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도덕적 가치가 우선한 美대선/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막스 베버는 “정치인이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아가기는 힘들다.”고 갈파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정치인을 힐난하는 난센스 퀴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2004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느낀 소감은, 정치인이 직업으로서 괜찮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정치인이 갖춘 자격과 능력보다, 그리고 그들이 투자한 노력보다 훨씬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케리의 도전이 좌절되고, 부시의 집권 2기가 확정되었다. 한국에서의 실망과 환영 못지않게, 미국에서의 절망과 환호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만큼 중요한 선택의 현장이었고, 치열한 결전의 무대였다.1960년 63%의 투표율 이래 가장 높은 투표참여율을 기록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가장 중시한 선택의 기준은 도덕적 가치와 경제, 그리고 테러리즘이었다. 유권자의 22%가 도덕적 가치,20%가 경제,19%가 테러리즘을 가장 중요한 투표의 기준이라 지적하였다. 경제문제가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전통적 쟁점이었다고 한다면, 도덕적 가치와 테러리즘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국 유권자들이 이야기하는 도덕적 가치란 낙태, 동성간 결혼, 줄기세포 실험, 가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공화당 부시 후보는 낙태와 동성간 결혼, 줄기세포 실험에 반대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유지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권자의 79%가 부시에 표를 던졌고,18%가 케리를 지지했다. 아직, 미국사회는 전통적 개념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확증된 셈이다.
테러리즘과 전쟁 역시 중요 논점이었다. 어찌 보면,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단할 것인가에 대한 국민투표적 성격을 갖는 대선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부시는 ‘강력한 리더’를 자임하며, 테러에 대한 강경 대처와 국민의 안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반면 민주당 케리 후보는 이라크 전쟁을 부시 대통령의 실수로 시작된 것으로 몰아붙였다.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된 대량 살상무기가 이라크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국제적 연대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라크 전쟁에 동의하는 유권자가 49%, 동의하지 않는 유권자는 47%였다. 근소한 차이지만 전쟁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유권자가 다수이고, 전쟁이 진행 중인 현실 속에서 전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은 무리였다. 국가안보라는 문제에 부딪쳐서는 득볼 것이 없는 민주당의 태생적 딜레마를 여지없이 보여준 선거였다.
11월2일 선거를 마치고도 또다시 혼란의 가능성이 우려되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의 선거제도에 기인한다. 미국의 대선은 일반국민이 하는 투표(popular vote)로 선거인단이 선출되고, 이들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인단 선거(electoral vote)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일반 국민이 하는 투표에서의 지지율과 선거인단이 하는 투표에서의 지지율이 달라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각 주의 정치적 자율성과 독자성을 극대화시키고자 과반을 점유한 후보측이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차지하는 제도를 택하고, 일반 대중의 민도를 신뢰하지 않았던 시대에 간선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초래되는 혼란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투표제도와 장비가 각 주마다 크게 달라 분권적으로 다양하게 투개표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투표방식과 개표기기에 따라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지지율이 팽팽할 경우 당락을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3일 오후 2시(한국시간 4일 새벽 4시) 패배를 인정하는 케리의 연설로 혼란에 대한 우려는 거두어졌다. 케리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원고를 보지 않고 자신의 비전과 희망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갈라진 유권자를 통합해야 하는 과제가 부시 대통령에게 남겨졌다. 일반 유권자 투표와 선거인단 투표 모두에서 승리하고, 집권 2기를 맞는 부시 대통령의 정책을 유심히 살펴볼 차례이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