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추억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김치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갤러리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1억원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보험사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424
  • [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11월 13일, 1970년과 2020년

    [이윤경의 노동을 묻는다] 11월 13일, 1970년과 2020년

    11월이다. 11월에는 전태일의 죽음과 민주노총 창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50년 전 일이다.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목도하며 충격과 분노를 느꼈고, 이후 고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한 ‘전태일 평전’(1983년 당시에는 익명으로 출간)을 읽으며 노동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운동가들의 투쟁과 좌절, 그리고 고난이 쌓여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정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문 대통령은 추서식에서 “오늘 전태일 열사에게 드린 훈장은 ‘노동존중 사회’로 가겠다는 정부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존중 사회로 가겠다는 정부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 갖는 실제 무게와 실천은 과연 무엇일까? 왜 정부의 의지가 아니고 정부 의지의 상징인 걸까? 1970년 전태일은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하는 10대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절규했다. 2020년 들어서 택배 노동자가 열 분, 그것도 10월 한 달 동안에만 세 분이 사망했다. 다수가 과로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이 하루 평균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 평균 4420건의 물품을 배송하고, 건당 800원의 배송 수수료를 받는다는 이 숫자들로 보아 이들의 죽음이 과로사가 아닐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사 직원 한 분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이런 추세로라면 올해도 작업장 사고 또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의 수가 ‘평균 2000여 명’을 채울 전망이다. 마음이 무거워져 글을 쓰기 힘들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무엇을 하고 있나? 노동계에서 ‘전태일 3법’이라 부르는 노동조합법 개정안(특수고용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조 결정권 추가), 근로기준법 개정안(영세 사업장 노동자의 근로 조건 개선),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안(산업 재해 발생 시 기업의 책임성을 강화)에 대해 앞장서도 부족할 더불어민주당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가 택배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내놓은 대책도 기업에 대한 강제성은 없고, 무수한 권고와 유도로 채워져 있다. 강제성이 있는 법도 어기는 것이 자본가인데, 권고가 무슨 힘을 가질 거라고 예상하는 것일까? 게다가 노동운동가 개인과 노동조합을 금전적으로 옥죄어 파괴하는 손해배상소송 및 가압류의 남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시민단체 ‘손잡고’와 민주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2020년 11월 현재,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은 총 58건이며, 그 액수가 658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 문재인 정부 들어 새로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만 28건이고 그 청구 금액은 68억 7000여 만원에 달한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던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손해배상 소송 남용은 노동3권을 무력화하는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민주당은 국회에서 다수 정당이 되면 손해배상 및 가압류법을 고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정치는 “의지의 상징”이 아닌 구체적인 정책과 입법으로 구현된다. 역대 가장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문 대통령과 역대 가장 많은 의석을 갖고 있는 집권 여당이 노동존중 사회를 위한 개혁 입법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과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의 절대 다수당인 민주당이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을 보호하려는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아련하게 호명하고 훈장을 추서하는 것은 씁쓸한 추억팔이 또는 정치적 퍼포먼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수세적이고 관례적인 행위만 반복한다면, 중도와 안정이라는 간판 뒤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약속한 정책을 입법하고 집행하지 않는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어떤 정치 세력도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국민의 심판을 비켜갈 수 없다.
  • [취중생]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공공 공연장 바라보는 민간 공연장의 한숨

    [취중생]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공공 공연장 바라보는 민간 공연장의 한숨

    [편집자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취중생’(취재 중 생긴 일)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사건팀 기자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코로나19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의 이야기가 연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홍대 일대 민간 공연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로 휴·폐업에 들어가는 등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이들 옆에 서울시가 정부 예산을 지원하는 ‘공공 공연장’을 개관했습니다. 홍대 공연장들이 이를 생존권 침해라며 반발하는 가운데 서울시는 시민들의 문화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서울시는 서울생활문화센터 서교를 개관했습니다. 서울생활문화센터 서교는 170석 규모의 전문 공연장과 연습실, 다목적실, 강의실 등을 갖춘 공연·문화시설입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비영리 공연뿐만 아니라 프로 아티스트(전문 예술인)의 공연도 대관할 수 있는 등 대관 대상에 제한이 없는 점이 문제가 됐습니다. 홍대 인근의 민간 공연장들과 직접 경쟁하게 된 셈이기 때문입니다. 롤링홀 등 홍대 인근 공연장 85곳은 즉각 반발하면서 ‘홍대 공연장 연합’을 결성해 지난 6일 서울시에 서울생활문화센터 서교의 운영 중단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공문에 적힌 요구는 ▲연극, 뮤지컬을 제외한 대중음악 장르의 기획 및 대관 금지 ▲협상 타결까지 센터 운영 중지 두 가지입니다. 지난 12일 서울시는 공문에 답을 보냈습니다. “연극, 뮤지컬로 한정해 운영하는 요청은 서울생활문화센터의 건립 취지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과도한 요청이어서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어 “홍대 공연장 연합 측의 입장을 반영해 운영 방향과 기획 공연 및 대관 공연의 대상·날짜 배분 등 구체적인 운영계획을 검토 중에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협상 가능성은 물 건너 간 셈입니다. 홍대에서 프리즘홀을 운영하는 이기정 대표는 “시는 정책이니 해야 한다는 간단한 문제지만, 인근 민간 공연장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라고 토로했습니다. 한국 인디음악의 성지로 불리는 홍대는 라이브 공연장과 인디밴드들이 함께 공연 생태계를 조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 업계가 타격을 입으면서 홍대 공연장들도 임대료와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공연 업계에 따르면 홍대 인근 대표 공연장인 하나투어 브이홀이 폐업하고, 밴드 크라잉넛이 탄생한 공연장 DGBD(옛 드럭)와 무브홀 등도 문을 닫았습니다. 인디음악을 대표하는 공연장들이 사라지자 음악팬들은 “브이홀, 무브홀 다 없어지면 밴드 내한 공연은 어디서 하나”, “공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인데 마음이 아프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홍대 공연장들은 코로나19로 관객을 10분의 1만 받는 가운데 직접 방역물품을 마련하고 방역알바를 고용하는 등 추가 지출은 늘어나 힘겹게 운영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됐을 때는 대부분 공연이 중단돼 수입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키면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정부가 뒤로는 공연장을 여는 등 소상공인과 경쟁하고 우리를 거리로 내몰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인근 민간 공연장들의 반응이 난감하다는 입장입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재정을 투입해서 운영하기 때문에 대관료를 비싸게 측정할 수도 없고, 너무 싸게 대관하면 인근 민간 공연장이 타격을 입어 무조건 가격을 낮출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서울시의 시장조사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주말 기준 인근 공연장 시세가 220만원에서 250만원 사이인 것을 고려해 총 대관료를 220만원으로 책정한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다만 총 대관료는 주말 기준 공연장 대관료 120만원에 음향·조명 인력 60만원과 악기사용료 40만원 등을 합해 산출됐습니다. 생활문화 동아리는 할인을 적용해 주말 기준 45만원에 공연장을 대관할 수 있습니다. 이 대표는 “프로 공연팀은 이미 자체 음향·조명 인력과 악기를 보유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반값’ 공연장”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예술인들은 서울생활문화센터 서교 개관을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예술인이 살아야 공연장도 산다’, ‘공공 공연장인데 가격이 비싼 것 같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공연 예술인들도 코로나19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질서를 지키며 유지되던 홍대의 공연·문화 생태계에 코로나19라는 악재가 들이닥쳤고, 여기에 ‘공공 공연장’이라는 변수가 추가되면서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서울시가 상생이 가능한 운영 계획을 내놓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길섶에서] 난로와 고타쓰/이종락 논설위원

    겨울철로 접어들면 늘 생각나는 추억거리가 있다. 손을 호호 불면서 등교하면 따뜻하게 반겼던 연탄난로다. 당번이 조개탄을 받아 와서 난로에 불을 지펴 놓으면 교실문을 열자마자 빠알갛게 얼어붙었던 얼굴이 스르르 녹기 시작한다. 혹시 당번의 등교가 늦어 교실에 냉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라도 하면 학생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양은 도시락 안에 계란프라이를 담고 참기름을 잔뜩 발라 난로 위에 올려놓으면 1교시부터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7일 공식 트위터 계정에 김장철을 알리는 글과 함께 난방기구 ‘고타쓰’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올려 논란을 빚었다. 고타쓰는 나무로 만든 상 아래에 화덕이나 난로를 둔 뒤 이불이나 담요를 덮어 열을 유지하는 일본식 난방기구다. 그림에는 탁상 아래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탁상에서 책을 보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네티즌들의 지적이 잇따르자 농식품부는 당일 저녁에 문제의 이미지를 내리고 김장이 들어간 다른 이미지로 교체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의미 있는 날(입동)에 저희의 부족으로 불쾌함을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의 글도 올렸다. 문명의 편리함에 너무 쉽게 빠져 역사도 추억도 도외시한 실수다. jrlee@seoul.co.kr
  • [신간] 빗장을 열다/이정순 시인

    [신간] 빗장을 열다/이정순 시인

    문학은 어떤 말의 어떤 속성, 함축성, 감정 유발성, 경험 등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테두리로 형성된다. 즉 문학은 인간이 가진 정서의 표현이며, 사회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글을 통해서 상호 가치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글이라고 모두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축적이고 정서를 유발하는 글, 서술한 자체로 충족된 의미 있는 세계를 이루는 작품들이 문학의 가치다. 이같은 문학의 한 장르인 시는 인간 내면의 세계를 경험과 융합하는 정신적인 활동이다. 문맥속에서 언어 조작에 대한 충실성을 도모하는 것이 기본적인 맥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경험의 시학’에 대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경험의 편차로 만들어진다. 한 편의 시는 기억의 근본으로 드러내기 기법과 감추기 기법의 편차를 시 속에 화자를 투영해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해 마무리된다. 이정순 시인의 새 시집 ‘빗장을 열다’(그림과책)는 현대 시가 가진 맥락 속에서 경험 소재로 감각적인 형상을 다양하게 표현한 작품집이다. 표제 시 ‘빗장을 열다’는 화자의 경험적인 맥락을 통하여 시적인 전개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득한 장독대 주인 손길 기다림에 지친 몰골 그제 내린 빗물인지 눈물인지 점점이 얼룩 흔적들 밀려드는 설움 눈 설레 마주한 날 자드락 비 몰아친 날 햇빛 짱짱한 날 분주하던 어머니 투명한 그리움 한바탕 쓸고 닦고 어머니 마중하고픈 오늘 -‘빗장을 열다’ 중에서 문학평론가 김환철 시인은 “문을 닫고 가로질러 잠그는 막대기인 ‘빗장’을 시의 소재로 도입해 추억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인지시키는 동시에 그리움을 발현시키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빗장’이라는 매개체로 어머니가 계실 것 같은 공간 속에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화초, 대청마루, 장독대 등 추억의 사물들을 도입하여 어머니에 대한 간접적인 만남을 꿈꾼다. 지금은 화자의 곁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이 작품에 다양한 시어들을 통해 녹아있다. ‘한바탕 쓸고 닦고 어머니를 마중하고픈 오늘’에서는 어릴 때 집안 청소를 해 놓고 칭찬받고픈 아이의 마음이 투영돼 있으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오신다는 동화적이 판타지적 요소도 결합됐음을 알 수 있다. ‘빗장을 열다’는 시공을 초월한 장면과 교감을 통한 기발한 상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김 시인은 “이정순 시인의 작품세계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시적 미학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실존적인 체험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고 재현해 시인의 특유한 시선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다”며 “특유한 미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직관적인 표현을 초월해 상상력의 도입과 판타지적인 동화 요소를 결합해 이정순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빗장을 열다’는 제17회 풀잎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한국시사문단작가협회 우수 시집으로 선정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블루마블·지구돋이…NASA 우주 탐사 역사담은 희귀 사진 경매

    블루마블·지구돋이…NASA 우주 탐사 역사담은 희귀 사진 경매

    인류 우주 탐사의 도전을 담은 희귀한 사진들이 무더기로 경매에 나왔다. 지난 10일(이하 현지시간) CNN 등 현지언론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탐사 황금기 시기 촬영된 총 700장의 원본사진이 오는 19일까지 크리스티 온라인 경매를 통해 판매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NASA의 우주탐사 황금기는 미국과 소련이 달 탐사 경쟁을 벌였던 1960년 대 냉전시기를 말한다. 지난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 절치부심하던 미국은 결국 달에 성조기를 꽂으며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이번에 경매에 오른 사진들은 당시 화려했던 우주탐사의 영광을 기록한 추억이자 역사다.이번 경매 사진 중 가장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총 3장이다. 먼저 지난 1969년 아폴로 11호 임무 당시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 위에 서있는 사진이다. 달 위에 홀로 서있는 암스트롱을 담아낸 사진으로 촬영자는 '비운의 우주인' 버즈 올드린이다. 이 사진의 예상 낙찰가는 최대 6만3000달러(약 7000만원)다.이어 인류가 첫번째로 촬영한 ‘어스라이즈’(Earthrise)가 최대 3만7800달러(약 4200만원)로 평가받았다. 어스라이즈는 우리 말로 ‘지구돋이’를 뜻하는데 1968년 12월 24일 당시 지구촌이 크리스마스 이브로 들떠있을 때 아폴로 8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인 윌리엄 앤더스는 역사적인 이 사진을 촬영했다.그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사진은 1972년 촬영된 블루마블(Blue Mable)이다. 당시 달로 향하던 아폴로 17호의 승조원들은 지구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우주에 두둥실 떠있는 '푸른구슬'을 담아 역사적인 이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은 3만1500달러(약 3500만원)로 평가받았다.또한 버즈 올드린의 인류 최초 우주셀카도 경매에 나왔다. 최대 1만600달러(약 1200만원)의 가치가 매겨진 이 셀카는 암스트롱에 이어 항상 2인자에 만족해야 했던 그에게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을 안겼다. 그는 1966년 제미니 12호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최초의 우주 셀카를 남겼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지난 1월 시작된 코로나19가 11월이 되도록 지속되는 상황에서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크게 줄어들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회 ‘추억의 극장가’ 편에 참여하기 위해 충무로역 1번 출구 앞에 모인 우리들은 눈앞의 대한극장을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1958년 개관해 초대형 스크린에 ‘벤허’, ‘마지막 황제’ 등 대작을 상영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테고, 2001년 11개 상영관의 멀티플렉스로 완전히 변신했을 때를 되돌아보는 이도 있을 터였다. 저마다의 나이에 따라 추억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기억은 바로 지난 11개월간의 일상일 것이다. 지난해 가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고 올 초에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에 감염병의 습격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꿔 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사람끼리 어떤 형태로든 접촉한다는 것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절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때 영화관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었고 오락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어느새 전설처럼 그리운 시절이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스크린 속의 이야기에 함께 빠져들며 같은 장면에서 소리 내어 함께 웃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함께 울기도 했던…. 가을이 깊어 가는 주말 우리는 충무로를 거쳐 을지로와 종로까지 한때 ‘서울의 10대 개봉관’으로 불렸던 극장들을 따라서 걸어 보기로 했다. 사라지고 변화되고 그나마 남아 있기도 한 그 모습들을 찾아서.먼저 서울미래유산 산업노동 분야에 선정된 ‘충무로 인쇄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오래되고 활력을 잃은 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영화산업의 발전과 함께 영화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면서 형성된 충무로 인쇄골목은 이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인쇄산업 메카로서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산업과 함께 발전해 온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연말을 맞아 달력과 연하장, 다이어리 등을 진열해 놓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디지털 시대에도 인쇄물을 통해 시간을 관리하고 손글씨로 안부를 전하는 풍경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정겹게 되돌아보며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만난 스카라극장 터. 지금은 아시아미디어타워 건물이 우뚝 솟아올라 있다. 1935년에 1000석이 넘는 규모로 세워져 국내 초창기 극장 건축의 역사를 간직해 온 까닭에 2005년 문화재 등록이 예고되자 건물주가 재산권 침해라며 철거를 해 버린 것이다. 급속한 사회 변화로 근현대 서울 시민의 모습이 담긴 문화유산이 덧없이 사라져 버린 생생한 현장이다. 199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생겨나면서 기존의 극장들이 복합상영관으로 변신해 갈 때도 스카라는 단관을 고수하며 국내 최대 스크린을 유지해 왔으나 반원형 현관 부분이 도로 쪽으로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새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전형을 70년 동안 보여 주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서울미래유산처럼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개별적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보전 방식이 그때도 있었다면, 문화재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이 그때도 지금처럼 높았다면…. 아쉬운 마음으로 대각선 방향의 명보극장으로 향하자 그나마 안심이 된다. 이제는 뮤지컬과 연극 등의 공연을 주로 하는 명보아트홀로 바뀌었지만 1957년 개관한 이래 스카라극장과 마주 보며 관객몰이를 했던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극장 앞 광장에 새겨진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광장 한쪽의 이순신 장군 생가터 표지석은 충무로라는 도로명의 유래까지 알려 준다.하지만 을지로로 접어들어 국도극장 터에 이르자 또다시 진한 아쉬움이 밀려든다. 문화재로 등록될 기미가 보이자 극장주가 건물을 허물어 버린 것은 이곳이 스카라보다 먼저였으니 1936년에 동양풍을 가미한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대리석 건물로 세워진 국도극장은 1999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국도호텔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충무로 인쇄골목을 지나오면서 1970년대 지어진 낡은 건물들 속의 인쇄 관련 업체들을 살펴봤고, 또한 1970년대에 완공된 세운상가 건물군을 지나쳐 온 까닭일까. 국도극장 터를 표시하는 기념 표석 앞에서 우리는 어느덧 1970년대를 추억하게 됐다. 지금과 같은 예매 시스템도 없이 단일 개봉관에서 신작 영화를 몇 달씩 상영했던 그 시절에는 이곳 국도극장에서도 아침부터 영화표를 예매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을 것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가 모두 이곳 국도극장에서 개봉됐으니 이른바 70년대 청년영화를 보기 위해 당시 을지로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이곳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을까.고도 성장기에 접어든 70년대 산업화의 역군들은 극장에서 한국 영화가 보여 주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방황과 좌절에 공감하며 한편으로는 영화처럼 빛나는 삶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과 유신 시절의 억압을 잠시 잊은 채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이 극장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듯 우리는 국도극장 터를 뒤로한 채 바로 앞 세운상가 3층 보행데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무로와 나란히 종로로 이어지는 세운상가는 약 1㎞ 길이의 초대형 주상복합상가로 일제강점기에 전쟁을 대비해 비워 둔 공터 자리에 세워져 각종 전자제품을 취급하며 명성을 날렸으나 1990년대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고 강남이 부상하면서 급격히 침체에 빠졌다. 그래서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녹지축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있었으나 5년 전부터 서울시가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다시세운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 컴퓨터, 불법 복제 등 세운상가를 통해 보급되고 발달한 다양한 ‘신기술’과 ‘신문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시 정비된 세운상가의 3층 보행데크를 걸으면서 한국 영화와 극장 건물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이쪽은 기존의 제조 산업을 디지털 디바이스와 결합하고 우리가 지나온 인쇄골목 쪽 상가 구간은 인쇄산업과 크리에이티브 디자인을 결합해 4차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다시 살리겠다고 하니 철거 대신 선택한 존치 재생이 다른 여러 산업과 문화에도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싶었다. 청계천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세운상가군이 자연스럽게 공중 보행교로 연결되고 있어서 잠시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시간도 가져 봤다.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지도 어느덧 15년. 산업화 시대를 지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진정한 현대화를 이뤄 가는 우리의 미래를 청계천 물길을 따라 상상해 본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종로와 만나는 세운상가 끝자락에서 다시세운광장 건설 때 발굴한 조선시대 중부관아 터 유적을 둘러보고 9층 옥상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종묘 숲을 보면서 서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인가를 실감했다. 옥상에서 사방으로 둘러보는 도심은 현대식 빌딩으로 가득하지만 바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으니 다시 한번 개발과 보존에 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한 순간이었다.다시세운옥상에서 서울의 기운을 가득 받아 안고 종로로 내려가서 서울극장 앞에 이르자 추억의 오징어구이와 군밤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길 건너 단성사는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새로 지은 빌딩의 이름 속에 흔적으로만 남았고, 피카디리극장도 광장의 핸드프린팅마저 지하로 내려가 옛 모습이 아니었지만 영화관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다 하고 있다. 1960년대의 세기극장을 인수해 1979년 서울극장으로 개관한 이후 증축을 거듭하며 일찌감치 복합상영관 시대를 열었던 서울극장은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극장으로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허리우드극장 역시 서울미래유산인데, 1969년 낙원상가 건립과 동시에 개관했던 모습 그대로 이제는 노년층을 위한 실버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회적 기업 방식으로 특화돼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를 저렴한 관람료로 상영하는 그곳에는 모처럼 만나는 옛 영화들이 알록달록한 포스터로 가득했다.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게 된다. 코로나19에 저당 잡힌 이 시대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추억의 극장가를 걸어온 끝에 우리에게 다가온 화두는 결국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였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다음 일정 - 제25회 경의선 숲길 걷기 ●출발 일시 11월 14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길섶에서] 주전부리/이동구 수석논설위원

    말투나 잠버릇, 좋아하는 색깔이나 음식 등 삶의 대부분이 생활 습관으로 결정된다. 몸에 밴 습관을 고치기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여덟 살 버릇 평생 간다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군음식을 자주 먹는 주전부리 또한 습관인 듯하다. 어릴 적 과자 먹던 버릇이 반백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고소하거나 달달한 과자를 보면 참기 어렵다. 한번 손이 가면 과자 봉지가 깨끗이 비워져야 멈춘다. 사무실 후배가 불쑥 건넨 과자 한 봉지에 옛 기억이 새록새록해진다. 시골 동네에 나타난 엿장수와 뻥튀기 장수도 떠오른다. 고철이나 빈병으로 바꿔 먹었던 어린 시절의 주전부리는 추억 때문인지 유난히 달콤했던 것 같다. 팝콘과 뻥튀기야말로 주전부리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 주는 메뉴가 아닐까. 그것도 영화나 TV, 만화책 등을 볼 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무아지경으로 손이 간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묵이나 떡볶이, 만두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주전부리 감이다. 특히 추운 겨울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새어 나오는 어묵의 국물 냄새에는 발길을 외면할 재간이 별로 없다. 소주 한 잔에 어묵 한 입. 괜스레 겨울이 기다려진다. yidonggu@seoul.co.kr
  • 반세기 TV·영화 누빈 ‘국민 아버지’ 잠들다

    반세기 TV·영화 누빈 ‘국민 아버지’ 잠들다

    고향은 평양… 성우에서 배우로 전향지병 악화되기 전까지 평생 연기 활동서울아시안게임·올림픽 국제심판 활약후배들 위해 KBS에 밀린 출연료 요구막내아들 잃은 충격에 기억상실 앓기도60년 가까이 대중 앞에서 꾸준히 활동했던 원로배우 송재호가 지난 7일 별세했다. 83세. 1937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아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다. 1964년 충무로를 찾아 영화 ‘학사주점’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들어섰고 1968년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대중과 가까워진 것은 김호선 감독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로 당시 서울 관객이 36만명에 달할 만큼 흥행했다. 김호선 감독과 작업한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도 크게 성공했다. 1980년대 중반부턴 주로 안방극장에서 활약했다. 드라마 ‘보통사람들’, ‘열풍’을 비롯해 1982년엔 ‘새댁’과 ‘탈출’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김수현 작가의 ‘부모님 전상서’(2004~2005)뿐만 아니라 영화 ‘살인의 추억’, ‘화려한 휴가’나 드라마 ‘싸인’, ‘추적자’ 등 다양한 작품에서 푸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남겼다. 지난해 ‘자전차왕 엄복동’과 ‘질투의 역사’에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지병이 악화되기 전까지 연기의 열정을 보였다. 고인의 관심사는 다양했고, 역할은 컸다. 사격 선수 및 국제심판 자격이 있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각각 사격 종목 국제심판과 보조심판으로도 활약했다. 2000년엔 밀렵감시단 단장을 지낼 만큼 환경에도 관심을 보였다. 99하남국제환경박람회 조직위원회 홍보위원, 야생생물관리협회장 등의 이력이 그를 설명한다. 2010년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 문화재사랑 어린이 창작동요제 홍보대사 등 어린이에 대한 관심도 컸다. 2012년엔 한국방송연기자노조 일원으로 후배 연기자들을 위해 KBS를 대상으로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며 촬영 거부 투쟁에 참여했다. 자녀는 4남 1녀로, 막내아들이 2000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고인이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을 앓기도 했다. 장남 영춘씨는 배우로도 잠시 활동했지만 지금은 목사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10일 예정이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폐허에서 피어난 ‘우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드나든다

    폐허에서 피어난 ‘우물’… 하늘과 바람과 별이 드나든다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영감 얻어건물 자체가 하나의 우물로 다시 태어나 윤동주 생가서 그대로 옮겨온 ‘나무 우물’가만히 그 속 들여다본 사나이가 떠올라버려진 물탱크 개조해서 만든 ‘열린 우물’오래된 물때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하늘이 한결 더 높아지는 가을이 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을 앓던, 끝내 부끄러움을 몸에 지니고 떠난 시인 윤동주다.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시작된 윤동주의 삶은 서울의 연희전문을 거쳐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끝이 난다. 시인의 짧은 생을 이 한 줄로 요약하고 나니 더욱 그의 시가 읽고 싶어지는 까닭은 어쩌면 가을이 끝나가고 곧 겨울이 잇대어 오기 때문이 아닐까.만주와 일본, 서울의 어디쯤을 떠돌며 시인의 흔적을 따라 헤매지 않아도, 윤동주의 시가 고였다 흐르는 곳이 있다고 해 찾아갔다.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이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재학 시절에 살았던 종로구 누상동 인근인 청운동에 자리했다.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져 있는 청운동과 누상동 일대를 산책하던 시인의 발자취를 따 만들어진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문학관과 이어진다. 의대나 법대를 가기 원했던 집안의 뜻과는 달리 문과로 진학해 아버지와 크게 불화했다는 시인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아마도 쓰고 싶었던 시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일견 숨통이 트이는 때였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건물 곳곳에 불어넣은 시의 생명력 그런 그가 늘 걷던 길목에 자신의 이름을 단 문학관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면 어떤 마음일까. 시 ‘자화상’에서 천착했던 ‘우물’이 옮겨와 있고, 거대한 그 건물 자체가 하나의 우물이 돼 청운동의 푸른 구름을 되비추고 있다면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못 궁금해졌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 작은 우물을 품은 커다란 우물 하나가 우묵하게 하늘을 응시하는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2008년에 운영이 중단된 수도가압장이 그 건물 그대로 문학관으로 재탄생하기까지 여정은 오롯이 ‘시’(詩)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산 중턱에 있는 청운아파트에 수돗물을 올려 보내기 위해 지어졌다는 수도가압장은 아파트가 철거된 뒤로는 버려지다시피 한 건물이었다. 그 공간에 다시 물이 차오르고 흐르는 것처럼 시와 시인의 생을 다시 흐르게 한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것은 역시 시가 아닐까. 명편들을 잊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뜻이 모이고, 또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여러 오브제와 손길들이 모여 버려진 건물에 시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야말로 시가 아니었더라면 이 건물은 그저 오래전에 방치된 폐허에 불과했을 터.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이 아닌가. 문학 작품 속의 문장이 마을을 만들고, 시의 구절들이 애틋하고도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을 여러 번 봐 왔다. 그중에서도 윤동주문학관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로지 ‘시’에 의한, ‘시’로 인해 만들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해를 짧게 살다간 시인이 시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기도 한 까닭에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곳이다.●시인의 순결한 詩心 느낄 수 있는 시인채 윤동주문학관의 제1전시실인 시인채는 시인의 순결한 시심(詩心)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윤동주 시인의 생애가 집약된 곳이다. 시인의 삶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9가지 전시대와 함께 친필원고 영인본을 전시해 두었다. 바로 그곳에 용정에서 온,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직접 옮겨온 ‘나무 우물’이 있다. 윤동주는 시 ‘자화상’에서 우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중략)/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일생을 일제강점기에서 살다간 시인에게 우물이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로이고 어쩌면 유일한 구원의 눈이자 모든 것을 비추는 반사경이 아니었을까. 외면하고 벗어나고 싶어서 멀찍이 돌아서 가다 결국은 돌아와 다시 얼굴을 비춰 볼 수밖에 없는 마음의 장소인 셈이다. 나무우물 옆에는 이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 우물 옆에 서면 동북쪽 언덕으로 윤동주가 다닌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낳습니다.’ 고작해야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밖에 할 수 없던 시대에 우물의 표면에 가장 많이 비춰진 모습은 아마도 윤동주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겨울철 꽃 같은, 어름(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이라는 정지용의 서문이 유독 눈에 와닿는다. 차가운 얼음 아래에서 헤엄치는 잉어는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을까. 우물의 잉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했을까. 잉어, 아니 윤동주가 들여다보고, 얼굴을 가두었던 우물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인 시인채다. 나무 우물의 우묵한 눈을 지나 제2전시실에 들어가면 물탱크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모습이 보인다. 제2전시실은 ‘열린 우물’로 제1전시실인 시인채와 닫힌 우물인 제3전시실을 잇고 있다. 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물때가 물이 차올랐던 시절의 흔적을 말해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학관을 만들던 당시에 물때와 곰팡이가 많이 핀 이곳의 천장을 뜯어서 하늘을 보게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나무 우물을 통과해 열린 우물을 만나면 물이 고였던 자국들을 따라 돋아난 윤동주 시의 시원(始原)을 만난다.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어서 우물의 본질, 그곳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는 공간인 셈이다. 조감도처럼 하늘에서 바라봤을 때 여기야말로 우물의 눈이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건물은 시인이 그토록 천착해 마지않던 우물의 형상인 셈이다. 그리하여 윤동주문학관은 크고 작은 우물의 집합소다. 시인의 우물과 시의 우물이 만나 죽은 시인을 끝없이 되살려 내는 곳.●시간여행을 마무리하는 공간 ‘닫힌 우물’ 바로 옆 제3전시실이자 나머지 하나의 물탱크는 ‘닫힌 우물’이란 이름처럼 말 그대로 닫혀 있는 곳이다. 문학관 건물의 제일 안쪽에 위치해 가장 늦게 발걸음을 하게 된다. 우물의 뚜껑을 열듯이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한때 물을 보관하던 실내의 모습은 여전히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지만 어쩐지 무엇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윤동주가 마지막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의 독방을 형상화한 장소라고 했다. 네모 반듯하고 사방이 막힌 공간이 감옥을 연상시킨다. 천장의 네모난 통기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 감옥의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도 겹쳐진다. 벽면에 윤동주의 인생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그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감옥에서 매우 쓸쓸하게 죽어간 젊은 시인의 마지막 시간들이 다가온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장소로 꼽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시 혹은 숨으로 꽉 차올라 수위가 높은 물탱크다. 닫힌 우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나오면 건물 밖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만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윤동주가 시와 삶, 그리고 시대의 엄혹한 칼날과 조국의 현실에 대해 고민하며 걷던 길이 나오는 것이다. 작은 우물과 큰 우물을 지나 만나는 길에서 윤동주가 남긴 시를 읊으며 걷다 보면 곳곳에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온다.여기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산 둘레를 따라 걸으며 별을 헤아리던 시인의 자리다. 유독 마음의 소리에 엄정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을 부끄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시를 썼던 공간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윤동주가 남긴 시편들과 얼마 되지 않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일뿐이다. 그러나 한 시대를 아프게 살다 간 젊은 시인이 시로서 이곳에 살아 있고, 시와 시를 둘러싼 마음들이 이 장소 자체를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장소야말로 세상에 있는 모든 우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시의 우물이 되는 셈이 아닐까. 그곳을 되살려 준 손길들이 하염없이 고마운 늦가을이다. 여기는 젊은 시인이 산길을 따라 걷고 시의 결을 매만지던 자리, 우물 안에서 별을 헤아릴 수 있는 장소인 윤동주문학관이다. 소설가 이은선
  • 최연소 상원 48년 만에… 대선 3수 끝에 최고령 백악관 입성

    최연소 상원 48년 만에… 대선 3수 끝에 최고령 백악관 입성

    첫 부인·자녀들 세상 떠난 개인사도 극복2차례 방한… DJ와 넥타이 교환도 회자與 박지원·문정인 교류 … 野 박진 친분미 민주당 조 바이든 당선인은 7일(현지시간) 대선 승리가 확정되며 파란만장했던 반세기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게 됐다. 그가 28세였던 1970년 카운티 의회 의원에 당선된 지 50년 만에 이룬 거사이며, 대권 도전 3수 만에 이룬 꿈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1942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부친의 실직으로 이사한 델라웨어주는 그의 ‘제2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된다. 바이든이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추억은 말더듬증으로 놀림받던 기억이다. 그는 조회시간 발표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심각했던 말더듬증이 오히려 자신을 더 강하게 했다며 “내가 바라던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믿는다”고 강조한다. 바이든은 피선거권 기준인 만 30세가 되기 2주 전이던 1972년 11월 첫 상원의원직 도전에서 공화당 현역 거물을 물리치고 당선된다. 하지만 당시 최연소 상원의원 타이틀을 눈앞에 두고 있던 바이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족을 잃는 비극이었다. 선거 승리 6주 뒤 자동차 사고로 첫 아내와 13개월 난 딸이 세상을 떠났고, 사고 당시 함께 차에 타고 있던 두 아들 보와 헌터도 중상을 입었다. 정신적 충격에 날개가 꺾인 바이든은 의원직까지 포기하려 했지만, 의회의 만류로 이듬해 아들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초선 당시 그는 아들들을 돌보며 의정활동을 하느라 워싱턴DC에서 델라웨어의 자택까지 120마일을 통근하며 생활했다. 개인적 비극을 극복한 바이든의 모습은 먼 훗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그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이후 바이든은 2015년 장남 보 바이든을 뇌종양으로 잃는다.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아버지만큼 유망한 정치인이었던 보가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당시 바이든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상원에서 6선을 하며 외교위원장과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바이든은 민주당 내 대표적인 거물급 인사로 성장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초선 의원으로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만났던 바이든은 이미 당시 상원을 쥐락펴락하던 최고참 중진이었다. 그는 두 차례 대선 후보에 도전한 바 있다. 처음 대선 후보에 도전했던 1988년에는 로스쿨 시절 쓴 보고서가 표절 논란에 휩싸여 낙마했고, 2008년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돌풍에 밀리고 만다. 하지만 대권의 꿈을 접게 한 오바마는 그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한다. 대선 후보를 꿈꾸던 6선 의원이 부통령을 맡기로 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한국에는 2001년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2013년 부통령 자격으로 각각 방한한 바 있다. 1980년대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당시 친분이 있었던 바이든은 2001년 방한 때 김 전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즉석에서 넥타이를 주고받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나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 등과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분이 있는 야권 인사로는 대표적인 미국통인 박진 국민의힘 의원이 꼽힌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원로배우 송재호 별세에… 정치권도 애도 “국민 배우·후배에 귀감”

    원로배우 송재호 별세에… 정치권도 애도 “국민 배우·후배에 귀감”

    원로배우 송재호가 지난 7일 숙환으로 별세한 가운데 정치권도 고인의 생전을 조명하며 추모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8일 페이스북에 “원로배우 송재호 선생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고인께서는 평생을 연기에 전념하며, 반세기 넘는 세월을 대중과 호흡한 ‘국민 배우’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이 대표는 “중년 이후에는 인자한 아버지 역으로 친숙해지셨지만, 젊은 시절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 이미지를 기억하시는 국민도 많다”며 “2012년에는 밀린 출연료 지급을 촉구하는 촬영 거부 투쟁을 벌이며 ‘나는 생계 걱정을 안 하지만 이 돈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야생생물관리협회장,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 문화재사랑 어린이 창작동요제 홍보대사를 지내시며 환경, 아동 문제 등에도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이셨다”며 “참 따뜻한 배우셨다.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송재호의 별세 소식을 전한 기사를 올리면서 고인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하 의원은 “배우 송재호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며 “제가 초선 국회의원일 때 고인을 뵈었다. 참 온화하고 멋진 분이셨다. 강한 애국심과 긍정적인 인생관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후배들의 귀감이셨다. 편히 쉬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앞서 송재호는 7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북한 평양 출신인 고인은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했고, 이후 배우로 전향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 등으로 성공을 거뒀다. 드라마로는 1980년대에 높은 인기를 누린 ‘보통사람들’과 ‘열풍’, 그리고 김수현 각본의 ‘부모님 전상서’(2004~2005)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후룩후룩 추억의 가락국수‘…제천역 앞 테마거리 조성

    충북 제천역 주변에 추억의 가락국수를 맛 볼 수 있는 전문점이 들어선다. 제천시는 8일 중앙선 복선전철 개통에 발맞춰 관광객들에게 미식도시 제천을 알리고 시민들에게는 추억의 맛을 제공하기 위해 가락국수 테마거리(핵점포)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시범사업으로 새해 초 공모를 통해 면 요리업소 3곳을 선정해 메뉴 컨설팅,내·외부 디자인,마케팅 비용 600만원씩을 지원할 예정이다. 가락국수 핵점포 육성 예정지는 역전시장 인근이다. 이곳 가락국수는 한때 충북선,중앙선,태백선 등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제천역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특히 플랫폼에 설치된 가락국수 간이식당은 한겨울 철도 여행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제천역사 앞에도 가락국수 점포가 오랫동안 운영됐다. 시는 가락국수 테마거리가 시민·관광객들의 호응을 얻으면 지원 대상 업소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제천시 관계자는 “추억의 제천역 가락국수가 외부에 알려지면 더 많은 관광객이 제천을 찾아 옛 도심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핵점포는 내년 하반기부터 장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천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말더듬증 소년, 대통령 되다…바이든은 누구인가

    말더듬증 소년, 대통령 되다…바이든은 누구인가

    7일(현재시간)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하며 11·3 미국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한 민주당 조 바이든(77) 민주당 후보는 파란만장했던 정치인생의 정점을 찍게 됐다. 바이든의 당선은 28세였던 1970년 55.4%의 득표율로 카운티 의회 의원에 당선된 지 50년만의 일이며, 대선 도전 3수 만에 이룬 꿈이다. 바이든은 1942년 11월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든에서 태어났다. 그가 상원의원에 당선돼 36년간 의원직을 지낸 델라웨어주로 이사한 것은 10살 때 일이다. 1950년대 찾아온 불황으로 이사한 델라웨어주는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현 주소지이기도 하다. 바이든이 떠올리는 어린시절의 가장 큰 추억은 말더듬증으로 놀림 받던 기억이다. 회고록 ‘지켜야할 약속’을 보면 학창시절 그의 별명은 모두 말을 더듬는 버릇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조회시간 발표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심각했던 말더듬증이 오히려 자신을 더 강하게 했다며 “내가 바라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고 강조한다. 바이든의 정치인생은 두번의 아픈 가족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1972년 첫 상원의원직 도전에서 공화당 현역 거물을 물리치고 당선된 바이든의 중앙정치 무대 출발은 탄탄대로일 듯했다. 당시 그는 피선거권 기준인 만30세가 되기 2주전에 당선돼 최연소 상원의원 타이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선거 승리 6주 뒤 자동차 사고로 첫 아내와 13개월 난 딸이 세상을 떠났고, 사고 당시 함께 차에 타고 있던 두 아들도 중상을 입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의원직까지 포기하려 했지만, 의회의 만류로 눈물 속에 워싱턴 정가에 발을 내딛는다. 2015년에는 장남 보 바이든을 뇌종양으로 잃는다. 델라웨어주 법무장관을 역임하는 등 아버지만큼 유망한 정치인이었던 보가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당시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상원의원 시절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을 역임하며 민주당 거물급 인사로 입지를 다진 그는 두차례 대선 후보에 도전한 바 있다. 처음 대선 후보에 도전했던 1988년에는 로스쿨 시절 쓴 보고서가 표절 논란에 휩싸여 낙마했고, 2008년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돌풍에 밀려 꿈을 접는다. 대선후보는 되지 못했지만, 그는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8년간 백악관의 2인자로 국정에 참여한다. 바이든과 오바마의 인연은 최고참 선배와 초선 의원으로 만난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젊은 오바마로서는 워싱턴 정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바이든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선후보를 꿈꾸던 6선 의원이 ‘국정의 조연’으로 40대 대통령을 보좌하기로 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그는 부통령으로 8년을 지낸 뒤 2016년 대선 출마를 타진하기도 했지만, 당시 대세는 누가봐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었다. 그해 클린턴의 충격적인 패배를 지켜만 봐야했던 바이든은 4년 뒤 대세론을 등에 업고 역사적 승리를 거두며 미 최고령 대통령이란 타이틀도 함께 얻을 전망이다. 바이든은 1977년 재혼한 영어교사 출신의 두번째 부인 질 바이든과의 사이에 현재는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우크라니아 스캔들’ 등으로 공화당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던 아들 헌터는 변호사로, 딸 애슐리는 사회복지사로 각각 일하고 있다. 애슐리는 바이든과 질이 낳은 소생이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국민 아버지’ 원로 배우 송재호 83세의 나이로 별세

    ‘국민 아버지’ 원로 배우 송재호 83세의 나이로 별세

    원로 배우 송재호가 7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송재호 선생님께서 1년 이상 지병으로 편찮으셨다가 이날 작고하셨다”고 밝혔다. 북한 평양 출신으로 1959년 KBS 부산방송총국 성우로 데뷔한 송재호는 이후 배우로 전향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1981)로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살인의 추억’, ‘그때 그 사람들’, ‘해운대’ 같은 대작에도 자주 출연했다. 드라마에서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 ‘용의 눈물’ 등으로 익숙하다. 최근작은 영화 ‘질투의 역사’, ‘자전차왕 엄복동’이다. 이밖에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이 있어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클레이 부문 심판으로 참가했으며 대한사격연맹 이사로도 활동했다. 야생생물에도 관심이 많아 야생생물관리협회장도 맡고 있었다. 자녀로는 4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되며, 호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조문은 8일 정오부터 할 수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두산 오재원 “이 멤버로 마지막 가을야구, 마무리 잘하고 싶다”

    두산 오재원 “이 멤버로 마지막 가을야구, 마무리 잘하고 싶다”

    두산 베어스 오재원은 지난 4일 LG 트윈스와의 준플레이오프(준PO) 1차전을 승리로 이끈 뒤 “우리끼리 농담으로 이 멤버로 치르는 마지막 가을 야구라고 말한다. 각자 말은 안 해도 마무리를 잘하고 싶은 것 같다. 이 멤버 그대로 좋은 추억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김태형 감독이 2015년 지휘봉을 잡은 이래 두산은 황금기를 맞았다. 두산은 2015, 2016, 2019년 등 최근 5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 3회를 기록했다. 2017년에는 KIA 타이거즈에, 2018년에는 SK 와이번스에 우승을 내줬지만 정규리그에서도 최근 5년간 3위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다. 두산은 팀 중심 타자였던 김현수, 민병헌, 양의지를 다른 팀으로 떠나보낸 이후에도 1번부터 9번까지 쉬어 갈 타선이 없을 정도로 강타선을 구축했다. 또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챙겨 주는 외국인 원투펀치를 구축했다. 여기에 토종 국내 3, 4선발이 버텨 주면서 투타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두산은 올 시즌이 끝나면 최대 9명의 선수가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 나온다. 유희관, 허경민, 최주환, 오재일, 김재호, 정수빈 등 두산 왕조 건설의 공신이자 현재 두산 전력의 주축을 이루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두산에서 모든 영광을 함께했지만 모두가 잔류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기량이 출중한 이들을 잡으려면 아낌없이 투자해야 하는데 두산은 현재 그럴 여력이 없다. 오히려 타 구단에서 영입 제의를 할 가능성이 크다. 박건우는 최근 모바일 메신저 대화방에 “끝까지 좋은 추억을 남기자”고 밝혔다. 보기에 따라 구단과의 이별을 암시하는 듯한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채권단은 야구단까지 매각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두산은 “상징과도 다름없는 야구단 매각은 절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여전히 두산의 사정은 좋지 않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로 입장 수익 등 구단 자체 수익까지 감소하면서 FA에 자금을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른바 두산발 엑소더스가 불가피한 것이다. 두산은 이번 준PO 1차전에서 최고의 경기력으로 승리하며 팬들에게 보답했다.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오재원은 “2위 팀, 1위 팀의 에너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다음 경기가 더 중요하다. 지금은 다음 경기에 집중하려고 한다. 선수들 모두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김현식 30주기 리메이크, 규현 ‘첫 주자’

    김현식 30주기 리메이크, 규현 ‘첫 주자’

    ‘비처럼 음악처럼‘ 7일 공개가수 규현이 고 김현식의 30주기 리메이크 앨범 첫 번째 주자로 나선다. 김현식 리메이크 앨범 ‘추억 만들기’ 제작사 슈퍼맨C&M은 규현이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를 7일 오후 6시 음원사이트를 통해 선공개한다고 5일 밝혔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1986년에 발표된 김현식 3집 수록곡으로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김현식의 대표적 명곡이다. 애달픈 가사와 특유의 거친 목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그룹 슈퍼주니어로 데뷔한 규현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소유자로 발라드 가수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제작사는 규현이 ‘비처럼 음악처럼’ 일부분을 부르는 티저 영상을 이날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어 “김현식의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가 규현을 만나 한층 더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전했다. 올해 김현식 30주기를 맞아 발매되는 리메이크 앨범 ‘추억 만들기’에는 규현을 비롯해 실력파 후배 가수 10여 팀과 가요계 히트메이커 ‘이단옆차기’를 비롯한 다수의 작곡팀이 각 곡의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제작사는 참여 가수 라인업을 이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그르니에를 그르니에답게 말맛까지 살려 내는 게 번역”

    “그르니에를 그르니에답게 말맛까지 살려 내는 게 번역”

    까딱 잘못하면 눈으로만 읽게 된다.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를 수차례 반복해도 문장의 뜻을 알까 말까다. 알베르 카뮈를 글의 세계로 인도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1898~1971)의 에세이 ‘섬’. 1980년 처음 초역 출간됐던 책이 40년 만에 새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그때 번역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던 30대 젊은 교수는 이제 70대가 됐다. 지난 3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본인도 어렵다는 책을 다시 내놓고 싱글싱글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도 모든 문장을 다 100% 이해하며 번역하는 게 아니에요. 이러리라고 짐작하는 거지.” ‘섬’을 읽으며 헤맸을 법한 독자에겐 ‘안심되는’ 고백이다. 그는 “전엔 살짝살짝 고쳐서 독자한테 친절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글이 가지고 있는 맛은 변질된다”며 ‘떠먹여 주는 번역’은 지양하고, 그르니에 특유의 금욕적이고 비밀스러운 문장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40년 세월 동안 독자도 더 현명해졌으리라고 가정하는 거죠.”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카뮈가 ‘아무런 회한도 없이,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15쪽)는 책, 젊은 김 교수를 매혹시켰던 그르니에의 문장은 다시 봐도 매력적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골목길을 요리조리 헤쳐 나가듯” 이야기하는 게 그의 글이다. “말이 섬 같아요. 한 문장이 섬이고 그 사이에 바다가 있어요. 말하는 것을 통해 말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말하는, 그런 책이에요.” 가령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29쪽, ‘공의 매혹’) 같은 문장들이 그렇다. 이런 그르니에를 두고 김 교수는 ‘견고한 통나무나 대리석을 더이상 깎을 수 없을 때까지 깎아 내어 진면목을 찾아내는 조각가’(176~177쪽)라고 평했다.그르니에가 한국에 소개되기까지는, 그르니에와 카뮈 같던 평생의 사제 관계 덕이 컸다. “출판사 다섯 군데에서 퇴짜를 놨는데, 때마침 고등학교(경기고) 때 은사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나한테 ‘문학사상’ 편집위원을 하래요. 그때 그르니에의 ‘공의 매혹’, 바슐라르의 ‘수련’을 번역해 잡지에 소개했는데 독자들이 반응했어요.” 이를 보고 대학 선배이기도 한 박맹호 민음사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 가지고 왔던 그 원고가 ‘문학사상’에 실은 그 사람 글이오? 빨리 가져와요.”(180쪽) 파트리크 모디아노, 크리스토프 바타유 등 수많은 프랑스 문호들의 책 120여권을 번역했지만 김 교수는 ‘프로 번역가’라는 말 대신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길 원한다. 번역으로 벌어먹지 않고, 본인이 소개하고 싶은 책만 번역했기 때문이다. 평생 해 왔던 강의와 연구, 번역과 시작(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중 무얼 할 때가 가장 행복했을까. “아무것도 안 할 때가 제일 행복하죠.(웃음) 그냥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때, 세상이 내 속으로 흘러드는 것 같을 때…. 그러다 그 생각이 원고지로 옮겨질 때가 좋고, 너무 심심하면 번역도 좋아요.” 그는 그날도 모디아노의 소설 ‘잠자는 추억’의 원고를 막 출판사에 넘기고 나왔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불문학 120권 번역한 김화영 교수 “아무 것도 안할 때가 제일 행복”

    불문학 120권 번역한 김화영 교수 “아무 것도 안할 때가 제일 행복”

    까딱 잘못 하면 눈으로만 읽게 된다.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를 수 차례 반복해도 문장의 뜻을 알까 말까다. 알베르 카뮈를 글의 세계로 인도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장 그르니에(1898~1971)의 에세이 ‘섬’. 1980년 첫 초역 출간돼 10만 부(추정) 이상 팔린 책이 40년 만에 새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그때 번역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다니던 30대 젊은 교수는 이제 70대가 됐다. 지난 3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본인도 어렵다는 책을 다시 내놓고 싱글싱글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도 모든 문장을 다 100% 이해하며 번역하는 게 아니에요. 이러리라고 짐작하는 거지.” ‘섬’을 읽으며 헤맸을 법한 독자에겐 ‘안심되는’ 고백이다. 그는 “전엔 살짝살짝 고쳐서 독자한테 친절하게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글이 가지고 있는 맛은 변질된다”면서 ‘떠먹여주는 번역’은 지양하고, 그르니에 특유의 금욕적이고 비밀스러운 문장을 그대로 살리려 노력했다. “40년 세월 동안 독자도 더 현명해졌으리라고 가정하는 거죠.” 그르니에게 한국에 소개되기까지는, 그르니에와 까뮈 같던 평생의 사제 관계 덕이 컸다. “출판사 다섯 군데서 퇴짜를 놨는데, 그 때 마침 고등학교(경기고) 은사셨던 이어령 선생님이 나한테 ‘문학사상’ 편집위원을 하래요. 그 때, 그르니에의 ‘공의 매혹’, 바슐라르의 ‘수련’을 번역해 잡지에 소개했는데 독자들이 반응했어요.” 이를 보고 대학 선배이기도 한 박맹호 민음사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 가지고 왔던 그 원고가 ‘문학사상’에 실은 그 사람 글이오? 빨리 가져와요.”(180쪽)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카뮈가 ‘아무런 회한도 없이,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15쪽)는 책, 젊은 김 교수를 매혹시켰던 그르니에의 문장은 다시 봐도 매력적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골목길을 요리조리 헤쳐나가듯” 이야기하는 게 그의 글이다. “말이 섬 같아요. 한 문장이 섬이고 그 사이 바다가 있어요. 말하는 것을 통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말하는, 그런 책이에요.” 가령 ‘말 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공의 자리에 즉시 충만이 들어앉는다.’(29쪽, ‘공의 매혹’) 같은 문장들이 그렇다. 이런 그르니에를 두고 김 교수는 ‘견고한 통나무나 대리석을 더 이상 깎을 수 없을 때까지 깎아 내어 진면목을 찾아내는 조각가’(176~177쪽)라고 평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책을 ‘덜 친절하게’ 번역한 교수의 생각이 궁금했다. “어차피 안 읽을 사람은 안 읽을 것”이라고 말문을 연 그에게서 달라진 세태에 대한 진단이 이어졌다. “모두가 대학에 가는 시대가 되면서,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래를 위해서 대학에 가요. 대학에서는 진리가 아니라 공평함을 배우죠. 쟤보다 내가 몇 점 떨어지는지가 중요하니까, 사지선다형 밖에 안해요.” 그의 말에 따르면 객관식으로 평가 받는 세대는 짧은 요약본 위주의 정보 외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학은 요즘 세태에 적극적으로 반하는 텍스트 양식이다. “스토리뿐 아니라 글 쓰는 방식, 전체 구조, 동원된 문장의 배열 방식이 곧 문학이에요. 아닌게 아니라 대입 시험 때문에 모든 걸 요약해놨는데, 요약본을 봤다고 해서 ‘마담 보바리’를 읽은 게 아니잖아요.” 스토리를 꿰고 나면 끝나는 문학이 아닌, 40년 만에 다시 읽어도 새로운 책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문학이다. 파트릭 모디아노,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등 수많은 프랑스 문호들의 책 120여권을 번역했지만, 김 교수는 ‘프로 번역가’ 라는 말 대신 ‘책을 선택하는 사람’ 이길 원한다. 번역으로 밥 벌어 먹지 않고, 본인이 소개하고 싶은 책만 번역했기 때문이다. 평생 해왔던 강의와 연구, 번역과 시작(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중 무얼 할 때가 가장 행복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무것도 안 할 때가 제일 행복하죠.(웃음) 그냥 바깥을 내다 보고 있을 때, 세상이 내 속으로 흘러 드는 것 같을 때…. 그러다 그 생각이 원고지로 옮겨질 때가 좋고, 너무 심심하면 번역도 해요.” 그가 생각하는 번역 일의 좋은 점은 딴 짓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번역 일은 내 생각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생각을 해둔 거예요. 그런 건 다른 일 하다가 다시 봐도 돼요. 내 글은 매달려야 하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죠.” ‘굉장히 기분파’인 교수는 번역을 하다가도 따분하면 놔두고 다른 글도 쓰고 시도 쓴단다. “계획은 없어요. 그 때 그 때 기분 좋은 것만 하는 거죠. 내가 나를 아니까 가만 놀지는 않을 거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겠지…” 그런 그는 그날도 모디아노의 소설 ‘잠자는 추억’의 원고를 막 출판사에 넘기고 나왔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실명 위기도 못꺾은 무대…늙어도 좋아, 난 노역배우

    실명 위기도 못꺾은 무대…늙어도 좋아, 난 노역배우

    “저도 이제 노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연극 ‘더 드레서’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송승환’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덟 살에 연기를 시작해 평생을 대중과 함께해 온 그다. TV에서 자주 봤던 배우가 스스로 ‘노역배우’라고 부르니 뭔가 아쉽고 야속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표정이 밝았다. ‘노역배우’라는 의미를 달리 해석한 데서 온 감정의 간극이었던 거다. “나이 들어 할 수 없이 노역을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제 늙은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정말 긍정적인 의미죠. 젊었을 땐 연극 ‘아마데우스’ 살리에리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아버지를 얼마나 하고 싶었다고요.” 예순셋 나이와 희끗해진 머리칼과 어울리는 그 단어로,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배우와 제작자를 거쳐 다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그를 지난달 19일 정동극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들뜨고 설렌 그 얼굴이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송 감독은 오는 18일 개막하는 정동극장 신작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로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 2014년 뮤지컬 ‘라카지’를 제작하면서 잠깐 출연한 것을 건너뛰면 2011년 연극 ‘갈매기’로 명동예술극장에 선 뒤 9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다. 정동극장 개관 25주년을 기념할 연극을 올리기로 하고 지난해 수많은 작품을 고심하다 송 감독이 직접 대본을 골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피아니스트’ 각본을 쓴 로널드 하우드의 탄탄한 원작이라는 점이 좋았다. 더욱이 무대와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 배우 이야기라는 점에 단번에 마음이 갔다. 정작 무대 위에서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 그런지 집보다 무대나 분장실이 더 편할 때가 있어요. 문을 열면 환한 무대 조명이 보이는 분장실에서 땀 흘린 배우들과 먹는 짜장면과 라면은 그 어떤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는 편안하고 남다른 맛이 있죠.” 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본을 읽으니 마냥 재미있고 좋았다. 게다가 극 중 그가 연기할 ‘선생님’(Sir)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대표이자 배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공습경보가 울리는 통에도 극장을 꿋꿋이 열고 연극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평생 배우와 극단 대표, 제작자로 활약한 그와 매우 비슷하다. 송 감독은 1965년 KBS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꾸준히 브라운관과 무대에 섰다. 대학에서도 활발하게 연극회 활동을 했고 극단76, 환퍼포먼스를 이끌며 대학로를 누볐다. 1996년 PMC프러덕션을 세운 뒤 타악 퍼포먼스 ‘난타’의 성공과 함께 제작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7년 초연된 ‘난타’는 지난해 말까지 전 세계 58개국 318개 도시에서 총 4만 7087회 공연됐다. 1437만 6050명이 ‘난타’를 봤다. 이와 함께 뮤지컬 ‘달고나’, ‘호두까기 인형’, ‘젊음의 행진’ 등 그가 20여년간 PMC프러덕션에서 제작한 작품만 50편이 넘는다. 그런데 송 감독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하고 불과 1년 만에 코로나19라는 공습경보 수준이 아닌 직격탄이 날아왔다. 공연계에 몸담고 단 한순간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작품과 현실의 차이였다. 해외 관광객이 관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난타’와 매년 선보이던 어린이 뮤지컬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되자 8개월째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됐다. 직원들은 유급 휴직 중이다. “23년간 한 번도 쉬지 않은 ‘난타’를 멈췄으니 일생에서 밖에서 닥친 가장 큰 시련이고 어느 때보다 어려운 날들인 건 맞다”는 토로가 굵지만 길진 않았다. 그나마 이달부턴 제주 난타전용관은 조심스레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 명동과 홍대는 아직 기약이 없다. “‘난타’는 공항이 활짝 열리기 전까진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면서 “올해는 일단 잘 버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매년 2~3편 이상 공연을 올리며 성패를 걱정하던 그에겐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달을 흘려보낸 것 같고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품으며 버티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공연계 ‘큰형’으로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장에선 아직까지 코로나19 확산 사례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객석 띄어 앉기를 완화해 줄 것을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과 대형 뮤지컬 제작사 대표 6명과 함께 기부콘서트도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취소됐다. 그래도 무대가 멈춰선 안 된다는 바람을 거듭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옛 명동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을 맑게 해 주니 이런 때일수록 필요하죠.” 폭풍 같은 시기라고 언급하면서도 송 감독은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행이다”, “고맙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고 인생을 돌아보니 마냥 고마운 게 많더라”면서 “그래도 이 와중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과 부감독으로 호흡을 맞춘 장유정 연출부터 안재욱·오만석·배해선·정재은 등 함께 연기할 배우들이 “송승환 선배님 때문에” 작품에 모였다고 입을 모은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자신이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마친 뒤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렸다. 시력이 자꾸 떨어지길래 병원을 찾았더니 황반변성과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으로 실명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실명까진 아니지만 결국 시각장애 등록을 하고야 말았다. “평생 연기를 다시는 못할 줄 알았어요. 다행히 진행이 멈춰 더 심하게 나빠지진 않았고, 이렇게 다시 할 수 있게 되니 감사하죠.” 20년 전 그와의 추억이 담긴 연극표를 건네자 눈 가까이 대고 골똘히 보고도 “(표에 그려진) 얼굴이 안 보인다”며 기억을 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형태 정도만 볼 수 있고 글씨는 아예 읽기 어려워 음성지원되는 전자기기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대본을 외운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 상견례 겸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울 정도로 완벽한 열의를 보였다. 다시는 설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무대의 소중함을 매일 연습실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개막도 전에 ‘더 드레서’의 시즌제 공연을 꿈꾸는 것은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눈이 안 좋아진 뒤부턴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만 봐도 고마워요. 내가 이걸 볼 수 있다니! 더구나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 고맙고 행복하죠.” 그는 작품 속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대사가 유독 절절하게 와닿는다고 했다. “40대였으면 이 감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60대라 공감할 수 있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고집스럽게 무대에 집착하면서도 결국 그곳이 가장 행복과 위안을 주는 곳임을 보여 주는 극 중 선생님처럼 송 감독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가장 좋아하는 무대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유튜버에 도전하기로 한 것인데 콘텐츠가 독특하다. “선배님들의 그간 배우로서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배우로 거쳐 온 무대나 방송에 얽힌 이야기들, 진짜 재미있는 게 많은데 저만 알기 아깝거든요. 그분들의 영상회고록을 아카이브처럼 남겨둘 거예요.” 벌써 이순재(85), 오현경(84), 김영옥(83)을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한 사람당 4~5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방대한 ‘기록’을 적당한 분량씩 나눠 조만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마지막회는 제 회고록이 되겠죠. 55년간 연기생활, ‘난타’ 등 공연 제작자의 삶. 언제쯤 다 얘기할 수 있을까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노역 배우로 새 출발”… ‘베테랑’ 배우·프로듀서 송승환의 설렘과 고마움

    “노역 배우로 새 출발”… ‘베테랑’ 배우·프로듀서 송승환의 설렘과 고마움

    “저도 이제 노역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어요.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연극 ‘더 드레서’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송승환’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여덟 살에 연기를 시작해 평생을 대중과 함께해 온 그다. TV에서 자주 봤던 배우가 스스로 ‘노역배우’라고 부르니 뭔가 아쉽고 야속하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표정이 밝았다. ‘노역배우’라는 의미를 달리 해석한 데서 온 감정의 간극이었던 거다. “나이 들어 할 수 없이 노역을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제 늙은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정말 긍정적인 의미죠. 젊었을 땐 연극 ‘아마데우스’ 살리에리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아버지를 얼마나 하고 싶었다고요.” 예순셋 나이와 희끗해진 머리칼과 어울리는 그 단어로,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배우와 제작자를 거쳐 다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그를 지난달 19일 정동극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들뜨고 설렌 그 얼굴이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동극장 신작 ‘더 드레서’로 9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 송 감독은 오는 18일 개막하는 정동극장 신작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로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 2014년 뮤지컬 ‘라카지’를 제작하면서 잠깐 출연한 것을 건너뛰면 2011년 연극 ‘갈매기’로 명동예술극장에 선 뒤 9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다. 정동극장 개관 25주년을 기념할 연극을 올리기로 하고 지난해 수많은 작품을 고심하다 송 감독이 직접 대본을 골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피아니스트’ 각본을 쓴 로널드 하우드의 탄탄한 원작이라는 점이 좋았다. 더욱이 무대와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 배우 이야기라는 점에 단번에 마음이 갔다. 정작 무대 위에서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일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서 그런지 집보다 무대나 분장실이 더 편할 때가 있어요. 문을 열면 환한 무대 조명이 보이는 분장실에서 땀 흘린 배우들과 먹는 짜장면과 라면은 그 어떤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는 편안하고 남다른 맛이 있죠.”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본을 읽으니 마냥 재미있고 좋았다. 게다가 극 중 그가 연기할 ‘선생님’(Sir)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 대표이자 배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공습경보가 울리는 통에도 극장을 꿋꿋이 열고 연극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평생 배우와 극단 대표, 제작자로 활약한 그와 매우 비슷하다. 송 감독은 1965년 KBS 아역배우로 데뷔한 뒤 꾸준히 브라운관과 무대에 섰다. 대학에서도 활발하게 연극회 활동을 했고 극단76, 환퍼포먼스를 이끌며 대학로를 누볐다. 1996년 PMC프러덕션을 세운 뒤 타악 퍼포먼스 ‘난타’의 성공과 함께 제작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7년 초연된 ‘난타’는 지난해 말까지 전 세계 58개국 318개 도시에서 총 4만 7087회 공연됐다. 1437만 6050명이 ‘난타’를 봤다. 이와 함께 뮤지컬 ‘달고나’, ‘호두까기 인형’, ‘젊음의 행진’ 등 그가 20여년간 PMC프러덕션에서 제작한 작품만 50편이 넘는다. ●전쟁에도 멈추지 않은 ‘선생님’… ‘난타’는 몇 달째 올스톱 그런데 송 감독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하고 불과 1년 만에 코로나19라는 공습경보 수준이 아닌 직격탄이 날아왔다. 공연계에 몸담고 단 한순간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작품과 현실의 차이였다. 해외 관광객이 관객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난타’와 매년 선보이던 어린이 뮤지컬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되자 8개월째 모든 공연이 ‘올스톱’ 됐다. 직원들은 유급 휴직 중이다. “23년간 한 번도 쉬지 않은 ‘난타’를 멈췄으니 일생에서 밖에서 닥친 가장 큰 시련이고 어느 때보다 어려운 날들인 건 맞다”는 토로가 굵지만 길진 않았다.그나마 이달부턴 제주 난타전용관은 조심스레 문을 열 계획이다. 서울 명동과 홍대는 아직 기약이 없다. “‘난타’는 공항이 활짝 열리기 전까진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라면서 “올해는 일단 잘 버티고 살아남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매년 2~3편 이상 공연을 올리며 성패를 걱정하던 그에겐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달을 흘려보낸 것 같고 지금은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품으며 버티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했다. 공연계 ‘큰형’으로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장에선 아직까지 코로나19 확산 사례가 없다는 걸 강조하며 객석 띄어 앉기를 완화해 줄 것을 정부에 꾸준히 요구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과 대형 뮤지컬 제작사 대표 6명과 함께 기부콘서트도 추진했지만 이마저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취소됐다. 그래도 무대가 멈춰선 안 된다는 바람을 거듭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옛 명동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영혼을 맑게 해 주니 이런 때일수록 필요하죠.” ●“실명 위기” 진단, 글씨 읽기 어려운 정도… “평생 연기 못할 줄 알았는데 감사” 폭풍 같은 시기라고 언급하면서도 송 감독은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행이다”, “고맙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던 일을 멈추고 인생을 돌아보니 마냥 고마운 게 많더라”면서 “그래도 이 와중에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과 부감독으로 호흡을 맞춘 장유정 연출부터 안재욱·오만석·배해선·정재은 등 함께 연기할 배우들이 “송승환 선배님 때문에“ 작품에 모였다고 입을 모은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자신이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마친 뒤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렸다. 시력이 자꾸 떨어지길래 병원을 찾았더니 황반변성과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으로 실명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실명까진 아니지만 결국 시각장애 등록을 하고야 말았다. “평생 연기를 다시는 못할 줄 알았어요. 다행히 진행이 멈춰 더 심하게 나빠지진 않았고, 이렇게 다시 할 수 있게 되니 감사하죠.”20년 전 그와의 추억이 담긴 연극표를 건네자 눈 가까이 대고 골똘히 보고도 “(표에 그려진) 얼굴이 안 보인다”며 기억을 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 형태 정도만 볼 수 있고 글씨는 아예 읽기 어려워 음성지원되는 전자기기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대본을 외운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번 작품 상견례 겸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울 정도로 완벽한 열의를 보였다. 다시는 설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무대의 소중함을 매일 연습실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개막도 전에 ‘더 드레서’의 시즌제 공연을 꿈꾸는 것은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눈이 안 좋아진 뒤부턴 아침에 일어나서 파란 하늘만 봐도 고마워요. 내가 이걸 볼 수 있다니! 더구나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극장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 고맙고 행복하죠.”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로 유튜브도 도전… ”원로 배우들 영상 회고록“ 그는 작품 속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대사가 유독 절절하게 와닿는다고 했다. “40대였으면 이 감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60대라 공감할 수 있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고집스럽게 무대에 집착하면서도 결국 그곳이 가장 행복과 위안을 주는 곳임을 보여 주는 극 중 선생님처럼 송 감독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가장 좋아하는 무대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유튜버에 도전하기로 한 것인데 콘텐츠가 독특하다. “선배님들의 그간 배우로서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배우로 거쳐 온 무대나 방송에 얽힌 이야기들, 진짜 재미있는 게 많은데 저만 알기 아깝거든요. 그분들의 영상회고록을 아카이브처럼 남겨둘 거예요.” 벌써 이순재(85), 오현경(84), 김영옥(83)을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한 사람당 4~5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방대한 ‘기록’을 적당한 분량씩 나눠 조만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마지막회는 제 회고록이 되겠죠. 55년간 연기생활, ‘난타’ 등 공연 제작자의 삶. 언제쯤 다 얘기할 수 있을까요.”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