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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하반신 마비 피해자와 가해자인 전두환의 같은 날 생 마감

    5·18 하반신 마비 피해자와 가해자인 전두환의 같은 날 생 마감

    5·18 가해자로 지목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5·18 당시 총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된 피해자가 공교롭게 같은 날 숨진 채 발견됐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린 가해자와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이모(68)씨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분노가 터져나오고 있다. 24일 전남 강진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4시쯤 강진군 한 저수지에서 이모(68)씨가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지난 22일 이씨가 전북 익산 자택에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는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소방대원들과 함께 이씨의 고향 마을을 수색 중이었다. 이씨가 남긴 유서에는 “요즘 통증이 더 심해지고 있다. 5·18에 대한 원한, 서운함을 모두 잊고 가겠다”는 내용이 쓰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4시간마다 진통제 주사를 맞았으며 가족들도 이씨가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육군 사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출가해 조계종 한 사찰의 승려로 생활하다가 1980년 5·18을 맞았다. 그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앞두고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시민들의 시위와 환자 이송에 동참했다. 그는 1988년 국회 광주 특위 청문회와 1995년 검찰 조사, 2019년 5월 13일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혐의 1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헬기 사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여학생을 구조해 적십자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증언했다. 적십자봉사단에 입단한 그는 부상자를 실어나르고,의약품과 혈액을 모으는 활동을 하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동구 구시청 사거리에서 잠복 중이던 군인이 연발로 쏜 총에 허리를 맞았다. 인근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지만 총탄 파편이 몸속에 그대로 남아 평생을 하반신 불구로 살아야 했다. 1996년 파편 제거 수술을 받긴 했으나 진통제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씨는 신군부가 왜곡한 5·18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고 조비오 신부와 함께 계엄군의 헬기 사격 목격담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타고 있던 적십자 봉사단 차량을 향해 헬기가 따라오며 집중적으로 사격했다”며 “일행 중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젊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 활동과는 별개로 그의 개인적인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욕창에 걸리는 건 다반사였고,경제 활동을 하지 못해 늘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떻게든 후유증을 치료해보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해보기도 했지만,그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이씨는 지난 22일 “나의 이 각오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바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고향인 강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5·18 기념재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5·18 자살의 계보학’에 따르면 후유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은 1980년대 25명,1990년대 4명,2000년대 13명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시신이 발견된 23일 전씨도 자신의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숨졌다. 당초 반란수괴 및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였던 전씨는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 평안한 삶을 살았다. 수사를 통해 전씨가 불법 비자금 9500여억원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추징금 2205억원을 내야 할 처지였지만 전씨는 ‘배 째라’는 식이었다.여전히 956억원은 환수되지 않았다. 전씨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신군부 세력과 호화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치러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5·18 단체 관계자는 “41년이 지났지만,여전히 피해자는 고통받고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며 “두 사람을 생각하면 세상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된 것 같다”고 한탄했다.
  • 수원역 인근 집창촌서 성매매 알선한 일가족 5명 징역형

    수원역 인근 집창촌서 성매매 알선한 일가족 5명 징역형

    경기 수원역 인근의 집창촌에서 성매매 업소를 운영한 세 남매와 이들의 배우자 등 일가족 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원지법 형사9단독 박민 판사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50대 A씨와 그의 부인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고 24일 밝혔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A씨의 동생 B씨는 징역 2년을, 동생 C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동생 C씨의 남편도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A씨 가족이 성매매 알선을 통해 챙긴 58억원가량도 추징했다. 박 판사는 “성매매 알선은 성을 상품화하는 등 사회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중대범죄”라며 “피고인들의 범행 동기, 범행 기간, 가담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판시했다. A씨 부부는 1998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수원역 인근에 성매매 업소를 차리고 종업원들을 고용한 뒤 성매매 알선 등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 일가족은 1998년부터 올 3월까지 23년간 수원역 일대 성매매집결지에서 업소 5곳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 확인한 이들 일가족의 수익은 128억원에 달했다. B씨는 2011년 1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C씨 부부는 2019년 5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성매매 알선 등을 한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채무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상대로 선불금을 주고 성매매하도록 유인했으며, 몸이 아파도 손님을 받도록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C씨의 남편은 2019년 초 업소 샤워실에서 씻고 있는 여성 종업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와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도 기소됐다. 이밖에 B씨의 범행 사실을 알고도 2011년 1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성매매 장소를 임대한 혐의(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로 기소된 건물주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400만원을 선고받았다.
  • “윤석열에 ‘그 양반’ 들은 김종인, 초라해 보여”…고민정 한마디

    “윤석열에 ‘그 양반’ 들은 김종인, 초라해 보여”…고민정 한마디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남긴 유언을 두고 “뭘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고 말했다. 23일 별세한 전 전 대통령은 “북녘 땅이 바라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고 의원은 24일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서 전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고 의원은 전 전 대통령이 내지 않은 추징금 956억원, 5·18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은 점 등을 들며 “뭘 위해서 그랬을까. 돈도 명예도 없이 결국은 다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건데. 아마 저 세상에서도 편치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식 계정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애도’, ‘전 대통령’ 등의 표현을 썼다가 삭제한 것에 대해선 “왜 그랬을까. 저는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임시로 진행을 맡은 방송인 김제동씨가 “민주당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접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알고 있냐”고 묻자, 고 의원은 “모른다. 제가 확인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고 의원은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하고 친분들이 당연히 있을 거다. 그러면 사적으로든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그런데 그걸 공식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제가 모르겠다”고 말했다.“윤석열에 ‘그 양반’ 들은 김종인, 참 초라해 보여” 국민의힘 선대위 구성을 두고 윤석열 대선후보와 이견이 노출된 김 전 위원장이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선 “이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후보가 김 전 위원장을 ‘그 양반’이라고 칭하며 날선 반응을 보인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고 의원은 “김 전 위원장은 40년생이고, 윤 후보는 60년생이다. 스무살 차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양반이’라는 말은 안 쓴다. 아마 그 말을 들은 김 전 위원장은 어떠셨을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수많은 정치적 풍파를 겪어 오신 원로이기도 한데, 이렇게 막판에 이런 말까지 듣는 자존심과 말로가 참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김 전 위원장이 국민의힘으로 합류하지 않는 게 민주당에게 유리하냐는 질문엔 “어디로 가든 상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 의원은 “제일 중요한 건 후보다. 그전까지는 김종인이라는 굉장히 큰 사람이 크게 그립을 쥐고 가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여기서 후보는 내가 주도권을 가져가겠다고 강하게 공언한 셈이다”고 덧붙였다. 또 “결국 선거는 후보가 치르는 거라 후보의 뜻대로 그렇게 가지 않을까 싶다”며 김 전 위원장이 국민의힘에 합류하기 어렵다고 봤다.
  • 전두환 빈소 박근혜 조화 가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어”

    전두환 빈소 박근혜 조화 가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24일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보냈다고 알려진 화환은 박 전 대통령이 보낸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대통령 측근인 유영하 변호사는 이날 서울신문에 “박 전 대통령이 보내는 조화는 오후 4~5시 사이에 도착할 예정”이라면서 “오전에 도착한 조화는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고 대통령이 보낸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은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오전에 보냈던 화환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보낸 화환 옆에 위치했으나 현재는 치워진 상태다. 전씨는 생전 박 전 대통령과 얽히고설킨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76년 전씨가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행’이었다. 1979년 10·26 사태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씨는 청와대 금고에서 찾은 6억원을 선친을 여윈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바 있다. 이 6억원은 2012년 18대 대선 TV토론에서 “당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의 지적이 제기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은 것인데 저는 자식도 없고 아무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전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 이어졌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없었던 5공 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해 박정희 정권과의 선 긋기에 나서면서다. 이후 6년간 박 전 대통령은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식도 공개적으로 참석하지 못했고 18년간 사실상 은둔의 삶을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 8월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로 선출됐을 때 취임 인사차 연희동 자택으로 전씨를 찾아간 바 있다. 이후 특별한 교류가 없던 두 사람은 2013년 2월 25일 박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해후’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전씨를 겨냥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7월 전씨에 대해 미납 추징금 환수 의지를 강하게 밝혔고, 검찰은 전씨의 연희동 자택을 전격 압수수색하고 수사에 돌입했다. 이후에도 별다른 접촉이 없던 두 사람의 돌고 도는 악연은 전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끝이 나게 됐다.
  •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군사반란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두 책임자가 사망함으로써 일그러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막을 내렸다. 전씨는 현재 진행 중인 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사건 재판의 피의자로서 반성은 물론 진실 고백도 거부했다. 또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5월 광주 학살에 대한 참회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언론 탄압을 비롯해 삼청교육대,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등 민주주의 말살, 인권유린, 노동운동 탄압, 간첩단 조작 사건,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등 수많은 과오에 대해 변변한 유감의 표시조차 없었다. 단언컨대 전씨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과만 있고 공은 찾기 힘든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1996년 군사반란 수괴죄, 반란 모의 참여죄,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돼 헌정 질서 파괴와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정치적 고려에 의한 대통령 사면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사면이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없애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에 걸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광주의 피해자들과 국민들 앞에 한마디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오히려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뻔뻔하게 주장했고,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전 재산 29만원’ 운운으로 전체 2205억원의 추징금 중 956억원의 미납금을 남기고 갔다. 세금 체납액도 9억 7000만원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건 존재의 소멸을 통해 그 생애의 공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전씨의 죽음을 대하는 많은 국민들은 어두운 역사의 일단락을 깔끔하게 맺지 못했다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식들을 통해 밝혔던 것처럼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가능했을 터다. 피해자의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사죄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화합은 거기에서 비로소 싹틀 수 있었으나 안타깝기만 하다. 그를 단죄해야 할 법적 다툼의 실효성은 사라졌다. 오직 남은 자들이 판단하고 역사가 심판해야 할 과제가 됐다. 전씨는 비록 사죄·증언 없이 떠났지만 역사의 심판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살아 있는 자들이 구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규명되지 않은 5·18 진상에 대해서도 끝까지 밝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됐다. 더디더라도 계속해서 화합과 치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우리의 또 다른 사명이기도 하다.
  •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사설] 사죄·증언 없이 떠난 전두환, 역사 심판은 영원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군사반란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두 책임자가 사망함으로써 일그러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막을 내렸다. 전씨는 현재 진행 중인 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사건 재판의 피의자로서 반성은 물론 진실 고백도 거부했다. 또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1980년 5월 광주 학살에 대한 참회나 사죄도 하지 않았다. 언론 탄압을 비롯해 삼청교육대, 부산형제복지원 사건 등 민주주의 말살, 인권유린, 노동운동 탄압, 간첩단 조작 사건,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등 수많은 과오에 대해 변변한 유감의 표시조차 없었다. 단언컨대 전씨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과만 있고 공은 찾기 힘든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1996년 군사반란 수괴죄, 반란 모의 참여죄,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돼 헌정 질서 파괴와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정치적 고려에 의한 대통령 사면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사면이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없애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에 걸쳐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광주의 피해자들과 국민들 앞에 한마디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오히려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뻔뻔하게 주장했고, 전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전 재산 29만원’ 운운으로 전체 2205억원의 추징금 중 956억원의 미납금을 남기고 갔다. 세금 체납액도 9억 7000만원에 이른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건 존재의 소멸을 통해 그 생애의 공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전씨의 죽음을 대하는 많은 국민들은 어두운 역사의 일단락을 깔끔하게 맺지 못했다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식들을 통해 밝혔던 것처럼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는 일 또한 어느 정도 가능했을 터다. 피해자의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와 사죄에서 출발한다. 사회의 화합은 거기에서 비로소 싹틀 수 있었으나 안타깝기만 하다. 그를 단죄해야 할 법적 다툼의 실효성은 사라졌다. 오직 남은 자들이 판단하고 역사가 심판해야 할 과제가 됐다. 전씨는 비록 사죄·증언 없이 떠났지만 역사의 심판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살아 있는 자들이 구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규명되지 않은 5·18 진상에 대해서도 끝까지 밝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됐다. 더디더라도 계속해서 화합과 치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우리의 또 다른 사명이기도 하다.
  • 미납 추징금 956억 상속 안 돼 환수 못할 듯

    미납 추징금 956억 상속 안 돼 환수 못할 듯

    1997년 유죄가 확정되면서 2000억원대 추징금을 부과받았던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미납 추징금 956억원은 환수가 어려워졌다. 20여년 만에 그를 다시 법정에 세웠던 5·18 민주화운동 관련 형사재판도 중단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23일 기준 전체 추징금 2205억원 중 1249억원(57%)을 집행했고 미납 추징금은 956억원(43%) 남아 있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상 추징금은 채무와 달리 당사자가 사망하면 상속되지 않고 집행 절차가 중단된다. 다만 검찰 관계자는 “추가 환수 가능성은 아직 단정하기 어려워 관련 법리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1997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죄 유죄 판결로 추징금이 확정되자 314억원만 납부한 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완납을 미뤘다. 2013년 본격 환수가 시작된 뒤 검찰은 지난해까지 추징금 1235억원을 집행했다. 올해는 가족 명의의 임야 공매 낙찰가 10억여원 등 모두 14억원을 추가 환수했다. 이외에 전씨는 지방세 9억 8200만원도 미납 중이다. 서울시는 2018년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압수한 그림 9점과 현재 자택에 남은 병풍, 가전제품 등을 공매할 계획이다. 지방세는 체납자가 사망하더라도 압류할 재산이 있다면 징수권이 유지된다. 현재 진행 중인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법 형사1부(부장 김재근)는 오는 29일 결심공판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씨가 재판 도중 사망하면서 절차에 따라 공소 기각을 결정할 전망이다. 전씨는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 신부에 대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지난해 11월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회고록과 관련해 5·18 단체들이 전씨와 아들 재국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은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 이순자 “우리도 5·18 피해자”… 아들은 추징금 반발 소송

    이순자 “우리도 5·18 피해자”… 아들은 추징금 반발 소송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왼쪽)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이들 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과오를 뉘우친 적이 없으며 측근들의 인식도 별반 다를 게 없다. 23일 전씨 사망 후 자택에는 부인 이씨와 장남과 차남, 그리고 장세동(오른쪽) 전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하나회 소속 고명승 예비역 육군 대장 등이 모였다. 3남은 미국에서 귀국 절차를 밟는 중으로 전해졌다. 전씨의 충복이었던 장 전 안기부장은 연희동 전씨 자택에서 나오면서 기자들이 ‘안에서 어떤 말을 나눴나’라고 묻자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 물어봐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고인 사망에 대한 소회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대로”라고 했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고인이 사망 전 사죄했느냐’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앞서 부인 이씨는 2017년 자서전에서 “5·18 당시 그분은 결코 발포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내릴 권한 자체가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친동생 경환씨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전씨의 비자금을 은닉·관리했다는 의심을 받다 지난달 사망했다. 장남 재국씨도 페이퍼컴퍼니 의혹과 관련해 국정감사장에서 사과한 바 있다. 그는 2013년 전씨의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자진 납부하겠다고 했다가 연희동 자택 공매에 반발해 소송을 했다. 차남 재용씨는 탈세 혐의로 받은 벌금 40억원을 내지 않아 노역을 살았다. 그는 2007년 이혼한 뒤 탤런트 박상아씨와 재혼해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전씨의 측근 ‘3허씨’ 중 12·12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5공 설계자’로 불렸던 허화평씨는 지난달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유족 측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씨도 노 전 대통령 별세 당시에 유족 측 장례위원에 포함됐지만, 그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자 출신으로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씨는 2016년 별세했다.
  •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광주는 폭동” “전 재산 29만원” 분노만 키운 정치군인의 퇴장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중에 육군사관학교 입학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개헌까지 하며 11·12대 대통령 연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조비오 신부 사자 명예훼손 등 1심 유죄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쿠데타 주역, 민주화 탄압, 현대사 퇴행… “공과 언급할 가치 없어”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달러화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로 과외를 금지시키는 한편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를 도입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켰다는 평가와 과외를 음성화시켰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 진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사죄없이 떠난 현대사의 오점

    사죄없이 떠난 현대사의 오점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전씨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전씨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씨까지 모두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전씨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일말의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전씨는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으며,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전씨는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11기)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지원했고, 10·26 사태가 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간선제 투표로 11, 12대 대통령에 올라 7년여간 독재 통치를 했다. 전씨는 내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전씨는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약속했던 재산 헌납도 지키지 않았다. 추징금 2205억원 중 미납한 금액은 956억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지만,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문이나 조화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선후보 모두 빈소를 찾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다. 최하 수백 명의 사람을 살상했고 중대 범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처음엔 “전직 대통령이시니까 조문을 가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가 2시간 뒤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전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7일 오전 8시.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 국가장 안한다…“전직 대통령 중 처음”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 국가장 안한다…“전직 대통령 중 처음”

    국가장 도입 후 사망 전직 대통령 중국가장 치르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 정부가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장’(國家葬)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2011년 국장과 국민장을 통합해 국가장이 도입된 이후 사망한 전직 대통령 중 국가장을 치르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정부가 장례를 지원하지 않은 세번째 전직 대통령이 된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전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며 “국가장을 하지 않기로 한 만큼 유족들이 가족장을 치르더라도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국가장법에 따라 정부는 국가장을 추진할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이 제청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하게 되지만, 행안부는 이런 절차를 밟지 않기로 했다.국가장 치른 노태우와 달리 가족장으로 장례 치를 듯 국가장법은 2조에서 전·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사망시 국가장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중대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의 목적을 담은 1조는 “이 법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라는 표현을 썼다. ‘국가·사회에 현저한 공훈’이 있거나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을 국가장의 대상자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결정은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살다 지난달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른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는 전씨의 경우 과오에 대해 나름의 반성의 뜻을 표한 노 전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여온 것을 고려해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이라는 큰 역사적 과오를 짊어지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사과 표명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의 발언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방송 인터뷰를 통해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하는 등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선고받은 추징금 2205억원은 완납하지 않았다.청와대 “진정성 있는 사과 없어 유감” 청와대는 이날 전씨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거나 조문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여야 대선주자들과 지도부도 전 전 대통령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사망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면서도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역사적 과오가 적지 않지만,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지면서 논란이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대통령 명의의 조화와 함께 유영민 비서실장을 통해 조문했다.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청와대 차원의 조화는 물론 조문도 하지 않기로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발언 당시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생략한 것으로 알려졌다.여야 대선주자들 및 지도부도 비판…“죽음조차 유죄” 여야 대선주자들과 지도부도 싸늘한 반응을 보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디지털 대전환’ 공약 발표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 전 대통령을 ‘전씨’라 지칭했다. 이 후보는 “내란, 학살사건 주범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확인됐다.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최하 수백명을 사살하고 국가권력을 찬탈한 범죄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았다”며 “이 중대범죄 행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조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민주당은 조화·조화·조문·국가장 모두 불가“라고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조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가 별도의 입장문을 통해 가지 않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국민의힘 당대표 차원 조화만…”조문은 개인적 판단“ 국민의힘은 당대표 차원의 조화를 보내기로 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조문할 계획이 없다. 당을 대표해서 조화는 보내도록 하겠다. 당내 구성원들은 고인과의 인연이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조문 여부를 결정하셔도 된다”고 설명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성찰 없는 죽음은 그조차 유죄다. 역사를 인식한다면 국가장 얘기는 감히 입에 올리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의 깊은 상처는 오로지 광주시민들과 국민의 몫이 됐다”고 지적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도 “역사적 심판과 사법적 심판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했다. 죽음조차 유죄”라고 비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페이스북을 통해 “스스로 굴곡진 삶을 풀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면서 “고인의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인정하지 않고 국민께 사과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공과 논하기조차 어려운 ‘전두환 7년’

    유신 체제에 억눌렸던 민주화 열망을 12·12 군사반란에 이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짓밟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생을 마감하면서 한국 현대사를 퇴행시킨 ‘정치군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씨를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고 집권했지만, 제5공화국 7년 동안 국민 다수에게 적용되는 정의는 없었다. 소수 군부 엘리트들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채 총칼과 ‘체육관 거수기’로 집권한 터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재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나 박종철·이한열 열사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활동’ 프레임에 걸리면 예외 없이 고문을 당하거나 희생됐다. “뚜 뚜 뚜 땡~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되는 ‘땡전뉴스’에서 보듯 언론 자유도 말살됐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64개 언론사는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됐다. 언론인 1000명 이상이 해직당했다. 새 질서 확립과 불량배 교화를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도 많았다.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공과’란 표현을 쓰기 어려울 만큼 그늘이 짙게 드리운 그를 그나마 평가하는 대목은 단임 실천이다. 전씨는 스스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 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애초에 4·13 호헌 조치로 5공 연장을 꾀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민주화 시위에 밀려 직선제 개헌을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평가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타오른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대 진압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치적으로 삼고자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데다 국민들의 거스르기 힘든 민주화 열망, 그리고 미국의 압박 등에 마지못해 물러섰고, 6·29 선언을 타협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 1981년 21.4%에 달했던 물가 상승률이 1982년 7.2%, 1983년 3.4%, 1984년 2.3%로 안정세를 찾았고, 경제성장률은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상승세를 탄 점을 두고 전두환 시대의 성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또 한 세계경제의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 기조에 힘입은 덕분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국제 금리가 내려가면서 외환 문제가 해결됐고 유가와 달러 가치 동반 하락으로 국내 물가가 안정되며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3저 호황이 이어지면서 과소비와 투기 현상이 심화했고, 이런 불안 요인들은 이어진 6공화국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설상가상 전씨 개인의 부정 축재로 더 빛이 바랬다. 1997년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 전씨는 재임 중 재벌로부터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추징금 2205억원 중 956억원은 지금까지 완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 유화 정책도 펼쳤다.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이처럼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드러났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궤변으로 정당화하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어 공분을 자아냈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라고 강변했고, 2017년 회고록에서도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닫았고, 12·12에 대해서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공과를 언급할 대상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고, 전두환을 끝내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수백여 명을 죽였고, 과오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로 애도하고 조문한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전두환 시대는 공과라는 표현 자체가 적용이 안 된다고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반인륜적 성격을 가진 정권인 데다 집권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면서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정치적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단임은 처음부터 본인이 약속했던 일인 데다 등 떠밀리듯 한 걸 두고 정치적으로 평가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고도성장이란 것도 ‘3저 호황’이란 국제경제적 조건이 조성됐고, 이전부터 이어진 자본 축적의 결과다. 전두환 시대에 발현됐을 뿐 전두환의 공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반성없는 전두환 가족·5共 인사…‘2인자’ 장세동 “아무것도 모른다”

    반성없는 전두환 가족·5共 인사…‘2인자’ 장세동 “아무것도 모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 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 등이 있다. 이들 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과오를 뉘우친 적이 없으며 측근들의 인식도 별반 다를 게 없다.23일 전씨 사망 후 자택에는 부인 이씨와 장남과 차남, 그리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하나회 소속 고명승 예비역 육군 대장 등이 모였다. 3남은 미국에서 귀국 절차를 밟는 중으로 전해졌다. 전씨의 충복이었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연희동 전씨 자택에서 나오면서 기자들이 ‘안에서 어떤 말을 나눴나’라고 묻자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 물어봐야 난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고인 사망에 대한 소회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대로”라고 했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고인이 사망 전 사죄했느냐’는 질문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는 “막연하게 사죄하라는 것은 옛날에 원님이 사람 붙잡아놓고 ‘네 죄를 네가 알 터이니 이실직고하라’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앞서 부인 이씨는 2017년 자서전에서 “5·18 당시 그분은 결코 발포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내릴 권한 자체가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친동생 경환씨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전씨의 비자금을 은닉·관리했다는 의심을 받다 지난달 사망했다. 장남 재국씨도 페이퍼컴퍼니 의혹과 관련해 국정감사장에서 사과한 바 있다. 그는 2013년 전씨의 미납추징금 1672억을 자진납부하겠다고 했다가 연희동 자택 공매에 반발해 소송을 했다. 차남 재용씨는 탈세 혐의로 받은 벌금 40억을 내지 않아 노역을 살았다. 그는 2007년 이혼한 뒤 탤런트 박상아씨와 재혼해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대학원에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전씨의 측근 ‘3허씨’ 중 12·12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5공 설계자’로 불렸던 허화평 씨는 지난달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유족 측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 씨도 노 전 대통령 별세 당시에 유족 측 장례위원에 포함됐지만, 그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자 출신으로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씨는 2016년 별세했다.
  •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사과없이 떠난 전두환의 일생…분노만 키운 全의 입

    빈농의 아들 출신으로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제11·12대 대통령직을 움켜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권력욕은 굴곡지고 어두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들어 냈다. 전씨는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일절 인정하지 않은 채 23일 세상을 떠났다.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가족을 부양했다. 전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서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밝혔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으나 처음부터 돋보이지는 못했다. 군 생활 초반에는 한직을 전전하다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육사 생도들의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소장의 눈에 띈 이후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으로 기용된다. 그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30대대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출세가도를 걸었다. 그가 속했던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도 군 내 주류 모임으로 급부상했다. 전씨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마침표를 찍은 10·26 사태가 발생한다. 그는 하나회를 등에 업고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건 수사·처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를 이끌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하면서 12·12 신군부 반란을 일으켰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생들이 군부에 반기를 들고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요구 시위에 나선다. 그러자 전씨는 ‘시국 수습’을 핑계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화 세력을 탄압했다. 5월 18일 서울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도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신군부는 계엄군·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하며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달 27일에야 마무리된 계엄군의 무분별한 진압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사임 직후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같은 해 10월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 ‘3저(저금리·저유가· 저달러) 호황’을 누리는 국가 개발 시기에 정권을 잡았으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탄압은 그의 몰락을 앞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거세졌고, 맞대응으로 내놓은 4·13 호헌조치는 6월 항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집권여당 대표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1988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전씨는 여생 내내 심판대에 올랐다. 퇴임 직후 전씨가 ‘5공 청문회’에 나와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한 데 대해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비판한 것은 사회가 그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시위에 전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강원 백담사로 들어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문민정부 들어 본격적인 법적 심판이 시작된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을 거쳐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을 최종 선고받았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그를 특별 사면했다. 전씨는 이후에도 반성 없는 모습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던 전씨는 2003년 법원의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 29만원’을 기재하며 사실상 납부를 거부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전씨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환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전씨는 훈장 반환도 거부하다 7년 만인 2013년에야 12·12 이후 받은 9개 훈장을 반납했다.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도 논란이 됐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상계엄은 “정당한 법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두고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5·18 관련 단체들은 사자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등으로 고발했다. 전씨는 1심 내내 알츠하이머 투병, 고령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다 2019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해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해 재판을 진행하다 오는 29일 변론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 8월 다발성 골수종 확진을 받았던 전씨는 생전 가깝게 지낸 노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전두환 미납 추징금 956억원 환수 미궁으로···5·18 재판도 중단

    전두환 미납 추징금 956억원 환수 미궁으로···5·18 재판도 중단

    1997년 유죄가 확정되면서 2000억원대 추징금을 부과받았던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하면서 미납 추징금 956억원은 환수가 어려워졌다. 20여년 만에 그를 다시 법정에 세웠던 5·18 민주화운동 관련 형사재판도 중단될 전망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23일 기준 전체 추징금 2205억원 중 1249억원(57%)을 집행했고 미납 추징금은 956억원(43%) 남아 있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상 추징금은 채무와 달리 당사자가 사망하면 상속되지 않고 집행 절차가 중단된다. 다만 검찰 관계자는 “추가 환수 가능성은 아직 단정하기 어려워 관련 법리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1997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죄 유죄 판결로 추징금이 확정되자 314억원만 납부한 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완납을 미뤘다. 2013년 본격 환수가 시작된 뒤 검찰은 지난해까지 추징금 1235억원을 집행했다. 올해는 가족 명의의 임야 공매 낙찰가 10억여원 등 모두 14억원을 추가 환수했다. 이외에 전씨는 지방세 9억 8200만원도 미납 중이다. 서울시는 2018년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압수한 그림 9점과 현재 자택에 남은 병풍, 가전제품 등을 공매할 계획이다. 지방세는 체납자가 사망하더라도 압류할 재산이 있다면 징수권이 유지된다. 현재 진행 중인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 재판 항소심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법 형사1부(부장 김재근)는 오는 29일 결심공판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씨가 재판 도중 사망하면서 절차에 따라 공소 기각을 결정할 전망이다. 전씨는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 신부에 대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지난해 11월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회고록과 관련해 5·18 단체들이 전씨와 아들 재국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은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민사소송은 피고가 사망해도 유족이 소송을 계속할 수 있다.
  • 전두환 전대통령 사망-5·18 유혈진압 사죄없이 떠났다

    전두환 전대통령 사망-5·18 유혈진압 사죄없이 떠났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전씨의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전씨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씨까지 모두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전씨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일말의 사과나 반성을 하지 않았다. 전씨는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으며,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전씨는 지난 8월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11기)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지원했고, 10·26 사태가 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간선제 투표로 11, 12대 대통령에 올라 7년여간 독재 통치를 했다. 전씨는 내란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전씨는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약속했던 재산 헌납도 지키지 않았다. 추징금 2205억원 중 미납한 금액은 956억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지만, “끝내 역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조문이나 조화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선후보 모두 빈소를 찾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씨는 명백하게 확인된 것처럼 내란 학살 사건의 주범이다. 최하 수백 명의 사람을 살상했고 중대 범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처음엔 “전직 대통령이시니까 조문을 가야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가 2시간 뒤 조문을 가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자씨와 아들 전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7일 오전 8시.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광주에 무지개 떴다” 전두환 사망한 날 목격담·사진 속출

    “광주에 무지개 떴다” 전두환 사망한 날 목격담·사진 속출

    23일 광주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 무지개가 목격됐다. 이날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광주에 무지개가 떴다’는 목격담과 사진이 다수 올라왔다.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는 오전 11시 48분쯤 ‘전두환 떠나자 광주에…’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이 올라왔는데, 글쓴이는 “오늘 방금 찍었다”라고 전했다. 트위터에도 광주시청 위로 커다랗게 드리워진 무지개 사진이 공유됐다. 이날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무지개 사진은 광주 외에도 전남 나주, 경남 김해 등에서도 속속 올라왔다. 공교롭게도 이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해 무지개와 이를 연관 짓는 이들이 많았다.작곡가 김형석은 트위터에 광주에서 촬영된 무지개 사진을 공유하며 “광주에 무지개가 떴다네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하다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분들을 애도합니다”라고 썼다. 김형석은 전씨의 사망 소식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란 것도 있다”라고 평가했다. 전씨는 이날 오전 8시 40분쯤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오전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으며,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전씨는 최근 알츠하이머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등의 지병을 앓았다.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던 전씨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열망을 짓밟았고,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기에 이르렀다.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1987년 민주항쟁에 밀려 퇴임 뒤 백담사로 쫓겨나듯 물러나 칩거했다. 이때 재산 헌납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때인 1995년 구속기소돼 1996년 내란·내란목적살인죄·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수감됐다. 2년 만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지만 전직 대통령 예우 등은 박탈됐다. 대법원에서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지만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하다며 버텼고, 정부와 검찰의 추징금 환수 노력에도 끝내 완납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군사 쿠데타와 집권 기간 동안의 민주화 운동 탄압, 무엇보다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해 단 한번도 진정성 있게 사과하지 않았다.
  • 전두환 세금 체납 9억 7천만원…추징금 956억도 못 받는다

    전두환 세금 체납 9억 7천만원…추징금 956억도 못 받는다

    지금까지 전두환(90) 전 대통령이 미룬 미납 지방세는 9억 7000만원, 미납 추징금은 956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전씨가 23일 오전 사망하면서 이를 받아낼 방법도 불투명해졌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전씨에게 확정된 추징금 2205억원 가운데 57% 정도인 1249억원을 현재까지 집행했으며, 나머지 956억원은 미처 환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씨는 그간 본인 명의의 재산이 29만원뿐이라고 주장하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해왔다. 서울중앙지검은 전씨가 남기고 간 추징금에 대해 “추가 환수 여부 등에 대해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라며 “미납 추징금 집행 가능성에 대해 관련 법리 검토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추징금은 법적 상속분이 아니어서 사망 시 유족을 통해 받을 수 없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지난 7월 전씨 장남인 전재국씨가 운영하는 시공사와 관련한 법원의 조정 결정에 따라 3억 5000만원을 집행했다. 이어 8월에는 10억원 상당의 임야를 공매에 넘기는 등 14억원가량을 추가로 집행했다. 전씨는 또 2014~2015년 아들 재국·재만씨 소유의 재산을 공매 처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지방소득세 등 5억 3699만원도 내지 않았다. 이후 계속 납세를 미루면서 가산금이 붙었고 체납액은 9억 7000만원까지 불어 6년 연속 고액 체납자에 오르기도 했다. 국세와 지방세 등 세금은 당사자가 사망하더라도 유족이 대신해서 갚아야 한다. 다만 유족이 상속을 포기하면 세금 납부 의무는 없어진다. 만약 전씨의 유족이 상속을 포기할 경우, 세무당국은 망자의 재산을 공매해 최우선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된다. 다만 검찰 등 당국이 여태 전씨의 재산을 샅샅이 뒤져 발견하는대로 몰수하고 공매에 넘겼기 때문에, 서울시가 향후 남은 재산을 더 찾아내 체납 지방세로 받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 사죄 없이 “찬송가 들려” 목회자 된다는 전두환 아들 [김유민의돋보기]

    사죄 없이 “찬송가 들려” 목회자 된다는 전두환 아들 [김유민의돋보기]

    지난달 26일 먼저 세상을 떠난 ‘군사 쿠데타 동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족과 달리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 유족은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부인인 이순자씨와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 중 어느 누구도 전씨가 미납한 추징금을 납부하겠다거나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부인 이순자씨는 2017년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내고 “정략적인 역사 왜곡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전율했다”라며 “당시 수사책임자인 동시에 정보책임자였던 그분은 결코 발포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라며 전씨의 쿠데타를 두둔했다.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죄 재판을 받으러 광주를 오갈 때에도 전씨와 동행하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노태우씨는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1997년 대법원에서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고 16년 만인 2013년 추징금을 완납했지만 전두환씨는 2200억 원의 추징금에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며 1020억 원 정도를 납부하지 않았다. 전두환씨 장남 재국씨는 “온 가족이 돈을 모아 부친(전두환)의 추징금을 완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연희동 자택이 공매에 넘어가자 이에 반발하며 소송을 통해 본채를 사수했다. 또한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나 국정감사에 불려 나와 사과하기도 했다.하루 일당 400만원…황제노역 논란“전두환, 아들 신학 공부에 기뻐해” 전두환씨의 차남 재용씨는 양도소득세 포탈 등의 혐의로 처벌받으면서 부과된 40억원의 벌금을 내지 않고 ‘황제 노역’을 하다가 비난을 받았다. 전재용씨는 2006년 12월 경기도 오산시 임야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다운계약서를 작성하고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15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40억원을 선고받았다. 전씨는 벌금 40억원에서 불과 1억4000만원(3.5%)만 납부하면서 원주교도소에서 약 2년8개월간 하루 8시간씩 노역을 했고 지난해 2월 출소했다. 하루 일당이 400만원인 셈이라 당시 논란이 됐다. 그리고 지난 3월 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에 출연해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며, 이 소식에 아버지 전두환씨가 굉장히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전재용씨는 “교도소에서 2년8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게 됐다. 처음 가서 방에 앉아 창살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라며 “종교방에 있던 분이 노래를 너무 못 불렀는데도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찬양,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목회자의 길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씨는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생각하지 못한 만큼 너무 기뻐했다”라며 “아버지는 ‘네가 목사님이 되면 네가 섬긴 교회를 출석하겠다’고도 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꼭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강조했다. 광주사태 가해로 국민 지탄…아들의 사죄 이러한 유족의 행보는 지난달 별세한 노태우씨 유족과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노태우씨의 아들 재헌씨는 부친을 대신해 여러 차례 5·18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삼가 옷깃을 여기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노재헌씨는 2019년 8월 23일 두 전직 대통령의 직계가족 중 유일하게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했다. 지난해 5월 29일에는 5·18 40주년 기념 배지를 달고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오월어머니집을 찾았다.재헌씨는 오월어머니집 방명록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광주의 정신을 만들어주신 어머님들과 민주화운동 가족 모든 분들께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고 적었다. 같은해 6월23일에는 CBS라디오와 인터뷰에서 ‘5·18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치유와 화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100번이고 1000번이고 사과를 해야 되고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일어나지 말아야 될 5·18과 관련해 항상 마음의 큰 짐을 가지고 계셨다”며 “특히 병상에 누운 뒤부터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 오면서 참배를 하고 사죄의 행동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고 저한테도 고스란히 마음의 짐이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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