 바탕으로 지난 80년 한샘출판사를 만들어 ‘한샘국어’ 등 참고서를 히트시켰다.학원강사 시절 ‘밑줄 쫙’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명강의를 했다.93년 교육전문 케이블TV인 다솜방송을 세웠다.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됐으나 지난해 9월 국민회의로 옮겼다.부인 서화자(徐花子·55)씨와 1남 1녀. ▲인천·55세 ▲서울사대 ▲다솜방송 회장 ▲국민회의 부총무 ▲15대의원♣ 鄭泳薰 연수원장 교통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관료출신의 재선의원으로 합리적이고 치밀하다는 평.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정치감각과 판단력을 인정받아 초선 때민자당 민원실장,국제협력위원장 등 중앙당직을 맡았다. 지난해 6월 한나라당을 탈당,국민회의로 옮겨 당 교통위원장을 역임했다.교통부 국장 시절 대학출강을 하는등 학구파로,최근까지도 대학특강을 자주 나가고 있다.부인 문태정(文泰廷·63)씨와 1남2녀. ▲경기 광주·66세 ▲연세대 법대 ▲하남장학재단이사장 ▲IPU대표 ▲14·15대의원 ▲신한국당 제 3정조위원장 ▲국민회의 당무위원♣ 金玉斗 총재비서실장 33년간 ‘DJ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한 동교동 가신그룹의 재선의원.지난 65년 김대중대통령 수행비서로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은 뒤 두차례의 옥고와함께 고문 등 혹독한 시련기도 있었다.김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존경심이 남다르며 ‘경호’에 일가견이 있는 의리파.종합적인 정국분석보다는 DJ의 의중에 포커스를더 맞춘다는 평.지방자치위원장을 맡아 당과 지방정부 사이의가교역할을 무난히 수행.부인 윤영자(尹永子·52)씨와 1남1녀. ▲전남 장흥·61세 ▲한양대 공대 ▲민주당 사무부총장,원내부총무 ▲14·15대 의원
  • [굄돌] 우상파괴는 최고의 ‘오락’

    오늘날 우리가 오랜 세월 인정해 오던 수많은 우상들이 파괴되고 있다.우리들의 삶을 지탱해 주던 정치·사업·문화적 기반이 썩은 빵처럼 부스러지고있는 것이다.성실성·인내심·믿음 같은 것은 시대착오적인,이상한 것으로보이기 시작했다.기업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직원들에 대한 배려라고는없는 탐욕스런 조직으로 바뀌어 버렸다.우상파괴는 정부·기업·결혼·종교·교육·의학·광고·소매업·영웅,그리고 심지어는 가족까지 우리 사회를지탱해 왔던 중심 세력 모두에 걸쳐서 이뤄지고 있다. 페이스 팝콘과 리스 마리골드는 ‘클리킹’(Clicking)에서 21세기에 대중이 어떻게 살게 될 지를 17가지의 트렌드로 설명하고 있다.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상파괴’라는 트렌드다.정보가 넘치는 이 시대에,대중에게는 우상파괴야말로 최고의 오락이다.대중이 우상파괴를 즐기는 이 같은 습관은 출판시장의 판도를 바꿔놓고 있다.금년 상반기 대형서점 베스트집계에서 각기 1위를 차지한 책은 두 일본인이 쓴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케하라 마모루)과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이다. 한국에서 26년을 살아온 한 일본인의 체험기인 ‘맞아 죽을…’은 지난해를 반성하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시점에 출간한 절묘한 타이밍이 돋보였고,사지가 없는 채로 태어났지만 장애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일깨워주는 ‘오체불만족’은 한 TV 다큐멘터리에 그의 일화가 소개되면서 크게 팔려나갔지만 두 책 모두 기존의 우상과 상식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기에 지난 5월초 출간돼 두 달만에 이미 10만 부가 판매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도 우리 사회의 첨예한 뇌관인 유교문화의 부정적인 면을 도발적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며 강준만 교수의‘인물과 사상’의 안정적 지속이나 ‘딴지일보’(김어준)의 제도권 진입도이와 무관치 않다. 이같은 우상파괴는 우리가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존의 사고방식과생활방식을 지배해온 시스템과 제도의 실패를 뜻한다.그러나 우상파괴는 결코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그것은 효과적인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려는 대중의 열망이다.이제 어느 누구도 이같은 열망을 막을 수 없다.이같은 성향을 놓고 대중이 냉소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지식인들도 결코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 국민의 정부 2기내각 출범-새얼굴 14人 프로필

    ‘제2기 내각은 우리에게 맡겨라’.‘5·24’ 개각으로 김대중(金大中)정부제2기 내각의 진용(陣容)이 갖춰졌다.기존 국무위원 가운데 11명이 바뀌었다.신설된 기획예산처장관도 국무위원에 합류했다.장관급인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과 차관급인 국정홍보처장도 첫선을 보였다.신임 장관들은 저마다 맡은분야에서 전문성과 참신성·개혁성을 인정받아 내각에서의 역할이 주목되고있다.내각에 그대로 남은 6명의 국무위원들과는 신·구(新·舊) 조화를 꾀할 것으로 기대된다.새 내각의 면면을 소개한다. ■康奉均 재정경제 행정고시 6회로 옛 경제기획원에서 관리를 시작한 정통 기획원 출신 관료. 경제정책 기획과 조정에 탁월한 능력으로 초기 새 정부의 경제개혁정책을 청와대에서 뒷받침했다.기획원 핵심요직인 경제기획국장과 차관보를 각각 4년씩 장수하는 등 5차례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했다.예산담당 과장과 국장으로 10년 근무했다.총리실 행정조정실장 재직때는 사회·경제정책을 매끄럽게 조정했다.업무처리에서 적당주의를 인정치 않아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편.미국 윌리엄스 칼리지 경제학석사,한양대 경제학박사 학위를 갖고있다.부인 서혜원(徐惠源·53)씨와 1남1녀. ■金泰政 법무 호방한 성격에 의협심이 강하고 뒤끝이 없는 보스형 인물.친화력이 뛰어나지인(知人)이 많고 부하들로부터 신망도 두텁다. 형광펜을 그어가며 보고서를 읽을 정도로 꼼꼼한 일면도 있다는 평. 문민정부 당시인 97년 검찰총장에 오른 뒤,‘DJ비자금 사건’ 수사를 유 보했다. 잔정이 많아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 2월 심재륜고검장 항명파동 당시 일선 검사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특유의 뚝심으로 극복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바둑을 즐긴다.부인 연정희(延貞姬·50)씨와 3녀. ■朴智元 문화관광 청와대대변인을 떠나는 고별사에서 “어디에 있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모신 영광을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충성심이 강하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정계복귀때는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기도 했다. 야당 총재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김대통령과 아침을 함께한 ‘측근중 측근’으로 8년동안 ‘김대통령의 입’으로 활약했다. 오랜 대변인생활로 달인(達人)의 경지에 올랐다는 주위의 평이다.언론계에지인도 많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뉴욕한인회장과 미주한인총연합회장을 지냈다.부인 이선자(李善子·56)씨와 2녀. ■孫 淑 환경 현 정부 출범 이후 입각이나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돼온 DJ인맥의 대표적 문화예술인. 지난 2월 연극 ‘어머니’의 주연으로 20년간 출연키로 정동극장과 계약하는 등 100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다.MBC 라디오 ‘여성시대’도 9년째 진행중. 93년 환경운동연합 창립시 지도위원을 맡은 뒤 지난 2월 공동대표로 추대됐다. 다정다감한 성격에 눈물이 많아 별명이 ‘수도꼭지’.‘무엇이 이토록 나를’등 3편의 책도 냈다. 고려대 연극반 선배인 연극배우 겸 탤런트 김성옥(金聲玉·64)씨와 3녀. ■陳 稔 기획예산 업무 장악력과 조정능력이 뛰어난 정통 경제관료.리더십과 정치감각을 겸비했다는 평.누구를 만나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인간적 매력이 있으며 논리가정연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추진력은 있으나 결론을 정해놓고 오락가락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정희(朴正熙)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공무원 중에서 저렇게 똑똑한 사람은 처음’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다. 단신이나 소주를 좋아하는 소탈한 성격.성신여대 음대학장인 서인정(徐仁貞·52)씨와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장남 등 2남이 있다. ■趙成台 국방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 꼼꼼한 업무 스타일이다. 정책통답게 영관장교 시절부터 전략기획 및 군사작전 분야에서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갖췄으며 조직장악력과 업무추진력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94년 정책기획관으로 있으면서 3억달러 규모의 한·미 방위비 분담협상을총괄하면서 500만달러를 깎기 위해 협상결렬 위기까지 몰고 간 일화를 남겼다. 외아들은 육사를 거쳐 대위로 복무중이다. 틈날 때마다 독서와 낚시를 즐기며 부인 이영숙(李永淑·53)씨와의 사이에1남1녀. ■鄭德龜 산업자원 재무부 재산세제과장과 증권정책과장,주영 재무관,경제협력국장,국제금융국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금융·세제·외환분야 전문가. 부가가치세 도입시 실무를 맡아 정착시켰고 대러 경협차관 협상도 주도했다.특히 97년말 IMF와의 자금지원 협상과 98년초 218억달러의 단기외채 만기연장,40억달러의 외평채 발행에 성공하는 등 환란을 수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추진력과 판단력,담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지만 한편으로는 부하직원들을지나치게 엄하게 대한다는 얘기도 있다.부인 이명덕(李明德·49)씨와 2남. ■李相龍 노동 9급 서기보로 공직을 시작,38년만에 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내무관료.강원도와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노동부 관련업무를 직접 다룬 적은 없으나 일선 시·도에서 재정·세무업무를 담당했다.대통령비서실과 건설부 차관을 지내면서 실업문제에 나름대로식견을 갖췄다는 평가다.지난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뒤,자민련 한호선(韓灝善)후보와의 후보단일화 논란 끝에 무소속으로 출마,낙선했다. 업무처리가 꼼꼼하면서도 부하들에게 자상하다는 평이다.부인 윤명규(尹明奎·60)씨와 2남1녀. ■金光雄 중앙인사위 방송을 통해 낯이 익은 행정학 교수.깔끔한 외모에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일품이다.두뇌회전도 빠르고 합리적이지만 다소 깐깐한 성격이란 평가도 받는다.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에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실행위원장을 맡아행정조직 축소를 주도했다. 제 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해 일찌감치 입각 대상자로 꼽혀왔다. 지난해 9월에는 서울대 22대 총장후보로도 거론됐다.취미는 등산이며 술도즐기는 편이다. 부인 유정희(柳貞嬉·57)씨와 1남1녀. ■林東源 통일 통일·외교·안보분야의 ‘3박자’전문가.외교안보연구원장,통일원차관,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거치는 등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 90년 1차 남북고위급회담부터 대표를 맡은 이래 일관되게 대북 포용론을 옹호해왔다.지난 95년부터 아태평화재단에 관여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북한 핵위협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포괄적 접근’구상을 기획,집행해왔다.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5공 출범과 함께 외교관으로 변신했으나 군인체취가없고,부드러운 성품이라는 평. 부인 양창균(梁昌均·60)씨와 3남. ■金德中 교육 개혁적 성향에 추진력이 강하다.현 정부 들어 대통령자문기구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온데다 김영삼(金泳三)정부때도 교육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아주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학부제와 교수연봉제 등을 과감히 도입,대학개혁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그같은 개혁성향이 발탁 배경이라는 후문이다.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회장의 친형으로 서강대 교수(경제학)를 정년퇴직한 뒤,대우그룹 계열사 사장을 맡기도 했다.골프 실력도 수준급이며 부인 박용주(朴容珠·60)씨와 1남2녀. ■車興奉 보건복지 일에 적극적이고 토론문화에 익숙한데다 리더십까지 갖췄다.지난 2월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총체적 난맥상을 조기 수습,제 궤도를 찾도록 했다. 사회보험의 두 축인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을 가장 잘 아는 사회복지학계의대표적 개혁론자로 꼽힌다.지난해 지역의보조합과 공무원·교직원의보조합의 통합에 따른 단일보험료 부과체계를 개발했다.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절청와대비서실 행정관으로 관가와 첫 인연을 맺었으며,83년 보험제도과장 재직때 의보통합 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하는 아픔도 겪었다.부인 송외숙(宋外淑·50)씨와 1남1녀. ■李建春 건설교통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이 트레이드마크.정통세무관료로서의 전문성 못지않게 부하직원들에게는 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자상한 선배의 덕성을 갖췄다.외부에도 지인들이 많다.이러한 성격 탓에 ‘정치적’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국세청장에 오른뒤 납세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무서 조직을 세목중심에서 기능중심으로 재편하는 등 강도높은 세정개혁으로 청와대로부터 높은점수를 받았다. 별명은 호남형의 외모와는 동떨어진 ‘불곰’.지난 80년대 후반 부동산 투기 억제시책을 강력히 밀어붙이면서 얻었다.부인 문영인(文玲仁·56)씨와 2남. ■吳弘根 국정홍보 지난 88년 군을 비판한 칼럼을 썼다가 정보사 요원들에게 테러를 당한 ‘정보사 테러사건’으로 잘 알려진 30년 경력의 언론인.칼럼이나 사설 등으로개혁적인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시경 출입기자때 신세지기 싫다며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 일화를 남겼으며 후배들을 잘 챙겼다. 원칙을 지나치게 고집하고 주관이 강해 주위사람들과 가끔 마찰을 빚기도 했다.평소 책을 많이 읽으며 자기관리에 엄격하다.취미는 바둑.부인 송명견(宋明·54)씨와 2남. [알 림]‘제2공화국과 張勉'연재물 26회는 기사 넘쳐 쉽니다.
  • 국민의 정부 2기내각 출범-정치권 반응

    여야는 24일 개각과 관련,엇갈린 반응을 보였다.국민회의는 개혁지향적 인사로 구성됐다며 환영했다.자민련은 공동정부 지분 ‘축소’에 다소 실망하는 분위기다.한나라당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기준이 된 ‘약체내각’이라고 혹평했다. 국민회의는 이번 개각으로 개혁작업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 논평에서 “개혁적이고 행정전문가로 짜인 이번 개각으로개혁의 기조가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이어 “행정부에 참여했던 당 인사의 복귀로 당력이 한층 보강될 것”으로 기대했다. 김영배(金令培)총재권한대행은 “정치성이 엷어진 실무형 내각”이라고 평하고 “공동여당 지분과 관계없이 능력 본위로 인선한데 대해 국민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민련은 실무내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공동 정부 지분’파기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이양희(李良熙)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실무내각을 통해 국정을 철저히 챙기려는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인사”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민련 내각 몫이 줄어든데 대해상반된 반응이 나왔다.일부 충청권의원들은 “지분을 찾아야 한다”며 아쉬움을 표시한 반면 일각에서는 “김종필(金鍾泌)총리가 장관 몇석을 포기한 대신 내각제 관철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나라당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만이 등용의 척도가 됐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특히 김태정(金泰政)법무장관의 임명에 대해 강도 높은 공세를 폈다.안택수(安澤秀)대변인은 논평에서 “국회에서 불신임 표결까지 받았던 검찰총장을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특수 목적용 인선”이라고 비난했다.이어 “일부 각료는 전문성이 결여돼 효율적인 직무수행이걱정된다”면서 孫淑환경장관의 입각을 꼬집었다.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은 지역 안배를 문제 삼았고 이부영(李富榮)총무는“김법무장관의 임명은 야당에 대한 사정 의지의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최광숙기자 bori@
  • [외언내언] 5·1절과 북한근로자

    5월 1일은 국제노동절이다.국제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근무제 실시를 주장하면서 벌인 파업을 기념하고 세계 노동자 권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제정됐다.북한은 해마다 국제노동절(5·1절)을 공휴일로 정하고 근로자들의 사기앙양을 위한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올해에도 5·1절을 앞두고 각종 선전매체를 통해 북한의 노동계급은 먹고,입고,쓰고,사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과 혜택을 받고 있으며 세상에 부러울 것이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이는 오직 북한 노동계급만이 지니는 최대의 영광이라는 선전을 되풀이하고 있다.그러나 북한내 각급 사회계층의 주도세력인 노동자들이 처하고 있는 실상은 그네들의 선전과는 판이한 상황이다.그동안 북한의 노동자들은 독재정치의 희생물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허울좋은간판 아래 기계 같은 노동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더욱이 북한의 노동실태는 철저한 불평등권리와 의무체계를 부과하고 있으며 직업선택의자유는 물론 강제노동 폐지조약과 결사의 자유를 포함해서 국제노동기구의 160개 항목에 이르는 노동기준 가운데 어느것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북한근로자들은 경제난으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으며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만을 강요받고 있어 사회일탈현상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노동자의 지상낙원을 약속했던 북한땅의 오늘날 근로자 실태는 노동자의 기본적 생존권마저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어 사회주의 체제의 허구성과 노동정책의 기만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북한 근로자의 실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남한 근로자들에 대해 파업과 반정부 투쟁을선동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망각한 자가당착이며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4월 23일자 노동신문은 논평을 통해 민주노총의 투쟁은 “괴뢰 통치패들에대한 쌓이고 맺힌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라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사슬을 끊고 임금인상을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여나가야 한다”고 선동했다. 5·1절을 맞아 북한이 인식해야 할 과제는 근로자들에게 노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이다.노동의 참된 가치인식이야말로 북한 근로자들이 참다운인간적 존재양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북한 근로자들이 피땀흘려 노력한만큼 인간적 행복이 보장될 때 비로소 5·1절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될것이다. 張淸洙논설위원
  • [외언내언] 북한 군사우위정책 /장청수 논설위원

    4월25일은 북한 인민군 창건 67주년 기념일이다.북한은 48년 2월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당초 이날을 창군일로 기념해 오다가 지난 78년부터 김일성(金日成)이 만주에서 조직했다는 반일인민유격대 결성일인 32년 4월25일로 바꿨다.알려진대로 북한 인민군은 6·25동족상잔을 일으킨 주력군으로 또는 북한 사회주의 존립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군의 위상과 역할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金正日)체제 출범이후에도 지속돼 무소불위를 자랑하고 있다.김정일체제 출범 이후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이며 당’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당우위에서 군사우위정책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체제고수를 위한 군대의 중요성을 거듭강조하는 등 북한군의 제고된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북의 이같은 군사우위정책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으며 김일성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해 군장성 79명을 대거 승진시킨 것은군사우위성을 잘 보여준 대목이다.북한의 이같은 군사중시 정책은 김정일이군에대한 지속적 관심과 배려를 표명함으로써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위축된군의 사기진작을 통해 절대적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군부에 대한 카리스마가 약한 김정일로서는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통치 전략으로 이해된다. 김정일체제 출범과 맞물린 북의 군사우위정책은 과다한 군사유지비로 북한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북한 군부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할 경우 한반도 안보에 위기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도 군사우위정책은 포기돼야 한다.총칼로 유지되는 정권은 총칼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은 세계사적 교훈이다.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도 결국 비극적 종말을 고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며 이는역사의 필연이다.현 시점에서 북한당국이 선택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무리한 군사우위정책을 포기하고 남북당국간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을 제도화하는 일이다.그리고 과다한 군사비 지출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중단하고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그 길이 바로 북한의 체제말기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특별기고] 공직부패 방지책이 성공하려면

    국무총리실에서는 6월까지 공직부패 방지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할예정이라고 한다.그 기초작업으로 10개의 전문 연구기관들에게 연구용역을맡겨 부패원인을 분석하고 방지대책의 시안을 작성하게 하였다.지난 12∼13일 한국행정학회가 주최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연구의 중간발표가 있었는데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과거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 환수,서정쇄신,숙정,사회정화,공직자 사정 등의 캐치프레이즈하에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공무원들을 대규모로해직시키면서 부패 척결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곤 했다.특히 군사정권처럼 정통성이 약한 정부일수록 사회정의의 구현과 부패 척결을 강도 높게 표방했다.거기에는 대규모 사정을 통해 통치권을 과시하고 공직자들의 새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집권 초에 서슬이 시퍼렇게 추진되던 공직부패 청산작업은 시간이지나면서 용두사미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그 실패요인은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무엇보다도 새로 집권한 정치지도자 및 고위공직자들과 경제계를비롯한 이권관계자들 사이에 새로운 유착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집권층이 오히려 대규모 부정과 비리에 연루됨으로써 초기의 사정 의지가 실종되고 부패 척결이라는 구호는 일반공직자나 국민으로부터 불신과 냉소를 받는 상태에 이르곤 하였다. 다음으로 대부분의 사정활동이 외부에 노출된 부패행위에 대한 단속과 처벌 위주로 전개되어 한계가 있었다.종합적인 진단에 의한 제도개선과 사전 예방적 차원의 활동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정부기관의 일방적이고 하향적인 수사나 감사활동에만 의존했고 시민들의 참여나 감시를 유도하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국무총리실에서 공직부패 방지방안을 수립하는 방식은 높이 평가할만한 측면이 있다.우선 부패가 심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식품위생,환경,건설,주택건축,경찰,세무 등 분야별로 부패요인과 방지대책에 대하여 관련 분야의 민간 전문연구기관으로 하여금 시안을 제시하게 했다는 점이다.교육계,법조계,언론계 등이 빠져 있긴 하지만 종래의 총론적이고 적발 위주였던 대책보다는 효과적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그리고 사후 처벌보다는 사전 예방에 중점을 두고 문제가 있는 법령이나 행정관행 등 제도개선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점,시민단체 역할을 강화하고 의식개혁을 위한 교육·홍보활동을 확대하겠다는 방향 등도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통치자를 비롯한 집권층의 강력한 의지와 솔선수범이다.국민의 정부는 정통성이 확보된 정권으로서 부패 척결을 정략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없고 이제 경제위기도 탈출한 상태이므로 부패방지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때라고 본다.제2건국운동이 총망라적이고 초점이 불분명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부패방지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정치적 저의를 의심받지 않고 국민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을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는 행정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공무원들의 재량권을 줄이고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강화하여 축재형 부패를 철저히 예방해야한다.그리고 부패방지법을 제정하여 공직사회의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고 시민들의 감시활동을 제도화해야 하며,공직자 복무강령을 구체화하여 부정·비리의 개념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부패한 공직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리는 한편 대부분의 정직한 공직자들이 부정의 유혹을 외면할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하여 생계를 보장하고 예산에서지급하는 활동경비를 현실화하는 등의 여건조성이 중요하다. 아무쪼록 이번 공직부패 방지 노력이 또 한번의 구호에 그치지 않고 총체적인 노력을 통해 반드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金 信 福 서울대 행정대학원장·한국행정학회장
  • 權魯甲고문 일문일답…“黨 화합-단결에 최선”

    ‘DJ의 그림자’‘동교동계의 맏형’으로 불리는 국민회의 權魯甲고문이 고희(古稀)를 하루 앞둔 4일 정치권을 떠난 지 2년만에 당무에 복귀했다. 그의 70평생을 되돌아 보면 金大中대통령과 함께한 40년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형극의 길이었다.서슬퍼런 유신독재와 군사정권을 거쳐 YS정권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金대통령의 방탄막 역할을 해왔다. 목포상고 4년 후배인 그는 60년 4·19 직후,당시 민주당 대변인인 金대통령을 찾아 첫 정치적 인연을 맺는다.그후 71년 대선부터 4번의 대통령 선거를치르면서 역대정권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를 이겨내며 ‘DJ 분신’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이다. 유신과 5공시절 수시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 끌려가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金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金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승부’였던 97년 대선은 감옥에서 지켜봐야 했다.그해 2월 한보비리에 연루된 탓이다. 權고문은 정권교체 직후 “나에 대한 사면복권이 정치적 부담이 된다면 마지막까지 감옥에남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전달,金대통령의 눈시울을 적셨다는 후문이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당무 복귀한 소감은감개무량하다.책임이 무겁다. ▒당내 역할은. 당의 화합과 단결,金대통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당의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는. 국민회의에는 국민신당출신 등 외부사람도 많다.이들이 소외감이나 섭섭함이 없이 똘똘 뭉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李康來전청와대정무수석의 구로을 공천 낙마와 관련,權고문이 흔들었다는설이 있는데. 잘못된 얘기다.李전수석이 후보로 내정됐을 때부터 불러다가 도와 주려고 노력했다.특히 구로을 종교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노력했다.李전수석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상도동에 갈 계획은. 가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辛相佑국회부의장도 만났고 그런 역할을 하고싶었다.그러나 현재로선 분위기가 아니다. ▒5월 전당대회에서 李壽成평통부의장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李부의장은 나를 선배로,나는 李부의장을 후배로 대하고 있다.집사람들끼리는 동기동창이다.인간적으로 친하고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사실이다.
  • 국민회의 韓총무 “개혁 반발 기득권 세력 청산해야”

    국민회의 韓和甲총무는 26일 아태재단이 주최한 아태청년 아카데미에 강사로 참석,기득권세력을 강도 높게 비난해 눈길을 끌었다.집권 2기 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다름아닌 개혁저항 세력을 적절하게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韓총무는 이날 “사방 팔방에 개혁저항 세력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고말문을 열었다.50년동안의 적폐를 청소하는데 이들 세력때문에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어 “‘(이 정권이) 얼마가 가나’‘5년만 참자’는 말까지 나온다”면서 “기득권세력에 대해 점차적으로 정리해나가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개혁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기득권 세력’의 청산의지를 밝힌 것이다.그러나 어떤 수순을 밟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다. 韓총무는 또 이날 강연에서 權魯甲고문의 당복귀 배경에 ‘자신의 역할’이 있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그는 한 대학생으로부터 “權고문의 정계복귀가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여권의지와 정면 배치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솔직히 金大中대통령에게‘노갑이 형님’과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고 털어놨다. 원내총무로서 대야(對野)교섭창구가 없어 ‘절벽’같은 상황이었다는게 그첫번째 이유다.총무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비공식’대화 채널이없어 답답했다는 설명이다.자신이 직접 나서면 金대통령의 뜻으로 비춰져 오해를 받는 상황에서 ‘막후’채널이 필요했다는 것이다.야당에서도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과 상대하길 원했다고 덧붙였다.그 적임자가 바로 權고문이라는 얘기다. 韓총무는 權고문의 정계복귀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
  • 정직한 역사되찾기-친일의 군상(20회)

    ■친일 고문경찰 盧德述 지난 8월 정부기록보존소가 건국 50주년을 맞아 공개한 ‘이승만관계 문서 철’(1949년 1월분) 가운데는 이런 내용의 기록이 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 는 터이므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諭示)에 대 하여 법무장관은 노덕술을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반민특위 사무실내 금고에 2일간 수감하였다는 보고가 유(有)하고 대통령 각하는 차(此) 불법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시 정 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중에서) 위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이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일제때 고등계 형 사 출신이자 수도청(서울시경 전신) 수사과장을 지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 특위 조사관들을 체포,감시하라고 지시한 내용이다.그동안 이 대통령이 반민 특위의 활동을 못마땅해 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관을 체포하라고 직접지시한 사실은 처음 밝혀진 내용이다.즉 이 대 통령이 친일파를 비호했다는 주장이 문서로 공식 확인된 셈이다.전 국민이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던 그 시절,대통령까지 나서 비호한 노덕술은 대체 어 떤 인물인가? ▲제1사단 헌병대장 시절의 노덕술(당시 계급은 소령임) 盧德述(1899∼?·창씨명 松浦鴻)은 일제때 대표적인 친일경찰 가운데 한 사 람이다.해방무렵 그는 조선인으로서는 불과 수 명에 불과한 경시(警視·현 총경계급에 해당)까지 승진한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특히 그는 일제하 27년간 사상관계 사건,즉 독립운동 관련 사건만 취급한 고등경찰 출 신으로 일제로부터 훈7등 종6위의 훈장까지 받았다.그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1949년 1월 9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반민족행 위자 검거에 돌입한 반민특위는 보름만인 1월 25일 새벽 2시경 마침내 노덕 술을 검거하였다.그를 체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반민특위는 1월초 부터 ‘노덕술 체포대’를 편성,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좀처럼그의 은신 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유는 간단했다.경찰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주면서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특위는 노덕술이 그의 애첩 金花玉의 집(관훈동 29번지)을 들락거 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급습,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체포대는 곧바 로 그가 은신해 있던 李斗喆(당시 동화백화점 사장)의 집(효창동 소재)을 덮 쳐 그를 체포하였다.체포 당시 노덕술은 권총 여섯 자루와 도피자금 34만 1 천원이 든 가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체포후 서울형무소에 수감중이던 그는 3월 30일 특별검찰부 徐成達 검찰관에 의해 정식 기소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로써 친일경찰에 대한 단죄가 시작된 것이다. 노덕술은 경남 울산출생으로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 하던 잡화상의 고용인 노릇을 하기도 했다.1920년 경남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남 경찰부 보안과 근무를 시작으로 친일경찰의 길에 들어섰다.20년대 에 그는 주로 경남지방의 여러 경찰서에 근무하였는데 당시 그의 직책은 사 법경찰이었다.그러나 그는 고등계 경찰의 소관업무인 사상사건(독립운동 관 련사건)을 자발적으로 취급하면서 일제에 충성을 과시하였다. 1929년 金圭直이 회장으로 있던 비밀결사조직 ‘혁조회(革潮會)’를 탄압, 김규직 외 1명을 사망케 하고 그 관계자들을 2∼3년간 복역케 하였으며 동래 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동래고보 맹휴(盟休)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사찰과 검거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졌다.또 1929·30년 여름 조선인 일본유학 생들이 하계휴가를 이용,귀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자 이들이 일본정치를 비 난했다는 구실을 들어 강연자 수 명을 검거,취조하였다. 1932년 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에는 반일단체인 M·L당(黨) 조직원 金載 學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직접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 끝에 송국(送局),벌금형을 받게 하였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34년 평 남 보안과장으로 승진,출세가도를 달렸다.일제말기인 1944년 평남 경찰부 보 안과장 재직시에는 화물자동차 다수를 직권으로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 공케 하는 등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한사실도 있다.조선인이라는 신 분과 빈약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에 대한 그의 남다른 충성심 때문이었다. 한편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할 당시 그의 죄목은 ‘반민법 위반’ 하나만이 아니었다.그는 이미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으며 체포후에는 다 시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피의자 죄목이 추가되었다.소위 ‘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은 張澤相 저격용의자 林和가 수사도중 사망하자 경찰은 임 화가 조사도중 도망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무부 수사국장 趙炳^^이 담당경찰관을 조사한 결과 고 문치사로 밝혀졌고 그 배후에는 노덕술과 崔雲霞 두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당시에는 장택상이 수도청장으로 있으면서 노덕술 일파를 비호하고 있어 수 사를 못하고 있다가 48년 9월 金泰善이 새 수도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노덕술 에 대한 체포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태선 역시 “당시 공산당 타도에 공이 많은 선배를 경찰의 손으로 체포할 수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경찰관 4명을 그의 궁정동 자택에 파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국립경찰 창설’ 51회, 중앙일보·74.12.11) 한편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검거된 직후 극우 테러리스트 白民泰(일명 鄭民 泰로 해방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놀랄만한 사실 하 나를 폭로하였다.구속된 노덕술이 주동이 돼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장 崔蘭洙 ·부과장 洪宅喜 등이 자신에게 반민특위의 중견요원인 盧鎰煥·李文源 등 간부 7∼8명에 대한 암살을 부탁했다는 것.노덕술 등은 백민태에게 이들을 시외 모처로 납치해 강제로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이북으로 가겠 다’는 내용의 유서를 받은 후 암살해버리면 뒷처리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 고 했다는 것이다. 특위요원들에 대한 암살음모가 공개되면서 특위와 친일경찰 진영은 극한대 립으로 치달았다.당시 친일경찰 세력을 정권의 한 축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하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묵살하였다.49년 6월 6일 발생한 친일경찰들의 반민특위습격사건(소위 ‘6·6사건’)은 이때부터예견된 사건이었다. 노덕술을 비롯해 이 사건 관련자 4명은 검찰에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49 년 5월 29일 열린 제7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수사의 권위자로 많은 공로 가 있으나 증거가 충분한 만큼 만행을 묵과할 수 없다”고 하여 각각 징역 4 년을 구형받았다.그러나 반민특위 습격사건 후 특위가 무력해진 가운데 열린 선고공판에서 노덕술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인정받았고 최난수·홍택희 등은 각각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노덕술은 당장 석방되지는 않았다.‘반민법위반’ 사건처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 역시 그리 오래 끌지 않았다.반민법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단축돼 반민특위는 껍데기만 남은 형국이었다.반민피 의자로 기소된 자 가운데 극소수만 재판을 받았으며 이들도 대부분 공민권 정지나 집행유예·병보석 등으로 풀려났다.또 실형선고를 받은 자들도 재심 청구를 통해 대부분 석방되었다.김태선의 증언에 의하면,노덕술 역시 병보석 으로 출감돼(일자 미상)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반민특위가 해체되면 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헌병사’에 따르면 그는 9·28수복 당시 제1사단 헌병대장(소령)을 지냈다.이후 부산CID(육군범죄수사단)와 서울 15CID 대장을 역임한 그는 金 昌龍 특무대장이 모종의 비리사건 관련자로 그를 구속시키면서 역사의 무대 에서 사라지고 말았다.경찰청 조회결과 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흔적도 없이 사라질 한 생애를 그는 악행(惡行)만 쌓다가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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