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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녀출생비 25년만에 정상

    남녀출생비 25년만에 정상

    여자 한명이 낳는 아이의 수(합계출산율)가 지난해 1.26명으로 2년 연속 상승했다.2001년 이후 6년 만에 최고치다. 하지만 2명 수준인 미국·프랑스 등에는 한참 못 미친다. 여성들의 평균 출산연령은 30.6세였다. 반드시 아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약해지면서 남녀 출생성비는 여아 100명 당 남아 106.1명으로 25년 만에 정상수준을 되찾았다. 통계청은 5일 ‘2007년 출생통계’를 발표했다. 지난해 출생아는 49만 6700명으로 전년(45만 1500명)보다 4만 5200명 늘었다.2006년(1만 3500명)에 이어 2년 연속 증가한 것이다. 인구 1000명당 출생아 수를 뜻하는 조(粗)출생률도 지난해 10.1명으로 전년 9.2명보다 증가하며 2003년(10.2명) 이후 4년 만에 10명을 넘어섰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사람들의 자녀가 대거 혼인·출산 연령에 도달한 데 따른 ‘3차 베이비붐’ 효과, 쌍춘년(雙春年)과 황금돼지해 효과 등이 지난해 출생아 증가의 이유로 분석됐다.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8명으로 저점을 찍은 뒤 2006년 1.13명, 지난해 1.26명으로 2년 연속 상승했다.2001년 1.30명 이후 7년 만에 가장 높았다. 그러나 미국(2.10명), 프랑스(1.96명), 영국(1.84명)은 물론이고 일본(1.34명)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역별로 부산의 합계출산율이 1.0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서울과 대구도 각각 1.06명과 1.13명으로 최하위권이었다. 전남과 충남은 각각 1.53명과 1.50명으로 최상위권이었다. 여자들의 평균 출산연령은 30.6세였고, 초산연령은 29.4세였다. 각각 전년보다 0.2세 늦어졌다.10년 전인 97년 평균 출산연령이 28.3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2.3세 늦어진 것이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응애~’ 소리 다시 줄었다

    ‘응애~’ 소리 다시 줄었다

    2006년 쌍춘년(입춘이 두번 드는 해)과 2007년 황금돼지해 등에 힘입어 소폭이나마 증가세를 보였던 국내 출산율이 올들어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으로 집계됐다. 4일 보건복지가족부가 전재희 복지부 장관 후보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오던 신생아 수가 올해 3월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5월까지 3개월 연속으로 줄었다. 지난 1,2월에는 신생아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00여명 증가했지만 3월에는 2100여명 감소했다. 이어 4월에는 1300여명,5월에는 2100여명 줄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국내 총 출생아 수는 20만 5400여명으로 지난해와 같은 기간에 견줘 1900여명 줄어들었다. 올해 3월처럼 월별 신생아 숫자가 전년 동기 대비 감소세를 보인 것은 2006년 1월 이후 26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출산율은 2005년 역대 최저인 1.08명을 기록한 뒤 2006년 1.13명,2007년 1.26명으로 소폭 상승해왔다. 복지부측은 가임여성의 감소 등의 영향으로 올해 전체 신생아 수는 지난해보다 적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복지부에 따르면 15∼49세 가임여성은 지난해 1358만명에서 올해 1314만명으로, 주된 출산층인 20∼39세 여성은 지난해 788만명에서 749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전 장관 후보자는 “가임여성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중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출산율 감소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구소련 탄압에 저항… 러 문학전통 살려

    구소련 탄압에 저항… 러 문학전통 살려

    ‘수용소 군도’의 작가인 솔제니친의 생애는 ‘탄압’과 ‘저항’으로 점철돼 있다. 그는 평생을 타협하지 않는 비판을 업으로 삼았고, 그런 그에게 옛 소련 당국의 제재는 가혹했다. 솔제니친은 1918년, 카프카스 키슬로보드스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생 직전 세상을 떠났다. 예술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는 솔제니친이 일찍부터 문학에 눈뜰 수 있게 도왔다. 솔제니친은 대학을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했다.1945년, 동프로이센에서 친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로 그는 10년을 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 스탈린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첫 작품을 출간했다.1962년 문학지 ‘노비미르’에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다. 한 서민 출신 죄수가 스탈린 시대 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렸다. 솔제니친은 단숨에 유명인사가 됐다. 이후 1963년에는 ‘마트료나의 집’,‘크레체토프카역에서 생긴 일’,‘공공을 위해서는’ 등의 작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작가로 입지를 굳혀갔다. 그러나 1964년 옛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념적 규제가 심해졌다. 그의 작품은 출판이 금지됐고 1969년에는 작가동맹에서도 제명됐다. 그에게는 ‘반체제 인사’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1968년작 ‘암병동’을 비롯한 이후의 작품들은 해외에서 출간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자비 출판 형태로 암암리에만 발표할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도덕적인 힘으로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추구했다.”는 것이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선정 이유였다. 노벨상 수상으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그는 귀국하지 못할까봐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73년 그의 대표작인 장편 ‘수용소 군도’가 파리에서 출판됐다. 옛 소련의 체포, 심문, 정죄, 이송, 구금 등을 묘사한 작품이다. 당국은 그에게 반역죄를 씌웠고 강제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옛 소련이 무너진 1994년에야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물질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베일에 가려 있던 스탈린 시대의 참상을 처음 드러낸 솔제니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폭로 일변도 문학에, 지나친 국수주의자”라는 것이다. 냉전시대 서방의 평가와 21세기적인 시선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새 대법관 후보 양창수 교수는 누구?

    새 대법관 후보 양창수 교수는 누구?

    국내 민법의 최고봉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양창수 서울대 법대 교수는 최근 대법관이 임명될 때마다 하마평에 올랐다. 그만큼 학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법원에 입성할 것으로 점쳐졌다.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뒤 쓴 잔을 3번 들이켰지만 결국 네 번째 추천에서 제청돼 ‘3전4기’에 성공했다. 5년 남짓 판사로 재직한 뒤 20여년 동안 강단에 선 그의 수업은 법학도 사이에 명강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민법입문’과 ‘민법연구’ 등은 교과서로 꼽힐 정도다. 그는 학점 평가에서 에누리가 없을 정도로 깐깐하고 엄격한 원칙주의자이며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지만, 주례 부탁이 많이 들어올 정도로 제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료 교수들은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는 모범적인 학자로 꼽는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가 있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다는 평이다. 법학뿐만 아니라 문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독서가 취미. 대학 시절엔 연극 극본 등을 직접 써서 무대에 올리고, 소설과 시로 상을 받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권유현(53)씨와 1남1녀가 있다. 장남 승우씨는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중인 예비법조인이다. ▲1952년 제주 출생 ▲서울고-서울대 법대 ▲사시 16회(연수원 6기) ▲육군 법무관 ▲서울민사지법·형사지법·부산지법 판사 ▲대통령비서실 법제연구관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 ▲뉴욕대 객원연구원 ▲서울대 법대교수(1996) ▲도쿄대 객원연구원 ▲민사판례연구회 회장 ▲한국민사법학회회장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도를 기다리며’ 40년째 연출 임영웅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도를 기다리며’ 40년째 연출 임영웅

    여기 지독히 몰개성한 방랑자들의 무궁한 지껄임이 있다. 에스트라공:그만 가자. 블라디미르: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왜? 블라디미르: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참 그렇지. 그 유명한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한다. 얼핏 쓸모없는 대사 같지만 연극 전편에 소나타 2중주처럼 깔린다. 그저 그렇게 살아온 이른바 유쾌한 허무주의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수시로 내뱉는다. 시간과 약속 장소도 종종 헷갈릴 정도로 판단력이 흐리다. 하지만 이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는 서로의 생각이 일치한다.‘고도∼’(이하 고도)의 마지막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에스트라공: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몰라. 블라디미르:내일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오면 말야. 에스트라공: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그럼 살게 되는 거지,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가자(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성에 대해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베케트의 ‘고도’를 셰익스피어의 그 무엇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긴다. 베케트의 모교인 트리니티대학에서는 ‘베케트센터’를 설립, 이를 기념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베케트극장’까지 새로 오픈했다. ‘젊은 원로’ 연출가 임영웅(74)씨. 그는 1969년 서울에서 ‘고도’를 처음 무대에 올리면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후 거의 매년 공연을 해왔다. 올해로 40년째. 그러는 사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연극계에서도 ‘임영웅=고도’가 됐음은 물론이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학 연극영화과에 다닌 학생들이라면 ‘임영웅의 고도’를 최소 한번쯤 이상 관람했으니 말이다. 이런 ‘임영웅의 고도’가 오는 10월21일부터 5일간 트리니티대학 베케트극장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갖는다.1990년 10월 아일랜드의 더블린 연극제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베케트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모교에서 정식 초청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올해로 한국·아일랜드 수교 25주년을 위한 문화행사에 초청됐으니 그 의미가 사뭇 크다.‘고도’가 더블린 연극제에 참가할 당시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등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트리니티대학 교수가 방한했을 때 ‘임영웅의 고도’를 관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초청제의가 있었다. 그동안 ‘임영웅의 고도’는 아일랜드 외에 프랑스 폴란드 일본 등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한국 연극계의 거목으로 통하는 임씨는 1955년 ‘사육신’으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연출 인생 53년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은퇴를 모르는 현역이다. 최근 막을 내린 ‘달이 물로 걸어오듯’ 외에도 뮤지컬 ‘갬블러’의 연출을 맡았으며, 올가을에는 연극 ‘산불’과 ‘고도’를 연달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서울 홍익대 인근의 산울림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어떻게 해서 ‘고도’를 처음 만나게 됐습니까. “1969년 한국일보 사옥이 신축됐지요. 당시 김성우 주간한국 국장이 점심을 함께 하면서 사옥 12층에 극장이 하나 생겼는데 개관공연으로 연극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요. 선뜻 대답했지요. 우선 등장인물도 적고 무대도 복잡하지 않은 ‘고도’를 떠올렸습니다.3일 동안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아차 이거 정말 난공사구나.’라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계속 밀어붙였지요. 그런데 공연 올리기 일주일 전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거 아닙니까. 개막 일주일 전에 입장권이 동나고 말았습니다. 나의 연극 인생에서 막이 오르기도 전에 표를 다 팔고 초연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그동안 ‘고도’만 20여차례 연출한 것으로 압니다. “베케트는 여러 연극적 기법을 동원해 현대인의 모습, 도덕과 인생의 의미 등을 그려냈습니다. 매번 작품을 대할 때마다 저번 공연에서 찾지 못한 것을 발견할 정도로 깊이 있고 폭넓은 작품이라고 실감합니다. 일단 ‘고도’를 올리면 객석이 꽉 찹니다. 현대연극을 이해하려면 ‘고도’를 거쳐야 하니까요.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겐 필수코스나 다름없어요.‘고도’를 연출할 때마다 신선하고 새로운 깊이를 느낍니다. 또 그걸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40년 전 나의 인생관과 지금의 인생관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베케트의 본고장에서, 그것도 한·아일랜드 수교 25주년 초청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겠습니다. “1989년 아비뇽 연극제에 ‘고도’를 갖고 참가했지요. 동양에서 ‘고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유럽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아일랜드 관계자가 다음해 더블린 연극제에 정식 초청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현지에서 공연을 했는데 리셉션때 ‘당신네 고도를 보니까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아일랜드 최대 일간지 ‘더 아이리시 타임’ 등 대부분의 신문 1면에서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활발하고 감동적인 연기’ 등의 찬사를 쏟아내더군요. 이번에는 베케트가 다니던 모교에서 공연이 이뤄지는 만큼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부조리 연극의 권위자 마틴 에슬린과도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에슬린은 1988년 서울연극제 세미나에 초청을 받고 방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떠나던 날 우리의 ‘고도’를 공연하기 시작하게 됐지요. 에슬린도 ‘한국의 고도’를 궁금하게 여겼고 결국 일정을 이틀 미루고 ‘고도’를 관람하게 됐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그는 배우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베케트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해석했다.’고 칭찬했지요. 베케트 전문가인 그의 말은 곧 ‘보증수표’가 됐고 아비뇽축제에도 참가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도’를 해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배우는 누구인가요. “다들 특징이 있지만 초연 때 에스트라공을 맡은 함현진씨가 생각납니다. 추송웅씨와 중앙대 동기인데 1970년대 후반 애석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연출기법이 사실주의와 심리주의라고들 합니다. “그건 평론가들이 하는 몫입니다. 물론 연극의 기본은 리얼리즘에 있지만 모든 것이 리얼리즘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요. 연극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기 때문에 무대위에서 사람이 사는 얘기가 펼쳐집니다. 관객이 보고 나오면서 저 연극과 내 삶의 차이가 무엇이냐, 관객의 삶에 보탬을 주는 게 바로 연극이지요. 일본 시즈오카대학의 센다 아키히코 교수는 우리 ‘고도’를 보고 나더러 ‘수비범위가 넓은 연출자’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해서 그 범위가 넓어졌을까. 그는 태어날 무렵 재즈 연주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세살 때 모친과 사별하자 기독교 권사인 조모의 밑에서 자랐다. 조모는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컸다. 그래서 어린 임영웅은 교회와 극장엘 자주 다녔다. 또 숙부가 명지휘자로 이름을 날렸던 터라 자연스럽게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을 접했다. 열두살 되던 해 아버지와 사별한 그는 휘문중학에 진학하면서 예술적 끼를 인정받는다.1946년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명동의 시공관극장에 올린 ‘마의태자’에 출연했으며 휘문고에 진학하면서 교내 예술제 행사를 주도했다. 당시 백두진 재무장관, 박종화 서울신문 사장 등을 찾아가 다짜고짜 돈을 받아낼 정도로 뱃심 또한 두둑했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하던 해에 ‘사육신’(유치진 작) 연출을 맡아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데뷔했다. 이후 세계일보-조선일보-대한일보 등에서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연출안목과 인맥을 넓히기도 했다. 그의 동반자 오증자(72)씨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여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고도’를 번역했다. 뒤를 이어 서울여대 교수로 있는 아들 임수현씨도 베케트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변에서는 내공이 간단치 않은 ‘베케트 집안’이라고 얘기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서울 출생 ▲55년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 ▲58~62년 세계일보·조선일보·대한일보 문화부 기자 ▲63년 동아방송 드라마 PD ▲69년 한국연극협회 이사 ▲73년 KBS TV연예부 차장·라디오국 차장·제작위원 ▲85년 소극장 ‘산울림´ 창단·대표(현) ▲91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회장 ▲9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9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연극·현) ▲99∼2005년 한·일문화교류회의 한국측 위원 ▲2001년 문화관광부 21세기문화정책위원 ▲2006년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 국립극단자문위원회 위원장, 단국대 초빙교수 # 수상 한국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동랑연극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 주요 작품 사육신, 살짜기옵서예, 환절기, 고도를 기다리며, 산불, 위기의 여자 등
  • 후쿠다, 라이벌을 구원투수로

    후쿠다, 라이벌을 구원투수로

    |도쿄 박홍기특파원|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1일 저녁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를 겨냥한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했다.17명의 각료 가운데 무려 13명을 바꿨다.4명만 유임시켰을 뿐이다. 이로써 지난해 9월 총리 취임 이후 사실상 ‘후쿠다 내각체제’를 갖췄다. 지금껏 각료 중 15명이 아베 신조 전 총리 때 임명된 ‘아베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아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특히 자민당 당직 개편과 관련,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포스트 후쿠다’를 노리는 아소 다로 전 간사장을 당의 얼굴인 간사장으로 다시 기용했다. 아소 간사장은 이르면 연말이나 내년 초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중의원의 임기 만료는 내년 9월이다. ‘8·1 개각’의 초점으로 비쳤던 관방장관, 외무상, 후생노동상은 유임됐다. 또 신임 각료 13명 가운데 8명은 전직 각료 출신,5명은 첫 입각이다. 자민당내 계파의 역학 관계도 고려, 절묘하게 균형을 맞췄다. 적절한 배치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후쿠다 총리의 전략인 셈이다. 중의원 선거를 위한 포석이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 고무라 마사히코 외무상, 니카이 도시히로 경제산업상, 다니가키 사다카즈 국토교통상, 이부키 분메이 재무상 등은 계파 회장들이다. 아소 간사장과 고카 마코토 선거대책위원장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있다. 물론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공조를 위해 사이토 데쓰오 공명당 정조회장을 환경상에 발탁했다. 후쿠다 총리는 새 진용을 구성한 만큼 ‘후쿠다 컬러’를 드러내는 데 힘을 쏟을 태세다. 생활자·소비자 중시정책의 본격적인 추진이다. 이미 고령자정책·비정규직 대책·국민연금·자녀 교육 등 소위 ‘안심 계획’도 내놓은 상태다. 후쿠다 총리는 개각에 앞서 가진 오타 아키히로 공명당 대표과의 회담에서 “원료 가격 급등, 경기 악화, 출생률 저하 등의 현안에 적극 대처할 수 있는 내각 진용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후쿠다 총리의 앞길이 순탄할지는 불투명하다. 정국 쇄신 차원의 개각 카드가 지지율의 상승 효과를 가져올지가 미지수인 탓이다. 당장 다음달 초로 예상되는 임시국회 및 정기국회에서는 세제개혁, 예산, 공무원 개혁, 인도양 급유활동 지원법 등 간단찮은 난제가 수두룩하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아소 간사장 역시 20%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 지지율로는 제 역할을 다하기가 힘겨울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결국 후쿠다 총리는 지지율의 반전이 없는 한 중의원 해산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다. 정책이 국민들에게 파고들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다. hkpark@seoul.co.kr
  • [토요영화]그르바비차

    [토요영화]그르바비차

    ●그르바비차(EBS 세계의 명화 오후 11시25분)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작은 마을 그르바비차. 이곳에서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는 12살의 딸 사라(루나 미조빅)와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은 없다. 에스마는 사라에게 “아버지는 보스니아 내전 때 전사한 전쟁 영웅”이라고 말해준다. 에스마의 일상은 곧 사라를 위한 일상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그녀는 시내 한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전사 증명서를 떼어달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는데, 전사자 가족에게는 경비가 면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마는 증명서 발급을 계속 미루기만 한다. 화가 난 사라는 어머니에게 대들지만, 곧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전쟁 와중에 수용소에서 집단강간을 당해 태어난 아이라는 것이다. 사라는 방황을 시작한다. 가슴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대신 출생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독한 고통이 자리잡는다. 영화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상처를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내전때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 여기서 보스니아 여성 2만여명은 세르비아 혈육을 낳기 위한 이른바 ‘인종 청소 프로젝트’에 따라 조직적인 강간을 당했다.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세르비아군의 만행이 빚은 시대의 참극을 직설화법으로 고발한다. 감추면 감출수록 상처는 덧나기 마련인 것. 즈바니치 감독은 조국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털어놓았다. 구차하게 에두르지 않고 딸에게 출생비밀을 알려주는 극중 에스마의 캐릭터도 그런 감독의 용기에서 가능했을 듯 싶다. 올해 34세인 즈바니치 감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 출신이다.1998년 옴니버스 영화 ‘메이드 인 사라예보’에 참여하며 감독으로 입문했다. 몇 편의 TV드라마를 연출한 뒤 처음 찍은 장편영화가 ‘그르바비차’. 이 데뷔작으로 지난 2006년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을 영화다. 엄청난 진실의 소용돌이 끝에 수학여행을 떠나는 딸이 버스에 올라 말없이 어머니와 나누는 그 눈빛. 모녀의 화해를 암시하는 평화롭고 잔잔한 화면 위로 보스니아 내전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진하게 오버랩된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PD수첩 광우병 정정·반론 보도해야”

    법원이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한 PD수첩의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달라 정정·반론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15부(부장 김성곤)는 31일 농림수산식품부가 MBC PD수첩을 상대로 낸 광우병 보도에 대한 정정·반론보도 청구 소송 선고 재판에서 “PD수첩은 일부 잘못된 광우병 보도내용에 대해 정정 및 반론보도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농식품부가 청구한 7가지의 정정 및 반론보도 내용 가운데 PD수첩이 ‘다우너 소(주저앉은 소)’를 광우병에 걸렸거나 걸렸을 가능성이 큰 소로 보도한 내용과 우리나라 국민이 광우병에 더 걸릴 가능성이 많다고 보도한 내용 2가지에 대해서는 정정보도를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또 정부가 특정위험물질(SRM) 5가지의 수입을 허용한 것처럼 보도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보도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아레사 빈슨 사인에 대해서는 이미 후속보도를 통해 정정보도가 이뤄졌다는 점을 들어 농식품부의 청구를 기각하는 등 나머지 4가지에 대해서는 농식품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다우너 소는 광우병 이외에 다양한 원인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다우너 소가 나오지만 광우병에 걸린 소는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97년 이후 출생한 소에서 광우병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종합하면 다우너 소가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공정택 서울교육감 당선] 공 당선자는 누구

    1934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이리 남성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57년 이리 동중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1986년 덕수상업고 교장을 지내고 서울시 강동교육청 교육장, 서울시교육청 중등교육국장, 서울시 교육위원회 교육위원을 차례로 역임했다.1998년부터 2004년까지 남서울대학교 총장을 맡아 대학 교육 지도자 생활을 했으며 2004년부터 지금까지 민선 4대 서울시교육청 교육감으로 재직했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2) 한국 살레시오회 모지웅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2) 한국 살레시오회 모지웅 신부

    서울 영등포구 대림1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소년원 수감생활을 마친 청소년들이 사회와 가정으로 복귀할 적응훈련을 받는 곳. 순간의 잘못으로 삶의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했지만 제자리를 다시 찾아가기 위한 마음을 다지고 방법을 배우는, 일종의 재교육장이다. 이곳에서 늘상 ‘Be Happy’(행복하게 지내세요)를 입에 단 채 청소년들의 벗이요, 아버지로 살고 있는 벽안의 노사제가 있다.80여명의 청소년들과 도예, 목공예를 함께하며 인생상담을 소임삼아 사는 5명의 신부 중 유일한 외국인, 모지웅(80·본명 몰레로 산체스·스페인) 신부.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해 평생 가난한 청소년들의 후원자요, 버팀목으로 살았던 이탈리아 사제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정신과 삶을 한국에서 52년간 이어와 ‘한국의 작은 요한 보스코’로 통하는 이방인이다. ●어딜 가도 “나는 모모신부” 자랑 예보에 없던 장맛비가 줄기차게 쏟아지던 지난 24일 오후 대림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넉넉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은 모지웅 신부는 대뜸 성경을 펴들어 손으로 줄을 쳐내렸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평범한 성경구절이지만, 평생 소외되고 뒤처진 젊은 영혼들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로 살아온 노사제의 삶이 얹힌 때문인지 눈에 쏙 박힌다. 한국에 온 지 10여년쯤 됐을까. 한국의 대학생들이 우연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몰레로와 비슷한 한국의 성씨 모자를 따 장난삼아 지어준 별명 ‘모모 신부’를 본명보다 더 좋아하는 신부. 처음엔 이름을 놀림감으로 삼은 게 기분나빴지만 나중에 대중가요 ‘모모’의 노랫말을 듣고는 ‘이것이 바로 나의 길’이라는 생각을 갖고부터 어느 자리에서든 “나는 모모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해왔단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앞에서 한 자의 틀림도 없이 ‘모모’ 노래를 유창하게 불러내는 노사제. 그는 정말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모모인 것일까. ●56년 입국 ‘작은 요한 보스코´로 살아 스페인 톨레도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살았다는 모 신부에게 한국은 원래 ‘가고 싶지않은 땅’이었다. 어릴적 중국 선교사를 꿈꾸던 신학생 친척으로부터 중국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때문인지 중국을 향한 동경이 아주 컸다고 한다. 마드리드 살레시오회 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도쿄 살레시오회 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한국은 “전쟁에 파묻힌 위험한 나라”일 뿐 결코 가고싶지 않은 곳이었다. 살레시오회 일본 관구장이 ‘한국엘 가보라.’고 거듭 권유해 반 강제로 한국 땅을 밟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마지못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해 한강철교를 건널 때였어요. 스페인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불현듯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폭격 맞아 엿가락처럼 엉긴 다리를 건너려는 개미떼 같은 피란민들…. 운명처럼 느껴지더군요.” 1956년 8월13일 낮 12시15분.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시·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 순간은 원치 않던 땅에서의 새 삶을 다짐한 회심(回心)의 찰나였음에 틀림없다. 사진으로 보았던 한강철교를 넘어 밤차로 광주에 내려가 살레시오 중학교 기숙사 사감을 맡은 게 ‘작은 요한 보스코’ 삶의 시작. 한국 청소년, 특히 어려운 환경의 젊은이들이 털어놓는 속 깊은 생각과 애환을 들어주며 자신도 모르게 요한 보스코가 되어갔다. 살레시오 중학교 교감, 살레시오 중·고교 서무과장, 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 서울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살레시오회 공동체 원장,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대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한국에서 52년을 사는 동안 서울 도림동성당·구로3동 본당의 주임 신부시절 6년과 이탈리아 로마 유학 2년을 합친 8년을 빼곤 모두 한국 청소년들의 곁을 지키며 살아온 셈이다. ●학교 세워 어려운 청소년에 기술교육 서울 도림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가정형편상 중학교 문턱을 밟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고, 광주 살레시오 중·고교 이사장 대리시절엔 돈보스코 야간 중학교를 세웠다. 의지할 곳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받아들여 기술교육을 시켰던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재직시절엔 수용하고 있던 청소년들을 전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시켜 어엿한 직장을 잡도록 주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시절 겪었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불쑥 꺼내는 노사제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80년대 중반 간첩죄로 몰려 사형당한 아버지의 아들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사형 직전 수녀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지요. 아들을 우리 청소년센터에 들어와 살게 했는데 말을 끊고 혼자만의 생활에 빠져들었어요.‘아들아 아들아’ 부르며 어렵게 말을 건넸지만 막무가내였는데, 어느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건네며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게 아닙니까.” 모 신부가 세워놓은 야간중학교며 청소년센터를 거쳐간 우리의 청소년은 얼마나 될까. 뜬금없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결혼 주례만 500번을 보았다.”는 말을 돌려준다. 커서 결혼을 한 뒤에도 배필과 함께 찾아와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란 말에 미안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조금 더 잘해줄 것을”. 가정의 행복과 부모의 사랑에서 멀었던 그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기도한단다. ●주례만 500번… 아버지라 부를때 뿌듯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이런저런 상을 주겠다는 제의가 쏟아졌고 받았다.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 최고훈장인 ‘인도장’ 금장, 스페인 국왕 훈장에 명예 서울시민증도 받았다. 하지만 “상패들이 어딘가 있을텐데…”하며 자랑삼지 않는다.“상을 너무 많이 받아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을까봐 걱정”이라며 웃는다. ‘전 세계 12억명이 하루 1달러로 살고 있고 5∼17세의 2억 450만명이 노동을 하고 있는 세상’.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자료를 내밀며 사제가 말한다.“부자들은 자신이 받은 것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결코 잊지 않아요.” 돈보스코 청소년센터에서 학생상담을 하던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해 이곳으로 온 게 지난해 7월. 은퇴했지만 여전히 바쁘다. 화·목요일 이틀은 서강대에서 스페인어·라틴어 강의를 해야 하고 성당들에서도 수시로 강의며 이런저런 도움을 청해온다. 중국 옌지의 국제합작기술학교(공업학교) 후원 책임을 맡아 학생들의 기숙사비며 장학금도 모금해 보내는 일도 큰 일이다. 가톨릭의대에 시신을 기증키로 약속했다는 노사제는 “내 껍데기를 세상에 돌려주는 게 내 일의 마지막”이라며 웃는다. 창문을 후려치는 빗소리가 팔순 노 사제의 목소리에 갇힌다.‘Be Happy’. 어쭙잖은 기자의 이별사에 노 사제가 다시 성경을 펴든다.“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모지웅 신부는 ▲1928년 스페인 톨레도 출생 ▲1955년 일본 도쿄살레시오회 신학교 졸업, 사제 서품 ▲1956년 한국 입국 ▲1959년 광주 살레시오중학교 교감▲1964년 서울 도림동성당 주임신부, 야간 중학교 설립 ▲1970년 로마 살레시오대 유학 ▲1974년 광주 돈보스코 야간중학교 설립 ▲1979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1984년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원장 ▲1989년 서울 구로3동성당 주임 신부 ▲1993년 살레시오 공동체 원장 ▲1995년 대전 살레시오회 생활관장 ▲1998년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사목 ▲2007년∼ 대림동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 사목
  • 한여름 밤, 코코모에서

    한여름 밤, 코코모에서

    여름이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여름이 예전보다 더욱 더 덥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제는 소나기라는 말보다 국지성 폭우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되는 것이 여름이라는 계절을 더욱 낯설게 만든다. 더워도 그늘 아래에서는 시원했었는데, 이제는 에어컨이 없으면 곤란한 계절이 되어 어쩐지 계절이 재미없어진 느낌이다. 그래도 여름은 아직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계절이지 않은가? 이 여름을 식혀주기도 하고 더욱 덥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여름 노래들이 있다. 비치보이스 - Kokomo 이 노래는 1988년 톰 크루즈(Tom Cruise) 주연의 영화 <칵테일> OST에 실려 있는 곡으로 ‘Surf-Music’이라 불리는 여름 노래의 대표 주자 비치보이스(Beach Boys)의 곡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코코모(Kokomo)’는 바닷가의 이름이 아니라 플로리다 휴양지의 바(bar)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노래로 비치보이스는 22년 만에 미국 차트 1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다. 비치보이스는 1961년 결성된 미국 그룹으로 <Surfin USA> <Surfer girl> 등 여름 노래라면 당연히 이들을 떠올릴 정도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들은 흔히 말하는 1960년대 비틀스와 롤링스톤 등의 British Invasion에도 꿋꿋하게 미국 음악을 지켜내던 대표적인 미국 그룹이다. 60년대 당시 가벼운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비틀스에 비해 평론가로부터 홀대 받던 이들은 1966년 ‘Pet sound’라는 앨범을 발표하면서 음악적인 면으로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멤버의 사망과 불화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들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밴드 중 하나이다. 진추하 & 아비 - One summer night 중화권 배우 진추하(陳秋霞, Chelsia Chan)가 주연했던 한국·홍콩 합작 영화 <사랑의 스잔나>에 삽입된 노래로 진추하가 직접 작곡했다. 이 영화는 1976년 개봉 당시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영화 속에서 <One Summer Night> 외에도 졸업 노래로 유명한 <Graduation Tears> 등을 진추하가 불렀다. 1957년생으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로 197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진추하는 1981년 말레이시아의 유명 사업가와 결혼 후 은퇴하였다. 그 후 2006년에 한국 팬들의 요청에 의해 방한하여 <사랑의 스잔나> 상영 30주년 기념 재상영회를 가지면서 새 앨범을 발표하였다. 제니스 조플린 - Summer time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은 흔히 3J(Janis Joplin, Jimi Hendrix, Jim Morrison)라 부르는 세 명의 요절한 뮤지션 중 한명이다. 1943년 미국 출생으로 1960년대 후반 파격적인 음악으로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1970년 약물 과용으로 사망하였다. <서머 타임(Summer time)>은 조지 거쉬인(George Gershwin)의 1935년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에 삽입된 노래로 조지 거쉬인 작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 영가에서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 이 노래는 비틀스(Beatles)의 <예스터데이(Yesterday)>와 더불어 여러 가수들에 의해 가장 많이 녹음된 노래라고 한다. 무려 2600번 이상 녹음되었다고 한다. 제니스 조플린의 <서머 타임>은 그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그만큼 다른 노래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편안한 자장가였던 원곡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해 그녀만의 원초적이면서 강렬한 목소리로 재탄생시켰다. 뛰어난 가수에 의해 곡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글 정준영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삶과꿈> 2008년 7월호 구독문의:02-319-3791
  • 日 ‘공립高 살리기’ 학군 통폐합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의 공립고교 학군제가 학생 부족과 사립학교로의 학생 쏠림현상 때문에 존폐 위기에 몰렸다.2003년 이후 47개 도도부현(都道府) 가운데 20곳에서 학군을 폐지한 데다 9곳에서는 학군을 통합해 운영하고 있다. 또 2010년 미야기현은 학군을 철폐하기로 했으며, 구마모토현은 통합할 방침이다. 홋카이도와 교토는 내년에 또다시 학군 통합을 실시하기로 했다. 28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공립고 학군체제가 출생률 감소에 따른 학생수 감소 및 사립고의 인기에 밀려 나눠먹기식인 ‘영역 분할’에서 ‘상호 경쟁’으로 전환, 생존을 꾀하고 있다.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넓히는 한편 공립고도 교육의 질을 높여 학생 유치에 적극 나서도록 한 셈이다. 반면 교육계 일각에서는 고교 서열화 및 성적 위주의 교육이라는 부작용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학군제는 1956년부터 교육기회 균등 확보 및 진학률 제고를 목적으로 시행됐다. 일본은 학군제에 힘입어 평균 고교 진학률을 97%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군제 탓에 공립고 선택 폭이 좁아졌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또 지역 사회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을 사립고나 국립고로 빼앗기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학군제 의무조항은 2001년 지방행정교육법 개정으로 삭제돼 존속 여부는 도도부현의 권한이 됐다. 도쿄도는 2003년 당시 14개 학군, 와카야마현은 당시 9개 학군을 전국 처음으로 폐지, 학생들이 거주지와 관계없이 도·현 안에서 학교를 선택하도록 했다. 홋카이도나 이와테현 등 면적이 넓은 지역은 통학 거리 등을 고려, 폐지보다는 통합체제를 선택했다. hkpark@seoul.co.kr
  • 中 여자체조 2명 부정출전 의혹

    지난주 중국 체조 대표팀에 선발된 2명의 여자선수가 나이를 속인 의혹이 제기됐다고 뉴욕 타임스가 27일 보도했다. 의혹의 당사자는 이단평행봉에서 나스티아 류킨(미국)과 금메달을 다툴 것이 확실시되는 허커신과 장위위안으로 이들은 1997년 이후 올림픽 최저 출전 연령으로 정해진 16세보다 무려 두 살 아래인 14세로 보인다는 것. 국제체조연맹(IGF) 관계자에 따르면 허커신의 출전 자격이 처음 문제된 것은 지난 5월 관영 영자신문 ‘차이나 데일리´를 비롯한 중국 언론들의 보도에서였다. 신문들이 일제히 그의 나이를 14세라고 보도했기 때문. 이에 따라 중국 당국은 재빨리 둘의 나이가 16세임을 증명하는 여권을 제시했는데 지난 2월14일 발급된 허커신의 여권에는 1992년 1월1일 생이라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중국체조연맹의 공식 홈페이지에 등재된 내용이라고 출처를 밝힌 온라인 상의 두 자료에는 허커신이 1994년 1월1일 생이라고 명기돼 있고 지난해 중국체조선수권 등록선수 자료집에도 같은 날 출생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지적했다. 장위위안도 2006년 발급받은 여권에는 1991년 11월 생이라고 명기돼 있지만 지장성체육총국이 발행한 선수 자료에는 1993년 10월1일 생으로 돼 있어 역시 만 15세가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을 땄던 매리 루 레턴은 허커신과 다른 중국 선수들의 경기 비디오를 본 뒤 “이들 소녀는 너무 작고 어려 보인다.16세라고 말들 하지만 난 정말 모르겠다.”고 말했다. 5월에 팬들의 제보를 받고 조사에 착수한 IGF는 중국체조연맹이 제출한 여권 사본을 근거로 의혹을 일단락지은 상태. 그러나 안드레 구에이스부흘러 사무총장은 “더 정확한 증거가 제시되거나 정식으로 이의가 제기되면 재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여자 체조에서 금메달을 다툴 미국이 대회 개막을 2주 앞두고 이런 의혹을 재론한 것은 정확한 증거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인 셈이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무엇이 연약한 여인의 마음을 이토록 ‘단디’ 묶었을까. 지난 55년 동안 오로지 ‘독도’라는 두 단어로 다부지게 살아왔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든 정신과 생각, 추억이 여전히 ‘독도’로 모아진다. 박영희(74) 여사. 학창시절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열아홉 나이에 당시 울릉도에 사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만나 결혼하면서 독도지킴이로 나섰다.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 등으로 이어지는 3대째 독도지킴이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그야말로 ‘독도는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1953년 4월 남편이 동료 33명 등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자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담당하는 후방 병참대원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애국심이 투철한 ‘여전사’로 변했다. 뿐만 아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故) 홍 전 대장의 조카와 딸 등이 독도연구원과 독도지킴이로 활동하고 있으니 4대째 그 집안내력을 잇고 있다. 독도에 대한 박 여사의 내조와 정신무장이 어떠한지 새삼 짐작이 간다. 지난주 경북 울릉군청으로 전화를 걸었다.“아, 예 홍 대장의 미망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박 여사의 연락처를 아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울러 홍 전 대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 10여명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전해들었다. 경기도 구리시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박 여사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까지 우렁찼다. 소파 뒤쪽 벽에 걸린 ‘독도사랑 대한의 얼’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폈더니 ‘고 홍순칠 선생님의 독도사랑을 기리며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뜻에 따라 이천육년봄 아무개 삼가씀’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였다. 그는 “2년 전 손 지사가 직접 들고 왔다.”고 귀띔했다. 독도 사진도 바로 옆에 있었다. 남편이 생전에 쓴 육필원고와 독도의용수비대 사진집을 펼친다.20여년 전 남편을 여의고 비록 혼자 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50년 전부터 우리가 정부에 수차례 건의했던 내용들을 이제 와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거 아닙니까.”하면서 볼멘소리를 높인다.1969년 당시 청와대에 건의했던 독도개발계획서를 직접 보여준다.‘어민 20가구 거주, 동도∼서도 매립, 어항구축, 냉동 및 제빙시설 등을 갖추게 해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면서 “시할아버지는 평소 ‘천지신명이시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나갑니다. 오늘도 30여명의 우리 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대를 이어 독도지킴이로 평생을 살게 했던 철학으로 가슴에 새겼다. ▶가족들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제가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 연숙이는 사이버 독도해양청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독도가족협의회를 발족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카는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독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지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 고향은 대구입니다. 학교선생이 되려고 안동사범학교에 다닐 때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살이었지요.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독도에 들어가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됐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운명이려니 하고 남편일을 열심히 도와야지요.” 결혼할 때 4살 연상인 남편과 독도에 일생을 바치자는 언약도 했단다. 이후 남편은 독도수비대장으로 대원을 이끌면서 일본 순시선과 전투에 가담했고 박 여사는 한달에 한번씩 어선을 통해 옷과 식량보급 등을 담당하느라 달콤한 신혼사랑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일본 순시선과 전투를 치렀느냐는 질문에 1954년부터 독도에 본격적으로 상주하면서 50여차례 조우를 했다고 대답했다. 또한 1954년 11월에는 일본 함정 3척을 물리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독도대첩’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독도수비대는 어떻게 해서 조직하게 됐습니까. -“제가 결혼해서 울릉도에 갔더니 대원들 일부가 모여들고 있었어요. 아마 그때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들러 죽도(竹島·다케시마)라는 간판을 세웠나봐요. 울릉도에 사는 한 어부가 그걸 들고와 울릉군청 앞마당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독도수비대를 조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요.”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요. -“할아버지가 울릉도를 개척하면서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걸 베어서 독도에 막사를 짓고 일부는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지요. 기관총 등 무기는 주로 부산에서 구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 가운데 2000만원을 털었으며 처음에는 기후나 물공급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전마선 2척을 만들어 여러 차례 독도에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독도의용수비대는 국가가 시키기 전에 무보수로 민간인 스스로가 독도를 지켰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바로 한민족의 정기가 아니냐.”고 강조했다.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적도 있다던데. -“한·일협상 무렵 방송에 나가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우물을 파고 나무도 심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방송에서 홍 아무개가 독도를 지키는 훌륭한 일을 했다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지요. 고문도 당하고 그후 몸이 많이 허약해졌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뭐, 식당운영도 했고…. 남편이 몸이 안좋게 되자 울릉도에서 서울로 나와 병원엘 다녔지요. 그때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인 1985년도인가 그래요. 처음에 송파쪽에 살았는데 1997년 구리에 우연히 들렀다가 지금까지 살게 됐습니다. 생활비는 자식들한테 얻어 쓰고 그럭저럭….” ▶그동안 나라에서 받은 혜택 같은 것은 없었나요. -“박정희 정권 때 여러 차례 건의를 했더니 대원 11명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주더군요.1996년 딸이 대통령에게 청원을 해서 33명 전원이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국가유공자가 됐지요. 남편은 대원과 가족에게 죄책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돌아가시면서 대원들이 꼭 국가 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유언했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팔순 다 된 나이에 뭘 하겠느냐.”며 남편이 남긴 것 중 책 한권 분량의 독도 관련 원고가 있어 이를 출간할 생각이라고 했다. 아울러 “정부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독도수비대원들의 활동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대구 출생 ▲51년 안동사범학교 강서과 1년 수료(준교사 자격증) ▲52년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과 결혼, 울릉도 거주 ▲53년 독도의용수비대 후방지원대 역할을 맡아 56년 12월까지 병참지원 활동 ▲61년 울릉도 사동초등학교 교사 ▲68년 울릉도에서 음식점경영 ▲69년 독도개발계획 등을 정부에 여러차례 건의 ▲85년 서울로 이사 ▲86년 남편 홍순칠 대장 작고 ▲97년∼현재 경기도 구리 거주 # 특이사항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조카와 딸 등으로 이어지는 4대째 독도지킴이 활동에 앞장
  • 성남 노령화에 분당이 ‘절반’ 기여

    성남 노령화에 분당이 ‘절반’ 기여

    경기 성남시의 인구 노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노부부 중심의 거주비율이 크게 늘고 있는 분당 신도시의 영향 때문이다. 서울의 과밀 인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제1기 신도시인 분당이 베드타운으로 전락한 데 이어 기형적 인구구조로 도시의 활력마저 상실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수도권 최고의 노른자위로, 지나친 집값 상승이 생산력이 왕성한 중산층의 진입을 막고 서울 강남 등지의 노년층만을 불러들여 이같은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1일 성남시가 처음 조사 발표한 ‘성남시 사회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남시 인구는 6월 말 현재 95만 3960명으로 전년에 비해 인구증가율이 -1.1%를 기록하는 등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그러나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03년 5만 6314명에서 올해에는 7만 1018명으로,5년 사이 무려 26%(1만 4704명)가 늘었다. 특히 노인인구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만 2507명이 분당구에 거주해 시 전체 노령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반대로 조사망률(특정인구집단의 1년간 사망자 수를 연인구로 나눈 1000분율)은 3개구 가운데 분당이 2.9로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돼 성남시의 인구 노령화를 촉진할 것으로 전망됐다. 성남의 구시가 지역인 수정구와 중원구는 조사망률이 각각 3.9와 3.7이다. 이에 따라 성남시 노령화지수(15세 미만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자치하는 비율)도 증가해 2004년 31.6%에서 무려 10.9%포인트가 높아진 42.5%를 기록했다. 이 현상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양 일산신도시와 차이가 두드러져 성남시는 원인 분석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산동구의 경우 노인인구가 전체인구(92만 4839명)의 7.6%로, 일산서구(7.8%)와 덕양구(8.8%)에 비해 오히려 낮은 점에서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유엔은 총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일 때 ‘고령화사회’,14% 이상이면 ‘고령사회’로 분류한다. 특히 성남시는 5∼6년 내에 노령인구 수가 15세 미만의 유년인구를 앞지르게 될 것으로 전망됐다. 출생률은 반대로 낮아졌다. 성남의 여성 1명당 출산율을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1.07로, 경기도 평균 1.23보다 낮다. 전국 1.1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생산가능인구(15∼65세)도 줄었다. 성남시내 생산가능인구는 지난 2005년 73만 3624명을 기점으로 매년 1만여명가량 낮아져 올해는 71만 6315명으로 조사됐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송아지 출생 30일안에 귀표 부착

    오는 12월 말부터 송아지가 태어나면 농가는 한 달 안에 반드시 축협 등에 신고하고 귀표를 붙여야 한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0일 축산 농가와 도축업자, 식육포장 처리업자, 식육 판매업자 및 기관 등이 지켜야 할 세부 사항을 담은 ‘소 및 쇠고기 이력추적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시행규칙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입법안에 따르면 소 소유자는 소가 출생·폐사하거나 소를 수입·수출·양도·양수한 경우 30일 안에 지역 축협 등 대행기관에 반드시 서면이나 전화 등을 통해 신고해야 한다.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명예군수 25년 가수 정광태 씨

    독도는 ‘돌섬’이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고도 한다. 원래 울릉도와 독도에는 경상도보다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돌섬’의 의미인 ‘독도’라 불렀다. 하여, 이곳에는 풀이나 자랄 수 있을 뿐이지, 대나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일본 사람들은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자꾸 생떼를 부리는지 원…. 이참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홍순칠,1929년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한테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6·25 참전 직후 1953년 4월 45명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그해 7월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쫓아내는 등 독도에 근접하는 일본 함정과 항공기를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그것도 6·25 때 쓰다 버린 소총과 박격포 등으로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의 야욕을 미리 짐작한 그는 독도의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크게 새겨 넣어 대한민국 영토임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그러던 1956년 12월, 무기와 독도수비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가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 작고했다. ●노래 인연으로 의용수비대장과 운명적 만남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3년 7월25일.‘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해진 가수 정광태(53)를 울릉도에 초청했다. 평소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그는 정씨를 무척 좋아했다. 둘은 ‘독도’라는 공통점으로 운명처럼 뜨겁게 만났다. “이런 훌륭한 노래를 불러줘서 너무 고맙소. 당신 같은 사람이 독도군수를 맡아야 해요.” 그러면서 홍순칠은 마지막 독도의용수비대장 자격으로 감사패와 함께 정씨를 명예군수로 임명했다. 이후 정씨는 25년째 무보수 군수로 장기 집권(?)하게 된다. 뗏목탐사와 수영종단 등 울릉도와 독도를 수십차례 다녀오면서 나름대로 명예군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뗏목탐사·수영종단 등 수십차례 독도 방문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과목 지침서인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를 감행했을 때에도 “대한민국에 대한 재침략이 시작된 것”이라고 분노하며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등과 함께 경찰청 소속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했다.4일 뒤인 18일 오후에는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롯데 전에서 LG의 초청을 받아 시구자로 나섰고 5회말 종료 후 응원석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소리 높여 불렀다.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정씨를 만났다. 그에게 ‘군수님’이라고 호칭하자 “무슨 말씀,1984년 독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예포를 발사하는 등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군수가 아닌 대통령인 셈이다.”며 웃는다. 이어 “우리나라 대통령이 아직까지 독도에 한번도 간 적이 없다.”면서 “우리나라 영토인데 한번쯤 방문해서 주민이나 근무자들에게 격려하고 그러면 얼마나 모양이 좋겠느냐.”고 했다. 그는 또 8년 전쯤 금강산에 갔을 때 북한 안내원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여자 안내원이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가 아니냐.”고 먼저 알아보자 옆에 있던 남자 안내원은 “그 노래 부른 지 얼마나 됐습네까. 노래만 불러서 독도를 찾갔시요.”라고 하더라는 것.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선수 정대세도 최근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자주 부른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기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본의 만행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예를 들어 부인이랑 함께 즐겁게 나들이를 하는데 일본사람이 대뜸 ‘내 아내’라고 주장하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본의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며 ‘무대응’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려면 얼마나 노력하고 궁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다니요. 이번 일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재침략하려는 술수를 드러낸 첫 단계입니다.” ●역사 등 근거 정부차원 장기 대응책 마련을 ▶그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일본은 역사학자를 정부차원에서 지원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일본이 떠들면 반짝 언론을 통해서 요란을 떨다가 금방 사그라집니다.1954년 무렵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은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총칼로 물리쳤고 당시 외무장관은 전투기로 공격하겠다고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일본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독도에는 왜 못 갑니까. 앞으로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수학여행을 권장해 독도를 꼭 가슴에 두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 비자를 요청했을 때 거부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12년째 일본 입국비자 거부자로 살고 있습니다.1996년 일본 고위 관료의 망언으로 독도 영유권 논쟁이 촉발된 뒤 SBS와 함께 독도 관련 추석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키로 했지요. 한국인과 일본인의 독도에 관한 인식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를 맡았는데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비자 발급에 결격 사유가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참다 못해 저는 대사관으로 찾아가 욕이란 욕을 다 퍼부으며 비자관련 서류를 돌려받아 그 자리에서 박박 찢어버렸지요.” ▶‘독도는 우리 땅’ 노래는 어떻게 해서 부르게 됐습니까. “그 노래는 1982년도에 발표가 됐지요. 당시에 ‘유머 1번지’라는 개그 프로에서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포졸복을 입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코믹하게 불렀어요.TV 방영 직후 레코드 제작자가 우리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우리 넷이 약속장소에 갔는데 제작자가 너무 늦게 나왔어요.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는 너무 바빠 먼저 자리를 떴지요. 나중에 제작자가 오더니 기다리던 저를 보고는 ‘혼자라도 취입하자.’고 했어요. 얼마후 ‘젊음의 행진’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담당 PD의 주문으로 큰칼 옆에 차고 이순신장군 복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요.” ●5공화국 땐 ‘독도는 우리땅´ 금지곡 아픔도 ▶방송금지된 적도 있었지요. “5공화국 때였습니다. 왜 금지시켰냐고 따질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지요. 당시 실세였던 허문도 문공부 차관이 하루는 저를 부르더군요. 녹차 한 잔을 주면서 자기는 독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애로사항이 뭐냐고 하더라고요. 노래가 금지돼 방송에서 안 틀어준다고 했지요. 다음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게 좋은 노래를 누가 금지를 시켰냐고 오히려 저한테 물어보더군요.” ▶독도는 언제 처음 갔나요. “1984년에 해양경찰청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접안 시설이 없어서 1987년 돌아가신 독도 최초의 주민 최종덕 할아버지가 마중나온 작은 배에 뛰어내려서 독도에 들어갈 수 있었죠. 최 할아버지의 아들, 딸, 그리고 어부들이 7∼8명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미역 등 해산물 선물을 많이 주셨지요. 또 독도 경비대에도 갔는데 예포를 발사하며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현재 뮤직라이프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있으면서 가끔씩 방송출연도 한다. 요즘에는 독도 관련내용이 많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 서울 YMCA에서 열린 ‘만우절 거짓말 대회’에 출전,1등을 차지하는 등의 경력을 쌓으며 개그맨으로 출발했다. 그가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방송국을 경영하는 친구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으며 6년 후 귀국한 뒤 본격적인 독도사랑에 나섰다.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며 ‘기러기 아빠’로 경기도 탄현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를 두고 개그맨 전유성씨는 “너는 항상 그 자리에서 독도처럼 사는구나.”라고 표현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서울 출생. 본적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 ▲74년 서라벌고 졸업.KBS-TV ‘젊음의 행진’ 데뷔 ▲75년 TBC-TV ‘살짜기 웃어예’ 등 출연 ▲78년 수도경비사 병장 전역 ▲81년 명지대 무역학과 졸업 ▲83년 KBS 남자가수 신인상 수상(독도는 우리땅) ▲84년 독도 첫방문.KBS 가사대상 동상수상(도요새의 비밀) ▲85년 김치주제가 발표 ▲90년 미국이민. 샌프란시스코 한미라디오 ‘오후의 희망가요’ 5년 진행 ▲2000년 8월 독도수호대와 울릉도∼독도 뗏목탐사 ▲04년 8월 45명의 애국인사와 울릉도∼독도 수영종단 ▲07년 한국연예제작자협회 이사 ▲08년 현재 동협회 부회장, 독도명예군수. 독도홍보대사. ●주요 히트곡 독도는 우리땅, 도요새의 비밀, 힘내라 힘, 김치 주제가, 화랑관창, 의병대장 곽재우,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 신고식 요란했던 전문직 드라마 시청률 왜 안뜨지?

    신고식 요란했던 전문직 드라마 시청률 왜 안뜨지?

    요란한 신고식과 함께 등장한 드라마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각각 문화재와 변호사 세계라는 참신한 소재로 기대를 모았던 ‘밤이면 밤마다’와 ‘대∼한민국 변호사’가 한 자릿수 시청률과 따가운 평가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반면 배 다른 자매의 뒤바뀐 운명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담은 ‘태양의 여자’는 갈수록 호평을 받는 등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MBC 월·화드라마 ‘밤이면 밤마다’(윤은경·김은희 극본, 손형석 연출)는 전문직의 세계를 다루는 것으로 관심을 끌었다. 문화유산의 밀반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문화재청 문화재사범 단속반원 허초희(김선아)와 고미술품 감정·복원 전문가 김범상(이동건)의 활약상에 시청자들은 큰 호기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도굴꾼을 잡기 위해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가 펼쳐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밋밋한 극 전개와 멜로에 치중한 모습이 애초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이 많다. 김선아와 이동건의 안방극장 복귀도 큰 관심을 모았지만, 별 반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김선아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강한 캐릭터를 상쇄시킬 만큼 인상적인 이미지 변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동건도 매력 없는 이야기 전개 속에 파묻혀 이렇다할 연기를 펼치지 못하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에 대해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전문직 드라마의 성격과 로맨틱 코미디 요소가 어설프게 결합해 이질감을 안겨준다.”면서 “주인공부터 조연까지 모두 ‘웃음강박증’을 갖고 있어 캐릭터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MBC 수·목드라마 ‘대∼한민국 변호사’(서숙향 극본, 윤재문 연출)도 빛을 못보고 있기는 마찬가지. 이혼소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류층의 이중적인 모습과 애정관계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보이겠다는 야심이었지만,4회까지 방영된 현재 “답답하다.”고 토로하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다. 전개가 지지부진할 뿐만 아니라 ‘유쾌’코드가 지나쳐 이야기가 어색하고 산만하다는 것이다. 배우의 어색한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신참내기 변호사 우이경 역을 맡은 이수경의 연기에 대해 시청자 게시판에는 “어설프다.” “국어책을 읽는 것 같다.”는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이같은 전문직 드라마의 부진은 흔한 소재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다른 드라마의 상승세와 비교하면 더욱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20일 종영한 MBC 주말드라마 ‘달콤한 인생’(정하연 극본, 김진민 연출)은 30대의 불륜을 담았지만 밀도 높은 스토리와 품격있는 영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KBS 2TV ‘태양의 여자’(김인영 극본, 배경수 연출)도 출생의 비밀과 애정 복수라는 상투적인 내용을 담았지만 탁월한 심리 묘사 등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를 더하고 있다. 윤석진 교수는 “드라마의 참신성은 결코 소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지나치게 장르에 얽매여 정해진 공식만을 답습하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70) 여의도 하나금융 앞 ‘환희’와 ‘비익’

    [거리 미술관 속으로] (70) 여의도 하나금융 앞 ‘환희’와 ‘비익’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고 있다. 새들은 어느새 한 몸이 되어 높이 날아오른다. 서울 여의도 하나금융그룹 사옥 앞에 놓인 서로 다른 높이의 두 작품은 이렇게 연결된다. ‘환희’와 ‘비익(飛翼)’이라는 이름이 붙은 백현옥(69) 인하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키낮은 조형물 ‘환희’ 아래는 사람들이 앉아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어미새의 날개 아래 안식을 갖는 아기새 같다. 환희의 의미가 어렴풋이 와닿는 순간이다. 선을 기본으로 조형물의 변주를 이뤄내는 백 교수는 각각의 조형물은 완벽한 대칭으로 만들었다. 대신 두 조형물의 높이에 변화를 주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역동성을 부여한다. 그가 작업의 지론으로 품어온 ‘상반되는 요소는 공존의 의미’라는 뜻을 이렇게도 느낄 수 있겠다. 충남 장항에서 출생한 백 명예교수는 1965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초기에는 추상작업에 몰두하다가 구상으로 선회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이끌어냈다.‘비(飛)’시리즈로 74년에,‘신천지’로 76년에 연달아 국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조형미술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는 81년부터 2004년 정년퇴임 때까지 23년간 인하대 교수로 재직했다. 교내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자 상징물인 ‘비룡탑’(1984년)과 본관 로비 ‘담론’(2005년)을 제작하며 학문에 대한 애정을 남겼다. 이외에도 어린이대공원(새날의 아침상), 공주군(웅진탑),KAL여객기 피격희생자와 괌 비행기 사고의 위령탑, 신라호텔(로비·정원) 등 전국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품과 발음이 같은 ‘비익조(比翼鳥)’는 두 개의 머리에 각각 하나의 눈을 갖고 몸은 하나인 전설의 새이다. 양 날개를 맞추지 않으면 하늘을 날지 못하고,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르면 앞서 나갈 수 없어 보통 부부의가 좋은 비유로 쓰인다. 조형물 하나를 보고 ‘호흡을 맞추고 제대로 된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 어디 부부뿐인가.’하고 떠올렸다면 지나칠까. 글 사진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웃기는 수학자’ 이광연 한서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웃기는 수학자’ 이광연 한서대 교수

    흔히 연인의 사랑을 ‘달곰쌉쌀함’에 비유한다. 이런 사랑을 수학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고 하니 귀가 절로 솔깃해진다. #상황 1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남녀가 있다. 둘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하찮은 일로 싸운다. 화가 난 여자는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남자는 진심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냈다. 여자는 감동했다. 둘은 다시 뜨거워졌고 예전보다 더욱 깊은 사랑을 하게 됐다. 이 전개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그래프를 그려 본다. 수평좌표는 둘의 만남을 유지하는 시간이고 수직좌표는 사랑의 양으로 정한다. 처음에는 연속적으로 변하던 상승곡선이 말다툼을 하고 난 후에는 갑자기 하락했고 다시 뜨거워지면서 곡선이 올라간다. 이런 현상을 어떤 곡면 위에 모두 나타낼 수 있으며 그 성질로부터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수학자들이 말하는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이다. #상황 2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어느날 수업 도중 사랑도 방정식으로 풀 수 있느냐는 한 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잠시 생각하던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칠판에 썼다.Love=2□+2△+2○+2∨+8< (그림 참조). 그런 다음 “가지 않으면 안될 길을 마지 못해 떠나가며, 못내 아쉬워 되돌아 보는 그 마음! 갈 수 없는 길인데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간절한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재치있는 사랑 방정식은 사랑의 감성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관련, 수학자들은 ‘위상수학(位相數學)’에서 사랑도 수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심장은 적분으로 뜁니다. 혈액은 정맥을 통해 우심방으로 들어가 폐동맥을 거쳐 폐에서 산소와 결합하지요. 그리고 폐정맥에서 좌심방으로 들어가서 대동맥을 거쳐 다시 몸전체로 전달됩니다. 이때 심장 박출량은 적분법을 이용해 계산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만날 때의 심장은 당연히 더 뛰겠죠. 적분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의 혈관 시스템은 수학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설계돼 있습니다.” ‘웃기는 수학자’로 유명한 이광연(45·한서대 수학과)교수. 수학을 알고 나면 온세상이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주창하는 수학 전도사다.‘웃기는 수학이지 뭐야’‘밥상에 오른 수학’‘신화속 수학 이야기’ 등 색다른 수학관련 저서만 10여권을 펴내 20여만명의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다. 다들 골치 아프게 여기는 수학을 재미있는 말투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웃기는 수학자’라는 별명도 여기에서 생겼다. 최근에는 ‘수학 블로그’라는 또 하나의 저서를 펴냈다. 여기에서 ‘게임의 법칙’‘자연의 비밀’‘역사의 명장면’‘생활의 발견’ 등 생활주변을 흥미로운 수학적 각도로 풀이해 눈길을 끈다. 이런 그가 요즘 방학을 맞아 집에서 새로운 집필을 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서적 50여권은 더 낼 작정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래저래 궁금증이 생겨 서울 서초동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마침 더운 날씨로 냉장고에서 과일과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온다. “수박을 비롯해 모든 과일이 왜 둥근 모양을 하는지 아세요?” 이 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과일을 맛있게만 먹을 줄 알았지 한번도 그 의문을 안가져 봤으니까. 주저하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은 항상 뛰어난 수학자입니다. 자연이라는 수학자는, 과일이 과육에 품고 있는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물체의 수분 손실은 그 물체의 겉넓이에 비례하지요. 즉 표피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많은 수분이 증발됩니다. 따라서 모든 과일은 과육의 부피를 최대로 하면서 겉넓이를 가장 작게 하는 쪽으로 진화하게 됐습니다. 그 답이 바로 둥근 모양의 과일입니다. 이 것을 우리는 디도의 문제(Dido’s Problem)라고 하지요.” 그는 또 겨울날 내리는 눈이 왜 육각형이고, 하루는 왜 24시간인지 등도 얼마든지 수학적으로 풀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수학은 우리가 매일 걸어다니는 보도블록에도, 명절날 가족들이 모여 하는 윷놀이와 화투에도 있다고 했다.48장인 화투놀이 중 고스톱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수학을 소개한다. 고스톱은 몇 명이 치느냐에 따라 나누어 주는 화투의 장수와 바닥에 까는 장수가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장수를 x라 하고 바닥에 까는 장수를 y라 할 때 뒤집는 장수가 나누어 주는 장수와 같아야 꺼내는 것과 뒤집는 것이 같이 끝나게 된다. 2명이 치는 일명 ‘맞고’일 때는 나누어 주는 장수가 2x이고, 바닥에 까는 장수는 y, 또 뒤집는 장수도 2x이므로 이들을 모두 더하면 48이 되어야 한다. 즉 2x+y+2x=4x+y=48. 이 식을 만족시키는 x,y를 각각 순서쌍으로 나타내면 (1,44),(2,40),(3,36)∼(11,4) 등이다.3명이 칠 때는 3x+3x+y=6x+y=48과 같은 식이 성립한다. 또 4명이 칠 때는 5장씩 나누어 가진 후 5×4=20장을 뒤집어 놓고 8장을 깔면 된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지면 고스톱은 무려 24명까지 함께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수학은 자연, 역사, 생활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학을 공부하는 까닭입니다. 수학을 통해 인류문명을 발전시키고 역경을 극복하고 또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수학이 어려워져 3분의2는 중도 포기한다는 것. 이를 안타까워해 수학을 왜 해야 하는지, 우리 주변 여기저기에 온통 ‘수학밭’이며 그걸 자각시키고 흥미를 유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남다른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다. 어려운 문제와 10∼20분 씨름하다가 어느 순간 정답을 맞혔을 때 느껴지는 쾌감과 감동 때문에 수학을 점점 더 좋아했다. 1983년 경문고를 졸업한 뒤 자연스럽게 성균관대 수학과에 지원, 합격했다.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와이오밍주립대학교에서 박사후과정 등을 마쳤다. 슬하에 아들 딸 둘을 두었으며 부인과는 같은 대학 수학과 선후배 사이. 식구들끼리 신문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수학으로 가득차 있는 ‘수학집안’이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더니 “삼국지와 세종대왕에 대한 구상을 다 마쳤다.”며 웃는다.2009년 7차 개정교육과정 ‘중·고등학교 수학 교과서’ 집필자이도 한 그는 “수학은 우리 일상과 아주 밀접하며 따라서 아이들에게 수학 알레르기를 없애 주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은 그 알레르기를 없애기 위한 방법.▲체스와 바둑, 윷놀이를 자주 시켜라. 두뇌회전에 좋기 때문이다. 종이접기도 좋다.▲수학을 이야기로 들려 줘라. 종이접기를 응용해 미 항공우주국 첨단 망원경을 72조각으로 만들어 우주로 운반한 사례,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로 컨베이어벨트를 만들어낸 것, 수학을 통해 최초로 시간을 나누었던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얘기 등이다.▲추리소설과 만화책이라도 읽게 하라. 다독은 최고의 수학공부 방법이며, 수학을 잘 하려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64년 충남 서산 출생 ▲83년 서울 경문고 졸업 ▲87년 성균관대 수학과 졸업 ▲93년 성균관대 수학과 박사과정 졸업 ▲94∼96년 한서대학교 수학과 학과장 ▲96∼97년 와이오밍대학교 수학과 포스트닥터.(한국과학재단지원) ▲98년 독학사 학위취득 종합시험 선제위원. 독학사 전공심화과정 문항개발위원, 독학사 학위취득 종합시험 문항개발위원 ▲현재 한서대학교 수학과 교수 ●주요 저서 웃기는 수학이지 뭐야(2000년), 또 웃기는 수학이지 뭐야(2002년), 신화 속 수학이야기(2004년), 밥상에 오른 수학(2004년), 피타고라스가 보여 주는 조화로운 세계(2006년), 자연의 수학적 열쇠 피보나치 수열(2006년), 수학자들의 전쟁(2007년). 이광연의 수학블로그(2008년) 등.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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