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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의 독립운동가 민종식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1906년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민종식(閔宗植·얼굴·1861∼1917) 선생을 광복회와 공동으로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일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20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이조참판을 지냈다.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관직을 버리고 낙향,국치설욕을 위해 부심했다. 선생은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06년 3월 충남 청양군정산면에서 유생들과 함께 의병 600여명을 조직,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서천읍·남포성읍·홍주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친일파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잡힌 뒤 1907년 7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탄원으로 풀려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56세 때 숨졌다. 정부는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경운기자
  • 6월의 호국인물 김풍익 중령

    전쟁기념관(관장 朴益淳)은 28일 6·25전쟁 당시 야포로적 전차를 격파한 김풍익(金豊益·1921∼1950) 육군 중령을 6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발표했다. 충남 예산 출신의 김 중령은 선린상고를 나온 뒤 육사 7기로 임관했다.1950년 5월 소령으로 진급해 포병학교 교도대 대대장을 맡고 있던 중 전쟁이 발발했다.경기도 의정부 금오리 지역에서 파죽지세로 밀려 들어오는 북한군 T-34전차를 맞았으나 전차는 물론,대전차 화기마저 전혀 없어피해자가 늘자 적 전차 50m 앞까지 105㎜ 야포를 끌고가직접 조준사격,전차를 파괴했다.그러나 김 중령은 뒤따라오던 전차의 직격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고인에게 중령 진급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추모행사는 오는 12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열린다. 김경운기자 kkwoon@
  • 5월의 호국인물 육탄 10용사

    전쟁기념관(관장 朴益淳)은 6·25전쟁 발발 1년여 전인 49년 5월 북한군의 기습으로 점령된 개성 송악산을 탈환하고 전사한 육탄 10용사를 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발표했다. 49년 5월3일 새벽 북한군은 본격적인 남침 전 국군의 전투력을 탐색하기 위해 송악산의 국군 1사단 11연대 진지를 기습 점령했다.고지 재탈환 과정에서 아군의 희생자가 늘어나자 11연대 1소대 1분대장인 서부덕 이등상사와 분대원(하사) 9명은 북한군의 토치카를 제압하기 위한 특공대에자원했다.이들은 박격포탄과 폭약을 가슴에 안고 토치카안으로 돌진,자폭함으로써 토치카를 파괴했다. 정부는 이들의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기려 서 상사는 소위로,분대원 9명은 특무상사로 각각 특진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 4월 독립운동가 김혁 선생

    국가보훈처는 대한통의부,신민부를 결성해 무장독립운동을전개하고,성동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오석(烏石) 김 혁(金赫·1875∼1939)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75년 10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뒤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에 입학,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해 정위(현 대위급)까지 진급했으나,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항일운동을 결심하고 낙향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용인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8월 임시정부의 지시에따라 북로군정서에 가담,청산리 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를 결성해 군사부감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지도했고,1924년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참모로 활약했다.1925년 3월 북만주지역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한 뒤 1928년 1월 일경에 체포됐다.선생은 1929년 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가출옥돼 1939년 64세를 일기로 숨졌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4월의 호국인물 최종봉 공군 소령

    전쟁기념관(관장 朴益淳)은 6·25전쟁 당시 낡은 비행기를 타고 낙동강 최후방어선 사수에 공을 세운 고 최종봉(崔鍾奉·1926∼1951) 공군 소령을 4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경북 청도 출신의 최 소령은 1949년 10월 공군 창군요원으로 참여한 뒤 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6·25전쟁이터졌다.최 소령은 전투기가 1대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공군 연락기인 L-4기에 30파운드 대전차용 폭탄과 수류탄을 싣고 60여 차례나 출격,물밀듯이 남하하는 북한군에게크고 작은 타격을 주었다. 51년 4월 3일 최 소령은 꿈에 그리던 전투기인 F-51(P-51 무스탕과 같은 기종)을 타고 북한군 건물,보급품 집적소,통신장비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세웠다.최 소령은 을지무공훈장과 함께 소령으로 추서됐다. 김경운기자 kkwoon@
  • [오늘의 눈] ‘한국의 슈바이처’ 외면한 의사協

    18일 오전 9시 원주시 제일감리교회. 이곳에서 ‘한국의슈바이처’로 불렸던 고 문창모(文昌模) 박사의 영결식이원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례 위원장은 한상철(韓尙澈) 원주시장이 맡았다.정부는평소 고인의 뜻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이자리에는 정부 대표로 이태복(李泰馥) 보건복지부 장관이참석,훈장을 추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원주 시민들은 초봄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한평생 국민의 보건의료발전에 기여한 고인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도했다. 하지만 이승을 떠나는 문 박사는 정작 의사들로부터는 외면당했다.이날 영결식장에는 대한의사협회에서는 한사람도찾아오지 않았다.의사협회 신상진(申相珍) 회장 명의로 된조화 하나만 덩그렇게 서 있었을 뿐이었다. 문 박사는 누구인가?그는 지난 3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뒤 지난해 의료현장을 떠날 때까지 칠십 평생을 참 의사의 길을 걸어왔다.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결핵협회를 만들었고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는 등 일생을 결핵퇴치에 앞장서기도 했다.뿐만 아니다.20년 동안 나환자들을 위한 집단촌을 운영하고 맹아학교를 여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다.자신이 진료했던 코흘리개 환자가 할아버지가돼서 찾아오기도 했다. 문 박사는 지난 2000년 사상 초유의 의료계 파업이 일어났을 때 “환자를 떠난 의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며 의사 가운을 내던진 후배 의사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한 꾸짖음에 대한 앙갚음인가? 의사들의 공식 단체인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영결식 참석은커녕 문상조차 가지 않았다.영결식이 열렸던 날도 의사협회 회장의 일정에 이렇다 할 공식 행사는 없었다. 지금 의사협회는 의약분업 및의료법 개정안 철폐를 주장하며 대정부 투쟁에 앞장서고있다.투쟁을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회원들로부터 많게는수백만원씩의 회비를 거둬 들이고 있다. 의료계의 큰 별이 졌는데도 의사협회가 조화 하나만 보내고 ‘나 몰라라’ 식으로 돌아서 버린 것에 대해 의사들은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실망감일까, 자괴감일까? 아무생각도 없는 것일까?[김용수 행정팀 기자 dragon@
  • 고 문창모박사, 국민훈장 무궁화장

    정부는 지난 13일 별세한 고 문창모(文昌模) 박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고 18일 밝혔다. 이태복(李泰馥) 보건복지부장관은 이날 원주제일감리교회에서 원주시 사회장으로 엄수된 고인의 장례식에 정부 대표로 참석,유족들에게 국민훈장을 전달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등분야에서 공을 세워 국민복지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다.고 문 박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70여년간을 사랑의 의술을 베풀고 이웃사랑을 실천한 의료인으로 국민보건의료발전에 기여했다. 김용수기자 dragon@
  • 3월의 독립운동가 이필주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李文遠)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이필주(李弼柱·1869∼1942) 선생을 200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서울 정동에서 몰락한 선비 이윤영(李允永)의 장남으로태어난 선생은 구한국 군대 사병으로 들어가 군생활을 하다가 자식남매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교회를 나가게되어 1903년 W.B.스크랜튼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후 목회자로 일하면서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였다. 1911년 협성신학교 입학,1915년 목사 안수를 거쳐 1918년 정동교회 목사로 초빙됐다.1919년 3·1운동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을 한 뒤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1년 일제가 교회 예배에 궁성요배,황국신민서사 등을요구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이듬해 4월21일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다음달 1일부터 선생의 사진 및 공판 보도기사,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를 모아 선생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임창용기자 sdragon@
  • 3월의 호국인물 김백일장군

    전쟁기념관(관장 朴益淳)은 6·25전쟁 당시 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김백일(金白一·1917∼1951) 육군 중장을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중국 만주에서 태어난 김 장군은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한 뒤 육군 중위로 임관,육사 교장을 지냈으나 6·25전쟁이 나자 1군단을 지휘해 경북 포항 일대의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공격을 저지,반격 작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1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북진 명령을 받고 예하 육군 3사단을 진격시켜 국군으로는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했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로 정했다.같은 해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에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피난민 10만명을 안전하게 후송하는데 기여했다.김 장군은 51년 3월 28일 경기도 여주에 있던 전방지휘소 작전회의에 참석한 뒤 “작전에 차질을 빚어선 안된다.”며 악천후 속에서도 경비행기를 탔다가 추락 사고로 순직했다.정부는 지난 66년태극무공훈장과 함께 중장 특진을 추서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2월의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일제 치하에서 비밀결사대를 조직,의병활동을 한 한훈(韓焄·1890∼1950) 선생을 광복회 등과 공동으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0년 전후 의병에 가담,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913년 비밀결사대인 광복단을 조직,일본인들의 광산 등을 털며 항일 군자금을 마련했다.이어 1916년부터는 친일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전북 순창의 일본군 헌병대를 습격,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일본군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했으나 옥중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나빠져 풀려났다.선생은 6·25전쟁중 북한군에 납치돼 피살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1월의 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

    국가보훈처는 2일 항일의열투쟁가 곽재기(郭在驥·1893-1952)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울 경신학교의 애국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활동했고 졸업후 청주 청남학교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에 힘썼다. 선생은 3·1운동 후 ‘필설'(筆舌)의 방법으로는 독립할수 없다고 보고 중국 지린(吉林)으로 건너가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 암살·파괴활동을 벌였다.1920년 5월 폭탄 13개와 권총 2자루,실탄 100발 등을 국내로 반입시킨 뒤 서울로 잠입한 선생은 인사동에서 동지들과 암살·파괴계획을 모의하다 일경에 체포됐다.1921년 최고형인 징역 8년을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인 1930년 다시 망명,만주와 상하이,노령 등지에서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11월 귀국했다. 이후 정치활동을접고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종사하다가 1952년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1월의 호국인물…심일 육군소령

    전쟁기념관은 28일 새해 1월의 호국인물로 6·25전쟁 당시육탄공격으로 용맹을 떨친 고 심일(沈鎰) 육군소령을 선정했다. 함남 단천 출신인 심 소령은 육사 8기로 임관, 6·25전쟁발발 직후 6사단 대전차중대 소대장(중위)으로 근무하던 중특공대를 편성,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남하하던 북한군에육탄공격을 감행해 적의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 심 소령의 용맹은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에 대한 아군의 공포심을 없애 국군 장병들이 모든 전선에서 적의 전차에 육탄공격을 감행하는 계기가 됐다. 심 소령은 이후 충북 음성지역 전투,경북 영천 304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51년 1월26일 영월지역전투에서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정찰 활동중 총격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산화했다.정부는 대위이던 심 소령에게 위관급 장교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소령 특진을 추서했다.전쟁기념관은 내달 3일 호국추모실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헌양행사를 갖는다. 강동형기자 yunbin@
  • 한겨레신문 초대사장 송건호선생 타계

    지조있는 지식인이자 참언론인의 표상으로 일컬어져온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이 21일 오전 6시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75세. 고인은 지난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씨병이발병,8년째 투병 생활을 해왔다.충북 옥천 출신인 고인은민주화운동가로,현대사연구가로 치열한 삶을 살다간,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형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서울대 법대 재학중인 1953년 대한통신에 입사,언론계에첫발을 들여놓은 고인은 자유신문 외신부장,한국·조선일보 논설위원,경향신문·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70년대 중반부터 언론민주화운동을 펼쳐온 청암은 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초대 사장에 취임했다.청암은 그뒤 94년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40여년동안 ‘언론외길’을 걸었다. 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언론자유를 외치는 젊은 기자들의 사표를 수리하라는 사주를 향해 “부하 기자들의목을 치면서 더 이상자리를 지킬 수 없다”며 동아일보를 떠난 청암은 이후 언론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동아일보를 박차고 나오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고생했으니 이제 청와대로 오시오”라며 온갖 유혹의 손길을 뻗쳤으나 그는 권력과는 한 치의 타협도 없이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84년 해직언론인들을 규합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의장에 취임한 청암은 대안매체로 ‘월간 말’을 창간했다. ‘행동하는 지성인’의 대명사격이었던 그는 60년대에 ‘드골평전’‘한국지식인론’을 쓴 바 있다.또 해직기자 시절을 전후해 20여 종의 저작물을 내놓았는데 ‘민족지성의 탐구’‘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국현대인물사론’‘한국현대사론’ 등이 그것이다.언론자유투쟁과 저술활동 공로로 청암은 금관문화훈장,심산상,호암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장례식장에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이날 오전 직접 빈소로 전화를걸어 부인 이정순(李貞順·71) 여사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다.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한광옥(韓光玉) 민주당대표,한완상(韓完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남궁진(南宮鎭) 문화부 장관,최학래(崔鶴來) 한국신문협회회장과 언론사 대표 등 각계 인사들도 밤새 빈소를 찾았다. 한국기자협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오늘 우리는 한국 언론의 정신적 기둥을 잃었다”면서 “선생의 삶은 고단했지만 그것은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언론의 역사가 됐다”고애도했다.전국언론노동조합도 “선생은 전국 2만 언론 노동자들의 스승이며 민족의 지성이었다”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씨와 준용씨 등 2남4녀.장례는 24일오전 8시 사회장으로 치러진다.장지는 광주 5ㆍ18묘역.(02)3210-2400,(02)710-0201. 정운현기자 jwh59@. ***정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21일 고 송건호(宋建鎬) 전 한겨레신문 대표이사의 빈소에 오홍근(吳弘根) 공보수석을보내 명복을 빌고 유가족을 위로했다.정부는 이날 송 전대표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추서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재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재명(李在明)선생을 선정,발표했다. 1886년 평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9년 1월 평양에서 이토 이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려 했으나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융희황제의 안전을 내세워 만류,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을사오적 처단으로 계획을 바꾼 선생은 1909년 12월22일 명동성당 입구에서 군밤장사로 변장해 있다 인력거를타고 지나는 이완용을 비수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일경에체포된 선생은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국가를 위한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빼앗지 못할것이다”는 최후 법정진술을 남겼다.선생은 1910년 9월30일 형 집행으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정부는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러서 순국 구한말 이범진선생 묘터 확인

    구한말 외교관이자 순국지사인 이범진(李範晉·1852∼1910)선생의 묘소 위치가 최근 러시아 교포들에 의해 확인돼 그 자리에 기념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측 자문위원 6명과 함께 고국을 찾은 조 바실리 이바노비치(51·모스크바 거주)고려인연합회 회장은 “최근 상트페테르부르그 시내 한 아파트단지에서 이 선생의 묘소자리를 고증을 거쳐 확인했다”며 “조만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현지에 기념표지판을 부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 선생의 묘소는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멸실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지난 90년 한-러 수교 이후 한국측에서 다시 수소문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서울출신으로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선생은‘아관파천’의 주역으로 법부대신 겸 경무사를 지냈으며 이후주미공사를 거쳐 1900년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돼 근무했다.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외공사 소환요구가 있자 이에 불응,현지에서 밀사로 활동하였으며,1907년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밀사’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3년 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해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순국했다.헤이그밀사 3인중 1인인 이위종(李瑋鍾)은 그의 아들이며,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정운현기자 jwh59@
  • 11월의 독립운동가 민영환선생

    국가보훈처은 30일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계정(桂庭)민영환(閔泳煥) 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1884년 이조참의로 벼슬길에 오른 뒤 예조판서·병조판서·한성부윤을 거쳐 1894년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됐다.그러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낙향했다.이어 1905년 의사조약이 체결되자 의정대신 조병세와 을사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수감됐다가 석방된 선생은 1905년 11월 29일 ‘동포형제들은 천만배 더욱 분려하고 지기(志氣)를 굳게 해 학문에 힘쓰며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는 내용의 ‘경고 대한 2천만 동포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순국했다.45세때다.정부는 62년 선생의 뜻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보훈처는 11월 한달동안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연다. 강동형기자
  • 11월의 호국인물 신철수 공군소령

    전쟁기념관은 30일 ‘11월의 호국인물’에 신철수 공군소령(26∼51년)을 선정,발표했다. 경남 양산 출신인 신 소령은 6·25전쟁 직전인 50년 4월공군장교로 임관,F-51 전폭기 조종사로 많은 전투에 참가,전공을 세웠다. 51년 10월23일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 편대장(당시 대위)이던 신 소령은 한국공군 단독으로 원산 폭격작전에 참가,큰 전과를 올렸다.이후 화천 일대 적 보급소,포진지,병력집결지 등을 타격하는 수훈을 세웠다. 신 소령은 12월15일 금성지구 북방으로 출격,적의 후방기지를 타격하는 대지공격(對地攻擊)작전을 수행하던 중 ‘애기’인 F-51가 적의 총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이자 양 날개를 흔들며 동료들에게 최후 신호를 보낸 뒤 적의 진지로 돌진,장렬하게 전사했다.정부는 1계급 특진과 함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강동형기자
  • 문화훈장 서훈자 34명 선정

    문화관광부는 18일 국악인 김천흥,동양화가 장우성 화백,최영희 문화재위원장,시인 고(故) 김수영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또는 추서하기로 하는 등 올해 문화훈장 서훈자 34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문화부는 또 ‘제 33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자로박찬수 목아불교박물관장 등 6명을 선정하고,20-30대 젊은예술가를 대상으로 하는 ‘2001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시인 나희덕씨 등 8명에게 주기로 했다.시상식은 20일오후 2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개최되는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있을 예정이다.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문화훈장 △은관=권영우 신응식(필명 신경림) 유종호 이지관 최일남 고(故)박용철 고(故)박태현 고(故)홍연택 △보관=강숙자(예명 강유정) 권오일 윤형두 이성천 이우석임원식 정철호 고(故)김종래 △옥관=권성덕 박형진 송대관유광열 장석웅 주남철 하춘화 마에다 켄지(前田憲二) △화관=강명보 김병학 민영근 장수봉 황용주 고(故)문호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박찬수(목아불교박물관장) 이문구(소설가) 정문규(화가) 이규도(성악가) 김의경(극작가) 고우영(만화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나희덕(시인) 허진(화가) 이신우(작곡가) 박명성(극단 신시 대표) 이해준(현대무용가) 곽경택(영화감독) 안재욱(연기자). 이종수기자
  • 누전 화재, 인천 웨딩홀 불 3명 사망

    지난 1일 인천 남동구 구월동 엠파이어 웨딩홀에서 발생,소방관 2명 등 3명이 숨진 화재의 원인은 누전일 가능성이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화재 원인을 수사중인 경찰은 3일 건물 외부에서 침입한흔적이 없고 2층 출입구에 위치한 배전판이 심하게 탄 점등으로 누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렸으며 4일국립과학수사연구소·경찰·검찰의 합동조사를 펴기로 했다. 경찰은 이 웨딩홀이 지난 4월 정기 소방검사때 벽·천장·바닥 등을 방염처리하지 않아 인천남부소방서로부터 7월까지 시정명령을 받았으나 이행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앞으로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한편 화재로 숨진 구용모(具龍模·49) 소방장과 이동원(李東垣·31) 소방사에 대한 영결식이 3일 오전 남동구 구월동인천남부소방서에서 열렸다. 시신은 인천시립묘지에 가안치됐으며 조만간 절차를 밟아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숨진 소방관들에게는 1계급 특진이 추서됐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10월 독립운동가 유근 선생

    국가보훈처는 3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항일언론인이자민족계몽운동가 석농 유근(柳瑾·1861∼1921)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선생은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근대문물을 수용,근대적 사고와 이념을 수용했다.1895년 4월 탁지부 주사로 김홍집 내각에 참여했다가관직에서 물러난 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황성신문 창간 당시 주필·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특히 장지연 선생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다 격분한끝에 끝을 맺지 못하자 후반부를 마무리짓고 신문을 인쇄했다. 선생은 황성신문이 무기한 정간을 당하자 휘문의숙 숙감과숙장을 맡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다 1907년 황성신문 5대사장으로 취임,경술국치 직전까지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노력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5년 중앙학교장에 취임,민족경제 자립을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을 지원하다 배후자로 체포됐다.3·1운동 때는 ‘13도 대표'로 참여했다. 그후 동아일보 창간을 발의하면서 ‘동아일보'라는 제호를지었고 양기탁 선생과 함께 편집 감독으로 활동하다 “조선의 고질인 지방열을 없애라”는 유언을 남기고 1921년 숙환으로 서거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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