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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뢰받는 軍을 위하여… 혁신만이 살길이다

    [기강]“우리 군 큰일 났다. 상층부는 정치만 생각하고 중·하층부는 재테크에만 열을 올린다. 전쟁을 생각하는 진정한 군인은 없는 것 같다.”(전직 청와대 비서실장) [조직]“육해공군이 싸우고 같은 군 내에서도 부서 간 이기주의·암투가 심각하다. 전쟁하는 군대라기보다 보신주의가 만연한 관료 조직이다.”(전 대통령 직속 국방선진화추진위원) [인사]“인사철만 되면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수준의 투서와 악성 루머가 나돈다. 순수한 사람들은 뒤통수를 맞고 사는 무서운 조직이다. 요즘 후배 장교들은 ‘별’(장성) 단다고 그리 높이 평가하지도 않는다.”(50대 현역 장성 부인) [인력]“육사 20기까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였던 것 같다. 40기까지도 훌륭한 재목이 많았다. 40기 이후에는 얼마나 유능한 인재들이 모였는지 잘 모르겠다.”(육사 출신 전직 장성) [병영]“윤 일병 사건과 22사단 총기 난사 사건으로 병영문화혁신위원회가 생긴 지 1년이 됐다. 그런데 바뀐 게 뭐가 있는가.”(군 인권센터 관계자) [방산]“한국군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권을 위해 무기를 만드는 것 같다. 자기가 만드는 무기로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만들 수가 없다. 자기 자식은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불량식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 같다. 어차피 전쟁은 미국이 대신 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방위산업 감사했던 감사관) [획득]“최근 10년간 군이 수입한 무기체계를 보면 북한에 들어가 전쟁하겠다는 무기는 없다. 대부분 안전하게 휴전선 이남에서 미사일을 쏴서 공격하겠다는 거다.”(전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작전]“한국군 작전 방식은 아직도 6·25전쟁 때처럼 몸으로 때우는 병력집약형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군 장성들이 자리 지키기에 급급해 병력 감축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예비역 해군 제독) [전력]“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구되는 능력이 10점이라면 미군은 7점 정도다. 한국군은 1~2점에 불과하다. 63만 대군은 숫자 놀음이다.”(군사 전문가) 대한민국 군은 1948년 창군 이래 외형적으로는 비약적 성장을 했다. 평시병력 63만명에 예비병력 310만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장갑차, 수상함정, 전투기 등 무기체계는 주요 선진국이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국방비는 2014년 기준으로 367억 달러를 지출해 세계 10위 정도다. 그러나 북한 군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군은 최근 들어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기강과 조직, 인사, 인력, 병영, 방위산업, 무기 획득, 작전, 전력 등 안보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중대한 문제점들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보안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던 군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은 이제 터진 둑의 물처럼 우리 사회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범국민 안보의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19.1%에 불과했다. 2013년의 41.9%와 비교하면 22.8% 포인트나 떨어졌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7.8%로 전해의 12.8%보다 25% 포인트 늘었다. 연구소에 따르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최근 5년 사이에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정치가 흔들리고 경제가 어려워도 나라는 지탱할 수 있다. 그러나 군이 무너지면 그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쓰라린 역사적 체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서울신문은 흔들리는 우리 군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강군으로 다시 서기를 기원한다. 이를 위해 우리 군이 가진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해결책도 제시하는 시리즈를 싣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주간 핫 영상] 장미란에게 배우는 ‘태극기 올바로 그리는 법’

    [주간 핫 영상] 장미란에게 배우는 ‘태극기 올바로 그리는 법’

    “오랜 국가대표 시절을 거치면서 태극기의 소중함을 많이 느껴왔다” 전 국가대표 역도선수 장미란이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의기투합해 ‘태극기 올바로 그리기’ 동영상을 제작,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것. 이에 장미란은 “태극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에 공개된 동영상은 서 교수가 추진 중인 ‘태극기 프로젝트’ 제2탄으로, 815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벌인 ‘태극기 그리기’ 실험 조사결과와 태극기를 올바로 그리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 7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강남역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남녀노소 815명을 대상으로 벌였다. 그 결과 태극기를 올바로 그리지 못한 인원(591명, 73%)이 올바로 그린 인원(224명, 27%)보다 3배에 달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서 교수는 “이번 조사결과처럼 우리 태극기를 올바로 인식 못 하는 시민들이 많아 대한민국 남녀노소 누구나 태극기를 손쉽게 그릴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이번 동영상 기획 의도를 전했다. 현재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인 서 교수와 장미란은 오는 광복절까지 이 동영상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꾸준히 홍보할 예정이다. 한편, 서 교수가 추진 중인 ‘대한민국 태극기 프로젝트’는 지난 3일 독도의 대형 태극기 재정비를 시작으로 다음 주 서울 스퀘어(구 대우빌딩) 외벽에 태극기 미디어 아트 전시, 광복절 당일에는 8150명이 함께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양재IC 국기게양대에 게양할 계획이다. 사진 영상=서경덕 교수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광복 70주년 ‘통일의 빛’

    광복 70주년 ‘통일의 빛’

    13일 저녁 서울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통일의 빛’ 점등식에서 보훈·호국·통일을 의미하는 3줄기 빛이 광복 70년을 이틀 앞둔 밤하늘을 비추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마련한 통일의 빛은 15일까지 오후 8시부터 밤 12시까지 4시간씩 불을 밝힌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12년째 제자리…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언제?

    12년째 제자리…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언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관련 단체와 자치단체 간 이견으로 12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13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논의는 2004년 시작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해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수 있게 된 데 따른 것이다. 12년이 지났지만 전북 전주시·정읍시·고창군·부안군과 충남 논산군의 의견이 달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자체 반발을 의식, 합의만 강조한다. 최근에도 동학기념재단이 지난 5일 고창군, 6일 정읍시, 12일 부안군을 방문해 전주화약일(6월 11일)을 기념일로 제정하는 방안을 놓고 간담회를 열었지만 합의안 도출에 실패했다. 고창군만 유보적 입장이고 정읍시와 부안군은 명분도 없고,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날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전주화약일은 지난해 재단이 유족회, 천도교, 학계 등으로 추진위를 결성해 의견을 모은 날이다. 관련 단체 30개 가운데 26개가 찬성했고 3개 단체만 반대했다. 관련 광역·기초 지자체 33곳도 29곳이 의견 없음, 3곳 반대, 1곳 찬성을 보였다. 찬성은 전주시, 반대는 정읍·고창·부안 등이었다. 기념일 제정은 2004년 당시 30여개 동학 관련 단체와 유족회 등이 참여해 고창 무장 기포일(4월 25일)로 의견이 압축됐다. 혁명군으로서 모습을 갖춘 최초의 사건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48년 동안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을 펼친 정읍시 반대로 기념일 제정에 실패했다. 정읍시는 황토현 전승일(5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08년까지 여러 차례 기념일 제정을 논의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일부 지역, 위안부 소녀상 건립 ‘푸대접’

    일부 지역, 위안부 소녀상 건립 ‘푸대접’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기 위한 평화의 소녀상이 전국 각지에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소녀상을 설치할 공원 이름을 생존 위안부 할머니 이름을 따 짓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역이 있는 반면 건립 장소를 찾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등 ‘대접’은 제각각이다. 경남 남해군은 남해여성인력개발센터 앞 숙이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해 14일 제막식을 한다고 12일 밝혔다. 군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인권 회복과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4000여만원을 들여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했다. 남해군에는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93·남해읍)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 이 평화의 소녀상은 박 할머니의 사연을 담아 한복을 입고 서 있는 소녀 모습과 바래(조개 캐기)할 때 쓰던 물건 등을 형상화했다. 박 할머니는 16살 때 남해군 고현면 바닷가에서 바래 가는 길에 외사촌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만주 등에서 7년간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군은 공원이름을 박 할머니 이름으로 정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푸대접받는 곳도 있다. 경남 창원시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시와 논의,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의 광장 입구 시유지에 소녀상을 건립하기로 했다. 시민성금을 모아 소녀상 제작까지 마쳤다. 추진위는 광복절 전에 제막하기 위해 기초공사를 하다 인근 주점 업주 등의 반대에 막혀 공사를 중단했다. 이들은 “가게 바로 앞에 추모 분위기의 소녀상이 건립되면 술 마시는 분위기와 맞지 않고 훼손 우려도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충북 평화의 소녀상 기림비 건립 시민추진위원회도 성금을 모아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소녀상을 제작했으나 설치 장소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추진위는 청주시 상당구 차 없는 거리에 설치하려 했으나 시가 도로법상 문제가 있다며 인근 청소년광장에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청소년 관련 단체들은 추모 분위기가 형성돼 청소년 행사에 지장을 준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추진위는 설치 대신 임시로 전시하려고 했지만 청소년단체들은 이마저도 반대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지난 3월 1일 간신히 울산대공원에 소녀상을 세웠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울산시민운동본부는 성금을 모금해 지난해 11월 북구 호수공원이나 울산대공원에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시와 북구가 난색을 보이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울산시는 “생태공원으로 특화돼 있고 다른 단체들의 구조물 건립 요청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반대했다. 시는 대신 중구 학성공원과 남구 문화공원을 후보지로 제안했으나 시민운동본부는 “학성공원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상주한 곳으로 역사성이 애매하고 시민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문화공원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은 시민의 눈 밖에 나도록 방치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울산시는 지난 2월 울산대공원 동문에 소녀상 건립을 허용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서울역앞 스퀘어에 ‘미디어 아트’로 초대형 태극기 재현

    국가보훈처와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의기투합해 광복 70년을 기념하여 서울역 앞 서울 스퀘어(구 대우빌딩) 외벽에 ‘미디어 아트’를 활용한 대형 태극기를 구현했다고 12일 밝혔다. 12일 저녁부터 총 10일간 구현될 이번 대형 태극기는 가로 99미터, 세로 78미터의 초대형 미디어 캔버스 위에 수만개의 LED 전구의 빛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 재현된 것이다. 이번 일을 함께 기획한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팀은 “대한민국의 상징이자 얼굴인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민 및 외국인 8150명의 사진을 활용하여 미디어 아트로 재현함으로써 광복 70년을 국내외로 경축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특히 이번 대형 태극기 안에는 안중근,윤봉길,이봉창,유관순,한용운 등 대한민국 독립 운동가의 이름을 한글로 함께 넣어 태극기의 괘를 재현하여 이들의 애국정신을 다시금 기리고 있다. 이번 한글을 재능기부한 배우 조달환은 “한글 캘리그라피스트로도 활동중인 저에게 이런 의미있는 일이 생겨 너무나 뜻깊다. 독립 운동가 정신을 되세기며 한글자 한글자에 혼신을 다해 썼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과거의 70년전 오래된 태극기의 모습부터 현재의 태극기 모습까지를 대형 화면에 순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임대주택 활성화 ‘뉴스테이 3법’ 가결

    국회는 11일 8월 임시국회 첫 본회의를 열고 기업형 임대주택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임대주택법 개정안’(뉴스테이법), ‘공공주택 건설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개정안’ 등 뉴스테이 3법 등 12개 법안을 가결 처리했다. 임대주택법 개정안은 민간 사업자에게 공공택지를 우선 공급해 중산층의 주거 안정을 위한 뉴스테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됐다. 사업자들은 8년 임대의무 기간과 연 5%의 임대료 상승률 상한만 지키면 초기임대료 규제와 분양전환 의무 등을 피할 수 있다. 뉴스테이 촉진지구에 한해서만 용적률·건폐율을 법정 상한선까지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기업에 대한 과도한 특혜 논란을 피하고자 일부 조항은 수정됐다. 공공주택건설 특별법 개정안은 행복주택 건설 가능 국유지 범위를 현행 국토교통부 장관이 관리하는 행정재산에서 국유재산 등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뉴타운 출구 전략을 담은 도정법 개정안은 2012년 1월 31일 이전에 정비계획이 수립된 구역 가운데 추진위가 구성된 경우에는 법 시행일 이후 4년까지 조합 설립 신청이 없으면 구역을 해제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는 산업단지 개발사업 시행자인 기업이 분할, 합병, 구조조정 등 불가피한 이유가 있으면 직접 개발해 사용하는 용지를 처분제한기간에 상관없이 처분할 수 있도록 한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처리했다. 국회는 또한 군 관련 8개 법안(군인사법 개정안, 군무원인사법 개정안, 군인연금법 개정안, 국군간호사관학교 설치법 개정안, 군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군사기밀 보호법 개정안,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개정안, 방위사업법 개정안)도 일괄 처리했다. 특히 군인사법 개정안은 국방부가 군인의 사망 원인을 밝히도록 했으며, 사망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면 모두 순직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사망한 군인에 대해 유족이 순직을 입증하도록 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광복에서 통일로, 여성이 쓰는 한국사회 미래전망” 13일 학술세미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원장 이명선)은 여성가족부(장관 김희정),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민간위원장 정종욱),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한국여성사학회(회장 박주)와 공동으로 오는 8월 13일(목) 오후 2시부터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광복에서 통일로, 여성이 쓰는 한국사회 미래전망”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공동개최한다. MobileAdNew center -->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달구벌에도 ‘평화의 소녀상’ 세운다

    달구벌에도 ‘평화의 소녀상’ 세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평화의 소녀상’이 대구에도 들어선다. 대구 평화의 소녀상 건립 시민추진위원회는 오는 15일 오후 3시 남구 대명동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내 작은 공원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한다고 10일 밝혔다. 추진위원회는 “과거 일본군에 어린 소녀들이 끌려가는 일과 같은 비인권적인 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다시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이 땅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는 뜻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평화의 소녀상은 키가 160㎝가량인 소녀가 태극기를 손에 든 모습으로 현재 청동으로 제작 중이다. 소녀상 옆에는 통나무 형태의 의자를 둬 누구나 앉아 소녀상의 뜻을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대구에 있는 한 조각가가 재능 기부 방식으로 제작을 맡았고 추진위가 재료비 등을 댔다. 추진위는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장소를 고민해 오다 대구여상으로 결정했다. 추진위는 대구시교육청과 협의해 학생들이 소녀상을 둘러보고 역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마련할 예정이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한여름밤 경복궁·덕수궁에 흐르는 우리 소리

    한여름밤 경복궁·덕수궁에 흐르는 우리 소리

    한여름 밤 고궁에 청아한 우리 소리의 선율이 흐르고 아름다운 우리 춤사위가 펼쳐진다. 고궁 벽면은 오색영롱한 빛으로 물든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오는 13~30일 ‘위대한 문화유산, 미래를 열다’를 주제로 경복궁과 덕수궁에서 개최하는 ‘광복 70년 기념 문화유산 활용 축제’에서다. 경복궁 경회루에선 경복궁 야간 특별관람과 연계해 13~15일 ‘경회루, 성하(盛夏)에 물들어’가 진행된다. 누각, 연못, 만세산(섬) 등 경회루 건축물과 경관을 무대 배경으로 신라 뱃놀이에 기원한 조선시대 궁중 무용 ‘선유락’(船遊), ‘오고무’(五鼓舞), ‘부채춤’, 안숙선 명창의 선상공연 ‘뱃노래’, 이생강 명인의 ‘대금독주’, 첼리스트 김해은의 ‘첼로연주’ 등 다채로운 공연이 이어진다.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지낸 한국무용가 국수호가 연출을 맡았다. 덕수궁 석조전에선 석조전 외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가 13~16일 선보인다. ‘미디어 파사드’는 미디어(media)와 건물 외벽을 뜻하는 파사드(facade)의 합성어로, 건물 외벽에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미디어 파사드’는 연세대 김형수 교수가 예술감독을 맡아 석조전의 역사적 장소성과 건축적 특성을 반영한 영상으로 연출한다. 입체 음향과 함께 석조전에 광복 70년의 역사를 담은 ‘빛의 옷’을 입힌다. 덕수궁 함녕전에선 20일 ‘덕수궁 풍류’ 100회 기념 특집 공연이 열린다. ‘덕수궁 풍류’는 중요무형문화재 가(歌)·무(舞)·악(樂) 분야 예인들이 출연하는 야간 전통공연으로, 2010년 시작됐다. 이번 특집 공연에는 구음 정영만(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대금독주 이생강(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판소리 안숙선(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사물놀이 이광수 명인이 출연해 창작국악그룹 ‘바라지’, ‘숨’ 등 신진 국악인과 함께 과거를 회상하고 새로운 도약을 기원하는 무대를 만든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장미란 서경덕 ‘태극기 그리기’ 동영상 공개

    장미란 서경덕 ‘태극기 그리기’ 동영상 공개

    “오랜 국가대표 시절을 거치면서 태극기의 소중함을 많이 느껴왔다” 전 국가대표 역도선수 장미란이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의기투합해 ‘태극기 올바로 그리기’ 동영상을 제작,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것. 이에 장미란은 “태극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에 공개된 동영상은 서 교수가 추진 중인 ‘태극기 프로젝트’ 제2탄으로, 815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벌인 ‘태극기 그리기’ 실험 조사결과와 태극기를 올바로 그리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 7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강남역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남녀노소 815명을 대상으로 벌였다. 그 결과 태극기를 올바로 그리지 못한 인원(591명, 73%)이 올바로 그린 인원(224명, 27%)보다 3배에 달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서 교수는 “이번 조사결과처럼 우리 태극기를 올바로 인식 못 하는 시민들이 많아 대한민국 남녀노소 누구나 태극기를 손쉽게 그릴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이번 동영상 기획 의도를 전했다. 현재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인 서 교수와 장미란은 오는 광복절까지 이 동영상이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꾸준히 홍보할 예정이다. 한편, 서 교수가 추진 중인 ‘대한민국 태극기 프로젝트’는 지난 3일 독도의 대형 태극기 재정비를 시작으로 다음 주 서울 스퀘어(구 대우빌딩) 외벽에 태극기 미디어 아트 전시, 광복절 당일에는 8150명이 함께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양재IC 국기게양대에 게양할 계획이다. 사진 영상=서경덕 교수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데스크 시각] 광복 70주년 유감/이지운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광복 70주년 유감/이지운 정치부 차장

    명절이나 기념일은 딱 그날을 쇠기까지다. 설이나 추석, 무슨 기념일이든 그 전후가 다른 법이다. 그런 점에서 올 8·15는 대단히 유감이다. 광복 70주년이 열흘 뒤인데, 분위기랄 게 없다. 오는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논의를 4일 국무회의에서 할 것이라는데, 늦은 감이 있다. ‘국민 사기 진작방안’의 하나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식적으로 50개 사업을 진행한다는 말에 놀랐다. 정부 각 부처와 지자체들이 준비하고 벌인 행사와는 별도다. 굳이 주변을 돌아보니 ‘태극기 선양운동’,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기념 뮤지컬 ‘아리랑’ 정도가 눈에 띈다.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가 ‘광복 70년 주제어 및 엠블럼 선포식’을 가진 게 지난 5월이다. 주제어는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 낯설기도 하지만 설명을 보니 70주년이 더욱 민망해진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민의 노력으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달성해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세계 8대 무역강국, 동·하계 올림픽 유치와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 한류 수출 문화강국이자 세계 일곱 번째의 30-50클럽(3만 달러-5000만 국민) 가입을 눈앞에 둔 광복 70년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도약은 “이런 성취를 이뤄 낸 민족적 역량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국민이 하나 되어 선진사회와 광복 이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통일 국가의 전기를 마련해 나가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 70주년이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됐다. 기본적으로는 메르스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메르스 외에는 뭐든 도저히 주목받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느냐”고 한 관계자는 볼멘소리를 했다.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인 국무총리가 오랜 기간 공석이거나, 공석에 준하는 상황이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듯싶다. 그래도 정부는, 공무원들은 좀 각성할 필요가 있겠다. 국무총리실을 포함해 기재·교육·행자·외교·통일·미래·문체·산업·국토·해수·여가부에 보훈처와 문화재청까지 행사 주관만 14곳이다. 저마다 부지런히 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민간의 어지간한 공연 기획도 이보다는 나을 듯싶다. ‘정권’도 크게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다. 역사를 되새기는 데 이만한 기회가 또 있을까. 국민적 역량을 결집하는 데 이만한 때를 따로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올해는 기념일을 넘겨도 할 일은 적지 않을 것 같다. 70년 전 일본의 패전을 둘러싼 오늘날의 전쟁이 오는 15일부터 새로 시작되려 하고 있어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가 무엇을 담느냐가 새로운 각축전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들 보고 있다. 아베는 9월 초 중국을 방문하고 내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을 기다리는 외교 일정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9월 3일 ‘항일전쟁 승전 70주년 기념’에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세계 각국 정상급 지도자를 초청해 놓았고, 천안문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자동차 2부제가 부활하고 또다시 스모그와의 전쟁을 먼저 치르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과 일본 등 주변을 향한 메시지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광복 70주년과 관련해 청와대도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걸 것 같다. 우선 남은 기간 열심을 쏟을 일이다. jj@seoul.co.kr
  • 서천군, 전통과 현대의 만남 ‘한산모시 패션쇼’ 개최

    서천군, 전통과 현대의 만남 ‘한산모시 패션쇼’ 개최

    충남 서천군은 오는 8일 한산모시관 내 특설무대에서 ‘한산모시 패션쇼’를 개최한다. 한산모시문화제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사)세계전통복식문화연구원이 주관하는 이번 패션쇼는 대한민국 한복명장 9명이 한산모시만의 단아한 미와 전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작한 전통의상, 현대의상, 웨딩의상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서는 모시옷 홍보 외에도 다례, 염색 체험 등이 연계 프로그램으로 진행돼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노박래 서천군수는 “이번 패션쇼는 한산모시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지속적으로 모시옷 전시·판매 행사를 개최해 모시옷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서천군은 지난 6월 한산모시문화제 기간 중 ‘한산 모시, 세계를 누비다’라는 주제로 패션쇼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메르스 여파로 취소된 바 있다. 이미경 기자 btfseoul@seoul.co.kr
  • 을사늑약 치욕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을사늑약 치욕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공간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지키고 근대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던 상징적인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문화재청과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8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중명전에서 공동 개최하는 특별전 ‘중명전, 고난을 넘어 미래로’를 통해서다. ●헤이그특사 파견 결정한 역사의 현장 중명전은 1897년 황실 도서관으로 건립됐다. 당시 명칭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됐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대화재가 발생해 고종이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중명전으로 불리게 됐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결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근대국가 도약 꿈꿨던 공간 이번 전시는 단순한 유물 진열 방식에서 벗어나 첨단 장비를 활용해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 게 특징이다. 전시는 4개 부문으로 꾸며진다. ‘도입부’에선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 현장을 영상과 음성으로 연출해 보여준다. ‘고종황제의 고뇌, 그리고 헤이그’에선 일제 침탈에 맞서 자주 의지를 보여 주고자 했던 대한제국 선포 모습 등을 삽화와 그래픽으로 소개한다. 이어 ‘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에선 관객 움직임에 반응해 가상현실을 연출하는 ‘키네틱 영상 시스템’을 활용해 관람객이 3·1 만세 운동 현장에 함께 참여하는 듯한 장면을 선보이고 독립운동 관련 유물 등도 영상으로 소개한다. ‘종결부’에선 광복 이후 모습과 남북 분단의 시련 등을 ‘렌티큘러 기법’(화면을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보여준다. ●첨단장비 활용 3·1운동 현장에 온 듯 문화재청은 “항일독립 운동과 관련된 등록문화재와 유품 등을 활용한 참여형·체험형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자주독립을 위한 선인들의 헌신과 노고를 되돌아보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펼쳐 나가기 위해 그 뜻과 정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를 숙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신용정보집중기관, 누구도 만족 못시켜

    신용정보집중기관, 누구도 만족 못시켜

    금융업권의 신용정보를 모두 통합한 종합신용정보집중기관을 은행연합회 산하기관으로 설립하는 방안을 놓고 금융권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은행권에서는 은행연합회를 통합 집중기관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 비은행권에서는 은행연합회와는 완전히 분리,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중기관 통합추진위원회(통추위)가 내놓은 절충안(산하기관 설립)이 외려 혼란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카드사 대규모 정보 유출 사태로 신용정보법을 전면 개편하면서 금융 당국은 5개 금융업권 협회별로 나눠 관리하고 있는 신용정보를 한 곳에 모으는 종합기관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각 업권에 흩어져 있는 대출·연체 정보와 보험정보 등이 한 곳에 집중되기 때문에 금융사 건전성 관리에 용이하다. 예컨대 지금은 은행이 보험 약관 대출 정보를 볼 수 없지만 통합이 되면 볼 수 있어 좀 더 정확한 대출 심사가 가능해진다. 금융 당국은 더 나아가 통합된 비식별 정보를 바탕으로 빅데이터 산업도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올해 2월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정무위원회가 ‘종합 신용정보 집중기관은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구성·운영하도록 한다’는 부대 의견을 달면서 해석이 분분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통추위는 지난달 은행연합회 산하기관으로 설립한다고 결정했다. 은행연합회와 금융노조 등은 “말이 산하기관이지 신용정보 업무를 은행연합회에서 떼내 사실상 제3의 독립기관을 만드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미 대출 정보를 집중 관리하고 있는 은행연합회를 집중기관으로 그냥 지정하라는 주장이다. 보험 등 비은행권에서는 은행연합회와의 ‘거리’를 좀 더 분명하게 둬야 한다고 반발한다. 보험권 관계자는 “은행연합회가 다른 금융업권까지 검사에 준하는 부당한 간섭을 할 수 있다”며 “집중기관의 공공성과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독립기관으로 해야 하며 최소한 은행연합회 산하로 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통추위 관계자는 “독립된 기관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국회 합의와 업권별 이해관계, 효율성 문제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어떻게 산하기관으로 운용할지는 좀 더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종합신용정보집중기관을 두고 있는 30개국 가운데 특정 협회 밑에 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美 노병들 “통일되면 그 땅에 꼭 다시…”

    美 노병들 “통일되면 그 땅에 꼭 다시…”

    “통일이 되면 장진호에 꼭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정전 62주년인 27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시 해병대박물관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삽을 들고 모였다. 미 전쟁사에 ‘불멸의 동투(冬鬪)’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6일~12월 11일)를 기리는 기념비 건립을 위한 기공식이 열린 것이다. 65년 전 처절했던 혹한의 사투에서 살아남은 노병들은 더 늦기 전에 장진호 전투 현장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밝혔다. 존 그레이(90) 예비역 중령은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리고 물이 부족해 길가의 눈을 먹었던 일, 고토리를 탈출해 흥남으로 향하던 고통스러웠던 행군의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며 “그래도 다시 그 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브루스 우드워드(85) 장진호 기념비 추진위원장도 “빨리 통일이 돼 다시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기념비 건립을 위해 첫 삽을 뜬 참전용사들은 모두 ‘고토리의 별’을 장식한 배지를 달았다. ‘고토리의 별’은 장진호 전투가 정점으로 치닫던 1950년 11월 26일 밤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지역에 뜬 밝은 별을 뜻한다. 이 별을 신호탄으로 미 해병1사단이 이중 삼중의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기리고자 ‘고토리의 별’ 장식을 만든 것이다. 내년 완공 목표인 기념비 꼭대기에도 같은 장식이 올려진다. 장진호 전투의 주역으로 꼽히는 스티븐 옴스테드(85) 예비역 중장은 “한국은 내 가족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옴스테드 중장은 이어 “이 기념비는 단순히 미국 해병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유엔의 이름으로 싸웠던 모든 동맹국의 병사들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동상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리처드 케리(88) 예비역 중장은 “지난 3년간의 건립 추진 노력이 결실을 거둬 너무 기쁘다”며 “우리는 장진호 전투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두 7억원이 드는 소요되는 기념비 건립에 국가보훈처가 1억 5000만원을 건립위원회 측에 전달했다.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도 자문위원들의 도움을 받아 15만 달러를 모아 전달했다. 한편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 현직 미 의원들인 찰스 랭글(민주), 존 코니어스(민주), 샘 존슨(공화) 하원의원 등은 이날 ‘휴전 상태인 한국전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참전용사들에 경의를 표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의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경기도 뉴타운 출구전략 확대

     경기도가 지지부진한 도내 뉴타운과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출구전략 마련을 위해 매몰 비용(사업을 포기할 경우 그동안 사용 비용을 보전해주는 것) 지원 대상을 확대한다.  도는 이런 내용을 담은 도시재정비사업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사용 비용 보조기준을 개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도 관계자는 “뉴타운 외에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 조합에도 매몰비용을 지원하며 자진해산 외에 직권해제된 곳도 지원대상에 포함했다”며 “조합에까지 매몰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경기도가 광역지자체 가운데 처음”이라고 말했다. 앞서 남경필 지사는 지난달 뉴타운 현황보고에서 “뉴타운 매몰비용 문제로 고통받는 주민이 많다. 매몰비용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주문했다.  지금까지는 조합 설립 이전 단계인 추진위원회가 자진 해산한 경우에만 매몰비용을 지원해왔다. 해제 정비구역의 추진위나 조합 대표자가 시장·군수에게 사용 비용 보조를 신청하면, 시장·군수는 산정위원회를 꾸려 검증에 나선다. 최종 인정 비용이 나오면 이 가운데 70%까지 보조하는 방식이다.  뉴타운 사업의 경우 인정비용의 35%를 도비로 지원하고 나머지 35%를 시·군이 부담한다.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은 인구 50만 이상의 경우 도비 10%, 나머지는 시·군, 50만 미만은 도비 20%, 나머지는 시·군이 지원한다. 다만 시장·군수가 내년 말까지 조합 등에 사용 비용을 보조한 경우에만 도비를 지원한다.  구리인창 뉴타운 E구역이 1억 7100만원을 지원받았고 현재 30여곳의 뉴타운 구역에서 매몰비용 지원을 신청해 절차를 밟고 있다. 도내에는 6개 시, 10개 지구에 52개 뉴타운 구역이 있다. 52개 구역 가운데 28개는 조합이 설립됐고, 17개는 추진위가 구성됐으며, 7개는 추진위 구성 이전 단계다.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의 경우 22개 시에 181개 구역이 있다. 181개 구역 가운데 57개가 조합이 설립됐다.  도는 해제됐거나 해제를 앞둔 정비구역을 66개 구역 정도로 보고 있다. 도는 이곳 추진위나 조합에 사용 비용 보조금으로 129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경기도 뉴타운 출구전략 확대

     경기도가 지지부진한 도내 뉴타운과 재개발·재건축 사업의 출구전략 마련을 위해 매몰 비용(사업을 포기할 경우 그동안 사용 비용을 보전해주는 것) 지원 대상을 확대한다.  도는 이런 내용을 담은 도시재정비사업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사용 비용 보조기준을 개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도 관계자는 “뉴타운 외에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 조합에도 매몰비용을 지원하며 자진해산 외에 직권해제된 곳도 지원대상에 포함했다”며 “조합에까지 매몰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경기도가 광역지자체 가운데 처음”이라고 말했다. 앞서 남경필 지사는 지난달 뉴타운 현황보고에서 “뉴타운 매몰비용 문제로 고통받는 주민이 많다. 매몰비용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주문했다.  지금까지는 조합 설립 이전 단계인 추진위원회가 자진 해산한 경우에만 매몰비용을 지원해왔다. 해제 정비구역의 추진위나 조합 대표자가 시장·군수에게 사용 비용 보조를 신청하면, 시장·군수는 산정위원회를 꾸려 검증에 나선다. 최종 인정 비용이 나오면 이 가운데 70%까지 보조하는 방식이다.  뉴타운 사업의 경우 인정비용의 35%를 도비로 지원하고 나머지 35%를 시·군이 부담한다.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은 인구 50만 이상의 경우 도비 10%, 나머지는 시·군, 50만 미만은 도비 20%, 나머지는 시·군이 지원한다. 다만 시장·군수가 내년 말까지 조합 등에 사용 비용을 보조한 경우에만 도비를 지원한다.  구리인창 뉴타운 E구역이 1억 7100만원을 지원받았고 현재 30여곳의 뉴타운 구역에서 매몰비용 지원을 신청해 절차를 밟고 있다. 도내에는 6개 시, 10개 지구에 52개 뉴타운 구역이 있다. 52개 구역 가운데 28개는 조합이 설립됐고, 17개는 추진위가 구성됐으며, 7개는 추진위 구성 이전 단계다. 재건축·재개발 등 일반정비사업의 경우 22개 시에 181개 구역이 있다. 181개 구역 가운데 57개가 조합이 설립됐다.  도는 해제됐거나 해제를 앞둔 정비구역을 66개 구역 정도로 보고 있다. 도는 이곳 추진위나 조합에 사용 비용 보조금으로 129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법조계 성공보수 관행 메스] “전관 변호사 사도 소용없다”… 사법부發 법조 개혁 신호탄

    [법조계 성공보수 관행 메스] “전관 변호사 사도 소용없다”… 사법부發 법조 개혁 신호탄

    대법원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무효 판결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또 법조계에서 성공보수 금지 논의가 시작된 지 20년 만이다.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대법관 13명은 죄의 유무를 가리고 형량을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돈을 주고받는 행위는 반사회적이고 사법 질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공통된 입장을 보였다. 24일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사법 불신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내건 논리도 “국가 형벌권의 공정한 실현”이다. 그러면서 “특정한 수사 방향이나 재판 결과를 ‘성공’이라고 정해 그 대가로 금전을 주고받는 변호사와 의뢰인 간 합의는 국민이 보편타당하다고 여기는 선량한 풍속 내지 건전한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정면으로 지적했다. ‘성공보수’의 의미도 조목조목 짚었다. 현재 형사사건에 있어 ‘성공’은 형사재판의 본질에 해당하는 인신 구속이나 형벌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이 대가로 지급되는 ‘성공보수’는 형사사법의 생명인 공정성과 염결성(청렴·결백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과도한 성공보수가 변호사의 공적 역할과 고도의 직업 윤리에 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 형벌권이 정당하게 실현되는 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민사 사건은 “의뢰인이 승소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등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성공보수 약정이 허용되는 데 문제가 없다”며 형사 사건과 차별화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이 법조계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 온 전관예우를 타파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형사사건과 관련해서는 유리한 결과를 받아내는 데 친분이나 청탁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 보고 많은 성공보수를 주고서라도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대법원은 전관 변호사를 찾는 경향이 잦아들면 사법불신도 불식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은 법률 서비스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변호사 비용이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당장은 착수금이 다소 오를 수 있지만 착수금은 형사 처벌 및 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지급해야 할 금액이므로 성공보수에는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변호사 보수의 과다 논쟁도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성공보수 문제는 장기적으로는 시간제 보수약정을 체결하거나 위임 사무를 세분화해 개별 항목마다 보수액을 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실 성공보수 문제를 먼저 공론화한 것은 변호사 업계 쪽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1995년 형사사건 성공보수 금지를 담은 변호사 보수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을 논의했지만 무산됐다. 1999년 대통령 자문기구로 출범한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도 이 문제가 재논의됐다. 고액의 성공보수 가능성과 윤리적 문제 등을 이유로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후 17대, 18대 국회에서 관련 내용을 담은 변호사법 개정안이 수차례 제출됐지만, 실제 개정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이때 변협은 이전과 달리 계약자유의 원칙에 어긋나고 공정거래와 자유 경쟁을 해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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