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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빈 대장에게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김홍빈 대장에게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 완등 후 하산 중 실종된 김홍빈(57) 대장에게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가 확정됐다. 광주시는 김 대장이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3일 밝혔다. ‘청룡장’은 체육 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체육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 발전에 공적이 뚜렷한 체육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체육훈장이다. 산악인 중에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엄홍길(61),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김미곤(49),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 대장 등이 받았다. 추서식은 4일 김 대장의 장례식장이 마련된 광주 염주체육관에서 열린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정부 인사와 김종효 행정부시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 대장의 장례는 4~8일 ‘산악인장’으로 염주체육관 1층 로비에서 열린다. 영결식은 오는 8일 오전 10시에 진행된다.
  • 김홍빈 대장에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확정

    김홍빈 대장에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확정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 완등 후 하산 중 실종된 김홍빈(57) 대장에게 정부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가 확정됐다. ‘청룡장’은 체육 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체육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체육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체육훈장이다. 산악인 중에는 세계 9번째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엄홍길(61), 히말라야 14좌 완등 김미곤(49),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 대장 등이 받았다. 광주시는 김 대장이 장애인 최초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3일 밝혔다. 시는 김 대장이 ‘청룡장’에 추서될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행정안전부 등 관계 부처에 건의했다. 추서식은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오는 4일 김 대장의 장례식장이 마련된 광주 염주체육관에서 열린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정부 인사와 김종효 행정부시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 대장의 장례는 4일부터 8일까지 ‘산악인장’으로 염주체육관 1층 로비에서 열린다. 영결식은 8일 오전 10시 진행된다. 광주시 홈페이지에 온라인 분향소(https://www.gwangju.go.kr/remembrance.do)를 운영 중이다. 영결식은 온라인으로 생중계한다.
  • 투지의 산악인 김홍빈 브로드피크에 영원히 잠들다

    투지의 산악인 김홍빈 브로드피크에 영원히 잠들다

    “김홍빈 Broad Peak에 영원히 잠들다” 김홍빈 대장의 수색이 끝난 뒤 원정대원들이 김 대장을 추모하는 글귀를 담은 추모판을 브로드피크에 남겼다. 김 대장의 모교인 송원대 산악회는 28일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는 원정대원들이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글로 새긴 추모판을 ‘K2 추모탑(k2 Memorial)에 헌정했다”고 밝혔다. 추모판은 원정대가 함께 식사 때 사용하던 직경 15㎝ 알루미늄 접시로 만들어졌다. 김 대장과 한솥밥을 나눠먹던 그 접시다. 김 대장을 브로드피크에 남겨두고 떠나지만 그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접시 뒷면을 꾹꾹 눌러 돋을새김으로 ‘장애인 세계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김홍빈 1964.10.7 ~ 2021. 7. 19 Broad Peak에 영원히 잠들다’라고 썼다. 김 대장이 평소 아끼던 ‘김홍빈 캐리커처’ 스티커도 붙였다. K2(8611m) 베이스 캠프에 있는 이 추모탑은 국적을 떠나 산에서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은 세계 각국 산악인들을 애도하는 돌탑이다. K2 추모탑에는 1999년 브로드피크 하산 때 실종됐다 최근 발견된 고 허승관(연세산악회)씨와 2001년 K2에서 하산하다 실종된 박영도씨의 추모 동판이 부착돼 있다.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인 김 대장은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이뤄냈다. 또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는 등 ‘불굴의 투지’를 상징하는 산악인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지난 19일 브로드피크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해 그가 가장 좋아했던 히말라야에 영원히 묻히게 됐다. 한편, 파키스탄 현지 수색대원들은 지난 25일 오후 김 대장이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브로드피크 7000m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어 실종 8일만인 26일 수색작업을 종료하고 장례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용섭 광주시장은 27일 열린 간부회의에서 ‘인간승리’의 표본인 김 대장이 편히 가시도록 영예롭게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대한산악연맹이 추진 중인 체육훈장(청룡장) 추서가 잘 진행되도록 정부와 적극 협의해달라고 당부했다.
  • 끝내 김홍빈 품어버린 히말라야… 그 산은 22년 전 실종 대학생을 돌려줬다

    끝내 김홍빈 품어버린 히말라야… 그 산은 22년 전 실종 대학생을 돌려줬다

    김 대장 “산에 묻히고 싶다” 생전 당부가족요청에 수색 중단… 산악인葬 준비 브로드피크서 ‘27세 허승관’ 시신 발견고 박영석 원정대와 합동 등반 중 실종“산에 묻히고 싶다.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수색 활동 등에 따른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 달라.” 최근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를 등정하고 하산하다 실종된 김홍빈(57) 대장이 원정을 떠나기 전 아내에게 당부한 마지막 말이다.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 대장은 그의 평소 말처럼 그렇게 히말라야에 영원히 묻혔다. 광주시 사고수습대책위는 26일 “김 대장에 대한 수색을 중단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책위는 “지난 25일 구조대 헬기가 김 대장이 추락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브로드피크 7400m까지 올라가 6회를 돌면서 수색했으나 김 대장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정황과 현지 구조팀·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해 수색 중단을 결정했다”면서 “생존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김 대장의 장례 절차가 진행 중이다. 대한산악연맹은 ‘산악인장’으로 김 대장의 장례를 치를 준비에 착수했다. 산악연맹은 정부에 김 대장에 대한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를 건의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행정안전부의 공적심사 등을 거쳐 대통령 재가로 이뤄진다. 대책위는 김 대장의 구조·수색활동을 지원해 준 파키스탄과 중국 정부에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한편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 베이스캠프(4950m) 인근에서 22년 전 실종된 연세산악회 소속 허승관(실종 당시 27세)씨 시신이 발견됐다. 이날 외교부 당국자 등에 따르면 이달 초순쯤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 근처에서 한 외국인 등반대가 눈이 잠깐 녹은 사이 풍화된 허씨 시신을 발견했다. 함께 발견된 연세산악회 재킷과 깃발 등을 토대로 허씨의 신원이 확인됐다. 김 대장 수색 도중 허씨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허씨는 1999년 7월 29일 연세산악회 등정대 소속으로 고 박영석 대장 등반대와 합동으로 브로드피크를 오르다가 해발 7300m 지점에서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오던 중 실종됐다. 연세산악회 측은 허씨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이날 파키스탄으로 관계자 1명을 출발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 가족 요청으로 김홍빈 대장 수색 중단…장례 절차 착수

    가족 요청으로 김홍빈 대장 수색 중단…장례 절차 착수

    전날 구조대 헬기 수색에서도 발견 못해생전에도 “수색으로 2차 사고 안돼” 당부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고 하산 중 실종된 김홍빈(57) 대장에 대한 수색 작업이 중단됐다. 광주시 사고수습대책위원회는 26일 광주시청에서 김 대장 가족(배우자)의 의사를 존중해 수색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날 구조대 헬기 1대가 실종 추정 지점(7400m) 상공에서 수색했으나 김 대장을 찾지 못했다. 구조대 헬기에서 촬영한 영상을 베이스캠프에서 판독한 결과, 김 대장을 확인할 수 없었다. ●“가족 의사 존중해 수색 중단 결정” 이에 가족은 사고 지점의 험준함과 전날 수색 결과를 고려, 현실적으로 생환이 어렵다고 판단해 추가 수색 중단을 요청했다고 대책위는 설명했다. 현지 원정·구조대원들도 가족의 의사를 존중해 결정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 대장도 생전에 배우자에게 사고가 발생하면 수색 활동으로 2차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현지 구조대는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할 예정이다. 당초 현지 지원을 하러 가기로 한 광주 산악인으로 꾸려진 지원단은 이날 밤 출국할 예정이다. 이들은 현지 대원의 귀국 지원, 행정사무 처리, 물품 정리 등을 맡는다. 대책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김 대장의 업적을 고려해 가장 영예로운 방법으로 장례를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고미영(2009년) 대장의 대한산악연맹장, 박영석(2011년)·김창호(2018년) 대장의 산악인장의 사례를 참고,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해 산악인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체육훈장 최고등급 ‘청룡장’ 건의 계획 김 대장의 공적 등을 감안, 체육훈장 최고등급(1등급)인 청룡장 추서를 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다. 대한산악연맹이 추천하면 정부 심사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게 된다. 조인철 대책위 위원장은 “김홍빈 대장 구조와 관련해 파키스탄과 중국 정부가 최대한 지원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김 대장은 지난 18일 오후 4시 58분(현지 시각)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북동부 브로드피크(8074m) 정상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도중 해발 7천900m 부근에서 조난 사고를 당했다. 김 대장은 조난 상태에서 다음날 오전 러시아 구조팀에 의해 발견된 뒤 주마(등강기)를 이용해 올라가다가 추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대장’ 히말라야에 영면하다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대장’ 히말라야에 영면하다

    “산에 묻히고 싶다. 사고가 나더라도 수색 활동 등에 따른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 최근 히말라야 히말라야 브로드피크(8047m)를 등정하고 하산하다 실종된 김홍빈(57) 대장이 원정을 떠나기전 아내에게 당부한 마지막 말이다. ‘열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 대장은 그의 평소 말처럼 그렇게 히말라야에 영원히 묻혔다. 광주시사고수습대책위는 26일 브리핑을 갖고 “김대장에 대한 수색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지난 25일 구조대 헬기는 김 대장이 추락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브로드피크 7400m까지 올라가 6회를 돌면서 수색했으나 김 대장을 찾지 못했다”며 “헬기에서 촬영한 영상을 베이스캠에서 정밀 판독해 봤으나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이런 정황과 현지 구조팀·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해 이같이 결정했다”며 “생존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김 대장의 장례 절차가 진행 중이다. 대한산악연명은 산악인 김홍빈 대장의 업적을 ‘산악인장’으로 장례를 치를 준비에 착수했다. 히말라야 등반 도중 산악사고로 숨진 고영미(2009년)·박영석(2011년)·김창호(2018년) 대장 등의 장례도 대한산악연맹장 또는 산악인장으로 치러졌다. 산악연맹은 김홍빈 대장에게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를 정부에 건의했다. 문체부와 행안부의 공적심사 등을 거쳐 대통령 재가로 이뤄진다. 대책위는 김 대장의 구조·수색활동을 지원해준 파키스탄과 중국 정부에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김홍빈 대장은 지난 19일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 ‘장애인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을 수립한 뒤 불과 1시간만에 실종됐다. 김 대장은 1991년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를 등반하다 손가락 10개를 모두 잃는 시련을 겪었다. 사고 이후에도 김 대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1997년 엘브루즈(5642m·유럽)과 킬리만자로(5895m·아프리카)를 시작으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도전, 12년만인 2009년 장애인 최초 7대륙 최고봉 완등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 이후에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목표를 세운 뒤 지속적으로 산을 올랐고, 이번 마직막 브로드피크 원정을 마치고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대기록이다. 특히 지난해 전 세계에 불어닥친 코로나19 확산으로 힘겹게 꾸렸던 브로드피크 원정이 좌절됐지만 다시 1년을 꼼꼼히 준비해 등정에 나섰다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산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 “지난해 12월 훈련소 입소한 아들이…한 줌 가루가 돼 조그만 함에”

    “지난해 12월 훈련소 입소한 아들이…한 줌 가루가 돼 조그만 함에”

    ‘열사병’ 추정 순직병사심 상병 母 “아들 사인은 무관심” 육군이 최근 비무장지대(DMZ) 작전 중 순직한 육군 병사의 사고경위와 관련한 중간수사 결과를 내주 발표하기로 했다. 강원도 고성군 소재 22사단 소속 고(故) 심모 상병은 지난 1일 수색정찰 임무 중 쓰러진 뒤 민간병원으로 응급 후송됐으나, 8일 오후 사망했다. 육군은 24일 “고인의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필요한 후속조치를 하는 가운데 정확한 사고경위와 원인 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면서 “유가족들께서 질의하시고 수사한 사항들을 종합해 다음주 중 중간 수사결과를 설명드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육군 군사경찰은 앞서 사고경위 등에 대해 현장검증한 내용을 토대로 심 상병의 유족에게 당시 현장상황을 설명했다.이와 관련 본인을 심 상병의 모친이라고 밝힌 A씨는 소셜미디어(SNS)에 글을 올려 “아들의 사인은 열사병이 아니라 무관심이었다”고 절규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장군이었다면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라며 무관심이 아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 아니냐고 물었다. 고인의 어머니는 “만20살의 아이가, 그 건장하던 아이가 한 줌 가루가 돼 조그만 함에 담겨있는 것을 볼 때마다 기가막혀 눈물밖에 나지 않는다. 이런 안타까움 죽음도 우리 준용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아들은 지난해 12월 14일 논산훈련소에 입소, 의무병으로 22사단에 배치됐다”면서 “6월 24일 코로나1차 접종하고 6월 30일 GP로 올라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머니는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지 1주일밖에 안됐고, GP에 도착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고, 수색훈련 경험도 없는 일반 의무병인 아들이 완전군장에다 앞에는 아이스패드가 든 박스를 메고 경사 37~42도의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다 12시30분쯤 쓰러졌다”고 했다. 이어 “전우들이 아이를 업고 받치고 아이스패드를 대어가며 오후 2시55분 GP까지 간신히 도착했다”며 “이후 강릉 국군병원을 거쳐 아산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15분이나 됐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투끝에 결국 아들이 떠나고 말았다며 “훈련소에서 행군해 본 것이 다였을 아이를 최소한의 훈련도 없이, 헬기로 구조도 안되는 지형으로 작전에 투입했다”며 “왜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냐”고 너무 원망스럽다고 했다. 또 심 상병의 어머니는 “정말 내 아이의 사인이 열사병인걸까”라며 반문한 뒤 의식을 잃은 상태로 제대로 된 구호조치 없이 4시간흘렀을 땐 누구라도 아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만약 장관의, 국회의원의, 장군의 아들이었다면 응급후송조차 불가능한 지역으로 투입했을지, 코로나19 백신 접종 1주일만에 더운 날씨속에 가파른 산속으로 몰아 넣었을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어떤 수단도 강구하지 않았을지, 쓰러진 용사가 4시간이나 제대로 된 구호조치조차 받지 못하게 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한편 육군은 임무 수행 중 순직한 심 일병을 1계급 진급한 상병으로 추서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 서훈등급 상향 서명운동 전개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서훈등급 상향 조정을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된다. 울산시와 우리역사바로세우기운동본부는 ‘박상진 의사 서훈등급 상향을 위한 범시민 서명운동’을 다음 달까지 전개한다고 13일 밝혔다. 송철호 울산시장도 이날 시장실에서 온라인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이번 서명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함께 진행된다. 온라인 서명은 홈페이지로 바로 접속하거나, 카카오톡 채널에서 ‘박상진 의사’를 검색하면 된다. 서명운동은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하나로 추진된다. 고헌 박상진 의사는 울산 출신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관을 지냈고, 독립운동자금 마련과 친일파 처단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정부는 고헌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으나 울산시는 공적과 비교해 훈격이 낮다는 지적을 꾸준히 제기했다.
  • “조선의 비통한 소리 들어라”… 독립운동가 변호한 ‘일본의 쉰들러’

    “조선의 비통한 소리 들어라”… 독립운동가 변호한 ‘일본의 쉰들러’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은 순수 외국인은 70명이다. 중국인(쑨원, 장제스 등 33명), 미국인(헐버트와 알렌 등 21명), 영국인(베델 등 6명), 캐나다인(스코필드 등 5명) 순으로 많다. 일본인도 2명이 있다. 한 사람은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던 박열 의사의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애국장)로 2018년에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박 의사를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로 2004년에 받았다. 당시 정부 일각에서는 일본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후세의 삶을 알고 나면 그런 생각을 버리게 된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인 변호에 앞장섰던 그를 독일 나치 치하에서 죽어가던 유대인들을 도왔던 독일인 쉰들러에 비유해 ‘일본의 쉰들러’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두 번 투옥, 세 번 변호사 자격 박탈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후세의 현창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후세는 조선인 지원 활동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미움을 사 두 번 투옥당하고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한 인권변호사, 민중변호사였다. 후세는 재판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조선 민중이 모두 이 재판을 주목합니다. 피고들의 향후 활동에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조선 민중의 비통한 양심의 소리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가들은 후세를 ‘우리의 변호사’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나타냈다. 후세는 1880년 일본 미야기현 오시카군에서 한 농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9년 고향을 떠나 도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한 후세는 조선인 등 유학생과 교류하며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후세가 조선에 관심을 보인 것은 훨씬 전이었다. 청일전쟁에서 돌아온 일본군 출신 마을 주민에게서 조선인 민간인들에게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었다고 한다. 후세는 일본인에게는 잔인성을, 조선인에게는 연민을 느꼈다.1902년 학교를 졸업한 후세는 고시에 합격, 시보로 부임했다가 넉 달 만에 사직했다. 아이 3명과 동반자살을 기도한 엄마를 살인미수로 기소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후세는 검사의 직무를 ‘늑대와도 같은 일’이라고 비난했다. 후세는 이후 변호사로서 핍박받는 조선인과 노동자·농민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길로 들어섰다. 1911년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을 비난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검사국으로 불려가 호된 조사를 받았다. 그가 처음 변호한 조선인은 1919년 도쿄 2·8 독립선언으로 현장에서 검거된 최팔용, 백관수 등 9명이었다. “일본은 체코 독립을 위해 시베리아에까지 군대를 보냈는데 조선민족 독립을 탄압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런 논리로 재판부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조선인들은 무료로 변론한 후세를 크게 신뢰하게 됐다. 후세는 계속해서 조선인 사건 변호와 구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해 5월 후세는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하겠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했다. 입신출세를 거부하고 약자와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후세는 계급투쟁이라는 시대적 사조에도 관심을 가졌다. 1923년 7월 조선을 처음 방문해 강연을 다닌 것은 총독 정치 비판뿐만 아니라 그런 사상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조선 농민의 생활고에 눈물이 난다” 후세가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인들은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세는 죽창을 든 자경단에 쫓기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집으로 데려가 숨겨 주고 차를 대접하고는 안심시켰다. 조선인 학살사건을 고발하기 위한 자유법조단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피살동포추모회’에서 후세는 이렇게 말했다. “천만 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무념에 가득 찬 그 사람들의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뒤 조선을 방문했을 때는 만행을 사죄하는 글을 신문사에 보냈다. 1924년에는 의열단원으로 일본 왕궁 이중교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변론했다. 후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열과의 만남이었다. 박열이 1923년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기소된 후 3년여간 그의 무죄를 변론했다. 일본의 국체(國體)를 전면 부정한 후세의 변론은 목숨을 건 법정투쟁이었다. 박열이 법정에서 사모관대를 입을 수 있었던 데도 후세의 노력이 컸다. 옥사한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를 거두어 박열의 고향으로 운구한 것도 후세였다. 또 하나의 업적은 동양척식회사의 전남 나주 농민토지수탈 사건 규탄과 변호였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후세는 나주 궁삼면 토지사건을 조사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본 헌병과 경찰의 힘을 빌려 유혈 참극을 벌이며 궁삼면 농민들의 땅을 빼앗았고 농민들은 물리적 저항과 법적 소송으로 맞붙고 있었다. 후세는 농민들의 열정에 감격하고 식민지 농촌 문제의 심각성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후세는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고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식민지정책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압박에 분개할 수밖에 없다”며 절절한 감회를 토로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체포된 권오설·강달영 등이 고문 만행을 폭로하고 고소를 제기할 때 조선으로 건너와 법률 업무를 도와주고 최후변론을 맡았다. 이 밖에도 조선 수해이재민 구원운동, 미에현 조선인 살해사건 변호, 재일 조선인 노동산업 희생자 구원회 결성, 김한경 등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변호 등의 활동을 했다. 후세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면서 조선인들의 인권과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다.●종전 후 ‘운명의 승리자 박열’ 출간 일본은 그런 후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32년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듬해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출옥 직후 일본 노농변호사단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을 받았고 변호사 등록도 말소당했다. 와중에 후세의 셋째 아들 모리오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교토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후세는 종전 후에도 한국인들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횡포로부터 재일 한국인의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에 힘을 쏟았다. 또 박열이 1945년 출옥한 후에도 관계를 이어 가며 ‘운명의 승리자 박열’을 출간하고 1947년에는 ‘관동대진재 백색테러의 진상’을 기고하는 등 한국인들과 연대 투쟁을 벌였다. 이어 후카가와 사건, 조련(朝連)·민청(民靑) 해산 사건,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다이토우회관 사건 등 일련의 재판에서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한국인도 연루된 메이데이 사건과 수이타 사건을 변호하며 죽을 때까지 한국인 관련 사건을 도맡다시피 했다. 후세는 1953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한국인이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부는 2004년 후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였다. 일본에서도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후세를 기리고 있고 그의 고향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는 시민들이 기부금을 모아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후세가 조선인 탄압과 학살에 항의하고 변호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후세는 일본인이었지만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을 위해 일본에 저항했다. 후세가 한복을 입고 활동한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조선인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진이다.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 사람인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의 편입니다.”
  • [포토] 고 노명래 소방교 영결식... 슬픔에 잠긴 동료들

    [포토] 고 노명래 소방교 영결식... 슬픔에 잠긴 동료들

    2일 오전 울산시청 햇빛광장에서 엄수된 중부소방서 소속 고(故) 노명래 소방교 영결식에서 동료 소방관들이 슬픔에 잠겨 있다. 노 소방교는 중구 상가 건물 화재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가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던 중 끝내 숨졌다. 고인에게는 소방사에서 소방교로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이 추서됐다. 2021.7.2 뉴스1
  • “지켜주지 못해 너무 너무 미안하다”… 순직 소방관 영결식 오열

    “지켜주지 못해 너무 너무 미안하다”… 순직 소방관 영결식 오열

    “명래야! 선배로서, 동료로서 너를 지켜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하다.” 2일 오전 9시 울산시청 햇빛광장. 울산지역 소방관 100여명은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울산 중부소방서 구조대 노명래(29) 소방교를 추모하며 넋을 기렸다. 노 소방교는 지난달 29일 중구 성남동 상가건물 화재 현장에서 인명 수색을 하던 중 화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이날 영결식은 묵념을 시작으로 고인에 대한 약력 보고, 소방사에서 소방교로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 추서, 조전 낭독, 영결사, 조사,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영결식에는 송철호 울산시장과 이채익·이상헌·박성민 등 지역 국회의원, 박병석 시의회 의장, 노옥희 울산교육감, 최병일 소방청 차장 등이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소방의 미래를 짊어질 유능한 소방관을 잃었다.”라며 “화마에 용감히 맞서 임무를 다한 고인을 대한민국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송철호 시장은 “생명을 생명으로 구해야 하는 소방의 길을 숙명으로 여긴 당신은 영원한 소방관”이라며 “당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뜻과 정신을 영원히 기릴 것”이라고 추모했다. 노 소방교 특전사 동기이자, 같은 소방서 구조대 선배이기도 한 김태민 소방사는 동료 소방관을 대표해 “선배로서, 동료로서, 함께하지 못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늘의 빛이 돼 우리를 끝까지 지켜봐 주길 바란다. 너의 몫까지 최선을 다할게”라며 울먹였다. 노 소방교의 부모님과 누나, 여동생, 예비 신부 등은 영결식 내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영정 속 아들 얼굴을 보고 가슴을 치며 “아들아. 내 아들아”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 차량이 햇빛광장을 빠져나가자 동료 소방관들은 거수경례를 하며 그를 보냈다. 노 소방교는 지난달 29일 오전 5시 5분쯤 발생한 중구 성남동 3층짜리 건물 화재 현장에 투입됐다. 그는 동료 소방관들과 함께 화염에 휩싸인 3층 건물 내부에서 인명 수색을 하던 중 갑자기 거세진 불길에 화상을 입었다. 노 소방교 등은 건물 창문을 깨고 탈출했으나 심한 화장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치료를 받던 중 이튿날 숨졌다. 그는 지난해 1월 임용된 새내기 소방관으로, 올해 2월 혼인신고를 마친 뒤 코로나19 사태로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노 소방교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7월 독립운동가’ 손일봉 선생 등 4명, 6·25 영웅은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국가보훈처가 7월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원 손일봉·최철호·박철동·이정순 선생을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6·25전쟁 영웅으로는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을 선정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중국 후베이성에서 창설된 군사조직이다. 손일봉 선생은 1934년 일본군 사령관 폭살 계획에 참여했으나 실패한 이후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무장선전대 제2분대장을 맡았다. 박철동 선생은 민족혁명당의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체포돼 3년간 징역을 살았고, 이후 조선의용대 1지대에 입대했다. 최철호·이정순 선생은 육군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의용대 창설 일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1993년 네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은 노르웨이 정부가 6·25전쟁 당시 파견한 의료기관이다. 1951년 7월부터 1954년 10월까지 연인원 623명이 파견돼 부상 장병을 치료하고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는 민간인을 치료했다.
  • 10월 결혼식 앞둔 20대 소방관, 구조 중 화상에 안타까운 순직

    10월 결혼식 앞둔 20대 소방관, 구조 중 화상에 안타까운 순직

    울산 노명래 소방사, 치료 중 숨져 임용 1년 6개월 막내 대원의 비극코로나 탓 결혼식 미뤄 동료들 침통내일 울산시葬… 1계급 특진 추서도꽃다운 나이의 20대 소방관이 울산 상가 건물 화재 현장에서 안타깝게 숨졌다. 울산소방본부는 30일 새벽 중부소방서 소속 노명래(29) 소방사가 부산의 한 화상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고 밝혔다. 울산소방본부와 동료들에 따르면 지난 29일 오전 5시 5분쯤 울산 중구 성남동의 한 3층짜리 상가 건물의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화재 신고 직후 현장에서 가까운 성남119안전센터가 5분 만에 출동해 화재 진압에 나섰고, 노 소방사가 소속된 구조대는 8분쯤 뒤에 도착했다. 구조대 3명과 119안전센터 2명 등 총 5명의 대원은 ‘3층 미용실에서 가끔 직원들이 숙식한다’는 주민들의 말에 화염을 뚫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다행히 3층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불길이 거세지면서 이들 구조대가 3층 유리창을 깨고 탈출을 시도했다. 건물 밖에 있던 대원들은 건물 내부 상황을 알고 바닥에 안전 매트를 설치했다. 5명의 대원 모두 밖으로 탈출했으나 화상 등의 상처를 입었다. 특히 노 소방사는 등과 몸을 중심으로 2도 화상을 입어 부상이 가장 심했다. 노 소방사를 비롯한 4명은 부산의 화상 전문병원으로 이송됐고, 애초 생사를 오가는 대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 소방사의 부상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심했고, 30일 새벽 숨졌다. 특전사 출신의 노 소방사는 구조 특채로 지난해 1월 임용된 구조대 막내 대원이다. 그는 지난 2월 혼인신고를 마친 뒤 코로나19 사태로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동료들은 “노 소방사는 차분한 성격에 배려심이 많고, 힘든 출동과 훈련에도 적극적이었다”며 “그가 숨졌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는다”고 침통해했다. 노 소방사 영결식은 2일 오전 10시 울산시청 광장에서 울산광역시장으로 거행된다. 울산소방본부는 장례 절차와 영결식 등을 지원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할 계획이다.
  • 임용 2년차 20대 소방관, 울산 화재 구조 중 화상 입고 순직

    임용 2년차 20대 소방관, 울산 화재 구조 중 화상 입고 순직

    울산소방본부는 30일 새벽 중부소방서 소속 노명래(29) 소방사가 부산 한 화상전문병원에서 치료 중 순직했다고 밝혔다. 소방본부에 따르면 노 소방사는 전날 오전 5시 5분쯤 중구 성남동 한 3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불이 나자 진화를 위해 투입됐다. 건물 내부로 진입해 화재를 진화하고 인명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불길이 거세게 번졌고, 노 소방사 등 소방대원 5명이 화상을 입었다. 또 다른 소방관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다른 소방대원은 비교적 부상 정도가 가벼웠으나 노 소방사는 중상인 2도 화상으로, 화상전문병원에 이송돼 치료를 받아왔다. 노 소방사는 지난해 1월 구조 특채로 임용돼 화재 현장 등에서 인명 구조 업무를 수행해 왔다. 가족으로는 아내(26)와 부모가 있다. 울산소방본부는 장례 절차와 영결식 등을 지원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할 계획이다.전날인 29일 오전 5시 5분쯤 발생한 이 화재는 상가 내부 등을 태우고 약 2시간 만인 오전 6시 54분쯤 진화됐다.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과 피해 규모를 조사하고 있다. 이날 진화 작업에는 인력 60여 명과 장비 21대가 동원됐다. 소방관 5명의 인명 피해 외에 건물 안에 있던 시민 2명 등이 연기를 흡입하는 부상을 입었다.
  • “열정과 헌신 잊지않을 것”…쿠팡화재 순직 김동식 구조대장 영결식

    “열정과 헌신 잊지않을 것”…쿠팡화재 순직 김동식 구조대장 영결식

    쿠팡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경기 광주소방서 119 구조대 김동식 구조대장(52·소방령)의 영결식이 21일 오전 9시 30분 광주시민체육관에서 경기도청장(葬)으로 엄수됐다. 이날 오전 영결식장에는 유족, 장의위원장을 맡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서영교 행정안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소병훈·임종성·임호선·오영환 의원,국민의힘 이명수·최춘식·김형동 의원, 신동헌 광주시장, 엄태준 이천시장, 동료 소방관 등 9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기렸다. 영전에는 고인의 정복과 모자가 놓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날 영결식은 운구 행렬이 입장한 뒤 묵념과 고인에 대한 약력 보고로 시작해 1계급 특진·훈장 추서, 조전 낭독, 영결사, 조사, 헌화 및 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고인은 화마의 현장에서 앞장서며 모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대한민국은 고인의 열정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문 대통령의 조전은 신열우 소방청장이 대독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옷을 툭툭 털고 땀에 젖은 얼굴로 현장에서 나오는 김 구조대장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랐는데 끝끝내 김 구조대장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언제나 가장 뜨겁고 위험한 곳을 지키던,가장 먼저 현장에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오던 그를 모두가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 지사는 “긴박했던 그 날 그 순간에도 그는 어김없이 동료들을 먼저 내보냈다. 이렇게 영영 이별을 해야 할 줄 정녕 알지 못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애타게 빌고 또 빌었지만, 끝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애도했다. 이어 “미비한 제도를 보완하고 근복적 대책을 마련해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기도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동료를 대표해 조사에 나선 경기 광주소방서 함재철 소방위는 “무시무시한 화마 속에서 대장님을 바로 구해드리지 못하고 홀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1분1초가 두려웠다”며 “대장님을 지켜드리지 못해 대장님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가족분들께 죄송한 마음뿐”이라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대장님께서는 동료들에게 잘못된 건 타일러 주시고 늘 우직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었다”며 “부디 좋은 곳에서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영면하시길 기도드린다”고 말했다. 영결식이 진행되고 영전에 헌화하는 내내 유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 행렬이 천천히 영결식장을 빠져나가자 어머니는 두 손을 뻗으며 아들을 목놓아 불러 참석자들 눈시울을 붉켰다. 동료 소방관들은 거수경례로 김 구조대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경기도는 고인에게 지난 18일자로 소방경에서 소방령으로 1계급 특진과 녹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이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서울포토] ‘눈물의 마지막 배웅’… 순직한 故 김동식 소방령 영결식

    [서울포토] ‘눈물의 마지막 배웅’… 순직한 故 김동식 소방령 영결식

    이천 쿠팡 물류센터 화재현장에서 진화 작업 중 순직한 고(故) 김동식 구조대장(52?경기 광주소방서)의 영결식이 21일 오전 경기 광주시민체육관에서 경기도청장(葬)으로 엄수된 가운데 동료 소방관들이 헌화.분향 후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경기도는 고인에게 소방경에서 소방령으로 1계급 특진과 녹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2021. 6. 21 사진공동취재단
  • 손꼽아 바라던 ‘기적’은 없었다

    손꼽아 바라던 ‘기적’은 없었다

    ‘기적은 없었다.’ 경기도 이천 쿠팡 덕평물류센터의 화재 진압 도중 건물 내부에서 실종된 소방관이 화재 발생 사흘째인 지난 19일 숨진 채 발견됐다. 소방 당국은 이날 수색팀 15명을 투입, 오전 10시 49분쯤 경기 광주소방서 119구조대 김동식(52) 구조대장의 유해를 발견했다. 실종 48시간 만이다. 유해가 발견된 곳은 지하 2층 입구에서 직선으로 50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발견 당시 김 대장의 시신은 내부 화염으로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소방 관계자는 “수습할 수 있는 대로 수습해서 병원으로 모셨다”고 말했다. 김 대장은 화재 발생 당일 화염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진 틈을 타 대원 4명과 함께 지하 2층으로 진입했다. 꺼져 갔던 불이 진열대 상품이 쏟아지면서 다시 살아났고, 김 대장은 후배 4명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현장 진입에 맨 앞, 탈출할 때는 맨 뒤를 고집했던 김 대장만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 대장의 구조 작업은 곧바로 진행됐지만, 가연성 물질로 인해 거세지는 불길에 이내 중단됐다. 건물 붕괴 위험도 있어 내부 진입이 불가능했다는 게 소방 당국의 판단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소방 당국은 이틀이 지난 이날 오전 건물 안전진단에서 ‘내부 진입이 가능하다’고 판단, 곧바로 인명 훈련을 받은 구조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결국 김 대장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광주소방서 한 관계자는 “모두가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김 대장의 무사귀환을 빌었다”면서 “동료와 후배를 먼저 생각했던 김 대장의 희생정신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는 김 대장에 대한 순직 절차를 진행하고 장례를 경기도청장(葬)으로 치른다. 또 1계급 특진과 녹조근정훈장을 추서한다. 영결식은 21일 오전 9시 30분 광주시민체육관에서 유가족과 동료 소방관 등 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될 예정이다. 한편 이번 화재는 지난 17일 오전 5시 20분쯤 연면적이 축구장 15개 넓이와 맞먹는 12만 7178.58㎡에 달하는 쿠팡덕평물류센터 건물 지하 2층에서 시작됐다. 물품 창고 내 진열대 선반 위쪽에 설치된 콘센트에서 처음 불꽃이 이는 장면이 폐쇄회로(CC)TV에 찍혀 전기적 요인에 의해 불이 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동료·후배 안전 먼저 생각한 희생에 가슴 저려와”

    “동료·후배 안전 먼저 생각한 희생에 가슴 저려와”

    20일 쿠팡 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경기 광주소방서 김동식 구조대장의 빈소가 마련된 하남시 마루공원 장례식장에는 동료 직원뿐 아니라 정치인과 일반 시민 등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착잡한 표정으로 빈소를 찾은 한 소방대원은 “처음 고립됐다는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정상적인 상황 판단이 힘들 만큼 손발이 많이 떨렸다”면서 “김 대장이 한쪽에 어디 대피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반 시민인 김모(51·하남시)씨는 “자신보다 동료·후배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던 김 대장의 희생에 가슴이 저려온다”면서 “다시는 이런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화재뿐 아니라 모든 사고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소에는 정치권 인사와 기관장의 조문도 줄을 이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엄태준 이천시장,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신열우 소방청장 등이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하고 고인의 넋을 기렸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전날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다. 김 대장의 영결식은 21일 오전 9시 30분 광주시민체육관에서 경기도청장(葬)으로 거행된다. 경기도는 고인에게 지난 18일자로 소방경에서 소방령으로 1계급 특진과 녹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경찰영웅에 故안맥결 총경·정연호 경위

    경찰영웅에 故안맥결 총경·정연호 경위

    경찰청은 여성 독립운동가 출신 안맥결(1901∼1976) 총경과 국민 생명을 구하려다 순직한 정연호(1977∼2017) 경위를 ‘2021년 경찰영웅’으로 선정했다고 27일 밝혔다.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 총경은 1919년 평양 숭의여학교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1937년 체포돼 만삭의 몸으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 조국 재건에 힘을 보탰던 안 총경은 1946년 여자경찰간부 1기로 경찰에 입직해 1961년 퇴직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서울여자경찰서장,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안전한 치안 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정부는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국가수호의 정신으로 평생을 바친 안 총경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대구 수성경찰서 범어지구대에 근무하던 정 경위(당시 경사)는 2017년 12월 21일 “아들이 자살하려고 번개탄을 사서 들어왔는데 막아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부모와 자살 우려자를 상대로 상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자살 우려자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후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옆 방 창문을 통해 그가 투신하려는 상황을 목격한 정 경위는 다급히 그를 구하고자 건물 외벽을 타고 창문으로 접근하다 아파트 9층에서 추락해 순직했다. 정부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준 정 경위에게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경찰청은 올해 말까지 경찰영웅으로 선정된 안 총경과 정 경위의 과거 근무지에 흉상을 세우고 추모 공간도 조성할 계획이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일본 경찰서장에 폭탄 던진 독립운동가 박재혁 순국 100주년 다양한 행사

    일본 경찰서장에 폭탄 던진 독립운동가 박재혁 순국 100주년 다양한 행사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박재혁(1895~1921)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출신지 부산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5일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 등에 따르면 오는 11일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내 박 의사 동상 앞에서 기념사업회와 삼일동지회 주최로 박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식이 거행된다.다음날인 12일에는 남구 일제강제동원역사관 6층 멀티미디어실에서 학술회의가 진행된다. 학술회의는 부산보훈청과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후원한다. 오는 28일까지 부산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박 의사를 추모하고 선양하는 순회 전시회가 열린다. 순국 100주기를 맞아 박 의사 동상 이전도 본격 추진된다. 기념사업회는 어린이대공원안 수변공원 외딴 장소에 있는 박 의사 동상을 동구 범일동 자성대 사거리 인근 등 시민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박 의사 동상은 롯데그룹이 1998년 제작해 시에 기증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동상 이전에 대해 동구청과 부산보훈청 협조를 얻었고 부산시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현 부산진초)와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생 시절부터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부산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의열단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부산경찰서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자 하시모토 슈헤이 부산경찰서장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1920년 9월 14일 고서적 상인으로 가장해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하시모토 슈헤이 부산경찰서 서장을 만난 자리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박 의사는 중상을 입고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혹독한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폐병에 걸렸고 “왜놈 손에 죽기 싫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사형 집행 전에 긴 단식을 한 끝에 1921년 5월 11일 형무소에서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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