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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泰,백만장자 내각?

    잉락 친나왓 신임 총리를 비롯해 태국 새 내각의 3분의2가량이 백만장자인 것으로 파악돼 눈길을 끌고 있다고 AP통신이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태국 국가부패방지위원회가 공개한 각료 36명의 재산 신고 현황에 따르면 재산이 가장 많은 각료는 플럿프라솝 수랏왓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9억 6350만 밧(약 362억원)을 신고했다. 그는 공직 생활 대부분을 산림부 등 자원개발 부서에서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총리는 에르메스 핸드백 7개를 포함해 5억 4100만 밧(약 200억원)을 신고해 두 번째로 재산이 많았다. 지난 8월 취임한 잉락 총리는 포르셰 카이맨 등 8대의 자동차와 축구장이 있는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 전 총리의 재산은 최근 포브스 조사 결과 6억 달러인 것으로 추정된다. 옛 통신 재벌로 한때 20억 달러에 달했던 그의 재산 중 일부는 태국 정부에 몰수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사르코지·캐머런 리비아행… 발 빠른 佛·英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15일(현지시간)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 이후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리비아를 방문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의 공습전을 선봉에서 이끌며 리비아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에서 카다피군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 대표적인 서방국가다. 두 정상의 발빠른 리비아 방문은 반군이 수립한 과도국가위원회(NTC)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포스트 카다피’ 체제에서의 입지를 선점하기 위한 실리적인 행보로 풀이된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는 이날 각각 헬기를 이용, 트리폴리의 메티가 공항에 도착했다. 두 정상은 NTC의 2인자 마무드 지브릴의 안내를 받으며 트리폴리의 의료원과 코린시아 호텔 등 주요 시설을 둘러봤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가 병실 3곳에 들러 부상자를 위로하자 리비아인들은 이들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두 정상은 이날 무스타파 압델 잘릴 NTC 위원장과 기자회견을 열고 리비아 사태가 끝날 때까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나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잘릴 위원장도 “동맹국들이 리비아가 앞으로 맺을 계약에서 우선권을 가질 것”이라고 화답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NTC를 가장 먼저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잘릴 위원장을 파리로 초대했으며, 캐머런 총리는 이집트 민주혁명 성공 이후 처음으로 카이로를 방문한 전력이 있다. 이번 방문에는 리비아 혁명을 지원하도록 사르코지 대통령을 설득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동행했다. 이들은 트리폴리에서 NTC 지도자들을 만나 리비아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한 방안들에 대해 논의했다. 프랑스 경찰은 전날 밤 트리폴리에 요원 160여명을 파견했으며 16일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앞서 제프리 펠트먼 미 국무부 중동담당 차관도 14일 트리폴리를 방문했다. 지난 8월 23일 카다피 요새 함락 이후 리비아를 방문한 최고위급 미국 관리다. 한편 반군 측은 카다피 고향인 시르테로 진격하면서 집중 포격을 가했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이에 대해 카다피는 14일 시리아 아라이TV에 또다시 육성 메시지를 보내 “시르테가 고립되면 세계는 잔혹한 행위에 맞서야 한다.”면서 “리비아 반군에 포위된 고향 시르테를 지켜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카다피 3남 등 측근 32명 니제르로

    리비아 국가원수에서 도망자 신세가 된 무아마르 카다피의 셋째 아들 알사디가 리비아와 남쪽 국경을 접한 니제르로 탈출했다. 반군은 새 정부 구성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중국 정부도 태도를 바꿔 반군 대표기구인 국가과도위원회(NTC)를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반면 카다피 측 반격도 계속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AI)는 카다피군뿐만 아니라 반군도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AFP통신은 알사디를 포함한 카다피 정권 핵심 인사 32명이 리비아와 남쪽 국경을 접한 니제르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브리기 라피니 니제르 총리가 12일(현지시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현지 주재 외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일행 중에는 알사디뿐 아니라 군 장성 3명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라피니 총리는 “니제르에 입국한 32명 중 국제 사법당국이 체포영장을 발부했거나 수배령을 내린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리비아의 반군 대표인 무스타파 압둘 잘릴 NTC 위원장은 같은 날 트리폴리 중심지에 위치한 순교자 광장에서 1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처음으로 연설을 하면서 향후 정국 구상을 내비쳤다. 그는 “우리는 법치국가를 추구하며 온건 이슬람에 기반한 민주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카다피 정권 치하 가해자들을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이들의 가족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여성권익 향상을 약속했다. 이와 관련, NTC 2인자인 마무드 지브릴 총리는 지난 11일 기자들에게 “새 정부가 7~10일 사이에 출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군 측이 자신감을 보이는 반면 카다피 친위부대는 리비아 최대 유전지대인 라스 라누프 정유시설을 공격해 17명이 숨지는 등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NTC 석유부 관리인 압달릴 살라는 “이 공격은 카다피군의 소행”이라면서 “정유시설 경비원들에게 공포를 주고 원유 생산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카다피군의 거점인 바니 왈리드, 시르테 등지에서는 반군과 카다피군의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인권단체인 AI는 13일 리비아 반군 역시 카다피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고문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며 이 중 일부는 전쟁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니컬러스 베거 앰네스티 유럽 지부장은 특히 “지난 2월 카다피가 흑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면서 그 결과 이제는 무고한 이들까지 집과 일자리를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나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중국과 세계은행(WB)은 이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마지막으로 NTC를 리비아를 대표하는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고 밝혔했다. 중국은 내전 발생 이전까지 석유개발과 사회기반시설 건설 등에서 3만 5000여명에 이르는 인력을 파견해 188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 50개를 진행하는 등 리비아와 적지 않은 경제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9·11 테러, 그 후 10년] (상) 아물지 않는 상처

    [9·11 테러, 그 후 10년] (상) 아물지 않는 상처

    미국과 전 세계를 경악케 한 9·11테러가 일어난 지 오는 11일로 10주년이 된다. 19명의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민간항공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DC의 국방부 건물 등을 타격, 2983명의 희생자를 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미국인의 의식과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미국은 공룡 부처 국토안보부를 신설하고 입국심사를 강화했지만 테러 공포를 안고 사는 나라가 됐다. 미국은 알카에다에 대한 보복에 나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고 올해 5월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하는 등 국제정세도 격변했다. 하지만 9·11 이후가 이전보다 안전해졌는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테러 공포는 여전히 미국과 세계를 짓누르고 있다. “지난 10년 간 미국은 더 안전해졌다. 하지만 위협은 남아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의 초대 장관을 역임한 톰 리지 전 장관은 9·11테러 10주년을 맞아 지난달 17일 워싱턴DC의 미 상공회의소에서 서울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갖고 미국 정부가 취해 온 대테러 정책의 허실을 짚었다. 9·11테러를 계기로 2002년 11월 신설된 국토안보부는 직원 17만 명에 연간 예산 400억 달러(약 42조원)를 쓰는 미 행정부 내 최대부처다. →국토안보부가 지금까지 한 일은. -정보자산을 강화했고 우방국과 파트너십을 다졌다.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했다. 공항에 지문인식장치와 방사능 검색대를 설치했다. 미국민의 자유와 헌법, 아메리카라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겹겹의 안보를 구축했다. →국토안보부의 역할에 미흡한 점은. -민간 부문과 연대를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다. 대테러 기획단계에서부터 민간을 참여시켜 역량을 극대화해야 한다. 각 부처 비상대책반 사이에 정치적인 이유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은 문제도 여전하다. 기득권을 버리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입국심사 강화에 따른 효과에 대해서는 만족하나. -입국심사는 크게 개선됐다. 하지만 출국심사에는 허점이 많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자 기간을 초과해 미국에 머무는지,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직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토안보부가 강하긴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됐는데 테러와의 전쟁도 변화해야 하나. -그를 죽인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지하드 이념을 땅에 묻어야 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극소수에게라도 전염되면 글로벌 테러리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제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말 대신 신앙체계와의 전쟁, 악의 이념과의 전쟁이란 말을 써야 한다. →미국과 비교할 때 한국의 테러 위험성은 얼마나 될까. -한국은 미국의 친구이기 때문에 위험에 잠재적으로 노출돼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역시 북한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한국도 국토안보부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할까. -미국은 한국과 동맹 관계이기 때문에 한국의 내부 문제에 대해 내가 이래라, 저래라 조언하기 조심스럽다. 원론적으로, 제대로 된 정부라면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사회나 군대가 도발에 즉각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그런 문제를 포괄적으로 잘 다뤄왔다. →9·11을 기점으로 미국민의 의식구조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 -9·11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됐다. 테러가 글로벌화됐고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개개인이 테러에 매우 민감해졌고 각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제2의 9·11테러가 일어날까. -정부가 겹겹이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9·11처럼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와 다른 유형의 테러를 우려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가 저지르는 테러다. 지난 18개월 동안 이런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60~70명이나 붙잡혔다. 테러의 유형은 더 늘어난 셈이다. 우리는 더 안전해졌지만 여전히 위협은 남아 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톰 리지는 누구 베트남 참전용사 가운데 처음으로 1982년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돼 6선을 했다. 1994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로 당선돼 재선했다.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자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 국토안보보좌관에 임명했다. 이듬해 국토안보부가 신설되면서 그는 초대 국토안보부 장관에 취임했다. 2005년 사임한 뒤 민간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다.
  • [열린세상] 기억과 성찰/김태승 아주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기억과 성찰/김태승 아주대 사학과 교수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먼저 ‘이름’을 교환한다. 명함을 이용하거나, 말로 하거나 교환의 형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름이라는 분류방식을 통해 상대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름은 ‘견출지’이고 이제부터(관계가 지속된다면) 그 이름 아래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축적되면서 기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만난 상대는, 이름으로 분류된 ‘폴더’ 안의 기억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나 역시 그에게는 동일한 방법으로 기억될 것이다(이러한 과정은 새로운 사물과 접촉하게 되거나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기억의 정리과정에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선택’과 ‘배제’는 기억의 효율성을 높여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감각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한편으로 기억을 ‘주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주관화 과정에서는 기억을 왜곡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데, 그것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불편한 기억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리하려는 본능적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편견’과 ‘견해의 대립’은 기억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기억은 당연히 ‘망각’과 ‘무시’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은 ‘선택’과 ‘배제’, ‘망각’과 ‘무시’의 과정을 거쳐 일종의 ‘가상 세계’(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를 만들어 내기가 쉽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상상 속의 귀신을 그리고 있으면서 살아 있는 개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하기 쉽다는 말이다. 밖에서 볼 때 분명히 내가, 우리가 귀신을 그리고 있음이 관찰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억화의 과정이 조작될 수 있고, 임의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런 기억에 의존하는 우리의 의견은 항상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 때문에 기억의 한계를 거의 성찰하지 못한다. 특히 집단화된 기억은 ‘신성한 교육’을 통하여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 없이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하나의 도그마로 작동되며, 집단 기억의 밖에 있는 모두를 ‘타자화’(적대시)하기 쉽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에 대한 ‘성찰’은, 이 모든 문제를 넘어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소통’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미덕이 된다. 동아시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분쟁은 그런 점에서, 자기 성찰 없는 ‘기억정치’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교육기구의 독점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집단 기억의 중심인 역사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한다. 중국은 1당 독재체제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애국주의’라는 정서를 매개로 억압하기 위해서, 대형 국가프로젝트를 통해 고대사의 상한을 끝없이 끌어올렸고, 얼마 전까지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고구려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전범국가’라는 성찰 없이 ‘침략과 폭력의 현대사’를 재구성하여 자국사를 미화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가해자’로서의 일본은 사라지고 ‘피해자’로서의 일본이 부활한다. 북한은? 기억조작을 통해 ‘김씨 왕조’ 건설에 몰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성찰 없는 기억정치의 가장 가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 한국의 제1공화국과 관련된 논의가 제헌헌법정신 등 국민적 총의에 의해 선택되었던 국민적 합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축출한 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는 것을 보면 매우 걱정스럽다. 오늘의 리비아를 보면서 카다피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확실히 기억은 조작되기 쉽고, 대부분의 기억은 ‘자기 중심성’을 회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통을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진리라고 믿는 자신의 기억에 대한 성찰 없이 ‘다른 기억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화해와 공존을 위한 미래를 논의할 수 있을까.
  • 애플 혁신 지속 미지수… 빅2공세 직면

    애플 혁신 지속 미지수… 빅2공세 직면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를 이끌던 스티브 잡스가 24일(현지시간) 최고경영자(CEO)에서 퇴진했다. 애플의 영혼으로 불리던 잡스가 빠진 애플은 글로벌 IT업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각 변동을 몰고 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당장 구글의 모토롤라 인수, 휼렛패커드(HP)의 PC 사업 분사 등 IT 업계의 주도권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전환되고 있고, 운영체제(OS)와 콘텐츠를 앞세운 각축전이 거세지고 있다는 점에서 애플의 명성이 이어질지 관심거리다. 경쟁 그룹 입장에서 ‘포스트 잡스’ 시대는 애플에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잡스의 애플’은 세계 IT 업계의 판도를 바꾼 1차 진원지였다. 윈도와 인텔이 독점했던 ‘윈텔’ 시대를 끌어내렸고, 기존의 휴대전화 제조사인 노키아와 모토롤라 등 하드웨어 회사들을 아이폰·아이패드와 통합한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허물었다. 그러나 창의적 카리스마를 지닌 잡스의 리더십이 사라진 애플이 지속적으로 혁신적인 제품과 경이로운 실적을 보여줄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애플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도 결국 ‘후계 리스크’이다. 실제로 잡스가 애플에서 축출된 1984년 이후 애플은 하락세를 걷다가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1997년 잡스가 복귀하면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연이어 블록버스터급 제품을 내놓으면서 애플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아이폰, 아이패드의 디자인도 잡스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월스트리트저널은 애플의 미래가 장기적으로 어둡다고 우려할 정도이다. 당장 애플에 대적할 경쟁자들의 공세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구글은 ‘애플 따라잡기’에 이미 시동을 걸었다. 구글은 모토롤라의 휴대전화 사업을 인수함으로써 애플식 수직통합형 모델을 구축했다. 애플은 OS(iOS)-단말기(아이폰·아이패드)-콘텐츠 장터(앱스토어)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구글은 단말기 제조 능력까지 확보하면서 애플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더구나 삼성전자-HTC-LG전자 등 구글 연합군을 앞세워 모바일 OS 점유율을 급속도로 높여가고 있다. 지난 2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OS 점유율에서 안드로이드는 47.7%로 1위를 차지했다. 구글은 세계 최대 검색엔진에다 유튜브, 구글 어스 및 스트리트뷰 등 고부가가치 콘텐츠도 확보하고 있어 잡스의 DNA가 사라질 경우 애플의 아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PC 시대의 공룡인 마이크로소프트(MS)도 모바일 OS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MS는 차기 윈도폰 OS인 망고를 9월에 발표할 예정이다. 애플과 구글에 비해 아직 기반은 약하지만 윈도폰 앱을 3만개로 확대하고 윈도폰 마켓 플레이스도 문을 여는 등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MS의 노키아 인수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등 단말기 직접 제조 가능성도 열어둔 상황이다. 글로벌 업계는 향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대표되는 모바일 분야에서 애플-구글-MS의 삼각 구도가 심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모토롤라는 구글을 배경으로, 노키아는 MS를 등에 업고 영향력을 키울 것으로 본다. 잡스의 부재가 삼성전자 등 하드웨어 강자들에게 일견 희소식이 될 수 있지만 구글, MS의 공세가 더욱 거칠어져 오히려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 글로벌 IT 전문가 상당수가 애플에 대해 장기적으로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사설] 마침내 비참한 최후 맞은 리비아 카다피

    리비아를 42년간 철권통치한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 리비아 반군은 어제 수도 트리폴리 입성에 성공했다. 카다피의 장남은 투항했고, 차남과 3남은 생포됐다. 트리폴리는 카다피의 최후 거점 도시다. 이에 앞서 반군은 카다피 5남이 지휘해온 트리폴리 외곽의 친위 정예부대 기지를 접수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휴가지인 마서스 비니어드섬에서 성명을 통해 “카다피 정권에 대항하는 힘이 정점에 달했다.”면서 “트리폴리는 독재자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6개월여간의 지루했던 내전은 미국, 영국 등 다국적군의 지지와 지원을 받은 반군의 승리로 사실상 끝이 났다. 지난해 말부터 아프리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피플파워’는 24년간 통치했던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을 축출하고, 30년간 이집트를 강압 통치한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쫓은 데 이어 카다피를 끌어내리는 데도 사실상 성공했다. 총과 대포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찾겠다는 시민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을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카다피의 몰락에 따라 민간인들에 대한 유혈 진압도 서슴지 않고 있는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퇴진 압력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 리비아에서는 ‘포스트 카다피’ 체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반카다피 진영의 대표기구인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리비아에 민주정부가 수립돼 하루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가장 우려스러운 눈으로 볼 대표적인 정권은 아무래도 3대째 세습을 준비하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일 것이다. 북한 정권은 주민을 억압만 한다고 해서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정부와 군은 북한의 움직임을 보다 면밀히 점검해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 또 정부는 교민 안전은 물론 카다피 이후에도 리비아의 건설사업에 우리 건설업체들이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차분하면서도 내실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 리비아 카다피 물러나면 대혼란?

    ‘카다피가 물러나면 카오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 6개월 넘게 계속된 리비아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날 조짐을 보이자 리비아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이 사분오열한 상태에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축출돼 ‘권력 진공 상태’가 되면 또 다른 내전이 리비아를 덮칠 것이라는 전망이 떠오른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은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권좌에 오르는 시나리오를 염려하는 눈치다. 리비아 반군 기구인 과도국가위원회의 만수르 사이프 알나스르 프랑스 주재 대사는 17일(현지시간) “우리 군이 자위야를 완전히 장악했다.”면서 “(이슬람 성월인) 라마단(올해는 8월)이 끝날 때 최후의 승리를 축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자위야는 카다피가 장악하고 있는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48㎞ 떨어진 최전선이다.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도 16일 미 국방대학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카다피가 집권할 수 있는 날은 이제 숫자로 꼽을 수 있다고 본다.”며 내전 종식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승리가 가까워질수록 반군을 도와온 서방사회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반군 거점인 리비아 벵가지 주재 서방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반군의 조속한 승리가 ‘가장 나쁜 시나리오’”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나토 소속의 한 고위 외교관은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토는 지금 리비아에서 ‘최악의 성공’을 거두게 생겼다. 반군은 정부를 운영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카다피가 이대로 떠나면 권력 진공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반정부 세력의 분열은 지난달 압둘 파타 유니스 반군 최고사령관이 내부 세력에 의해 피살된 이후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때문에 ‘카다피’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내전이 불거질 것이란 우려도 증폭되고 있다. 리비아 사정에 밝은 한 위험평가 컨설턴트는 “‘포스트 카다피’ 시대가 반드시 더 평화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여러 내부 분파 간 갈등과 반목이 시작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극단주의 성향의 이슬람 세력이 반군 안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도 리비아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한 서방 외교관은 “서양에서 교육받은 자유주의자들이 힘을 잃고 강경파들이 힘을 얻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고 전했다. 한편, 반군은 카다피 정권과의 협상은 없을 것이며 카다피를 축출한 뒤 신속히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열린세상] 독도와 동해 지킬 외교역량에 목마르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독도와 동해 지킬 외교역량에 목마르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한 세기 전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앗기는 뼈아픈 역사를 썼다. 독도는 외교권을 뺏긴 을사조약 체결 열달 전 이미 강탈되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일본은 무주지(無主地) 선점이라며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1900년 10월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로 울릉군의 관할로 규정한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래로 독도는 우리 땅이었다. 대한제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진 지 20여년 뒤인 1929년 국제수로기구(IHO)는 한·일 두 나라를 가르는 바다를 ‘일본해’로 적기로 결정했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신민(臣民)이었던 이 땅의 사람들은 항변할 수 없었다. 열도가 일본이란 국호로 불린 시기보다 7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0년쯤인 신라 동명왕 때부터 이 바다는 동해였다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본격화된 18세기 이래 서구열강들이 만든 대부분의 해도가 ‘일본해’(Sea of Japan)가 아니라 한국해(Sea of Korea)로 적었었다고. 1943년 12월 연합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전후 일본의 영토에 대한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1867년 메이지 유신 이전으로 영토가 축소된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이 코앞에 다가온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전범세력의 단죄를 천명했다. 1946년 6월 독도수역에서 일본의 어로활동을 금지하는 ‘맥아더라인’이 선포된 이후 미국이 대일 강화조약을 위해 만든 5차례의 초안 모두에 독도는 우리 땅으로 명시되었다. 그러나 1948년 중국의 공산화가 눈앞에 다가오자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을 수정하였다. ‘역코스’(reverse course)라 불리는 점령정책의 전환이 있던 그해 11월에 끝난 도쿄전범재판은 전범세력이 철저하게 단죄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너무도 달랐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군국주의자들과 손잡는 쪽을 택했다. 침략전쟁의 최고책임자 일왕을 비롯한 A급 전범 대다수는 면죄부를 받고 되살아났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더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하다.” 1949년 11월 맥아더의 정치고문인 시볼드의 보고가 있은 후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누락시켰다. 1951년 4월 한국은 대미외교에서 일본에 완패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요시다 총리와의 비밀 회담에서 한국의 연합국 지위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발에 종래의 입장을 철회했다. 패전국 일본과의 강화조약에 협상·서명국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의 정보에 의하면 독도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한 번도 없고 1905년쯤부터 일본의 시마네 현 관할 하에 있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부정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한 달 뒤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는 한국에 반환되는 점령지 명단에서 빠지고 말았다. 지난 8월 1일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자민당 소속 의원 3명의 입국 시도가 있었다. 또한 9일 미국 국무부는 1992년 이래 우리정부가 국제사회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동해 병기 요청에 반하는 일본해 단독 표기 지지를 천명하였다.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 우익의 술책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고, 동해 병기를 이루기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도 높다. 독도에 대한 영토 주권과 동해라는 영해 명칭을 앗긴 실패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독도가 다케시마(竹島)로, 동해가 일본해로 바뀔 때 우리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구한말의 아픈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독도가 명명백백한 우리 땅임과 동해 병기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설득할 리더십과 외교 역량을 갈망한다.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1952년 1월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지킨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과 뚝심이 새삼 그리운 오늘이다.
  • 美 ‘디지털 외교’의 1인자 “北주민, 美 도움없이 인터넷 자유 찾을 것”

    美 ‘디지털 외교’의 1인자 “北주민, 美 도움없이 인터넷 자유 찾을 것”

    위기의 미국 외교가가 ‘e-외교’에 주목하고 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아프가니스탄전 등 ‘전쟁의 덫’에 발목 잡힌 채 아랍권역의 ‘재스민 혁명’을 맥없이 바라보며 정보력과 영향력 상실을 한탄했던 미국은 인터넷과 새로운 소통 도구를 활용한 외교 가능성에 눈을 돌린다. 미국의 디지털 외교전 최전선에 알렉 로스(40) 국무부 장관 혁신담당 수석 자문관이 서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등 뉴미디어로 무장한 그는 외교관 대신 외국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려 애쓴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인터넷 자유’를 끌어올리려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그는 워싱턴 국무부 내 사무실에서 국내 언론으로는 서울신문과 첫 인터뷰를 갖고 “북한 주민 스스로 (동북아시아) 지역의 정교한 디지털 생태계에 접속할 것이며 끝내 인터넷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국무부가 아랍 권역 등의 ‘인터넷 자유’ 보장을 위해 추진해 온 프로젝트는. -미국 정부는 최근 (인터넷 자유 보장을 위한) 12개의 프로그램 개발을 도우려고 모두 2800만 달러(약 300억원)를 투입했다. 그중에서 ‘여행가방 속 인터넷’(IIS)과 ‘패닉버튼’은 공개됐다. IIS는 (권위주의 국가 등에) 이동광대역통신망을 설치하는 것으로 거의 상용화됐다. 패닉버튼은 시리아 등에서 (반체제 인사 등이) 체포될 위기에 놓이면 비상 버튼을 눌러 체포 사실을 주위에 알리도록 고안한 제품이다. 버튼을 누르면 휴대전화 속에 저장된 모든 연락처도 함께 지워진다. 나머지 10가지는 기밀 사항이다. →북한에서도 ‘IIS’나 ‘패닉버튼’ 같은 기술이 활용될 가능성이 있나. -우리는 특정 국가를 겨냥해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미 국무부는 지구상 194개국에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인터넷 자유를 위한 기술도 모든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나라가 됐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북한에는 인터넷망이 거의 구축돼 있지 않다. 북한의 ‘인터넷 자유’를 돕기 위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북한 주변에는 활기 넘치는 ‘디지털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북한의 인터넷 자유는 미국의 도움으로 얻어지지 않을 듯하다. 외부 세계와 연결할 방법을 찾는 북한 주민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북한 정권이 ‘정보 정전’ 상태를 지속하려 한다면 이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랍의 봄’ 기간 동안 인터넷은 독재자 축출 도구로 활용됐지만 ‘반미감정’ 전파의 장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인터넷 자유’는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물론 네티즌이나 언론이 미국에 대해 좋은 말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할 권리’를 존중하며 이 같은 권리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이집트와 튀니지 등의 혁명 과정에서 기술과 소셜 미디어는 큰 역할을 해냈다. 결성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정치운동 조직을 단박에 가능하도록 했고, 짧은 시간 안에 연대의 고리를 강화했다. 저소득층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민주화 세력의) 리더십을 확산시켰다. 시리아나 이집트, 튀니지 등에서는 넬슨 만델라나 레흐 바웬사 같은 독보적 리더는 없다. 네트워크가 ‘혁명 지도자’가 된 것이다. →줄리언 어산지가 주장하는 정보의 자유와 미국이 강조하는 정보의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자유는 책임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에서는 무기를 소지할 권리가 있지만 누군가에게 마음대로 쏠 권리를 준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말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할 권리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인터넷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포르노물 등을 인터넷에 올릴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에서 사기를 칠 권리나 지적 재산을 훔칠 권리가 주어진 것도 아니다. →한국의 정보기술 환경을 평가한다면. -한국은 굉장히 수준 높은 디지털 환경을 구축한 것으로 안다.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는 미국보다 낫다. 다만 한국의 디지털 환경 중 인터넷 카페 등에서 인터넷의 자유로운 사용에 제약이 있는 것이 아쉽다. ‘디지털 지문’ 같은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클린턴 국무장관과 모두 일해 봤는데, 두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두 사람 모두 ‘머리’와 ‘가슴’, 지능과 동정심이 조화를 이룬 지도자들이다. →‘디지털 외교관’이자 비정부기구(NGO)의 창립자이며 혁신가다. 당신과 같은 꿈을 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청년이라면 기꺼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성공한 사업가들을 보라. 여러 번 실패한 이들이 많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해고됐다가 돌아왔고,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지배당한 회사에서 일했었다.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실험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실패에서 배우라고 독려한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태국 첫 女총리 잉락 등극

    태국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태국 국회는 5일 정기국회를 열어 재적의원 500명 가운데 296명의 지지를 얻은 푸어타이당의 잉락 친나왓(44)을 총리로 선출했다.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해외로 도피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은 푸어타이당의 총리 후보로 발탁돼 지난달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정계 입문 두 달 반 만에 총리 업무를 공식 수행하게 됐다. 미국 켄터키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잉락 총리는 그러나 정치경력이 전혀 없어 탁신 전 총리의 분신에 불과하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외신들은 잉락 총리가 오빠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전했다. 탁신 전 총리는 해외 도피 이후에도 태국의 도시 빈민층과 농촌 주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된 뒤 2008년 부정부패 공판에 참석하지 않고 해외로 도피했지만, 집권 당시 친 빈민정책 덕분에 도시 빈민층과 농촌 주민들로부터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푸어타이당 의원들이 지난 총선 직후 탁신 전 총리가 머물고 있는 두바이로 몰려가기도 했다. 때문에 태국에서는 잉락 총리가 ‘상왕’으로 불리는 오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중동 독재자 초라한 은둔

    중동 독재자 초라한 은둔

    지난 2월 권좌에서 물러난 호스니 무바라크(83) 전 이집트 대통령이 다음 달 3일 유혈진압과 부정축재 혐의에 대한 첫 재판을 앞두고 우울증 증세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올초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재스민 혁명’으로 축출되거나 해외로 피신한 독재자들의 근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28일 무바라크 전 대통령,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74) 전 튀니지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69) 예멘 대통령 등이 감옥 대신 철통 보안의 병실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30년간 이집트를 무력통치해온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뒤 이집트 남부 시나이 반도의 홍해 휴양지 샤름엘셰이크에서 칩거해 오다 지난 4월 수사기관의 조사가 시작되자 병원에 입원했다. 한때 심장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주치의는 단순한 심장박동 이상이라고 밝혔다. 튀니지를 23년 장기집권해온 벤 알리는 시민혁명이 발발하자 지난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해 제2도시 제다에 있는 전용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다. 튀니지 법원은 지난달 궐석재판에서 권력남용과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35년과 벌금 5000만 디나르(약 386억원)를 선고했다. 33년간 예멘을 부패의 늪에 빠트린 살레는 지난달 대통령궁에서 일어난 폭탄 사고로 입은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사우디로 떠난 뒤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달 초 수도 리야드의 진료소에서 팔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 포착된 그는 귀국을 공언하고 있지만 야권이 살레 대통령 축출을 위한 혁명국가위원회 발족을 준비하는 등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재스민 혁명의 타도 대상인 독재자들이 하나같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인디펜던트는 재판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이와 더불어 예전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자들과 달리 호화판 해외망명이 쉽지 않게 변한 환경도 원인으로 꼽았다. 일례로 우간다의 학살자 이디 아민은 1979년 권좌에서 쫓겨난 뒤 사우디 왕가의 보호 아래 제다에서 24년간 편히 살았다. 필리핀의 21년 독재자 페르난도 마르코스의 아내 이멜다(82)도 하와이에서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으로 망명생활을 한 뒤 1991년 귀국, 하원의원에 당선되는 등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요즘 독재자들은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이 수사 당국에 쉽게 발각돼 자금인출이 동결되는 데다 이웃 국가들도 이들의 망명을 꺼리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신문은 “국내에 남아 처벌받거나 피난처를 찾는 길밖에 없는 독재자들에게 병원이 은신처로 인기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도시광산/박홍기 논설위원

    흔히 희귀금속은 전자산업의 쌀로 일컬어진다. 반도체·자동차 등의 필수 부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인 까닭이다. 금·은·동·백금을 비롯해 니켈·안테몬·카드뮴·텅스텐·몰리브덴 등은 실제 매장량은 적고 수요는 큰 금속류다.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전자산업을 선도하는 우리나라,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희귀금속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때문에 희귀금속의 재활용, 즉 리사이클링(recycling)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자 숙제인 것이다. 비교적 자원이 풍부한 미국·중국 등도 예외가 아니다. 이른바 ‘도시광산’(Urban mining)은 이런 고민 속에서 나왔다. 1980년대 일본 도호쿠대학 선광(選鑛)제련연구소의 난조 마치오 교수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쓰다 버린 휴대전화·TV·냉장고 등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산업폐기물에 함유된 금속자원을 축출해 내는 것이다. 자연광산이 아닌 도시의 폐처리장에서 자원을 캐내는 작업이다. 평균 100g 나가는 휴대전화 1t에서는 대략 금 300g, 은 2㎏뿐만 아니라 니켈과 크롬 등 20여종의 희귀금속을 얻을 수 있다. 자연광산에서 캐낸 광석 1t에서 확보할 수 있는 금의 양은 5g에 불과하다. 도시광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자동차 1대에 4.5㎏씩,국내 자동차 1800만대에 함유된 희귀금속은 8만 2000t에 이른다. LCD패널에는 344g, 가전제품 모니터에는 335.4g의 희귀금속이 들어 있다. 희귀금속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일본 물질·재료연구기구에 따르면 2008년 기준 일본 내 도시광산에 쌓여 있는 금의 양은 6800t이다. 최대 금 생산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매장량을 넘어설뿐더러 세계 금의 16.05%에 해당한다. 은은 6만t으로 세계의 22.4%, 인듐은 61%, 동은 8.06%를 보유하고 있다. 도시광산 관점에서 일본은 세계 자원대국인 셈이다. 그만큼 재활용 기술 노하우와 국민들의 호응이 높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중국은 올 3월 채택한 5개년 계획에서 전국 50곳을 도시광산 시범기지로 지정했다. 정책에 도시광산이 처음 등장했다. 중국은 일본 최대 리사이클링기업인 도와(DOWA)그룹의 도움을 받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전기·전자제품, 자동차 등에 잠재한 금속자원의 가치를 최소 50조원으로 추산했다. 초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의 도시광산 개발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태껏 소중한 희귀자원을 헛되이 버렸다. 금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천연 항암물질 추출

    천연 항암물질 추출

    이삼완(53) 하버드 의대 교수가 식물에서 항암 물질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축출된 성분은 정상세포까지 죽이던 기존 항암제와 달리 암세포만 골라 죽이기 때문에 항암치료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양념 등으로 흔히 쓰이는 인도산 후추에서 뽑아낸 물질인 ‘PL’(Piperlongumine)을 분석한 결과 이 성분에서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효소를 억제하는 기능을 발견했다고 과학저널 네이처 온라인판을 통해 13일 발표했다. 이 물질을 섭취하면 암세포를 공격하는 활성산소가 많아져 암세포 크기를 줄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사멸을 유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특히 “기존의 항암제는 독성이 강해 정상세포까지 죽이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PL은 암세포만을 골라서 죽이고 다른 세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홍영권 남가주대(USC) 교수는 “보통 기초과학만을 다루는 네이처에서 ‘항암제’ 같은 약 개발에 관한 논문을 실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그만큼 파급 효과가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고개드는 탈레반 요동치는 아프간

    ‘대통령의 이복동생’이자 ‘탈레반의 숙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아메드 왈리 카르자이(50) 칸다하르 주의회 의장이 암살당하면서 아프간 정세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탈레반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자 미국 등 철군을 앞둔 서방국은 또 한번 고민에 빠지게 됐다. ●카르자이 피살전 아홉 번 암살 모면 칸다하르 주 경찰은 12일(현지시간) 아메드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그의 가족을 오랫동안 지켰던 경호 책임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밝혔다고 AFP통신 등이 전했다. 탈레반은 암살의 배후를 자처했다. 아메드는 형인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미군 등을 도와 칸다하르 주 탈레반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 때문에 반군의 표적이 돼 왔다. 그는 지난해 11월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들(탈레반)은 지금껏 나를 9차례나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프간 반군의 최대 거점인 칸다하르에서 탈레반 축출 작업을 주도한 아메드가 사망하자 아프간이 다시 대혼란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BBC 등 주요 외신들은 아메드의 사망이 칸다하르에서 탈레반에 맞서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타격을 주고 지역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했다. 특히 아메드의 암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지역 상점들은 급히 문을 닫았으며 주민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아프간 군과 경찰도 아메드의 장례식이 진행된 13일 칸다하르 주요 도로를 봉쇄하며 추가 테러에 대비했다. 이번 사건이 이달부터 철군을 시작하려던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 등 서방국가들의 출구전략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서방 탈레반 축출작전 혼란에 빠져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탈레반 제거 작전’의 파트너였던 아메드의 죽음을 애도했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12일 정례 브리핑에서 “가장 강력한 어조로 이번 피살 사건을 규탄한다.”면서 “미국은 아프간 당국의 사건 진상규명과 배후 색출에 함께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 국무부 측은 이번 사건이 지난달 오바마 대통령이 지시한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군 결정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숨진 아메드는 칸다하르 지역에서 돈세탁과 아편거래 등 각종 범죄에 연루돼 큰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으며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시카고에서 아프간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서방 출구모색 다각화 속 지지부진 중동사태

    미국과 프랑스 등 주요국들이 아랍권의 교착 사태를 풀기 위해 다양한 카드를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은 돈줄을 틀어막으며 파키스탄 등 사이가 틀어진 대테러전 파트너를 압박하고 있고 리비아 공습을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는 카다피 정권과의 대화를 통해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반면 시리아 등 일부 아랍 국가에서는 정정 불안 속에 반정부 시위와 강경 진압이 되풀이되고 있다. 내전 양상으로 번진 북아프리카·중동 국가들의 무력 충돌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 사회가 본격적으로 ‘협상 카드’를 빼들기 시작했다. 리비아 군사작전의 선봉에 섰던 프랑스는 100일 넘는 공습에 지친 듯 협상을 통한 출구전략을 찾고 있고 미국도 6개월째로 접어든 예멘 사태를 끝내려고 ‘독재자 설득 작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차남인 사이프 알이슬람은 알제리 신문인 ‘엘 카바르’의 11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리비아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특사를 보냈다.”면서 “프랑스 측은 우리 리비아 정부가 자신들과 (휴전을) 합의한다면 반군 측에 ‘전쟁을 중단하라’고 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알이슬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카다피 축출’을 목표로 줄곧 공습에만 매달려 온 프랑스 측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프랑스 측은 카다피 정부와의 직접 대화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향후 협상 가능성을 내비쳤다. 제라르 롱게 국방장관도 10일(현지시간) 현지 TV에 출연해 “카다피군과 리비아 반군이 서로 대화하고 (전쟁 중인 리비아) 군인들이 막사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포격을 중단할 것”이라면서 “(카다피군과 반군) 양측이 정치적 타협을 위해 테이블에 둘러앉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의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담당 보좌관은 10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과 회동했다. 브레넌 일행은 국민적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살레 대통령에게 “걸프 국가들이 마련한 권력 이양 중재 방안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고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이 전했다. 미국 정부는 대테러 작전의 동맹국인 예멘이 6개월째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태국 정권교체… 도망자 탁신 “적당한 때 귀국”

    태국 정권교체… 도망자 탁신 “적당한 때 귀국”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망명길에 오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막내 여동생 잉락 친나왓(44)이 이끄는 푸어타이당이 3일(현지시간)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에 따라 잉락 친나왓은 정권 교체와 함께 태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르게 됐다.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탁신 전 총리도 조만간 입국, 정치 일선에 복귀해 사실상 막후 정치를 펼칠 전망이다. 그러나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태국 군부 내 일부 세력의 반발로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다 ‘레드셔츠’(탁신 지지 세력)와 ‘옐로셔츠’(탁신 반대 세력)로 대표되는 태국 내 계층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태국 정국은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전국 9만 800여개 투표소에서 실시된 태국 국회의원 총선 결과 선출직 의원 375명과 비례대표 의원 125명 등 전체 500개 의석 가운데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이 과반 의석을 웃도는 263석을 차지한 것으로 태국 선관위 잠정 집계 결과 드러났다. 반면 민주당은 161석을 얻는 데 그쳤다. 푸어타이당은 이날 총선을 통해 과반 의석을 차지함에 따라 군소정당과의 연대 없이 독자적으로 정부를 꾸릴 수 있게 됐다. 잉락은 출구 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총선 승리가 확실시되자 취재진에게 “이 결과를 나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시민들이 나에게 기회를 줬고 나는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웨차치와 총리도 총선 패배를 인정하며 잉락의 승리를 축하했다. 투표 직후 실시된 출구조사에서 푸어타이당이 압승한 것으로 나타나자 두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탁신 전 총리는 잉락에게 전화를 걸어 총선 승리를 축하했다. 탁신 전 총리는 “민심은 화해를 원했다. 푸어타이당은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귀국을 희망하지만 태국 사회에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서둘러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축출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뒤 주로 두바이에 머물러 왔다. 탁신의 ‘클론’(복제 인간)으로 불리는 잉락은 오빠의 후광에 더해 수려한 외모와 빼어난 말솜씨, 똑똑한 이미지와 다듬어진 매너 등 인간적 매력을 앞세워 표심을 사로잡았다. 특히, 탁신의 전통적 지지층인 도시 빈민과 농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왕실과 군부, 엘리트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집권 민주당은 부패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선고된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건 푸어타이당을 비판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정치 신인’의 거센 바람몰이에 끝내 무릎을 꿇었다. 투표율이 75%에 이른 것으로 예상된 가운데 태국의 이번 조기 총선은 경찰 18만 3000명이 투입돼 삼엄한 경계를 펼친 덕에 큰 불상사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최남단 나라티왓주에서 총선 투표함을 수송하던 트럭이 무장 괴한으로부터 총기 공격을 받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한편 ‘푸어타이당이 승리하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프라윗 옹수완 태국 국방장관은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군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며 쿠데타설을 일축했다. 푸어타이당의 압도적 승리 속에 총선이 큰 충돌 없이 끝났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잠복해 있다. 전문가들은 태국 내 빈부계층 간, 정치세력 간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정정불안이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푸어타이당이 현재 30%인 법인세를 2년 뒤 20%로 낮추고 학교에 입학하는 80만명의 학생에게 태블릿PC를 주기로 하는 등 선심성 공약을 쏟아낸 탓에 이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첫 女총리 축제전야? 군부의 쿠데타 전야?

    태국은 신데렐라와 쿠데타를 함께 맞이할 것인가. 3일 태국 총선에서 탁신 친나왓(61)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 잉락 친나왓(44)의 총리 당선이 유력한 가운데 집권세력인 군부가 이 결과를 수용할지 태국 안팎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녀가 탁신의 여동생이라는 점에서 5년 전 탁신을 쿠데타로 축출한 군부가 가만있겠느냐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쿠데타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태국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 후보로 나선 잉락은 정치 경험이 두 달도 채 안 되는 초보 정치인이지만 빼어난 외모에 대중친화적인 언변을 자랑한다. 오빠의 지지층인 빈민, 농민은 물론 중산층까지 아우르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아피싯 웨차치와 현 총리를 제친 상태다. 태국 치앙마이대학교에서 정치·행정학을 전공한 잉락은 미국 켄터키주립대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부동산·통신회사 대표 등을 지냈다. 기업인 아누손 아몬찻과의 사이에 아들 1명을 두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에 머물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는 탁신 전 총리는 여러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푸어타이가 승리하더라도 2006년 쿠데타에 대한 복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군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이와 관련,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방콕 사무소의 마크 색서 소장은 “탁신은 푸어타이당의 승리와 함께 정치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반대세력인) 엘리트층과의 ‘그랜드바겐’을 준비하려는 양면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탁신 진영의 진화책에도 불구하고 태국 군부는 막판까지 잉락의 당선을 저지하는 데 부심하고 있다. 쿠데타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을 일축하면서도 “푸어타이를 지지하는 것은 태국 왕정을 거스르는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잉락 총리’ 저지에 나섰다. 탁신 남매의 재산 은닉 혐의를 부각시키면서 잉락이 당선될 경우 자칫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지지층을 압박하고 있다. 5년 전 군부의 쿠데타 이후 태국과 관계가 틀어졌던 미국도 총선 향방에 긴장을 풀지 않고 있다. 자칫 태국의 정국이 혼란으로 치달을 경우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자국의 동남아시아 전략이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정부 당국자들이 물밑 외교채널을 통해 태국 정부와 군부에 총선 결과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中 공산당 90주년] 공산당을 이끈 10명의 주역

    ●천두수(陳獨秀·1879~1942) 공산당 초기 지도자. 청년 시절 반청(反淸) 활동에 몸담고, 5·4운동 후에는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 베이징대 교수 시절 ‘매주평론’ 등 사상지 발간. 상하이 지역 공산당 조직 결성. 제1차 당대회에 불참했지만 초대 중앙국 서기에 선임되는 등 5차 때까지 중앙국 서기, 중앙국 집행위원장, 총서기 등 역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두 말할 필요 없는 중국 공산당 역대 최고지도자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주역. 자신이 결성한 후난성 공산당 조직을 대표해 제1차 당대회 참석.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무장봉기 주도. 대장정 도중인 1935년 1월 ‘준이(尊義)회의’에서 당권 장악. 신중국 건국 후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대오류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신격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혁명운동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오쩌둥과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영원한 2인자. 건국 후 초대 총리(외교부장 겸임)를 맡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역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과 함께 고도의 청렴성으로 사망 후에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대 총리로 추앙받음. ●주더(朱德·1886~1976)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독일 유학 중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 가입. 소련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국민당군에 합류. 1928년 병력 1만명과 함께 마오쩌둥의 징강산 해방구에 가담. 제2차 국공합작 때는 8로군 총사령관으로 항일전쟁을 지휘. 건국 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을 역임. 문화대혁명 때 물러났다가 1971년 복권.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 6·25전쟁에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1928년 입당해 항일전쟁 때 부총사령관으로 주더 총사령관을 보필. 건국 후 국방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 등을 역임하며 군 현대화 추진. 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실패 등을 지적하다 실권.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화인민공화국 제2세대 지도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두 차례 실권됐다가 복권된 ‘오뚜기’. 항일전쟁 및 내전 시기에는 정치공작, 건국 후에는 국정에 참여.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해 마오쩌둥 추종자들과 대립.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실권 장악. 개혁·개방 선도하며 중국의 발전 견인.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며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개혁파 지도자. 1989년 4월 사망하자 청년학생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들면서 ‘톈안먼 사태’ 촉발. 1928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한 뒤 홍군의 일원으로 대장정 참여. 건국 후 공청단 제1서기 등으로 공청단 업무 주관. 1980년 2월 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 개혁 및 실용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1987년 대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 등으로 실각. ●장쩌민(江澤民·1926~ ) 제3세대 지도자. 상하이교통대 재학 시절인 1946년 입당. 건국 후 공장 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 등으로 일하다 문화대혁명 때 공직에서 축출. 복권된 뒤에는 상하이시 당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핵심인물로 부상. 1989년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실각하자 총서기로 선출됨. 1990년 4월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전권 장악. 재임 중 한·중 수교,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성사. ●후진타오(胡錦濤·1942~ ) 제4세대 지도자. ‘퇀파이’(團派·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대부. 칭화대 수리공정학과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정치보도원으로 후배들의 정치교육 담당. 문화대혁명 때 간쑤성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하방됐지만 승진을 거듭해 덩샤오핑에 의해 4세대 지도자로 낙점돼 1992년 최연소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후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장악. ‘과학발전관’을 주창. ●시진핑(習近平·1953~ )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5세대 핵심지도자. 아버지는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한 시중쉰(習仲勳)으로 ‘태자당’(당·정·군 혁명원로들의 자제그룹) 계열.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의 실각 등으로 중학교 재학 중 산시성 오지로 하방. 10번이나 입당이 거부될 정도로 시련을 겪었으나 경력을 쌓고, 저장성 당서기 등을 거쳐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에 오른 뒤 같은 해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듬해 국가부주석, 지난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돼 후계 입지 공고화.
  • [글로벌 시대] 미국과 탈레반의 동거/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글로벌 시대] 미국과 탈레반의 동거/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3일 3만 3000여명의 미군을 내년 여름까지 철수시키는 것을 비롯해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군 규모와 향후 일정 등을 발표했다. 앞서 19일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아프간 탈레반 반군과 예비회담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아프간에서 점진적으로 발을 빼면서 탈레반과의 공존 의지를 밝힌 것이다.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는 전임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벌여 놓은 아프간 전쟁을 계승했다. 아프간전 상황이 미국의 안전에 직결되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지만 오바마는 전임자와는 다른 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전지구적인 테러와의 전쟁’ 및 ‘이슬람 과격주의’라는 타깃에서 ‘극단적인 폭력주의’ 분쇄로 목표를 옮겼다. 타깃의 범위를 줄이면서 보다 확실하게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과격 사상에 빠진 일부 무슬림들이 현실 세계에 테러리스트로 등장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를 총과 칼을 넘어선 이데올로기와 의식의 전쟁을 통해 달성해 보자는 시도도 담았다. 2009년 6월 카이로대학에서 행한 오바마의 연설에 이 같은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오바마는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폭력주의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대다수 이슬람국가와 무슬림들에 대해선 편견의 굴레속에 넣어서 대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이슬람국가들과의 관계발전도 강조했다. ‘아프간인에 의한 아프간 정책’도 진전됐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정부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시도한 것도 그 같은 노력 가운데 하나다. 미국 역시 끝이 없는 전쟁을 계속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아프간에서 수렁에 빠져 버린 옛 소련의 전철을 뒤따르지 않으려고 경계해 왔다. 아프간에서의 철군 결정이 부시 전 대통령이 세운 목표들(테러활동 근거지를 없애고, 탈레반 무장세력을 축출한다는)을 달성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빠져나갔을 때 아프간은 다시 탈레반의 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고, 다시 테러 근거지로 활용될 우려도 크다. 미국이 심어 놓은 카르자이 정권은 겨우 수도인 카불 주위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하는 최약체 정부이다. 국토의 80%가량이 탈레반이나 탈레반에 우호적인 지방군벌들에 의해 장악돼 있다.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 상황’이 전략 구도다. 카르자이는 대통령이 아니라 카불 시장이라는 조롱이 단순한 우스개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카르자이 정부의 능력뿐 아니라 도덕성과 내부 갈등 및 혼란도 외국군의 철수 이후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인다. 정치 부패, 부족 간 갈등과 알력 등은 탈레반의 귀환을 재촉하고 있다. 미국이 지난 10년간 심혈을 기울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급 결과도 미미하다. 탈레반의 이슬람교법은 아프간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고 있다. 테러의 토양이 되는 사회경제적 조건도 달라지지 않았다. 빈곤과 낙후, 불평등과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국제사회는 테러와의 전쟁의 성과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관건은 탈레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탈레반의 미래와 지위를 인정해 주는 데 있다. 지난 17일 미국과 국제 사회는 이와 관련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디뎠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에 대한 제재 조치를 분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제연합은 이날 이와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탈레반이 알카에다와 관계를 정리하고 발을 끊을 때 국제사회로의 복귀 등 미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알카에다의 주요 목표는 전 세계에서 서방세력과의 성전을 전개해 이슬람국가, 종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반면 탈레반의 목표는 자기 나라 안에 맞춰져 있다. 이미 미국과 카르자이 정권은 탈레반과 협상을 시작했다. 미흡하지만 그래도 실마리를 찾아가는 아프간 문제의 새 발걸음에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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