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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지크공 의회 의장 사임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소련 연방 산하 타지크 공화국의 카카르 마크카모프 최고회의 의장이 31일 타지크 공화국 최고회의가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직후사임했다고 포스트 팍툼 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타지크는 아프가니스탄과 접경을 이루고있는 소련 연방내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인구 5백만명의 공화국으로서 얼마전 실패로 돌아간 보수강경파들에 의한 쿠데타 이후 소련 전역을 휩쓸고 있는 정치적 혼란을 역시 겪고있는데 마크카모프 의장은 고프르바초프 대통령 축출을 위한 이번 쿠데타와 지난 90년 2월에 발생한 타지크 공화국내에서의 충돌사태에서 미온적 태도를 취해왔다고 비난을 받아왔었다. 한편 수천 명의 군중들이 지난 29일 이후 타지크 공화국 수도인 두삼베시의 타지크 공화국 최고회의 의사당 건물밖에서 마크카모프 의장의 사임과 공산당 재산의압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왔다.
  • 「민주러시아」/「지역간 그룹」/옐친의 쌍두마차

    ◎옐친,그는 누구인가/그의 사람들/민주화·경제개혁,아이디어의 산실역/야코블레프·루츠코이·포포프등 「정치고수」 포진/야블린스키·샤탈린·실라예프등은 경제전문가 보리스 옐친을 도와 그에게 끊임없이 민주화와 개혁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온 사람들이 있다.새로운 러시아의 탄생은 옐친의 용기·결단력과 이들의 아이디어가 합쳐져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츠코이러시아공 부통령,가브릴 포포프 모스크바시장,현정치국원 야코블레프 등 정치적인 동지들과 경제면에서 개혁 아이디어를 제공해온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실라예프총리,우즈코프,볼스키 등이 모두 새로운 소련을 만들기 위해 옐친을 도운 숨은 공로자들이다. 옐친이 이들 개혁인사들과 관계가 깊어진 것은 1987년 공산당중앙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당시 보수파의 거두로 불리던 정치국원 리가초프를 비롯,보수파를 맹공한 뒤부터였다.옐친은 그 때문에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와 정치국원직을 박탈당했다. 옐친은 그의 자서전 「고백」에서 공산당의 동지들이 모두 등을 돌릴때모스크바의 개혁파 지식인들이 자기를 도왔다고 했다.이들 개혁인사들은 지난 89년7월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옐친을 도와 당선시킴으로써 그의 정치적 재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이때 「지역간 그룹」이라는 단체를 조직,그를 도운 인사들이 고안드레이 사하로프박사,역사학자인 유리아파나셰프,가브릴 포포프 현모스크바시장 등이다. 러시아공 의회에서는 역시 개혁파 인사들로 구성된 「민주러시아」대의원들이 그를 지지,지난 90년4월 옐친이 러시아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될때 큰 역할을 했다.이 기간동안 만난 인사들이 5백일 경제개혁 입안자인 스타니슬라프 샤탈린,외교전문가인 게오르기 아르바토프,경제전문가 스비야토슬라프 표도로프 등이다. 옐친과 소련개혁 지식인들의 만남은 상당히 의외의 측면이 강하다.옐친은 노동자 출신에 공산당 당료로 평생을 지냈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개혁파 지식인들의 구미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그런데도 이들이 옐친을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대신 실현시켜줄 가능성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혁지식인들로서는 자신들의 이상실현을 위해 옐친을 대신 내세웠고 옐친은 이 아이디어의 실현 기회를 훌륭히 제공한 것이다. 이들중 최근 정치일선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68)=한때 「고르비의 분신」으로 불리었으며 쿠데타 발생 직전에 공산당 탈당과 함께 옐친 진영에 합류.IMEMO(세계국제경제관계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역사학자로 연방최고회의 대의원. ▲그리고리 야블린스키(39)=젊은 경제학자로 4인경제위에 임명돼 향후 옐친의 경제정책을 입안해 나갈 인물.옐친의 개혁경제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고 5백일 계획 입안자중 한사람.지난해 러시아공 재무장관직을 사임,고르비의 지시로 미하버드대팀과 G­7회담에 제출할 고르비의 경제개혁안을 작성한 장본인.그러나 G­7 직후에 다시 옐친 진영에 복귀. ▲이반 실라예프(60)=앞으로 연방총리로서 옐친의 오른팔 역할을 할 인물.연방정부에서 산업부장관,부총리까지 역임.고르비의 측근으로 분류됐으나 러시아의회에 남아 싸움으로써 옐친과 급속히 가까워졌다는 후문.지난 21일 고르비 영접단 대표로 크리미아까지 갔던 인물. ▲가브릴 포포프=모스크바시장.인민대표회의내 개혁파 모임인 「지역간 그룹」발기인으로 급진개혁을 주장해온 경제학자.모스크바시의 독자 경제개혁을 추진,옐친의 신임을 받은 인물. 보수파에 몸을 담고 있다가 뒤늦게 옐친 진영에 합류한 인사로는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러시아공부통령과 바딤 바카틴 신임 KGB의장이 있다. ▲루츠코이(44)=공산당내의 개혁세력을 주도하다 지난 6월 러시아공 대통령선거때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발탁.지난 3월 보수파공산당 출신 러시아의회 대의원들의 옐친 축출 기도때 옐친을 지지,이를 저지시킨게 결정적 인연이 됐다. ▲바딤 바카틴(54)=고르비 밑에서 내무장관재직때인 지난해 12월 발트해 공화국들에 대한 무력사용을 거부,내무장관직에서 해임되면서 옐친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밖에 하즈블라토프 러시아공 최고회의의장,옐친의 수석보좌관인 셰르게이 스탄케비치,경제전문가로 유리 루즈코프,아르카디 볼스키,블라디슬라 블라프등이 주목해야 될 옐친의 브레인들이다.
  • 소 쿠데타 주역 사형가능성/타스통신 전망

    ◎“비상위원등 11명… 반역죄 적용”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특약】 고르바초프 축출을 기도한 지난주 쿠데타의 주도자들이 「조국배반」죄목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소련관영 타스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이들에 대한 기소는 러시아공화국 형법 64조에 의거하고 있다고 이 통신은 덧붙였다. 【모스크바연합】 쿠데타사건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스테판코프 러시아공화국 검찰총장은 27일 현재 투옥중인 사건 관련주모자는 파블로프 전총리,크류치코프 전KGB의장,야조프 전국방장관,세닌,티자코프 전국가비상위 위원,스타로드브체프 전국가비상위위원,바클라노프 전국가비상 위원,볼딘 대통령 비서실장,바레니코프 전지상군총사령관,플레하노프 전KGB경호국장,그루시코 KGB 제1부의장 등 모두 11명이라고 밝혔다. 스테판코프 검찰총장은 이들에 대한 심문이 진행중이며 조만간 사건전모를 공식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모스크바 교외 삼림지대의 한 비밀가옥에 감금됐다가 26일 모두 감옥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감옥의 정확한위치는 확인되지않고 있다.
  • 군 지휘부 전면 숙청/고급장교 80% 교체/신임 소 국방 밝혀

    【모스크바 AP 연합】 예프게니 샤포슈니코프 소련 신임 국방장관은 25일 소련군 지휘부에 대한 전면 숙청작업을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샤포슈니코프장관은 이날 한 TV회견에서 공산당을 군부에서 축출하려는 미하일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조처에 지지를 표명하고 고급 장교들의 80%를 교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소 연방총리/이반 실라예프

    ◎러시아공 총리 지낸 시장경제 신봉자/항공학도 출신… 「4인경제위장」도 겸임 불발쿠데타로 축출된 발렌틴 파블로프에 이어 새 연방내각의 총리에 지명된 이반 실라예프(61)는 지난 6월부터 러시아공화국 총리를 역임해온 시장경제의 확고한 신봉자이다. 그는 또 소련경제의 운영방향을 결정할 4인 경제위원회의 위원장도 맡게되므로 앞으로 소련경제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항공학을 전공한 실라예프는 29세때인 59년 공산당에 입당,74년 소련항공공업차관을 역임한 이래 기계공업장관(80∼81년)항공공업장관(81∼84년)등 경제관련각료를 두루 거친후 85년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는 소련각료회의부의장직을 역임했으며 89년 7월 니콜라이 리슈코프 총리내각에서 부총리에 올랐다. 86년 체르노빌핵사고에 대한 정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지난6월 「시장경제로의 빠른 이행」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로서의 면모가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눈에 띄어 러시아공화국 총리로 발탁됐었다.
  • “중국은 사회주의 고수/외국의 체제간섭 불용”

    ◎강택민 총서기,소 정변이후 첫 언급 【북경 로이터 연합】 소련에서의 공산주의 파괴 이후 중국의 고립이 심화하는 것을 인식한 강택민 중국공산당총서기는 각국은 사회주의 체제에 간섭해서는 안되며자국의 문제에나 신경을 쓰라고 말했다. 강총서기는 23일 중국을 방문중인 소 몽 미얀마 군사정권지도자에게 『일국의 사회제도 및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나라 국민에 달린 것이며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용납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24일 전했다. 강총서기의 이 발언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축출하려던 소련 강경파의쿠데타가 실패한 이후에 나온 중국지도자의 첫 발언으로 주목된다.
  • 미 국방 정보국이 분석한 「3일정변」

    ◎“쿠데타 D데이는 원래 20일이었다”/고르비가 눈치채자 하루 앞당겨 단행/군부 이견 극심… 옐친 체포·거점장악 지연/야조프등 일부는 작전스케줄 몰라 소련강경파들의 쿠데타는 사전에 치밀한 준비없이 다급하게 진행된데다 정보가 미리 새나가 예정시간을 하루 앞당겨 진행케 됨에 따라 주동자들간에 손발이 맞지 않아 실패했다고 미국방정보국(DIA)은 분석하고 있다. 미외교정책위원회의 피터 슈바이저연구위원은 22일 뉴욕타임스에의 기고문에서 소련 쿠데타의 실패원인을 두명의 DIA 고위소식통을 인용,이같이 밝혔다. DIA의 분석에 따르면 이 쿠데타는 적어도 초기단계에서는 성공이 틀림없었다는 것이다.소련 내무부와 KGB·군부등 쿠데타 주동세력들은 원래 하루 늦은 20일로 거사일을 계획했으며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시간계획을 변경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으리라는 것이다. 슈바이저는 이들의 거사과정에서 있었던 의문점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왜 군인들이 19일 고르바초프 구금후 4시간이 지나도록까지모스크바로 향하지 않았는가.왜 쿠데타세력에 심각한 위협이된 옐친을 체포하지 않았는가.왜 모스크바 주요지역에 쿠데타세력에 충성하는 부대 대신에 옐친에게 동정심을 가진 지휘관들의 부대가 동원됐는가.왜 쿠데타지도부가 그렇게 빠르게 와해됐는가. DIA의 분석은 고르바초프가 아마도 크리미아에 있는 동안 쿠데타를 경고받았으며 그 사태를 막기위해 원래 역사적인 신연방조약을 체결키로한 20일까지는 크렘린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던 그가 19일 갑자기 모스크바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거사날이 하루 당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쿠데타 공모자들은 이때문에 서둘러 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옐친 추종자들에 의해 지휘되는 것으로 알려진 모스크바 인근 주둔부대들을 러시아공화국 건물을 경비케하는등 주요작전에 투입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것이다. 이사실은 또 고르바초프의 구금과 모스크바에서의 첫군사작전 사이에 왜 4시간의 갭이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될것이다.내무부와 KGB에 소속된 충성스러운 정예부대들이 출동하는데는그로부터도 10시간이 더 걸렸다. 주동자들의 결속은 쿠데타가 계획보다 빨리 시작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을 비롯한 다른 군지휘관들은 아마 이미 작전이 개시된 후까지도 앞당겨진 시간계획을 알지 못했던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야조프 국방장관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쿠데타가 시작된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냈는데 이는 그가 국가비상사태위의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축출을 발표한 20일의 기자회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과 이어서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비상위 위원직을 사퇴했다는 발표에 대한 설명이 될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거사계획을 미리 귀띔해준 사람이 바로 주동 핵심인 야조프장관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고르바초프대통령이 모스크바로 돌아가려고 시도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크리미아에서 두사람이 만났다는 것이다. 또 주동자들의 군사작전이 제멋대로 진행됐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군대들은 고르바초프 구금 이후 7시간이 지나도록까지 러시아공화국의사당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여 옐친이 자유롭게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용기를 불어넣을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더욱이 옐친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파견된 군부대 가운데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휘되는 부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쿠데타 주동자들이 얼마나 치밀하지 못했는가를 알수 있다.막상 옐친을 구금할수 있는 군대들은 10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고 그들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의사당빌딩이 수천명의 옐친 지지시민들에 둘러싸여 손을 쓸수가 없었다. 얼마전부터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경고가 과거 고르바초프의 오른팔이었던 전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전보좌관 야코블레프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KGB와 내무부·군부의 합동훈련이 실시되고 있다는 명백한 근거를 토대로한 것이었다.그러나 그 부대중 이번 쿠데타에 참여한 부대는 거의 없었으며 그들이 참여치 못한 것은 분명 계획된 것이 아니고 주동자들의 혼선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소련의 쿠데타는 사전에 잘 계획된 거사가 아니고 성급하게 급조된 것이었으며 진행과정에서 주동자들의 결속이 와해,실패하게 됐다는 것이다.
  • 소 반전드라마와 북한 대응

    ◎“기대만큼 허탈”… 희비 엇갈린 평양/총리회담등 대남정책 거듭 번복/「내키지 않는 남북대좌」 자인한셈/당분간 「문단속」강화… 「조정기」 거칠듯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복귀로 마무리된 소련의 정변은 엉뚱하게 한반도에 그 여파를 미쳐 남북고위급회담의 연기라는 불똥을 남기었다. 소련 군부강경파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북한은 사태추이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 반응을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남북대화에 임하는 기본자세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주고 말았다. 이는 곧 고위급회담이 재개된다해도 생산적인 대화가 어려울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회담전망을 낙관하고 있는 일부 정책담당자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되고있다. 북한은 지난 19일 「고르비 실각」사실이 외신에 입전된지 불과 6시간여만인 하오 7시이를 중앙방송의 비정규뉴스를 통해 이례적으로 신속히 보도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을 앞세워 김일성주석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고르비의 축출에 대해 고무된 감정을 솔직히 표출했다. 이어 같은날 하오 9시 방송을 통해 콜레라발생국가 주민의 입북을 제한할 것이라는 보건부대변인의 담화를 보도,일종의 복선을 깔았다. 북한은 소쿠데타 발생 하루뒤인 20일 로동신문을 통해 『사회주의 승리는 역사적 필연』이라며 『그 누구든지 역사발전법칙에 따를 때는 승리하지만 이 흐름에 역행할때는 파멸을 면치 못한다』고 호언했다. 북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날 상오10시 판문점에서 있은 제4차 고위급회담 남북책임연락관 접촉에서 「남쪽에서의 콜레라발생」이라는 절묘한 이유를 내세워 27일로 다가온 평양회담을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소사태에 고무된 북한으로 볼때 열악해진 국제적 입지를 반전시킬 수 있는 호기를 맞고 있는 상태에서 탐탁지 않은 남북대화에 임하기보다 좀더 사태가 명료해질 때까지 시간을 끌자는 입장이 분명해진 것이다.북한은 그러나 21일 쿠데타발생 3일이 지나면서 소련전역에서 수십만명의 국민들이 반쿠데타시위를 벌이는등 사태가 역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일체 언급을 회피한채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발표한 「정령」과 모스크바위수사령관의 통금령만을 전하는등 쿠데타주도세력에 대한 기대를 떨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21일과 22일 판문점에서 두차례의 고위급회담 남북책임연락관접촉이 있었으나 북측은 20일 내놓은 「판문점개최」만을 거듭 주장할뿐 제4차 평양회담의 개최반대인지,연기요구인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1일밤 소쿠데타가 실패로 끝났고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졌으나 북한이 이를 보도한 것은 하룻밤이 지난 22일 낮12시 뉴스에서였다.쿠데타 실패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않은채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성명을 발표,정상적인 대통령의 직무에 복귀하겠다고 밝힌 사실만을 짤막하게 5번째 뉴스로 보도했다. 쿠데타실패뉴스를 접한 김일성주석이 기대만큼이나 큰 허탈감에 빠져 있으리라는 일반적 예측과 달리 예상보다 빠른 반응이었다. 곧이어 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이 22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만나 고르바초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이 역시 이례적으로발빠른 행보였다. 더 나아가 북한은 23일 열린 남북판문점 책임연락관 접촉에서 「판문점개최」를 주장해 온 제4차고위급회담을 오는 10월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의,남북합의를 이끌어냈다. 김일성주석이 지난달 24일 조·일우호촉진의원연맹대표단과 대좌한 자리에서 밝혔듯 북한이 다시 『세계조류에 맞춰 현실적인(대외)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음을 자인한 셈이다. 김주석은 그러나 소련의 격변이 「주체사상」과 같은 위대한 사상이 없는데서 비롯됐다는 말을 내세워 대내적인 결속의 고삐만은 늦추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소 사태 보도태도 일 자 보 도 내 용 19일 고르비 실각,비정규 뉴스로 신속보도. 콜레라 발생국가 주민 입북제한 발표 20일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판문점개최 주장 21일 소 국가비상사태위 「정령」만 보도 22일 고르비 직무복귀 간단히 보도 김영남외교부장,고르비지지 표명 23일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10월 평양개최 제의
  • 빛바랜 고르비… 「옐친시대」보인다

    ◎3일 정변이후 권력구조 어떻게 바뀔까/고르비,사임·축출 가능성 거의 없어/당분간은 견제­협조관계 지속될듯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떠오르는 별」로 각광받고있는 가운데 실각했던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이 복귀함에 따라 이들 양자간의 위상이 어떤 방향으로 정립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있다. 이들의 위상은 고르바초프가 계속 직무를 수행하거나 스스로 그만두거나 아니면 쫓겨나는 3가지 경우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결론적으로 말해 두사람이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비록 기간이 어느정도 될지는 모르지만,각자의 위치에서 경쟁속의 협조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큰 방향에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협조에 임하는 자세는 상당히 달라지리라는게 지배적인 전망이다.예전에는 고르바초프가 한수 위인듯한 입장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이제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옐친의 우위로 역전되는 분위기에서 역할분담이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번 사태를 통해정치지도자로서 옐친의 입지는 대단히 강화됐다.쿠데타 저항운동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휘한 결단과 추진력은 대다수 소련국민들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서방각국의 찬사를 얻기에 충분했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통치능력에 의문이 제기되는 등 정치적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그의 복귀를 가능케 한 옐친과 소련내 민주세력,미국 등 서방세계에도 앞으로 갚아나가야 할 빚을 진 셈이다. 포린 어페어즈지의 하이랜드편집국장은 『고르바초프가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전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브레진스키 전미백악관안보담당보좌관과 주르칸스 리투아니아공화국 외무장관이 『이제 고르바초프의 시대는 끝났고 옐친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연방조약이 체결된 뒤 연방대통령 직선이 실시될 경우 고르바초프가 연임에 도전할지,옐친이 나설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앞장서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도하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재출마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공화국으로의 권한이양을 착실히 한다면 차기 연방대통령 직선에서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수차 밝힌 바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이에 역행하지 않는한 당장 나서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신연방조약 체결후 허수아비 연방대통령보다 소련 국토의 4분의3을 차지하는 막강한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 자리가 더 실세라고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 정변을 거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래도 연방의 대통령을 해보겠다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다. 고르바초프가 자발적으로 멀지않아 대통령직을 내놓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차기선거에 출마하는 경우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가능성이 높지않다. 고르바초프가 옐친에 의해 축출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국내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고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군과 KGB 등 아직도 옐친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많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와 같은 중도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부시도 『옐친이 고르바초프를전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있다』고 밝혔다. 두사람은 지난 31년 출생한 동갑내기로 각각 지방공산당 제1서기로 있던 70년대부터 가까이 지내왔다.무명의 옐친이 지난 85년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로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한 것은 공산당서기장으로 먼저 출세해있던 고르바초프의 은덕에 힘입은 것이었다.그러나 개혁속도 부진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년11개월만에 해임된 뒤 재기,인민대회 대의원과 러시아공화국대통령으로 급성장해 급기야는 실각당한 고르바초프를 구원해내기에 이르렀다. 옐친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고르바초프의 운명이 이제는 거꾸로 옐친의 의지에 달려있게 된 것이다.
  • “고르비 맞이”주가 수직상승

    ◎국내/전장부터 “사자”폭주… 26.88P 치솟아/세계/미·일등 일제히 폭등… 달러·유가는 하락 주가가 단숨에 26포인트 뛰어 7백10선에 올라섰다. 22일 증시는 소련의 쿠데타실패와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복귀보도로 사자주문이 폭주하면서 종합주가지수가 전날보다 26.88포인트 오른 7백16.94를 기록했다. 이같은 주가상승폭은 지난 2월18일의 29.18포인트,1월17일의 28.08포인트에 이어 올들어 세번째로 큰 폭이다. 이날 개장과 함께 사자는 주문이 폭주,증권전산의 전산망이 마비돼 상오11시에 개장된 전장은 소련쿠데타의 실패와 고르바초프대통령의 복귀사실로 「상한가라도 사자」는 주문이 밀려 금융·무역·건설등 트로이카주를 중심으로 거의 전업종이 올랐다. 후장들어서도 상승세가 지속돼 트로이카주와 도매업종등의 대형주는 매물이 없어 거래가 이뤄지지 않을 정도였다. 증권·건설등 3백65개 종목이 상한가를 기록한 것을 포함,7백35개 종목이 올랐고 하한가 15개종목등 51개 종목이 내렸다. 거래량 3천8백40만주에 대금은 6천1백14억원에 달했다. 【뉴욕·도쿄 AP 로이터 연합】 소련 쿠데타가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세계증시는 21일 폭등세를 보였으며 달러값과 유가는 하락했다. 뉴욕 증시는 이날 다우 존스 지수가 88.10 포인트(3%)상승한 3천1.79에 폐장됐는데 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축출 소식이 처음 알려진 19일 초래된 약 70 포인트의 손실을 단숨에 회복한 것이며 다국적군의 걸프전 승리가 낙관됐던 지난 1월 17일에 이어 금년들어 두번째로 큰 폭등세를 기록한 것이다. 19일 크게 상승했던 달러값은 이날 독일 마르크화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지기 시작,전날의 달러당 1.7955 마르크에서 달러당 1.7450 마르크로 폭락했다. 엔화에 대한 달러의 교환 비율은 19일의 1백37.10엔에서 1백36.50엔으로 떨어졌다.소련 쿠데타로 오름세를 보였던 유가도 전날에 비해 배럴당 85센트가 하락한 21.55달러에 거래됐다. 한편 지난 19일 니케이 지수가 1천3백 포인트 하락,사상 5번째로 큰 폭락세를 기록했던 도쿄 증시는 20일과 21일 있었던 이틀간의 주가 반등에 이어 쿠데타 기도 좌절 소식이전해진 22일 개장초부터 폭등세를 보였다. 니케이 지수는 이날 전날보다 4백64.17포인트(2.1%)나 폭등,2만2천5백15.77을 기록했다.
  • 총리회담장 변경요구/북한,소 정변서 영향/소 방송주장

    【내외】 북한이 제4차 남북총리회담의 장소변경을 요구하고 나선것은 소련에서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축출 기도사건발생 때문이었으며 북한은 소련정세가 안정될때까지 총리회담을 연기하려는 속셈이라고 모스크바방송이 22일 주장했다.
  • “승리” 외치며 붉은광장서 촛불축제/환호의 물결… 모스크바 표정

    ◎“KGB 없애라”… 창설자 동상을 부숴/“이번 쿠데타는 3번째 기도” 옐친 주장 ○…10만명이상의 러시아인들은 22일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저지를 축하하는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러시아 최고회의빌딩 앞에서 열린 이날 집회에서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은 쿠데타의 실패는 피플파워의 승리라고 선언.러시아공화국은 이날 70년간의 공산주의시대 종언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붉은색 공화국기를 러시아혁명 전의 백·청·적 3색기로 공식 교체했다. 모스크바시민들은 최고회의 빌딩앞에서의 집회를 마치고 붉은 광장으로 행진,이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이들은 「옐친」과 「러시아」를 연호하며 강경보수파들의 쿠데타 저지를 축하했다. ○…약5천명의 군중들이 22일 모스크바에 있는 KGB 본부앞 광장에 집결,반KGB 시위를 벌이고 KGB를 창설한 제르친스키 동상을 철거하기 시작했다고 타스통신이 보도. ○“옐친에 노벨평화상을” ○…유럽의회의 기독민주그룹 지도자는 22일 소련 러시아공화국의 보리스 옐친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할 것을 제안했다. 독일의 에곤 클렙슈씨는 유럽의회지도자들의 비상회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한 3일간의 쿠데타에 저항을 선도한데 대해 옐친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동유럽에서 강경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평화적 혁명을 이루는데 기여한 정책으로 이미 노벨평화상을 받은바 있다. ○…소련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의 기자들은 22일 동지 편집국장 니콜라이 예피모프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그를 파면하기로 결의했다고 이즈베스티야의 막심 유신기자가 말했다. 유신기자는 이즈베스티야의 기자들이 이날 총회에서 또한 앞으로는 이 신문의 1면 머리에 있는 마르크스주의 슬로건인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단결하라」라는 문구를 삭제하기로 결의했다고 전했다. 그는 AFP통신에 기자총회는 이날 「예피모프가 쿠데타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면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타스,사전에 알았었다○…소련 관영 타스통신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실각되기 하루전인 지난 18일 이미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이 통신사의 한 간부가 말한 것으로 모스크바의 네사비시마야 가제타지가 보도. 이 신문은 텔레팍스를 통해 배포된 호외판을 통해 타스통신의 한 간부가 겐나디야나예프 부통령의 성명서 전문과,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지난 17∼18일 밤 타스통신에 소개됐음을 밝혔다고 전했다.이 성명은 지난 19일 아침 공개됐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의 쿠데타저항본부인 의사당을 지키는 군인및 민간들은 쿠데타 실패 소식에도 불구하고 21일 저녁 여전히 경계를 펴고 있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축출하려다 실패한 이른바 「쿠데타 음모자들」은 벽에 세워놓고 총살을 해야 할 것이라고 콘스탄틴 코베츠 러시아공화국 국방장관이 21일 밝혔다. 지난 20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이날 러시아공화국 의사당 복도에 집결해 있던 일단의 기자들에게 이같이 밝히면서『옐친 대통령이 나에게 장관직을 제의했을 때 내가 수락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만약 쿠데타 주동자들이 그들의 음모가 실패해 체포될 경우 이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복귀와 쿠데타 주동자들의 체포를 충심으로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지난 19일 실각되기 이전에 이미 2건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고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21일 공개. 옐친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공화국 의회에서 대의원들에게 첫번째 쿠데타 음모는 예두아르트 세바르드나제 전외무장관이 지난해 12월 장관직 사퇴연설을 통해 소련에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성 발언으로 실패했으며 두번째 쿠데타는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가 소련 최고회의에 대해 자신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설득했던지 난 6월에 있었다고 말했다.
  • 고르비,지도부 개편/옐친 연정제의… 오늘 요직인선

    ◎새국방·KGB의장·내무 임명/“공산당도 개혁세력으로 교체”/고르비 회견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모스크바로 돌아와 집무를 시작한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은 22일 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과 함께 공석이 된 지도부의 요직인선에 착수,1차로 국방장관에 미하일 모이세예프참모총장을 임명했다.또 국가보안위원회(KGB)의장에 레오니드 셰바르신을,내무장관엔 바실리 투르신을 발령했다.이에앞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은 국방차관에 보리스 파안코프대장을 임명했는데 타스통신은 쿠데타 주동자의 체포로 자리가 빈 일부 핵심요직의 임명이 「임시적」인 것이라고 전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날 모스크바로 귀환한 뒤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산당안의 반동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지지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정변을 계기로 급부상한 옐친러시아공대통령은 보수파 제거에 본격 착수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옐친대통령은 그와 고르바초프대통령이 23일 만나 정부구성문제를 비롯한 「대단히중요한」사안들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3인의 요직인사와 관련,『앞으로 러시아공화국이 연방정부구성에 보다 많이 대표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 이유는 어려운 시기에 민주주의를 수호한 것이 러시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옐친은 또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연금돼있었던 크리미아휴양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직후 그에게 자신의 지지세력들과 연정을 구성할 것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모스크바 라디오방송이 보도했다. 이에앞서 고르바초프대통령은 모스크바공항에서 크렘린관저로 돌아온 직후 발표한 첫 성명에서 『나를 축출하려던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승리』라고 강조하고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소련은 큰 재난을 겪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부시 미국대통령은 그동안 주저해왔던 대소직접경제원조 제공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고 유럽공동체(EC)와 일본등도 소련에 대한 지원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 소 쿠데타 실패/고르비 대통령직 복귀

    ◎비상위 8인 체포,곧 재판회부/군 철수… 통금등 포고령 무효화/모스크바 이기동특파원/옐친 급부상… 오늘 긴급간부회의 소집 유혈사태까지 빚으며 내란위기로 치닫던 소련의 반개혁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다.이에따라 크리미아휴양지에서 연금상태에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날하오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며 연방최고회의는 그의 대통령직을 복권시켰다고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쿠데타 주도세력인 8인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20일 해산됐고 8인위원들도 대부분 체포되거나 도피한 것으로 전해졌다.이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될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와 발트3국을 비롯한 비상사태선포지역에 배치됐던 모든 연방군 병력도 이날 철수를 시작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 전역은 축제분위기를 이뤘다. 연방간부회의는 22일 긴급회의를 열고 향후 정치일정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쿠데타의 실패에 따라 반쿠데타 선봉에 섰던 옐친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모스크바 AP 연합 특약】 고르바초프는 21일 모스크바로귀경길에 올랐다고옐친러시아공화국대통령의 보좌관이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연금상태에 있던 크리미아반도의 휴양지로부터 루키야노프 연방최고회의 의장등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 AP 연합】 소련 연방최고회의 지도자들은 21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축출기도 쿠데타를 비난했으며 쿠데타 지도자들에 의해 내려진 모든 포고령을무효화했다고 연방최고회의의 유리 카리아트킨 대의원이 말했다. 그는 연방최고회의가 모스크바의 야간통행금지령과 독립적인 언론매체의 보도금지령 등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내렸던 모든 포고령을 무효화했다고 덧붙였다. 【모스크바 타스 AFP 연합】 소련 국방부는 모스크바를 비롯,비상사태가 선포된지역에 배치된 모든 연방군 병력에 대해 철수를 명령했다고 소련관영 타스통신이 21일 보도했다. 타스통신은 국방부가 비상사태 선포 지역으로부터 모든 부대와 분견대 병력의철수를 이행토록 하는 결정을 채택했다고 전했다. ◎TV 정규방송/언론검열 해제 【모스크바 AP 연합】 쿠데타 세력들이 모스크바를 떠남에 따라 쿠데타발생이후 방송이 중단됐던 소련의 TV와 라디오가 21일 방송을 재개했으며 관영 타스통신은 독립적인 출판물에 대해 내려졌던 출판금지령이 해제되고 있다고 전했다.
  • 쿠데타 실패이후의 정국풍향은(크렘린 대지진:3)

    ◎페레스트로이카 가속이 붙는다/권력구조 변화등 후유증 뒤따를듯/서방의 경원 가시화… 동서화해 공고히 소련의 강경보수파들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막을 내린것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좌초의 위기에서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잠시 거꾸로 가던 「크렘린의 시계」가 멈추고 소련은 다시 페레스트로이카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자유의 실체를 체험한 소련국민들이 보수파를 거부하고 있음이 이번 쿠데타를 통해 실증됨으로써 소련의 개혁과 개방은 더욱 촉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쿠데타 실패는 오랜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았던 소련국민들의 의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련은 이같은 국민들의 의식변화를 바탕으로 보다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소련의 보수적 성향은 아직도 매우 깊다. 그러나 이번 강경보수파들의 쿠데타 실패는 소련 사회가 민주적 체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쿠데타의 후유증에서벗어나 소련이 안정을 되찾은 후 소연방들은 예정대로 신연방조약을 체결할 것으로 보인다. 신연방조약 체결을 거부한 발트해 3개 공화국은 비롯 6개 공화국이 조약체결을 할지는 미지수이지만 각 공화국간의 관계는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수 있다. 고르바초프를 축출한 강경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한후 일단 고르바초프가 다시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복귀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러나 이번 쿠데타로 큰 상처를 입었다고 볼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많은 소련문제 전문가들은 고르바초프는 보수와 개혁파간의 완충역할을 하며 행정수반으로서의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전부일 것으로 전망한다. 고르바초프의 시대가 다음 선거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않다. 반면 고르바초프의 계속 집권가능성을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국제정치에서의 고르바초프의 위상과 그의 개혁정책을 감안할때 소련국민들이 그의 계속집권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들은 이번 쿠데타로소련에서의 그의 비중이 더욱 중요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함께 향후 소련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지도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다. 옐친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의 성공을 저지한 「피플파워」의 구심점이었다. 옐친은 쿠데타로 소련이 침묵할때 분연히 일어나 쿠데타를 비난하고 반쿠데타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소련국민들과 서방세계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옐친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옐친이 집권할 경우 소련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보다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옐친은 그동안 소련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빠른 시장경제도입 뿐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옐친이 주장하는 급진경제개혁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소련의 경제개혁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접목시키는 「경제실험」이 아직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난 70년간의 공산주의 경제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서방세계도 소련의 경제개혁을 보다 적극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부 국제 정치학자들은 서방세계의 미온적인 대소 경제지원이 소련의 경제난을 악화시키고 쿠데타로까지 이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도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에 보다 관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소련의 「불확실성」 때문에 대소 경제지원을 주저해왔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으로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선진국들도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에 인색했었다. 소련의 강경보수화 움직임이 일단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서화해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소련의 쿠데타로 한때 냉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렸었으나 냉전구도는 일단 청산되었다고 볼수 있다. 소련 지도부가 앞으로 어떤 외교정책을 추구할 것이냐에 따라 국제정치 기류가 크게 바뀌겠지만 소련이 보다 개방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국제정치의화해무드는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의 「피플파워」는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거부했다. 소련국민들은 보다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지도가 하나의 「민주주의」 세계로 통합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빗속의 모스크바 온통 환호물결/이기동특파원 「대반전 현장」서 급전

    ◎“시민의 승리… 동조세력 처벌 안해”/옐친/검열중단에 “고르비 축출항의”기사/프라우다/수㎞ 탱크행렬 사라지자 시민들 안도 ○…소련군 탱크들이 물러가고 쿠데타를 주도한 8인이 비행기로 도주 혹은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21일 하오 러시아공화국 정부청사앞 광장에는 여전히 10여만명의 시민들이 운집. 정문앞에 모인 사람들은 현관위에 설치된 대형확성기를 통해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대의원들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소련군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을 국가유공자로 간주해 그 가족들에게 공화국 정부에서 연금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 또 쿠데타 세력들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에 진주했던 군인들을 비롯,KGB·경찰 등 모든 쿠데타 동조세력들에 대해 일체의 처벌도 하지 않겠다는 옐친의 포고령도 발표. ○…정부청사안 프레스센터로 들어가는 정문입구에서는 군복을 차려입고 각목들을 든 러시아시민군들이 출입자들을 일일이 체크했다.기자가 프레스 카드를 내보이고 출입을 요청하자 가방을 열어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한 뒤에야 들여보내 주었다.이런 절차를 3번이나 거친뒤에야 프레스센터내 공보책임자에게 안내됐다. 그러나 이 공보책임자는 『모든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어서 2∼3일 뒤에나 정리된 정보들을 내놓을 수 있다』면서 일체의 코멘트를 피했다. 청사구내와 뒷마당에는 간밤의 긴장을 말해주는 잔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수백개가 됨직한 보드카 빈병들이 흩어져 있고 천막·음식찌꺼기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21일 하오2시쯤 모스크바 남서쪽 외곽도로에는 병영으로 복귀하는 탱크 수백대가 수㎞에 걸쳐 목격됐다.하오4시가 되자 철수가 완료된듯 시가지에서 쿠데타군의 탱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러시아공 정부청사로 가는 칼리닌가 주변에는 옐친지지 탱크들이 백·청·적 3색의 러시아국기를 당당히 내걸고 서 있었다.탱크병들은 시민들이 건네준 화환들에 싸여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하오들어 비도 그치고 칼리닌 다리위에는 바리케이드도 많이 치워졌으며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긴장감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21일 쿠데타 발생 이후 처음으로 언론검열을 중단하라는 호소문과 함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축출에 항의하는 상당량의 기사를 게재하는등 크렘린 당국과의 전통적인 유대를 단절하는 등 이례적인 태도를 취해 눈길. 쿠데타 지도부에 의해 발행이 허용된 7개 매체들 가운데 하나인 프라우다지는 1면에는 쿠데타 지도부가 발표한 통금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시위에 대한 기사를 동시에 게재. 프라우다는 이와함께 강경파들의 권력장악에 대한 항의를 호소하는 옐친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공정부대 요원들이 러시아 정부청사에 집결하고 있다고 전언. 프라우다는 이어 고르바초프의 축출과 관련,런던과 파리,본,워싱턴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게재해 외국의 비난을 무시한 관영 타스통신과는 대조적인 모습. ◎철수군인들 “우린 영원히 떠난다” ○…성바실대성당과 시청 등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 배치돼있던 소련군탱크 및 병력이 21일 대부분 철수해 고리키가의 차량통행이 재개되는 등 모스크바 시내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연도에 나온 시민들은 철수하는 군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군인들도 『우리는 영원히 떠난다』고 말했다. ○…보리스 옐친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중심으로한 쿠데타반대세력들은 이들 「비상위」8인을 국법질서문란을 이유로 적법절차에 따라 재판에 회부할 것이 확실하다.옐친등 개혁주의자들은 이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초헌법적이며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해온 이상 8인을 재판에 회부,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운 「강제명령」만으로는 산적한 소련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전세계에 알릴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쿠데타반대세력의 중추역할을 한 러시아공의회 건물을 에워싼 채 시위군중들과 충돌,4명의 소련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소련군병사들에 대한 처벌은 없을 것 같다. 옐친은 이와관련,『이들은 상관의 명령에 복중했을 뿐』이라고 지적,『소련헌법을 준수한다면 처벌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 발트해연안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이어 라트비아 공화국도 21일 소련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인근 리투아니아 공화국 대변인이 말했다. 이 대변인은 현재 라트비아 공화국과 연결되는 모든 전화통화가 두절됐으며 라트비아 공화국 의회에 의해 의결된 이 독립선언은 리투아니아 공화국 자체의 통신망을 통해 전해졌다고 밝혔다.
  • 소 강경파,「국민의 뜻」 못읽었다

    ◎엉성했던 조직력… “수준미달의 거사”/“실패원인” 미 시각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성공 확률은 50%를 넘지 않는다』이것이 쿠데타 발발 사흘째를 맞은 미국의 많은 관리들의 예상이다. 따라서 부시 미국대통령의 잇따른 강경발언은 감정적이고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쿠데타가 종국에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실질적인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관측되고 있다. 즉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소련 쿠데타의 실패를 예상하고 반쿠데타전략을 세운 것으로 대부분의 언론들은 보고 있다. 쿠데타를 일찍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충분한 조직과 무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하는 최초의 생각이 크게 빗나갔기 때문. 쿠데타 중심세력의 결집력이 예상외로 단단하지 않다는 진단은 거사당일인 19일부터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우선 쿠데타 지도부안의 분열 또는 충분히 계획이 안된 임시변통의 조치로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발틱해안 여러 공화국들에의 쿠데타군 배치가 엉성하며 엄격한 비상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더욱이 모스크바에 배치된 군대의 일부는 배치된 뒤 친옐친으로 태도를 바꾸기까지 하고 있다.미국관리들은 『아직까지의 사태진전만 가지고 말할 때 이것은 고전적인 쿠데타와는 다르다.탱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쿠데타 발표가 있은지 몇시간이나 지난 뒤였다』는 말로 실패를 단정했다. 또 하나의 실패징조는 쿠데타지도자들이 소련의 여러 공화국 지도자들을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일부 공화국 지도자는 이미 반쿠데타 입장을 밝혔으며 다른 지도자들중 상당수도 그 뒤를 이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라디오와 TV 등의 언론에 대한 통제도 보통의 쿠데타 수준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모스크바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우방을 독려하여 쿠데타 지도자들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즉 미국은 쿠데타 지도자들에게 경제원조를 잃게될지 모르며 국제적인 미아가 될 것임을 믿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 ◎경제난 해결책·정통성 미비가 치명적/불 르몽드지 분석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 몽드지는 21일 소련전문가 미셸 타튀의 분석을 인용,이번에 고르바초프를 축출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르 몽드지의 모스크바특파원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소련문제전문가인 타튀는 르 몽드지 기고를 통해 이번 쿠데타상황이 지난 64년의 흐루시초프 실각 당시와 판이하고 또 쿠데타 주도세력이 경제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갖고있지 못한데다 군부내의 이견등이 겹쳐 결국 성공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흐루시초프 실각 당시 소련의 정치·경제상황이 현재와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중국 천안문사태때의 반정부세력도 지금 소련의 경우와 비교하면 훨씬 미약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국내부문제도 현재 소련에 비해 덜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 타튀는 우선 현 쿠데타세력이 흐루시초프때와 비교해 「권위성」「신뢰성」,그리고 무엇보다 「정통성」이 결여돼 있다고 전제,64년 당시 흐루시초프 축출세력은 공산당 중앙위원회라는 제도의 틀내에서 일을 벌였으며 또 소련최고회의가 이를 승인하고 당사자인 흐루시초프도 자신의 사임에 동의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경우 쿠데타 인정을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상사태를 선포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역시 헌법상 규정되지 않은 기관이며 이는 공산당내에서도 합법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타튀는 주장했다. 쿠데타 주동세력들은 또 최대한 지지를 긁어모으기 위해 「법과 질서」「범죄와 부도덕 비난」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나 이는 스탈린­브레즈네프 시대에 성행했던 「러시아인 주도 질서」를 연상케 하는 「향수적」인 것으로서 다른 민족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타튀는 군부내 이견을 지적,구세대 고위간부와 중간장교·사병 등 군구성원중 중간장교와 사병은 이제 정치보다는 경제적 요인에 불만이 더 큰 만큼 대중에 보다 접근해 있다고 지적했다. 공산노선 고수를 주장하는 고위장성들 역시 최근 기존노선고수와 군개혁 필요성의 모순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 소 강경보수파의 「막후」/“검은대령” 알크스니스

    ◎김영만기자가 만났던 “소유즈의 얼굴”/“고르비식은 혼란만… “비상조치 역설/“「60년대 한국」,경제난 타개의 모델” 소련쿠데타세력이 지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독재」가 아닌가 싶다.그들이 구체적 모델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형독재」라는 유추도 가능하다. 서울에서 이같은 추론이 가능한 것은 쿠데타세력의 의회내 기반으로 보이는 소유즈그룹이 한국의 「박정희독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들이 현 쿠데타세력의 아이디어뱅크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실제로 8인국가비상위원회의 실세로 알려진 푸고내무장관은 소유즈그룹의 「도움」으로 개혁파인 전내무장관 바딤 바카틴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지난 4월 검은대령 알크스니스를 정점으로 한 소유즈그룹은 『파국의 소련을 구하기 위해 소련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일찌감치 쿠데타세력에게 거사의 명분을 제공한 바 있다. 기자는 지난 4월23일 알크스니스대령의 숙소인 모스크바 호텔에서 2시간동안 그와 단독인터뷰를 했다.당시 그들은 비상사태선포를 주장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으려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운동을 공공연히 벌이고 있었다.그들의 소련정세에 대한 시각과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소련의 미래상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은 현 쿠데타세력의 이념적 기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알크스니스는 고르바초프가 말하는 시장경제로 가기위한 혼란과 경제침체가 「일시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공산당과 연방정부가 강력한 힘을 행사해 전권을 장악하지 않을 경우 소련경제는 3류 빈민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보혁갈등이 조기에 종식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내전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알크스니스는 박정희와 한국경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그는 『보수세력이 개혁자체에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우리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정치안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은 우리가 따라야 할 주요한 모델이다.한국은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때문에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정치적 안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알크스니스의 소련정치관을 요약하면 이렇다.우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소련경제를 희생시켜야한다.그러나 그방법은 현재와 같은 연방정부의 무기력화로는 빈곤과 내전만이 있을 뿐이며 연방정부가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하나씩 개혁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알크스니스 일파가 현재 어느정도의 쿠데타 핵심세력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알크스니스식 논리가 핵심세력의 이론적 기초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그들은 유혈사태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감내해야 할 희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민주화가 어느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비상사태선포와 같은 강경책은 필연적으로 유혈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한국의 경험을 알크스니스에게 이야기해주자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그는 『생명의 가치는 무한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자신은 유혈적인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러나 다른 생명을 보호하기위해 국가는 때때로 힘을 사용할수 밖에 없고 소련은 개혁정책이 실시된이래 민족분규 등으로 1천명이상이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알크스니스 일파가 직접 쿠데타에 연루돼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만 당시의 보수파들은 쿠데타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알크스니스는 쿠데타가 가능할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마디로 잘랐다.한국과 달라서 쿠데타를 지휘하고 의견일치를 보아야 할 장군의 숫자가 너무 많고 나라가 커서 쿠데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그는 『장성만 모여도 크렘린궁으로는 자리가 모자란다.또한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프랑코나 피노체트,주코프원수 같은 대중에게 익숙한 장성도 없다』고 말했다.그럼에도 소련에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모스크바에 진주해 있는 군부대간에도 알력이 있고 비상위원회와 친고르바초프쪽으로 세가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면 알크스니스의 쿠데타 불가능론은 어느정도 맞아들어간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크스니스는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발트3국중 라트비아 출신이다.그는 출신배경과 현재의 정치적견해 사이를 어떻게메울수 있느냐는 질문에 『민족주의자들이 내놓는 것은 「배고프지만 자유롭게」이다.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데도 연방탈퇴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 이해 때문에 인간의 생존권을 희생시키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처사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당시 모스크바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개혁파가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을 때였다.그럼에도 알크스니스는 매우 확신에 찬 어조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한다고 이야기해 나갔다.
  • 옐친 결국 해냈다/선봉서 「반쿠데타」주도… “정신적 지주역”

    ◎국내외 지지 급상승… 「고르비이후」예약 고르바초프를 축출한 강경보수파의 이번 쿠데타를 실패로 이끄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다. 그는 19일 쿠데타 발생직후 러시아공 의사당앞에 진주한 탱크위에 올라가 국민들에게 총파업과 시민불복종을 외치며 신군부의 보수회귀를 끝까지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더욱 극적인것은 그가 지난 6월 러시아공화국 최초의 민선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강력히 비난하며 사임요구까지 해왔기 때문에 쫓겨난 고르바초프의 원상회복을 위해 쿠데타세력에 과감히 맞선 그의 행동은 소련국민뿐 아니라 미국 등 우방국에도 소련내 「마지막 희망」으로 간주돼 왔다. 그는 쿠데타군의 탱크로 둘러싸인 러시아공 의사당안에서 자신이 러시아공화국의 통제를 계속할 것을 선언하고 쿠데타에 가담했던 모든 군인들과 KGB요원들에게 대열 이탈을 촉구하는 등 반쿠데타세력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왔다. 이같은 옐친의 용감한 행동에 힘입은 광원들이 파업을 단행했으며 전국적으로 수십만의 시민들은 쿠데타 저지시위에 가담함으로써 쿠데타세력이 발붙일 곳을 잃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옐친은 이번사태로 말미암아 국내적으로는 러시아공화국뿐만 아니라 다른 공화국에서도 엄청난 지지를 얻게됐으며 더욱이 서방지도자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고르바초프 이후」의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고르바초프와 동갑인 1931년생으로 우랄산맥의 한 농가에서 출생한 그는 우랄공과대학에서 공부했으며 55년 건설기술자로 졸업했다.61년 공산당에 입당,67년부터 85년까지 지방당에서 일하던중 81년 중앙위원으로 승진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추진을 위한 심복으로 85년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온후 그는 급속도로 지위를 높여 정치국의 소장멤버가 되었고 농업분야의 총책임자로 승진됐었다.그러나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하라는 그의 끈질긴 요구때문에 고르바초프로부터 멀어지게 됐고 87년에는 모스크바시 당위원장직에서 해임됐으며 90년 7월에는 공산당을 탈당하기까지 했다.이같은 그의 과감한 행동은 국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더욱 높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4월부터는 고르바초프와 일종의 공동전선을 구성,민주적이고 시장경제지향적인 새로운 소련을 건설하는데 힘을 모아왔다. 공개적인 상호비난은 중단됐고 옐친은 연방정부와 소련공화국간에 새로운 연방조약을 체결하려는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가장 큰 지지를 보냈었다.고르바초프는 이에대한 보답으로 공화국들의 주권을 확대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번 쿠데타에서 강력하게 고르바초프를 지지한 옐친의 용감한 행동은 러시아공화국뿐 아니라 소련전체의 대중지도자로,또 국제적인 지도자로 그를 변신케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 “찬탈과 숙청” 소 권력투쟁 74년

    ◎정권이양때 「인민의 뜻」 배제/개혁·보수파가 번갈아 집권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재임중 쿠데타에 의해 실각됨으로써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래 소련권력의 정상을 차지해온 7명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흐루시초프에 이어 두번째로 자연사가 아닌 이유로 도중하차한 지도자가 됐다. 지난 여섯차례의 정권이양과정을 보면 예측불허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통해 후계자가 결정돼왔으며 후계자가 집권한 후에도 실질적인 전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짧게는 1∼2년,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같은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의 진통은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하는 측보다는 반대하고 공격하는 측의 입장이 우월한 양상을 보여 집권자의 변화에 따라 개혁과 보수의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왔다. 공산혁명후 소련의 첫지도자인 레닌은 10월혁명후 사회주의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사회혁명당등 온건사회주의 정파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볼셰비키 단독정부를 수립,자신이 총리가 되고 트로츠키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그러나 이어서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25%의 지지밖에 얻지못해 소수정부를 유지해오다 이듬해인 18년 국회를 해산하고 볼셰비키를 전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1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동시에 자신이 국가수반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을 차지,반대파들을 숙청해가며 24년 사망할때까지 절대적인 지도자로 군림했다.레닌은 1차대전이 끝난후 식량부족과 경제침체가 극에 달하자 21년 개인기업허용및 농만들의 자유로운 식량처분권등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F)을 실시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의 2인자 부상 예상을 뒤엎고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의 3두체제가 등장했다.당시 스탈린은 실권없는 당서기장으로 이론이나 실제활동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코민테른 책임자 지노비에프와 공산당 정치국원 카메네프를 재빨리 포섭,레닌의 신경제정책 지지를 표방한 부하린등 우파를 제거했다.그 다음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이간질시키는 각개격파전술을 구사,레닌 사후 5년만인 1929년말 명실공히 당과 소연방의 최고지도자로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를 강제적으로 추진시키는 무자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대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36년에는 공산당을 모든 공공조직과 국가조직의 핵심으로 규정한 새헌법을 발포,39년부터 52년까지 당대회를 한번도 열지 않은채 철권통치를 해왔다. 53년 30년 가까이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스탈린이 죽자 당내에는 유력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집단지도체제가 불가피해 당시 총리 말렌코프·KGB의장 베리아·외무장관 몰로토프·정치국원 흐루시초프의 4두체제가 수립됐다.원래 스탈린 사망 다음날인 3월6일 당중앙위원회와 정부및 최고회의 합동회의에서 말렌코프를 당간부회 의장·당제1서기·총리등 3개요직에 앉힘으로써 말렌코프체제가 수립되는 듯했으나 4인의 암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돼 불과 8일만에 당중앙위 총회에서 당 제1서기직을 흐루시초프에게 넘기도록 결정,말렌코프의 권력은 줄어들었으며 이어서 베리야가 KGB를 이용,권력장악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이후 2년동안 권력투쟁을 벌인뒤 55년 말렌코프를 총리직에서 제거함으로 흐루시초프는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흐루시초프는 이른바 「해빙」이라는 신정책을 시도했으며 반스탈린정책을 추진,고르바초프등 당시 젊은 당료들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64년 10월 쿠바위기와 중소이념논쟁 격화등으로 인한 당내불만의 고조로 그가 휴양차 모스크바를 비운 사이 그의 추종자들인 브레즈네프·수슬로프·포드고르니·코시긴등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어서 등장한 것은 총리 코시긴·당제1서기 브레즈네프·최고회의 간부회의의장 포드고르니등에 의한 이른바 트로이카체제(3두체제)였다. 브레즈네프는 이 체제내에서 옛질서의 회복을 강력히 추진하는 반흐루시초프정책을 밀고나가 2년후 서기장에 올랐으나 코시긴총리가 죽고 새헌법이 통과된 77년에야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82년11월 브레즈네프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정치국원 체르넨코와 경쟁을 벌이던 안드로포프 연방최고회의의장은 이틀만에 당서기장에 올랐으며 그는 불과 7개월만에 국가원수격인 연방최고회의간부회의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5개월만에 사망했고 72세의 고령인 체르넨코가 불과 4일만에 후계자로 결정됐다.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로마노프·알리예프등 소장파들의 강한 도전이 있었으나 일종의 과도체제라는 묵계하에 체르넨코가 지명될수 있었다.그는 브레즈네프의 후광을 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강력한 보수체제로의 회귀를 꾀했으나 불과 13개월만에 병사,최단명 지도자를 기록했다. 85년3월 체르넨코가 죽자 고르바초프가 후임 서기장에 선출됐으며 그는 1년동안 최고의 정적인 로마노프·빅토르 그리신등을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다음해 3월 개최된 제27차당대회에서 소련의 대변혁을 가져온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어서 90년 3월에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으나 군내부의 보수파와 옐친등 급진개혁파등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같은 소련의 권력이양과정을 볼때 이번 쿠데타로 누가 권좌에 오르든 상당기간 또 한차례의 권력투쟁은 불가피할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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