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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라운지] “연아언니 본받아 리듬체조 여왕 될래요”

    [스포츠 라운지] “연아언니 본받아 리듬체조 여왕 될래요”

    “연아 언니를 꼭 닮고 싶어요.” 앳된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미니홈피를 찾는 팬들이 하루에도 수백명이 넘을 정도로 인터넷에서는 이미 ‘얼짱’ 또는 ‘요정’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였던 신수지(18·세종대1)의 뒤를 이을 리듬체조의 유망주 손연재(15·광장중3) 얘기다. 지난달 28일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국가대표선발전 주니어부에서 92.025점의 압도적인 점수로 1위를 차지했다. 이후 숨돌릴 틈도 없이 구슬땀을 흘리는 그를 서울 세종고 체육관에서 만났다. ●얼짱·실력짱… 최연소 국가대표 출신 “경기 전에는 작품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만 생각해요.” 어린 나이지만 리듬체조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듯한 이 한마디가 귀에 꽂힌다. 대표선발전에서 2위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데는 이유가 있는 법. 158㎝, 38㎏으로 타고난 신체조건을 가졌을 뿐 아니라 턴·점프 등 기술이 이미 주니어 수준을 넘어 외국선수들과 대등하다는 평가다.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노력으로 타고난 재능을 꽃피웠다. 손연재를 지도해온 김지희 국가대표 코치는 “러시아 선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외국 코치들도 아름답다면서 깜짝 놀라곤 한다.”고 귀띔했다. 손연재가 처음 리듬체조를 시작한 건 다섯 살 무렵. 리듬체조로 유명한 세종대(서울 광진구 소재) 근처에 살다가 우연히 대학에서 꿈나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균형 잡힌 몸매와 타고난 유연성으로 일찍 두각을 보인 그는 세종초교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었다. 6학년 때는 최연소로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 “처음엔 리본이나 기구로 운동하는 언니들이 예뻐 보여 시작했죠. 그런데 재밌기까지 하더라고요.” 그에게도 잠깐이지만 슬럼프는 있었다. 광장중 1학년 말이던 지난해 1월, 몸과 마음이 지쳐 운동을 잠시 쉬기로 한 것. 묵묵히 뒷바라지하던 어머니 윤현숙(41)씨도 딸이 안쓰러웠는지 동의했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못 가 좀이 쑤셨다. 리듬체조가 없는 일상은 오히려 지루했다. 그는 “갑자기 운동을 쉬니까 계속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결국 앞으로 ‘포기는 없다.’는 다짐을 하고 다시 시작했죠.”라며 멋쩍게 웃었다. ●김연아 매니지먼트사와 계약 “올해부터는 국제대회 경험을 많이 쌓고 싶어요.”라며 욕심을 드러낸 그가 처음 공식 국제대회에 나간 건 2년 전. 동유럽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국제체조연맹(FIG) 유로피언 월드컵 시리즈였다. 강호 러시아 등 20여개국 선수들이 모두 참여한 탓에 “꼴찌만 면하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결과는 주니어 부문 5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난해에는 말레이시아 에인절컵에서 개인종합 1위에 입상, 변함 없는 실력을 뽐냈다. 가능성을 인정 받은 그는 지난 연말 ‘피겨여왕’ 김연아의 소속사 IB스포츠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으면서 체계적인 관리를 받게 됐다. 리듬체조계에서는 세마스포츠 마케팅과 계약한 신수지 이후로 두 번째. 비인기 종목으로 실업팀조차 존재하지 않는 열악한 리듬체조계 현실에서 좋은 대우를 받게 된 것. “연아 언니는 표정 연기가 뛰어나고 관중을 매료시키는 카리스마가 있어요. 저도 연아 언니를 배우고 싶어요. 비인기 종목 피겨가 다들 주목하는 종목이 됐잖아요. 노력해서 리듬체조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게 꿈이에요.” 내년부터 시니어 국가대표로 뛰는 손연재는 “2010년 아시안게임과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요.”라고 당차게 포부를 밝혔다. 글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출생=1994년 5월28일 서울 ▲체격=158㎝, 38㎏ ▲학력=세종초-광장중 ▲가족관계=무남독녀 ▲주특기=후프 ▲닮고 싶은 선수=리듬체조선수 안나 베소노바(우크라이나) ▲경력=2006년 전국소년체전 1위, 2007년 FIG 월드컵 시리즈(슬로베니아) 주니어 5위, 2008년 말레이시아 에인절컵 개인종합 1위, 2008년 KBS배 개인종합 1위, 2009년 국가대표선발전 주니어부 1위
  • “둘째兒 낳으면 무료 보험” 대구시 저출산 해소책

    대구시가 저출산 해소 대책의 하나로 둘째아이 이상을 낳으면 어린이 종합보험에 가입해 주는 ‘컬러풀 어린이 안심보험’ 서비스를 시작한다. 지자체가 월 2만원 이내의 보험료를 5년간 내고 10년간 보장해 주는 순수보장형이다. 시는 1일 시청 상황실에서 금호생명, 대한생명, 제일화재, 동부화재 등 4개 보험사와 업무제휴 협약을 체결했다. 대상은 지난 1월1일 이후 출생한 둘째 자녀부터다. 피보험자의 친권자는 자녀 출생 1개월 전부터 출생 뒤 6개월까지 시와 4개 보험사가 공동으로 만든 상품 가운데 선택, 해당 보험사 전용창구로 전화를 걸어 청약하면 된다. 보험료는 각 주소지 구·군에서 해당 보험사에 직접 지급한다. 대구시는 피보험자가 다른 시·도로 이사하면 그 다음달부터 보험료 지원은 중단하지만 계약자 변경을 통해 지자체 대신 부모가 보험을 승계하도록 했다. 문의 (053) 803-4151.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8)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오기백 신부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8)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오기백 신부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성신여대 캠퍼스 맞은편엔 둔중한 돌담이 제법 너르게 둘러쳐진 이색 지대가 있다. 한국에 파견돼 영성지도, 원목, 이주노동자 돕기, 교육 등 새로운 선교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출신 선교사 33명의 생활터전인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 이곳에서 ‘선교야말로 지구공동체의 진정한 평화를 앞당길 수 있는 큰 방편’이라는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매일매일 한국인들과 부대끼며 몸, 마음을 나누고 있는 평화 전도사들이다. 이 가운데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 오기백(58·본명 도날 오 키프) 신부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아 20여년간 한국의 격동기를 관통하며 우리네 이웃들과 울고 웃으며 살아온 이방인. 선교사로 왔지만 “이제는 평화를 위해 한국 사람들을 선교사로 키워내야 한다.”는 소신 아래 한국 사제, 수녀, 평신도들의 해외선교 교육을 총괄하는 독특한 사제이다. 돌담길을 따라 돌아 다다른 골목 끝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정문. 굳게 닫힌 육중한 철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니 부드러운 목소리의 외국인이 객을 안내한다. 작은 접견실에서 마주한 일상복 차림의 오기백 신부. 손수 타서 내온 커피 잔을 건네는 신부의 웃음이 좋다. 이런저런 선교회의 일상들을 들려주던 신부가 대뜸 용산 철거민 참사 이야기를 꺼낸다. “2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기분이었습니다. 설령 철거민들의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지할 곳 없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네들을 꼭 그렇게 대했어야 할까요?” 참사 현장을 찾아 기도를 이어갔다는 사제. 대면한 기자에게 섭섭한 심경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사제에게 지난날의 한국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은 원래 오고 싶은 땅은 아니었어요. 외방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섭섭한 마음으로 인연을 맺어 살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국 생활은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 같고 나름대로 제 길을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어려운 이웃들을 보고 그 곁을 지켜온 순간들은 저의 소명과 신앙인의 책임을 져 나가야만 했던 운명의 나날들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 서남쪽 코르크 지역의 작은 해변 마을 반트리 출신. 친·외가에 사제와 수녀들이 적지 않았던 때문일까, 막연히 선교사가 될 생각을 어릴 적부터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학 박사가 되고 싶어 코르크대학을 들어갔지만 성적이 썩 좋지 않아 진로를 바꿨다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대학 입학 때도 그렇고 1학년 말 진로를 결정짓는 시험에서 성적이 아주 나빴어요. 현실적인 불만 탓에 공부보다는 가톨릭 서클에 빠져들면서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사제의 길을 결정한 것입니다. 특히 남미 지역 선교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아일랜드에서 남미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던 유일한 선교회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대학 졸업후 주저없이 골롬반 대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부제 서품을 받는 자리에서 총장 신부의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 졸업한 이듬해인 1976년 섭섭함을 달래며 한국 땅을 밟았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명도원에서 한국 말을 4개월쯤 배웠을 무렵, 선교회가 관할하던 흑산도 성당 주임신부를 보좌할 젊은 신부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따라 부랴부랴 흑산도로 내려갔다. 당시 혼자 첫 미사를 집전하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국 말이 서툴고 미사 경험이 없던 형편상 일부러 신도들이 많지 않은 날씨 궂은 평일을 택해 첫 미사를 집전했어요. 아주머니 신도 3명이 미사 내내 어색한 저의 말과 모습을 보고 웃더니 갑자기 일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곳에서 해외선교사의 교육을 총괄하는 일을 하게 된 데는 당시의 부끄러운 기억이 큰 요인이었다. 낯선 땅에서 선교사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가 한국생활을 시작하던 때는 군사정권의 위세가 서슬퍼런 시기. 부마사태를 비롯해 전국에서 심각한 마찰과 희생이 연일 이어졌다. 흑산도 생활을 접고 목포 연동성당 보좌 신부로 있던 무렵. 일반 신문과 방송에서 보지 못하던, 억압에 맞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을 광주교구 소식지인 주보를 통해 알고는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첫 안식년을 맞아 본국 휴가를 떠나기 전 선교회 지부장에게 “한국의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살겠다.”는 말을 전했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노동사목에 뛰어들었다. 부천 삼정동 성당에 살면서 노동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통을 나누기 시작하다가 아예 성당 근처에 셋방을 얻어 노동자들과 함께 살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자기 삶을 결정하고 책임져 사는 것이 당연한데도 1970~80년대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어요.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만 살아야 하는 삶이란 끔찍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인간을 자기의 모상(모습)대로 만들었고,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 만큼 하느님의 제2 모습인 인간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위반하고 무시하는 것이라는 오 신부.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는 사제의 눈시울이 불거진다. 1980년부터 9년간 부천 지역의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살았고, 아일랜드 대학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92년부터 6년간은 서울 봉천동에서 셋방을 얻어 재개발로 생활터전을 잃은 철거민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해외 선교사 교육을 맡아 생활한 것은 선교회 한국지부장을 지낸 뒤인 2005년부터. 해외로 선교를 떠나는 사제와 수녀, 평신도들에게 철저한 정신 무장을 시키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1998년 해외선교사교육협의회를 결성해 지난해까지 회장을 맡아왔다. “지구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질적으로 함께 어울려 사는 과정에서 얼마나 갈등이 많습니까. 교회가 평안하게 어울려 사는 삶을 솔선수범한다면 세계의 평화는 훨씬 더할 것입니다.” 나와 남이 가족처럼 친하게 살기보다는 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함께 어울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훨씬 더 앞당길 것이라고 말한다. 어렵고 험한 시절 변두리에서 소수의 양심을 지켜 인간 존엄의 목소리를 높였던 한국의 교회. 오 신부는 이제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으로 바뀐 한국의 교회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교회는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함께 부유해졌어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진 한국 교회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변두리에서 중심축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지금 한국 교회에서 오히려 1970~1980년대 험한 시절 사회를 향해 뿜었던 날카로운 예언자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오 신부.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한가족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복음의 가치는 지금 교회에서 가장 새기고 지켜야 할 덕목”이라며 웃는다. 글 사진 kimus@seoul.co.kr ■ 오기백 신부는 ▲1951년 아일랜드 코르크 반트리 출생 ▲1971년 코르크대학 졸업 ▲1975년 성골롬반 대신학교 졸업, 사제수품 ▲1976년 한국 선교사 파견 ▲1977~1978년 흑산도 성당 보좌 ▲1978~1980년 목포 연동성당 보좌 ▲1980년 아일랜드에서 안식년 ▲1980~1989년 부천 지역에서 노동사목 ▲1989~1992년 아일랜드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 ▲1992~1998년 서울 봉천동에서 빈민사목 ▲1998~2004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 ▲2005년~ 해외 파견 선교사 교육 총괄
  • 美연구팀 “추운지방서 아들낳을 확률 높다”

    美연구팀 “추운지방서 아들낳을 확률 높다”

    아들 낳고 싶다면 추운 지방으로… 최근 해외의 한 연구팀이 거주지의 기후에 따라 신생아 성별 비율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조지아대학의 크리스틴 나바라(Kristen Navara)박사 연구팀은 지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202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성별 비율을 조사한 결과 남아는 51.3%, 여아는 48.7%로 나타났다. 그러나 열대지방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의 비율은 202개국 남아의 출생비율보다 0.2%낮은 51.1%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더운 곳에 속하는 서브 사하란 아프리카의 남아 출생 비율은 0.5%나 떨어진 50.8%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열대지방에서의 남아 출생비율이 전체에 비해 크게 낮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반면 열대지방에서의 여아의 출생 비율은 48.9%, 한대 지방에서는 48.7%로 따뜻한 곳에서 여자아이가 더 많이 태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나바라 박사는 “각 지방의 환경과 일조량, 온도 등이 생식개체인 난자와 정자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면서 “기후와 환경은 성별 비율에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각 대륙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현상에 따라 성별이 달라지기도 한다.”면서 “남아선호사상 등 유독 하나의 성(性)을 추구하는 각 지방의 문화적 압력 또한 영향을 끼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와 비슷한 사례로 시베리안 햄스터나 집쥐 등 작은 포유동물들이 겨울이나 밤에 새끼를 낳을 경우 수컷의 비율이 더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CIA가 제공하는 국가정보기록 사이트 ‘World Factbook’과 ‘ Royal Society journal Biology Letter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Corbis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17번 심장수술 이긴 ‘기적의 소녀’ 감동

    긍정적인 태도와 강인한 의지로 심장수술을 17번이나 받고도 살아난 ‘기적의 소녀’ 사연이 훈훈한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데일리메일은 사라 하셀그로브란 16세 소녀가 생사를 넘나드는 심장 수술을 17번이나 받고도 이를 이겨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고 최근 소개했다. 켄트 주에 살고 있는 이 소녀는 1.9kg의 가녀린 몸으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매우 약한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하셀그로브는 출생 몇 시간 만에 생애 첫 심장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맞으며 태어난 첫 해에만 무려 5번의 큰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어머니 니키는 “사라가 작은 몸으로 수술대 위에 누울 때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도 못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딸과 지내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소녀는 10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그리고 13살이 될 때까지 총 17번이나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하셀그로브는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3년 전 수술을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소녀는 “고된 수술을 받으면서도 꼭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나와 같이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영양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한편 소식을 접한 많은 네티즌들은 강인한 의지로 기적을 일궈낸 이 소녀에게 따뜻한 감동을 받고있다. 한 네티즌은 “소녀의 강인한 의지력과 긍정적인 모습이 기적을 만들었다.”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소녀”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졸리, 성녀와 악녀 사이…”따뜻한 가슴 vs 잔인한 사랑”

    졸리, 성녀와 악녀 사이…”따뜻한 가슴 vs 잔인한 사랑”

    배우는 여러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 작품 속 캐릭터에 맞춰 얼굴을 바꿀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배우의 숙명을 타고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기파 배우 존 보이트와 마셀린 버틀랜드 사이에서 태어난 졸리는 할리우드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이미지와 매력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1993년 ‘사이보그2’로 데뷔해 1999년 ‘처음 만나는 자유’로 25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는 다양한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하며 흥행배우의 입지를 굳혔다. 그녀의 다양한 필모그래피만큼이나 화제를 모은 것은 사생활이다. 아버지 존 보이트와의 의절은 물론이고 떠들썩한 연애사까지 화제를 모으며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돋보이는 가십의 여왕이 됐다. 졸리가 세상을 떠나고 난다면 할리우드의 역사는 그녀를 어떻게 기억할까. 또 팬들은 안젤리나 졸리를 어떤 이미지로 떠올리게 될까. 성녀와 악녀 이미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졸리, 그녀의 두 얼굴을 들여다봤다. ◆ 위험한 사랑 “돌을 맞을지라도...” 2005년,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놓은 대사건. 브래드 피트-제니퍼 애니스톤-안젤리나 졸리의 삼각 스캔들이다. 세기의 커플로 불렸던 피트와 애니스톤의 사랑이 졸리의 등장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에서 열연한 피트와 졸리가 사랑에 빠지며 피트 부부는 이혼 소식을 전했다. 피트는 애니스톤과의 이혼 후 졸리와의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스타였던 피트는 삼각스캔들로 언론과 팬들의 맹비난에 시달렸다. 졸리 역시 이 일로 인해 ‘세기의 악녀’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2005년 5월경부터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1년 뒤 졸리는 자신을 똑닮은 딸 샤일로을 낳았다. 피트가 애니스톤과의 결혼 생활 내내 원했던 자신의 2세였다. 피트와 졸리는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부부보다 강한 결속력으로 가정을 꾸려나갔다. 피트는 졸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겨 모든 것을 함께 공유했다. 졸리의 입양아였던 매덕스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켰고 자하라, 팍스 입양을 함께 추친했다. 두 사람의 가정은 그 누구도 손가락질 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거듭났다. ◆ 천륜을 끊다 “나에게 아버지는 없다” 졸리는 자신의 아버지 존 보이트와는 애증의 관계다. 아버지의 끼를 물러받아 배우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고 스타가 된 후에도 아버지의 돌발행동으로 배신감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살이 되던해 이혼했다. 이후 졸리는 어머니 바셀린트의 손에서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일까. 졸리는 어린시절부터 연기를 접했고 모델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7년 ‘사이보그 2’를 통해 정식 데뷔를 하게 된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는 것을 꺼렸던 졸리는 데뷔 시절부터 아버지의 성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몇년 후에는 자신의 이름에서 아버지의 성을 완전히 걷어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보이트가 졸리를 정신 이상자로 모는 발언을 하며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캄보디아 출생의 매덕스를 입양하고자 한 졸리와 마찰을 빚으면서 졸리는 아버지와 부녀의 연을 끊었다. ◆ 평화 수호자 “파티보다 세계 평화가 우선” 졸리가 아름답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을 별로 없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을 압도한다. 졸리는 또래의 여배우들이 걷는 화려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 LA클럽에서 밤을 지새우고 연인과 해외 휴양지를 떠도는 것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오지의 아이들을 돌보고 기상이변으로 폐허가 된 곳을 찾는 일이다. 2001년 영화 ‘툼 레이더’의 해외로케지였던 캄보디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졸리는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UN의 국제난민고등판문위원회의 명예대사로 활동하며 나미비아, 시에라리온 등 아프리카 국가를 수차례 방문했고 필리핀, 캄보디아 등 아시아 국가에서의 봉사 활동에도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녀에게 봉사는 내면을 포장하기 위한 허울좋은 가면이 아니다. 지난해 낳은 쌍둥이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피플지로부터 받은 400만 달러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수익의 1/3을 기부할 뿐만 아니라 일년에 두달 이상 오지에 가서 봉사활동하는데 시간을 쏟는다. 그녀의 사회활동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놓았다. 조지 클루니, 스칼렛 요한슨, 셀마 헤이엑 등의 스타들로 할리우드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 6명의 아이들 “가슴으로 낳았다” 졸리와 피트에게는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 6명이나 있다. 그들에게 아이들이란 핏줄의 이상의 개념이다. 자식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은 “핏줄보다 애정”이라는 생각이다. 졸리의 첫번째 아들 매덕스와의 만남은 2001년 영화 ‘툼 레이더’ 촬영에서 이뤄졌다. 촬영 중 고아원을 방문한 졸리는 활짝 웃는 매덕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 가족과 남편(빌리 밥 손튼)의 반대를 무릎쓰고 입양을 결정했다. 둘째 딸 자하라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입양했다. UN홍보대사로 에디오피아를 방문한 졸리는 영양 실조로 신음하고 있던 자하라의 눈망울을 보며 운명을 직감했다. 2006년 5월에 졸리는 피트와의 사이에서 첫딸 샤일로를 낳았다. 그러나 자신의 핏줄을 낳은 후에도 입양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다. 2007년에는 베트남 출생의 팍스 티옌을 입양했다. 2008년 쌍둥이 녹스 레온과 비비안 마셀린을 낳은 졸리와 피트는 이제 여섯 아이의 부모가 됐다. 자신의 핏줄과 입양한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있는 두 사람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샤일로보다 매덕스, 자하라, 팍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는다”고 말했다. 졸리는 “그 아이들은 스타의 입양아라는 이유로 주목받는 인생을 살게끔 되있다. 또 피트와 내가 밝히지 않더라도 스스로 부모와 다른 눈 색깔과 피부색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그 애들은 입양아가 아니라 나와 피트의 첫째, 둘째, 넷째 아이들이다”라고 말해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닷컴@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엄마와 읽는 동화] 새 아파트에 살 사람을 뽑습니다/박성배

    [엄마와 읽는 동화] 새 아파트에 살 사람을 뽑습니다/박성배

    3월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받아 본 사람들은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새로 지은 아파트 광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그 광고를 보는 사람들마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가슴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고는 흔히 쓰는 아파트 분양 공고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파트에 살 사람을 뽑습니다 이렇게 쓴, 초등학교 1, 2학년 어린이가 쓴 듯한 삐뚤삐뚤한 글자부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푸른 산 아래 그림처럼 예쁜 아파트를 그린 그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세 동의 아파트를 서로 건너다닐 수 있는 구름다리를 만들어 이웃끼리 오고 갈 수 있도록 설계한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각 층에서 엘리베이터나 계단 말고도 빙글빙글 돌아가며 타고 내려오게 만들어진 미끄럼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흙으로 된 놀이터도, 그리고 무려 20가지가 넘는 놀이시설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만으로는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고 숨이 가빠질 이유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파트 값은 이천만원입니다. “뭐? 이천만원? 작은 아파트 전세를 들어도 일억이 넘는데 이천만원에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은 안경을 고쳐 끼고 신문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격은 초등학교 이하의 아이들이 두 명 이상 있어야 합니다. “에이, 좋다가 말았네.” 아이들이 두 명 이상 있어도 이미 다 커버렸거나 아이가 두 명이 안 되는 사람들은 신문을 내던지며 투덜거립니다. “야! 이게 웬 떡이냐?” 초등학교 이하의 아이들이 두 명 이상 있는 집에서는 벙글벙글 좋아했습니다. 다음 글자로 삼행시를 지어 보내주시면 심사를 해서 아파트에 살 사람을 뽑습니다. <어린이> “삼행시 하나만 멋지게 지어내면 되겠군.” 사람들은 끙끙대며 삼행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시인을 찾아가서 삼행시를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책임지고 삼행시를 지어 드립니다.’ 이런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무조건 삼행시만 잘 짓는다고 뽑히지는 않습니다. 누가 심사 하느냐에 따라 뽑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누가 심사한다고 씌어져 있습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은 신문광고를 오려 들고 찾아온 사람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묻습니다. 삼행시를 부탁하러 왔던 사람은 꾸깃꾸깃 구겨진 신문 쪽지를 펴서 다시 자세히 봅니다. 심사하는 사람은 초등학교 어린이들입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심사를 한다고 했는데요?” “바로 그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무조건 멋진 삼행시를 짓기 위해 노력하는데 문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심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삼행시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까 정말 그렇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주고 삼행시를 부탁하였습니다. ‘삼행시 학원’도 여기저기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삼행시 잘 짓는 법을 배우느라 삼행시 학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일은 갑자기 부모가 없는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가 한 명인 사람은 한 명을 입양했고, 아이가 없는 사람은 두 명을 입양했습니다. 나중에는 입양할 아이가 없어서 다른 나라로 가서 입양할 아이를 찾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파트에 들어갈 사람으로 뽑히기만 하면 당장 팔아도 20배는 더 넘게 팔 수가 있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뉴스에서는 아파트에 살 사람을 뽑는다는 광고가 나간 이후로 벌어진 이상한 일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새 아파트를 지은 효준이 아빠도 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쯧쯧!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입양을 하다니.” 효준이 아빠는 혀를 찼습니다. “나빠! 나빠!” 초등학교 2학년인 효준이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 그래, 나쁘다. 아파트가 탐이 나서 아이의 행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않는 나쁜 사람들이구나.” 효준이 아빠는 효준이를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저도요, 저도요.” 옆에 있던 다른 네 아이들이 아빠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하하하, 강아지들 같구나.” 아빠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처럼 아이들을 안아주었습니다. 효준이가 태어나면서 효준이 엄마, 아빠는 사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효준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놀이방에 맡겨졌다가 밤늦게까지 엄마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집에 와서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효준이 아빠는 한번도 효준이와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효준이가 칭얼거리면 꽥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내곤 했습니다. 효준이는 늘 혼자였습니다. 효준이 아빠가 돈을 많이 벌어 제법 큰 회사의 사장이 되었을 때, 효준이는 사람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말도 잘 못했습니다. “아니, 똑똑하던 아이가 왜 이러지?” “효준아, 왜 혼자만 노는 거야?” 효준이 엄마와 아빠가 다그쳤지만 효준이는 점점 더 말을 잃어갔습니다. “내가 헛살았어!” 아빠는 효준이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돈을 버느라고 효준이와 놀아주지 못한 것도 미안했고, 효준이 동생을 낳아줄 생각조차 않았던 것도 미안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사람 사는 것같이 살아봅시다.” 효준이 아빠가 굳은 결심을 하고 효준이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효준이 엄마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얼굴을 갸웃하며 효준이 아빠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많아야 사람 사는 것 같은 집이 되는 거요.” 그제서야 효준이 엄마는 효준이 아빠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저도 좋아요!” 효준이 엄마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효준이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효준이 엄마와 아빠는 곧바로 아이들을 네 명이나 입양했습니다. 아이들이 다섯 명이 되자 정말 사람 사는 집 같아 보였습니다. 외톨이로 지내던 효준이도 차차 웃기 시작했고 떠들고 까불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집안은 사람 사는 집안이 아니야.” 효준이 아빠가 시끄럽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마을도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니지요.” 효준이 엄마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지금 당신 뭐라고 그랬지?” “예?” “그래! 아이들이 사는 마을이 필요해.” 효준이 아빠는 학교 공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에 바빴던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좋은 데 사용해야지.’ 효준이 아빠는 아이들이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아파트 세 동을 지었습니다. 보통 아파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놀이터와 같은 특별한 아파트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아이들에게 신문 광고를 만들게 하고 들어와 살 사람도 다섯 아이들이 뽑도록 했습니다. 마감 날짜가 되자 사람들이 보내온 삼행시가 방안 가득 찼습니다. 다섯 아이는 가득 쌓인 삼행시 위에서 씨름도 하고 모래를 파듯이 파고 들어가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읽어 나갔습니다. 쌓아 놓은 삼행시 위에 누워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읽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삼행시를 현관으로 던지면 엄마 아빠가 주워서 커다란 봉지에 담았습니다. “우리가 보낸 삼행시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빨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심사를 하는 아이들은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재미가 없거나 귀찮아지면 이삼일씩 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심사하다 보니 심사가 다 끝나기 까지는 세 달 하고도 열흘이 더 걸렸습니다. 드디어 효준이가 마지막 읽은 삼행시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현관으로 던졌습니다. 다음 날 아이들의 심사에서 뽑힌 90편의 삼행시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유명한 시인에게 부탁한 사람들이나 학원을 다니면서 삼행시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 그리고 이름을 지어 주듯이 삼행시를 지어 주는 곳에서 지은 사람들의 삼행시는 한 편도 뽑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으로 뽑히기 위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아이들을 입양한 사람들의 삼행시도 뽑힐 리가 없었습니다. “엉터리다! 내 삼행시가 떨어지고 저런 삼행시가 뽑히다니.” “심사에 문제가 있어.” 떨어진 많은 사람들이 법원에 몰려가 심사가 공평했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판사는 합격한 삼행시를 한 편 읽어 보았습니다. 어 - 어려운 삼행시 짓기 린 - 없음 이 - 이행시가 되어버렸어요. “후훗, 정말 어린이답군. 솔직하고 정직해. 그리고 욕심이 없어. 이런 시는 아마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의논하면서 썼을 거야. 특히 ‘린- 없음’이라는 부분에서 이렇게 써도 괜찮을지 많은 말들을 했을 거야.” 판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떨어진 삼행시 한 편을 집어들었습니다. 어 - 어여쁘고 곱게 자라거라 이 땅의 어린이들아 린 - 린스로 머리 감고, 어린 왕자처럼 머리카락 휘날리며 이 - 이제는 멋진 아파트에서 보란 듯이 살아보자. “ 흠! 어린이를 생각해 주는 척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군. 하지만 진실이 없어. 아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쓴 글이야. 어른들의 욕심도 감추어져 있군. 슬기로운 어린이라면 이런 시를 뽑을 리 없겠지.” 판사는 더 이상 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한 명도 끼지 않고, 어린이 다섯 명이 꼭 뽑혀야 할 삼행시를 잘 뽑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혹 푸른 산 곁을 지날 때면 잘 살펴보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아파트 세 동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보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루나 이틀쯤 놀다가 가세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반갑게 맞아줄 것입니다. ●작가의 말 지구에 어린이가 없다면 살 맛이 날까? 그런데 어린이가 없는 집, 어린이가 없는 학교, 그리고 어린이가 없는 마을이 늘어나고 있어서 걱정도 되고 마음 아프다.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잘 놀고 행복한 지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약력 ▲1946년 전남 무안 출생 ▲초등학교 교장, 꽃동산교회 장로 ▲197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지은 책으로 ‘꿈꾸는 아이’, ‘새싹한테서 온 전화’ 등 다수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 ‘새싹한테서 온 전화’, ‘잠자리 꿈쟁이의 흔적’, ‘가을까지 산 꼬마 눈사람’, ‘행복한 비밀 하나’ 등이 실려 있음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등 받음
  • [스포츠 라운지] “내 플레이 할수 있다면 신한이든 아니든 OK”

    [스포츠 라운지] “내 플레이 할수 있다면 신한이든 아니든 OK”

    “내 플레이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아요.” 올 여자프로농구 자유계약선수(FA) ‘최대어’로 손꼽히는 신한은행의 최윤아(24). 그는 신한은행의 통합우승 3연패는 물론 25연승(정규리그 19연승 포함)을 달리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신한에 남아 4연패를 해도 좋고, 팀을 옮겨 우승으로 이끄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 말이 모든 팀들을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본인은 알까. ●수비수가 무서웠던 소녀, 국가대표의 핵으로 최윤아는 무작정 농구공이 좋아 땅거미가 질 때까지 슛을 해대던 꼬마였다. 체육교사 삼촌의 권유로 농구부가 있는 서대전초교로 전학했다. 조상현(LG)·조동현(KTF) 형제와 황성인(전자랜드)을 배출한 농구 명문. 그게 5학년 때였다. 한달 만에 소년체전에 나갔지만 달려드는 수비수가 무서워 굳어버렸다. 몇 달 뒤 나선 두 번째 경기에선 달랐다. “2차 연장까지 갔는데 결국 졌어요. 너무 분해 엉엉 울었다니까요.” 그는 타고난 승부욕의 화신이었나 보다. 농구팬에게 최윤아는 2004년 존스컵 결승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타이완 에이스에게 발차기를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작은 키에 발군의 실력을 뽐내자, 느닷없이 ‘발차기 소녀’가 포털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일을 후회하진 않지만 ‘좀 참을 걸….’ 하는 생각은 해요. 발차기가 이렇게 오래 따라다닐 줄 몰랐거든요.”라며 얼굴을 붉힌다. 사실 올림픽을 앞두고 은퇴까지 생각했던 최윤아다. 어느 날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한 것.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식사량도 비슷한데 계속 살이 붙었다. 병원에 가보니 ‘갑상선기능저하증’이라고 했다. 호르몬조절 약도 먹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남들한테 약한 모습 보이는 게 자존심 상했어요. ” 올림픽에 열중하며 마음을 비운 게 오히려 약이 됐다. 여자농구를 8강으로 이끈 것은 물론 ‘국민여동생’으로 거듭나서다. “언제 또 올림픽에 나가겠나 싶어 즐겁게 했어요. 그렇게 즐기면서 한 건 처음이에요.” 하지만 덩치 큰 미국선수와 부딪쳐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한 달 반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답답하고 힘들었어요. 그 이후 부상 없이 선수생활 하는 게 목표가 됐다니까요.” 2개월 만에 복귀한 최윤아는 부상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신한은행의 중심에는 항상 포인트가드 최윤아가 있었다. “여유가 생겨 그런지 눈이 트인 것 같아요.”라며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어깨보다는 국민 여동생 별명이 좋아요” 문근영을 닮은 외모 덕에 ‘국민여동생’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여전히 민망하다. 태연한 척 “별명은 ‘어깨’라니까요.”라고 얼버무리다가 몇 번 더 묻자 “사실 ‘국민여동생, 문근영, 어깨’ 순으로 좋아요. 저도 여자예요.”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화장을 해본 적도 없고, 시합하느라 머리도 질끈 묶기 일쑤지만 코트에 ‘완소윤아’류의 플래카드가 없으면 서운하다고 털어놓았다. 남자친구는 없을까. “연애를 안 하겠단 생각은 아닌데 아직 안 생기네요. 남들은 제가 눈이 높대요.” 역시 솔직발랄 신세대다. 가수 ‘비’ 스타일이 좋다나. 은퇴 후 복안을 묻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지금은 농구가 최우선”이라면서도 “딱 서른에 결혼해 아이를 예쁘게 키울래요.”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는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 같은’ 최윤아가 엄마가 된다고 상상하니 왠지 어색하다. 이내 진지하게 “최고의 포인트가드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이구동성으로 최윤아라고 대답하는 것, 그렇게 모든 선수들에게 인정받는 게 목표예요.”라며 다부지게 말한다. 새달 26일까지는 달콤한 휴가다. “얼른 집에 가서 효도해야죠.”라며 벌써 대전에 간 듯 그는 들떠있다. 글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프로필 ▲출생=1985년 10월24일 대전▲가족=최대우(50), 김성옥(50)씨의 1남1녀 중 막내▲체격=170㎝, 62kg▲학력=서대전초-중앙여중-대전여상▲경력=현대건설(2003년 입단)-신한은행(2005년)▲수상 경력=05겨울 우수후보상, 07~08시즌 자유투상, 베스트5▲주량=정신력으로 버틸 뿐▲별명=국민여동생, 문근영, 어깨▲닮고 싶은 사람=전주원(신한은행)+김지윤(신세계)+이미선(삼성생명)▲좌우명=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애장품=막 배우기 시작한 카메라▲징크스=경기 전날 같은 패턴으로 생활하는 것
  • “올해 20살!”…현존 세계 최고령 개 화제

    사람나이로 환산하면 올해 147살이 된 애견 샤넬(Chanel)이 ‘세계 최고령 개’로 세계 기네스 최신판에 이름을 올려 눈길을 모으고 있다. 주인과 함께 뉴욕에서 살고 있는 샤넬은 지난 1989년에 태어나 올해로 20살 된 닥스훈트 종이다. 지난해 샤넬은 출생 신고서와 날짜가 찍힌 여러 장의 사진을 제출하고 수의사에게 소견을 받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받아 세계 기네스 협회로부터 ‘현존하는 최고령 개’임을 인정받았다. 샤넬은 현재 노환 때문에 시력도 잃었고 청각도 거의 손실된 상태다. 대부분의 시간을 애견용 침대에서 보내며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편안한 노년을 맞고 있다. 주인인 데니스 쇼니시(51)는 “샤넬은 인생을 함께 보낸 친구이자 가족”이라면서 “백내장에 걸리고 거동은 불편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고 말했다. 실제로 쇼니시는 극심한 가난에 허덕일 때 샤넬과 길거리에서 음식을 함께 먹으며 어려움을 나눴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인은 “집중되는 세간의 이목과 여러 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 때문에 편안해야 할 샤넬의 노년이 오히려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된다.”며 우려감을 표했다. 한편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26살 ‘벨라’는 사람으로 치면 200살로 샤넬보다 더 나이가 많지만 출생 신고서가 없어서 세계 기네스북 협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과거 세계 최고령 기록을 세운 개는 호주의 ‘불루이’(1910~39)라는 이름의 양치기 개로 29살까지 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만나고 싶었습니다] 원로시인 김남조

    [만나고 싶었습니다] 원로시인 김남조

    ‘말 없음의 시’라고 할까. 침묵 너머의 소리를 전하는 ‘깨달음의 시’라고 해야 할까. 한국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인 김남조(82)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묵시(默詩)’라는 화두를 던졌다. “세월 깊어져 지금은 침묵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할 말들이 그치진 아니합니다.” 60년 가까이 시업(詩業)을 이어온 이 노성한 시인에게 아직도 시로써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제 시인은 하고 싶은 말들을 침묵, 아니 그 이상의 언어로 전하려 한다. 서울 효창동 비탈의 하얀 단독. 창밖 백목련 그림자가 우련히 비쳐 드는 2층 응접실에서 만난 시인은 예의 단아한 모습 그대로였다. 1953년 첫 시집 ‘목숨’ 이후 지금까지 열여섯 권의 시집을 내며 불굴의 시혼(詩魂)을 살라온 천생 시인. 얼마 전에는 한지에 요즘 보기 드문 납활자를 사용한 수제 시선집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를 펴내기도 했다. “시는 땀과 눈물의 수제품”이라고 믿는 그이기에 이처럼 공력이 든 활판시집이 더없이 맞춤해 보인다. 시집에는 그동안 써온 1000여편의 시 중에서 가려 뽑은 100편의 작품이 실렸다. “무릇 좋은 시란 영혼성이 깃들어 있는 시, 예언적인 시라고 생각해요. 시의 하늘은 종국에는 그런 데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최근 젊은 시를 호명하는 용어로 굳어진 ‘미래파’ 시에 대해서는 사뭇 마뜩잖은 표정이다. “‘형의 두개골을 파먹고… ’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게 이른바 미래파라는 건데, 요즘 시가 점점 기괴한 쪽으로 흘러가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불온한 서정의 섬뜩한 시가 아닌 순연한 정조(情調)의 따뜻한 시를 지켜 나가자는 것이다. 김 시인에게 시는 영혼 혹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 영혼이란 육체와 따로 노는 영혼이 아니다. 늘 육체와 함께하는 영혼, 육체를 입은 영혼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사변적일지언정 공허하지 않다. 좀처럼 관념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유정함, 종교적인 경건함, 만유에 대한 감사, 세상과의 화해·용서의 마음”이 생생한 시어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참담한 영혼의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절대 긍정의 세계다. ●자신의 시대 업신여기는 건 모순 시인은 혹독한 일제 강점기를 거쳤고 한국전쟁의 참화도 몸소 겪었다. 처녀 시집 ‘목숨’은 그 전쟁의 와중에 탄생했다. 표제시 ‘목숨’에는 시인의 고단했던 삶의 한 자락이 그대로 녹아 있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중략)반만 년 유구한 세월에/가슴 틀어박고/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이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罰族)이더라도/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그래도 죽지만 않는/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름겨운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혹한 상황, 시인은 오죽하면 ‘벌족’이라는 말을 썼을까. “지금 우리 삶이 힘들지만 식민지 시절보다 슬프고 6·25때보다 더 가혹하겠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대를 업신여기는 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자기부정이에요. 인생의 수틀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색상과 잘못 기워진 자국도 남지만 그것까지 포함해 산다는 건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보니 보수니 좌(左)니 우(右)니 하며 분열을 앓고 있다. 상생의 길은 없을까. “어린 아이들이 빨갛고 파란 예쁜 자동차를 보면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돌을 던지게 만드는 세상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문학 쪽도 마찬가지예요. 이수익·신달자 같은 괜찮은 시인도 성향이 어떠어떠하다고 한국 대표시인 목록에서 빼고 그랬지요. 편 가르고 증오하는 마음의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야 합니다.” 시인에게 사랑의 대상은 무궁하다. 사랑의 총량 또한 무한하다. “떫은 사랑일 땐/준 걸 자랑했으나/익은 사랑에선/눈멀어도 못다 갚을/송구함뿐이구나”(‘사랑초서’ 53)라는 시인의 시구처럼 더욱 넉넉한 사랑이 필요한 때다.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사랑 밖엔 길이 없음’을 설파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진리는 지극히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남(男)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서 일까. 시인의 시에는 굳이 ‘페미니즘적’이랄 게 없다. 스스로도 페미니즘 운동엔 별 관심이 없다고 고백한다. 이 또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가장 여성적인 여성은 인간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남성적인 남성 역시 인간적인 남성이고요. 양쪽 모두 인간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서로 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 아니겠어요. 여성이 여성이기에 받는 사랑의 몫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퍽이나 선명한 논리다. ●부권 상실 풍조에 아쉬움 시인은 이미 십수년 전부터 지적해온 부권(父權)상실 풍조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TV 드라마에서도 여걸형 가모장(家母長)이 뜨는 시대. 하지만 시인의 생각은 좀 달랐다. “부권의 역조현상이 점점 가속화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를 아버지의 자리에 앉혀 줘야 합니다. 뒷방에 내앉거나 머슴이나 문지기의 자리에 있어선 안 되지요. ‘기눌림’을 풀어줘야 해요. 남자에게는 큰 틀을 세우는 능력이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요즘 시류에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남 탓 하지 말고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의 원로의 충고로는 충분한 값을 지닌다. 우리 사회에 원로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원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들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미국에서는 지금 헨리 키신저(86) 전 국무장관 등 7080세대 원로그룹이 정부 대외정책의 ‘선봉’에서 자문활동을 하고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우리에게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국민원로회의가 생겼다. 김 시인은 공동 의장을 맡았다. 어떤 형태의 세속정치와도 절연된 삶을 살아왔기에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말에서는 한층 진정성이 느껴진다. “38년간 대학에 있으면서 어떤 보직도 맡지 않았어요. 내 문학에 상처를 줄까봐서였지요. 지난 독재정권 시절엔 전국구 의원을 하라고 찾아온 이에게 ‘날 빼주면 평생 은인으로 삼겠다.’며 통사정해 돌려보낸 적도 있어요.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심정입니다. 식민지 시절을 생각하면 나라가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한 일인데, 정치도 국민 노릇도 너무 미숙하기만 하니….” ●감성에도 이성에도 치우치지 말라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시가 그의 후기작에 속하는 ‘좌우명’이다. “잎이 아닌 뿌리에서 더욱 봄답기를,/능금 익히듯 사람들 마음에 공들이고/충직한 농부에서 모범을 취하여라/백지를 능가하는 글을 쓰고/침묵보다 나은 말일 때 말하여라/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를 동일하게 경애하며/다수의 복지를 섬기는 이에게/앞자리를 대접하고 아울러 그 줄에 서거라/감성에도 이성에도 치우치지 말며/행복에 앞서 가치를 생각해라…” 삶의 잠언, 나아가 우리 사회의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을 ‘국민교육헌장’ 같은 시다. 김 시인은 그의 애제자인 신달자 시인이 첫 시집을 냈을 때 ‘봉헌문자’라는 제목을 지어 줬다. ‘평생 문자를 받들며 살라.’는 뜻이다. 봉헌문자는 결국 그의 명제가 됐다. “시를 쓰는 건 살점을 뜯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지만 그 측은한 길동무와 언제까지 함께하리라.”고 지금도 다짐하고 있으니 말이다. 2007년 만해대상 수상 시집 ‘귀중한 오늘’ 출간 이후 80줄이 넘어 새로 쓴 시만 30여편. 60편쯤 모이면 내년에는 열일곱 번째 시집을 낼 계획이다. “문학은 내게 병이면서 치유”라고 말하는 노시인. 그의 바람은 시의 언어가 사회 구석구석 스며들어 미움으로 얼룩진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변함없이 뜨거운 기도의 문을 연다. 글 김종면 편집위원 jmkim@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숙명여대 교수(1955∼93년), 한국시인협회·한국여성문학인회의 회장 역임 ▲예술원상, 영랑문학상, 만해대상 등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은관문화훈장 받음 ▲저서:‘목숨’ ‘나아드의 향유’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 ‘바람 세례’ ‘마음 안의 마음’ 등 16권의 시집과 ‘잠시 그리고 영원히’ ‘먼 데서 오는 새벽’ 등 12권의 수필집 등 다수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국민원로회의 공동의장
  • 군위 삼국유사 마케팅 눈길

    군위 삼국유사 마케팅 눈길

    경북 군위군이 ‘삼국유사의 고장=군위’ 알리기에 적극 나섰다. 국보 제306호인 삼국유사가 700여년 전 군위(인각사)에서 보각국사 일연 스님에 의해 편찬됐다는 점을 널리 알려 지역 홍보 및 관광객 유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에서다. 26일 군위군에 따르면 올들어 군청 새마을과 내에 ‘삼국유사 담당’ 부서를 신설하는 등 삼국유사와 군위를 연계한 다양한 홍보 및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군은 21일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일원에 삼국유사에 의해 전해지는 각종 설화·신화 등을 소재로 한 ‘삼국유사 문화랜드’ 조성을 위한 기본 및 타당성 조사 연구 용역을 대구경북연구원에 의뢰했다.또 학술·종교·문화·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전국의 삼국유사 전문가 13명으로 ‘삼국유사 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운영에 들어갔다. 다음달엔 3억원을 들여 차량 통행이 잦은 군위읍 서부리 중앙고속도로 군위 IC 입구에 군위가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대형 조형물(가로 7m 세로 5m)을 설치하고, 중앙고속도로와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군위읍 서부리 군위체육공원에도 이런 내용을 새긴 홍보판을 세울 계획이다. 아울러 예산 1억 5000만원으로 대구·군위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 및 택시 140대 외부에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 문구를 새긴 광고판을 부착하고, 군위읍 동부리의 군위교육문화체육회관도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 시가집(향가, 찬시 등)과 삼국유사·군위 홍보 안내 책자 각 3000부를 제작, 전국 지자체 및 공공 도서관, 출향인 등에 배부할 계획이다. 4~5월엔 중앙고속도로 상·하행선 휴게소에서 상춘객 등을 대상으로 군위가 삼국유사의 산실임을 알리는 홍보 전달물을 나눠 주는 한편, 470여 군 전체 공무원들의 명함에도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는 문구를 새겨 넣도록 권유할 계획이다. 김태웅 군위 부군수는 “삼국유사가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정작 군위에서 집필됐다는 점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면서 “삼국유사와 유서깊은 군위가 함께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도록 관련 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한 일연(1206∼1289)은 노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군위 인각사에 머물면서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편찬(충렬왕 7년·1281년)하고 그곳에서 입적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엘리트 외국인’ 이중국적 허용

    정부가 외국인 인재를 확보하려고 제한적으로 이중국적을 허용한다.법무부는 26일 열린 제11차 국가경쟁력강화회의에서 우수 외국인력을 유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아온 단일국적주의를 완화하는 방안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선거권·피선거권 부여 추후 검토 과학·경제·문화·체육 등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외국인으로 대한민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되면 특별귀화 대상자로 분류할 방침이다. 특별귀화로 인정받으면 국내 의무거주조건(5년)과 귀화시험이 면제된다. 또 한국에서 외국인으로서 권리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외국 국적 행사 포기각서’만 내면 외국 국적을 유지할 수 있다.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부여는 추후 검토할 계획이다. 현행법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내국인처럼 살려면 반드시 원래 국적을 포기하도록 규정한다.●‘국적선택 최고제도’ 도입키로법무부는 이와 함께 국제 결혼이나 해외 출산 등으로 이중국적자가 된 한국인에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국적선택(催告) 최고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만 20세 이전에 이중국적을 보유한 한국인은 만 22세 전까지, 만 20세 이후 이중국적 보유자는 그때로부터 2년 안에 한국이나 외국 국적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 남성 이중국적자는 만 18세가 되는 해까지 국적을 선택하지 않으면 병역의무를 이행할 때까지 이중국적으로 살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2년 안에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특별한 통보절차가 없어서 본인도 모르게 한국 국적이 상실돼 원하지 않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병역을 피하기 위해 해외에서 출생한 남성은 병역 의무를 다해야 국적 선택권을 주는 법조항은 그대로 유지된다. 추규호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은 “엄격한 단일국적주의를 제한적으로 완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면서 “첫걸음을 내디딘 만큼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유형별로 이중국적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인간 정신세계·남녀 행동방식 차이 궁금하시죠? 미지의 세계 파헤쳐볼까요

    두개골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의 뇌는 마치 커다란 호두처럼 생겼다. 무게는 1.36㎏ 정도에, 각 영역마다 특정 기능을 담당한다. 좌뇌는 주로 언어와 정보처리 능력 등을, 우뇌는 주로 시각 정보와 추상적인 사고과정 등을 맡는다. 뇌라는 기관에 대한 관심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신비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인간의 정신과 뇌의 관계는 여전히 호기심을 거둘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이런 인간 정신 과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헤친 책들이 최근 나란히 출간됐다. ●세계적인 석학과 함께하는 뇌와 기억의 과학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카블리 뇌과학연구소장인 에릭 캔델(80)은 자서전 ‘기억을 찾아서’(전대호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에서 인간의 정신과정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했다. 정신의학을 정신 분석에 의존하지 않고 세포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나간 캔델은 가장 단순한 뇌를 가진 바다달팽이를 이용해 기억이 세포 안에 저장되는 과정을 연구한 논문으로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1938년 나치로부터 이주 명령을 받고 소유물 박탈, 아버지의 실종과 등장 등 강렬한 유년기의 경험 때문에 기억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인간이 겪은 과거가 뇌의 신경세포들에 어떻게 영구적인 흔적을 남기고, 체계적으로 보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호기심은 신경세포(뉴런)를 이해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시냅스를 통해 어떻게 다른 종류의 기억들이 신경회로상에서 저장되는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확대됐다. 그는 인간의 핵심적인 정신 과정 중 하나인 기억은 뇌세포가 물리적으로 변하는 ‘시냅스 가소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간의 의식은 상호작용하는 신경세포 집단들이 사용하는 분자적 신호전달 경로들로 설명해야 할 생물학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뇌 속을 채우는 200만~300만개에 이르는 감각신경섬유는 우리의 유일한 정보 통로이자, 자아에 대한 의식을 제공한다.”면서 “이런 기억의 결합력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경험은 무수한 순간만큼 많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런 구조 속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기억되고, 우리를 우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캔델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생물학계는 인간 게놈 전체의 유전암호를 읽어내고 인간을 괴롭히는 많은 병의 유전적 토대를 해명해왔다. 언젠가는 의식의 생물학적 기초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새로운 정신과학 입문서로 저술했다.”는 설명처럼, 세계적인 석학의 과학 이야기는 난해한 소재를 다뤘지만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 2만 5000원. ●화성남·금성녀의 차이를 만드는 뇌 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남녀는 서로의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을까. ‘브레인 섹스’(앤 무어·데이비드 제슬 지음, 곽윤정 옮김, 북스넛 펴냄)는 남녀의 정신 과정을 뇌와 호르몬의 관계로 분석한다. ‘남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남성’이라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어머니의 몸 속에서 다르게 형성되는 뇌의 성별은 얼마나 남성호르몬에 노출됐느냐에 따라 남녀의 차이가 확연해진다는 것. 임신 6~7주가 되면 태아의 뇌는 성별이 구분된다. 남자 태아는 이즈음에 유아기와 아동기에 걸쳐 나오는 양의 4배에 달하는 남성호르몬에 노출되는데, 만약 여자 태아가 남성호르몬의 신호전달을 강하게 받으면 출생 후 아기는 남자 성향이 강한 여자로 성장한다. 반대로 남자 태아가 남성호르몬에 노출되지 않으면 아기는 여자 같은 모습의 남자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자궁 속 환경은 성 정체성, 출생 후 능력의 차이까지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주장이다. 남성의 뇌는 공간 지각 능력이 더 우수해 추상적인 개념의 수학이나 체스, 지도 읽기 등에 강점을 보인다. 반면 여성의 뇌는 모든 감각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광범위한 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언어, 음악, 기억력, 미각 등에 우월하다. 성장할수록 운동능력, 공격성, 성취욕 등을 유도하는 남성호르몬의 강한 영향을 받은 남성은 대부분 기계나 이론과 관계 있는 직업을 택하고 권력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더 관심을 갖는 여성은 요식업이나 사회사업가, 교사처럼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찾는다. 이런 주장은 남녀의 차이는 부모와 사회의 역할 기대가 다르게 제공돼 다른 행동방식을 학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회적 조건화’에 정면 배치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음모’로 공격받기도 했다. 저자들은 “태생적으로 분명한 남녀의 차이를 외면하게 되면 남성들의 직업은 우월하고, 가정주부라는 직업은 하위에 속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꿀 수가 없다.”면서 “남녀의 차이를 확인하고, 충분히 이해해야 문화와 가치의 성숙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1만 6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오감만족’ 목포로 떠나요

    ‘오감만족’ 목포로 떠나요

    목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는 아니다. 그렇다고 숨가쁘게 변화를 이끌어가는 산업도시 또한 아니다. 그저 서해와 남해를 이어주는 반도의 서남쪽 모퉁이에 자리잡아 뭍과 바다의 시작이자 끝으로서 1897년 10월 일제의 조선 수탈의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도시일 뿐이다. 여기에 억센 이들이 많아 최근에는 이름깨나 얻은 주먹잡이들의 고향으로만 여겨졌을 뿐이다. 목포 110년의 기억을 말없이 담고 있는 옛 골목길, 항구에 늘어선 채 어디론가 당장 떠날 듯 시동 걸려 흔들거리고 있는 뱃전, 그리고 분주한 거리마다 축음기 속의 환청처럼 아련하게 들리는 듯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는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감상(感傷)을 자극한다. 하지만 아픈 ‘출생의 과거’는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이미 다 지워졌다. 목포는 지금 적당한 부산함과 흥청거림으로 오롯한 내일의 희망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일단 목포를 찾았으면 얕은 감상에 젖을 겨를이 없다. 거리 곳곳의 식당마다 열린 문틈에서 솔솔 흘러나오는 냄새는 객의 발걸음을 멈춰세운다. 곰삭은 젓갈의 깊음, 신선한 바다의 펄떡거림, 삼학도 해풍에 잘 말라가는 짭조름함이 있다. 그렇다. 목포 여행의 시작은 ‘맛’이다. 홍탁삼합, 세발낙지, 민어, 갈치, 꽃게무침을 대표적 ‘목포 5미(五味)’로 꼽는다. 이밖에도 준치 회무침, 숭어, 광어, 농어, 붕장어, 전복 등 맛있는 바다 먹거리는 널렸다. 목포에 가면 진짜 흑산도 홍어를 먹어보아야 한다. 흑산도에서는 딱 19명만 홍어잡이 허가를 갖고 공급량을 조절하고 있다. 홍어값은 칠레산, 일본산이라도 결코 싸지 않다. 게다가 흑산도 것은 목포 어시장에서도 1㎏에 8만원이다. 칠레산이 3만원이니 세 배 가까이 비싼 셈이다. 하지만 먹어보면 ‘역시 흑산도 홍어’다. 식당에 가면 적당히 삭힌 것과 푹 삭힌 것 등 기호에 맞춰 준다. 여기에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가 어우러지면 환상의 음식, 삼합으로 거듭나게 된다. 술 한 잔 생각이 절로 난다. 곁들이는 술은 목포 지역 인동초로 만든 인동주가 제격이다. 쌉싸름하게 달콤하다. 여기에 도마에서 탕탕 두드려가며 다진다고 해서 이른바 ‘탕탕이’로 통하는 낙지회무침이 있다. 참기름, 참깨, 마늘 양념으로 무친 뒤 숟가락으로 푹 떠서 우물거리다 꿀꺽 삼키면 뱃속이 든든하다. 낙지는 또 얄팍썰어놓은 무와 함께 끓이면 시원함의 극치를 이루는 연포탕으로 변신한다. 아주 옛날 여름철 복달임으로 백성들이 흔히 즐겨 먹던 민어(民魚)는 이제 비싼 몸이 됐다. 목포 근대역사관 동쪽으로 만호동 일대에 민어횟집 거리가 있다. 7, 8월이 제격이라 아직 이른 듯하지만 맛은 벌써부터 물이 올랐다. 민어 부레, 껍질, 내장 등 부산물도 쫄깃쫄깃하게 맛있다. 또한 꽃게는 흔히 간장 게장으로 많이들 먹지만 목포에서는 꽃게 무침으로 내놓는다. 맵거나 짜지 않다. 꽃게살이 뭉개져 흘러나와 걸쭉해진, 달콤매콤한 양념에 밥을 비벼먹으면 더할 나위 없다. 목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어른 손바닥 합쳐놓은 것만 한 두께의 먹갈치 구이까지 곁들이면 포만감을 느낄 새도 없이 빈 밥공기 두어 개가 식탁 위에 나뒹군다. ●외달도 한옥민박 꼭 묵어보세요 배가 든든해졌으면 이 고장이 내밀히 숨겨둔 바다의 매력 외달도를 찾아보자. 23가구가 띄엄띄엄 살고 있다.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비수기에는 2시간 간격, 7~8월 성수기에는 1시간 간격으로 배가 다닌다. 비수기에는 달리도·율도 등을 돌아 50분 정도 걸리고, 성수기에는 직통 여객선이 다녀 30분으로 줄어든다. 요금은 왕복 8000원. 외달도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야트막한 매봉산(해발 64m)이 섬 절반에 펼쳐져 있어 1시간 남짓 산책하기에 좋다. 또한 청정바다의 팔뚝 만한 대어가 강태공들을 손짓한다. 심사가 복잡한 이에게는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볼 수 있는 간명한 자유를 준다. 고운 모래밭 해수욕장과 갯벌, 갯바위가 고르게 해변을 둘러싸고 있다. 해수풀장이 있어 아이들도 안심하고 놀 수 있다. 하룻밤 쉬어가기에는 한옥 민박이 100만불짜리 숙소다. 방문을 열면 대청마루가 있고 바로 앞으로 모래사장의 해변이 펼쳐진다. 해외 유명 리조트의 ‘프라이빗 비치’와 흡사하다. 남해 앞바다를 정원으로 둔 셈이다. 외달도 주민 김한용(57)씨는 “산책로와 해수욕, 낚시 등 휴양을 위한 여건이 잘 갖춰진 섬”이라면서 “꼭 여름철이 아니라도 몸과 마음을 재충전시키기에 괜찮을 것”이라고 한껏 자랑했다. ●목포 여행 마무리는 문화·역사 목포시내의 근대역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있다. ‘목포의 눈물’을 떨구게 만든 곳이다. 1층에는 목포의 옛 모습, 2층에는 참수 장면, 성폭행 장면 등 잔혹한 일제의 기억을 전시해놓았다.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일제가 꼼꼼하게 남겨둔 기록에는 새삼 경탄할 수밖에 없다. 목포역 광장을 나와 왼쪽 주차장이 ‘시티 투어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국도 1, 2호선이 시작되는 기점부터 근대역사관, 유달산, 삼학도, 갓바위 등 주요 볼거리를 빠짐없이 데려다준다. 어른 3000원, 학생 1000원. 월요일은 쉰다. 특히 ‘목포판 박물관 거리’는 빼놓으면 안될 곳이다. 갓바위를 지나 5분 정도 서쪽으로 걸어가면 문학관, 자연사박물관, 생활도자박물관, 문예역사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남농미술관 등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여 있다. 자연사박물관 표(3000원)를 사면 생활도자박물관, 문예역사관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 차범석, 김우진, 박화성 등 목포 출신 세 문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문학관은 별도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1960년대 후반 샛별처럼 떠올라 문단의 한 축을 평정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추억거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김현은 전후 문단에서 리얼리즘, 모더니즘의 총아였던 김지하(68), 최하림(70) 등과 함께 목포 출신이다. 문학관 옆 주차장에 문학비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여행수첩 ▲가는 길 : KTX가 있다. 용산역에서 3시간20분이면 목포다. 요금은 4만 500원. 목포는 또한 서해안고속도로의 종점이다. 주말이면 서울-목포간 고속버스가 32차례 다닌다. 2만 6200원. ▲맛집 : 홍어삼합의 대표주자는 인동주마을(061-284-4068)이다. 인동주를 처음으로 만들어 ‘평화주’라는 이름으로 특허출원까지 했다. 간장 꽃게장도 맛있다. 혼자 온 손님에게는 ‘결코’ 밥값을 받지 않는 것이 우정단 사장의 장사 철칙이라고 한다. 하루 열명 남짓 된다고 한다. 민어회는 영란횟집(061-243-7311)이 좋다. 선경준치횟집(061-242-5653)에서는 병어회, 갈치구이, 꽃게무침, 준치회덮밥, 마른우럭탕 등을 두루 갖춰 목포의 대표적 음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묵을 곳 : 일부러 외달도를 찾아가 한옥민박(011-631-8156)에 묵어볼 만하다. 4인실부터 12인실까지 방 7개가 있다. 비수기엔 5만~8만원 정도. 목포 시내라면 샹그리아비치호텔(061-285-0100)이 깔끔하다. 온돌방 11만원. 글 사진 목포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경제플러스] 여신금융협회장에 장형덕 비씨카드 사장

    여신금융협회는 25일 오후 총회를 열고 신임 회장에 장형덕 비씨카드 사장을 선임했다. 장 회장은 취임사에서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위험을 경시한 이익추구는 기업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각종 리스크에 대한 선제적 관리시스템을 확고히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0년 부산 출생으로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1976년 씨티은행에 입사, 서울은행 부행장과 교보생명 대표이사, 국민은행 상임감사 등을 지냈다.
  • 세계에서 가장 나이많은 ‘130세 할머니’

    최근 비공인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사칸 도소바(Sahkan Dosova)라는 할머니는 오는 27일 130번째 생일을 맞는다. 출생카드 기록이 정확하다면 그녀의 나이는 현재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114세)보다 무려 16세나 많은 것이 된다. 지난 2월부터 3월에 걸쳐 실시된 카자흐스탄 인구조사 중 인구통계부서 관계자들이 그녀의 출생기록이 적힌 문서를 발견하고는 조사에 착수했다. 얼마 후 카자흐스탄 측은 각종 언론에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카자흐스탄에 산다.’고 발표하면서 여론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1879년 3월 27일에 태어난 도소바의 건강상태는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양호하다. 의사들은 평소 치즈와 요거트를 좋아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지닌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나는 단 것을 절대 먹지 않는다. 하지만 치즈와 밀로 만든 담백한 음식을 즐긴다.”면서 “몸이 아플 때에도 약을 잘 먹지 않는 습관이 도움을 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손녀(42세)는 “할머니는 매우 활기찬 사람이다. 그녀의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장수를 도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그녀의 출생기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지만 카자흐스탄 인구통계부서 측은 “그녀에게는 오래된 여권과 그녀의 나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이 있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도소바도 “나에게는 어떠한 비밀도, 거짓도 없다.”며 자신의 나이에 대해 강한 확신을 드러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23일 하이라이트]

    ●TV소설 청춘예찬(KBS1 오전 7시50분) 경숙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뒤 고통스러워하며 방황한다. 주형할매가 갑작스레 일어나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광자는 순영에게 집안일을 떠넘기려 한다. 한편, 가수 선발대회에서 문규는 노래 반주를 하다가 실수를 해 자책감에 술을 잔뜩 마시는데….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아름다운 선율로 중남미를 감동시킨 중남미의 별, 바이올리니스트 도진미를 만나본다. 엘살바도르 화제의 인물 도진미의 연주 ‘아리랑’을 들은 중남미 사람들의 반응, 엘살바도르를 비롯해 중남미에 진출하기까지의 과정과 기억에 남는 팬, 엘살바도르의 공연문화에 대해서 들어본다. ●하얀 거짓말(MBC 오전 7시50분) 은영은 형우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준비한 캠코더를 병원에 가져간다. 한편 은영은 신여사에게 비안이가 갑자기 물고기를 왜 죽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놀이쯤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는 신여사의 말에 은영은 심심하다고 물고기를 죽이는 아이는 없다고 대꾸하는데…. ●TV로펌 솔로몬(SBS 오후 8시50분) 직장생활하는 두 딸의 부탁으로 30년간 운영한 식당까지 접고 외손자 셋을 봐주며 생활비를 받기로 한 순임, 윤섭부부. 이들에게 손자 셋을 돌보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던 중 실직 등으로 딸들의 사정이 바뀌며 더 이상 노부부가 아이를 봐줄 필요가 없게 되자 두 딸은 생활비를 다 줄 수 없다고 하는데…. ●다큐 프라임(EBS 오후 9시50분)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과거의 상처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는 부부. 한 공간,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부부는 결국 8주 동안 부부 상담을 받기로 한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갈등을 쌓아왔던 이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8주 뒤, 이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30분) 에티오피아의 커피를 1600년대 서양에 처음 소개한 건 이탈리아 상인들이었고, 그때부터 이탈리아는 세계적인 커피 소비국이자 수출국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파도는 이탈리아도 비켜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소비가 줄어 커피 바들도 급격한 고객 감소를 겪고 있다.
  •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토지 한국사학교’ 여는 고창영 박경리문학공원 관리소장

    [김문 전문기자 인물 프리즘] ‘토지 한국사학교’ 여는 고창영 박경리문학공원 관리소장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했고, 사명이라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기까지 왔네.’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에 있는 ‘박경리문학공원’ 입구에 새겨진 고 박경리 선생의 시(詩)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고인의 영혼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작품속 인물·사건 중심으로 역사여행 오는 5월5일이면 타계한 고인의 1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를 기념해서 내달 4일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 배우는 ‘토지 한국사학교’를 개설한다. 1897년 시작되는 소설 토지의 시작을 기점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시기까지 작품속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되돌아볼 예정이다. 주제는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항일 독립운동, 일제 침략기의 경제침탈과 토지조사 사업 등이다. 이와 함께 5월에는 ‘2009 소설 토지학교’를 개강해 작품의 깊이를 다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를 기획하고 준비한 주인공이 ‘박경리문학공원’ 관리소장으로 있는 고창영(41) 시인이다. 박경리문학공원에서 고 시인을 만났다.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원을 잠시 둘러봤다. 공원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과는 별도로 1999년 5월 완공됐다. 1만여㎡의 부지에 고인의 옛집과 정원, 집필실 등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소설 ‘토지’의 배경을 옮겨놓은 3개의 테마공원, 즉 평사리마당과 홍이동산, 용두레벌로 꾸며져 있었다. 1980년 서울을 떠나 이곳 단구동으로 이사 와 ‘토지’의 4, 5부를 집필하면서 1994년 8월15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곳으로 고인이 손수 가꾸던 텃밭과 나무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고인이 집필실에는 토지의 마지막 육필원고와 함께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탈고 당시 시계가 벽에 걸려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번 행사를 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토지’를 좋아하는 독자들과 직접 그 배경을 체험해 보고 또 ‘토지’를 가지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짚어보자는 취지입니다. 아울러 ‘토지’와 함께 주변 세계사도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박 선생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대문호께서 이곳에 사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1969년 9월26일 추석날 아침에 태어났어요. 공교롭게도 선생님은 그날 처음으로 ‘토지’ 1부의 원고를 탈고하고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했지요. 고등학교 재학때도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그 숨결을 느끼곤 했습니다. 제가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선생님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지난해 7만7000여명 공원 다녀가 →선생님과는 언제 처음 만났는지요. -2005년 5월 제가 박경리문학공원 관리소장을 맡게 되면서 직접 만나게 됐습니다. 열무가 한참 익어갈 즈음이었지요. 선생님은 저를 뚫어지게 보시더니 ‘인상이 참 좋다!’를 여러번 말씀하시더군요. 그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에게 고인과 인상이 비슷하다고 하자 “(집필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그런가요.” 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공원 내방객은 어느 정도 됩니까. -지난 해에는 연간 7만7000여명, 올해는 현재까지 전국에서 5000여명이 다녀갔습니다. 고 시인은 원주 출생으로 1986년 불휘문학회, 1990년 토요시동인으로 활동하면서 2001년 ‘예술세계’로 등단했다. 개인 시집으로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힘든 줄 모르고 가는 먼 길’을 냈으며 4월초 ‘살면서 가끔은 울어야 한다’는 세번째 시집을 출간한다. km@seoul.co.kr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신한금융지주 ‘토종 신한맨 투톱’

    신한금융지주 ‘토종 신한맨 투톱’

    신한금융지주가 ‘신상훈 지주사장-이백순 신한은행장’ 체제의 새 진용을 구축했다. 무수한 하마평 속에서 ‘토종 신한맨’을 ‘투톱’으로 내세운 건 임기가 1년 남은 라응찬 회장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면서 금융위기 상황을 무리 없이 극복하기 위한 포석이란 평가가 주를 이룬다. 외부에선 라 회장 퇴임을 고려한 인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신상훈 신한지주 사장은 은행원들 사이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신한지주와 신한은행 직원들은 그를 라 회장을 이을 차기 후계자로 꼽는다. 전북 옥구 출생으로 군산상고,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나온 그는 1968년 한국산업은행에서 은행원 배지를 단 뒤 40년 넘게 금융인의 외길을 걸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1982년 신한은행 창립 멤버로 일본 오사카지점장, 본점 자금부장, 영업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3년 은행장에 취임하고 나서 3년 후 다시 조흥은행과의 통합은행장으로 선임됐다. 소탈한 성격으로 만나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반면 일에는 빈틈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통합 은행 출범 직후 천막 농성을 하던 조흥은행 노조를 혼자 찾아가 대화를 통해 노조원의 마음을 열게 한 사례는 일화로 꼽힌다. 이백순 신임 행장은 발로 뛰는 영업맨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71년 옛 덕수상고를 졸업한 이후 제일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 1982년 신한은행으로 옮겼다. 비서실장, 테헤란로 기업금융지점장, 일본 도쿄지점장 등을 역임했다. 라 회장의 신임이 누구보다 두텁다는 평이다. 신한지주 상무, 신한은행 부행장을 거쳐 2007년부터 신한지주 부사장으로 일해 왔다. 지점장 시절에는 전국 영업점 대상과 금상을 받는 등 영업력을 발휘했다. 개인주의인 천재보다는 회사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조직 우선형’ 인재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17일 열린 취임식에서 위기에 대응하는 변화를 역설했다. 신상훈 사장은 “과거에 경험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차원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지금은 응형무궁 (應形無窮)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응형무궁이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영원한 승자로 남기 위해 무한히 변하는 상황에 맞춰 조직을 계속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 행장은 “고도로 전문화되고 복잡해지는 시장에서는 무조건 열심히 뛰는 것만으로는 절대 승자가 될 수 없다.”면서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조직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직원들의 역량을 기르고 인재를 육성하는 일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가짜 미네르바 K는 대북사업가 권씨의 작품?

    월간 신동아를 통해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 행세를 해온 K씨가 가짜 행세를 계속한 데에는 대북사업가로 알려진 권모 씨의 강한 압박이 작용했던 것으로 동아일보사의 자체 진상 조사 결과 드러났다. 권씨가 어떤 이유로 이런 역할을 했는지 검찰이 규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사는 18일 1면에 ‘거듭 사과드립니다’란 제목으로 사과문을 싣고 지난 2월17일 첫 번째 사과문에서 독자들에게 약속했던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요약해 1개 면에 실었다.진상조사위는 송문홍 신동아 편집장 등을 비롯한 신동아 기자들로부터 K씨가 진짜 미네르바라고 믿었던 경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장시간 조사한 것은 물론,대북사업가로 K씨의 기고문과 인터뷰 게재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권씨와 K씨,누리꾼 3명 등을 심층적이고 다면적으로 조사했다고 밝혔다.편집장은 물론,기자들 실명까지 공개해 조사 결과의 신뢰성을 높이려 한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동아 취재진이 K씨의 신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간과했다고 시인했다. 진상조사위의 활동 기간에 출판편집인이 회사를 떠났고 출판국장과 신동아 편집장에게 오보 사태의 책임을 물어 정직하는 등 엄중 문책을 단행했다고도 밝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권씨가 K씨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했다는 점.18일자 동아일보 29면 한 면에 게재된 보고서 요약본에 따르면 신동아팀이 지난 2월12일 심야와 13일 새벽에 걸쳐 서울의 한 호텔 객실에서 K씨에게 가짜가 아니냐고 계속 추궁하자 K씨는 “기고문을 보낸 것도, 인터뷰를 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도 심하게 압박이 들어와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됐다. 박대성이 구속됐을 때는 죽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는 것. 13일 새벽 3시쯤 권씨가 “K씨랑 좀 더 이야기해 보겠다.”고 제안했고 K씨도 “담담당당(권씨의 다음 아고라 필명) 선생이랑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 두 사람만 남겨놓고 신동아팀은 객실에서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권씨가 K씨의 신체에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했다는 진술을 양 측으로부터 확인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신동아팀은 이날 오후 충정로 사옥 인근 카페에서 K씨를 다시 만나 왜 미네르바를 사칭했느냐고 재확인하자 K씨는 “독서클럽 멤버 중에 50대 K 씨가 있다. 그가 진짜 미네르바다. 이름은 모르지만 50대 K 씨를 찾을 수 있다. 만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K씨는 신동아팀의 거듭된 추궁에 “포털사이트 다음이 아닌 네이버에서 ‘미네르바’란 필명으로 활동한 적 있었다.미네르바가 유명해진 이후 사람들이 나를 자꾸 미네르바라고 단정했다.내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믿어주지 않아 그냥 미네르바 행세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조사결과 신동아측이 K씨에게 건낸 원고료는 K씨에게 건재지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이 부분은 권씨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신동아로부터 원고료를 받아 K씨에게 전달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신동아는 K씨의 원고료 88만원은 그와 같은 인터넷 독서클럽 멤버의 은행 계좌로 송금했고,K씨는 진상조사 과정에서 “돈을 받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독서클럽 멤버 역시 K씨가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아 자신이 사용했다고 말했다고 신동아는 전했다. 동아일보사의 진상 조사는 이 대목에서 멈춰 있다.왜 권씨가 K씨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가짜 미네르바 행세에 강한 집착을 보였는지,K씨는 (’이날 처음 만난) 권씨로부터 어떤 약점을 잡혔길래 이런 수모를 감수하고 있었는지 등은 앞으로 규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동아일보사의 진상조사로는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려운 대목일 수도 있다.기왕 검찰은 진짜 미네르바 박대성(31)씨를 구속해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권씨가 K씨로 하여금 완력을 행사한 경위가 명확히 규명되어야만 여전히 진짜 미네르바는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일부 누리꾼의 주장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다음은 동아일보가 18일자 29면에 게재한 동아일보사 진상조사단의 진상조사 보고서 요약본이다.신동아 3월호에 전문이 실렸다. 1.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및 활동 동아일보사는 2009년 2월 16일 자매지인 ‘신동아’에 기고문(2008년 12월호)을 싣고 인터뷰(2009년 2월호)를 한 K 씨가 미네르바를 사칭했다는 출판국의 보고를 받고, 당일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위는 신동아의 편집장과 기자들에게 각자 K 씨 보도 관련 경위서를 제출받았으며 조사위원들이 이를 토대로 1명씩 면담을 실시했고 필요 시 추가 면담했다. 송문홍 편집장과 K 씨 보도에 관여한 기자들의 동의하에 당사자들의 e메일 내용도 확인했다. 면담 및 조사 활동과는 별개로 진상조사에 필요한 관련 자료를 확보해 분석했다.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과 이민웅 한양대 언론정보대 명예교수를 외부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3차례에 걸쳐 조사위 활동 전 과정과 조사 내용 및 결과를 설명하고 보고서에 대해 자문 및 검증을 받았다. 최용원 출판편집인은 사표를 제출하고 회사를 떠났다. 황의봉 출판국장은 2차례 6시간 40분 동안, 송문홍 편집장은 4차례 22시간 반 동안 면담 조사했다. 신동아팀 윤영호 편집위원, 조성식, 정현상 기자는 1차례씩 각각 1시간 반, 1시간 반, 1시간 45분 동안 면담했다. 허만섭 기자는 2차례 5시간 반 동안, 송홍근 기자는 3차례에 걸쳐 13시간 40분 동안 면담했다. 황일도 기자는 1차례 3시간 동안 면담했으며, 한상진 기자는 2차례 3시간 45분 동안 면담했다. 면담 외에도 필요할 때마다 전화와 e메일 등을 통해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 작업을 했다. K 씨는 2차례 만나 7시간 40분 동안 조사했다. K 씨는 이후 잠적해 추가 조사를 할 수 없었다. 대북사업가로 알려진 권모 씨에 대해서는 3차례 만나 19시간 10분 동안 조사를 실시했다. 누리꾼 M은 1차례 만나 2시간 10분가량, 누리꾼 I는 1차례 2시간 반가량 면담 조사에 응했다. 누리꾼 S는 면담 조사를 거부한 대신 1시간 반가량 1차례 조사위원과 e메일 및 인터넷 채팅을 통해 질문에 답했다. S는 이후 조사위에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추가로 밝혔다. Ⅱ. 2008년 12월호 K 씨 기고문 게재 경위 송문홍 편집장은 2008년 11월 8일경 권 씨로부터 “미네르바 기사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전화로 받았다. 송 편집장은 11월 10일 다시 권 씨의 전화를 받고 신동아 12월호에 K 씨와의 인터뷰를 추진하려 했다. 권 씨가 송 편집장에게 보낸 인터넷 채팅록을 분석한 결과, 권 씨는 11월 11일 한 인터넷의 ‘경제독서모임’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M’의 주선으로 K 씨와 처음으로 인터넷 채팅을 했다. K 씨는 채팅 기록에서 권 씨에게 자신을 계속 ‘늙은이’라고 표현하며 “늙은이가 경고한 대로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저번에 외신에 대한민국 외환위기설 기사제보 외국계 지인에게 늙은이가 터뜨렸습니다.”“심적 고통이 몸까지 상하게 합디다. 그래서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등을 언급했다. 권 씨는 K 씨에게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여러 차례 권했다. 송 편집장은 11월 12일 권 씨와의 통화에서 “미네르바가 인터뷰를 꺼린다.”는 말을 듣고 13일 K 씨의 기고문을 싣기로 결정했다. K 씨는 11월 13일 밤부터 11월 14일 새벽까지 기고문을 작성했으며 다음 아고라에 올라 있는 미네르바 박대성 씨의 글과 자신의 이전 글을 섞어 기고문을 작성해 M을 통해 신동아팀에 전했다고 조사위에 밝혔다. 누리꾼 M은 K 씨 기고문을 11월 14일 오전 송 편집장의 e메일로 발송했다. 송 편집장은 신동아팀 황일도 기자에게 e메일로 받은 기고문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황 기자는 기고문을 읽어본 뒤 “최소한 필자의 신원을 밝혀야 한다.”고 건의했으며, 송 편집장은 기고자의 신원 자체를 밝히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 몇 가지 질문을 11월 14일 오후 e메일로 M에게 전달했다. ‘노란 토끼’란 무엇인지, ‘미네르바는 50대 초반, 증권사 근무와 해외체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보도가 맞는지 등이었다. M은 같은 날 오후 송 편집장에게 e메일로 답장을 보내 “(원고가) 중구난방이니 일관성 유지 측면에서 손을 좀 봐 달라. 영감님이 담담당당(권 씨의 아고라 필명) 선생님께서 보시고 오케이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신다.”고 밝혔다. M은 답장 e메일에서 “노란 토끼는 환투기세력을 언급한 것이고, 증권사 근무 경력이 있고 해외 체류경험이 있다. 나이는 노코멘트” 등이라고 답변했다. 황 기자는 원고를 정리한 뒤 송 편집장에게 “앞뒤 문체가 확연히 다르고, 내용상 중복되는 대목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원고를 정리한 사람이 여러 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M은 11월 15일 오후 송 편집장에게 e메일을 보내 “영감님께서 ‘꼭 미네르바라고 (기고문에 적시)해야 하느냐, 사이버경제논객 장사꾼 정도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여쭤봤다. 지금도 글을 안 싣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Ⅲ. 2009년 2월호 K 씨 인터뷰 게재 경위 권 씨는 신동아 12월호가 발매된 날인 11월 18일 K 씨와 다시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조선하고도 연락하는 중입니다. 그쪽이 쉽게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송편(송 편집장)이 이미 데스크 한 자리를 가지고 이번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동아의 방향이 가장 극악한데… 그걸 이제는 못하는 겁니다. 한 번 정하면 부인 못하는 곳, 그래서 조선을 일단 눌러두고 동아부터 때린 겁니다. (중략) 그리고 이진법 내에도 혼란은 생깁니다.”라고 주장했다. 검찰이 2009년 1월 8일 박대성 씨가 미네르바라며 박 씨를 구속했다. 1월 12일 오전 본사 임원들과 일부 실·국장들이 참석하는 월요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신동아 미네르바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정밀한 확인 취재를 최용원 출판편집인에게 주문했다. 송 편집장은 월요 간담회에서 제기된 문제점 등을 13일 권 씨에게 e메일로 보냈다. 송 편집장은 1월 14일 다시 M에게 e메일을 보내 K 씨 인터뷰를 요청해 이날 20:00경 지하철 아현역에서 K 씨를 만나 인근 카페에서 1시간 반 정도 대화를 나눴다. 송 편집장은 22:00경 K 씨에게 “차라리 우리 회사로 가자.”고 설득해 그를 출판국 회의실로 데리고 갔다. 인터뷰는 1월 15일 03:30경까지 진행됐다. 실명을 밝히라는 요구에 K 씨는 망설이다 자신의 이름은 ○○○이며, 한 외국 언론사의 정부 부처 출입기자를 안다고도 말했다. 허만섭 기자는 1월 15일 K 씨의 발언을 확인하기 위해 해당 언론사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정부 부처 출입기자인 Y 씨가 K 씨를 아는지 문의했다. 허 기자는 다음 날인 1월 16일 그 지인으로부터 ‘Y 씨가 △△은행에 다니는 ○○○(K씨 실명)을 안다고 하더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조사 과정에서 말했다. 신동아 기자 대부분은 당시 K 씨를 미네르바라고 생각했다고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황의봉 출판국장은 1월 15일 오후 발행인에게 K 씨와의 인터뷰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했다. 이에 따라 15일, 16일 주요 간부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대부분 회의 참석자들은 K 씨가 미네르바인지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므로 IP, ID 문제 등에 대한 의혹을 명쾌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Ⅳ. K 씨 자백 경위 1월 28일경 허만섭 기자는 외국 언론사 Y 씨를 직접 만나 신동아 2월호 인터뷰 과정에서 촬영한 K 씨 사진을 보여주며 아는 사람인지 다시 확인을 시도했다. 이에 Y 씨는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송 편집장은 2월 6일 M에게 e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 K 씨와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K 씨가 M을 통해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자, 송 편집장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1월 14일 인터뷰 당시 찍은 K 씨의 사진과 녹취한 음성 파일을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M에게 말했다. K 씨는 2월 12일 오후 “오늘 저녁에 만나겠다. 담담당당님(권 씨)을 인터뷰 장소로 데리고 오라.”고 제안했다. 일부 기자는 “신동아의 취재 공간에 제3자인 권 씨를 데리고 가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수용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2월 12일 20:00경 송 편집장, 권 씨, K 씨, M 등 4명이 지하철 당산역 인근에서 만났다. 22:00경 송 편집장, 송홍근 기자, 한상진 기자와 권 씨, K 씨 등 모두 5명은 S 호텔 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신동아팀은 가장 먼저 K 씨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해 K 씨의 성명과 주소, 생년월일 등을 확인했다. 이어 K 씨에게 “미네르바가 맞다면 그동안 글을 올린 ID와 패스워드를 밝히라.”고 요구했고, K 씨는 “사실 글은 내가 직접 올리지 않아서 ID와 패스워드는 모른다.”고 말했다. 2월 13일 01:00경 ID 문제 등을 계속 질문하던 한상진 기자가 K 씨에게 “당신 미네르바 아니지?”라고 물었고 K 씨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네”라고 답했다. K 씨는 또 “기고문을 보낸 것도, 인터뷰를 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도 심하게 압박이 들어와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됐다. 박대성이 구속됐을 때는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03:00경 신동아팀은 K 씨에게 “그만 가라.”고 했으나 K 씨는 가지 않았다. 이에 권 씨가 “내가 K 씨랑 좀 더 이야기해 보겠다.”고 제안했고 K 씨도 “담담당당 선생이랑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해 두 사람만 남겨놓고 신동아팀은 객실에서 나왔다. 신동아팀은 호텔 1층 로비에서 30여 분간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일부 기자 등이 “객실에 권 씨와 K 씨 둘만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03:30분경 신동아팀은 호텔을 나왔고 권 씨와 K 씨는 객실에 함께 있다가 07:00경 귀가했다고 조사위에 밝혔다. 조사위는 이 과정에서 권 씨가 객실에서 K 씨의 신체에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했다는 진술을 양 측으로부터 확인했다. 황의봉 출판국장은 이날 11:00경 출근한 송 편집장으로부터 K 씨의 자백 사실을 처음으로 보고받았다. 신동아팀은 진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이날 오후 충정로 사옥 인근 카페에서 K 씨를 만났다. K 씨는 왜 미네르바를 사칭했느냐는 질문에 “독서클럽 멤버 중에 50대 K 씨가 있다. 그가 진짜 미네르바다. 이름은 모르지만 50대 K 씨를 찾을 수 있다. 만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신동아팀은 통상의 원고 마감일을 하루 앞둔 2월 14일 오후 출판국에서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신동아 기자들은 K 씨가 가짜 미네르바라고 최종 결론 냈다. 황 국장은 회의를 마친 뒤 전화로 최용원 출판편집인에게 K 씨 자백 상황을 처음으로 보고했다. Ⅴ. K 씨와 권 씨 K 씨는 1976년생으로 출생지는 ○○이며 지방 도시의 S고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K 씨는 지방의 모 대학을 졸업했다고 말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K 씨는 자신이 2000년 H 창투를 시작으로, C 투자증권의 한 지점에서 영업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가 H 창투를 다녔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K 씨가 C 투자증권에 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권 씨의 진술에 따르면 권 씨는 1963년생으로 출생지는 ○○이다. 조사 과정에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했으나 확인 결과 1982년 지방의 K대에 입학해 1989년 졸업했으며, 1989∼1995년 KOTRA 특수사업과에서 근무했다. 송문홍 편집장은 1997년 미국 연수 후 권 씨를 처음 만나 10여년간 만남을 지속하며 외교안보 분야의 정보를 제공받아 왔다고 조사에서 밝혔다. 권 씨는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담담당당’이란 필명으로 글을 게재하고 있다. Ⅵ. 문제점 ① 검증의 부재 신동아는 2008년 12월호 K 씨의 기고문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필자에 대한 신원과 경력을 확인하지 않았다. 송 편집장은 K 씨를 소개한 권 씨의 얘기만을 믿고 K 씨를 미네르바라고 속단했다. 기고도 K 씨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누리꾼 M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았다. 신동아가 2009년 2월호 K 씨와의 인터뷰를 기사화할 때도 신원 검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인터뷰 게재 당시 신동아가 알고 있는 것은 K 씨의 성명뿐이었다. 검찰이 박대성 씨를 미네르바로 특정한 가장 중요한 근거였던 IP와 ID 문제에 대해서도 신동아팀은 엄밀하게 검증하지 못한 채 기사를 게재했다. ② 게이트키핑 시스템 미작동 K 씨와 관련한 일련의 보도를 제작 책임자인 송 편집장이 주도하면서 사실상 게이트키핑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신동아팀 기자들은 기고문의 게재 경위나 인터뷰 성사 과정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송 편집장의 판단과 결정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③ 윤리적 문제 송 편집장은 M으로부터 K 씨의 기고문을 받은 뒤 글의 내용에 관한 몇 가지 추가 질문을 M에게 전달했다. 신동아 2008년 12월호의 <편집자주>는 M과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을 토대로 작성했다. 그럼에도 ‘K 씨를 여러 차례 접촉했다’는 모호한 표현을 씀으로써 K 씨를 직접 만났거나 그와 전화 인터뷰를 한 듯한 인상을 줘 결과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 신동아팀은 2월 13일 03:00경 권 씨와 K 씨만을 호텔방에 남겨두고 현장을 떠났으나 두 사람은 이날 처음 만난 데다 K 씨에게 신동아 기고를 수차례 요구한 사람이 권 씨였던 만큼 K 씨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신동아팀 관계자가 현장을 지켰어야 한다는 것이 조사위의 판단이다. 송 편집장은 사내 정보를 제3자인 권 씨에게 지속적으로 유출했다. Ⅶ. 개선 대책 동아일보사는 이번 신동아의 미네르바 오보를 계기로 유사사건의 재발을 막고, 독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마련했다.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해 시행할 방침이다. ① 취재 및 보도 원칙 재정립과 교육 강화 사실의 검증, 익명 취재원 처리, 인용, 정정, 반론, 표절금지, 사진 및 영상물의 사용 등에 관한 기준을 재정립한다. 이 같은 원칙과 기준을 데스크와 기자들에게 교육을 통해 실천토록 한다. ② 인터넷 정보 활용 원칙 마련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에 대한 사실 확인, 내용 검증, 인용 기준, 정정보도 등에 관한 원칙을 마련해 시행한다. ③ 게이트키핑(단계별 기사 검증) 강화 기사 관련 정보의 정확성과 기사 가치 판단에 대한 보도·논평·편집 간부들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고 단계별로 충실한 게이트키핑이 이뤄질 수 있는 체계를 갖춘다. 취재 내용에 관해 기자들과 데스크 간의 의견 교환을 활성화한다. ④ ‘스탠더드 에디터’ 제도 도입 스탠더드 에디터는 보도 준칙의 실행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정확한 보도와 취재 윤리를 실천하기 위한 관련 교육을 담당한다. ⑤ 내부 심의 강화 신문 기사 위주로 이뤄졌던 회사 차원의 내부 심의 기능을 잡지, 인터넷 기사까지 확대한다. ⑥ 독자위원회(가칭) 설립 동아일보사는 사회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한 독자인권위원회를 2001년부터 운영해 왔다. 이를 ‘독자위원회’로 확대 개편한다. 독자위원회는 독자의 인권보호는 물론 취재 및 보도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원칙을 정확히 준수했는지 심의한다. 독자위원회의 심의 대상에는 신문뿐 아니라 잡지, 온라인 기사까지 포함한다. 동아일보 진상조사위원회 [다른기사 보러가기] ”신인 여배우 12명 돌아가며 만나는 재벌” 연 8만명 중동여행…여행사들 생계수단 체육활동중 부상자도… 도넘은 유공자 남발 결국 법정 가는 고교등급제 의혹 ’녹색기획관’은 자리 늘리기? 의사·경찰·‘나이트 삐끼’까지 “코끼리 주사 한 방만…” 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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