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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앵란의 마지막 인사 “저승에선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길”

    엄앵란의 마지막 인사 “저승에선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길”

    전날 ‘사망 오보’… 몇시간 뒤 끝내 눈감아 영화인장 엄수… 훈장 추서도 추진하기로4일 별세한 배우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 왔다. 하루 전인 3일 병세가 위독해지면서 한때 그의 사망 오보가 쏟아졌지만 몇 시간 후인 4일 새벽 끝내 눈을 감았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첫 조문객인 원로배우 최불암씨는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우리 또래의 연기자로서 조금 더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면서 “고인이 남긴 업적이 오랫동안 빛나기를 바란다”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신성일의 부인 엄앵란씨도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취재진에게 인생의 동반자이자 동료 배우로 55년을 함께한 고인을 떠나보내는 심정을 밝혔다. 그는 신성일에 대해 “사회 남자, 대문 밖의 남자이지 집안의 남자가 아니었다”면서 “일에 미쳐서 집안은 나한테 다 맡기고 자기는 영화만 하러 다녔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저승에 가서도 못살게 구는 여자 만나지 말고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재미있게 손잡고 구름 타고 그렇게 슬슬 전 세계 놀러 다니라고 얘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다. 영결식은 6일 오전 10시에 진행된다. 한편 영화계는 신성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훈장 추서를 추진한다. 이날 지상학 회장 등이 주축이 돼 장례식장을 방문한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에게 이 같은 뜻을 전했다. 이에 나 차관은 “잘 협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해보겠다”고 답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영화계, 고 신성일 훈장 추서 추진…정부도 화답

    영화계, 고 신성일 훈장 추서 추진…정부도 화답

    영화계가 4일 작고한 국민배우 신성일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훈장 추서를 추진한다. 이에 정부도 화답하고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고 신성일 장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이날 “영화계가 뜻을 모아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하기로 했다”면서 “장례가 끝난 뒤 문화체육관광부 측과 구체적인 협의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영화계는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 김국현 한국배우협회 이사장, 이해룡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 등이 주축이 돼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방문한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에게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 장례추진위 관계자는 “유족 측도 영화계와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정부가 고인을 예우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에 나종민 차관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신 분이 돌아가셔서 정부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영화계와 협의해 이분을 예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계와 유족 측에서 훈장 추서를 말씀했다”며 “잘 협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해보겠다”고 말했다. 다만, “훈장 추서를 결정하는 데 두세 달 정도 걸리고, 결정되더라도 영화계에 좋은 계기나 행사가 있을 때 드려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무수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으며, 주연작만 507편에 달한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만주벌 호랑이’ 일송(一松) 김동삼. 평생을 만주 벌판과 밀림을 누비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생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김구, 안창호보다 김동삼 선생을 더 높이, 최고로 받든다. 선생의 호(號) 때문인지 ‘일송정(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의 실제 모델이 선생이라는 설도 있다. 서간도 독립군기지 개척의 선구자이며 만주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278에서 태어났다. 행정 지명처럼 선생이 나고 자란 마을 이름은 ‘내앞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이 굽이쳐 흐른다.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 두물머리처럼 안동에서 물길이 갈라지는데 북동쪽으로 안동호와 이어지는 강이 낙동강 본류이고 동쪽으로 임하호로 연결되는 하천이 반변천이다.경북독립기념관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차를 내려 200여m 들어가니 선생의 생가가 있다. 원형을 잃었고 평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생가로서는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300m쯤 더 들어가 선생의 족숙(族叔)이며 석주 이상룡의 처남인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를 찾았다. 김대락의 후손인 김시중(81)씨가 기거하며 집을 돌보고 있었다. 김씨는 “김대락을 필두로 임신부와 아이들까지 의성 김씨 일족 150여명이 한꺼번에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다”면서 “‘3000석 부자’였던 백하 선생이 멀리는 강원도까지 흩어져 있던 많은 토지를 50일 동안 처분했는데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동삼은 일제의 침략과 만행이 본격화된 1907년 유인식, 이상룡과 3년제 중등학교 ‘협동학교’를 세웠다. 퇴계 이황의 학통이 면면히 내려오는 유학의 본고장에서 영어와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친 협동학교는 완고한 유림의 극렬한 반발을 샀다. 초대 교장 유인식은 부자 절연, 사제 절연을 당했다. 김대락 또한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백하구려를 교사(校舍)로 내주었다. 보수 유림은 의병을 가장해 학교로 사용되던 백하구려를 덮쳐 교사 2명 등 3명의 목을 치는 사건을 저질렀다. 경술국치 넉 달 후인 1910년 12월 말 김대락은 65세의 나이에 일가를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협동학교 1회 졸업생이 배출될 무렵인 1911년 초 김동삼도 애국청년 20여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동삼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등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해 4월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라는 자치단체를 결성했다.김동삼은 한겨울에도 싸이혜라는 만주족의 여름 신발을 신고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둘러멘 채 만주 전병으로 끼니를 이으며 광야의 모랫길을 매일 100여리나 걸어 동포들을 독려했다. 만주 생활은 초기부터 고난의 길이었다. 혹독한 추위, 참혹한 흉년, 목숨을 앗아 가는 풍토병, 중국 마적의 약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이 이어졌다. 김동삼은 농지를 개척해 이주민들의 정착을 돕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서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1914년 무렵 선생은 극심한 재정난 등 시련을 견뎌가며 신흥강습소 졸업생들과 함께 백두산 서쪽 고원에 백서농장이라는, 사실상의 독립군 병영을 만들어 장주(庄主)로서 조직을 이끌었다. 중국에서도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서명자 39명에 선생도 들어 있다. 그 무렵 남만주에는 이미 수십만명의 동포가 이주해 있었다.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확대 개편됐다. 한족회는 독립군을 지휘할 군사조직으로 서로군정서를 설치했다. 독판(督辦)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김동삼은 참모장을 맡아 반일 군사항전에 뛰어들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백서농장, 서로군정서 출신은 봉오리·청산리전투를 이끈 주역이 됐다.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국내로 잠입해 주요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경찰과 밀정을 처단했다. 독립군과 맞붙어 대패한 보복으로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적어도 3700여명의 무고한 한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삼원포 삼광학교 교장이었던 선생의 동생 김동만도 붙잡혀 말꼬리에 묶여 끌려다닌 끝에 살해당했다. 가족을 멀리하던 선생도 사흘 밤낮을 걸어 삼원포로 가서 애통해 마지않았다. 김동만의 부인은 충격을 받고 정신병을 앓았다. 임시정부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1922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김동삼은 의장에 선출됐다. 안창호, 윤해가 부의장이었다. 통합을 외친 김동삼의 노력에도 충돌은 수습되지 않았고 그는 의장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김동삼의 통합 노력은 만주에서 빛을 발했다. 통합단체인 대한통군부에 이어 대한통의부를 출범시켜 김동삼은 최고지도자인 총장에 추대됐다. 통의부는 정의부로 재탄생, 김동삼은 참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초산, 벽동, 철산 등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일제 경찰서와 주재소를 습격해 일경을 사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25년 7월 내각책임제로 바뀐 임정의 초대 국무령 이상룡은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발령했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사양하고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김동삼은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의 통합을 주도하면서 민족유일당 조직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31년 어느 날 김동삼은 하얼빈의 옛 동지인 의사(醫師) 정진영 집에 들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항일운동의 거목에게 일제는 악랄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전기고문을 하고 양팔을 등 뒤로 결박해 공중에 매단 뒤 코에 물을 부었다. 단식을 하자 영양주사를 놓으며 고문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않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민족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을 동원한 회유에도 “이제 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고 단호히 말했다. 면회 온 맏아들 정묵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선생은 1937년 4월 13일 59세의 나이로 싸늘한 감방에서 쓸쓸히 영면했다. 만주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의 비통한 최후였다. 만해 한용운이 시신을 서울 정릉 심우장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해 한강에 뿌려졌다. 한용운은 단 한 번 눈물을 흘렸는데 선생의 장례 때였다. 후손들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장남 정묵의 큰딸은 북한에서 폭격으로 사망했고 큰아들, 즉 김동삼의 장손자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실종됐다. 셋째 아들은 정신 이상으로 사망했다. 정묵의 부인인 선생의 큰 며느리 이해동(1905~2003) 여사가 둘째 아들 김중생(2016년 사망)씨와 1989년 1월 근 80년 만에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만주생활 77년’이란 여사의 수기에 형극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여사는 “시아버지를 세 번 뵈었는데 결혼 2년 후, 첫 손자를 낳았을 때, 일제에 붙잡혀 감금돼 있을 때였다”고 썼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아들의 못다 이룬 꿈 이뤄달라” 31년 모은 유족연금 육사에 기부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발병한 위암으로 숨진 이상엽 소위의 아버지 이승우(84)씨가 31년간 모아온 아들의 유족연금을 육사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이씨는 지난 8일 육사를 방문해 1억원을 육사발전기금으로 기탁했다고 육군이 14일 밝혔다. 이씨의 아들 이 소위는 1984년 육사 44기로 입학, 생도 1학년 시절 우수생도로 선발돼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로 파견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 소위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도중 생도 2학년 때 위암에 걸렸고 미국 내 최대 군 병원인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서 치료받았지만 1987년 2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후 육군 소위로 추서돼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매달 나오는 유족연금을 31년간 모았고 아들이 중·고교 시절 저금통에 모았던 용돈까지 더해 1억원을 기금으로 전달했다. 이씨는 기금을 전달한 자리에서 “육사는 국가에 헌신하는 청년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라며 “이 돈은 아들이 못다 이룬 꿈의 값이다. 이 돈으로 아들이 못다 이룬 애국의 꿈을 후배 생도들이 이뤄달라”고 말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BTS, 정부 훈장 받는다

    BTS, 정부 훈장 받는다

    정부가 ‘월드스타’인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에게 유공 훈장을 수여한다.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같이 의결했다고 서면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김 대변인은 “한류 확산에 기여한 방탄소년단 멤버 7명에게 화관문화훈장을 주기로 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화관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에 공적이 뚜렷한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 가운데 5등급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원조 한류스타’ 자리에 오른 배우 배용준이 2008년 이 훈장을 받았다.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도 2010년 별세 뒤 같은 훈장을 추서받았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회의에서 “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된 가사를 집단으로 부르는 등 한국어 확산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고 김 대변인은 전했다. 아울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양국 우호증진 공로를 인정해 무궁화대훈장을, 배우 이순재에게도 콘텐츠·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화관문화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김 대변인은 덧붙였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충주에 항일독립운동역사관 개관

    충주에 항일독립운동역사관 개관

    일제에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희생을 추모할수 있는 공간이 충북 충주와 옥천에 마련됐다. 충주시는 5일 항일독립운동역사관을 개관했다. 충주시 칠금11길(칠금동620)에 위치한 역사관은 부지 355.1㎡, 연면적 882.72㎡에 지상 4층 규모다. 1층은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사무실로 쓰고, 2~4층은 전시관이 자리잡았다. 시는 다세대주택을 매입해 역사관으로 꾸몄다. 예산은 13억원이 투입됐다. 이곳에는 을미의병, 3.1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자료 233점이 전시돼 있다. 신채호, 유자명, 유인석 등 우리 지역 출신이거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업적과 기록도 볼 수 있다. 역사관 개관은 윤경로 광복회충북지부북부연합지회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2015년부터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를 방문해 자료들을 수집한 뒤 역사관을 마련하자고 건의했다.조길형 충주시장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운동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항일독립운동역사관 개관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는 교육의 산실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옥천에서는 항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1872~1936) 선생의 기념비가 그가 세운 창명(진명)학교 후신인 죽향초등학교에 세워졌다.1872년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교육을 통해 민족을 일깨우려 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다. 1905년을 전후해 현 죽향초 전신인 사립 창명(진명)학교를 설립하고, 목화밭을 기증해 학교 터를 마련해줬다. 대한자강회 등에서 활동하며 나라를 개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21년 박용만과 함께 베이징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세워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도했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6년 향년 65세로 중국 텐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2014년 9월 선생의 업적 발굴을 위한 기념 사업회가 설립됐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故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등 ‘한글 발전 유공자’ 정부포상

    故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등 ‘한글 발전 유공자’ 정부포상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는 9일 572돌 한글날을 맞아 고(故) 김수업(사진) 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하는 등 한글 발전 유공자 8명에게 훈·포장 및 표창을 수여한다고 5일 밝혔다. 올해 별세한 김 이사장은 30년 동안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한글 발전에 힘쓰고, 관련 논문 40여 편과 책 10여 권을 저술했다. 국립국어원 국어심의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강봉식 일본 이와테 현립대 교수는 일본에서 30년 이상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 교육을 학문으로 정립한 공로로 화관문화훈장을 받는다. 전국 규모 일본 한국어교육학회를 설립해 매년 학술대회를 여는 등 한국어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저서 ‘일본인을 위한 한국어 입문’은 영어, 중국어, 태국어 등으로도 번역됐다. 고토브 에르데네치메그 몽골국립대 교수는 몽골 내 한국학 기초 구축에 이바지한 공로, 변정용 동국대 교수는 한글 정보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포장 수상자로 결정됐다. 문화예술발전에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문화훈장은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의 5등급으로 구분한다. KBS 1TV ‘우리말 겨루기’ 제작진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국어진흥재단은 대통령 표창, 싱가포르 한국국제학교와 김진량 스리랑카 캘라니야 대학교수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는다. 수상자는 9일 한글날 경축식에서 훈·포장 및 표창을 받는다. 김기중 기자 gkkim@seoul.co.kr
  • 서경덕·알베르토·다니엘, ‘유관순 열사 순국일 실검 프로젝트’

    서경덕·알베르토·다니엘, ‘유관순 열사 순국일 실검 프로젝트’

    “9월 28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한국 홍보 전문가로 알려진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와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와 다니엘 린데만이 ‘유관순 열사 순국일’인 28일 ‘대한민국 역사, 실검(실시간 검색) 프로젝트’에 나섰다. ‘대한민국 역사, 실검 프로젝트’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에 맞춰 그날의 정확한 한국사 지식을 이해하기 쉬운 카드뉴스로 제작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 퍼트리는 대국민 역사교육 캠페인이다. 서 교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이 캠페인은 팔로워 스가 많은 셀럽들과 함께 펼쳐 나가는데 이번 9월에는 방송인 알베르토와 다니엘이 함께 동참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몇 달 뒤면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게 된다”며 “이를 기념해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 관한 일문, 사건 등의 다국어 영상 제작 및 SNS 캠페인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지난 17일에도 방송인 안현모와 래퍼 라이버 부부와 함께 ‘한국광복군 창설일’을 기억하는 실검 프로젝트에 나선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 병천면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 고향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다. 열사는 1916년 이화학당을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해 고등과 1학년 3학기 때인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맞이했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열사는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했다. 열사는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또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 김구응 등과 만나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옛 천안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 일대뿐 아니라 청주와 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시위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 3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곧이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한 오후 1시쯤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쓰러졌다. 열사는 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내로 숨어버렸다. 시위 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쯤, 지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자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이 감행됐다. 시위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일제의 만행으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4시쯤, 열사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열사는 일본 헌병에게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공주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열사는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학생 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을 만났다. 유관순 열사의 가족은 모두 독립만세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애국투사가 됐다.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열사는 이에 불복해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7년형이 확정돼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열사는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 모진 고문으로 18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전 11시 천안 병천면 소재 유관순열사추모각에서 천안시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순국 제98주기 유관순 열사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제에는 심덕섭 보훈처 차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기념사업회원, 시민,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했고, 문재인 대통령 명의 추모화환이 증정됐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김종필 훈장 추서’ 사후 의결한 정부, 공적조서 비공개 논란

    정부가 김종필(1926~2018) 전 국무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사후 의결하고도 훈장 추서 이유를 적은 ‘공적조서’를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16일 국무조정실이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 등에 따르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6월 25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김 전 총리 측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달했다. 당시 국무조정실은 “이영덕·남덕우 전 총리도 별세 뒤 국무회의 의결 없이 무궁화장을 먼저 추서받고 사후 절차를 밟았다”며 김 전 총리에 대한 ‘선 추서’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한쪽에서는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자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역임한 분이기에 무궁화장을 받아 마땅하다”고 찬성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군사 쿠데타와 유신 체제 옹호 등 대한민국 적폐 체제에 책임이 큰 역사적 범죄자에게 줘선 안 된다”며 반대했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7월 13일 자체 공적심사를 통해 그에게 무궁화장을 수여하기로 하고, 같은 달 31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제33회 국무회의에서 이를 의결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8월 1일 재가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등에 제공된 국무회의 사전·사후 안건 목록에는 ‘영예수여안’(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등)으로만 표기돼 있어 김 전 총리 훈장 추서안의 상정·의결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文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이 광복의 완성”… 강주룡·제주 해녀 언급

    文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이 광복의 완성”… 강주룡·제주 해녀 언급

    “남녀 차별 없이 독립운동 역사 쓸 것” 정부, 5월 여성독립운동가 202명 발굴 그중 26명에게 서훈·유공자 표창 수여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깊이 묻힌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이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지난 5월 202명의 여성 독립유공자를 발굴했고 이날 이 중 26명에게 서훈과 유공자 표창을 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 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은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 낼 것”이라며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평양 평원고무공장의 여성 노동자였던 강주룡 선생과 제주 해녀 항일운동의 시발점이었던 5명의 해녀를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로 언급했다. 노동계의 여장부로 불리던 강주룡 선생은 14세에 서간도로 이주해 혼인했지만 독립운동가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평양 평원고무공장에서 일했다. 세계경제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평양고무공업조합이 1930년 노동자 측에 임금의 17%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자 그는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를 비판하며 투쟁했다. 특히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치며 단식투쟁을 펼쳤다. 투옥된 그는 건강이상으로 보석 출감됐지만 병세가 악화돼 두 달 만에 숨을 거뒀다. 정부는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등 5명의 해녀는 1931년 일본 관리들이 전복 등 해녀의 수확물을 헐값에 매수하고 제주도해녀조합을 어용화하려 하자 이듬해 1월 7일과 12일에 제주도 구좌면에서 항일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가 제주 각지로 확산되면서 참여인원은 800여명으로 늘었고 3개월간 연인원 1만 7000명이 238회의 집회시위를 열었다. 결국 이들 5명은 당시 도사(島司)였던 다구치 데이키와 담판을 지었고 ‘지정판매 반대’ 등 해녀들의 8대 요구조건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민족운동가 검거를 저지하려다 체포돼 3개월가량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3년 이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현재 구좌읍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런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에도 발굴은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독립운동가 포상자 1만 4830명 중에 여성은 296명으로 2%에 불과했다. 최소 3개월의 수형·옥고 등 획일적인 포상 기준에다 남성에 비해 독립운동기록도 많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4월 3개월 기준을 폐지하고 학생 독립운동가의 경우 정학 및 퇴학도 인정했다. 또 실형 여부보다 실질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포상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이날 포상자 177명 중 여성이 14.7%(26명)였다. 문 대통령이 이날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직접 포상한 5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는 허은 선생도 포함됐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보훈처, 건국포장 추서하며 가족에게 통보도 안 해”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보훈처, 건국포장 추서하며 가족에게 통보도 안 해”

    양인집 어니컴㈜ 대표는 지난 13일 미국에서의 항일 운동 자료를 통해 공개된 강명화 지사의 외종손이다. 강 지사의 손녀인 수잔 강을 설득해 하와이 모 대학으로 넘길 뻔한 이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케 했다. 강명화 지사뿐만 아니라 아들 영대, 영소, 영문, 영상, 영각과 사위 양우조가 모두 독립유공자다. 양 대표는 이번 기증 과정에서 국가보훈처의 미숙한 일 처리를 아쉬워했다.보훈처는 강명화 지사의 다섯째 아들 영각씨가 199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고 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전혀 몰랐다. 가족에게 어떤 통보도 없었다. 포장이 집에 전달되지도 않았다. 양 대표는 “부인과 후손들에게 건국포장을 전달하려는 보훈처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강명화 지사와 수잔 강이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임을 증명하라며 1866년생인 강 지사의 사망진단서를 보훈처 직원이 요구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다. 1866년생이면 당연히 생존하지 않고, 더욱이 강 지사가 북한에서 사망해 증명서를 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진단서 요구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씨는 “할아버지 강명화-아버지 강영각-손녀 수잔 강의 관계를 증명하는 가족관계증명서만으로 충분한데 보훈처는 굳이 애국지사 본인의 사망진단서 제출을 요구했다”면서 “현실을 도외시한 채 규정만 강조한 융통성 없는 일 처리”라고 꼬집었다. 양 대표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기까지 문턱이 너무 높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는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뒤에도 보훈처의 일 처리가 매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jrlee@seoul.co.kr
  • 한강서 숨진 소방관들 1계급 특진

    한강서 숨진 소방관들 1계급 특진

    한강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 소방 보트가 전복되면서 순직한 소방관 2명이 1계급 특진 된다. 경기소방본부는 16일 오전 10시 김포시 마산동 김포생활체육관에서 고 오동진(37) 소방장과 심문규(37) 소방교의 합동 영결식을 거행한다고 14일 밝혔다. 합동 영결식은 유가족과 동료 소방관 등 1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소방청은 구조 활동 중 순직한 이들에게 영결식 당일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할 계획이다. 오 소방장은 소방위로, 심 소방교는 소방장으로 각각 특진한다. 합동 영결식이 끝난 뒤 이들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들의 장례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경기도청장으로 치러진다. 임용 동기인 오 소방장과 심 소방교는 지난 12일 오후 1시 33분 “민간보트가 신곡 수중보에 걸려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가 수난구조대 보트가 전복되면서 실종됐다. 이들은 모두 사고 발생 이틀째인 13일 오후 구조 당국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3·1운동 재현’ 배화여학생 6명 98년 만에 독립운동 인정받아

    ‘3·1운동 재현’ 배화여학생 6명 98년 만에 독립운동 인정받아

    서울 배화여학교 재학 시절 3·1 운동 1주년을 맞아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여학생 6명이 98년 만에 독립운동을 인정받았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김윤식(김영랑 시인) 선생에게는 건국포장이 수여된다.국가보훈처는 제73주년 광복절(8·15)을 맞아 중앙 및 지방자치단체 기념식장에서 독립유공자 177명에게 건국훈장(93명), 건국포장(26명), 대통령표창(58명) 등을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3개월 이상이던 최소 수형·옥고 기간을 폐지했고 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경우도 포상토록 심사 기준을 개선했다”며 “177명 중에 65명(36.7%)이 개선안에 따라 포상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배화여학생 6명은 1920년 3월 1일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최연소자인 소은명은 16세였다. 보훈처는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시위 재현을 우려해 경계 태세를 유지한 상황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결행한 만세시위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평가했다. 서간도에서 독립군의 항일 투쟁을 도와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여사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건국포장이 수여되는 김윤식 선생은 1919년 3월 25일 고향인 전남 강진군 강진면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 선생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러자 선생은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곧 사형이 집행됐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나이 53세였다.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였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국치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죄수들과 도성(都城)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다. 박상진은 하얀 천으로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상주인 장남 허학을 비롯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회유하는 이완용에게 “넌 죽일 것” 호통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던 선생은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에게 거사 밀명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었다. 강제로 퇴위당하기 직전인 1907년 4월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쓰인 의대조(衣帶詔·옷 속에 넣어 비밀리에 전하는 임금의 편지)가 선생에게 전달됐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인영도 다시 뛰어들었다. 이인영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1907년 12월 각도의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토록 했다. 경기도에서 거병한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의병 총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1908년 1월 연합의병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화승총에 짚신을 신은 의병은 애초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울 진공 계획을 알아챈 일제는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선생은 선발대 격인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지휘해 선두에 서서 서울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도 뒤이어 1월 28일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인영에게 부친의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이인영은 후사를 허위에게 맡기고 급히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은 부대별로 흩어져 유격전에 들어갔다. 선생은 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덮쳐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의 의병들이 수많은 전과를 올리자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 내부대신 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선생은 “너(이완용)는 반드시 죽일 것이로되 심부름 온 놈이야 죽여서 뭐하겠느냐”고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 있던 선생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생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아카시가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자 선생은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선생에게 존경을 표했다. 또 선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데라우치 통감에게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선생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월위대장군 성위만병수)라는 글을 지을 만큼 한학에 능통했다. 관직에 나선 것은 44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평리원 재판장(지금의 대법원장 격),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의 본관과 고향은 김해다. 임은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에서 서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허위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에 정착했다고 한다. 임은동은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과 붙어 있다. 드넓던 평야는 구미산업공단으로 바뀌었고 공단 아래쪽 허씨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은 빌라와 주택이 들어서 고가(古家)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추서… 서울시 ‘왕산로’ 명명 다행히 생가터는 남아 있었다. 선생의 장손 허경성(91·둘째아들 허영의 장남)씨가 자신은 전세를 살면서도 큰돈을 대출받아 1990㎡의 터를 사들여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생가 건물은 자료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건너 쪽 야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유허비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세워졌다. 김교홍 기념관장은 “선생의 집안은 논 3000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쓰는 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묘소 옆에 위패를 모실 사당 경인사(敬仁祠)가 조성되고 있지만, 예산 편성이 미뤄져 공사가 답보 상태다. 기념관 아래에 선생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가 있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추석특집 2018 아육대, 라인업 보니..워너원·트와이스·세븐틴·레드벨벳

    추석특집 2018 아육대, 라인업 보니..워너원·트와이스·세븐틴·레드벨벳

    ‘추서특집 2018 아이돌 육상 선수권 대회’(이하 ‘추석특집 아육대’)가 개최를 확정하고 오는 20일과 27일 녹화를 진행한다. 이번 ‘추석특집 아육대’에는 워너원, 트와이스, 세븐틴, 레드벨벳 등 국내 최정상 아이돌들이 대거 출동할 예정이다. 명절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아육대’를 통해 매해 새로운 아이돌 스포츠 스타가 발굴되는 만큼 올해는 누가 그 영광을 차지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추석특집 아육대’의 진행은 아나운서 전현무와 슈퍼주니어 이특 그리고 트와이스 나연이 맡는다. 아육대 터줏대감 전현무와 예능감 충만한 이특,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진 나연의 색다른 케미스트리 역시 관전 포인트. 올해 ‘추석특집 아육대’는 무엇보다 참가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둔다. 총 다섯 종목이 진행되는 가운데 부상 위험이 많은 종목은 제외하고 보다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족구를 신설했다. 20일 경기도 고양 실내체육관에서는 60m·400m 육상, 양궁, 리듬체조 그리고 족구 경기가 진행되며, 27일에는 볼링만 단독으로 진행된다. ‘추석특집 아육대’ 제작진은 “응급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의료팀 인력을 항시 대기시키는 것은 물론 경기에 참여하는 아이돌들과 현장을 찾은 팬들이 모두 안전히 귀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추석특집 아육대’를 제패할 새로운 체육돌은 누가될지 오는 추석 연휴 MBC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8월 호국인물에 연해주 독립군 이끈 이범윤 선생

    전쟁기념관이 8월의 호국인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이범윤 선생을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856년 경기 고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정부 간도관리사로 파견됐고, 농민들과 ‘사포대’(개인이 관리하는 부대)를 조직해 현지에 거주하던 한인 7만여명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사포대를 이끌고 러시아군과 함께 반일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러시아 노보키예프스크를 활동 기지 삼아 항일 단체인 ‘창의회’를 결성해 소위 ‘연추의병부대’(이범윤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안중근 의사도 이곳에서 우영장(참모중장)을 맡았었다. 이후 선생은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 총재로 추대됐다. 권업회는 시베리아 일대의 최대 한인 기관으로 최재형·최봉준이 부총재, 이상설이 의장, 홍범도가 경찰부장을 맡았다. 이어 그는 1919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군부’를 조직해 총재를 맡았고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에 참여했다. 평생을 항일 운동에 몸바쳤으며 1940년 10월 20일 서거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2일 오후 2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를 연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아빠다!” 아이 외침에 눈물바다 된 해병대 헬기추락 순직장병 영결식

    “아빠다!” 아이 외침에 눈물바다 된 해병대 헬기추락 순직장병 영결식

    해병대 마린온 헬기 사고로 순직한 해병대 장병 5명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23일 경북 포항 해병대1사단 도솔관에서 해병대장(葬)으로 열렸다. 순직 장병은 고 김정일 대령, 고 노동환 중령, 고 김진화 상사, 고 김세영 중사, 고 박재우 병장으로 지난 17일 포항공항에서 상륙기동헬기 정비를 마치고 정비 상태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비행을 하던 중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함께 탄 김모 상사는 중태에 빠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영결식에는 유가족, 친지, 송영무 국방부장관,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해병대 장병, 군 주요 지휘관, 육·해·공군 장병과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해 고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유해 입장 때부터 도솔관 로비는 유족의 울음바다가 됐다. 순직장병들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든든한 아버지였으며, 사랑하는 남편이었다.장의위원장인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은 조사에서 “전우를 지켜주지 못한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해병대에 더 안전하고 튼튼한 날개를 달고 해병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순직 장병의 희생을 기렸다. 순직한 장병 동기들은 추도사마다 울음을 터뜨리거나 흐느끼며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추모영상 속 아빠의 사진을 본 아이는 반가움에 ‘아빠’를 외쳤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 유족뿐만 아니라 영결식에 참석한 많은 장병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함을 나타냈다. 이 모습은 MBC 중계카메라에 포착돼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순직 장병들의 영현은 고인들의 해병대 정신이 깃들고 꿈을 키웠던 항공대 등 주둔지를 돌아본 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져 오후 6시 30분께 안장된다. 순직 장병들이 가는 마지막 길에는 사단 장병들이 도열해 동료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갖춘 경례로 배웅했다 국방부와 해병대는 순직 장병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계급 진급을 추서했다. 해병대는 민·관·군 합동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한편 순직 장병을 기억하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故최인훈 작가 금관문화훈장 추서

    故최인훈 작가 금관문화훈장 추서

    정부가 지난 23일 별세한 최인훈 작가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금관문화훈장은 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이에게 수여하는 최상위 등급 훈장이다. 앞서 최 작가는 1999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도종환(왼쪽)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4일 최 작가 빈소인 서울대병원을 찾아 정부를 대표해 훈장을 전달하고 유족을 위로했다. 도 장관은 빈소에서 김병익 장례위원장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께서 ‘훈장을 좀 적극적으로 드리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하셨다”고 설명했다. 시인이기도 한 도 장관은 “최인훈 선생 소설을 참 많이 읽었다. ‘회색인’, ‘구운몽’, ‘서유기’ 같은 소설에 매료돼 푹 빠져서 문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문학적 스승이라고 늘 생각해온 분”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해병의 희생,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해병의 희생,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김정일 대령, 노동환 중령, 김진화 상사, 김세영 중사, 박재우 병장, 이제 편히 쉬소서. 우리는 여러분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17일 경북 포항공항에서 상륙기동헬기인 마린온(MUH1) 정비를 마치고 시험비행을 하다 추락 사고로 순직한 해병대 장병 5명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23일 포항 해병 1사단 강당 도솔관에서 해병대장(葬)으로 엄숙하게 열렸다. 유가족, 친지, 송영무 국방부 장관,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등 1300여명이 참석해 고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먼저 장의위원장인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이 조사 낭독에 앞서 순직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영결식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전 사령관은 조사에서 “5명의 해병을 뼛속에 새기고 뇌리에 각인하겠다”며 넋을 기렸다. 이어 추도사에 나선 순직 장병 동기들은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흐느끼며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 글을 통해 “안타까운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클지, 너무 마음이 아프다. 장병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해병대 사령부는 이들의 시신 화장을 마치고 수습한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했다. 해병대는 순직 장병에 대해 1계급 특별 진급을 추서하고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했다. 또 민·관·군 합동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추락 사고 유일한 생존자인 김용순(43) 상사는 이날 오전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울산대병원에서 10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김 상사는 갈비뼈 10여곳에 골절상과 폐 손상을 입었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영상]예견된 참사였나?... 헬기 사고 부대 전역병 “잦은 결함으로 매일 정비”

    [영상]예견된 참사였나?... 헬기 사고 부대 전역병 “잦은 결함으로 매일 정비”

    “예견된 사고였나?.”지난 17일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추락사고로 해병 5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한 가운데 해당 헬기의 기체 결함 문제가 심각했던 것을 추정할만한 증언이 나왔다. 사고 헬기 소속 해병대 1사단 항공대에서 근무하다가 최근 전역한 병사가 헬기 결함 문제로 운행을 거의 못했고 거의 매일 정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 달 전 만기 전역한 이 병사(예비역 병장·21)는 “2호기(사고헬기)는 결함 때문에 못 나가고 1호기가 대신 나가곤 했다”며 “2호기는 거의 뜬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20일 전했다. 그는 “해병대 헬기 사고가 났다는 보도를 봤을 때 2호기라고 바로 생각했다”며 “덜덜 떨리는 문제(진동)가 있었는데 간부들끼리 ‘언젠간 사고 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 병사는 해병대 1사단 항공대에서 헬기 이착륙 시간을 상급부대에 보고하는 업무를 한 것으로 연합뉴스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2호기는 가끔 운행할 때도 있었지만 거의 뜨지 못했고, 정비사가 거의 매일 정비에 매달렸다”고 전했다. 이 병사는 항공대에 근무하면서 이번 마린온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박모(20) 상병(병장 추서)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항공대는 작은 부대이기 때문에 생활관이 4개밖에 없었다”며 “(병사들이) 가족처럼 지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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