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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리재단 복귀 부추기는 사학분쟁조정위

    사학 비리로 상지대학교를 떠났던 김문기 전 이사장이 21년 만에 총장으로 복귀하면서 김 총장의 복귀 근거를 마련해 준 교육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축출됐던 비리 재단 및 인사들이 사분위의 사학 정상화 조치로 속속 복귀하면서 대학마다 큰 내홍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분위가 오히려 분쟁 조정이 아닌 분쟁 조장의 일등공신이라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사분위는 25일 102차 회의를 열어 경기대 임시이사의 정이사 체제 전환을 논의했다. 이날 논의는 2004년 교수 채용 대가로 억대의 금품을 받고 49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던 손종국 전 총장이 학교 정상화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경기대 이사회는 옛 재단 추천 정이사 3명과 학교구성원 추천 정이사 2명, 교육부 추천 정이사 1명, 교육부 임시이사 1명 등 7명으로 구성돼 있다. 임시이사를 정이사로 전환하면 옛 재단 측 인사가 4명으로 과반을 넘기면서 옛 재단이 결정권을 갖게 된다. 경기대 내부에서는 옛 재단 측 인사의 복귀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한 교수는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구조조정과 개혁을 하고 발전기금을 유치했는데, 비리 재단이 복귀할 경우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제는 사분위가 옛 재단 측 인사들의 학교 복귀를 막을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앞서 사분위는 상지대 임시이사 체제를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옛 재단 측에 교육부 몫의 이사 자리를 넘겼고, 이는 김문기 체제 회귀로 이어졌다. 김 총장이 부임하자 교육부는 뒤늦게 이사 취임 승인 신청을 거부하고 총장직 사퇴를 권고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아도 사학에 대한 직접적인 인사조치 등은 불가능하다. 김 총장 역시 물러날 뜻이 없다는 입장이다. 전국대학노동조합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임시이사 파견 대학의 정이사 선임권을 쥐고 있는 사분위가 대학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옛 재단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사학들이 또다시 비리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0년 이후 사분위에 의해 옛 재단이 복귀한 대학은 세종대, 대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광운대, 조선대, 서일대 등 10여곳에 이른다. 상당수가 총장 선임과 대학 운영을 놓고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교육부와 사분위는 사립대학 재단의 권한을 존중하는 대법원 판례 등의 문제로 개입에 한계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사분위 관계자는 “현행 사립학교법상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관계자는 5년만 지나면 복귀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슬람국가(IS), 美백악관 앞서 ‘인증샷’ 조롱

    이슬람국가(IS), 美백악관 앞서 ‘인증샷’ 조롱

    이라크의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마치 미국 정부를 조롱하듯 백악관 앞에서 ‘인증샷’을 남겨 논란이 일고있다. 최근 미 보안 당국은 “IS 측이 자신들의 트위터 계정에 백악관 등지에서 촬영된 사진을 올려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조사대상에 오른 사진은 지난 9일 트위터에 포스팅됐으며 백악관을 배경으로 IS 깃발을 촬영한 모습을 담고있다. 또한 사진 밑에는 ‘우리는 당신들의 주, 도시, 거리에 있다’고 적어 마치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테러를 저지를 수 있다는 뉘앙스까지 풍기고 있다. 미 국토안보부 산하 비밀경호국 대변인 에드 도노번은 “관련 부서들이 이미 사건을 인지해 조사 중에 있다” 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해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당국에 따르면 이번 사례와 유사한 사건이 지난 6월 20일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친 ISIS 트위터에는 시카고의 유명 빌딩(Old Republic Building) 앞에서 아랍어로 쓰인 메모를 들고있는 사진이 게재됐다. 메모 속 글에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 전사들이 곧 여기(시카고)를 지나갈 것”이라고 씌여 있었다. IS측이 미 정부를 위협하고 나선 것은 역시 오랜 구원(仇怨) 때문이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정권과 전쟁을 벌여 후세인을 축출한 미국은 지난 2003년 시아파 정부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군 철수 이후 수니파의 반격이 이어져 결국 이라크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치달아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지난 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내 자국민과 IS의 학살을 피해 도망친 민간인 수천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제한적 공습을 승인한 바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美에 의한 이라크 재편…美를 위한 쿠르드 지원

    美에 의한 이라크 재편…美를 위한 쿠르드 지원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공격으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이라크가 내부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미국은 이라크 정부를 지원해선 사태가 풀릴 것 같지 않자 이라크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을 활용해 IS와의 전쟁 및 이라크 내 권력투쟁을 동시에 해결하려 하고 있다. 11일(현지시간) 외신을 종합해 보면 미국은 우선 시아파 위주의 종파 정치로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사퇴를 거부하자 쿠르드계 출신인 푸아드 마숨 대통령을 움직여 알말리키를 전격 축출하도록 했다. 사담 후세인 제거 이후 대통령은 쿠르드계가, 총리는 시아파가, 국회의장은 수니파가 각각 맡아 왔다. 총리가 전권을 행사해 대통령은 사실상 허수아비였는데, 이번에 미국이 지난달 24일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숨에게 총리 지명권을 적극 행사하게 한 것이다. 총리로 지명된 하이데르 알아바디는 알말리키의 측근 출신으로 알말리키가 이끄는 다와당 소속이기 때문에 ‘다수당에서 총리를 지명한다’는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집권했던 알말리키가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이 주도한 이 같은 권력 재편에 대해 “이라크를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고 평가했다. 새 내각을 구성하는 향후 30일 동안 알말리키가 자신의 친위대인 ‘바그다드 경비대’를 앞세워 계속 버티거나 충돌을 일으킬 경우 사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알말리키는 이날 TV 연설을 통해 “미국의 사주로 이뤄진 헌법 위반 사태를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알말리키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알아바디 총리 지명자는 지체 없이 새 내각을 구성하라”고 재촉했다. 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가 이끄는 시아파 민병대는 알아바디를 지지한다. 이란과 연계된 ‘바드리 군단’은 현 총리와 총리 지명자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다. 자칫 긴장이 고조되면 정부군 내부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형국이다. 미국은 사분오열된 정부군을 돕느니 차라리 쿠르드 민병대에 직접 무기를 지원해 IS와 대리전을 치르게 하기로 결정했다. 공습만으로는 IS를 격퇴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지상군을 파병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군대가 페슈메르가인 셈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쿠르드군에 직접 공급로를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이를 “치명적 조치”라고 지적했다. 자칫 이라크를 IS와의 전쟁, 권력 쟁취를 둘러싼 민병대 간 전쟁, 쿠르드의 독립전쟁 등 ‘3중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 문이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천상의 도시, 핏빛으로 물든 이유는

    천상의 도시, 핏빛으로 물든 이유는

    예루살렘 광기/제임스 캐럴 지음/박경선 옮김/동녘/ 660쪽/2만 5000원 유대인의 역사/폴존슨 지음/김한성 옮김/포이에마/1064쪽/4만 5000원 최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공습을 비난하는 국제적 여론이 드세다. 나치의 대학살을 겪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을 향해서 어떻게 그리도 잔인하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을까. 성스러운 순례지가 존재하는 예루살렘이 어쩌다 인간의 광기로 얼룩진 폭력의 장소로 전락한 것일까. 끝없는 갈등의 뿌리를 파헤친 ‘예루살렘 광기’와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의문이 좀 풀릴지도 모르겠다. ‘예루살렘 광기’는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미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캐럴이 2011년 ‘예루살렘, 예루살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의 번역본이다. 캐럴은 모든 문제의 발단을 ‘예루살렘 열병’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는 “지상의 예루살렘이라는 화면 위에 천년왕국에 대한 강렬한 환상을 투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가 완성되리라는 신념이 바로 예루살렘 열병”이라며 “예루살렘 열병에 걸리는 이들은 종교집단들이며,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세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이 열병에 걸린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캐럴에 따르면 수세기 동안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로 만든 이는 바로 수많은 인간들이었으며, 그들이 자신의 신앙에 도취되어 예루살렘이라는 땅에 병적인 열광과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그 열병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 열병이 폭력을 낳은 것이다. 캐럴은 종교와 폭력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한다. 인간은 폭력성과 욕망의 적절한 발산과 통제를 위해 희생제의를 만들었으며, 폭력의 어두운 그늘과 지적·도덕적 고민에서 종교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세 종교 모두가 겉으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이유다. 폭력은 성전(聖戰)으로 미화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습,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공격, 지하드의 자살폭탄 테러도 같은 맥락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모든 모순된 상황의 무대가 바로 관념 속에 존재하는 ‘천상의 도시’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도시 예루살렘이었다. 캐럴은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고 적었다. 지금의 폭력과 전쟁 사태는 종교에서 비롯됐으므로 그 해법도 종교 개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는 “사랑이라는 태고의 법칙을 어기게 만드는 신앙은 바뀌어야 한다. 폭력을 낳는 종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즉, 모든 종교는 영원히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예루살렘은 인간이 처음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던 곳인 동시에 여전히 깨달아야만 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역사저술의 대가 폴 존슨이 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집필한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 근원을 파헤쳤다. 1987년 출간된 책은 2005년 살림출판사에서 세 권짜리로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됐고 이번에 포이에마 출판사가 같은 번역을 사용해 한 권으로 엮어 냈다. 존슨은 책 첫머리에서 “유대인은 역사상 가장 집요한 민족”이라며 그 증거로 예루살렘 남쪽 32㎞에 있는 헤브론을 거론한다. 헤브론은 유대인들이 최초로 취득한 땅으로 기록(창세기 23장)된 지역이며 산악지대 막벨라동굴에는 이스라엘 족장의 묘역이 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오래된 무덤 중 하나에 유대 종교의 창시자이자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안치돼 있다. 그 옆으로 아내 사라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손자인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다. 4000년 유대 역사가 시간과 공간에 닻을 내린 곳이다. 헤브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히브리인의 성지, 비잔틴 양식의 성당, 십자군 교회, 이슬람 사원으로 모습을 바꿨다. 오랜 유랑과 노예생활, 전쟁의 살육과 추방이라는 역경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2차 대전 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존슨은 “어떤 민족도 그토록 긴 시간 지구상의 특정 지역에 그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다. 강력하고 일관된 목적을 가슴에 품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려는 본능, 즉 기존 거주민을 축출하고 그 땅에 다시 정착하려는 용기와 역량을 유대인만큼 강하게 표출한 민족은 여태껏 없었다”고 적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짧은 휴전 끝나 가자 또 공방전

    짧은 휴전 끝나 가자 또 공방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3일 휴전’과 추가 휴전을 위한 협상이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전투는 다시 시작됐고, 팔레스타인 어린이 1명이 숨졌다. 8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하마스는 휴전 종료 시점인 이날 오전 8시(현지시간)가 되자 “휴전 연장은 없다”고 선언했다. 협상에 참여한 하마스 대표는 “이스라엘이 우리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협상에서 하마스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 봉쇄 해제를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무장해제를 주장했다. 휴전이 종료되자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를 향해 최소 25발의 로켓포를 발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도 즉각 가자지구 공습을 재개했다. 이 공격으로 10세 어린이 1명이 숨지고 여성 한 명이 크게 다쳤다. 한편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지난해 쿠데타에 성공한 뒤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몰아내자는 데 합의했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네 차례의 중동전쟁에서 맞붙은 앙숙이다. 신문은 이 합의에 따른 가자지구 봉쇄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세속주의자’인 시시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이슬람주의자’인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과 무르시의 권력 기반이었던 무슬림형제단을 축출했다. 시시가 무슬림형제단의 한 분파였던 하마스를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시시에게 접근해 하마스 축출을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시시 대통령은 하마스가 밀수품을 들여와 돈을 만드는 통로였던 이집트·가자지구 접경의 터널을 대부분 폐쇄했다. 하마스는 돈줄이 막혀 공무원 월급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양측은 ‘궁지에 몰린 하마스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미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심지어 이집트가 중재한 ‘3일 휴전’ 협상에서도 미국은 배제됐다”고 전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리비아 ‘엑소더스’

    리비아 ‘엑소더스’

    전기와 물 공급이 끊겼고 주유소도 불에 탔다. 대다수 병원에 약이 떨어져 환자들은 갈 곳조차 없다. 유명 정치 활동가들은 살해됐고 각국 외교관들도 속수무책으로 공격 대상이 됐다. 대포와 로켓 폭발음이 귀를 울리는 가운데 미처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은 도로 한복판에서 강도를 만날까 공포에 떨고 있다. 27일(현지시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리비아에서 2주째 계속된 이슬람 세력과 세속주의 민병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자 세계 각국이 자국민에게 일제히 ‘대피령’을 내렸다. 미국 정부는 전날 트리폴리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인근 국가인 튀니지로 철수시켰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 네덜란드도 27일 자국민 탈출을 권했다. 독일 외무부도 “납치와 공격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무장 괴한들은 튀니지로 대피 중이던 영국 대사관 차량에 총을 쏘며 납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도 현지 공관원들 가운데 일부를 튀니지로 철수시켰다. 완전 철수보다는 교대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500여명의 교민과 기업인에게 사실상 전원 대피령도 발동했다. 이 유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리비아의 정치 혼란에 있다. 리비아는 2011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축출 이후 ‘이슬람 대 비이슬람’ 세력의 충돌로 지금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갑자기 사라진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로 지역·부족 간 이해관계에 따르는 민병대들이 권력과 유전을 두고 파벌 싸움을 벌였다”면서 “미국·유럽은 오일 머니 덕에 부유한 리비아를 멈출 만한 힘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지난 2월 퇴역 장성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국민군’이 “이 모든 위기의 원인은 정부”라며 의회 해산을 요구하고 나오면서 갈등이 격화됐다. 전략적 요충지인 트리폴리 공항을 3년여간 장악해 온 진탄 출신 이슬람 민병대와 ‘공수부대’까지 국민군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은 지난 5월 트리폴리의 제헌의회(GNC) 의사당도 장악했다. 의회 내 다수인 이슬람주의자들은 “(국민군의) 권력 장악 시도에 맞서자”며 이슬람계 연합 민병대를 조직해 맞서 왔다. 26∼27일 이틀간 벵가지에서 세속주의 민병대 ‘국민군·공수부대’가 이슬람 무장세력 ‘안사르 알샤리아’의 군사기지를 타격해 이 과정에서 최소 36명이 목숨을 잃었다. 앞서 트리폴리에서는 지난 13일부터 리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미스라타의 무장단체가 가세한 ‘이슬람 연합 민병대’가 진탄 출신 민병대의 공항 통제권을 빼앗기 위해 총부리를 겨눠 2주 새 97명이 숨졌다. 외신들은 카다피 정권 붕괴 후 가장 치열한 교전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새롭게 구성되는 의회가 국가 통합을 위해 무엇인가 할 것이라는 게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라고 전망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카타르 국왕, 사우디 4개월만에 ‘깜짝’ 방문…가자 사태 논의

    카타르의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전격 방문해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과 만났다고 아랍권 위성채널 알아라비야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우디가 지난 3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과 함께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는 카타르 정부에 항의하며 도하에 주재하는 자국 대사를 소환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양국 간 정상회담이다. 타밈 국왕은 이날 하루 일정으로 사우디 제다를 방문, 압둘라 국왕과 만나 가자 사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휴전 방안을 모색했다고 방송은 전했다. 이번 정상회담에는 사우디의 살만 왕세제와 무크린 제2왕세제, 국왕 고문인 반다르 빈 술탄 왕자, 국가수비대 장관 미타브 왕자도 배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디는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제안한 휴전 중재안을 지지한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 분파인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인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엘시시 대통령의 휴전 중재안을 거부했다. 이에 무슬림형제단에 우호적인 카타르와 터키가 휴전 중재를 자처하고 나선 상황이다. 그러나 엘시시 대통령은 카타르와 터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휴전안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미국도 공식적으로는 이집트 편에 섰다. 카타르 국왕의 사우디 방문은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 이뤄진 것이어서 가자 사태에 대한 중동 국가들의 입장 조율로 이어질 지 귀추가 주목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중동국가 간 분열에 발목 잡힌 이·팔 휴전

    중동국가 간 분열에 발목 잡힌 이·팔 휴전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협상이 지리멸렬한 데는 이집트와 터키, 카타르 등 인근 중동 국가들 간의 뿌리 깊은 분열상에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AP통신은 20일(현지시간) 이집트의 중재안은 하마스가 거부했고 터키와 카타르의 중재 노력은 이집트의 비판을 받고 있다면서 “이집트 측과 하마스·터키·카타르 측의 깊은 적대감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보도했다. 양측의 갈등은 지난해 7월 이집트의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이 군부에 의해 축출되면서 시작됐다. 무르시 전 대통령은 이슬람 운동조직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으로, 무슬림형제단의 분파 조직인 하마스가 무르시를 지지해 왔다. 이집트 군부는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이후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하마스를 겨냥해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 정책을 강화해 왔다. 반면 터키와 카타르는 무르시 전 대통령과 무슬림형제단의 편에 섰기 때문에 이집트와 하마스·터키·카타르 간에 긴장도가 높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이 시작됐고 이집트는 지난 15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 중재안을 내놨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중재안을 받아들였지만, 하마스는 이집트의 중재안을 거부했다. 이집트의 휴전 중재가 실패하자 터키와 카타르도 휴전 중재에 나섰다. 하마스는 터키와 카타르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중재안에 반영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이들 국가가 하마스를 경제·외교적으로 지원하는 점을 들어 중재 역할을 비판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양측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교전에도 엇갈린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집트 언론 매체들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희생을 이용하고 있다고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터키 정부는 이스라엘이 국제적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터키와 이스라엘의 악화된 관계도 휴전 중재를 방해하는 요소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우호적 관계였던 터키와 이스라엘은 2010년 5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로 가던 터키 구호선을 공격해 터키인 8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관계가 급속히 나빠졌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최동호 새벽을 열며] 통일 준비와 탈북문학

    [최동호 새벽을 열며] 통일 준비와 탈북문학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3월 드레스덴 선언 이후 통일 대박론이 전면에 대두했고 지난 16일 통일준비위원회도 발족됐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과연 통일을 위해 얼마나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격동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정치, 경제적 득실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인간적 이해와 소통 없이 추진되는 통일은 새로운 다른 분쟁의 시작일 수도 있다. 분단 극복의 시각에서 광복 이후 70여년의 한국문학을 개괄하자면 월남문학과 분단문학, 그리고 통일문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통일문학의 전제 조건으로 탈북문학을 설정해야 한다. 월남문학은 1950년대 북에서 남으로 온 월남 작가들에 의해 형성된 문학으로 여기에는 황순원, 선우휘, 최인훈, 이호철 등의 작가와 구상, 박남수, 김규동 등의 시인이 포함된다. 분단문학은 1970년대 백낙청, 임헌영, 염무웅, 구중서 등의 민중문학 평론가들이 선도했으며, 민족 동질론 차원에서 고은, 홍성원, 황석영, 조정래, 안도현 등 많은 문학인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1972년 7·4 공동성명이 분단문학을 거론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3대 원칙으로 내세워 통일문학을 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7·4공동성명이었다. 1990년대 이후는 분단문학에서 통일문학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한 시기다. 2000년 남과 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이루어진 6·15선언 또한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한 국면 전환에 크게 기여했다. 6·15선언을 계기로 남과 북의 문인이 함께 ‘통일문학’이란 잡지를 발간하자는 제안까지 있었지만 그 실현은 쉽지 않았다. 이 전환기적 과정에 탈북문학을 설정하고 이를 문학사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탈북문학은 월남문학과는 성격이 다르다. 우선 탈북인 모두 북한의 체제에서 출생하고 주체사상을 배경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월남문학은 분단 이전에 출생하고 성장한 문인들이 주축이었다면 분단문학은 민중문학의 시각에서 사회비판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며 탈북문학은 북한의 체제에서 현장을 경험한 문인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그러나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탈북문학의 범주를 북에서의 경험만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탈북인들이 남한의 시장경제체제하에 독립적 주체로 적응해 가는 과정에 대한 체험도 중요한 소재로 포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북의 체제를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측면에서의 성과보다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점이 한국 문학에 기여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상당 기간은 남과 북의 체제나 문화, 경제적 이질성으로 인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후 독일이 겪었던 갈등과 분쟁도 좋은 선례일 것이나 우리에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겪어야 했던 한반도에서의 분쟁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백제나 고구려의 잔여 세력과 싸워야 했음은 물론 한반도에 진출한 당나라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도 싸워야 했다. 백제지역의 분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라의 원효가 변산 개암사에서 ‘화쟁론’을 설법하고 김제로 나가 야단법석을 개최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는 지금 우리가 처한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너무 유사하다. 통일 신라가 진정한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통일 후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앞으로 통일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많은 시련과 난관이 부닥쳐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한국이 이루어나갈 미래의 찬란한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역사적 사명이며 이를 준비하기 위해 탈북문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두지 않을 수 없다.
  • 하마스 포격에 이스라엘서도 첫 사망자

    하마스 포격에 이스라엘서도 첫 사망자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이 무산된 후 양측 교전이 재개되면서 이스라엘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AP, AFP통신은 16일 이스라엘 에레즈 인근에서 군인들에게 음식을 운반하던 37세 남성이 전날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곳은 가자지구에 맞닿아 있는 곳으로, 지난 8일 이스라엘의 공습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인이 사망한 것은 처음이다. 앞서 하마스는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로켓포를 발사했고, 이스라엘도 공격 중단 여섯 시간 만에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와 칸유니스에 공습을 퍼부었다. 이날까지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13명을 기록했다. 이스라엘은 마무드 알 자하르 등 하마스 고위직 4명의 자택을 정밀 타격했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자하르는 2007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집권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휴전이 무산되자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는 계속 싸우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정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면서 “더 강하게 대응하는 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2012년 ‘8일 전쟁’과 달리 하마스가 이집트의 중재안을 거부한 것에 대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하마스는 이집트가 적절한 중재자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하마스의 동지인 ‘무슬림형제단’을 축출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타임은 “경제적, 지리적 고립에 대한 언급 없는 휴전 제안에 대해 하마스가 얻을 것은 전혀 없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하마스가 휴전안을 거부하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봉쇄를 해제하거나 이집트가 라파 국경을 개방해야만 하마스가 (휴전안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자에 있는 알아즈하르대학의 므크하이메르 아부사다 교수는 타임에 “하마스는 장거리 로켓과 무인기로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하루도 못 간 휴전… 이스라엘·하마스 교전 재개

    이집트가 제안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안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거부하면서 양측의 교전이 또다시 벌어졌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AP통신은 15일 하마스가 이날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자 이스라엘도 가자지구 공습을 재개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군은 성명을 내고 “우리가 공습을 중단하자마자 하마스가 47발의 로켓포를 발사했다”며 “이에 우리도 군사작전을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번 충돌은 이집트 정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 휴전 중재안을 제안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재개된 것이다. 이로써 양측의 교전은 이날로 8일째 이어졌고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최소 192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4분의1이 어린이, 4분의3이 민간인이라고 유엔은 전했다. 이는 양측이 2012년 11월 ‘8일 교전’을 벌였을 때 발생한 팔레스타인 희생자 수 177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와 하마스는 이집트가 전날 제시한 휴전 중재안을 각자 검토했지만 상반된 결과를 내놓았다. 중재안은 양측이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즉각 휴전에 돌입해 지상과 해상, 상공을 통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오전에 안보 각료회의를 소집해 논의를 한 끝에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도 중재안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하마스는 휴전안을 내놓은 이집트의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에게 불신을 나타내며 중재안을 거부했다. 시시 대통령은 이집트에서 하마스의 뿌리인 ‘무슬림 형제단’을 축출했다. 하마스의 파우지 바르훔 대변인은 “적대행위를 완전히 끝내겠다는 약속이 없는 휴전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휴전 조건으로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 해제, 이집트와 인접한 라파 국경 개방, 이스라엘에 수감 중인 재소자 석방 등을 내세우고 있다고 이집트 언론은 전했다. 한편 이스라엘 비밀경찰 신베트가 지난 2일 16살 소년 무함마드 아부 카디르를 납치한 뒤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용의자 3명을 최근 체포해 조사한 결과 범행 며칠 전부터 수갑과 휘발유를 준비하는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이들은 사건 뒤 그날 입은 옷을 불태우는 등 증거 인멸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 당국은 용의자 3명 가운데 최연장자가 29살이고 나머지 2명은 연장자와 친척 관계라는 것 외에는 모든 정보를 비공개에 부쳤다. 가족이나 주변인에 대한 보복 공격을 우려해서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정면충돌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정치적 다툼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뉴욕타임스는 무함마드가 죽은 곳 근처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로 쌓은 임시 추모탑을 만들어 줬지만, 누군가가 무너뜨리고, 다시 쌓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고 전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냉전 해체 기여’ 셰바르드나제 前 그루지야 대통령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이자 그루지야의 전 대통령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7일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소련 개혁 개방의 핵심으로 동서 냉전체제를 허문 인물이면서, 고향 땅에서 대통령이 된 뒤 혁명에 의해 축출된 셰바르드나제가 오랜 투병 끝에 숨졌다. 그는 1928년 그루지야에서 태어나 1972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낼 정도로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다. 그루지야공화국의 경제성장과 개혁을 이룬 그는 1985년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부름을 받고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하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헌신했다. 셰바르드나제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그루지야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됐다. 그가 취임한 1995년엔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남오세티야와의 유혈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대전차포가 차량 행렬에 날아든 것을 포함해 두 번의 암살 기도를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루지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경력은 부패와 정실인사로 얼룩졌다. 급기야 여당이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었고, 그는 결국 2003년 11월 24일 무혈의 장미혁명으로 하야했다. 셰바르드나제는 당시 법무장관으로 있던 미하일 샤카슈빌리에게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대통령직 사임을 약속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셰바르드나제는 공화국 수도 트빌리시 외곽의 별장에서 칩거하며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았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들은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친구였고 그를 잃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그의 친구들과 유가족, 그루지야 국민 모두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우크라 동부 27일까지 임시 휴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던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이 오는 27일까지 임시 휴전하고 평화 협상을 준비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영토 내 군사력 사용 권한을 철회했다. 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친러 분리주의 세력의 최고 지도자들은 23일(현지시간) 도네츠크 주정부 청사에서 정부 측 대표인 레오니트 쿠치마 전대통령과 회담한 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0일 선언한 임시 휴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와 반군 측은 일시 휴전 상태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의 평화안에 대한 협상을 준비할 전망이다. 회담 뒤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알렉산드르 보로다이 총리는 러시아 국영방송에 나와 “우리는 임시 휴전 기간 중에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상 착수에 합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친러 세력 측은 또 수주일째 억류 중인 유럽안보협력기구 실사 단원들을 풀어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친러 세력의 임시 휴전 선언에 주목하면서도 실제로 적대 행위가 멈췄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리 하프 국무부 대변인은 “그들에게서 교전 중단을 지지한다는 발언이 나오긴 했지만 우리는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행동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편 AFP통신에 따르면 푸틴의 대변인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24일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사태 해결과 안정을 위해 지난 3월 1일 승인된 군사 개입 결의안의 철회를 상원에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푸틴은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축출되자 상원의 승인을 얻어 크림반도에 군사력을 투입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즉각 환영 의사를 밝혔다. 그는 푸틴의 결의안 철회 요청이 나온 직후 낸 성명에서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실질적인 진전이 나왔다”고 밝혔다. 러시아 상원은 25일까지 푸틴의 요청을 검토할 예정이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시아파 두 지도자 ‘동상이몽’ 이라크 해법

    시아파 두 지도자 ‘동상이몽’ 이라크 해법

    이슬람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이라크를 내전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가운데 이란과 이라크를 대표하는 두 시아파 최고 성직자가 주목받고 있다. ‘ISIL 격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는 이들이 미국의 개입과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의 진퇴를 놓고 시각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아파 ‘맹주 국가’인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22일(현지시간) 이란 관영 IRNA 통신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사태 개입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하메네이는 “미국이 사태를 종파 간 내전으로 몰아가 이라크를 다시 꼭두각시처럼 부리려 하고 있다”면서 “이라크 정부는 미국의 개입 없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이터 통신은 “하메네이는 미국이 과거 사담 후세인을 지원해 이란-이라크 전쟁을 배후 조종한 것처럼 다시 이라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알말리키 정권을 축출하고 수니·시아파를 아우르는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전략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메네이의 ‘미국 개입 반대’와 ‘알말리키 정권 유지’ 주장은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시아파 정권을 이라크에 존속시켜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미국과의 협력을 추진하는 중에 나온 ‘지침’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신정국가인 이란에서는 최고지도자가 대통령 위에 있다. 반면 이라크의 시아파 최고성직자 알리 알시스타니는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지 않고, 알말리키 총리의 퇴진을 종용하고 있다. 알시스타니는 지난 20일 금요 예배 강론에서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새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모든 국민은 무기를 들고 반군에 대항하라”는 그의 교시에 따라 과거 미군과 싸웠던 시아파 급진 민병대 ‘마흐디’도 다시 봉기했다. 2005년 제헌의회 총선에서 범시아파 정권이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알시스타니는 미군과 마흐디의 휴전을 중재한 바 있다. AP 통신은 “알시스타니는 미국과 이란의 영향력이 모두 배제된 시아파 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목표를 위해서는 우선 이란은 물론 미국의 힘까지 빌려 ISIL을 격퇴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이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급진 시아파의 봉기를 부추기고, 미국의 입장에 일단은 동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오바마 “이라크반군 타격 준비”… 軍자문단 파견

    오바마 “이라크반군 타격 준비”… 軍자문단 파견

    미국이 이라크에 군사 자문관 300명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자국민 보호 병력 275명을 파견할 때처럼 전투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이라크에 들어서는 미군 숫자는 점점 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최대 300명의 군사 자문관을 이라크에 파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정밀하고 선별적인 군사 행동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라크 사태 발생 이후 오바마 대통령이 구체적 군사 행동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군사 고문단은 전투 임무가 아닌, 이라크 정부군의 병력 모집·훈련·정보 수집 분석 등을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에도 “미군이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 전투에 투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존 케리 국무장관이 이번 주말 중동과 유럽으로 건너가 이라크 사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케리 국무장관은 조만간 이라크도 방문해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 등이 동참하는 거국 내각을 만들라고 누리 알말리키 총리를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알말리키 총리에 대해 “그를 비롯한 이라크 지도자들이 시험대에 서 있다”면서 “이라크의 운명은 종파 간 균형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가 알말리키 총리를 대신할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알말리키 총리의 정치적 라이벌들도 비밀리에 그를 축출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P통신은 익명의 시아파 정치인들을 인용해 알말리키 총리를 대체할 인물로 아델 압둘 마흐디 전 부통령, 이야드 알라위 전 총리 등 시아파 출신 정치인들이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알말리키 총리는 과도한 수니파 억압 정책과 부정부패로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시아파 정당 다와당의 핵심 인물인 그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핍박을 피해 이란과 시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때부터 시아파 국가인 이란, 시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지원 덕에 2006년 5월 총리에 올랐지만, 취임하자마자 수니파 반군을 엄중단속하는 데 열중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영자지 걸프 뉴스는 “알말리키 총리는 수니파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그가 이라크를 파멸시켰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4월 이라크 정부군이 수니파 거점 지역인 하위자를 습격하는 와중에 민간인 53명이 사망하는 ‘하위자 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도 등을 돌렸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어부지리 쿠르드… 노심초사 사우디

    이라크 내전으로 이라크 내 쿠르드자치정부가 최대 수혜자로 떠오르는 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걸프 국가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18일(현지시간) 허핑턴포스트 등은 쿠르드자치정부가 이번 이라크 사태에 힘입어 완전한 분리독립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쿠르드족은 지난 12일 이라크 정부군이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에 밀려 도망친 틈을 타 ‘쿠르드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키르쿠크를 차지했다. 키르쿠크는 쿠르드인들이 조상의 땅이라고 믿는 곳이자 100억 배럴로 추정되는 막대한 유전이 있는 도시다. 유전은 쿠르드자치정부의 분리독립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전 때문에 사담 후세인에 의해 키르쿠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1991년 미국이 후세인을 축출하면서 쿠드르족은 자치권과 함께 이 지역을 잠시 확보했지만 이라크의 새 정부에 다시 빼앗겼다. 쿠르드자치정부가 완전한 독립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 이유는 미국의 오랜 우방이자 중동의 강자인 터키가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자국 내에서 쿠르드족과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터키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독립에도 반대했었다. 그러나 ISIL이 이라크에서 파죽지세로 성장하자 이라크 내 쿠르드족이 독립해 이라크와 터키 사이에서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 내렸다. 터키는 지난달 초 쿠르드자치정부와 석유수출 계약을 맺기도 했다. 터키의 집권 정의개발당은 “쿠르드도 살아가는 곳의 이름과 실체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독립을 지지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은 ISIL을 비롯한 여러 수니파 무장단체에 뒷돈을 대다가 역풍을 맞고 있다. 이 수니파 국가들은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의 시아파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이 목표였다. 알말리키가 축출되고 수니파 정권이 들어서야 이 지역이 이란 주도의 시아파 지대로 통일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ISIL이 너무 극단주의화돼 오히려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특히 사우디 등은 대부분 미국의 우방이기 때문에 미국을 ‘주적’으로 삼는 ISIL이 언제든지 총구를 돌릴 수 있다. 사우디 등은 또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앙숙인 이란이 미국과 손을 잡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국의 석유재벌들이 ISIL에 자금을 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무능한 정권·무심한 서구… 급진 이슬람 세만 불렸다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의 맹위가 심상치 않다. 9·11 사태 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13년이 돼가지만 이들의 세력은 올 들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다. 이라크에선 제2의 도시 모술이 함락된 데 이어 수도 바그다드까지 위험한 상황이고, 파키스탄 최대도시 카라치의 국제공항은 테러로 얼룩졌다. 이런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의 동시다발적 부상은 중동 각국과 국제사회의 전략 실패가 그 배경이라고 AP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라크는 10여년 전 사담 후세인 정권이 축출됐지만, 이후 등장한 정권들이 전 국토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하면서 치안 불안이 이어졌다. 여기에 시아파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일부 수니파가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를 지원하면서 ISIL은 이라크 전역을 위협하고 있다. 무장단체 파키스탄탈레반(TTP)의 공격을 받는 파키스탄은 자국 이슬람 신도를 의식한 탓에 화를 키웠다. 무장세력과 대응도, 협상도 제대로 하지도 않는 애매한 전략으로 되레 TTP 득세에 빌미만 내줬다. FT는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지하디스트)의 꿈이 갑자기 실현 가능한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이 상황을 평가했다. 살만 샤이크 브루킹스연구소 도하 센터장은 AP통신에 “국제사회가 이들 국가의 정치·정부 시스템 확립을 돕지 못했다”며 국제사회의 무능을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했다. 더욱이 이라크에서 2년 전 철군한 미군은 올해 말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철수한다. 일각에선 2010년 ‘아랍의 봄’(민주화 바람)이 무장단체 재부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무장단체를 힘으로 억누르던 독재정권이 물러나자 이들이 다시 세를 키웠다는 것이다. 무장세력이 정권교체의 혼란한 틈을 타 각종 화기를 빼돌려 전력을 강화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투표시간까지 연장하며… 각본대로 권좌 오른 그들

    ■ 이집트 시시, 대통령 당선 확정… 최종 투표율 50%도 안 돼… 정당성 얻으려다 출발부터 ‘굴욕’ 압둘팟타흐 시시(60) 전 이집트 국방장관이 결국 새 대통령이 됐다. 선거일을 하루 연장하면서까지 투표율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예상보다 저조한 결과에 시작부터 ‘굴욕’을 겪었다. 3일(현지시간) 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집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달 26~28일 치러진 대선 개표 결과 시시가 득표율 96.9%로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안와르 엘아시 선관위원장은 유권자 5400만명 중 시시가 2378만 표를 획득했으며 유일한 경쟁자인 함딘 삽바히는 3.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최종 투표율은 47.4%에 불과했다. 2012년 대선 투표율 52%보다도 4% 포인트가량 낮다. 당초 시시는 대선 투표율이 74% 정도는 될 것으로 예측했다. 지난해 7월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전 대통령을 몰아낸 그는 이번 투표율을 통해 전 정권 축출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국민의 지지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되레 정치적 타격만 입었다. 시시는 첫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제 이집트 재건을 위해 일해야 할 시간”이라며 자축했지만 당장 해결할 과제가 산더미다. 무르시 지지파는 ‘제3의 혁명’을 촉구하며 벌써부터 반발하고 있다. 빈약한 경제도 걱정이다. 낮은 외국인 투자와 관광객 축소로 이집트는 수년간 빈곤 상태다. 아랍의 봄 이후 가계경제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못 느낀 이집트인들이 민주화보다 경제 부흥을 외친 시시를 선택한 만큼 경제난 타파가 시급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시시가 공포정치를 펼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미 이집트 내무부는 인터넷 감시를 확대하기로 했다. 미 백악관은 이날 “정치적으로 제약된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주장이 나오는 만큼 대통령이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보호하는 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시리아 알아사드 3선 연임 확실시… 투표자 많단 이유로 5시간 연장… 동·북부선 투표 못해 ‘반쪽 대선’ 3년 넘게 이어진 내전으로 16만명이 숨진 시리아에서 3일(현지시간) 대선이 실시됐다. 결과는 5일 나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바샤르 알아사드(48) 대통령의 3선 연임이 확실시된다. 어차피 이번 선거는 알아사드가 당선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반쪽짜리’ 선거이기 때문이다. 반군이 장악한 동·북부 지역에 투표함조차 설치되지 않아 수백만명의 표가 공중에 날아갔고, 상대 후보들은 인지도가 낮아 경쟁력조차 없었다. 투표는 당초 오후 7시 종료 예정이었지만 “투표 대기자가 너무 많아 시간을 연장한다”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원칙 없는’ 발표에 밤 12시쯤 끝났다. 시리아 국영 사나(SANA) 통신 등은 이날 오전 7시부터 유권자들이 전국 9601곳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앞으로 7년 동안 시리아를 통치할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보도했다. 시리아 내무부는 유권자가 1580만명이라고 밝혔지만 알레포를 비롯해 약 60%에 이르는 정부군 통제 밖의 지역에선 투표가 진행되지도 않았다. 난민 270만명 가운데 20만명만 투표권이 허용됐다. 이에 대해 CNN은 “역사상 가장 괴이한 민주주의의 패러디”라고 촌평했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부대변인도 이번 대선에 대해 “불명예스러운 선거”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대선 후다. 알아사드가 또다시 당선되면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에 이어 일가가 60년 동안 시리아를 통치하며 2대째 장기 독재를 이어가게 된다. 이미 알아사드 일가의 독재 정권 타도를 내걸고 2011년 3월부터 이어진 내전으로 시리아 국민 3분의1이 난민이 됐다. 특히 선거를 통해 명분을 쌓은 알아사드가 대대적인 반군 진압에 나설 것으로 예측돼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美 ‘테러리스트와의 거래’ 정당성 논란

    탈레반 지도자 5명과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풀려난 아프간전쟁의 마지막 미군 포로 보 버그달(28) 미 육군 병장의 귀환이 미 정가 내에 후폭풍을 불러오고 있다. 미 정부는 이번 교환이 ‘전장에 어떤 병사도 남겨두고 나오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야당인 공화당은 물론이고 재계 등 일각에서 되레 ‘테러를 부추길 것’이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USA투데이는 ‘테러리스트와의 거래는 정당한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오바마의 포로 교환이 적절한 것인지 악마와의 거래에 대한 논란이 몇 주간 지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1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NBC방송 대담 ‘미트 더 프레스’에 참석해 “석방을 계기로 탈레반과 직접 대화하고 아프간 평화에 돌파구가 마련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어 공군기지를 방문해 버그달의 소식을 직접 알렸지만 예상과 달리 현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장병들은 박수도 치지 않았다. AP통신은 “단순히 군의 수장 앞에서 감정을 아낀 것인지, 아니면 버그달에 대한 의혹 때문인지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버그달이 탈레반에 생포된 게 아니라 투항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미 장병들 뿐만이 아니다. 공화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인 마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은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미군들을 오히려 위험에 노출시켰다”고 경고했다. 같은 당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도 “풀어주기로 한 5명은 ‘극렬분자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인물들’이라면서 “한 특정 개인이 아프간에서 죽어 간 많은 이들의 피를 묻히고 살아 나온 꼴”이라며 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했다. 정부가 테러리스트를 미국 시설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 30일 전 의회에 알리도록 한 현행법을 위반했다는 비난도 나온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브루스 호프먼 조지타운대학 안보연구소장은 USA투데이에 “사실 우리는 늘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해 왔다”면서 “특히 1979년 발생했던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 때도 정부는 조건부 석방으로 매듭지었다”고 강조했다. 반미 감정이 극에 치달았던 당시 이란에서 친미 성향인 팔레비 국왕이 축출됐는데 이 왕가의 재미(在美) 자산을 이란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미국은 대사관에 444일간 억류돼 있던 미국인 50여명을 구출했다. 찰스 스팀슨 헤리티지재단 보안 전문가도 “우리가 모르는 소규모 협상 사례는 훨씬 많다”면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쿠바, 이라크 등 세계 곳곳에서 구류된 이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증언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세계의 창] ‘아랍의 봄’ 밀어내는 시리아·이집트 두 권력자 가상인터뷰

    [세계의 창] ‘아랍의 봄’ 밀어내는 시리아·이집트 두 권력자 가상인터뷰

    2011년 1월 튀니지에서의 재스민 혁명을 시작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법의 심판대에 세워질 때도 그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지독한 내전으로 국토가 쪼개지고 지난달까지 16만 2000명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시리아를 철권통치하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48) 대통령 얘기다. 왕정을 시행하지 않는 아랍권 국가 중 유일하게 2대째 40년 넘도록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다음 달 3일 자신이 당선될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대선을 통해 정권을 연장할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에서는 약 30년 동안 독재를 하던 군인 출신 대통령을 끌어내린 지 3년여 만에 다시 군부 권력자가 대통령이 되려 한다. 이집트 최초의 민주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몰아낸 압둘팟타흐 시시(59) 전 국방장관은 26~27일(현지시간) 이틀간 실시되는 대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된다. ‘아랍의 봄’ 열풍과 국제사회의 민주화 노력에도 독재의 권좌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두 권력. 미국과 유럽의 주요 외신 기사와 관련 도서 등에 나타난 사실들을 바탕으로 가상 인터뷰를 구성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알라위파·기독교도 날 필요로 해… 전 세계가 하야 원치 않는다” 언젠가 내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처럼 피투성이로 모랫바닥에 뒹구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리비아와 내 나라 시리아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카다피의 부족 카다파는 세력이 워낙 강해서 카다피가 없어진 지금도 과도 정부군이라는 자들이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 알라위파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뒤 처음으로 권력을 잡긴 했지만 고작 200만명뿐이다. 우리나라의 군대와 정치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나와 우리 일족이 무너지면 인구의 9%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무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74%에 달하는 수니파의 근본주의자들과 13%의 시아파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리아보다 알라위파가 많은 나라는 없다. 시리아 밖에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 나라 인구의 9% 정도에 해당하는 기독교도들도 내가 없으면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물론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탄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보호해 온 내가 건재하는 한, 중동에서 시리아만큼 기독교도가 살기 좋은 나라는 없다. 기독교도들을 심하게 차별하고 박해한 리비아나 이집트에선 이들이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처럼 나를 위해서라면 자폭도 주저하지 않는다. 알라위파와 기독교도들에게 알아사드의 시리아가 절실한 만큼 그들은 용맹하다. 카다피가 리비아의 테러리스트들에게 밀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아는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국과 서방 놈들이 하늘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왜 내 나라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는 누구나 알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러시아와 중국이 왜 지난 3년 동안 내 나라에 개입을 결정하는 안보리 결의안에 4번이나 비토(거부권)를 행사했을까. 푸틴은 나를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인 그의 세상에서 나는 상징적인 푸틴이고 그래서 그는 내가 지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가. 푸틴은 내가 패배하는 세계에서는 그도 언젠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방위산업 관련해서 시리아와 총 40억 달러(약 4조 1000억원)어치의 계약을 맺고 있다. 우리는 2009년과 2010년에 러시아 무기를 사는 데 각각 1억 6200만 달러씩을 썼다. 5억 5000만 달러짜리 훈련용 전투기 공급 계약도 맺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러시아는 우리의 타르투스 항을 임대해서 해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이 패권을 휘두르는 세계를 저지하는 것이 지상 목표인 그들에게는 중동에 군항이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국이 왜 우리 편을 드는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자기네 나라에서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와의 문제도 있고 해서 기본적으로 ‘남의 나라 내부의 일에 외국이 간섭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비아 때도 중국은 기권을 했지 않은가. 그럼 미국은 내가 내려가길 진심으로 원할 것 같은가. 이스라엘은. 이들이 또 하나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팔레스타인을 바랄 것으로 보이나. 한 번 잘 생각해 보시라. ■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前 국방 “무르시는 경제 살리기에 실패… 국민이 날 지지하는 이유다” 이집트 민중에게 경찰은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이지만 군인은 영웅이자 혁명의 수호자로 각인돼 있다. 무바라크가 물러나고 국민투표에 부쳐진 헌법개정안의 찬성률이 77%에 달했던 이유는 그 개정안을 투표에 부친 것이 바로 최고군사위원회였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첫 번째 대통령도 군인이었다. 위대한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중령이었던 1952년 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이집트아랍공화국을 건설했다. 그 전까지 우리가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자그마치 2300년이다. 기원전부터 계속돼 온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군인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지난 3월 군복을 벗기 전까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나의 형제들은 재판관, 공무원이 됐고 사촌은 아라베스크 양식 가구의 세계적인 명인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가업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나는 40년 이상을 군 기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군이 운영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군관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된 것이 23세 때였다. 물론 이집트 국민이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군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민은 지난해 민중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테러집단의 수괴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한 내가 이 땅에서 무슬림형제단을 뿌리 뽑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인데,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은 테러리스트들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공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무르시는 2011년 국민이 군과 함께 이뤄낸 혁명의 성과를 가로챘을 뿐 아니라 병든 이 나라의 경제를 살려내는 데 실패했다. 그는 정권을 잡은 뒤에 우리의 피가 그를 뒷받침해 줬다는 사실을 잊은 듯 행동했다. 무르시에 의해 국방장관이 된 나는 숨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 결국 그를 권좌에 세웠던 국민은 그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내가 무르시를 축출한 것은 국민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집트 국민은 나를 자애로운 아버지로 여긴다. 위대한 나세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특히 카이로의 거상인 내 배경과 경제적 능력 덕분에 부유층과 지배 계층이 나를 폭넓게 지지한다. 나는 벌써 사막지대의 넓은 땅을 기부했다. 물가가 내려가도록 정부에 주문했고 농경을 위한 수로 정비를 요청했다. 국민은 무르시가 재건에 실패한 나라를 내가 바로 세우고, 다시 전 세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 그것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미국이다. 내가 대통령이 된 이집트를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국의 속내를 뚜렷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신경쓰인다. 내 지지자들은 미국이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내가 무르시를 끌어내린 것을 쿠데타로 규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무슬림형제단의 지원자로 알려진 앤 페터슨 주카이로 미 대사가 떠난 자리를 빈 채로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선거가 끝나면 미국과 유럽은 내 뒤에 이집트 국민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수백만의 국민이 나에게 투표하고 나면 미국과의 관계는 따뜻해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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