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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호국인물 육탄3용사

    전쟁기념관(관장 朴益淳)은 27일 6·25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인 ‘육탄 3용사’를 10월 호국의 인물로 선정했다. 육탄 3용사는 강승우(30년 11월 남제주 출생)소위,오규봉(28년 10월 천안 출생)일병,안영권(24년 11월 김제 출생) 일병이다. 이들은 52년 10월12일 중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백마고지에서 중공군과의 전투 도중 특공대를 자원,박격포탄,수류탄을 휴대하고 육탄 돌격해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장렬히 전사했다.이를 계기로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대공방전에서 국군은 백마고지를 완전 탈환하게 됐다. 이들 3용사는 백마 3군신(軍神)으로 불리고 있으며,이들의 희생정신을기리어 정부는 을지무공훈장 수여와 함께 강 소위는 중위로,오,안 일병은 하사로 추서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 ‘9월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

    9월 독립운동가로 ‘상록수’의 작가 심훈(沈熏·본명 大燮) 선생이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밝혔다. 1901년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한 선생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베이징에서이회영(李會榮) 선생을 만나 신학문을 수학했다.24년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돈화문 앞에서 ‘통곡 속에서’라는 시를 ‘시대일보’에 발표했다. 31년 충남 당진으로 낙향한 선생은 33년 신문에 ‘영원의미소’,‘직녀성’을 집필하고,농촌 계몽운동을 위한 장편소설 ‘상록수’를 통해 민족항일운동을 일깨웠다.36년 장티푸스로 3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부는 지난해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김락여사 死後 72년만에 훈장

    일제때 시아버지와 남편·아들 3대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고 자신도 3.1운동을 지원하다가 일경의 고문끝에 두눈까지 실명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맏며느리가 뒤늦게 공로를 인정받게 됐다. 주인공은 퇴계의 13대 손으로 구한말 의병장인 향산(響山) 이만수(李晩壽·제59호 건국공로훈장독립장)선생의 맏며느리이자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의 처제인 김락(金洛)여사(1863∼1929). 김여사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광복 제56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일제경찰 극비본 고등경찰요사 폭도사편집자료’ 제1장총설 제2쪽에는 ‘김락여사는 안동 양반가 이중업의 아내로 대정 8년(1919년) 3·1만세운동 소요 당시 일본 경찰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던 중 두눈을 실명,11년간 고초를 겪다가 소화 4년(1929년) 2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씨의 시아버지인 향산선생은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단식투쟁에 들어가 24일만에 6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남편 이중업선생은 안동 3.1운동과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했다.아들 동흠·종흠 형제도 군자금 모금에 연루돼 두번씩 투옥되는 등 김씨는 시아버지와남편·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독립운동내조에 평생을 바쳤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
  • 8월의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으며,한국애국부인회 재건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3.1만세운동 후인 1920년독립운동단체 대표이던 시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이후 31년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정에 전달했다. 22년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기도 한 선생은 일제의 패망으로 1946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왔다.당시 임정 요인 가운데 선생이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이가없었다.이동녕 선생이 중국 사천성에서 외롭게 숨질 때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43년에는 임시정부내 좌우익 통합을 위해 여성 차원의 민족통일전선인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기도 했다.광복 이듬해 귀국한 선생은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金九) 선생의 노선을 지지했다.정부는 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8월의 호국인물 김용식일병

    전쟁기념관은 30일 국군 창설 이래 병사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전쟁영웅 김용식(金龍植) 육군 일등병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31년 2월8일 경기도 옹진군에서 출생한 김 일병은 6·25전쟁 발발 직전인 50년 5월 자원 입대,수도사단 17연대 3대대 9중대에 배치된지 1개월만에 최전선에 투입됐다.이어 8월 낙동강 전선의 비학산 전투에 참가,돌격작전의 선봉에서서 수류탄과 대검으로 군관 1명을 포함,15명의 적을 사살,생포하는 공을 세웠다. 김일병은 같은해 9월 19일 경북 안강 전투에서 척후병으로 정찰중 북한군의 만행을 보고 격분,홀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황해도 옹진군 강령초등학교와 옹진중학교 재학 시절 줄곧 반장을 맡으며,리더십과 의협심이 뛰어났던 그는 전장에서도 앞장 서는 등 불퇴전의 용기를 보여줬다. 정부는 살신보국 정신을 기리어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나,유족이 없어 전달하지 못한채 보관해오다 이번에 호국인물로 헌양했다. 노주석기자 joo@
  • 유성희 전 의사협회장 국민훈장 추서

    대한의사협회 대외의료협력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중지난 11일 급환으로 사망한 유성희(柳聖熙) 전 의사협회장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보건복지부는 유 전회장이 지난 94년부터 지난해까지 의협회장을 맡아 의료계 발전과 의약분업 도입에 기여했고남북간 의료분야 협력을 적극 추진한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김원길 보건복지부장관은 이날 오후 유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영안실을 방문,유족들에게 국민훈장을 전달했다. 김용수기자 dragon@
  • 이재명의사 추모동상 제막식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 제거에 나섰던 이재명(李在明)의사의 추모동상이 전북 진안군에 건립됐다. 사단법인 이재명의사 추모사업회(이사장 안원)와 이재명의사 동상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이경선)는 12일 진안읍 군하리 진안 이씨(李氏) 제각 광장에서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이날 제막식에는 임수진 군수,김성배 35사단장,김형중 전주보훈지청장,진안 이씨 종친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의사 동상은 진안군이 3억4,000만원을 지원해 부지 50평에 높이 4.3m 크기로 세워졌다. 진안 이씨인 이 의사는 1909년 12월22일 오전 11시30분쯤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을 비수로 찔러 중상을 입힌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사건과 연루돼 재판을 받고 다음해인 1910년 23세의 젊은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독립운동가 윤세주 사상 통일과정서 교훈 삼아야”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의열단 창단멤버로 활동한 석정 윤세주(尹世胄·1901∼1942)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진보성향의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다는 평가가 나왔다.그의 항일투쟁활동 뿐 아니라 ‘지식인 윤세주’의 면모를 본격 조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의미가 크다. 5일 경남 밀양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밀양문화원 주최 윤세주선생 탄신100주년기념 한중학술회의에서 강만길 상지대총장은 ‘윤세주와 조선민족혁명당’이란 발표문을 통해 윤세주의 사상·세계관,조선민족혁명당에서 그의 역할,해방후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구상 등을 소개했다.강총장은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소상히 알려져 있지만그들의 생각이나 세계관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고지적하고 “윤세주는 진보적인 세계관과 해방 후 독립국가건설에 대한 뚜렷한 구상을 가진 이론가인 동시에 의열투쟁 등 실천가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강총장은“1930년대 당시 윤세주는 세계 도처의 식민국가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을 한 단계 높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았으나,역사를 움직여나가는 기본조건은 경제적 조건이란 시각 아래 사상적으로는 유물사관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해방 후 독립국가 건설과 관련,윤세주는 1936년에 발표한 글에서 “경제균등에 의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이나 자본가 계급 그 어느 쪽의 독재도 원치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이는 해방 후 좌·우익정당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일본인이나 친일파 소유의 독점적기업에 대한 몰수와 국유화,그리고 토지 몰수(국유화),균등분배 등을 주장한 것과 동일한 생각이며,근본적으로는 비자본주의적 국가건설을 구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강총장은 “좌우합작·통일전선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대표적 이론가인 윤세주의 사상은 향후 남북통일 과정에서 교훈으로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과 윤세주’라는 논문에서 “조선의용대 결성 초창기 윤세주의 가장 큰 임무는 일본군 포로 가운데 조선인을 포섭해대원으로 확보하는 일이었다”며 “조선의용대 청년대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정신적으로 감화시키고 단련시켰다”고 주장했다.중국국민당의 한 문서에서는 그를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한편 이날 중국측에서는 난주 장액사범학원 석건국 교수,계림 광서사범대 최본춘 교수 등이 주제발표자로 참가했다. 또 조선의용대원 출신으로 흔히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불리는 김학철(金學鐵·84·중국 연길시 거주)옹이 토론자로 참가,조선의용대 시절 윤세주의 활동상에 대해 증언했다. 1942년 5월 태항산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과의 교전끝에 순국한 윤세주는 동지 진광화(陳光華)와 함께 하북성 한단시 열사능원(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중국 국립묘지에 묻힌 한국인은 이들 뿐이다.지난 82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밀양 정운현기자 jwh59@
  • ‘6월의 독립운동가’ 나창헌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조선민족대동단과 한국노병회를 조직, 일본 총영사관 폭탄의거 등 의열투쟁을 전개한 나창헌(羅昌 憲)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96년 평북 희천에서 출생해 경성의학전문학교 2 학년 재학중 3·1운동추진계획에 학생대표로 참가하면서 독 립운동에 뛰어들었다.3·1운동의 절정기인 5월초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특파원자격으로 상해임 시정부에 파견돼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다. 국내로 잠입,고종황제의 아들 이강(李堈)공의 탈출을 꾀했 으나,일경에 발각돼 실현하지 못했다.1922년 김구,여운형선 생 등과 함께 1만명 이상의 의병을 양성하고 100만원이상의 전비를 마련,독립전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한국노병회를 조 직,이사로 활동했다. 일제를 피해 중국 스촨(四川)성 만(萬)현으로 가 의원을 운 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36년 6월26일 위암으로 순국했 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순직 헬기조종사들 훈장 추서

    정부는 서울 올림픽대교 주탑 위에 조형물을 설치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소속 헬기 조종사 전홍엽(全洪曄·45)준위,남인호(南仁琥·41)준위,김우수(金禹隨·27)상사 등 3명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키로했다고 31일 밝혔다. 훈장은 1일 오후 2시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리는 안장식에서 추서될 예정이다. 한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이날 오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거행된 육군 헬기 추락사고 사망자 3명의 영결식에 하정열(河正烈·육군 준장)국방비서관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노주석기자 joo@
  • ‘6월의 호국인물’ 장세풍 중령

    전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경기도 의정부지구 전투에서105㎜ 야포로 적 전차를 격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장세풍(蔣世豊) 육군중령을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1921년 10월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한 장 중령은 40년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43년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수학했다. 46년 월남,2년뒤 육군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임관했다. 포병학교 제2포대장으로 의정부전선에 투입된 당시 장 대위는 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워 돌진해오자 근거리 직접 조준사격으로 적 선두전차를 격파했다.이어두번째 전차를 향해 포를 발사하려는 순간 적의 포탄이 폭발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실행할 수 없는 105㎜ 야포의 직접 조준사격으로 적의 진격을 저지시킨 그의 불굴의 투혼은군 포병의 귀감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정부는 2계급 특진과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1일 호국추모실에서 유족인 여동생 장순덕(75)·순복씨(65) 등이 참석한가운데 고인의 공적을 추모하는 현양행사를 갖는다.노주석기자 joo@
  • 순직 조종사 31일 영결식

    육군은 30일 서울 올림픽대교 상공 헬기추락 사고와 관련,제작사인 미 보잉사의 기술진과 대한항공 기술요원 등 6명으로 ‘민·관 합동 중앙항공기 사고조사팀’을 구성,정확한사고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육군은 일단 ▲장시간 정지로 인한 엔진과열 등 기체결함 ▲한강상공의 돌풍 등 예기치 못한바람의 영향 ▲조종사의 실수 등 3가지로 나눠 정밀 조사 중이다. 한편 순직한 조종사 전홍엽(全洪曄·45)준위,부조종사 남인호(南仁琥·41)준위,기관사 김우수(金禹隨·27)상사의 영결식은 31일 오전 10시 육군 항공작전사령부장으로 거행된다. 육군은 전 준위 등 3명을 순직처리하고 다음달 1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합동 안장할 예정이다.순직한 김 중사는 상사로추서됐다. 노주석기자 joo@
  • 베델선생 92주기 추모제

    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1872∼1909·한국명 裵說)선생의 92주기 추모제가 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주최로 15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서 열렸다. 1904년 러일전쟁 취재차 서울에 온 베델은 영어통역관으로 소개받은 양기탁 선생 등 민족진영 인사들과 교류하면서뜻을 모아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그러나 창간 6년만인 1909년 5월1일 그는 이역 한국땅에서 타계했고,‘신보’는 이듬해 한일병합으로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지난 68년 정부는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윤경빈 광복회장,김병오 국회 사무총장,이원범 3·1운동기녑사업회장,짐 호어 북한주재 영국대사대리 등을 비롯해 독립유공자·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 김구 영문편지 첫 공개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이듬해 미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을위해 한독당 관계자를 미국에 파견,당시 미 상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영문)가 새로 발견됐다.당시 임정세력과 미국 정부간에 정식 외교라인이 없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통상 관련 서한을 보낸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1946년 8월 31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는 발신지가 당시 한독당 본부가 자리잡은 운현궁으로 돼 있다.편지의 발신자는 한독당 위원장(Chairman Independence Party)인 백범,수신자는 미 상무장관 아브렐 해리먼(1891∼1986)이다.또 이 편지를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전경무(田耕武·1900∼1947)당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 외교위원이었다.백범은 편지에서 전씨를 워싱턴 주재 한독당 특별대표로 소개하고 전씨가미국정부에 한미 양국의 통상관계 수립을 요청할 것이라고밝히고 있다. 노경채 수원대(사학과) 교수는 “46년 2월 백범이 미군정자문기구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총리를 맞고 있어서 미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백범이 한독당위원장 자격으로 특사를 통해 미국측에 편지를 전달한 것은이승만과의 정치적 역학관계 등을 감안,미국과 독자적인 유대관계를 맺기위한 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편지 수신자인 해리먼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기간 동안 외교관으로서 미소간의 외교관계를 주도한 인물로 루스벨트 대통령시절 소련대사,영국대사를 지냈으며 케네디 대통령시절 국동문제담당 국무차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편 이 편지는 재미사학자 안형주씨(安炯柱·65)가 미국 LA에 거주하는 전씨의 사촌여동생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편지 하단에는 백범의 한문 서명,낙관과 함께 ‘K.Kim’이라는 영문서명이 부기된 점이 이채롭다.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백범기념사업회 상임감사는 “미군정초기 백범이 미국정부 각료에게 편지를 보낸 경우는 희귀한 사례”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백범편지 전달 전경무씨는. 백범의 편지를 휴대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전경무씨는 1906년 사탕농장 노동자로 하와이로 건너간 재미한인 이민1세대의 후손이다.미 본토로 건너가 미국인에게 입양돼 미시건대를 졸업한 전씨는 임시정부 후원단체에서 외교·선전활동을 벌였다.1941년 재미한인들의 통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1944년 임정에서 새로 구성한 주미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장 비서로 활동하였다. 해방후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한국올림픽위원회의 IOC가입을 위해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1947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총회 한국대표로 참석차미 군용기를 타고가던 그는 일본 후지산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타계했다. 지난 95년 정부는 뒤늦게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를 추서했다.그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우이동에 있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어 도시개발 과정에서 유실된것으로 알려졌다.
  • 5월의 독립운동가 ‘안규홍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전라도 일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머슴 출신 의병장 담산(澹山) 안규홍(安圭洪)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선생은 1879년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0살때부터 20년간 머슴생활을 하다 러·일전쟁 이후 토지약탈등 일제의 침략을 절감,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 농민을 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졌다.이후 전남 순천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투신,활동하던 중 의병장이 민폐를 끼치자 그를제거한 뒤 1908년 전남 보성군 동소산에서 토착농민과 해산군인 등을 모아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와 친일세력,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과 순천 등 전남 중동부지역에서 활동하며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거나 탐욕스러운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1909년 10월까지 1년6개월동안 일본수비대·토벌대·순사대와 26차례 전투를 벌여 파청대첩과 진산대첩 등 숱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일제가 전남지역 의병을 상대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자 선생은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부대를 해산,고향으로돌아가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이후 대구감옥으로 옮겨져 1911년 5월5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정부는 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김대통령 故김지웅교육감 조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6일 고 김지웅(金知雄) 울산교육감의 미망인 송근주(宋槿主)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또 고인의 빈소에 정순택 교육문화수석을 보내 조문하고 고인에게 훈장을 추서토록 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4월의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는 2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단주(旦洲)유림(柳林)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189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1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을,다른 한편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항일운동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협동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신채호 선생을 도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이 때 선생은 무정부주의를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했다.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대표로 참여했고 임시 의정원의원,외교위원회 연구위원,선전위원회 선전위원,무임소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1945년귀국한 선생은 ‘독립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신문’을창간,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쓰다 1961년 4월1일68세를 일기로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발언대] 박차정의사 동상 6년만에 건립… 가슴 뿌듯

    3·1독립만세운동 82주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 부산시민은한껏 애국시민으로서의 자긍심과 부산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역사적 호재를 갖게 됐다.그것은 다름아니라우리 부산시민의 정성과 뜻을 한데 모아 그동안 추진해 왔던 부산의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인 박차정 의사의 동상건립이 완공, 3월 1일 금정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서 그 역사적인 제막식을 거행한 것이다.전 시민이 함께 의사의 애국혼에 경의를 표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박차정 의사는 동래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에서 신지식을 깨우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저 머나먼 중국땅에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했다.박 의사는 무장항일투쟁(중국 강서성 곤륜산전투)의 선봉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중 부상을 입고 1944년 5월 27일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광복과 일본의 패망을보지 못하고 순국했다.참으로 우리 부산의 자긍심이요 자랑이며,부산시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지난 95년 유관순 열사와 같은 훈격인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해 여사의 공훈록이 발간됐다.같은 해에 박차정 의사 숭모회가 창립되었으니 여사의 동상건립 준비가 본격화된 이후 실로 6년만에 제막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부산 시민은 모두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여사의 숭고한 애국혼과 위훈을 내고장 부산의 시민정신으로승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하겠다.또한 박 의사의 생가복원과기념관 건립 등 산적한 과제들도 차질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우리 시민의 역량을 다시 한번 결집해야 하겠다.부산은일제의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그들의 수탈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던 곳으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55주년 8·15광복절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광복기념관이 개관돼 독립운동사와 민족정기 선양의 산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이밖에 동래읍성지 내 마안산 정상에 우뚝선 부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과,구포대교 옆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어린이대공원 내 박재혁 의사동상 등 이미 많은 독립운동사적이 건립됐다.또한 ‘기장지역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음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영원 부산보훈청 급여계장
  • 진화작업 소방관 6명 참사

    휴일 새벽 꽃샘추위 속에 화재현장에 출동한 소방관 6명이사람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불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려 순직했다.서울세곡동 화훼단지 비닐하우스에도 불이나 10명이 숨졌다. 4일 오전 3시48분쯤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312의 135 2층주택에서 불이 나 건물이 붕괴,서울 서부소방서 소속 박동규(朴東奎·45)소방장 등 6명이 숨지고 이승기(38)소방교 등 3명은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나 이 소방교는 위독하다. 숨진 소방관들은 화재가 난 건물 안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말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불타고 있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다순식간에 변을 당했다. 경찰은 집주인 선모씨(69·여)의 아들 최모씨(32)로부터 “어머니에게서 꾸중을 들은 뒤 홧김에 불을 질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최씨는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자치부와 서울시는 순직한 소방관들에게 1계급 특진과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하기로 했다.또 서소문동 서울시청 별관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영결식은 6일 서울특별시 소방방재본부장으로 치를 예정이다.한편 이날오전 4시40분쯤 서울 강남구 세곡동 202 율암마을 화훼단지비닐하우스에서 불이나 잠을 자던 이일행(李一行·58)씨 등일가족 10명이 숨졌다.경찰은 일단 누전 또는 전기곤로 과열로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화재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사망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홍제동 화재 △박동규△김철홍(金喆洪·36·소방교)△박상옥(朴相玉·33·〃)△김기석(金紀錫·43·〃)△장석찬(34·소방사)△박준우(朴埈佑·31·〃) ◇세곡동 화재 △이일행△김옥례(金玉禮·54·이씨의 부인)△황수연(黃水蓮·31·〃 큰며느리)△이현수(29·〃 둘째아들)△박구자(朴九子·28·〃 둘째 며느리)△이아성(李雅星·6·〃 손자)△이유성(李兪聖·4·〃)△이유진(李兪珍·5·〃 손녀)△이아진(李雅珍·2·〃)△이아선(李雅善·1·〃)전영우 안동환기자 anselmus@
  • 3월의 독립운동가 이승훈선생

    국가보훈처는 27일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무역업과 운송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으나 연이은 사업실패를 겪으며외세와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일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에 감명받은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됐다.이후 태극서관을 설립,민족자본 육성에 힘쓰는 한편 초등교육기관인 강명의숙과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 운동을 펼쳤다. 1911년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사건인안악(安岳)사건에 연류돼 제주로 유배되었다.105인 사건의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했다.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 등으로 세계정세가 변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일제에 체포돼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출옥한 선생은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1924년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1930년 5월 9일 ‘내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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