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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개월 만에 수익률 8%… ‘건강한 돈’ 보여줄게요”

    “5개월 만에 수익률 8%… ‘건강한 돈’ 보여줄게요”

    기자들과 노작가 사이에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논쟁이 오갔다. 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허영만(70) 화백의 주식투자 만화인 ‘허영만의 3천만원-주식에 빠지다’(가디언출판사) 출간 언론 간담회에서다.허 화백은 지난해 7월부터 종잣돈 3000만원을 주식에 투자하고 실제 매도·매수한 종목에 대한 분석과 수익 결과를 웹툰으로 그려 매주 웹진 채널예스에 연재하고 있다. 신간은 그 연재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은 첫 권이다. 왕초보인 허 화백은 홀로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다. 만화 기획 과정에서 선정한 주식투자대회 수상자 출신의 전업투자자 등 자문단 5인이 600만원씩 계좌를 나눠 각자 스타일에 따라 투자할 주식을 선정하면 허 화백이 집행한다. 투자 밑천은 허 화백 지갑에서 나왔지만 실제 투자 종목 선정부터 매도·매수 대응, 시장 대처 등 주요 소재는 자문단 취재를 통해 습득한다.간담회에서는 ‘왜 이제서야’라는 의구심도 적지 않았다. 미국의 전설적 투자가 워런 버핏이 직접 쓴 투자철학서부터 추종자들이 쓴 수많은 번역서가 출간돼 있고, 국내에서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체불명 대박 비법서가 난무하는 출판 시장에 주식투자는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닐까라는 인식부터 잘못된 투자 정보를 제공하게 될 위험성 등에 대한 지적도 제기됐다. 허 화백은 담담했다. 그는 “평생 만화를 그리며 여윳돈은 은행 통장에 넣어 뒀다”며 “하지만 내 손주들이나 젊은층은 나처럼 살지 말고 주식 투자를 통해 경제와 돈에 대한 안목이나 역량을 키우는 게 좋다고 믿게 됐다”고 말했다. 주식 투자를 만화로 그리겠다는 기획은 두 번이나 엎어졌다. 2015년 8월 직접 주식 투자를 하고 그 수익을 공개하는 주식 웹툰을 기획했지만 자칫 작전 세력에 이용될 수 있다는 주변 만류로 포기했다. 그 후 전문가가 포함된 자문단을 꾸려 재시도했지만 ‘시장질서교란행위방지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답보 상태였다. 돌파구는 모 증권사 법률팀에서 나왔다. 매도·매수가 이뤄진 뒤 2주일 후에 그 내용을 연재하는 식의 ‘안전장치’를 두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지난달 15일 공개된 그의 주식 통장 잔고는 3142만 9963원(자문위원 1명이 최근 추가 합류해 현재 운용금은 3600만원이다)이다. 종잣돈 3000만원을 뺀 수익금은 142만 9963원이다. 허 화백은 “8월부터 5개월 만에 8% 수익을 거둔 건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코스닥이 (같은 기간) 너무 올라 돋보이는 수익은 아니다”라면서 “어쨌든 골병이 생긴 대가”라며 웃음을 지었다. 집필 작업에 방해돼 평소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도 잘 확인하지 않던 그는 이 연재를 시작한 후 증시 거래 시간인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휴대전화를 거의 놓지 않는다. 자문단의 단체 카톡방에 수시로 뜨는 매도·매수 메시지도 확인해 처리한다. “자문단의 매수 추천 종목을 다 공부하고 분석한다”는 그는 “일흔 살인 나도 이 웹툰 연재를 위해 40여권의 주식투자 책을 공부하고 30여명의 고수를 만났다”며 “몰빵하지 말고, 모르고 덤비면 판판이 깨진다. 반드시 자신의 결정으로 투자하라”는 초보의 기본자세를 제시했다. “주식 웹툰은 사전에 스토리를 짜 놓고 시작했던 ‘타짜’나 ‘식객’과는 완전히 달라요. 콘티가 없는, 정말 그때그때 시장 변동에 따라 만화 내용도 달라지거든요. 제 목표는 주식투자 이야기를 통해 ‘건강한 돈’을 보여 주는 거예요. 모두가 워런 버핏이 될 수 없듯이 각자 지향하는 투자의 정석이 있겠지만 전 독자들이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킨제이 밀혼의 알파벳 추리 시리즈 작가 수 그라프톤 77세를 일기로

    킨제이 밀혼의 알파벳 추리 시리즈 작가 수 그라프톤 77세를 일기로

    각기 다른 알파벳 철자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미스터리 소설인 킨제이 밀혼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미국의 범죄소설 작가 수 그라프톤이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딸 제이미 클라크는 모친이 2년 동안 암과 투병하다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자택에서 남편 스티브를 비롯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 28일 밤(이하 현지시간) 영면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을 통해 밝혔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고인은 18세 때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해 4년뒤인 1962년에 장편소설 한편을 탈고하고 다음해 한꺼번에 6편의 원고를 집필해 출판사에 넘겼다. 이 중 두 편이 각각 1967년과 1969년에 출간되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자 생업을 위해 10여년 텔레비전 방송작가로 일하다 40대에 범죄소설 작가로 전업해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두 차례 이혼 경력이 있고 화초도 애완동물도 키우지 않고 외모에도 별반 관심이 없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늘 존대하는 매력적인 여자 탐정 킨제이 밀혼을 창안해낸 그는 A부터 Y까지 각기 다른 알파벳 철자가 소설의 주제를 이루는 매력적인 시리즈로 26개국 언어로 번역될 정도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도 1990년대 중반 큰나무 출판사가 1편 ‘여형사 K’와 2편 ‘두 얼굴의 여자’, 3편 ‘말없는 목격자’까지 번역해 냈으나 반응이 시원찮았는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첫 편 ‘A is for Alibi’는 1982년 세상에 나왔으며 마지막 ‘Y is for Yesterday’는 지난 8월 출간됐는데 출간된 지 얼마 안돼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2019년에 ‘Z is for Zero’가 출간되면 이 시리즈는 37년만에 26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이었다. 훨씬 더 유명한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같은 식의 제목을 사용하려 했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그라프톤의 전매 특허나 다름 없으니 다른 제목으로 바꾸라고 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딸 제이미는 성명에서 “우리 가족이 걱정했던 대로 알파벳 Y에서 막을 내리게 됐다”며 “이런 날이 올지 알았지만 예상 못할 정도로 빨리 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호전됐는데 그 뒤 갑자기 안 좋아졌다. 평소에도 늘 주스를 마실 힘만 있으면 계속 집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고인은 영국범죄작가협회와 미국 미스터리작가협회 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발 맥더미드는 고인이 “놀라울 정도로 내게 관대했다”고 적었고, 사라 파레츠키는 “킨제이 시리즈가 첫 출간된 1982년에 자신의 작품 ‘VI’도 세상에 나온 뒤 둘의 작품세계가 쌍둥이처럼 연결돼 있었다”며 크나큰 손실이라고 추모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김유민의 노견일기] 아들의 모든 것이었던 해모와의 이별

    [김유민의 노견일기] 아들의 모든 것이었던 해모와의 이별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이 파주로 이사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을 키울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헤이리에 집을 짓기로 결정한 직후 아들은 그동안 책으로만 익히고 연정을 키워 온 수많은 애완견 중에서 어떤 견종을 택할 것인가로 며칠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아들은 정원이 있는 헤이리로 이사한 뒤 초등학교 6년 동안 저축했던 통장을 깨 블루멀 콜리를 분양받았습니다. 영리해서 자신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은 물론, 목양견으로 많은 운동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운동을 좋아하는 자신과 매일 함께 뛸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잠깐이었습니다. 1개월 뒤 희귀견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헤이리의 다른 집 애완견 2마리와 함께 도난당한 것입니다. 결국 녀석을 되찾는 것은 실패했고 다시 같은 부모의 형제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도 잠시였습니다. 장염으로 세상과 이별한 것입니다. 연거푸 슬픔을 당한 아들의 성화로 다시 저희 식구가 된 애완견이 해모였습니다. 해모는 아들의 바람대로 우리 식구의 일원으로 잘 적응했습니다. 아들은 중학교 방과 후 시간의 대부분을 해모와 함께했습니다. 아들이 서울로 돌아간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모는 순전히 저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해모의 생활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과는 뛰는 운동이었다면 저와는 걷는 산책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들과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면 저와는 각자 홀로 지내야 하는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할 일이 적지 않은 제가 해모에게 내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재 밖에서 나를 또는 먼 산을 묵묵히 바라보던, 또 저희 가족의 공간인 모티프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해모를 보면서 사람에게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선한 성정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해모와 함께한 11년간은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번의 가출로 온 가족이 애를 태웠고, 두 번의 심장사상충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생환했습니다. 출판사 웅진이 낸 자연 생태전집의 반려동물 주인공으로 뽑혀서 해모의 일생이 ‘소중한 우리 가족, 해모’라는 동화책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모두 객지로 나가있는 아이들이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라도 하면 해모의 안부를 묻는 것이 제일 먼저였습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근무 중인 딸, 영국에서 공부 중인 아들 등 함께 모일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해 해모가 함께하는 가족의 그림을 그려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대형견은 소형견보다 대체적으로 수명이 짧습니다. 해모도 10살을 넘기고부터는 활발했던 운동성이 둔화되고, 산책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11살이 되어서는 노화 현상이 더욱 뚜렸해졌습니다. 급기야 작년 7월에 들어서는 뒷다리의 힘이 빠져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하곤 했습니다. 해모와의 마지막 산책은 8월 1일 저녁이었습니다. 헤이리 한 바퀴를 뛰어도는 기력은 온데간데없고, 밤나무골 한 바퀴를 도는데도 힘겨워했습니다. 마침내 2일 오전, 마당 한 바퀴를 도는 것을 끝으로 오후부터 앓아 누웠습니다. 3일에는 좋아하던 통조림 오리고기조차도 먹지 못했습니다. 첫째 딸이 서울에서 급히 와 해모를 차에 태워 단골병원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50분 뒤 해모는 11년간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해모는 한 줌의 재로 제게 돌아왔습니다.해모는 특히 아들의 모든 것이다시피 했습니다. 아들이 군 복무 중인 터라 해모가 천수를 다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군에 매인 몸이라 해모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심이 너무 클까봐 걱정됐습니다. 우리 가족은 유골을 보관해뒀다가 휴가 나온 아들과 함께 해모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해모의 유품을 바로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4일 뒤에야 해모의 물통과 밥통을 거두었습니다. 해모가 남긴 온전한 사료, 심장사상충 및 회충약, 북어포와 간식, 방석 등은 대형견을 키우는 이웃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속의 통조림은 길냥이에게 주었습니다. 서재에서 글을 쓰다가 눈을 들면 해모가 늘 앉아 나를 바라보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있던 서재 밖 발코니가 너무 휑하게 느껴져서 한동안 블라인드를 내려놓았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블라인드를 올렸더니 해모가 있던 그 자리는 고양이 차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해모가 있었을 때는 얼씬도 않던 고양이들의 휴식처가 된 것입니다.지금도 발코니를 차지하고 서재를 들여다보는 고양이들이 해모와의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들추어내곤 합니다. 목숨을 다한 나무가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와 둥지가 되어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슬프고 끔찍하게 느껴졌던 그 소멸의 모습이 점점 더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자신을 빛내는 일이었습니다. - 해모의 가족, 헤이리마을 이안수 선생님으로부터 (해모의 이야기 전편 ▶소중한 가족, 해모의 노년)한국에서는 해마다 약 8만 2000마리의 유기동물이 생겨납니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들이 받는 대우로 짐작할 수 있다”는 간디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법과 제도, 시민의식과 양심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생명이, 그것이 비록 나약하고 말 못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다 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노견일기를 씁니다. 반려동물의 죽음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렵고, 그래서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유난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늙은 반려동물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오랜 시간 동물과 함께 했던, 또는 하고 있는 반려인들의 사진과 사연을 기다립니다. 소중한 이야기들은 y_mint@naver.com 로 보내주세요.
  • [문화마당] 다가오는 것/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다가오는 것/강의모 방송작가

    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이가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순간 갈등한다. ‘누굴까. 모르는 얼굴인데….’ 몇 걸음 가까워지는 아주 짧은 순간이 매우 혼란스럽다. 잠시 미적거리는 사이, 그는 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휙 지나가 버린다. 황망하여 돌아보니 내 뒤의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당혹한 감정을 헛웃음으로 눙치며 다시 길을 걷는다.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나를 향해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버린 그 또는 그것. 집에 돌아오자마자 IPTV로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2016)을 찾아냈다. 처음 봤을 땐 이자벨 위페르의 강퍅한 표정에 마음이 쏠려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되잖게 나의 삶을 투영시키다 보니 좀 아프기도 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비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영화가 문득 생각났다. 다시 결제를 하고 텅 빈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속엔 이자벨 위페르가 혼자 빠르고 조급하게 걷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온다. 늙음에 저항하며 딸의 삶을 훼방하는 홀어머니, 25년을 함께 살다 갑자기 다른 여인에게로 떠나버리는 남편, 철학교사로서 올곧게 지켜온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출판사 등등. 잔인하게 다가오는 그 모든 것들을 빠르게 지나치고자 그녀는 그리도 걸음을 재촉했을까? 빠르게 다가온 건 금세 지나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잊힌다. 천천히 다가온 건 서서히 스미며 오래 남아 생을 지탱한다. 그녀를 절망시켰던 것들은 다가온 속도대로 사라졌다. 그녀를 지킨 건 오랫동안 마주하며 착실하게 쌓아 온 이성과 가치였다. 그녀는 수업을 하며 이런 글을 읽는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람 불어 오는 삶의 한 지점에서 온전히 자유와 품위를 찾아낸 한 인간의 여정을 다룬 탁월한 여성 영화이면서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다.’ 자유와 품위, 내 생각에 이 둘을 갖추는 건 모든 걸 갖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젊은 날엔 감히 욕심낼 수 없는 경지다. 늙음을 감추지 않는 위페르의 얼굴과 몸은 얼마나 당당한가. 쓸쓸하고 허탈해지기 쉬운 연말에 이 영화로 마음을 다독인 건 참 좋은 선택이었다. 박재삼의 시 ‘千年의 바람’이 생각났다.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 이 시에 매료되었던 게 20대 초반인데, 여전히 좋다. 이미 그때부터 천 년의 바람 속에 내 삶을 아주 작은 점으로 보고자 노력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여전함이 그동안 내게 다가온 것들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 세 걸음 남은 2018년도 성급하게 마주하면 그만큼 빨리 스쳐갈 것이기에, 되도록 느긋한 맘으로 천천히 맞을 참이다. 자연에 반항하지 않는 속도로.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연말이 되면 늘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책에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책을 좀더 많이 읽는 편이다. 돌이켜 보니 올해도 거의 2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는데 매년 한두 권 정도는 작품성과는 별개로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책이 있다. 올해 내게 그런 책은 ‘모눈종이 위의 생’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조선작’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 이름은 성별조차 짐작하기 어려워서 이미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리기 어려운 작가다.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사람에게 “그럼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는 아시죠?”라고 물으면 또 열에 아홉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어도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다.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그 작품을 쓴 작가가 바로 조선작이다.1940년 대전에서 태어난 조선작은 1960년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교사로 일하며 신춘문예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신춘문예 심사를 자주 했던 김동리 작가가 말하길, 조선작이 글 솜씨는 뛰어났는데 작품의 소재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당선작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한국전쟁을 맞았고 그때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가난에 찌들어 자란 청년이 명랑하고 건전한 소설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1년 월간 ‘세대’ 잡지에 ‘지사총’으로 등단한 후에 펴낸 그의 작품 속엔 이렇듯 가난, 억압, 방황, 소외, 부조리 같은 암울한 느낌이 가득했다.‘모눈종이 위의 생’은 조선작이 ‘영자의 전성시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1970년대를 마감한 직후에 써낸 작품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제목으로만 보자면 꽤 건전하고 긍정적인 내용인 것 같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다가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중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영자에게 전성시대라는 게 찾아올 수 있을까? 영자는 결국 사창가로 흘러들어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는데 여기서 약간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영자를 좋아하는 청년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의수 덕분에 손님이 늘어 돈을 좀 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창가 골목에 화재가 나서 영자는 거기서 허망하게 죽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의 작품이 대개 이런 식이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인생들은 끝까지 피로한 삶을 살다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나버린다. 그것이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정권이 바뀐 1980년대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1년에 조선작은 한국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는데 그것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 ‘모눈종이 위의 생’이다. 소설은 내용과 설정 면에서 그전까지 써 오던 조선작의 작품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들이 밑바닥 계층이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안종희’는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6년 전 어떤 사건 때문에 결혼식 직전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다.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있는 ‘한민일’은 인기 있는 소설가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안종희가 한민일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는 내용으로 흡사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을 가진 특이한 작품이다. 안종희는 치밀한 작전을 바탕으로 한민일의 심리상태마저 이미 손바닥 위에 놓고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행동하는데 그 시작은 북악에 있는 ‘P호텔’에서부터다. 사실 P호텔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혼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던 커피숍이 있는 곳이다. 어머니는 여기서 만나주지 않는 남편을 며칠 동안이나 같은 시간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P호텔은 소설 속에서 “세검정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터널 입구에” 위치해 있고 5층이라는 단서로 미루어 보아 1980년대 북악터널 근방에 있던 ‘북악파크호텔’이 그 모델일 것으로 추측한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오는 P호텔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장(章)의 제목이 ‘북(北)호텔’이기도 하고 주인공 자신도 호텔 근처에서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어느 시인이 쓴 같은 이름의 시집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정확한 이름을 밝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1979년에 민음사에서 초판을 펴낸 김영태 시인의 시집 ‘北호텔’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북호텔’은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영화로 이어지며 조선작의 소설이 영화의 내용과 연계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외젠 다비가 1929년에 발표한 소설 ‘북호텔’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P호텔은 소설 초반에 한 번 등장했다가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한 번 나온다. 모든 희망을 잃은 안종희가 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죽을 장소로 첫 장에서 어머니와 만났던 P호텔을 선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장 제목이 ‘북호텔’이기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P호텔의 정식 명칭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수면제를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쓰는 유서에서 느닷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을 ‘북호텔’이라고 쓴다는 점이다.외젠 다비의 소설 ‘북호텔’ 역시 죽음과 관계가 있다. 파리 10구 운하 근처에 있는 4층짜리 호텔은 온갖 인간 군상들이 머물다 떠나는 곳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거리 없이 그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할 뿐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 쌍의 연인이 동반자살을 하려는 목적으로 북호텔에 투숙한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에게 총을 쏘고 뒤이어 자신에게도 총을 쏘는 방법이었지만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이 나중에 겁이 나서 도망가버리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그런데 ‘모눈종이 위의 생’에서 북호텔에 투숙한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혼자다. 당연히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 죽기로 결심하기 전 안종희는 과거의 연인 한민일을 조사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치밀하게 준비했고 완벽하게 실행했다. 모든 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안종희의 뜻대로 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것이 적용될 수 없었다. 이것이 안종희가 절망한 이유다.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이 계획하고 마치 건축가가 모눈종이 위에 완벽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실상 인간의 삶이란 거대한 모순 덩어리임을 깨달았다. 나중에 가수가 된 주인공의 동생 안세호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서로 모순의 별들. 한동안 우리의 길을 잃은들 어떠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번 실수하고 상처도 받는다. 그것이 거름이 되어 또 조금씩 발전한다. 조선작은 신문 연재가 끝난 후 ‘모눈종이 위의 생’을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신작사’(新作社)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나중에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여전히 이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작의 여러 작품을 알고 있지만 정작 조선작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 작가가 소설에서 쓴 것처럼 이것도 굳이 애써서 풀지 않아도 될 하나의 모순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2017 문화계 결산] 성찰 부른 女風… 위로 건넨 대화

    [2017 문화계 결산] 성찰 부른 女風… 위로 건넨 대화

    올해 문학 출판계는 ‘82년생 김지영 신드롬’을 시작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다채롭게 한 작품들이 앞다퉈 출간되며 동시대 독자들과 교감했다. 30대 여성 작가들은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문단 내 세대교체를 뚜렷이 확인시켜 줬다. 출판계는 구어체로 대표되는 읽기 문화가 자리 잡았고, 독자들에게 위로와 힐링의 메시지를 던진 책들은 베스트셀러 순위를 역주행하며 인기를 끌었다.■‘82년생 김지영’ 페미니즘 불붙여… 30대 女작가 문단 세대교체 극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문장이 빼어나게 유려한 것도 아니었다. 작가는 거의 무명이었다. 1년에 400편 이상 쌓이는 투고작 가운데 편집자 눈에 우연히 띄어 펴 나온 작품이었다. 여기까지만 열거해도 ‘베스트셀러’의 요건과는 배치된다. 하지만 이 책은 올해 문단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반성과 성찰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현상’이 됐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 ‘82년생 김지영’이다. 소설은 지난해 10월 출간됐지만 올 한 해 드라마틱하게 판매 순위를 거슬러 올라갔다. 지난 3월 금태섭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5월 노회찬 의원이 청와대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하면서 화력이 붙었다. ●차별받는 여성 내면 세밀하게 조명 시사교양 프로그램 방송작가 출신답게 작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성들을 무력하고 무참하게 만드는 차별과 억압을 세밀하게 복원해 공감과 자성, 비판 등이 뒤섞인 반응을 한 몸에 받았다. 책은 지금까지 50만부가 팔려 나가며 화제성 측면에서 올해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대가들의 신작은 물론 국내 주요 작가들의 신작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이 도화선이 되며 문단에서는 강화길의 ‘다른 사람’, 김혜진의 ‘딸에 관하여’,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 등 여성 혐오, 데이트 폭력 등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이 잇달아 출간됐다.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1990년대 여성 작가들이 여성이 겪는 폭력 문제를 미학적인 장치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면 최근의 영페미니즘 소설들은 여성들을 의식적으로 정치적 주체로 그려 내며 여성에 대한 갖가지 폭력과 싸우고자 하는 사회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한다”고 평가했다.30대 여성 작가들의 약진도 돋보였다. 김애란(동인문학상), 손보미(대산문학상), 김금희(현대문학상) 등 30대 여성 작가들의 잇단 주요 문학상 수상 소식은 문단의 세대교체를 확연히 실감케 했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위선과 예술에 대한 몰이해, 비뚤어진 엄숙주의를 돌이켜 보게 했다. ●국립한국문학관 논의 본격화 지난해 지방자치단체의 과열된 유치 경쟁으로 중단됐던 국립한국문학관 논의도 본격화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1년 개관을 목표로 내년 상반기 문학관 조직과 인력, 예산 계획을 마련할 설립추진위원회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학 자료 수집·보존 대책을 세울 자료수집위원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문학관 부지로 잠정 결정된 서울 용산공원에 대해 서울시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상황이라 진통이 예상된다. 문체부는 최근 부지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시를 포함한 민관 협의체를 꾸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 관계자는 21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용산 부지를 전제로 하는 협의체라면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라틴어 수업’ 등 구어체 출판 트렌드… 감성 메시지 호응받아 “우테레 펠릭스.”(Utere Felix·읽고 행복하길)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의 저자 한동일 서강대 교수는 지난 6월 출간한 자신의 책을 선물할 때면 옛 로마인들이 말했던 라틴어 인사를 건넨다. 가톨릭 사제로 한국인 최초(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대법원(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한 교수의 ‘라틴어 수업’은 올해 출판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구어체로 쓴 책 몰입감 높아 인기 한 교수의 서강대 교양강좌 수업인 ‘초·중급 라틴어’ 강의를 엮은 이 책은 입소문이 돌면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했고, 반년 만에 10만권이 넘게 팔렸다.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듯 구어체로 쓴 이 책의 인기는 출판계에 확산 중인 ‘읽기 문화’의 변화를 보여 준다. 2015년 이후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와 지난해 베스트셀러인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등 몰입감이 높은 구어체 책들이 대중화된 이래 이런 추세가 공고해지고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딱딱한 문어체보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구어체 형태를 소구하는 독자층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이를 반영하듯 촛불과 탄핵 정국으로 얼어붙은 출판 시장을 녹인 건 따뜻한 언어였다. 올해 대형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책들을 봐도 ‘읽고 행복한’ 책에 대한 대중의 갈구가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다. 70만권 넘게 팔린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말글터)와 50만권을 돌파한 정신과 전문의 윤홍균 작가의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은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한다. 독자는 책을 통해 지식만 얻기보다는 가슴을 콕 찌르는 감성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라틴어 수업도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조언과 응원을 담고 있다. ●1인 출판사 존재감 확연 아울러 ‘1인 출판사’의 존재감도 확연했다. 올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두 책 모두 출간 후 6개월이 지나 순위를 역주행하는 뚝심을 발휘했지만 무엇보다 1인 출판사가 기획하고 펴낸 것이어서 화제가 됐다. 이기주 작가는 저자인 동시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박경란 심플라이프 대표는 “불확실성이 크고 사회적 압력과 집단 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삶을 다룬 책에 주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라틴어 수업은 청년들의 감수성에 부응한다. 한 교수는 그의 수업에서 청춘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당신은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그에 얽힌 라틴어 문구가 있다.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Dilige et fac quod vis·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이 밖에 올해 출판계는 탄핵, 대선, 새 정부 출범 등 연이은 정치적 격동의 영향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사회 분야 도서에 대한 관심이 유독 높았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화마당] 책을 잘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책을 잘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몇 해 전 겨울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한국의 출판기획자들’이라는 제목으로 ‘후배 출판인이 선배 출판인을 만나 물어본다’는 것이 콘셉트라고 했다. 나의 임무는 열린책들 홍지웅 대표를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출판 경력이 일천한 나로서는 당연히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혼자서 책상에 앉아 끙끙거리며 칼럼을 쓰는 거라면 몰라도 누군가를 만나 그 과정을 글로 쓰는 건 자신이 영 없었다. 이럴까 저럴까 꽤 오래 망설였다. 결국 하기로 한 건 이것도 소중한 경험이 될 거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홍지웅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 나는 인터뷰할 생각이 없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거다. 나는 당연히 기획회의와 홍지웅 대표 사이에 사전 조율이 다 끝난 줄 알고 그가 쓴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를 사서 몇 날 며칠에 걸쳐 꼼꼼하게 읽고 난 후였는데 인터뷰를 못하겠다니. 왜 안 하겠다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이미 많이 했고 보나 마나 뻔한 질문과 답변이 오갈 텐데 굳이 또 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 되자 나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여느 인터뷰와 다를 게 없는 하나 마나 한 인터뷰로 귀결되면 게재하지 않겠다”고 짐짓 건방을 떨었다. 홍지웅 대표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까마득한 후배가 묘하게 열을 내니 황당하기도 하고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는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그래? 그럼 와서 밥이나 먹고 가든가”라는, 승낙도 거절도 아닌 뜨악한 얘기를 들은 후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장소는 열린책들 사옥, 당초 약속한 두 시간을 넘겨 네 시간 가까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시큰둥한 표정이었던 그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것은 역사를 자기합리화하여 늘어놓는 뻔한 서사가 아니라 나에게 공부가 되는 이야기였다. 건축과 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도 영향을 줬겠지만, 그는 직감을 중시하는 예술가 타입의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타입의 인간이 갖는 대체적인 성향과 달리 행정적인 실무에도 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열린책들의 직원이었다면 스트레스를 받아 종교에 귀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왜냐. 유능한 대표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꺼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대목은 그 새로운 것을 설명할 때다. 대표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일단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추진할 수 있지만 직원들은 다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열린책들에서는 직원들끼리 배우고 익히는 상호협동적인 분위기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물론 재주 많은 사장이 직원들을 부지런히 채근한 결과이기도 하리라. 결과적으로 그 인터뷰는 ‘여느 인터뷰와 다를 게 없는 하나 마나 한 인터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다면 오늘 내가 받은 ‘출판사를 만들다 열린책들을 만들다’에 게재하지 않았겠지. 이 책은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획작이다. 표지부터 색인까지 지금껏 자신들이 만든 책에 대한 생각과 각종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읽고 있자니 홍지웅 대표 말대로 소신을 가지고 색깔을 만들어 가면 언젠가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30주년도 도래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앞으로 18년 남았구나. 그때쯤 나도 이런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
  • [말빛 발견] 동사가 된 ‘잘생기다’/이경우 어문팀장

    [말빛 발견] 동사가 된 ‘잘생기다’/이경우 어문팀장

    지난 4일 국립국어원은 ‘잘생기다’가 ‘동사’라고 발표했다. 더 정확히는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변경된 내용을 안내했다. 그 가운데 ‘잘생기다’가 ‘동사’로 바뀐 사실이 들어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독자들은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뜨겁게 반응했다. 오랫동안 ‘형용사’였고, 아무리 살펴도 형용사인데, 동사라고 하니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표준국어대사전이 민간 출판사의 국어사전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국가가 편찬한 것이어서 더 권위가 있었고, 기준이 돼 왔다.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찍는 데도 신중했다. 표준사전의 독자들이 ‘국민’이기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국민의 자격으로 사전을 ‘감시’도 했다. 열흘쯤 뒤 국어원은 알림 글을 다시 홈페이지에 올렸다. ‘잘생기다’는 형용사 ‘착하다’와 성질이 다르다. 기본형이 현재형으로 쓰이지 않는다. ‘착하다’는 어미 ‘-었’이 결합하면, 과거가 되는 ‘착했다’가 된다. 형용사는 ‘-었’이 들어가면 ‘과거’를 뜻한다. ‘-었’이 결합한 ‘잘생겼다’는 형용사처럼 ‘과거’를 나타내지 않는다. 동사 ‘늙다’에 ‘-었’이 결합한 ‘늙었다’같이 현재를 나타낸다. 동사 ‘잘생기다’는 그동안 축적된 국어학계의 논의 결과라고 했다. ‘낡다, 못나다, 못생기다, 잘나다’도 ‘잘생기다’처럼 같은 날 동사 자리로 옮겨 갔다. 자리를 옮겨 간 말들은 새말처럼 여전히 익숙지 않다.
  • 영어교육창업 YBM리더스, 오는 23일 코엑스서 두 번째 서울 사업설명회 개최

    YBM NET의 무점포 영어교육 창업브랜드 ‘YBM리더스’가 지난달 사업설명회에 이어 오는 23일 코엑스에서 두 번째 서울 사업설명회를 진행한다. YBM리더스는 이번 서울 사업설명회를 포함해 전국 13개 주요 도시에서 사업설명회를 순회 중이며 27일 창원 사업설명회가 마지막 일정이다. YBM리더스는 지난 11월 11일 부터 전국 설명회가 진행된 후 1달여 만에 100건 이상의 가맹 계약이 체결됐다. YBM리더스 관계자는 “그만큼 YBM리더스 프로그램에 대한 교육관계자 및 학부모 계층의 관심이 크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YBM리더스는 미국 현지에서 사용되는 영어학습 콘텐츠로 영어실력과 올바른 독서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설계된 온라인 영어독서학습 프로그램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교과서 출판사인 호튼 미플린 하코트사의 초등 교과서 ‘Leveled Readers’ 1,000여 권과 세계적인 어린이 서적 출판사 스콜라스틱 온라인 전자책(e-book) 프로그램의 BookFlix 250권으로 정독과 다독을 짜임새 있게 연결하는 온라인 영어독서 프로그램이다. YBM리더스는 영어독서를 가지고 함께 생각하면서 학습 방향을 제시하는 ‘코칭(coaching)’ 교육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이다. 영어 비전공자이더라도 YBM리더스가 본사 1박2일 교육을 통해 창업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게 지원한다. 센터장 근무에 필요한 YBM영어독서지도사 과정을 수료 및 마케팅 그리고 전산 교육 등도 제공한다. YBM리더스 센터장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주 1회 유선 상담을 하고, 회원과 온라인으로 연락해 학습자의 독서학습 관리를 돕는다. 지난 서울사업설명회 현장에서는 예비 창업자를 대상으로 YBM리더스 프로그램과 성공적인 창업 방안을 소개하고, 1:1 창업 상담을 진행하였다. 이어 두번째 서울 설명회에서도 보다 상세한 창업 컨설팅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경력이 단절돼 고민이거나, 재택근무에 관심 있거나, 교육 창업에 희망이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YBM리더스 이벤트 페이지에서 미리 설명회를 신청하면 참석할 수 있다. YBM리더스는 이번 사업설명회 예약자 전원에게 따뜻한 선물과 혜택을 제공한다. YBM리더스 전국 사업설명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상세 일정은 YBM리더스 이벤트 페이지나 전화 문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文대통령 방중 결산] 文자서전 ‘운명’ 중문판 연내 발간…환구시보 “文대통령 힘써 中 감동”

    [文대통령 방중 결산] 文자서전 ‘운명’ 중문판 연내 발간…환구시보 “文대통령 힘써 中 감동”

    문재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 중문판이 연내 중국 서점에 깔린다.중국 관영 인터넷 매체 펑파이는 17일 “문 대통령의 첫 국빈 방문에 맞춰 출판된 ‘운명’ 중국어판이 12월에 중국 서점에서 판매된다”면서 “35만자 분량에 60여장의 사료적 사진이 실린 이 책은 문 대통령이 처음으로 공식 인증한 외국어 번역본”이라고 전했다. 펑파이는 중국어로 “모든 것은 운명이다. 반드시 강조할 점은 각고의 노력으로 바꾼 운명이라는 것이다”고 적힌 책 표지 사진과 함께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를 회상한 ‘노제, 50만명의 바다’ 부분을 출판사(장쑤봉황문예사)의 동의를 얻어 전제했다. 책 표지에 “대통령의 중문판 특별 머리말 수록”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으로 볼 때 문 대통령이 중국 독자들에게 직접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평파이는 “가난한 집안, 수감 생활, 특전사, 인권변호사,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기까지 문 대통령의 생활은 소탈했지만, 정치적 운명은 기복이 컸다”면서 “그의 자서전은 개인사이자 한국 현대사”라고 평가했다. 중국 출판사가 문 대통령의 자서전을 출간하고, 관영 매체가 이를 보도한 것은 국빈 방문 전후로 문 대통령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도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킨다’도 2014년 중국어로 번역돼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서점에서 사라졌다. 한국에 대해 비판적 보도 경향을 보여 온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 16일자 1면 전체를 할애해 문 대통령의 충칭시 방문을 전했다. 제목은 ‘문재인, 힘써 중국을 감동시키다’였다. 이날 인민일보도 1면에 문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회담을 보도하며 양국의 경제 협력 재개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다만 환구시보는 한국 기자 폭행 사건과 관련한 사설에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국 정부에 책임을 묻지 말라”고 주장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사드 배치 이후 보류시켰던 한·중 산업단지 건설을 승인했다. 중국 국무원은 17일 장쑤성 옌청, 산둥성 옌타이, 광둥성 후이저우 등 3개 지역에서 설립 신청을 올린 한·중 산업단지 건설을 승인한다고 회신했다. 통지문은 “19차 당대회 정신에 따라 개혁개방을 심화 확대하고 한국과의 합작의 장점을 살려 첨단 산업단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국무원은 또 한·중 간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규정을 적극적으로 이행해 한·중 산업단지가 전면적 개방의 시험구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씨줄날줄] 올해의 단어/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올해의 단어/이순녀 논설위원

    한 단어로 한 해에 일어난 모든 사건, 현상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떤 흐름이나 방향을 짚는 데는 유용하다. 외국 유명 사전이나 각 나라 어문 단체가 매년 이맘때 선정하는 ‘올해의 단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지난해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탈진실’, ‘비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포스트트루스’(post-truth)를, 미국 온라인사전 메리엄 웹스터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믿을 수 없는’ 등을 의미하는 ‘서리얼’(surreal)을 선정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각국 연쇄 테러 등 혼란스런 사회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 단어 선택이었다. 올해는 어떨까. 메리엄 웹스터가 선정한 단어는 ‘페미니즘’이다. 사전 편집자는 “연초에 워싱턴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여권 운동이 펼쳐지면서 검색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문 이후 ‘미투’ 캠페인의 확산으로 더 주목받는 단어가 됐다”고 설명했다. 시사주간지 타임과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의 인물로 성희롱·성폭행을 폭로한 여성들을 선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서 영국 사전출판사 콜린스는 ‘가짜뉴스’(fake news)를 올해의 단어로 꼽았다. 목록에 올라 있는 45억개 단어 가운데 가짜뉴스의 사용 빈도가 1년 새 365%나 급증했다고 한다. 2015년부터 조금씩 늘다가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폭증했다는 게 출판사의 설명이다.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올해를 대표하는 한자로 ‘北’(북)을 선정했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 규슈 북부의 집중 호우, 인기 고교야구 선수의 홋카이도(北海道)야구팀 입단 등이 뜨거운 화제로 떠오른 결과다. 우편과 인터넷 조사에서 15만 3594표 중 가장 많은 7104표를 얻었다. 협회는 매년 한자의 날인 12월 12일 올해의 한자를 선정해 발표해 왔다. 중국에서도 ‘北核 危機’(북핵 위기)가 올해 국제 분야의 주목받은 한자로 뽑혔다. 중국어언자원검측연구센터, CCTV 등의 공동조사에서 제조업 스마트화 시대를 의미하는 ‘知’(지), 테러를 뜻하는 ‘襲’(습),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창한 ‘인류운명공동체’ 등도 함께 선정됐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국내에선 올해의 단어 대신 전국 대학교수들이 선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매년 화제를 모은다. 지난해에는 ‘백성이 화가 나면 임금을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의 ‘군주민수’(君舟民水)가 뽑혔다. 올해는 어떤 촌철살인의 사자성어가 등장할지 궁금하다. coral@seoul.co.kr
  • [김민희 기자의 B컷 월드] 차 마시는 엄마, 일하는 아빠

    [김민희 기자의 B컷 월드] 차 마시는 엄마, 일하는 아빠

    나는 따지기를 못 한다. 웬만한 경우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거니 넘기게 된다. 무릇 기자라면 따박따박 따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경천동지할 특종 하나 건지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왔다. 그런 내가 최근 10년래 가장 불같이 따진 사건이 지난해 가을 발생했다. 아기 전집으로 유명한 A출판사에서 만든 사운드북 때문이다. 버튼을 누르면 가족의 호칭을 말해 주는 책이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까진 괜찮았다. 여자와 남자 어린이 버튼을 눌렀더니 누나, 형이란다. 그럼 언니, 오빠는? 아무리 눌러 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남자 아기를 위한 책이었다. 분노가 화산처럼 솟구쳤다. 여자인 나와 내 딸이 ‘2등 국민’ 취급당하는 느낌이었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세련된 대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다음 쇄에는 반영하겠다며 잘못을 인정하길 바랐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심지어 내가 따지는 이유를 이해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의 분노가 새삼 떠오른 건 영국의 한 엄마가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저학년 독서 목록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빼달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지난달 23일 영국 미러 등의 보도에 따르면 사라 홀(40)은 “왕자가 공주의 동의를 얻지 않고 키스를 하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된 성 관념을 갖게 하고, 그런 행동을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므로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고 있었는데,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내 마음속 활화산에 또다시 불을 댕겼다. “뭘 그렇게까지. 동화는 동화로 보면 되지.” 아니. 전혀 아니다. 지난 3년간 딸과 함께 본 수많은 동화와 애니메이션은 마치 3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 것마냥 낡아 빠진 성역할을 답습하며 어린 독자들의 사고 체계를 물들이고 있었다. 아기들의 대통령인 뽀로로가 나오는 ‘뽀로로 퓨처북’이라는 게 있다. 전자펜으로 터치하면 내용을 읽어 주는 책이다.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펼쳤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책에서 엄마는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아빠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 심지어 이모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삼촌은 학교에 간다! 여성은 비생산적·비경제적 활동을, 남성은 생산적·경제적 활동을 한다는 전제가 이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없었다. 이런 노골적 성차별을 참을 수 없어 일부러 사지 않았다. 출판계가 위기라며 앓는 소리를 하던데, 적어도 어린이 책에서는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구태의연하게 책을 만드니 안 팔리는 거다. 정말이지 이럴 줄은 몰랐다. 내가 어릴적 교과서에 나오던 ‘차 마시는 엄마, 일하는 아빠’라는 구닥다리 프레임이 아직도 횡행할 줄이야. 양성평등이니 여풍이니 하는 말들의 향연에 취해 우리 사회의 진짜 수준을 미처 보지 못했던 거다. 인공지능이 바둑을 두고 화성에 사람을 보내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성역할이라는 낡은 틀로 가두는 게 한국 사회라면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 어린이 책과 만화를 만드는 분들이 이 글을 꼭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 원본·어록·소설… 70살 백범일지 한눈에

    원본·어록·소설… 70살 백범일지 한눈에

    관련 책 380여권·출판물 전시 윤봉길·美피치 부부 등도 만나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 출간 70주년을 맞아 ‘백범일지 70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전이 개최된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백범일지 출간 70돌 특별전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를 오는 15~30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연다고 12일 밝혔다.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육필로 쓴 자서전으로 1947년 12월 15일 출판사 ‘국사원’에서 처음 활자화된 뒤 각 출판사에 의해 지금까지 출간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백범일지 원본(보물 제 1245호)을 비롯해 백범일지를 모태로 나온 380여권의 책들이 한자리에 전시된다. 국한문 혼용체인 백범일지 원본의 ‘영인본’(원본을 사진 등을 이용해 그대로 복제한 책) 백범 어록·평전·연구서·논문집·소설 등의 출판물이 모두 선보인다. 백범일지의 국사원판 초판·재판·3판본과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아들(윤종)에게 준 친필 서명본도 전시된다. 윤봉길·이봉창·이재명·나석주 의사를 비롯한 한인애국단원들, 백범의 피신을 도운 중국 여인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움을 준 중국 요인들, 윤봉길 의거 직후 백범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미국인 피치 부부 등도 이번 특별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은 “백범일지는 첫 출간 이후 70년 동안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며 청소년 필독서, 국민 교양서로 자리매김했다”면서 “백범일지는 영화, 드라마, 판소리, 창무극(唱舞劇) 등으로 장르를 넓혀 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청춘·문화 그리고 새로움… 다시, 신촌의 살롱 꿈꾸다

    청춘·문화 그리고 새로움… 다시, 신촌의 살롱 꿈꾸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정문에서 신촌역 방향으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돌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의아한 간판 하나가 사람들을 반긴다. 신촌극장. ‘이런 데 극장이 있다고?’ 의문을 품은 채 건물의 계단을 올라 4층 옥탑에 다다라 검정색 미닫이문을 열면 66㎡(약 20평)가 채 안 되는 아담한 공간이 나온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블랙박스 형태의 이 극장은 지난 6월 문을 열었다.극단 아어의 공동 대표인 전진모 연출가와 신촌과 상암동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원부연 대표가 공동 대표를 맡았고, 영화제작자 김성우 다이스필름 대표, 앱 개발 회사에 재직 중인 김선민씨가 운영진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연세대 연극 동아리 ‘토굴’ 선후배 사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원 대표를 제외한 신촌극장 운영진 3명을 최근 신촌에서 만났다. 극장의 시작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전 연출가는 “지난해 잠시 연출 일을 쉬면서 원 대표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이때 젊은 희곡 작가 7명의 작품을 낭독하는 ‘희곡 좋아해?’라는 공연을 기획했었다”면서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제대로 된 공연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동아리 선배들과 ‘이렇게 된 거 아예 극장 하나 만들까’라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간 농담처럼 해 왔던 말이지만 사실은 이들 가슴 속에 뭉근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불씨가 타오르는 순간이었다.마치 언젠가는 벌어질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해 11월 이야기가 오고 간 지 한 달 만인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온라인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았다. 4000여만원의 후원금에 지인들과 대학 선후배들의 십시일반 지원을 바탕으로 올 5월 공사를 마친 극장은 6월 문을 열었다. 이후 작가와 아티스트들을 섭외하는 기간을 거쳐 지난 9월부터 정식으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 실린 단편 2편을 각색해 무대화한 이연주 연극연출가의 ‘아무도 아닌’을 시작으로 사운드디자이너 목소와 공연예술 관련 독립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는 허영균의 정원에 대한 연구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 ‘정원연구:응시’, 안무가 최은진의 ‘신체하는 안무 솔로’ 등 연극, 전시, 무용, 시각 미술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가들의 실험적인 공연 6편을 선보였다.생각보다 바쁘게 달려온 ‘신참내기 극장’의 초기 정착기를 듣고 있자니 왜 하필이면 공연 예술의 중심지인 대학로가 아닌 신촌에다 극장을 지어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 신촌은 대학가, 문화, 청춘, 소극장 이런 의미들로 연결돼요. 가수 신촌블루스나 김광석 이런 사람들이 신촌에서 늘 공연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종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유흥가가 돼버렸죠. ‘뉴 빌리지’라는 ‘신촌’(新村)의 뜻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전혀 새로움과는 상관없는 곳이 돼버린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신촌극장이라는 무척 작고 별것 아닌 공간이 신촌을 다시, 새롭게 만드는 출발점 같은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김성우) 공연 형식에 따라 25명에서 최대 40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정말 작은 ‘소’극장이지만 극장으로서 갖춰야 할 것은 살뜰히 갖췄다. 층고가 높은 특성을 이용해 음향과 조명을 조절할 수 있는 시설은 복층 별도 공간에 마련했다. 후원자들의 이름을 뒤쪽에 새긴 접이식 의자는 공연 특성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배치한다. 신촌극장이 자랑하는 작은 야외 테라스에 서면 탁 트인 신촌 전경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극장 바로 앞 기찻길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때때로 공연의 음향 효과로도 사용된다. 극장이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정체성 덕분에 흥미로운 순간도 자주 마주하게 된다고. “얼마 전에 천둥번개가 엄청 많이 치던 날이 있었어요. 그 시간에 극장에서 공연이 진행 중이었죠. 지하 극장이라면 몰랐을 텐데 옥탑에서 공연하니까 천둥번개 소리도 그럴싸한 배경음이 되더라고요.(웃음)”(전진모) “어떤 아티스트는 기찻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흔드는 퍼포먼스를 공연의 한 장면으로 새로 만들어 넣더라고요. 극장 주변의 지형지물을 공연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아티스트와 관객 모두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는 것 같아요.”(김선민) 오랫동안 품어왔던 극장에 대한 열망이 신촌을 움직이는 작은 파동이 되길 바란다는 이들. 이들이 바라는 신촌극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촌에 소극장이 8개나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신촌은 청년들의 문화를 대표하던 곳이었죠.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나서 하는 게 예술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이 극장에 들러 재미있게 한바탕 놀다 가면 그보다 좋은 건 없겠죠. 매번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칵테일파티’라는 이름으로 관객과 아티스트들이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사람들끼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살롱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어요.”(김선민) “최근 ‘극장이라는 공간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 자체의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촌극장은 규모는 작지만 깊이 있는 즐거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길 바라요. 예술가와 관객, 예술가와 예술가가 서로 건강한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요.”(전진모) 글 사진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삶의 동반자’에게 바치는 헌사

    [그 책속 이미지] ‘삶의 동반자’에게 바치는 헌사

    나의 아름다운 연인들/나희덕 외 70인 지음/달출판사/220쪽/1만 5300원1984년 4월의 어느 맑은 날 부부가 된 신랑 김응준, 신부 이은순은 전남 여수 부림호텔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랑은 호텔 인근에서 복숭아 통조림과 함께 사들고 온 마주앙을 따르며 다짐한다. 당신만을 평생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 신랑은 소년처럼 순수하고, 신부는 수줍은 소녀의 미소를 짓는다. 32년이 지난 2016년 11월 어느 저녁. 딸이 문득 아빠에게 묻는다. “엄마랑 언제 결혼하겠다고 결심했어?” 그 말에 사랑으로 물든 아빠의 촉촉한 눈빛. 딸은 느꼈다. 아직도 서로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낡은 사진첩 속 엄마·아빠의 연애 시절 사진 한 장. 이 책은 평범한 부부들의 찬란했던 청춘의, 연애의, 동행의 시간들을 켜켜이 엮어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각각의 사연마다 우리가 태어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당신이 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진심이 전해진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13년간 현지서 지켜본 ‘일본의 민낯’

    13년간 현지서 지켜본 ‘일본의 민낯’

    지난 9월 타계한 마광수 교수의 제자이자 스승을 이어 ‘윤동주 전문가’로 꼽히는 김응교(55) 숙명여대 교수(시인·문학평론가). 그는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부터 야스쿠니 신사, 일본이 외면하고 있는 국가 범죄와 폭력의 실체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민낯을 그린 ‘일본적 마음’(책읽는 고양이)을 펴냈다.책은 단순한 인상비평에 그치지 않는다. 1996년부터 2009년다지 13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학자로서, 타자로서 보고 듣고 체험하며 쌓은 기록이다. 김 교수는 1999년 5월 일본 3대 축제로 꼽히는 도쿄 아사쿠사의 산쟈 마쓰리에 참가했다. 당시 와세다대학의 30대 객원교수로, 한국과 일본 문화를 비교 연구하던 그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한 것이었다.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훈도시(전통 속옷)만 걸친 채 거친 몸싸움을 벌이며 ‘잇쇼켄메이’(의역하면 열심히 하자는 다짐이 되겠다)를 내지르는 수천명의 사내들 속에 김 교수도 있었다. 책에는 이처럼 그가 일본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13년 동안 일기 또는 편지처럼 쓴 수천장의 원고지 가운데 일본인에 대한 자신만의 인문적 통찰을 추려낸 ‘일본인론’이 담겼다. 6일 만난 김 교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대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책을 냈다”며 “죽음을 숙명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복종하는 일본인만의 정신세계를 엿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일반 책의 3분의2 크기인 문고본 판형인데도 꽤 알차다. 일본인의 미학적 관념부터 문화, 문학, 작가, 역사 인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적 관심과 인문적 성찰이 부드럽지만 날카롭고 거침없이 전개된다. 김 교수가 본 일본인 정신은 그가 ‘질서 속의 초질서’로 표현한 집단주의와 육체화된 체념, 인간을 신으로 만들 만큼 강렬한 죽음에 대한 미화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전사·전몰자 246만 5000명을 일본의 신으로 모신 야스쿠니 신사를 대표적 미화의 공간으로 꼽는다. 일급 전범부터 이름도 없는 군도에서 숨진 이등병까지 전과에 따라 줄을 세운 신들의 집합소. 현대에 들어서는 순직한 자위대원 464명도 새로 신이 된 곳이다. 김 교수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세뇌 공장’이라고 책에서 표현했다. “야스쿠니는 우리 말로 평화로운 국가라는 뜻인데 이 신사를 만든 메이지 천왕은 15년 전쟁을 일으켰고, 히로히토 천왕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어요. 일본 군인들은 알았어요. 싸우다 죽으면 신이 되고, 포로가 되면 신이 되는 걸 포기하는 거라는 것, 그러니 옥쇄를 했죠. 야스쿠니는 일본의 국가중심주의와 선민의식의 판타지를 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에요.” 그가 보기엔 하루키 문학도 죽음과 닿아 있는 일종의 판타지다. 김 교수는 그의 문학을 일본인을 위한 롯데월드 같은 ‘하루키 놀이공원’이라고 말한다. “일본인 중에서는 하루키 소설을 비타민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표면적으로는 무국적이나 미국적으로 느껴지지만 동시에 가장 일본적인 작가입니다. 글쓰기 스타일도 빈틈을 주지 않는 전체주의적이고, 작품마다 일본인에게 내재된 죄의식과 수치심을 치유하는 느낌을 줍니다. 일본인 대다수는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의식 상태에서 치유받는 거예요. 2002년에 발표한 ‘해변의 카프카’에서 군복을 입은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장면을 풀어 가는 방식을 봐도 일본 체제에 대해 속죄해 주는 의식이 있어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습니다. 최근 그의 소설과 말이 변화를 보여 주고 있지만 힐링의 문학으로 통하는 이유죠.” 김 교수는 자신의 일본관, 혹은 일본인론이 일본의 전부는 아니라는 ‘타자로서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가 책 제목으로 일본(의) 마음이 아닌 출판사가 제시한 일본적 마음이라는 문법적으로 어색하고 알 듯 말 듯한 제목에 선뜻 동의한 이유다. 글 사진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우스운 사람이었지만 우습지 않았던 인생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우스운 사람이었지만 우습지 않았던 인생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쟈니 윤 쇼’라는 방송을 했다. 그때까지 내게 코미디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짓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쟈니 윤의 코미디는 전혀 다른 식이었다. 게다가 한국 사람인데 미국에 가서 미국사람들을 대상으로 코미디를 했다고 하니 더욱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사사로운 자리에서 그를 직접 만난 일이 있다. 나는 그가 심형래를 능가하는 최고의 코미디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다면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도 하기 전에 웃음부터 날 것 같아 긴장했다. 하지만 내 우려는 완전히 빗나갔다. 쟈니 윤은 우스운 사람이 아니었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타난 그는 시종일관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살짝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이가 보일 정도로 웃는 일은 없었다. 그는 행동이 무척 신사적인 사람이었고 기대와는 달리 말하는 내내 가벼운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날 이전까지 내 머릿속에 있던 쟈니 윤의 이미지는 완전히 지워졌다. 여전히 나는 그의 본 모습을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송인으로서 그는 우스운 연기를 하지만, 실제 쟈니 윤은 로버트 드니로처럼 멋진 신사라고 믿는다. 그 만남이 있은 후부터 나는 쟈니 윤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명배우 찰리 채플린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다.찰리 채플린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왜소한 체격에 허름한 양복, 윗옷은 자기 치수보다 작아 꽉 끼지만 바지는 헐렁하다. 커다랗고 다 낡아빠진 구두는 발에 매달려 있는 수준이라 걸을 때면 오리처럼 뒤뚱거린다. 우스운 차림이지만 대나무 지팡이까지 있어서 신사로서 갖출 것은 다 갖춘 모습이다. 채플린은 매번 똑같은 차림으로 영화에 출연했고 그가 맡은 배역은 언제나 말썽을 몰고 다니는 떠돌이 방랑자 역할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많이 웃었고, 또 감동도 받았다. 하지만 채플린이 죽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렇게 전 세계를 웃겼던 사람의 삶이 실은 전혀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많은 사람의 증언을 보더라도 영화 밖의 채플린은 한없이 진지한 사람이었다. 채플린과 비슷한 시기에 무성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버스터 키튼은 경쟁자였던 채플린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실 그가 가장 우습지 않을 때는 영화를 제작할 때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고 명석하고 면밀한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나비의 날개를 다루는 곤충 채집가의 꼼꼼함에 비견된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 채플린은 관객들을 웃기기 위해서 정작 자신은 가장 우습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채플린은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해내고야 마는 완벽함을 추구했다. 배우 섭외에서부터 촬영, 연기지도, 시나리오 작성, 필름 편집은 물론 나중에는 영화에 들어갈 음악까지 독학으로 공부해 직접 작곡했다. 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촬영장에 의무적으로 분장사를 고용해야 했을 때도 특유의 ‘떠돌이 찰리’ 분장은 언제나 스스로 했다. 이 놀라운 인간은 자서전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썼다. 보통 유명인들의 자서전인 경우 전문 작가의 도움을 받으며 쓰는 일이 많은데 채플린은 삶의 후반기 여러 해 동안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직접 썼다. 우리말로 번역된 책만 해도 본문 분량이 1000쪽이 넘어가는 책이다.워낙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평전이나 연구서도 꽤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분량이 비교적 적은 책 한 권이 눈길을 끈다. 제목은 ‘나의 아버지 채플린’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은 중앙신서에서 문고본 시리즈로 펴낸 작은 책이다. 서지를 보니 1978년에 초판을 낸 이래 1981년까지 다섯 번을 더 찍었으니 나름 잘 팔린 책이다.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글을 쓴 사람은 찰리 채플린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니 더욱 인기를 끌었을 것이 분명하다. 평론가나 전문 작가보다 아들의 위치는 채플린과 더욱 가깝다. 그래서 이 책에는 좀더 인간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 있다. 책의 저자는 찰리 채플린의 두 번째 아내인 리타 그레이의 아들인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인데 채플린은 그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리타 그레이와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해 자녀를 본 직후인 1927년에 이혼했다. 아내와 함께했던 날은 만 3년뿐이었지만 자녀들과는 이후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채플린과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채플린 주니어는 바로 이 책 ‘나의 아버지 채플린’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들은 채플린이 ‘키드’, ‘모던 타임즈’, ‘독재자’를 만들 때 작업장에 함께 있었다. 이 때문에 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연기 지도자였던 채플린을 누구보다 생생한 모습으로 책에 그려 내고 있다. 채플린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았고 모든 걸 직접 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한번 믿음을 준 사람에겐 모든 걸 맡겼다. 책 속에는 채플린의 집에서 일하던 세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은 각각 집사, 운전사 그리고 요리사였는데 꼼꼼한 채플린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큰 신뢰를 얻었다. 진주만 공습의 여파로 집에 일본인을 두지 못하게 됐을 때도 채플린은 이들에게 때마다 봉급을 줬다. 재미있는 일화도 꽤 있다. 채플린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히트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공로로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그는 수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영화를 전문가 몇 명이 평가해서 상을 수여하는 것에 반감이 있던 것이다. 채플린은 평론가들의 의견보다는 더 많은 영화팬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웃어 주는 게 더 값지다며 상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아카데미 특별상 트로피는 채플린의 집으로 배달됐고 그는 한동안 이 ‘물건’을 문이 닫히지 않도록 틈에 고정해 두는 도구로 사용했다. 떠돌이 방랑자 캐릭터가 워낙 세계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여기저기서 채플린 흉내 내기 경연대회도 많이 열렸던 모양이다. 채플린은 미국의 한 동네에서 열린 닮은꼴 경연대회에 신분을 숨긴 채 본인이 직접 참가했던 일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재미있게도 본인이 직접 참가한 채플린 흉내 내기 경연대회에서 진짜 채플린은 3등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아들이 쓴 책에 따르면 아버지로부터 경연대회 결과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나치가 정권을 잡았던 독일에서는 채플린의 영화가 상영금지되었던 때가 있다. 히틀러와 채플린은 외모도 닮았지만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는 점 때문에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두 사람의 운명에 관한 숱한 이야기가 양산됐다.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성장한 것도 같다. 나중에 채플린은 아예 히틀러와 똑같은 분장을 하고 그의 연설 장면을 흉내 낸 영화 ‘독재자’를 만들어서 크게 히트시켰다. 이처럼 아들이었기 때문에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채플린의 여러 모습이 이 작은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하지만 아들이 쓴 책의 마지막 장은 채플린이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인 우나 오닐과 결혼해 스위스에 정착한 것에서 멈췄다. 이때 채플린은 방대한 자서전의 첫 부분을 쓰고 있었다. 얘기가 이렇게 끝난 것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 채플린’은 1960년 롱맨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출판됐고 채플린 주니어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떠돌이 찰리 채플린은 1974년에 자서전 ‘My Life in Pictures’를 펴냈고 1977년 12월 25일 성탄절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배우가 죽었을 때 영국 신문 가디언지는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책꽂이]

    [책꽂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따뜻한 감성을 담은 영화로 주목받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자신의 전작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한 영화 자서전. 448쪽. 1만 8000원.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리처드 존스 지음, 소슬기 옮김, MID 펴냄) 지난 40여년간 똥이 만들어 내는 생태계를 연구해 온 권위자이자 곤충학자인 저자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모두가 언급하기 꺼리는 똥의 자연사를 들려준다. 464쪽. 1만 8000원. 자신에게 고용된 사람들(김도균·김태일·안종순·이주하·최영준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총 경제활동인구의 26%에 달하는 자영업자의 형성 과정과 현황을 논하고 부채·조세·특수 고용직 문제를 비롯해 기술변화에 따른 자영업자의 미래에 대해 살펴본다. 316쪽. 1만 6000원. 다윈의 물고기(존 롱 지음, 노승영 옮김, 플루토 펴냄) 척추동물 진화 연구를 위해 로봇을 이용하는 해양생물학자 존 롱이 그간 물고기 진화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로봇 물고기를 만들고 실험하는 과정을 담았다. 368쪽. 1만 7000원. 부채 트릴레마(김형태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청년 부채 악순환의 시작인 학자금 부채부터 가계 부채, 국가 부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경제의 뇌관인 부채 삼중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채를 지분과 주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60쪽. 2만원. 루벤스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그리지 않았다(노성두 지음, 삶은책 펴냄) 루벤스의 소묘 작품 ‘한복 입은 남자’ 등 고전 미술 작품 20개의 역사와 숨겨진 비밀을 시대, 지역, 작가, 장르, 주제, 기법 등에 주목해서 들려준다. 256쪽. 1만 8000원.
  • 주부·퇴직자·대학생… “삭막한 삶에 청량제 됐죠”

    주부·퇴직자·대학생… “삭막한 삶에 청량제 됐죠”

    “병원장님, 허공 쳐다보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는 장면입니다. 비서님은 좀더 자신 있게 대사 하시고요. 극이 3분의1 정도 지나서야 드라마 맛이 느껴져요. 그전까지는 연기가 불분명하고 정체를 알기 힘들어요. 각자 조금만 더 분발해 주시고요, 강사님들은 장면별로 1대1 연기 지도해 주세요.”부쩍 추워진 날씨에 직장인들이 귀갓길 발걸음을 재촉하던 지난 27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3층 연습실은 열기로 가득했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 ‘6호실’ 리허설이 막 끝난 상황. 연출을 맡은 서울시극단 단원 김신기(47)씨의 칼 같은 지적이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이들은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이다. 서울시극단이 2009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시민연극교실 9기 월요일반 멤버들이다. 지난 7월부터 열린 시민연극교실에는 이들을 포함해 일반인 32명이 참여하고 있다. 월요일반 16명은 ‘6호실’을, 목요일반 16명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5개월간 연습해 왔다. 새달 2~3일, 단 이틀이지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진짜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어서다.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는 시민 배우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매주 평일 하루 저녁 시간을 연습에 할애한 이들은 은행원, 주부, 사업가, 프리랜서, 사회복지사, 정년퇴직자, 대학생 등 면면도 다양하다. 23살 막내부터 64살 최고 연장자까지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궤적도 제각각이지만 무대를 향한 열정과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나의 삶, 나의 바람을 무대로’라는 올해 시민연극교실의 주제답게 이들은 연극에서 삶의 에너지를 되찾는 계기를 찾았다고 입을 모았다.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 이후 20여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은행원 최은주(37)씨는 유독 감회가 남달라 보였다. 최씨는 “365일 웃고 있어야 하는 은행원으로 살다 보니 가슴 한켠에 묻어 둔 감정들을 해소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연극을 하면서 긍정적으로 풀 수 있었다”며 “인기 스타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스스로 끌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단체 생활에 참여하게 됐다는 대학생 정진호(24)씨는 “누가 보면 예의 없고 이기적이라고 할 만큼 나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연극 연습을 하면서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 멋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새로운 도전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장년층에게 연극은 ‘청량제’가 됐다. 지난 6월 정년퇴직한 김문수(56)씨는 삶의 활력을 되찾고자 연극교실에 지원했다. 그는 “금융계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삶이 삭막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라면서 “막연하게 동경해 왔던 연극 무대에 서려고 사람들과 어울려 연습하는 과정 자체가 보람이자 활력소”라고 귀띔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조영준(56)씨 역시 “출판업계가 불황인 데다 지난해 여러 사회적인 이슈로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연극이 자존감은 물론 꺾인 의욕도 되살려 줬다”고 말했다. 이들의 과감한 도전과 무대에 대한 열정은 연기를 가르치는 서울시극단 단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된다. 첫 시작 때부터 참여한 김신기씨는 “처음엔 대본 읽는 것조차 힘들어하지만 막상 연기를 시작하면 (일반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열정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며 “이분들을 보면 지난 20여년간 연기를 하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무대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2015년부터 3년째 보조 강사로 참여하고 있는 서울시극단 연수단원 박진호(30)씨도 “어머니, 아버지뻘 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서투르지만 인생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고 있자면 전문 배우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삶과 연극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많다”고 덧붙였다. 글 사진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임신 중 스트레스, 아이 심신 건강에 악영향”(연구)

    “임신 중 스트레스, 아이 심신 건강에 악영향”(연구)

    엄마의 임신 중 스트레스가 아이의 심신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샌프란시스코) 연구진이 최신 연구를 통해 임신 중에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던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스트레스 요인에 더 크게 반응하고 회복력도 더 느린 경향을 발견했다. 또한 임신 중 겪은 스트레스가 자녀의 심장 기능은 물론 성장한 뒤에도 우울증이나 행동 장애를 유발할 위험이 더 큰 것으로 예측됐다. 연구를 이끈 니콜 부시 박사(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는 “스트레스가 심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아동기 품행장애(적대적 반항 장애, 품행 장애)와 같은 외현화 행동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임신 중에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어떤 연쇄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임신 12주 차부터 24주 차에 있는 저소득층이나 중산층 여성 151명의 스트레스 수준을 조사했다. 연구자들은 각 참가 여성이 낳은 아기가 생후 6개월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했다. 특히 임신 중인 참가 여성에게 일정 기간을 간격으로 질병이나 주택 문제, 법적 문제, 가족 문제, 관계 문제 등 스트레스성 생활 사건을 얼마나 겪었는지 설문을 통해 묻는 방법으로 스트레스 수준을 측정했다. 이후 생후 6개월 된 아기들의 심장 기능을 측정함으로써 아이들의 스트레스 수준을 측정했다. 스트레스는 호흡과 함께 심장박동수 변이에 따른 스트레스 반응성으로 측정할 수 있는데 그 반응성이 높으면 부교감 신경 기능의 저하를 뜻한다. 부교감 신경계가 활성화되면 심장박동수가 느려지고 장과 분비샘의 활동이 증가해 신체의 휴식과 소화를 돕는다. 그 결과, 연구 동안 가장 많은 스트레스 요인을 경험한 여성 22명이 낳은 아이들은 가장 큰 스트레스 반응성을 보였다. 스트레스 요인이 가장 적었던 여성 22명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22% 더 높게 반응했다. 이에 대해 부시 박사는 “스트레스 반응성의 증가는 아이의 심장에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고, 성장하면서 행동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스트레스는 명백하게 유전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진은 아이가 태어난 뒤 처음 몇 개월 동안 안정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가 노력하면 높아진 스트레스 반응성을 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시 박사는 “안정된 환경에서 아이들은 스트레스에 너무 자주 반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런 시나리오 측면에서 아이의 스트레스 반응성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면 긍정적인 관계와 경험의 혜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면서 “따라서 평균 이상의 사회적 기술은 물론 감정적이고 행동적인 웰빙을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타난 스트레스 반응성의 증가와 외향성(surgency) 및 자기 조절의 감소가 일생에 미칠 영향은 알지 못한다”면서 “많은 것이 가족과 지역 사회 등 다른 환경 요인에 의해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건강한 환경을 조성해주면 나중에라도 높아진 스트레스 반응성과 외향성 및 자기 조절의 감소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발달과 정신병리학’(Journal Development and Psychopathology) 최신호(22일자)에 실렸다. 사진=ⓒ kieferpix / Fotoli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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