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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경계…조광희 ‘인간의 법정’ 드라마·뮤지컬로 본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경계…조광희 ‘인간의 법정’ 드라마·뮤지컬로 본다

    인간을 살해한 인공지능(AI) 안드로이드의 재판을 다룬 조광희 작가의 SF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솔출판사)이 드라마와 뮤지컬로 제작된다. 변호사이자 영화제작자인 조 작가는 지난 20일 영화제작사 나우필름(대표 이준동)과 ‘인간의 법정’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고 26일 밝혔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 ‘시’(2010) 등을 제작한 나우필름은 영화사 레드피터와 공동으로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다.조 작가는 앞서 17일에는 뮤지컬 회사 TMM과 판권 계약도 체결했다. TMM은 장소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가 대표로 있으며, 드라마 제작사 히든시퀸스와 공동으로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뮤지컬을 제작할 예정이다. 지난달 초 출간된 ‘인간의 법정’은 최근 베트남 출판사 ‘아이 러브 북스’와 번역 출판권 수출 계약을 맺는 등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솔출판사는 전했다. 조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인간의 법정’은 ‘인간과 유사한 안드로이드 인간이 ‘의식’을 갖게 된다면 인간일까, 기계일까’라는 문제의식을 다뤘다. 안드로이드 ‘아오’가 주인에게 복종하게 돼 있는 알고리즘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주인을 살해하고 법정 다툼으로 번지는 이야기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그들의 시선] “직업에 귀천이 있죠” 장례지도사에서 유품정리사의 길을 걷는 남자

    [그들의 시선] “직업에 귀천이 있죠” 장례지도사에서 유품정리사의 길을 걷는 남자

    “‘이런 걸 치우지도 않고 사셨네…’, ‘왜 쓰지도 않고 이렇게 놔뒀어요…’ 마지막 이삿짐 정리하는 걸, (고인이) 보고 계실 거라는 생각에 잔소리를 많이 해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혹시라도 듣고 있거나 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착각인 줄 알지만….” 죽은 자에게 잔소리한다는 김새별(46)씨. 그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지운다. 주로 범죄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 또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채 외롭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머문 공간을 청소한다. 김씨는 고독하게 세상 떠난 사람들의 마지막 이삿짐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사다.■ 유품정리사 이전에 10년간 장례지도사로 일했다 김새별씨는 유품정리사 이전에 장례지도사로 10년간 일했다. 장례지도사 길을 걷게 된 것은 20대 초반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죽은 친구를 염습(殮襲)한 장례지도사의 태도에 감동 받아서였다. 그는 1999년 지인 소개로 서울의 한 병원 영안실에서 장례지도사 일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주변 시선이 무섭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나이 드신 분들은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 오갈 데 없이 할 거 없는 사람들이 그런 일 한다고… 빌어먹어도 그런 일은 하지 말라고 그랬으니까요. 근데 저는 괜찮았어요. 돌아가신 분들을 내가 깨끗하게 목욕시켜 보내드린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느 유족 부탁으로 시작한 유품정리사의 길 김씨는 이후 10년간 장례지도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한 유족에게 부탁받은 일을 계기로 유품정리사 길을 걷게 됐다. 당시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딸은 퇴근 후 각혈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했다. 장례가 끝난 뒤,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에 들어갈 수 없었던 딸이 장례지도사였던 김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참혹하게 돌아가신 분의 공간을 가족이 청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장례지도사에게 부탁한 거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요청이 많아졌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고,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품정리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외로운 죽음과 마주하다 김씨는 2009년 특수청소업체 바이오해저드를 설립, 본격적으로 유품정리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수많은 죽음의 현장과 마주했지만, 그는 지금도 매순간 마음이 무겁다고 밝혔다. 실제로 현장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죽음의 형태가 40~60대 고독사인데, 대부분 세상과 단절을 의미하는 술병이 많다고 설명했다. 고인에게는 삶의 마지막 친구가 술인 것이다. 그런 외로운 죽음의 현장과 마주할 때,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김씨. 그러나 방 한쪽 수북이 쌓인 술병과 달리 “무슨 이유인지 아끼느라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들을 볼 때면, ‘인생을 왜 이렇게 사셨을까…’란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고인이 이삿짐 정리 과정을 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유품 중 재산적, 정서적 가치가 있는 통장이나 사진 등은 모두 정리해 유족에게 전달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폐기 처분 한다. 김씨는 이 과정 전부를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긴다. 간혹 물건이 없어졌다고 오해하는 유족이 있어서 시작했다. 그는 “초창기에 그런 일을 몇 번 겪었다”며 “이후 현장에 들어가면, 사진을 찍었다. 영상 기록을 시작한 후,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을 오해하는 유족의 말보다 더 씁쓸한 경험이 있냐는 물음에 대해, 김씨는 “죽음 앞에서 매정한 유족과 마주할 때”라고 답했다. 그는 “도둑이 든 것처럼 이것저것 뒤져놓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대체 이게 뭐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겨울 이불을 꺼내서 고인이 돌아가신 자리를 덮은 뒤, 그 위를 발로 밟으며 무언가를 찾았던 흔적을 보면 많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차마 버리지 못하는 유품도 있다고 밝혔다. 유족이 버려달라고 말했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품은 유품으로 판단되면, 일정 기간 사무실 한쪽에 보관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타까움에 보관하고 있는 유품들이 있다. 나중에 유족이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1년 정도 보관한 뒤 폐기 처분 한다”며 “실제로 유품을 찾는 전화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덧붙였다. 20여 년간 죽음의 현장에서 일하며 트라우마도 생겼다. 아이가 죽은 곳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20대 아버지가 딸을 살해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딸 주변에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김씨는 “저도 애를 키우다 보니 그날만 생각하면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그날 이후, 아이들이 죽은 현장은 안 간다”고 털어놨다.■ 삶의 흔적을 지우고, 마지막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김씨는 죽음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블로그에 기록했다. 그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2015년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출간했다. 그의 책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도 제작됐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브 투 헤븐’이다. 김씨는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 현장 기록 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영상을 공개한 이유는 유품정리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누군가가 영상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는 연락을 해 왔어요. 지금까지 20편도 안 올렸는데, 문자나 메일이 100통도 더 왔습니다. 한 편당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계속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직업에 귀천은 있다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싸늘한 시선이 존재한다. 그는 “직업 얘기를 듣고, 깔보고 무시하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많이 좋아졌다, 라고 하지만, 여전히 직업에 귀천은 있는 것 같다”라며 편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김씨는 유품정리사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정말 고인과 유족의 입장에서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도 “수익 측면으로 접근해 ‘블루오션이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면, 다른 일 하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수많은 죽음을 접한 김씨. 그는 좋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아름다운 죽음인 것 같다. 그런 사람 없이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시는 것만큼 외로운 죽음이 어디 있겠나. 죽기 전, 작별 인사도 못하고, 고마웠다고 말 한마디 해줄 사람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싶다.” 글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형우 기자 gophk@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진중문고의 탄생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진중문고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징병제를 시행했다. 1942년 봄 미군은 세계 곳곳에 배치됐다. 병사들의 유일한 오락은 책이었다. 1942년 3월 구성된 전시도서협의회는 양서를 선정해 수백만 권을 배포했다.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지만 병사들은 무거운 양장본을 싫어했다. 1943년 초까지만 해도 병사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책은 없었다. 몇몇 출판사들이 머리를 짜내 새로운 제작 기법과 판형을 고안했다. 크기와 무게를 줄인 페이퍼백으로 만들어 군복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미국 출판계의 혁명이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선언했다. “1943년은 미국의 150년 출판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해였다.” 진중문고(陣中文庫)의 탄생이다. 문고판의 효시다. 1943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전역 병사들이 정부 지원금으로 대학 교육 및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이 제정됐다. “전쟁이 끝난 후 교육과 기술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만큼 군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없다”는 취지다. 1945년 8월에서 46년 1월까지 540만명이 전역했다. 1947~48년 미국 대학생의 절반이 참전 용사였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았다. 일반 학생들은 참전 용사들과 함께 받는 수업에 분노했다. 상대평가에서 그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대학의 일반 학생들은 참전 용사들을 가리켜 ‘평균 학점을 높이는 지겨운 인간들’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 산더미 같은 책이 배급된 덕분에 군인들은 독서와 공부에 흥미를 키웠다. 진중문고는 수백만 명의 군인들에게 독서 습관을 심어 주었다. 1945년 봄 뉴욕포스트는 이렇게 자랑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군대를 보유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참전 용사 중 다수는 이미 전선에서 플라톤, 셰익스피어, 디킨스 등을 독파한 뒤였다. 역사, 경영, 수학, 과학, 언론, 법률에 관한 독서도 익숙했다. 전역 후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기자 그들은 전투 못지않게 공부도 잘 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폭탄이 터지는 참호 속에서도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했으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징병제, 모병제를 두고 한동안 여론이 끓어올랐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군복무가 제대 후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배려해 주는 일 아닐까.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시대가 불러낸 정의의 사나이

    시대가 불러낸 정의의 사나이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풍자소설 ‘돈키호테’는 무모한 시골 기사의 모험담을 재치 있게 풀어내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고전으로 꼽힌다. 최근 다양한 볼거리를 곁들인 돈키호테 작품이 잇달아 나왔다. 거장의 삽화를 곁들이거나 뮤지컬에 맞춰 유명 만화가의 만화를 재구성하는 등 볼거리를 추가했다. 국내에선 원전에 충실한 완역본이 나온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고급화된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여전하고, 정치가 불신받는 시대 꿈과 희망을 주는 영웅을 갈구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문예출판사는 최근 20세기 초현실주의 미술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삽화를 그려 넣은 ‘돈키호테 살바도르 달리 에디션’ 1, 2권을 펴냈다. 두 권에 걸쳐 달리가 그린 삽화 54점이 수록됐다. 달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돈키호테’ 삽화는 세기의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1권의 삽화들은 1946년 미국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된 ‘명성이 자자한 라만차의 돈키호테의 일생과 업적 제1부’에 실린 작품들이다. 2권 삽화는 1957년 프랑스 ‘라만차의 돈키호테’에 실린 석판화들이다. 달리는 ‘풍차 공격’ 장면을 비롯한 삽화를 통해 환상으로 가득한 독창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김충식 번역가가 속담과 수사가 많은 원작의 특성과 문체를 최대한 살렸다.열린책들은 이에 앞서 영국 만화가 롭 데이비스가 만화로 재구성한 그래픽노블 ‘돈키호테’를 번역 출간했다. 지난 2월 아홉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개막에 맞춰 내놓은 이 책은 원작의 두꺼운 분량이 부담스러운 독자들을 겨냥해 1, 2권을 하나로 합쳐 각색했다.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이해하기 쉬운 대사와 화려한 색감의 삽화는 원작 속 전율과 비극, 유머를 완벽하게 그려 낸다”고 평가했다.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이달 20일까지 돈키호테 관련 도서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가량 늘어났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2014년 안영옥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가 완역본을 내놓기 전까지 아동용 책으로만 알려졌던 돈키호테가 이제 문학적 가치를 중시한 고급화된 책으로서 소장 가치를 중시하는 독자층의 수요 대상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풍차 공격 등 모험 이야기로 유명한 1권(1605년판)과 달리 돈키호테가 멀쩡한 인물로 나오는 2권(1615년판)은 그동안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이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지난 16일 종연한 ‘맨 오브 라만차’에 이어 다음달 4~6일에는 유니버설발레단의 희극 발레 ‘돈키호테’가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를 정도로 돈키호테 콘텐츠는 공연 예술계에서도 인기가 있다. 안 교수는 “돈키호테는 단순히 무모한 사람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약한 자를 도우려는 이상향을 추구해 이상적 가치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 준 인물”이라며 “인기의 비결은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힘든 시대에 배려, 자족, 인류애, 사랑, 정의가 모두 담긴 기사의 모험담이 희망과 꿈을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나의 진정한 스승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나의 진정한 스승

    몹시 피곤한 아침이었다. 전날 늦게까지 번역을 했는데도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새벽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합정역에서 내린 시간은 오전 7시. 그날은 당시 편집위원으로 일하던 어느 출판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승강장 한가운데에서 나는 놀랍게도 전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분도 나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우리 단골을 왜 못 알아보겠어요.” 그분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터줏대감 ‘아벨서점’의 곽현숙 대표였다. 나는 고교 시절에는 뻔질나게 아벨서점을 드나들었는데, 대학 때부터 줄곧 타지에 살게 되면서 20년 가까이 그분을 거의 뵙지 못했다. 작고 단단한 체구에 반백의 머리를 늘 단발로 기르시던 그분은 말수가 적고 뭔가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풍겨서 학생 때 그렇게 자주 아벨서점을 드나들면서도 나는 그분과 긴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날 그분은 자신이 헌책을 사러 왔다고, 합정역 부근에 사는 퇴임한 교장 선생이 타계해 유족이 장서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때까지 그분이 어떻게 양질의 헌책과 희귀 도서를 조달하는지 잘 몰랐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잠시 후 우리는 헤어졌다. 조만간 서점에 들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공수표에 그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헌책방은 이미 머나먼 학창 시절의 추억에 불과했다. 곽현숙 대표와의 그 우연한 만남은 2008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무려 13년이 흐른 올해 4월 나는 한 출판사 대표와 함께 우연히 아벨서점에 들르게 됐다. 그사이 인천으로 이사를 온 나는 그 대표에게 인천 구도심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출발점을 배다리 헌책방 거리로 삼은 것이다. 가히 책귀신이라고 할 만한 그는 아벨서점 간판을 보자마자 안에 뛰어들어가 ‘보물찾기’에 나섰고, 나는 한참을 바깥에서 쭈뼛대다가 뒤따라 들어갔다. 내가 한창 드나들던 1980년대 중후반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통로를 빼고는 천장까지 수만 권의 장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종교서와 실용서가 늘어난 정도였다. 출판사 대표는 벌써 서너 권의 책을 골랐고 그중 ‘한글판 꾸란’을 보여 주며 “심봤다”고 자랑을 했다.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그가 책값을 치를 때 뒤에 서 있다가 계산대의 곽현숙 대표와 눈빛이 마주친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13년 만의 만남이었고 게다가 나는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나를 알아봤단 말인가? 이게 바로 산더미 같은 폐지 속에서도 볼만한 책을 집어내는 헌책방 주인의 눈인가? “사장님, 정말 저를 기억하세요? 혹시 옛날에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것도….” “그럼요. 합정역이었죠, 아마?” 나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이윽고 책가방을 연 김에 번역할 책을 넘기겠다고 출판사 대표가 내게 중국어 원서를 건넸다. 그때 곽 대표가 궁금해하는 듯하여 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번역할 책이에요. 제가 중국어 번역가이거든요.” “아, 그래요?” 곽 대표의 엷은 미소를 뒤로하고 나는 쫓기듯 서점을 나왔다. 왠지 많이 미안하고, 많이 부끄러웠다. 곽현숙 대표가 맨 처음 3평짜리 공간에 아벨서점을 연 것은 1973년이다. 무려 49년째 한 곳에서 서점을 꾸리면서 나 같은 ‘아벨서점 키드’를 얼마나 많이 배출했을까. 돌아보면 나의 진정한 스승은 대학의 은사도, 책으로만 접한 동서양의 석학도 아니었다. 어린 내가 스스로 글과 지식의 아우라를 찾아 마음껏 방황하게 해주었던 배다리 헌책방 거리와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탑처럼 존재했던 아벨서점이었다. 그날 내가 느낀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이 엄연한 사실을 너무 오랜 세월 깨닫지 못했거나 깨닫기를 피한 데에서 비롯됐다. 이제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긴 했지만 나는 앞으로 무엇으로 곽현숙 대표에게, 그리고 아벨서점에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까.
  • 군부쿠데타로 폭정 시달리는 미얀마인들… “5·18 광주처럼 미얀마의 봄 빨리 오길”

    군부쿠데타로 폭정 시달리는 미얀마인들… “5·18 광주처럼 미얀마의 봄 빨리 오길”

    “‘엄마, 미얀마 사람들이라면 할아버지도 장애인도 다 같은 마음이겠지?’ 라고 딸이 묻더니,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큰 푯말을 휠체어에 앉은 사람과 지팡이 든 할아버지, 젊은 남녀가 함께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어요. 그리고 총으로 죽은 미얀마 사람 옆에 위로의 꽃 스티커를 붙여주고 미얀마 국기도 그리더군요.” 경기 부천유네스코책쓰기교육연구회가 최근 군부 쿠데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을 응원하는 뜻으로 ‘함께해요, 미얀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3대가 함께 참여한 조승희씨 가족 등 100여명의 스토리가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19일 부천유네스코 책쓰기교육연구회(책연)에 따르면 이번 글쓰기 프로젝트는 책연 자문위원이며 지도자 양성과정 공동기획자인 허병두씨에게 책쓰기 수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서 시작됐다.먼저 허 위원이 국제사회에서 벌어진 큰 사건에 대해 연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보자고 제안했다. “미얀마 국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내가 만약 미얀마 사람이라면?” 허 위원의 이 한 마디가 시발점이 돼 ‘미얀마 프로젝트’는 책연에서 부천시민까지 확산됐다. 지난 4월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홍보한 결과 아동부터 성인까지 그림그리기 62명, 글쓰기 61명 등 중복자를 포함해 100여명이 동참했다. 조승희씨 가족처럼 자녀·조부모와 함께 3대가 참여한 경우도 있다. 짧은 기간임에도 부천시민 남녀노소가 참여하며 한마음으로 일궈낸 프로젝트였다. 자체적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았고, 그림과 글이 쌓이면서 176페이지 그림책으로 제작됐다. 문한기 책연 회장은 “본 연구회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함께해요, 미얀마”는 미얀마 군부 폭정에 고통당하는 미얀마 국민을 응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자발적 시민의식에서 시작됐다”면서 “이 행사는 한 점의 불꽃이 온 산을 불태우듯 부천시민 100인의 마음에 점화돼 블로그와 유튜브·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확산됐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작은 불꽃이 마중물이 돼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지지하는 국민운동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미얀마에 민주주의의 봄이 속히 오기를 부천시민 모두와 함께 뜨겁게 응원한다”고 덧붙였다. 미얀마의 평화와 인권이 회복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책 ‘함께해요, 미얀마’는 5월 중 출간될 예정이다. 현재 출판사를 찾고 있는데 펀딩방식으로도 출간해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책 수익금은 모두 미얀마 시민을 돕는 데 쓰인다. 책연은 부천시립 상동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일인일저(一人一著) 책쓰기 지도자 양성 1년 과정을 수료한 부천시민들로 구성됐다. 올해 지도자 양성과정 4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21명이 수강 중이다. 한경구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은 “부천유네스코 책쓰기교육연구회의 작지만 의미가 큰 책자 발간을 시작으로 다른 단체나 도시에서도 적극 호응해 전국적으로, 아니 전세계적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응원했다.또 김정이 책연 부회장은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한국어로 도와 달라고 외치는 수많은 미얀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냥 있기 힘들었다. 몇 줄의 글을 쓰자. 함께 고민하던 이들이 글을 더하면서 조각보 글쓰기는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글과 더불어 그림이 있으면 언어가 다른 미얀마 국민들에게 우리의 뜻이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부천유네스코책쓰기교육연구회와 부천시민들의 도움으로 책을 만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조각보를 짜듯 글을 조금씩 이어붙였다. 자그마한 우리들의 뜻과 마음이 미얀마에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올해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뒤 지난 18일까지 802명이 사망했고 체포·구금된 사람은 5210명에 달한다. 올해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1980년 5·18 당시 ‘오월어머니회’ 사람들처럼 부천시민들이 주먹밥 대신 글과 그림을 통해 이들에게 응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80년 전 세상 떠난 독일 작가의 소설, 영국 베스트셀러에

    80년 전 세상 떠난 독일 작가의 소설, 영국 베스트셀러에

    1942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독일 작가의 책이 사후 80년 만에 영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돌연 등장했다. 울리히 알렉잔더 보슈비츠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38년 독일에서의 유대인 박해가 자행되는 것을 고발하는 소설 ‘패신저’를 펴냈다. 나치 정권이 발호하던 시기에 독일을 탈출하려던 유대인 남성의 얘기를 다뤘는데 물론 자신의 얘기였다. 그 해 11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른바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유리가 깨지는 밤)가 있었다. 유대인이 사는 집들과 가게,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급습해 유리창이 깨지는 공포를 그렇게 묘사했다. 울리히는 몇 주 뒤에 그 내용을 고발하는 원고를 탈고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유대인 기업가 오토 반 실베르만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탈출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아내와 함께 값나가는 것들을 재빨리 가방 안에 넣어 열차를 타고 독일을 빠져나가려 한다. 3년 전 반유대 법이 제정됐을 때도 이미 그는 몰래 달아난 경험이 있었다. 그의 책은 이듬해 미국에서, 영국에서 1940년 출간됐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절판됐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역시 1935년 독일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노르웨이로 이민갔다. 나중에 프랑스와 벨기에, 룩셈부르크에서 머물렀다. 두 사람은 1939년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잠깐 영국에 이주했다. 둘 다 적국 사람으로 간주돼 체포돼 호주로 추방돼 그는 2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견뎌냈다. 영국으로 송환되는 기쁨도 잠시, 그를 태운 보트는 독일군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 침몰했고 그는 세상을 등졌다. 보슈비츠의 조카는 어느날 독일 편집자 페터 그라프가 다른 소설을 재발견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고 연락을 취했다. 삼촌도 책을 냈는데 초고가 프랑크푸르트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고 알렸다. 그라프는 그곳을 찾아 초고를 읽자마자 “중요한 소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편집과 수정을 거쳐 독일에서 재출간했고, 지금까지 20여개국 언어로 옮겨졌다. 그라프는 현 시점에서도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난민 문제를 들여다봐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손길은 부족하다. 난민이 많아질수록 돕는 이들은 줄어든다. 끔찍하고도 단순한 이 패턴은 역사를 관통한다”면서 “11월 독일에서 그 난리가 일어나자 거의 모든 나라가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옴짝달싹 못했다. 그들은 살던 나라를 떠났는데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름아닌 박해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을 영국에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지난 2018년 보슈비츠의 조카가 한 출판사 편집자에게 알리면서 시작됐다. 영어 번역본이 지난주 1800부 가까이 팔리면서 일간 선데이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소설 부문 10위 안에 들었다고 BBC가 17일(현지시간) 전했다. 토비 리치틱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리뷰를 통해 이 책이 크리스탈나흐트를 다룬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보인다면서 “언뜻 봐도 깊이있는 소설과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밀스는 선데이 타임스 리뷰를 통해 “2차대전을 다뤄 최근에 각광을 다시 받는 ‘Suite Fran?ise’와 ‘Alone in Berlin’ 같은 위대한 소설들이 많지만 난 이 작품 패신저도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조너선 프리들랜드는 “어둠이 내리면 나치 독일의 악령이 독자에게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소설”이라며 “집필했을 때도 읽힐 만했고 지금 읽는 일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집콕에 집의 재발견… 잘나가는 ‘홈북’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실내장식이나 정리 관련 도서 판매량도 껑충 뛰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지난해 ‘인테리어’, ‘정리·수납’ 분야의 도서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대비 2020년에 판매가 무려 40.6% 성장했다. 이 분야 도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매해 판매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였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급격히 반등했다. 도서 구매 연령대는 40대가 41.8%로 가장 많았다. 이어 30대(30.8%), 50대(17.4%), 20대(6.3%) 순이었다. 구매자의 71.4%가 여성인 점도 특징이다. 가장 많이 팔린 도서는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쌤앤파커스),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가나출판사), ‘하루 10분 꼼수 살림법’(청림Life), ‘곤도 마리에 정리의 힘’(웅진지식하우스) 등이었다. 이 밖에 스웨덴 인테리어 전문가 프리다 람스테드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스타일링의 기본’은 지난달 발간한 직후 인테리어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나온 인테리어, 정리·수납 신간 도서는 모두 17종으로, 지난해 출간된 36종의 절반에 이르렀다. 코로나19가 이어지는 상황이어서 관련 도서 출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예스24 측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수요와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유튜브 등에도 많은 방법을 공유하지만, 더 정제된 정보와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려는 수요가 도서 구매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책 내지 말라던 법정 스님의 글 덕조 스님이 13년 만에 엮은 이유

    책 내지 말라던 법정 스님의 글 덕조 스님이 13년 만에 엮은 이유

    2010년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의 새 책이 나왔다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 2010년 세상을 떠난 스님이 ‘내 이름으로 책 내지 말라’고 했던 것 아닌가, 질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스님은 그 해 3월 11일 열반에 들었는데 2월 24일치 ‘남기는 말’을 통해 “그동안 풀어 논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밝혔던 것이다. 스님이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송광사 수련회에서 젊은 스님들에게 가르치려고 만들었던 수련 교재를 다듬은 ‘진리와 자유의 길’(지식을만드는지식)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우리 곁으로 왔다. 스님의 육필 원고가 책으로 나오기는 2008년 ‘아름다운 마무리’ 이후 13년 만이다. 마침 책을 받은 날이 스승의 날인 지난 15일이었다. 서울 종로구 홍은동 옥천암의 백불을 보고 돌아온 길이었다. 10년 단위로 입술 색, 액세서리 장식, 머리카락 색이 바뀌어 부처의 과거오늘미래를 새롭게 다지게 하는데 이날 이 책을 받은 것도 인연이다 싶었다. 생전 스님의 맏상좌 노릇을 했던 덕조 스님이 수류산방 불일암에서 수행하며 월간 ‘맑고 향기롭게’ 원고를 정리하다 은사의 미발표 원고가 30년 묵힌 것이 아까워 출판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덕조 스님도 어지간히 은사의 마지막 당부가 저어됐던 것 같다. 그가 “아마도 당신이 빠뜨린 것을 챙겼다고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분들에게 공부와 수련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게 되어서 잘되었다고 미소짓는 모습이 눈에 떠오릅니다”라고 적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니 머리말 대신으로 덕조 스님과 편집자(동일인인지 모르겠음)가 삼은 1971년 법정 스님의 글 ‘부처님 오신 날에 부쳐’도 마치 어제오늘 쓴 것처럼 생생하고 묵직하다. ‘우리 몸에서도 붉은 피 대신 연둣빛 수액(樹液)이 흐르는 5월’로 시작해 ‘구체적인 그날그날의 행동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의 구현자가 될 때, 부처님은 새삼스레 오실 것도 가실 것도 없이 무량광(無量光)와 무량수(無量壽)로서 상주하게 될 거라는 말이다’로 끝나는데 날마다 소리내 읽으며 새길 만하다.수련교재는 크게 불(佛)과 선(禪)으로 나눴다. 이어 법정 스님이 들려주는 세 스님 이야기, 꼬리말/ 사람의 길, 책을 엮으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단어풀이와 찾아보기도 꼼꼼해 이 책은 은사가 젊은 스님들을 모아 두고 불교와 하나 되는 부처 삶의 요체, 수행 방법, 수행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 받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일종의 불교 사전처럼 간결하며 알기 쉬운 설명이 돋보인다. 편집 후기에 해당하는 ‘자유로 가는 진리의 길,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는 1992년 송광사 수련생 모집 공고에 “혹시 산사 나들이 정도로 생각하시고 동참하셨다가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이 점 염두에 두시고 신청하시기 바랍니다”란 당부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소개하며 시작한다. 30년 만에 절집 교재를 일반 서적으로 세상에 소개하니 앞의 백불처럼 새롭게 한 것, 그대로 놔둔 것이 뒤섞이게 마련인데 솔직히 편집자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불교에 아둔한 기자로선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편집자의 마지막 대목은 새길 만하다. ‘길은 멀고 밤은 길다. 그러나 모든 길은 끝이 있어 길이고 밤은 아침이 있기 때문에 밤임을 안다. 그러니 진리의 길 끝에는 자유의 아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냥 걸으면 된다. 그냥 걷자. 그냥 읽자.’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출판계-문체부, 출판유통통합전산망 놓고 또 충돌

    출판계-문체부, 출판유통통합전산망 놓고 또 충돌

    출판 분야 표준계약서를 두고 갈등을 빚는 출판계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번에는 출판유통통합전산망(통전망) 등의 현안을 놓고 또 충돌했다. 출판계 대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는 13일 입장문을 통해 “특정 작가와 출판사 간 벌어진 이례적인 계약위반 사례를 들어 표준계약서나 통전망을 강요하고 그에 순종하지 않는 출판인들에게 사업적 불이익을 주려는 행위는 용납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체부가 이날 오전 배포한 ‘출판유통의 투명성 높여 불공정 관행 개선한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에서 아작 출판사 논란을 언급하며 통전망 등을 통해 투명한 출판유통 체계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계약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반박 차원이다. 최근 SF 전문 출판사 아작이 장강명 등 작가들에게 인세와 계약금 등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작가와 협의 없이 오디오북을 발행해 논란이 됐는데 9월 통전망 가동을 앞두고 출판유통의 문제도 불거졌다. 문체부는 도서의 생산과 유통, 판매정보를 종합적으로 수집·관리하는 통전망이 가동되면 도서 유통·판매 현황을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고, 작가와 출판사 간 투명한 정산을 위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출판계는 필요한 기능이 여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등 이유로 9월 가동에 부정적이다. 출협은 또 아작 출판사 논란에 관해 ‘불공정 관행’ 등 단어를 사용한 문체부 보도자료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출협은 “마치 출판계에서 불공정한 일들이 ‘관행’처럼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 곤혹스럽다”며 “균형 잡힌 출판행정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건은 아작 출판사 한 곳에서 벌어진 일이지 모든 출판사에서 관행처럼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앞서 출판계가 지난 1월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 설정 계약서’라는 이름의 자체 표준계약서를 도입한다고 발표하자 문체부는 지난 2월 출판 분야 표준계약서 10종의 제·개정안을 확정해 고시했다. 이에 출협은 “사실상 표준계약서 사용 강제는 위법”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최근 서울행정법원에 고시 취소소송과 함께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집행정지 심문기일은 오는 20일 예정돼 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부처님오신날 다시 걷는 두 큰스님의 한길 큰 길

    부처님오신날 다시 걷는 두 큰스님의 한길 큰 길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나누어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나눔은 자기확산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고독을 체험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이지 거기 머무르기 위해서는 아니다.”(‘진리와 자유의 길’ 356쪽)“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주었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마세요. 그냥 도와주어야 행복합니다. 도와주었다는 한 생각을 내는 순간 괴롭기 때문입니다.”(‘혜암 평전’ 512쪽) 오는 19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생전에 존경받았던 불교계 큰 스승들의 가르침과 삶을 담은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한국 불교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스님들의 면모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다.도서출판 지식을만드는지식은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이끈 법정스님(1932~2010)의 미발표 육필원고를 묶은 책 ‘진리와 자유의 길’을 출간해 13일부터 서점에 내놓는다. 법정스님은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 동안 수련생들을 위해 불교의 핵심 내용을 담은 교재를 집필하고 강연했으나 이후 이 교재는 잊혔다. 법정스님의 제자인 덕조스님이 최근 원고를 발견하면서 출간하게 된 것이다. 법정스님의 육필원고가 책으로 나온 것은 2008년 ‘아름다운 마무리’ 이후 13년 만이다. 책은 불교 출현의 역사적 사실과 초기 불교의 특징, 교법 등을 쉬운 언어로 풀어냈다. 특히 법정스님은 서문에서 “어느 절이나 법당 앞과는 달리 법당 뒤는 마냥 깜깜하다. 등은 절간보다도 거리나 어두운 길목에 켜서 여러 중생의 발부리를 밝혀주는 일이 널리 일어났으면 한다”고 일침한다. 덕조스님은 “불자들이 스님을 그리워한다면 이런 가르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30년 만에 세상에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조계종출판사는 조계종 10대 종정 등을 지낸 혜암스님(1920~2001)의 탄생 101주년을 맞아 최근 ‘혜암 평전’을 출간했다. 박원자 불교전문작가가 쓴 이 책에는 20세기 후반 한국 불교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혜암스님의 삶과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 있다. 10대 때 일본 유학 도중 불교에 첫발을 딛고 출가한 이후 성철스님 등과 함께 수행하는 과정이 담겼다.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며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님은 출가한 날부터 50년간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는 ‘일종식’과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 ‘두타고행’ 등을 실천하며 진정한 행복을 설파했다. 박원자 작가는 “스님의 삶을 글로 쓰면서 정진하는 삶만이 생명의 존엄을 드러내는 일임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다시 맞는 법정·혜암스님의 가르침과 삶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다시 맞는 법정·혜암스님의 가르침과 삶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나누어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나눔은 자기확산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고독을 체험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이지 거기 머무르기 위해서는 아니다.”(‘진리와 자유의 길’ 356쪽) “남을 도와주고도 도와주었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마세요. 그냥 도와주어야 행복합니다. 도와주었다는 한 생각을 내는 순간 괴롭기 때문입니다.”(‘혜암 평전’ 512쪽) 오는 19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생전에 존경받았던 불교계 큰 스승들의 가르침과 삶을 담은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한국 불교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스님들의 면모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다.도서출판 지식을만드는지식은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이끈 법정스님(1932~2010)의 미발표 육필원고를 묶은 책 ‘진리와 자유의 길’을 출간해 13일부터 서점에 내놓는다. 법정스님은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 동안 수련생들을 위해 불교의 핵심 내용을 담은 교재를 집필하고 강연했으나 이후 이 교재는 잊혔다. 법정스님의 제자인 덕조스님이 최근 원고를 발견하면서 출간하게 된 것이다. 법정스님의 육필원고가 책으로 나온 것은 2008년 ‘아름다운 마무리’ 이후 13년 만이다. 책은 불교 출현의 역사적 사실과 초기 불교의 특징, 교법 등을 쉬운 언어로 풀어냈다. 특히 법정스님은 서문에서 “어느 절이나 법당 앞과는 달리 법당 뒤는 마냥 깜깜하다. 등은 절간보다도 거리나 어두운 길목에 켜서 여러 중생의 발부리를 밝혀주는 일이 널리 일어났으면 한다”고 일침 한다. 덕조스님은 “불자들이 스님을 그리워한다면 이런 가르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30년 만에 세상에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조계종출판사는 조계종 10대 종정 등을 지낸 혜암스님(1920~2001)의 탄생 101주년을 맞아 최근 ‘혜암 평전’을 출간했다. 박원자 불교전문작가가 쓴 이 책에는 20세기 후반 한국 불교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혜암스님의 삶과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 있다. 10대 때 일본 유학 도중 불교에 첫발을 딛고 출가한 이후 성철스님 등과 함께 수행하는 과정이 담겼다. 제자들에게 “공부하다 죽어라”며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님은 출가한 날부터 50년간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는 ‘일종식’과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 ‘두타고행’ 등을 실천하며 진정한 행복을 설파한다.박원자 작가는 “스님의 삶을 글로 쓰면서 정진하는 삶만이 생명의 존엄을 드러내는 일임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씨줄날줄] 다크사이드/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다크사이드/전경하 논설위원

    세계적인 액션 영웅 시리즈의 양대 산맥은 미국의 마블과 DC다. 1939년 만화 출판사로 시작해 마블은 디즈니에, DC는 워너브러더스에 인수됐다. 마블의 캐릭터는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헐크 등이다. 다양한 인격의 소유자로 때론 실수도 하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가깝다. DC의 캐릭터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아쿠아맨 등이다. 별 고민 없이 자신을 던져 세상을 구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다. 판권 문제로 DC의 캐릭터와 마블의 캐릭터가 섞인 영화는 보기 드물다. 마블과 DC 영화는 평행우주 설정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외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고 가정, 이야기가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진 많은 우주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마블이나 DC 영화는 다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 전반을 이해하기 힘들다. 마니아가 형성되는 이유 중 하나다. 마블 영화에서 악당은 타노스, DC 영화에서는 다크사이드다. 둘 다 엄청나게 힘이 세고 염력을 쓰며 우주를 말살하려는 절대 악의 존재다. 액션 영화답게 마블의 ‘인피니티 워’, DC의 ‘저스티스 리그’(잭 스나이더판)에서는 이들 악당이 영웅들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진다. 연방수사국(FBI)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최대 송유관 운영사인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을 해킹한 집단이 다크사이드라고 발표했다. 동유럽에 기반을 둔 다크사이드는 지난해 8월 이후 주로 영어권 서방 국가의 80개 이상 기업을 상대로 랜섬웨어 공격을 저질렀다. 랜섬웨어는 컴퓨터를 일시적으로 쓸 수 없게 만든 뒤 이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해킹 공격이다. 랜섬(ransom)은 ‘인질의 몸값’을 뜻한다. 공격받은 송유관 회사는 텍사스주 걸프만에서 동부 뉴저지주까지 8850㎞ 규모의 송유관으로 하루 250만 배럴의 휘발유, 항공유 등을 수송한다. 이 회사 송유관에 의존하는 소비자가 5000만명이 넘는다. 아메리칸항공은 이번 공격 탓에 연료가 부족해 매일 출발하는 장거리 노선 2개를 중단했다. 다크사이드는 다크웹에 올린 성명에서 “우리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송유관 운영 중단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상황이 다크사이드에는 사회적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악당답다. 요즘은 가공을 뜻하는 ‘메타’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가 합쳐친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서로 연동해 확장되는데 여기서도 보안이 주요 문제다.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는 늘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lark3@seoul.co.kr
  • 넷플릭스 ‘하백의 신부’ 프랑스어 자막서 ‘동해→일본해’ 표기

    넷플릭스 ‘하백의 신부’ 프랑스어 자막서 ‘동해→일본해’ 표기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 ‘하백의 신부’를 방영하며 프랑스어 자막에 동해를 ‘일본해’로만 표기했다고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가 11일 밝혔다. 프랑스에서 석사 과정 중인 유학생 김다윤씨는 넷플릭스에서 현지어로 이 드라마를 시청하던 중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고 반크에 제보했다. ‘하백의 신부’는 2017년 한국에서 방송된 드라마로, 인간 세상에 온 물의 신(神) 하백(남주혁 분)과 대대손손 신의 종으로 살 운명인 여의사 소아(신세경 분)의 코믹 판타지 로맨스 물이다. 현재 넷플릭스가 세계인들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문제의 자막은 드라마 11화 51분 분량에서 신세경이 “우리나라 동해 바다에서 석유도 좀 막 팡팡 솟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나온다. 여기서 동해를 프랑스어 ‘La mer du Japon(일본해)’로 번역한 것. 반크는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최근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있기에 이러한 오류는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넷플릭스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번역을 고치라고 요청했다. 또 프랑스의 아틀라스 출판사가 발행하는 세계지도책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 사례와 세계 최대 교과서 출판사 중 하나인 돌링 킨더슬리(DK), 온라인 지도 제작사 월드아틀라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동해’로 표기한 사례를 전달했다. 반크는 한국 관련 오류가 발견되면 글로벌 동해 홍보 사이트(whyeastsea.prkorea.com)에서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과 동해 홍보 정당성 자료들을 넷플릭스에 보내달라고 유학생과 재외 동포들에게 요청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인문학의 꽃은 저술과 번역이다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인문학의 꽃은 저술과 번역이다

    대학의 변화와 몰락, 정원 감축, 구조조정을 둘러싼 논의가 분분하다. 이즈음 대학 사회는 코로나19와 학령인구 감소라는 이중고를 맞이해 그 어느 시기보다도 근원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국립대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대학이 취업률과 입학 경쟁률을 기준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다. 언제 대학 문을 닫을지 모르는 위기의식 앞에 학문의 다양성과 균형 감각, 인문학의 고유한 가치를 논하는 담론은 한가한 소리로 여겨질지 모른다. 이 글은 단지 인문학을 보호하자는 식의 주장과는 결을 달리한다. 불과 50년 사이에 출생 인구가 4분의1로 줄어드는 상황,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는 시점에서 보건대 대학의 혁신적인 변화는 필연적이다. 대학의 변화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지만, 정작 현실적으로 충분히 개선 가능한 사안마저 묵인과 방조 속에서 속으로 곪아 가기도 한다. 가령 인문학 분야의 연구 업적 평가에서 저술이나 번역이 경시되는 점이 그렇다. 장기적인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저술과 번역서가 논문 한두 편에 부여되는 점수와 비슷하니 굳이 이 분야에 매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로 자연과학 분야의 평가 기준인 논문이 언젠가부터 인문학 분야마저 획일적으로 지배하면서 대학에 소속된 인문학자나 학문 후속 세대는 장기적인 차원의 저술이나 번역보다는 논문 편수 늘리기에 몰두한다.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학 연구 지원에서도 저술에 대한 지원은 극히 미미하다. 전체 지원액으로 따지면 논문의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다. 외국 대학의 인문학 분야 정년 보장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저술의 질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대체로 논문 편수가 중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의적인 저술과 꼭 필요한 번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읽을 만한 저술과 번역이 주로 대학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일면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이 대목에서 ‘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존재 이유 중의 하나는 민간기업이나 연구소, 출판사에서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장기적이며 창의적 연구, 저술, 번역을 대학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게 국민 세금이 대학에 투입되는 이유다. 대학에서 수행되는 인문학 연구가 사회와 유리된 채 단지 논문 편수 늘리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대학의 위기와 구조조정 과정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길이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다. 일본의 학계에서도 노벨문학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받는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의 산문과 소설 중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저작이 많다. 그의 작품 세계를 면밀하게 이해하고 탐구하려면 꼭 번역돼야 할 책들이다. 한국 사회(문화)의 분석과 해석에 커다란 도움이 될 세계 문화의 고전 중에서 시간과 경제적 이유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은 얼마나 많은가. 가령 20세기 전반의 탁월한 비평가인 발터 베냐민의 편지 전집도 아직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 논문 편수에 대한 압박 탓에 의욕적으로 쓰고 싶었던 책과 꼭 필요한 번역서를 미루는 동료 학자를 몇 번이나 목격했다. 인문학의 꽃은 저술과 번역이다. 설사 대학이 커다란 변화를 통과하더라도 의욕적인 학자에게 기꺼이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게 만드는 대학의 양식, 도서관에서 양서를 읽는 게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존재하는 대학의 품격은 포기할 수 없는 윤리다. 이런 희망이 없다면 저 대학의 위기와 구조조정에 대한 숱한 진단과 기사는 과연 무슨 소용일까. 앞으로 대학의 인문학은 책과 번역으로 상징되는 창의적인 사유와 지성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고민이 누락된 대학의 구조조정과 획일적인 변화는 새로운 야만의 얼굴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 포스트 5·18세대, 글과 영상으로 다시 본 그날의 진실

    포스트 5·18세대, 글과 영상으로 다시 본 그날의 진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앞두고 당시의 아픔을 알아보고 이를 현재에 되새기는 책과 영상물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가해자들은 사과도 하지 않고 일각에선 본질을 왜곡하며 조롱하는 상황 속에서,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손을 건넨다.출판사 리틀씨앤톡은 정복현 작가의 동화 ‘오월의 편지’를 최근 출간했다. 동화 속 주인공인 무진이가 할머니 댁에서 큰 아버지가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이를 대신 보냈더니, 시간을 초월해 1980년을 사는 용주라는 아이에게 답장이 온다는 줄거리다.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이 편지를 부치지 못했는지 궁금했던 무진이는 용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동안 몰랐던 5·18의 진실과 마주한다. 백성동 5·18민주화운동선도교사단 회장은 추천사를 통해 “잊지 못할 어제의 일이 오늘과 내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5·18의 장면을 선명한 이야기로 그려 냈다”고 평했다.고래가숨쉬는도서관은 임지형 작가의 동화 ‘영화 속 그 아이’를 오는 18일 낸다. 지난해 5·18을 다룬 영화 ‘낙화잔향’ 제작 과정에 참여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주인공 찬들이의 엄마가 영화에 출연하고, 찬들이도 엑스트라를 맡으면서 5·18의 진실에 대해 알아 간다. 찬들이가 이유 없이 계엄군에게 맞는 역할을 하면서 경험하는 심리 묘사로 당시 실상을 생생히 전하려 애썼다.한겨레출판은 청소년들이 5·18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수산나 작가의 역사서 ‘청소년을 위한 광주 5·18’을 출간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 사건에서부터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더 알아봅시다’, ‘더 생각해 봅시다’ 항목을 추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광주의 피해뿐 아니라 광주 시민만큼 힘들었던 계엄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오는 14일부터 28일까지 ‘DMZ랜선영화관 다락(Docu&樂)’ 유튜브 채널에서 5·18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기획전을 연다. 1980년 이후 태어났거나 성장한 젊은 감독들의 중단편 5편으로 구성했다. ‘포스트 5·18세대’가 당시 광주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를 현재에 연결하려는 과정이 눈에 띈다. 박영이 감독의 ‘우리가 살던 오월은’은 5·18 역사기행에 참가한 재일동포 4세 청년, 광주 지역 대학생들, 민주화 운동 참가자 등을 기록했다. 5·18과 식민, 분단, 냉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함께 엮었다. 보 왕 감독의 ‘속삭이는 잔해와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들’은 고문과 폭행으로 다친 시민들이 치료받던 국군광주병원을 찾아 먼지와 들풀, 부스러기를 응시하며 당시를 돌이키도록 한다. ‘쉬스토리’는 텅 빈 들판에서 펼치는 무용수의 공연과 1980년 광주를 산 여성들의 증언을 겹쳐 표현했다. 황준하 감독 작품으로, 지난해 대한민국대학영화제 특별상을 받았다. 개인의 일상을 통해 5·18을 마주하는 작품도 상영한다. 박은선 감독 ‘손, 기억, 모자이크’는 그림 작가 은선의 자기 고백을, 정경희 감독의 ‘징허게 이삐네’는 서울에 사는 수현을 통해 5·18 광주민화운동의 의미를 묻는다. 하종훈·김기중 기자 artg@seoul.co.kr
  • 또 역사 흔드는 日 “교과서에 ‘종군 위안부’ 아닌 ‘위안부’로 표기”

    일본 정부가 향후 자국 교과서에 ‘종군 위안부’가 아닌 ‘위안부’로 표기하는 것은 물론 이미 검정이 끝난 교과서도 위안부로 정정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1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유신회 소속 후지타 후미타케 의원이 정부가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을 칭찬하면서 교과서 검정에도 적용되는지 묻자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에 있어 정부의 통일적인 견해를 근거로 적절히 대응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앞으로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는 교과서에서 쓰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달 27일 각의(국무회의)를 열고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노동자 동원에 대해서도 ‘강제 연행’이 아닌 ‘징용’으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한 바 있다. 후지타 의원은 이미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내 종군 위안부 등의 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추가 질의했다. 이에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은 “교과서 검정 규칙에 근거해 종군 위안부나 강제 연행 등의 용어가 기재된 교과서를 발행하는 교과서 회사에서 각의 결정된 정부의 통일적 견해를 근거로 어떻게 검정이 끝난 교과서의 기술을 정정할 것인지 검토하게 된다”고 밝혔다. 사실상 출판사에 교과서를 수정하도록 압박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역사 왜곡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온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동원이라는 의미를 희석시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교과서에서도 물타기에 나서면서 역사 왜곡의 범위와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5·18 41주년 동화로, 영상으로…민주주의·인권 가치 일깨운다

    5·18 41주년 동화로, 영상으로…민주주의·인권 가치 일깨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앞두고 당시의 아픔을 알아보고 이를 현재에 되새기는 책과 영상물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가해자들은 사과도 하지 않고 일각에선 본질을 왜곡하며 조롱하는 상황 속에서,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함께 생각해보자고 손을 건넨다. 출판사 리틀씨앤톡은 정복현 작가의 동화 ‘오월의 편지’를 최근 출간했다. 동화 속 주인공인 무진이가 할머니 댁에서 큰 아버지가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이를 대신 보냈더니, 시간을 초월해 1980년을 사는 용주라는 아이에게 답장이 온다는 줄거리다.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이 편지를 부치지 못했는지 궁금했던 무진이는 용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동안 몰랐던 5·18의 진실과 마주한다. 백성동 5·18민주화운동선도교사단 회장은 추천사를 통해 “잊지 못할 어제의 일이 오늘과 내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5·18의 장면을 선명한 이야기로 그려냈다”고 평했다.고래가숨쉬는도서관은 임지형 작가의 동화 ‘영화 속 그 아이’를 오는 18일 낸다. 지난해 5·18을 다룬 영화 ‘낙화잔향’ 제작 과정에 참여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주인공 찬들이의 엄마가 영화에 출연하고, 찬들이도 엑스트라를 맡으면서 5·18의 진실에 대해 알아간다. 찬들이가 이유없이 계엄군에게 맞는 역할을 하면서 경험하는 심리 묘사로 당시 실상을 생생히 전하려 애썼다.한겨레출판은 청소년들이 5·18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수산나 작가의 역사서 ‘청소년을 위한 광주 5·18’을 출간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에서부터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더 알아봅시다’, ‘더 생각해 봅시다’ 항목을 추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광주의 피해뿐 아니라 광주 시민만큼 힘들었던 계엄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이밖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오는 14일부터 28일까지 ‘DMZ랜선영화관 다락(Docu&樂)’ 유튜브 채널에서 5·18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 기획전을 연다. 1980년 이후 태어났거나 성장한 젊은 감독들의 중·단편 5편으로 구성했다. ‘포스트 5·18세대’가 당시 광주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를 현재에 연결하려는 과정이 눈에 띈다. 박영이 감독의 ‘우리가 살던 오월은’은 5·18 역사기행에 참가한 재일동포 4세 청년, 광주 지역 대학생들, 민주화 운동 참가자 등을 기록했다. 5·18과 식민, 분단, 냉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함께 엮었다. 보 왕 감독의 ‘속삭이는 잔해와 소리없이 떨어지는 잎들’은 고문과 폭행으로 다친 시민들이 치료받던 국군광주병원을 찾아 먼지와 들풀, 부스러기를 응시하며 당시를 돌이키도록 한다. ‘쉬스토리’는 텅 빈 들판에서 펼치는 무용수의 공연과 1980년 광주를 산 여성들의 증언을 겹쳐 표현했다. 황준하 감독 작품으로, 지난해 대한민국대학영화제 특별상을 받았다.개인의 일상을 통해 5·18을 마주하는 작품도 상영한다. 박은선 감독 ‘손, 기억, 모자이크’는 그림 작가 은선의 자기 고백을, 정경희 감독의 ‘징허게 이삐네’는 서울에 사는 수현을 통해 5·18 광주민화운동의 의미를 묻는다. 하종훈·김기중 기자 artg@seoul.co.kr
  • 오은·조해진 문학 외국어로 듣는다…15일부터 한국문학 교차언어 낭독회

    오은·조해진 문학 외국어로 듣는다…15일부터 한국문학 교차언어 낭독회

    한국문학번역원은 5월부터 10월까지 전국 9개 도시에서 ‘2021 온·오프라인 한국문학 교차언어 낭독회’를 개최한다고 10일 밝혔다. 2017년부터 시작해 5년째를 맞는 교차언어 낭독회는 한국 시인과 소설가가 번역가와 한 무대에서 만나 한국어와 외국어로 작품을 낭독하는 문화 교류 행사다. 이번 낭독회 주제는 ‘역:시’(譯:詩)’와 ‘역:설(譯:說)’이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과 만나는 한국문학의 현재를 국내 대중들에게도 알리려는 취지로 기획됐다. 올해는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여 문학과 언어에 관심 있는 지역 내 대학·고등학생들에게 외국어 번역 및 낭독 기회를 제공하는 등 독자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마련된다.총 11번의 행사 가운데 서울에서는 K현대미술관에서 오는 15일 오은 시인(스페인어, 프랑스어), 22일 조해진 소설가(일본어)의 낭독회가 개최된다. 이어서 10월 16일에는 대학로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김복희 시인(아랍어)의 낭독회가 열린다. 예컨대 오 시인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시집에 실린 7편을 한국어로 낭송하고, 번역가 2명이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낭송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8번의 지역 낭독회는 오는 6월 강원 원주를 시작으로 전주, 인천, 진주, 대전, 광주, 충주, 수원까지 이어진다. 유승도(러시아어), 유강희(프랑스어), 김언희(러시아어), 손미(영어), 최정진(영어), 이안(스페인어), 김태형(베트남어) 등 시인 7명과 표명희(중국어) 소설가가 참가한다.현장 관람이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유튜브를 통한 생중계(https://youtube.com/Ltikorea)도 예정돼 있다. 상세 일정 등은 서울국제작가축제 공식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siwf_insta/)과 아침달 출판사 블로그(https://blog.naver.com/achimdalbooks)에서 확인 가능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작가 울리는 ‘깜깜이 서적 유통’ 출판전산망이 눈물 닦아줄까요

    작가 울리는 ‘깜깜이 서적 유통’ 출판전산망이 눈물 닦아줄까요

    영화나 공연 티켓처럼 서적 판매량을 투명하게 알 수 있는 ‘출판유통통합전산망’(출판전산망)이 오는 9월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된다. 최근 과학 장르 전문 출판사 아작이 작가들에게 계약금과 인세 일부를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이는 가운데, 출판전산망이 고질적인 ‘깜깜이 서적 유통’을 막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장강명 작가 “불투명· 비도덕적 유통관행 바꿔야” 박은주 아작 대표는 지난 1일 “여러 작가에게 판매 내역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면서 사과문을 올렸다. 아작은 자사와 계약하고 책을 출간한 작가들에게 줘야 할 계약금과 인세 일부를 누락하고, 작가와의 협의 없이 오디오북을 발행했다. 피해 작가 중 한 명인 장강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영화는 전국 관객이 몇 명인지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공개되는데, 작가들은 자기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출판사에 의존하는 것 외에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내 출판계에 오래도록 뿌리내린 채 개선되지 않는 불투명하고 비도덕적인 유통 관행 개선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아작은 사과문에서 “출판유통통합전산망에 가입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장 작가도 “출판사와 서점들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준비 중인 통합전산망에 가입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출판계는 이번 사태에 대해 신진 작가나 인지도가 낮은 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피해는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김가경 작가는 “장 작가가 인지도가 있어 그나마 목소리를 냈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들은 출판사에 찍힐까 봐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다”면서 “작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판사가 2쇄, 3쇄를 내는 사례도 적잖다”고 지적했다. 조광희 작가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출판계약서에는 인세 정산에 관한 방식과 시기 등을 명시하는데, 이 계약서대로 실행이 잘되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게 문제”라면서 “작가 혼자서 나서기엔 불편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풍토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책의 유통 과정과 재고 상황 등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서 시작된다. 서점은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판매하고, 안 팔린 책은 출판사로 반품한다. 출판사, 유통사, 서점은 책 판매와 반품 수량을 공유한다. 그러나 각각 다른 시스템을 쓰기 때문에 사실상 전체 책 판매량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대형 체인서점과 온라인서점은 자체 판매관리시스템인 공급망관리(SCM) 서비스를, 지역서점은 판매관리시스템 현황을 모아 집계하는 서점온 시스템을 쓴다. 이러다 보니 서점마다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결과도 모두 다르다.●캐나다·독일·일본·프랑스선 이미 활성화 무엇보다 작가들이 책 판매량을 확인할 수 없어 잡음이 불거진다. 출판사가 통보해 주지 않으면 자신의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알 길이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작가 1532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3%가 “책 판매량을 출판사로부터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김대현 한국작가회의 저작권위원장은 “출판사가 작가들에게 분기나 반기별로, 혹은 연간으로 인세가 얼마나 들어왔는지 알려줘야 하는데 이를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판매량 집계를 확인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오는 9월부터 운영하는 출판전산망은 기존 제각각이었던 출판·유통 정보를 하나로 통합해 제공한다. 출판사가 책 제목, 저자명,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출간일, 가격 등의 서지정보를 입력하면, 유통사와 서점이 이를 공유해 활용한다. 특히 책을 구입했을 때 결과도 통합해 집계한다. 출판물의 생산부터 판매까지 정보를 통합 관리해 유통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2017년 1월 송인서적 부도 이후인 2018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앞선 사례로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과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을 들 수 있다. 영화나 공연 티켓을 구입하면 어느 곳에서 얼마나 봤는지 전산화했는데, 이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해 투명성을 높였다. 예컨대 영화전산망 홈페이지(www.kobis.or.kr)에 들어가면 개별 영화에 대한 정보는 물론, 관객 수와 해당 영화의 일별 매출액, 전체 매출액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박스오피스 순위도 전국적으로 통합돼 나온다. 많은 나라에서 서적 분야 통합전산망을 이미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의 북넷캐나다, 독일의 엠파우비, 일본의 JPO, 프랑스 CLIL 등이다. 북넷캐나다는 책에 대한 정보가 279만건, 엠파우비는 정보 건수가 210만건에 이른다. ●빅데이터로 시장트렌드 파악·반품도 줄여 출판진흥원 측은 출판전산망을 통해 책의 판매량을 투명하게 알고, 판매 정산도 정확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김진우 출판진흥원 출판유통선진화센터장은 “출판사가 도서 정보를 기반으로 도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하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빅 데이터로 경영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서점과 유통사는 데이터를 활용해 시장 트렌드를 파악하고 반품률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수요 높은 책을 적시에 보유할 수 있어 재고 관리와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출판전산망이 영화전산망이나 공연전산망처럼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출판사, 유통사 서점 등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따라가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송성호 대한출판문화협의회 상무이사는 “한 해 나오는 영화가 300개 안팎에 불과한 영화계 사정과 출판 쪽은 상황 자체가 아주 다르다. 작은 출판사부터 시작해 대형 출판사까지 5000개 안팎 출판사가 한 해에만 8만종의 책을 내고 있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고 말했다. 현재 출판진흥원은 1600개 출판사가 출판전산망에 회원으로 돼 있지만, 시스템이 적용되면 얼마나 정보를 공개하고 따라올지에 대해서는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서점에서 출판전산망을 달가워하지 않는 일도 걸림돌이다. 통합전산망 시스템을 서점들이 사용하는 판매시점정보관리(POS) 시스템에 설치해야 하는데, 매출이 이 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송 상무이사는 “출판진흥원 측은 통합전산망 운영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와 보상에 대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언급이 없다”고 지적했다. ●서점선 매출 노출 부담… 지역별 공개도 고려를 출판전산망이 성공하려면 우선 해당 업체의 가입 의무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참여에 따른 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영화전산망은 가입 의무조항도 법에 명시하고, 운영 주체인 영화진흥위원회가 가입 영화관에 전송지원금을 준다. 영화상영 신고를 면제하는 혜택도 줬다. 이에 따라 스크린 연동률이 99%에 이른다. 반면, 법적 의무조항 없이 시작했던 공연예술전산망은 2018년 데이터 수집률이 38%에 그쳤는데, 이듬해 각 예매처의 티켓 발권 데이터 전송 의무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김 센터장은 이와 관련, “현재 출판사와 서점 등을 대상으로 교육과 홍보로 가입에 따른 이점을 알리고 있다”면서 “직접적으로 서점 판매 자료를 공개하는 일을 꺼린다면, 지역별로 집계해 일부 공개하는 방식도 가능하다.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좀더 확보해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기중·하종훈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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